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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가정축일 독서와 복음 해설
조회수 | 100
작성일 | 21.12.25
개방된 가정 개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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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성가정 축일이다. 하느님께서 사람이 되신 신비는 참으로 위대한 신비이다. 그러나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와 똑같이 ‘가정’이라고 하는 공동체의 체험을 거쳐 우리의 형제가 되셨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강생의 신비는 이 가정이라고 하는 실체도 취하여 거기에 보다 깊은 의미를 부여하고 하느님의 사랑의 표지와 구원의 도구로 삼는다. 이제 오늘 축일은 가정 이 강생의 신비를 통해 구원을 위한 공간이 됨을 상기시켜줄 뿐 아니라, 하느님 사랑의 신비에 대한 체험을 했던 나자렛 가정을 우리에게 구체적인 ‘모범’으로 제시하고자 한다. 즉 교회는 오늘 나자렛 가정의 구체적 체험을 거행하고자 하며, 그 체험을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모범으로 제시하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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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독서 : 집회서 3,3-7.14-17a
어버이에 대한 공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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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독서의 내용은 부모를 공경해야할 의무를 강조하고 있다. 이것은 케케묵은 옛날 이야기가 아니다. “너는 네 아비가 늙었을 때 잘 보살피고...그가 설혹 노망을 부리더라도 잘 참아 받고 네가 젊고 힘 있다고 그를 업신여기지 말아라”(집회 3,12-13). 이 말씀은 너무나 쉽게 노인들에게 무관심해버리고, 마치 그들을 무슨 짐처럼 여기며 그들을 사회공공기관에 맡겨버리는 것이 잘하는 일이라고 생각하는 오늘의 우리에게 하는 말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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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 : 마태오 2,13-15.19-23
이집트 피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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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복음의 내용은 한 가정이 겪는 고통스럽고도 극적인 사건들에 집중되고 있다. 요셉이나 마리아 혹은 아기 예수가 주인공이 아니라, 한 가정의 이야기로 전개되고 있다. 천사가 요셉에게 하는 말은 한결같이 “아기와 아기 어머니를 데리고”(13.20절)라고 하고 있다. 이는 어느 것도 따로 생각할 수 없는 단일한 결합 상태를 의미한다. 이러한 분위기는 복음 전체에 흐르고 있다(14-15절.21절). 여기에는 신학적인 의미가 있다. 즉 나자렛 가정의 가족들 사이에 이루어지고 있는 감정과 행동의 완전한 일치를 강조하고 있다. 서로간의 봉사와 보호와 도움이 필요한 ‘아기 예수’에 대한 사랑이다.

아기 예수는 하느님의 아들이지만 인간적으로 나이 때문에 또 그의 사명 때문에 닥치는 어려움에 대해 보호와 도움을 필요로 한다. 그래서 그 부모들은 하느님의 뜻에 순종하고 하느님께서 보여주시는 징표들을 알아듣고자 하는 마음자세로써 아기를 보호하고 도와주고자 애쓴다. 즉 하느님의 구원계획이 그리스도를 통해 실현되도록 하기 위해 이루어지는 하느님과 사람의 협력관계를 볼 수 있다. 가족들 상호간의 사랑과 하느님께 대한 무한한 신뢰로 이 가정의 삶이 전개되고
있다.

나자렛 성가정이 우리에게 가르쳐주는 것은 이것이다. 우선, 가정의 참된 의미는 오직 서로 사랑할 수 있고 서로를 깊이 나눌 수 있는 곳에만 있을 수 있다는 것이다. 사랑은 모든 것을 이기고, 영혼과 육신을 결합시켜주며, 사랑은 삶의 극적인 어려움까지도 극복하도록 해준다. 사랑이 없으면 가정은 무너지고 말며, 사랑이 식어 가는 가정에는 법적 조치도 사회적 대책도 아무 소용이 없다. 가정은 사랑과 그 사랑의 요구가 회복될 때만이 다시 살아날 수 있다.

두 번째 사실은 가정이 하느님의 계획의 일부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가정은 바로 사랑의 최대 표현이기 때문이다. 우리의 가정이 진정한 의미의 가정이 되려면, 나자렛 가정과 같이 하느님께로부터 오는 빛과 영감에 항상 개방되어 있어야 함을 의미한다. 가정이 근본적으로 ‘종교적’ 차원을 가져야 하며 하느님께 대한 ‘감각’을 양성해야할 의무도 있다.

세 번째는 나자렛 성가정이 사랑과 헌신으로 가득 찬 삶을 살았고 하느님께 온전히 개방되어있었기에 이 세상과 인간적인 문제에 ‘개방되어’있다는 점이다. 즉 예수님은 다른 사람들을 위한 사람이며, 마리아는 예수로 하여금 형제들의 어려운 처지를 알고 느끼게 해주는 협력자 역할을 할 것임을 말해줄 것이다. “그를 나자렛 사람이라 부르리라”(23절). 이 말씀은 나자렛이 아무런 명성도 없는 보잘것없는 동네이다(요한 1,46참조). 이 동네와 예수님을 연결하는 것은 당신의 겸손을 의미할 뿐 아니라, 모든 사람들과의 결합을 입증하는 것이다. 가정은 ‘개방된’ 공동체이다. 그것은 가정이 사랑에서 생기고 사랑 안에 자라기 때문이다. 사랑은 그 안에 폐쇄될 수 없다. 그렇다면 사랑이 아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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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독서: 골로새서 3,12-21
사랑은 모든 것을 하나로 만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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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오로 사도는 가정 안에서의 행동규범에 대해 짤막하게 이야기한다.
이것은 모든 어려움과 긴장 그리고 세대간의 긴장 등을 안고 있는 가정생활이 처해있는 분위기에 대한 것이다(18-21절 참조). 한 가정을 이루는 남편과 아내를 ‘한 몸’(창세 2,24)이라고 할 때, 그리고 부모와 자식간을 연결시켜주는 사랑에 이르기 까지 그리스도의 ‘몸’으로 실현되어야 한다. 이 그리스도의 ‘몸’이란 가정에 대한 하느님의 계획이 담겨있는 것으로써, ‘하느님의 말씀’과의 항구한 일치가 가족들 모두를 하느님의 뜻 안에서 사랑 속에 성장할 수 있도록 도와줄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이러한 가정들과의 만남으로 서로 ‘가르치고’ ‘충고함’으로서 현대가 안고 있는 여러 가지 문제들, 즉 혼인의 의미, 부부사랑, 생명의 가치, 자녀들의 가치, 자녀들의 교육, 부부 상호간의 신뢰 등에 대한 문제를 극복 할 수 있도록 하여야 한다. 이것이 ‘개방된’ 가정의 개념이라고 할 수 있다.

진정 부부간의 넘치는 사랑과 자녀들의 기쁨에 찬,
웃음이 끊이지 않는 ‘가정’, 한평생 이루어졌으면 하는
이 놀라운 기적은 인간들의 깨어지기 쉬운 사랑을 감싸주고
하느님의 사랑의 징표로 바꾸어놓는 하늘로부터의 ‘축복’에 의해서만이
이루어질 수 있을 것이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이제 이러한 가정을 실제적으로 만들도록 최선을 다해야 한다.
성가정 축일은 오늘의 가정이 지녀야할
모든 가치 즉 사랑, 헌신, 희생, 정덕, 생명 존중, 노동, 평화, 환희 등을
알아들을 수 있는 열쇠를 던져주고 있다고 요한 바오로 2세는 말씀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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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신부
505 7.6%
[수원] 주님과 함께 사는 가정생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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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성가정 축일이다.
교회가 이 축일을 제정하여 거행하는 것은
그 ‘성가정’이 이루어진 순간부터 주님의 공생활이 시작될 때까지,
그리고 십자가 위에 돌아가시고 부활하시기까지
겪은 모든 인간적인 것들을 우리도 알고 그 성가정을 본받도록 하려는 것이다.

가정은 교회를 위해서나 사회를 위해서나 매우 중요한 곳이다.
우리는 서로 간에 항상 사랑의 막을 쳐야 한다.
가정 안에서 사랑하는 것을 배우지 못한다면,
다른 어느 곳에서도 사랑하기를 배우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께서는
“가정교회가 사랑과 하느님께 대한 인식과
또한 생명과 인간 품위에 대한 존경심을 가르치는 학교입니다”(1979.1.28. 멕시코 푸에블라에서)라고 하셨으며 그 때문에 가정사목에 중점을 두라는 말씀을 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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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독서 : 집회서 3,3-7.14-17
주님을 두려워하는 사람은 어버이를 공경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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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남녀가 사랑으로 만나서 가정을 이루고 자녀를 낳고 키우는 것이 외적으로는 단순하고 아무 문제가 없는 것 같으나, 한편으로는 어려움, 긴장감, 몰이해, 고통 등도 느끼는 곳이기도 하다. 그래서 자신의 처지를 아파하면서도 다시 시작하는 삶을 반복하는 것이 우리 인생인 것 같다. 여기서 성서는 남편과 아내, 부모와 자식, 형제와 자매의 가족관계가 사랑이라는 기본법에 근거하고 있음을 알려준다.

1독서에서는 “부모를 공경하라”(출애 20,12)는 계명을 말하고 있다. “아비를 공경하는 것은 자기 죄를 벗는 것이며 어미를 공경하는 것은 보화를 쌓아올리는 것이다. 아비를 공경하는 사람은 자기 자식들에게서 기쁨을 얻고 그가 기구하는 것을 주님께서 들어주시리라. 아비를 공경하는 사람은 오래 살 것이며 주님께 순종하는 사람은 어미를 평안케 한다”(3-6절). 부모를 공경하고 순종하는 것은 하느님께 순종하는 것과 같다. 하느님께서 가정을 원하신 분이시기 때문이다. 하느님께서는 부모에게 자녀들에 대한 사랑을, 자녀들에게는 부모에 대한 사랑을 주셨기 때문에, 이 사랑의 교류의 법을 거부하는 것은 곧 하느님을 거부하는 것임을 말하고 있다. “자기 아비를 저버리는 것은 하느님을 모독하는 것이요, 어미를 노엽게 하는 것은 주님의 저주를 부르는 것이다”(16절).

부모와 자녀는 누구도 변경하거나 파괴할 수 있는 관계가 아니다. 하느님의 초월적인 구원계획 안에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부모에 대한 의무를 채우지 못하는 것은 ‘하느님을 모독하는 것’과 같고, 부모에게 효도하는 것은 우리의 ‘죄’를 속죄하는 희생을 하느님께 봉헌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이렇게 성서는 가정을 더 풍요로운 역량을 갖추도록 초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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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 : 루카 2,41-52
부모는 성전에서 예수를 찾아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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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복음에서 말하고자 하는 핵심적인 것은 “왜 나를 찾으셨습니까? 나는 내 아버지의 집에 있어야 할 줄을 모르셨습니까?”(49절)이다. 이 말씀은 예수님의 정체와 사명을 드러내는 말씀이기 때문이다. 즉 아버지와의 관계는 유일하고도 절대적인 것이고, 당신의 삶 전체를 통해 아버지의 뜻을 이루며 아버지의 영광에 들어가실 것이기 때문이다(참조: 루가 24,26.46-47).

예수님의 성가정은 해마다 과월절이 되면 명절을 지내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갔다. 그것은 히브리인들의 종교적 관습에 따른 것이지만, 어린 예수님을 위해서도 더욱 그러하였다. 성전에서는 교사들이 회당에서 성서를 봉독할 수 있는 자격과 아울러 신앙으로 성인(成人)으로 인정받아야 했던 어린이들에게 율법을 가르쳤다. 이렇게 그 가정은 종교의 행위에 개방된 가정이었다. 이러한 종교적 행위가 필요 없는 듯 여겨질 수 있다. 그러나 오늘 복음은 이러한 사실을 이야기하면서 하느님과의 관계나 기도, 그리고 주님의 말씀을 읽고 묵상하는 등의 종교행위가 우리 가정이 티 없는 공동체로 성장할 수 있도록 향기를 부여해 준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있을지 모르는 우리를 일깨워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예수님을 성전에서 잃어버렸다는 것은 나자렛 가정에는 청천벽력과도 같은 것이었다. 이 분위기는 마리아가 걱정하며 사흘 만에 성전에서 예수를 발견하였을 때, “얘야, 왜 우리를 이렇게 애태우느냐? 너를 찾느라고 아버지와 내가 얼마나 고생했는지 모른다”(48절)라고 하신 말씀 속에 나타나고 있다. 이것은 깊은 의미가 있다. 우리가 보는 가정은 모두가 아무런 번민, 즉 몰이해, 갈등, 오류, 실패, 질병, 또는 죽음 등으로 인한 문제가 없을 만큼 이상적인 가정은 없다는 것이다. 우리가 이루고 있는 가정은 모두 이럴 수 있다. 여기서 신앙으로 ‘하느님께 대한 신뢰’만이 그 고통을 덜어줄 수 있고 가족들을 더 가깝게 일치시켜 주고 밝은 희망을 줄 수 있다. 괴로움과 고통이 생활을 멈출 수는 없다. 하느님을 통해 보이는 괴로움과 고통은 생활을 보다 역동적이고 풍요롭게 해 준다. “예수는 부모를 따라 나자렛으로 돌아와 부모에게 순종하며 살았다. 그 어머니는 이 모든 일을 마음속에 간직하였다. 예수는 몸과 지혜가 날로 자라면서 하느님과 사람의 총애를 더욱 많이 받게 되었다”(51-52절)이라고 복음을 맺고 있는 것을 우리는 일 수 있다.

오늘 복음에는 우리의 사고를 요하는 대목이 있다. “부모는 아들이 한 말이 무슨 뜻인지 알아듣지 못하였다”(50절)고 한다. 아들의 태도와 말속에는 어떤 신비가 들어있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신비일 것이다. 이 신비는 그의 부모들도 우리도 이해할 수 없는 것이다. 우리도 이것을 알아야 한다. 성장과정에 있는 인간존재 안에는 ‘신비’가 들어있다. 그래서 부모들은 자녀들 위에 군림하지 말고 하느님 안에서 자녀들의 문제를 이해하고 그들이 그 문제를 해결해갈 수 있어야 한다. 흔히 자녀들의 길은 부모들이 원하거나 생각하는 길과는 다르다. 그러므로 그들이 하느님께 대한 충만한 믿음으로 자신의 길을 갈 수 있도록 존중하고 용기를 주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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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독서 : 골로 3,12-21
주님과 함께 사는 가정생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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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독서에서도 가정의 원천이 오로지 사랑이라는 것을 깨닫게 해준다. 그리스도인들은 자신이 하느님의 사랑의 대상이라는 것을 알면 서로 사랑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이렇게 해서 사랑의 공동체가 되고, 그 안에서 각자는 형제자매로서 받아들여지고 또 다른 사람들을 그렇게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사랑의 법이 ‘그리스도 안에 새로워진 존재’로서의 그리스도인들의 기본적 규범이라면, 이 법은 이미 자연적 유대관계를 전제로 하는 가정에서도 유효한 것은 당연하다. 즉 가정에서 보다 비옥한 경작지를 얻게 된다. 이러한 사랑의 내용에 비추어 가정적 의무의 어떤 것을 강조하고 있다.

“아내 된 사람들은 자기 남편에게 순종하십시오. 이것이 주님을 믿는 사람으로서 해야 할 본분입니다. 남편 된 사람들은 자기 아내를 사랑하십시오. 아내를 모질게 대해서는 안 됩니다. 자녀 된 사람들은 무슨 일에나 부모에게 순종하십시오. 이것이 주님을 기쁘시게 해드리는 일입니다. 어버이들은 자녀들을 못살게 굴지 마십시오. 그들의 의기를 꺾어서는 안 됩니다”(18-21절). 자신의 고유한 역할 때문에 남에게 부담을 주는 일은 없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 모든 것은 사랑의 분위기 속에서만 가능하다. 가정이 사랑으로 하나가 되어 살아가는 것이 바로 “주님을 기쁘시게 해드리는 일”(20절)이라고 바오로 사도는 말하고 있다. 그래서 이러한 그리스도교 사상은 오늘날 퇴폐하고 파탄에 이를 지경에 놓이게 되는 이 자연적 가정에도 새로운 힘과 의미를 부여해 줄 수 있다. 이를 위해 기도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이렇게 볼 때 나자렛 가정은
자녀들에 대해서 부모가 갖추어야 할 자세를 잘 말해주고 있다.
따라서 우리들은 “가정이 사랑하시는 하느님의 계획”임을 깨닫고,
주님의 사랑 안에서 성가정을 이루어 나가도록 노력해야 할 것이다.

이제 우리 모두 2천년 전 예수, 마리아, 요셉의 성가정을 묵상하면서
‘함께 어우러져 살아가는 가정’이 되도록
주님의 은총을 구하면서 이 미사를 봉헌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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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신부
  | 12.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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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독서(집회서 3,2-6.12-14)는
부모공경에 대한 중요한 의미를 말해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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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회서의 저자는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여라. 그러면 너는 주 너의 하느님이 너에게 주는 땅에서 오래 살 것이다.”(탈출 20,12; 신명 5,16)라는 말씀을 해설한 것입니다.

하느님의 백성인 이스라엘이 강대국들의 침략으로 인해 많은 위기를 겪으면서 가정의 소중함을 누구보다도 더 절실하게 체험했던 것 같습니다.

강대국들 사이에서 살아남아야 하는 소수민족인 이스라엘은 자녀를 낳지 못하는 여인들을 마치 하느님께서 그녀의 태를 닫아놓으셨기 때문이라고(1사무 1,5-6) 저주했고, 사람들 사이에서 치욕을 겪는다고 했습니다(루카 1,25).

전쟁을 자주 해야 하는 처지에서 남자의 소중함은 극대화되기도 했습니다.
후대로 오면서 집안에서 여인에 대한 존경심은 어머니가 되었을 때 점점 높아갔으며(창세 16,4) 남편은 아내에게 더욱 매이게 되었고, 자녀들은 순종과 존경으로 부모를 대했습니다.

그래서 자녀들을 낳고 기르고 가르치는 일이
곧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혼인을 하면 아내와 결합하여
부모를 떠나야 하는 제도가(창세 2,24) 강화되면서
집회서의 저자는 자기 제자들에게
끝이 있을 수 없는 부모공경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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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루카 2,41-52)은
예수님의 어린 시절을 “지혜”와 “하느님의 총애”로 표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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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께서는 요셉과 마리아에게서 참된 율법의 아들로 성장했습니다.

정통 유다인으로 성장한 예수님께서는 아직 어린애이면서도 지혜가 넘쳤습니다.

당시 풍습에 따라 이미 어른 대우를 받는 열두 살 된 남자는
일 년에 세 번, 혹은 파스카 축일에
한 번 예루살렘에 순례를 반드시 가야만 했습니다.
마리아는 순례가 의무는 아니었으나
신심이 깊은 여인들은 항상 동행했다고 합니다.
특히 이집트 탈출을 기리는 파스카 축제의 순례는 국가적 행사이기 때문에
길은 순례자로 가득 찼고, 로마 총독부는
만일의 사태(소요)에 대비하기 위해 무척 바삐 움직였다고 합니다.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목에 있는 모든 샘을 정리하고,
언덕에서 흘러내리는 작은 물줄기까지 샘을 파놓았다고 합니다.
순례를 시작할 때에는 긴 기도를 했고,
해가 뜰 때와 질 때에는 감사의 찬미가를 읊었으며,
나무숲을 지나면서 숲의 향기를 맡을 때,
어떤 도시에 가까이 접근할 때,
산의 정상에 올랐을 때, 무지개를 볼 때,
그리고 천둥소리를 듣거나 번개를 볼 때에도
하느님께 찬미를 드렸다고 합니다.

순례 길에는 빵이나 과일을 파는 장사꾼들이 줄지어 있었고,
예루살렘에 가까이 다가간다면
모든 사람들은 함께 순례의 노래(시편 122장; 125장; 128장)를 부르는 거룩한 모습들뿐이었다고 합니다.

파스카 축제 때가 되면 예루살렘 성전에는
율법학자들이 두 파(Hille과 Schammai)로 나뉘어 늘 토론을 했다고 합니다.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도 역시 두 파로 나뉘어 치열하게 토론을 했는데,
예수님께서는 사두가이들과 율법 해석에 있어서
매우 유연했던 율법학자들(Hillel의 제자들)과 논쟁을 하셨을 것이라고 합니다.

마리아와 요셉의 교육 덕택으로
율법에 대한 예수님의 분명한 견해는 감히 어느 누구도
반론을 제기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복음사가는
“그의 말을 듣는 이들은 모두 그의 슬기로운 답변에 경탄하였다.”고 합니다.

당시 예루살렘 시민이 삼만 명이었는데,
파스카 축제 때에는 이백오십만 명의 순례객이 모여들었답니다.

복음은 요셉과 마리아가 아이를 잃어버린 것을 마치 전혀 모르던 것으로 표현하지만 부모는 이미 오래전부터 긴 행렬을 샅샅이 뒤지다가 하룻길이 다 끝났을 때 잃어버린 것으로 결론을 내린 것입니다. 사흘 뒤에야 잃었던 아들을 찾아낸 부모는 깜짝 놀랍니다.

“성경에 기록된 대로, 그리스도는 고난을 겪고 사흘 만에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나야 한다.”(24,46)는 말씀을 미리 보여주신 것입니다.

어린애로만 알았는데 논쟁을 하면서 슬기로운 대답을 하고 있던 예수님을 통해 부모는 자랑스러움을 느끼는 순간이었습니다.

“얘야, 우리에게 왜 이렇게 하였느냐?”라고 하셨지만 어린 예수님을 보는 마리아에게는 만감이 교차되는 순간이었을 것입니다.

아이가 자기들을 따라오지 않았음에 화도 났을 것이며, 거꾸로 찾아와야 하는 고통 때문에 만나기만 하면 한바탕 혼쭐낼 생각도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영영 잃어버릴 것만 같았던 양이 아니라, 찾았기 때문에 커다란 기쁨으로 어깨에 메고 돌아갈 수 있는 어린양이었으며(15,1-7), 동시에 하느님의 신비를 드러낼 수 있을 정도로 똑똑한 학자였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마리아는 낳아서 기른 보람을 최초로 뿌듯하게 넘치도록 느끼는 순간이었을 것입니다.

신약성경 전체를 통해 드러난 예수님의 첫 마디는
“왜 저를 찾으셨습니까?
저는 제 아버지의 집에 있어야 하는 줄을 모르셨습니까?”라는 소리였습니다.

애간장을 태우면서 찾아야만 했던 하느님은 성전에서 선포되는 복음에 귀를 기울일 때에만 찾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또한 부모님의 뜻보다는 하느님 아버지의 뜻이 더 앞서야 한다는 가르침을 주십니다(14,26).

유다인들은 제아무리 탁월하고 훌륭한 일을 할지라도 하느님의 뜻을 드러내지 못한다면 세상은 그에게 관심을 갖지 않는다고 합니다.

한편 마리아는 지혜로운 아들이 자랑스러웠지만
아직 부모의 입장을 이해하지 못하는
예수님의 반문은 매몰차게 들렸을 것입니다.
마리아의 반문도 없고, 복음사가는
“예수님이 한 말을 알아듣지 못했다.”면서
어머니의 사랑과 아들의 사랑이 향하는 곳이 다름을 말해줍니다.

예수님께서는 아직 당신의 모든 것을
드러내시지 않으셨기 때문에
부모는 예수님의 말씀을 알아듣지 못한 것입니다.
그러나 때가 차면 알아들을 것입니다.
그래서 마리아는 당장은 알아듣지 못한
예수님의 말씀을 알아듣기 위해 반복해서 되씹고 마음속에 간직했습니다.

모든 부모가 그렇듯이, 자식이 자기가 해야 할 일을 위해 부모를 떠나는 것이 안타깝지만 자랑스러운 것과 똑같은 일입니다.

이제 마리아는 아들 예수님을 서서히 하느님 아버지께 돌려드려야 할 시간이 다가오고 있음을 깨달을 것입니다.

“아버지의 집에 있어야 한다.”는
예수님의 이 말씀을 통하여
루카 복음사가는 이미 예수님께서
하느님 아버지의 사명을 실천하고 계심을 표현합니다.

그리고 루카는 예수님께서 나자렛으로 돌아가
부모 공경의 계명(탈출 20,19)을
잘 지키는 가운데 순종하며 지냈다고 짧게 말합니다.
자녀의 순종적인 모습과 가능성을 보기 위해
기다려야 하는 부모의 인내심을 강조합니다.
또한 예수님께서는 지혜와 키가 자랐고,
사무엘처럼(1사무 2,26),
하느님과 사람들의 총애도 더하여갔다고 합니다.

마리아와 요셉은 예수님께서 사람들의 총애보다는 하느님 아버지의 총애를 받게 가르쳤고, 지식을 주입시키기보다는 지혜를 쌓아주었고, 자기가 누구이며, 자신이 완수해야 할 사명이 무엇인지 분명하게 알게 하는 자존감을 키워주는 교육을 시켰다고 합니다.

요셉과 마리아께서는 철저하게 고대 그리스 교육철학의 삼대요소인 지혜, 덕, 그리고 체력을 모두 아우르는 전인교육을 시키신 것입니다.

많은 경우에 있어서 하느님의 사랑이 아니라
사람들의 인기에 연연하게 하는 교육, 지혜가 아니라
지식에 매달리게 하는 교육,
그리고 건강한 신체를 유지하기에 급급한 오늘의 현실과 비교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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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독서(콜로새서 3,12-21)는
공동체가 지켜야 할 최소한의 규범을 제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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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을 받아들이기 시작한
초기교회의 작은 공동체는 함께 모이는 경우가 잦았었다고 합니다.
오늘날 우리와는 달리
교우의 집이 곧 성당이었고
(마르 2,1; 3,20; 7,17.24; 9,29.33; 10,10),
가정집이 공동체의 구심점이었다고 합니다.

세례를 받고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아난 이들은
늘 저 위에 있는 것을 추구해야 하고(3,1)
새 인간을 입은 사람이라고 합니다(3,10).
하느님의 자녀들 가운데 그리스도의 말씀이 풍성히 머무르게 된다면
서로 쉽게 용서할 수 있고, 평화가 마음을 다스리게 할 수 있고,
사랑으로 완전하게 묶여 하나가 될 수 있다고 합니다.

바오로는 아마도 성당으로 쓰는 집에서
가족들이 겪는 아픔을 보았던 것 같습니다.
가정을 다스리는 법이 있다면,
그것은 오로지 예수님의 말씀(복음)이어야 함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어떤 형태일지라도 폭력이 가정을 다스린다면 사탄이 하는 짓,
갈라놓는 짓밖에는 할 것이 없을 것입니다.
사랑은 게으름은 물론 폭력도 없앱니다.
그래서 “사랑은 움직이는 거야!”라고 했던 것입니다.

저는 자식을 낳지도, 가르치지도 못했기에,
그리고 여러분들이 훨씬 더 전문가이시기에
성가정 축일을 맞이해서 오늘 읽혀진
제1독서와 제2독서를 오늘 저녁기도를 대신해서
읽어보시라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우리 모두의 가정이 오늘 복음 독서들의 내용이
실현되는 공동체라면 좋겠습니다.
저도 오늘만이라도 보좌신부님과의 관계에서
제2독서의 내용을 거스르는 것이
무엇인지 꼭 확인해보고, 있다면 고쳐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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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방효익 바오로 신부
2021년 12월 26일
  | 12.26
505 7.6%
예수, 마리아, 요셉의 성가정 축일은 신앙인들이 나자렛의 성가정을 특별히 기억하고 본받기 위하여 제정된 날입니다.

가정은 우리 삶의 보금자리이며,
더욱이 그리스도인 공동체의 기본 요소이므로,
가정을 거룩하게 하도록 힘써야 합니다.
예수님의 가정이 우리에게 참된 삶의 모범으로 소개됩니다.

오늘의 독서와 복음에서는 부부 사이의 관계,
그리고 부모와 자녀 사이의 관계에 대해 잘 말해주고 있습니다.
잘 묵상해보고 우리 가정에 실천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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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제1독서 : 집회서 3장 2절-6절.12절-14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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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째 독서에서는 부모에 대한 자녀들의 의무를 말해주고 있습니다.
즉 자녀들은 부모를 공경하라고 가르칩니다.
어떻게 더 잘 설명할 수 없을 정도로
아주 분명하고 명확하게 말하고 있습니다.

“아버지를 공경하는 이는 죄를 용서받는다.
어머니를 영광스럽게 하는 이는 보물을 쌓는 이와 같다.”

부모를 공경하면 죄를 용서받고,
또 그것은 공로를 쌓는다는 깊은 뜻이 들어있습니다.

“네 아버지가 나이 들었을 때 잘 보살피고 그가 살아 있는 동안 슬프게 하지 마라. 그가 지각을 잃더라도 인내심을 가지고 그를 업신여기지 않도록 네 힘을 다하여라. 아버지에 대한 효행은 잊히지 않으니 네 죄를 상쇄할 여지를 마련해 주리라.”

부모에 대한 효도는 십계명에도 들어 있습니다.
자녀들이 성장하면 부모에 대한
효도와 공경을 등한시하기 쉽기 때문일 것입니다.
부모는 하느님의 은혜로 자녀를 낳고,
하느님을 대신하여 자녀들을 잘 키우고 교육하여
세상과 교회에 훌륭한 일꾼이 되게 합니다.
자녀에 대한 부모의 노고와 희생은 이루 말할 수 없습니다.

살아 계신 하느님을 공경하는 이는 분명히 자기 부모를 공경한다고 합니다.
몸이 불편한 부모를
잘 돌봐드리는 것보다 더 큰 활동과 공로가 어디에 있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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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제2독서 : 콜로새서 3장 12절-21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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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째 독서에서 바오로 사도께서는
먼저 신앙인들 사이 특히 가족끼리의 의무에 대해 말해주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의 가정은 남들과 구별되어야 하는데,
사랑하고, 온순하게 참고 견디며, 용서하는 인내를 보여주어야 한다고 합니다.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동정과 호의와 겸손과 온유와 인내를 입으십시오. 누가 누구에게 불평할 일이 있더라도 서로 참아 주고 서로 용서해 주십시오. 주님께서 여러분을 용서하신 것처럼 여러분도 서로 용서하십시오.”

그러면서도 기뻐해야 한다고 합니다.
이렇게 할 때 “주님 안에” 사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서 부부 사이의 의무와
자모와 자녀와의 관계에 대해 말해주고 있습니다.
“남편 여러분, 아내를 사랑하십시오. 그리고 아내를 모질게 대하지 마십시오. 자녀 여러분, 무슨 일에서나 부모에게 순종하십시오. 이것이 주님 마음에 드는 일입니다. 아버지 여러분, 자녀들을 들볶지 마십시오. 그러다가 그들의 기를 꺾고 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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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루카복음 : 2장 41절-52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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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예수님

루카 복음서는 오늘 예수님의
‘유년 시절’을 다음과 같이 간단히 요약하고 있습니다(2,40)

“아기는 자라면서 튼튼해지고 지혜가 충만해졌으며, 하느님의 총애를 받았다.”

51-52절에서는 예수님의 ‘소년 시절’을 다음과 같이 요약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부모와 함께 나자렛으로 내려가, 그들에게 순종하며 지냈다. 그의 어머니는 이 모든 일을 마음속에 간직하였다. 예수님은 지혜와 키가 자랐고 하느님과 사람들의 총애도 더하여 갔다.”

예수님은 다른 사람과 마찬가지로
부모와 함께 생활하시면서 자라고 교육받으시고
훌륭한 인격체로 성장해가셨다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뜻을 이루시는 공생활을 잘 하시기 위해서
그 밑바탕으로 건강하고 훌륭한 교양인이 되셔야 합니다.
이렇게 3년의 공생활을 위해,
부모의 보살핌과 교육을 받으며 30년간의 가정생활을 묵묵히 하신 것입니다.

(2) 요셉과 마리아

아버지 요셉의 일생은 드러나지 않게 숨겨져 있습니다.
바로 여기에 그의 위대함이 있습니다.
전혀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 겸손되이
숨어서 성가정을 지탱하며 예수님과 마리아께 봉사했습니다.
건전한 육체적인 노동인 목수일을 하시면서 성가정을 지탱하셨습니다.
성가정에 대한 요셉의 봉사와 희생과 사랑 없이는
구세주가 튼튼히 잘 자랄 수 없었을 것입니다.

요셉은 양부이지만 성가정의 가장의 역할을 다하여
예수님을 훌륭하게 키우고 교육합니다.
요셉은 정통 유대인으로서 당연히 종교교육을 받아
구약성경과 전례와 종교의식을 잘 알고 있었고
따라서 예수님께도 종교 교육을 잘 시키신 것은 분명합니다.

예부터 유대인들은 자녀들에게 가정교육과 철저히 종교 교육을 시킵니다.
요셉도 예수님을 어린 시절부터 가정교육, 인성교육,
종교 교육을 철저히 시켜서 예수님이
훌륭한 ‘교양인’과 ‘종교인’으로 자랄 수 있게 했습니다.

그와 더불어 성령의 은혜도 함께 한 것입니다.
예수님의 부모가 30년 동안 닦아 놓은
가정교육이라는 튼튼한 기초 위에
예수님의 3년의 공생활이 세워질 수 있었습니다.
먼저 인격이 형성되고 자질을 갖춘
교양인부터 되어야 성인(聖人)이 될 수 있는 법입니다.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는 속담대로,
하느님께서는 스스로 노력하는 사람을 도와주시고 은혜도 베푸십니다.
하느님께서는 게으르며 노력하지 않는 사람이나,
가정교육과 인성교육을 잘못 받아 인간으로서의
교양이나 자질이 모자라는 사람을
갑자기 성인이나 위대한 인물로 만들지는 않으실 것입니다.

물론 예수님의 인성과 신성을 엄격하게 구분하면 오류에 빠집니다.
예수님의 30년의 가정생활 동안에 ‘인성교육’이 중요했으며,
그 바탕 위에 신성(神性)이 빛을 보게 된다고 묵상해볼 수 있습니다.
30년간의 가정교육이 잘 이루어지고 난 뒤에 3년의 공생활을 시작하십니다.

어린 예수님이 먹고 마시고 입는 등
인간으로서의 예의와 교양과 인격을 배우는 데에는
부모인 요셉과 마리아 그 역할을 다했습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이시기도 하기에
그런 기본교육은 필요 없고 저절로
다 갖추어져 있었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나아가서 예수님은 아버지 요셉으로부터 종교교육도 잘 받았기 때문에
일반 유대인들 이상으로 율법과 예언서 대해 잘 알 수 있었습니다.

어머니 마리아도 드러나지 않게 가정을 위해서나
예수님을 위해서 헌신적이셨습니다.
이같이 평범한 가정에서 가장 위대한 인물이신
구세주께서 태어나시고 가정 교육을 받으시며 자라나셨습니다.

4. 오늘의 실천

예수님께서는 부모에게 순종하시고 가정생활을 잘 하심으로써,
화목한 가정의 모범을 보이시고 또한 가정을 축복하셨습니다.

우리의 가정도 평범한 가정입니다.
부모가 온갖 희생으로 가정을 돌보고,
자녀를 키우는 가운데 그 자녀는
미래에 교회와 사회의 훌륭한 일꾼으로 성장해나가게 됩니다.

참으로 복된 가정은 하느님의 말씀을 따르며
사랑으로 서로 감싸주고 격려하고 화목과 일치를 이루는 가정입니다.
기쁨과 평화가 흘러넘치는 가정,
서로를 위하여 기도하고 헌신적으로 봉사하는 가정은
하늘나라를 비추는 거울입니다.

우리의 가정도 성가정을 본받아 믿음과 사랑 안에서 하나 되고,
하느님의 뜻을 실천해 나가는 가정을 이루어야 하겠습니다.
아울러 세상의 모든 가정을 위해서도 기도드립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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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4년 1월에 교황 바오로 6세께서 나자렛을 방문하여 말씀하신 강론의 내용이 아주 좋기에 참고로 첨부합니다(성무일도 ‘성가정 축일’의 중 제2독서).

나자렛의 모범

“나자렛의 집은 우리가 예수님의 생애를 이해하기 시작하는 학교, 즉 복음의 학교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지극히 소박하고 겸손하며 아름다우신 하느님의 아들의 현시, 즉 그렇게도 심오하고 은밀한 그 계시가 지니고 있는 의미를 보고 듣고 묵상하며 투시하는 것을 배웁니다. 또한 은연 중에 본받는 것을 배우게 될지도 모릅니다.

여기서 그리스도가 누구이신지 쉽게 이해하는 것을 배우게 됩니다. 여기서 예수님이 우리 가운데서 영위하신 생활의 환경, 즉 그 장소, 시대, 관습, 언어 그리고 종교 예식 등 한마디로 당신 자신을 드러내시기 위해 사용하신 모든 것을 고찰해야 할 필요성을 발견합니다. 여기서 모든 것 하나하나가 웅변과 의의를 지닙니다.

여기 이 학교에서 우리가 복음의 가르침을 따르고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려고 할 때 왜 영적인 규율을 갖는 것이 필요한지 이해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다시 어린 시절로 돌아가서 나자렛의 이 겸허하고도 숭고한 학교에 들어가, 마리아와 함께 생의 참된 지식과 신적 진리에 대한 고귀한 지혜를 다시 배우기 시작했으면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곳을 잠시 들렀다 가는 여행자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래서 어느 누구도 완전히 도달하지 못하는 복음의 이해를 이 가정에서 추구해 나가려는 열망을 포기해야 하겠습니다. 그럼에도 이곳에서 살짝이 몇 가지 간단한 교훈들을 수집하기 전에는 떠나고 싶지 않습니다.

첫째로 침묵의 교훈입니다.

영혼이 살아나가는 데 있어 불가결하고도 놀라운 환경인 침묵을 중대시하는 마음이, 법석대고 지나치게 민감해진 우리 현대 생활에서, 그렇게도 많은 고성과 소음과 소란으로 포위당해 있는 우리들 안에서 재생되었으면 합니다. 나자렛의 침묵이여, 우리 마음을 거룩한 반성과 내적 생활에 집중시키고 하느님의 신비스러운 영감과 훌륭한 가르침을 들으려는 마음의 자세를 주소서. 또한 마음의 준비와 영적인 것의 연구와 묵상, 각 개인의 내적 생활 그리고 하느님 홀로 은밀히 보시는 그 기도의 필요성과 가치를 가르쳐 주소서.

다음으로 가정 생활에 대한 교훈입니다.

나자렛의 집은 가정생활이 무엇인가를, 그것이 지니는 사랑의 친교, 간소하고도 단순한 아름다움 그리고 성스럽고도 침해할 수 없는 성격 등을 우리에게 가르치고 있습니다. 나자렛 가정은 또 그 가정교육은 어떤 것으로도 대치할 수 없는 참으로 감미로운 것임을 보여주며, 사회 질서에 있어서 가정의 역할이 차지하고 있는 최고의 중요성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노동의 교훈입니다.

나자렛은 “목수의 아들”의 고향입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인간 노동의 준엄하고도 구속적인 법을 이해시키고 고취시키고 싶으며 새로운 인식을 불러일으키기를 원하고, 또한 노동은 그 자체로 목적이 될 수 없고 그것이 지니는 자유와 탁월성은 경제적 가치를 초월하여 그 노동의 목적이 지니는 가치에서 연유된다는 점을 다시 상시시키고 싶습니다. 결론적으로 여기 나자렛에서 우리는 세계의 모든 노동자들에게 인사를 보내 드리고자 하며, 노동자들의 모범이시오 그들의 신적인 형제이시며 모든 정당한 권리와 명분의 예언자이신 우리 구세주를 보여 드리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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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대교구 박광호 베드로 신부
2021년 12월 2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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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마리아, 요셉의 성가정 축일’은
나자렛의 성가정을 기억하며 이를 본받고자 제정된 축일이다.
1921년 이 축일이 처음 정해질 때에는
‘주님 공현 대축일’ 다음 첫 주일이었으나,
1969년 전례력을 개정하면서 ‘성탄 팔일 축제’ 내 주일로 옮겼다.

복음은 “예수님의 부모는 해마다 파스카 축제 때면 예루살렘으로 가곤 하였다. 예수님이 열두 살 되던 해에도 이 축제 관습에 따라 그리로 올라갔다.”(루카 2,41-42)로 시작한다.

열심한 유다인이었던 요셉과 마리아는 모세가 전해주었던 토라,
곧 율법의 “주 너희 하느님께서
당신의 이름을 머무르게 하시려고 선택하시는 곳에서만…
파스카 제물을 잡아 바쳐야 한다.”(신명기 16,6)라는 말씀에 따라
종살이하던 이집트에서 이스라엘 백성이 풀려난 것을 기념하기 위해
파스카 축제 때면 해마다 거룩한 도성 예루살렘으로 순례를 떠났다.

요셉과 마리아는 베들레헴에서 태어나
나자렛에서 성장한 아들 예수가 열두 살이 되었을 때
이 아들을 순례길에 동행하도록 한다.
이는 성전에서 제물을 바치는 의식을 통해서
예수가 율법과 계명의 아들,
곧 주님 앞에서, 그리고 동족들 사이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책임감 있게 잘 지키는 아들이 되기를 바랐기 때문이었다.

히브리인들 사이에서는 지금도 그러하듯이
그때에도 부모를 따라 순례길에 오른 아이들은
말씀을 쓰인 그대로 잘 읽는지를 증명하기 위해
성경을 읽도록 초대받았을 것이고,
성경의 전문가들이나 율법 교사들이 아이에게 질문하였을 것이며,
아이는 토라에 쓰인 주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알기 위해
열심히 말씀을 읽고 공부했음을 보이면서 잘 대답해야 했을 것이다.
예수님의 경우도 똑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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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사흘 뒤에야 성전에서…듣기도…묻기도”(루카 2장 41절-52절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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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축제 기간이 끝나고 돌아갈 때에 소년 예수님은 예루살렘에 그대로 남았다. 그의 부모는 그것도 모르고, 일행 가운데에 있으려니 여기며 하룻길을 갔다. 그런 다음에야 친척들과 친지들 사이에서 찾아보았지만, 찾아내지 못하였다. 그래서 예루살렘으로 돌아가 그를 찾아다녔다.”(루카 2,43-45)

한참 사춘기의 아이인 예수를 잃은 부모는
혹시 길을 잃었을지도 모를 아들 걱정에 불안했고 두려웠다.
그래서 부모는 먼저 “친척과 친지들 사이에서” 찾는다.
부모로서 소년 아들 예수가 “어디?”에 있는지를 묻는 것은
생각보다 고통스럽고 심각한 질문이다.
결국, 부모는 예루살렘으로 되짚어 돌아가기로 한다.

예루살렘으로 돌아간 부모는 아들 예수를 “사흘 뒤에야 성전에서 찾아냈는데, 그는 율법 교사들 가운데에 앉아 그들의 말을 듣기도 하고 그들에게 묻기도 하고 있었다.”(루카 2,46)

우리는 부모로서 애가 어디 있는지도 알지 못한 채
“사흘”을 헤맨다는 것이 어느 정도의 고통인지 짐작해 볼 수 있다.

“이틀 뒤에 우리를 살려주시고
사흘째 되는 날에 우리를 일으키시어
우리가 그분 앞에 살게 되리라.”(호세아 에언서 6,2) 하는 말씀처럼
히브리 사람들에게 관습적으로 충분히 긴 고뇌의 시간을 뜻하는
“사흘째”에 부모는 아들 예수를 “성전”에서 찾는다.
온갖 곳을 헤매다가 마침내 율법을 지키려고 열성인 사람들 가운데에서,
그리고 하느님의 현존을 상징하는 성전에서 예수를 찾는다.

아마도 예수는 성전에 들어가 나오지 않고 내내 그곳,
곧 하느님의 쉐키나(처소, 거처)에서 지낸 듯하다.

예수는 라삐들과 율법 학자들,
성경을 해석하는 전문가들 사이에서 “듣기도 하고” “묻기도 하며” 있었다.

우리는 뭔가 기적적이거나 특별한 상황이 발생한 것처럼
이 대목을 읽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예수는 함께 있던 이들에게 어떤 엄청나고
놀라운 진리를 설파하고 있었던 것이 아니다.
정말 라삐들의 제자로서 그들을 잘 ‘들으셨고’,
주님께서 듣는 이들에게 무엇을 뜻하고자 하시는지
의문 생기는 것들을 ‘물으셨다.’

우리는 복음의 이 대목을 “저는 어린아이에 지나지 않아서 백성을 이끄는 법을 알지 못합니다.…당신 종에게 듣는 마음을 주시어 당신 백성을 통치하고 선과 악을 분별할 수 있게 해주십시오.”(열왕기 상권 3,7.9) 하는 솔로몬의 기도처럼 ‘묻기 위해 들으시는 예수’, 혹은 ‘제자가 되신 예수’와 같은 소제목을 붙여 읽어 볼 수도 있겠다.

유다 역사가 요세푸스Flavius Josephus(기원후 38년경~?)가
증언하는 대로 열두 살 소년 사무엘이 예언을 시작하였듯이
(참조. 1사무엘 3장),
비슷한 나이의 “아주 젊은 사람” 다니엘이 지혜의 말을 한 것처럼
(참조. 다니 13,45-49),
예수님 역시 성장 과정 안에서
‘가르침의 아들’이 되고 “말씀의 종”(루카 1,2)이 되시어
“그의 말을 듣는 이들은 모두
그의 슬기로운 답변에 경탄하였다.”(루카 2,47) 한 대로
주님의 현존 안에서 ‘말씀하실 수 있는 분’으로서 당신을 드러내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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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얘야, 우리에게 왜 이렇게 하였느냐?”(루카 2장 41절-52절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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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의 부모는 그를 보고 무척 놀랐다. 예수님의 어머니가 ‘얘야, 우리에게 왜 이렇게 하였느냐? 네 아버지와 내가 너를 애타게 찾았단다.’ 하자 그가 부모에게 말하였다. ‘왜 저를 찾으셨습니까? 저는 제 아버지의 집에 있어야 하는 줄을 모르셨습니까?’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이 한 말을 알아듣지 못하였다.”(루카 2,48-50)

어머니 마리아가 놀라 아들 예수를 꾸짖듯이 말한다.
루카가 전해주는 바에 따를 때 아버지 요셉은 말이 없고,
마리아가 “네 아버지”라면서 요셉의 걱정을 전한다.
비록 혈육은 아니었을지라도 법적으로는 엄연한 아버지였기 때문이다.
어머니의 말에 예수는 투정을 부리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반항하는 것도 아니게 단순하게 하나의 계시처럼
“왜 저를 찾으셨습니까?”라고 대답한다.

사실, 이 의문문의 대답은
분명 마리아와 요셉의 마음에 남아서 자기들의 뜻으로 얻은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선물로 얻은 이 아들에 대해서
스스로 자신들의 신앙과 느낌에 대해 깊이 자문하게 하는 대답이었을 것이다.

소년 예수와 부모 사이의 관계에도 오해와 갈등이 있었음이 분명하다.
모든 가정의 자녀들처럼 소년 예수도
그의 부모에게 걱정과 고통의 원인이 되었을 것이고,
부모는 부모대로 교정과 꾸지람으로
그의 성장에 교육적으로 개입하려 했을 것이다.
인간은 누구나 고통스러운 과정을 거쳐 성장하고,
한 자녀가 세상에 뿌리를 내리기까지 무척 힘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
하느님의 아드님으로서 사람이 되신 예수님,
참 인간이 되신 예수님의 성장 과정도 이렇게 지극히 인간적인 과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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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제 아버지의 집…모르셨습니까?”(루카 2장 41절-52절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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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이어 소년 예수는
“저는 제 아버지의 집에 있어야 하는 줄을 모르셨습니까?” 하며, “제 아버지의 집에(ἐν τοῖς τοῦ Πατρός μου, en toîs toû Patrós mou)”라고 한다.

예수님은 하느님이라는 참아버지를 모신 분이다.
공생활 동안 몇 번이고 “아버지”를 가르치시고 외치신 분이다.
예수는 세상에 오시어 성장하면서 아버지를 모신 당신 마음,
거룩하고 또 거룩한 지성소,
하느님께서 계신 곳에 있어야만 한다.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여라.”(탈출기 20,12 / 신명기 5,16) 하는 계명을 상기하며 말씀하신 어머니 마리아에게 소년 예수는 “나 말고 다른 신이 있어서는 안 된다.…어떤 신상도 만들어서는 안 된다.…그것들에게 경배하거나, 그것들을 섬기지 못한다.”(탈출기 20,3-6 / 신명기 5,7-10) 하는 계명, 곧 부모 공경에 우선하는 하느님 관련 계명을 상기하라는 듯이 답한다.

예수는 무엇보다 하느님의 아들로서 하늘에 계신 아버지가 누구이신지를 알고 그분의 뜻에 순종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안다.

루카 복음사가는 예수님의 마지막 말씀으로 “아버지, 제 영을 아버지 손에 맡깁니다.”(루카 23,46) 하며 시편 말씀을 인용하는 기도로 “아버지”를 부르며 공생활을 마감하시는 것으로 기록한다.
예수님의 삶 자체가 이렇게 “아버지”를 부르는 고백의 여정이었다.

예수님은 반드시 아버지와 함께 머물러야만 한다고 하시고,
그렇게 해야만 할 필요가 있다면서
공생활 내내 제자들에게 이를 강조하신다.

예수님께서는 항상 아버지의 뜻에 순명하시는 분으로 남는다.
그의 운명이라서 어쩔 수 없이 그렇게 하시는 것이 아니라,
항상 온전한 자유로 이를 적극적으로
수행해야만 하는 당신 아버지 하느님의 뜻이자
사명으로 당신 삶을 살고자 하시기 때문이다.

아버지의 뜻에 순명하시는
이러한 예수님의 여정이 예수님께서 수난과 죽음을 맞으시고
하느님 아버지로부터 영원한 생명을
받으시는 부활을 이루시기 위해
예루살렘을 향해 기꺼이
계속 오르시는 여정
(참조. 루카 9,22 / 13,33 / 17,25 / 22,7.37 / 24,7.26.44)에서
처절하고도 두드러지게 드러나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예수님께서 아주 여러 번 이렇게 아버지의 뜻을
좇아야만 한다는 사실을 강조하셨음에도
그 말을 듣는 사람들은 이를 알아듣지 못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의 부모들도
“예수님이 한 말을 알아듣지 못하였다.”(루카 2,50) 한다.

루카 복음사가는 훗날 예수님께서 세 번째로
당신의 수난과 부활을 예고하신 다음에
예수님의 제자들 역시
“말씀하신 것을 알아듣지 못하였던 것이다.”(루카 18,34)라는 문장을 남긴다.

루카가 기록한 대로 성전에서 사흘 만에 극적으로
다시 만나 말을 주고받던 중에
소년 예수가 부모에게 한 이 말을 듣고
부모는 말을 잇지 못하고 이해하지도 못한 채로 남는다.
그렇지만 예수님의 부모는 참으로 믿음의 사람이었다.
교육은 지금 알지 못하더라도
언젠가 아이 안에 이루어질 하느님의 계획에 대한 믿음의 행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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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예수님은 부모와 함께…그들에게 순종하며”(루카 2장 41절-52절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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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은 “예수님은 부모와 함께 나자렛으로 내려가, 그들에게 순종하며 지냈다.”(루카 2,51)라는 문장으로 뒤를 이어간다.

복음으로 볼 때 소년 예수가 부모 공경을 소홀히 하지는 않는다.
일단 표징은 드러났고, 언젠가 부모도 이를 이해할 날이 올 것이다.

“그의 어머니 (마리아)는 이 모든 일을 마음속에 간직하였다.”(루카 2,51)

재 속에 담긴 뜨거운 불씨처럼 마리아는 이 모든 일을 간직한다.
이 불씨는 장차 믿음의 불꽃이 되어
십자가의 순간과 오순절에(참조. 사도행전 2,1-12)
제자들의 믿음을 더해주는 불꽃으로 맹렬하게 타오르게 될 것이다.

“예수님은 지혜와 키가 자랐고
하느님과 사람들의 총애도 더하여 갔다.”(루카 2,52)

예수님께서는 나자렛의 고향집이라는 학교에서
무엇보다도 하느님을 ‘아빠, 아버지’라 부르도록 교육받았다.
야훼, 에도나이, 엘로힘…그 무엇도 아닌 ‘아빠, 아버지’라 부르도록,
그 말은 언제나 내가 하느님의 아들이라는
자각으로 살아야 함을 교육받았다는 뜻이 된다.

둘째로 예수님은 나자렛 집에서 성장하면서
아버지의 뜻만을 찾도록 교육받았다.

어릴 때는 “왜 저를 찾으셨습니까?
저는 제 아버지의 집에 있어야 하는 줄을 모르셨습니까?”(49절) 하셨고,
성장해서는 “내가 내 뜻을 이루기 위해서가 아니라
아빠의 뜻을 이루러 왔다.” 하시면서
얼마나 자주 아버지의 뜻
(마태오 6,10 / 7,21 / 12,50 / 18,14 / 21,31 / 26,42)
(루카 22,42 / 요한 6,40)
을 강조하셨는지 모른다.

“주의 기도”를 가르치실 때도 그러하셨고,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이라야 하늘 나라에 들어간다” 하실 때도
그러하셨으며,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이라야 내 형제요
누이이며 어머니”라 하실 때도 그러하셨고….
그리하여 마지막에 “예수님께서는 신 포도주를 드신 다음에 말씀하셨다.
‘다 이루어졌다.’
이어서 고개를 숙이시며 숨을 거두셨다.”
(요한 19,30) 하신 분이 바로 우리 주님이시다.

셋째로 예수님은
나자렛 집에서 오로지 다른 사람을 위해서만 살라고 교육받았다.

잉태되었을 때부터 어머니를 따라 봉사하러 갔고,
인간에게 봉사하고, 특히 어려움에 부닥친 사람들에게 봉사였으며,
“사람의 아들은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고, 또 많은 이들의 몸값으로 자기 목숨을 바치러 왔다.”(마르 10,45) 하시고,

최후의 만찬 때에는 발을 씻겨주시면서 너희도 그렇게 해야 한다고 말씀하신 분이 바로 우리의 주님이셨던 것이니, 이 모든 것을 나자렛의 고향집 학교에서 공부하셨다.

주님께서는 가끔 이렇게 나자렛에서 배운 것들이 흔들릴 때마다 혼자 기도하러 가셨고 어린 시절에 고향집에서 익혔던 내용들, 아버지의 아들임을 자각할 것, 아버지의 뜻만을 찾을 것, 누군가에게 도움이 되는 삶을 살 것을 끊임없이 되새기셨다.

오늘 우리는 전례적으로 우리들의 가정이 이상과 본보기로 삼아야 할 성 가정을 기리는 축일을 지낸다.

물론 우리는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얽혀있는 우리의 현실에서 예수님의 순명처럼 우리가 과연 살 수 있을 것인가에 관해 회의적인 시각을 지닐 수가 있다.

또 현대 사회를 살아가면서 전통적인 의미에서 이상적인 가정을 꾸린다는 것이 오늘날 과연 가능하기나 할 것인가 하는 점에서 대단히 많은 논란의 여지가 있는 것도 사실이다.

『…“예수님은 부모와 함께 나자렛으로 내려가, 그들에게 순종하며 지냈다.”(루카 2,51)라는 복음의 내용에 근거할 때, 예수는 친히 가정에서 부모에게 순종하며 살면서 이상적인 그리스도교 가정의 모범이 되는 탁월한 가정생활을 하셨다. 그러나 소년 예수가 홀로 성전에 간 사건(루카 2,41-50)은, 하느님 나라를 위한 철저한 봉헌의 삶은 현실의 가정을 초월한 새로운 양식의 삶임을 보여준다. 즉 그리스도를 따르는 구원의 삶, 부활의 삶, 영생의 삶은 (때로) 부모, 형제, 친척, 가정까지 버려야 하는 결단도 요구한다.(마태 10,34-39 루카 14,26-27 참조) 따라서 나자렛의 성가정은 하느님 나라를 향한 개방성과 이웃을 위한 연대적인 삶 안에서만 참가치가 확인되는 가정이며, 하느님을 체험하는 친교의 현장으로서 거룩한 가정이다. 또한, 이 성가정은 모든 그리스도교 신자들 가정의 원형이요 모범이기도 하다.…

성가정의 모범을 본받는 모든 그리스도교 가정은 인내와 노동의 기쁨, 형제애, 거듭되는 너그러운 용서, 그리고 특히 기도와 삶의 봉헌을 통해서 하느님을 경배하는 것을 배우는 곳이 되어야 한다.(가톨릭교회 교리서, 1655-1657항)』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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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 벤지
2021년 12월 26일
  | 12.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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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쁨과 행복'의 성가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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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미예수님!
오늘은 예수, 마리아, 요셉의 성가정 축일이고, 오는 주 한 주간은 가정 성화 주간입니다. 우리 가톨릭교회는 성탄 팔일 축제를 지내면서 한해의 마지막 주일을 ‘예수, 마리아, 요셉의 성가정 축일’로 정해서 축하하고 기쁘게 지냅니다. 성가정 축일은 나자렛 성가정을 기억하며 이를 본받고자 하는 축일입니다.

교회는 성탄 다음 주일을 성가정 주일로 정했습니다. 예수님께서 탄생하심으로써 아빠, 엄마, 아가로 성가정으로서의 구성요소를 다 갖추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외톨박이로 이 세상에 뚝 떨어져 강생하여 오신 것이 아니라, 구체적으로 나자렛 성가정의 핵심 구성원으로서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일반적으로 가정살이는 생존과 활동의 근본이며 생활과 삶의 기본입니다. 가정은 이 사회와 나라가 시작되는 가장 작은 요소의 공동체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사람을 홀로 만들지 않으시고 남자와 여자로 만들고 번성하도록 여러 조건과 환경을 마련해 주셨습니다.

그래서 사람은 홀로 살지 않고 공동체를 이루어 살아갑니다. 모든 가정은 하느님의 섭리로 이루어집니다. 남녀가 짝을 짓고 살면서 자녀를 낳아 기르고 가르쳐 하느님의 창조 사업에 참여하는 가정은 가장 기초적인 공동체를 이룹니다. 보통 가정은 우리의 삶이 시작되는 곳이며 동시에 우리가 삶을 마감하는 곳입니다.

가정은 우리 인생살이의 모든 것을 담고 있는 그릇과 같은 곳입니다. 따라서 좋은 가정을 이루는 것은 우리의 인생살이를 ‘기쁨과 행복’으로 이끄는 길입니다. 좋은 가정은 이 나라 이 사회를 바르게 만들고 우리 교회를 좋은 교회로 만듭니다.

지상에서 성가정을 이루는 것이 천상의 기쁨을 미리 체험하는 것이기에 행복한 가정은 미리 누리는 천국입니다. 사람들은 하느님께서 마련하신 가족 제도를 통하여 하느님의 사랑과 축복을 받습니다.

우리 가톨릭 교회는 우리가 본받아야 할 가정의 모범으로 예수님, 성모님, 그리고 요셉 성인으로 구성된 나자렛 성가정을 모범으로 제시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너무 쉽게 그냥 ‘성가정은 행복했으리라’ 추측합니다.

‘성모님, 요셉 성인 그리고 예수님 이 세 분은 결코 다투는 일이 없었을 것이다. 불평도 불만은 조금도 없고, 서로서로 고맙게 감사하고, 집안에 온통 행복한 웃음만이 가득했을 것이다.

성가정에는 분통터지게 하거나 말썽 부리는 사람이 없을거야’사람들은 막연히 이렇게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 중에 어떤 사람들은 성가정이라는 단어에 너무 기가 죽어 본받는 것이 어렵지 않느냐 하고 지레 겁먹어 포기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성가정, 말만 들어도 너무 이상적이지 않는가?
우리가 어떻게 요셉 성인처럼 살 수 있고,
성모님처럼 살 수 있으며 더군다나
구세주 예수님처럼 살 수가 있겠는가?
그 가정은 하느님 가정이니 우리 같이
불쌍한 중생이 세상의 삶을 영위해
나가면서 꾸리는 가정과는 차원이 다른 특수한 가정이 아닌가?
우리 같은 보통의 평범한 사람이 어떻게 하느님 가정을 본받을 수 있겠는가? 성가정! 좋은 가정이지. 하지만 우리는 아니야!”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더 이상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한 번 더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과연 정말 그렇겠습니까? 과연 예수님의 가정은 편안하고 안락하고 행복하기만 했겠습니까? 성가정에는 아무런 고통이 없었을까요? 아닙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요즘 표현으로 하면 성모님이 살림을 살았던 성가정은 모든 편리 시설이 다 갖춰진 평수가 넓고 호화로운 고급 아파트나 큰 주택을 소유한 가정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나서 자라난 성가정은 먹을 것, 입을 것 걱정 없는 강남이나 수성구의 부유한 가정도 아니었습니다.

보호자 요셉 성인이 힘이 닿는 대로 열심히 노력하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변의 악조건으로 말미암아 평화로움과 안정이 깃든 원만한 보금자리 가정도 아니었습니다. 성가정을 단순히 ‘고통 없는 가정’이라고 판단해서는 안 됩니다. 성가정은 말썽부리는 사람이 없어야만 가능한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금수저라기 보다 흙수저였습니다.

용이 아니라 개구리, 가재, 붕어 등의 수준에 맞는 가정이었습니다. 어떻게 보면 우리보다 훨씬 고달프고 힘겹고 가난했으며 시련과 어려움이 많았던 가정입니다. 경제적으로도 성가정은 정말 가난했습니다. 가장인 요셉의 직업은 일용 노동자 신분 목수였기에 힘겨운 생활고를 겪을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요셉과 마리아의 가정은 결혼 시초부터 절대로 원만하지 않았습니다. 요셉과 마리아의 정식 결혼 전에 마리아의 임신 사실이 드러나면서 출발부터 삐걱거렸습니다. 마리아의 동정 잉태를 이상하게 여겼던 의인 요셉은 남모르게 파혼하기로 마음먹기까지 하였습니다.

그리고 로마 황제 아우구스토가 내린 호구 조사령에 따라 본 고향 베들레헴에 왔을 때, 하필 마리아는 객지에서 해산을 해야 했습니다. 설상가상(雪上加霜) 해산할 방 하나 제대로 구하지 못해서 예수님을 마구간에서 낳았습니다. 아기 예수님의 탄생 자체 그리고 성가정의 탄생 자체가 하나의 큰 고난이었습니다.

여행 중에 탄생한 아기 예수님은 부모에게 그 자체로 기쁨이면서도 스트레스 덩어리였습니다. 마리아와 요셉에게 예수 탄생 그날부터 고생문이 열린 것입니다. 요셉 성인이 목수 일을 했다고는 하나 벌이가 신통찮았는지, 아기 예수의 정결예식 때 요셉이 예물로 바친 것은 기껏 비둘기 새끼 두 마리뿐입니다.

성가정은 바보들의 행진을 계속합니다. 예수, 마리아, 요셉의 성가정은 세속적인 눈으로 보면 철저하게 실패한 가정인지도 모릅니다. 특히 요셉 성인의 인생살이는 어땠습니까?

성가정의 인간적으로 요셉은 남편과 아버지로서 참으로 기구한 운명을 타고난 사람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어떻게 보면 바보 같은 사람입니다. 허울만 남편이고 아버지이지 하늘 아래 어느 남편, 아버지가 이렇게 살 수 있겠습니까?

자신의 약혼녀를 하느님께 빼앗기고 자신의 아들도 아닌 아기의 출산을 묵묵히 뒤치다꺼리하고 그 시대에 누구에게나 인정받던 아버지의 고유한 권리인 아들의 작명도 자기 마음대로 하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성모님과 예수님을 먹여 살리기 위해 힘든 목수 일을 감내했습니다. 요셉 성인이 이럴진대 성모님의 고통과 시련은 또 어떠했겠습니까?

예수님을 배 아파하면서 낳은 엄마로서의 고통은 더 말할 나위가 없습니다. 그리고 나중에 어진 요셉을 사별한 성모님은 공생활 중에 아들 예수가 미쳤다는 소문과 가짜뉴스 등 갖가지 가슴 아픈 소식을 들어야 했습니다.

거기에다, 아들 예수의 일거수일투족은 불가해한 신비에 감싸져 있었고, 유년기에 성장하면서 가끔 보여준 돌출적인 행동과 말은 부모의 속을 사정없이 뒤집어 분통을 터지게 했습니다.

또 예수님의 어떤 말은 어떤 쌍날칼보다 날카로운 비수처럼 성모님의 심장을 찌르기도 했습니다. 그리고는 급기야 아들 예수님은 젊은 나이에 십자가에 처형되고 맙니다.

이렇게 힘든 시련과 고통을 감내하고 기도하며 승화시켰던 불행하고 고통스러운 가정이 바로 예수, 마리아, 요셉의 성가정이었던 것입니다.

성가정의 구성원 하나하나를 두고 보면 참으로 뭔가 핀트가 맞지 않는 이상한 가정입니다. 따지고 보면 세 식구가 서로 피 한 방 울 섞이지 않는 남남이었습니다.

오늘날 우리 사회나 본당 안에서 일어나고 있는 크고 작은 모든 문제의 시작은 가정의 문제에서부터 시작됩니다. 이 가정의 문제는 많은 경우 엎친 데 덮쳐 계속 대물림된다는 것입니다. 좋은 가정을 이루지 못하면 인생살이가 괴로워지고 불행해지기 마련입니다. 그리고 좋은 가정은 이 나라, 이 사회 그리고 우리 교회를 바르게 만듭니다. 또한 신자 가정의 위기는 교회의 위기이며 신앙의 위기입니다.

요한 바오로 2세 교황님께서는 가정을 ‘작은 교회’ ‘가정교회’라고 했습니다. 가정은 가장 작은 교회입니다. 가정 없이 하느님 백성인 교회가 있을 수 없습니다. 가정은 예수님을 주님으로 모시고 주님과 함께 살아가는 곳입니다. 가정이 튼튼해야 사회가 튼튼할 뿐만 아니라 교회도 건강해집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에게 있어 가정은 하느님의 모습과 사랑을 드러내야 하는 신앙 실천의 장이며 이미 하나의 작은 현장 교회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성가정은 주님의 뜻 안에서 지상 생활을 이끌어 가는 가정교회입니다.

따라서 모든 그리스도인 가정은 성가정을 이루어야 하는 책임과 의무를 지니고 있습니다. 가정교회는 행복한 삶이 피어나서 자라고 완성되는 못자리와 같습니다. 모든 이가 바라는 마음의 평화와 행복은 가정교회에서 시작되고 가정교회에서 끝난다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한 인간의 성공과 실패도 가정에 달려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예로부터 수신제가치국평천하(修身齊家治國平天下)라 하였고 ‘가화만사성(家和萬事成)’ 이라 했습니다.

특별히 교회가 성가정 축일을 지내는 의미는 오늘의 본기도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하느님, 성가정을 통하여 참된 삶의 모범을 보여 주시니, 저희가 성가정의 성덕과 사랑을 본받아, 하느님의 집에서 끝없는 기쁨과 행복을 누리게 하소서.”

첫째 우리가 오늘 성가정 축일을 기리는 것은
성가정의 ‘성덕과 사랑’을 본받기 위함이며

둘째 저 세상에서 뿐만 아니라 이 세상에서도
끝없는 ‘기쁨과 행복’을 누릴 수 있는 은혜를 청하기 위함입니다.

오늘 전례 말씀은 성스러운 가정교회를 이루는데
필요한 세세한 가정윤리를 제시합니다.
가정생활에 중요한 내용은 제1독서 집회서와
제2독서의 바오로 사도의 말씀에서 잘 나옵니다.

오늘의 전례 독서들은 우리가 성가정을 이루는 방법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오늘 제1독서와 제2독서는 성가정을 이루기 위해
필요한 부모와 자식간의 관계, 부부관계가 어떠해야 하는지를 말합니다.

부모와 자식간의 관계에서‘ 먼저 자식들은 부모님을 ‘공경’하고 ‘순종’하라고 합니다. 그리고 아버지는 자녀들을 들볶지 말고 기(氣)를 꺾지 말라고 합니다. 성가정내에서의 자식들은 내가 낳았더라도 내 소유의 자식이 아니라 하느님 아버지의 자식들입니다. 자식은 생겨서 어미의 몸 안에 들어서는 것부터 신비의 영역입니다. 부모는 잠시 하느님의 아들딸을 맡아 키우고 보호할 뿐 진정한 아버지는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하느님뿐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기쁨과 행복’의 성가정을 이루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부부관계가 좋아야 한다는 것은 불문곡직(不問曲直)의 사실입니다. 오늘 제2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교우들에게 말합니다. “아내 여러분, 남편에게 순종하십시오. 주님 안에 사는 사람은 마땅히 그래야 합니다. 남편 여러분, 아내를 사랑하십시오. 그리고 아내를 모질게 대하지 마십시오.”

이렇게 볼 때 성가정을 이루기 위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세 가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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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째 부부는 서로 사랑하고 동시에 존경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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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과 존경은 동전의 양면과도 같습니다. 참된 사랑은 존경을 조건으로 하고 참된 존경은 사랑을 바탕으로 하여 결실을 맺습니다. 존경이 없는 사람은 아전인수(我田引水)의 사랑이 됩니다. 사랑이 없는 존경은 알맹이가 빠진 껍데기뿐인 존경이 되고 단순히 딱딱한 위계질서 확립의 도구가 될 뿐이고, 당사자로 하여금 한없는 외로움을 느끼게 합니다. 존경 없는 사랑은 상대방을 무시하기 쉽고, 상대방의 자존심을 상하게 하기 쉽고, 수치심이 생기게 하기 쉽고, 마음의 상처를 주기 쉬운 일방적인 자기만족이 되기 쉽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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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째 부모가 가정교회 안에서 신앙의 모범을 잘 보여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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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일 마음대로 되지 않는 것이 자녀 교육입니다, 부모가 하느님을 참되게 공경하면 자녀가 그 부모를 진심으로 존경합니다. 자녀들은 존재뿐 아니라 존재양식까지 부모를 닮습니다. 다 그렇게 보고 들으면서 배우기 때문입니다. 자식들의 문제는 결국 어른들의 문제입니다. 문제 학생 있는 곳에 문제 부모가 반드시 있습니다. 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 팥 난다는 속담처럼 부모의 삶이 그대로 자녀에게 전이됩니다. 그래서 자식은 외모뿐 아니라 신앙생활까지도 붕어빵입니다. 가정은 기초 신앙 교육의 장입니다. 부모가 하느님을 무시하고 주일을 빼먹으면 그 자녀들도 하느님과 자기 부모를 무시하고 신앙생활을 소홀히 합니다. 역시 그렇게 보고 들으면서 배우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자녀들 앞에 말 한 마디, 행동거지 하나를 잘 분별해서 해야 합니다. 하느님을 두려워하고 서로 믿고 사랑하며 부모 자식이 서로 사랑하는 성가정이야말로 모든 ‘기쁨과 행복’을 가능하게 해줄 것입니다. 자녀는 부모의 분신이거나 소유물이 아니고 하느님께서 맡겨 주신 하느님의 자녀이며 하느님이 주신 선물입니다.

하느님을 공경한다는 것은 돈보다 하느님을 더 잘 섬긴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돈으로 좋은 집(House)을 살 수는 있어나 좋은 가정(Home)을 살 수는 없는 법입니다. 집은 많으나 홈은 많지 않습니다.

가정을 이룬다는 것은 한 남자와 한 여자가 단순히 한 지붕 밑에서 함께 산다는 것을 뜻하는 것이 아닙니다. 부부가 가정을 이루면서 두 사람의 세계는 하나의 세계가 됩니다. 가정은 집이나 건물이 아니고 사랑입니다. 모난 것은 모난 대로 둥근 것은 둥근 대로 서로 인정하고 받아 주는 것을 사랑이라고 말하고 이런 사랑이 부부를 한몸이 되게 합니다.

부부간의 애정이나 부모와 자식 간의 사랑보다는 돈과 물질적인 풍요를 더 중요하게 여기는 세상으로 바뀌고 있습니다. 의식주 생활 풍요로워도 불행한 가정들 얼마나 많습니까? 반대로 의식주 생활 빈약해도 행복하게 사는 성가정 얼마나 많습니까? 의식주 풍요해서 성가정 공동체가 아니라 하느님을 사랑하고 하느님의 보호와 인도를 받을 때 행복한 성가정 공동체입니다. 현대가 모든 것의 가치를 돈으로 가름하는 사회라 할지라도 물질적인 풍요가 행복일 수는 없습니다.

가정은 소유나 소비살이의 영역에 속하는 것이 아니라 체험의 창조살이이며 가치의 존재살이입니다. 소유는 결국 소비되어 언젠가는 고갈되고 ‘번아웃’이 되기 마련입니다. 돈으로 성가정, 행복한 가정을 지을 수는 없습니다. 거룩하고 행복한 가정은 돈으로 해결되는 것이 아니라 신앙으로만 해결 가능합니다. 물질인 돈에서 영성인 ‘기쁨과 행복’이 나올 수 없는 법입니다. 아무리 돈이 많고 풍족하게 산다고 할지라도 부부가 애정이 없고 부모 자식이 서로 사랑하지 않는다면 그 가정 안에는 행복이 없습니다. 똘똘한 좋은 아파트에 살지 못하고 가난할지라도 부부가 서로 사랑하고 부모 자식이 서로를 신뢰하는 가정이라면 그 가정 안에는 행복이 있습니다.

가난하든 부유하든 주님을 공동체의 중심에 모시고 주님을 믿고 사랑하며, 주님의 보호와 인도를 받을 때 비로소 성가정 공동체라는 것입니다. 주님을 공동체의 중심에 모실 때 주님의 보호와 인도를 받습니다.

주님의 보호와 인도가 있어야 세상 바다에서 공동체라는 배들 파선 되지 않습니다. 참으로 주님을 모실 때 성가정 공동체요, 주님을 공동체의 중심에 모시느냐 모시지 않느냐는 우리의 선택과 의지에 달려있습니다.

그래서 하느님을 잘 공경하고 성가정을 이루기 위해서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는 것은 기도입니다. 가정을 지키는 보루는 신앙이며 하느님의 현존입니다. 부모가 하느님을 참되게 공경하면 자녀가 그 부모를 진심으로 존경합니다. 부모가 하느님을 무시하면 그 자녀들도 자기 부모를 무시합니다.

우리는 성가정의 평화를 위해서는 가정기도를 성실히 잘 해야 합니다. 가정에서 함께 기도하지 않으면 그 가정은 믿는 가정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도, 둘이나 셋이 당신의 이름으로 모인 곳에 당신 친히 그곳에 머무시겠다고 하셨는데 함께 기도하지 않는다면 그 가정엔 주님이 머무시지 않습니다. 주님이 거기 안 계신다면 그 가정은 ‘기쁨과 행복’이 넘치는 천국이 될 수 없고 지옥이 되기 마련입니다.

의외로 지옥 같은 세상을 사는 가정들이 많습니다.
남편이 원수고 아내가 원수며 자식이 원수고 부모가 원수입니다.
이런 가정은 남편이 있어도 아내가 외롭고,
아내가 있어도 남편이 외롭습니다.
자녀가 있어도 부모가 외로우며,
부모가 있어도 자녀들이 외롭습니다.

기도야말로 우리가 하느님으로부터 받은 가정 성소를 완성시켜 가는 가장 확실한 길입니다. 온 가족이 자리에 모여 앉아서 기도하는 가정을 하느님께서는 지켜주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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셋째 우리가 성가정을 이루기 위해서는
십자가를 함께 지고자 하는 마음과 노력이 필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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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가정은 공짜로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가족 구성원 전체가 자기의 몫을 다할 뿐만 아니라 덤으로 서로가 서로에게 힘이 되어 주어야 합니다. 한 발 뒤로 물러설 줄도 아는 지혜도 필요합니다. 가정 안의 평화와 사랑은 작은 희생을 먹고 자라나는 나무입니다. 성가정은 저절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각자가 자기의 역할과 몫을 다해야 합니다. 성가정에서도 요셉, 마리아, 예수는 각자 자기 몫을 충실히 다 하였습니다. 오랫동안 가정이 편하기 위해 흔히 여성의 일방적 순종과 희생이 요구되고 강요되어왔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이런 분위기는 많이 바뀌고 있습니다. 소위 역할 분담이 젊은 층을 중심으로 확산되고 있습니다. 가정의 평화는 남편으로서, 아내로서, 부모로서, 자녀로서, 각자의 몫을 충실히 수행하고 자기 책임을 다할 때 선물로 주어지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요셉 성인은 성가정의 가장으로서
하느님의 계명을 충실히 따르는 본보기를 보여주었습니다.

요셉 성인은 생계를 꾸리려고 목공 일을 하였습니다.
그리고 성모님의 삶은 영혼에 칼이 꽂히는 일곱 가지 고통으로 묘사됩니다.

성모님께서 시메온의 예언을 들으셨을 때,
이집트로 피신하셨을 때,
예수님을 성전에서 잃으셨을 때,
십자가의 길에서 예수님과 만나셨을 때,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셨을 때,
예수님을 십자가에서 내려 품에 안으셨을 때,
예수님을 무덤에 모실 때,
성모님의 영혼은 칼에 찔리듯 아프셨습니다.
성모님께서는 아드님과 함께 하느님의 구원 사업의 협조하고 동참하였습니다. 그리고 아들 예수님께서는 성모님과 성 요셉에게 순종하셨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이 사람이 되어 오신
인류의 구세주께서 지상의 부모에게 순종하시며
하느님의 구원 경륜을 완수하셨습니다.

그리고 우리 가톨릭 신자 가정에는 집집마다 십자고상이 다 있습니다.
우리는 가정의 주인이 예수님이라는 고백으로
거실이나 방의 한가운데 잘 보이는 곳에 십자가를 모셔놓고 살아갑니다.
그런데 실제 삶에서 십자가는 종종 잊혀지고 외면당하는 것 같습니다.
각 개인의 십자가도 있지만
가정의 십자가 가족이 공동으로 져야 하는 십자가도 있습니다.
서로서로 상대방이 얼마나 힘들까를 생각하고 배려해야 합니다.
남편과 아내의 역할 분담은
그 분담된 짐을 서로 져주려고 노력할 때 갈등을 피할 수 있습니다.
어려운 짐과 멍에를 나누어지려고 하는 노력이 중요합니다.
가정 안에서는 방관자나 구경꾼이 있어서는 안됩니다.
훼방꾼이 있어서는 더더욱 안됩니다.
구성원 가족 모두가 노력하고 각자의 십자가는 각자가 져야 합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오늘은 예수, 마리아, 요셉의 성가정 축일입니다.

성가정을 본받아 성가정을 이루기 위해서는
오늘 제2독서에 나오는 바오로 사도의 권고를 명심해야 하겠습니다.

“형제 여러분,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인내를 입으십시오.
누가 누구에게 불평할 일이 있더라도
서로 참아 주고 서로 용서해 주십시오.
이 모든 것 위에 사랑을 입으십시오.
사랑은 완전하게 묶어 주는 끈입니다.”

설사 불평할 일이 있더라도
서로 참아주고 감사하는 마음으로 살아가라는 것입니다.
가족이 모여 살다보면 불평할 일이 생기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렇지만 서로 서로 참아주고 용서하고 감사할 거리를 찾을 때
오해도 풀리고 서로 사랑할 수 있게 됩니다.

믿음의 눈으로 보면 은총 아닌 것은 하나도 없고,
은총의 눈으로 보면 감사하지 못할 일이 하나도 없습니다.
모두가 감사할 것뿐입니다.
감사하는 것 역시 우리의 선택이요 의지입니다.
감사할 것 찾아 보면 끝이 없을 것입니다.

오늘 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말씀하십니다.
“감사하는 마음으로 하느님께 시편과 찬미가와 영가를 불러드리십시오.
말이든 행동이든 무엇이나 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하면서,
그분을 통하여 하느님 아버지께 감사를 드리십시오.”

하느님께 감사할 때 행복과 축복의 성가정 공동체가 됩니다.

성가정의 윤활유는 인내와 감사와 용서와 사랑이며
이것이 잘 비벼질 때
우리가 갈구해 마지않는 가정의 평화가 이루어지고
우리 가정은 ‘기쁨과 행복’이 충만한 성가정을 이룰 수 있습니다.
우리의 정성어린 노력에 주님의 은총이 더해질 때
우리 가정은 성가정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성가정은 어느 날 갑자기 저절로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예수, 마리아. 요셉의 성가정을 모범으로 하여
가족 모두가 노력하면서 기도 할 때
하느님 은총으로 서서히 성가정으로 변모 되어 갑니다.

단번에 성가정이 되는 게 아니라 하느님께서 이루어주십니다.
그러므로 가정 공동체 내의 갈등과 불화,
불완전함에 추호도 실망하거나
좌절할 것 없이 가정기도를 충실히 해야 합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우리가 성가정을 이룰 때 오늘 전례 중 본기도에서 바쳤듯이
‘끝없는 기쁨과 행복’을 누릴 수 있고,
우리가 하는 모든 일이 하느님과 우리의 뜻대로
은혜롭게 이루어질 수 있을 것입니다.
아무쪼록 이번 한 주간도 서로 인내하고
불평의 말보다는 감사의 표현을
많이 하는 거룩한 성가정을 이루시면 좋겠습니다.
여러분과 여러분의 가정에 주님께서
주시는 ‘기쁨과 행복’이 충만하기를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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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대교구 박태범 라자로 신부
2021년 12월 26일
  | 12.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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