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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 30일 : 성 안드레아
조회수 | 2,652
작성일 | 05.11.30
성 안드레아 (1세기경)

출생순서

대체로 장남이나 장녀는 형제들 사이에서 첫째로 군림하기 때문에 다른 곳에 가서도 우두머리 행세를 하려는 경향이 있다. 반대로 막내는 집안에서 항상 아이 취급을 받기 때문에 남에게 의지하려고 한다. 그런데 중간에 태어난 아이는 위로는 형의 그늘에 가리고, 아래로는 동생에게 양보를 해야 하는 위치에 있기 때문에 자신의 위치를 지키기 위해 남모르는 투쟁을 벌인다. 성 안드레아는 예수님의 열두 제자 중 한 사람이었지만 자기보다 유명한 형인 베드로의 그늘에 가려져 있었다. 베드로와 안드레아는 다른 점이 많았다. 베드로는 예수님이 말씀하시자마자 물에 뛰어들어 갈 만큼 급하고 쉽게 흥분하는 성격이었지만 안드레아는 조용하고 신중한 성격으로 보인다. 복음서에서 안드레아는 형에게 예수님을 소개하고, 보리 빵과 물고기를 가진 소년을 예수님에게 인도했던 사람으로 나온다. 안드레아가 주는 교훈은 간단하다. 집안에서 몇째로 태어났든지, 혹은 뛰어난 다른 형제의 그늘에 가려져 있다고 생각되든지 관계없이 나는 나 자체로 예수님에게서 사랑을 받고 있다는 것이다. 다른 형제에게 열등감을 가져 본 적이 있는가? 나는 존재 자체로 중요한 사람이다.

생활성서 [작은 거인들]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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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이 빨리 지나갑니다. 글쎄 벌써 11월의 마지막 날입니다. 10월의 마지막 날에 어떤 분의 ‘잊혀진 계절’이라는 노래를 부르면서 올 해도 두 달 밖에 남지 않았다고 하면서 아쉬워했었는데, 이제는 정말 마지막 한 장의 달력밖에 남지 않았네요. 더군다나 어제는 이곳 강화도에 첫눈이 왔답니다. 떨어지는 첫눈을 바라보면서 ‘이제 본격적인 겨울인가?’라는 생각과 함께, ‘2005년도 이렇게 보내는구나.’ 라는 아쉬운 생각을 갖게 됩니다.

하지만 이렇게 달력만 쳐다보면 매번 후회를 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드네요. 왜냐하면 우리 인간들은 만족을 잘 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늘 부족하고 아쉬움을 갖는 것이 아닐까요? 그러다보니 감사의 마음을 전혀 갖지 못하는 것이지요. 따라서 비록 아쉬움의 순간이 드는 12월을 내일이면 맞이하지만, 그래도 새로운 한 해를 맞이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지나야 하는 12월인 만큼 오히려 감사의 마음을 갖도록 노력했으면 합니다.

어제는 하루 종일 바깥에 있었답니다. 어제 새벽 묵상 글을 통해서도 말씀드렸듯이 얼마 전 심었던 나무들이 모두 뽑혀서 그것들을 세워서 다시 심는데 시간을 보내야 했거든요. 물론 동네의 조경하시는 분을 불러서 했지요. 나무가 워낙 커서 저 혼자서는 도저히 움직일 수도 없었으니까요. 그런데 조경하시는 전문가를 불렀지만, 이분들에게 이 모든 것을 그냥 놔두고서 저 혼자 안에 들어갈 수는 없을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저는 성지에 옮겨 심어야 할 나무들을 새롭게 심고, 자른 나무들을 구석에 모아서 정리하는 일들을 하고 있었지요. 이렇게 왔다갔다 하면서 일하시는 분들과 참으로 많은 이야기를 할 수 있었습니다. 특히 제가 잘 모르는 부분까지도 친절히 가르쳐 주셔서 많이 배울 수가 있었습니다.

만약 제가 고용주의 입장에서만 서서 “알아서 일하세요.”하고서 저는 따뜻한 방구석에만 있었다면 어땠을까요? 아마 이분들에게 많은 것을 배울 수 없는 것은 물론, 제가 보고 있지 않으니까 이분들도 대충 대충 할 수도 있지 않았을까요? 하지만 비록 많은 부분에서 함께 하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밖에서 함께 했기에, 저 역시 많은 것을 얻을 수가 있었던 것은 물론 깔끔하게 정리된 나무들을 바라볼 수 있게 되었네요.

그래요. 어쩌면 조금만 더 정성을 쏟으면, 조금만 함께 하려는 노력만 한다면, 이렇게 많은 것을 얻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저 사람과 나는 다르다’라는 완고한 마음 때문에, 아무 것도 얻지 못하는 것은 아니었을까요?

오늘 복음을 보면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부르시는 이야기를 전해들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부르심을 받은 장소는 어디였나요? 바로 고기잡이를 하고 있었던 갈릴래야 호수였습니다. 즉, 그들의 일터였던 것입니다. 밤새 고기를 잡고 이제 뒷정리를 하고 있을 때, 예수님께서 직접 오셔서 제자로 부르셨던 것입니다.

스승님이 직접 찾아와서 제자를 부른다는 것. 사실 어떤 스승도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스승이 아쉬운 것은 없으니까요. 그래서 제자들이 좋은 스승을 쫓아가는 것이지요. 그런데도 불구하고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찾아가는 방법을 선택하십니다. 그래서 제자들도 망설임 없이 곧바로 그 부르심을 받아들였던 것이 아닐까요?

지금 나는 사람들을 대할 때 어떠한가요? 예수님도 직접 사람들 곁으로 가는데, 예수님과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형편없는 우리들은 사람들 위에 서려는 이기적인 행동만을 간직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11월의 마지막 날 깊은 반성을 하게 됩니다.

인천교구 조명연 신부
  | 1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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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릴래아 호숫가에서 고기를 잡던 사람들`/`바람결 따라 들려오는 주의 말씀 들었네`/`나를 따르라 나를 따르라 그 그물을 버리고’ 청소년 성가에 나오는 이 노래를 부르노라면 저절로 나도 그처럼 부르고 계시는 듯한 착각을 할 때가 있다. 바람을 눈으로는 볼 수 없어도 느낄 수는 있는 것처럼 하느님을 알게 되고 확신을 갖게 되는 것은 마음의 체험이다. 왜 우리를 부르실까? 선교의 열정과 사명감을 불태우라는 주님의 초대이다. 선교 이전에 먼저 선교의 내용인 주님에 대한 앎을 먼저 제시한다. “마음으로 믿어서 하느님과 올바른 관계에 놓이게 되고 입으로 고백하여 구원을 얻게 됩니다.” 마음으로 믿는다는 것은 생각으로 이론으로 논리로 따져서 믿는 것을 말하지 않는다. 이것은 하느님과의 내밀한 만남으로 개개인이 체험하는 하느님 체험의 느낌을 의미한다. 이 느낌은 개인에 따라 강렬할 수도 있고 미미할 수도 있다.

그러나 내가 체험한 예수님은 내 경험 안에 생생히 살아 계시기에 예수님을 모르는 형제들에게 그분이 누구신지 그리고 그분이 나에게 베푼 은총이 무엇인지 설명할 수 있다. “들어보지 못한 분을 어떻게 믿겠습니까? 말씀을 전해주는 사람이 없으면 어떻게 들을 수 있겠습니까? 기쁜 소식을 전하는 이들의 발이 얼마나 아름다운가!”라는 말씀을 입으로 고백하며 삶으로 실천하게 되는 것이다. 여기서 바오로 사도는 신앙의 형성 과정을 설명하고 있다. 이 중 제일 우선하는 것은 예수님 체험이다. 어떻게 체험할 수 있는가? 우리는 지금까지 삶 안에서 예수님을 무수히 만났다. 다만 내가 아직 그분을 알아보지 못했고 느끼지 않을 뿐이다. 오늘부터 바람결 따라 조용히 부르시는 그분의 소리를 듣기 위해 하루 마음을 모아 조용히 기도하는 시간을 갖자. 기도 안에서 주님의 활동을 체험하게 될 것이다.

오 마리아 수녀(성심수녀회)
  | 1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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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부르심의 여정

예수님은 제자들을 부르시고 만나시기 위하여 길을 걸어다니시고, 말씀을 가르치기 위해서 머무르십니다. 그를 따르는 제자들도 같은 여정을 하기 위해서 부름 받은 사람들입니다. 이 여정은 자신을 위한 여정이 아니라 예수께서 하신 것처럼 어둠 속에 있는 다른 사람들을 빛을 향해 나아가도록 인도하는 여정입니다. 제자들이 이 여정을 걸어 가는 이유는 주님께 대한 사랑 때문이었습니다. 그들이 부르심을 받은 것이 사랑받았기 때문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고 이 사랑 때문에 온전히 자신을 내놓게 되는 것입니다. 부르심이라는 것은 단 한 번에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매일의 삶 속에서 순간순간 응답할 때 완성되는 것입니다. 선배 신부님들은 가끔 ‘성소는 관 뚜껑을 닫을 때 완성되는 거야’라고 말합니다. 수도자로서 매일 합당하고 충실한 선택을 해야만 완성된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인간적인 나약함에 넘어지는 순간들이 많이 있다는 것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런 약점은 저를 겸손하게 하고 하느님을 만나는 장소가 되게 합니다. 오늘도 제가 서원한 순명, 청빈, 정결의 삶을 보다 충실히 살아갈 수 있는 은총과 힘을 주님께 청해봅니다.

백광현 신부
  | 1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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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성 안드레아 사도 축일입니다. 예수님의 열 두 제자를 우리는 사도라고 부르지요. 안드레아도 여러 명이 있는데 사도 안드레아가 있고, 크레타의 순교자 안드레아가 있으며, 김대건 안드레아도 있습니다.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은 원래 본명이 안드레아였지만 성인(聖人)이 되신 분이기 때문에 김대건 안드레아로 호칭됩니다. 안드레아라는 또 다른 이름이 명명된 것이지요.

오늘 축일을 지내는 안드레아는 예수님의 열 두 사도 중의 한 사람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를 뽑으셨을 때 제일 먼저 따라나선 사람이지요. 안드레아와 시몬 베드로는 형제지간입니다. 안드레아는 예수님을 만나 뵙고 제일 먼저 형을 찾아가 메시아를 만나 뵌 사건을 이야기하고 찾아가게 합니다.

형이 워낙 뛰어나서 그 그늘에 가리웠던 사람이었지만 안드레아는 예수님을 잘 보필했던 사람입니다. 특히 예수님께 사람들을 잘 소개했지요. 자신의 형 시몬을 소개했을 뿐만 아니라 다른 제자들도 소개하였고 그리스 사람들이 찾아왔을 때 그들을 예수님께 소개하기도 하였습니다.

“축제 때에 예배를 드리러 올라온 이들 가운데 그리스 사람도 몇 명 있었다. 그들은 갈릴래아의 벳사이다 출신 필립보에게 다가가, ꡒ선생님, 예수님을 뵙고 싶습니다.ꡓ 하고 청하였다. 필립보가 안드레아에게 가서 말하고 안드레아와 필립보가 예수님께 가서 말씀”(요한 12,20-22)드렸습니다.

또 오천 명을 먹이신 빵의 기적을 일으키실 때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고 있던 소년을 예수님께 데리고 갔던 사람이 안드레아 사도였습니다.

“그때에 제자들 가운데 하나인 시몬 베드로의 동생 안드레아가 예수님께 말하였다. ꡒ여기 보리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진 아이가 있습니다만, 저렇게 많은 사람에게 이것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ꡓ”(요한 6,8-9)

안드레아 사도는 예수님을 따르기 전에는 세례자 요한의 제자였습니다. 다른 복음서와 비교하여 요한 복음 1장에는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부르시는 장면이 무척 자세하게 나와 있는데 안드레아 사도에 관한 이야기도 잘 나와 있습니다. 세례자 요한은 예수님께서 자기한테 오시는 것을 보고 이렇게 증언합니다.

“요한은 또 증언하였다. ꡒ나는 성령께서 비둘기처럼 하늘에서 내려오시어 저분 위에 머무르시는 것을 보았다. 나도 저분을 알지 못하였다. 그러나 물로 세례를 주라고 나를 보내신 그분께서 나에게 일러 주셨다. ꡐ성령이 내려와 어떤 분 위에 머무르는 것을 네가 볼 터인데, 바로 그분이 성령으로 세례를 주시는 분이다.ꡑ 과연 나는 보았다. 그래서 저분이 하느님의 아드님이시라고 내가 증언하였다."(요한 1,32-34)
다음 날 요한은 자기 제자 두 사람과 함께 다시 그 곳에 서 있다가 마침 예수님께서 걸어가시는 것을 보고 이렇게 말합니다.

“보라, 하느님의 어린양이시다."(요한 1,36)

요한의 이 말을 듣고 예수님을 따라 간 두 사람 있었는데 그 중의 하나가 안드레아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뒤돌아 서서 그들이 따라오는 것을 보시고 물으십니다.

“무엇을 찾느냐?"(요한1,38)

"라삐, 어디에 묵고 계십니까?"(요한1,38)

그들의 대답에 예수님께서 와서 보라고 하시고, 안드레아는 예수님과 함께 하루를 머물고 나서 과연 그 분이 메시아임을 확신합니다. 그는 곧장 형을 찾아가 말합니다.

“우리는 메시아를 만났소.”(요한 1,41)

그리고 형 시몬을 예수님께 데리고 가자 예수님께서는 그를 눈여겨보시며 말씀하십니다.

“너는 요한의 아들 시몬이구나. 앞으로 너는 케파라고 불릴 것이다."(요한1,42)
세례자 요한의 제자였던 안드레아는 메시아를 찾아 헤매다가 요한이 예수님을 가리키며 증언하는 소리를 듣고 예수님을 따라가 확신을 하게 됩니다. 그는 바로 형을 예수님께 데리고 갔고 예수님께서는 한 눈에 그들을 알아보시고 제자로 맞아들이셨던 것입니다.

이들 형제는 누구보다도 메시아에 대한 갈망이 컸던 사람들이었고 메시아에 대한 확신이 서자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나선 용기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자 그들은 곧바로 그물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다.”(마르1,18)

어부에게 있어서 그물은 생활의 모든 것입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삶을 지탱했던 것을 모두 버리고 예수님을 따라나섰던 것입니다. 이렇게 시몬과 안드레아는 자기 직업을 버렸고, 야고보와 요한은 가정을 두고 떠났습니다.

“예수님께서 조금 더 가시다가, 배에서 그물을 손질하는 제베대오의 아들 야고보와 그의 동생 요한을 보시고, 곧바로 그들을 부르셨다. 그러자 그들은 아버지 제베대오를 삯꾼들과 함께 배에 버려두고 그분을 따라나섰다.”(마르1,19-20)

그렇습니다. 안락했던 자리를 떠난다는 것은 참으로 큰 어려움입니다. 불편함이요 두려움일 수 있지요. 그러나 주님께 나아가기 위해서는 떠나야 한다는 것입니다. 떠나지 않으면 그 자리에 머무를 수밖에 없습니다. 창세기 12장에 보면 야훼께서 아브라함을 부르시는 장면이 있습니다.

“네 고향과 친족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너에게 보여 줄 땅으로 가거라.”(창세12,1)

아브라함은 하느님의 말씀 한 마디에 귀를 기울이고 아무 계산 없이 위험을 무릅쓰고 길을 떠납니다. 또 이집트에서 노예살이를 하던 이스라엘 백성들 역시 모세와 아론을 통해서 들려주신 하느님의 말씀을 믿고 어디인지도 모르는 가나안 땅을 향해 길을 나섭니다.

“그러자 백성이 믿었다. 그들은 주님께서 이스라엘 자손들을 찾아오셔서 그들의 고난을 살펴보셨다는 말을 듣고, 무릎을 꿇어 경배하였다.”(탈출4,31)

하느님을 믿는다는 것은 나의 안락함을 그대로 둔 채 또 다른 축복을 구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익숙해진 자리를 떠나서 주님께서 일러주신 새로운 자리로 넘어가는 것, 이것이 바로 신앙입니다. 과거에 집착하는 사람은 떠나기가 어렵지요. 하느님을 만나기가 쉽지 않습니다. 열 두 제자들은 그물도, 배도, 가족도 버리고 떠나서 마침내 예수님의 사도들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성서를 보면 따르지 못한 사람도 나옵니다. 마태오 복음 19장에 나오는 부자 청년은 영원한 생명을 얻겠다고 예수님을 찾아왔지만 재산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하여 떠나지 못하고 그 자리에서 주저앉아버리고 말았습니다.

우리의 신앙은 매번 떠날 것을 촉구합니다. 어느 날 주님께서 원하시면 재물과 직책, 애지중지했던 모든 것에서 떠날 수 있어야 합니다. 물론 그것은 어려운 일입니다. 불안하고 두려운 일이지요. 그러나 오직 하느님만을 믿으며 떠나는 것은 내 인생의 또 다른 성숙을 불러오고 더불어 풍요로운 은총을 약속합니다. 우리 주위에는 자기 자신이나 자기 것에 집착하여 끝내 떠나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들에게는 바리사이파 사람들 같은 아집이 형성되고 자신만의 신관이 자리잡습니다. 떠나지 못하는 그들은 자신을 방어하며 스스로의 우상을 만들어 가기가 쉬운 것입니다.

오늘 성 안드레아 사도 축일을 지내며 주님의 부르심에 모든 것을 버리고 따라나섰던 사도의 모습을 되새겨 봅니다. 안드레아 사도는 자기 혼자만이 메시아를 따라나섰던 것이 아니라 형제와 친구들, 심지어 이방족인 그리스 사람들에게까지 예수님을 소개하는 열정을 보여주었습니다. 하느님에 대한 체험은 나 혼자 쌓아두는 것이 아니라 이웃과 함께 나누는 것입니다. 가장 큰 이웃 사랑이 바로 복음선포라는 오늘 독서 말씀이 바로 그 의미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오고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이루어집니다."(로마10,17)

우리는 내가 알고 있는 하느님, 내가 주님으로 고백하는 그리스도를 안드레아 사도처럼 이웃에 전하는 예수님의 참 제자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그것은 신자인 우리가 반드시 해야할 일입니다.

교회의 전승에 따르면 안드레아 사도는 성령 강림 후 열심히 복음을 전하다가 X형 십자가에 못 박혀 순교를 하였다고 합니다. 베드로 사도의 그늘에 가려서 잘 드러나지는 않았지만 그 누구보다도 확신에 차서 메시아를 알아보고 주저 없이 따랐던 안드레아 사도는 여러 사람들을 예수님께 인도하여 하느님 나라의 건설에 동참시킨 열정에 가득 찬 그리스도인이었습니다.

안드레아 사도처럼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께로 떠날 수 있는 결단을 생각해보는 대림 기간입니다. 안드레아 성인의 열정과 믿음을 주님께 청하며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맡기신 복음을 전하라는 사명에 충실할 것을 다짐해봅니다.

서울대교구 이기양 신부
  | 1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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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한 어부

고해소에 있다 보면 오랜 기간 냉담을 하다가 다시 신앙생활을 시작하려는 분들을 만나게 됩니다. 이런 경우 사제들은 흔히 월척을 낚았다고 이야기합니다. 말 그대로 큰 물고기를 낚은 것입니다. 왜냐하면 오늘 복음에 나오는 예수님의 말씀처럼 사제들은 ‘사람 낚는 어부’로 부르심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오랫동안 하느님을 떠나 있던 분들이 고해성사를 통해 다시 신앙을 회복하고 하느님의 자녀로 살아가려는 결심을 하는 것을 보면 그 어떤 큰 물고기를 낚을 때보다 깊은 손맛을 느끼게 됩니다.
사실 예수님이야말로 가장 유능한 ‘사람 낚는 어부’라고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예수께서 유능한 어부라는 것은 그분의 낚시 솜씨가 다른 이들이 감히 흉내낼 수 없는 탁월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무엇이 그토록 탁월할까요? 그것은 예수께서 사람을 낚고자 하는 이유가 사람을 살리기 위한 것이며, 그 수단으로 생명까지 아끼지 않고 내어 주시는 철저한 사랑을 사용하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야말로 일생을 세상 모든 사람을 낚아 구원하시기 위해 어부로 사신 분이십니다. 예수님은 당신의 이름(하느님께서 구원하신다)처럼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이 세상에 오신 분입니다. 그것이 그분의 유일한 사명이요 관심이십니다.
예수께서는 당신을 따르려는 우리한테도 당신처럼 살 것을 요구하십니다. 곧 우리 삶의 일차적인 목표도 나와 이웃을 구원(살리는 것)하는 것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께 낚인 우리는 참으로 행복한 이들입니다. 그 행복을 다른 이들과 나누기 위해 우리도 예수님의 뒤를 이어 훌륭한 어부가 되어봅시다.

의정부교구 이재화 신부
  | 1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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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무엇이기에

위령 성월 동안 은혜가 크셨겠지요? 죽은 자와 산 자의 하느님이신 그분의 사랑이
온누리에서 찬미 받으시길 기도드립니다. 오늘 복음에서는 베드로와 안드레아가 모든 것을
버리고 주님의 부르심에 따르는 장면이 소개됩니다. 제 소양이 크고
대단한 사람이 되지 못하는 탓인지 모르지만 저는 사실 베드로보다 안드레아의 모습에
마음이 더 끌리는 편입니다. 그분처럼 눈에 띄지도 않고 드러나지도
않지만,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진 아이를 예수님께 소개해드리고
(요한 6,9 참조) 예수님을 뵙고 싶어하는 그리스인을 데려다주는(요한 12,22 참조) 몫을
살고 싶은 까닭입니다. 그래서 끝내는 내가 예수님께 소개해준 그 사람이
베드로처럼 하느님 교회의 반석이 되는 기쁨을 안드레아와 함께 누릴 수 있게
되기를 소망하기도 합니다. 우리는 하느님께 중재해드릴 힘을 가진
가톨릭 신자입니다. 죽은 이를 위해서 기도할 뿐만 아니라 참 하느님의 말씀으로 목마른
세상에게 우리 예수님을 소개시키는 일도 우리의 몫입니다. 살았으나
죽어 있는(묵시 3,2 참조) 그 영혼들을 위해서 기도와 사랑을 바치고 아직
모자라는 헌신과 인내를 청하도록 합시다. 세상에는 많은 종교가 있지만
죽은 영혼을 위해서 기도하는 일이 의무로 주어진 종교는 우리 가톨릭뿐입니다
(타 종교의 천도제와 구별하시기 바랍니다). 이렇게 거룩한 몫을 부여받은 우리는 모두 세상의 대표 ‘레위인’입니다(레위 4장 참조).

부산교구 장재봉 신부
  | 1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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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달, 어떤 자매님으로부터 “신부님, 감기 예방 접종을 맞으셔야지요.”라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저는 이 말에 “안 됩니다. 저는 감기 예방 접종만 맞으면 꼭 심하게 감기를 앓아요. 더군다나 저는 올해 감기 걸린 적이 없습니다. 제가 워낙 튼튼한 체질이잖아요. 자매님의 성의는 감사하지만, 굳이 맞지 않아도 될 것 같습니다.”라고 말했지요.

그런데 저 지금 심한 독감으로 시달리고 있습니다. 목이 아파서 말도 제대로 못하겠고, 두통에 몸살 기운까지 겹쳐서 온 몸이 쑤셔 옵니다. 오늘부터 꾸르실료 들어가서 강행군을 해야 하는데 어떻게 보내야 할 지 앞이 캄캄합니다. 그리고 들은 생각……. “그냥 감기 예방 주사 맞을 걸......”

하지만 버스는 이미 떠났지요. 후회한들 감기 걸리지 않은 상태로 다시 되돌아 갈 수는 없습니다. 바로 ‘나는 감기 걸리지 않을 것이다.’라는 교만이 지금의 이런 고생을 하게끔 만든 것이지요.

사실 고집을 부려서 잘 된 적이 그렇게 많은 것 같지 않습니다. 오히려 상대방의 의견을 수렴해서 깊은 생각을 한 뒤 했던 일들이 훨씬 좋은 결과가 있었음을 깨닫게 됩니다. 그런데도 우리들은 다른 사람들의 말을 듣지 않을 때가 참으로 많습니다. 그것은 ‘내가 저 사람보다는 낫다.’는 교만이 활동하기 때문이지요.

오늘 복음에서는 성 안드레아 사도 축일을 맞이하여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부르시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 부르심의 장면을 떠올리면서 엉뚱한 상상을 해봅니다. 만약 ‘제자가 된다고 돈과 명예가 생기는 것도 아닌데, 예수를 쫓아갈 필요가 있을까?’라는 생각 때문에 예수님의 제자가 되는 것을 거절했다면 어떠했을까요? 오늘의 기쁜 축일도 없었을 테지요. 하지만 예수님의 제자들은 달랐습니다. 자신 안에 가지고 있는 모든 교만들을 내려놓았기 때문에, 일하다말고 그물을 놔두고 그리고 가족과 친척들을 뒤로 한 채 곧바로 예수님을 따를 수 있었습니다.

지금 내 안에 혹시 다른 사람들 위에 올라서려는 교만이 있는지를 반성해 봅니다. 특히 전지전능하신 하느님조차도 내 밑에 두려는 교만을 가지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요? 그래서 모든 이의 하느님이 아니라 나만 잘 되게 하는 나만의 하느님을 외치고 기도했던 것은 아니었을까요?

이제 교만이라는 것은 내려놓아야 합니다. 그래야 고생하지 않습니다.

인천교구 조명연 신부
  | 1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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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 한 사람을 낚는 낚시꾼

11월의 마지막 날 교회는 안드레아 사도의 축일을 기념한다. 안드레아는 시몬 베드로의 동생으로서 형과 같은 어부였으나, 갈릴래아 호숫가를 거니시던 예수로부터 형과 함께 제자로 불림을 받았다. 안드레아는 베싸이다 출신(요한 1,14), 아니면 가파르나움 출신(마르 1,29)이다. 요한복음에 따르면 안드레아는 처음에 세례자 요한의 추종자였다가 예수의 제자가 된 그 첫 번째 사람이다.(요한 1,35-40) 그리고는 자기 형을 예수께 인도하였다. 신약성서를 살펴보면 안드레아는 복음서에 16번, 사도행전에 1번 등장하는데, 예수님의 최후의 만찬과 승천, 성령강림 사건에 함께 있었던 것은 확실하다.

성령강림 이후 안드레아는 흑해 연안의 소아시아 전역과 오늘날 불가리아와 그리스 지방을 두루 다니며 복음을 전하였다. 많은 병자들을 고쳐주고 죽은 이도 소생시켰다고 전해진다. 성인의 마지막 종착역은 그리스 아카이아 지방의 파트라스, 여기서 성인은 에게아스 총독의 부인 막씨밀리아를 신앙으로 인도하고 영적 생활을 하도록 권고한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총독은 안드레아 성인을 불러 그리스도교에 대한 납득할만한 이해를 요구한다. 성인의 충분한 설명에도 불구하고 총독은 경비병들에게 지시하여 성인을 구금하고 고문을 가한다. 결국 성인은 ‘X’자 모양의 십자가에 매달려 서서히 죽어간다. 그래서 우리는 이 ‘X’ 모양의 십자가를 ‘안드레아 십자가’라 부른다. 성인은 죽어가면서도 백성들을 향하여 설교를 하였고, 하늘의 광채가 그를 비추었다. 이에 완전히 정신이 나간 에게아스 총독은 성인을 창으로 찌르며 죽도록 매질하게 하였다. 이렇게 성인은 60년경에 순교한 것으로 보인다. 막씨밀리아는 성인의 시체를 거두어 경건하게 장례를 치렀다. 성인의 유해 대부분은 356년 콘스탄티노플의 사도성당에 옮겨졌고, 1208년에는 나폴리 근처 아말피의 성 안드레아 대성당으로 로 옮겨졌다. 유해의 다른 부분들은 로마와 파트로스로 옮겨졌다고 하나 그 진실성은 의심스럽다. 안드레아 사도는 러시아와 스코틀랜드 등 여러 나라의 수호성인으로 공경 받고 있으며, 부르군트 왕가는 안드레아 십자가를 가문의 문장을 삼기도 했다. 부르군트 왕가는 12세기경 ‘안드레아의 십자가’를 발견하여 마르세이유에 보관하였으나 14세기에는 다시 브뤼셀로 옮겨 보관하였다고 한다.

성서에서 안드레아 성인은 형 베드로와는 전혀 다른 성격의 소유자로 나타난다. 형 베드로가 과격하고 덤벙거리는 유형이라면 동생 안드레아는 신중하고 세심한 성격을 가진 자였다. 복음서에서는 안드레아는 주의력과 끈기가 대단한 사람으로 등장한다. 안드레아는 세례자 요한이 예수를 가리켜 “하느님의 어린양이 저기 가신다.”(요한 1,36)는 말을 듣고 예수께서 묵고 계신 곳까지 따라가 그분의 제자가 된다. 그리고는 형 시몬을 예수께 인도하였다.(요한 1,37-42) 며칠씩 따라 다니던 오천 명의 군중을 허기진 채로 돌려보내시지 않으려는 예수님의 의중을 헤아려 보리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진 어린아이를 발견하고는 중과부적(衆寡不敵)의 안타까운 마음으로 그것을 예수님께 전해 드림으로써 빵의 기적을 보기도 했다.(요한 6,8-9) 예수님이 마지막 과월절 명절 때에 예배를 드리러 온 그리스 사람들이 예수를 뵙게 해 달라는 간청을 듣고 필립보와 함께 예수께 전해 올리기도 한다.(요한 12,20-22) 또 안드레아는 베드로, 야고보, 요한제자와 함께 올리브산에서 예루살렘 성전을 바라보시던 예수께로 다가가 재난의 시기와 징조에 대하여 질문을 던지고는, 어떤 일이 있어나도 정신을 차리고, 박해자들 앞에서 주님을 증언해야 하며, 모든 민족에게 복음이 전파되어야 한다는 말씀을 마음에 새기기도 했다.(마르 13,3-13)

바로 이런 세심함과 끈기와 다짐이 오늘 성 안드레아 사도를 있게 한 것이다. 위에 언급한 안드레아 성인의 복음선포활동에서 보았듯이, 그는 총독 에게아스의 부인 막씨밀리아를 그리스도의 신앙으로 인도한 대가로 목숨을 바쳐야 했다. 그가 단 한 사람을 위해서라도 목숨을 내어놓을 수 있었던 것은 자신의 세심하고 주의 깊은 성격 탓도 있겠지만, 모든 것을 스승인 예수님으로부터 배운 것이다. 그의 스승이 그러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첫 번째 제자들의 소명사화를 전하는 오늘 복음이 더 의미 있게 들리는 것이다. 곰곰이 생각해 보면 제자들의 소명사건이 예수님 공생활의 시작과 갈릴래아 출현의 첫 시점에 있었던 사건이 아닐 수도 있다. 그렇지만 마태오는 이 사건을 예수님 공생활의 첫 부분에 배치해 놓았다. 왜일까? 그것은 제자들이 스승과 함께 있으면서 스승으로부터 모든 것을 배우고 보고 들어야 했기 때문이다. 바로 그것을 안드레아 사도는 자신의 목숨을 바쳐 해 낸 것이다. 자기 형 베드로가 그물을 쳐서 많은 사람들을 낚는 어부요 사도였다면(사도 2,14-42), 동생 안드레아는 낚시를 던져 한 사람을 낚는 세심하고 끈기 있는 낚시꾼이며 사도였다. 모든 민족에게 복음이 전파되어야 한다는 예수님의 말씀이 단 한 사람을 인도하는 데서 시작됨을 깨닫는 오늘이다

부산교구 박상대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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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의 모든 것을 버리고 주님을 따른 안드레아

시몬 베드로의 동생인 사도 안드레아는 갈릴래아 지방의 벳사이다 출신으로(요한 1,44) 갈릴래아 호수에서 고기를 잡던 어부였다. ‘씩씩한, 남자다운’이란 뜻을 지닌 그의 이름처럼 그는 남자답고 용기 있는 사람이었다. 그는 구약에 약속된 메시아가 올 것이라고 굳게 믿고 있었으며, 그 메시아가 오면 이스라엘이 침략자들의 압제에서 해방될 것이라는 믿음 속에 메시아를 손꼽아 기다리고 있었다. 그래서 세례자 요한이 물로 세례를 베풀며 회개를 선포하였을 때, 혹시 세례자 요한이 구약에 약속된 메시아가 아닌가 하고 생각하여 세례자 요한을 찾아가 그의 가르침을 듣고 따랐던 것이다. 그런데 세례자 요한이 예수님을 가리켜 “하느님의 아드님이시라고 증언하며”(요한 1,34) “하느님의 어린 양이 저기 가신다.”(요한 1,36) 하고 그에게 말하자, 그는 만사를 제쳐놓고 곧장 예수님을 따라가, 예수님과 함께 머물렀다. 그럼으로써 예수님이 곧 구약에 약속된 메시아이심을 깨달았다. 그는 예수님 곁을 물러나자마자 형 베드로를 찾아가 메시아이신 주님을 만났다고 전하며, 베드로를 주님께 인도했다. 이리하여 그들은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가 되었다. 그러나 그들이 본격적으로 예수님께 온전히 헌신한 제자가 된 것은 예수님께서 전도생활을 하신 이후였다. 예수님께서는 복음을 전파하시는 전도생활을 하시면서 갈릴리 호수에서 그물을 던지던 그들을 제자로 부르셨고, 그들은 곧장 주님의 제자가 되었다. 이후부터 그들은 주님과 동고동락하는 주님의 제자가 되었다.

전해져 내려오는 이야기에 의하면 그는 예수님께서 부활 승천하신 후 스키티아와 그리스 지방에 복음을 전하였고, 그리스 아카이아 지방의 파트라이에서 X자 형태의 십자가에 매달려 순교했다고 전해진다. 안드레아 사도는 러시아에도 복음을 전파했다고 전해져 내려오며, 그리하여 러시아의 수호성인이 되었다. 또한 스코틀랜드에 전해지는 이야기에 의하면 사도의 유해 가운데 일부가 4세기경에 스코틀랜드로 옮겨졌다고 한다. 그런데 사도의 유해를 관리하던 성 레굴루스(Regulus)가 천사의 인도를 받아 성 안드레아가 부르는 곳으로 갔고, 그 곳에서 30여 년 동안 복음을 전하고 성 안드레아 수도원을 설립하였다고 한다. 그래서 성 안드레아는 스코틀랜드의 수호성인이 되었으며, 스코틀랜드의 국기에 새겨진 X자는 성 안드레아 사도를 상징한다고 한다.

성 예로니모에 따르면 성 안드레아 사도의 유해는 원래 콘스탄티노플에 있었는데, 357년 콘스탄티누스 2세 황제의 지시에 따라 그리스의 파트라이로 옮겨졌다고 한다. 그 후 1208년에 이탈리아 아말피의 성 안드레아 성당으로 옮겨졌으며, 15세기에 그의 두개골이 로마 베드로 대성전으로 옮겨졌는데, 1964년 9월 교황 바오로 6세가 그리스 정교회와 화해하는 표시로 그의 유해를 다시 파트라이로 보내어 그곳에 보관하고 있다.

성 안드레아 사도는 구약의 약속이 꼭 이루어지리라고 믿는 믿음의 사람이었다. 그는 메시아를 기다리는 믿음으로 세례자 요한을 찾아가 그의 가르침을 들었다. 마침내 메시아이신 주님을 만나 주님의 제자가 되어 주님과 함께 살았다. 주님의 부르심을 듣자마자 과감하게 자신의 모든 것을 버리고 온전히 주님을 따랐다. 그는 주님을 위해 자신의 목숨까지 바치며 일생을 주님께 봉헌했다.

오늘 성 안드레아 사도 축일을 보내면서 우리도 성인처럼 하느님의 약속을 굳게 믿는 믿음의 신앙인이 되자. 주님을 위하여 자신의 모든 것을 바칠 수 있는 신앙인이 되자.

전주교구 경규봉 신부
  | 1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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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우리는 성 안드레아 사도의 축일을 기념하고 있습니다.
안드레아 사도는 시몬 베드로의 동생으로 늘 베드로 사도와 함께 등장하는 인물입니다.
오늘 복음에는 나오지 않지만 요한 복음에 따르면 원래 안드레아 사도는 세례자 요한의 제자였고,
그래서 세례자 요한이 “보라, 하느님의 어린양이시다”라고 하는 말을 듣고
예수님을 따라가 하루를 함께 묵은 인물입니다.
안드레아 사도는 그래서 예수님께 시몬 베드로를 소개한 인물로 등장합니다.
오늘 복음에서는 예수님께서 그물을 던지고 있던 베드로와 안드레아
그리고 그물을 손질하고 있던 야고보와 그의 동생 요한을 부르시는 장면이 등장합니다.
고기를 잡고, 그물을 손질하던 그들이 예수님의 부르심에 즉각 응답하여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라가는 장면은 언제나 부르심과 응답의 참 좋은 본보기로 등장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여기서 예수님께서 이렇게 첫 제자들을 부르시기 전에 행하신 행적을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 행적을 찾아 살펴볼 때 우리는 부르심과
그 응답에 대한 진정한 의미를 발견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때가 온 것을 아시고, 세례자 요한을 찾아가 세례를 받으십니다.
그리고는 광야에서 인간이 받을 수 있는 온갖 유혹을 광야에서 받으시고,
갈릴래아로 가셔서 이렇게 선포하십니다.
“회개하여라. 하늘 나라가 가까이 왔다.”
예수님께서는 인간이 하느님을 저버리는 모든 그 유혹들을 몸소 경험하시면서
모든 인간이 하느님의 말씀으로 그 모든 유혹들을 물리치고
하느님께로 다시 돌아갈 수 있음을 몸소 보여주십니다.
그리고 우리들에게 이렇게 외치십니다. “회개하여라.”

그 다음에 하신 일이 바로 당신의 제자들을 부르신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여기서 조금 이상한 부분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이 부르심을 받은 제자들이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그 “회개”라는 것을 하고 예수님을 따랐는지,
아니면 그냥 예수님이 말씀하시니까 따라 갔는지 그 어떤 언급도 없다는 사실입니다.
물론 모든 것을 버렸다는 것에서 회개의 조건이 갖추어지기는 했습니다만,
그것이 그들 마음 속에 진정으로 우러나온 회개인지 아닌지에 대한
어떤 언급도 없다는 사실이 우리를 이런 의문에 빠지게 만듭니다.
더욱이 예수님의 제자로서 살아가던 그 모든 모습들 속에서 지금 우리가 생각하고 있는
그 회개의 삶과는 거리가 먼 제자들의 여러 가지 실수들과 권력을 탐하는 모습들에서
우리는 이런 의문에 더욱 몰입하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렇게 생각할 수 있습니다.
바로 그들이 비록 하느님 나라의 시작에 있긴 했지만 아직 속죄에 이르지는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의 삶은 변화되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것이 우리들에게 말하고자 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로 부르심에 대한 응답이라는 것이 단지 마음과 행동의 변화로만
이루어지지는 않는다는 것을 우리들에게 보여주는 것입니다.
새로운 삶의 시작, 즉 하느님 나라의 시작이 완벽한 마음의 회심과
완전한 생활의 변화를 전제하고 있지 않다는 사실을 우리는 오늘 이 복음에서 발견하게 됩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이 새로운 삶의 시작일까요? 무엇으로 우리는 하느님 나라가 시작되었음을 알 수 있을까요?
그것을 알려 주는 것이 바로 오늘 기념하고 있는 사도들의 모습입니다.
진정으로 마음을 돌리지는 못했지만, 생활적 실천적으로도 아직 하느님의 사람에 도달하지는 못했지만,
모든 것을 놓아두고 예수님을 따르고자 했던 그 따름이 바로 중요하다는 것을 오늘 복음은 말하고 있습니다.
그들에게 있어 회개의 시작은 바로 예수님 곁에서 예수님의 생활에 참여함으로써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오늘 복음은 전해주고 있습니다.
이러한 모습은 요한 복음에서 예수님을 따라 하루를 함께 묶었던 안드레아가
베드로를 예수님께로 인도하던 그 모습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모든 회개의 시작과 하느님 나라의 시작은 내가 회개를 이루고 내가 이루어나가는 것이 아니라,
바로 예수님과 함께함으로써 이루어진다는 것을 오늘 복음은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들은 때로 하느님을 믿고 하느님의 뜻대로 살아간다고 하지만,
많은 실수를 저지르고 많은 죄를 짓고 살아갑니다.
그리고 그러한 자신의 모습에서 내가 과연 하느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있을지,
구원을 받을 수 있을지 의문을 품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런 우리들에게 예수님께서는 당신 제자들의 모습을 보여주십니다.
어리숙하고 부족한 것 같은 그들의 모습이 당신과 생활하면서 하느님의 사람으로 불리우게 되고,
배반하고 숨어있던 그들의 모습이 결국 성령을 통해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는
위대한 사도들이 되는 모습을 보여주고 계십니다.
그들이 그렇게 변화될 수 있었던 것은 부족하지만 예수님과 함께 생활 했고,
늘 예수님의 곁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오늘 하루 나 역시 이런 제자들의 따름과 생활을 묵상하면서
예수님과 늘 함께 생활하는 그런 시간을 보내셨으면 좋겠습니다.

대구대교구 박재철(안토니오) 신부
  | 1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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