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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도회] 세월이 정답입니다
조회수 | 820
작성일 | 16.01.26
[수도회] 세월이 정답입니다

때로 잘 한번 살아 보기도 어렵다는 것을 종종 눈으로 확인합니다. 오랜만에 마음 한번 제대로 열심히 살아보려면 별의 별 사람들이 다 나타나지요. “저게 뭘 잘못 먹었나? 갑자기 왜 저러지?”그럽니다.

좋은 일 좀 해보려고 해도 발목 잡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가만히 좀 놔두면 좋으련만 꼭 남의 인생에 끼어들어 집적댑니다. 이러쿵저러쿵 뒤에서 말들을 해댑니다. 한 마디로 남의 인생에 고춧가루를 뿌리는 것입니다. 아마도 어쩔 수 없이 부족한 우리 인간 공동체의 본래적인 모습인가 봅니다.

중요한 것은 이럴 때 의기소침해져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이럴 때 고민할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냥 쭉 밀고 나가는 것이 정답입니다. 그래도 계속 가는 것이 필요합니다.

인생이란, 세상이란, 세속의 사람들이란 결코 만만치 않다는 것을 잘 파악하고 계셨던 예수님이셨습니다. 당신의 제자들을 세상으로 파견하시면서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셨을 것입니다. 얼마나 걱정이 많으셨으면 이런 표현까지 하고 계십니다.

“가거라. 나는 이제 양들을 이리 떼 가운데로 보내는 것처럼 너희를 보낸다.”

세상의 냉대 앞에, 세상 사람들의 무자비함 앞에 혹시라도 당신 제자들이 큰 상처를 입거나 의기소침해지지 않을까 노심초사하시면서 예수님께서는 자상하게도 하나 하나 짚어가며 행동강령을 전달하고 계십니다.

중요한 강조점은 세 가지 정도입니다. 무기나 재물이 아니라 무소유의 삶으로 무장하라, 평화를 빌어주라, 하느님 나라가 가까이 왔음을 선포하라. 덧붙여 강조하십니다. 복음을 선포하는 과정에서 겪게 될 냉대나 박해나 무관심 앞에서, 조금도 개의치 말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 앞으로 나아가라고 당부하십니다.

복음 선포를 위한 여정 안에서 늘 성공과 박수갈채만 보장되리라는 법은 절대 없습니다. 참담한 실패도 가능합니다. 냉혹한 현실을 있는 담담한 마음으로 받아들일 필요가 있습니다. 다양한 가능성 앞에서 자신을 활짝 열어놓을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 앞에 펼쳐질 인생길에서, 삶이란 여행길에서 다양한 국면의 체험은 필수입니다. 우중충하게 흐린 날씨가 있는가하면 활짝 갠 맑은 날이 있듯이 한없이 기쁜 날이 있는가 하면 죽음보다 더 힘든 날도 맞이합니다. 탄탄대로를 걸을 때가 있는가 하면 먼지 자욱한 비탈길을 걸을 때도 있습니다.

결국 세월이 정답입니다. 지금 당장 죽을 것만 같은 순간을 맞이하지만 조금만 기다려보십시오. 언제 그랬냐는 듯이 시련의 순간은 지나갑니다. 칠흑같이 어두운 밤, 폭풍우로 심하게 요동치던 밤도 아침이 오면 어느새 잔잔해지고 맙니다.

우리가 실천해야할 사랑, 우리가 선포해야할 복음의 길은 때로 길고 험한 길입니다. 어쩌면 힘겨운 희생의 제단입니다. 때로 자신을 완전히 잊어야 합니다. 때로 육신의 안락함을 완전히 포기해야 합니다. 때로 세상과는 완전히 담을 쌓아야만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사랑의 길, 복음의 길은 우리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어쩔 수 없이 선택하고 걸어야 할 운명의 길이며, 우리가 하느님 사랑의 품에 푹 잠길 수 있는 유일한 희망의 길입니다.

▥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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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흔두 제자를 파견하시는 장면인데 관상을 해도 괜찮겠습니다만 그냥 오늘은 묵상을 해봤으면 합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내리시는 지침들을 좀 더 정확하고 깊게 이해하는 것이 더 유익하게 다가오기 때문입니다.

먼저 예수님께서는 당신에 앞서 일흔두 제자를 파견하셨다고 했습니다. 여기서 제자들과 예수님과의 관계가 어떻게 형성되는지 깊이 알아듣는 가운데 우리 각자와 예수님과의 관계를 이해하는데 도움을 얻을 수 있겠습니다. 특히 사도직과 같은, 일을 하는데 예수님과의 관계에 대해 짚었으면 합니다.

다음은 수확할 밭에 일꾼들을 보내주십사고 청하라는 대목을 잘 알아들어야 하겠습니다. 수확할 것은 많다고 하십니다. 도대체 수확한다는 것이 무엇을 가리키는 것인지 또 그에 따른 일꾼이란 어떤 일꾼을 말씀하시는 것인지, 오늘날의 상황과 견주어 깊게 알아들을 필요가 있겠습니다. 그런데 그 일꾼들이 파견되어 일하는 상황이 이리 떼 가운데 양들이 놓여 있는 모습 같다고 하십니다. 이 또한 깊게 알아들었으면 합니다. 이리 떼의 상황이 어떤 모습인지 잘 알아야 하겠습니다.

그다음으로 제자들이 취해야 할 구체적인 행동양식들입니다. 하나하나 알아들어야 하겠습니다. 아무것도 지니지 마라, 인사하지 마라, 먼저 평화의 기도를 하라, 한 집에 머물면서 주는 대로 먹고 마셔라, 병자를 고쳐주고 하느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고 선포하여라 등입니다. 대단히 세세하게 많은 지시를 내리십니다. 그 연유가 무엇인지, 각 내용이 담고 있는 깊은 의미가 무엇인지, 새겨듣는 가운데 큰 영적 유익을 얻게 될 것입니다.

▥ 예수회 유시찬 신부
  | 0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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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도회] 참 일꾼

오늘 우리는 일꾼이 적다는 말씀을 현대적으로 알아들어야 바로 알아듣고 실효성이 생기는 참 추수 일꾼이 됩니다. 이름값을 하는 일꾼, 갖추어야 할 덕목을 지닌 인격적 일꾼, 가난한 이를 위한 참 일꾼, 정의를 위하여 목숨 내놓고 싸우는 일꾼이 없는 것이지 일꾼은 많이 있습니다.

"우리 본당 신부는 독재자 같다. 너무나 편견이 심하여 마음에 드는 신자하고만 일하고 다른 신자를 무시하고 기피한다."라는 소문을 들으면 마음이 아려옵니다.

일꾼이 아니라, 정규직이 아니라 비정규직이 많아 일에 대한 책임감도 없이 시간을 소모하고 공간을 메우고 있다면 참 일꾼이 아닙니다. 정해놓은 일만 하고 창조적 일을 하지 않으면 매너리즘에 빠져 일을 습관적으로, 형식적으로 하게 되어 일의 성과는 나오지 못합니다.

공동체가 필요로 하는 사람이 아니라 불필요하게 생각하는 사람은 자기에게 주어진 일을 희생정신으로 자신을 내놓으며 살지 않습니다. 자기 이익을 찾고 무사안일주의에 빠져 밖에 나오지 않으면 올바른 정보도 받지 못하고 정보에 따라 쇄신도 적응도 불가능해집니다. 일어나는 일에 민감한 반응을 보이고 과감하게 대처하는 용기가 있어야 합니다.

오늘 교회는 스스로 강한 척하지만, 너무나 약하게 행동합니다. 옛날 순교자들의 정신은 보이지 않고 유약한 면이 보여 물질의 노예가 되어 살고 있습니다. 참 일꾼은 어려운 일을 솔선해서 땀과 피를 흘리면서 해야 할 일을 하는 것입니다. 피 흘리는 순교는 없다고 해도 정신적 피 흘리는 순교는 계속됩니다. 즉, 이웃을 위하여 목숨을 바치는 사랑의 삶은 참 일꾼들이 하는 현대적 순교입니다. 모두가 주위에 사랑의 밭을 갈고, 많은 추수 결실을 거두어들이도록 기도합니다.

▥ 분도회 이석진 신부
▥ 2016년 1월 26일
  | 0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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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도회] 주님의 제자답게 사는 법

오늘 강론은 ‘주님의 제자답게 사는 법’에 대한 묵상을 나눕니다. 몇가지 예화로 강론을 시작합니다.

1.‘삶은 선물이냐 짐이냐?’ 제가 자주 신자분들에게 화두로 던지는 질문입니다. 얼마전 이삿짐 가득한 아파트 새집을 축복식차 방문한 적이 있습니다. 순간 ‘아, 짐이 너무 무겁겠다.’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세식구쯤 되는 가정의 집이었는데 거기에 딸린 짐이 많아서 숨막힐 듯 답답한 느낌이었습니다. 큰 거주 공간에 불필요한 짐도 참 많아 보였습니다.

‘저 정도 유지하려면 보통 벌어선 안되겠구나. 가장의 짐이 무겁겠다’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살다보면 점점 늘어나는 짐에 무거워지는 인생이 되기 십중팔구입니다. 갈수록 비워지고 가벼워져 선물인생이어야 하는데, 현실은 갈수록 소유로 무거워져 존재는 사라지고 삶도 몸도 점점 짐이 되어간다는 것입니다.

2.얼마전 ‘신神의 한 수手’라는 제목의 자신의 강론에 통쾌해 했던 기억이 새로운데 어제 원장수사와 이야기하며 새삼 공감한 말 마디입니다. 참으로 용기백배, 자부심을 갖게 하는 말마디입니다. 어느 수사를 일컬어 신의 한수라 했는데 잘 들여다 보니 요셉수도원 모든 형제들 하나하나가 유일무이한 신의 한수와 같은 주님의 사람으로 느껴졌습니다.

바오로 사도가 예수님의 신의 한 수 였다면, 어제 성 바오로 개종 축일에 이은 오늘 축일을 지내는 바오로의 두 애제자인 성 티모데오와 성 티토 역시 성 바오로의 신의 한 수 같은 제자임을 깨닫습니다. 우리 역시 신의 한 수 같이 귀한 주님의 사람들입니다. 과연 신의 한 수처럼 살고 있는지 자신을 살펴보게 됩니다.

3.어제 신문에서 ‘꼰대가 되지 않고 청년들에게 인정받고 사랑받는 좋은 어른’이 되기위한 지침을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첫째, 나이를 묻지 마라. 한국사회에서 버젓이 나이를 묻는 것은 상대방과 위아래를 겨루는 것이다. 둘째, 함부로 호구조사를 하거나 삶에 참견하지 마라. 셋째, 자랑을 늘어놓지 마라. 당신의 인생자랑은 ‘노잼’이다. 넷째, ‘딸같아서 조언하는데’같은 수사는 붙이지 마라. 당신이 걸어온 길이 매력적이라면 상대가 알아서 물을 것이다. 다섯째, 나이나 지위로 대우받으려 하지 마라. 나이나 지위에 매달린 대우를 받고 있다면 지금 과감히 던져 버려라. 마지막 지침, 스스로가 언제든 꼰대가 될 수 있음을 인정하라. 자기 안의 꼰대성은 자신이 쌓아온 나이만큼 부지런히 누적된다. 내 안의 괴물같은 꼰대성을 인지하는 것만으로도 꼰대성의 탈출의 가능성이 높아진다. 그러면 당신은 꼰대가 아닌 어른에 가까워질 것이다.

주님의 제자답게 살기위한 방법은 다 제시된 셈입니다. 짐이 아닌 선물인생을 사는 것이요, 신의 한수 같은 삶을 사는 것이요, 꼰대로 살지 않는 것입니다. 어떻게 이렇게 살 수 있겠는지요. 오늘 말씀이 답을 줍니다.

소유의 삶을 사는 것이 아니라 존재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소유에 묻혀 존재를 잊고 사는 삶이 아니라 날로 안팎으로 비워가며 존재가 투명히 드러나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소유나 존재냐?’ ‘짐이냐 선물이냐?’ 같은 맥락의 질문입니다.

소유의 짐이요 존재의 선물입니다. 부단히 내외적으로 비워갈 때 자유롭고 가벼운 존재의 선물같은 주님의 제자다운 삶이 된다는 것입니다. 참 기쁨도 소유의 짐이 아닌 존재의 선물에서 솟아납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파견하면서 하신 다음 말씀도 이런 맥락에서 확연히 이해됩니다.

“가거라. 나는 이제 양들을 이리 떼 가운데로 보내는 것처럼 너희를 보낸다. 돈주머니도 여행 보따리도 신발도 지니지 말고, 길에서 아무에게도 인사하지 마라.”

문자 그대로가 아닌 최소한의 의식주로 무엇에도 집착하지 말고 자유롭고 유연한 무소유의 영성을 살라는 것입니다. 소유가 아닌 존재의, 짐이 아닌 선물의 본질적 삶을 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바오로 사도가 티모테오에게 주신 다음 말씀은 이런 본질적 삶을 추구하는 우리 각자에게 좋은 격려가 됩니다.

“그대가 받은 하느님의 은사를 다시 불태우십시오.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비겁한 영을 주시는 것이 아니라, 힘과 사랑과 절제의 영을 주셨습니다. 그러니 그대는 우리 주님을 위하여 증언하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말고, 오히려 하느님의 힘에 의지하여 복음을 위한 고난에 동참하십시오.”

다시 주님 사랑에 불을 붙이고 초발심의 자세로 새롭게 시작하라는 말씀입니다. 아무리 좋은 선물도 시간이 지날수록 무거운 짐이 되어 버립니다. 그러니 부단히 안팎으로 버리고 비우는 본질적 수행이 얼마나 중요한지 깨닫습니다. 이래야 자신은 물론 이웃에게도 주님 평화의 선물이 될 수 있습니다.

주님의 제자는 주님만으로 만족하고 행복한 사람들입니다. 이와 더불어 삶은 저절로 비워져 투명히 드러나는 ‘존재의 삶’, ‘선물의 삶’, ‘신의 한 수’같은 주님의 제자다운 삶입니다. 꼰대같은 삶에서의 완전 탈출입니다. 이런 삶자체가 참 좋은 복음 선포입니다. 주님은 매일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이런 주님의 제자다운 삶을 살게 하십니다. 아멘.

▥ 분도회 이수철 신부
▥ 2016년 1월 2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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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도회] 부족해도 괜찮습니다!

바오로 사도가 때로 애제자처럼 때로 막내아들처럼 애지중지한 협력자가 한 명 있었는데 그의 이름은 티모테오였습니다. ‘주님으로부터 사랑받는’이란 의미를 지닌 자신의 이름처럼 티모테오 주교는 초세기 그리스도 신자들의 착한 목자가 되기 위해 각고의 노력을 다했습니다.

3차 전도 여행 중 체포된 바오로 사도는 로마 카이사리아 감옥에 2년간 갇혀있었는데, 당시 옥중에서 티모테오에게 2통의 편지를 씁니다. 그 유명한 티모테오 1서와 2서입니다.

바오로 사도가 아들이자 제자 티모테오에게 보낸 두 편의 편지는 거의 ‘눈물로 쓴 편지’입니다. 오늘 천천히 다시 읽다보니 바오로 사도의 고초가 손에 잡힐 듯이 느껴져 코끝이 찡해오더군요.

로마 감옥의 냉기가 얼마나 뼛속까지 파고들던지 바오로 사도는 티모테오에게 자신이 깜빡하고 트로아스에 두고 온 겨울 외투를 좀 가져달라고 당부까지 합니다.

“그대는 서둘러 나에게 빨리 오십시오. 올 때 내가 트로아스에 있는 카프로스의 집에 주고 온 외투와 책들, 특히 양피지 책들을 가지고 오십시오. 겨울이 되기 전에 서둘러 오십시오.”(티모테오 1서 4장 13절)

1차 전도 여행 중에 바오로 사도가 에페소에 있던 자신의 집에 하룻밤 묵은 것이 인연이 되어 티모테오는 바오로 사도의 둘도 없는 동반자가 됩니다. 3차 전도 여행 중에 바오로 사도가 체포되자 티모테오는 에페소로 돌아오게 되고 그곳 그리스도교 공동체의 주교로 사목하게 됩니다.

바오로 사도가 티모테오에게 보낸 서간에 따르면 티모테오는 아직 어리고 병약한 사람이었습니다. “아무도 그대를 젊다고 업신여기지 못하게 하십시오.”(티모테오 1서 4장 12절) “이제는 물만 마시지 말고, 그대의 위장이나 잦은 병을 생각하여 포도주를 마시십시오.”(티모테오 1서 5장 23절)

아직 어리고 경험도 부족한 티모테오였습니다. 이런 저런 잔병치레도 많았습니다. 두려움도 자질도 부족했던 티모테오였습니다. 그러나 바오로 사도는 티모테오를 전도 여행의 동반자로 선택했을 뿐 아니라 에페소의 주교로 임명합니다.

자신도 한때 예수님의 박해자였으며 한없이 부족했었건만 그런 자신을 이방인의 사도로 뽑아주신 주님의 사랑을 회상하며 병약한 티모테오를 자신의 제자요 동반자로 선택한 것입니다.

오늘도 주님께서는 완벽해서가 아니라 부족해서 우리를 당신 협조자로 부르십니다. 그리고 그 부족함을 당신 사랑과 자비로 채워주십니다. 뿐만 아니라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많은 것을 요구하지 않으십니다. 각자의 그릇에 따라, 각자의 처지에 따라 할 수 있는 만큼만 요구하십니다. 그러니 걱정하지 말고 근심하지 말고, 주님께 맡겨드리며 그분의 부르심에 기쁘게 따라나설 일입니다.

“그러므로 내 아들이여,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주어지는 은총으로 굳세어지십시오. 그리스도 예수님의 군사답게 고난에 동참하십시오.”(티모테오 1서 2장 1절, 3절)

▥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 2016년 1월 26일
  | 0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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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   1월 27일 : 성녀 안젤라 메리치  [8] 2524
  [수도회] 세월이 정답입니다  [4] 820
28   [인천] 일꾼의 기준  [4] 631
27   [수원/서울/의정부/청주] 주님 밭의 일꾼  [5] 784
26   1월 26일 : 성 디모테오와 성 디토 주교  [4] 2805
25   1월 25일 : 성 바오로 개종  [10] 3034
24   1월 24일 : 성 프란치스코 드 살  [3] 2392
23   1월 23일 : 자선가 성 요한  1705
22   1월 22일 : 성 빈첸시오  1710
21   1월 21일 : 성녀 아녜스  [6] 3065
20   1월 20일 : 성 파비아노  2012
19   1월 19일 : 성 울프스턴  1676
18   1월 18일 : 프리스카  1880
17   1월 17일 : 성 안토니오  [4] 2390
16   1월 16일 : 성 호노라토  17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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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1월 13일 : 푸아티에의 성 힐라리오  17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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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1월 11일 : 성 테오도시오  [1] 2059
10   1월 10일 : 성 베드로 오르세올로  17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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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1월 08일 : 성 토르핀  1795
7   1월 07일 : 페냐포르트의 성 라이문도  18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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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1월 02일 : 성 대 바실리오와 나지안조의 성 그레고리오 주교 학자  [2] 2984
1   1월 01일 : 천주의 성모 마리아  [1] 3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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