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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월 25일 : 성 바오로 개종
조회수 | 3,185
작성일 | 06.01.25
성 바오로 (1세기)
  
열정
  
갓 영세한 사람의 열정에 비길 만한 것이 있을까? 그러나 시간이 흐를수록 열정은 사라지고 불타던 첫 마음은 덜 바람직한 것과 타협한다. 그래서 우리는 살아 있는 열정을 가진 사람을 만나면 자신도 모르게 그에게 이끌린다. 열정과 흥분은 전염성이 강해서 그들이 지닌 충만한 기쁨은 때로 우리를 다시 한 번 불타오르게 하기도 한다. 사울이라는 이름으로도 불렸던 성 바오로는 열정에 넘치는 사람이었다. 그는 그리스도를 믿게 된 유다인들을 박해하는 데 앞장섰다. 그리스도인이 된 유다인들을 체포해서 예루살렘으로 끌고 올 수 있는 특권을 대제사장으로부터 위임받고 다마스커스로 향하던 사울은 땅에 엎드러지며 하늘에서 “사울아! 사울아! 네가 왜 나를 박해하느냐?”라는 소리를 듣는다. 그 소리는 그가 핍박하던 나자렛 예수의 소리였다. 바로 그 순간 사울의 마음은 완전히 변화된다. 그때부터 그리스도인들을 핍박하던 사울의 그 열정은 사람들을 그리스도인으로 만들려는 사도 바오로의 열정으로 바뀌어 또다시 타오르게 된다. 성 바오로의 회심이 우리를 감동시키는 것은 그의 열정이 결코 사그라지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는 죽는 날까지 열정적으로 자기의 믿음을 전파했다. 성 바오로의 열정은 죽은 뒤에도 계속되어 이천 년이 지난 오늘날까지도 그가 남긴 편지는 우리에게 영감을 불러일으키고 수많은 사람들을 회개로 이끌고 있다. 내 삶의 어디에서 회심의 체험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는가? 삶의 기쁨을 막는 것을 버리겠으며, 나에게 주신 모든 축복에 대해서 기뻐하겠다.

생활성서[작은 거인들]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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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 저는 동네의 미용실에서 이발을 했습니다. 한동안 이발을 하지 않아서 머리카락이 너무나 길었거든요. 그래서 저는 짧게 머리카락을 자를 생각을 가지고 동네 미용실로 갔고, 저는 미용사 자매님께 “짧게 잘라 주세요.”라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그분께서는 제게 이런 말씀을 하세요.

“손님, 머리카락에 전혀 신경을 쓰지 않나봐요. 혹시 머리카락에 뭐 안 바르세요?”

저는 이 말에 웃으면서 말했지요.

“봐 줄 사람도 없는데 뭣 하러 머리카락에 신경을 써요? 신경 안 쓴지 꽤 되었어요.”

사실 지금 있는 갑곶성지에 오기 전만 해도 머리카락에 상당히 신경을 썼었지요. 그래서 항상 제 머리는 젤이 발라져 있었고 때가 되면 염색과 파마를 하는 등, 누구보다도 머리카락에 신경을 썼습니다. 하지만 갑곶성지를 온 뒤로 그런 행동을 모두 버렸던 것이지요. 그런데 미용사 자매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시는 거에요.

“손님, 아직 이렇게 젊은데 왜 벌써 포기를 하세요?”

“저도 나이 먹을 만큼 먹었거든요. 그런데 제가 몇 살로 보이시는데요?”

“31나 32? 아닌가요?”

저는 사제 서품 받고 얼마 뒤에 어떤 분에게 “신부님, 올해 나이가 마흔 몇이세요?”라는 질문을 받은 적도 있었던 사람입니다. 그런데 이런 저를 보고서 31나 32라고 말씀을 하시니 제가 어떻게 기쁘지 않겠습니까? 너무나 기뻐서 어제부터 다시 머리카락에 젤을 바르는 등 신경을 쓰게 되었지요.

사실 그냥 저 좋으라고 그 자매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셨는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그 말 하나는 저에게 커다란 기쁨을 가져다주었고, ‘다음에도 저 집에 가야겠다.’는 결심을 하게 만드네요.

말 한마디로 천 냥 빚도 갚는다고 하지요. 이처럼 말 한마디로 저에게 또 다른 활력을 가져다 줄 수 있었으며, 그래서 새로운 마음을 가지고 살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문득 이런 생각이 듭니다. 주님께서는 어쩌면 우리들에게 매순간 힘이 되는 말씀을 하시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성서를 통해서 뿐만 아니라 일상의 삶 안에서도 주님께서는 우리들에게 계속 말씀하십니다. 우리들이 더욱 더 행복해질 수 있도록, 더 잘 살 수 있도록……. 문제는 우리들이 그 주님의 말씀을 들으려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어쩌면 세속의 목소리에만 더 집중을 하다 보니 주님의 소리를 들을 여력이 없는 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우리들은 변화되지 못하는 것이 아닐까요?

오늘 우리들은 사도 바오로의 개종 축일을 기념하는 독서를 통해서, 사도 바오로가 주님의 말씀인 “사울아, 사울아, 왜 나를 박해하느냐?”라는 소리로써 변화되었음을 알게 됩니다. 그래서 그 뒤로 세상 끝까지 주님의 기쁜 소식을 전하는데 최선을 다하게 되지요.

한때 교회를 없애려는 자가 180도 바뀌어서 교회를 세상에 알리는데 최선을 다한다는 것. 어떻게 보면 이해하기 힘든 사실입니다. 하지만 잘못된 판단으로 교회를 박해하기도 했지만, 누구보다도 열심히 살았기에 주님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던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즉, 자신의 삶 안에서 최선을 다했기에, 그는 주님의 선택을 받아 그 부르심을 들을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대충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과연 주님의 목소리가 들릴까요? 다른 것만을 바라보고 있는 우리들이 과연 주님의 부르심을 들을 수 있을까요?

매순간 우리에게 다가오시는 주님의 목소리. 그러나 잘 들리지 않는 그 소리를 듣기 위해서 노력하는 오늘이 되셨으면 합니다.

인천교구 조명연 신부
  | 0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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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성 바오로 사도의 개종 축일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을 박해하는 종교를 믿다가 다마스쿠스에서 예수님을 만나고 나서 개종하여 예수님을 위해 일생 동안 복음을 전하다가 돌아가신 분입니다. 사람이 신앙을 바꾼다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이며 또한 신앙의 길에 들어서는 것도 어렵습니다. 오늘 복음 말씀에서 예수께서 “너희는 온 세상에 가서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선포하여라. 믿고 세례를 받는 이는 구원을 받고 믿지 않는 자는 단죄를 받을 것이다” 하고 말씀하십니다. 예수께서 믿지 않으면 ‘단죄’를 받는다는 말씀을 하여도 사람들은 신자가 되는 것을 수없이 망설이곤 합니다.

그러면 지금 신자로 살아가고 있는 나는 어떤 신앙생활을 하고 있습니까? 세례를 받았으니까 ‘구원은 따놓은 당상이다’ 하고 신앙 쇄신 없이 적당히 살고 있습니까? 아니면 바오로 사도와 같은 열정적인 신앙을 가지고 나날이 쇄신하는 신앙생활을 하고 있습니까?

얼마 전 학생들에게 우리가 처한 현실을 이해시키기 위하여 인류의 역사와 젖과 꿀이 흐르는 땅 ‘가나안’을 이야기해 준 적이 있는데, 수업이 끝나자 한 학생이 “교수님, 교회 다니세요?” 하고 물어왔습니다. 그래서 “성당 다니는데” 하고 대답하니까, 그 학생이 “그런데도 성경 말씀을 잘 아시네요” 하였습니다. 어쩌면 이것이 우리 가톨릭 신자들의 현주소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이제 2006년도 1월이 거의 다 지나가고 있습니다. 금년은 성경 중 어느 하나만이라도 필사해 보는 결심을 해보면 어떻겠습니까?

최재곤 (서울대교구 천호동 성당)
  | 0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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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독서 : 사도 22,3-16 (일어나 예수님의 이름을 받들어 세례를 받고 죄를 용서받으십시오.)
복 음 : 마르 16,15-18 (너희는 온 세상에 가서 복음을 선포하여라.)

사울,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다

오늘 해가 서쪽에서 떴는데 혹시 못 보셨는지요? 흔히 될 수 없는 일이 일어났을 때 해가 서쪽에서 떴다고 이야기하지요. 오늘은 성 바오로 사도의 개종 축일입니다. 교회는 다마스쿠스로 가는 길에서 부활하신 예수님과 만난 사건을 근거로 1월 25일을 성 바오로 사도의 개종 축일로 지내고 있습니다. 열렬한 유대교 신자였던 ꡐ사울ꡑ이라는 사람이 자기가 몸담고 있는 유대교에서 못박아 죽인 예수님을 주님으로 고백한 후 세례를 받고 ꡒ예수는 주님ꡓ이라고 선포하기 시작한 것이지요. 사울 본인으로서도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일이 일어난 것입니다. 이 사울의 회개는 세계사를 바꾼 사건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의미심장한 사건이지요.

초창기 그리스도교의 두 기둥을 뽑으라고 한다면 누구나 망설임 없이 베드로 사도와 바오로 사도를 뽑을 것입니다. 특히 바오로 사도는 27권의 신약성경 중에 약 13(4)권이나 되는 책을 집필한 저자이기도 하지요. 그 성경은 테살로니카 전․후서, 코린토 전․후서, 갈라티아서, 로마서, 필리피서, 필레몬서, 콜로새서, 에페소서, 티모테오 전․후서, 티토서, 히브리서입니다. 그 중에서도 초대 교회를 전 세계로 확장한 일등 공신은 바오로 사도입니다. 프리드리히 니체가 바오로 사도를 두고 ꡒ그리스도교의 발명가ꡓ라고 까지 부를 정도였으니 바오로 사도를 초대 교회의 근간을 이룩한 사도라고 보아도 틀림은 없을 것입니다. ꡒ신은 죽었다ꡓ고 부르짖은 니체는 사울을 이렇게 변화시킨 분이 바로 하느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였음을 몰랐음이 분명합니다. 바오로 사도의 이름은 그래서 두 개입니다. 일반적으로 유대교 신자였던 때 ‘사울’로 불렸고 회심하여 그리스도교 공동체로 들어와서는 ꡐ바오로ꡑ로 불리었지요.

역사를 바꾼 바오로 사도의 회심 이야기가 오늘 독서의 내용입니다. 이 사건은 사도행전 9장, 22장, 26장에 되풀이되어 묘사되고 있습니다. 같은 성경에 세 번씩이나 반복되어 다루어진 것을 보면 이 일이 얼마나 큰 사건이었는지를 알 수가 있지요. 바오로 사도는 너무나 열렬한 유대교 신자였기 때문에 유다교를 거부하는 그리스도교를 받아들일 수가 없었습니다. 그는 스테파노가 죽을 때에도 옆에서 찬동을 하였고, 스테파노의 죽음 이후에 그리스도교 신자들이 박해를 피해 안티오키아 쪽으로 도망가 있다는 소식을 듣고 그들을 잡으러 다니기도 하였습니다.

그리스도교 신자에 대한 그의 박해는 유명하여 심지어는 예루살렘에서 다마스쿠스까지는 상당한 거리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바오로의 회심을 옆에서 도왔던 하나니아스라는 사람까지도 바오로의 악명을 들었을 정도였습니다.

ꡒ주님, 그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주님의 성도들에게 얼마나 못된 짓을 하였는지 제가 많은 이들에게서 들었습니다.ꡓ(사도9,13)

사울을 찾아가라는 주님의 요청에 하나니아스가 한 대답입니다. 그 곳까지 소문이 자자했던 것이지요. 바오로는 그리스도인들이 안티오키아에 모여 있다는 말을 듣고 대사제들과 원로들로부터 아주 특별한 위임장을 받고 혈기왕성하게 그들을 잡으러 갑니다. 의기양양하게 길을 가고 있는 바오로에게 갑자기 하늘에서 빛이 번쩍이며 그의 둘레를 환히 비추었습니다. 그러자 바오로는 너무 놀라서 땅에 엎드러지고 말지요. 그때 한 음성이 들려옵니다.

ꡒ사울아, 사울아. 왜 나를 박해하느냐?ꡓ(사도9,4)

ꡒ주님, 주님은 누구십니까?ꡓ(사도9,5) 깜짝 놀란 바오로가 묻자 그 음성이 대답합니다.

ꡒ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다.ꡓ(사도9,5)

이 순간 사울은 완전히 다른 인물이 되어버립니다. 단 한번 예수님과의 만남으로 유다인으로서의 사울이 아니라 하느님의 사람 바오로로 탄생이 되지요. 다마스쿠스에 도착한 바오로는 예루살렘을 떠날 때의 혈기왕성한 유다인 사울이 아니라 부활하신 예수님을 뵙고 너무나도 놀라서 모든 것을 뉘우치고 예수님을 구세주로 고백하며 그리스도교를 전 세계로 선포하는 그리스도의 사도로 변화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이렇게 회심이 이루어지고 나서 바오로 사도는 온 세상에 복음을 전하는 사도로서 목숨을 아끼지 않고 주님을 증언하게 됩니다.

사울의 변화는 그의 판단력이나 의지에서가 아니라 오로지 부활하신 주님의 은총에 의한 것이었습니다. 주님께서 그를 뽑은 이유가 오늘 독서에 나와 있지요. 주님께서 하나니아스에게 말씀하십니다.

ꡒ가거라. 그는 다른 민족들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내 이름을 알리도록 내가 선택한 그릇이다. 나는 그가 내 이름을 위하여 얼마나 많은 고난을 받아야 하는지 그에게 보여 주겠다.ꡓ(사도9,15-16)

스테파노를 돌로 쳐 죽이는 데에 가담하고 그리스도 신자들을 박해하기 위하여 다마스쿠스로 출발할 때부터 벌써 주님은 바오로 사도를 당신의 일꾼으로 뽑아 놓으셨던 것입니다. 예수님을 만난 충격으로 땅에 엎드려졌던 사울은 즉시 기력을 회복하지 못했습니다. 사흘 동안이나 앞을 못 보고 먹지도 않고 마시지도 못했지요. 마치 돌아가신 예수님께서 사흘 밤낮을 돌무덤에 묻히셨다가 부활하신 것 같은 과정을 겪습니다. 그 후 그리스도교 공동체와 만나면서 ꡒ눈에서 비늘 같은 것이 떨어지면서 다시 보게ꡓ(사도9,18) 되지요. 그는 그 자리에서 일어나 세례를 받고 새로운 사람이 되어 그리스도를 전하기 시작합니다.

이렇게 사울이 주님께로부터 큰 은총을 받는 장면을 보고 우리는 이제 그가 당장 그리스도의 사도로서 큰 일을 하고 승승장구하리라고 생각하게 됩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크신 은총을 받았고 예수님께서 직접 불러주셨음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 공동체는 바오로를 받아들이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들의 뛰어난 선교사 스테파노를 죽이는 데 찬동하고 조직적으로 자신들을 박해하는데 힘을 쏟던 유다의 열혈 청년을 인정하고 받아들이기가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었던 것이지요. 이렇게 사면초가에 빠진 바오로사도는 45년경 1차 전도여행을 하기까지 많은 시련과 실패를 체험하면서 성과없는 11년을 보내고 고향 타르수스에서 은둔생활을 하기까지 합니다. 실의에 빠져 고향에 머무르고 있는 바오로를 예루살렘에서 안티오키아 교회를 돌보기 위해 파견된 바르나바가 사목자로 부릅니다. 그때서야 하느님의 사람으로 쓰기 위해 부르셨지요.

하느님의 뜻과 사람의 생각은 이렇게 다른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은 사람의 의지로 되는 것이 아니라 때가 있는 법입니다. 사울의 사람됨과 그 행위를 낱낱이 아시고 그를 바오로로 변화시킨 후에도 주님은 기다리셨습니다. 묵묵히 지켜보시지요. 여기에서 우리는 우리의 생각과 하느님의 뜻이 얼마나 다른 지를 깨달을 수가 있습니다.

바오로가 회심하자마자 자신의 경험과 의지만을 믿고 마구 행동했다면 분명히 얼마 안 가서 실패자가 되었을 지도 모를 일입니다. 자기의 의지만을 믿는 사람은 반드시 걸려 넘어지게 되어 있기 때문이지요. 주님께서는 바오로가 힘이 빠져 성령 안에 자신을 도구로 내어 맡길 수 있을 때까지 기다리셨습니다. 이것은 성경에 나오는 인물들의 공통점이기도 합니다.

구약의 대표적인 인물인 모세 또한 혈기 왕성하게 자기 민족을 박해하는 이집트 사람을 쳐죽이지만 그의 의거는 실패로 돌아가지요. 미디안 광야로 도망간 모세는 사십 년 동안을 양치기로 보내야 했습니다. 힘이 다 빠진 모세가 ꡒ제가 무엇이라고 감히 파라오에게 가서, 이스라엘 자손들을 이집트에서 이끌어낼 수 있겠습니까?ꡓ(탈출3,11)할 때 비로소 하느님께서는 ꡒ내가 너와 함께 있겠다.ꡓ(탈출3,12)하고 끌어내시지요. 바오로도 마찬가지입니다.

특히 하느님의 일을 하는 사람들은 자기의 의지나 지식만을 믿어서는 안 됩니다. 성령의 도구로 내어 맡길 때 풍요로운 결실을 맺게 되지요. 또 자신을 성령의 도구로 내어 맡긴다고 해서 시련이나 고난이 사라지는 것이 아닙니다. 모세에게도, 부활을 체험한 열 한 사도에게도, 또 갑작스럽게 회심한 사도 바오로에게도 분명하게 주어진 소명과 고난이 있었습니다. 하느님의 뜻, 복음을 전하는 길은 험난하지만 세상이 줄 수 없는 자유와 평화를 주는 길이지요. 복음을 전함으로써 누구보다도 강하고 자유로운 사람이 되었던 바오로 사도는 주님을 전하는 일을 사도의 권리라고 말합니다.

ꡒ나는 복음을 위하여 이 모든 일을 합니다. 나도 복음에 동참하려는 것입니다.ꡓ(1코린9,23)

이 복음 선포의 사명은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시대와 역사를 초월하여 모든 그리스도교 신자들에게 주어진 첫 번째 사명입니다. 이 곳에 성당에 세워진 이유도 바로 그것이지요. 이 지역에 복음을 전하는데 그 목적이 있습니다. 하느님께 미사를 드리며 감사와 찬미로써 모든 봉헌을 마치고 파견될 때마다 사제는 신자들에게 촉구합니다.

ꡒ미사가 끝났으니 가서 복음을 전합시다.ꡓ

또 다시 복음 선포의 사명을 일깨워주는 것이지요. 복음 선포가 바로 교회의 첫 번째 사명이고 그것이 가장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바오로 사도의 회심, 초대교회 공동체의 모습들, 그리고 하느님의 부활의 체험을 더 깊이 성장시키는 방법은 복음 선포에 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되겠습니다. 우리의 신앙이 성숙하고 우리 공동체가 복음적인 공동체로 거듭 성장하려면 복음 선포의 사도로서 내 자신을 성령의 도구로 내여 놓아야 합니다. 그 때 개인의 부활 체험은 더욱 깊어져 성화 되고 공동체는 복음적인 공동체로 한 걸음 더 성장될 수 있는 것입니다.

ꡒ가거라. 그는 다른 민족들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내 이름을 알리도록 내가 선택한 그릇이다.ꡓ(사도9,15)

오늘 주님께서 하나니아스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그렇습니다. 바오로 사도의 개종 축일을 지내는 우리에게도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도 같은 사명을 주셨습니다. 복음 선포의 사명을 실천할 때 부활하신 예수님을 더욱 깊이 체험할 수 있음을 기억하고 실천하는 오늘 하루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서울대교구 이기양 신부
  | 0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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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오로 사도는 유다인 중에 유다인이었습니다. 오늘 제1독서 사도행전에 나오듯이... 그는 어릴 적부터 훌륭한 스승 가말리엘 문하에서 학문을 배웠습니다. 그래서 바오로 사도는 성서와 율법에 정통하였고 어느 유다인 못지않게 하느님을 철저히 섬기고 공경하면서 살았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자신을 하느님의 아들이라 하며 하느님의 신성을 모독한 예수님과 그의 모든 추종자들을 누구보다 앞서 박해했었습니다.

그런데 그러던 어느 날, 바오로 사도는 예수님을 따르는 추종자들을 잡으려고 다마스커스로 가던 도중에 부활하신 예수님의 음성을 듣게 됩니다. '사울아, 사울아, 네가 왜 나를 박해하느냐?' '나는 네가 박해하는 나자렛 예수다'

이렇게 바오로 사도는 부활하신 예수님과 만나게 됩니다. 그리고 예수님과의 직접적인 만남은 바오로 사도의 마음을 바꾸어 놓습니다. 참된 구원의 빛과 말씀을 보고 들음으로써 율법의 굴래 속에서 막혔던 그의 눈과 귀가 열리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리하여 바오로 사도는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하던 죄인에서.. 그리스도의 복음을 선포하는 의인으로 바뀌게 됩니다. 즉, 바오로 사도는 자신이 박해하였던 예수님을 주님으로 고백하게 되었고, 예수님의 말씀을 세상에 선포하는 데 목숨을 걸고 일생을 바치게 됩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제자들에게 당신의 권한까지 주시면서 복음 선포의 사명을 주십니다. '너희는 온 세상에 가서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선포하여라'(마르 16,15). 그러므로 바오로 사도를 비롯하여 다른 제자들은 또 다른 그리스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또 다른 그리스도 되기 위해서 반드시 거쳐야 했던 과정이 있습니다. 오늘 바오로 사도께서 그러하셨듯이... 바로 부활하시어 살아계신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의 체험입니다. 바오로 사도와 제자들은 먼저 부활하신 예수님과 만남으로서 변화됩니다. 그리고 예수님과의 만남 체험을 통해 변화되었기에 세상의 그 어떤 것에도 굴하지 않고 살아 계신 주님을 용감하게 전할 수 있게 됩니다.

부활하신 구세주 예수님에 대한 체험은 바오로 사도와 제자들을 완전히 바꾸어 놓습니다. 그랬기에 그들은 구세주 예수님께 온전히 자신을 봉헌할 수 있었습니다. 또한 부활하신 구세주 예수님께서 그들과 함께 하심을 확신했기에... 그들은 자신 있게 마귀들을 쫓아내고 새로운 언어를 말했으며, 뱀이나 독 따위의 것들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우리 모두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예수님과의 만남을 통해 얼마나 변화되었습니까? 우리는 세상의 온갖 마귀들의 꼬임에 현혹되지 않고 세상의 권력이나 부귀 앞에 무릎을 꿇지 않습니까?

제 이런 질문에 지금은 확신 있게 답하지 못했다 하더라도.... 분명한 것은 우리 모두 적어도 분명 그러했었다는 것입니다. 세례의 물이 우리를 씻고, 처음으로 감격스럽게 구세주 예수님의 몸을 받아 모셨을 때 말입니다.

바오로 사도의 개종 축일을 기념하면서... 오늘 하루 내가 예수님을 만나 변화 되었던 그 첫 모습을 기억하도록 합시다. 우리 모두 흔들림 없었던 그 첫 모습으로 반드시 돌아갈 수 있습니다. 걱정하지 마시고 주님만 믿고 따르십시오. 아멘.

대구대교구 김용한(세례자 요한) 신부
  | 0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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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년 전 ‘패션 어브 크라이스트’라는 영화가 상영되어 많은 논란을 불러왔다. 영화의 내용과 그 표현이 ‘신성모독’에 가까운 화면으로 가득했다고 보았기 때문일 것이다. 십몇 년 만에 극장에 처음 가서 그 영화를 보았는데 이 영화가 흥행에 성공했다는 것이 의아스러울 정도였다.

어쨌거나 이 영화는 그리스도인들에게 한 가지 중요한 도전을 하고 있었다. 이 영화는 ‘피와 살이 튀는’ 화면이 중심이다. 채찍을 휘두르는 병사의 얼굴까지 땀에 범벅이 될 정도로 끔찍한 장면이 화면을 채우는데, 한 가지 우리 신앙의 근본적 허점을 깊이 찌르고 들어왔다. ‘우리 신앙은 너무 잘 다듬어져 있는 것은 아닌가?’ ‘우리 신앙은 너무 추상화된 것은 아닌가?’ ‘십자가가 이제 많은 사람이 목걸이로 달고 다니는 장식품 이상의 의미가 있는가?’ 하는 것이었다. 이 영화는 마치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을 아느냐?”고, 그리스도의 고난을 말하는 그리스도인들을 조롱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그리스도교가 만약 힘을 잃고 있다면 여기에 중요한 단서가 있다고 생각되었다. 우리의 신앙에 구체성이 사라지고 있다는 것이다.

주님은 열한 제자에게 말씀하셨다. “믿는 이들에게는 이러한 표징들이 따를 것이다.” 그런데 우리한테는 어떤 표징이 따르고 있는가? 우리한테는 어떤 그리스도의 ‘살과 피’가 있는가? 때로는 삼류 유행가 가사가 원래 가사의 의도와 관계없이 심금을 울리듯, 하찮은 영화지만 나에게는 무슨 믿음의 표징이 있는가를 돌아보게 했다.

최연석 목사 (전남 여수시 중부교회)
  | 0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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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저는 가정방문을 하고 있습니다. 사실 이 가정방문에 대해서 특별히 어렵다는 생각을 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사람들을 만나는 것이 너무나 좋거든요. 하지만 막상 가정방문을 해보니 피곤함을 많이 느끼게 만드네요.

가정방문의 첫째 날부터 상당히 힘들었답니다. 아침 9시부터 저녁 6시까지 가정방문을 하고 돌아와서 7시에 저녁미사를 했습니다. 그리고 8시부터 예비자교리, 9시부터는 저를 아는 청년들이 찾아와서 늦게까지 술자리를 가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다보니 마음속에서 이런 생각이 들더군요.

‘지금 바쁜 일도 많은데 괜히 가정방문을 한다고 한 것은 아닐까?’

그래도 신자들과 약속을 한 것이라, 가정방문을 어제도 바쁜 가운데 했습니다. 그런데 가정방문을 하면서 느끼는 것은 하기를 잘했다는 생각입니다. 지금 현재 쉬고 계신 교우들도 찾을 수가 있었고, 또한 우리 신자들의 힘든 점들을 같이 공유할 수 있는 시간을 가질 수가 있더라는 것입니다. 특히 어떤 냉담 교우와의 만남은 가정방문을 꼭 해야 한다는 목적의식을 갖게 됩니다.

이 교우는 집에서 혼자 세례를 받았습니다. 그러나 직장 문제로 인해서 오랫동안 냉담을 하게 되었지요. 그러면서 교회와 점점 멀어지게 되었고, 이렇게 냉담하는 자기를 성당에서도 잊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저와 몇몇 교우들이 찾아온 것이지요. 이 분은 너무나 놀라서 이런 생각을 하게 되었데요.

‘이렇게 냉담하는 나를 잊지 않았구나.’

자기를 잊지 않고 기억해준다는 그 사실이 너무나 감사하다는 말씀을 계속해서 하시는데, 그 순간 가정방문의 보람을 느끼면서 흐뭇한 미소를 간직하게 되네요. 사실은 기억하고 있었던 것이 아니라, 교적이 있으니까 찾아갔던 것인데 말이지요.

오늘은 성 바오로 사도의 개종 축일입니다. 예수님을 박해하던 바오로 사도였지요. 그런데 그가 개종을 하고, 예수님을 세상에 알리는 사람으로 변화됩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요? 바로 예수님을 박해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이 자기를 기억하고 계신다는 깨달음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감사의 마음이 그를 예수님께서 힘주어 말씀하신 사명, “너희는 온 세상에 가서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선포하여라.”는 사명을 최선을 다해서 실천하였던 것이지요.

사람들의 변화는 작은 것을 통해서 이루어질 수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즉, 나를 기억해주고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변화는 이루어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주님의 복음 선포를 위해서 내가 할 수 있는 작은 일들이 얼마나 많을까요?

그 할 수 있는 일들이 바로 예수님의 선교 사명에 큰 역할을 할 수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면서 내가 할 수 있는 것들을 뽑아보았으면 합니다. 그리고 적극적인 실천을 해야겠습니다. 님의 복음 선포를 위해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것 다섯 가지만 생각해봅시다.

인천교구 조명연 신부
  | 0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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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롭게 변화되게 하소서

오늘도 나는 새롭게 변화하고 싶다. 바오로 사도처럼! 유교 집안에서 태어난 나는, 아픈 자식을 위해 무속에 의지하며 아침마다 치성을 드리는 어머니를 통해 신의 존재를 알게 되었다. 그리고 최초의 스승인 예배당 선생님들을 통해 개신교 신자가 되었다. 새벽 예배에 나온 꼬마들과 함께 놀아주시던 선생님들. 그중에 김경숙 선생님은 결혼식 당일에도 우리와 함께 놀아주셨다. 아마도 나의 신앙은 그때부터 시작된 것 같다.

초등학교 4학년 때는 절에 사는 짝을 따라 수락산 자락에 있는 절에 갔다. 스님한테 불경과 불상을 받고 열심히 경문을 외우며 불교를 배웠다. 중학교에 다닐 때는 군종목사였던 이모부가 최전방 사병들을 찾아다니며 기도와 찬송으로 목회하는 모습을 보면서 그런 삶을 동경하기도 했다. 그 후 나는 여러 교회를 섭렵하며 신앙심을 키워갔다. 「불타는 세계」·「인류의 종말」과 같은 이상한 책까지 읽다가 교무실에 불려가 국어선생님께 야단 맞은 기억도 생생하다. 고등학교 1학년 때 성당에 다니던 친구가 있었는데, 그 친구는 나를 성당으로 이끌지 않고 천도교에 다니자고 해 같이 다녔다. 어느 날 이 사실을 안 친구 어머니가 천도교에 와서 친구를 데려가는 바람에 그것도 끝이 났다.

그 후 나는 다른 친구와 함께 성당에 찾아가기로 했다. 그런데 약속 시간이 다 되어도 친구가 오지 않아 혼자 용기를 내어 성당에 들어갔다. 아무도 손을 내밀어 주지 않는 냉정한 성당에 매력을 느꼈다. 부모님이 신자가 아니고, 또 미혼 여성들에게 세례 주기를 꺼리던 시대여서 3년 동안 교리반에 다녔다. 마침내 교리반 수녀님이 가정방문을 오셨고 아버지 몰래 어머니의 허락을 받고 난 후에 나는 세례를 받을 수 있었다. 이미 오랜 시간 개신교 문화에 길들여진 터라 주일이면 역전에서 노래와 율동으로 찬양을 하고, 하루 종일 기차를 오르내리며 전단지를 뿌리고, 추운 겨울에도 사병들을 찾아다니는 이모부처럼 열정적으로 살고 싶었다.

결국 나는 수녀원에 입회했다. 내 열정이 넘치긴 했지만 모태신앙을 가진 자매들이나 레지오 마리애 단장 출신인 자매들과는 다른 면이 있었다. 훗날 동기 수녀님이 나에게 해준 이야기가 있다. 그 시절 성모님에 대해 너무 아는 것이 없는 나를 보면서 분심이 많았다고 했다. 아무튼 나는 노틀담(Notre Dame) 수녀원에서 성모 마리아의 신심을 새롭게 받아들였고, 입회 전 내가 즐겨 바치던 ‘이름 없는 순례자의 기도’보다 묵주기도를 더 바치게 되었다. 밤이면 수호천사에게 못다 한 묵주기도를 대신해 주기를 청하며 잠이 드는 것에 익숙해져 갔다. 그리고 이냐시오식 관상기도를 배웠고 나중에 내 성향에 맞는 향심기도를 받아들였다. 사도직에서 영적인 목마름을 느꼈을 때 하느님은 나를 ‘십자가의 버림받은 예수님을 사랑하며 외로우신 마리아를 살자.’는 포콜라레의 이상으로 이끌어 주셨다. 이제 또 주님께서 예비하신 새로운 길을 두려움 없이 따라가며 그분을 더 깊이 사랑하게 되기를 소망한다.

김현숙 수녀(노틀담수녀회)
  | 0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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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코 복음 16장 15-18절
“너희는 온 세상에 가서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선포하여라.”

설득력 있는 신앙생활

얼마 전 <가톨릭신문>에서 “입교도 냉담도 가족 영향 크다”라는 제목의 기사를 읽은 적이 있습니다. 복음은 말로써만 전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신앙에 따른 행동이 수반되어야 한다는, 다시 말해서 복음을 선포하기 위해서는 나 자신이 먼저 복음에 근거한 신앙의 삶을 살아야 한다는 사실을 역설하는 좋은 증거가 아닌가 싶습니다.

우리들은 우리보다 먼저 신앙의 삶을 살아간 사람들로부터 신앙을 물려받았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그랬던 것처럼 우리들도 아직 하느님을 알지 못하는 다른 사람들에게 신앙을 전파할 의무를 지니는데, 그것을 위해 가장 중요한 것은 스스로 모범적인 신앙생활을 하는 것입니다. 바로 여기서 신앙에 관한 한 좋은 것을 골라서 듣고 봄으로써 자신들의 신앙을 적극적이며 긍정적으로 키워나갈 필요성이 생겨납니다. 좋은 것을 골라서 듣고 본다는 것은 다른 신앙인들의 부정적인 측면이나 단점들을 비판하기보다는 긍정적이고 적극적인 측면과 그들의 장점 등을 찾아내고 본받아 내 것으로 만들려는 부단한 노력을 말합니다. 쉽지 않은 것이 사실이지만 이러한 노력으로 얻어진 모범적인 신앙생활을 통해서만이 신앙을 전파할 의무를 채울 수 있게 됩니다. 우리 모두가 아무런 허물없이 지낼 수 있는 가족들에게조차도 모범이 되는 복음적인 삶을 살아 이웃에게 보다 설득력 있게 주님의 복음을 선포했으면 하는 마음입니다.

부산교구 구경국 신부
  | 0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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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사기꾼이 식당에서 밥을 먹는데 꿀벌이 날아와 포도주 잔 근처를 맴도는 것입니다. 그는 꿀벌을 책으로 내리쳐서 잡으려고 했으나, 괜히 마음이 내키지 않아서 마음을 바꾸어 살려주었지요. 죽었다가 살아난 꿀벌은 잽싸게 그 자리를 떠나 막 꽃을 피운 어린 야생 살구나무 밭에 다다랐습니다. 꿀벌은 열심히 꿀을 모았고, 어찌어찌해서 꽃가루도 옮겨주었지요.

머지않아 살구나무에는 열매가 맺혔고, 하도 열매가 달콤한지라 한 농부가 이 살구를 따서 잼을 만들었습니다. 다들 맛있다고 칭찬하므로 농부는 왕에게 이 잼 한 단지를 바쳤지요. 왕은 살구 잼을 그다지 좋아하지는 않았지만 그 진상품을 받아주었지요. 그런데 이 왕은 한 공주를 좋아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 공주는 왕의 데이트 신청을 계속해서 거절하는 것이 아니겠어요. 왕은 이번이 마지막이라고 다짐하면서 농부가 바친 잼 한 단지와 초대장을 보냈습니다.

그런데 이 살구 잼 한 단지에 공주는 감동을 했습니다. 왜냐하면 몇 달 전 세상을 떠난 공주의 할머니가 늘 맛있는 잼을 만들어 주었거든요. 이 살구 잼을 통해 할머니의 추억을 떠올리게 되었고, 그래서 왕의 초대를 승낙한 것입니다.

마침내 공주가 초대에 응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왕은 또 나쁜 짓을 저질러 감옥에 갇힌 사기꾼에게 큰 벌을 내리려던 참이었지요. 하지만 이 희소식에 마음이 누그러져서 사기꾼에게 가벼운 벌을 내렸답니다. 이 사기꾼이 바로 처음에 꿀벌을 죽이려다가 말았던 사람이었습니다.

한 사기꾼의 작은 행동 하나로 인해서 자신의 삶에 큰 변화가 일어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는 우리들의 삶 안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나의 작은 행동, 나의 조그마한 체험 하나를 통해서 내 삶 전체가 아니 어쩌면 세상이 변화될 수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오늘은 사도 바오로 사도의 개종 축일입니다. 사도 바오로는 원래 예수님을 믿던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하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그에게도 예수님께서 다가오십니다. 그리고 오늘 독서에 나오듯이 작은 체험을 하게 됩니다. 이 체험을 통해 그는 커다란 변화를 가져옵니다. 그리스도인들을 철저히 박해했던 사람이, 오늘 복음의 말씀처럼 ‘온 세상에 가서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선포’하는데 최선을 다하는 사람으로 변화됩니다.

우리 본당의 어떤 자매님 말씀이 기억납니다.

“신부님, 저는 성당이 너무 재미없어요. 미사도 재미없고, 기도하는 것도 너무나 힘들어요. 그런데 예수님은 정말로 대단하신 분 같아서 미사도 꼭 참석해야 할 것 같고, 기도도 꼭 해야 되는 것 같아요. 왜냐하면 저와 함께 살면서 평생 바뀌지 않았던 제 남편이 세례 받고 나서는 술 담배를 끊는 등 완전히 바뀌었거든요.”

나의 작은 행동, 작은 체험 하나도 소중히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 작은 행동, 작은 체험 하나가 나를 변화시키고 가족을 변화시키며 이웃을 변화시키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 이 세상을 바꿀 수도 있습니다.

인천교구 조명연 신부
  | 0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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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특별한 인물, 바오로 사도

교회 역사 안의 많은 인물들 가운에 바오로 사도처럼 특별한 인물이 또 있을까요? 그는 한때 이 세상 그 누구보다도 앞장서서 교회를 박해하던 사람이었으나, 후에 바로 그 교회를 가장 사랑하는 참 목자로 탈바꿈합니다. 그는 한때 예수님을 철저하게도 부인하던 사람이었으나, 머지않아 온 몸과 마음을 다해 예수님의 사랑을 노래하는 서정 시인으로 거듭납니다.

극적인 회심을 통해, 또 많은 감동적인 아름다운 서간을 통해, 시대를 뛰어넘어 아직까지도 우리에게 큰 감동을 안겨주시는 위대한 사도, 뛰어난 문학가이신 분이 바오로 사도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잘 나가던 가문 출신이었습니다. 순탄했던 성장기를 보냈습니다. 출중한 자질을 지녔습니다. 다방면에 걸친 학문적 조예도 깊었습니다. 세상의 눈으로 볼 때 바오로 사도는 아무런 부족함이 없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리도 당당했고, 자존심이 강했습니다.

“나는 태어 난지 여드레 만에 할례를 받았습니다.”
“나는 제대로 된 이스라엘 백성입니다.”
“율법으로 말하면 바리사이 사람입니다.”

그러나 회심이후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나에게 유익했던 이런 것들을 나는 그리스도를 위해서 장애물로 여겼습니다.”

바오로 사도 안에서 자신의 인생에 대한 총체적인 재평가가 이루어졌음을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제대로 예수님을 만난 바오로 사도는 그분의 충만하심 앞에서 그야말로 ‘깨갱’ 하고 말았습니다.

바오로는 지금까지 자신이 지녀왔던 삶의 자세가 근본적으로 틀렸음을 깨달았던 것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예수님과의 참 만남을 통해 자신이 가장 중요하게 여겼던 그 모든 것들이 사실 아무것도 아닌 하찮은 것임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예수님과의 만남을 통해 자신은 정녕 불쌍한 사람이고, 자신이 대단한 존재여서가 아니라 하느님께서 죄인인 자신을 사랑하셨기 때문에 자비를 베풀어주시고 회심의 기회를 주셨다는 사실을 인식하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수시로 자신에게 반문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의 생애 안에서 언제 예수님과의 참 만남이 이루어졌는가? 언제 근본적인 회심이 이루어졌던가? 언제 하느님의 신비를 조금이나마 이해하게 되었는가?

하느님께서 우리를 선택하신 이유는 우리가 잘나서, 또는 대단해서라기보다는 우리가 너무 안쓰러워서, 우리가 너무나 죄인이어서, 우리가 너무 안 되 보여서 우리에게 자비를 베푸시고 우리를 구원하시는 것입니다. 바오로 사도의 말씀대로 우리가 자랑할 것은 쥐뿔도 없습니다. 아무것도 없습니다. 자랑할 것이 있다면 그것은 오직 예수님 그분의 흘러넘치는 자비입니다. 내세울 것이 있다면 은총의 십자가뿐입니다.

살레시오회 양승국 신부
  | 0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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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   1월 31일 : 성 요한 보스코  [3] 2794
33   1월 30일 : 성녀 히야친타 마리스코티  2083
32   1월 29일 : 성 질다스  1769
31   1월 28일 : 성 토마스 데 아퀴노  [1] 2405
30   1월 27일 : 성녀 안젤라 메리치  [8] 2747
29   [수도회] 세월이 정답입니다  [4] 1005
28   [인천] 일꾼의 기준  [4] 800
27   [수원/서울/의정부/청주] 주님 밭의 일꾼  [5] 881
26   1월 26일 : 성 디모테오와 성 디토 주교  [5] 2944
  1월 25일 : 성 바오로 개종  [10] 3185
24   1월 24일 : 성 프란치스코 드 살  [3] 2556
23   1월 23일 : 자선가 성 요한  1782
22   1월 22일 : 성 빈첸시오  1779
21   1월 21일 : 성녀 아녜스  [6] 3219
20   1월 20일 : 성 파비아노  2089
19   1월 19일 : 성 울프스턴  1750
18   1월 18일 : 프리스카  1967
17   1월 17일 : 성 안토니오  [4] 2492
16   1월 16일 : 성 호노라토  1775
15   1월 15일 : 성녀 이타  1964
14   1월 14일 : 성 사바  1771
13   1월 13일 : 푸아티에의 성 힐라리오  1798
12   1월 12일 : 성녀 마르가리타 부르저와  [1] 2090
11   1월 11일 : 성 테오도시오  [1] 2164
10   1월 10일 : 성 베드로 오르세올로  1810
9   1월 09일 : 성 아드리아노  1942
8   1월 08일 : 성 토르핀  1874
7   1월 07일 : 페냐포르트의 성 라이문도  1922
6   1월 06일 : 복자 안드레아 비제트  1929
5   1월 05일 : 성 요한 네포묵 뉴먼  1808
4   1월 04일 : 성녀 엘리사벳 앤 시튼  2251
3   1월 03일 : 성녀 제노베파  2384
2   1월 02일 : 성 대 바실리오와 나지안조의 성 그레고리오 주교 학자  [2] 3128
1   1월 01일 : 천주의 성모 마리아  [1] 31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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