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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축일/명절강론 코너 ( 대축일/명절 미사에 관련된 강론자료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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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도회] 상지의 옥좌
조회수 | 2,579
작성일 | 09.03.24
마리아의 응답은 모든 부르심에 응하리라는 준비성을 보여주며, 여기서 바로 마리아의 ‘Fiat’이 선언되었다. 마리아의 대답은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하소서”라는 주님의 기도에 이미 참여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또한 마리아의 ‘예’는 아버지의 뜻을 따르는 데 모든 그리스도인의 모범이 된다. 마리아의 이런 완전한 맡김은 그가 이것을 완전히 이해했기 때문에 할 수 있었던 것이 아니다.

이것은 마리아의 ‘완전한 믿음’을 나타내며, 여기서 우리는 그의 완전한 순명을 읽을 수 있다. 믿음과 순명은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이러한 구원 역사가 진행되도록 그 문을 열어준 분이 바로 마리아다. 인류의 멸망이 하와의 불순명 때문에 왔지만 마리아의 ‘예’를 통하여 다시 회복되었다.

오늘 축일의 핵심은 하느님의 육화에 있으며 성모영보는 강생에 대한 신심을 일깨운다. 그리스도 신자라면 누구나 강생하신 말씀의 신비를 경축하는 특별한 신심을 지녀야 할 것이다. 이것은 성령의 감도로 된 것으로 하느님의 아들은 구원 역사의 실현을 위하여 일정 기간 마리아의 태중에 계셨다.

강생의 신비는 이처럼 예수님의 첫째가는 신비이며 가장 숨겨진 신비이고, 또한 가장 높고 가장 알려지지 않은 신비이기도 하다. 이 신비 안에서 예수님은 당신의 모든 신비를 이룩하셨다. 그러므로 이 신비는 모든 신비의 요약이며 그 의지와 은총을 담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리고 모든 신비의 산실이 된 것이 바로 마리아다.

성모호칭기도에 ‘상지의 옥좌’라는 칭호가 나온다.

여기서 상지는 최고의 지혜를 뜻하며 최고의 지혜란 바로 하느님의 말씀을 의미하고 그 말씀께서 마리아를 통하여 인간이 되신 것이다. ‘상지의 옥좌’란 말씀이 임하신 마리아를 뜻한다. 최고의 지혜께서 당신이 육화하실 장소로 택하신 곳이 바로 마리아의 몸이다. 거룩한 장소, 하느님의 말씀이 거하실 지성소로 마리아는 선택을 받은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상지의 옥좌란 거룩한 말씀이 머무신 장소로서 마리아를 따르는 우리는 그분처럼 말씀이 머무실 수 있는 거룩한 장소가 되어야 한다. 우리도 제2의 마리아로 상지의 옥좌가 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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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모영보수녀회 정복례 수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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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순함과 소박함에서 오는 기쁨

“보십시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루카 1,26-38)

한 장애인 복지시설에 들렀을 때의 일입니다. 처음 만난 사람들 사이에는 쑥스럽기도 하고, 어색하기도 해서 왠만해서는 말문을 열기가 어렵습니다만, 그분들은 전혀 그렇지 않았습니다. 얼마나 붙임성이 많고 또 인사성이 밝은지 깜짝 놀랐습니다. 또 그분들과 몇 마디 이런 저런 세상 살아가는 이야기를 잠깐 나눴는데, 얼마나 순수하고 또 단순하신지, 그리고 얼마나 재미있게들 사시는지…

솔직히 그분들의 삶은 저보다 훨씬 영적이고 또 하느님 중심적이었습니다. 저보다 훨씬 자연스럽고 따뜻한 인간미를 풍기며 그렇게들 살고 계셨습니다. 무엇보다도 그분들은 이미 이 세상의 고통을 깊이 체험하고 계셨기에 예수님께서 겪으신 고통과 멸시, 소외에도 이미 깊이 동참하고 계셨습니다.

왠만한 십자가에는 끄떡도 하지 않으십니다. 고통을 수용하고 십자가를 기꺼이 지는데 완전히 이력이 나신 분들이었습니다. 여러 가지 모습으로 이 세상에서 많은 고통을 겪고 살아가시는 분들, 그분들의 장점은 지극히 순수한 마음으로, 또 열렬한 마음으로 주님을 기다린다는 것입니다.

왠만한 세상의 어려움 앞에서도 실망하지 않습니다. 이미 그들이 겪은 이 세상에서의 고통과 시련들을 통해 그들은 예수님의 고통과 십자가 길에 상당히 동참하고 계시다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언젠가 우리가 하느님 앞에 서게 될 때 우리의 상상은 무참히도 깨어질 것입니다. 자신이 잘 났다고 여기는 사람들, 큰 소리 떵떵 치는 사람들, 자기 잘난 맛에 사는 사람들, 하느님 앞에 큰 코 다칠 것입니다.

반면에 마리아와 같이 “보십시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라며 겸손하게 살아가는 사람들, 진정 견디기 힘든 십자가라 할지라도 하느님께서 주시는 것이려니 하고 기쁘게 지고 가는 사람들, 언제나 어디서나 기쁘게 "예" 하고 응답한 사람들, 인간적인 눈으로 보기에 아둔해 보이는 사람들, 마리아 같은 사람들이야말로 하느님 나라에서 큰 상급을 받을 사람들입니다.

상급을 받게 되는 이유는 오직 한가지입니다. 그들 안에는 교만이 자리 잡을 공간이 없기 때문입니다. 다만 단순하고 소박함에서 오는 감사함과 기쁨만이 있기 때문입니다.

마리아의 기쁘고 기꺼운 응답(피앗)을 묵상하면서 우리 삶에 대한 총체적인 반성이 필요하리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작음과 가난함은 멸시의 대상이 아니라 하느님 체험을 위한 필수적인 요소라는 것입니다.

우리 가운데 늘 현존해 계시는 하느님의 존재를 우리가 느끼지 못하는 이유는 가난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이미 너무 커져버렸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자만심이나 이기심이 극에 달했기에, 우리 자신으로 가득 차있기에 하느님께서 개입하실 여지가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작아지면 작아질수록, 낮아지면 낮아질수록, 비참하게 되면 비참하게 될수록, 깨지면 깨질수록, 천대받고 모욕당하면 당할수록 우리 영적 생활을 위해서는 바람직한 것입니다.

시련의 때, 고통의 순간은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임하시기 위해 준비하시는 은총의 시기이기 때문입니다.

살레시오회 양승국 신부
  | 03.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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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애를 입은 이여”(루가1,26-38)

천사는 마리아를 찾아가 "총애를 입은 이여, 기뻐하여라. 주님께서 너와 함께 계신다." 하고 인사하였다. 이 인사는 마리아에게만 하신 것이 아니라 오늘 우리에게도 "총애를 입은 이여, 기뻐하여라. 주님께서 너와 함께 계신다." 하고 인사하시는 것이다. 하느님은 늘 우리에게 은총을 베푸시는 분이시다. 그리고 우리는 그 은총으로 살아가는 사람이다.

하느님의 은총이 없이는 우리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다. "너희는 나 없이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다." 라고 말씀하지 않으셨는가? 다만 우리가 그것을 느끼지 않고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느님은 한결같이 누구에게나 은총을 내려 주시는 분이시다. 우리가 받아들이거나 안 받아들이거나 알아듣거나 못 알아듣거나 관계없이 선인이나 악인이나 똑같이 비를 내려주시고 햇빛을 내려주시듯이 같은 은총을 내려주신다. 하느님의 은총이 누구에게는 큰 것을 내려주시고 누구에게는 작은 것을 내려 주시는 것이 아니라 각자 자기에게 가장 알맞는 큰 은총을 내려주신다.

문제는 하느님에게 달린 것이 아니라 은총을 받아들이는 이에게 달려 있다. 은총을 받아들이는 그릇이 크면 많은 은총을 받을 것이고 그릇이 작으면 조금밖에 받아들이지 못할 것이다. 은총은 받아들이는 만큼 받는 것이다.

하느님이 주시는 은총은 여러 가지가 있지만 그 중에서 가장 큰 은총이 있다. 가장 큰 은총이 무엇인가를 알고 그 은총을 무엇보다 소중하게 생각하고 그 은총을 우선적으로 받아들이는 사람이 있고 별로 중요하지 않은 은총을 가장 큰 은총이라고 생각하고 가장 중요한 은총은 소홀히 하면서 다른 은총을 더 중요하게 생각하고 그것만 받아들이려는 사람이 있다. 우리는 무엇이 갖아 큰 은총인가를 잘 알고 가장 큰 은총을 받아들이려고 노력해야 한다.

그럼, 가장 큰 은총이란 무엇일까?

오늘 복음을 보면 천사 가브리엘이 마리아에게 말씀하셨다. "총애를 입은 이여, 기뻐하여라. 주께서 너와 함께 계신다." 가장 큰 은총은 "주께서 나와 함께 계시는" 은총이다. 사실 이보다 더 큰 은총은 없다. "하느님께는 불가능한 일이 없다."라고 말씀하셨듯이 모든 것이 가능하신 하느님과 함께 하는 것보다 더 큰 은총이 어디 있겠는가?

마리아가 총애를 입었다는 것은 바로 "주께서 함께 계시기" 때문이다. 돈을 많이 벌게 되었다는 것도 아니고, 로또 복권에 당선되었다는 것도 아니고, 미스 월드에 뽑혀서도 아니다. 단 하나 즉 "주님께서 함께 계신다."는 것, 그것이 가장 큰 은총이요, 총애를 입은 거다.

가장 큰 은총을 받으면 어떻게 되는가? "보라. 이제 네가 임신하여 아들을 낳을 터이니 그 이름을 예수라고 하여라. 그분께서는 큰 인물이 되시고 지극히 높으신 분의 아드님이라 불리실 것이다." 라고 말씀하셨던 것처럼 하느님의 아들 예수를 낳게 된다.

그런 일이 어떻게 이루워지는가?

주님께서 어떻게 함께 계시는가?

인간적으로는 불가능한 일이다. 그래서 마리아도 처음에는 그 방법을 몰라서 천사에게 물었다. "저는 어떻게 남자를 알지 못하는데,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라고 물으니까 천사가 "성령께서 너에게 내려 오시고 지극히 높으신 분의 힘이 너를 덮을 것이다. 그러므로 태어날 아기는 거룩하신, 하느님의 아드님이라고 불릴 것이다."라고 말씀해 주셨듯이 남자 즉 인간을 통해서가 아니라 성령을 통하여 거룩한 아기를 갖게 되는 것이다.

즉 예수를 잉태하는 일은 하느님이 내 안에서 하시는 일이지 내가 하는 일이 아니다. 그러기 때문에 은총이 필요한 것이고 그 은총을 받아들이는 이에게만 가능한 일이다. 그리고 은총 중에 가장 큰 은총은 성령을 통하여 예수를 잉태하는 은총이다.

그럼 오늘 내가 예수를 잉태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성령이 내 안에서 활동하시도록 나를 성령께 맡기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은 누구인가? 그리스도인은 성령을 따라는 사는 삶이다. 그래서 성 바오로는 "여러분은 성령의 지도를 따라 사는 사람"(갈라 6,1)이라고 했던 것이다.

성령의 지도를 따라 산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성령은 보이지 않는다. 그럼 어떻게 성령을 따라 살 수 있는가? 요한은 "보호자,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께서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기억하게 해 주실 것이다."라고 말씀하시면서 "그분 곧 진리의 영께서 오시면 너희를 모든 진리 안으로 이끌어 주실 것이다. 그분께서는 스스로 이야기하지 않으시고 들으시는 것만 이야기하시며, 또 앞으로 올 일들을 너희에게 알려 주실 것이다. 그분께서 나를 영광스럽게 하실 것이다. 나에게서 받아 너희에게 알려 주실 것이기 때문이다. 아버지께서 가지고 계신 것은 모두 나의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성령께서 나에게서 받아 너희에게 알려 주실 것이라고 내가 말하였다."(요한16,13-15)라고 말씀하셨던 것이다.

오늘 가장 큰 은총은 말씀이 사람이 되어 오셨던 분이 다시 말씀으로 우리에게 오시는 복음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리하여 마리아가 예수님을 잉태하여 낳으셨듯이 내가 말씀을 받아들여 다시 말씀을 내놓는 삶을 사는 것이다. 이 세상에서 가장 큰 은총을 받는 사람은 복음을 받아들이는 사람이다. 그리고 그 복음을 다시 사람들에게 낳아주는 사람이다.

그런 사람이 되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하는가?

마리아는 우리에게 그 모범을 보여 주셨다. 즉 마리아는 천사의 말을 듣고 "보십시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라고 말씀하셨다. 바로 마리아의 이런 자세가 바로 은총을 받아들이는 자세요, 예수를 내 안에 잉태해서 낳아주는 사람이 되는 자세이다.

잉태하여 하나의 생명을 낳는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그것은 가장 힘든 일이며 가장 위대한 일이다. 가장 위대한 일인만큼 거기에 따른 희생도 그만큼 크다.

그리하여 성 바오로는 "여러분 속에 그리스도가 형성될 때까지 나는 또다시 해산의 고통을 겪어야겠습니다."(갈라4,19)라고 말했다.

그렇다. 내가 그리스도로 형성되기 위해서는 해산의 고통을 겪어야하고 또 다른 이들에게 예수를 전해주는 일은 또 다른 해산의 고통을 통해서만이 가능한 일이다. 이 일은 나의 노력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은총을 통해서만 가능한 일이며 내가 은총을 받아들인다는 것이 그만큼 어려운 일인지도 모른다. 그렇기 때문에 하느님은 누구에게나 똑같은 은총을 내려 주시지만 누구나 다 받아들이는 것은 아니다.

그 은총을 받아들이려고 노력한 사람만 받을 것이고 은총을 받아들인만큼 충만해질 것이다.

성 바오로회 유 광수신부
  | 03.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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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소 같은 남자

요즘 저 같은 열렬한 축구팬들에게 뿐만 아니라 전 국민들에게 한국인으로서의 자긍심을 한껏 드높이고 있는 겸손하고 예의바른 축구선수가 한 명 있습니다. 유럽 3대 빅 리그 중에 하나인 ‘프리미어리그’ 내에서도 명문구단인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의 당당한 주전 공격수 박지성 선수입니다.

그는 함께 그라운드를 누비고 있는 유럽 빅리그 선수들과 비교할 때 너무나도 왜소한 체격을 지니고 있습니다. 거기다 축구선수로서는 치명적인 ‘평발’의 소유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피 말리는 주전경쟁에서 조금도 밀리지 않습니다. 참으로 고맙고 아름다운 청년입니다. 이 ‘팍팍한’ 세상에서 그는 많은 이들의 기쁨이자 희망입니다.

이런 그의 활약을 보기 위해 많은 축구팬들은 새벽녘까지 TV앞을 떠나지 못합니다. 심야에 생중계되는 박지성 선수의 축구시합 때문에 수도생활에 ‘큰 지장’을 받고 있는 몇몇 신부님, 수사님들도 계신다는 후문입니다.

박지성 선수가 팬들을 매료시키는 비결은 무엇이겠습니까? 그에게는 대명사처럼 따라다니는 별명이 하나 있습니다. ‘산소탱크’입니다. 전 후반 내내 쉴 틈 없이 그라운드 구석구석을 누비기 때문에 붙은 애칭입니다. 그의 지칠 줄 모르는 강철체력과 놀라운 심폐기능 때문에 붙은 별명입니다.

또 다른 면에는 그는 ‘산소탱크’입니다. 그는 언제나 팀에 신선한 활력을 불어넣어줍니다. 그는 여간해서 개인플레이를 하지 않습니다. 득점에도 집착하지 않습니다. 다른 공격수들이 화려한 개인기를 선보이거나, 골에 집착하는 반면 그는 늘 팀을 먼저 생각합니다.

그는 공을 잡으면 절대로 오래 끄는 법이 없습니다. 부드러운 원터치 패스로 동료들에게 결정적인 골 찬스를 만들어줍니다. 그런가 하면 공격수로서 수비가담도 뛰어납니다. 그러다보니 감독은 물론 동료선수들, 변덕스럽기 짝이 없는 맨체스터 팬들도 그를 좋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오늘날 우리 사회에는 ‘산소탱크’가 많이 필요합니다. 고달픈 삶의 청량제 역할을 담당할 ‘박지성 선수’가 보다 많아져야 합니다. 공동체에 활력을 불어넣어주고, 공동체 분위기를 깔끔히 환기시켜주는 ‘산소 같은’ 분들의 현존이 요구됩니다. 공동체를 위해서 궂은일을 마다않는 조력자가 필요합니다.

오늘 주님 탄생 예고 대축일입니다. 사순시기에 맞이하는 가장 큰 축일입니다.

하느님의 인류구원사업을 위해 많은 조력자들을 필요로 했습니다. 수많은 신앙의 선조들, 성왕들, 예언자들, 사제들, 신앙과 율법의 전수자들...그리고 더 가까이 내려와서는 안나와 요아킴, 엘리사벳과 즈카르야, 세례자 요한, 그리고 마침내 요셉과 마리아!

마리아는 구세주 강생을 위해 노력한 수많은 인물들 가운데 어쩌면 가장 큰 조력자, 가장 직접적인 조력자였습니다. 메시아 탄생에 가장 결정적 기여를 한 인물이 마리아였습니다.

비록 지금은 모든 것이 희미하지만, 지금은 모든 것을 다 알 수 없지만, 그저 하느님께서 원하시니 앞뒤 가리지 않고 무조건 ‘예’하고 순명하신 마리아의 소박하고 순수한 신앙이 인류구원을 위한 본격적인 출발점이 되었습니다.

‘큰 인물’ ‘저명인사’ 존경받는 유명인사의 어머니로 처신하기가 얼마나 힘든 것인지 어떤 분의 체험을 통해서 잘 알고 있습니다. 아들의 유명세로 인한 기쁨도 큰 것이지만, 그에 못지않은 스트레스들, 말 못할 어려움 만만치 않습니다.
예수님의 어머니가 됨으로 인해 마리아 개인의 삶은 사실 끝났습니다. 세상의 모든 신부들이 누구나 그려보는 신혼생활의 단꿈, 평범한 주부로서의 소박한 생활도 물 건너갔습니다. 아쉽지만 구세주 강생을 위해 마리아는 모든 인간적인 꿈을 접어야 했습니다.

어떻게 보면 마리아는 하느님의 뜻이 땅에서 이루어지도록 자신의 몸과 마음, 전 생애를 하느님께 빌려드렸습니다. 아니 돌려드렸습니다. 이런 마리아의 아낌없는 헌신, 생애 전체를 통한 봉헌이 있었기에 하느님의 인류 구원 사업은 아무런 무리 없이 시작되었습니다.

살레시오회 양승국 신부
  | 03.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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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 탄생 예고 축일-Fiat

3월에 요셉 축일과 성모님 축일이 같이 있습니다.
이렇게 얘기하면 새로운 전례 정신에 어긋나는 것이지요.
새로운 전례는 과거 성모 영보 축일을
주님 탄생 예고 축일로 바꾸었습니다.
이것은 성모 취결례를 주님 봉헌 축일로 바꾼 것과 마찬가지로
마리아 중심이 아니라 주님 중심으로 바꾸는,
매우 타당한 전례 정신의 표현이지요,

그러나 이러한 전례 정신을 모르지 않으면서도
저는 그래도 주님의 축일이자 성모님의 축일이라고 하고 싶습니다.
그리고 축일 이름도 바꾸고 싶습니다.
주님 탄생 예고 축일이 아니라
그리고 성모 영보 축일도 아닌,
성모 마리아의 주님 잉태 축일, 또는
성모 마리아의 주님 임신 축일이라고 말입니다.

될 대로 되라!
되어져야 하는 대로 되라!
둘 다 나의 뜻대로 하지 않음에서 같습니다.
그럼에도 될 대로 되라는 것은 뭔가 좋지 않은 태도인 것 같습니다.
정결을 빼앗긴 처녀가
자기 몸을 함부로 굴리며 아무에게나 자기 몸을 내주고
그래서 애비가 누구인지도 모르는 아이를 배는 것과 같이 느껴집니다.
그래서 자기도 욕보이고
애비 될 사람도 욕보이며
태어날 아기는 더더욱 욕되고 버림받고 빌어먹을 존재가 되고 맙니다.
그러니 자기 뜻을 포기한다고 다 좋은 것은 아닙니다.
이런 뜻의 자기 포기는 자기와 모든 것을 쓰레기로 만드는 것입니다.

이에 비해 되어져야 하는 대로 되라는 것은
더 높은 뜻이 이루어지는 데
자신이 장애가 되지 않기 위해 소극적으로 자기 뜻을 포기함은 물론
도구가 되겠다고 적극적으로 자기 의지를 봉헌하는 것입니다.
오늘 2독서에서 당신의 뜻을 이루러 왔다고 말씀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러하셨고
복음에서 말씀하신 그대로 이루어지기를 바라신
성모님께서 그러하셨습니다.

성모님의 경우, 그 말씀은 주님께서 너와 함께 계시다는 말씀이었고,
성모 마리아께서 그 말씀을 믿고
그 말씀을 받아들임으로써
그 말씀께서 마리아의 자궁에 머무시게 된 것입니다.
우리와 함께 계셔 주시는 엠마누엘 주님은
성모 마리아의 그 “Fiat(이루어지소서)"에서부터
우리와 함께 계시는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도 당신의 뜻이 이루어지는 것이 저의 뜻이라고 아뢰고
주님을 잉태하기 위해 마리아처럼 말합시다.
“말씀하신 대로 제게 이루어지소서!”
“Fiat mihi secundum verbum tuum!”

작은 형제회 김찬선 신부
  | 03.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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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십시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설레는 마음으로 십자가를

삶이란 것, 때로 불공평하게 여겨질 때가 많습니다. 한 평생, 아무런 아쉬움 없이, 건강하게, 고생이라고는 털끝만치도 모르고, 귀공자처럼 살아가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삶 전체가 십자가 투성이인 사람이 있습니다. 한 고개 넘으면 또 다른 고개가, 한 고비 넘기면 또 다른 고비가 끝도 없이 계속됩니다.

끝도 없이 반복되는 십자가의 틈바구니에 끼여 힘겹게 살아가면서도, 얼굴 표정은 어찌 그리 환한지, 이해가 잘 가지 않는 한 형제, 하는 말도 얼마나 어여쁜지 모릅니다.

“하도 겪어봐서 그런지 이젠 십자가에 익숙해졌습니다. 이젠 십자가가 다가오면 두려워하기보다 호기심 가득 찬 눈으로, 흥미진진한 표정으로, 설레는 마음으로 그 십자가를 바라봅니다. 이번 십자가는 나를 어떤 길로 이끌 것인가, 기대하면서 그렇게 십자가를 기다립니다.”

매일 져야만 하는 십자가의 무게에 힘겨워하는 우리에게 큰 의미를 던져주는 말씀이라고 생각합니다.

여러 형태의 십자가 가운데 참으로 특별한 십자가가 있는데, 한 ‘존재’ 자체입니다. ‘행동 하나 하나가 마음에 들지 않는 공동체 구성원’이라고 볼 수도 있겠습니다. 이 십자가가 다른 십자가에 비해 더 무거운 이유가 피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내칠 수도 없습니다. 어쩔 수 없이 지고 가야하는 십자가입니다.

어차피 지고 가야할 십자가라면 기쁘게 지고가야겠습니다. 두려워하고 피하려고 하면 그 십자가는 더욱 크게 다가오겠지요. 오히려 호기심과 더불어 기대감을 가지고 십자가를 바라봐야겠습니다. 이번 십자가의 특징은 무엇인가, 이번 십자가는 어떻게 다루면 쉬운가, 어떻게 해야 극복이 가능한가, 흥미를 지니고, 연구하면서, 실험해가면서, 그렇게 적극적으로 받아들여야겠습니다.

십자가가 다가올 때 정말 필요한 것은 용기요, 인내요, 도전정신이기도 하지만, 더 중요한 것이 여유입니다. 유머입니다. 큰마음입니다. 이왕 다가온 것, 피할 수 없는 것이라면 즐기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오늘 우리는 주님 탄생 예고 대축일을 지내고 있습니다. 평범한 시골 처녀 마리아에게 너무나 가혹한 십자가가 다가옵니다. 아기 예수 탄생이라는. 구세주의 어머니가 된다는 것, 물론 큰 기쁨이요, 영광이 될 수도 있겠지만, 엄청난 부담과 희생, 고통이 예견되는 십자가의 길이기도 했습니다.

언젠가 그는 성장한 아들 예수님을 떠나보내야만 합니다. 언젠가 그는 아들 예수님의 죽음도 목격해야 합니다. 아들의 십자가 밑에서 무기력하게 그냥 서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성모님께서 위대한 이유는 여기에 있습니다.

인류 전체를 위해 삼십년간 고이 키워온 사랑하는 아들 예수님을 떠나보낸 것, 결국 아들 예수님을 진정으로 사랑했기에 더 큰 사랑을 위해 아쉽지만 그를 놓아주신 것.

사랑하는 아들 예수님이든, 자기 자신이든, 그 어떤 상처든, 아무리 무거운 십자가든, 그 뭐든 떠나보냄, 그 고통스런 순간을 잘 극복한 성모님이셨기에, 진정한 하느님의 어머님이 되는 영광을 입게 된 것입니다.

난데없이 다가온 너무나 가혹한 십자가 앞에 성모님은 호들갑을 떨지 않으셨습니다. 도망치지도 않으셨습니다. 그저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것이라니 기쁘게 수용하셨습니다. 더 나아가서 설레는 마음으로 십자가를 고이 끌어안으셨습니다.

살레시오회 양승국 신부
  | 03.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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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하느님께서는 대 프로젝트를 구상하시고
인선 작업에 나서신다.
이 프로젝트는 역사상 그 어떤 프로젝트보다도
위대하고 심혈을 기울여야만 하는 사업이다.
요즘 문제가 되고 있는 경부대운하 프로젝트도
비교가 안될 정도로 중대한 사업이다.
온 인류를 죄악의 구렁텅이에서 빼내어
영원한 생명의 나라도 데려가는 구원 계획이기 때문이다.

아마도 하느님께서도
고민을 많이 하셨을 게다.
<누구를 보낼 것인가?>
<누구에게 그 시작을 맡길 것인가?>
당신의 구상은 이미 다 되어 있었다.
그 구상은 당신 독생성자로 하여금
사람이 되어 직접 사람의 처지에까지 내려가서
그들을 다시 이끌어 올린다는 회심에 찬 계획이다.
거의 완벽한 계획이다.

하지만 단 한가지가 모자란다.
그 독생성자가 사람이 될 수 있도록
그 구원사업의 시작을 가져다 줄 수 있는 인물이 꼭 필요했다.

자, 누구를 선택할 것인가?
우선, 여자여야 한다는데는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그럼, 어떤 여자여야 하는가?
미스 코리아나 미스 유니버스 중에서 택해야 할까?
서울대나 하버드 대학에서 제일 똑똑한 여자를 택해야 할까?
삼성이나 현대, 아니면 다른 갑부의 딸이어야 할까?
아니면 연예인, 탈렌트나 영화배우 중에서
잘 나가는 여자를 택해야 할까?

아무리 생각해봐도 이런 류의 여자는 아닌 것 같았다.
어떤 조건이 필요한가 다시한번 따져보았다.

첫번째 조건은 순수성이다.
처녀요 맑고 순수한 영혼이어야 한다.
속된 여자여서는 안된다.

두번째 조건은 순응성이다.
이 구원 프로젝트를 잘 이해하고 적극적으로 예하고
응답하는 사람이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실패로 돌아갈 공산이 크다.

세번째 조건은 인내심있는 수용성이다.
이 프로젝트를 완성시키기 위해서는
수많은 고통이 뒤따르게 될 것이다.
사람들의 몰이해와 예상치도 못했던 가슴아픈 일들을
많이 겪게 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인내심 있게
그러한 고통과 몰이해를 수용할 수 있어야만 한다.

그래서 하느님께서는
인사부장 가브리엘을 시켜 합당한 사람을 찾아보게 하셨다.
가브리엘은 위의 조건을 충족시켜 줄 사람을 찾기 위해
도시가 아닌 시골로 갔다.
왜냐하면 시골여인이야말로
순수성을 간직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중에서도 다윗가문과 관련이 있는 여인을 하나 찾았다.
그것은 하느님의 구원계획을 잘 아는 가문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다윗가문 여자 중에는 합당한 사람이 없어서
다윗가문의 요셉이라는 사람과 약혼한 처녀를 택하게 되었다.
지켜서 살펴보니 순수성과 수용성에 있어서는 합격이었다.

이제 문제는 순응성이다.
그래서 가브리엘은 마리아에게 직접 접근한다.
순응성 테스트의 시간이다.
마리아는 힘들어 한다.
하지만 결국 순수성과 수용성이 있었기에
기꺼이 순응한다.

<그대로 내게 이루어지소서!>

바로 이것이었다.
하느님이 바라신 선택이 이렇게 해서 이루어지게 되었다.
하느님의 인선방식은 참으로 기묘하다.
그리고 그 방식은 정말 옳았다.
마리아의 선택은 인류 구원의 시작이었다.

......

나라의 일꾼들을 선택하기 위한
대통령선거가 있었고,
또 우리는 국회의원을 뽑는 총선을 앞두고 있다.
서로 자기가 적격자라고 자처한다.

어떤 인물을 선택해야 하는가?
그 선택 기준은 무엇인가?

그리고 나는 어떠한가?
과연 하느님의 선택을 받아
하느님 나라를 위한 일꾼으로 불림받기에
합당한 자질을 갖추고 있는가?

나는 마리아처럼 순수한 영혼인가?
나는 마리아처럼 인내심을 갖춘 수용적인 사람인가?
나는 마리아처럼 <예> 할줄 아는 순응적인 사람인가?
그렇지 않다면
스스로 사도임을 자처해서는 안되리라.
하느님께서 파견하신 자가 아니라
내가 스스로 나를 파견하는 것이 되고 말리라.

선택된 이들의 모델이신 성모님,
저를 위해 빌어주소서.
저희를 위해 빌어주소서.
우리 또한 당신처럼 순수하고
수용적이고 순응적인 영혼이 되도록.
아멘.

작은 형제회 오상선 신부
  | 03.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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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체성과 사명

프란치스코 성인이 오상을 받았다는 알베르나 산에 있는 성당에 들어가면 예수 탄생 예고의 순간을 표현한 벽화가 있습니다. 거기에서 가브리엘 천사가 마리아께 예수님 잉태 소식을 알리는데 하늘에서는 하느님과 천사들이 초조하게 마리아의 대답을 기다리고있습니다. 이 초조한 기다림은 “보십시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라는 마리아의 전적인 응답에 순간 기쁨으로 변합니다.

한 인간이 자기 죽음을 넘어선 믿음의 응답은 세상에 생명을 선사합니다. 이는 자신의 정체성과 사명을 알고 있는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응답입니다. 하느님의 일에 자발적이고도 믿음에 찬 이 응답은 책임이 따르는 것입니다. 그래서 구세주의 어머니가 되리라는 하느님의 부르심에 마리아는 예수님 잉태에서부터 예수님의 십자가상 죽음, 성령강림에 이르기까지 책임 있게 살아 있는 “예”를 충실히 살아가십니다.

자신이 누구인지를 아는 사람은 자기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압니다. 자기 정체성에 대한 바른 이해는 자신의 소명이 무엇인지도 알게 해줍니다.

이 세상은 지금 책임 없는 말과 행동이 난무합니다. 자기 정체성의 부재로 방황합니다. 무책임한 결혼생활에서 이어지는 가족 해체의 증가와 개인주의, 생명경시 사상의 팽배 앞에서 진정한 신앙인은 누구이며, 그 신앙인의 사명이 무엇인지 마리아를 통해 바라봅니다.

정명숙 수녀
  | 03.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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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베 마리아!

아베 마리아(Ave Maria)! 가브리엘 천사가 마리아에게 나타나 던진 첫 인사말입니다. 우리의 인사말과 별 차이도 없는 평범한 인사말입니다.

“안녕하세요? 마리아.”

그러나 이 평범한 인사말을 기점으로 하느님의 인류를 위한 구원계획이 첫걸음을 내딛습니다. 이 조용한 인사말을 통해 하느님의 무한하신 자비가 우리 인간의 비참을 관통합니다. 이 간단한 인사말을 통해 마리아는 하느님께서 거처하시는 성도로서의 새 삶을 시작합니다.

오늘도 가브리엘 천사는 매일 아침 우리 집 현관 앞에 서서 문을 두드리며 외칩니다.

“아베, 스테파노!”

“아베, 베드로!”

“아베, 데레사!”

다시 한 번 하느님 구원의 역사가 시작될 텐데, 내 도움이 필요하다고, 하느님께서 나를 당신의 일꾼으로 선택하셨다고, 그 표시로 오늘 새로운 하루를 선택하셨다고, 감사와 사랑의 마음으로 하느님의 부르심에 기쁘게 응답하라고, “아베, 스테파노!”라고 외치는 것입니다.

한 거룩한 사제가 있었습니다. 그는 누군가가 자신의 사제관 문을 두드릴 때 마다 마음속으로 이렇게 외쳤다고 합니다.

“아베!”

누군가가 자신을 찾아올 때 마다, 누군가가 자신의 손길을 필요로 할 때 마다, 누군가가 자신의 시간을 빼앗을 때 마다, 누군가가 자신을 귀찮게 할 때 마다, 그는 “아베!”하고 외치며 천사의 부르심으로 여겼다는 것입니다.

오늘은 주님 탄생 예고 대축일입니다. “아베 마리아!”라는 가브리엘 천사의 인사에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감사와 사랑의 마음으로 Fiat!(보십시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그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으로 응답한 마리아의 신앙을 큰 목소리로 찬미하는 하루입니다.

젖과 꿀이 흐르는 축복된 나라, 더 이상 고통도 눈물도 없는 평화로운 세상, 인류 만민의 구원을 위한 하느님의 계획의 완수를 위해서는 미약하지만 우리 각자의 기여도 필요합니다. 우리 각자의 협조도 필요합니다.

그것은 절대로 크고 어려운 일이 아닐 것입니다. 매일의 삶에 대한 충실, 이웃들 안에 들어있는 나와 다름을 기꺼이 참아내기, 매일 다가오는 십자가들을 당연히 끌어안기, 이웃들의 작은 요청들을 기쁘게 들어주기, 더 나은 세상을 위한 미세한 몸짓들

▶ 살레시오회 양승국 신부
  | 03.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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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조의 "Fiat"

어제 저에게도 기쁜 소식을 하나 들었습니다.
아이가 안 생겨 온 집안이 걱정하며
그토록 오래 기다리고 기다리던 아이가 생겼다는 소식입니다.
안 생기다 생기니까 쌍둥이라고 더 좋아하는 것이었습니다.
제가 기도해주어 아이가 생겼다고 저에게 너무 감사하다고 인사합니다.
저도 기도를 하였지만 제 기도로 그 아이가 생겼겠습니까?
모든 사람, 그 중에서도 아마,
그 아이의 할아버지, 할머니 될 분들의 기도가 가장 간절했겠지요.

그런데 한 번 가만히 생각해봅시다.
이 아이의 탄생이 우리 기도의 결과일까요?
이 아이의 탄생 계획이 없었는데
우리의 기도 때문에 하느님께서 주신 것일까요?
계획은 있었지만 더 있다가 주실 계획이었는데
우리의 기도 때문에 앞당겨 주신 것일까요?
하나만 주실 계획이었는데
우리의 기도 때문에 쌍둥이를 주신 것일까요?
신비이기에 우리가 알 수 없지만
만일 그런 것이라면
하느님께서 우리의 기도에 순종하신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에 대해 묵상해봅니다.
주님의 탄생이 우리 기도의 결과인가?
아아, 그것은 아닙니다.
우리 인간은 그런 꿈도 꾸지 못했습니다.
그런 엄청난 일이 일어날 수 있다는 가능성조차 생각못했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탄생은 어느 인간의 그 무엇에 의해 시작된 것이 아닙니다.
인간의 소망에 의해 시작되지도 않았고
인간의 기도에 의해 시작되지도 않았습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어머니라고 받드는 마리아조차도
이런 일은 상상도 못했던 일이고,
그러니 기도를 드리지 않았음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탄생은 우리 인간으로서는 전혀 상상도 할 수 없었던,
그리고 인간의 그 무엇이 먼저 있을 수 없는
100% 하느님의 Initiative(主導하심)입니다.
마리아가 기도해서 태어난 것이 아님은 물론
마이아가 예뻐서 마리아에게 태어난 것도 아닙니다.
철저히 하느님의 계획이고
완전히 하느님의 Initiative입니다.
하느님께서 아들을 보내시기로 작정하신 것이고
하느님께서 아들의 어머니 마리아를 창조하신 것입니다.
마리아는 하느님의 그 계획과 주도하심에 순응하신 것뿐입니다.

그러니 성모 마리아 입장에서 보면 오히려 느닷없는 것입니다.
마른하늘에 날벼락입니다.
‘마른하늘에 날벼락도 유분수지!’라고 얘기하는데 바로 그 꼴입니다.
그러나 이런 갑작스러움에도 마리아는 ‘Fiat' 하셨습니다.
받아들이기엔 너무 벅찬 것임에도 마리아는
‘그대로 이루어지소서!’ 하셨습니다.
불가능할 것 같아 보였어도 마리아는 ‘Fiat' 하셨습니다.
어쩌자고 이러시는지 그 뜻을 몰라도 마리아는
‘그대로 이루어지소서!’ 하셨습니다.

그리하여 인간이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 이루어졌습니다.
그러니 성모 마리아의 이 “Fiat"은 창조입니다.
이 “Fiat"이 하느님의 뜻의 성취임은 물론
태초에 “생겨라!”는 말씀 한 마디에 만물이 생겨났듯이
“Fiat"이라는 말씀 한 마디에 주님이 생겨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당신의 뜻대로,
그대로 저에게서 이루어지소서.
그대로 이 땅위에서 이루어지소서.”하고 우리가 순응하여 말할 때
우리도 순종하는 것이요 창조하는 것입니다.

▶ 작은 형제회 김찬선 신부
  | 03.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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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십시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거울 같은 성모님

절친한 친구의 생일을 맞아 진심이 담긴, 그리고 꽤 값나가는 선물을 준비했다고 생각해보십시오. 드디어 생일날입니다. 찻집에 마주 앉아 준비한 선물을 꺼내 친구에게 건넸습니다. 그런데 그 친구가 나의 선물을 받지 않았다고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애써 선물을 준비한 내 기분이 어떻겠습니까?

아기 예수 잉태는 마리아 입장에서 보면 일종의 선물이었습니다. 선물도 그냥 선물이 아닌 ‘대박’ 선물, 인생을 송두리째 바꾸는 초대박 선물이었습니다.

마리아는 위로부터 오는 선물(하느님께서 주신 가장 큰 은총의 선물인 구세주의 잉태)에 자신을 100% 개방하였고, 두렵고 설레는 마음으로 받아들였으며, 결국 그 선물로 인해 팔자를 고친, 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전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께서는 성모님에 대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성모님은 거울 같은 분이십니다. 성모님의 얼굴은 하느님의 구원 업적이 가장 맑고 투명하게 반영하는 거울입니다.”

성모님의 믿음은 참으로 탁월한 것이었습니다. 성모님의 믿음이 더욱 돋보이는 것은 믿음이 계속 성장해나갔다는 것입니다. 매일 끊임없이 믿기를 멈추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모든 것이 베일에 가려져있는 희미한 상태에서도 희망하기를 멈추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성모님은 원죄 없이 잉태하신 그 순간부터 성덕으로 온전한 믿음으로 충만하셨으나, 하느님 아버지의 뜻을 받들어 고통스런 신앙 여정을 걸어가시면서 믿음과 희망과 사랑 안에 계속 성장해 나가신 것입니다,

성모님의 순종하는 믿음의 덕은 또 얼마나 영웅적인지요? 인간적인 눈으로 바라봤을 때 도저히 백번 깨어나도 이해할 수 없는 대 사건, 아기 예수의 잉태 사건 앞에서 보여준 성모님의 지성과 의지의 통한 완전한 순종은 참으로 놀라운 것이었습니다.

성모님은 순종하는 믿음을 통해 우리들에게 참 신앙인의 모델을 명백하게 보여주셨습니다. 성모님의 생애는 순례 길에 서 있는 하느님 백성인 교회 공동체 모든 구성원들에게 희망과 위로의 표지로 빛나고 있습니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는 응답은 마리아의 온전한 개방성을 증명합니다. 이 응답은 마리아의 하느님 인류구원사업에 대한 전적인 개방을 의미합니다. 이러한 마리아의 개방성은 가브리엘 천사의 잉태 예고 때뿐만 아니라 한평생에 걸쳐 지속됩니다. 탄생 예고 때부터 골고타 언덕에 이르기까지 지속적인 응답과 개방을 통해 하느님의 인류구원사업에 최대한의 모성적 협력을 다하셨던 것입니다.
인류 역사상 가장 큰 사업이었던 ‘구세주의 탄생’, ‘말씀의 강생’ 사업의 성공을 위해 능동적이고 책임감 있게 ‘예’하고 응답한 마리아의 모범이 오늘 우리 삶 안에서 되풀이되면 좋겠습니다.

암브로시오 성인의 당부가 오늘 하루 우리 생활 안에 계속 메아리쳤으면 하는 바램을 가져봅니다. “여러분 각자 안에 하느님을 찬송하는 마리아의 영혼이 깃들고, 또 여러분 각자 안에 하느님 안에서 마음 기뻐 뛰노는 마리아의 영혼이 깃들었으면 합니다.”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 03.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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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리아 앞에 나타난 천사는 마리아가 은총을 가득히 받은 이이며, 주님께서 함께 계시기에 기뻐하라고 말합니다. 이 말을 들은 마리아는 몹시 놀랐지만, 이내 천사의 말이 무슨 뜻인가 곰곰이 생각합니다. 이렇게 곰곰이 생각하고 있는 마리아에게 천사는 당신이 낳을 아기가 하느님의 아들이라 불리고, 그분의 나라는 끝이 없을 것이라 이야기합니다. 성모 어머니께서는 이러한 천사의 말을 평생 마음속에 간직하셨습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에게 가시관을 씌우고 채찍질하는 순간에도, 결국 당신의 아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돌아가시고 당신 두 팔에 안기는 순간에도 천사의 말을 간직하고 계셨습니다.

성모님은 당신이 은총을 가득히 받은 이라는 사실을 마음속에 평생 간직하셨습니다. 이 은총은 주님의 종으로서 주님의 말씀이 당신을 통해서 이루어질 수 있도록 내어드리는 은총이었습니다. 이러한 성모님을 교회는 어머니로 모시고, 신앙인의 표지로 삼고 있습니다. 우리는 성모님을 우리를 돌보아 주시고 우리를 위해 간구해 주시는 분으로만 여겨서는 안 될 것입니다. 신앙인의 모범이신 성모님을 본받으려는 구체적인 노력이 모든 신앙인에게 요구됩니다. 성모님은 인간으로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상황들 속에서도 하느님께서 약속하신 바를 끝까지 믿으시는 모범을 보여주셨습니다.

<한모세 수사>
  | 03.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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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뻐하여라. 주님께서 너와 함께 계시다.”(루카 1,28)

오늘은 참으로 기쁜 날입니다. 왜냐하면, 이 ‘기쁨’은 단순히 던져진 인사말인 것이 아니라, 마리아에게서 이루어져 실재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우리에게도 이미 실현되어 있는 실재인 까닭입니다.

오늘 <복음>에서는 이 ‘기쁨’이 실현되는 과정을 보여줍니다. 곧 선포된 말씀이 실현되는 기도의 과정, 곧 렉시오 디비나의 과정을 잘 보여줍니다.

<첫째>는 기쁨이 선포되고, 선포된 말씀이 마리아에게서 경청됩니다.

이는 “보십시오.”(루카 1,38) 라고 하는 하느님과의 대면에서 시작됩니다. 곧 그분 면전에서 신원을 깨달아 알아듣는 일에서 시작됩니다. 이 일을 벌이시는 분이 누구신지? 그리고 그분 앞에 대면하고 있는 나 자신이 누구인지에 대한 인식입니다. 곧 “주님의 종이노니”(루카 1,38) 라고 고백하면서, 주님이신 분 면전에 주님의 종으로 다소곳하게 나섭니다.

<둘째>는 경청된 말씀을 영접하여 묵상합니다.

마리아는 천사의 인사말을 듣고 그 뜻을 곰곰이 새겨봅니다. 곧 “저는 남자를 모르는데, 어떻게 그런 런 일이 있을 수 있습니까?”(루카 1,34) 하고 그 일이 무슨 뜻인지를 들여다봅니다. 그리고 마침내, 그것이 ‘하느님의 뜻’임을 알아듣습니다.

<셋째>는 ‘하느님께서 하시고자 하는 일’에 대한 마리아의 응답이 이루어집니다.

마리아는 그분의 사랑에 자신을 수락합니다. 곧 그분의 뜻에 승복하고, 그분께서 당신의 사랑을 자신 안에서 이루시도록 자신을 그분께 바쳐드립니다. 그것은 약혼자 요셉과의 단란한 미래를 포기하는 것일 뿐만 아니라, 율법의 위반자로서 목숨까지도 내놓는 일이요, 자신의 모든 것을 내놓는 일입니다. 그분의 은총이 자신 안에 파고들도록 자신을 그분께 수락하는 일이요, 그분께서 원하신 바를 이루시도록 자신을 그분의 뜻에 맡기는 일입니다. 곧 하느님의 사랑에 대해 “피앗”으로 동의하고 받아들이는 일입니다.
그것은 “말씀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1,38) 믿는 일이요, 사랑을 드리는 봉헌이요, 하느님의 뜻에 대한 순명입니다. 이를 <제1독서>의 응송시편에서는 “주님, 당신 뜻을 따르려 이 몸이 대령했나이다.”(시편 39,8) 라고 하고, <제2독서>에서는 “하느님, 저는 당신의 뜻을 이루려고 왔습니다.”(히브 10,9) 라고 말합니다.

<넷째>는 단지 그렇게 응답하기만 한 것이 아니라, 그것이 진정 이루어지기를 희망합니다.

마리아는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1,38) 하고 흔연히 자발적으로 그것을 원합니다. 실상 우리가 할 수 있는 한 가지는 오직 임이 나를 사랑하도록 허용하는 일이요, 임의 사랑에 자신을 승복하는 일이요, 임이 사랑하시도록 온전히 자신을 내어주는 일이요, 사랑하기에 앞서 사랑을 받아들이는 일일 것입니다. 하여, 받아들인 그 사랑으로 사랑하는 일, 곧 임으로 임을 사랑하는 일이 벌어지는 일, 바로 그 한 가지뿐이게 됩니다. 오로지 그분만이 자신의 전부가 되고, 그분의 힘에 덮이게 되는 일입니다.

우리는 다시 천사의 인사말을 들어봅시다. “기뻐하여라. 주님께서 너와 함께 계시다.”(1,28)

이제, 우리는 마리아와 함께 이 크고 큰 은총을 입었음에 기뻐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셔서 당신의 아드님을 구세주로 주셨습니다. 이 얼마나 큰 기쁨인지! 내 안에 사랑이 있다는 이 사실, 사랑하는 분이 있다는 이 사실 말입니다. 우리에게 우리의 사랑을 받아주는 사랑하는 임이 있다는 이 사실에 그만 자지러집니다. 우리는 참으로 기쁘고 행복합니다.

이제 우리는 어머니 마리아와 함께 노래합니다. “내 마음이 나의 구원자 하느님 안에서 기뻐 뜁니다.”(루카 1,47)

▦ 파주 올리베따노 이영근 신부 : 2017년 3월 25일
  | 03.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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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도회] 우리 삶의 의미는 무엇인가? -주님의 뜻을 이루는 것-

사순시기 대축일의 배치가 참 절묘합니다. 이동 경축으로 3월20일 요셉 대축일을 지낸후 오늘 3월25일은 주님 탄생 예고 대축일입니다. 십자가의 여정 중에 오아시스 쉼터와 같은 대축일입니다. 요셉 대축일의 주인공이 요셉이었다면 오늘 주님 탄생 예고 대축일의 주인공은 마리아입니다.두 분 다 주님께 무한한 신뢰를 받았던 분이십니다. 오늘 복음 서두의 말씀이 감동적입니다. 하느님께서 주도권을 잡고 겸손히 활동하시는 모습입니다.

‘하느님께서는 가브리엘 천사를 갈릴래아 지방 나자렛이라는 고을로 보내시어, 다윗 집안의 요셉이라는 사람과 약혼한 처녀를 찾아가게 하셨다.’(루카1,26-27).

요셉대축일 복음에서 친히 요셉을 찾았던 주님의 천사가 이번에는 하느님의 심부름으로 마리아를 찾습니다. 주님은 참 겸손하고 부지런하십니다. 주님의 천사와 마리아의 만남은 그대로 주님과의 만남을 상징합니다. 마리아를 향한 가브리엘 천사의 전갈이 참 은혜롭습니다.

1.“은총이 가득한 이여, 기뻐하여라. 주께서 너와 함께 계신다.”(루카1,28).

제가 고백성사 보속으로 가장 많이 써드리는 말씀 처방전 구절로 모두가 좋아합니다. 주님과의 만남을 통해 축복 받은 존재임을 깨닫는 마리아입니다. 바로 우리가 잊고 지내는 우리의 진면목입니다. 마리아는 물론이고 세례 받아 하느님의 자녀가 된 우리 하나하나의 존귀한 신원을 가리킵니다. 우리 모두 은총이 가득한 이들이여, 주님 또한 우리와 함께 계신다는 것입니다. 얼마나 놀라운 축복인지요. 매일 미사를 통해 깨닫는 진리입니다.

이어지는 대목에서 마리아의 관상적 면모가 잘 들어납니다. 마리아는 몹시 놀랐지만 이 인사말이 무슨 뜻인가 하고 곰곰이 생각하였다 합니다. 마리아의 주님 말씀에 활짝 깨어 열려있는 깊은 침묵이 인상적입니다. 바로 마리아의 이런 면이 하느님의 총애를 받기에 합당한 모습임을 깨닫습니다.

주님의 천사와 마리아의 주고 받는 대화가 참 흥미진진합니다. 이런 일련의 주고 받는 대화의 기도를 통해서 마리아의 내적 삶의 깊이가 얼마나 깊은지 깨닫습니다. 이렇게 마리아와 대화하면서도 주님은 내심 조마조마하셨을 것입니다. 일방적으로 일하시는 주님이 아니라 마리아의 자발적 응답을 통해서만 일하시는 주님이기 때문입니다. 다음 마리아의 응답은 오늘 복음의 절정입니다.

2.“보십시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루카1,38).

아, 마침내 삶의 의미를 발견한 마리아입니다. 마리아의 이 응답이 나오기전 온 우주가 쥐죽은 듯 고요했다는 어디선가 읽은 아오스팅 성인의 주석도 생각납니다. 마리아의 ‘예스Yes’의 응답에 세상 구원 역사의 성패가 달렸기 때문입니다. 참으로 역사적인, 인류역사에 획기적인 전환점이 된 복된 사건입니다. 마리아의 응답이 있었기에 주님의 구원역사도 차질없이 펼쳐질 수 있게 되었으니 하느님도 마리아가 참으로 고마웠을 것입니다. 어느 학자는 이런 마리아를 일컬어 우리가 하느님께 내보일 수 있는 ‘인류의 자부심’이라 했습니다.

우리가 자주 바치는 삼종기도는 바로 오늘 복음에 근거합니다. 마리아의 응답을 통해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졌듯이 우리를 통해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소망하며 바치는 삼종기도입니다. 마침내 마리아의 순종을 통해서 오늘 제1독서 이사야의 예언이 완전히 실현됨을 봅니다.

“보십시오. 젊은 여인이 잉태하여 아들을 낳고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할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 함께 계시기 때문입니다.”(이사7,14ㄴ.10ㄷ).

마리아의 순종의 응답을 통해 하느님께서 주신 최고의 선물 임마누엘 하느님이신 예수님과 영원히 함께 살게 된 우리들입니다. 마리아 성모님을 그대로 닮은 예수님의 순종의 고백도 마리아 성모님의 고백과 일맥상통합니다. 히브리서의 예수님은 시편을 인용해 고백합니다. 바로 오늘 화답송 후렴입니다.

3.“주님, 보소서, 당신 뜻을 이루려 제가 왔나이다.”(시편40,8ㄴ.9ㄱ).

바로 주님께서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평생 화두로 삼아야 할 말씀입니다. 이 ‘뜻’에 따라, 예수 그리스도의 몸이 단 한 번 바쳐짐으로써 우리 모두는 거룩하게 되었고 매일의 이 거룩한 미사를 통해 체험하는 진리입니다.

예수님은 우리 삶의 원형이자 모범입니다. 바로 예수님처럼 주님의 뜻을 이루는 것이 우리 삶의 의미이자 목표임을 깨닫습니다. 주님 탄생 예고 대축일에 주님께서 우리 모두에게 일깨워 주신 참 귀한 진리입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를 통해 당신 천사를 통해 우리 각자에게 말씀하십니다.

“은총이 가득한 이여, 기뻐하여라. 주께서 너와 함께 계신다.”(루카1,28). 아멘.

▦ 분도회 이수철 신부 : 2017년 3월 25일
  | 03.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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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도회] 수락은 고통

“보십시오. 저는 당신의 뜻을 이루려 왔습니다.” “보십시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오늘 축일은 하느님 편에서 보면 통보 축일이고, 마리아 편에서 보면 수락 축일인데 무엇을 하느님은 통보하신 것이고 마리아는 무엇을 수락한 것입니까?

하나마나한 얘기인지 모르지만 하느님께서는 당신 뜻을 통보하신 것이고 마리아는 하느님의 뜻을 수락한 것입니다.

그런데 하느님의 뜻이 도대체 무엇입니까? 당신 아들을 세상에 보내시겠다는 것이고 당신 아들을 보내니 수태하라는 것이지요.

이는 마치 생판 모르는 사람이 아이를 보내며 내 자녀로 키워 달라 부탁하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도 종종 받아들이기 힘든 상황이 닥칠 때 누가 나보고 그것을 하느님 뜻으로 받아들이라고 하면그것을 받아들이기도 힘들지만 그게 과연 하느님 뜻인지 긴가민가하여 고민케 되지요.

그렇습니다. 우리의 삶에는 이렇듯 늘 수락의 어려움과 식별의 어려움이 있고 마리아의 잉태도 바로 이런 것입니다. 제가 언젠가 진주의 생성과정에 대해 말씀드린 바 있지요.진주는 조개가 생성하는 것인데 진주는 이물질이 조개 안으로 들어오는 것으로부터 생성이 시작됩니다.

조개에 이물질이 들어온다는 것은 눈에 티가 들어오는 것처럼 아프고 이물질이 날카로운 것이면 조개에 상처를 입혀 조개를 썩게도 합니다. 그럼에도 진주를 생성하려면 이물질이 들어오는 고통을 받아들여야 하고, 이물질이 상처 주지 못하도록 이 이물질을 감쌀 물질을 분비해야 하는데 이 락카라는 물질을 분비할 때 동반하는 통증도 감수해야 한다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삶의 많은 경우 수락은 수난입니다.

그리고 수락이란 이런 것이기에 쉽지가 않은 것이고 그것이 하느님의 뜻이라는 것을 알면 그나마 쉬운데 우리는 그것이 하느님의 뜻인지 확신할 수 없습니다.

좋으신 하느님이, 사랑이신 하느님이 이러실 리 없다고 생각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느님의 뜻임을 확신한다는 것은 그것이 하느님의 뜻인지 아닌지 진위에 대한 확신이기도 하지만이 고통을 주심도 하느님의 사랑이라는 확신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확신이란 고통에서 사랑을 읽어내는 능력인 것 같습니다.

우리는 종종 마리아는 주님의 어머니이고, 주님의 어머니에게 주어지는 은총을 받았기에 수락도 식별도 별 어려움이 없었을 거라고 생각기 쉬운데 믿음의 은총을 받은 것이지 고통이 없는 은총을 받은 것이 아님을 오늘 우리는 알아야만 하고 이런 수락을 우리는 본받아야겠습니다.

▦ 작은 형제회 김찬선 신부 : 2017년 3월 25일
  | 03.25
459 58%
[수도회] 하느님을 품고 낳으신 어머니

주님 탄생 예고는, 십자가에 달려 죽기까지 순종하시면서(필리 2,7) 자신 전부를 건네주시는, 하느님의 무한한 사랑을 알려줍니다. 마리아의 ‘예’를 통하여, 하느님께서 살을 취하시어 사람이 되시는, 강생의 신비가 드러나게 됩니다. 하느님께서는 천사를 통해 마리아에게 주님 탄생을 알려주시면서, 그녀의 협조를 요청하십니다.

마리아는 납득할 수 없는 놀라운 통보를 받고 몹시 당황해합니다. 그러나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루카 1,38)라고 말하며, 깊은 믿음과 강한 사랑으로 그 모든 것을 받아들입니다. 말씀에 대한 마리아의 순응으로 구원과 행복의 문이 열리게 된 셈입니다.

주님 탄생 예고의 신비를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무엇보다도 먼저 하느님 친히 비우시고 낮추시어 유한한 인간 조건을 취하시어 우리 가운데 오셨음을 알아차려야 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어떤 기적으로 보이신 것이 아니라 우리를 위한 사랑 때문에 기꺼이 가난한 모습으로 우리 가까이 오신 것이지요.

살을 취하시어 사람이 되신 하느님의 뜻과 몸짓이 바로 우리의 생활양식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세상 것들로 채우는 것을 멈추고 하느님이 원하지 않는 모든 것을 비워내야겠지요. 그래야 그 자리에 하느님의 영이 머무실 것입니다. 하느님의 가난과 낮추심이 강생의 신비를 사는 우리 삶의 기본 태도여야 할 것입니다.

다음으로 주님 탄생의 신비를 사는 법을 복되신 마리아에게서 배워야 합니다. 마리아는 이해할 수 없는 하느님의 신비 앞에 두렵고 떨렸으나 그 모든 것을 받아들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네 삶도 이해할 수 없는 일들과 수용하기 어려운 고통의 연속입니다.

그러나 삶의 어느 한 순간도 하느님과 무관하거나 의미 없는 경우는 없지요. 따라서 어떤 상황에서도 마리아처럼 탄생의 신비를 통해 드러나는 사랑과 생명의 오심을 믿고 행동해야 할 것입니다. 고통스럽고 불안하고 두려울 때, 억울함과 불의를 감당하기 어려울 때, 영적 메마름이 덮칠 때 포기하지 말아야겠지요. 그 모든 것은 하느님의 사랑과 창조의 의미를 품고 있는 까닭입니다.
복되신 마리아는 아버지의 말씀에 토를 달지 않고 순응했습니다. 우리도 성모님처럼, 매순간 “말씀하신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1,38) 하고 순응하며 응답할 수 있어야겠습니다. 성모님은 베들레헴에서의 시련, 이집트로 피난, 나자렛 성가정의 가난한 생활, 골고타에서 아드님의 십자가상 죽음을 묵묵히 겪어내셨습니다. 우리도 삶의 이런 순간마다 그것을 사랑으로 견디며 하느님의 뜻을 발견하도록 힘써야겠지요.

한걸음 더 나아가 우리는 주님을 낳는 사람이 되도록 힘써야 할 것입니다. 주님을 낳는다는 것은 하느님의 본질을 다른 이들과 이 세상에 드러내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는 ‘사랑과 순수하고 진실한 양심을 지니고, 마음과 몸에 주님을 모시고 다님으로써 그분의 어머니가 되고, 거룩한 행위로써 주님을 낳게 될 것입니다.’(성 프란치스코, 2신자 편지 53절) 한마디로 가슴 절절한 사랑을 품고 세상 안에서 사회적 사랑을 실천하라는 것입니다.

▦ 작은 형제회 기경호 신부 : 2017년 3월 25일
  | 03.25
459 58%
[수도회] "보라, 이제 네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터이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여라."(루카 1, 31)

믿음을 위하여기도하는 사순시기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신비와 섭리 안에서 살아가는 우리들의 삶입니다. 보드라운 새순이 땅 위로 올라오는 따뜻한 봄의 새로운 시작입니다. 무엇보다도 우리 삶을 바꾸는 가장 강력한 선물은 받아들이는 우리의 믿음일 것입니다. 모든 잉태의 시작에는 믿음의 주인이신 하느님이 계십니다. 모든 생명은 그냥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두려움과 떨림이라는 여정을 거쳤습니다.

마리아는 두려움과 떨림 속에서도 하느님을 향했습니다. 하느님을 향했던 사람이 드디어 성령으로 하느님을 잉태합니다. 하느님의 잉태는 구체적인 말씀의 잉태였습니다. 하느님 말씀은 단절이 아닌 구체적인 소통의 시작이기 때문입니다. 사람과 하느님을 이어주는 생명의 만남인 말씀을 통해 은총의 사순시기 되시길 기도드립니다.

▦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 : 2017년 3월 25일
  | 03.25
459 58%
존재 자체로 순례 하는 우리들에게
확실한 희망과 위로의 표지가 되어주시는 성모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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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브리엘 천사가 전해준 하느님 측의 메시지 ‘주님 탄생 예고’ 앞에 보여준 나자렛의 마리아의 모습이 참으로 감동적입니다.

놀랍고 은혜로운 초대, 그러나 부담스럽고 두려운 초대 앞에 마리아는 즉각적이고 호의적으로 응답합니다. 나자렛 소녀의 응답의 말씀이 참으로 기특하고 갸륵하며 사랑스럽습니다.

“보십시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루카 복음 1장 38절)

단순하면서도 겸손한, 그러나 단호한 결기로 가득한 마리아의 응답 앞에서 하느님께서 참으로 기뻐하시고 흐뭇해 하셨을 것입니다. 하느님 입장에서 그녀를 각별히 사랑하시지 않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이럴 때 어울리는 표현이 아마도 총애(寵愛)가 아닐까 싶습니다.

나자렛의 마리아에 앞서 이스라엘 역사 안에는 수많은 위인들과 예언자들이 하느님으로부터 메시지를 받았습니다.

그들이 보인 반응들을 보면 제각각 다릅니다. 어떤 사람은 “왜 하필 저입니까?”하고 하느님께 따졌습니다. 어떤 예언자는 “죽어도 못합니다?”라며 도망가버렸습니다.

또 다른 사람들은 이런 저런 핑계를 댔습니다. “저는 이미 나이가 너무 많습니다. 이제 곧 세상을 하직할 나이라 죄송합니다!” “제 나이 이제 열 여섯입니다. 도저히 자신이 없습니다.”

그런 면에서 마리아께서 보인 응답은 참으로 각별합니다. 예라고 응답했을 경우 자신에게 닥쳐올 고통과 시련이 엄청날 것임을 예상하고 있었지만, 주님께서 저를 원하시니, 주님께서 저를 선택하셨으니, 주님께서 저를 초대하시니, 앞뒤 돌아보지 않고 예! 라고 응답하신 것입니다

오늘도 주님께서는 다양한 형태로 우리를 초대하고 계십니다. 많은 경우 우리의 귀, 영적인 귀, 마음의 귀가 제대로 열리지 못한 관계로, 초대의 말씀을 미처 듣지 못함에도 불구하고, 주님께서는 끊임없이 우리를 부르고 계십니다. 매일의 다양한 사건들, 다양한 사람들을 통해서 말입니다.

다양한 음성을 통해 매일 우리에게 다가오는 하느님의 초대, 하느님의 음성을 나자렛의 마리아처럼 잘 경청할 수 있는 은혜를 청해야겠습니다. 하느님의 초대 앞에 망설인다거나 뒤로 물러서지 말고 기쁘게, 즉각적으로 순명할 수 있도록 노력해야겠습니다.

영성생활이란 다른 것이 아닌 것 같습니다. 하느님의 뜻, 하느님의 음성, 하느님의 부르심에 대한 인간측의 적극적인 호응과 응답과 협력, 그것이 참된 영성 생활이 아닐까요?

그런 면에서 나자렛의 마리아는 가장 충실하고 모범적인 영성생활의 길잡이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마리아는 존재 자체로 순례 하는 하느님 백성인 우리들에게 확실한 희망과 위로의 표지가 되어주시니, 기쁨에 찬 감사와 공경을 드려야 마땅하겠습니다.

척박한 산골 나자렛에서 태어나신 마리아께서 평생에 걸친 순명과 기도, 각고의 노력 끝에 영광스럽게도 하느님의 어머님이 되셨습니다. 성모님의 생애는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 각자에게도 큰 희망을 주고 있습니다.

한없이 부족한 우리들이지만 우리도 노력하고 또 노력하면 하느님의 큰 영광에 참여할 수 있다는 것을 오늘 우리는 기억해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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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신부
2020년 3월 25일
  | 03.25
459 58%
오늘은 주님탄생예고 대축일입니다. 참으로 기쁜 날입니다. 천사는 마리아에게 뿐만 아니라, 우리 모두에게 기쁨에 찬 인사말을 전합니다.

“기뻐하시오. 은총을 입은 이여, 주님께서 함께 계십니다.”(루카 1,28)

오늘 <복음>은 가브리엘 천사와의 세 번의 대화를 통해 마리아께서 어떻게 자신의 신원과 소명을 알아듣고 응답하게 되는 지를 보여줍니다.

<첫째 대화>는
천사의 인사말에 대한 마리아의 당황, 곧 인사말이 무슨 뜻일까 하고 곰곰이 생각함입니다(루카 1,29).

<둘째 대화>는
천사의 아기 잉태 예고와 그 아기의 신원과 소명에 대한 마리아의 물음, 곧 “어떻게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있겠습니까?”(루카 1,34)라는 물음입니다.

<셋째 대화>는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에 대한 마리아의 응답, 곧 “주님의 종이오니, 말씀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루카 1,38)라는 응답입니다.

<첫째 대화>에서의 마리아의 당황은
‘은총을 입음’과 ‘주님께서 함께 계심’을 아직 실감하지 못함이요, 이를 어떻게 알아들어야 할지에 대한 곰곰이 생각함입니다.

<둘째 대화>에서의 마리아의 물음은
아기의 잉태와 그 아기의 사명이 자신과는 무슨 상관이 있는지, 그리고 이를 어떻게 따라야 할지에 대한 물음입니다.

<셋째 대화>에서의 마리아의 응답은
‘하느님의 뜻’ 아래 놓인 자신의 신원과 소명을 깨닫고서 이에 순명함입니다.

우리는 마리아의 이 깨달음을 세 가지로 알아들어 볼 수 있습니다. 먼저, 지금 이 일을 하시고자 하는 분이 누구인지에 대한 깨달음입니다. 곧 성령이 내려오시고 지극히 높으신 분의 힘이 감싸고 거룩한 하느님의 아들이 탄생하는 이 일은 다름 아닌 “하느님이 하시는 일”임을 깨달음입니다. 다음에는, 나는 누구인가라는 자신의 신원에 대한 깨달음입니다. 곧 “주님의 여종”임을 깨달음입니다. 그리고 자신의 소명에 대한 깨달음입니다.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것에 대한 깨달음입니다. 그것은 하느님께서는 ‘아기 잉태’를 원하신다는 것이며, 바로 이 ‘하느님의 뜻’에 응답하는 것이 자신의 소명임을 깨달음입니다.

그렇다면 이 소명에 마리아께서는 어떻게 응답하였을까요?

그것은 무엇보다도 먼저 그것은 사랑하기에 앞서 먼저 그분의 사랑을 허용하는 일, 곧 그분께서 당신의 사랑을 내 안에서 이루시도록 나 자신을 그분께 허용하는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분을 수락하고, 그분의 사랑을 수락하고, 그분의 사명을 수락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름 하여, 하느님의 사랑에 대한 “예”(피앗)라는 동의, 곧 받아들임이었습니다. 또한 그것은 그분의 은총이 나에게 파고들도록 자신을 그분께 승복하는 일이었습니다. 곧 당신께서 원하신 바를 내 안에서 하시도록 나 자신을 하느님의 뜻에 승복시키는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화답송>에서처럼
“주님, 당신 뜻을 따르려 이 몸이 대령했나이다.”(시편 39,8)라고 말하는 것이요,

<제2독서>에서처럼
“하느님, 저는 당신의 뜻을 이루려고 왔습니다.”(히브 10,9)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름 하여, 하느님의 뜻에 대한 “순명”이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그분께 결혼의 단란함과 미래뿐만이 아니라,
율법의 위반자로서 목숨까지도 내어드리고,
자신의 모든 것을 내맡기는 일이었습니다.
나아가서 그것을 희망하고 바라는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말씀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루카1,38)라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오로지 그분만이 자신의 전부가 되는 일이었습니다.
이름 하여, 말씀에 대한 “믿음”의 봉헌이었습니다.
그분의 희망 안에 일치를 이루는 일이었습니다.

우리는 다시 천사의 인사말을 들어봅니다.

“기뻐하시오. 은총을 입은 이여, 주님께서 함께 계십니다.”(루카 1,28)

이제 우리는 마리아와 함께 이 크고 큰 은총을 입었음에 그리고 주님께서 함께 계심에 기뻐합니다. 하느님의 사랑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셔서 당신의 아드님을 구세주로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이 기쁨보다 하느님의 기쁨은 더할 것입니다. 그것은 당신의 사랑을 받아주는 이가 있다는 기쁨일 것입니다. 그 기쁨이 큰 까닭은 사랑이 아무리 크고 크다 하여도 그 사랑을 받아줄 이가 없다면, 그 사랑은 열매를 맺지 못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성모님은 바로 그 크신 사랑을 받아들인 사랑의 감실, 거룩한 성전이 되셨습니다. 이제, 마리아의 소명은 구세주의 구원은총을 입은 우리 그리스도인 모두의 소명이요, 교회의 소명이 되었습니다. 그것은 먼저 하느님의 사랑을 받아들이는 일이요, 그 사랑을 믿고 따르는 일이요,

먼저 받은 바로 그 사랑으로 하느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일입니다.
그렇습니다.
실상 필요한 한 가지는 임이 나를 사랑하도록 허용하는 일,
임의 사랑에 나를 승복하는 일,
임이 온전히 나를 사랑하도록 나를 온전히 내어주는 일,
사랑에 앞서 사랑을 받아들이는 일,
하여, 받아들인 그 사랑으로 사랑하기,
임으로 임을 사랑하기.
이 얼마나 큰 기쁨인지요.
내 안에 사랑이 있다는 사실,
사랑하는 이가 있다는 사실,
그리고 그 사랑을 받아주는 이가 있다는 이 사실이 그 얼마나 큰 기쁨인지요!
우리는 참으로 기쁘고 행복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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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말씀에서 샘솟은 기도 -

"기뻐하여라. 주님께서 너와 함께 계시다."(루카 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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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
참으로 큰 기쁨입니다.
제 안에 사랑이 있다는 이 사실, 참으로 놀랍고 아찔한 감미로움입니다.
하오니, 이제는 그 사랑에 승복하게 하소서.
항상 저를 향하여 있는 당신 사랑 안에 머무르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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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주 올리베따노 이영근 신부
2020년 3월 25일
  | 03.25
459 58%
네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터이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여라.(루카 1, 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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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을 헤아려보는 사순의 봄입니다. 말씀이 우리에게 오십니다.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지를 가르쳐주십니다. 그것은 말씀입니다. 우리 몸에 담아야 할 것 또한 말씀입니다. 말씀의 잉태로 뼈와 살이 형성됩니다. 말씀만 한 탄생은 없습니다. 말씀은 말씀으로 통합니다. 말씀은 말씀으로 이어집니다. 말씀이 점점 자라고 커지고 성장합니다.

말씀이 우리를 품어줍니다. 말씀으로 잃어버린 사랑을 얻게 됩니다. 말씀의 잉태이며 말씀의 탄생입니다. 말씀의 때에 말씀이 탄생하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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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
2020년 3월 25일
  | 03.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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