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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위일체 대축일 성경 말씀 해설
조회수 | 150
작성일 | 22.06.08
‘삼위일체이신 하느님과 친교로 사랑의 일치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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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하느님의 축일인 삼위일체(Trinity) 대축일입니다.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을 믿고 고백하는 우리가 이 축일을 맞아 사랑이신 하느님의 자녀요 상속자로 살아간다는 것이 참 행복이기에 주님께 먼저 감사와 찬미를 드립니다. 이 날을 기리면서 성삼위의 하느님은 사랑과 친교와 일치의 근원이심을 알고, 삼위일체이신 하느님께서 이끌어 주시어 교회가 친교로 사랑의 일치를 이루기를 소망합니다.

삼위일체란 용어는 신·구약 성경에 직접 나오는 말은 아닙니다. 구약성경에는 한분이신 하느님에 대한 계시와 구원의 역사가 분명히 기록되어 있습니다. 신약성경은 예수님의 탄생예고와 세례(루카 1,35; 3,22), 하느님과 일치(요한 10,30), 그리고 제자들에게 사명을 부여하실 때(마태 28,19) 성삼위의 신비를 보여줍니다.

천주교 핵심 교리의 하나인 삼위일체에 대한 진리는 초기교회 때 이미 신앙 고백, 교리교육, 세례, 기도문에 반영되어 있었습니다. 세기 초에 삼위일체의 신앙을 왜곡시키는 이단의 오류를 바로잡기 위한 교부들의 줄기찬 논쟁과 신학 연구 및 이를 뒷받침한 공의회(니케아 325년, 콘스탄티노플 381년)의 결실로 삼위일체의 교리가 정립되었습니다. 1334년 요한 22세 교황께서는 교회 전례력에 삼위일체 대축일을 성령 강림 대축일 다음 주일에 기리도록 제정하셨습니다.

세례를 받기 전 교리시간에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에 대해 배운 때를 되돌아봅니다.

“하느님은 성부, 성자, 성령이란 세 위격(位格, three persons)을 지니신 한 분의 본체(本體, one body)시고, 존재(Being) 자체이신 하느님은 위격 면에서는 성부께서는 창조주시고, 성자는 구세주시며, 성부와 성자께서 발하시는 성령은 하느님(진리)의 영이십니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이란 인격체가 이렇게 따로 계시는데 한 분의 하느님이시라는 게 쉽게 이해되지 않았던 게 사실입니다.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은 누구이신지를 알아보겠다고 성직자나 수도자를 만나는 기회에 여쭈어 보기도 했는데, 여기 몇 가지 비유를 옮겨봅니다. 삼위일체는 세 변을 가진 하나의 삼각형, 성 요셉과 성 마리아와 아기 예수님께서 이룬 성가정의 모습, 빛과 열과 광선으로 이루진 태양(불), 아우구스티노 성인의 일화, 삼위일체의 성화에 대한 해설 등이 있습니다. 지금까지 삼위일체에 관한 강의를 들으면서 삼위일체는 머리로 이해되는 것이 아니라 삼위일체의 삶을 살 때 체험을 통해 알게 되는 ‘신앙의 신비’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우리는 ‘성부와 성자,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주일과 대축일 미사 때마다 하느님과 공동체 앞에서 신앙을 고백하며,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총과 하느님의 사랑과 성령의 친교가 여러분 모두와 함께”(2코린 13,13)라고 삼위의 이름으로 인사를 나누고, 기도의 시작과 끝에 성호경을 긋습니다. 그런데 지금 “당신은 누구를 믿습니까?”라고 물으면 하느님 또는 예수님을 믿는다고 말하긴 쉽지만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을 믿는다’고 바른 대답을 하기는 어렵습니다.

예수님께서 하느님을 ‘아버지’라 부르시어 창조주이신 성부를 계시(마태 11,27)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한 처음 천지가 창조되기 이전부터 하느님과 함께 계셨고 성부와 한 본체”(요한 1,1; 325년 니케아 신경)이십니다. 예수님께서 성령을 보내주시겠다고 약속하신대로 지상에 파견되심으로 삼위일체의 신비가 드러났습니다. 성삼위께서는 동등하시고, 영원히 공존하시며, 같은 본체이시므로 동일한 흠숭과 영광을 받아야 하는 하느님이십니다. 아우구스티노 성인은 “나의 하느님은 성부·성자·성령의 삼위시요, 모든 피조물의 창조주이시다”라고 고백했습니다.(고백록 13권 5)

삼위일체는 인간의 지혜로는 알기 어려운 ‘신비’입니다. 계시된 성삼위의 하느님은 지식이 아닌 믿음의 대상이기에 삼위일체의 하느님은 우리의 ‘신앙고백’이고 ‘사랑의 일치’를 이루는 삶의 목표입니다. 삼위일체의 하느님은 기도와 전례에서 드러납니다. 삼위일체는 우리와 함께하시며 ‘현존’하시는 하느님의 모습입니다. 그러므로 구원의 역사는 삼위의 공동사업입니다. 삼위일체의 신비는 사랑의 삶을 살며 체험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 모세는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느님의 법을 실천하라고 명합니다. “주님께서 위로는 하늘에서, 아래로는 땅에서 하느님이시며, 다른 하느님은 없음을 분명히 알고, 너희 마음에 새겨 두고, 그분의 규정과 계명을 지켜야 영원한 생명을 누릴 것”(신명 4,39-40)이라고 선포합니다.

제2독서에 나오는 사도 바오로의 말씀(로마 8,14-17)처럼 하느님의 영(성령)으로 다시 태어난 이들은 모두 ‘하느님의 자녀’이고, 성령의 힘으로 하느님을 “아빠! 아버지!”라고 부릅니다. 또한 하느님의 자녀인 그리스도인은 하느님의 상속자로 그리스도와 함께 부활의 영광을 누리려면 그분과 함께 십자가의 길을 걸어야 한다고 전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들을 제자로 삼아,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명령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여라” 하고 복음 선포의 사명을 내리시면서 “세상 끝 날까지 언제나 함께 있겠다” 하신 말씀(마태 28,20)에 따라 초기교회 때부터 ‘십자가의 길’을 걸으면서 지금까지 구원의 역사를 이룩하여 왔습니다.

오늘 삼위일체 대축일을 맞아 하느님의 자녀인 나와 하느님의 관계가 친교를 이루고 있는지, 생각과 말과 행동이 사랑의 일치를 이루고 있는지, 주님과 우정 속에 자신의 사명을 성실히 수행하고 있는지를 되돌아보는 계기가 되면 좋겠습니다. 한국 평신도 희년을 지내는 우리가 언제 어디서나 자신의 신앙을 용기 있게 고백하고, 창조질서의 회복, 생명수호, 가난한 이웃들에 대한 관심, 용서와 화해 등 ‘그리스도인답게’ 살려는 평신도의 다짐을 실천하는데 앞장선다면 주님께서도 함께해 주실 것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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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창선 세례자 요한 : 가톨릭영성독서지도사
가톨릭신문 2018-05-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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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위일체는 사랑의 신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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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한 분의 하느님을 믿고 고백하는 교회는 오늘 ‘지극히 거룩하신 삼위일체 대축일’을 기립니다.

삼위일체의 신비는 초기교회 때부터 그리스도 신앙의 원천입니다. 삼위의 이름으로 세례받은 우리는 이 신앙의 진리대로 성삼위께서 이루시는 친교와 사랑의 일치에 참여합니다.

우리는 기도의 시작과 끝에 성호경을 긋고, 삼위일체의 하느님께 영광송을 바치며 깊은 절을 합니다. 또한, 주일이나 대축일 미사 때 신앙 고백을 합니다. 사도신경이나 니케아-콘스탄티노폴리스 신경은 삼위일체 하느님을 믿고 고백하는 우리 신앙의 핵심입니다.

신경(Credo)의 표현대로 전능하신 성부께서는 천지의 창조주이십니다. 성부와 한 본체이신 성자께서는 저희 구원을 위하여 동정 마리아께서 육신을 취하시고, 십자가 수난과 죽음에서 부활하시어 하늘에 올라 성부 오른편에 앉아계시며, 산 이와 죽은 이를 심판하러 다시 오실 주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성부와 성자께서 발하시는 성령께서는 생명을 주십니다.

삼위일체의 교의는 주님 계시(마태 28,19)에 따라 초기교회 때 이미 세례와 신앙 고백, 설교와 가르침, 교회기도문에 반영된 신앙의 뿌리입니다. 교회사가 말해주듯이 2~3세기경에 신앙을 왜곡시킨 이단의 주장과 분열의 위기 속에 교부들의 호교론과 동·서방 교회가 함께한 공의회(니케아 325, 콘스탄티노플 381)에서 이 교의가 정립되었습니다.

삼위일체 대축일이 교회 전례력에 들어온 것은 요한 22세 교황(1334) 때입니다. ‘삼위일체’란 말이 성경에 직접 언급된 적은 없으나 주님의 계시로 그 신비가 드러납니다. 구약 성경은 존재(Being, I Am) 자체이신 한 분의 하느님과 다른 위격들의 존재를 암시합니다(창세기 1,2.26 ; 탈출기 3,14 ; 신명기 6,4 : 미카서 5,2 등). 신약성경은 성자의 강생과 세례, 거룩한 변모, 고별담화, 부활, 복음 선포의 사명 등에서 삼위의 위격을 분명히 밝힙니다.

삼위일체 신비는 본체(실체, Substance)와 위격(Persona)이란 용어를 사용하여 설명합니다. 본체란 한 분이신 하느님의 신적 존재를 가리키며, 위격은 삼위 간에 서로 구별되는 지위입니다. 삼위의 관계는 친교로 사랑의 일치를 이룸에 있습니다. 오늘의 감사송은 위격은 서로 다르면서도 본성(신성)으로는 한 분이신 삼위일체의 신비를 노래합니다.

신앙의 베일에 가린 삼위일체의 신비를 깨달아보겠다고 성직자나 수도자에게 여러 번 청해 설명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그 가운데 이런 예화가 있습니다. 한 성인 사제(St. Patrick)께서 삼위일체의 상징으로 아일랜드 국화인 애기괭이밥(클로버) 풀잎을 들고 “한 잎인가, 세 잎인가?”라는 질문을 한 뒤, 신자들이 “한 잎이며 세 잎이다”라는 대답을 할 때 “하느님도 그렇다” 하셨답니다.

모세가 시나이산에 올라 40일간 단식기도하는 동안 백성들은 제멋대로 금송아지를 만들어 신으로 섬깁니다. 이를 목격한 모세는 하느님께서 쓰신 돌판을 깨트려버립니다.

제1독서는 모세의 중재기도와 새 돌판을 받는 장면입니다. 백성을 당신 소유로 삼으신 “주님은 자비하고 너그러운 하느님이다. 분노에 더디고 자애와 진실이 충만하다(탈출기 34,6).”라는 표현은 구약시대 이스라엘 백성의 신앙 고백(민수기 14,18 ; 시편 103,8 ; 요나서 4,2 등)입니다.

그렇습니다. 존재 자체이신 주님은 자비와 은총, 진리와 사랑의 하느님이십니다.

제2독서에서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총과 하느님의 사랑과 성령의 친교가 여러분 모두와 함께”(코린토2서 13,13)라는 구문은 신약의 가장 분명한 삼위일체의 표현으로, 초기교회 때부터 원문 그대로 사용되어온 미사 전례의 인사말입니다. 우리는 교회의 품 안에서 성삼위의 친교와 형제애를 나누며 하느님의 내적 생명에 참여하는 성도입니다.

오늘 복음은 모든 사람이 하느님을 알고 삼위의 친교와 일치로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하려는 하느님 구원계획의 궁극 목적을 밝힙니다(가톨릭 교리 260). 그러므로 성자의 강생은 사랑이신 하느님의 선물입니다. 성자의 파견목적은 세상의 심판이 아니라 구원에 있지만, 그분을 알아보지 못하고 믿지 않는 자는 스스로 심판을 받았습니다(요한 3,18).

“사랑의 신비인 삼위일체를 제대로 이해하려면 삼위일체의 삶을 살아야 한다.” 하고 일러주신 한 스승의 가르침을 회상합니다.

“누구든지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킬 것이다. 그러면 내 아버지께서 그를 사랑하시고, 우리가 그에게 가서 그와 함께 살 것이다(요한 14,23).”

성삼위의 이름으로 세례받은 우리는 이미 하느님의 본성인 사랑의 씨앗을 간직하고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이 사랑이 꽃을 피워 열매 맺기를 기다리십니다. 주님 사랑의 파트너인 우리가 주님과 하나 되는 십자가의 길을 묵묵히 걸을 때 그리스도의 향기가 됩니다.

우리 안에 계신 성령의 영감과 은총으로 사랑의 삶을 사는 사람은 하느님의 내적 생명을 이미 누리고 있습니다. 주님의 영원한 사랑의 파트너인 그리스도인들이 기도와 성사로 신심을 길러, 주님만을 섬기고 사람을 돕는 사랑의 계명을 실천하면, 세상은 변화될 수 있다고 확신합니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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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창선 세례자 요한 : 가톨릭영성독서지도사
2020년 6월 7일 가톨릭신문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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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별되지만 한 분이신 하느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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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마트에서 울다」는 작년 미국 서점가를 떠들썩하게 했던 미셸 자우너 작가 회고록입니다. 버락 오마바 전 미국 대통령이 추천했고 여러 매체에서 올해의 책으로 선정되었다는 광고 문구는 다소 식상하지만, 많은 이들이 눈물을 흘리며 이 책을 읽은 것은 저자의 이야기가 누구나 겪는 관계의 문제에 닿아있기 때문입니다.

미국인 아버지와 한국인 어머니 사이에 태어난 저자 미셸은 미국 소도시에서 성장하면서 친구들 엄마와 너무 다른 자기 엄마와 갈등을 빚습니다. 늘 ‘예쁘게’ 입히려 하고 음식 장만에 별나게 공들이는 엄마, 매사에 엄격한 엄마를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음악가로 자유롭게 살기 원했던 딸은 급기야 엄마와 대판 싸우고 독립합니다.

몇 년이 흐른 다음, 미셸은 엄마가 말기 암 진단을 받았다는 소식을 듣고 부모님 집으로 돌아와 투병과 임종 과정을 지키지요. 장례를 마친 미셸은 엄마와 함께 한국 음식 재료를 사러가던 H마트에서 비로소 엄마의 삶이 자기 삶 안에 얼마나 진하게 녹아있는지 깨닫고 오열합니다. 엄마의 잔소리, 엄마가 해 주던 음식들, 그 모두가 지금의 자기를 만드는 뿌리였고 엄마 나름의 사랑이었음을 깨달은 것입니다.

많은 이들이 비슷한 성장 과정을 겪습니다. 부모님께 껌딱지 마냥 붙어있던 어린 시절을 지나면 ‘내 인생은 나의 것’을 외치며 독립하기를 바랍니다. 나는 내 부모와 같은 삶을 살지 않겠노라 다짐하기도 합니다. 부모의 관심과 기대가 너무 무거운 짐으로 느껴지기도 하지요. 그렇게 부모와 다른 길을 걸으려 하다가, 어느 시점이 되면 알게 됩니다. 자기 삶이 결코 자신만의 것이 아니었음을, 부모의 삶은 나와 달랐지만 그 깊은 바닥에는 같은 무엇이 흐르고 있음을…. 인격적으로 성숙한다는 것은, 이렇게 내 삶이 타인의 삶과 구별되는 고유한 것이지만 동시에 하나의 사랑이 서로를 관통하고 있음을 깨닫는 것입니다.

내 삶이 고립된 무인도의 삶이 아니라 수많은 생명과 사랑의 결정체임을 깨달을 때 인생을 보는 눈이 깊어집니다. 더 나아가 존재하는 모든 생명과 내 삶이 연결되어 있음을 깨닫게 되면 그의 삶은 범속한 단계를 넘어섭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이런 깨달음을 온전히 실현하신 분이었습니다. 이미 탄생에서부터 “성령께서 너에게 내려오시고 지극히 높으신 분의 힘이 너를 덮을 것이다. 그러므로 태어날 아기는 거룩하신 분, 하느님의 아드님이라고 불릴 것이다”(루카 1,35)라는 천사의 예고가 있었습니다. 성자 예수의 삶은 근본에서부터 성부와 성령과 하나라는 말입니다. 이것을 오늘 첫째 독서는 “한처음 세상이 시작되기 전에 영원에서부터 모습이 갖추어졌다”(잠언 8,23)고 표현합니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삶은 시간의 범주를 넘어 영원으로부터 하나라는 뜻입니다.

공생활을 시작할 때도 성령께서 비둘기 같은 형체로 그분 위에 내리시고 하늘에서 “너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루카 3,21; 마태 3,13-17; 마르 1,9-11)이라는 소리가 들립니다. 예수께서 당신 자신을 어떻게 이해하셨는지 암시하는 구절입니다. 그분은 아버지께 사랑받는 아들로서, 성령께 인도되는 아들로서 완전한 친교를 누리고 있음을 아셨습니다. 그렇게 당신 신원을 성부와 성령의 친교 안에서 이해하신 까닭에, 하느님의 친교에로 모든 이를 초대하는 것이 당신 사명임을 받아들인 것은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그렇기에 예수께서는 고립된 사람들, 단절된 사람들, 소외된 사람들을 불러 모으고 친교의 풍요로움을 누리게 하는데 진력을 다하셨습니다. 외롭고 고통받는 사람들에게 하느님 나라의 기쁜 소식을 알리시며 인간에게 ‘영광과 존귀의 관을 씌워주신’ 하느님의 사랑을 전하셨습니다. 고난에 지친 사람들마저도 “인간이 무엇이기에 이토록 기억해 주시나이까? 사람이 무엇이기에 이토록 돌보아 주시나이까?”(화답송, 시편 8)하고 탄복할 수 있도록, 소외받은 이들과 함께 머무시며 그들이 버려져 있지 않음을, 하느님께서 함께하심을 알려 주셨습니다.

이런 예수님의 사명이 정점에 달한 것은 수난과 부활의 파스카 신비를 통해서였지요. 뭇 사람들 눈에는 철저히 버림받은 것처럼 보이는 십자가의 죽음, 그 누구도 함께할 수 없는 것처럼 보이는 순간까지 예수께서는 아버지 하느님께 순명하셨습니다. 부활은 그런 성자의 죽음이 버려진 시간이 아니었음을 입증합니다. 죽음에 이르기까지 성부께 순종하신 성자는 부활을 통해 성부 오른편에 앉으십니다. 제2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믿음으로 의롭게 된 우리 신앙인들이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느님과 더불어 평화를 누리게 되었음을 힘차게 선포하지요.

그 누구도 하느님으로부터 버려지지 않았고, 그 어떤 고통의 순간에도 하느님께서 함께하신다는 믿음 때문에 신앙인은 결코 희망을 버리지 않습니다. “하느님의 영광에 참여하리라는 희망을 자랑으로”(로마 5,2) 여기고, 환난조차도 인내와 수양과 희망을 자아내는 계기로 여깁니다.

복음서 가운데서 삼위일체 하느님을 가장 분명하게 드러내는 요한복음은 시종일관 예수님의 삶이 삼위일체의 친교 안에 있음을 증언합니다. ‘아버지께서 가지고 계신 것은 모두 나의 것이고, 성령께서 나에게서 받아 너희에게 알려 주실 것’(요한 16,15 참조)이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하느님께서 서로 다르지만 동시에 하나인 신비이심을 알려 줍니다.

우리가 신앙의 희망 속에 사랑의 삶을 추구할 수 있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는 삼위일체 하느님을 닮도록 창조되었고, 삼위일체 하느님의 친교 안에서 완성될 것입니다. 삼위일체의 신비는 하나가 동시에 셋이라는 이상한 산수가 아닙니다. 모든 인간이 고유한 가치를 가지면서도 사랑으로 연결되어 있음을 깨닫게 하는 진리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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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대교구 박용욱 미카엘 신부
2022년 6월 12일 ‘가톨릭신문‘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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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는 성령 강림 대축일 다음 첫 주일로 삼위일체 대축일을 규정한다. 이는 1334년 교황 요한 22세께서 교회의 공식 축일로 지정하면서 그렇게 되었다. 이 축일은 예수님의 생애와 관련된 어떤 복음적 사건을 기념하는 것이 아니라, 교회의 역사 안에서 니체아 공의회(325년)와 콘스탄티노폴리스 공의회(381년)를 통하여 확정된 교의를 기념하여 거행하고 이에 관해 신앙을 고백하고자 함이다.

‘삼위일체’라는 말마디 자체는 교의적인 형태의 말마디로서 성경에서 찾아볼 수 없다. 그렇지만 성경은 아버지로서의 하느님, 사람이 되신 하느님의 아드님 예수, 그 아버지와 아드님께서 역사와 구세사 안에서 활동하시는 하느님의 영이신 성령을 계시한다.

다른 그리스도인들과는 달리 오직 우리 가톨릭교회의 신자들만이 교회의 뜻에 순명하여 이 축일을 거행하면서 삼위일체의 위대한 신비를 드러내는 하느님의 말씀을 듣는다.

공의회들의 결정에 따라 우리 신경에서 우리는 『전능하신 천주 성부 천지의 창조주를 믿고, 인간을 위하여 그리고 인간의 구원을 위하여 하늘에서 내려오시어 사람이 되신 하느님의 외아들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며, 주님이시며 생명을 주시는 성령을 믿는다.』라고 고백한다.

구약에는 이스라엘의 유일신 사상 때문에 삼위일체에 대한 표현이 구체적으로 없으나, 초대교회는 예수님과 성령을 하느님으로 고백하였고, 예수님의 명령에 따라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마태 28,19) 세례를 베풀면서 삼위일체를 자연스럽게 신앙 교리로 받아들였다. 삼위일체의 신비를 묵상하면서 한 분이신 하느님께서 어떻게 3위로 계시는가를 논리적으로 물으려는 시도나, 결코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신비일 뿐이라는 사고방식은 피해야 할 두 가지이다. ‘삼위일체’는 교회의 역사와 함께 성경의 내용을 바탕으로 교의로 형성된 믿을 교리이자 신비이다. 성부, 성자, 성령의 삼위께서 같은 본성의 한 하느님이라는 신비를 기리면서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아서 우리의 진정한 생명이 시작되었으니, 성부, 성자, 성령을 부르는 ‘성호경’으로 시작되어성부, 성자, 성령을 찬미하는 ‘영광송’으로 끝나야 하는우리 인생에 관하여 묵상하는 날이기도 하다.

1. “내가 너희에게 할 말이 아직도 많지만” (요한 16,12-15)

오늘 복음의 대목은 부활 시기에 이미 몇 번 언급된 ‘예수님의 고별사’ 중 한 대목이다. ‘고별사’란 예수님께서 당신의 영광스러운 수난을 앞두고 제자들에게 주신 말씀이다. 말씀하시는 분은 제4복음서에서 드러나는 영광의 예수님이시고, 현재 이 세상과 교회의 주님이신 분이시다. 주님께서는 ‘지금 여기’ 교회에 말씀하시며 부활하시어 살아계신 하느님, 하느님 안에서 하느님이신 분으로서 말씀하신다. 당신을 믿는 이들에게

“나는 너희를 고아로 버려두지 않고
너희에게 다시 오겠다.”(요한 14,18)라고 하시며 주님께서는 이미 “보호자”(요한 14,15-17.26;15,26-27;16,7-11)이신 파라클리토 성령을 보내시겠다고 약속하셨다. 주님께서는 당신을 믿으라고 초대하시고, 그 믿는 이들이 살아가는 세상에 대해 경고하시면서 적대감과 박해를 받더라도 “산란해지거나 겁을 내지 말라” 하시며(참조. 요한 14,27;16,1-4.33), “이 세상의 우두머리가 쫒겨날 것”이고 “이미 심판을 받았다”라고 선언하신다.(참조. 요한 12,31;14,30;16,11)

제4복음서에서는 예수님께서 이미 몇 년을 두고 가르치셨던 당신의 제자들을 남겨두시면서 “내가 너희에게 할 말이 아직도 많지만, 너희가 지금은 그것을 감당하지 못한다.”(요한 16,12) 하셨다 한다. 예수님께서도 많은 것을 전하고 싶고 마음은 있지만, 상대방이 감당할 수 없고 이해할 수 없으며 나눌 수 없어서 무엇인가를 완전히 공유할 수 없는 상황을 체험하셨다. 우리 역시 매일 그러한 내용을 경험한다. 찬찬히 헤아려서 무엇인가를 계속 파고들면 이해의 지평이 넓어지고 주고받는 말을 주의 깊게 듣다 보면 소통의 폭이 넓어지기도 하지만, 어떨 때는 벽에 부닥친 듯 넘을 수 없는 한계에 직면하기도 한다. 무엇인가를 아무리 이야기해도 상대방이 이를 알아들을 수 없고, 받아들일 수 없으며, 사실과 진실을 알리는 것 자체가 부적절하다는 생각이 들 때도 있게 마련이다. 이럴 때 우리는 괴롭지만, 현실을 받아들여야만 한다. 우리가 그런 장벽에 굴복하는 것은 아니더라도 어쩔 수 없이 내가 그 현실을 받아들여야만 한다. 이를 억지로라도 극복하려다가는 소통하자고 시작한 대화가 엄청난 불통의 문제로 비약할 수도 있다.

예수님과 제자들 사이의 대화에서 예수님 편에서는 당신을 표현하는 데에 어려움이 없었지만, 제자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는 데에는 문제가 있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오늘은 이해하지 못해도 언젠가 당신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라는 확신과 믿음으로 말씀하신다. 예수님께서는 인간의 역사와 인생 역시 인간에게 계시하는 바가 있을 것임을 아시기 때문이다. 인간은 무엇을 단순하게 듣기만 하고 지금은 그것을 이해할 수 없을지라도 인생을 살아가면서 함께 살아가는 사람들과 더불어 그 깊은 뜻을 언젠가 자연스럽게 이해할 수 있는 때가 오게 마련이다. 대 그레고리오St. Gregorius Magnus 성인(540?~604년 활동)께서는 이를 두고 『말씀은 듣는 이와 함께 자란다.』라고 표현하신다. 말씀은 실로 함께 나누는 이들, 함께 묵상하는 이들, 함께 인생을 듣고 역사와 표징을 듣는 이들과 함께 자란다. 이해를 깊이 하는 여정은 끝나는 법이 없고, “진리”를 향한 여정은 이 땅에서 절대 끝나지 않는다. 죽음 너머 “얼굴과 얼굴을 마주 볼” 저편의 “그때”에 비로소 “지금은 부분적으로 알지만, 그때에는 하느님께서 나를 온전히 아시듯 나도 온전히 알게 될 것”(1코린 13,12)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언젠가 온전히 알게 될 “진리”는 그리스도교 신앙에 우리가 생각지도 못할 지위를 부여한다. 우리는 예수님과 제자들 간에 오간 내용을 들으면서 단지 과거의 사건 기록으로만 이를 들을 것이 아니라 그 말씀을 살아가는 오늘 우리의 사건과 역사의 말씀으로 신중하게 읽어야 한다. 우리의 신앙은 고정적인 것이 아니고, 한번 주어져 우리가 안절부절못하면서 간직해야만 할 그런 보물 같은 것만은 아니다. 우리의 신앙은 우리의 손에서 성장하고 자라나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도 제자들에게 말씀을 주시면서 제자들이 당신에게서 들은 바를 박물관에 박제라도 하듯이 폐쇄적인 곳에 고정적인 어떤 것으로 간직하려고 들 것이라는 위험을 미리 간파하셨을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말씀이 세상의 길에서 긴 여행을 하고 세기와 역사를 통해서, 다른 문화와 언어, 그리고 역사를 만나 더욱 풍요로워지며 성장하기를 바라셨다.

우리에게 전해진 “진리”는 오늘의 교회와 어제의 교회가 지닌 다양성 안에서, 구원에 필요한 본질이 무엇인지를 알고 있는 교회 안에서, 분명 어제의 교회보다는 복음 자체를 더욱 깊이 이해하고 있는 오늘의 교회 안에서, 더욱 깊어지고, 성장해야 하며, 확장되어야한다. 복음이 바뀐 것이 아니라, 교황 성 요한 바오로 2세께서 『교회의 옛 교부들보다도 오늘의 우리가 어쩌면 더 잘 이해하는 면이 있다.』라고 말씀하신 것처럼 어제의 우리보다 오늘의 우리가 복음을 더 잘 이해하고 있다.

2. “진리의 영께서 오시면…진리 안으로 이끌어” (요한 16,12-15)

그러나 이러한 성장은 우리 안에 내재한 우리의 힘으로 되는 것이 아니다. 인간 정신의 탐구와 그 결과가 아니다. 부활하신 주님, 성령께서 인도하시는 발걸음으로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그분 곧 진리의 영께서 오시면 너희를 모든 진리 안으로 이끌어 주실 것이다.”(요한 14,13ㄱ) 하신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팔레스티나의 거리를 당신의 제자들과 함께 걸으시던 모습으로 지금의 우리와 함께 걸으시지는 않는다는 것을 안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 이방인이며 나그네”(히브 11,13 1베드 2,11)로서 세상 길을 걷고, 사람들 사이를 걸으며, 이방인들 사이를 걷는다. 그러나 우리는 혼자가 아니고 어디로 가야 할지를 모르는 고아가 아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의 은총이요 선물인 성령, 예수님과는 『떼려야 뗄 수 없는 동반자이신 성령(체사레아의 성 바실리오)』, 이제는 우리와 떼려야 뗄 수 없는 우리의 동반자가 되신 성령께서 우리와 함께 계신다.

성령께서는 빛이시며 힘이시고 보호자이시며 우리를 인도하시는 분이다. 어두운 밤에는 감미로운 빛이시고, 더위를 식혀주는 시원한 바람이시며, 우리가 흔들릴 때 우리를 굳건하게 붙들어주시는 분이시다. 우리는 우리가 결코 소유해보지 못한 진리를 찾아 우리의 길을 가고 있지만, 성령께서는 우리가 알고 있는 그 진리 너머, 결코 끝이 없는 진리에까지도달할 가능성을 주시는 분이시다. 우리가 나아가는 진리는 분명 우리의 지적인 이해의 차원에 머무르지 않는 그런 진리이며, 우리 인간 전체를 아우르는 진리이다. 단지 우리가 찾고 가르치며 배우는 교의나 교리가 아니며 어떤 공식이나 사상도 아니다. “내가 진리이다.”(요한 14,6) 하신 예수 그리스도라는 인격체이다.

3. “나에게서 받아…모두 나의 것” (요한 16,12-15)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그분(성령)께서는 스스로 이야기하지 않으시고 (나에게서) 들은 것만 이야기하시며, 또 앞으로 올 일들을 너희에게 알려주실 것이다. 그분(성령)께서 나를 영광스럽게 하실 것이다. 나에게서 받아 너희에게 알려주실 것이기 때문이다. 아버지께서 가지고 계신 것은 모두 나의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성령께서 나에게서 받아 너희에게 알려주실 것이라고 내가 말하였다.”(요한 16,13ㄴ-15) 하신다. 성령께서는 불고 싶은 데서 불어와 불어가고 싶은 데로 가는 바람이 아니시다. 성령께서는 그리스도의 영이시며 예수님과 분리된 적이 없는 분이시다. 성령께서 함께하시어 우리에게 예수님에 대해 말씀하시면 이는 예수님께서 친히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것이다. 이와 같은 방식으로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신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이후에는 “아버지와 가장 가까우신 외아드님 하느님이신 그분께서 알려주셨다.”(요한 1,18) 한 그대로 지극한 인간의 삶과 인간의 언어로 말씀하신 예수님을 알고 예수님을 바라보지 않고는 이제 하느님에 관해서 더는 말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성령에 관한 예수님의 말씀은 아드님과 모든 것을 함께하시는 하느님 아버지를 가리킨다. 아드님은 아버지에게서 터져 나온 말씀이고, 성령은 말씀이 터져 나오게 하신 하느님의 숨이다. 이와 같은 모습으로 복음사가 요한은 예수님의 말씀을 통해 우리의 하느님을 성부, 성자, 성령으로 볼 수 있도록 우리를 동반해 준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미사의 시작 때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총과 하느님의 사랑과 성령의 친교가 여러분 모두와 함께!』라고 인사하는 이유이다. 사랑이신 하느님, 아드님 예수를 통해서 우리와 하나 되신 하느님, 성령을 통하여 계속 생명의 친교를 이루시는 하느님이 우리의 하느님이시다.

삼위일체에 관한 이 복음 대목을 읽거나 되풀이하면서 이를 교의적인 내용을 담은 논문 정도로 변질시켜서도 안 되고, 어떤 선문답처럼 알쏭달쏭한 수수께끼로 만들어서도 안 되며, 그럴듯한 수학 공식 정도로 풀어서는 안 된다. 이 복음 말씀이 진실로 “진리”라면 가장 작은 이들, 그다지 지적인 화려함을 자랑할 필요가 없는 이들, 소박하고 가난한 이들에게 이 복음 말씀을 선포하여 그들로부터 확인하고 배워야 한다. 그들이 우리의 입술에서 나간 말로 무엇인가를 알아들었다면, 우리도 무엇인가를 조금이라도 이해한 것이 된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본다면서도 보지 못하는 눈먼 이(참조. 요한 9,40-41)이고, 무엇인가를 안다면서도 무식한 자이며, 신앙을 고백한다면서도 그저 판에 박힌 교리나 나불대는 자들일 뿐이다. 복음은 작은 이와 철부지, 단순하고 무식한 이들, 가난한 이들을 위한 것이며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에게는 감추어진”(마태 11,25 루카 10,21) 실제이다. 괜스레 어렵고 수수께끼처럼 만들어 그 누구의 마음에도 새겨지지 못할 또 다른 돌판을 만들어서는 안 된다.

우리는 우리 몸에 십자가를 그어 우리의 마음과 정신, 두 팔과 두 발로 기꺼이 아버지와 아드님과 성령의 것이 되어 그분의 도구가 되겠다는 우리의 각오와 열망을 온몸으로 표현한다. 넉 줄밖에 안 되는 오늘의 이 짧은 복음 안에서 “너희”라는 말마디는 무려 6번이나 반복된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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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세상과 인류를 위해 펼쳐진 하느님의 드라마안에서 작가는 누구이고 배우는 누구였으며 연출가는 누구였습니까? 바로 성부와 성자, 그리고 성령이었습니다. 성부께서는 창조하셨고 표현하셨으며 모든 것의 꼴을 갖추게 하신 분이었고, 성자는 이를 육화하셨고, 실현하셨으며, 실제가 되게 하시고 모든 것이 현재와 행동이 되게 하신 분이었으며, 성령께서는 고무하시고, 제안하시며, 소화하시고, 모든 것이 조화를 이루도록 세심하게 배려하신 분이었습니다. …작가인 성부께서는 드라마 밖에 군림하시는 혹독한 비평가가 아닙니다. 성부의 작품은 당신 자신이 몸소 당신의 피조물을 향해 겸손하게 자신을 굽히시는 바로 그런 내용을 담았습니다. 배우인 성자께서는 성부의 사랑받는 소중한 외아드님이었습니다. 성부의 뜻 안에 완벽하게 일치하시는 분이었으며 한순간도 그분의 뜻을 잊지 않으시는 분이었을 뿐만 아니라 실제로 죽으셨고 부활하신 바로 그런 분이었습니다. 연출가인 성령께서는 완전하게 성부의 작품에 담긴 혼(魂), 곧 성부 자신을 완벽하게 이해하신 분이었습니다. 성부께서는 성령께 당신의 작품을 맡기셨고, 그 작품에 대한 성령의 해석과 인도하심으로 성자께서는 당신에게 부여된 작품을 당신의 생生으로 소화해 내실 수 있었던 것입니다.

하느님의 드라마는 이처럼 완벽한 삼위일체의 드라마였고, 순수 그 자체인 사랑의 드라마였으며, 인간에게 온전히 하느님 자신을 내어놓는 선물의 드라마였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이 모든 것을 압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이 하느님의 드라마에 우리 생의 마지막이고도 진정한 의미가 담겨있음을 압니다. 매일 매일 우리의 삶 안에서 하느님의 드라마 가장 깊은 곳 마지막까지 참여할 수 있기를 빕니다. 삼위일체이신 하느님께 영광을!(한스 우르스 폰 발타살Hans Urs von Balthasar, 1905~1988년, 스위스 태생 예수회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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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 벤지
2022년 6월 12일
  | 06.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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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위일체는 명사가 아니라 동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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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미 예수님!
오늘은 삼위일체 대축일입니다. 또 사제들에게 가장 난감한 주일, 삼위일체 대축일이 다시 돌아왔습니다. 신자들에게 이런 저런 비유를 들어 삼위일체 신비를 이해시키려고 애를 쓰지만, 자칫 적당치 않은 비유를 들다가는 이단이나 오류로 빠집니다.

우리 그리스도교의 독창성(l’originalité)은 삼위일체 교리입니다. 삼위일체론을 주장하는 종교나 사상체계는 그리스도교 이외에는 없었습니다. 유다교나 이슬람교는 유일신을 믿는 종교입니다. 유다교는 야훼 하느님 한분이면 족하며 다른 위격은 필요 없다고 하고, 이슬람교는 알라신 외에 위격이 무슨 소용이냐는 주장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교 신앙은 한분이신 하느님께 성부와 성자와 성령이 계신다고 믿습니다. 삼위일체론은 다른 유일신론들, 다신론, 범신론, 허무주의, 무차별주의, 그리고 무신론과 분리됩니다.

우리는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의 이름을 부르며 늘 기도를 시작하고 마칩니다. 그러나 어떤 이들은 삼위일체 하느님의 이름을 부르는 ‘성호경’을, 기도를 시작하고 맺는 짧은 문장 정도로 취급하는데, 이 짧은 성호경은 그 자체가 기도이며,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을 고백하는 우리의 가장 중요한 기도 가운데 하나입니다.

우리 천주교에는 4대 교리가 있습니다. 천주존재, 강생구속, 삼위일체, 상선벌악입니다. 이 중에서 삼위일체 교리는 하느님은 페르소나로는 성부와 성자와 성령 삼위이시며 본체 즉 숩스탄시오로는 한 분이라는 교리입니다.

창세기 1장26절을 보면, 하느님께서 사람을 만드실 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우리와 비슷하게 우리 모습으로 사람을 만들자.”(창세 1,26) 하느님은 한 분이신데, 왜 ‘우리’라고 말씀하신 걸까요? 천지창조 때부터 하느님은 세 위격으로 존재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구약시대에는 성령의 존재도 잘 몰랐고, 성자의 존재는 예언을 통해서만 알고 있었을 뿐이었습니다.

그리고 삼위일체와 관련해서 무엇보다도 중요한 사건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예수님의 세례입니다. 예수님께서 세례자 요한에게 세례를 받고 나오셨을 때, 성령께서 비둘기 모양으로 내려오셨고, 하늘에서는 예수님께서 당신의 사랑하는 아들이라고 하시는 아버지의 음성이 들려왔습니다. 예수님의 세례 때에 하느님께서는 당신 스스로 세 위격을 지니셨다는 것을 동시에 직접적으로 계시하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세례를 받으시고 물에서 올라오셨을 때에, “성령께서 비둘기처럼 당신께 내려오셨으며,” 하늘에서는 “너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 하는 성부의 음성이 들려왔습니다(마르 1,9-11; 마태 3,13-17; 루카 3,21-22). 성경에서 성부, 성자, 성령 세 위께서 동시에 나타나신 경우는 예수님 세례 때이며, 이 내용은 세 복음서 모두 한결같이 증언하고 있습니다.

타볼산에서도 성부의 비슷한 음성이 들려왔습니다.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마태 17,5; 마르 9,7; 루카 9,35)

예수님께서는 승천하시기 직전에 제자들에게 온 세상을 두루 다니며 삼위일체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들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명령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여라.”(마태 28,19-20)

그런데 신약시대에 이르러서,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 예고 때에 성령의 존재가 언급되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성령의 존재에 대해 많이 이야기하셨습니다. 또한 예수님께서는 결정적으로 “아버지와 나는 하나”(요한 10,30)이며, “하느님은 영”(요한 4,24)이시라는 것을 가르치심으로써 아버지와 예수님과 성령께서 한 분이신 하느님이라는 사실을 알려주셨습니다. 물론 오늘 복음에서 보는 바와 같이, 제자들도 이러한 진리를 잘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삼위일체는 다른 종교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그리스도교만의 고유한 교리로서 우리 신앙의 핵심입니다. 신성으로 하나의 본체이신 하느님이 위격적으로는 성부, 성자, 성령의 삼위로 구분된다는 것이 삼위일체입니다.

구약성서 안에서는 삼위일체에 대한 명시적인 계시를 찾을 수가 없습니다. 이스라엘은 오직 한 분이신 하느님과 맺은 계약으로써 하느님을 세상 안에 현존하시며 인간과 대화하시는 분으로 이해했습니다. 삼위일체라는 말은 성서에는 나오지 않는 용어입니다.

초대 교회 교부들도 삼위일체 신비를 받아들이기는 쉽지 않았습니다. 선교와 일치라는 측면에서 볼 때 삼위일체 신비를 부정하는 것이 눈앞의 이익만을 볼 때 더욱 매혹적이었습니다. 특히 합리성을 바탕으로 하는 그리스 문명과 만날 때 더욱 그러했습니다. 그렇지만 교회는 삼위일체 신비를 믿을 교리로 선포하였습니다. 성서에 충실하고 솔직하기 위해서 이성의 오만과 유혹을 물리친 것입니다.

제4차 산업혁명 시대는 신학적으로 삼위일체론의 르네상스 부흥기라고 부를 수 있습니다. 삼위일체 신학은 20세기 후반부터 오늘날까지 새롭게 발견되고 재조명되고 있습니다. 일찍이 교회는 삼위일체론을 교리적으로 공식화하고 믿고 가르치고 고백해 왔습니다. 동시에 이단과 이교로부터 도전과 비판과 공격도 많이 받았습니다. 특히 계몽주의 이후 18세기 및 19세기에는 더 큰 도전과 비판을 받아 신학의 논의에서 사라지는 월식 현상을 보이기도 하였다. 칸트는 삼위일체론이 아무런 실천적 가치가 없는 교리로 보았고, 정언명령을 제1가치로 내세웠습니다. 포에르바하(Feuerbach)는 신(神)을 인간 정신의 투사로 정의하였고, 그 후 여러 종류의 무신론은 삼위일체 하느님을 인간 사회와 문화 그리고 인간 심리 등의 투사로 간주하였습니다.

그러다가 소련의 해체와 함께 실천적 무신론이 몰락하자, 20세기 및 21세기에서는 삼위일체론이 다시 부흥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삼위일체 중심적인 신학은 제2차 바티칸 공의회를 거치면서 협소한 그리스도 중심주의나 폐쇄적인 교회 중심주의에서 벗어나게 했습니다. 삼위 중심주의는 교회일치운동, 종교 신학, 페미니스트 신학, 흑인 여성 신학, 다문화 신학 등에 의해서 촉진되었으며, 다수의 포스트모던 신학자들에 의해서 심화되고 있습니다. 더 나아가 신학의 모든 주제들과 분야들이 삼위일체 하느님의 관점에서 다루어지기 시작하였습니다. 예를들면 삼위일체 중심적인 기초신학, 삼위일체 중심적인 계시론, 삼위일체 중심적인 신앙론, 삼위일체 중심적인 창조론, 삼위일체 중심적인 인간론 등이 있습니다. 심지어 그리스도론이나 성령론까지도 삼위일체 중심적인 그리스도론이나 삼위일체 중심적인 성령론이 있습니다. 이러한 현상은 여기에 그치지 않고 구원론, 속죄론, 성령론, 영성론, 교회론, 종말론, 윤리학 등등의 주제들과 사목, 성사, 선교, 기도, 가정생활, 사회 등의 분야들이 삼위일체신학의 관점에서 다루어지고 있습니다. 그야말로 삼위일체신학의 르네상스를 맞이하고 있습니다.

새롭게 재발견되어 부흥기를 누리고 있는 현대 삼위일체신학은 칼 라너 신부에 의해서 시작되었습니다. 칼 라너는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이 입으로는 삼위일체론을 고백하지만 일상적인 실제 삶에서는 일신론자처럼 살고 있다고 비판하면서 삼위일체론의 부흥에 불을 댕겼습니다. 그는 삼위를 강조하고자 하였습니다. 그는 삼위일체에 대해 묵상할 때 우리가 시작해야 할 지점은 셋이지 하나가 아니라는 점을 강조합니다. 하느님이 한 분이시라는 점도 참으로 중요시해야 하지만, 이미 불가항력적인 다원주의 사회에서 하느님의 사랑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것보다는 세 페르소나가 관계성 안에서 아가페 사랑의 흘러나옴과 흘러 들어감의 움직임이 영원히 지속하신다는 점에을 우선적으로 방점을 두어야 한다는 점은 매우 중요합니다.

삼위의 관계는 상호 위격적인 관계이지 사물적 관계가 아닙니다. 마틴 부버는 페르소나의 관계를 “나와 너(I-Thou)”의 상호인격적 관계로 보면서 “나와 그것(I-It)”의 관계를 비판하였습니다. 프랑스의 포스트모던 철학자 엠마누엘 레비나스는 하나 안에서 생겨나는 전체성의 개념을 거부하고, 또한 타자와 약자를 위한 책임을 강조합니다. 그의 사상은 “타자의 윤리(Ethics of the Other)”라고 일컬어집니다. 타자를 긍정하고 포용하는 진정한 공동체를 형성하기 위한 사상적 토양을 구축하기 위하여, 페르소나 간의 관계성 및 공동체성에 대한 논의들이 적용될 필요가 있게 된 것입니다. 신학의 영역에서는 이러한 가능성을 현대 삼위일체신학에서 발견할 수 있다. 현대 삼위일체신학은 삼위일체 하느님 안에서의 관계적 개방성뿐만 아니라, 하느님의 모상대로 지음을 받은 인간 페르소나의 포용성에 대하여 큰 영감을 줍니다.

현대사회의 가장 주요한 특징이면서 동시에 가장 큰 문제 중의 하나는 비지성적인 개인주의(individualism)와 집단주의(collectivism)입니다. 집단주의는 우리 한국 사회에서 진영논리로 구체화됩니다. 개인주의와 집단주의를 극복하고 진정한 공동체(authentic community)를 형성하기 위하여 페르소나의 관계성(relationality)에 관한 올바른 이해가 요구됩니다. 특히, 근대적 주체의 특징으로서의 개인주의는 인간의 자율성과 합리성을 강조하는 장점이 있지만, 폐쇄적 자아의 가치관을 견고하게 함으로써 타자를 이해하지 못하고 배제하며 심지어 폭력까지 행사하는 병리현상이 생깁니다. 삼위일체 하느님을 깊이 묵상하고 삼위의 관계성을 제한적이나마 미메시스하여 닮아가고자 할 때, 우리는 개인주의적인 단일성을 넘어서고 집단주의적인 획일성에 빠지지 않는 지점에서 자신의 페르소나를 구성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삼과 일이라는 숫자에 있어 강조점은 일에 있기보다 셋에 있습니다. 하나를 강조했다면 ‘Tri-unitas’를 선택했을 것입니다. ‘unitas’의 하나를 약화시키고 균형을 잡기 위해 그 대신에 ‘Trinitas’라는 용어로 정리하였습니다. 즉 하느님은 세 위격이지만 하나의 본체이신 분이라기보다 하나의 본체이지만 위격적으로 삼위이신 분입니다. 본체가 하나라고 강조하기 보다 페르소나가 셋이라는 점을 강조하고 각 페르소나간의 관계성에 주목할 때 근대적 본체 개념과 주체 개념 상호 논란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본체에 관한 중세의 실체론적 잔재를 제거하고 또 위격의 해석에 있어 근대의 상호 배타적인 주체론에서 해방되어 관계성과 포용성이 더욱 강조되어 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구체적으로 각자의 개별적이고 독립된 자아를 내세우는 근대적 주체의 개념을 비판하면서, 또한 상호주관적인 관계성의 개념을 더 적극적으로 강조할 때 파편화된 폐쇄적인 개인주의와 배타적 집단주의를 극복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정보화 사회에서 각 개인들은 분리되고 단절된 자아들이지만 이 자아중심성이 주체 상호간의 관계성과 공동체성을 완전히 부인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더불어 함께 살아가는 존재이고 인격적인 관계 안에서 각각의 페르소나들이 서로 소통하고 일치의 통교를 누리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아버지께서 아드님과 성령과 함께 한 하느님이시기에 하나를 강조하는 것도 반은 맞고 반은 틀렸고 삼을 강조하는 것도 반은 맞고 반은 틀렸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다양성을 강조하는 인터넷 시대의 신학은 삼위를 더욱 강조하고 있습니다. 하나만을 고집하면 홀로 독(獨)이 판을 치게 됩니다. 독선, 독주, 독백, 독박, 독거, 독점, 독재, 독불장군, 독식 등 부지기수입니다. 홀로 독이 꼭 나쁜 것은 아니지만 대개 부정적입니다. 예를 들면 독선은 결국 위선으로 통하고 독백이 되기 쉬우며 독주하게 됩니다.

더 나아가 삼위는 다수성을 기반으로 합니다. 다수성을 다양성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삼위일체는 다수성의 영성입니다. 여럿이니 아름답고, 더 참되고 좋다는 것입니다. 유일신 신앙이 아니어서 다행입니다. 삼위일체 신앙은 유목민의 유일신론적 부족신앙이 아닙니다. 유대교나 이슬람교는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배타적 유일신론입니다. 유일신론을 강조하다 보면 쉽게 삼이라는 숫자를 잊어버리곤 합니다. 삼이라는 이 위격의 다수성을 잊게 될 때 다양성은 사라지고 배타적이며 획일적인 신앙으로 흐르기 쉽습니다. 개신교 신자들 가운데 근본주의자들이 많고 이슬람 신자들 가운데 자살특공대와 같은 극단주의자들이 많은 것은 우연이 아니라고 여겨집니다. 그런데 우리 역시 위격의 차이성과 다수성을 종종 잊어버립니다. 하나의 본체를 가지신 하느님은 그 단수성에도 불구하고 성부, 성자 성령 삼위가 동등하시면서도 서로 다르심으로 인해 더욱 풍요로울 뿐만 아니라 아름답습니다. 자기가 아는 하나만을 주장할 때 편을 갈라 싸우게 됩니다. 하나만 아는 것은 그 하나도 모르는 것입니다.

삼위를 강조하면 무엇보다도 획일적인 일치가 아니라 일치 안에서의 다양한 다름이 부각됩니다. 삼위의 관계성은 나와 다르고 우리와 다르다고 여겨지는 타자와 약자의 다름을 그대로 인정하고 받아들일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줍니다. 삼위일체론에서 삼위 중심적인 입장이 될 때 다수성을 인정하게 되고 이 다수성이 인정될 때 이러한 삼위일체 하느님의 존재를 근거로 인간 사회도 각각의 페르소나들이 공동성, 개방성, 포용성, 상호내주성 등의 관계성 안에서 동고동락할 수 있는 가능성이 생깁니다.

삼위일체는 이론적인 사색에서 나온 정의라기보다는 하느님과 예수 그리스도, 그리고 성령을 체험한 사람들의 신앙고백입니다. 삼위일체라는 단어로써 초기 신앙인들이 말하고자 한 것은 유대인들이 믿던 야훼 하느님의 일신론을 바탕으로 그분에게서 분화된 성부, 성자, 성령의 세 페르소나로서의 하느님을 의미합니다. 성부, 성자, 성령 세 페르소나 모두 실제 하느님이라는 것을 체험한 것입니다. 예수님 안에서 우리가 알아보는 하느님은 실제 하느님이고, 신앙인들 안에 숨결로 살아계신 성령도 실제 하느님이라는 것입니다.

구원경륜 안에서 계시된 진리 중에 성부 하느님을 이해하기는 비교적 쉽습니다.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은 야훼 하느님께 대한 창조주 유일신 사상을 갖고 있었습니다. 보통 성부를 표현할 때 그냥 하느님이라고 표현할 때가 많습니다. 프랑스어로 하느님은 “Dieu”인데 보통 명사로 사용됩니다. 일반적인 의미에서 신(神)을 의미합니다. 알라신도 바로 이 신(神)이고 야훼 하느님도 바로 이 신(神)으로 표현합니다. 삼위가 분화되기 전의 신(神)을 의미합니다. 우리가 보통 하느님이라고 표현할 때 이 하느님은 성부를 의미하는 것으로 자리매김이 됩니다.

그런데 제2차 바티칸 공의회 문헌의 계시헌장에는 신약의 관점에서 구약을 읽는다는 원칙이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계시된 진리의 안경을 끼고 구약에서 이루어진 하느님의 구원경륜을 이해한다는 의미입니다. 신약의 삼위일체적인 하느님에게서 제2위인 성자는 이미 구약에서 이미 하나의 위격으로 어렴풋이 모습을 드러냅니다.

본격적인 성자의 페르소나가 계시되는 것은 오늘 제1독서의 잠언 8장 22-31입니다. 잠언은 솔로몬 왕의 잠언이라고 하여 일부 편집된 부분을 빼고는 솔로몬 왕이 저자입니다. 이 구절은 잠언 중에 가장 위대한 구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잠언 8장은 의인법을 사용하여, 지혜가 직접 말하는 형식으로 진리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지혜는 일인칭으로 의인화되는데 엄격히 말해서 신적 지위를 갖추기에 신격화라는 것이 더 정확합니다. 라틴어로는 Personicatio라고 하여 오늘날 인격화하고 번역되지만 신의 영역에서는 신격화 혹은 위격화라고 합니다. 이 페르소니피카시오로 인해 지혜는 단순히 하느님의 속성이나 질적인 특성이 아니라 창조주 하느님과 동급으로 페르소나를 가집니다. 지혜가 직접 주님과 같이 되어 진리를 말씀하기도 하고 때로는 지혜가 주님 자신으로 직접 나타나고 있지 않지만, 주님과 함께 있는 어떤 페르소나적인 존재로서 묘사되고 있습니다.

잠언 8장 6~8절을 뽑아서 읽어보겠습니다.
"들어라, 나는 고귀한 것들을 말하고 내 입술에서는 올바른 것들이 흘러나온다. 내 입은 진실을 말하고 내 입술은 불의를 역겨워한다. 내가 하는 말은 모두 의로울 뿐 거기에는 교활한 것도 음흉한 것도 없다."

이 구절에서 일인칭 주어 "나"는 지혜가 의인화된 표현입니다. 마치 지혜가 우리 곁에서 직접 말하는 사람인 것 같기도 합니다. 잠언서는 하느님을 지혜로 간주하고 있으며 지혜가 온 만물을 창조했다고 노래합니다.

다음 말씀에선 지혜가 청각적인 소리로 그려집니다. 시끄럽고 북적거리는 가운데서 우리를 부르고 있는 그 소리를 듣습니다.

<지혜가 바깥에서 외치고 광장에서 목소리를 높인다. 법석대는 거리 모퉁이에서 소리치고 성문 어귀에서 말을 한다. “어리석은 자들아, 언제까지 어리석음을 사랑하려느냐? 언제까지 빈정꾼들은 빈정대기를 좋아하고 우둔한 자들은 지식을 미워하려는가? 내 훈계를 들으러 돌아오너라. 그러면 너희에게 내 영을 부어 주어 내 말을 알아듣게 해 주리라.>(잠언 1,20∼23)

오늘 제1독서의 잠언 8장 22-31입니다. 여기에서 잠언의 저자 솔로몬은 하느님께서 지혜를 통하여 세상을 창조하신 놀라운 일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위격적인 힘으로 작용하는 하느님의 지혜는 세상 창조의 순간부터 하느님과 함께 있던 분이시라고 설명합니다. 지혜가 한 처음 영원 전부터 존재한 것은 물론 거기서 한걸음 더 나아가, 세상을 창조하는 일에 동참했음을 말합니다. 즉 지혜라는 위격화된 존재가 창조 이전부터 존재하면서 하느님과 함께 작업을 하시고 특히 사람들이 있는 곳에 기쁘게 임마누엘 함께 있으면서 어떤 목적의 일을 하신다는 주장입니다.

오늘 제1독서는 크게 세 부분으로 나누어 분석할 수 있습니다.

첫째 부분은 우주 창조 전에 태어난 지혜(22‐26절)입니다. 지혜는 자신이 세워지고 존재한 시점에 대하여 설명하고 있습니다. 하느님의 창조 중에서 대표되는 몇 가지, 하늘과 심연, 구름, 바다의 샘과 바다의 한계, 땅의 기초 등에 대하여 말하고 있습니다. 고대 중동의 우주관에 의하면 사람들과 동물들이 살고있는 곳이 ‘땅’이고, ‘바다’그 땅을 둘러싸고 있습니다. 땅의 기둥들이 바다에 뿌리를 내리고 있어 땅이 바다에 빠지지 않도록 하고, 하늘과 땅 사이에는 하늘이 무너지지 않도록 높은 산들이 받치고 있습니다. 하늘에는 새들이 날아다니고 해와 달과 별들이 있습니다.

오늘 본문의 23절에서는 영원부터, 처음부터, 또는 땅이 있은 이래로 지혜가 존재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24절에서는 심연이나 물을 풍성히 내는 샘들이 없을 때, 25절에서는 산들이 있기 전에, 지혜는 자신이 태어났다고 합니다. 그리고 26절에서 땅도 들도 세상 흙도 없을 때에, 27절에서 하늘들을 예비하실 때, 28절에서 구름들을 세울 때, 29절에서는 바다와 땅을 만드실 때에 지혜는 거기에 있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그 옛날 모든 일을 하시기 전에 당신의 첫 작품으로 나를 지으셨다. 나는 한처음 세상이 시작되기 전에 영원에서부터 모습이 갖추어졌다. 심연이 생기기 전에, 물 많은 샘들이 생기기 전에 나는 태어났다. 산들이 자리 잡기 전에, 언덕들이 생기기 전에 나는 태어났다. 그분께서 땅과 들을, 누리의 첫 흙을 만드시기 전이다.”

시간적 관점에서 지혜는 ‘그 옛날 모든 일을 하시기 전에’ 등장합니다. 태초에 하느님께서 천지창조를 하시기 전에 나의 모습이 갖추어졌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지혜가 처음 영원전부터 존재했다는 의미입니다. 지혜는 ‘하느님께서 천지창조를 시작하시던 태초에’즉 ‘하느님의 창조 활동이 있기 전에’ 태어나 등장하게 되었습니다. 지혜는 이 세상에 그 어떤 존재들도 나타나기 전에 등장하였습니다. 그는 창조의 ‘첫 피조물’이 아니라, 주님의 첫 창조가 이루어지기 전에 태어났습니다.‘그 옛날’, ‘한처음 ’, ‘땅이 생기기 전’이라는 의미는 ‘시간이 생기기 전’이라는 뜻입니다.

우리가 ‘처음부터’라고 하면 일단 창세기 1,1절을 떠올립니다. 시간은 천지가 창조된 이후에 시작이 되었습니다. 즉 시간도 하느님의 창조물입니다. 하지만, 지혜는 그 이전부터 존재했습니다. 계속해서 지혜가 영원 전부터 존재했음을 이렇게 증언합니다.

자연스럽게 오늘 제1독서의 둘째 부분은 우주 창조 과정에 있는 존재했던 지혜의 선재(27‐29절)를 설명합니다.

“그분께서 하늘을 세우실 때, 심연 위에 테두리를 정하실 때 나 거기 있었다. 그분께서 위의 구름을 굳히시고 심연의 샘들을 솟구치게 하실 때, 물이 그분의 명령을 어기지 않도록 바다에 경계를 두실 때, 그분께서 땅의 기초를 놓으실 때”라고 언급합니다. 지혜는 하느님의 천지창조 전에 태어나 창조의 모든 과정에 증인이 되고 있으며, 하느님의 창조를 기뻐하고 축하하고 있습니다. “나는 그분 곁에서 사랑받는 아이였다. 나는 날마다 그분께 즐거움이었고 언제나 그분 앞에서 뛰놀았다. 나는 그분께서 지으신 땅 위에서 뛰놀며 사람들을 내 기쁨으로 삼았다.”(30-31)

이런 지혜의 모습은 구약의 지혜 문학뿐 아니라 구약성경 전체에서 유일무이하며, 신약성경에서도 그 유사한 것을 찾기 어렵습니다. 구약성경에서 육화 이전의 그리스도, 하느님의 지혜로서의 아들에 관한 말씀으로 이곳 외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진리의 말씀입니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계시와 예언의 말씀입니다. 이 부분은 태초의 창조에 참여하셨던 그리스도를 간접적으로 묘사한 말씀으로 이해될 수 있습니다. 사도 요한은 증언하기를, “한처음에 말씀이 계셨다. 말씀은 하느님과 함께 계셨는데 말씀은 하느님이셨다. 그분께서는 한처음에 하느님과 함께 계셨다.”(요한 1,1-2)고 합니다. 예수님은 ‘처음부터 있어 온’ ‘생명의 말씀(1요한 1,1)’이며 지혜입니다.

그리스도의 선재(先在; pre-existence) 교리는 육화 이전에 그리스도의 존재론적 또는 인격적 존재를 주장합니다. 삼위일체 해석에서 그리스도는 로고스 혹은 말씀이라고 불리는 선재적 신성을 가진 위격으로 동일시 되었습니다. 이 교리는 요한 복음 17장 5 절에서도 예수님이 이별 담화 중에 "아버지, 세상이 생기기 전에 제가 아버지 앞에서 누리던 그 영광으로, 이제 다시 아버지 앞에서 저를 영광스럽게 해 주십시오."라고 아버지와 함께했던 영광을 언급할 때 언급됩니다. 요한 복음 17 장 24 절은 또한 “세상 창조 이전부터 아버지께서 저를 사랑하시어 저에게 주신 영광을 그들도 보게 되기를 바랍니다.”라고 반복됩니다. 그리스도의 선재 개념은 하강 그리스도론(Christology)의 핵심입니다. 삼위일체론에 있어서 그리스도의 선재가 그리스도의 영원성과 신성의 중심이며 예수님이 삼위일체 하느님에서 둘째 페르소나인 성자라는 주장을 뒷받침해준다는 의미에서 오늘 제1독서의 의미가 있습니다. 즉 오늘 잠언의 지혜 선재론은 요한 복음의 로고스 선재론의 예표이며 이 선재론에 의해 예수님은 성자가 되시고 삼위 중 두 번째 위격이 됩니다.

본문에서 "지혜"라고 번역된 히브리어는 חָכְמה (호크마)이다. 호크마는 동사 חָכַם (하캄)에서 파생한 여성명사인데 חָכַם (하캄)은 ‘현명하다’란 뜻입니다. 인간의 지성 활동을 묘사할 때 흔히 이 동사를 사용하는데 욥기와 잠언서와 전도서에 집중되어 나옵니다. 하캄이란 동사의 뜻은 삶의 경험에 관련된 이해관계나 도덕, 세속적인 처세술이나 공교한 기술, 도덕적 감수성이나 야훼 하느님의 뜻을 따라 사는 경험의 세계까지도 두루 감쌉니다.

오늘 복음은 진리의 영에 관해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이 십자가 처형을 당하기 전에 제자들에게 주신 ‘고별 말씀’이 요한 13-17장에 나오는데 오늘 말씀도 그 중의 일부입니다. 일명 입니다. 상당히 긴 구절입니다. 예수님은 이제 곧 십자가의 길을 가야 합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처할 엄중한 상황을 예상하고 두려워하지 말라고 위로하면서 자신이 떠나면 성령이 와서 제자들과 함께 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성령이 제자들을 어떻게 구체적으로 도울 것인지에 대해서 13,14절에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그분 곧 진리의 영께서 오시면 너희를 모든 진리 안으로 이끌어 주실 것이다. 그분께서는 스스로 이야기하지 않으시고 들으시는 것만 이야기하시며, 또 앞으로 올 일들을 너희에게 알려 주실 것이다. 그분께서 나를 영광스럽게 하실 것이다. 나에게서 받아 너희에게 알려 주실 것이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진리의 영은 그리스어 성경에 나오는 ‘το πνεῦμα τῆς ἀληθείας 토 프뉴마 테스 알레테이아스’의 번역입니다. ἀληθείας(알레테이아)는 ‘제거하다’ ‘벗어나다’‘박탈하다’는 뜻의 부정 접두사 ἀ‘아’와 망각이나 은폐라는 뜻의 명사 ληθε‘레테’의 합성어입니다. 즉 알레테이아는 망각에서 벗어났다, 은폐에서 벗어났다는 뜻입니다. 여기에서 레테(그리스어: Λήθη, 영어: Lethe)는 그리스 신화 속의 망각의 여신이자 강입니다.

그리스 신화에 의하면 죽은 사람이 이승에서 저승으로 넘어가려면 다섯 개의 강을 건너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첫 번째 강은 고통의 강으로써 ‘아케론’이라고 합니다. 망자는 그 강을 건너면서 죽음의 고통을 씻어냅니다. 두 번째 강은 비탄과 통곡의 강으로써 ‘코키토스’라고 합니다. 이 강을 망자는 건너면서 모든 비탄과 통곡을 내려놓아야 합니다. 세 번째 강은 ‘플레게톤’이라는 불의 강입니다. 여기서 망자는 분노와 감정의 찌꺼기를 다 태워버립니다. 네 번째 강은 ‘스틱스’라고 하는데 불사의 강입니다. 이 강을 건너면서 망자는 이제 더 이상 죽지 않습니다. 다섯 번째 강은‘레테’입니다. 망자는 레테 강물을 마시고 이승에서의 모든 기억을 잊게 됩니다.

오늘 복음에서 요한은 성령을 ‘토 프뉴마 테스 알레테이아스’, 즉 ‘알레이테의 영’이라고 표현했습니다. 이것은 탈망각 혹은 탈은폐의 영이라는 뜻입니다.

요한복음 기자는 ‘진리의 영’인 성령이 바로 숨어계신 하느님을 알게 해준다고 말합니다. ‘그분 곧 진리의 영께서 오시면 너희를 모든 진리 안으로 이끌어 주실 것이다.’(요한 16,13)는 말씀이 바로 이 사실을 가리킵니다. 하느님을 인식하게 하는 것이 바로 성령, 삼위일체 하느님을 알게 해주시는 영이 바로 알레테이아의 영입니다. 성령을 통하지 않고는 궁극적인 진리와 천주교 4대교리 삼위일체 진리를 깨달을 수 없습니다. 머리가 좋다거나 인격이 좋다고 해서 예수가 하느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믿을 수는 없습니다. 성령을 통해서만 그것을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성령은 우리에게 믿음을 가능하게 하시는 분, 앞으로 다가올 일을 일러주실 분입니다. 즉 예수님께서 다하지 못한 말씀을 성령께서 계속 전달해 주시며 그리스도의 가르침과 하느님의 구원사업이 가능케 하십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또 앞으로 올 일들을 너희에게 알려 주실 것이다. 나에게서 받아 너희에게 알려 주실 것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볼 때 하느님 안에서 삼위의 역할이 분담되어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 안에 선후 우열의 관계는 없지만 아버지가 계시고 아들이 계시며 또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에서 그 관계를 가능케 하시는 성령이 계십니다. 그런데 이 세 역할이 고유하면서도 그러나 하느님은 한 분이십니다.

성부 하느님은 이 세상을 당신의 뜻대로 창조하시고 세상을 당신의 섭리대로 이끌어 가시며, 우리의 기도를 들어주시는 분이십니다. 주로 구약성경에서 자신을 충분히 드러내셨습니다.

성자 하느님 즉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 세상에 강생하시어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시고 당신 자신을 십자가에서 제물로 바치심으로써 우리와 하느님과의 관계를 새롭게 해주셨습니다. 신약성서가 그분이 어떻게 사셨는지를 분명하게 드러내고 있습니다.

성령 하느님은 성부와 성자의 위격적인 사랑에서 발하시는 진리의 영으로서, 우리 안에 사랑의 불을 피우십니다. 그분은 우리 안에 머무시면서 우리를 하느님께로 이끄시고, 우리를 성화시키시는 분이십니다.

성부이신 아버지께서 창조사업을 주도하셨다면 지혜이신 말씀께서는 강생과 십자가를 통해 구속사업을 수행하셨고 그리고 성부와 성자께서 발하시는 성령께서는 성부와 성자의 일을 가능케할 뿐만 아니라 성자가 이룩한 구원사업을 계속 진행하십니다. 그러나 하느님이 세 위격을 가지고 게시다고 하여 따로 독립적으로 분리시킬 수는 없습니다.

리옹의 이레네우스(AD 130-202) 교부의 가르침은 이렇습니다.
“모든 구원 역사는 성부로부터 유래하고, 성자에 의해서 실현되며, 성령에 의해서 충만히 성취됩니다. 성자와 성령은 성부이신 ‘하느님의 두 손’입니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 사이에 서열이나 등급이 있는가?, 성부가 성자보다 더 높지 않을까?, 세 위격 중에 성부가 제일 높으신 분이 아닌가?, 성부의 능력이 더 뛰어나지 않을까? 하는 질문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세 위격들 사이에는 어떠한 ‘우열’이나 ‘등급’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세 위격은 같은 본질, 같은 실체, 같은 본성을 이루시기에 동인한 신원과 동일한 능력을 지니고 계십니다. 삼위의 능력에는 높고 낮음이 없습니다. 협업입니다. 혼자 해도 다 잘 할 수 있습니다. 혼자 못해서가 아니라 함께 하기 위해서입니다. 혼자 잘 하는 것보다 함께 잘하는 것이 더 완전한 능력입니다.

옛날 교리서 요리문답에 의하면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은 “높고 낮음도 없고 먼저 계시고 후에 계심도 없어 도무지 온전히 같으사 한가지로 다만 한 천주시니라”라고 설명합니다. 높고 낮음이 없습니다. 오늘 미사 감사송에서 아버지이신‘주님의 영광은 아드님께도 성령께도 다름’이 없고,‘위엄으로는 같으심을 흠숭’한다고 고백합니다.

삼위는 경쟁하지 않습니다. 삼위는 서로 릴레이로 짝패이지만 시기 질투하지 않습니다. 서로 비교하지도 않습니다. 왕따시키지도 않습니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 삼위는 서로 다르지만 각각으로 하느님이시기에 서로 경쟁하거나 억압하거나 지배하지 않고 상대방의 격(格)을 침범하지 않습니다. 한 위격이 아니라 한 본체로 삼위일체이시기에 성부는 성자와 성령을 갈라치기를 하지 않습니다. 혐오는 물론 차별하지 않습니다. 정글 자본주의 인간 세계에서는 ‘공정한 경쟁’이 ‘야수적 경쟁’보다 낫다고 할지 모르겠지만 하느님의 세 위격 사이에 경쟁은 없습니다. 적자생존(適者生存)이 창조원리가 아니라 공생공락(共生共樂)이 삼위일체의 존재원리이며 창조원리입니다. 삼위가 서로 경쟁하거나 비교한다면 같은 영광이나 위엄이 되지 않습니다. 삼위는 우월감이나 열등감을 느끼지 않습니다. 성자가 자신의 죽음을 통해 인간의 구원사업을 이루었다고 자신의 업적을 자랑하지 않습니다. 서로가 서로의 진정성을 있는 그대로 인정합니다.

요즘 MZ세대들에게 유행하는 노래 중에 가수 장기호가 부르는 노래 중에 “부럽지가 않아”라는 노래가 있습니다. 패러디 영상물까지 나왔다고 합니다.

“야 너네 자랑하고 싶은 거 있으면 얼마든지 해. 난 괜찮어. 왜냐면 나는 부럽지가 않어 한 개도 부럽지가 않어. 근데 세상에는 말이야. 부러움이란 거를 모르는 놈도 있거든 그게 누구냐면 바로 나야”

노래를 들어보면 부럽다는 건지 부럽지 않다는 것인지 잘 모르겠지만 치기 어린 반어법이 아니라면 ‘부럽지 않다’는 사람이 부러워질 지경입니다. 이 가사는 에스엔에스를 이용하면서 자랑에 짓눌리고 부러움에 괴로워해본 젊은 세대가 느껴온 열등감이나 자격지심을 겨냥합니다. 장기하의 노래는 계속됩니다. “부러우니까, 자랑을하고, 자랑을하니까 부러워지고, 부러우니까, 자랑을하고 자랑을하니까, 부러워지고”

과잉정보로 다른 사람에 대해 너무 많이 알고 비교하며 부러워하는 시대입니다. 어떤 때는 제주도에서 요가하며 욜로하는 이효리의 삶이 부럽고, 어떤 때는 에스엔에스에 명품을 두른 친구의 사진을 보고 부러워합니다. 잘 나가는 사람과 자신을 비교하기 쉬운 환경이 되었습니다. SNS에서는 모든 대상이 과장되기 쉽고 극단적인 한 면만이 노출되기 쉽습니다. 특별한 성공담, 인싸들의 서로 추앙하기, 고급스러운 취향과 덕담만큼 누군가의 박탈감이 존재하기 마련입니다. 스스로 절제하고 살펴도 결코 피해가기 어려운 일입니다. 나의 누림만큼 타자의 상처가 동반되는 것이 세상사의 이치입니다. 바로 이것이 제가 유배생활을 하면서 서서히 깨달아가는 사실 중의 하나입니다. 그것은 타인의 기회를 직접 뺐고 빼앗기기도 하지만 간접적인 방식으로라도 성공한 자의 그림자에는 포기한 자의 회한이 숨어있다는 눈물의 진실입니다. 경쟁사회에서 피할 수 없는 현실입니다. 인생은 부지불식간에 무수한 타자와 약자에게 상처를 주는 일의 연속입니다. 매일 걷는 산책길에도 벌레들의 짓밟힘이 있고 약하고 여린 풀들의 비명이 있습니다.

유튜브나 사진을 보고 신기해하거나 부러운 정도에서 스톱하면 좋겠지만 자꾸 몰두하다 보면 점점 형언하기 어려울 정도로 ‘나는 뭐꼬?’하는 자괴감이 들 수 있습니다. 이른바 ‘반지성주의’에 빠지고 자신의 가치관이 사라지기 시작합니다. 스마트폰의 존재는 약이지만 마약이 되기도 합니다. 한 회사의 조사에 따르면 우리가 하루에 스마트폰을 만지는 수가 2000번 이상이라고 합니다. 수시로 뉴스 혹은 가짜뉴스, 사진, 짧은 영상 등을 계속 봅니다. 이정도 되면 주객이 전도되어 이제 스마트폰이 나의 목자이시고 주(主)님이십니다. 요즘 시대에는 가끔 정보의 양을 조절할 필요가 있습니다. 인스타그램은 비활성화하고 SNS 다이어트도 필요합니다.

삼위일체 하느님의 삼위는 서로 부러워하지 않습니다. 삼위일체 하느님을 믿는 사람은 자신의 에스엔에스(SNS)에 명소 여행이나 먹방이나 멋진 생활을 과장되게 올리며 우월감을 과시하지 않습니다. 이런 가벼운 행동을 진실로 믿고 위축되어 열등감을 느끼고 삶의 의욕을 잃는 사람이 의외로 많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처지를 비관하고 절망하며 자살하고 싶은 사람들에게 희망을 뺏지 말아야 합니다. 에스엔에스(SNS)를 보며 ‘쟤는 연애도 하고 놀러도 다니네, 공부도 잘하고’자신과 남을 비교하면 행복은 물건너 갑니다. 제가 가끔 하는 말이 있는데 그것은 ‘부러우면 진 것’이라는 말과 ‘비교하면 비참해진다’ 말입니다. 이웃이 행복해야 나도 행복합니다. 친구가 불행하면 나도 불행해집니다. 연구에 의하면 내 친구 중에 행복한 친구가 한 명 추가될 때마다 내가 행복해질 가능성이 9% 증가하고 불행한 친구가 한 명 추가될 때마다 내 행복이 7% 감소합니다. 그리고 가까운 친구가 행복하면 내가 행복해질 확률이 15% 증가한다고 합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오늘은 삼위일체 대축일입니다. 삼위일체는 나와 너의 다름이 폐기되지 않고 성령 안에서 서로 일치하는 궁극적 통일을 뜻합니다. 위격으로는 각각이시고 본성으로는 한 분이시기에 성부는 성자와 성령의 사적이고 개별적인 영역을 건드리지 않습니다. 우리가 믿는 삼위일체 하느님은 하느님의 공동성, 개방성, 상호내주성의 모습들을 지니시는 분이십니다. 우리는 성부의 자녀이고 성자의 지체이며 성령의 궁전입니다.

동방의 신학자들은 셋이 아니면서도 셋인 분의 신적인 삶에의 이러한 동등한 참여를 나타내기 위해 페리코레시스(perichoresis, 삼위일체의 상호침투)라는 말을 만들어 냈습니다. 페리코레시스는 바퀴의 회전과 같이 원이나 주기적인 회전운동을 말한다. 삼위는 서로가 서로를 포용합니다. 개방적이다. 삼위는 각각으로 갇혀 있는 모나드나 다락방이나 에코 챔버가 아닙니다. 하나의 닫힌 원이 아닙니다. 서로 열려있습니다. 세 개의 원이 뫼비우스로 연결되어 춤을 춥니다. 그것은 원운동 속에서 한 “위격”이 다른 위격을 돌아 역동적으로 움직이고, 다른 위격과 상호작용을 하며, 다른 위격에 침투하고, 다른 위격과 함께 엮어지는 것을 말한다. 성부 성자 성령은 협업의 상징입니다. 서로 타자의 입장에 서서 자신을 내어놓습니다. 너의 입장에 서서 생각하고 판단할 수 있는 능력의 영성입니다. 역지사지의 영성입니다. 상대방의 입장에서 생각하고 판단하는 영성입니다.

본당이든 어느 공동체이든 다른 시각과 목소리를 조금도 허용치 못하고 삿대질하는 공동체는 똥볼을 찰 수밖에 없고 무말랭이처럼 맥없이 쪼그라들 수 밖에 없습니다. 내가 꼰대인지 아닌지 구별하는 방법에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그 첫째가 내보다 어린 후배가 나를 반대하는 말을 할 때 순간 기분이 어떤가이라고 합니다. 나보다 나이나 경력이 적은 사람이 이의를 제기할 때 옳고 그르고를 떠나 기분이 나쁘면 이미 꼰대의 수준이 있다고 합니다. MZ, 2030들도 20세대들은 30들, M세대들을 꼰대라고 30들은 ‘요즘 것들’이라고 한답니다. 그런데 삼위일체신학은 우리 공동체에 대하여 각각의 페르소나들이 서로에게 자신을 열어서 개방하며 서로를 자신 안으로 포용할 수 있도록 초대합니다.

마지막으로 첨언하면, 프랑스 리옹 가톨릭대학 기초신학자 르네 비르굴레 신부는 삼위일체를 명사로 쓰지만 동사로 읽고 이해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인 적이 있습니다. 프랑스어로 삼위일체는 명사형' Trinité' 즉 뜨리니떼인데 이것이 뜻하는 바는' Trinite'r가 동사라는 주장입니다. 명사형 접미어 ‘–ité’를 동사형 접미어 ‘–er’로 바꾸어 이해해야 삼위일체를 제대로 이해한다는 뜻입니다. 프랑스어에서 접미어 ‘–ité’는 형용사나 동사에 붙어 특성이나 상태를 나타냅니다. 역동성을 잃게 된다는 것입니다. 대조 언어학(対照言語学; contrastive linguistics)에 따르면 프랑스어는 형식적으로 명사 중심의 언어이기에 이해할 때는 동사로 풀어서 이해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예를 들면 히딩크 감독이 한 유명한 말 중에 ‘배고프다’가 있는데 프랑스어로 ‘J’ai faim’입니다. 영어로는‘ I’am hungry’이고 우리 말로는 간단히 ‘배고파’인데 프랑스어에서는 구태여 명사형 ‘faim(배고픔)’을 사용합니다. 대조 언어학에서 동아시아 말은 대개 동사 중심적인데 그 극에 있는 말이 우리나라 말이고, 유럽 말은 대개 명사 중심적인데 그 극에 있는 말이 프랑스어라고 합니다.

여하간 르네 비르굴레 신부는‘ Trinité’는 ‘Triniter’로 이해해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둘 다 발음은 마찬가지이지만 후자는 동사임을 강조하는 표현입니다. 즉 삼위일체는 명사이지만 그 의미는 정황적 동사라는 것입니다. 삼위일체란 추상적인 개념이나 정적인 지위같은 것이 아니라 역동적인 행위의 존재를 의미합니다. 그래서 ‘Triniter’를 동사형으로 구태여 해석한다면 ‘삼위일체하다’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실천하는 행동이 중요합니다. 삼위일체는 머리로 인식하는 것이 아니라 삶으로 실천하고 사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삼위일체를 명사로 이해했기에 박물관에 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삼위일체는 고정된 박제나 결과가 아니라 현재진행 중인 과정이며 행동이고 실천해야 하는 진리입니다. 타자와 약자의 다름을 인정하고 배려하고 환대하는 삶이 삼위일체하는 삶입니다.

​아무쪼록 이번 한 주간 삼위일체하는 한 주간이 되면 좋겠습니다. 서로 무시하거나 비교한다면 상호주체적이지 않고 우월감이나 열등감을 느끼면 같은 존엄이 아닙니다. 또한 삼위는 각각으로 고립되어 닫혀 있는 격(格)이나 페르소나가 아닙니다. 삼위일체의 삶은 ‘따로 또 같이’이며 '같이 또 따로'입니다. 일방통행이 아닙니다. 독선과 배제가 아니고, 평등·공정·정의입니다. 포용하되 흡수하지는 않습니다. 상대를 있는 그대로 존중합니다. 소통, 포용, 협력 그리고 공감이 삼위일체의 현대적 의미입니다. 삼위는 사랑으로 일치를 이루고, “하느님은 사랑”(1요한 4,6)이시기 때문입니다. 이번 한 주간 동안 삼위일체합시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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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대교구 박태범 라자로 신부
2022년 6월 12일
  | 06.10
513 46.8%
위격으로는 각각이시요 본성으로는 한 분이시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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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위일체 대축일 미사의 감사송을 보면 이렇게 고백하고 있습니다.
“아버지께서는 아드님과 성령과 함께 한 하느님이시며 한 주님이시나,
한 위격이 아니라 한 본체로 삼위일체 하느님이시옵니다. 주님의 계시로
저희가 믿는 주님의 영광은, 아드님께도 성령께도 다름이 없나이다.
그러므로 위격으로는 각각이시요 본성으로는 한 분이시며,
위엄으로는 같으심을 흠숭하오며, 영원하신 참 하느님을 믿어 고백하나이다.”

용어들이 어려운 말이기도 하지만, 우리가 일상적으로 쓰는 말이 아니어서 비현실적인(너무 추상적이고 관념적인) 교리라는 느낌을 줍니다.

‘위격, 본체, 본성’을 좀 더 쉬운 말로 바꿀 수는 없을까? 라는 생각이
들기도 하는데, 다른 적당한 용어가 없습니다.

<삼위일체 교리를 설명하려고 어떤 사물로 예를 드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삼위일체를 잘 설명할 수 있는 사물은 우리 인간 세상에는 없습니다. 억지로 설명하다가 교리를 왜곡하는 일은 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면 “그렇다고 하니까 그런가 보다.”라고 그냥 넘어가야 하는가?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가 지금은 거울에 비친 모습처럼 어렴풋이 보지만,
그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마주 볼 것입니다.
내가 지금은 부분적으로 알지만, 그때에는 하느님께서 나를 온전히 아시듯 나도 온전히 알게 될 것입니다(1코린 13,12).”

‘아는 것’이 먼저가 아니라 ‘믿는 것’이 먼저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이해가 안 되어도 무조건 믿어라.”라고
윽박지르는 것은 아닙니다.
충실하게 신앙생활을 하다 보면, 언젠가는 삼위일체 교리를 비롯해서
알아듣기 어려운 교리들을 깨닫게 되는 때가 오고,
그 깨달음을 통해서 더 깊은 믿음을 갖게 됩니다.

(이것은 머리가 좋거나 나쁜 것과는 상관없는 일입니다.
무슨 공부를 많이 하고, 무슨 학위를 딴다고 해서
그 깨달음을 얻는 것도 아닙니다.
충실한 신앙생활이 가장 중요합니다.)

요한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지금까지 하느님을 본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느님께서 우리 안에 머무르시고 그분 사랑이
우리에게서 완성됩니다(1요한 4,12).”

이 말은, ‘삼위일체의 신비’ 같은 ‘하느님의 신비’를
어떻게 대할 것인지에 관한 ‘지침’으로 삼을 수 있는 말입니다.

“지금까지 하느님을 본 사람은 없습니다.”라는 말은,
‘하느님의 신비’를 온전히 깨닫고 이해한 사람은 없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오늘날까지도 그렇고, 앞으로도 그럴 것입니다.
종말의 날에 하느님 나라가 완성될 때까지는.)

그래도 하느님을 체험하고, 하느님의 신비를 조금이라도 깨달을 수 있는
방법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사랑’입니다.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느님께서 우리 안에 머무르시고”라는 말은,
사랑을 통해서 하느님을 체험할 수 있다는 말로 해석됩니다.
“그분 사랑이 우리에게서 완성됩니다.”라는 말은, “완전한 사랑에 도달하면, 하느님의 신비를 온전히 깨닫게 된다.”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사랑’이라는 것을 온전히 깨닫고 이해하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닌데,
머리가 아니라 ‘삶’으로 실천하면
누구든지 그 ‘완성’에 도달할 수 있다고 믿습니다.)

하느님에 대한 믿음과 사랑으로 하느님과 일치를 이루고,
온몸으로 삼위일체의 신비를 받아들인 분이 계십니다.
그분은 바로 성모님입니다.

“성령께서 너에게 내려오시고 지극히 높으신 분의 힘이 너를 덮을 것이다. 그러므로 태어날 아기는 거룩하신 분, 하느님의 아드님이라고 불릴 것이다(루카 1,35).”

이 말을 보면, 아버지 하느님과 성령과 아들 예수님이 구분되어 있고,
하시는 일도 구분되어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사람의 힘으로는 불가능한 일, 그러나 하느님의 힘으로는
가능한 일인 ‘동정 잉태’와 ‘메시아 강생’이라는 일 안에서
삼위일체를 이루고 있습니다.

성모님께서 천사의 말만 듣고서 곧바로 삼위일체의 신비를
온전히 알아듣고 이해하셨다고 생각하기는 어렵습니다.
그렇지만 성모님께서는 삼위일체의 신비를 온몸으로, 또 ‘온 삶’으로
받아들이셨고, 예수님의 수난, 죽음, 부활, 승천 때까지
예수님과 함께 하시면서 그 신비를 깨닫고 이해하셨을 것입니다.

삼위일체의 신비는 하느님의 본성에 속한 것이니
인간의 언어로 표현하는 데에는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그 신비가 우리에게 계시 된 이유가 무엇인지 말하는 것은
어렵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바로 우리의 ‘구원’입니다.

우리가 모두 구원받는 것이 아버지 하느님의 뜻입니다.
아버지의 그 뜻을 이루기 위해서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리고 성령께서는 우리 안에 머물러 계시면서,
구원을 향해서 나아가는 우리를 보호해 주십니다.

요한 사도는 이렇게 설명합니다.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은 바로 그분의 계명을 지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분의 계명은 힘겹지 않습니다.
하느님에게서 태어난 사람은 모두 세상을 이기기 때문입니다.
세상을 이긴 그 승리는 바로 우리 믿음의 승리입니다. 세상을 이기는
사람은 누구입니까?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믿는 사람이
아닙니까? 그분께서 바로 물과 피를 통하여 세상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물만이 아니라 물과 피로써 오신 것입니다.
이것을 증언하시는 분은 성령이십니다.
성령은 곧 진리이십니다(1요한 5,1-6).”

위격으로는 ‘삼위’이지만, 본체로는 ‘한 분’이라는 말에 대해서
‘어떻게’ 그럴 수 있느냐고 물으면 ‘모른다.’고 대답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왜’ 그래야 하느냐고 물으면(그 신비를 왜 우리에게
드러내셨느냐고 물으면), 우리를 사랑하시니까, 우리가 구원받아서
하느님의 사랑에 참여하기를 바라시니까, 라고 대답할 수 있습니다.

(믿음도 없고 사랑도 없는 사람들에게는 어떻게 표현을 하든지 간에
말장난으로 들리겠지만, 믿고 사랑하는 우리는 믿음과 사랑을 통해서
점점 더 깊이 하느님의 신비 안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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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
2022년 6월 12일
  | 06.11
513 46.8%
우리는 하느님을 세 개의 이름으로 부르면서 그분과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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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복음은 성령과 예수님과 하느님 아버지가 서로 어떤 관계 안에 계시는지를 말하고자 합니다. 예수님의 죽음에 절망하여 흩어졌던 제자들이 그분이 부활하셔서 하느님 안에 살아 계시다고 믿으면서 다시 모여들었습니다. 그들은 함께 모여 예수님의 삶을 회상합니다. 그러면서 그들은 예수님이 평소에 하느님을 아버지라 부르면서 몸소 그분의 생명을 사셨다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이 깨달음과 더불어 제자들은 심기일전하여 예수님이 사셨던 하느님의 생명을 그들도 살아서 하느님의 자녀가 되어야 한다고 믿었습니다. 그들은 다른 사람들도 그 자녀 됨의 길에 초대하기 위해 그들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가르칩니다. 그 가르침이 기록으로 남아 우리에게 전달된 것이 신약성서의 여러 문서들입니다.

제자들은 그들 안에 일어난 이 변화를 하느님의 영이 하신 일이라고 믿었습니다. 그 변화는 그들이 예기치 못한 새로움이었습니다. 그들은 그 새로움이 하느님의 숨결이신 성령으로부터 온다고 믿었습니다. 그들이 기도하던 구약성서의 시편(104,30)에는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당신께서 입김을 불어 넣으시면 다시 소생하고 땅의 모습은 새로워집니다.” 하느님의 입김이신 성령이 오시면 사람들 안에 하느님의 일이 소생하고 삶의 모습이 새로워진다는 말입니다.

오늘 우리가 들은 복음은 이 시편이 말하는 것을 예수님의 입을 빌려 새롭게 표현합니다. ‘진리의 영께서 오시면 너희를 모든 진리 안으로 이끌어 주실 것이다.’ 성령이 오시면 예수님 안에 나타난 진리, 곧 하느님의 일을 깨닫게 해주신다는 말입니다. 복음은 이어서 말하였습니다. ‘그분께서는 스스로 이야기하지 않으시고 들으시는 것만 이야기하시며...나를 영광스럽게 하실 것이다.’ 성령이 하시는 일은 예수님에 관해 제자들을 깨닫게 하는 것이고, 그것으로 제자들이 예수님을 새롭게 알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아버지께서 가지고 계신 것은 모두 다 나의 것이다.’는 말씀도 있었습니다. 제자들이 예수님 안에 깨닫는 일은 실제로 하느님이 어떤 분인지를 알린다는 말씀입니다. 성령이 제자들 안에 하느님의 생명을 살아있게 하여 그들이 예수님 안에 보았던 생명을 하느님의 것이라고 새롭게 인식하게 하였습니다. 그것이 제자들 안에 일어난 새로움이었습니다.

오늘은 삼위일체 축일입니다. 삼위일체라는 단어를 세 분이신 하느님이 실로 오묘하게 하나로 계신다는 뜻으로 이해하지 말아야 합니다. 삼위일체는 알아들을 수 없는 하느님의 깊은 신비를 믿으라고 하늘에서 내려준 단어가 아닙니다. 하느님은 세 분인데 한 분이라는 수수께끼 같은 말을 맹목적으로 믿으라는 단어도 아닙니다.

예수님 안에 하느님의 생명이 어떤 것인지 구체적으로 나타났고, 제자들 안에 오신 성령은 그 사실을 깨닫게 하였고, 그 깨달음과 실천으로 제자들은 하느님의 자녀인 그리스도 신앙인이 되었습니다. 그리스도 신앙인은 이제 하느님에 대해 생각하면, 인간으로 이 세상에 사셨던 예수님, 그분이 아버지라 부르신 하느님, 그리고 그들 안에서 일하시는 성령, 이렇게 세 개의 이름을 사용하게 되었습니다. 신약성서는 삼위일체라는 단어를 아직 사용하지 않습니다.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모두 유대인이었습니다. 그들은 한 분이신 야훼를 믿었습니다. 구약성서 신명기는 말합니다. “우리의 하느님은 야훼 한 분뿐이시다.”(6,5). 그들은 또한 하느님이 세상만물을 창조하실 때, “하느님의 영이 내려 오셨다.”(창세 1,2)는 말씀도 알고 있습니다. 초기 그리스도인들이 예수님의 삶을 회상하면서 깨달은 것은 그분이 아버지라 부르신 하느님의 생명이 그분 안에 실제 있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 깨달음은 그들에게 새로움이었습니다. 그 깨달음으로 그들은 유대교를 떠나 예수님을 주님이라 부르며 그리스도 신앙인이 되었습니다. 그들은 그것이 성령이 하신 새로움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들에게는 하느님과 관련된 호칭이 세 개가 되었습니다.

아버지이신 하느님과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와 그들 안에 숨결로 살아 계신 성령입니다. 바울로 사도는 당신의 서간을 다음과 같은 기도로 끝맺습니다. “주님 예수 그리스도의 은총과 하느님의 사랑과 성령의 친교가 여러분 모두와 함께 하시기를 빕니다.”(2고린 13,13). 바울로 사도는 이렇게 세 분의 이름을 들어 축복의 인사를 하십니다.

예수님 안에서 우리가 발견하는 하느님은 실제 하느님과 다르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3세기부터 5세기에 걸쳐서 생긴 주장입니다. 그리고 또 성령과 하느님이 서로 다르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이런 주장들 앞에 신앙인들은 삼위일체라는 단어를 사용하기 시작합니다.

예수님 안에 우리가 알아듣는 하느님은 실제 하느님이시고, 신앙인 안에 일하시는 성령도 실제 하느님이시라는 것을 말하기 위해 만들어진 삼위일체라는 단어입니다. 이 단어로써 초기교회가 말하는 것은 예수님 안에서 우리가 알아듣는 하느님은 실제 하느님과 다르지 않고, 신앙인들 안에 숨결로 일하시는 성령도 실제 하느님의 숨결이라는 것입니다.

삼위일체라는 단어는 하느님과 우리가 얼마나 다양하게 또 깊이 연결되어 있는 지를 고백합니다. 이 단어는 세 분이신 하느님이 하나로 뭉쳐있다는 말이 아닙니다. 이 단어는 우리가 어떻게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지를 말합니다. 하느님은 우리에게 생명을 주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느님을 아버지라 부릅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의 자녀 된 사람의 삶이 어떠해야 하는 지를 당신 삶으로 보여주셨습니다. 또 하느님은 당신의 숨결을 우리 안에 주셔서 그 숨결로 우리가 당신의 참다운 자녀가 되어 살도록 하십니다. 삼위일체라는 단어는 하느님이 이렇게 우리와 밀접하게 연결되어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사실을 말합니다. 하느님 따로 우리 따로 분리해서 생각할 수 없는 하느님이십니다.

삼위일체라는 단어는 우리에게 추상적 이론이나 객관적 지식을 가르치지 않습니다. 이 단어는 하느님이 인류 역사 안에 다양하게 또 은혜롭게 일하셨고, 현재도 일하신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상기시킵니다. 아버지, 예수 그리스도, 성령, 이렇게 세 분의 이름이 있는 것은 하느님이 은혜롭게 또 다양하게 우리와 함께 계신다는 말입니다.

그리스도 신앙인은 예수 그리스도의 삶을 귀감으로 삼고, 성령을 자기의 숨결로 하여 하느님 아버지의 자녀 되어 사는 사람입니다. 그리스도 신앙인은 하느님에 대해 생각하고 말할 때, 그분을 멀리 높이 계시는 분으로만 생각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하느님을 세 개의 이름으로 부르면서 그분과 함께 있습니다.

하느님은 우리 존재의 기원이시기에 우리는 그분을 아버지라 부릅니다. 우리는 그분의 자녀로 사는 길을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배웁니다. 그리고 하느님은 우리 안에 영으로 숨결과 같이 은밀히 일하십니다. 삼위일체라는 단어는 이렇게 우리와 밀접히 함께 계시는 은혜로우신 하느님을 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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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교구 서공석 신부
  | 06.11
513 46.8%
오늘은 삼위일체 대축일입니다.
삼위일체 교리는 하느님이 한 분이신데 위(位)는 세 위라는 말로 흔히 설명됩니다. 그러나 삼위일체라는 단어는 하느님 신비의 모든 이론을 요약하지 않습니다.

이 단어는 4세기부터 7세기에 걸친 신학자들의 논쟁의 결과 그리스도 신앙 언어 안에 나타나서 통용되고 있습니다. 이 단어는 구약성서에도 신약성서에도 없습니다. 어느 한 시기에 하느님에 대한 말이 왜곡되자, 그것을 방지하기 위해 신학자들이 사용하기 시작한 단어입니다.

그리스철학에 물든 옛날 신학자들이 예수 그리스도와 성령이 하느님 아버지와 어떤 관계 안에 계신지를 알아듣기 위해 오래 동안 고심하고 논쟁한 결과를 요약하여 담은 삼위일체라는 단어입니다. 오늘 우리에게는 그런 논쟁이 없습니다. 따라서 하느님 아버지와 예수 그리스도와 성령의 상호 관계를 알아듣기 위해 삼위일체라는 옛날의 이론을 끌어들이지 않아도 됩니다.

모세로부터 비롯된 유대교 신앙의 핵심은 하느님이 사람들과 함께 계신다는 것이었습니다. 그 하느님은, 오늘 제1독서, 출애급기에서 우리가 들은 바와 같이, “자비와 은총의 하느님...사랑과 진실이 넘치는” 하느님이십니다. 따라서 하느님을 믿는 사람은 함께 계시는 하느님에 준해서 실천하며 삽니다. 하느님의 자비와 은혜로우심, 사랑과 진실을 실천하면서 살아야 한다는 말입니다. 구약시대에 율법은 그 실천에 도움을 주기 위한 지침이었습니다.

이런 이스라엘 신앙의 전통 안에 예수라는 분이 출현하였습니다. 유대교 기득권자들은 율법을 잘 지키고 제물봉헌에 충실한 사람만 하느님이 아끼신다고 가르쳤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생각은 달랐습니다. 예수님은 율법을 잘 지키지 못하고 제물 봉헌에 충실하지 못한 사람도 ‘자비와 은총의’ 하느님은 함께 계심에서 제외하지 않으신다고 믿으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이 함께 계신 것은 사람을 죄인으로 판단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사람이 하느님의 자비와 사랑을 배워서 실천하게 하기 위한 것이라고 믿으셨습니다. 예수님은 당신이 믿으신 대로 실천하셨습니다. 병자들을 고쳐 주고, 죄인으로 낙인찍힌 사람들에게 용서를 선포하셨습니다. 그것은 하느님의 자비와 사랑을 실천하신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그런 실천은 그 시대 유대교 지도자들에게는 도전으로 보였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잡혀서 십자가에서 생을 마치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하신 일은 하느님의 자비와 은총을 실천하신 것이었기에 하느님은 그분을 당신 안에 살려 놓으셨습니다. 그것이 그분의 부활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중심이 된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의 그런 실천이 하느님의 자비와 사랑을 보여 주신 것이라 믿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하신 일을 그들도 실천하면서 예수님을 따른다고 믿었습니다. 하느님은 예수님을 당신 안에 되살려 놓으셨고, 신앙인들 안에도 예수님의 도전과 실천이 살아나게 하셨습니다.

예수님 안에 하느님이 살아 계셨듯이, 신앙인들의 같은 도전과 실천 안에도 하느님은 숨결로 살아 계셨습니다. 그 하느님의 숨결을 성령이라 부릅니다. 하느님은 사람들과 함께 계시되, 예수님이 하신 자비와 사랑을 실천하는 사람들 안에 그 숨결로, 곧 생명으로 살아 계신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이 자비와 사랑을 실천하신 것은 인류역사의 무자비와 독단주의와 단죄에 대한 도전이었습니다. 그 시대 유대교는 모세와 더불어 시작된 하느님에 대한 체험을 잊어버리고, 그 무자비와 독단주의와 증오를 실천하면서 하느님의 일을 한다고 착각하였습니다. 로마 총독과 유대교 지도자들이 합세하여 예수님을 제거한 것은 인류역사의 무자비와 독단주의와 단죄를 실현한 것이었습니다.

하느님을 모르는 두 개의 기득권이 어울려서 실현한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자비와 사랑은 하느님의 것입니다. 예수님을 본받아 역사 안에 발생하는 자비와 사랑의 도전들 안에 하느님은 숨결로 살아계십니다. 그것이 우리 안에 살아 계신 성령이십니다. 하느님은 인류역사 안에 자비와 사랑으로 살아 계십니다. 그 생명을 강도 높게 실천하신 분이 예수님입니다. 신앙인들은 그분을 하느님의 아들이라 부릅니다. 하느님의 생명을 충만히 사셨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을 따라 자비와 사랑을 실천하는 사람들 안에 하느님은 아버지로 살아 계십니다. 하느님은 인간이 실천하는 자비와 사랑의 기원이라는 말입니다. 이제 하느님을 예배할 장소는 사마리아인들이 주장하듯이 갈릴래아의 산도 아니고, 유다인들이 주장하듯이 예루살렘의 성전도 아닙니다. 요한복음서는 말합니다. “하느님을 예배하는 이들은 영과 진리 안에서 예배합니다”(4,24). 하느님의 숨결이신 영과 예수님이 보여주신 진리인 자비와 사랑을 실천하는 사람이 참다운 예배를 한다는 뜻입니다.

오늘 복음은 “하느님은 이 세상을 극진히 사랑하셔서 외아들을 보내 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든지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여 주셨다”고 말했습니다. 하느님은 인류역사 안에 예수님을 태어나게 하셔서 자비와 사랑을 실천하는 인간 모습을 보여주셨습니다. 하느님은 예수님이 보여주신 그 자비와 사랑을 실천하는 사람들 안에 아버지로 살아계시면서 영원한 생명, 곧 당신의 숨결을 주신다는 뜻입니다.

삼위일체라는 단어는 하느님이 역사 안에 세 개의 이름을 남기셨다는 사실을 기억하게 합니다. 하느님은 아버지이십니다. 우리가 실천하는 자비와 사랑의 원천으로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하느님은 예수라는 한 사람의 삶 안에 당신의 자비와 사랑이 어떤 실천으로 표현되는지를 보여 주셨습니다. 그리스도 신앙인은 그 자비와 사랑을 배워 역사 안에 새로운 도전과 실천을 합니다.

그들 안에 하느님은 숨결, 곧 성령으로 살아 계십니다. 우리가 하느님을 부르는 이름은 세 개이지만, 그 이름들은 모두 우리와 함께 계셔서 우리를 구원하시는 하느님을 의미합니다. 삼위일체라는 단어는 이런 사실을 우리에게 상기시킵니다. 하느님은 자비와 사랑의 원천이시고, 예수님은 그 자비와 사랑을 실제 살아 보여주셨으며, 성령은 그 자비와 사랑이 우리 안에 실현되게 하십니다.

하느님은 우리를 구원하시는 아버지이십니다. 예수님과 성령은 그 구원이 우리 안에 실현되게 하십니다. 예수님은 하느님 다음으로 높은 분이 아니고, 성령은 기적을 행하거나 이상한 소리를 내게 하는 분이 아닙니다. 하느님의 자비와 사랑이 우리 안에 살아 있게 하는 ‘협조자’(요한 14,16)들입니다. 삼위일체는 하느님이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으로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사실을 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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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교구 서공석 신부
  | 06.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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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으로 하나이신 하느님

오늘은 삼위일체 대축일을 지내고 있다. 이것은 지난 주일에 성령강림대축일을 지냄으로써 성령이 주님 부활의 가장 완성된 열매라는 것을 들었다. 또한 오늘 삼위일체대축일을 지내는 전례적인 이유는 예수 그리스도의 성탄과 수난 죽음 부활이라고 하는 구원의 업적이 모두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이 원천이 되심을 다시 한번 강조하고 이 탁월한 신앙의 신비를 거행하게 한 것이다. 더 깊이 생각하여야 할 것은 삼위일체의 신비가 신학자들의 사변에만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고뇌에 찬 생활 속으로 들어오게 되었다. 즉 그 하느님은 우리와 아무 관계없이 천상에서 우리의 공경의 대상만이 아니라, 우리 구원의 `주역`이시며, 우리 안에 계시는 분이시다. 그러기에 우리의 몸은 "성령의 살아있는 궁전"(1고린 6,19)이다. 바로 삼위일체는 그리스도인이 살고 움직이고 행동하는 생명의 공간이시며, 자신의 삶의 모델이시다.

제2독서: 2고린 13,11-13: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의 사랑과 은총과 친교

바오로 사도는 신자들에게 성삼위의 이름으로 인사하고 있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총과 하느님의 사랑과 성령께서 이루어주시는 친교를 여러분 모두가 누리시기를 빕니다"(13절). 오늘 독서의 내용은 전체적으로 전례 때에 거행되던 형제적 사랑의 행위로 볼 수 있다. 당시의 신자들은 서로 포옹하면서 `삼위일체`의 축복을 주고받았다. 그 축복은 본질적으로 "사랑과 평화의 하느님"(11절) 안에서 통교를 이루어 서로 결합되기를 바라는 것이었다. 바오로 사도의 말씀은 우선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총`이 먼저 나오고, 다음에 `하느님의 사랑` 그리고 마지막으로 `성령께서 이루어주시는 친교`가 나온다. 전형적인 형식을 따르지 않고 있다.

그리스도인이 하느님께로 가는 여정에서 처음 만나게 되는 실체가 바로 그리스도이다. 그분은 항상 우리에게 먼저 오시며 구원해 주시는 분이시다. 그러기에 구원의 은총은 `무상`임을 알게 해주며, 우리 생활의 모든 것이 `은총`임을 체험하게 한다. 가장 근본적인 은총이 바로 그분이시다. 다른 은총들은 그 다음에 그분으로 말미암아 주어지는 것이다. 이렇게 그리스도를 만날 수 있을 때 하느님의 모습, 즉 사랑의 참 모습도 발견하게 해 준다. `하느님의 사랑`은 그분이 우리에게 베풀어주시는 은총의 선물이 크면 클수록 그만큼 크다.

하느님의 가장 큰사랑으로 표현된 선물이 바로 그리스도이시다. 그분은 하느님의 아들이시고 또 하느님이시며 하느님을 완전히 계시하시는 결정적인 `말씀`이시기 때문이다. 즉 그분은 `아들`로서 우리에게 나타나시고 동시에 `아버지`로서의 하느님의 고귀한 실체를 우리에게 열어 보여주신다. 그래서 우리의 아버지가 되게 하여 주셨으며, 그럼으로써 이제는 또한 당신의 `자녀들`을 통하여 당신을 반영시키고자 하셨다. 이제는 우리도 우리에게서 하느님의 모습이 나타날 수 있도록 하여야 한다. 그래야 우리가 그리스도께서 하느님의 아들임을 드러내셨듯이 하느님의 자녀라는 것이 증명될 것이다. 여기서 "하느님은 사랑이시다"(1요한 4,8)라는 사실을 피부로 느낄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바오로 사도께서는 "하느님의 사랑을 여러분 모두가 누리시기를 빕니다"(13절)하고 축원하고 있다.

"성령께서 이루어주시는 친교". `친교`를 성령께 적용시킬 때 그것은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보내주신 성령과의 신비롭고 친밀한 관계, 즉 성령 안에서의 삶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과의 일치를 이루는 성령의 능력도 뜻한다. 즉 성령은 신자들을 결합시키는 원리이시고, 교회를 믿음과 사랑과 희망의 `공동체`로 만들어 주는 분이시다. 삼위일체의 신비를 우리 안에 드러나게 해 주시는 분이시다. 실제로 성령은 아버지와 아들을 위격과 사명으로 명확히 구분하면서도 신비스럽게 하나로 일치시켜 영원히 결합시키는 `사랑`이시다.

복음: 요한 3,16-18: 외아들을 보내주신 하느님의 사랑

오늘 복음은 예수님과 니고데모와의 대화를 소개하는 것으로서 삼위일체의 신비를 잘 소개하고 있다. 즉 성자를 `보내주시는` 하느님 아버지에 대해, 그리고 성부와 성자의 구원적 사명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먼저 하느님이 무한하게 `사랑하시는 분`으로 계시되고 있다. "하느님은 이 세상을 극진히 사랑하셔서 외아들을 보내주셨다"(16절). 여기서 `보내주시다`(par doken)은 `죽게하다`(갈라 2,20; 로마 4,25; 8,32 참조)의 의미로 이해하여야 한다. 즉 아버지께서는 하나 밖에 없는 외아들을 세상의 구원을 위해 사랑의 선물로 주시기 위해 포기하시는 것이나 다름없다. 이 세상은 모든 인간들과 우주 전체를 말한다. 그러므로 삼위일체이신 하느님께서는 사랑으로 우주만물을 포용하신다.

때문에 `하느님의 아들`이신 그리스도를 `믿기` 거부하는 사람은 그 순간부터 무서운 `심판`이 내려지고 있다는 것이 이해할 만하다. 그것은 가장 큰 하느님의 사랑에 마음의 문을 닫고 사랑을 떠난 멸망의 상태에 있음을 스스로 인정하는 것이다.

제1독서: 출애 34,4b-6.8-9: 나는 주 하느님이다. 자비와 은총의 신이다

지금까지 하느님의 신비를 ‘사랑의 신비’로 강조하고 있다. 1독서 역시 이런 의미이다. 시나이산에서 모세에게 당신 자신을 “자비와 은총의 신, 좀처럼 화를 내지 아니하고 사랑과 진실이 넘치는 신”(6절)으로 선포하신다. 이 하느님께서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으로 나타나실 때 그 사랑은 무한히 펼쳐질 것이다. 우리 그리스도인 앞에 있는 문제는 이제 우리의 생활 속에서 이 놀라운 삼위일체의 ‘구조’를 실현시키는 것이다. “교회의 내적 생명은 삼위일체로부터 온다. 즉 교회는 삼위일체의 교회이다. 그러므로 교회는 삼위일체의 영원한 사랑의 계획이 성취되는 곳이다. 삼위일체는 성부와 성자와 성령 세 위격으로 구분되지만 그들을 하나로 묶어주는 것은 ‘사랑’이다. 그러므로 인간들이 서로의 개인 차이를 인정하면서도 최선을 다해 서로 사랑으로 하나가 될 수 있다면 삼위일체의 모습을 닮아가게 될 것이다“(Y. De Montcheuil).

삼위일체의 신비가 사랑으로 하나된 공동체의 모습을 통해 이제 먼저 우리 가정에서부터 이루어지는 삶으로 삼위일체의 모습을 닮을 수 있는 은총을 구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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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신부
  | 06.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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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독서(잠언 8,22-31)는
하느님의 초월적 속성인 지혜에 대하여 말합니다.

현자는 우리 마음속에서 활동하면서 인간적 경험을 통해 하느님을 체험하도록 이끄는 지혜를 모든 피조물에 앞서 존재했고, 우주의 창조에 활동했다고 합니다. 창조에 대한 시적인 아름다운 표현으로서 창세기(1-3장)를 능가하며, 요한복음(1장)을 뛰어넘습니다.

피조물인 이 지혜는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에 연루되어 있으며 만물에 형태를 준 것(지혜 7,22-30; 8,4)은 물론 “만물이 그분의 말씀에 따라 잘 정돈되어 있기”(집회 43,26) 때문에 하느님의 백성은 지혜를 간직해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마치 하느님의 구원계획 속에 담긴 무엇인 듯합니다. 하느님과 세상 사이의 중개자와 같은 이런 지혜를 추구하도록 부추기면서 구원에 대한 확신을 주기 위해 지혜가 인격체가 되어 말을 하는 모습으로 표현합니다. 지혜는 ‘주님께서 주시는 것이며’(2,6) 인간이 추구해야 하는 하느님의 속성으로 이해합니다. 그래서 지혜를 얻으면 생명을 얻게 되고, 지혜를 잃으면 목숨을 잃게 되는 것은 물론 죽음을 사랑하는 것이라고(8,35-36) 합니다.

하느님의 백성 앞에 제시된 삶과 죽음, 축복과 저주 가운데 하나를 선택해야 했듯이(신명 11,26-31) “하느님의 지혜”(1코린 1,24)를 택하느냐 아니냐가 구원을 좌우한다고 합니다. 신약성경의 저자들도(마태 11,28-30; 요한 1,1-3; 1코린 1,21-31; 콜로 1,15-17) 이 내용을 인용합니다.

복음(요한 16,12-15)은
성령의 활동과 더불어 성자와의 관계를 말해줍니다.

예수님의 공생활의 시기가 끝났기 때문에 제자들이 더 이상 당신의 말씀을 직접 들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성령께서 오시면 예수님을 믿지 않은 죄와 십자가를 통해 드러난 하느님의 의로움과 심판에 관한 세상의 그릇된 생각을 밝힐(16,8) 것이고, 제자들을 진리의 핵심으로 이끌어주실 것입니다(12-13ㄱ). 성자께서는 성부에게서 들은 말씀을 제자들에게 들려주셨으며, 성령께서는 그 말씀을 다시 제자들에게 일깨워주시면서 성자를 영광스럽게 하실 것입니다(13ㄴ-15). 성령과 성자는 둘이지만 활동에 있어서는 모두 성부의 일을 하십니다. 이것을 위격은 다르지만 한 분이신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이라고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버지에게서 들은 것을 모두 알려주었음에도(15,15) 아직도 하실 말씀이 많이 있는데 제자들이 감당할 수 없기 때문에 더 이상 말하지 못한다고 하십니다. 제자들과 함께 있는 동안 예수님께서 당신의 수난과 죽음과 부활에 관해 모두 말해주셨지만 제자들의 능력으로는 감당할 수 없는, 인간 구원을 위한 하느님의 지혜입니다.

그래서 “너희는 사람의 아들을 들어 올린 뒤에야 내가 나임을 깨달을 뿐만 아니라, 내가 스스로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아버지께서 가르쳐 주신 대로만 말한다는 것을 깨달을 것이다.”(8,28)라고 하셨습니다. 하느님 아버지께서 아드님의 이름으로 보내실 진리의 성령께서 오셔야만 제자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모두 기억하는 가운데 예수님에 관한 계시를 감당해낼 수 있다는 것입니다(14,25-26).

성령께서는 성자의 말씀을 기억하고 깨닫게 해주시는 해석자이십니다. 성령께서 오시면 성자의 시대가 끝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성자의 가르침을 깨우쳐주기 때문에 성자께서 성령과 함께 말씀으로 우리 안에 머무르시게 됩니다. 비록 성자의 침묵 속에서 이루어지는 머무름이지만 인성을 취하신 성자의 떠나심은 오히려 성자를 다시 만나게 할 것입니다(16,16).

성령께서 전해주시는 성자의 말씀과 사랑은 성부께서 하신 말씀이기 때문에 성부와 성자의 완전한 일치 안에서 공유하고 있는 것을 그대로 제자들에게 전해주실 것입니다. 하느님 아버지, 성부께서 “위의 구름을 굳히시고 심연의 샘들을 솟구치게 하실 때, 물이 그분의 명령을 어기지 않도록 바다에 경계를 두실 때, 그분께서 땅의 기초를 놓으실 때”(잠언 8,28-29)부터 성자와 성령께서는 늘 함께 하셨습니다.

지금도 삼위일체이신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기 때문에 우리가 그분의 본성에 참여하리라는(2베드 1,4) 희망을 자랑으로 여기고 기뻐하는 것입니다.

제2독서(로마 5,1-5)는
의롭게 된 이들이 누리게 될 희망에 대해 말합니다.

바오로 사도는 그리스도인들의 희망을 위협하는 세력을 다루기(6-7장) 전에 믿음으로 의롭게 된 이들이 누리고 있는 은총의 상태인 평화를 말하면서(1-2절) 선물로 주어진 성령의 역할을 설명합니다. 죄(6장)와 율법(7장)이 그리스도인들에게 적대 세력으로 돌변하는 상황에서도 그리스도인들은 죄와 율법으로 인해 받게 되는 고난에 굴복하지 않습니다. 이 고통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 덕분에” 우리가 하느님의 영광에 참여하리라는 희망을 솟아오르게 하기 때문입니다.

이 희망의 근거는 바로 “우리가 받은 성령을 통하여 하느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어졌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겨내야 할 환난은 오히려 성령의 보호를 통하여 성자의 말씀을 들으면서 우리에게 희망에 대한 인내를 자아내게 하고, 그 인내는 덕을 쌓도록 수양하게 할 것입니다.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생명을 주시는 성령의 법이 그대를 죄와 죽음의 법에서 해방시켜 주었기 때문입니다.”(8,2) 또한 우리가 수양을 하는 것은 그리스도를 통한 하느님의 은총에 바탕을 둔 희망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희망을 가능케 하는 것은 성자의 협조자이신 성령을 통하여 우리에게 주어진 하느님의 말씀과 사랑 때문이라서 우리가 자랑하는 것입니다. 결국 이 사랑이 어떤 역경도 이겨내게 하는 불굴의 희망의 원천이기에(8,31-39) 그리스도인은 기뻐하는 것입니다.

성경에 삼위일체라는 말은 없지만 우리를 위한 하느님 아버지의 구원계획 안에서 계시된 성자와 성령의 관계를 말해줍니다. 우리가 믿는 주님의 영광을 성자와 성령께서도 누리시고, 성부와 나누시던 사랑을 성자께서는 말씀과 행동으로 세상에 드러내셨고, 사랑이신 성령께서는 성부와 성자로부터 들은 것을 제자들에게 기억하게 하시면서 우리를 진리로 이끌어주실 것입니다.

행동은 다르지만 같은 사랑을 말하고, 방식은 다르지만 같은 실천을 말하고, 역할은 다르지만 같은 의미를 남깁니다. 성자께서는 날마다 성부께 즐거움이었고, 언제나 성부와 함께 지으신 땅(아버지의 그늘)에서 일하시면서 사람들(제자들)을 당신의 기쁨으로 삼으셨으며, 성부 곁에서 사랑받는 아들이십니다. 성부와 성자를 완전하게 묶어주는 사랑의 끈인(콜로 3,14) 성령께서는 이런 일을 다 보셨던 그대로 제자들을 이끌어주실 것입니다. 삼위일체는 같은 사랑을 각기 다른 방식으로 실천하시고, 드러내시면서 같은 기쁨으로 삼으신다는 심오한 하느님의 지혜입니다.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의 사랑은 우리가 알거나 상상할 수 있는 사랑보다 훨씬 더 강하고 열정적이며 격렬한 불길과 같아서(아가 8,6-7). 인간이 쉽게 이해할 수 없기에 참으로 엄청난 신비가 아닐 수 없습니다. 이제는 성부의 말씀을 성자께서 직접 하시는 말씀을 통해서가 아니라 성령을 통하여 우리의 마음에 속삭이시는 말씀을 통해서 중개하십니다.

그런데 초기교회는 성령의 보호와 가르침을 잘 받아들여서 중개자라는 이름으로 오류들을 끌어들이는 이단적 생각을 막아야만 했습니다. 그래서 처음 4-5백 년 동안은 다신적 개념이라는 뜻에서 삼위일체라는 말을 쓰지 못하게 하다가 하느님 아버지의 그늘, 예수님의 역할, 그리고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를 성령으로 표현하셨다는 사실에 관심을 기울이게 되면서 성부 성자 성령을 세 위격으로 표현했고, 한 분이신 하느님으로 고백했습니다.

촛불의 빛은 불이 아니며, 빛 또한 불은 아니지만 빛과 불에서 나오는 뜨거운 열로 한 자루의 초를 태웁니다. 삼위일체를 촛불에 비유한다면, 성부는 불이고, 성자는 불에서 나오는 빛이며, 성령은 불과 빛이 동시에 지니고 있는 열입니다.

이렇듯이 삼위일체는 어떤 한 위격이 독점하지 않으시고, 지혜롭게 역할을 나눕니다. 이름이 달라도 나눔에서도 같은 능력을 발휘하시면서 세상 구원을 위한 하나의 목표를 지향하시는 한 분 하느님이십니다. 세 가지 방식으로 우리를 사랑하시고, 세 가지 역할로 같은 일을 하시고, 세 가지 위격으로 우리에게 당신을 드러내시는 한 분이신 하느님을 삼위일체라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기 때문에 모든 일을 삼위일체의 이름으로 시작하고, 모든 성사들이 그렇지만, 특히 성체성사는 거룩한 삼위의 일치로 우리를 인도합니다. 우리 공동체 역시 너와 나의 만남이 사랑으로 우리를 만들게 하면서 삼위일체의 신비를 구현합니다.

이렇게 우리의 신앙생활 전체는 삼위일체의 신비인 사랑과 기쁨이 깃들어 있기에 어떤 역경에서도 굴복하지 않고 하느님을 희망의 원천으로 삼습니다. 그래서 하느님의 지혜에 탄복하고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아멘.” 하고 외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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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방효익 바오로 신부
2022년 6월 12일
  | 06.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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