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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주의 성모 마리아 대축일 성경 해설
조회수 | 116
작성일 | 21.12.29
임인년(壬寅年) 새해에는 생각 좀 하며 삽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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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미예수님!
오늘은 새해의 첫날이면서 ‘천주의 성모 마리아 대축일’이고, 또한 ‘세계 평화의 날’입니다. 우리는 공시적으로 이루어진 하느님의 구원경륜을 전례력 안에서 통시적으로 기리고 있습니다. 성탄대축일, 성가정 축일 그리고 오늘 천주의 성모 마리아 대축일입니다. 성탄 때 예수님께서 태어나셨고, 그와 동시에 예수 마리아 요셉은 성가정을 이루고, 이 성가정의 핵심 인물인 성모님이 오늘 ‘천주의 모친’으로 부각됩니다.

천주의 모친”(Theotokos)‘천주의 성모 마리아’라는 공식 호칭은 431년 에페소 공의회가 믿을 교리로 결의하고 반포한 것입니다. 믿을 교리란 이성적으로 논란의 여지가 있다고 하더라도 계시 진리이기에 믿음으로 수용하는 교리입니다.

제가 가톨릭 대학교 종교학과 교수로 있을 때 진량에 있는 영남 신학대학에 특강을 간 적이 있습니다. 이 대학은 개신교 신학대학입니다. 강의 주제는 가톨릭에서 보는 종교 개혁이었습니다. 강의 내용은 그 후 신학 잡지에 논문으로 발표하였기에 참고하실 수 있습니다. 강의 대상은 그 대학 교수님들과 신학생들이었습니다. 신학생들 중에는 여학생들도 꽤 많이 있었습니다. 큰 강당이 꽉 찼습니다. 신부를 특강한 것은 개교이래 처음이었다고 합니다. 강의료는? 비밀입니다. 그날 강의는 제 시간에 끝났는데 즉문즉설의 질문 시간이 무척 길었습니다. 많은 질문 가운데 성모님에 관한 질문도 몇 가지 있었습니다. 그 중에 하나가 바로 오늘 대축일과 관련된 질문이었습니다. ‘천주교에서는 마리아를 하느님의 어머니라고 부른다는데 그것이 어떻게 신학적으로 가능하냐?’는 질문이었습니다. 만일 여러분이 개신교 신자로부터 이런 질문을 받는다면 어떻게 대답하시겠습니까? 한 번 고민해보십시오. 천주의 모친이라는 성모님의 호칭은 오늘날에도 질문의 대상이 되지만 초대교회 시대에도 그러했습니다. 논란 끝에 니케아 공의회는 그 호칭을 믿을 교리로 선포하였습니다.

이 칭호는 성모님께 대한 신앙고백이기 보다 예수님의 천주성에 대한 신앙고백입니다. 성모님의 아들 예수님이 참 인성과 참 천주성을 갖춘 하느님이시라는 것을 고백하는 호칭입니다.

오늘 복음은 지난 성탄 밤에 들은 복음과 성가정 축일 때 묵상한 복음의 연장선 속에 있습니다. 오늘 복음은 아기 예수님의 탄생 직후의 일을 내용으로 합니다. 오늘 이야기에서 목자들이 전하는 예수님에 관한 뉴스에서 보통의 사람들이 보인 반응과는 다른 태도를 성모님께서 보입니다. 성모님께서는 벌어진 모든 사건을 체험하시면서 특별히‘모든 일을 마음속에 간직하시고 곰곰이 되새기시는’분으로 표현되십니다. 오늘 천주의 어머니 성모 마리아 대축일에 성모님에 관한 언급은 겨우 이 문장 하나 뿐입니다.

‘마리아는 이 모든 일을 마음속에 간직하고 곰곰이 되새겼다’

새성경에서‘마음 속에 간직하고 곰곰이 되새겼다’라고 번역된 그리스어 본문은 쉬네테레이 쉼발루사 엔 테 카르디아(συνετήρει συμβάλλουσα έν τή καρδία)입니다. 이 구절에 대해 리옹 가톨릭 대학교의 성서학 교수 장 피에르 러모농(Jean Pierre Lemonon) 신부는 매우 독특한 방식으로 해설합니다.

러모농 신부는 사유의 범위를 확대하는 장면이라고 해석합니다. 원문을 직역하면 ‘모든 일을 심장 안에 보관하여 생각하였다’입니다. 러모농 신부는 오늘 복음의 앞 부분을 목자들의 이야기로 규정하면서 크게 네 부분으로 나눕니다. 첫째 아기 탄생에 관한 천사의 말에 대한 목자의 확인(목자들은 베들레헴에 16 서둘러 가서, 마리아와 요셉과 구유에 누운 아기를 찾아냈다), 둘째 목자들로부터 천사의 메시지를 들은 사람들의 반응(그것을 들은 이들은 모두 목자들이 자기들에게 전한 말에 놀라워하였다), 셋째 마리아의 반응(마리아는 이 모든 일을 마음속에 간직하고 곰곰이 되새겼다), 넷째 목자들의 찬양과 귀향(목자들은 천사가 자기들에게 말한 대로 듣고 본 모든 것에 대하여 하느님을 찬양하고 찬미하며 돌아갔다)입니다. 그런데 러모농 신부님의 주장에 의하면 성모님께 특별히 관심이 많았던 루카 복음사가가 목자들의 이야기에 꼭 없어도 되는 이 셋째 부분의 구절을 특별히 영감을 받아 구태여 목적을 가지고 삽입하여 기록하였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복음서 전반을 훑어 보면 루카복음서는 구세사 안에서 마리아의 역할을 조명하는데, 그의 조명은 매우 체계적입니다. 그리고 루카는 성모님에 관한 신심이 컸습니다. 먼저 루카는 성모님이 동정으로 예수님을 잉태했다고 기록하였습니다. 곰곰이 생각하고 마음으로 깊이 사색하고 사유해야만 가능한 마리아의 노래도 루카 복음서에 나와 있습니다. 루카는 이 노래를 기록하면서 마리아의 역할을 강조하려고 문맥(38.45절)에 맞추어 “당신 여종의 비천함을 굽어보셨기 때문이로다. 보라, 이제부터 나를 복되다 하리니”(48절)를 넣기도 했습니다. 이외에도 루카 복음사가는 성모님에 관한 기록을 많이 남겼습니다. 예수 탄생 이야기(루카 2,1-20), 할례와 작명, 정결례와 속량, 시므온의 노래와 예언(루가 2,21-40) 등이 있습니다. 그 중 특별히 시므온은 성모님께 칼로 꿰뚫리는 듯한 고통을 당할 것이라고 예언합니다. “두고 보시오, 이 아기로 말미암아 이스라엘에서 많은 사람들이 넘어지기도 하고 다시 일어서기도 하며 또 아기는 배척당하는 표징이 될 것입니다. 그래서 당신의 영혼을 칼이 꿰뚫을 것입니다. 그리하여 많은 사람들의 속생각이 드러날 것입니다”(34-35절).

루카 복음사가는 성모님의 위상을 살리기 위해 특별히 ‘모든 일(τα ῥήματα ταυτα, 타 레마타 타우타, ta remata tauta; all these things)을 심장 안에 보관하여 생각하였다’라는 구절을 언급하였습니다. 러모농 신부의 주장을 좀 더 세부적으로 분석하면,‘간직하고’로 번역된 ‘συνετήρει’(쉬네테레이, syneterei, kept; treasured up)는 능동적인 미완료 과거형의 동사로서 과거의 그 시점에서부터 현재까지 그리고 미래에도 언제 끝날지 모르게 계속적으로 되씹어 지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앞으로도 마음속에 계속적으로 간직하고 지키고 있겠다는 뜻입니다. 쉬네테레이 동사는 미완료 과거형으로 사용되었는데, 이것은 목자들이 전해 준 천사의 모든 말을 마리아가 계속해서 소중히 간직해 나갔던 사실을 나타낸다.

그리고 쉬네테레이 동사는 본문에서 주동사로서 현재분사 συμβάλλουσα(쉼발루사symballousa; and pondered them)와 함께 활용되고 있습니다. '곰곰히 되새겼다'로 번역된 쉼발루사는 ‘함께’ 즉 영어의 with를 의미하는 접두어 함께 ‘συμ’(sym)과 ‘놓다’ 혹은 ‘던지다’를 의미하는 ‘βάλλω’가 합쳐진 단어입니다. 쉼발루사συμβάλλουσα는 문자적으로 ‘함께 던지다’ ‘함께 놓다’‘함께 가져가다’등의 의미를 가지는데 ‘여러가지 일을 함께 생각하고 비교한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루카 복음사가는 ‘생각하다’라는 말을 머리와 연관 짓지 않고 έν τή καρδία(엔 테 카르디아, en te kardia, in heart) 즉 심장과 접속합니다. 그리고 그리스어 καρδία는 70인역과 신약에서 히브리어 레브(לב)에 상응하는 단어인데 성경에 수 없이 많이 등장합니다. 성경에서의 '레브'는 신체의 핵심 기관인 심장을 가리킵니다. 생물학적으로 심장은 모든 척추 동물, 수축 된 수축을 통해 몸의 모든 부위를 통해 혈액의 흐름을 전달하는 근육 기관입니다. 심장은 비자발적 불수의근으로 평균적인 박동은 분당 72회입니다.

심장에는 네 개의 심혈관이 있는데 막히지 않도록 관리를 잘해야 됩니다.

하지만 히브리적 의미의 레브는 단순한 심장, 그 이상의 인간학적·신학적 의미를 지닙니다. 성경에 따르면 심장은 단순히 혈관을 통해서 피를 순환하게 만드는 기관이 아니라, 내적 자아를 표현합니다. 그것은 사람들로 하여금 사랑하게 만들고 공감하도록 만드는 인간의 내면을 나타내는 핵심 기관이며 더 나은 말로 복음에서는‘마음’ 이라고 번역하였습니다. 마음(καρδιά)은 영적 생명을 결정할 만큼 중요한 중심처, 근원, 터, 더 나아가 지성, 정서, 의지, 욕망, 열정 등을 두루 포함하는 광범위한 의미를 지닙니다. 즉 카르디아는 의지 혹은 뜻의 중심, 감정의 중심, 성령이 일하시는 독특한 영역, 결국 은유적으로 사람 전체를 가리킵니다.그 마음에 무엇을 담느냐에 따라 어떤 ‘마음’이 되느냐가 결정됩니다. 마음(καρδία) 자체가 선하고 악한 것이 아닙니다. 그 마음에 선을 쌓으면 선한 자가 되고 악을 쌓으면 악한 자가 됩니다. 에제키엘 11장 19-20에 대표적인 범례가 나옵니다. 돌로 된 마음과 살로 된 마음이 대조되고 있습니다.

“나는 그들에게 다른 마음을 넣어 주고, 그들 안에 새 영을 넣어 주겠다. 그들의 몸에서 돌로 된 마음을 치워 버리고 살로 된 마음을 넣어 주어, 그들이 나의 규정들을 따르고 나의 법규들을 준수하여 그대로 지키게 하겠다. ”

그리고 심장이라는 단어에 주목하고 생각의 영역을 넓히기 위해 특별히 이 단어를 사용하였다는 러모농 신부의 주장은 꽤 타당성이 있습니다. 고대 그리스 철학에서 사유는 이성의 영역에 속하던 것이었는데 그 사유를 레브, 카르디아 혹은 하트 등의 단어와 결합함으로써 생각 혹은 생각의 영역을 머리에서 마음으로까지 확장하였다는 주장입니다.

루카 복음사가가 소크라테스와 아리스토텔레스로 대표되는 고대 헬레니즘 사상에서 이성적 영역에 갇혀 있던 인간의 사유를 해방하여 비이성적인 마음의 영역으로까지 확대했다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러모농 신부는 마음으로 곰곰이 사유하는 성모님을 가장 위대한 신앙인인 동시에 가장 위대한 철학자라고 주장합니다. 이런 관점에서 오늘 복음의 구절은 헤브라이즘과 헬레니즘이 만나는 자리이고 성경과 철학이 만나는 자리이고 머리와 심장이 결합하는 자리입니다. 러모농 신부는 근대 이성 중심의 사회에서 이런 사유의 모습이 다시 축소되었는데, 인간의 고유성을 회복하기 위해서 사유의 영역을 다시 머리와 마음 그리고 몸 전체로 확대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실 건전한 기초신학의 신앙론은 이성과 마음, 머리와 가슴, 뇌와 심장, 두뇌와 하트, 영과 육, 주지주의와 주의주의, 신앙과 철학 등의 이분법을 극복하여야 합니다. 인간은 전체적으로 한 인간이 있을 뿐입니다. 한 인간을 반으로 쪼갤 수 없습니다. 한 인간이 사유하고 하나의 몸이 믿고, 희망하고, 사랑합니다. ‘닥치고 이성만’을 주장하던 근대 이성주의를 극복한 사람은 프랑스의 파스칼입니다. 파스칼의 명상 즉 팡세는 이성적인 부분까지 포함하는 의미에서 생각이며 사유입니다. 팡세의 영역은 순수이성과 실천이성을 뛰어넘어 숭고함과 거룩함까지 포괄합니다. 인식의 영역에서 탈주하여 이해의 영역으로까지 확장됩니다. 성서적 의미에서의 사유는 신앙의 영역과 이성의 영역을 넘나듭니다.

루카 복음사가는 성모님께서는 바로 이런 의미에서 곰곰이 생각하고 모든 말씀과 일들을 심장 안에 키핑해놓고 사유를 하였다고 주장합니다. 마리아는 심장으로 생각하고 오장육부(五臟六腑)로 사유하였습니다. 이 생각은 과거에 시작되었지만 아직 미완료형으로 끝나지 않고 지금도 계속되며 오늘날까지 교회를 통해서 계속되고 있습니다. 모든 것을 하느님의 일로 생각하고 신앙의 관점에서 심사숙고(深思熟考)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마리아는 예수 탄생을 전후하여 천사로부터 전해진 메시지들이나 처녀의 몸으로 잉태한 사건 전반을 기도하는 심장으로 계속해서 생각하여 그 의미를 되새겼습니다.

마리아는 자신이 직접 들은 성모영보(수태고지; 루카1,27~38)와 목자들을 통해 전해 들은 구세주 탄생에 대한 메시지가 실제로 자신에게 이루어진 것을 확인했으며, 그 의미와 희망에 관해 심장으로 곰곰히 생각하였습니다. 성모님은 예수님 강생의 신비와 관련된 일을 어느 하나도 허투루 생각하지 않으시고 진지하게 심장으로 숙고하시고 성찰하십니다. 모든 사람들에게 예수의 탄생을 통해 하느님의 구원경륜이 공개적으로 계시되었으나, 그것을 마음속에서 계속적으로 마음에 상기하고 사유해 나간 분은 오로지 성모님 뿐이었습니다.

형제 자매 여러분!
오늘은 천주의 성모 마리아 대축일인 동시에 2022년 검은 호랑이의 해 임인년 새해 첫 날입니다. 우리는 새해 인사로 ‘새해 복 많이 받으십시오’라고 서로 덕담을 주고받습니다. 그리고 새해 첫날 아침이 되면 우리는 저마다 크고 복된 희망을 품고 그것의 성취를 기원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해돋이를 보러 가서 새해에도 복 많이 받고, 한 해 동안 모든 가족이 무탈건강하고, 하는 일마다 재수가 좋아 돈 많이 벌기를 간절히 기원합니다. 하지만 우리 신앙에 의하면 모든 축복은 하느님으로 부터만 나옵니다.

오늘 제1독서는 진정한 복(福)이 무엇인지를 생각하게 합니다. 오늘 독서의 내용은 이스라엘인들이 신년 축제가 끝날 때 사제들이 백성에게 복을 빌어주는 말씀입니다. 주님께서 모세와 아론에게 이런 말로 백성들에게 복을 빌어주라고 하십니다. “주님께서 그대에게 복을 내리시고 그대를 지켜 주시리라. 주님께서 그대에게 당신 얼굴을 비추시고 그대에게 은혜를 베푸시리라. 주님께서 그대에게 당신 얼굴을 들어 보이시고 그대에게 평화를 베푸시리라.”(민수 6,24-26) 성서에서 말하는 복이란 하느님에게서만 그리고 하느님과의 친밀한 관계에서 비롯되는 온갖 좋은 것을 의미합니다.

얼굴을 뜻하는 히브리어로 ‘파님 (פני, faceם)은 위격적인 친밀한 관계를 맺는 관건입니다. 하느님과 얼굴과 얼굴을 마주봄(face to face)은 파님 엘 파님(paniym el paniym)입니다. 죄를 지은 아담과 하와는 하느님의 파님을 피했다고 합니다. 탈출기에서는 사람은 하느님의 얼굴을 볼 수 없다고 나옵니다(탈출 33, 20). 사람이 하느님의 얼굴을 보면 죽을 것이기 때문이라고 풀이합니다. 그런데 오늘 제1독서에서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당신 얼굴을 드러내 보이시고, 복된 평화를 베풀어주시고 복을 내리겠다고 하십니다. 형제 자매 여러분 오늘 새해 복 많이 받으시기 바랍니다.

오늘 제2독서(갈라 4,4-7)에서 바오로 사도는 우리 인간이 하느님으로부터 받을 수 있는 가장 큰 축복에 관해 말씀하십니다. 세상 사람들은 ‘복 많이 받아라.’고 인사를 나눌 때 대부분 ‘재물 복’이나 ‘건강 복’ 같은 세상 복을 생각합니다. 그러나 복은 하느님께서만 주실 수 있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물질 중심적인 축복관에서 탈주합니다. 사도는 아들의 성령 안에서 우리도 하느님을 우리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게 되었다고 말합니다.

우리가 예수님 안에서 받는 가장 위대한 축복은 우리로 하여금 하느님의 자녀가 되게 하는 은총입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것이 가장 큰 축복입니다. 죄인이며 피조물인 우리 인간이 어린이처럼 하느님을 감히‘아빠,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는 것보다 더 큰 축복은 없습니다. 지난 주 표현대로 하면 천상 성가정의 일원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앙인에게 있어서 참된 복은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임을 잊지 않고 하느님 은혜 속에서 하느님의 사랑 안에서 사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주신 하느님의 가장 크신 복은 바로 신앙과 믿음입니다.

다른 한편, 하느님으로부터 주어지는 가장 큰 축복은 지금 현재 내가 살아 있다는 사실입니다. 세익스피어는 햄릿이라는 비극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존재하느냐? 존재하지 않느냐?’ 라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2022년 신축년을 맞아 내가 존재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생명을 가지고 존재하면서 새해를 맞고 있다는 사실이 1차적으로 가장 큰 축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내가 오늘 당연한 사실로 맞고 있는 2022년 새해는 2021년에 이 세상을 하직한 사람이 하늘을 우러러 소원하던 내년이었다는 것을 잘 알아야 합니다.

지난 2001년 8월에 영국의 천체 물리학자 스티븐 호킹 박사가 한국에 와서 청와대도 방문하고 강의를 했는데 그때 많은 분들이 그분의 연구 업적을 크게 찬사하자 이런 이야기를 하였습니다. “내가 지금까지 이룬 업적 중에 가장 큰 업적은 아직 내가 살아 있다는 것이다‘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우리 신앙의 입장에서 볼 때 내가 아직 살아있다는 것은 내가 지금까지 이룬 업적 중에 가장 큰 업적이라기 보다 하느님께서 나에게 베풀어주신 가장 큰 축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매일 아침 자리에서 일어나면서 제일 먼저 느끼는 것은 그대로 영원히 잠들지 않고 다시 깨어나서 살아 있다는 데에서 나오는 기쁨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2022년이라는 새로운 1년이 우리에게 주어졌다는 것은 새로운 기회이며 하느님의 축복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우리 인간은 의미를 부여하고 의미를 추구하는 존재이기에 해가 바뀔 때 바뀌는 그 순간에 우리는 특별한 의미를 부여합니다. 동해로 해돋이를 보러 가는 사람도 있지만 해가 바뀌고 날이 바뀐다고 해서 다른 태양이 뜨는 것은 아닙니다. 어제나 오늘이나 같은 태양이 뜨고 같은 태양이 집니다. 그런데 우리는 시간이라는 구분을 만들어 하루를 24시간으로 구분하고 일 년을 열 두 달로 구분합니다. 그리고 지나가는 해와 새해를 구분합니다.

이러한 구분은 단순히 시간적인 구분만이 아니라 우리에게 새로운 각오와 기회를 제공해줍니다. 하느님께서 주시는 새로운 출발과 새로운 기회를 우리는 감사하는 마음으로 잘 활용해야 할 것입니다. 지나간 묵은 세월 앞에서 반성할 필요는 있지만 미련을 가질 필요는 없습니다. 과거는 이미 지나갔고 추억 속에 묻히기 마련입니다. 선물로 주어지는 지금부터의 시간이 중요합니다.

1년은 365일이고 8760시간입니다. 우리가 굵고 짧게 80까지 산다면 날짜로 2만 9천 200날이며 시간으로 70만 800시간입니다 그 중에서 3분의 1은 잠을 자야 한다. 이중 우리가 잠자는데 23만 3천 6백 시간을 보낸다. 우리가 깨어 있는 시간은 겨우 46만 7천 200시간밖에 되지 않습니다. 인생 80년 중 직장에서 보내는 시간이 20년이 넘고 먹고 마시면서 보내는 시간이 7년이 넘고 쉬며 즐기며 보내는 시간이 8년이 넘고 약속 기다리다 보내는 시간이 3년이 넘고 인터넷이나 전화통 붙들고 있는 시간이 세대차가 나겠지만 2-3년은 될 것입니다.

기도하는 시간은 2년 될동 말동 할것입니다. 2년 채우자면 하루 중 아침기도 5분 저녁기도 5분 매주 평일미사 혹은 주일미사 참례하는 시간 3시간 해야 겨우 2년 채울 수 있습니다. 나중에 하느님 앞에 불러 갔을 때 우리가 가지고 갈 수 있는 시간은 바로 이 기도하는 시간과 틈을 쪼개어 이웃을 위해 희생하고 봉사하며 하느님의 뜻을 실천한 시간뿐일 것입니다.

우리에게 주어지는 한 평생이라는 시간은 그리 많은 시간이 아닙니다. 나폴레옹이 남긴 명언 중에 ‘지금 겪고 있는 불행과 재앙은 언젠가 자신이 잘못 보낸 시간의 보복이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거꾸로 이야기하면 ‘지금 내가 누리고 있는 행복과 축복은 언젠가 내가 잘 보낸 시간의 갚음이다’라고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내가 현재 살아가고 있는 삶은 내가 태어난 이후 보낸 시간에 달려 있다는 뜻입니다. 오늘 새로운 한 해 365일, 8760시간이 하느님께서 주시는 축복으로 우리에게 주어졌습니다.

우리는 이 시간을 잘 보내야 하겠습니다. 남에게 빌려 줄 수도 없고 빌려 쓸 수도 없습니다. 돈으로 살 수도 없고 팔 수도 없습니다. 시간은 저축할 수도 없지만 하루 24시간은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분배되어 있습니다. 시간은 황금이라고 옛사람들은 말했지만 시간은 황금 이상의 것입니다. 천만금을 주더라도 일초의 시간도 살 수가 없습니다. 시간은 생명이요, 그리스도의 성혈입니다. 시간을 사랑하는 것은 생명을 사랑하는 것이요, 시간을 낭비하는 것은 생명을 낭비하는 것입니다.

시간은 늘 있는 것이라 생각하기 쉽지만 세월은 사람을 기다리지 않습니다. 시간은 광음여시(光陰如矢), 쏜살같이 날아가고 한 번 가버리면 다시 돌아오지 않습니다. 하느님의 선물로 주어진 이 시간을 얼마나 창조적으로 잘 활용하느냐, 무의미(無意味)하게 낭비하느냐에 따라서 인생의 성패(成敗)와 흥망성쇠(興亡盛衰)와 영고(榮枯)가 결정됩니다.

사람은 태어나는 순간에서 죽는 순간까지 단 한 순간도 쉴새없이 시간 여행을 떠나야 한다. 네발로 기던 어린 아이가 두 발로 꼿꼿이 서서 걷는 청년이 되고, 식솔을 책임지는 어른이 되고, 그러다 보면 어느새 머리는 흰 눈 내린 백발의 노인이 되고, 급기야는 마지막 한 줌의 흙으로 돌아가게 되는 것이 인생이지만 우리 신앙에 의하면 이러한 인생살이 자체가 허무한 것이 아니라 어떻게 보내느냐에 따라 축복이 될 수도 있고 재앙이 될 수도 있습니다. 우리 신앙에 의하면 시간은 시간으로 마감되지만 그것으로 끝나거나 회귀하는 것이 아니라 영원으로 연결되고 하느님께로 돌아간다는 것입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우리가 내세울 만한 성과가 없다고 결코 헛산 것은 아닙니다. 팬데믹을 견디어 내고 살아있다는 것 자체가 이미 엄청난 일입니다. 그리고 공동체를 지켰고 각자의 고유한 소임을 수행하였습니다.

지난 신축년(辛丑年) 한해, 이제 하느님께서 모두 거두어 가시고 우리는 또 다시 다시 새로운 한 해 신축년의 은총 앞에 섰습니다. 우리가 별 탈 없이 2022년 새해를 또다시 맞이한 것 그 자체만으로도 과분한 축복이며 헤아릴 수 없는 은총입니다. 정녕 측량할 수 없는 축복인 새해입니다. 또한 ‘새해 복 많이 받으십시오!’라고 우리가 남에게 복을 빌어 주고 인사를 주고 받는다는 사실만으로도 축복입니다. 그리고 천주의 모친 성모 마리아 대축일을 맞아하여 우리가 부르고 찾을 수 있는 천상의 어머니가 계시다는 그 자체가 은총입니다.

2001년부터 교수신문은 지나간 한 해를 상징하는 사자성어를 선정해 발표해 왔습니다. 올해 선정된 사자성어는 ‘묘서동처(猫鼠同處)’입니다. 고양이 ‘묘’, 쥐 ‘서’, 함께할 ‘동’, 있을 ‘처’라는 네 자로, ‘고양이와 쥐가 함께 있다. 도둑 잡을 사람이 도둑과 한패가 됐다'는 뜻입니다. 묘서동처는 중국 후진 때 당나라 역사를 서술한 <구당서(舊唐書)>와 이를 북송 때 수정한 <신당서(新唐書)>에 ‘고양이와 쥐가 같은 젖을 빤다’는 ‘묘서동유’(猫鼠同乳)라는 말과 함께 나옵니다. 보통 쥐는 굴을 파고 들어와 곡식을 훔쳐 먹고, 고양이는 쥐를 잡는다. 이렇게 사이가 원수이면서도 위아래 벼슬아치들이 부정 결탁하여 나쁜 짓을 함께 저지르는 것을 지적합니다. 이를 추천한 교수는 묘서동처를 추천하면서 “각처에서, 또는 여야 간에 입법, 사법, 행정의 잣대를 의심하며 불공정하다는 시비가 끊이질 않았다”며 “국정을 엄정하게 책임지거나 공정하게 법을 집행하고 시행하는 것을 감시할 사람들이 이권을 노리는 사람들과 한통속이 돼 이권에 개입하거나 연루된 상황을 (2021년에) 수시로 봤다”라고 이유를 밝혔습니다. 씁쓸한 마음이 드는 상황입니다. 사유하지 않는 고양이와 쥐들 때문입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오늘 복음에서 성모님께서는 ‘마음속에 간직하고 곰곰이 되새겼다’고 하는데 이 성서적 표현을 인문학적 표현으로 바꾸면 ‘사유하거나 생각했다’는 이야기입니다. 성모님은 단순히 멍때리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오장육부로 곰곰이 생각하고 사색하고 성찰하였습니다. 이 세상에는 두 가지 유형의 인간이 있습니다. 사유의 인간과 무사유의 인간이 있습니다. 곰곰이 생각하면서 사는 사람은 사유의 인간입니다. 그리고 생각없이 그냥 살아가는 사람은 무사유의 인간입니다. 한나 아렌트는 독일의 전범 아이히만을 무사유의 전형으로 보았습니다. 수백만의 유대인을 독가스실로 보내 놓고도 그는 법정에서 칸트의 정언명령에 따랐다고 주장하였습니다. 무사유의 결과는 너무나 파렴치하다 못해 오히려 평범해 보입니다. 아이히만의 사이비 사유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성모님이 간직하고 되새긴 ‘모든 일’은 무엇입니까? 크든 작든 모든 일 하나하나를 허투루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모든 일은 이소성대입니다. 작은 것으로 큰 것이 이루어집니다. 세상의 모든 일과 모든 만상은 처음부터 큰 것에서 출발하기 보다는 작은 것에서 시작합니다. 점이 모여서 선을 이루고 선이 모여 면을 만들고 면이 모여 입체가 구성되며, 작은 겨자씨에서 싹이 나서 나무가 자라 새들이 깃들이게 되고, 빗방물과 눈송이가 모여 내와 바다를 이루며, 한 걸음의 오름이 올레길의 정상에 이르게 하고 한 발자국의 걸음이 둘레길을 한 바퀴 돌게 하며, 사소하고 보잘것없는 일이 모여 큰 일을 이룹니다.

성모님께서 되새긴 일에는 좋은 일도 있고 나쁜 일도 있었을 것입니다. 성모님이 되새기고 간직한 일은 바로 구세주의 잉태와 관련된 일일 것입니다. 인간은 과거에 일어난 일에 대해서 생각할 때 흔히 부정적이고 나쁜 일에 대해 편파적으로 더 많이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보통 인간은 아흔 아홉가지 좋은 일을 누려도 한 가지 안 좋은 일에 마음을 다 빼앗기고 노심초사합니다. 그러나 오늘 복음사가는 성모님은 어디에 치우쳐 생각하지 않음을 밝히고 있습니다. 성모님은 자신이나 자식 예수님에 대한 걱정보다는 과거를 되새기면서도 미래의 희망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아무쪼록 하느님께서 선물로 주신 올 한 해도 희망찬 축복의 시간이 될 수 있도록 우리도 성모님처럼 심장으로 생각하면서 살도록 노력해야 하겠습니다. 아무튼 검은 호랑이의 해인 임인년(壬寅年) 새해에는 성모님과 함께 다시 한 번 힘찬 출발을 시작하시길 바랍니다. 여러분과 여러분의 가정에 주님의 축복이 가득하고 좋은 일과 일용할 양식이 많이 생기는 한 해가 되시길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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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대교구 박태범 라자로 신부
2022년 1월 1일
505 7.6%
“여드레가 차서 아기에게 할례를 베풀게 되자
그 이름을 예수라고 하였다.
그것은 아기가 잉태되기 전에
천사가 일러 준 이름이었다.”(루카 2,21)

짧고 한 구절밖에 안 되지만,
이 구절은 서방 세계에서 일반적인
새해 첫날을 기념하는 데에 배경과 기초가 될만한
세 가지 요소를 모두 담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이러한 세 요소의 신비적인 내용을 살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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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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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께서는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셨지만(참조. 루카 2,4.15), 그로부터 여드레나 지난 뒤에야 비로소 당신의 신분과 소속이 드러난다고 할 수 있다. 이는 율법에 쓰인 대로 “너희가 지켜야 하는 계약, 곧 나와 너희 사이에, 그리고 네 뒤에 오는 후손들 사이에 맺어지는 계약은 이것이다. 곧 너희 가운데 모든 남자가 할례를 받는 것이다.…이것이 나와 너희 사이에 세운 계약의 표징이다.”(창세 17,10-11)라는 말씀에 의한 것이었다.

예수님의 몸에 계속 남을 그 상처와 흔적은 구약에서 하느님과 당신 백성 사이에 결정적이고도 영원히 맺어진 계약에 의한 것으로서 예수님이 아브라함의 자손임을 나타낼 것이다. 예수님의 몸에 남을 이 상처는 그분이 영원히 히브리 사람이라는 것을 드러내는 표징이 된다. 루카 복음사가는 예수님의 신분과 소속에 관하여 이러한 내용이 결정적인 사건이라고 생각하여 이를 복음에 기록한다.

할례는 히브리 사람들에게 “조상들에게 자비를 베푸시고 당신의 거룩한 계약…조상 아브라함에게 하신 맹세로…한평생 당신 앞에서 거룩하고 의롭게 하느님을 섬기도록 해주시려는 것”(루카 1,72-75)이었다. 그렇지만 이 할례는 일찍이 예언자가 “너희 마음의 포피를 벗겨내어라.”(예레 4,4) 하고 예언해 주었던 대로 “육체를 벗어버림으로써, 사람 손으로 이루어지지 않는 할례 곧 그리스도의 할례를 받았습니다.”(콜로 2,11) 하는 신약의 새로운 계약에서 ‘마음의 할례’로 넘어갈 할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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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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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례는 할례로만 끝나는 것이 아니었고 아기에게 이름을 지어주는 사건이기도 했다. 예수님의 할례도 그러하였다. 요셉과 마리아는 아기의 “이름을 예수라고 하였다.” “예수”라는 이 이름은 실제로는 “보라, 이제 네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터이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여라.”(루카 1,31) 한 대로 “천사가 일러 준 이름이었다.” 곧 ‘JHWH’라고 알려지면서 감히 발음할 수 없는 하느님의 이름으로서 인간이 아닌 하느님 몸소 주신 이름이었다.

예수님은 하느님의 뜻과 행위로 태어나신 분이므로 하느님만이 그분에게 이름을 주실 수 있었다. “예수”라는 이름은 ‘주님, 구원해주소서!’ 하는 청원이며 또한 “주님께서 구원하신다!” 하는 하느님의 구원 행위 자체를 뜻한다. 이 이름은 “큰 인물이 되시고 지극히 높으신 분의 아드님이라 불리실 것”(루카 1,32) 한 대로 하느님께서 예수님께 맡기신 고유한 소명과 사명 자체를 담는 이름이면서, 동시에 예수님을 믿는 그리스도인들이 신앙으로 고백할 이름이었다.

참으로 이 이름은 인간을 구원할 ‘거룩한 이름’이요, ‘표징을 일으킬 이름’이며, 하느님의 나라가 펼쳐져 사탄이 물러갈 하느님 ‘통치(다스림)의 이름’이다. 그리스도인의 온 역사는 생명의 시작으로부터 죽음의 문턱에 이르기까지 기쁨 중에서나 슬픔 중에서나 온 마음을 다하여 은총의 이 이름을 부르면서 하느님의 힘과 그분의 거룩하심을 이 이름 안에 고백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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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인, 마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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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가 차자 하느님께서 당신의 아드님을 보내시어 여인에게서 태어나 율법 아래 놓이게 하셨습니다.”(갈라 4,4) 하는 말씀대로 예수님은 “여인”에게서 태어나셨는데, 그 여인은 “나자렛이라는 고을”의 “처녀” “마리아”로서 “모든 세대가 나를 행복하다 하리니”(루카 1,48) 하고 노래한 대로 “하느님의 (특별한) 총애”(루카 1,30)를 받은 여인이었다.

마리아는 “성령께서 내려오시고 지극히 높으신 분의 힘이 너를 덮을 것이다”(루카 1,35) 한 대로 하느님의 뜻에 따라 하느님만이 인류에게 주실 수 있는 분을 잉태하신 분이었다.

“지극히 높으신 분”이 지극히 낮으신 분이 되시고, 무한이 유한이 되시며, 시간이 없는 영원이 시간의 일순간이 되시고, 가장 강하신 분이 가장 약하신 분이 되신 것이니 이 모든 것이 마리아의 태중에서 이루어졌다. 성령의 은총이 마리아의 태를 덮으시고 감히 주님의 어머니가 되게 하셨으니 그 예수님은 마리아의 아들이요 하느님의 아들이시라 불리신다.

이렇게 이 여인의 태를 통해 맺어진 열매는 하느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축복이며 이제 바야흐로 그 축복이 예수님 안에 육신을 취하신 것이니, 이는 모든 세대가 과연 마리아의 이름을 행복하다 할 것이며 그로부터 온 인류가 축복을 얻도록 하시기 위함이었다. 과연 시편에서 “땅이 제 소출을 내주었으니 하느님, 우리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강복하셨네.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강복하시리라. 세상 모든 끝이 그분을 경외하리라.”(시편 67,7-8) 하고 노래한 그대로이다.

인간의 시간표에서 새로운 한 해를 시작하는 이 날에 오늘 축일은 매우 중요한 의미가 있다. 인간에 대한 하느님의 축복, 곧 예수, 온 인류의 상징이신 마리아에게서 나신 분, 그분께서 우리 인생의 매일매일 우리 위에 계시고, 하느님과 당신께서 사랑하시는 인간 사이에 맺으신 혼인과도 같은 축복으로 우리를 축복하신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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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미사의 전례 독서를 통해 ‘축복하다to bless’, ‘태어나다to be born’, ‘찾다to find’라는 세 단어가 하느님의 어머니 안에서 이루어짐을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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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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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수기에서 주님께서는 사제들에게 “너희는 이렇게 말하면서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축복하여라. ‘주님께서 그대에게 복을 내리시고 그대를 지켜 주시리라. 주님께서 그대에게 당신 얼굴을 비추시고 그대에게 은혜를 베푸시리라. 주님께서 그대에게 당신 얼굴을 들어 보이시고 그대에게 평화를 베푸시리라.’”(민수 6,23-26) 하라 하십니다. 단순히 경건한 권고가 아니라 특별한 요구입니다. 이는 오늘날의 사제들에게도 중요합니다. 사제들은 하느님 백성을 계속 축복해야 합니다. 이 축복을 받는 신자들 역시 축복의 전달자들이 되어서 (서로를) 축복해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우리가 얼마나 많은 축복을 받아야 할 필요가 있는지 잘 아십니다. [“모든 것이 참 좋았다”(창세 1,31)라는 기록을 통해서 보면] 하느님께서 세상과 인간을 창조하신 다음 맨 먼저 하신 일은 참 ‘좋다고 말씀(축복, 강복, benediction>bene-dicere=good talk)’하신 것이었습니다. 그렇지만 이제 우리는 하느님의 아드님을 통해 단지 축복의 말을 들을 뿐 아니라 축복 그 자체를 받습니다. 예수님은 하느님 아버지의 축복 그 자체이십니다. 성 바오로는 성부께서 성자 안에서 “하늘의 온갖 영적인 복”(에페 1,3)을 우리에게 내리신다고 말합니다. 우리가 예수님께 마음을 열 때마다, 하느님의 축복이 우리의 삶 안으로 들어옵니다.

오늘 우리는 은총으로 축복을 받으신 어머니를 통해 우리에게 오신 분, 본성적으로 축복이신 하느님의 아드님을 기념합니다. 이런 방식으로 성모님께서는 우리에게 하느님의 축복을 전해주십니다. 성모님이 계시는 곳이 어디이든 그곳이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오시는 자리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녀 엘리사벳처럼 성모님을 받아들일 필요가 있습니다. 성녀 엘리사벳은 성모님을 자신의 집으로 들어오시게 했고 즉시 (하느님의) 축복을 깨달으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당신은 여인들 가운데에서 가장 복되시며 당신 태중의 아기도 복되십니다.”(루카 1,42) 이 말은 우리가 성모송을 바칠 때마다 반복하는 말입니다.

우리는 성모님을 맞아들이며 축복을 받지만, 축복하는 것을 배웁니다. 우리 성모님께서는 축복이 주기 위해 받는 것이라고 가르치십니다. 복되신 성모님께서는 당신께서 만나시는 모든 이를 위해 축복이 되셨습니다. 엘리사벳을 위해, 카나의 혼인 잔치 신혼부부를 위해, 이층 다락방에 있던 사도들을 위해서… 말입니다. 우리 또한 축복하고(a benedire), 하느님의 이름으로 좋게 말하라는(a dire bene)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세상은 타인에 대해, 사회에 대해, 자기 자신에 대해 ‘나쁘게 말하고’ ‘나쁘게’ 생각함으로써 심각하게 오염되었습니다. 나쁘게 말하면서(speaking badly)은 부패하고 타락하지만, 시킵니다. 좋게 말하는 축복(blessing, benedizione)은 생명을 복원하고 매일 다시 시작하도록 힘을 줍니다. 성모님께서 우리에게 해주신 것처럼, 우리도 다른 이들을 위해 하느님의 축복을 전하는 기쁨의 전달자들이 되기 위한 은총을 하느님의 어머니께 청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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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어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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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째 동사는 ‘태어나다’ 입니다. 성 바오로는 하느님의 아드님께서 “여인에게서 태어났다”(갈라 4,4)라고 지적하면서 이 몇 마디로 우리에게 무엇인가 놀라운 일을 말해줍니다. 곧 주님께서 우리처럼 (인간의 몸으로) 태어나셨다는 사실입니다. 성인成人으로 나타나신 것이 아니라 아기로 태어나셨고, 홀로 세상에 오신 것이 아니라 어머니의 태중에서 아홉 달 후에 여인에게서 태어나셨으며, 성모님으로부터 그분의 인간성이 꼴을 형성하셨습니다. 주님의 심장이 성모님과 안에서 뛰기 시작했고, 생명의 하느님께서 마리아로부터 산소를 들이마셨습니다. 그때부터 성모님은 우리를 하느님과 결합시키십니다.

하느님께서는 성모님 안에서 우리 인간의 살(flesh)이 되셨고, 그 살에서 한 번도 떠난 적이 없으셨기 때문입니다. 성 프란치스코는 성모님이 “전능하신 주님을 우리의 형제가 되게 하셨다”(성 보나벤투라, 대전기Legenda major, 9.3항)라고 즐겨 말했습니다. 성모님은 단지 우리와 하느님 사이의 교량일 뿐 아니라, 그 이상이십니다. 성모님은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닿으시기 위해 걸으셨던 길이시고, 우리가 그분께 도달하기 위해 걸어가야 할 길이십니다.

우리는 마리아를 통해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대로 하느님을 만납니다. 곧 부드러운 사랑tender love, 친밀함intimacy, 살flesh 안에서 만납니다. 그렇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는 추상적인 관념이 아니시기 때문입니다. 인간이 되신 실제적인 분이시고, 여인에게서 태어나신 분이시며, 조용하게 성장하신 분입니다. 여성들은 이러한 조용한 성장을 알아봅니다.

우리 남성들은 종종 추상적이고 즉각적인 무엇인가를 원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여성들은 구체적이며 조용한 인내로 생명의 끈을 엮어나갈 줄 압니다. 얼마나 많은 여성이, 또 얼마나 많은 어머니들이 이런 방식으로 생명을 낳고 다시 태어나게 하면서 이 세상에 미래를 제공하는지 모릅니다!

우리는 죽기 위해서가 아니라, 생명을 태어나게 하려고 이 세상에 존재합니다. 하느님의 거룩하신 어머니께서는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이들에게 생명을 내어주기 위한 첫걸음이 우리 안에 있는 것을 잉태하는 것이라고 가르쳐줍니다. 오늘 복음은 성모님이 “이 모든 일을 마음속에 간직하고 곰곰이 되새겼다”(루카 2,19)라고 말해줍니다.

선함이 그 마음으로부터 나옵니다. 마음을 깨끗하게 간직하고, 내적인 삶을 잘 가꾸며, 그 마음 안에 기도를 간직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모릅니다! 우리 주변 사람들과 사물을 잘 보살피고 아끼도록 우리 마음을 교육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모릅니다. 모든 것이 여기서 시작됩니다. 타인을 보살피고, 세상을 보살피며, 피조물을 보살피는 것으로부터 시작됩니다.

우리가 수많은 사람과 수많은 사물을 안다고 해도, 이들을 보살피지 않는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우리가 다시 태어남과 새로운 보살핌을 희망하면서, 올해에는 보살핌을 소홀히 하지 맙시다. 우리의 몸을 위한 백신뿐만 아니라 마음을 위한 백신이 필요합니다. 이 백신은 보살핌이라는 백신입니다. 성모님께서 우리에게 하신 것처럼, 우리가 타인을 돌본다면 올해는 좋은 한 해가 될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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찾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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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번째 단어는 ‘찾다’ 입니다. 복음은 목자들이 “마리아와 요셉과 구유에 누운 아기를 찾아냈다,”(루카 2,16)고 말합니다. 목자들은 거창하거나 기적적인 표징을 찾아낸 것이 아니라, 단순한 가정, 바로 거기서 하느님을 찾았습니다. 보잘것없음 안에 있는 위대함, 부드러움 안에 있는 강함입니다. 목자들은 이토록 눈길을 끌지 못하는 표징을 어떻게 찾았을까요? 그들은 천사로부터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은총으로 부르심을 받지 않으면 우리 역시 하느님을 발견하지 못할 것입니다.

우리는 여인에게서 태어나시고 따뜻한 사랑으로 역사를 바꾸시는, 그런 하느님을 상상조차 할 수 없었지만, 은총으로 그분을 발견하였습니다. 그분의 용서는 다시 태어나게 하고, 그분의 위로는 희망에 불을 붙이며, 그분의 현존은 억누를 수 없는 기쁨을 선사한다는 것을 우리는 발견했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찾은 그분을 시야에서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실로 주님은 딱 한 번 찾아서 그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매일 새롭게 찾아야 하는 분이십니다. 그래서 복음은 목자들이 움직이면서 그분을 찾는다고 묘사합니다. “그리고 서둘러 가서, …아기를 찾아냈다. 목자들은…들은 말을 알려 주었다. 목자들은…하느님을 찬양하고 찬미하며 돌아갔다.”(루카 2,16-17.20) 그들은 수동적이지 않았습니다. 은총을 얻기 위해서는 능동적이고 적극적이어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어떻습니까? 한 해의 시작에서 무엇을 찾으라는 부르심을 받습니까? 누군가를 위한 시간을 낸다면 아름다울 것입니다. 시간은 우리 모두 소유한 보물이지만, 우리는 우리의 시간을 오로지 우리 자신을 위해서만 쓰려고 열심히 지킵니다. 하느님과 우리의 이웃을 위한 시간을 찾을 수 있는 은총을 청합시다. 혼자 지내는 사람, 고통받는 사람, 경청과 돌봄이 필요한 사람을 위해서 말입니다.

우리가 누군가를 위한 시간을 찾을 수 있다면, 우리는 목자들처럼 놀라고 기쁨으로 충만할 것입니다. 하느님을 시간 안으로 이끄셨던 성모님께서 우리가 시간을 내어줄 수 있도록 우리를 도우시길 빕니다. 거룩하신 하느님의 어머니, 우리는 당신께 새해를 봉헌합니다.

어머니, 당신은 마음속에 간직할 줄 아시니, 우리를 보살피소서. 우리의 시간을 축복하여 주시고 하느님과 타인을 위해 우리가 시간을 낼 수 있도록 가르쳐 주십시오. 우리는 기쁨과 신뢰로 당신께 외치나이다. 거룩하신 하느님의 어머니! 아멘.(교황 프란치스코, 2021년 1월 1일, 바티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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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 벤지
2022년 1월 1일
  | 12.31
505 7.6%
평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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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서둘러 가서, 마리아와 요셉과 구유에 누운 아기를 찾아냈다. 목자들은 아기를 보고 나서, 그 아기에 관하여 들은 말을 알려 주었다. 그것을 들은 이들은 모두 목자들이 자기들에게 전한 말에 놀라워하였다. 그러나 마리아는 이 모든 일을 마음속에 간직하고 곰곰이 되새겼다. 목자들은 천사가 자기들에게 말한 대로 듣고 본 모든 것에 대하여 하느님을 찬양하고 찬미하며 돌아갔다(루카 2장 16절-20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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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유에 누워 있는 아기 예수님의 모습은 ‘참 평화’의 상징입니다.
(예수님이 곧 ‘참 평화’입니다.)
세속 사람들은 ‘힘’이 있어야 평화를 얻을 수 있고,
지킬 수 있다고 말하지만,
구유에 누워 있는 아기 예수님은 아무런 힘이 없는,
세속의 물리적인 힘 같은 것은 전혀 없는,
가난하고 연약한 아기일 뿐입니다.

그 모습에서 “나의 힘은 약한 데에서
완전히 드러난다(코린토 2서 12장 9절).”라는
하느님 말씀이 연상됩니다.

인간을 구원하시는 하느님의 자비와 사랑은 분명히 ‘큰 힘’인데,
세속 사람들이 생각하는 그런 힘이 아닙니다.
(무력도 아니고 권력도 아닙니다.)
인간을 완전히 새롭게 변화시키는 생명력입니다.

죄 속에서 살고 있으면
예수님께서 주시는 ‘참 평화’를 얻어 누릴 수 없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죄를 짓고 나서 첫 번째로 잃은 것은 평화였습니다.

“그들은 주 하느님께서 저녁 산들바람 속에
동산을 거니시는 소리를 들었다.
사람과 그 아내는 주 하느님 앞을 피하여
동산 나무 사이에 숨었다(창세기 3장 8절).”

하느님을 피해서 숨은 아담과 하와의 모습은,
죄 때문에 ‘참 평화’를 완전히 잃은 모습입니다.

우리가 죄를 짓는 것은 하느님과 우리의 관계를 끊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느님은 평화의 원천이신 분입니다.
따라서 죄를 짓는 것은 스스로 평화를 버리는 것입니다.

안 믿는 사람들 가운데에는
죄를 짓고서도 마음 편하게 잘 살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사람도 있긴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겉으로만 그렇게 보이는 것이고,
그 안에는 ‘참 평화’가 없습니다.
그래서 ‘참 평화’를 누리려면 회개부터 해야 합니다.

믿음이 없거나 부족하면 ‘참 평화’를 얻어 누릴 수 없습니다.

돌풍 때문에 겁에 질렸던 제자들의 모습이 좋은 예입니다.
“그들이 배를 저어 갈 때에 예수님께서는 잠이 드셨다.
그때에 돌풍이 불어 호수로 내리 몰아치면서 물이 차 들어와 그들이 위태롭게 되었다. 제자들이 다가가 예수님을 깨우며, ‘스승님, 스승님, 저희가 죽게 되었습니다.’하고 말하였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깨어나시어 바람과 물결을 꾸짖으시니, 곧 잠잠해지며 고요해졌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너희의 믿음은 어디에 있느냐?’하셨다(루카 8장 23절-25ㄱ절).”

제자들은 아직 예수님에 대한 믿음이 부족했습니다.
그래서 바로 옆에 예수님이 계시는데도
자기들이 죽을지도 모른다고 무서워했습니다.
그것이 바로 믿음이 부족해서 평화를 잃은 모습입니다.
만일에 그때 그들의 믿음이 완전했다면,
주무시는 예수님과 함께 그냥 잤을 것입니다.

<그랬던 제자들이 나중에는 모두 위대한 믿음의 사도가 되었습니다.
감옥에 갇혔을 때의 베드로 사도의 모습이 좋은 예입니다.
헤로데가 베드로 사도를 붙잡아서 감옥에 가둔 다음에
군중 앞으로 끌어내어 사형시키려고 했을 때
(사도행전 12장 4절-5절),
그 전날 밤, 감옥에 있는 베드로 사도의
모습을 보면, 두려움이 전혀 없는 모습,
즉 ‘참 평화’를 누리는 모습입니다.
다음날 사형당할 죄수가 아닌 것처럼, 또 그곳이 감옥이 아닌 것처럼
그는 아주 태평스럽게 깊이 잠들어 있는데
(사도행전 12장 6절),
그것은 그가 이미 ‘완전한 믿음’에 도달해 있었기 때문입니다.

바람과 파도 때문에 죽게 되었다고 겁에 질렸던 때의 일을 생각하면,
‘믿음’은 ‘참 평화’를 얻어 누리는 지름길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희망’이 없으면 ‘참 평화’도 없습니다.

배반자 유다의 경우를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그때에 예수님을 팔아넘긴 유다는 그분께서 사형 선고를 받으신 것을 보고 뉘우치고서는, 그 은돈 서른 닢을 수석 사제들과 원로들에게 돌려주면서 말하였다. ‘죄 없는 분을 팔아넘겨 죽게 만들었으니 나는 죄를 지었소.’ 그러나 그들은‘우리와 무슨 상관이냐? 그것은 네 일이다.’ 하였다. 유다는 그 은돈을 성전 안에다 내던지고 물러가서 목을 매달아 죽었다(마태오 27장 3절-5절).”

유다는 예수님에 대한 믿음을 잃었을 때 이미 평화를 잃었겠지만,
아마도 그 자신은 의식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러다가 예수님을 배반한 뒤에는 평화 없는 생활을 하면서
불안과 고통 속에서 살았을 텐데,
그래도 구원을 희망하면서 그때 회개했다면
그렇게 끝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배반자 유다의 가장 큰 죄는
자기 스스로 ‘구원의 희망’을 버리고, 자기 자신을 포기한 죄입니다.

‘사랑’이 없으면 ‘참 평화’도 없습니다.

‘착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에 나오는 사제와 레위인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예리코로 내려가다가 강도들을 만났다. 강도들은 그의 옷을 벗기고 그를 때려 초주검으로 만들어 놓고 가 버렸다. 마침 어떤 사제가 그 길로 내려가다가 그를 보고서는, 길 반대쪽으로 지나가 버렸다. 레위인도 마찬가지로 그곳에 이르러 그를 보고서는, 길 반대쪽으로 지나가 버렸다(루카 10장 30절-32절).”

(여기서 ‘길 반대쪽’은 ‘사랑의 반대쪽’입니다.)

그 사제와 레위인은,
몸은 편했겠지만, 마음의(영혼의) 평화는 잃었을 것입니다.

(분명히 그렇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최선을 다 해서 사랑 실천을 한(루카 10장 33절-35절)
‘착한 사마리아인’의 마음속에는 평화가 가득했을 것입니다.
그 평화는 사랑 실천을 통해서 얻은 하느님의 은총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아무것도 걱정하지 마십시오. 어떠한 경우에든 감사하는 마음으로 기도하고 간구하며 여러분의 소원을 하느님께 아뢰십시오. 그러면 사람의 모든 이해를 뛰어넘는 하느님의 평화가 여러분의 마음과 생각을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지켜 줄 것입니다(필리피서 4장 6절-7절).”

<기도한다고 해서 자동적으로 평화를 얻는 것은 아니고,
믿고, 회개하고, 희망하고, 끊임없이 사랑을 실천하면서 기도할 때,
그때 ‘참 평화’를 얻어 누리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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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
2022년 1월 1일
  | 0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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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36   [수도회] 부활의 아침, 설레는 마음  [12] 3083
535   [인천] 신음하는 모든 피조물에게 부활의 기쁨이  [12] 2900
534   [수원] 구원받은 자의 삶으로  [8] 2796
533   [서울] 부활을 선포하는 사람들  [15] 3572
532   [군종] 하나의 밀알이 죽어 많은 열매를 맺다  [2] 2677
531   [원주] 우리는 주님 부활의 증인  [3] 2610
530   [의정부] 예수님께서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나셨습니다.”  [7] 2721
529   [춘천] 부활을 믿고 복음 전할 의무  [3] 2634
528   [청주] “여러분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아났습니다”  [3] 771
527   [대전] 부활은 인간에서 하느님 발견하기  [5] 2617
526   [전주] “아! 잔인한 4월, 잔인한 부활”  [3] 2573
525   [광주] “너희는 이 일의 증인이다”  [3] 2428
524   [마산] '부활 - 돌을 치우자' (요한 20,1 이하 참조)  [5] 2659
523   [부산] 부활신앙은 예수님으로 부터 빛을 받아 살겠다는 약속.  [14] 3293
522   [안동] 부활의 증인이 되십시오!  [11] 2886
521   [대구] 주님께서 참으로 부활하셨도다. 알렐루야!  [6] 2846
520   (백) 예수 부활 대축일(파스카 성야) 독서와 복음  [13] 2733
519   [수도회 3] Fiat  [7] 458
518   [수도회 2] 단순함과 소박함에서 오는 기쁨  [7] 421
517   [수도회 1] 우리 삶의 의미는 무엇인가?  [10] 3070
1 [2][3][4][5][6][7][8][9][10]..[27]  다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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