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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축일/명절강론 코너 ( 대축일/명절 미사에 관련된 강론자료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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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도회] 어느 수녀의 기도
조회수 | 3,118
작성일 | 09.03.18
성가정의 수호자이며 노동자들의 수호성인 요셉. 아마도 예수님과 성모님을 제외하고 나면 모든 성인을 통틀어서 요셉 성인만큼 사랑과 존경을 많이 받는 성인도 없지 않을까 생각된다. 내가 아는 요셉, 혹은 요셉피나 본명을 가진 이들이 대부분 충직하고, 일거리도 많이 따라다녔던 것으로 기억되는 것을 보면 어쩌면 성인의 영성이 그러해서 그런가 싶기도 하다.

내가 수련원에서 처음 요셉 축일을 맞이했을 때, 지금은 신설교구의 교구장이 되신 수련장 신부님께 성인에 대한 기도문을 하나 받았다. 그 기도문은 초라하게 낡은 종이에 인쇄되어 있었지만 지금까지도 나는 성서 안에 끼워놓고 가끔씩 읽어보곤 한다. 이 기도문은 어떤 수녀님이 30일 영신수련 피정을 하시면서 묵상 중에 만든 기도문이라고 하는데, 나는 이것을 읽을 때마다 수도자로 산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마음으로 되새겨 보곤 한다.

어느 수녀의 기도

숨은 의인 성 요셉이여, 당신은 말없이,
보수를 기대함도 없이,
누가 알아주기를 바람도 없이 순수히 그저 당신을 내어주셨으며
숨어 봉사하는 것으로 만족했습니다.

당신은 항상 남의 입장을 옹호해 줄 줄 알았으며
남의 허물을 감싸줄 줄 알았고
자신의 포기와 양보로 평화를 도모하는 길을 추구했습니다.

당신은 항상 깨어 주님 말씀에 귀기울였고,
듣는 순간 자기 계획을 포기할 줄 알았으며
주님 길을 선택하는 데 과감했습니다.

주님 뜻을 받드는 것이 당신 음식이 되고,
남을 위한 봉사가 당신 기도가 되었으며
가족을 돌봄이 당신 유일한 기쁨이었습니다.

당신은 평생 내내
세상 어느 누구도 당신을 위인이라 생각지 않았으며
당신 자신도 그저 하느님의 종으로 살았습니다.

그랬기에 당신은 하느님 앞에 더욱 보배로웠고,
그런 겸손과 그런 의덕이 아들을 맡길 정도로 하느님 눈에 들었습니다.

세상에서는 한줄기 빛도,
한 점의 영광도 못 누렸어도
지금은 하느님 동산에 체드루스처럼 우뚝 서 계시며
성인 중에 혜성처럼 빛나고 있습니다.

존경하올 성 요셉이여,
당신은 수도자의 모범이시고
주님 찾는 자들의 지도자시니
아직 투쟁 중에 있는 우리를 이끄사
당신 숨은 길을 걷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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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회 이재욱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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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의 사람’ 성 요셉

고향이 사라져가는 시대라 하지만, 고향은 사라져갈 지 몰라도 고향을 찾는 귀소본능(歸巢本能)조차 사라질 수는 없습니다. 많은 이들이 끊임없이 고향을 찾는 마음으로 여기 수도원을 찾습니다.

오늘은 요셉 성인을 주보성인으로 모신 저희 성 베네딕도회 요셉수도원이 스무 번째 맞이하는 주보 축일이기도 합니다. 요셉수도원을 배경한 불암산이 마치 요셉 성인의 넉넉한 품을 연상케 합니다.

10년 전에 써놓고 자주 읽어보는 ‘산처럼’이란 애송시입니다.

“언제나 그 자리에 머물러
가슴 활짝 열고
모두를 반가이 맞이하는
아버지 산 앞에 서면
저절로 경건 겸허해져
모자를 벗는다.
있음 자체만으로
넉넉하고 편안한
산의 품으로 살 수는 없을까
바라보고 지켜보는
사랑만으로
늘 행복할 수는 없을까?”

산의 품 같은 하느님의 사람, 요셉 성인입니다. 믿는 이들에겐 너무나 정답고 친숙한 이름 요셉 성인이라, 성인의 이름을 딴 세례명이 그리도 많은가 봅니다. 아버지와 남편의 권위와 힘이 날로 쇠퇴해 가는 시절에 아버지의 모범이자 남편의 모범이시고 신앙인의 모범이신 하느님의 사람 성 요셉의 면모를 살펴보겠습니다.

첫째, 성 요셉은 기도의 사람이었습니다.

세상이 어지럽고 혼란할수록 필요한 기도입니다. 영혼의 호흡과 같은 기도요, 말 그대로 ‘살기위하여’ 기도합니다. 숨 쉬듯이, 밥 먹듯이 기도해야 삽니다. 살아있다고 다 살아있는 것이 아닙니다. 기도하지 않아 영혼이 죽어 가면 육신이 살아있다 해도 살아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느님과의 대화가 기도입니다. 이 대화의 단절로 고립 자폐되어 삶의 의미를 잃고 무기력하게, 외롭고 쓸쓸하게 지내는 이들 얼마나 많은지요? 이래서 날로 늘어가는 우울증, 정신질환자들에 숱한 병자들입니다.

하느님의 모상대로 창조된 사람입니다. 아무리 하느님 잊고 바쁘게 살아도 마음 속 깊이 하느님 찾는 본능은 누구나 있는 법입니다. 빵만으로 사는 게 아니라 하느님으로 사는 사람입니다.

기도해야 영혼도 살고 육신도 삽니다. 내면 깊이 잠재해 있는 하느님 찾는 마음을 기도로 활짝 꽃 피어내야 삶의 탄력도 감각도 살아나 기쁘게 삽니다. 아브라함도 다윗은 물론 성 요셉은 모두 기도의 사람이었습니다. 하느님과 늘 대화했던 기도의 사람이었습니다.

직접 하느님의 축복 말씀을 들은 아브라함이요, 나단 예언자를 통해 하느님의 축복의 약속말씀을 들은 다윗입니다. 늘 하느님과 가까이 살았던 기도의 사람들임을 깨닫습니다. 오늘 요셉도 밤샘 기도 중에 주님의 천사의 말을 들었습니다.

둘째, 성 요셉은 믿음의 사람이었습니다.

기도와 함께 가는 믿음입니다. 기도와 더불어 하느님께 깊이 뿌리내려가는 믿음입니다. 믿음의 뿌리입니다. 과연 여러분의 믿음의 뿌리는 어느 상태에 있습니까?

거목의 나무들을 보면 그 보이지 않는 뿌리를 짐작할 수 있듯이 삶의 모습을 통해 짐작되는 믿음의 뿌리들입니다. 하루아침에 내리는 나무뿌리가 아니듯 몇 번의 기도로 깊어지는 믿음의 뿌리가 아닙니다. 평생 꾸준히 죽을 때 까지 기도해야 하고 믿음의 뿌리 내려야 합니다. 하느님은 믿음을 보십니다. 믿음이 없이는 하느님을 기쁘게 해드릴 수 없습니다. 믿음의 사람들은 자기의 약함에 초점을 두지 않고 하느님의 전능에 초점을 둡니다.

자기의 죄에 절망하지 않고 하느님의 은총과 자비에 희망을 겁니다. 희망이 없어도 희망하며 하느님의 약속 말씀을 믿은 아브라함이었습니다. 죽은 이들을 다시 살리시고 존재하지 않는 것을 존재하도록 불러내시는 하느님을 철석같이 믿은 아브라함이었습니다. 하여 아브라함은 믿은 우리 모두의 조상이 되었습니다.

순전히 고립 단절된 혼자의 믿음은 없습니다. 교회 공동체와 전통에 뿌리 두고 있는 믿음입니다. 교회 믿음의 뿌리를 거슬러 올라가면 성인성녀들의 믿음의 있고 성모 마리아와 성 요셉의 믿음이 있고, 숱한 예언자들과 다윗 그리고 마지막 믿음의 뿌리 아브라함에 닿습니다. 바로 이 교회 공동체와 전통에 뿌리를 내리고 믿음을 흡수하는 참 좋은 시간이 이 은혜로운 미사시간입니다.

믿음은 막연하거나 추상적이지도 않습니다. 침묵과 인내, 배려와 겸손으로 표현되는 믿음의 덕입니다. 다음 복음의 묘사 한 구절에서 환히 드러나고 있는 요셉의 성덕인 침묵과 인내, 배려와 겸손의 덕입니다.

“마리아의 남편 요셉은 의로운 사람이었고 또 마리아의 일을 세상에 드러내고 싶지 않았으므로, 남모르게 파혼하기로 작정하였다.”

진정 믿음 좋은 사람들은 침묵과 인내의 사람들이자 배려와 겸손의 사람임을 깨닫습니다.

셋째, 성 요셉은 순종의 사람이었습니다.

우리 삶의 여정은 순종의 여정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순종의 실천에서 믿음의 진정성이 입증됩니다. 기도와 믿음, 순종이 밀접한 관계에 있음을 봅니다. 기도와 믿음의 열매가 순종의 삶입니다. 가을의 잘 익은 열매들이 잘 떨어지듯이 성숙한 사람들의 순종도 이와 같습니다. 순종을 보아 성숙의 정도를 짐작할 수 있습니다. 하여 일상의 크고 작은 순종을 잘한 이들, 마지막 순종의 죽음도 거룩하고 아름답게 맞이할 수 있습니다.

순종의 사람들은 요리조리 변명이나 핑계로 피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의 현실을 직면하여 믿음과 지혜로 돌파해 나갑니다. 이것저것 요구하며 불평이나 불만하지 않고 찬미와 감사하는 마음으로 있는 그대로의 현실을 받아들입니다. 바로 오늘 복음의 다음 한 대목에서 환히 빛나는 요셉의 순종의 덕입니다.

“잠에서 깨어난 요셉은 주님의 천사가 명령한 대로 하였다.”

아마 하느님도 요셉의 순종이 참 고마웠을 것입니다. 평생, 하느님의 뜻에 순종하며 살았던, 말 그대로 하느님의 사람, 요셉 성인이셨습니다. 요셉 성인의 넉넉한 사랑의 품이 있어, 든든한 믿음의 울타리 있어 가능했던 예수, 마리아, 요셉의 성가정이었습니다.

요셉수도원의 수사님들과 요셉수도원을 사랑하여 갖가지 모습으로 도와주시는 은인들은 참 행복합니다. 양 편에 두 수호성인, 성 요셉과 성 베네딕도의 보호아래 주님의 길을 따라 하느님께 나아가기 때문입니다. 두 성인 모두가 기도의 사람, 믿음의 사람, 순종의 사람이었습니다.

결론하여 명실 공히 하느님의 사람이셨습니다.

좋으신 주님은 은총의 사순시기, 성 주간 전 마지막 토요일, 성 요셉 오아시스 대축일 미사를 통해 우리 모두에게 위로와 평화와 축복을 풍성히 내려 주십니다. 하여 우리 모두 기도와 믿음, 순종의 하느님의 사람들로 살 수 있게 되었습니다.

“주님께 감사하라. 그 좋으신 분을, 영원도 하시어라. 그 사랑이여.” 아멘.

베네딕도회 이수철 신부
  | 03.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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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가 함께 기도하면···

성경에서 의로움 또는 정의는 관계의 충실함을 뜻한다. 요셉의 의로움은 먼저 마리아와의 관계에 충실함으로써 마리아를 살리는 것이다.

그리고 모든 인간관계의 근본인 하느님과의 관계에 충실하여 그분의 뜻에 순종하는 것이다.

요셉은 성령으로 말미암아 잉태한 마리아를 믿었다. 관계의 의로움은 신뢰로 표명되며, 이 신뢰와 사랑을 바탕으로 예수님이 태어나셨다.

교포사목을 할 때 자주 출근길에 있는 미국인 성당에 들러 성체조배를 하곤 했다. 1년 6개월 전 대장암 수술을 받은 남동생 요셉의 간에 또다시 두 개의 종양이 발견되어 재수술을 받아야 할 것 같다는 소식을 들은 뒤라 기도에 매달릴 수밖에 없었다.

하느님께서 남동생과 가정을 지켜주셔야 제가 이곳에서 마음과 정성을 다해 교포사목에 충실할 수 있으니 남동생을 살려 달라고 기도했다.

성당 제대 쪽에 모셔져 있는 영원한 도움의 성모 성화 앞에서 남동생을 위해 기도하면서 갑자기 큰 성당을 꽉 채우는 듯한 메시지를 느꼈다.

‘너희가 함께 기도하면 내가 도와줄 수 있다.’ 그 후 우리 가족은 각자 삶의 자리에서 남동생을 위한 묵주의 9일 기도를 바치기 시작했고, 그렇게 묵주의 54일 기도를 두 차례 바쳤다. 그 후 동생이 병원에 갔더니 대장에서 간으로 전이된 동전만한 크기의 종양 두 개가 모두 사라졌다는 것이다.

그리고 7년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지금 동생은 건강한 몸으로 살고 있으니 ‘너희가 함께 기도하면 내가 도와줄 수 있다.’ 하신 말씀이 그대로 이루어진 것이다.

하느님께 대한 신뢰는 이성을 무시하는 것이 아니라 초월하는 것이다. 믿고 기도하는 사람들 안에서 하느님은 놀라운 능력을 드러내신다.

성령으로 잉태된 말씀이 사람이 되시기까지 삶이 곧 기도가 되셨던 성 요셉과 성 마리아처럼 우리 역시 기도의 사람들이 되기 위해 성령의 은총을 지속적으로 구해야 한다.

하느님께서는 두 사람 이상 마음을 합해 기도할 때 더욱 큰 능력을 드러내신다. 가족이 함께 두 손을 모은다면 우리 가정사는 바로 구원사가 되어 저마다 하느님의 영광을 비추는 성가정이 될 것이다.

서 효경 수녀 (영원한 도움의 성모 수도회)
  | 03.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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착한 남자

요셉! 단 한 번도 대면한 적이 없지만, 성인의 모습을 상상해볼 때마다 떠오르는 이미지는 이렇습니다. 착한 남자, 과묵한 사람, 그래서 든든한 사람, 쫀쫀하지 않은 사람, 아무것도 아닌 일로 호들갑을 떨지 않는 사람, 비록 타인으로부터 속임을 당하고 손해 보는 일이 있다하더라도 개의치 않는 사람, 신의나 의리를 목숨처럼 소중히 여기는 사람...

진정 사랑했던 여인,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것 같던 약혼녀 마리아를 포기하라는 하느님의 요청은 요셉에게 있어 청천벽력 같은 요구였기에 정말 수용하기 힘든 부담스러운 것이었습니다.

더구나 당시 구세주 탄생 사건의 전모는 모든 것이 다 베일에 가려져 있었습니다. 명확하게 "이건 이렇고, 저건 저렇다, 앞으로 어떻게 될 것이다"는 설명도 없었습니다. 무조건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이어라!" 그것이었습니다. 요셉은 어떤 면에서 구세주 탄생으로 인해 발생한 가장 큰 피해자였습니다. 속수무책인 가운데 약혼녀를 강탈당한 것입니다. 하느님으로부터.

미래의 삶 역시 생각만 하면 갑갑한 것이었습니다. 처녀의 몸으로 잉태한 마리아! 누구의 자식인지도 모르지만 태어나게 될 아기, 고스란히 떠안아야할 부양의 의무...한 평생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자식과 “배신녀” 마리아를 위해서 뼈 빠지게 일만 하는 자신의 괴로운 미래가 예측되었습니다.

그러나 요셉은 불평불만하지 않고 묵묵히 천사가 알려준 그 길, 한 평생 이해 못할 신앙여정을 출발합니다. 우리같이 길고 짧음과 이해득실을 세밀하게 따져보지 않고 길을 떠납니다.

하느님의 계획에 대한 전적인 신뢰와 순명, 여기에 요셉의 덕이 있습니다. 요셉이 지녔던 가장 큰 덕행은 뭐니 뭐니 해도 순명의 덕이었습니다. 하느님의 요청에 그저 한 치 오차도 없이 따라갑니다. 하느님께서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이라니 말씀대로 맞아들입니다. 이집트로 길을 떠나라니 말씀대로 길을 떠납니다. 유다로 돌아오라니 말씀대로 돌아옵니다. 한 평생 하느님께서 제시해주신 그 길을 단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묵묵히 따라감을 통해서 요셉은 구세 사업에 한 몫을 합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서 예수그리스도의 구원사업의 협조자로서 지녀할 첫 번째 자세는 결국 요셉 성인이 지니셨던 부드러움입니다. 부드러움만이 하느님을 기꺼이 수용하게 하고, 이웃을 기쁘게 받아들이는 원동력이 됩니다. 하느님을 향한 부드러운 시선, 이웃을 향한 따뜻한 눈길 그것이 결국 우리를 구원할 것입니다.

"노란 종달새"란 이름의 인디언이 지은 기도를 읽으면서 세상만사 안에서 하느님의 음성을 들으려고 노력했던 요셉의 생애가 떠올랐습니다.

바람 속에 당신의 목소리가 있고
당신의 숨결이 세상 만물에게 생명을 줍니다.
나는 당신의 많은 자식들 가운데 작고 힘없는 아이입니다.
내게 당신의 힘과 지혜를 주소서
나로 하여금 아름다움 안에서 걷게 하시고
내 두 눈이 오래도록 석양을 바라볼 수 있게 하소서.
당신이 만든 물건들을 내 손이 존중하게 하시고
당신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도록 내 귀를 예민하게 하소서.
당신이 내 부족 사람들에게 가르쳐 준 것들을
나 또한 알게 하시고
당신이 만든 나뭇잎, 모든 돌 틈에 감춰둔 교훈들을
나 또한 배우게 하소서.
내 형제들보다 더 위대해지기 위해서가 아니라
가장 큰 적인 내 자신들과 싸울 수 있도록 내게 힘을 주소서.
나를 하여금 깨끗한 손, 똑바른 눈으로
언제라도 당신에게 갈 수 있도록 준비시켜 주소서.
그래서 저 노을이 지듯이 내 목숨이 사라질 때
내 영혼이 부끄럼 없이 당신에게 갈 수 있게 하소서.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 03.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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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적인 의로움

의로움은 남성의 덕
사랑은 여성의 덕이라 해도 좋겠지.
그렇기에 반대로
독선은 남성의 악덕
질투는 여성의 악덕이라고 해도 될까?

의로움이 남성의 덕이라면
오늘 축일을 지내는 요셉을 특별히 의롭다 추어줄 이유가 있을까?
사랑-이해적인 여성에 비해
남성이 사리-판단적이고
그래서 남성이 여성보다 더 의로움을 중시하고
의로움에 강점이 있다 해도
모든 남자가 다 의로운 것은 아닐 것입니다.
의로움이란 진리를 지향하고 진리를 수호하며
진리에 순응하게 하는 것이라고 한다면
우리의 삶에는 진리를 저버리게 하는 것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 첫 번째 것이 人情입니다.
인정에 끌리어 우리는 의로움을 잃기도 합니다.
잘 아는 이의 딱한 사정을 봐주다 일을 그르치는 경우가 많습니다.
친구의 부탁을 거절하지 못하고 불의를 저지르는 경우도 있습니다.

두 번째 것이 욕심입니다.
누구 때문이 아니라 자기 욕심 때문에 진리를 저버리는 경우입니다.
욕심에 눈이 멀면 진리가 보이지 않고 진실도 왜곡합니다.

그러므로 의로우려면 이런 인정과 욕심을 칼처럼 잘라내야 합니다.
그러나 욕심은 과단성 있게 잘라내야 하지만
사랑마저 그렇게 해도 된다는 것은 아니겠지요.
냉정할 필요는 있어도 무정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무정함과 사랑 없음은 가장 큰 불의이기 때문입니다.
진리에 부합하게 하는 것이 가장 큰 사랑이지만
최고의 진리는 사랑의 진리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사랑도 사유화하지 않고
진리도 사유화하지 않을 때
우리는 최고의 진리 안에서 사랑하고
최고의 사랑으로 진리에 의합함으로
신적인 의로움에 도달하게 됩니다.

오늘 우리가 축일을 지내는 성 요셉은
이 신적인 의로움에 가까이 다가간 남자가 아니었을까 생각해봅니다.

작은 형제회 김찬선 신부
  | 03.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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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들은 우스개 소리 하나를 해야겠다.
천국의 문지기인 베드로 사도가 고민에 빠졌다.
언제부턴가 천국 살림이 빠져나가는 듯 하였기 때문이다.
이리저리 셈을 해보아도 자꾸만 식량이 모자라는 것이었다.
그래서 자초지종을 살펴보기로 하였다.
며칠을 지켜보면서 문제를 찾아본 결과 답이 나왔다.
요셉이라는 녀석이
자꾸만 연옥에 있어야 할 위인들을
때도 되지 않았는데
몰래 천국으로 빼돌리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한 것이다.
베드로 사도는 요셉을 불러서 나무랐다.
천국 살림을 생각지도 않고 이게 무슨 짓이냐고.
다시는 그러지 마라고.
한번만 더 그러면 천국에서 추방하겠노라고 엄포를 놓았다.

아니, 그런데도 자꾸만 살림이 부족한 것이었다.
요셉이 말을 듣지 않고
계속 연옥 사람들을 끌어들이고 있었다.
그것도 한두명이 아니라 무더기로 말이다.
베드로는 화가 머리 끝까지 나게 되었다.
그래서 요셉을 불러서 천국에서 나가라고 하였다.
요셉은 두말하지 않고 천국문을 나섰다.

그리고는...

뒤를 돌아보더니만
“여보, 얘 데리고 나와!”
하는 것이었다.

요셉 성인에 대해 많은 이야기들을 할 수 있지만
예수님과 성모님과 가장 가까이 지내신 분이라는 사실만이라도 기억하자.
우리 또한
예수님과 성모님과 가까운 사람이 되고자 한다면
요셉의 전구가 필요하리라.

그리고
임종자들의 주보이신 성 요셉을
오늘 특별히 기억하자.
그리고
오늘 임종하는 이들을 위해서,
그리고
우리가 알고 있는 연옥에서 단련받고 있을 영혼들을 위해
성 요셉의 전구를 겸손되이 청해봄이 어떨까?

성 요셉, 저희를 위하여 빌어주소서! 아멘.

작은 형제회 오상선 신부
  | 03.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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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너에게

카르투시오 수도원의 일상을 담은 영화 <위대한 침묵>을 보았습니다. 침묵하며 모든 시간에 하느님을 만나려는 수도승들의 모습, 그들의 기도와 일, 대자연의 아름다움이 한참 어우러져 갈 무렵 화면에 성경 구절 하나가 떠오릅니다. “나는 있는 나다.” 탈출기 3장 14절에서 하느님이 모세에게 알려주신 당신의 이름입니다. 여기에서 ‘야훼’?라는 이름이 나왔다고 하지요. 수도승들이 침묵 속에 사는 것은 바로 이분, 계시는 분을 만나기 위함입니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 불 꺼진 성당 바닥에 수도승들이 엎드려 그분을 조배하고 있을 때 오직 감실의 붉은 등만 깜빡거리는 것은 바로 이것을 말해 줍니다.

계시는 분, 존재하시는 그분께서 이제 우리와 같은 살과 피를 지닌 사람이 되셨다는 말씀을 오늘 듣습니다. 그리스도교의 가르침은 계시는 분, 존재하시는 하느님께서 우리 곁에 오셨다는 것, 곧 야훼 하느님이 임마누엘 하느님이라는 것입니다. 필리피서 2장의 그리스도 찬가는 자신을 낮추어 사람이 되신 그리스도의 신비를 이렇게 노래하고 있지요. “그분께서는 하느님의 모습을 지니셨지만 하느님과 같음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지 않으시고 오히려 당신 자신을 비우시어 종의 모습을 취하시고 사람들과 같이 되셨습니다.”(필리2,6-7ㄱ)

하느님이 사람이 되신 것은 사랑 때문입니다. 이렇게 하느님이 사람에게 건너오셨으므로 우리 역시 이웃에게 건너갑니다. 하늘에서 벼락이 치고 땅이 갈라지는 것이 기적이 아닙니다. 진짜 기적은 너무나도 자기에 사로잡혀 있는 나, 내가 너에게 건너가는 것입니다. 내가 너에게 건너가는 것은 참으로 대단한 일입니다. 이것을 한 우주가 다른 우주와 만나는 일에 비길 수 있지 않을까요?? 이것을 우리는 사랑이라고 부릅니다. 그리고 우리가 사랑할 때 우리는 임마누엘 하느님을 온 존재로 증거하는 것이고요.

성바오로회 황인수 신부
  | 03.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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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된 의로움

요셉 성인은 예수님께 세상에서 한 남자로 살아가는 법을 가르쳐주셨습니다. 그러나 이보다 더욱 빛나는 그의 덕은 예수님께서 마리아의 태중에 계실 때 그가 실천했던 참된 의로움이었습니다. 문득 이름도 인품도 요셉 성인과 무척 닮은 한 형제가 떠오릅니다.

어느 날 그의 부인인 자매가 남편의 행동 때문에 난감해진 자신의 처지를 하소연했습니다. 받을 게 있는 친구에게 돈을 받아 오라고 남편을 보냈더니만, 빚진 친구가 아이만 남겨둔 채 잠적해버린 바람에 돈을 받아 오기는커녕 친구의 아이가 애처롭다고 데려왔다는 겁니다. “한동안 이 아이까지 키우려면 허리띠 바짝 졸라매고 더 열심히 일해야겠네…” 하는 한마디만 던지면서 말입니다.

새삼 요셉 성인의 의로움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하게 됩니다. 우리는 의로움을 내 자신의 정당성을 주장하고 내세우기 위한 명분 정도로 여깁니다. 정당방어라는 명분이 이에 해당하는 대표적인 예일 것입니다.

요셉 성인도 약혼녀 마리아의 잉태 사실이 드러났을 때 상대방에게 최소한의 해만 끼치는 범위 안에서 자신의 정당성을 관철시킬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요셉 성인은 이러한 논리를 뛰어넘어 하느님의 의로움을 찾습니다. 그분은 미래를 알 수 없는데도 희망하며, 침묵에서도 하느님의 부르심을 들으며 성실하게 응답하십니다. 그의 의로움이 참된 이유입니다.

글라렛선교수도회 김성웅 신부
  | 03.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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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리아의 남편 요셉은 의로운 사람이었고, 또 마리아의 일을 세상에 드러내고 싶지 않았으므로, 남모르게 마리아와 파혼하기로 작정하였다.”

성가정의 든든한 언덕

새신랑 후보 요셉이 마리아의 혼전 잉태라는 대사건 앞에 얼마나 당혹스럽고 힘들었는지는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그림이 잘 그려집니다. 그리도 믿었던 약혼녀 마리아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아기를 가졌습니다. 참으로 기가 막히고 통탄할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백번 생각해도 도저히 ‘이건 아니올시다’였습니다. 요셉은 치미는 분노로 밤잠을 설쳤을 것입니다. 배신감에 이를 갈았을 것입니다. 술로 밤을 지새웠을 것입니다. 그러나 요셉은 참으로 너그러운 사람이었습니다. 요즘 아이들 표현대로 ‘쿨’한 사람이었습니다. 참으로 억울하지만 그냥 넘어가기로 결심했습니다. 혼전 잉태 사건은 당시 분위기로 봐서 그냥 넘어갈 수 없는 큰 사건입니다. 만일 요셉이 홧김에 확 한번 ‘불었더라면’ 마리아의 목숨은 파리 목숨과 다를 바가 없는 것입니다.

“남모르게 마리아와 파혼하기로 작정하였다.”는 말은 크게 선심 써서 봐주었다는 말과 일맥상통하는 말입니다.

남의 불행을 절대로 원치 않는 요셉, 예의바른 요셉, 인간미가 넘치는 요셉의 모습입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요셉이 그 상태에 머무르기를 원치 않으십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기를 원하십니다. 결국 신앙의 인간, 성령의 인간으로 거듭나고 성장하기를 원하십니다. 주님의 천사는 인간성 좋은 요셉, 성품이 출중한 인간 요셉을 성령의 인간, 믿음의 인간, 신앙의 인간으로 변화시킵니다.

그 결과 요셉의 태도를 보십시오. “잠에서 깨어난 요셉은 주님의 천사가 명령한 대로 하였다.”

마리아의 ‘혼전 잉태’ 인간적인 눈으로 도저히 봐줄 수 없는 사건이었습니다. 이해할 수도 없는 사건이었습니다. 감당해내기 어려운 사건이었습니다. 그러나 믿음의 사람으로 변모된 요셉은 순명하기 시작합니다. 요셉은 더욱 수용적이고 협조적이고 부드러운 사람, 결국 하느님의 사람으로 일취월장합니다. 그 뒤로 드러나는 요셉의 인생은 그야말로 순명 빼면 시체인 삶이었습니다. 마리아를 아내로 맞이하라니 두말 않고 맞이하였습니다. 까놓고 보면 결혼도 아닌 결혼이지만 결혼식을 치렀습니다. 정든 고향을 버리고 이집트로 떠나라니 지체 없이 떠났습니다. 그쪽에서 어느 정도 자리 잡고 살만했는데, 다시 돌아오라니 예, 하고 돌아왔습니다.

한평생 묵묵히, 진지하게, 나자렛 성가정의 든든한 언덕이 되어 구세사에 크게 일조하신 분이 요셉입니다. 참으로 말 많고 소란스런 이 시대, 요셉의 침묵과 경청, 순명의 삶이 필요한 때입니다.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 03.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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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원의 도구

성경에서 요셉 성인에 대한 진술은 그리 많진 않지만, 적어도 그분이 하느님의 말씀에 따라 믿음의 삶을 열심히 살았다는 사실은 어느 누구도 부인할 수가 없을 것입니다. 마리아가 성령으로 아기예수님을 잉태하였다는 천사의 말을 굳게 믿고 따른 요셉 성인의 삶은 그 이후, 아기 예수님을 마리아와 함께 세상의 위험으로부터 보호하는 수호자의 역할을 맡게 됩니다.

구세주 탄생의 거룩하고 영광스런 사건이 바로 자신의 약혼녀에게 일어났다는 사실을 목격한 요셉 성인은 그 영광스런 부르심에 응답함으로써, 하느님께 마리아와 자신을 온전히 내어 주신 것입니다. 그리고 아기 예수님이 구세주의 길을 잘 걸으실 수 있도록 소명에 충실한 삶을 겸손하게 살아오셨습니다.

이는 요한 복음서 3장에 세례자 요한의 “그분은 커지셔야 하고 나는 작아져야 한다.”의 말씀을 떠올리게 합니다. 바로 그런 겸손의 모습은 계속 이어져, 하느님의 아들 예수님께서도 전 생애에 걸쳐 제자들에게 보여 주셨고, 그렇게 살도록 명령하셨습니다.

결국 남을 위한 배려와 희생은 그 자신도 영원히 함께 살 수 있게 하는 구원의 도구가 됩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 온 이유는 하느님을 찬미하고, 그분의 뜻에 따라 우리 자신과 주위의 많은 이들이 함께 구원의 잔치에 초대받았음을 알리고 인도하는 것임을 다시 한 번 기억하기 바랍니다.

성 골롬반 외방선교회 권태문 신부
  | 03.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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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너에게

카르투시오 수도원의 일상을 담은 영화 “위대한 침묵“을 보았습니다. 침묵하며 모든 시간에 하느님을 만나려는 수도승들의 모습, 그들의 기도와 일, 대자연의 아름다움이 한참 어우러져 갈 무렵 화면에 성경 구절 하나가 떠오릅니다. “나는 있는 나다.” 탈출기 3장 14절에서 하느님이 모세에게 알려주신 당신의 이름입니다. 여기에서 ‘야훼’라는 이름이 나왔다고 하지요. 수도승들이 침묵 속에 사는 것은 바로 이분, 계시는 분을 만나기 위함입니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 불 꺼진 성당 바닥에 수도승들이 엎드려 그분을 조배하고 있을 때 오직 감실의 붉은 등만 깜빡거리는 것은 바로 이것을 말해 줍니다.

계시는 분, 존재하시는 그분께서 이제 우리와 같은 살과 피를 지닌 사람이 되셨다는 말씀을 오늘 듣습니다. 그리스도교의 가르침은 계시는 분, 존재하시는 하느님께서 우리 곁에 오셨다는 것, 곧 야훼 하느님이 임마누엘 하느님이라는 것입니다. 필리피서 2장의 그리스도 찬가는 자신을 낮추어 사람이 되신 그리스도의 신비를 이렇게 노래하고 있지요. “그분께서는 하느님의 모습을 지니셨지만 하느님과 같음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지 않으시고 오히려 당신 자신을 비우시어 종의 모습을 취하시고 사람들과 같이 되셨습니다.”(2,6-7ㄱ)

하느님이 사람이 되신 것은 사랑 때문입니다. 이렇게 하느님이 사람에게 건너오셨으므로 우리 역시 이웃에게 건너갑니다. 하늘에서 벼락이 치고 땅이 갈라지는 것이 기적이 아닙니다. 진짜 기적은 너무나도 자기에 사로잡혀 있는 나, 내가 너에게 건너가는 것입니다. 내가 너에게 건너가는 것은 참으로 대단한 일입니다. 이것을 한 우주가 다른 우주와 만나는 일에 비길 수 있지 않을까요? 이것을 우리는 사랑이라고 부릅니다. 그리고 우리가 사랑할 때 우리는 임마누엘 하느님을 온 존재로 증거하는 것이고요.

성 바오로 수도회 황인수 신부
  | 03.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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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의 사람>

요즘 저는 기도 중에 희망이 없는 이들을 많이 생각합니다. 특히 극단적인 선택으로 생명을 버린 이들을 기도합니다. 또 절망의 암흑 속에서 자살의 악한 유혹에 흔들리고 있는 이들을 더 많이 기억합니다.

우리가 경축하는 요셉 성인은 의로운 사람이었지만 자신에게 일어난 일 때문에 절망과 실망 속에서 임신한 마리아와 파혼을 하기로 결정했습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한계와 우리를 둘러싼 모진 환경에 너무나도 심하게 흔들립니다. 모든 걸 포기하고 싶습니다. 어쩌면 생명까지도 그만 내려놓고 싶은 강한 충동에 휩싸입니다. 여기에는 예외가 없습니다.

그러나 사도 바오로는 로마서에서 아브라함을 가리켜“그는 희망이 없어도 희망하며… 믿었습니다.”(로마 4,18)고 증언합니다. 우린 현재에만 매달려 사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미래에 대한 희망 덕분에 오늘을 사는 것입니다. 희망은 우릴 앞으로 나아가게 하는 에너지입니다.

요셉 성인은 현실의 어둠 속에도 미래를 내다보았습니다. 요셉 성인이 꾼 꿈은 희망의 상징입니다. 꿈이 없는 사람은 희망이 없는 사람을 뜻합니다. 희망의 사람은, 지금 겪고 있는 이 어둠은 미래의 어느 때에 자기 자신을 하느님의 도구로 잘 사용되기 위한 인고의 시간임을 믿습니다.

“성 요셉이시여, 지금 절망의 어둠속에서 신음하고 있는 이들을 보호하여 주소서. 희망을 꿈꾸는 이들이 되게 하소서.”

<성 베네딕도회 인끌레멘스 신부>
  | 03.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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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대한 '배경의 사람' 성요셉 -성 요셉 예찬-

오늘은 우리 요셉수도원의 주보 성인인 성 요셉 대축일입니다. 작년 3.25일부터 시작된 안식년을 2015.2.28일로 끝내고 귀원하여, 3.1일 요셉 성월 첫날부터 미사 주례로 새롭게 시작된 모원(母院)에서의 수도생활 중 맞이하는 대축일이기에 감회가 깊습니다.

'한국 교회의 공동 수호자 동정 마리아의 배필 성 요셉 대축일', 이렇게 긴 타이틀이 붙는 성인은 없습니다. 내 산티아고 순례 때, 순례자 증서에 무수히 찍혀 있던 스탬프들이 훈장처럼 보였는데 이 긴 타이틀이 마치 요셉성인에 붙은 훈장처럼 보입니다. 정말 자기비움의 '겸손의 대가', 위대한 '배경의 사람', '하느님의 선물' 요셉 성인입니다.

'보일 듯 말 듯/있는 듯 없는 듯
뒤로 물러나/바라보고 지켜보는
그윽한 불암산 배경이 되어/살고 싶네.‘

얼마전 써놓고 자족한 자작시입니다. 말그대로 요셉수도원의 위대한 배경인 불암산같은 성 요셉입니다. 어제의 신선한 일화도 생각납니다. 전베드로 형제가 피정을 끝내고 귀가하는 연벨라뎃다 어머니와 전수산나 누나를 모시러 왔습니다. 소방대원으로 근무하는 아주 신심깊은 성실한 하느님의 일꾼입니다.

"빈 손으로 와서 미안합니다.“

'사랑밖엔 길이 없었네'란 책을 나에게 선물 받으며 미안해 어쩔줄 모르며 한 말에, 즉각적으로 대답했습니다.

"전베드로 형제 자체가 참 좋은 선물인데 무슨 선물이 필요하겠습니까?“

진정이었습니다. 좋은 사람은 그 사람 자체가 하느님의 선물이기에 빈 손으로 와도 반갑습니다.

성 요셉은 말 그대로 하느님이 우리 모두에게 주신 위대한 선물입니다. 사실 눈만 열리면 온통 하느님의 선물들로 가득한 세상이요 이에 대한 저절로의 응답이 하느님 찬미와 감사입니다. 오늘 강론은 위대한 성 요셉의 인품에 대한 탐구입니다.

첫째, 성 요셉은 '기도의 사람'이었습니다.

기도는 테크닉이 아니라 사랑입니다. 기도해야 사람입니다. 기도하는만큼 살고 사는 만큼 기도합니다. 기도에 대한 내 지론입니다. 바로 위대한 기도의 모범이 성 요셉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침묵의 밤, 꿈중에 주님과 대화하는 요셉의 모습이 감동입니다. 주님의 말씀을 듣든 것이 바로 기도요 주님의 말씀을 잘 듣기 위한 침묵입니다.

"다윗의 자손 요셉아, 두려워하지 말고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 들여라. 그 몸에 잉태된 아기는 성령으로 말미암은 것이다. 마리아가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고 하여라. 그분께서 당신 백성을 죄에서 구원하실 것이다.“

요셉의 충격이 얼마나 컸겠는지요? 참으로 신뢰했던 요셉에게 당신의 천사를 통해 속내를 고스란히 털어 놓은 하느님이요 침묵 중에 깊이 듣고 받아들이는 성 요셉입니다. 평소 끊임없는 기도를 통해 넓고 깊은 내면을 지닌 큰 그릇 같은 요셉이었기에 주님의 천사의 말씀을 깊이 경청했음을 봅니다.

둘째, 성 요셉은 '믿음의 사람'이었습니다.

기도와 믿음은 함께 갑니다. 침묵의 기도 중에 주님 천사의 말씀을 깊이 경청한 요셉의 신속한 순종이 감동입니다. 복음의 마지막 짦은 구절이 아주 통쾌합니다. '잠에서 깨어난 요셉은 주님의 천사가 명령한 대로 하였다.‘ 실천의 순종으로 표현되는 믿음입니다. 하느님께서도 요셉의 믿음의 순종에 깊이 감동하셨을 것이며, 그의 순종이 한없이 고마웠을 것입니다.

순종을 통해 환히 드러나는 믿음입니다. 진정 아름다운 사람은 순종의 사람입니다. 부단한 순종을 통해 자기비움의 겸손에 도달합니다. 아브라함의 믿음을 연상케하는 요셉의 믿음입니다.

'아브라함은 우리 모두의 조상입니다. 그는 희망이 없어도 희망하며, "너의 후손들이 저렇게 많아질 것이다."하신 말씀에 따라 "많은 민족의 아버지"가 될 것을 믿었습니다.‘

아, 이것이 믿음의 진수입니다. 보이는 희망이 없어도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희망하는 것이 진정 믿음입니다. 아브라함처럼 요셉의 믿음이 바로 그러했습니다. 1독서의 나탄 예언자를 통한 주님의 말씀은 다윗뿐 아니라 믿음의 사람, 요셉에게도 그대로 적용됨을 깨닫습니다.

"너의 집안과 나라가 네 앞에서 영원히 굳건해 지고, 네 왕좌가 영원히 튼튼하게 될 것이다."

요셉의 양자, 하느님의 아드님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를 통해 고스란히 실현되고 있는 나탄의 예언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요셉의 그 믿음을 의로움으로 인정해 주셨습니다. 하느님이 보시는 것은, 하느님을 감동시킬 수 있는 것은 믿음 하나뿐입니다.

셋째, 성 요셉은 '배경의 사람'이었습니다.

내 사랑하는 요셉수도원의 배경인 불암산과, 불암산의 배경인 하늘입니다. '하늘과 산'이라는 오래 전 자작시가 생각납니다.

'하늘이 있어/산이 좋고, 산이 있어/하늘이 좋다.
하늘은 산에 신비를 더하고/산은 하늘에 깊이를 더한다.
이런 사이가 되고 싶다/이런 사랑을 하고 싶다’

하늘이신 하느님을 배경했기에 성가정의 넉넉하고 든든한 불암산 같은 배경이 되어 늘 '예수, 마리아, 요셉의 성가정'을 품에 안았던 성 요셉입니다. 다음 복음의 묘사에서도 위대한 배경의 사람, 요셉의 고결한 인품이 잘 드러납니다.

'마리아의 남편 요셉은 의로운 사람이었고 또 마리아의 일을 세상에 드러내고 싶지 않았으므로, 남모르게 파혼하기로 작정하였다.“

마리아를 위한 성 요셉의 섬세한 배려가 눈물 겹도록 감동입니다. 그대로 너그럽고 자비로운 하느님 아버지의 부성을 닮은 의로운 사람, 배경의 사람 성 요셉입니다.

아버지의 권위가 날로 추락해 가는, 노인은 많은데 어른은 날로 줄어가는 작금의 현실입니다. 성 요셉 같은 아버지들이, 어른들이 참으로 그리운 시절입니다. '아버지 상(像)이 없다' '어른 상(像)이 없다' 탄식할 것이 아니라, 지금 여기 나부터 성 요셉 같은 아버지가, 어른이, 신자가 되어 사는 것입니다. 바로 매일의 미사은총이 우리의 소원을 이루어 주십니다.

끝으로 불암산같은 배경의 성인 요셉에게 드리는 오래 전 나의 자작 헌시(獻詩)를 나눕니다.

'언제나 그 자리에 머물러/가슴 활짝 열고
모두를 반가이 맞이하는/아버지 산앞에 서면
저절로 경건, 겸허해져 모자를 벗는다.

있음자체만으로/넉넉하고 편안한
산의 품으로 살 수는 없을까
바라보고 지켜보는/사랑만으로
행복할 수는 없을까
하느님의 산, 불암산(佛巖山)처럼,
성 요셉처럼!' 아멘.

<분도회 이수철 신부>
  | 03.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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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도회] "다윗의 자손 요셉아, 두려워하지 말고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여라."(루카 19, 20)

겨울을 뚫고 나온 봄꽃소식이 여기저기서 들려옵니다. 마리아를 진심으로 존중했던 성 요셉대축일입니다. 그저 사는 것이 아니라 진심으로 사랑하며 살았으면 좋겠습니다. 진심을 잃어버린 우리들에게 성 요셉은 진심어린 가슴을 다시 찾아 줍니다. 사람을 살리는 것이 참된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도움이 절실히 필요한 마리아를 끝까지 도와주고 감싸 안아 줍니다.

요셉 성인이 우리에게 보여준 지혜는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 여기에서 다시 시작하는 지혜였습니다. 하느님의 뜻을 받아들이기 위해 뒤로 물러나는 겸손함을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겸손과 순종은 평범한 일상 안에서 자연스레 드러날 수 밖에 없습니다. 언제나 먼저 상대를 배려하는 요셉 성인의 삶이었습니다.

서로를 지켜주는 것은 신앙을 바탕으로 한 건강한 책임감입니다. 지켜주고 보살펴주는 사랑 없이는 그 어떤 것도 자라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삶을 뒤돌아보면 삶의 요소요소마다 신앙의 디딤돌 같은 요셉 성인이 있었습니다. 우리 또한 누군가를 빛내게 하는 작은 성 요셉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참다운 신앙의 동행은 먼저 하느님 말씀을 듣는 겸손과 순종에서 비롯됩니다. 무엇보다도 먼저 하느님 말씀을 들으려 하는 그리스도인이 되길 기도드립니다. 참된 사랑은 거창한 것이 아니라 작은 것에서부터 시작됨을 성 요셉에게서 다시 배우는 은총의 대축일 되십시오.

▦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 : 2016년 3월 19일
  | 03.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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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도 안 되는 상황의 수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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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에 부풀어 새로운 출발을 기대했던 요셉에게 문제가 생겼습니다. 사랑스러운약혼녀가 아버지가 누구인지도 모르는 아이를 덜컥 가진 것입니다.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당황스럽고 수치스러웠지만 한편으로는 마리아를 보호하고자 하는 마음이 앞섰기에 조용히 남모르게 파혼하는 것으로 일을 마무리하려고 합니다.

그런데 그는 마음을 바꿉니다. 꿈에 나타난 천사가 지금 겪고 있는 이 일이 하느님의 일이라고 알려주었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이 땅에 오시기 위해서는 이렇게 한 남자, 요셉의 엄청난 갈등과 번민을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그는 포기할 수도 있었습니다. 얼토당토않은 상황을 거부할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믿음의 사람입니다. 요셉은 도저히 납득할 수 없는 이 일을 받아들이기로 결정합니다. 그의 수용을 통해 이제 하느님의 새 역사가 놀랍게 펼쳐지게 됩니다.

믿음은 무엇입니까?

여러 가지로 정의할 수 있겠지만, 우리의 믿음이 결정적으로 발휘되어야 하는 순간은 바로 도저히 설명이 안 되는 상황, 기대하지도 않았고 나의 계획에는 들어 있지 않은 상황입니다. 억울하고 부당한 상황 안에서도 여전히 하느님을 바라보고 있다면 그는 믿음의 사람입니다.

좋은 일 안에서만 하느님을 만날 수 있다면 반쪽짜리입니다. 궁지에 몰린 순간에도 하느님을 만날 수 있는 자, 그가 진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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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남상근 신부
  | 03.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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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배필이신 성 요셉 대축일입니다. 복음사가들은 예수님의 모친이신 마리아께 대한 관심에 비하면, 성 요셉에 대해서는 별로 관심을 보이지 않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이는 그가 구속사에 있어서 해야 할 일을 다 하지 못했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계획하신대로를 일찍이 다 이루셨다는 것으로 알아들을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마태오 복음사가는 두 가지 예언이 성취되었음을 통해, 태어날 아기가 구세주 메시아임을 알려줍니다.

첫째는 그가 다윗의 자손이라는 사실이요,
둘째는 그가 동정녀에게서 태어난다는 사실입니다.

바로 이러한 하느님의 계획과 예언이 요셉의 믿음의 결단과 행동을 통해서 성취되었음을 보여줍니다. 이처럼, 요셉은 하느님 구원계획의 온전한 조력자로 제시됩니다.

오늘 <복음>을 통해, 성 요셉의 인품을 세 가지로 묵상해 봅니다.

첫째, 그는 “의로운 사람이었습니다.”(마태 1,19).

곧 ‘하느님의 뜻’을 따르는데, 열심을 다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 의로움으로 자신의 안락과 평안을 포기하였고, 마침내 “하느님의 뜻”을 따라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였습니다.

둘째, 그는 “마리아의 일을 세상에 드러내고 싶지 않았으므로, 남모르게 마리아와 파혼하기로 작정하였습니다.”(마태 1,19).

곧 타인에 대한 깊은 이해심과 자비심을 겸비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공적인 고소를 통해 마리아를 수치스럽게 만들지 않으려고, 조용히 파혼하기로 작정했습니다. 물론, 그렇게 된다하더라도 결국 그에게는 모욕이 될 수밖에 없는 처지였습니다. 그렇지만 그러한 모욕을 감수하면서라도, 마리아의 안녕을 도모하고자 했습니다. 참으로 그는 사려 깊은 처사를 할 줄 아는, 자비심이 많은 사람이었습니다.

<셋째>, 그는 “주님의 천사가 명령한대로 하였습니다.”(마태 1,24).

곧 순명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깊은 침묵으로, 하느님의 음성에 마음의 귀를 열고 있었습니다. 그리하여, “하느님의 뜻”에 행동하는 믿음으로 순명하였습니다. 사실, 요셉은 오늘 <복음>에서뿐만 아니라, <복음서> 전체에서 단 한마디의 말씀도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는 “행동하는 믿음과 순명”으로 구원받는 모든 이들의 양부가 되셨습니다.

그는 <제2독서>에서 아브라함이 ‘희망이 없어도 희망하며, 많은 민족의 아버지가 될 것을 믿었듯이’(로마 4,18), 그도 희망이 없어도 희망하며 믿음으로 순명하여, 구세주의 양부가 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아브라함이 이미 얻은 외아들을 포기했어야만 했다면, 요셉은 아들을 얻기도 전에 이미 외아들을 포기해야만 했습니다. 아니, 아브라함에게는 그래도 아내가 있었지만, 요셉은 아내마저도 포기해야만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그는 침묵하되, 참으로 믿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믿되, 참으로 행동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행동하되, 참으로 순명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사려 깊되, 참으로 자비심이 많은 사람이었습니다. 그야말로, 그는 우리 신앙의 모델이라 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의 음성을 듣고 그분의 뜻을 따르는 깊은 침묵, 자신의 안락과 평안을 접고 오로지 하느님께만 내맡기고 행동하는 믿음, 타인의 처지를 배려하는 사려 깊은 자비심과 사랑, 희망이 보이지 않아도 ‘하느님의 뜻’을 따르는 참다운 순명이, 바로 우리의 모델입니다. 오늘 우리도 성 요셉께 전구하며, 하느님 구원의 온전한 조력자가 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아멘.

-오늘말씀에서 샘솟은 기도 -

“두려워하지 말고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여라.”(마태 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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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
믿음으로 침묵할 줄을 알게 하소서.
행동으로 사랑할 줄을 알게 하소서.
타인의 처지를 자비로 헤아리고, 희망이 보이지 않아도 희망하게 하소서.
선하신 당신의 뜻을 따르며 당신의 의로움을 따르며,
영으로 인도되는 다 헤아려지지 않은 신비를 살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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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주 올리베따노 이영근 신부
2020년 3월 19일
  | 03.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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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셉은 주님의 천사가 명령한대로 하였다.(마태오 1,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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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꽃 하나 피기 위해서도 수 많은 사랑의 보살핌이 필요합니다. 요셉 성인은 예수님과 성모님을 온 삶으로 끝까지 보살펴 주십니다. 지켜야 할 것은 하느님과 우리의 뜨거운 믿음의 약속입니다. 요셉 성인은 믿음으로 주님의 보호자가 되십니다. 한 사람의 믿음이 끝내 주님의 양부가 되게합니다.

사랑받고 사랑하는 삶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보게 됩니다. 사랑과 무관한 일은 없습니다. 믿음과 무관한 일은 없습니다. 지나가는 시간 속에 아버지가 있고 어머니가 있습니다. 뜨겁게 흐르는 사랑의 새역사입니다.

이 사순시기가 요셉 성인처럼 하느님의 뜻을 찾고 사랑을 실천하는 시간이길 기도드립니다. 생명과 믿음공동체와 사랑은 하나이듯 세상을 바꾸는 것은 하느님의 뜻에 순명하는 신앙의 참된 실천임을 믿습니다. 참된 실천은 참된 순명입니다. 서로를 살리는 순명의 길을 우리 또한 걸어갑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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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
2020년 3월 19일
  | 03.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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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지하게 침묵하고 숙고하며,
깊이 성찰하고 기도하던 하느님의 사람, 요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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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적인 시선으로 바라볼 때, 요셉처럼 기구한 운명의 소유자가 다시 또 있을까 싶습니다. 이미 마리아와 약혼까지 하였으며, 결혼식 날짜가 코앞으로 다가온 어느날, 해괴망칙한 사건이 벌어진 것입니다.

약혼녀 마리아가 결혼식도 치르기 전에 덜컥 아이를 가지게 된 것입니다. 약혼자로서 마리아를 향한 배신감이 하늘을 찔렀을 것입니다. 끓어오르는 분노로 잠을 이룰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머리 뚜껑이 활짝 열리면서 연기가 풀풀 새어나왔을 것입니다.

요셉의 머릿 속은 별의 별 생각이 다 교차했을 것입니다. ‘얌전한 고양이 부뚜막에 먼저 올라간다더니, 얌전한 척 하던 마리아가 어떻게 이런 일을 벌일 수가 있지? 이 사실을 사방팔방에 확 불어버릴까? 법대로 해버릴까?’

그러나 의로운 사람 요셉은 치밀어 오르는 분노와 배신감을 꾹 눌러참았습니다. 그리고 쥐도 새도 모르게 마리아와 파혼을 하기로 결심했습니다. 이렇게 마음 먹은 요셉에게 주님의 천사가 나타나 상황을 설명하고 협조를 구합니다.

“다윗의 자손 요셉아, 두려워하지 말고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여라. 그 몸에 잉태된 아기는 성령으로 말미암은 것이다. 마리아가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고 하여라. 그분께서 당신 백성을 죄에서 구원하실 것이다.”(마태오 복음 1장 20~23절)

그럼에도 불구하고 요셉 입장에서 억울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하늘을 향해 하소연도 했을 것입니다.“다 좋은 데 왜 하필 나냐고요?”

희귀한 사건으로 인해 마리아와의 단란하고 행복한 새 인생을 꿈꾸던 요셉의 소박한 희망은 순식간에 산산조각나고 말았습니다. 요셉의 인생은 한 마디로 닭쫓던 개 지붕 쳐다보는 격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럭저럭 괜찮은 인생이 제대로 꼬여버린 것입니다.

그러나 이같은 생각은 단지 인간적인 생각일 뿐입니다. 물론 처음에는 갑작스레 다가온 마리아의 혼전 잉태가 요셉에게 엄청난 시련이요 상처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요셉은 납득하기 힘든 대 사건 앞에 침묵하고 기도하며 하느님을 뜻을 찾았습니다. 이해하기 힘든 사건을 인간적인 시각에서가 아니라 영적인 시각으로 바라보고자 각고의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마리아와 함께, 그리고 예수님과 함께 신비스런 신앙 여정을 출발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요셉은 깨달았을 것입니다. 마리아로 인해 자신이 겪은 희생과 포기는 절대로 무의미한 것이 아니라는 진리를 말입니다.

은혜롭게도 하느님 아버지께서 요셉 자신을 인류 구원 사업의 협조자로 선택해주신 것에 대한 감사의 마음이 점점 커져갔을 것입니다. 그 얼마나 기쁜 일입니까? 하느님께서 내게 협조를 구하시다니요? 하느님께서 나를 동반자로 불러주시다니요?

따지고 보니 세상 만사가 그런 것 같습니다. 짧은 안목으로, 그리고 인간적인 시선으로 바라볼 때, 우리가 매일 겪는 시련과 고통은 견딜 수 없는 불행입니다. 그러나 마음 한번 크게 바꿔 먹고, 호흡 한번 크게 하며, 긴 안목에서 바라볼 때, 시련과 고통은 더할 나위없는 축복이요 은총입니다.

하느님은 우리 인간과 철저하게 다르신 분입니다. 참으로 묘하시고 신비스러운 분이십니다. 따라서 하느님의 깊은 뜻을 이해한다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입니다. 그래서 필요한 것이 요셉처럼 너그러운 마음이요 의로운 성격입니다. 진지하게 침묵하고 숙고하며, 깊이 성찰하고 기도하는 태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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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신부
2020년 3월 19일
  | 03.19
459 58%
의인義人 성聖 요셉 예찬禮讚

-연민, 믿음, 순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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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라, 주님은 당신 가족을 맡길 충실하고 슬기로운 종을 세우셨다.”

오늘 미사 입당송이 참 적절하여 고무적입니다. 오늘은 참 자랑스런 저희 수도원의 주보 성인인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배필이신 의인 성 요셉 대축일입니다. 저희 수도형제들이 영원한 롤모델로 삼고 있는 성 요셉입니다. 우리는 성 요셉을 통해서 참 신앙인은 물론 참 아버지 상을 만납니다. 아버지가 된다면 성 요셉같은 아버지가 되고 싶다는, 닮고 싶다는 생각도 듭니다.

성 요셉 축일 미사때마다 부르는 입당송 성가(280)는 늘 들어도 신납니다.

-“성 요셉 찬양하세 주님의 양부를
정결하신 성 요셉 마리아의 정배
의로우신 성 요셉 우리 양자로 삼아
언제나 우리 마음 정결케하시며
의롭게 생활하도록 이끌어 주소서”-

1절만 인용했습니다만 이어지는 2,3절 가사도 은혜롭습니다. 수도원 주차장에는 아기 예수님을 안고 있는 후덕해 보이는 성 요셉상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아주 예전 성모성월 5월, 성 요셉상 옆 빨갛게 불타오르던 연산홍을 보며 즉시 떠올랐던 시도 생각납니다.

-“말없이 고요해도 가슴은 타오르는 불이다
요셉상 옆 빨갛게 타오르는 연산홍!”-2000.5.10.
외관상 고요하고 평화로운 후덕한 모습의 요셉이지만 내면의 가슴은 흡사 연민의 사랑으로 불타오르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써놓은 시입니다. 요셉 수도원 배경의 불암산 역시 성가정의 든든한 버팀목이자 배경인 예수님의 양부 요셉을 연상케 합니다.

역시 아주 오래전 써놓은 글이 생각납니다.

-“언제나 그 자리에 머물러
가슴 활짝 열고
모두를 반가이 맞이하는
아버지 산 앞에 서면
저절로 경건 겸허해져
모자를 벗는다
있음 자체만으로
넉넉하고 편안한 산의 품으로 살 수는 없을까
바라보고 지켜보는 사랑만으로
늘 행복할 수는 없을까
불암산처럼!”-2000.11.17

성 요셉 수도원을 품에 안고 있는 불암산처럼, 말없는 배경의 자비로운 품이 되어 성가정을 안고 있는 의인 성 요셉 양부를 통해 하느님 아버지를 어렴풋이 나마 깨달아 알 수 있습니다. 참으로 자랑스런 우리 수도형제들의 영원한 롤모델이자 경탄의 대상인 성 요셉의 인품에 대해 세 측면에 걸쳐 나눕니다.

첫째, 의인 성 요셉은 ‘연민compassion의 사람’이었습니다.

바다같이 깊은 연민의 사람이었습니다. 자비와 지혜의 사람이었습니다. 참으로 존중과 배려, 공감의 사람, 현재의 프란치스코 교황님처럼 공감능력자였습니다. 바로 복음 서두 말씀이 이를 입증합니다.

“그분의 어머니 마리아가 요셉과 약혼하였는데, 그들이 같이 살기 전에 마리아가 성령으로 말미암아 잉태한 사실이 드러났다. 마리아의 남편 요셉은 의로운 사람이었고 또 마리아의 일을 세상에 드러내고 싶지 않았으므로, 남모르게 파혼하기로 마음 먹었다.”

우선적으로 생각한 것이 마리아의 안위였습니다. 마리아를 존중 배려한 그대로 하느님 아버지를 닮은 요셉의 바다같이 깊은 연민의 사랑이 눈물겹도록 고맙습니다.

나탄을 통해 다윗을 향한 예언은 흡사 요셉을 향한 예언처럼 들립니다. 급기야 의인 성 요셉을 통해 실현되는 나탄의 예언입니다.

“그는 나의 이름을 위하여 집을 짓고, 나는 그 나라의 왕좌를 영원히 튼튼히 할 것이다. 나는 그의 아버지가 되고 그는 나의 아들이 될 것이다. 너의 집안과 나라가 네 앞에서 영원히 굳건해 지고, 네 왕좌가 영원히 튼튼하게 될 것이다.”

그대로 2000년 전통의 가톨릭 교회를 통해 실현된 하느님의 예언, 하느님의 꿈이 아닙니까? 바로 이에 결정적 공헌을 하신 분이 오늘 축일을 지내는 연민의 사람 의인 성 요셉입니다.

둘째, 의인 성 요셉은 믿음의 사람이었습니다.

산같이 큰 믿음의 사람이었습니다. 밖으로는 늘 거기 그 자리 배경의 불암산처럼 정주의 사람, 믿음의 사람 성요셉이었습니다. 기도와 함께 가는 믿음입니다. 믿음의 사람이자 기도의 사람이었던 의인 성 요셉입니다. 아브라함처럼 믿음으로 얻은 요셉의 의로움입니다. 참으로 침묵의 사람, 들음의 사람, 기도의 사람, 믿음의 사람인 의인 성 요셉입니다. 주님과 늘 깊은 관계의 친교를 나눴던 의인 성 요셉입니다.

하느님의 요셉에 대한 신뢰가 얼마나 컸던지 다음 내용이 이를 입증합니다. 주님은 침묵중에 늘 당신의 말씀을 경청했던 믿음의 사람, 성 요셉에게 당신 천사를 보내시어 자초지종 속내를 밝히십니다.

“다윗의 자손 요셉아, 두려워하지 말고 마리아를 아내로 맏아들여라. 그 몸에 잉태된 아기는 성령으로 말미암은 것이다. 마리아가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고 하여라. 그분께서 당신 백성을 죄에서 구원하실 것이다.”

의인 성 요셉을 구원한 복음 말씀입니다. 요셉의 어둡던 내면이 주님의 계시의 빛으로 환해 졌음이 분명합니다. 진정 이런 주님 체험의 기억이 요셉의 믿음을 더욱 견고히 했을 것이며 장차 있을 모든 시련을 이겨낼 수 있게 하는 내적 힘의 원천이 되었을 것입니다.

아브라함에 버금가는 요셉의 믿음에 바오로 사도가 아브라함에 드렸던 고백을 그대로 성 요셉에게 드리고 싶은 심정입니다.

“아브라함은 자기가 믿는 분, 곧 죽은 이들을 다시 살리시고 존재하지 않는 것을 존재하도록 불러내시는 하느님 앞에서 우리 모두의 조상이 되었습니다. 그는 희망이 없어도 희망하며, ‘너의 후손들이 저렇게 많아질 것이다.’ 하신 말씀에 따라 ‘많은 민족의 아버지’가 될 것을 믿었습니다.”

하느님께 대한 절대적 신뢰가 있기에 희망이 없어도 희망하는, 참으로 천하무적天下無敵의 큰 믿음의 사람 아브라함에 이어 요셉입니다. 아브라함의 ‘믿음의 유전자DNA’를 고스란히 전수 받은 요셉처럼 생각됩니다.

셋째, 의인 성 요셉은 순종의 사람이었습니다.

강같이 유연한 순종의 사람이었습니다. 안으로는 끊임없이 자비의 바다 하느님 향해 맑게 흐르는 강같은 순종의 사람, 의인 성 요셉이었습니다. 순종은 영성의 잣대입니다. 침묵도 경청도 겸손도 순종의 열매로 드러납니다. 하느님은 순종의 사람을 통해서 일하십니다.

“잠에서 깨어난 요셉은 주님의 천사가 명령한 대로 아내를 맞아들였다.”

참 아름답고 매력적인 사람이, 자발적 지체없는 사랑의 순종, 겸손한 순종의 사람이 성 요셉입니다. 하느님은 요셉의 순종이 참으로 고마웠을 것입니다. 강요할 수 없는 순종이요, 이런 요셉의 자발적 순종 덕분에하느님은 당신 구원 역사의 꿈을 펼쳐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하느님은 분명 요셉에게 고마운 마음을 다음 같이 표현했을 것입니다.

“나 그대의 자랑이듯이, 그대 나의 자랑이다!”

코로나 19 바이러스 사태로 인해 ‘신앙의 어둔밤’을 통과해 가고 있는 이 은총의 사순시기, 선물같이 주어진 의인 성 요셉 대축일이 우리 마음을 기쁨과 감사의 빛으로 환히 밝힙니다. 위로와 평화를 주고 용기백배하게 하십니다.

하느님은 우리 모두 의인 성 요셉을 닮아 바다같이 깊은 연민의 사람, 산같이 큰 믿음의 사람, 강같이 유연한 순종의 사람이 되기를 바라십니다. 얼마전 요셉 수도원을 방문했던 시찰관들의 조언을 나눕니다.

“이 수도원의 주보 성인이 얼마나 잘 선택되었는지 놀랍다. 성 요셉은 성실함, 단순성, 침묵, 고된 노동, 그리고 책임감의 모델이기 때문이다. 그분은 예수님께서 성장하실 수 있는, 그리고 다른 이들이 예수님을 만날 수 있는 집을 제공하신다. 그 집이 바로 요셉 수도원이다. 이곳은 여기서 매일 생활하는 수도승들과 몇 시간이나 며칠 간 수도승들과 삶을 공유하기 위해 찾아 오는 많은 이가 예수님을 만나는 장소이다. 이것은 매우 소중하다.”

얼마나 고무적이며 격려가 되는 조언인지요!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모두 주님을 닮은 의인 성 요셉처럼, 연민의 사람, 믿음의 사람, 순종의 사람이 되도록 도와 주십니다.

“주님의 자애를 영원히 노래 하오리다. 제 입은 당신의 진실을 대대로 전하오리다. 제가 아뢰나이다. ‘주님은 자애를 영원히 세우시고, 진실을 하늘에 굳히셨나이다.”(시편89,2-3).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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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도회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
2020년 3월 19일
  | 03.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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