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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축일/명절강론 코너 ( 대축일/명절 미사에 관련된 강론자료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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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천] 한결같은 사랑에 찬미와 감사를…
조회수 | 51
작성일 | 18.06.01
[춘천] 한결같은 사랑에 찬미와 감사를…

우리는 공기가 있어 숨을 쉴 수 있는 것, 물을 마실 수 있는 것, 흙이 있어 딛고 설 수 있는 것 등 우리의 노력 없이도 우리에게 제공 되고 있는 것들에 대해 너무도 당연하다는 생각을 갖곤 합니다. 아니 당연하다고 생각조차 못할 정도로 그 고마움을 잊고 지냅니다. 늘 우리 곁에 너무도 가까이 있기 때문입니다.

극적으로 이집트를 탈출한 이스라엘 역시 매 순간 자신들을 이끌어가시던 하느님의 사 랑의 손길을 느끼며 자신들에 대한 하느님의 사랑을 깊이 체험하였을 것입니다. 그들이 홍해를 건널 때, 광야에서 물과 만나와 메추라기를 먹을 때도 항상 하느님 사랑의 이끄심이 함께 하심을 체험하였습니다.

그러니 오늘 시나이 산에서 계약을 맺으며 이스라엘의 온 백성은 그 사랑 앞에 얼마나 커 다란 감사와 찬미를 드렸을까요? 그들은 분명 한목소리로 “주님께서 하신 모든 말씀을 실행 하겠습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신 모든 것을 실행하고 따르겠습니다.” 하고 크게 외쳤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마음도 잠시, 감사와 찬미 의 다짐은 무너집니다. 그들은 또 다시 의심하 기 시작했고, 주변에 한눈을 팔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에 대한 한결같은 사랑이 담 긴 계약과 율법을 하느님께 대한 진정한 감사 와 찬미에서 살지 못하고 결국에는 형식과 의 무에 얽매인 율법주의에 빠지고 말았습니다. 그들을 이집트에서 체험한 한결같은 사랑과 그 계약에 대한 감사의 마음은 그렇게 기억 저 편으로 사라져갔습니다.

과연 우리에게 주어진 사랑은 당연한 것일 까요? 부모님께로부터 받아온 사랑, 신자들로 부터 받는 사랑, 동료 사제들로부터 받는 사 랑. 어느 것 하나도 당연한 사랑은 없어 보입니다. 모두 부족함을 참아주고, 감싸주고, 기 다려주고, 이해해 줍니다. 그렇게 더 가까이 다가서려는 노력과 그렇게 하고자 하는 결심 에서 주어지는 사랑임을 새롭게 깨닫습니다.

우리에 대한 하느님의 사랑도 당신의 자유로운 결단과 선택이었습니다. 하느님께서 이집트 종살이에 허덕이는 이스라엘을 탈출시키시고 그들을 당신의 백성으로 삼으신 것은 분 명 고통에 신음하는 이스라엘의 처지에 함께 하시고자 하신 하느님의 결심이셨습니다. 더욱이 외아들마저 내어주신 그 사랑은 우리와 같아지시기를 자처하신 하느님의 결정적인 결단이었습니다. 십자가를 통해 보여주신 하느님의 사랑은 아버지의 뜻에 순명하고자 하신 아드님의 힘겨운 결단이며, 그리스도의 땀 과 피를 통한 결실이었습니다. 분명 우리에 게 주어진 하느님의 사랑은 우리를 끝까지 사랑하고자 하신 의지의 결실입니다.

오늘 그리스도의 성체 성혈 대축일을 지내면서, 마지막 만찬 때에 파스카 음식을 나누시며 보여주신 예수님의 찬미와 감사의 모범을 본받아야 하겠습니다. 매 미사 안에서 갱신되고 더욱 굳건해지는 새 계약에 참여하며, 우리 구원을 위한 그리스도의 피와 땀이 어린 사랑의 수고에 감사와 찬미를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그 놀라운 사랑에 대한 찬미와 감사의 마음으로 우리 가슴에 사랑의 불씨를 지펴야 하겠습니다.

▥ 춘천교구 이종찬 라우렌시오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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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천] 소중한 존재

어느 대학에서 학생을 가르치던 교수가 강의 도중 십 만원 짜리 수표를 꺼내들고는, “이거 가질 사람 손들어보세요” 라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모든 학생이 손을 들었습니다. 그걸 본 교수는 갑자기 그 수표를 주먹에 꽉 쥐어서 구기더니 다시 물었습니다. “이거 가질 사람 손들어보세요” 이번에도 역시 모든 학생이 손을 들었습니다. 다시 교수는 그 수표를 바닥에 내팽겨치고는 발로 밟았습니다. 그리고 다시 물었습니다. “이거 가질 사람?” 모든 학생들이 다시 손을 들었습니다. 교수가 말했습니다. “여러분은 구겨지고 더러워진 십 만원짜리 수표일지라도 그 가치는 변하지 않는다는 것을 잘 알고 있는 것 같군요. 그렇습니다. 이처럼 자신의 가치도 마찬가지입니다. 구겨지고 더러워진‘자신’일지라도 그 가치는 전과 다르지 않게 소중한 것입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우리는 루카 복음 15장에 나오는 탕자의 비유에서 방탕의 죄를 지으며 만신창이가 되어 돼지만도 못한 처지에 놓인 작은 아들의 모습을 알고 있습니다. 이 복음에 나오는 작은 아들의 모습은 때론 우리들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살아가면서 우리들은 작은 아들이 느꼈던 것처럼‘인간이 이렇게까지 비참하게 나락으로 떨어질 수 있구나!’ 하는 날이 있습니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소중한 존재입니다. 아무리 만신창이가 되었을지라도 우리는 소중하고 고귀한 존재입니다. 바로 이점을 교회는 성체와 성혈 축일을 통해 선포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살아하신 나머지 당신의 몸과 피를 우리에게 밥으로 내어주셨습니다. 그 귀하고 소중한 당신의 생명을 우리에게 내어주신 것입니다. 이렇게 소중한 몸을 받아 모셨으니 우리의 몸은 이루 말할 수 없이 소중한 존재입니다.

우리 인간이 소중하고 존귀한 까닭이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가 죄로 말미암아 만신창이가 되었을지라도 주님께서는 변함없이 우리에게 생명으로 다가와 소중한 존재라는 것을 잊지 않게 해주십니다. 실패하고 사회의 바닥으로 내팽겨친다 할지라도 좌절해서는 안됩니다. 우리들의 가치는 어느 무엇으로도 바뀔 수 없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몸을 내어주어 다른 이의 생명을 살리게 하는 것, 이보다 더 한 사랑은 없을 것입니다. 몸을 내어주신 이 큰 사랑, 그 사랑이 모든 이에게 전해져서 이 땅의 모든 사람들이 자신의 가치를 소중하게 생각했으면 좋겠습니다. 또한 특별히 오늘 그리스도의 성체 성혈대축일을 지내면서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 뿐만 아니라 싫어하는 사람들일지라도 그 가치를 얕보지 않고 서로 존중해주었으면 하고 간절하게 바랍니다.

▥ 춘천교구 최일호 신부
  | 06.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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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미 예수님!
오늘은 우리가 알고 있고 믿는 대로 예수님께서 성체성사를 세우신 것을 기념하는 ‘그리스도의 성체성혈 대축일’입니다.

성 토마스 아퀴나스는 성체 찬미가에서 “보고 맛보고 만져 봐도 알 길 없고 다만 들음만으로 믿음 든든하다.” 고 기도했듯이 성 체는 빵과 포도주의 형상 안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현존하시며 봉헌되고 영해지는 성사 (교회법전 801조)입니다. 오늘 제2독서 후에 나 오는 성체송가에서는 이렇게 노래합니다. “모든 교우 믿는 교리, 빵이 변해 성체 되고 술이 변해 성혈 된다. 물질세계 넘어서니 감각으론 알 수 없고 믿음으로 확신한다. 살은 양식, 피는 음료, 두 가지의 형상 안에 그리스도 온전하다.”

우리는 매일 미사의 성체성사 안에서 기 적을 살고 있는 행복한(?) 사람들입니다. 빵 이 변해 성체 되고, 술이 변해 성혈 되는 성체성사의 기적을 목격하고 그 기적을 받아 모시는 사람들이 바로 우리들입니다. 예수님 을 믿는 우리들이 아니면 누가 성체성사의 기적에 참여하고 기적을 받아 모시겠습니까? 예수님께서 성체성사를 통하여 주시는 은총 에 힘입어 예수님을 닮아 가고, 행복을 사는 기적의 사람이 되어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구원을 차지하는 그리스도의 사람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그러기 위하여 우리는 예수님께서 성체성사를 세우신 뜻을 헤아리고 그 뜻을 삶으로 증거해야 할 것입니다.

“험한 세상 살아가면서 내가 힘들어 질 때
앞에서 손 내밀어 이끌어 주는 사람이
당신이었으면 좋겠습니다.

내 아픔 아프고 괴로워 눈물 젖은 모습이 될 때
마음 놓고 기대어 울 가슴을 빌려주는 사람이
당신이었으면 좋겠습니다.

비 내리는 어느 날
우울한 마음에 외롭다고 생각될 때
음악이 흐르는 카페에서 차 한 잔을 사주는 사람이
당신이었으면 좋겠습니다.

실수로 저지른 내 잘못으로 모두가 비난 하고 내 곁을 떠나가도
마지막까지 따뜻한 눈길을 보내주고 믿어주는 사람이
당신이었으면 좋겠습니다.” (당신, 작자미상).

우리가 누군가를 위해 손을 내밀어 이끌어 주고, 기대어 울 가슴을 빌려 주고, 차 한 잔을 사주 는 사람이며, 따뜻한 눈길로 믿어 주는 ‘당신’ 이 된다면, 예수님께서 당신의 몸 과 피를 생명의 양식으로 내어주신 그 뜻을 조금쯤은 헤아리며 사는 것이라는 생각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와 같이 너희의 빛이 사람들 앞을 비추어, 그들이 너희의 착한 행실 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를 찬양하게 하여라.” (마태 5,16)하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착한 행실로 하느님을 찬양하고 성체를 모시며 기적을 사는 우리는 기꺼이 누군가를 위해 ‘당신’ 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아멘.

▥ 춘천교구 이동수 세례자 요한 신부
  | 06.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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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천] 나눔의 기적

▬ 생명의 빵

오늘 복음의 예수님께서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장정만도 오천 명이 넘게 먹이신 기적 이야기가 우리에게 전해주고자 하는 교훈은, 예수님 친히 당신의 죽음을 통하여 생명까지 내어 놓으신 가없는 사랑이 이제는 세상 모든 사람들의 영육의 굶주림을 해결해 주시리라는 가르침인 것입니다.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이미 이같이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너희는 썩어 없어질 양식을 얻으려고 힘쓰지 말고, 길이 남아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하는 양식을 얻으려고 힘써라. 그 양식은 사람의 아들이 너희에게 줄 것이다. 이 빵은 하늘에서 내려오는 것으로, 이 빵을 먹는 사람은 죽지 않는다.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빵이다. 누구든지 이 빵을 먹으면 영원히 살 것이다. 내가 줄 빵은 세상에 생명을 주는 나의 살이다.”(요한 6, 27; 50~51)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빵은 참되고 영원한 음식을 의미합니다. 결코 썩지 않는 음식, 하느님께서 주시는 순수한 음식, 충만한 생명을 주시는 음식, 죽음에서 생명으로 옮아가는 음식을 말씀하시고 계신 것입니다.

당신의 모든 것을 다 내어 놓으신 사랑의 성체성사를 통하여 이제는 우리들도 형제들을 위하여 자신을 내어놓는 실천의 삶을 요구하시는 것입니다. 제자들은 이기심과 기적을 믿지 못하는 마음으로 굶주린 군중을 돌려보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우리 역시 자주 우리를 찾아오는 이들을 돌려보낼 때가 많습니다. 시간이 없다는 핑계로, 바쁘다는 구실을 내세워, 도와줄 가치가 없다는 자신의 잣대로 남을 판단하여 돌려보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마음, 목자의 마음은 단호하였습니다.

“너희가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어라.”(루카 9, 13) 이 소중한 말씀은 성체성사의 참된 의미를 깨달았다면, 없는 가운데서도 나누어 보라는 가르침인 것입니다. 그것이 엄청난 생명의 은총인 성체성사의 혜택을 입은 그리스도인들이 살아야 할 참된 모습인 것입니다.

▬ 너희가 먹을 것을 주어라

복음은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어떤 기적이 일어났는지에 대한 기록이 없습니다. 이를테면 예수님 기도 후에 빵이 남산만큼 커졌다거나, 물고기가 고래만큼 커졌다거나 하는 자세한 설명이 없습니다.

다만 우리가 추측해볼 수 있는 것은 그 많은 장정들이 며칠째 예수님을 따라 왔는데, 자주 여행을 했던 경험이 있는 유목 민족인 그들의 보따리에 먹을 것이 전혀 없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서로들 눈치를 보며 날이 저물도록 음식을 꺼내지 않았다는 것을 뜻합니다.

그런데 웬 아이가 가지고 있는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내어 놓습니다. 그러자 부끄러운 어른들과 제자들도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음식을 내어 놓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하늘을 우러러 감사의 기도를 올리신 다음 빵과 물고기를 나누어 주셨고, 모두 배불리 먹은 뒤, 남은 것을 모으니 열두 광주리나 되었다는 가설입니다.

이 같은 추측이 설득력을 얻는 것은, 만약 예수님께서 당신의 능력으로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만으로 군중을 먹이시는 기적을 행하셨다면, 그것은 예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일회성의 기적으로 끝날 것입니다. 그러나 십시일반으로 서로가 함께 나누어 먹었다면, 그것은 누구나 할 수 있으며 훗날 예수님을 따르고자 하는 제자들이 그 모범을 실천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 혼자만이 하시는 일회성 기적을 절대 행하실 분이 아니십니다. 모든 인간이 할 수 있고 따를 수 있는 기적을 선택하셨을 것입니다.

교회가 오늘 성체와 성혈 대축일에 이 같은 복음을 선택한 이유와 가르침은 자명해 집니다. 성체성사의 삶을 살아가는 모든 하느님 백성은 진정한 나눔의 삶을 사셨던 그리스도의 모범을 살아가라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예수님의 십자가상 나눔의 희생 제사인 성체성사는 빛을 잃고 맙니다. 사람은 그 어느 누구도 나눌 수 없는 사람이 없습니다. 사실 나누고자 하는 마음이 없는 것이고, 이웃의 불행과 아픔에 대한 무관심 때문인 것입니다. 성체성사의 참된 의미는, 하느님의 보편적 사랑을 살아야 할 예수님의 제자들은 가난한 사람들이 굶주림에 지쳐 쓰러지지 않도록 그들의 인간적 존엄을 지켜 주어야 할 의무가 있음을 가르치는 것입니다.

오늘날에도 성탄 무렵 구세군의 자선냄비의 기적이나, TV 불우이웃돕기 ARS 자선기금 마련들의 모습을 보면 2천 년 전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천 명을 먹이신 기적이 재현되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것이 성체성사의 삶이며, 그 같은 삶을 살아가라고 예수님께서 간곡히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이는 너희를 위한 내 몸이다. 너희는 나를 기억하여 이를 행하여라.”(1코린 11, 24)

▥ 춘천교구 배광하 신부
  | 06.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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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천] "함부로 대하지 마라."

아이들이 첫 영성체 할 때면 부모님들께 부탁하는 말이 있습니다. “이제는 아이들을 함부로 대하지 말아 주세요. 예수님께서 오늘 이 아이들에게 오시는 겁니다. 이제는 이 아이들 안에 주님께서 참으로 살아 계시는 겁니다.”

그런데 그럽니다. 미사 시간에 떠들고 장난치는 아이들을 보며 ‘미사 끝나고 보자’며 징벌(?)을 생각합니다. 복사를 서다가 틀렸다고 나무랍니다. 불러도 응답 없는, 내 맘처럼 따라와 주지 않는 청소년들을 보며 그만 화를 내고 말았습니다. 내 욕심의 탓이 자꾸만 교사들을 힘들게 하고 지치게 하는가 봅니다. 내가 힘들다고, 내가 피곤하다고 신자들과의 만남을 외면하기도 했습니다.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부탁하십니다. ‘함부로 대하지 마라.’

사제 수품을 준비하면서 정했던 성구가 바로 “받아먹어라. 이것은 내 몸이다.”(마르 14,22)라는 말씀이었습니다. 다 내어 주고 싶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토록 사랑하시던 제자들에게 이제는 마지막 남은 당신의 몸까지 내어 주신 주님의 사랑이 너무도 아름다웠기 때문입니다. 어린 시절부터 성체에 대한 의심이 많던 저에게, 사제가 되기에 부족함이 많은 저에게 ‘네 안에 내가 살았기 때문’이라는 믿음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저는 지금까지, 그리스도를 함부로 대하고 있었습니다.

주님은 오늘의 미사 안에서 ‘우리’에게 오십니다. 너희와 모든 이를 위하여 흘리는 피의 계약으로 우리를 용서하시며, 우리와 하나되기 위해서 당신은 쪼개어 지십니다. 주님을 모시기에 합당치 못한 영혼에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받아먹어라. 이것은 내 몸이다.” “나를 먹는 사람은 나의 힘으로 살 것이다.”(요한 6,57)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그래서 사는 겁니다. 그분이 살게 하고 계신 겁니다. 내 능력이 아니라 그분의 힘으로 말입니다. 토마스 데 아퀴노 성인의 고백 그대로, 내 안에 사시는 그분은 그래서 당신을 더욱 믿고, 당신 안에 희망하고 사랑하게 하시는가 봅니다.

오늘도 감히 성체와 성혈을 이루며 고백합니다. ‘주님을 함부로 대하지 않겠습니다.’ 내안의 그리스도를 만나러 갑니다. 주님, 사랑합니다.

▥ 춘천교구 원용훈 스테파노 신부
  | 06.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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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천] 나눔의 삶’ 깨닫고 실천하자

▬ 사랑의 완성체인 성체

이탈리아의 영성가인 ‘카를로 카레토’는 그의 책 「보이지 않는 춤」에서 이 같이 말합니다. “내 아버지, 우리 아버지, 이 말에 모든 계시가 요약되어 있고, 성경 전체가 요약되어 있습니다. 또 기쁜 소식의 내용이 담겨 있고, 모든 두려움의 종말이 있습니다. 하느님은 참되고 본질적인 의미에서 또 진정한 생명의 의미에서 내 아버지이십니다. 하느님은 내 아버지이십니다. 그래서 그분은 나를 바라보십니다. 하느님은 내 아버지이십니다. 그래서 그분은 나를 사랑하십니다. 하느님은 내 아버지이십니다. 그래서 그분은 내가 그분과 영원히 함께 하기를 바라십니다. 하느님이 내 아버지시라면 나는 더이상 어둠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자녀들인 우리 모두에게 모든 것을 주시고 싶어 하셨던 예수님께서는 의심이 많은 우리에게 이같이 말씀하십니다. “너희 가운데 어느 아버지가 아들이 생선을 청하는데, 생선 대신에 뱀을 주겠느냐? 달걀을 청하는데 전갈을 주겠느냐?”(루카 11,11-12)

그리고 당신 사랑의 가장 큰 절정인 성체성사를 통하여 당신을 송두리째 주시고, 영원히 우리와 함께 계시고 싶어 하셨습니다. 사랑은 기억하는 것입니다. 자녀들이 부모님 사랑을 보답하는 길은 그분들이 나에게 해 주신 가없는 그 사랑을 기억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부모님의 사랑을 결코 다 갚을 수 없습니다. 그분들의 사랑을 잊지 않고 기억할 때 작은 보답이라도 드릴 수 있는 것이고, 불효를 저지르지 않는 것입니다. 그리고 부모님의 사랑을 또 다른 세대에 전할 수 있는 것입니다. 사랑은 ‘내리사랑’이라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먼저 당신의 사랑이 무엇인지를 우리에게 분명히 보여 주셨으며, 당신의 사랑을 보고 배운 우리들이 그 사랑을 또 다시 전하기를 바라셨습니다. 그 같은 내리사랑이 가능할 수 있는 것은 기억입니다. 아름다운, 감사로움의 사랑을 잊지 않을 때, 사랑은 이어지는 것입니다. 때문에 사도 성 바오로는 기념과 기억의 제사, 사랑의 성체성사를 기억하며 이렇게 가르치고 있는 것입니다.

“주 예수님께서는 잡히시던 날 밤에 빵을 들고 감사를 드리신 다음, 그것을 떼어 주시며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너희를 위한 내 몸이다. 너희는 나를 기억하여 이를 행하여라’”(1코린 11,23-24).

▬ 평화와 구원의 음식

히브리 말로 평화는 ‘샬롬’입니다. 샬롬은 ‘완전하다’라는 의미라고 합니다. 가득차 모자람 없다는 뜻입니다. 엄마의 젖을 모자람 없이 만족하게 먹은 아기의 잠든 모습을 연상하면 되겠습니다. 그때 아기의 모습은 평화스러움 그 자체입니다. 비취색의 푸른 바다와 청명한 하늘을 바라보면서 평화를 느끼는 것은 그 자체로 모자람이 없기 때문입니다.

세상 그 무엇보다도 하느님은 평화이십니다. 하느님 그분이시야말로 가장 완전한 충만함이시기 때문입니다. 가장 충만하신 하느님께서는 우리 인간에게 당신의 충만함을 온전히 나누어 주시려고 하셨습니다. 그것이 매일의 현실에 나타나는 성체성사의 은총인 것입니다. 이 같은 엄청난 사랑을 거저 얻어먹고 영육의 건강을, 삶의 충만함을 되찾은 우리는 반드시 나누어야 할 삶이 무엇인지를 깨닫고 실천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도 당신의 전부를 우리에게 주시기 위하여 스스로 속량 제물이 되시어 나누셨습니다. 이를 오늘 히브리서의 저자는 이렇게 가르치고 있습니다.

“영원한 영을 통하여 흠 없는 당신 자신을 하느님께 바치신 그리스도의 피는 우리의 양심을 죽음의 행실에서 얼마나 더 깨끗하게 하여 살아계신 하느님을 섬기게 할 수 있겠습니까?”(히브 9,14)

‘김지하’ 시인은 자신의 시 「밥」에서 이렇게 외치고 있습니다.

“밥이 하늘입니다.
하늘을 혼자 못 가지듯이 밥은 서로 나눠 먹는 것
밥이 하늘입니다.
하늘의 별을 함께 보듯이 밥은 여럿이 같이 먹는 것
밥이 입으로 들어 갈 때에 하늘을 몸속에 모시는 것
밥이 하늘입니다.
아! 아! 밥은 모두 서로 나눠 먹는 것”

우리는 분명 주님에게서 모자람이 없는 충만함을 받고 또 받았습니다. 때문에 이제는 이 은총을 나누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도 당신의 영원한 생명의 피를 우리에게 주실 때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내 계약의 피다”(마르 14,24).

우리는 매 미사 때마다 주님의 몸과 피를 모시기에 합당하지 못한 죄인이지만, 이 지상에서 감히 체험하지 못할 천상의 음식을 모시고 있는 것입니다. 진정 우리는 모든 것이 충만한 평화와 기쁨, 내어 주심의 완전한 사랑의 감격과 행복을 체험하고 있습니다. 이제 이 충만한 기쁨을 더 많은 이들과 나눌 수 있어야 합니다.

▥ 춘천교구 배광하 신부
  | 06.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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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천] 그리스도인의 삶의 지표인 성체와 성혈

그리스도의 성체 성혈 대축일은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남겨주신 가장 신비스럽고 값진 유산을 기념하고 감사드리는 날입니다.

오늘 복음 전에 노래한 성체 송가는 성체와 성혈의 신비가 지니고 있는 고귀한 의미와 그 가치를 잘 요약하여 설명하고 있습니다. ‘생명주시는 천상 양식’, ‘새 임금이 베푼 잔치’, ‘빵과 포도주의 두 가지 형상안에 계신 주님’, ‘먹여 기르시는 참된 음식’ 등등. 성체와 성혈이 지니고 있는 놀라운 신비는 사실 이루 다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심오합니다.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는 부활하신 주님을 만났을 때 처음에는 그분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말씀에 감동을 받고 그분과 함께 저녁 식사를 하던 중 빵을 떼어 나누어 주시는 모습에서 그분이 부활하신 주님이심을 알아보았습니다. 이 이야기는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가 성체와 성혈의 신비를 받아들이기에 잘 준비되어 있었음을 가르쳐 줍니다. 그들은 성찬식을 통해 주님을 만났고 그 만남은 그들을 회심시켜 발길을 돌려 다시 예루살렘으로 돌아가 부활하신 주님에 대해 증언하게 합니다.

이렇게 오늘 우리가 거행하는 성체와 성혈의 신비도 우리에게 회심을 이루어 주는 신비가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기적을 행하는 법을 가르치시지 않았습니다. 비록 많은 사람들이 그분의 기적을 보고 따라다녔지만 제자들에게 그 기술을 가르치시지는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복음을 전하라고 말씀하셨지만 설교하는 방법을 가르치신 적도 없습니다. 그분은 제자들에게 자신의 생명을 나누어 주는 법, 그리고 서로에게 봉사하고 자신이 이웃에게 또 하나의 먹을 음식이 되는 법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분은 “나를 기억하여 이를 행하여라.” 하시면서 우리 자신이 다른 사람들에게 생명의 양식이 되고 스스로 봉사하고 희생하는 법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미사 안에서 우리도 주님의 성체와 성혈의 신비를 매일 거행합니다. 하지만 그분의 몸인 빵을 나누면서도 그분을 진정으로 알아보고 회심에 이르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참으로 적은 사람들만이 성체와 성혈이 가르쳐 주는 사제직의 참된 의미를 깨닫고 얼마나 감사드려야 하는지, 또 자신을 어떻게 희생하고 복음을 위해 봉사해야 하는지를 알고 있을 뿐입니다. 성체와 성혈의 신비는 그리스도인의 삶의 지표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이 어떤 모습이어야 하는지를 가르쳐 줍니다. 성체와 성혈의 신비를 통해 자기 자신이 이웃을 위한 또 하나의 빵이 되는 그런 삶을 살아야 함을 가르쳐 줍니다.

▥ 춘천교구 이태혁(요아킴) 신부
  | 06.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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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천] 성체성사 은총 속에 사는 우리

▬ 하필이면

순국선열을 추모하는 현충일이나 광복절 기념행사 중 “님들은 피를 흘려 이 땅을 지켰습니다.” 라든가 “온 몸을 바쳐 조국의 독립을 위하여 투신하였습니다.”라는 말을 듣게 됩니다.

우리는 종종 가장 숭고한 일이나 조국을 위한 헌신, 또는 무엇인가 고귀한 일을 한 분을 두고 최상의 찬사를 논할 때 ‘몸과 피’라는 단어를 자주 쓰게 됩니다. 신앙을 끝까지 지킨 순교자들의 희생을 이야기할 때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숭고한 희생과 헌신에 몸과 피를 자주 인용하는 까닭은, 사람이 자기 몸만큼 소중히 여기는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음식, 옷, 집 등도 내 몸 소중한 줄 알기 때문에 그토록 신경을 쓰는 것입니다. 내 몸에 조그마한 상처나 피곤이 와도, 고통과 신경을 쓰는 까닭도 마찬가지입니다.

피는 생명과 죽음을 상징합니다. 사람이 무엇이든 두려움을 느낀다면 궁극적인 것은 결국 죽음입니다. 때문에 몸과 피는 인간의 가장 중요한 전체를 상징합니다. 몸과 피를 바쳐 희생하였다는 것은 그의 전 존재를 바쳤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성경은 하느님의 크신 사랑 이야기입니다. 그 크신 하느님의 사랑을 인간이 이해하기 쉽도록 하느님께서는 인간의 언어로, 인간의 생활방식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삶과 가르침, 그 크신 희생을 인간이 이해할 수 있도록 가르치신 까닭도 여기에 있습니다.

그분께서는 가장 큰 희생인 몸과 피를 바쳐 인간 사랑의 절정을 보여 주셨습니다. 그것이 십자가의 희생이었습니다.

그런데 몸과 피를 바치신 사랑으로는 도무지 만족하실 수 없으셨던 예수님께서는 인간에게 가장 중요한 먹는 음식으로 영원히 인간 곁에 남아 계시기를 원하셨습니다. 그것이 성체성사입니다.

당신의 몸과 피를 우리에게 음식으로 내어 주시어 우리와 하나로 남으시려는 끝없는 사랑의 절정이 성체성사인 것입니다. 때문에 최후만찬 중에 제자들의 발을 씻기기 전 예수님 사랑의 마음을 요한복음 사가는 이렇게 증언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세상에서 아버지께로 건너가실 때가 온 것을 아셨다. 그분께서는 이 세상에서 사랑하신 당신의 사람들을 끝까지 사랑하셨다”(요한 13, 1).

몸과 피로만이 아니라 그 몸과 피를 우리에게 내어주시어 함께 하시겠다는 하느님 사랑의 성사가 성체성사입니다.

▬ 영원한 생명의 성사

가톨릭 교회 교리서 1405항에는 성체성사에 대한 이같은 가르침이 있습니다.

“정의가 깃든 새 하늘과 새 땅에 대한 이 큰 희망에 대하여 성찬례보다 더 확실한 보증과 분명한 징표는 없다. 실로 이 신비가 거행될 때마다 우리의 구원 활동이 이루어지고, 영생을 위한 약이요 죽지 않게 하는 해독제이며 영원히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살게 하는 빵을 나누어 먹는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오늘 당신의 몸과 피를 두고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얻고, 나도 마지막 날에 그를 다시 살릴 것이다”(요한 6, 54)

결국 예수님께서 당신의 몸과 피를 우리에게 주신 까닭은 우리의 영원한 생명을 바라신 때문이었습니다.
히브리서의 저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구약의 사제들은 자신들의 몸과 피를 바쳐 제사를 드린 것이 아니라 동물의 몸과 피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당신 자신을 십자가 제사의 제물로 바치셨습니다.

동물의 몸과 피가 인간을 거룩하고 깨끗하게 하여 준다면, 그리스도의 신비스러운 몸과 피는 강력한 작용을 하여 인간을 더욱 깨끗하고 거룩하게 만들어 줄 것입니다.(히브 9~10장 참조)

진실로 교회의 기나긴 역사를 통하여 수많은 신앙인들이 성체성사의 은총으로 기적을 맛보았으며 삶의 희망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성체성사의 크나큰 은총의 샘에서 흘러나오는 생명의 힘을 체험하였던 것입니다.

제 자신도 오랜 세월 냉담의 길을 걸으며 인생을 허비하였던 한 형제님의 눈물어린 통회의 고백 뒤 감격의 영성체 장면을 보았으며, 정신지체 장애를 앓는 장애인이 미사 내내 딴청을 하다가도 영성체 때에는 경건하게 성체를 모시는 모습과 사경을 헤매다 성체를 영하고 평안히 임종하는 모습도 보았습니다.

우리 인간의 인식으로는 하느님의 깊은 신비인 성체성사의 모든 것을 다 이해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무엇보다 나를 그토록 사랑하시는 하느님의 품안에서 사랑의 소리를 들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부족하다면 ‘성 토마스의 성체 찬미가’ 기도를 바치면 좋을 듯 싶습니다. “주님의 죽음을 기념하는 성사여, 사람에게 생명주는 살아있는 빵이여, 제 영혼 당신으로 살아가고 언제나 그 단맛을 느끼게 하소서.”

▥ 춘천교구 배광하 신부
  | 06.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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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천] 성체, 내 품 안의 작은 예수

어느 자매님께서 들려주신 이야기입니다. 아이를 낳던 날, 그 아이를 자신의 품에 끌어안고 처음으로 눈을 맞추던 날, 가슴 속 깊은 곳에서 일어나는 마음에 스스로 놀랬다고 합니다. ‘이 아이를 위해서라면 죽을 수도 있겠구나.’

사제의 두 손 위에 올려 진 성체와 한 어머니가 받아 안았던 자신의 아이. 이 둘의 실체가 저에게 하나로 보여 진다면 조금 과장된 생각일까요?

“받아라, 이는 내 몸이다.”

제가 처음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품에 안고, 성체분배를 했던 날은 신학교 대학 원 1학년, 성소주일 행사 때였습니다. 전 아직도 그날을 기억합니다. 성체를 분배해야 할 장소에 멈추어 서서, 성합 안에 계시는 성체를 잠시 바라보았습니다. 그 리고 어떤 영문인지 모르지만, 이런 고백이 제 안에서 일어났습니다. ‘제 모든 것을 바쳐서 당신을 지켜드리겠습니다.’ 아마도 그날 전, 지금까지 언제나 크신 분으로 여겼던 저의 하느님이, 제 두 손 위의 작은 성체조각으로 있는 것에 조금 놀랐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그분의 작고 초라한 모습을 보며, 평상시 제게 있지도 않았던 그 어떤 용기가 꿈틀거렸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돌아보면, 이 모든 것은 그분께서 우리를 변화시키시는 하나의 방법이라는 그 어떤 확신을 지울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은 강한 자이기 보다, 약한 자이기를, 높은 자이기보다 낮은 자이기를, 온전하게 남아있기보다 쪼개지고 부서지기를 원했던 분이었습니다.

그런 면에서, 그분은 오늘도 우리의 용기를 원하십니다. 모든 것이 잘 이루어진 다고 여겨지는, 그런 고상한 일들을 멈추고 성체를 바라볼 수 있는 용기. 내가 하고, 우리가 한다고 여기는 일들을 그분이 하시는 것이라 믿을 수 있는 용기. 숫자 적인 수치와 효율성이라는, 커다란 덩어리들이 주는 유혹에 넘어가지 않을 용기.

우리는 여전히 부서지고 나뉘어진 성체 조각에 우리의 인생을 걸고 있습니다. 실제로 이 조각에 우리의 목숨이 달려 있기 때문입니다. 세상 이치라는 것이 쪼개지고 부서지면 답이 없을 지언데, 우리는 끝까지 작아진 성체 신비 그 자체에 목적 을 두고 있습니다. 분명 이 성체는 우리를 ‘영원한 생명’으로 인도합니다(요한 6,22-59). 그러나 영원한 생명을 이야기하기 이전에, 이 부서짐의 길 자체가 우리 의 길이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이것이 영원한 생명에 중점을 두고 있는 요한 복음과 달리, 마르코 복음이 우리에게 전하고자 하는 단순한 진리가 아닌가 여겨집니다(마르 14,22).

예수님께서 빵을 들고 찬미를 드리신 다음, 그것을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며 말씀하셨다. “받아라. 이는 내 몸이다.”

▬ 춘천교구 오경택 안셀모 신부
▬ 2018년 6월 3일
  | 06.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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