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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 공현 대축일 성경 해설
조회수 | 142
작성일 | 21.12.30
베들레헴에서 별이 빛나는 밤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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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미예수님!
오늘은 주님 공현 대축일입니다.
우리 본당 공동체는 요 며칠 사이 성탄, 성가정 축일, 천주의 성모대축일을 지내고
송구영신의 제를 봉헌하였고 오늘은 주님 공현 대축일을 맞이하고 있습니다.

주님 공현 대축일은 글자 그대로
주님께서 공적으로 당신의 모습을 사람들 앞에 드러내 보이신 것을
기리는 대축일이라는 뜻입니다.
동시에 아기 예수님의 신성을 고백하는 축일입니다.
예수님은 인간으로 태어나는 순간
인성을 갖춘 동시에 천주성을 갖춘 분이라는 고백입니다.

교의사 안에서 볼 때 2세기 경에 아기 예수님의 신성을 부인하는 이단이 있었습니다.
이 이단은 아기 예수님은 처음부터 하느님의 아들이었던 것이 아니라
태어날 때 신성의 가능성만을 갖추고 있었는데
세례를 통해 비로소 삼위일체의 제2격인 하느님의 아들이 되셨다는 주장입니다.

그러나 동방박사의 경배는
아기 예수님의 신성과 왕권과 주권을 인정하고 고백하는 일종의 황태자 알현입니다.
애니매이션 라이언 킹에서 아기 사자의 공현과 마찬가지입니다.
영화에 보면 모든 창생들이 다 와서 경배합니다.
아기 사자는 나중에 황태자가 된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황태자입니다.

성탄이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이 세상에 탄생한 날이라면,
주님 공현 대축일은 예수님을 통해 이루어진 구원경륜이
온 세상과 모든 백성에게 분명하게 알려진 것을 확인하고 기념하는 날입니다.

주님의 공현이라는 말은
프랑스어로는 Epiphanie(에피파니)라고 하고,
라틴어로는 Epiphania(에피파니아)라고 하며,
그리스어로는 ‘Ἐπιφανεία’(에피파네이아)라고 합니다.

희랍어 에피파네이아는 일차적으로 ‘Ἐπι + φανεία’인데
‘Ἐπι’9에피0라는 접두어는 ‘위’와 ‘바깥’을 나타내는 전치사이고
‘φανεία’파네이아라는 말은
‘나타내다’‘드러나다’‘발현하다’‘현현하다’
‘나타나다’‘보여주다’라는 뜻을 지닌 phainein이라는
희랍어 동사의 명사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Epiphania는 일차적으로
‘위 혹은 바깥으로 드러냄’이라는 의미를 지니는 명사라고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이 단어는 평범하게 보이는
어떤 인간이나 사물 혹은 현상을 통하여
그것을 능가하는 신성 혹은 천주성이 바깥으로 드러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Ἐπιφανεία’는 성경이 쓰여지던 시대에는 일상적인 용어로
또 다른 뜻으로도 사용되었습니다.
그것은 왕이나 황제가 와서 도착하여 백성들에게 얼굴을 직접 보여주며
자신을 나타내 보여주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런 의미에서 에피파니아는 공현이지만 그 보다 내현(來現)입니다.
내현이라는 표현은 인간의 얼굴을 갖춘 하느님 방문의 직접성을 강조합니다.

하느님께서 당신 자신을 인간의 얼굴로 이 세상에 직접 와서 자신을 현현하고 드러내시는 것을 강조합니다. 하느님께서 당신 자신을 천둥이나 번개 등의 신비로운 자연현상, 고목이나 커다란 바위덩어리, 거룩한 힘, 예언자 혹은 예언자의 말씀 안에 통교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얼굴로 인간의 세상에 오셔서 직접 드러내시고 계시하시는 하느님의 현현을 의미합니다. 하느님이 천상 구중궁궐에 유아독존으로 팔짱끼고 자존하시는 천지의 창조주만이 아니라, 중생의 구원을 위해 인간 세상에 뛰어드시어 개입하시는 하느님이라는 의미입니다.

이렇게 볼 때, 주님 공현 대축일은 주님께서 아기 예수님께서 구세주로 가족이나 이스라엘 백성에게 뿐만 아니라 온 세상 사람들에게 구세주로 첫 선을 보인 것을 경축하는 날입니다. 즉 예수는 당신의 모습을 이스라엘 백성이 아닌 이방인의 세 박사에게 공적으로 얼굴을 드러내 나타내 보이심으로써, 이 세상에 이스라엘 백성들만을 위해서 오신 분이 아니라 모든 인류의 구원을 위해서 오신 분이라는 사실을 드러내셨던 것입니다. 성탄 대축일에는 아기 예수의 ‘비천함’이 드러나고 공현 대축일에는 하느님 아들의 ‘위대하심’이 두드러지게 강조됩니다. 아기 예수님은 비천하게 보이지만 왕중왕이시라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설정된 배경은 별이 빛나는 밤이며 에피파니가 벌어지는 곳은 베들레헴이지만 사건의 조연은 헤로데입니다. 왕중왕의 탄생 앞에서 인간은 서로 다른 두 부류로 나뉩니다. 한편으로는 구세주의 탄생을 알아차리고 기뻐하며 경배하려는 동방박사들이고 다른 한편으로는 왕중와의 탄생에 불안을 느끼고 제거하려는 당대의 정치적인 왕 헤로데와 그 무리입니다.

동방 박사들은 오로지 경배할 목적으로 아기 예수님을 찾지만, 헤로데 임금은 자신의 왕권을 위협하는 경쟁자로 여기고, 왕의 수하인 수석 사제들과 율법 학자들은 태어난 장소를 알아맞히는 전문지식을 자랑합니다. 헤로데와 그 무리들은 메시아가 탄생할 곳으로 베들레헴을 지목합니다.

‘빵의 집’이라는 뜻을 지닌 조그만 고을 베들레헴은 온 구약 시대를 통틀어 자랑할 만한 것이 아무 것도 없는 빈촌이었지만, 다윗의 고향(1사무 16장)이기에. 다윗의 후예인 메시아는 당연히 여기서 탄생한다는 예언과 속설이 있었습니다.

베들레헴은 이스라엘의 두 번째 임금 다윗(기원전 1010-970년경 재위)이 태어나서 목동으로 자란 곳이고, 사무엘이 어린 다윗을 왕으로 선정했다는 전설(1사무 16,1-13)의 발원지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다윗을 가장 성스럽고 강력한 군주로 여겼기 때문에 다윗의 고향이라는 사실만으로도 이목을 끌기에 충분하였습니다. 그래서 장차 이스라엘 백성을 이민족들의 압제에서 해방시키고 태평성대를 이룩할 이상적인 왕, 곧 메시아도 당연히 다윗의 고향 베들레헴에서 탄생하리라고 기대하는 메시아 대망 사상이 어느 정도 퍼져 있었습니다.

마태오 복음사가는 유다인 출신의 그리스도교 신자 공동체를 위하여 복음을 썼습니다. 그는 당시의 신앙 문제에 대한 해답을 주고, 신앙 교육을 위해 복음서를 서술했습니다. 따라서 그의 복음서는 모든 신자에게 의미가 있는 것이지만 특히 유다인 출신 신자들이 유다교 신앙의 맥락 안에서 예수님을 받아들일 수 있도록 하는 데 초점을 맞추었습니다. 즉, 당시의 독자들이 예수님을 약속된 메시아이며 다윗의 후손인 왕으로서 인정케 하기 위한 목적으로 복음서를 기록한 것입니다. 그래서 마태오 복음은 유다인의 민족 역사인 구약성서를 많이 인용하고 있습니다.

복음서 작가 마태오는 구약성서의 예언이 역사의 예수님을 통해 곧이곧대로 이루어졌음을 확인시키기 위해 이른바 '성취 인용문'이라는 문학적인 장치를 15회 가량 사용했습니다.

헤로데 대왕은 삼왕의 방문을 받고 당황하여 대사제와 율사들에게 메시아 예언에 대해 물어 봅니다. 그러자 그들은 미가서 5장1절을 제시합니다: "유다 땅 베들레헴아, 너는 결코 유다 땅에서 가장 작은 고을이 아니다. 내 백성 이스라엘의 목자가 될 영도자가 너에게서 나리라." 그런데 이 인용문을 앞뒤로 감싸 주는 표현이 "예언서의 기록을 보면 … 고 하였습니다"로 되어 있습니다(5-6절). 이것이 바로 전형적인 성취 인용문 형식입니다.

유다인들 사이에서는 마치 다윗 같은 인물이 등장해 도탄에 빠진 이스라엘을 구해 내리라는 기대(메시아 待望 사상)가 팽배해 있었습니다. 메시아라면 기본적인 조건들을 갖추어야 하는데 그는 다윗의 후손이어야 하고, 선구자인 엘리야가 등장해야 했으며, 당연히 다윗의 고향인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야 한다는 믿음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다윗의 자손인 요셉의 아들이고(마태 1,1-16), 엘리야 격인 세례자 요한이 있었으며(마태 17,12-13), 구약성서의 예언대로 베들레헴에서 났으니 유다인들이 기다리던 메시아임에 틀림없다는 논리가 성립되는 것입니다.

오늘 전례와 오늘 복음의 주요 등장인물은 동방박사 세 사람입니다.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동방박사는 유다인이 고대하던 메시아를 인식한 전 세계 이방인의 첫 대표자라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주님 공현 대축일은 아브라함의 후손이 아닌 모든 인류가 처음으로 ‘하느님 백성’으로 하나가 된 기념일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전하는 바에 의하면 동방 메소포타미아 지방에서 왔던 세 박사는 세월이 흐르면서 발타살·멜키오르·카스퍼라는 이름이 붙여지고, 각각 황인·흑인·백인이었다는 이야기도 등장했습니다. 아마도 그들은 고대 근동 지방의 점성가들이 아니었겠는가 추측하고 있습니다.

밤하늘의 별을 관찰하고 있는 그들에게 갑자기 나타난 큰 별은 늘 그들의 관심을 끌기에 충분한 것이었습니다. 여기에서 별은 에피파니를 위한 성현의 기능적 도구였습니다. 성현은 거룩함의 현현을 의미합니다. 고대 근동에서 별은 그 자체로 하나의 거룩한 신격으로 숭배되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창조신앙을 바탕으로 우주 삼라만상(參羅萬像)에 관하여 탈신격화의 작업을 하였습니다. 별을 비롯한 하늘과 땅과 달과 별은 모두 하느님의 피조물입니다. 그것들은 신성 자체가 아니라 신성을 가리키는 도구가 되었습니다. 하느님의 모든 피조물은 그 자체로는 세속(世俗)이지만 동시에 거룩함이 나타나는 현장이 됩니다. 속(俗)을 통하지 않고 성(聖)이 드러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돌멩이 하나라도 거룩함을 가리킬 수 있습니다. 인간은 이 세상 안에서 이 세상 만물을 통해서 하느님과 소통하고 있습니다. 자연 만물은 하느님을 설명하는 편지이며 책입니다.

인간과 자연은 다 같이 하느님의 피조물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정황을 설명하기 위해 기초신학에서는 신현이나 공현과는 구별되는 성현이라는 표현을 사용합니다. 성현은 세상 만물을 통해서 하느님의 거룩함이 현현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많은 종교들은 바로 이 성현에 근거를 두고 있습니다.

이러한 거룩함을 프랑스의 실존철학자 가브리엘 마르셀은 미스테르라고 부릅니다. 단순히 미스테르는 인식론적으로 모른다는 의미에서 소위 영어에서 말하는 그런 의미의 미스테리가 아닙니다. 성현은 비이성적인 요소를 가지고 있기에 명시적으로 완전히 인식할 수 없습니다. 성현은 우리가 익숙한 자연과학이나 수학의 인식론적인 틀로 설명되는 대상적인 요소를 뛰어 넘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반이성적이라는 말은 아닙니다. 철학적 해석학에서 반이성적인 것과 비이성적인 것을 구별합니다. 전인적인 인간에게는 이성적으로 설명되지 않지만 포괄적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영역이 있다는 것입니다. 로고스의 영역에서 언어로 설명할 수 없어 불립문자(不立文字)이지만 에토스나 파토스의 영역에서 감성적이거나 윤리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신비를 현대 해석학은 인정합니다. 성현이란 다 설명할 수 없지만 어느 정도 이해할 수는 있습니다.

가브리엘 마르셀이 말하는 미스테르는 그것에 인간이 존재론적으로 연루되어 있기에 그것을 따로 분리하여 대상화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대상이 될 수 없기에 객관적으로 분석하거나 논리적으로 추론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동시에 인간이 그것에 연루 되어 있기에 전혀 불가촉의 대상은 아니며 따라서 몸과 마음으로 느끼고 이해할 수 있다는 주장이 바로 유신론적 실존철학에서 말하는 미스테르입니다. 이런 미스테르의 개념은 나중에 칼 라너 신부에게 받아 들려져 거룩한 신비라는 개념으로 정립됩니다.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별이라는 상징도 이런 차원에서 그 자체로 신격은 아니지만 신성의 에피파니를 지목하는 성현의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습니다. 별이 메신저라면 메시지는 예수님이십니다. 그런데 메신저와 메시지가 예수님의 인격 안에서 통합되고 별은 사라집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위격 안에 메신저와 메시지가 통합됩니다.

예수님은 구원의 알림자인 동시에 구원 그 자체이십니다. 예수님은 복음이며 복음의 내용입니다. 예수님은 하늘 나라를 선포하는 메신저인 동시에 하늘 나라 그 자체입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을 알리는 말씀인 동시에 하느님이십니다. 하느님께서는 자연의 무서운 힘, 바람이나 불이나 물이나 달이나 별이나 해를 통해 당신 자신을 드러내시고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 인간을 위해서 우리 인간의 구원을 위해서 신적인 본성 우시아를 온전히 가지시고 나타나신 것입니다.

말씀을 전하는 선지자는 있었어도 전하는 말씀과 전하는 사람이 인격 안에 일치하는 존재는 예수님 뿐이었습니다. 다른 모든 성현들과 종교의 창시자들은 말씀을 전하고 지목하는 도구요 손가락이었습니다. 인류 종교 역사상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이루어지는 유일회적인 말씀의 육화가 온전하게 이루어진 사건에 대한 공적인 고백이 공현대축일의 의미입니다.

이렇게 볼 때 베들레헴의 별은 천문학에서 말하는 대상이 아니라 바로 성현의 계기로서 신적 현존을 가리키는 손가락입니다. 동방의 세 박사는 손가락을 보고 손가락이 가리키는 것을 보는 예언자적인 혜안을 가졌습니다. 세상의 많은 사람들은 별을 보고도 그 성현의 의미를 깨닫지 못했지만 그들은 인류가 열망하는 에피파니를 찾아 나섭니다.

별의 인도를 따라서 나선다는 것은 그들에게 있어서 커다란 모험이었습니다. 그 별의 주인공이 정확하게 어디에서 태어나셨는지도 알 수 없었을 뿐 아니라 그들이 여행 중에 당해야 할 위험 역시 여러 가지였습니다. 그들은 결국 성현을 통해 신현과 에피파니를 체험합니다. 하느님을 단순히 거룩한 신비로 이해하는 정도를 지나 육화하신 위격적인 신성으로 한 아기를 만나게 됩니다.

마태오 복음사가는, 별을 보고 아기 예수님의 탄생을 축하하러 먼 길을 떠나온 동방 박사들의 이야기를 전하면서 낯설고 먼 길을 여행하는 데 따르는 육체적인 노고, 강도의 위험, 추위와 더위, 목마름과 배고픔 등 그들이 겪었을 많은 어려움에 대해서는 아무런 이야기도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자신들의 운명을 바꾸어 놓게 될 진리를 찾기 위해서는 그만한 모험을 감행할 용기와 결단이 필요했던 것입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운명을 하늘에 맡긴 채 여행 준비를 갖추고 무작정 길을 떠났습니다. 이제 그들에게 남은 것은 믿음뿐이다. 어둠 속을 더듬으며 여기까지 인도해 주신 주님의 손길이 그들을 버리지 않으실 것을 믿고 계속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거룩한 그 큰 별은 그들을 이스라엘로 인도했고, 아마도 그 세 박사는 우연히 예루살렘으로 향하는 길목 어디에선가 서로 만나 합류하게 되었을 것입니다. 세 박사가 예루살렘으로 발길을 향하게 된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이스라엘에 새로운 왕이 태어난다면 그 장소는 당연히 하느님의 도성이며 왕의 도성인 예루살렘이어야 마땅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오늘 복음을 통해서 동방 박사들과는 대조적인 인물인 헤로데를 만납니다. 세 박사가 헤로데를 만났을 때 헤로데는 두려움으로 떨어야 했습니다. 헤로데는 이스라엘의 통치자가 되었지만 그는 유다인 출신이 아니라 이두메아 출신의 이방인입니다.

그래서 그는 늘 자신의 정권 안보에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차에 헤로데는 새로 태어난 왕을 경배하러 온 세 박사의 방문을 받게 됩니다. 이런 사정을 잘 모르는 동방박사들은 메시아는 왕의 혈통을 가지고 태어났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왕을 알현하였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묻습니다.

“유다인들의 임금으로 태어나신 분이 어디 계십니까?
우리는 동방에서 그분의 별을 보고 그분께 경배하러 왔습니다.”

박사들의 이 말에 모두 깜짝 놀랍니다.
루카 복음사가는 헤로데 임금을 비롯하여
온 예루살렘이 깜짝 놀랐다고 기억을 공유하여 기록하였습니다.
특별히 헤로데에게는 청천벽력같은 소리였을 것입니다.
왕궁에 새로 태어난 왕자는 없는 데 이 무슨 해괴한 말인가?
역성혁명의 기운이 있다는 말인가?
헤로데는 동방 박사들의 말을 듣고 이미 자신이 누리고 있던
권력과 향락을 잃게 될까 봐 두려움에 떨어야 했습니다.
그는 동방 박사들을 통해서 듣게 된
구세주 탄생의 복음을 기쁜 마음으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오히려 자신이 누리고 있는 왕권에 대한 도전으로 받아들입니다.

그리고 헤로데는 곧 어전회의를 엽니다. 헤로데는 원래 꾀가 많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잘 발달한 기회이성의 소유자였습니다. 그는 백성의 수석 사제들과 율법 학자들을 모두 모아 놓고, 메시아가 태어날 곳이 어디인지 물어봅니다. 헤로데 역시 메시아니즘에 관한 예언에 관해 어느 정도 알고는 있었습니다.

헤로데는 자신의 권력 유지와 보신을 위해서는
명사목(明四目)과 명사총(明四聰)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사방의 눈으로 자신의 눈을 밝히고 사방의 귀로 자신을 총명하게 하고자 하였습니다.
쉽게 말해서 그는 그 분양의 학자들과 전문가들의 의견을 구하고 존중할 줄 알았습니다.
보통 권력을 가진 사람은
다른 사람들을 모든 분야에서 자기보다 못한 사람으로 여기기 쉽습니다.

그러나 헤로데는 막강한 왕권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자기가 잘 모르는 분야에 관해서는 독단적이지 않고
다른 사람에게 조언을 구할 줄 아는 어느 정도 열린 사람이었습니다.

적어도 이 점은 통치자들 뿐 아니라 모든 교회 지도자들도 본받아야 할 점입니다.
다른 사람이 가진 능력은 그저 재주 좋은 것으로 폄훼하거나
무시하는 사람이 권력자 중에는 항상 있습니다.
주변에 보면 헤로데 만큼도 되지 못한 완장찬 사람들도 더러 있습니다.

권력을 가지고 있으면 모든 분야에서 자신이 다른 사람보다 우월한 걸로 착각하는 완장들이 있습니다. 하느님은 각자에게 각자의 고유한 탈렌트를 주신다는 것을 잊어버립니다. 권력이나 돈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 중에는 자신보다 뛰어난 학식과 전문지식을 가진 사람을 무시하는 속물들도 많습니다. 그러나 헤로데는 그런 사람은 아니었고 적어도 자문을 구할 줄은 아는 깜냥은 되었습니다.

그래서 곧 그는 자신의 음흉한 생각을 감추고 박사들에게 말합니다. 그는 자신의 불안한 심정을 감춘 채 대사제들과 학자들을 불러서 새로운 왕이 태어날 곳이 어딘지 물어 봅니다. 그들은 헤로데에게 베들레헴이라고 대답합니다.

“유다 베들레헴입니다. 사실 예언자가 이렇게 기록해 놓았습니다. ‘유다 땅 베들레헴아, 너는 유다의 주요 고을 가운데 결코 가장 작은 고을이 아니다. 너에게서 통치자가 나와 내 백성 이스라엘을 보살피리라.’”

그 다음에 그는 박사들을 몰래 부릅니다. 다른 사람이 알면 곤란하다고 판단한 것입니다. 그는 박사들에게 별이 나타난 시간을 정확히 알아냅니다. 그러고 나서 그는 박사들을 베들레헴으로 보내면서 마음에도 없는 말을 합니다.

“가서 그 아기에 관하여 잘 알아보시오. 그리고 그 아기를 찾거든 나에게 알려 주시오. 나도 가서 경배하겠소.”

그러나 헤로데의 이 말은 구밀복검(口蜜腹劍) 즉 입에는 꿀을 발랐으나 배속에는 비수를 감춘 말이었습니다. 그는 아기를 찾아서 죽일 생각을 하면서 말로는 반대로 이야기 합니다. 헤로데는 말이 생각이나 행동과는 다른 간사하고 간악한 사람이었습니다. 헤로데는 자신이 누리고 있는 권력과 명예와 안락을 지키겠다는 생각으로 끔찍한 범죄를 꾸미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그는 실제로 돌이킬 수 없는 비극적인 선택을 하게 됩니다. 그는 베들레헴에 있는 두 살 이하의 사내아이들을 모조리 학살함으로써 씻을 수 없는 죄악을 저지르고 맙니다. 헤로데는 지신이 이미 누리고 있는 권력과 향락에 안주하려 했지 새로운 삶으로 건너가려 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자신의 위기를 기회로 바꿔 제구포신(除舊佈新)할 수 있는 선택을 놓쳐버리고 하느님 구원경륜의 궤도에서 낙오합니다. 그는 구원사적으로 구약을 접고 신약을 여는 변곡점에서 악역을 담당합니다. 그는 박사들을 통해서 들려 온 기쁜 소식을 거부했을 뿐 아니라 무죄한 어린이들의 피와 그 엄마들의 눈물로 자신의 손을 더럽히는 반인륜적인 범죄를 범하게 됩니다.

세 박사가 헤로데의 왕궁을 나와서 베들레헴으로 길을 재촉하자 사라졌던 별이 다시 나타나 그들을 인도했습니다. 별이 그들을 앞서 가다가 아기가 있는 곳 위에 멈추자 그들은 그 집에 들어가 어머니 마리아와 함께 있는 아기를 보고 땅에 엎드려 경배합니다.

여기에서 “경배한다”는 것은 ‘숭배하다,
무릎을 꿇다, 조공(공물)을 바치다’라는 의미를 가집니다.
피조물이 창조주 앞에 무릎을 꿇는 행위입니다.
그리고 동방박사들은
아기 예수님께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예물로 바칩니다.

이 장면은 솔로몬 임금을 찾아와 금과 향료와 보석을 바친 스바 여왕을 연상시킵니다(1열왕 10,10). 아직 구유에 누워 계시는 아기 예수께 바쳐진 황금과 유향과 몰약은 장차 이분이 어떤 분인지를 예표합니다.

먼저 멜키오르가 가져온 황금이 상징하는 것은
아기 예수께서 이 세상의 왕이라는 사실입니다. 잘 아시는 바와 같이 황금은 쇠붙이 중에서는 가장 값진 것이며 변하지 않는 금속입니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황금은 가장 소중한 광물로 여겨졌습니다. IMF때 금모으기 운동이 벌어졌는데 금은 바로 달러가 되고 기준이 됩니다.

박사들이 황금을 아기 예수께 선물한 것은
아기 예수야 말로 영원히 변치 않을 왕이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세상에 많은 왕들이 있지만 그들은 밤하늘에 명멸하는 별처럼 언젠가 사라지고 말 권력자들입니다. 그러나 초라한 외양간에서 가난하게 태어나신 아기 예수가 오히려 온 인류의 왕으로서 영원히 변치 않을 왕입니다. 예수께서는 나중에 왕이 되시는 분이 아니라 이미 지금 분명 왕으로 오셨습니다. 그러나, 힘과 권세로 세상을 다스리는 것이 아니라 사랑으로 사람들의 마음을 다스리고 하늘과 땅을 이어주는 임금이십니다.

가스파르가 가져온 유향은 사제를 위한 예물입니다.
박사들이 아기 예수께 드린 유황은 기도할 때 피워 올리는 향입니다. 유향은 비싼 향료라서 사제가 성전에서 제물을 바칠 때 주로 사용되었으며, 일상생활에서는 그 중에서도 특별한 날에만 사용되었습니다. 예수께서 당신 자신을 희생 제물로 바치시는 대사제로 세상에 오신 것을 표상합니다.

우리가 향을 피우면 어디로 올라갑니까? 하늘로 올라갑니다. 하늘엔 누가 계시죠? 하느님이 있습니다. 그래서 유향은 하느님을 향한 기도와 제사를 의미합니다. 또한 사제의 역할은 무엇보다 인간을 하느님과 만나게 해 주는 일입니다. 하느님과 인간 사이에 다리를 놓는 역할을 하는 사람이 바로 사제입니다. 그것이 장차 예수께서 하실 일입니다. 아니, 하느님이 인간이 되신 예수야말로 하느님과 인간을 하나로 잇는 다리 그 자체이십니다. 예수를 통해서 우리는 하느님께로 나아갑니다. 아기 예수야말로 하느님의 아들이고 구원의 참된 매개자이심을 나타내는 선물입니다.

발타사르가 가져온 몰약은 죽음을 앞둔 사람들을 위한 예물입니다.

그리고 몰약은 무엇을 상징합니까?
몰약은 단순한 물약이 아닙니다.
몰약은 어디 사용됩니까? 몰약은 몰약은 아프리카와 아라비아 지방에서 나는 향수와 방부제의 원료로 사용되는 약제입니다. 즉 몰약은 시신에 바르는 약입니다. 몰약은 시신을 부패하지 않게 하는 물건이지요. 예수께서는 역설적으로 죽으시기 위해서 태어나셨습니다. 그래서 몰약은 아기 예수님이야말로 인류를 죄와 죽음의 썩음에서 구원할 구세주라는 뜻입니다. 바로 당신 자신의 생명을 바치심으로서 세상을 구원하시는 구원자로서 오신 것입니다.

결국 세 사람의 마뉴스가 아기 예수님께 경배 드리러 와서 봉헌한 황금과 유향과 몰약은 예수님께서 왕중왕이시고 하느님의 아들이시며 우리 인간을 죄와 죽음에서 구해주시는 구원자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분은 바로 우리의 임금이시며 대사제이시고 구세주이십니다. 이렇게 볼 때 오늘 동방의 세 박사는 자신들이 지닌 가장 값진 보물을 아기 예수께 선물로 드렸습니다. 황금과 유황과 몰약은 겉으로도 값진 것일 뿐 아니라 그들이 마련할 수 있었던 최고의 선물이었습니다.

그 후 박사들의 행적에 대해서 성경에 나오지 않고 다만 각자 자기의 고향으로 돌아가 하느님 아들의 탄생을 말과 행동으로 세상 사람들에게 알렸을 것이라고 짐작됩니다. 우리가 신학적으로 생각해 볼 때 지금 이 자리에 있는 우리 모두는 동방박사들의 후예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영원한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이 세상에 오신 후 그 모습은 요셉과 성모님께 가장 먼저 드러났고, 그 다음 양치기 목동들에게 드러났고, 오늘 동방의 마뉴스들에게 드러난 것입니다. 요셉과 성모님 그리고 양치기 목동들은 구약의 백성인 유대인들이었고 동방 마뉴스들은 이방인들로서는 처음 하느님의 백성이 되고 신약의 창단 멤버들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들은 최초의 이방인 그리스도인이라고 불릴 수 있습니다.

따라서 이분들은 이방인 그리스도인인 우리에게는 더 의미 있는 선구자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방인 박사들의 경배 사건은 우리 그리스도교가 닫힌 종교가 아니라 열린 종교임을 잘 보여주는 일입니다. 우리 역시 닫힌 회로가 아니라 열린 회로가 되어야함을 강조하는 인생원리를 보여주는 사건입니다.

성서적으로 볼 때 경배 이후의 동방 박사들은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지고 그분들의 행적을 역사적인 기록으로는 알 수 없습니다. 베들레헴의 거룩한 별과 그 별을 따라 동방에서 온 이방인 박사들은 구원의 보편성 즉 하느님의 보편적 구원의지를 선민 뿐만 아니라 온 세상 만민에게도 알리는 자신의 구원사적 역할을 다 수행하고서는, 모든 것을 예수님께 맡기고 자신들은 역사의 뒤안길로 물러납니다.

이방인 동방박사들을 통해 예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만을 위한 메시아가 아니라 단군의 후예들을 위한 구세주이심이 에피파니한 것입니다. 주님의 공현은 하느님의 구원 의지가 처음에는 하나, 한 사람, 한 민족의 선택에서 출발했지만 그 방향과 목적은 온 세상 모든 사람들에게 골고루 확산되어 적용되는 보편적인 것임을 밝혀 줍니다.

‘모두를 위한 하나’(one for all)라는 구원도식이 정립됩니다. 선택은 하나이지만 그 하나는 그 하나만을 위한 선택이 아니라 모든 인류를 위한 하나의 선택이라는 것에 하느님 구원경륜의 묘미가 있습니다.

아담과 이브와의 결약, 노아와의 결약, 아브라함과의 결약, 모세와의 결약, 선민 이스라엘 백성과의 결약 등이 오늘 동방박사로 대표되는 모든 이방 민족들과의 결약으로 보편화된 것임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즉 하느님의 구원 약속은 이스라엘 민족에게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온 세상 모든 사람들에게도 해당되는 것임이 오늘 주님의 공현으로 드러난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오늘 주님의 공현은 구세주의 성탄이 갖는 의미와 내용을 보다 깊고 심오하게 드러내 주는 에피파니 계시의 축일이 됩니다. "하느님의 심오한 계획"은 보편성으로 열린 개체성이었음이 드러납니다. 우리는 한 개체로 살아가고 자신의 고유성을 실현하지만 타자에게로 열린 삶을 살아가야함을 암시해줍니다.

쉽게 말해서 하느님은 백성의 하느님,
우리의 하느님이지 나만의 하느님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느님은 나를 위해서만 존재하는 하느님이 아니라
모든 사람들을 위한 하느님입니다.

설령 하느님께서 나를 사랑하고 나를 도구로 써 주신다고 해도
그것은 나를 위한 것이 아니라 모두를 위한 것입니다.

주님은 하나를 위한 하느님이 아니라
모두를 위한 하느님이며 이방인들이나 타자의 하느님이기도 하십니다.

하느님은 나만 잘 되기를 원하시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도 잘 되기를 원하십니다.

아기 예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위해서만 오신 것이 아니라
동방박사들, 이방인들, 모든 색깔과 빛깔의 인간을 위해 오신 것입니다.

물론 하느님께서 나 자신을 위해서 오신 것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
부득불 편가르기를 피할 수 없다면
하느님을 내편으로 만드는 방법은 내가 하느님과 한편 먹는 수밖에 없습니다. 내가 하느님의 편에 서서 하느님의 뜻에 맞게 살아갈 때
하느님과 나는 같은 편이 됩니다.
내가 하느님의 보편적 구원의지를 받들고
그 뜻을 실현할 때 하느님은 나의 편입니다.
네편 내편 가르지 말고 다 하느님 편이 되면 좋겠습니다.
예수님은 편가르기나 줄세우기를 위해 이 세상에 오신 것이 아닙니다.
누구든지 선민이고 이방인이고 간에
우리 모두 하느님 쪽에 서 있으면 다 한 형제요 자매입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우리는 모두 지난 성탄 밤 미사 때 구유 경배 예절에 참여하였고 구유 예물도 이미 봉헌하였습니다. 오늘 주님 공현대축일을 지내며 우리는 다시 한 번 임금이시며 대사제이시고 구세주이신 아기 예수께 우리의 마음을 드리며 가만히 무릎을 꿇고 경배를 드려야 하겠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이미 우리는 동방 박사의 반열에 들었다고 감히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이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아기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아들이시고 왕중왕이시며 구세주이심을 말과 행동으로 알리는 일일 것입니다.

오늘 제1독서는 새해를 맞이하는 우리에게 큰 희망을 주는 응원과 격려의 말씀을 담고 있습니다. 이사야 예언자는 힘차게 외칩니다.

“일어나 비추어라, 너의 빛이 왔다. 주님의 영광이 너를 비춘다. 온 땅이 아직 어둠에 덮여, 민족들은 암흑에 싸여 있는데, 주님께서 너만은 비추신다”(이사 60,1-2)

이사야 예언자는 예수님의 탄생이 어둠 속에 살고 있는 뭇 민족에게 구원의 빛을 예언하시고 마태오 복음사가는 이 예언이 아기 예수님에게 와서 성취되었음을 선포한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빛은 비단 유다인 뿐 아니라 이방 모든 민족에게 비치게 된 것입니다. 따라서 이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우리 자신도 그리스도의 또 다른 별빛이 되어 세상을 비추는 역할을 충실히 하는 것입니다.

또한 이사야 예언자는 우리에게
‘너는 기쁜 빛으로 가득’할 것이라고 합니다.
이 얼마나 큰 힘이 되는 말씀입니까?
이제 하느님께서 새로 선물로 주신 임인년 2022년이
기쁜 빛으로 가득할 것을 우리는 기도해야 하겠습니다.
또한 예언자는 너희 마음은 두근거리며 벅차오르리라고 합니다.

우리의 마음이 설레고 두근거린지가 얼마나 오래 되었습니까?
이제 우리의 가슴이 두근거리고 벅차오르는
좋은 일이 새해에는 많이 생길 것입니다.

또한 이사야 예언자는 보화와 재물이 너에게 들어올 것이라고 예언합니다.
이 모든 말씀이 얼마나 신이 나는 흥겨운 말씀입니까?

아무쪼록 올 새해에 오늘 제2독서의 말씀대로
빛이 우리에게 오고, 영광이 떠오르며,
우리의 얼굴은 기쁜 빛으로 가득하고,
다리가 아니라 가슴이 떨리며,
또한 땅의 재물과 바다의 보화가 들어오는
한 해가 되기를 기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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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대교구 박태범 라자로 신부
2022년 1월 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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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탄 축일에 우리는 예수님이 이 세상에 태어나신 사실을 기념하였습니다.
태어난 아기는 자라서 하느님에 대해 또 우리의 구원에 대해 알려주었습니다.

오늘 주님의 공현 축일에서
우리는 하느님이 주신
그 생명을 찾아 나선 사람들이 있었다는 사실을 기념합니다.
마태오복음서가 전하는 오늘의 이야기는
일어난 역사적 사실 그대로를 보도하는 것이 아닙니다.

동방에서 박사들이 베들레헴에 왔다는 오늘의 이야기는,
하느님이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신 예수님이었지만,
이스라엘은 그분을 거부하였고,
이교도들이 먼 이역에서 찾아 와 그분을 영접하고 경배하였다는 것입니다.

살아계실 때 예수님은 이스라엘 백성을 위해 활동하셨지만,
이스라엘은 그분을 배척하고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다.
그분의 죽음 후 그분의 가르침은
이방인들에게 실제로 더 큰 성공을 거두었습니다.

오늘 복음은 해 뜨는 동방에서 왔다는 박사라는 사람들을 등장시켰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몇 명이며 무엇 하는 사람들인지,
베들레헴을 다녀서 어디로 갔는지,
후에 신앙인이 되었는지,
어느 것 하나도 복음서는 말해 주지 않습니다.

그들은 잠시 무대에 나타났다가 그들의 배역이 끝나자 사라졌습니다.
그들이 세 명이라는 전설이 있습니다.
복음서에 예물이 셋으로 되어 있어서,
기원 후 500 년경부터 전래된 전설입니다.

그들이 나타나자
‘헤로데 임금을 비롯하여 온 예루살렘이 깜짝 놀랐다’고
오늘 복음은 말합니다.

이스라엘을 대표하는 헤로데 왕이고, 이스라엘의 수도 예루살렘입니다.
이스라엘은 예수님이 탄생하셨다는 소식을 들을 때부터
놀라고 그분에 대해 적의를 품었다는 뜻입니다.

오늘 복음의 이야기에서 헤로데 왕은 아기를 찾거든 자기에게도 알려 달라는 음흉한 주문을 하면서 그 박사들을 베틀레헴으로 보내었습니다. 그들은 다시 길을 떠나 결국 아기를 찾아 경배하였습니다. 말씀을 찾아 자기 길을 꾸준히 가는 사람은 말씀을 만난다는 뜻입니다.

우리도 모두 길을 가는 사람들입니다.
태어나고 철이 들면서부터 우리는 길을 가고 있습니다.
어디로 가든 우리는 가고 있습니다.
사랑하기도 하고, 환상을 좇기도 하면서 갑니다.
돈을 좇아, 권력을 좇아, 때로는 비굴하기도 하고,
거짓을 말하기도 하며 우리는 길을 가고 있습니다.
나 한 사람 잘났다고 착각하기도 하고,
이웃을 미워하기도 하면서 우리는 길을 가고 있습니다.
아침에 피었다가 저녁에 시들고 마는 한 송이의 꽃과 같이
길지도 않은 인생길을 우리는 가고 있습니다.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하느님이 주신 우리의 생명입니다.

창세기는 하느님이 인간을 창조하실 때 진흙으로 인간의 모상을 빚어놓고 당신의 숨결을 불어넣으시자 살아 있는 존재가 되었다고 말합니다.

인간의 삶은 하느님의 숨결,
곧 하느님의 생명과 관계가 있다는 말입니다.
우리 안에 그 숨결이 살아 있으면,
우리는 허무로 돌아가지 않습니다.

창세기는 “흙으로 돌아간다...먼지로 돌아간다.”(3,19)는 말로 그 허무를 표현하였습니다. 하느님 없이 우리 삶의 수수께끼는 풀리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인간은 제 멋대로, 자기중심적으로 살도록 태어나지 않았습니다.
하느님의 숨결을 자기 안에 살려서 살아야 하는 인생입니다.

오늘 베들레헴을 향해 길을 떠난 박사들의 이야기는
말씀을 찾아 나선 신앙인들의 행보를 말해 줍니다.

그들은 구원의 말씀을 찾아 별을 보고 떠났습니다.
그들에게 보이는 것은 별 하나입니다.
흔하디흔한 별들 중의 하나입니다.
그들은 정든 그들 삶의 온상을 버리고 떠났습니다.

아브람이 자기 고향을 버리고 길을 떠났듯이 그들도 떠났습니다.
그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과거의 편안함이 그립기도 하였고,
회의에 빠져 마음이 어둡기만 한 때도 있었습니다.

그들은 헤로데 왕에게 가서 길을 묻기도 하고,
그의 간교한 주문을 받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 간교함이 하느님을 향한 그들의 발걸음을 막지는 못하였습니다.

드디어 그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만나
그들의 정성을 바치고 우리 시야에서 사라집니다.
성서는 그들에 대해 다시는 말하지 않고,
우리는 그들에 대해 알아볼 길도 없습니다.
그들은 그들에게 주어진 역할을 끝내고 사라졌습니다.

우리도 하느님의 말씀을 찾아야 합니다.
찾는 마음이 있고, 길을 떠나는 용기도 있어야 합니다.
길을 떠나는 것은 지금까지 아무 문제없다고 생각하며
안주하였던 온상을 떠나는 것입니다.
재물이 제공하는 온상에서 하느님의 말씀은 들리지 않습니다.
위대하고 화려한 것만 찾는 시선에 말씀의 별은 보이지 않습니다.

말씀은 초라한 구유에 사람이 되어 누워 계십니다.
“이 지극히 작은 형제들 가운데 하나에게 해 주었을 때마다
나에게 해 준 것이다.”(마태 25,40)는 복음서 말씀이 있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찾는 우리가 시선과 마음을 주어야 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려 주는 말입니다.
초라한 현실과 고통당하는 약자들의 모습을 외면하면,
말씀에로 인도하는 별은 보이지 않습니다.
그런 현실과 그런 사람들을 위해 무엇인가 해야 하겠다는 마음이 있을 때,
별은 보이고 말씀은 들립니다.
그런 마음에 하느님의 숨결이 살아 계십니다.

별은 우리에게도 주어졌습니다.

우리의 이기심과 욕심의 구름이 걷히면,
하느님 말씀의 별은 보입니다.
초라한 현실들과 고통스런 약자의 모습들은 하늘의 별과 같이
우리 주변에 얼마든지 있습니다.
그것을 향해 우리는 움직여야 합니다.
그러면서 말씀의 별은 빛을 발할 것입니다.

헤로데와 예루살렘의 율법학자들과 같이,
오늘의 통치자와 종교 지도자들의 엉뚱하고
때때로 간교한 생각도,
말씀을 찾아가는 우리의 발길을 막지는 못합니다.
그 말씀의 별을 보고 그것을 향해
조금씩 움직이는 우리의 삶 안에 하느님은 숨결로 살아 계십니다.

말씀을 향해 떠나야 합니다.
우리가 갇혀서 사는 이기심의 따뜻한 온상을 뒤로 하고 떠나야 합니다.
우리의 죄도, 우리가 받은 상처도 모두 잊어버리고 가야 합니다.
하느님은 그런 것들 안에 계시지 않습니다.

하느님은 과거를 가지고 우리와 시비하시지 않습니다.
하느님은 우리가 그분을 향해 길을 떠나면,
별이 되어 우리를 인도하십니다.
우리가 이웃을 불쌍히 여기고 돌보아줄 때,
하느님은 우리의 별이 되어 우리의 길을 인도하십니다.
그런 실천들의 원천이신 하느님이십니다.

하느님 없이도 잘 돌아가는 세상입니다.
각자가 자기 자신만을 위해 살아도 무방한 세상입니다.
그러나 하느님이 계시지 않는 그
런 삶 안에 ‘흙과 먼지’의 허무를 보는 사람이 신앙인입니다.
하느님의 말씀과 숨결이 우리의 실천 안에
살아 계시게 사는 사람이 신앙인입니다.
그것을 향해 우리를 움직여야 합니다.
그때 하느님은 우리를 인도하며 함께 계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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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교구 서공석 신부
  | 12.30
505 7.6%
빛나는 별과 동행하는 은총의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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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 공현 대축일에 성탄의 기쁨이 새롭습니다. 동방박사(Magi)들이 별의 인도로 베들레헴을 찾아와 아기 예수님께 경배드리고 예물을 바침으로 강생의 신비가 모든 민족에게 드러납니다. 구원의 문은 열려있습니다. 오늘의 복음 말씀을 묵상하면서 새해에는 사랑이신 임마누엘 주님께 감사하는 삶을 살기로 다짐합니다.

우리 위에 별빛이 비칩니다. 이사야 예언자(제1독서)는 거룩한 도성에 은총의 빛이 충만함을 선포합니다. 예루살렘아, “일어나 비추어라. 너의 빛이 왔다. 주님의 영광이 네 위에 떠 올랐다(이사 60,1).” 구원의 빛을 향한 세상 사람들의 순례는 보편적입니다. 모든 민족이 기쁜 소식을 들으면 주님께서 이끄시는 행복한 삶의 길로 향할 것입니다.

사도 바오로(제2독서)는 계시를 통해 주님의 신비를 알고 이방인들에게 사도직 사명을 수행합니다. 지금은 성령을 통해 사랑의 신비가 드러납니다. 다른 민족들도 복음을 통하여 약속의 공동상속자가 되고, 그리스도 가족의 한 몸으로 공동수혜자가 됩니다. 모든 신자가 성령 안에서 친교와 사랑의 일치를 이룹니다.

오늘 복음에 동방박사들은 주님의 별을 보고 베들레헴을 찾아와 성모 마리아와 함께 계신 아기 예수님께 경배를 드리고 예물을 바칩니다.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참빛’으로 오신 그리스도의 성탄은 모든 민족에게 드러내신 구원의 은총입니다. 이스라엘은 거부하지만 다른 민족들이 복음을 받아들인 시초입니다.

‘야곱에게서 별 하나 솟는다’라는 신탁((민수 24,17)처럼 새로 뜬 별을 보는 것은 주님의 탄생으로 사랑의 여정이 시작되는 믿음입니다. ‘거룩한 도성’인 예루살렘에 동방박사들이 찾아온 때는 헤로데 왕 시대(기원전 37-4년)입니다. 이스라엘의 임금으로 태어나신 분께 경배드리러 왔다는 말에 헤로데와 온 예루살렘은 깜짝 놀랍니다. 별이 앞서가다 아기 예수님 계신 곳에 멈춘 곳은 예루살렘 남쪽 10km 정도 떨어진 베들레헴입니다. 다윗의 출생지인 베들레헴은 일명 ‘빵의 성전’으로 불립니다.

아시시의 프란치스코 성인께서 베들레헴 첫 크리스마스 때 강생의 신비를 묵상할 수 있게 그레치오 성당에 구유를 처음 설치(1223)했지요. 오늘 주님 공현 대축일에 우리는 구유에서 이민족의 첫 방문객인 동방박사들을 봅니다. 한 처음에 말씀이 사람이 되신 아기 예수님께 경배를 드리고 연약한 우리의 인성에 사랑이신 주님의 신성을 함양합니다.

별빛을 따라 순례한 동방박사들의 여정은 방랑의 길이 아닙니다. 그들이 자유의지로 선택한 여행목표는 분명합니다. 영혼의 생명이신 주님을 향한 믿음의 순례길입니다. 빛나는 별을 보고 팔레스타인 산악지대에 있는 예루살렘을 찾아옵니다. 일기가 불순하거나 구름이 짙을 때는 잠시 쉬어 생기를 돋우고, 장애물을 만나면 좁은 길을 택했겠지요. 우리의 삶의 길도 나 중심이 아닌 진리요 생명이신 그리스도 중심이어야 합니다.

주님께 땅에 엎드려 경배한 동방박사들은 값진 예물(황금, 유향, 몰약)을 드립니다. 영성독서회에서 성서에 ‘가장 아름다운 노래’인 아가를 묵상한 바 있습니다. 사랑의 상징물 중에 순금과 향유와 몰약이 여러 번 등장합니다. 순금은 왕이신 주님께 대한 사랑의 표지이고, 향료는 주님 사랑을 갈망하는 영혼의 향기이며, 몰약은 죽음을 이기는 사랑의 힘입니다. 아가는 사랑의 빛, 그리스도의 향기, 사랑의 일치를 찬미합니다.

사랑의 신비를 드러내신 주님께 우리는 무슨 예물을 드려야 할까요? 아가는 사랑은 죽음처럼 강한 불길임을 노래합니다. 아가가 인간의 사랑 이야기라면 어찌 정경으로 채택되었겠습니까? 창조의 신성과 주님의 지혜는 물론 조건 없는 사랑은 영원합니다. “먹어라, 벗들아. 마셔라, 사랑에 취하여라(아가 5,1).” 우리는 미사성제에서 사랑이신 주님께 감사기도를 드리고, 그리스도의 몸과 피를 모시고, 부르심에 ‘예’라고 응답합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인류의 빛이십니다.
빛 속을 걷는 우리는 세상 속에서도 하늘나라의 삶을 맛보고 기쁜 소식을 전하며 살아갑니다. 빛나는 별과 함께하는 길은 성령님의 도움으로 진리를 깨닫고 친교와 형제애로 살아가는 신앙의 여정입니다.

지난날 잦은 해외여행과 산행을 한 경험에 따르면 순례길의 배낭은 가벼울수록 좋습니다. 무거운 짐을 가볍게 하려면 많은 것을 포기하거나 나누고, 낡은 습관은 털어버리며, 마음을 무겁게 한 사람과 화해하고, 풀리지 않는 매듭은 성모님께 의탁합니다. 코로나 19 감염 위기로 가난한 이들이 큰 고통과 어려움을 당하고 있습니다. 주님과 동행하는 길은 자신을 버린 가난한 마음으로 따르는 사랑의 길입니다.

동방에서 출발해 ‘빵의 성전’인 예루살렘을 향한 동방박사의 순례길을 인도한 별은 참빛이십니다. 이 별은 이 땅에 어둠을 밝히는 구원의 빛이고, 하느님을 아는 신앙의 여정을 밝히는 ‘생명의 빛’이십니다. 새해는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 탄생 200주년 희년’인 동시에 ‘성 요셉의 해’입니다. 주님의 현존을 믿고, 그리스도의 향기를 갈망하며, ‘세상의 빛’이신 주님을 따라 그리스도인답게 사랑의 삶을 살게 해 주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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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창선 요한 세례자 가톨릭영성독서지도사
2021년 1월 1일 가톨릭신문에서
  | 12.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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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현 대축일을 가리킬 때 흔히 사용하는 말마디
‘에피파니Epiphany’는 그리스 말에서 유래되어
“보여주다(to show)”,
“알게 하다(to make known)”
또는 “계시하다(to reveal)”를 의미한다.

공현 대축일은 동방 교회에서 시작되었다.
동방 교회에서는 이 축일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세례를 받으실 때
메시아이자 삼위일체의 두 번째 위격으로 드러나심을 강조하면서
삼위일체의 초자연적인 계시를 강조하고,
가톨릭교회에서는 이방인들이었던 동방 박사들이
아기 예수님을 방문하고 경배하면서
이를 통해 예수님께서
당신을 왕이요 주님으로 “계시”하신다는 점을 강조하고자 한다.
동방 교회가 공현 대축일에 강조를 두는 듯하고,
가톨릭교회는 성탄 대축일을 강조하는 듯이 보이지만
공현 대축일 역시 같은 비중으로 강조하려 한다.

이 축일을 ‘테오파니Theophany’라고도 하는데
이 낱말 역시 그리스어에서
‘하느님께서 나타나시다(자신을 드러내시다)’를 뜻하는 말에서 기원한다.
이 말은 ‘θεοφάνεια(theopháneia)’에서 파생되며,
‘θεός(theós)’는 ‘하느님’, ‘φαίνω(phainō)’는 ‘나타난다’는 뜻이다.

굳이 구분하여 말할 때 ‘Epiphany’가
‘사람으로 나타나신 하느님’이라면,
‘Theophany’는 ‘하느님의 나타나심’ 정도이다.

이를 바오로 사도는 한 마디로
“모든 사람에게 구원을 가져다주는
하느님의 은총이 나타났습니다”(티토 2,11)라고 표현하는데,
이 구절은 예수 성탄 대축일 밤 미사와
주님 공현 대축일 전례문에 모두 사용된다.

어떻든 공현 대축일은 예수님께서 당신을 구세주로 “계시”하시면서
온 세상 사람들에게 다가가고자 하는
교회의 사명에 초점을 맞추어야 하는 축일임도 잊지 말아야 한다.

복음은 예수님의 탄생과 죽음에
“유다인들의 임금”이라는 같은 칭호를 기록한다.

탄생 시에 알려지는 칭호는
오늘 복음에서 동방에서 온 박사들이 처음 사용한 것을
예루살렘의 수석 사제들과 율법 학자들이 반복한다.

예수님의 죽음에서는
당시 로마 총독이었던 빌라도가 붙여 달게 했다는
“유다인들의 임금 나자렛 사람 예수”라는 명패인데
(참조. 마르 15,26과 병행구 및 요한 19,19),
이는 군사들이 조롱하기 위해 사용하였으며
(참조. 마르 15,18 마태 27,29 요한 19,3),
야만적인 십자가 형의 처참한 형장에서
“많은 유다인이 그 명패를 읽게 되었다.”
(요한 19,20)

이처럼 예수님의 탄생과 십자가의 죽음에 같은 ‘계시’가 드러난다.
인간은 하느님을 찾거나 하느님을 거부하는 데에,
아니 어쩌면 희망 속에 좋은 믿음을 갖는 데에서나
믿음을 버리고 폭력과 악을 선택하는 데에 같은 내용을 사용하기도 한다.

1. “동방에서 박사들이 예루살렘에 와서”(마태오 2장 1절-12절 참조)

주님 공현 대축일의 복음으로서 예수님의 정체가 이스라엘 백성들만이 아니라 이방인에게까지 공공연하게 드러나는 과정을 묘사한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백성인 유다인들의 임금으로 태어나셨으면서 아울러 세상 모든 이가 찾아가 경배해야 할 임금이시라는 특별하고도 결정적인 의미를 담는다. 마태오가 전해주는 오늘 복음은 역사적인 사건이면서도 복음을 기록하는 복음사가의 믿음을 그 안에 담았다.

평범한 한 시골 장인匠人인 요셉과 그의 아내인 마리아로 구성된 보통 가정에서, 그것도 형편이 옹색한 “유다 베들레헴” 외곽에 양들을 비롯한 동물들을 가두어두기 위한 헛간에서 한 아기가 태어난다.

그런데 멀리 “동방에서 박사들이 (그들의 오랜 탐구와 지혜에 따라 인도되어) 예루살렘에 와서”(마태 2,1) 자기들의 추구와 기다림의 완성을 확인하면서 단순한 한 아기의 탄생을 목격한다.

박사들은 기나긴 여행 끝에 도달한 곳의 언어나 관습을 몰랐고 구약성경도 그리 잘 알지 못한 처지였다고 할 수 있다. 그들은 “유다인들의 임금으로 태어나신 분이 어디 계십니까? 우리는 동방에서 그분의 별을 보고 그분께 경배하러 왔습니다.”(마태 2,2) 하며 당시 현지의 왕인 헤로데에게 새로운 왕에 관해 물어볼 만큼 순진하고 단순하다.

박사들은 그저 갈망하고 기다리며 찾아 헤맨 새로운 왕에 관한 생각만으로 가득한 사람들이었다. 시대와 역사, 문화를 막론하고 진실한 인간은 자기들이 진정으로 바라는 것과는 모순되더라도 선善을 추구하고 갈망하려는 공통점을 갖는다. 인간 존재는 선, 충만한 삶, 평화를 찾는 내면의 불꽃을 지닌다.

그리고 이러한 내면의 열정은 현재 내가 살고 있는 뭔가가 불충분한 이 땅을 벗어나 불꽃의 인도를 받아 먼 길을 떠나도록 부추긴다. 이를 위해 길을 떠난 인간은 “별을 따라” 온 동방 박사들처럼 하늘, 땅, 바다, 온갖 생물이나 사물들과 교감하며 신호를 찾고 표징을 구한다.

동방 박사들은 긴 순례길에서,
특히 마음과 정신의 순례길,
‘머리에서 마음에 이르는’ 순례길(고故 김수환 추기경님의 표현)에서,
별을 보았고, 사막의 모래들을 보았으며,
길을 동반해주는 동물들을 보았고,
일상을 위한 보따리들을 보았으며,
나름대로 최선을 다해 준비한 선물들을 보고 또 보았을 것이다.

멀리 지평선을 응시하는 사람들에게는
늘 별이 떠오르는 법이어서 동방 박사들은 “별을 따라” 왔다.
그렇게 동방 박사들은 해가 뜨는 곳,
“동방에서(ἀπὸ ἀνατολῶν, apò anatolôn)”부터
“세상의 중심”이요
“한가운데”이며
“아름답게 솟아오른 산”
(참조. 에제키엘 예언서 5장 5절 : 38장 12절 / 시편 48,3),
세상의 배꼽(ὀμφᾰλός, omphalos)이라 생각하던 예루살렘에 왔다.

박사들은 유다인의 왕이면서
자기들의 새로운 왕의 탄생을 아직 가늠도 하지 못한
헤로데에게 “유다인들의 임금으로 태어나신 분”을 묻는다.

2. “헤로데…유다 베들레헴”(마태오 2장 1절-12절 참조)

박사들의 질문을 “듣고 헤로데 임금을 비롯하여
(성전의 사제들이나 수석 사제들,
율법 학자들, 성경 전문가들을 막론하고)
온 예루살렘이 깜짝 놀랐다.”(마태오 2,3)

마땅히 알았어야 할 사람들이 알지 못한 상태에서,
“백성의 수석 사제들과 율법 학자들”이
연구 끝에 성경 말씀(미카 5,1 2사무 5,2)에 따라 “유다 베들레헴입니다. 사실 예언자가 이렇게 기록해 놓았습니다. ‘유다 땅 베들레헴아 너는 유다의 주요 고을 가운데 결코 가장 작은 고을이 아니다. 너에게서 통치자가 나와 내 백성 이스라엘을 보살피리라.’”(마태 2,5-6)라고 보고한다. 보고하는 이나 보고를 받는 이나 분명하고 확실한 내용을 접하지만, 그들 모두 근본적으로 정확한 상황에 대해서는 여전히 눈이 멀고 귀가 들리지 않는 상태였다.

이는 오늘날도 마찬가지이다.
성경 말씀과 하느님의 목소리를 인용하고 설명할 수 있으며
나아가 다른 이에게 가르치기까지 할 수 있으나
여전히 귀먹고 눈먼 상태에 있는 사람들이 많다.

이는 “마음이 완고”(마태 19,8 마르 3,5;6,52;10,5)한 때문이다.
하느님의 활동과 현존을
알아차리지 못하는 완고함
(스클레로카르디아, σκληροκαρδία, sklerokardía)으로
식별과 분별의 눈과 귀가 막혔기 때문이다.

동방 박사들의 방문과 질문은 정치 권력의 대표자와 온 예루살렘을 “깜짝 놀라게” 하며 불안과 혼란을 빚는다. 하나의 정치 권력은 또 다른 정치 권력이 등장할 때 두려워하고 위협을 느끼기 때문이다.

사실 이 혼란과 불안은 아기의 탄생인 이때로부터 그 아기가 유다인의 왕으로서 자주색 망토를 걸치고 갈대로 지휘봉을 들며 머리에 가시로 된 왕관을 쓴 채 온갖 조롱과 멸시 속에 발가벗겨져 십자가 위에서 처참하게 죽어갈 때까지 계속된다. 몹시 불안했던 “헤로데는 박사들을 몰래 불러 별이 나타난 시간을 정확히 알아내고서는, 그들을 베들레헴으로 보내면서 말하였다.

‘가서 그 아기에 관하여 잘 알아보시오.
그리고 그 아기를 찾거든 나에게 알려주시오,
나도 가서 경배하겠소.’”(마태 2,8) 하며 자신을 감추고 거짓말을 한다.

한 생명의 탄생과 그 생명을 죽이려는 힘의 통치가 충돌한다.
헤로데는 박사들을 회유하여 그들이 지녔던 본래의 여행 목적과 바람을 저버리도록 유도하여 새로운 생명의 가능성을 없애고 미래를 바꾸려고 시도한다. 극명하게 대비를 이루는 이 이야기의 중심에는 박사들이 “더 없이 기뻐하였다.”(마태 2,10)는 기쁨의 아기가 있다. 그러나 헤로데는 모든 이에게 미칠 이 ‘기쁨’이 두려웠다.

오늘날 우리 사회와 문화는
모든 이에게 가장 큰 ‘기쁨’이 될 인간의 생명이
점점 더 두려워지는 세상을 산다.
우리는 생명을 보존하고, 키우며, 축복하고,
이 위대한 하느님의 선물에 감사하는 삶을 다시 살아야만 한다.

3. “엎드려 겸배…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예물로 드렸다”(마태오 2장 1절-12절 참조)

유다인들의 성경을 듣고 그 말씀에 순명하며 그 성경 말씀의 인도를 따라 동방 박사들은 “(다시) 길을 떠났다.” “그러자 동방에서 본 별이 그들을 앞서가다가, 아기가 있는 곳 위에 이르러 멈추었다. 그들은 그 별을 보고 더없이 기뻐하였다.”(마태 2,9-10) 박사들은 “(별이 멈춘) 그 집에 들어가 어머니 마리아와 함께 있는 아기를 보고 땅에 엎드려 경배하였다. 또 보물 상자를 열고 아기에게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예물로 드렸다.”(마태 2,11)

박사들은 자기들이 꿈꾸고 기다렸던 것과 사뭇 다른 상황을 맞는다. 왕의 탄생에 걸맞은 궁궐이나 화려함이 아니며 초라하기 그지없고 전혀 예측하지 못했던 헛간에서 어머니와 가난한 한 아기의 탄생을 만난다.

동방 박사들은 마음으로부터 불타올라 약속을 향해 나아가도록 그들을 부추기고 몰아붙이며 안절부절못하게 했던 불꽃을 따라 “하늘의 별”에 의지했고, 예상하지 못했으나 세상이 반드시 알아모셔야만 할 상황을 깨우쳤으며, 알 수 없는 것을 밝혀주시고 인도해주시는 성경의 인도라는 세 표징에 성실히 순명했다. 세 가지 표징을 따랐던 이들이 세 가지 예물을 드린다.

박사들은 이방인이었지만 마음과 정신을 바꾼, 어떤 의미에서 ‘개종자’가 되어 참 왕권과 거짓 왕권을 식별하고, 웅변적인 말은커녕 한마디도 할 줄 모르는 하염없이 약하고 어린 아기의 인간적인 연약함에도 불구하고 강하고도 보편적인 왕권을 지니신 그분을 진정으로 알아모신다. 이방인 박사들은 성경이나 계시의 직접적인 대상이 아니었음에도 그분을 알아모시는 믿음에 이른다.

이렇게 유다인들과 이방 백성들에게 메시아에 관한 계시가 드러난다. 이 세상의 세속적인 권력과 힘의 왕이 아니라 연약하고 작은 한 아기의 미소함 안에서 비로소 예수님의 진정한 왕권과 그분의 정체를 이해하게 된다. “별을 보고…아기를 보고…”라 하는데, 같은 내용을 두고 루카복음은 예수님을 ‘본다(관상觀想, contemplation, theoría)’는 것이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참조. 루카 23,48)을 본다는 것이라 하고, 요한복음은 예수님을 믿는 믿음에로 인도하는 바라봄이란 예수님을 땅에 떨어진 씨앗(참조. 요한 12,24)으로 보는 것이라 한다.

예수님을 만나 이방인 박사들은 예수님을 ‘알아보고’ “엎드려 경배”하며 “황금, 유향, 몰약”이라는 “예물”을 드린다. 자기들 고장에서 나오는 귀한 예물, 그곳의 백성들과 문화가 오랜 세월에 걸쳐 빚어낸 귀한 선물을 드린다.

마태오복음 맨 마지막 장 마지막 절에서 부활하신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들을 제자로 삼아…”(마태 28,19) 하실 것인데, 예수님께서는 몸소 이미 이 장면에서 여기 동방 박사들을 제자로 삼으신다.

박사들은 마태오복음이 전하는 바에 따라 예수님을 알아 모시고 예수님의 제자들이 된 첫 번째 이방인들이다. 이러한 박사들을 두고 마태오 복음사가가 오늘 복음의 마지막 구절에서 “그들은 꿈에 헤로데에게 돌아가지 말라는 지시를 받고, 다른 길로 자기 고장에 돌아갔다.”(마태 2,12)라고 기록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다른 길로 자기 고장에…”라 한다.
이방인이었음에도 이미 “다른 길”에 들어선 이들이 된 박사들이
“자기 고장에” 돌아간다.
진지하게 진리를 추구하는 이들은
예수님의 제자가 되어 곧 길을 나선다.
동방 박사들도 “다른 길로 (바로) 자기 고장에 돌아갔다.”

베들레헴에서 나신 “유다인들의 임금”이신 분의 ‘공현公顯’ 앞에서 사람들은 이미 두 편으로 갈린다. 한편에서 이방인이었음에도 그분을 알아모시고 경배하는 사람들, 약속의 자녀요 후손들이었음에도 그분을 알아모시지 못하는 사람들이다.

동서고금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동방 박사들처럼 선善을 추구하고 찾는 사람들, 그것에 사명감을 느끼고 일생을 바쳐 헌신하는 사람들, 그것이 인간답게 사는 길이요 더 나은 인간으로 사는 길이라며 기나긴 길을 묵묵히 걸어가는 사람들이 있다.

세상에 오는 모든 아기도 그들이 알든 모르든 임금과 같은 존엄으로 경배받아야만 마땅하다. 그들은 우리의 형제요 자매로서 우리가 지닌 “황금(소유)”, 우리가 내뿜는 향기로운 “유향(현존)”, 우리가 바쳐야만 하는 “몰약(희생)”을 예물로 받아야만 한다.

그것이 사랑으로 오시어 작은 아기가 되신 분이 당신을 희생하여 우리에게 알리고자 하신 공현의 뜻이었다. 그런 의미로 주님의 공현은 그리스도인이든 비그리스도인이든 모든 인간의 진정한 왕적王的 존엄성과 신분을 밝힌다.

세상 모든 임금 중의 임금, 우주의 임금이시고 메시아이신 그분께서 사람이 되어 오시고 이렇게 당신을 드러내신 까닭이 ‘내가 너희를 사랑한다’ 하시기 위함이고, ‘내가 너희를 위해 내 목숨을 바친다’ 하시기 위함이며, 그러니 ‘너희도 그렇게 서로 사랑해야 한다’ 하시기 위함이기 때문이다.

프랑스의 가톨릭 작가였던
조르주 베르나노스Georges Bernanos(1888~1948년)는
오늘 우리가 지내는 이 공현 대축일에 관해 다음과 같이 쓴다.
『처음부터 나의 교회는 오늘과 같았고
세상 끝날까지도 강한 자들에게는 문제요
약자들에게는 실망일 것이며
나 자신 외에는 그 무엇도 찾지 않는
내면의 영혼에는 시련과 위안일 것이다.
…그렇다.
…누구든 거기에서 나를 찾는 자 그곳에서 나를 찾을 것이지만,
반드시 ‘찾아야만’ 할 것이니
이는 내가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잘 숨어있기 때문이며,
나의 사제들이 당신을 믿게 하는 것보다도 더 잘 숨어있기 때문이다.
나는 여전히 발견하기가 쉽지 않을 것이니
목자들이나 동방 박사들이 겸손하게
베들레헴의 왜소한 마구간의 나를 찾았듯이
그렇게 그들의 발자취를 따라서 나를 찾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이다.
…나를 기리고자 수많은 왕궁이 지어졌고,
수를 셀 수도 없는 갤러리와 회랑들이 생겨났으며,
밤낮으로 화려하게 조명을 비추고 관리하는 이들이
끊임없이 그곳들을 지키고도 있다.
하지만, 진정 나를 찾고자 한다면 옛 유다의 길,
눈 덮인 길에서, 별과 순수한 마음만을 청하는 것이
더욱 현명한 일일 것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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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 벤지
2022년 1월 2일
  | 12.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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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방박사처럼 참 빛을 증언하는 삶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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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방에서 박사들이 별의 인도로
아기 예수님께 경배하러 온 것을 기념하는 ‘주님 공현 대축일’입니다.
인류의 빛이요 구세주이신 그리스도의 탄생이 세상에 드러났습니다.
아기 예수님의 거룩한 빛이 우리 마음을 밝혀
성탄의 기쁨을 새롭게 하고 주님께 맞갖은 예물을 드리며
빛을 증언하는 삶을 살아가기로 다짐해봅니다.

마태오 복음사가만이 전하는 동방박사들의 예루살렘 방문 이야기는 예수님 성탄의 특별한 기원과 신학적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그들의 출신지와 방문자의 수는 복음에 나와 있지는 않지만 아기 예수님께 경배를 드리러 온 그들의 지위와 품격에 비추어 강생의 신비와 구원의 보편성이 드러납니다.

동방 ‘박사’(Magi, 현자)의 일화는 구약성경에 이민족 왕들이 메시아격인 왕에게 선물을 가져오거나 축복한 전승과 맥락을 같이합니다. 이스라엘을 축복하는 발라암(Balaam)의 신탁(민수 23장), 스바 여왕의 솔로몬 방문(1열왕 10장), 아라비아와 스바 왕들의 조공(시편 72)이 대표적인 예입니다. ‘박사’는 고대 메디아(카스피 해 남부왕국)와 페르시아 제국(이란과 이락)의 통치자에게 정치와 종교의 자문역을 수행하던 고위직입니다. 로마제국주의에 반대하던 그들은 새 ‘유다의 왕’이 등장하여 동방 왕권을 회복한다는 소망을 간직했습니다.

그들이 예루살렘에 와서 “유다인들의 임금으로 태어나신 분이 어디 계십니까? 우리는 동방에서 그분의 별을 보고 경배하러 왔습니다”(마태 2,2) 하고 묻습니다. 당시 헤로데(안티파스) 임금을 비롯하여 온 예루살렘이 당혹감을 감추지 못합니다. 헤로데는 수석사제들과 율법학자들을 불러 메시아가 태어날 곳을 묻습니다. 예언서(미카 5,1)에는 유다 땅 ‘베들레헴’이라고 적혀있습니다. 베들레헴은 예루살렘 남서쪽 약 10㎞에 ‘하느님의 집’으로 알려진 작은 고을로 다윗 왕의 출생지이기도 합니다.

별을 보고 먼 길을 온 동방 박사들이 새 임금을 찾는다는 말에 위협을 느낀 헤로데 안티파스는 박사들을 은밀히 불러 별이 나타난 시간을 알아보고, 베들레헴으로 보내면서 아기의 처소를 비롯해 자세히 알아보라(마태 2,7-8)고 부탁합니다. 명예를 소중히 여기는 중동사회에서 비밀리에 조사를 한다는 것은 수치요 위협적인 음모입니다.

계시를 받은 박사들은 그의 위선에 말려들지 않습니다. 헤로데는 박사들에게 속은 것에 분노하여 무고한 사내아이들을 살해(마태 2,16)하는 끔찍한 만행을 저지릅니다.

별이 앞서가다가 ‘포대기에 싸여 구유에 누워있는 아기’가 있는 곳에 멈춥니다. 박사들은 모든 민족들의 대표로 아기 예수님께 경배를 드립니다. 지위가 높은 사람이 경배를 드린다는 것은 ‘지극히 높은 분’에게 경의를 표하는 것입니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왕권과 신성과 인성을 상징하는 ‘황금과 유향과 몰약’의 세 가지 선물을 드립니다. 예수님의 성탄으로 이스라엘의 역사에 새 희망이 이루어진 사실을 유다인은 발견하지 못했지만 이방인들은 하느님의 현존을 분명히 인식했습니다.

제1독서에서 이사야 예언자는 예루살렘을 향해 “일어나 비추어라. 너의 빛이 왔다. 주님의 영광이 네 위에 떠올랐다”(이사 60,1)고 선포하고, 모든 민족들이 그 빛을 향하여 모여든다고 전합니다. 예루살렘은 지리적으로는 팔레스타인 산악지대의 꼭대기에 위치해 있지만, 신앙인들에게는 성전이 있는 ‘거룩한 도성’이요 충실한 믿음의 상징입니다.

사도 바오로는 제2독서 말씀에서 성령을 통해 사도들과 예언자들에게 그리스도의 신비가 계시되었음을 고백합니다. “다른 민족들도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복음을 통하여 한 몸의 지체가 되고 약속의 공동상속자가 된다”(에페 3,6)는 말씀을 전합니다. 이 신비가 믿음에서 믿음으로 이어져 주님께서는 이제 우리의 일상생활에 현존하십니다.

주님 공현은 앞으로 세례축일과 가나의 혼인잔치로 이어집니다. 교회 전례를 통해 예수님의 신성이 이민족에게 드러난 동방박사들의 방문, 이스라엘 백성에게 드러난 주님 세례, 교회에 드러난 가나의 혼인잔치의 역사적 사건을 경축합니다. 모든 민족들이 예수님을 믿고 섬기도록 이끄시는 하느님의 완전한 계획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당신의 제자들에게 모든 민족들에게 나아가 세례를 주라는 사명을 부여하심(마태 28,19)과 괘를 같이합니다.

우리는 물과 성령으로 세례를 받은 빛의 자녀요 성체를 모시는 그리스도의 지체입니다. 구원의 역사는 혼인잔치에 신부인 교회를 통하여 계속됩니다. 하느님의 현존은 갈망하는 사람에게 사명의 길을 열어줍니다. 별을 바라보고 진리를 탐구한 동방박사들은 별의 인도로 아기 예수님을 발견했습니다. 지금은 별빛보다 강한 태양이 우리를 비추고 있습니다.

아기 예수님이 어디에 계십니까?
‘빵의 집’인 베들레헴입니다.
성체를 모시는 그리스도인들 내면의 성전에 함께 하십니다.
빛의 자녀가 ‘빛에서 나신 빛’이신 그리스도의 몸을 모시니 더없이 기쁩니다.
별이 비추는 베들레헴은 이제 더 이상 작은 집이 아닙니다.
참 빛으로 구유에 오신 아기 예수님께서 경배를 드립니다.
모두가 한 마음 한 형제로 사랑의 공동체를 이루도록
선교의 깃발을 높이 드는 것이 주님께 드리는 예물입니다.

주님께서 함께하십니다.
위선과 두려움을 뿌리치고 새 복음화의 길로 나아갈 사명이 주어졌습니다.
새해도 빛 속을 성실히 걸으며 부활하신 주님을 증언하는
제자의 삶을 살아갈 때 강생의 신비가 드러납니다.
이 길은 인간의 말과 지혜가 아니라
가난한 이웃에게 자비의 손길과 형제애를 나누는 애덕의 실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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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창선 요한 세례자 : 가톨릭영성독서지도사
가톨릭신문 2019년 1월 6일
  | 0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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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금(χρυσὸ̀ν), 유향(λίβανον), 몰약(σμύ́ρνα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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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방박사가 아기 예수님께 바친 선물인,
‘황금’(χρυσὸ̀ν, 크루손)과
‘유향’(λίβανον, 리바논)
그리고 ‘몰약’(σμύ́ρναν, 스무르난)은
그리스도론적의미로 이해됩니다.

「가톨릭 대사전」에는
“‘황금’이 그리스도께서 하늘과 땅의 ‘왕’이심을,
‘유향’은 한 분이신 ‘하느님’을,
‘몰약’은 ‘참사람’이심을 상징한다.”라고 적혀있습니다.

「교부들의 성경 주해」안의 대 그레고리오 교황의 해설을 보면,
“‘황금’은 ‘지혜’(잠언 21,20),
‘유향’은 ‘하느님께 드리는 기도’(시편 141,2),
‘몰약’은 ‘우리 육신의 고행’(아가 5,5)”을 의미한다고 되어 있습니다.

신학자들의 연구 결과에 의하면,
마태오 복음사가가
“모든 왕들이 그 ‘왕’ 앞에 엎드리고 만백성이 그를 섬기며
‘황금’을 예물로 바치게되리라.”(시편 72,10-15)와
“모든 민족과 왕들이 메시아의 ‘빛’을 보고 모여 들며
‘황금’과 ‘유향’을 그에게 바치게 되리라.”(이사 60,1-6)는
내용의 영향을 받았다고 봅니다.
즉 새로 태어나실 ‘왕’은 온 세상의 왕이시며
모든 민족과 제왕들의 경배를 받아 마땅하신 분이라는 것입니다.

한편 ‘몰약’과 관련해서는
“그들이 몰약을 탄 포도주를 예수님께 건넸지만
그분께서는 받지 않으셨다.”(마르 15,23)라는 구절과 연계시킵니다.
여기서 포도주에 탄 몰약은 고통을 없애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그것을 마시지 않았다는 것은
고통을 덜어주는 그 어떠한 것도 받아들이기를 거부하셨음을 의미합니다.
이는 예수님께서 이 세상을 위해서
스스로 고난을 받아들이셨음을 알려주는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세 가지 선물’은
아기 예수님이 온 세상의 진정한 왕이시며 경배 받아 마땅한 분일뿐만 아니라
이 세상을 위해서 스스로 고난의 길을 가심으로써
이 세상을 구원하실 분이심을 알려주는 것이라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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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수완 로마노 교수
수원교구 주보 2019년 1월 6일 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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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독서(이사야 예언서 60장 1절-6절)는
주님의 빛으로 말미암아 달라질 예루살렘의 미래를 말해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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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흑 같던 유배생활(50년)을 마치고
예루살렘으로 돌아온 이들에게 주님의 빛이 비추고,
주님의 영광이 떠올랐다고 합니다.

이제 빛과 영광이 가져다주는 밝음과 기쁨으로 말미암아
유다인들이 자유롭게 하느님을 찬미하면서
살 수 있게 되었습니다(이사야 예언서 60장-62장).

하느님께서 유배를 벗어나게 해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언자는 예루살렘에게 새로운 시작을 알리면서
모두 일어나 주님의 빛을 받아 세상에 반사시키라고 합니다.

하느님의 빛이 예루살렘을 비출 때
그 빛으로 말미암아 한쪽에는 어둠이 짙게 깔릴 것입니다.
빛이 밝으면 그만큼 어둠이 짙게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때가 되면 영원하고 큰 빛이신(이사야 예언서 9장 1절)
구세주를 찬미하는 이들과
그렇지 않은 이들이 명확하게 드러날 것입니다.

하느님의 영광이 떠오르면서 가나안 땅의 중심,
예루살렘에 많은 이들이 교역을 위해 모여들 것입니다.

새로운 성전을 세우고 예루살렘을 재건하게 되면
마치 솔로몬의 시대처럼
사방에서 많은 나라의 임금들이
주님의 영광과 구원의 빛을 보기 위해
모여들 것이라고 합니다
(즈카르야 에언서 8장 20절-22절 / 시편 102장 13절).
초기교회는 일찍부터 이 말씀을 예수님의 탄생으로
구원의 빛이 세상에 비춰지고,
하느님의 영광이 드러났음을
예언하는 것으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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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마태오 2장 1절-12절)은
이방인들을 통하여 구세주께서 공적으로 드러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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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윗의 후손에게서 구세주가 나셨음을 말한 뒤에
복음은 즉시 이방인들과의 관계를 말합니다.

천문학자들인 듯한 이방인들이 동방에서부터
별을 따라 예루살렘까지 와서
“유다인들의 임금으로 태어나신 분”께 경배하러 왔다고 합니다.

이들을 인도한 별은 야곱 집안에서
일어나는 왕권(민수기 24장 17절)을 뜻하지만,
중요한 것은 자기들 마음속에서 솟구치는 하느님께로 향한 갈망이며,
이보다 훨씬 더 중요한 것은
하느님의 이끄심(부르심)이었습니다.

더욱 결정적인 것은
구세주 하느님을 찾을 수밖에 없는 인간의 운명을 말해줍니다.

베들레헴의 밤을 지키던 목동들뿐만 아니라
최고 권력가들과 지식인들까지
모두 별이 가리키는 아기 예수님께 경배하기 위해
얼굴을 땅에 대리라
(이사야 예언서 49장 23절)고 했던 예언이 이루어진 것입니다.

동방박사들은 자기들을 인도하던 별이 아기가 있는 곳에 멈추자,
그 별(아기 예수님)을 보고 더없이 기뻐하였다고 합니다.

“어둠 속을 걷던 백성이 큰 빛을 본다.
암흑의 땅에 사는 이들에게 빛이 비친다.”
(이사야 에언서 9장 1절)고 했듯이,
어둠이 짙었기 때문에 자기들을 비치던 빛은
(요한 1장 5절)
더욱 뚜렷이 드러났을 것입니다.

별빛을 따라온 동방박사(이방인)들은
“모든 사람을 비추는 참빛”(요한 1장 9절)이신 예수님을 뵌 것입니다.

별빛을 따라가던 동방박사들은
예루살렘에 있는 유다인들의 가짜 임금 헤로데와
베들레헴에 계신 진정한 임금 아기 예수님을 차례로 만납니다.

이 만남에서 예수님을 죽이려는 명목으로
두 살 이하의 모든 아이들까지 죽이려는
헤로데의 간계
(마태오 2장 16절-18절 / 사도행전 7장 19절)와
동방 박사들이 아기 예수님께 경배를 드리고 돌아간 뒤
이집트로 피신하라는 천사들의 지시
(마태오 2장 13절-15절)를 통한
하느님의 섭리가 함께 드러납니다.

모든 것의 중심이라 여겼던 예루살렘과
이 도시를 위한 초라한 빵집들이
즐비한 마을(베들레헴)의 대립이 시작됩니다
(사무엘기 하권 5장 2절
이사야 에언서 7장 14절-17절 / 미카 에언서 5장 1절 참조).

동방박사들이 헤로데를 만날 때는 화려한 왕궁,
진수성찬, 로마 병정들의 도열, 대신들의 배석,
그리고 황금의자에 자주색 옷을 입고 앉아서
권세를 과시하는 거만한 태도를 보았을 것입니다.

반면에 참된 임금이신 아기 예수님을 찾아온 동방박사들은
마구간에서 도열한 의장대가 아니라 동물들을,
대신들이 아니라
아기를 돌보던 초라한 모습의 요셉과 마리아를 보았을 뿐이었습니다.
왕궁의 황금의자가 아니라 초라한 구유,
자주색 옷의 왕이 아니라
허름한 포대기에 싸여있는 연약한 아기뿐이었습니다.

“경배하다”(προσ-κυνέω: ~에게+입맞추다)라는 말이 반복되면서
헤로데와 예수님의 대립,
그리고 헤로데와 박사들의 갈등이 조금씩 드러납니다.

구세주를 뵈려는 열정으로 별빛을 따라온
동방박사들의 진정한 경배와
박사들을 따라서 하겠다는 헤로데의 거짓 경배가 맞섭니다.

경배하러 가야하기 때문에 무너지는
예루살렘의 깜짝 놀란 왕권과 경배를 받기 때문에
“더없이 기뻐할” 베들레헴의 왕권이 비교됩니다.

동방박사들은 별빛이 멈추는 곳에서 기뻐했다고 하듯이,
진정한 기쁨의 원천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임을 말해줍니다.
구유에 누워계신 아기를 구세주로 믿고,
극진한 정성으로 땅에 엎드려 경배하고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선물로 드리고 떠납니다.

구세주의 탄생을 두려워하던 헤로데의 부탁을
들어주지 말라는 꿈의 지시를 받은
동방박사들은 다른, 길로 돌아갔습니다.

예수님의 탄생지를 알려준다면 경배하겠다는 헤로데의 말은
세속 권력에 의한 보상의 약속이었음에도
동방박사들은 전혀 다른 새로운 길로 돌아갔습니다.

동방박사들이 구세주를 찾기 위해
온전히 하늘의 별빛(요한 1장 9절)에만 의존했듯이
우리도 하느님을 만나려면(체험하려면)
오로지 빛이신 그리스도께만 의존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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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독서(에페소서 3장 2절.3ㄴ절.5절-6절)는
계시를 통해 드러난 하느님의 신비를 선포하라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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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오로는 성령을 통하여 자신에게 주어진 계시이며,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풍요로운 그리스도의 신비
(에페소서 3장 4절.8절)는 물론
성경에 드러난 구원계획을 정확하게 알았기 때문에
이 모든 것들을 기쁜 소식으로 받아들였습니다.

이뿐만 아니라 “하느님 안에 감추어져 있던
그 신비의 계획이 어떠한 것인지
모든 사람에게 밝혀 주는”
(에페소서 3장 9절)
은총의 직무를 받았으므로
충실히 수행할 수밖에 없음을 말합니다.
그리스도의 신비는 이미 예언자들을 통하여 선포되었고,
복음을 통하여 드러났고,
성령을 통하여 사도들에게는 물론 자신에게도 주어진
은총의 직무를 통해 선포됩니다.

바오로는 유다인만이 아니라 다른 민족들도 복음을 통하여
구원의 공동 상속자, 은총의 공동 수혜자가 될 수 있도록
복음을 선포하는 것입니다.
복음을 선포해야 하는 은총의 직무는
오늘날 우리에게도 주어진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모두는 “복음의 일꾼”입니다
(에페소서 3장 7절).

새로운 한 해를 시작하면서 우리들의 계획 속에
예수님께 드릴 선물이 반드시 포함되어 있어야 하겠습니다.

성경을 읽으면서 주님을 만나 뵘으로써 받게 되는
그리스도의 빛으로 우리의 마음이 즐거워서 기쁨이 넘치고,
얼굴에 부끄러움이 없어지면서
우리의 삶이 밝아진다면
(시편 34장 6절 / 잠언서 15장 13절 / 집회서 13장 26절)
우리도 역시 그분께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선물로 드리면서 경배하는 것입니다.

경배는 섬기기 위해 “엎드려 절하고”
(사무엘기 상권 25장 23절 / 시편 45장 12절),
“무릎을 꿇고”
(루카 22장 41절 / 사도행전 20장 36절),
굴복한다
(루카 4장 7절-8절)는 뜻도 있지만,
뜨거운 사랑으로 예수님께 입을 맞춘다(아가서 1장 2절)는 것입니다.

동방박사들이 가져온 황금은 예수님께서 임금이심을,
몰약은 예수님의 인성과 죽음
(마르코 15장 23절 / 요한 19장 39절)을,
유향은 예수님께서 영원한 사제이심을 상징합니다.
동시에 황금은 이성적 지혜와 믿음을 뜻하고,
유향은 기도와 사랑을 표현하며,
몰약은 절제와 희망으로 이해합니다.

한편 황금은 가난한 예수님의 부모를 위해서,
유향은 마구간의 악취를 제거하기 위해서,
몰약은 어린 아기의 건강을 위해서 봉헌된 선물입니다.

갈라지지 않는 마음으로,
자유로운 결단으로 주님을 믿는다면
우리도 역시 황금을 예수님께 드리는 것입니다.

덕을 많이 쌓았기 때문에
우리 삶에서 사랑이 넘쳐흐르고
(티모테오 1서 1장 5절)
그리스도의 향기가 피어오른다면
(코린토 2서 2장 15절)
우리도 역시 그분께 유향을 선물로 드리는 것입니다.

예언자들과 사도들을 통하여 기록된 계시 때문에
하느님의 신비를 알게 되었고,
주님께서 약속해주신 상속의 몫을 차지할 것을 깨닫고
성실하게 봉사하게 살아간다면
(에페소서 3장 2절.3ㄴ절.5절-6절)
우리도 역시 그분께 몰약을 선물로 드리는 것입니다.

지금은 별이 아니라 말씀을 통하여
예수님께서 항상 우리에게 당신을 드러내십니다.

주님께 경배를 드리려면(입을 맞추려면),
예수님(말씀)께 대한 뜨거운 사랑과 열정이 있어야 합니다.
동방박사들이 긴 여정의 끝에서 주님을 만나 뵈었듯이,
우리도 주님을 기쁨으로 맞으려면
주님께서 원하시는 새로운 길을 걸어가야 합니다.

동방박사들이 험란하고 굽은 길을 걸으면서
온갖 야생동물의 위협을 뚫고 오로지 별을 따라올 수 있었던 것은
어두운 밤에만 드러나는 별빛이 가져다주는
구원의 의미에 대한 깨달음 때문이었습니다.

빛에 대한 믿음으로 시련(밤길)을 견뎌낸다면,
별보다 더 밝은 “참빛”이신 예수님께 경배를 드릴 수 있음에
감사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 경배를 드리면서 받은 빛을
우리도 이웃에게 반사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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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방효익 바오로 신부
2022년 1월 2일
  | 01.01
505 7.6%
부르심과 응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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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방에서 박사들이 예루살렘에 와서, ‘유다인들의 임금으로 태어나신 분이 어디 계십니까? 우리는 동방에서 그분의 별을 보고 그분께 경배하러 왔습니다.’하고 말하였다. 이 말을 듣고 헤로데 임금을 비롯하여온 예루살렘이 깜짝 놀랐다(마태오 2장 1ㄴ절-3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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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방박사들의 이야기에 대해서 이런 의문들이 생깁니다.

‘그분의 별’을 동방박사들만 보았을까? 밤하늘의 별이 그들의 눈에만 보이고,
다른 사람들의 눈에는 안 보였을까? 그 별을 본 사람들이 많았다면,
그 별의 의미를 해석할 능력이 있었던 사람들이 동방박사들 말고는 없었을까?
아니면, 다른 사람들도 그 별을 알아보았지만 무시한 것일까?
그 별은 정말로 별이었을까? 아니면 상징적인 표현일까?

이런 의문들에 대한 답은 예루살렘 사람들의 반응입니다.

헤로데는 하느님을 안 믿었고, 성경 지식이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니 어떤 표징이 주어져도 알아보지 못할 사람이었습니다.
또는 전혀 관심이 없었을 사람이었습니다.

동방박사들의 말을 듣고 깜짝 놀라기만 하는 것으로 그친 예루살렘 주민들은,
메시아 강생에 대해서 관심이 없었던 사람들,
또는 메시아를 기다리지 않은 사람들이었을 것입니다.
즉 세속 일만 생각하고(먹고사는 일만 생각하고)
영적인 일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었던 사람들이었을 것입니다.

사제들과 율법 학자들은 메시아께서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신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마태오 2장 5절-6절), 메시아께서 태어나셨다는
동방박사들의 말을 듣고서도 아무런 행동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머리’로만, 또는 ‘입술’로만 신앙생활을 하고,
‘삶’으로는 신앙생활을 하지 않았던 사람들입니다.
그러니 그들이 알고 있는 것은 사실상 알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삶으로 실천하지 않는 지식은 ‘아무것도 아닌 것’입니다.

지금까지 한 말을 요약해서, “부르심은 모든 사람에게 주어졌지만,
동방박사들만 응답했다.”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당시에 실제로 어떤 천문학적 현상이 있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진짜 그런 별이 나타났는지, 아니면 별이라고 표현할 수 있는 어떤 표징이
나타났는지, 아니면 천사를
별이라고 표현한 것인지, 확실한 것은 알 수 없습니다.

어떻든 모든 사람이 다 볼 수 있는 어떤 표징이 나타난다고 해서
모든 사람에게 표징이 되는 것은 아니고,
응답할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에게만 표징이 됩니다.
동방박사들은 응답할 준비가 되어 있었고, 응답한 사람들입니다.
유대인이냐, 이방인이냐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주님의 부르심에 응답했느냐, 아니냐가 중요할 뿐입니다.

(신앙인이 부르심에 응답하는 것이 아니라,
부르심에 응답하는 사람이 신앙인입니다.)

이스라엘이 이집트를 탈출했을 때의 일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그때 하느님께서는 ‘눈에 보이는 표징’으로 항상 이스라엘과 함께 계셨습니다.

“주님께서는 그들이 밤낮으로
행진할 수 있도록 그들 앞에 서서 가시며, 낮에는 구름 기둥 속에서 길을 인도하시고, 밤에는 불기둥 속에서 그들을 비추어 주셨다. 낮에는 구름 기둥이, 밤에는 불기둥이 백성 앞을 떠나지 않았다(탈출기 13장 21절-22절).”

그렇게 하느님께서 항상 함께 계셨는데도,
이스라엘은 걸핏하면 하느님을 잊어버렸고, 금방 우상숭배에 빠졌습니다.
하느님께서 함께 계시는 것이 눈에 안 보여서 그랬던 것이 아니라,
마음이 다른 데로 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때에 헤로데는 박사들을 몰래 불러 별이 나타난 시간을 정확히 알아내고서는, 그들을 베들레헴으로 보내면서 말하였다. ‘가서 그 아기에 관하여 잘 알아보시오. 그리고 그 아기를 찾거든 나에게 알려 주시오. 나도 가서 경배하겠소.’ 그들은 임금의 말을 듣고 길을 떠났다. 그러자 동방에서 본 별이 그들을 앞서가다가, 아기가 있는 곳 위에 이르러 멈추었다. 그들은 그 별을 보고 더없이 기뻐하였다. 그리고 그 집에 들어가 어머니 마리아와 함께 있는 아기를 보고 땅에 엎드려 경배하였다. 또 보물 상자를 열고 아기에게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예물로 드렸다. 그들은 꿈에 헤로데에게 돌아가지 말라는 지시를 받고, 다른 길로 자기 고장에 돌아갔다(마태오 2장 7절-12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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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이야기를 겉으로만 보면, 헤로데의 의도가 무엇이었든지 간에 헤로데가
동방박사들을 베들레헴으로 인도해 준 것으로 생각하기가 쉬운데, 그것은 아니고, 하느님께서는 처음부터 동방박사들을 베들레헴으로 인도해 주셨습니다.

그러면 왜 중간에 예루살렘을 거치게 하셨을까?
그것은 예루살렘에(이스라엘에)
‘메시아 강생’이라는 기쁜 소식을 선포하는 사명을 맡기신 것으로 해석됩니다.
또 헤로데를 만나게 하신 것은, 당시의 통치자를 통해서
‘메시아 강생’을 공적으로 확인하게 하신 일로 해석됩니다.

동방박사들이 예수님께 바친 예물 가운데 ‘황금’은 ‘예수님은 우리의
주님이신 분’이라는 것을 상징하고, ‘유향’은 예수님의 사제직을 상징하고,
‘몰약’은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을 상징한다고 해석합니다.

그런데 동방박사들은 예수님에게서 무엇을 받았나?
그들은 예물을 바치기만 하고 ‘빈손’으로 돌아갔나?
아닙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뵙고,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큰 기쁨’과 ‘평화’를 얻었습니다.
동방박사들이 예수님께 바친 예물은 ‘작은 것’이고,
그들이 예수님에게서 받은 기쁨과 평화는 ‘큰 은총’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바친 것만 생각하고, 받은 것은 잊어버릴 때가 많은데,
주님은 언제나 항상 우리가 바친 것보다 훨씬 더 큰 은총을 주시는 분입니다.)

공현 대축일은 단순히 동방박사들이 예수님께 경배한 일을 기념하는 날이 아니라,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오셔서 당신을 드러내신 일을 경축하는 날입니다.

우리가 먼저 예수님을 찾아 나서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먼저 우리를 찾아오십니다.
그 예수님을 우리가 잘 맞아들이는 것이 ‘공현’의 진짜 의미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비뚤어지고 뒤틀린
이 세대에서 허물없는 사람, 순결한 사람, 하느님의 흠 없는 자녀가 되어, 이 세상에서 별처럼 빛날 수 있도록 하십시오(필리피서 2장 15절).”

모든 신앙인은 ‘그분의 별’처럼 이 세상을 비추는 하나의 별이 되어야 합니다.
그것은 자기 자신이 주님에게로 나아가는 일이기도 하고,
다른 사람들을 주님에게로 인도하는 일이기도 합니다.
신앙인답게 살아서 별처럼 빛나는 사람이 되는 것,
그것이 우리에게 오신 예수님을 잘 맞아들이는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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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
2022년 1월 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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