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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단 두세 사람이라도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
조회수 | 2,090
작성일 | 08.06.19
북한에서도 영어를 배우고 사용할까요? 안 할까요? 요즈음은 북한에서도 영어를 배운다고 하는데 특히 고위직일수록 많이 배운다고 합니다. “I am a boy.”를 번역하면 “나는 소년입니다.”가 되지요. 그런데 북한말로는 어떻게 번역될까요?

"내래 간나새끼야요!"

60년의 세월이 한 민족을 이질적으로 변화시켜 놓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남북통일 기원 미사’를 봉헌하고 있습니다. 참으로 안타까운 현실을 우리는 살아가고 있지요. 지금 많은 북한 주민들이 굶주림으로 살아갈 수가 없어서 목숨을 걸고 정든 고향 땅을 탈출하고 있다고 합니다. 반면에 정권을 잡고 있는 일부 고급 공산당원들은 호위호식하면서 그 정권을 유지하기 위해서 온갖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버티고 있지요. 그것이 바로 너 죽고 나죽자는 식의 핵무기입니다. 나만 죽을 수 없으니까 같이 죽든지 아니면 지금의 체제와 정권을 그대로 인정해 달라는 것이지요. 북한의 많은 사람들이 소수의 권력자에 의해서 희생당하고 굶주림에 변방 국가들을 떠돌고 있는 현실이 작금의 현실입니다.

이러한 정권을 보는 우리는 한민족으로서 무력감과 분노를 느낍니다. 많은 사람들이 북한 하면 김일성과 김정일을 먼저 떠올리고 철천지원수같이 이질적인 민족으로 생각하지만 대부분의 주민들은 우리와 한 형제이고 친척이며 한 핏줄입니다. 그런데 같은 민족끼리 왜 이렇게 힘들게 살아야 하는 것일까요?

한쪽에서는 너무 넘쳐 나서 힘들고 또 한쪽에서는 너무 없어서 굶어 죽어가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세상에서 그 어느 곳도 갈 수 없는 나라가 없지만 북쪽의 우리 땅을 바로 지척에 두고도 왕래하지 못하고 있으며, 일생을 그리워하고 만나고 싶어 애를 써도 가족을 만날 수 없는 이산의 아픔을 지닌 사람이 천만 명이나 되는 참으로 답답하고 힘든 상황을 살고 있습니다.

많은 나라들이 공산주의 체제를 지향했다가 결국 실패하는 아픈 체험을 겪고 모두 포기했지만 북한만은 아직도 공산주의를 강요하고 여전히 무력통일을 꿈꾸며 국민을 볼모로 하여 희생을 강요하는 어리석은 나라로 남아 있지요. 그 곳에서는 무력통일의 환상이 60년이나 지속되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것을 실현하겠다고 1950년 전쟁을 일으켰지만 서로를 원수지간으로 만들어버렸고 남은 것은 녹슨 탱크와 낡은 전투기들, 그리고 어찌할 수 없는 처절한 빈곤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무력통일을 포기하지 못하는 안타까운 북한의 모습을 우리는 보고 있습니다. 그 결과 북한에서는 굶어 죽어 가는 사람들이 넘쳐나고 있지요.

한 편 남한에서는 식량이 남아 돌아가면서도 지원하지 못하는 안타까운 일이 벌어지고 있지요. 북한을 지원하는 문제로 국민들 사이에 분열이 생기고 다툼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식량을 지원하면 그것이 분명 무기가 되어 우리에게 날아올 것이라고 반대라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그래도 굶어 죽어 가는 동포들을 외면할 수는 없다고 주장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는 실정이지요.

우리 정부는 대화를 통해서 해결의 실마리를 풀어가려고 하지만 북한의 기득권자들은 핵탄두를 만들었다고 하면서 함께 다 죽든지, 지금의 체제를 인정하든지 둘 중의 하나를 선택하라고 협박 아닌 협박을 하고 있습니다. 막가자는 식의 북한 태도에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는 우리의 모습, 이것이 지금 참담한 우리 남북한의 현실입니다. 힘으로도 안 되고 설득으로도 안 되는 이 현실 앞에 도대체 어떤 방법으로 남북이 통일을 이루고 이 처참한 현실을 극복할 수 있겠습니까? 그 무엇보다도 하느님 말씀에 귀 기울여야 될 시점인 것 같습니다.

바로 오늘 독서와 복음이 하나의 방법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지요.

"너희 가운데 두 사람이 이 땅에서 마음을 모아 무엇이든 청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이루어 주실 것이다."(마태18,19)

간절히 기도하라는 말씀입니다. 인간적으로 불가능해 보이는 일도 끝없이 구하면 들어주시겠다고 말씀하고 계시는 것이지요. 또 베드로가 예수께 와서 ꡒ주님, 제 형제가 저에게 죄를 지으면 몇 번이나 용서해 주어야 합니까? 일곱 번까지 해야 합니까?ꡓ(마태18,21)하고 묻자 예수님께서 대답하십니다.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해야 한다."(마태18,22)

바오로 사도 역시 제2독서에서 말씀하고 계시지요.

"여러분의 입에서는 어떠한 나쁜 말도 나와서는 안 됩니다. 서로 너그럽고 자비롭게 대하고, 하느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여러분을 용서하신 것처럼 여러분도 서로 용서하십시오."(에페4,29.32)

이것이 바로 통일의 방법입니다.

"아이고, 신부님. 그렇게 해서 언제 되겠습니까? 그냥 힘으로 단번에 밀어 부치는 것이 속 시원하고 성과 또한 크지 않겠습니까?"

이렇게 말하는 분들도 계실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으로 안 된다는 것이 남북한 60년 역사가 우리에게 준 교훈이지요. 힘으로 통일을 이루어 보겠다고 남과 북이 60년 동안 대치했지만 결과는 원수맺음과 이산의 고통, 가난, 그리고 극빈국으로의 전락밖에 없었다는 것입니다. 이래서는 우리 모두의 미래가 어두울 뿐입니다. 함께 잘 살기 위해서 될 것 같지 않지만 기도하고 용서하고 인내하는 노력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지요.

미국 인디애나주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애지중지 양을 기르는 양치기가 살고 있었는데 가끔 그의 목장 안에서 사고가 발생하곤 하였습니다. 옆집의 개가 울타리를 넘어 들어와서 양들을 물어 죽이곤 하였던 것입니다. 물어 죽여도 하필 양치기가 제일 소중히 여기는 탐스럽고 튼튼한 양만을 개들은 골라 죽였습니다. 이런 일이 생기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화가 솟구쳐 이웃집으로 달려가 큰소리로 항의를 하고 분풀이를 시도할 것입니다. 여러분들 같으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개를 없애는 것이 좋겠습니까? 아니면 울타리를 쳐야 할까요? 개 주인한테 보상을 요구해야 하겠습니까? 이 방법들은 서로가 원수처럼 지내야 하는 막판으로 가는 방법이지요. 개 한 마리 때문에 이웃 간이 원수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양치기는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깊이 생각한 끝에 이웃집 아이들에게 새끼 양을 몇 마리 선물하였습니다. 아이들은 금방 새끼 양을 사랑하게 되었지요. 애지중지 양을 돌보게 되면서 자연스럽게 키우던 개를 묶어놓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감정이 격화되는 상황일수록 지혜가 필요하지요. 감정에 감정으로, 싸움에 싸움으로 대해서는 결코 얻는 것이 없습니다. 문제를 푸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 이상 어떻게 할 수 없는 처지로 만들어 버리는 것이지요. 이것이 우리의 60년 대결 역사이고, 그 결과가 북한은 북한대로 남한은 남한대로 어려움에 처해 있는 지금의 현실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남한도 "무찌르자 공산당, 쳐부수자 김일성, 북한 괴뢰군…"하면서 북한 못지 않게 배타적으로 60년 간을 대치했지요. 그 결과 어떻게 할 수 없는 지금의 처지가 되어 버린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는 통일이 될 수가 없지요. 남과 북은 더 깊은 골만 만들어냈고 안타깝게도 모든 주도권은 주변의 강대국에 빼앗겨 버리고 처분만을 기다릴 수밖에 없는 처지로 떨어지고 말았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남북통일을 위해서 함께 기도하고 일곱 번씩 일흔 번이라도 용서하며 해치는 말은 입밖에도 내지 말고 사랑으로 감싸는 노력들이 필요합니다. 그러한 노력들이 어느 날 갑자기 물꼬를 트게 만들지요. 용서의 마음을 오랜 기간 담고 있으면 어느 순간 작은 계기에도 탁 열리게 되어 있지요. 역사가 한 순간에 바뀌는 것입니다. 과거의 그 모든 갈등과 문제가 한순간에 눈 녹듯 사라지는 것, 이것이 용서와 사랑의 힘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우리가 원하는 통일의 방법입니다.

기도와 용서와 사랑은 총과 대포와 핵무기보다도 더 위대합니다. 총과 대포가 원수 맺음과 이산의 아픔과 극빈국으로의 전락을 가져왔다면 기도와 용서와 사랑은 화해와 기쁨과 통일의 열매를 가져올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인내가 필요합니다.

중요한 것은 힘있는 사람이 더 포용을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만이 우리 민족이 함께 통일을 앞당기고 잘 살 수 있는 방법입니다. 그리고 만나서도 빨리 이질적인 문화를 극복할 수 있는 바탕이지요. 많이 참고 기도하며 손해보는 것 같아도 함께 나누는 것, 이것이 오늘 주님께서 가르쳐주신 민족의 화해와 일치를 위한 방법입니다.

"너희 가운데 두 사람이 이 땅에서 마음을 모아 무엇이든 청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이루어 주실 것이다.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 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해야 한다."(마태18,19.22)

기도와 용서는 도저히 이루어질 것 같지 않은 상황에서도 과거의 모든 아픔이 한순간 씻기는 기적을 가져옵니다. 기도하고 나누고 인내하는 것이 화합의 지름길임을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우리의 기도와 용서의 마음을 보시고 주님께서 이루어 주신다는 것을 믿고 다 함께 마음을 모아서 오늘 미사 중에 기도합시다.

이기양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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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의 힘에 의한 일치와 화해

오늘 복음은, 함께 기도하면 아버지께서 들어 주신다는 것과 형제가 죄를 지으면 몇 번이고 용서해야 한다는 두 가지 내용을 전해 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기도를 정의할 때 흔히 ‘하느님과의 대화’라고 합니다. 이를 다시 말하면 ‘하느님께서 우리의 기도를 들어 주시지 않는다’ 혹은 ‘과연 하느님은 내가 기도할 때 귀 기울이시는가? ’하는 질문이 지극히 자기중심적이라는 점입니다.

하느님과의 대화라는 차원에서 볼 때, 우리가 하느님의 목소리를 듣기 위해서는 오늘 제1독서에서처럼 그분께 돌아가야 합니다. 또 그분께 돌아가기 위해서는 자기중심적으로 모든 것을 바라보고 판단하던 삶의 자세에서 벗어나 그분의 말씀과 계명에 순명해야 합니다. 바로 이 점에서 모세는 백성에게 말합니다. “너희가 마음 속으로 뉘우치고, 주 너희 하느님께 돌아와서, 내가 오늘 너희에게 명령하는 대로 너희와 너희의 아들들이 마음을 다하고 정신을 다하여 그분의 말씀을 들으면, 주 너희 하느님께서 너희의 운명을 되돌려 주실 것이다”(신명 30,1-3).

오늘 우리가 민족의 화해와 일치를 위해 기도하고, 남북통일을 기원한다면 우리의 자세가 어떠해야 하는지 잘 드러납니다. 스스로 하느님을 벗어나 살고 있으면서 하느님께 기도하고 있다고 착각해서는 안 됩니다. 스스로 하느님을 외면하고 있으면서 하느님이 우리의 기도를 들어 주시지 않는다고 여겨서도 안 됩니다. 과연 우리가 기도할 때 우리의 마음이 하느님을 향하고 있었는지 혹은 입으로는 하느님을 부르면서 마음은 다른 곳에 머물고 있었는지 솔직하게 돌아봐야 합니다.

그렇기에 사도 바오로는 오늘 제2독서에서 새 생활의 규범에 대해 말합니다. 여기서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하느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여러분을 용서하신 것처럼 여러분도 서로 용서하십시오”(에페 4,32)라는 권고입니다. 사실 타인을 용서한다는 것이, 특별히 나에게 큰 아픔과 고통을 준 사람을 용서하는 것이 결코 쉽지 않다는 것을 우리는 체험을 통해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사랑하시고 또 우리를 위하여 당신 자신을 하느님께 바치는 향기로운 예물과 제물로 내놓으신 것처럼, 여러분도 사랑 안에서 살아가십시오”(에페 5,2)라고 바오로는 말합니다.

이 말씀은 내 자신으로 하여금 다음의 질문을 던집니다. 나는 하느님으로부터 용서받았다는 체험을 갖고 살아가고 있는가? 내 마음 속에 한 사람을 미워하고 있을 때, 그 사람을 더 이상 미워하지 않도록 해 달라고만 청했는지 아니면 진정 그 사람을 위해 기도했는가? 아니면 그저 내 마음 속의 미움만 바라보고 있는가? 이 모든 질문은 화해와 일치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하느님의 도우심임을 느끼게 해 줍니다. 인간 안에 자리한 분열과 다툼이 인간의 이기적 마음에서 나온 것이라면, 화해와 일치는 하느님의 힘에 의해 이룩된다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오늘 특별히 민족의 화해와 일치를 위해 그리고 남북통일을 위해 기도하는 것은 우리가 만들어놓은 것을 하느님의 손길로 바꾸어 달라는 것입니다. 단 하루가 아닌 매일의 기도 지향이었으면 합니다.

변종찬 마태오 신부
  | 06.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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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남자가 옆집 사람과 원수처럼 지내고 있었습니다. 쓰레기 하나 떨어진 것으로 시작된 다툼이 갈수록 커져서 동네방네 서로를 욕하고 다니더니 그 소문이 다시 본인들 귀로 들어가 큰 싸움이 되고 이제 이들은 아예 원수 사이가 돼 버린 것입니다. 어찌나 옆집 사람이 미웠던지 남자는 속으로 옆집에 벼락이라도 떨어지기를 바랐고 어떤 때는 기름이라도 부어 불을 질러버리고도 싶었습니다. 그리고 실제로 휘발유통을 자기 집에 쌓아놓고 기회를 엿보기 시작했지요.
 
'어디 두고 보자. 적당한 밤에 불을 질러 뜨거운 맛을 보여 줄 테다.'
 
그런데 이게 어찌된 일입니까? 밤마다 남자는 가위에 눌려 고함을 지르며 잠에서 깨어나야 했습니다. 바로 자신의 집에 불이 붙어 훨훨 타들어 가는 꿈을 밤마다 꾸었던 것입니다. 남자는 도저히 잠을 이룰 수가 없었고 정상적 생활도 불가능하게 됐습니다.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 불안에 떨어야 했지요. 자지도 못하고 먹지도 못하던 남자는 더 견딜 수가 없어서 신부님을 찾아가 상담을 했습니다. 그리고 다음 날부터 기름통을 다 치우고 옆집 사람을 용서하기로 마음먹었습니다. 그는 그날 밤부터 편히 잠을 이룰 수가 있었다고 합니다.
 
세상에서 제일 미련한 사람은 미움을 마음 깊이 쌓아 놓고 키워 가는 사람입니다. '어디 두고 보자, 내가 당한 것보다 수십 배는 더 고통스럽게 갚아주고 말거야!'하며 자기 마음을 송두리째 미움에 맡겨버립니다.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모든 생명체가 그러하듯 인간의 몸과 마음 역시 사랑 안에서만이 충만함을 느낍니다. 더구나 다치기 쉬운 우리들 마음은 미움이 자라면 자랄수록 피폐되기에 될 수 있으면 미움의 감정은 버리고 건강한 삶을 키워주는 사랑과 평화의 감정이 자리 잡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이것은 개인뿐만 아니라 단체나 나라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남과 북은 70여 년 가까이 미움과 증오의 감정만을 키워왔습니다. 서로가 다 망가질 정도로 3년 넘게 치고받으며 전쟁도 벌였습니다. 그것도 모자라 모든 것을 다 바쳐 서로 죽이겠다고 무기를 개발하고 협박과 증오의 감정을 남발하며 대치중입니다. 참으로 어리석은 백성들입니다. 어떻게 이 감정의 깊은 골을 이겨내고 화해의 물꼬를 틀 수 있을까요?
 
바로 오늘 독서와 복음이 하나의 방법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내가 또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 가운데 두 사람이 이 땅에서 마음을 모아 무엇이든 청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이루어 주실 것이다"(마태 18,19).
 
간절히 기도하라는 말씀입니다. 또 베드로가 예수님께 와서 "주님, 제 형제가 저에게 죄를 지으면 몇 번이나 용서해 주어야 합니까? 일곱 번까지 해야 합니까?"(마태 18,21)하고 묻자 예수님께서 대답하십니다.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해야 한다"(마태 18,22).
 
바오로 사도 역시 제2독서에서 말씀하고 계시지요.
 
"여러분의 입에서는 어떠한 나쁜 말도 나와서는 안 됩니다. 필요할 때에 다른 이의 성장에 좋은 말을 하여, 그 말이 듣는 이들에게 은총을 가져다줄 수 있도록 하십시오"(에페 4,29).
 
이것이 바로 통일의 방법입니다.
 
"아이고, 신부님. 그렇게 해서 언제 되겠습니까? 그냥 힘으로 밀어부치는 것이 속 시원하고 성과 또한 크지 않겠습니까?"
 
이렇게 말하는 분들도 계실 것입니다. 그러나 힘으로 통일을 이뤄 보겠다고 남과 북이 70여 년을 대치했지만 결과는 원수맺음과 이산의 고통, 가난밖에 없었습니다. 함께 잘 살기 위해서는 자주 만나 대화를 해야 하며 기도와 인내, 용서의 노력이 필요합니다. 두 사람이 치열하게 치고받아 입원했어도 상처는 한두 달이 지나면 회복되지만 싸움 중에 주고받은 독설들은 갈수록 깊어지고 평생을 가기도 합니다. 감정의 골은 쉽게 치유되지 않기에 많은 노력과 세월을 필요로 하지요.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남북통일을 위해서는 끈기 있게 기도하고 일흔일곱 번이라도 용서하며 해치는 말은 입 밖에도 내지 말고 사랑으로 감싸는 노력들이 필요합니다. 그러한 노력들이 어느 날 갑자기 화해의 물꼬를 트게 만들지요. 과거의 그 모든 갈등과 문제가 한순간에 눈 녹듯 사라지는 것, 이것이 용서와 사랑의 힘입니다. 그러면 인간적으로 불가능해 보일지라도 우리의 노력과 주님의 은총으로 평화통일의 그날은 반드시 올 것입니다.

이기양 신부
  | 06.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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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도 서로 용서하십시오.

오늘 복음 안에서 예수님께서 남북이 화해하기 위해서는 우선 기도하고, 서로 사랑하고 용서하라 말씀하십니다. 남북으로 갈라진 지 65년이라는 시간이 흘렸습니다.물리적 시간으로 생각했을 때는 꽤 많은 시간이지만, 우리 민족의 마음의 시간은 언제나 하나가 되길 바라는 기다림의 시간입니다. 명절 때면 가끔 이산가족 상봉을 보곤 합니다. 그때 남과 북이 참으로 하나가 되는 순간을 간접적으로 체험하면서 코끝이 찡해 옵니다. 이념적, 정치적 대립을 이길 수 있는 것은 한 민족이라는 핏줄이라는 사실에 스스로도 깜짝 놀랍니다. 남북의 화해는 우리 민족의 가장 중요한 과제 중 하나입니다.

복음은 우리에게 남북통일을 위해 우리가 가장 우선적으로 해야 할 일은 주님께 기도하는 것이라는 가르침을 줍니다. 분열을 원하시지 않으시는 주님께 우리 모두는 남북이 그 어떤 어려움도 이겨내어, 하나 되길 간절히 기도해야 합니다. 다음에는 바오로 사도가 말한 것처럼 서로의 화해를 위해서 긴장감을 조성하는 일체의 언행을 삼가고, 서로 좋은 말로 상대방에 도움이 되는 일을 합니다(에페 4,29). 남북이 하나 되는 것을 방해하는 것은 신뢰를 깨는 악의 찬 상호 비방입니다. 그리고 신뢰 회복에 가장 중요한 요소는 이웃을 사랑하는 마음입니다.

그 사랑의 마음은 남북 화해에 대해 우리가 가져야 할 마음입니다. 여러 가지 어려움에 처해 있는 이웃을 사랑하는 것은 우리의 의무입니다. 그것은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사랑하셨고 우리를 위해서 당신 자신을 하느님께 바치는 향기로운 제물로 내놓으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남북의 문제를 정치적으로 해결하기 이전에, 우리 스승께서 하셨던 위대한 사랑을 북쪽에 보여 주는 것입니다. 이 사랑은 지칠 줄 모르게 계속해서 해야 합니다. 이제 어느 정도 했으면 끝났다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생명까지 바쳐 우리를 사랑하신 것처럼, 통일을 위해서는 끊임없이 사랑의 정신을 발휘해야 합니다. 통일을 위해 일하는 데 어려움은 서로 용서하지 못하는 마음입니다. 시간이 약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남북이 갈라진 지 많은 시간이 흘렀습니다만 여러 가지 아픔들이 아직도 서로 남아 있습니다. 하지만 미래의 한국을 위해서, 서로의 아픔도 용서할 수 있는 용기가 가장 우선적으로 필요합니다. 바오로 사도는 오늘 독서에서 ‘서로 너그럽고 자비롭게 대하고, 하느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여러분을 용서하신 것처럼 여러분도 서로 용서하십시오.’라고 말합니다. 하느님께서 우리 죄를 용서하신 것처럼, 남북도 서로 용서하고 상처를 치유하여 화해의 물꼬를 터야하겠습니다. 이 용서를 위해서는 상대방을 자극하는 어투나 감정을 드러내서는 안 됩니다. 화가 난 상태에서는 그 어떤 화해의 손짓도 무의미하기 때문입니다. 남북의 통일에 대한 문제는 우리 신앙인들의 기도, 용서 그리고 사랑 실천을 통해서 이루어 낼 수 있는 우리 사명입니다.

양해룡 신부
  | 06.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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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8   [전주] 남북 화해, 일치 위한 기도 절실  1009
47   [수도회] 예루살렘을 위하여 평화를 빌어라.  1745
46   [마산] 우리 모두는 하나이다  2636
45   [인천] 민족의 화해와 일치를 위해 기도합시다.  [4] 2541
44   [원주] 굶어 죽어가는 북한 동포를 안타까워하며....  1820
  [서울] 단 두세 사람이라도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  [3] 2090
42   [원주] 먼저 용서 청하는 자세 가져야  1691
41   [기타] 누가 교회인가?  [1] 1614
40   [군종] 하나되게 하소서  [2] 1694
39   [대전] 일치. 용서. 기도  1663
38   [대구] 믿음과 기도가 필요합니다  [2] 1922
37   [수원] 우리의 소원은 통일  [4] 1900
36   [춘천] 주님, 하나 되게 하소서!  [3] 1849
35   [의정부] 얼마나 용서를  [1] 1843
34   [부산] 두사람이 합심하여  1825
33   [안동] 하나되게 하소서  [5] 1946
32   (백)남북통일 기원 미사 독서와 복음  1494
31   티 없이 깨끗하신 성모 성심 기념일  [7] 2398
30   6월 30일 : 성 피에르 투생  1626
29   6월 29일 : 사도 베드로  2190
28   6월 28일 : 이레네오 주교 순교자  [2] 2151
27   6월 27일 : 알렉산드리아의 성 치릴로  1553
26   6월 26일 : 성 안셀모  1444
25   6월 25일 : 베르첼리의 성 윌리엄  1521
24   6월 24일 : 세례자 요한  [1] 2568
23   6월 23일 : 성녀 에텔드레다  1672
22   6월 22일 : 성 토마스 모어  1911
21   6월 21일 : 성 알로이시오 곤자가  [3] 2591
20   6월 20일 : 만투아의 복녀 오산나  1607
19   6월 19일 : 성녀 율리아나 팔코니에리  2218
18   6월 18일 : 쇼나우의 성녀 엘리사벳  1748
17   6월 17일 : 포르투갈의 성녀 데레사  1597
16   6월 16일 : 성녀 루트가르다  1584
15   6월 15일 : 피브락의 성녀 제르마나  1590
14   6월 14일 : 프란치스코 솔라노  1575
13   6월 13일 : 파도바의 성 안토니오  [3] 2638
12   6월 12일 : 사아군의 성 요한  1566
11   6월 11일 : 성 바르나바 사도 기념일  [18] 2912
10   6월 10일 : 복자 요한 도미니치  1509
9   6월 09일 : 시리아의 성 에프렘  1614
1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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