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요안 신부의 가톨릭

 l Home l Bestsite l Search l Freeboard l E-mail l

 
 

주일강론

평일강론

축일강론

대축일/명절강론

혼인강론

장례강론

예 화

사설/칼럼

♣ 현재위치 : 홈 > 강론자료실 > 대축일/명절강론

대축일/명절강론 코너 ( 대축일/명절 미사에 관련된 강론자료입니다... )

 


( 쪽지보내기 스크랩하기 프린터하기 홈페이지 )
510 63.6%
성체성혈 대축일 성경 말씀 해설
조회수 | 132
작성일 | 22.06.14
지난주 ‘지극히 거룩하신 삼위일체 대축일’을 지낸 교회는 오늘 다시 한번 또 다른 교의의 옹호를 위해 설립된 ‘지극히 거룩하신 그리스도의 성체 성혈 대축일’을 거행하면서, 예수님께서 영광스럽게 다시 오실 그날까지 교회가 당신을 기억하여 성체성사를 거행하도록 명하신 사실을 기린다. 예수님의 교회는 매주 성체성사를 거행하면서도 성체성사의 다할 길 없는 신비를 특별한 날, 곧 성령 강림절 후 두 번째 주간의 목요일(삼위일체 대축일 다음 목요일)에 거행하도록 하는 것인데, 우리나라나 미국, 이탈리아를 비롯한 국가들에서는 성령 강림절 후 두 번째 주일로 옮겨 이를 거행한다. 이 대축일은 1264년 우르바노 4세 교황 때부터 공식적으로 지낸 축일이다. 성삼일 동안의 성 목요일에는 성체성사의 제정을 기념하고, 오늘 축일에는 많은 교회에서 성체거동을 통하여 하느님께서 인간을 사랑하시어 마련해주신 성체성사를 공개적으로 기념한다고 할 수 있다.

오늘 복음은 루카 복음이 전하는 바에 따라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 명이 넘는 사람을 먹이신 빵의 기적 이야기를 전한다. 빵을 많게 하신 기적 이야기는 복음서에 여섯 번(마태오와 마르코에 각각 두 번, 루카와 요한에 각각 한 번) 등장하고 4복음서 모두 수록한다는 특징을 보인다. 이는 예수님의 공생활에서 대단히 중요한 내용이었고, 초대교회에서 강조한 내용이었다는 반증이다. 이는 초대교회가 지낸 성찬례(성체성사)의 배경을 엿볼 수 있는 내용이기도 하다. 오늘 복음인 루카복음에 의하면 예수님께서는 열두 제자에게 “힘과 권한”을 부여하시고 “하느님의 나라를 선포하라고” 파견(루카 9,1-2 참조)하셨으며, 이러한 예수님의 명령에 순명하며 제자들이 사명을 수행하고 돌아와 그간의 활동과 체험을 보고하였다. 예수님 위에 성령께서 내려오시어(참조. 루카 3,21-22) 하느님으로부터 수행하라고 명하신 사명이자 나자렛 회당에서 드러난(참조. 루카 4,18-19) 예수님의 사명이 이제 제자들에게까지 이어지고 확산한 것이다.

복음사가들(특히 요한 복음사가)은 예수님께서 당신의 결정적이고도 중요한 순간에 음식으로 제자들과 만나는 장면을 기술한다. 때가 이르지 않았음에도 이루신 첫 번째 기적이 포도주에 관한 것이었고(참조. 요한 2장), 수많은 군중을 먹이시어 사람들이 임금으로 모시고자 시도할 때에도 빵을 많게 하신 기적이 있었던 다음이었으며(참조. 요한 6장), 당신의 수난을 예고하시고 예루살렘으로 가기로 결정하실 때가 바로 빵의 기적 다음이었고(참조. 루카 9장), 제자들을 위해 마지막 당부와 그들을 위한 기도를 하셨을 때에도 최후의 만찬이 있었던 다음이었으며(참조. 요한13,31-16,33에 나오는 ‘예수님의 고별사’와 그에 이어지는 요한 17장), 부활하신 주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걸으시고 제자들이 예수님을 알아본 순간이 바로 빵을 떼어 나누던 바로 그 순간이었고(참조. 루카 24장), 부활하신 주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호숫가에서 그 누구도 그분이 과연 주님이신지를 물을 필요가 없게 된 때도 이른 아침 식사를 드시던 바로 그 자리(참조. 요한 21장)였다.

1. “맞이하시어…말씀해 주시고…고쳐 주셨다”(루카 9,11ㄴ-17)

“사도들이 돌아와 자기들이 한 일을 예수님께 보고하였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을 따로 데리고 벳사이다라는 고을로(벳사이다 근처에 있는 예수님과 제자들의 안가로) 물러가셨다. 그러나 군중은 (예수님과 제자들이 어디로 가셨는지) 그것을 알고 예수님을 따라왔다. 예수님께서는 (사명 수행에 고생한 제자들과 함께 잠시 휴식도 취하실 겸 재정비의 기회를 얻고자 하셨으나) 그들(고집스럽게 예수님을 찾고, 예수님께로 왔으며, 예수님을 따라온 군중)을 맞이하시어, (자비를 베푸시는 데에 한없이 너그러우신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나라에 관하여 말씀해 주시고 필요한 이들에게는 (기꺼이) 병을 고쳐 주셨다.”(루카 9,10-11) 낯선 이나 불편한 이까지도 절대 외면하지 않으시고 내치지 않으시며 환대하시고 맞아들이시는 예수님의 스타일이다.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들 역시 다른 이들을 환대하는 일에 게을러서는 안 된다. 군중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싶고, 자기들의 인생을 짓누르고 있는 악과 무게 앞에서 예수님이 무엇인가를 하실 수 있고 해방하실 수 있으며 치유하실 수 있는 분이라고 믿는다. 이것이 하느님의 종으로서 예수님의 일상이자 일생이었으며, 하느님께서 예수님께 맡기신 말씀을 선포하는 일과였다.

2. “황량한 곳…너희가…저희에게는”(루카 9,11ㄴ-17)

그런데 “(해가 져서 어두워지면서) 날이 저물기 시작하자 (걱정하면서) 열두 제자가 예수님께 다가와 말하였다. ‘군중을 돌려보내시어, 주변 마을이나 촌락으로 가서 잠자리와 음식을 구하게 하십시오. 우리가 있는 이곳은 황량한 곳입니다.’”(루카 9,12) 제자들의 제안은 인간적으로 볼 때 매우 현실적이고 합리적인 내용이었다. 그렇지만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가능성을 일축하신다. “황량한 곳(사막, 광야)”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불평과 우상 숭배, 문제 제기가 있던 곳이면서 예수님의 유혹이 있던 곳이지만, 만나와 생수가 터져 나오는 곳이면서 예수님의 승리가 있던 곳이다. 예수님 없이는 어떤 기본적인 필요도 채워주지 못하는 것이 제자들의 한계이다. 그러나 이미 제자들은 예수님으로부터 “모든 마귀를 쫓아내고 질병을 고치는 힘과 권한을 받았다.”(루카 9,1) “예수님께서 ‘너희가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어라.’ 하시니, 제자들은 ‘저희가 가서 이 모든 백성을 위하여 양식을 사 오지 않는 한, 저희에게는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밖에 없습니다.’”(루카 9,13) 한다.

예수님께서는 “너희가~” 하는 이 명령으로 제자들에게 나를 믿으라 하시는 것이고, 모든 이들의 마음에 이미 있으면서 당신께서 이끌어가실 ‘믿음’의 역동성과 리듬에 참여하라고 하신다. 그렇지만 제자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알아듣지 못하고, 자기들이 먹을 것밖에 없다는 가난함을 내세우며 고집한다.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밖에”는 우리가 가진 초라함이지만, 이것이라도 예수님을 믿고 그분께 정직하게 내어놓을 때 만인이 먹는 풍요로움이 된다.예수님께서는 그것을 “축복”하시고 만인이 먹을 양식으로 삼으신다. 풍요는 결국 예수님께로부터 얻어진다. 제자들은 “양식을 사 오지 않는 한”이라고 재원 마련을 걱정하는데, 예수님께서는 이에 대해 답이 없이 사람들에게 “대충 쉰 명씩 떼를 지어 자리를 잡게 하고…나누게 하신다.”(루카 9,14) 예수님께서는 가진 것의 조직과 분배를 생각하신다.

3. “하늘을 우러러…떼어…나누어 주도록”(루카 9,11ㄴ-17)

“예수님께서 (주도권을 잡고 나서시어) 제자들에게 이르셨다. ‘대충 쉰 명씩 떼를 지어 자리를 잡게 하여라.’ 제자들이 그렇게 하여 모두 자리를 잡았다.”(루카 9,14-15) 예수님께서는 군중이 단지 허기를 면하는 것만이 아니라 해가 진 뒤에 여럿이 어울려 지내는 푸짐하고 넉넉한 만찬을 생각하신다. “예수님께서는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손에 들고 (하느님 아버지를 향해 기도하시는 몸짓으로) 하늘을 우러러 그것들을 축복하신 다음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며, (식탁 봉사를 하듯이) 군중에게 나누어 주도록 하셨다.”(루카 9,16) 음식은 충분했고, 모두가 나눌 수 있었다. “사람들은 모두 배불리 먹었다. 그리고 남은 조각을 모으니 열두 광주리나 되었다.”(루카 9,17) 구약의 예언서를 아는 이들은 이미 엘리사 예언자가 보리빵 스무 개로 백 명이나 되는 굶주린 사람들을 먹이고도 남았다는 일화를 떠올린다.(참조. 2열왕 4,42-44) 예수님께서도 그렇게 하실 뿐만 아니라 “열두 광주리”나 남는다. 예수님 앞에 있던 제자들과 구약을 알고 있는 이들의 마음에는 예수님이야말로 엘리야나 엘리사뿐만 아니라 만나로 이집트에서 빠져나온 광야의 이스라엘 백성들을 배부르게 했던 모세(차조. 탈출 16장)보다도 더 위대한 예언자이시며 뛰어난 분임을 믿고 알게 된다.

도대체 이러한 사건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일까? 이 사건을 보통으로 ‘빵을 많게 하신 기적’이라고 알고 있지만, 복음에는 실제 이러한 말마디 자체가 없다. 그러한 사실로 미루어 우리는 ‘빵을 떼어’ 모두가 ‘함께 나누는’ 일이 있었다는 동작들과 함께 이것이 모든 이를 위한 풍요의 잔치가 되었다는 것을 이야기해야만 한다. 그런 의미로 우리는 예수님께서 장차 예루살렘에서 거행할 마지막 만찬의 예표, “예수님께서는 또 빵을 들고 감사를 드리신 다음, 그것을 떼어 사도들에게 주시며 말씀하셨다. ‘이는 너희를 위하여 내어주는 내 몸이다. 너희는 나를 기억하여 이를 행하여라.’”(루카 22,19) 하셨던 것과 같은 동작들이 이미 이 이야기 안에 담겨있음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 앞에서도 부활하신 주님께서는 같은 동작을 취하신 것으로 루카 복음사가는 기록한다. 그때도 날이 저물어가던 저녁때였으며 제자들이 예수님과 함께 지내자고 예수님을 붙들어 청하였으며, 예수님께서 두 제자와 함께 “식탁에 앉으셨을 때, 예수님께서는 빵을 들고 찬미를 드리신 다음 그것을 떼어 그들에게 나누어 주셨다.”(루카 24,29-30) 루카가 전해주는 세 가지 이야기 모두 ‘군중, 백성, 하느님 나라에 대한 굶주림, 하느님 나라의 선포자이자 그 나라를 이루시는 예수님, 빵의 나눔으로 모두를 배불리시는 예수님, 모두를 위해 당신의 몸과 목숨을 떼어 나누시는 예수님’이라는 요소들을 담고 있다.

너무도 많고 다양한 성체성사에 관한 교의나 교리에 현혹되는 것보다는 성체성사의 신비가 지닌 단순성과 성체성사의 본질을 알아 모셔야 한다. 그리스도께서는 십자가 위에서 한번 부서지고 쪼개어지시면서 당신을 찾고 따르려는 이들, 당신의 말씀에 굶주리고 목마른 이들, 예수님의 생명을 나누려는 교회, 우리 모두에게 당신을 내어주시면서 남고도 넘치는 양식이 되신다. 거룩한 전례 안에서 성체성사 거행의 본질은 빵을 떼어 모두가 함께 나눈다는 바로 이 역동성이다. 또한 우리의 일용할 양식, 물질적인 음식의 나눔으로까지 나아가는 패러다임이 성체성사의 완성이 된다. 성체성사는 천상 잔치요 주님의 살과 피를 모시는 식탁만이 아니다. 성체성사는 풍성한 음식이 있으면서도 배고프고 허기진 수많은 사람을 위해 나눔이 없는 우리의 매일 식탁에 대한 가르침도 되고자 하신다. 이런 의미로 실제로 가난한 이들이 참여하지 않는 우리 성체성사의 식탁, 음식이 없어 굶주리는 이들과의 구체적인 음식 나눔이 없는 우리 성체성사의 식탁은 본질의 결여라는 점에서 빈말이다. 이럴 때 성체성사는 신심 깊은 이들의 영혼을 만족시키는 그럴듯한 전례일지는 몰라도 예수님께서 당신 교회에 바라신 표징에는 대단히 못 미치는 심각한 결핍이다. 주님 몸의 식탁은 언제나 주님의 말씀과 함께, 가난한 이들과 나누는 나눔의 식탁이어야만 한다.

예수님께서는 빵과 물고기를 군중과 함께 나누심으로써 인간과 새로운 관계의 차원을 시작하시고 설정하신 셈이 된다. 친교를 통해 차별화가 없어질 수 있다고 하지만, 여기에 형제애나 연대 의식, 나눔이 없는 관계라는 것은 도무지 말이 안 된다는 것을 알려주시기 때문이다. 우리는 어떤 면에서 오늘의 우리 교회가 초대교회와 교부들이 성체성사에서 얻었던 지혜와 가르침을 일정 부분 상실한 측면이 있다는 것을 솔직히 고백해야만한다. 성체성사의 전례적인 측면과 가난한 사람과의 빵 나눔이라는 측면이 마치 이혼이라도 하듯이 갈라서게 되었다는 사실말이다. 세상에 여전히 굶주림이 존재하고 우리 옆에는 여전히 가난한 사람들이 상존하는데도 우리의 성체성사가 그들에게 구체적인 행동으로 결과를 이어지지 않는다면 우리의 성체성사는 바로오 사도께서 “여러분이 한데 모여서 먹는 것은 주님의 만찬이 아닙니다.”(1코린 11,20) 하신 대로 단지 종교적 장면이나 의식으로만 비쳐질 뿐이다.

미사는 하느님 백성의 대표인 사제가 드리고 신자들이 ‘보러 가는 것’이 아니다. 미사는 주일을 거룩하게 지키라는 제3계명의 수행을 위한 요식행위가 아니다. 미사는 개인적으로 ‘영성체를 받아먹으러’ 가는 것이 아니다. 미사, 곧 성체성사는 ① 하느님께서 우리를 어떻게 구원하셨는가를 생각하며 공동체로서 함께 드리는 감사이며(미사를 가리키는 ‘Eucharist’라는 말은 말마디 자체로 ‘감사’라는 뜻이다.) ②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모든 사람이 그것을 보고 너희가 내 제자라는 것을 알게 될 것”(요한 13,35)이라는 말씀에 따라 공동체로서 같은 빵과 피, 예수님을 먹고 마셔 예수님 안에 하나가 되는 ‘하느님 사랑의 나눔’이다. 성체성사 안에서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살과 피를 우리에게 ‘내어주시고’, 동시에 당신 손에 우리를 ‘받으시는’ 사제이시다. ③ 공동체로서 서로의 사랑을 드러내는 행위이다. 우리를 “끝까지 사랑”(요한 13,1) 하신 주님께서 바로 이를 위해 성체성사를 제정하셨고, 이를 위해 “모두 하나가 되게 해 주십시오.…완전히 하나가 되게 하려는 것입니다.”(요한 17,21.23)라고 기도하셨다.

우리는 성체강복 때 부르는 오래된 성체 찬미가 ‘딴뚬 에르고Tantum Ergo’의 첫 소절에서 『…묵은 계약 완성하는 새 계약을 이뤘네. 오묘하온 성체 신비 믿음으로 알리라.』라고 노래한다. 그렇지만 우리는 어떤 면에서 아직 그저 ‘묵은 계약’에만 사로잡혀있고 갇혀있으며, 우리가 마땅히 드려야 하는 “합당한 예배(λογικὴ λατρεία, loghikè latreía, 직역하면 ‘말씀 예배’)”(로마 12,1)를 여태껏 드리지 않고 있는지도 모른다. “합당한 예배”는 우리의 “몸을 하느님 마음에 드는 거룩한 산 제물로 (가난한 이웃을 위한 형제애로 ‘끝까지’-요한 13,1) 바치는”(로마 12,1) 것이다. 아멘!

---------------------------

작성자 : 벤지
2022년 6월 19일
510 63.6%
▬ 시작기도

주님, 저희 마음의 눈을 열어주시어 저희와 함께 계신 당신을 알아보게 하소서.

▬ 세밀한 독서 (Lectio)

오늘 복음인 빵을 많게 하는 기적은 네 복음서 모두에 소개된 유일한 말씀입니다. 그만큼 복음사가는 이 기적을 중요하게 기억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더 멋있고 굉장한 기적들이 있는데 왜 그 많은 기적 중 꼭 이 이야기만이 그런 중요성을 가지고 있을까요?

그것은 이 기적이 교회의 성찬례를 겨냥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루카 복음사가가 본문을 성찬례와 연관 짓고 있다는 암시가 여러 군데에 나옵니다. 무엇보다도 먼저 빵과 물고기를 들어  축복하시고  떼어  주시는  예수님의 행동(9,16)은 성체성사를 제정해 주시는 마지막 만찬 때에 그대로 재현됩니다.(22,19) 그리고 또 다른 성체성사의 상징적 이야기인 엠마우스의 제자들과 함께한 식탁에서도 이 행동이 반복됩니다.(24,30)

오직 이 세 가지 이야기에서만 예수님의 이 행동에 관련된 동사와 그 동의어가 반복됩니다. 그리고 ‘자리를 잡았다.’(9,14.15)라고 번역된 동사는 본래 비스듬히 눕는 자세를 지칭하면서 연회를 연상케 하는데 이것 또한 마지막 만찬 때에 파스카 잔치에 함께한 제자들의 자세와(22,14) 비슷합니다. 마지막으로 빵을 많게 한 기적이 저녁에 이뤄진 것 또한 성체성사가 제정된 저녁과 엠마우스의 제자들이 예수님을 알아본 저녁식사와 연결되어 있습니다. 이렇게 오늘 복음은 예수님을 만나고 알아보는 자리이자 교회의 핵심적 성사를 상징하고 있기에 다른 어떤 기적보다 더 근본적인 것입니다.

제자들은 군중과 자신들이 있는 곳이 황량한 곳이고 날도 저물어 군중의 음식과 숙소를 걱정하기 시작합니다. 예수님을 따르기 위해 그들이 모인 장소는 바로 광야, 사막 이었습니다. 교회는 전통적으로 성찬례의 예비적 상징으로 출애굽의 만나 사건(탈출 16장)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이 상징에서 광야에 모인 제자들과 군중은 약속된 땅을 향해 걷고 있는 출애굽 공동체의 종말론적 실현이고, 예수님은 이 여정에서 만나보다 더 맛나고 풍성한 음식인 당신 자신으로 당신 백성을 먹이시는 참된 인도자요 구원자인 것입니다.

걱정에 휩싸인 제자들은 그들 나름대로 해결방법을 모색해서 군중을 돌려보내어 각자 알아서 그들의 필요를 해결하도록 예수님께 제안합니다. 하지만 예수님에게 이 제안은 그리 흡족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은 하느님 나라의 이름으로 받아들인 사람들을 온전하게 환대하고 싶으셨습니다. 예수님의 환대는 그분의 마음을 우리에게 잘 드러내 보여줍니다.

오늘 말씀 전에 제자들은 자신의 사명을 마치고 돌아왔고 예수님은 그들을 따로 데리고 물러가셨다는 구절이 나옵니다. 따로 데리고 물러나심의 목적을 마르코 복음사가는 더욱 분명하게 말하고 있습니다.(6,31-32) 곧 그들에게 휴식과 재충전을 위한 머무름의 시간이 필요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그분을 따라왔던 군중은 사실 초대받지 않은 손님이요 어떤 의미에서 권리를 침범하는 괘씸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도 예수님은 그들을 맞이하셨는데 이 ‘맞이하다’는 그리스어 동사는 예수님의 환대가 이들을 기특하게 생각하시며 기쁘게 이뤄진 것임을 보여줍니다.

그마음으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너희가 먹을 것을 주어라.” 하고 말씀하십니다. 그들이 가진 것은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뿐, 그들끼리 먹기에도 부족하고 초라하기 그지없는 것이었습니다. 제자들의 이 가난은 오직 그들이 예수님께 의존할 때만 사람들에게 먹을 것을 내놓을 수 있다는 것을 말해 주지만 무엇보다도 가난이 하느님을 체험할 수 있는 통로가 된다는 것을 말해 주기도 합니다.

제자들은 자신들의 초라한 현실에 집중하기보다 예수님의 말씀에로 시선을 들어 올렸습니다. 그래서 자신들이 가진 것을 내놓았고 주님은 잔치의 참된 주인으로서 당신의 모든 양 떼를 먹일 음식을 내놓으셨습니다. 이를 통해 제자들은 그분이 누구신지를 알게 됩니다. 제자들도 군중도 육신의 필요뿐 아니라 무엇보다도 마음의 참된 허기, 하느님에 대한 갈망을 채워 모두 배부르게 되었습니다.

▬ 묵상 (Meditatio)

‘너희가 먹을 것을 주어라.’ 하신 예수님의 말씀은 성체성사가 단순히 전례적 예식으로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가난한 형제들을 마음에 품고 그들의 필요를 내 것으로 여기며 그들에게 다가가야 한다는 것을 일러줍니다. 이 사랑의 행위를 통해 우리가 행하는 성찬은 참으로 완성에 이릅니다. 비록 우리가 가진 것이 적다 하더라도 그것을 주님께 내놓을 때마다 주님께서는 필요한 만큼 마련해 주십니다.

▬ 기도 (Oratio)

정녕 당신 앞뜰에서 지내는 하루가 다른 천 날보다 더 좋습니다. 저의 하느님 집 문간에 서 있기가 악인의 천막 안에 살기보다 더 좋습니다.(시편 84,11)

---------------------------------------------------------

성 바오로 수도회 김태훈 수사
  | 06.16
510 63.6%
렉시오 디비나에 따른 복음 묵상

-----------------------------------------

“주님, 오늘도 먹을 것이 없어서 죽어가는 사람들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고 함께 잘살 수 있는 아름다운 세상이 되게 하소서.”

“주님, 저희의 기도를 들어주소서.”

이런 보편지향 기도가 때로는 참 공허하게 느껴집 니다.
그 까닭은 어떤 형태로든 내 양식을 쪼개어 나누기보다
이 기도로 써 내가 할 몫을 다 한 것처럼
빠져 나가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 때문입니다.

오늘 참 많은 사람들이 등장하지만(장정만 오천이니…)
이야기는 군중을 사이에 둔 예수님과 제자 사이의 일화로,
벳사이다 고을 어디, 마을도 없는 황량한 장소에서
날이 저물기 시작하는 시점의 이야기입니다.
본문을 기승전결의 형식으로 나누어 봅니다.

<기> 예수님의 일행을 따라다니는 군중에게
예수께서 하느님 나라에 관해
말씀도 해주시고 병도 고쳐주신다(루카 복음 9장 11절).

<승> 날이 저물기 시작하자 제자들이 와서
주변 마을이나 촌락으로 군중을 보내어
잠자리와 음식을 구하게 하자고
예수께 제의하는데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직접 먹을 것을 주라고 억지(?)를 부리신다.
빵이 턱도 없이 부족한 그들의 사정을 말하니
예수께서는 그제야 그들을
대충 쉰 명씩 떼를 지어
자리잡고 앉도록 지시하신다(루카 복음 9장 12절-15절).

<전>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손에 들고 축복하신 다음
제자들을 시켜 군중에게 나누어 주신다.
이야기의 절정이다(루카 복음 9장 16절).

<결> 사람들이 모두 배불리 먹고 남은 조각을 모으니
열두 광주리나 되었다(루카 복음 9장 17절).

이 일 이전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 살펴보면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기 위해 파견받았던 제자들이
(루카 복음 9장 1절-6절 참조)
돌아와 자기들이 한 일을 예수께 보고하였고,
예수께서는 그들을 따로 데리고 벳사이다란 고을로 물러가셨는데,
군중이 이를 알고 따라와
그들만의 오붓한 시간을 방해한 것으로 보입니다(루카 복음 9장 10절).
아마 예수님과 제자들 마음에 이런 생각이 교차했을지도 모릅니다.

-------
제자들
-------

배도 고프고 피곤한데 이제 이 훼방꾼들을 좀 돌려보냈으면 좋겠다.
날은 저물고 인가도 없는 이 황량한 곳에서
스스로 먹을 것과 잠자리를 구하도록 빨리 보내는 것이 현명한데
선생님은 저렇게 계속….
체력도 좋으시지. 말씀드리자.
“군중을 돌려보내시어,
주변 마을이나 촌락으로 가서 잠자리와 음식을 구하게 하십시오.”

------
예수님
------

너희의 마음을 이해한다.
그런데 너희는 조금 전까지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고 온 사도들 아니냐.
너희는 어떤 마음으로 병자를 고치고,
마귀를 쫓아냈느냐?
남을 위해 불속에 뛰어든다 하더라도,
산을 옮기는 믿음이 있다 하더라도
사랑이 없다면 아무것도 아니다.

각자 잠자리와 음식을 구하게 하라고?
아직 멀었구나! 이 기회에 가르쳐 주고 싶은 것이 있다.
그러나 내가 나의 몸과 피를 너희의 생명을 위해
내놓을 때까지 너희가 오늘의 의미를 깨닫지 못할 줄을 알지만
비로소 알아들을 그날을 위해….
“너희가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어라.”

------
제자들
------

아니, 무슨 말씀을 하십니까?
저희 사정 잘 아시잖아요.
장정만도 오천 명,
모두 합치면 헤아릴 수도 없는
이 사람들에게 저희가 먹을 것을 주라고요?
우리 먹을 빵도 모자라는 판인데.
더구나 그만한 빵을 살 가게는 없고,
날도 어두워지고,
그만한 돈은 더욱 없습니다. ‘
그건 불가능합니다.’고 말하고 싶지만.

“저희가 가서 이 모든 백성을 위하여 양식을 사 오지 않는 한,
저희에게는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밖에 없습니다.”

------
예수님
-----

아버지께서 너희 조상들이 이집트를 탈출할 때 굶긴 적이 있었더냐?
엘리야가 기진하였을 때 천사들이 두고 간 빵,
사렙타 과부의 이야기를 모르는가?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느냐?
카나의 혼인잔치 때 어떤 일이 있었는지 기억나지 않느냐?
물이 최고의 맛을 가진 포도주로 변해
잔치의 흥이 깨지지 않았음을.

‘무엇이든지 그가 시키는 대로 하여라.’(요한 복음 2장 5절) 하신
어머니의 믿음을 못 보았는가?

내가 시키기 전에 ‘주님, 시키는 대로 하겠습니다.’라고
할 수 있는 믿음이 아직도 부족하구나.

“대충 쉰 명씩 떼를 지어 자리를 잡게 하여라.”

-----------
제자들의 회상
-----------

주님, 그때는 미처 깨닫지 못했습니다.
그 빵이 당신의 ‘살’이라는 것을.
그때의 황량한 장소는 바로 군중에 대한 연민이 없었던
저희의 황량한 마음이었습니다.
주님께서 잡히시던 날 밤에 마지막으로
저희와 파스카 식사를 하실 때 빵을 들고 감사드리신 다음
그것을 떼어주시며

“이는 너희를 위해 내어 주는 내 몸이다.”(루카 복음 22장 19절)
하실 때도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몰랐습니다.
다만 축제의 기쁨에 들떠 있었지요.
부활하시어 저희와 엠마오의 식탁에 앉아
빵을 들고 감사의 기도를 드리신 후
빵을 쪼갤 때 빵의 의미를
어렴풋이 느낄 수 있었습니다만(루카 복음 24장 35절)
갈릴래아 호숫가에서 대표인 베드로에게
‘내 양들을 돌보아라.’ 하셨을 때
어떻게 돌보라는 말씀이신지 아직도 제대로 몰랐지요.

그러나 당신께서 떠나신 이제야 확연히 당신의 마음을 알았습니다.
함께 계실 때 알았더라면
당신께 기쁨을 드렸을 텐데 참으로 저희는 어리석고
굼뜨고 미련하였습니다.

그래서 “내가 떠나는 것이 너희에게 이롭다.”
(요한 복음 16장 7절)고 하셨군요.
당신은 ‘살아서 키우시고 죽어 가르치십니다.’
(이 표현은 유소림 시인의
「살아 키우시고 죽어 가르치시네」에서 인용) 하고
깨달은 지금 당신의 사랑이 가슴에 사무칩니다.

저희도 그렇게 살겠습니다.
“너희는 나를 기억하여 이를 행하여라.”고 하신 대로
주님의 식탁에서 생명의 빵을 나눕니다.
그리고 삶의 현장에서 만나는 양떼들의 빵이 되겠습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사고파는 상거래에 의한 것이 아니라
가진 것을 서로 내어 놓을 때,
그것을 나눌 때 비로소 모두가 만족하고도
남는 것이라는 것을 당신을 믿는
모든 제자들이 알고 행하도록 말입니다!

-------------------------------------------------

포교 성 베네딕도 수녀회 정 세라피아 수녀
  | 06.16
510 63.6%
“너희는 맛보고 눈여겨보아라, 주님께서 얼마나 좋으신지!”(시편 34,9)

오래 전에 루르드 성지 한 가운데에 있는 천막 성당에서 성체 조배를 할 때 한 체험이 지금 떠오릅니다. 임종을 앞둔 어느 수녀님이 병원 침대에 실려 천막 안에 들어왔습니다.

제대 위에 모셔진 성체를 한참 바라보는 수녀님 얼굴이 일순간 환하게 빛났습니다. 하느님 앞에서, 하느님 백성 안에서 경배하며 보낸 그분의 한 생애가 일순간 주마등처럼 지나가고 그 수녀님은 받은 모든 선물에 대해 감사와 경배를 드리는 듯했습니다.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19(코로나19)로 성체 단식을 한 후에 맞은 성체 성혈 대축일은 저에게 성체성사의 의미에 대해 깊이 성찰하도록 초대합니다. 오늘 복음은 제1독서와 제2독서의 빛에 비춰 성찰할 수 있습니다.

1. 하느님을 기억하고 감사하라

제1독서는 모세가 요르단강을 건너기 전에 모압 평야에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한 설교입니다. 오늘 본문에는 나오지 않지만 신명기 8장 1절에 제1독서 주제가 함축돼 있습니다.

“너희는 오늘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는 모든 계명을 명심하여 실천하여라. 그러면 너희가 살 수 있고 번성할 것이다.”

하느님에 대한 경외에 바탕을 두고 그분 계명을 실천하며 사는 의로운 삶, 그 결과의 가시적인 표징인 하느님의 축복 받는 삶은 구약에서 말하는 지혜로운 인생의 핵심입니다. ‘너희’, ‘오늘’이라는 말은 모세의 이 가르침이 모세 시대 이스라엘인만이 아니라 모든 시대의 모든 사람, 21세기 우리에게도 해당되는 말씀임을 보여 줍니다.

이어서 모세는 이스라엘에게 그들이 광야에서 만나가 상징하는 하느님 섭리로, 주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던 시절, 광야 체험을 ‘기억하도록’, 종살이에서 이끌어주신 하느님을 “잊지 말라”고 권고합니다. “내 영혼아, 주님을 찬미하여라. 그분께서 해 주신 일 하나도 잊지 마라.”(시편 103,2)

하느님이 내 삶에서 일하신 것에 대한 기억에서 찬미가 흘러나옵니다. 구약에서 찬미는 감사라는 개념과 유사합니다.

‘성체성사’(eucharistia)는 그리스어 ‘감사’라는 말에서 유래합니다. 성체를 모시고 사는 그리스도인은 피조물에게 영감과 활기를 불어넣어 창조주를 향해 ‘감사’의 노래가 터져나오게 하는 사람입니다.

2. 그리스도의 몸과 친교와 일치를 나누라

성체성사는 초대 교회의 중심이었고(사도 2,42) 세상 끝 날까지 그러할 것입니다. 바오로는 갓 태어난 코린토 교회 신자들에게 보낸 서간 여러 곳에서 공동체의 성장을 바라는 사목자의 마음으로 성체성사의 의미에 대해 가르칩니다.

아마도 코린토라는 지역이 아프로디테 여신을 비롯해 고대 여러 동양 종교가 혼재하던 곳이라 신자들이 이교 예식을 매일 주변에서 목격하고 참여하기도 하면서 주님의 만찬을 이교 예식과 다를 바 없이 여기는 일이 발생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먼저 바오로는 오늘 제1독서에서 성체성사의 필수적인 전제이자 결과인 그리스도와의 일치와 친교에 대해 가르칩니다.

성체성사에 참여한다는 것은 그리스도의 몸과 피를 구경하는 것이 아니라 거기에 ‘동참하는’ 것, 곧 그리스도와 친교를 나누는 것, 나아가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것,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의 지체로서 일치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바오로는 또한 성체성사 전에 양심성찰을 하라고 권고하기도 합니다. 빵의 형상 안에 실재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현존을 강조하면서 그것을 불신하는 사람에게는 무서운 결과가 닥쳐올 것이라고 경고하기도 합니다. “주님의 몸을 분별없이 먹고 마시는 자는 자신에 대한 심판을 먹고 마시는 것입니다.”(1코린 11,29)

3. 가서 복음을 실천하라

오늘 복음에서 요한은 다른 복음서 저자들처럼 성체성사 제정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지만 성체성사의 신비를 명시적으로 설명합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생명의 빵이며 “이 빵을 먹는 사람은 영원히 살 것이다. 내가 줄 빵은 세상에 생명을 주는 나의 살이다”라고 말합니다.

그분이 주시는 빵은 물질적인 빵이 아니라 당신의 ‘살’(사륵스(sarx))입니다. 성경 용어에서 ‘살’은 ‘사람’을 가리킵니다. “말씀이 사람(살)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사셨다.”(요한 1,14) 예수님의 살은 은유가 아니라 실제로 십자가 위에서 그분이 우리를 위해 주신 몸입니다.

예수님은 “내 살은 참된 양식이고 내 피는 참된 음료”라고 말씀하시는데 이것은 그분의 십자가를 암시합니다. 예수님은 십자가 위에서 그분 몸을 주시고 그분 피를 쏟을 것입니다. 피와 물이 예수님 옆구리에서 흘러나올 때 그분 신부인 교회가 탄생합니다.

예수님은 또 “나를 먹는 사람도 나로 말미암아 살 것이다”라고 하십니다. 그분의 살, 참된 빵을 먹고 그분의 피를 마시면서 그분을 닮아가는 사람은 하느님이 주시는 최상의 선물, 하느님과의 친교를 선물로 받습니다.

바오로가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시는 것입니다”(갈라 2,20)라고 한 고백은 요한이 “나로 말미암아 살 것이다”라고 한 말과 같은 의미일 것입니다. 성체성사는 그리스도를 통해 하느님을 닮은 모습, 그분 자녀의 모습으로 우리를 변화시킵니다.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미사에 참여하는 것입니다.”(한스 스콧) 오늘도 미사에서 예수님의 몸과 피를 먹고 마시는 교회와 신자들은 예수님이 처음에 당신 몸을 선물로 주시면서 원하신 대로 세상에 생명을 전달할 수 있는 힘을 얻습니다. 특히 세상 안에 하느님을 모셔갈 수 있는 식별의 지혜를 청합니다.

“식별은 인간의 모든 생각과 모든 사고를 검토합니다. 악한 모든 것과 하느님이 기뻐하지 않은 모든 것을 찾아내어 흩어버립니다. 그런 방식으로 인간을 보호합니다.”(요한 카시아노)

하느님이 없다면 이 세상의 문화와 정치, 과학, 경제, 사회는 신적 영감이 결여된 세계가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주님과 함께 가서 복음을 실천하십시오.” 아멘!

---------------------------------------

임숙희 레지나 : 엔아르케성경삶연구소 소장
2020년 6월 14일 ‘가톨릭신문‘에서
  | 06.18
510 63.6%
1. 전례적 의미

오늘은 지극히 거룩하신 성체와 성혈 대축일입니다. 그 전례적 취지는 신자들로 하여금 성령의 이끄심에 따라서 다양성 안의 일치를 이룩하기 위한 실천적 지혜가 바로 자신과 세상의 거룩한 변화를 이룩하는 것이며, 이를 위한 성사적 변화를 거행하는 일이야말로 세상에서 복음을 선포하는 일임을 일깨우고자 함입니다.

2. 카파르나움 평원에서의 엇갈린 반응, 열광하거나 의심하거나…

예수님께서는 갈릴래아 호숫가 평원에서 오천 명도 넘는 많은 군중 앞에서 빵의 기적을 일으키셨는데, 이때 배고팠던 군중은 많아진 빵에 열광하였습니다. 그러나 열광하는 군중을 떠나 근처의 카파르나움 회당에서 좀 더 차분하게 생명의 빵에 관한 말씀을 들려주셨습니다. “썩어 없어질 빵을 구하지 말고 영원히 살게 하는 빵을 구하라.”(요한 6,27)고 그분이 말씀하시자 말귀를 못 알아들은 군중이 “그 빵을 저희에게 주십시오.”(요한 6,34)하였고, 그분이 재차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빵이다. 누구든지 이 빵을 먹으면 영원히 살 것이다. 내가 줄 빵은 세상에 생명을 주는 나의 살이다”(요한 6,35.41.51).

빵에만 열광하던 군중은 이 말씀을 듣고 나서, “저 사람은 요셉의 아들 예수가 아닌가? 그의 아버지와 어머니도 우리가 알고 있지 않는가? 그런데 저 사람이 어떻게‘나는 하늘에서 내려왔다.’고 말할 수 있는가?”라거나, “저 사람이 어떻게 자기 살을 우리에게 먹으라고 줄 수 있단 말인가?”(요한 6,52) 하며 떠나갔습니다.

빵을 배불리 먹을 때에는 열광하던 군중이 이렇게 의심하거나 반문하며 떠나버리자,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도 결단을 재촉하셨습니다. “자, 너희는 어떻게 하겠느냐? 너희도 떠나가겠느냐?”(요한 6,67). 믿든지 떠나든지 하라는 매우 단호한 어조였습니다. 그러자 망설이며 눈치만 보면서 선뜻 대답하지 못하던 제자들 중에서 베드로가 나서서 고백했습니다. “주님, 주님께서 생명을 주는 말씀을 지니셨는데, 우리가 주님을 두고 누구에게 가겠습니까?”(요한 6,68).

그 다음, 생명의 물에 관해서는 예루살렘에서 초막절 축제 마지막 날에, “목마른 사람은 다 나에게 와서 마셔라. 나를 믿는 사람은 성경 말씀대로 ‘그 속에서부터 생수의 강들이 흘러나올 것’”(요한 7,37-38)이라고 군중에게 가르치셨습니다. 이 말씀을 들은 군중도 두 갈래로 갈라졌습니다. 예언자나 메시아로 알아본 사람들도 있었지만, 그분이 갈릴래아 출신이라는 이유로 믿지 않는 사람들이 더 많았습니다.

2. 교회는 성체성사로 산다

2003년에 요한 바오로 2세는 「교회는 성체성사로 산다」는 제목의 회칙을 반포하여 성체성사에 관한 가톨릭교회의 가르침을 확정하였습니다. 이 문서에 의하면, 성체성사에 관해 공식적으로 가르치기 시작한 기점은 트리엔트 공의회입니다.

이 회칙에 따르면 트리엔트 공의회에서는, 성찬례의 빵과 포도주 안에 ‘참되고, 실재적이며, 실체적으로’ 그리스도께서 현존하시어 성체와 성혈로 거룩한 변화가 일어난다고 표명했는데, 이는 성경이 진술하고 있는 성체성사에 관한 계시적 언급을 시대적 상황에 맞추어 해석해 놓은 성전(聖傳) 즉 거룩한 전통입니다. 그러니까‘성령으로 말미암아’ 일어나는 거룩한 변화를 중세 유럽의 철학적 사유로 엄정하게설 명하고자 했던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거룩한 변화에 대한 이 세 가지 형용부사, 즉 ‘참되고, 실재적이며, 실체적으로’ 일어나는 변화라는 트리엔트식 표명은 중세에 특유한 형이상학적 용어입니다. 하지만 이렇게 자상하게 설명한다 해도 ‘성령으로 말미암아’라는 성서적 형용부사 이상으로 설명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성체성사의 질료인 빵과 포도주가 성령의개입 없이도, 즉 예수님의 십자가 수난과 부활을 전제하지 않고도 거룩하게 변화될 수 있다는 뜻으로 설명할 수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는 뜻입니다. 여기서 중세와 근세에 성체성사를 둘러싼 해프닝이 두 가지 일어났는데, 트리엔트식 성체 교리 설명의 한계에 대해 올바르게 이해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 주었습니다.

3. 성체성사를 둘러싼 현실 하나 : 루터는 뛰쳐나가고…

아우구스티노 수도회 사제였던 마르틴 루터(1483-1546)는 베드로 대성전을 건축하는 과정에서 벌어지고 있던 교황청 관료들의 부패와 과도한 모금 행위에 항의하는 95개조 반박문을 1517년에 독일 비텐부르크 성당 문에 내걸었습니다. 이 항의에 대해 레오 10세는 파문으로 응수했고 결국 이 파문장을 찢어버린 루터는 성체성사를 비롯한 성사의 효력 모두를 폐기한 채로 가톨릭교회를 뛰쳐나갔습니다.

성체성사를 거행하는 사제직무는 하느님 백성에게 봉사하라는 예수님의 명령으로 제정된 것인데, 과도한 모금 행위와 이로 말미암은 부패한 사제상은 파스카의 역사적 정신에 대한 섬김과 함께 상호 섬김과 그것도 가난한 이들에 대한 섬김으로 뒷받침되어야 할 성체성사의 거룩한 변화를 인효적(人效的)으로 – 사효적(事效的)으로가 아니라 - 심각하게 침해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 점에서 루터의 항의는 정당하였고 교황청에서는 이를 종교적 관용으로 수용하고 부패상과 과도한 모금 행위를 중단했어야 마땅했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파문으로 응수하고 완강하게 버티는 바람에 서방 교회는 분열되고 말았습니다. 이는 성체성사의 필요조건인 사제직의 섬김 윤리가 관철되지 못하는 바람에 생겨난 역사상의 해프닝이었습니다.

그런가 하면, 교회를 뛰쳐나간 루터와 그에 동조한 개혁가들이 세운 공동체들 역시 성사적 효력 자체를 부인하는 바람에 지금까지 성사 없는 공동체로 남아 있습니다. 성사 없이는 교회성도 담보할 수 없기에, 가톨릭교회 공식 문헌에서는, ‘개신교 공동체들’이라고만 쓰지 ‘개신교 교회’라고 부르지 않으며 교회 일치 운동에 있어서도 그들 개신교 공동체가 성체성사에로 돌아오기를 촉구하고 있습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그 당시까지 이단으로 단죄했던 개신교 공동체에 속한 그리스도인들을 갈라진 형제들이라고 부르면서 ‘일치 교령’을 반포함으로써 재일치를 향한 담대한 도정을 시작한 바 있습니다만 재일치로 향한 여정에서 가장 큰 관건은 이 갈라진 형제들이 성체성사에로 돌아오는 일입니다.

4. 성체성사를 둘러싼 현실 둘 : 브루노는 화형당하고…

트리엔트 공의회의 설명은 이미 그전부터 행해져 오던 성체성사의 이해를 반영한 것이었는 데, 이에 대하여 반발한 인물이 있습니다. 당시 교회가 이 거룩한 변화를 물리적이고 화학적인 차원에서 실체적 변화가 일어난다는 식으로까지 과도하고 무지하게 성체성사의 거룩함을 가르쳤던 관행에 반발하여 도미니코 수도회의 사제 브루노(1548-1600)는 자연과학의 이론을 인용하여 모든 물질에 하느님의 영이 작용하고 있으며, 성체성사 중에 빵과 포도주가 물질적이고 화학적인 변화를 일으킨다면 예수님을 하느님으로가 아니라 마법사로 취급하는 것이라고 학술적으로 반박하였습니다.

브루노의 이 같은 주장은 빵과 포도주의 실체적 변화를 과도하게 주장했던 당시 교회 교도권에 반박하기 위한 것이기는 했으나, 성령에 의하여 그리스도께서 현존하시고 그 은총으로 우리의 인격과 삶이 거룩하게 변화되어야 함을 가르치는 성체성사의 신학적 본질에 비추어 보면 역시 초점이 빗나간 반론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 책임은 애초에 성체성사 교리의 프레임을 잘못 짜 놓은 교회 당국에 돌아가는 것이지, 문제를 제기한 브루노에게 돌아갈 것은 아니었지만 결국 그는 종교재판을 받아야 했고, 교권 당국은 끔찍하게도 그를 화형시켜 버렸습니다(1600년). 이는 성체성사의 충분조건인 성령의 개입과 그리스도의 현존을 충분히 고려하지 않은 데서 생겨난 역사적 해프닝이아닐 수 없습니다.

이 사건이 중세 가톨릭교회의 분위기의 일단을 잘 말해줍니다. 결국 제2차 바티칸공의회 후에 브루노를 화형시킨 사건에 대한 역사적 과오를 반성하는 분위기 속에서 요한 바오로 2세는 1979년에 브루노에 대한 사형 선고가 부당하다는 재심 판결을 내렸고 2000년에는 브루노 처형 400주년을 맞아 폭력적인 사형 선고와 집행에 대하여 공식적으로 사과하였습니다.

5. 성체와 성혈 신심의 실천을 향하여

오늘 전례가 우리에게 던지는 메시지는, 우리가 성체와 성혈의 성사에 참여하여 삶과 세상 일에서 거룩한 변화를 이룩함으로써 세상 사람들이 하느님을 알아보게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예수님께서는 성체와 성혈의 성사를 세우셨는데, 교회는 절차상의 문제를 이유로 성찬례를 성체성사로만 좁혀서 기념하는 관행도 한 번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몸인 성체가 우리 영혼을 양육하는 생명의 빵이라면, 그리스도의 피인 성혈은 우리가 사랑의 희생을 각오하고 다짐하는 생명의 물인데, 성체와 성혈의 신심은 세상을 거룩하게 변화시켜 하느님 나라로 이끌기 위하여 생겨났습니다. 우리가 하늘에서 기운도 얻어야 하지만 우리가 바칠 희생도 각오해야 하는데, 희생을 아끼려는 오래된 관행은 성혈 신심을 망각한 데에서 기인한 듯합니다.

그래서 성체와 성혈 대축일인 오늘, 생각해 볼 주제는 균형의 회복입니다. 첫째, 성령의 개입 및 그리스도 현존에 대한 믿음이라는 성찬례의 충분조건과 섬김으로 나타나야 할 사제직의 윤리라는 필요조건 사이의 균형이 회복되어야 합니다. 둘째, 이를 위해 우리가 거룩한 기운을 얻기 위한 성체 신심과 우리의 희생을 다짐하는 성혈 신심도 균형을 바로 잡아야 합니다. 그리고 셋째, 성찬례에 참여하는 신자들에게 나타나야 할 인격의 거룩한 변화와 세상의 거룩한 변화 사이의 균형도 바로 잡아야 합니다. 교회는 성체와 성혈의 성사로 살아야 하기 때문이고, 이는 믿지 못하면 떠나야 할 만큼 너무도 중요한 계시 진리이기 때문입니다.

------------------------

서울대교구 이기우 신부
2022년 6월 19일
  | 06.19
510 63.6%
제1독서(창세 14,18-20)에
이스라엘이 가나안에 정착한 뒤 거행하던 예배를 반영합니다.

아브람이 조카 롯이 잡혀갔을 때 싸우러가서 이기고 돌아오는 길에 소돔 임금이 아브람을 마중 나왔던 것처럼(창세 14,17), 살렘(시온?) 임금 멜키체덱(시편 76,3) 역시 아브람을 맞이했습니다. “나의 하느님은 의로우시다.”라는 뜻을 지닌 하느님의 사제 멜키체댁이 제사 때 사용하는 빵과 포도주를 가져왔다는 것은 전쟁에 지친 아브람과 그의 부하들에게 안전을 보장한다는 뜻입니다. 아브람에게 축복을 빌어주고, 즉시 적들을 아브람의 손에 넘겨주신 하느님께 찬미를 드리자 아브람이 “그 모든 것의 십분의 일을 그에게 주었다.”는데, 이것은 멜키체덱이 가져온 빵과 포도주를 하느님께서 주시는 선물로 인정했다는 것입니다. 또한 이방민족인 소돔 임금이 주는 선물을 배척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루살렘 성전에서 사제들에게 제물의 십분의 일을 주던 관습이 아브람 시대부터 내려오던 것임을 말해줍니다.

복음(루가 9,11-17)은
하느님 나라에 대한 선포와 치유 뒤에 잔치를 베풀어주십니다.

빵의 기적은 “당신께서 저의 원수들 앞에서 저에게 상을 차려주시고, 제 머리에 향유를 발라 주시니 저의 술잔도 가득합니다.”(시편 23,5)와 “모든 육신에게 빵을 주시는 분이신 주님의 자애는 영원하시다.”(시편 136,25)라는 찬미소리가 들리는 듯하고, “모든 눈이 당신께 바라고, 당신께서는 그들에게 먹을 것을 제때에 주십니다.”(시편 145,15)라는 경탄의 소리가 들리는 듯합니다. 그러나 속뜻은 예수님이 누구신지 드러내는 것이며(1,53), 최후의 만찬을 미리 보여주시는 것이고(22,19-20), 장차 제자들이 해야 할 자선행위(6,21)가 담겨있습니다.

선교활동을 하고 돌아온 제자들(9,1-6)의 보고를 들으신 예수님께서는 그들과 함께 한적한 곳으로 가셨는데, 그곳까지 군중이 따라왔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황량한 곳”까지 따라온 그들을 맞이하셨다고 합니다. 벳사이다에서 일어난 빵의 기적은 하느님 나라에 관해 말씀해주시고 치유해주신 다음, 날이 저물었을 때 일어났습니다. 제자들도 예수님을 따라온 이들에 대해 측은한 마음이 들었는지(2열왕 4,42-44), 예수님께 군중을 돌려보내시어 그들 스스로 먹고 잘 곳을 마련하게 하라고 약간은 철없는 말을 합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직접 먹을 것을 주라고 하시자, 능력이 없었던 제자들은 가진 것이라고는 매우 하찮은 것으로서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뿐이라고 합니다. 장정만도 오천 명가량 되는 인원을, 마치 모세가 그랬듯이(탈출 18,21), 쉰 명씩 떼를 지어 자리를 잡게 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빵과 물고기를 손에 들고 하늘을 우러러 축복하신 뒤,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며 군중에게 나누어주도록 하셨습니다.

복음사가는 예수님께서 빵을 주실 수 있는 능력을 지니신 분이라는 사실과 군중이 모두 배불리 먹었다는 것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굶주렸던 이들이 배불리 먹고(6,21) 남은 조각을 모으니 열두 광주리나 되었다는데, 이는 제자 한 사람당 한 광주리씩 차지해야 할 것으로, 그리고 필요한 이들에게 나누어주어야 하는 교회의 풍요로운 모습을 말해줍니다(6,38). 그래서 장정 오천 명을 먹이시고 남은 것이 12광주리였다는 빵의 기적은 온 교회가 참여해야 할 말씀과 성찬의 식탁에서 예수님께서 주시는 생명의 양식을 통하여 풍요로움을 체험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엠마오로 가던 제자들이 하루 종일 주님의 말씀을 들었고, 날이 저물었을 때에 빵을 떼어주시는 모습에서 비로소 부활하신 주님을 알아본 것과 똑같은 내용입니다(24,13-35) 그런데 군중과 제자들은 하루 종일 예수님으로부터 하느님 나라에 대해 들었고, 많은 이들이 치유되었고,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고 자기들을 식탁에 앉게 한 다음 시중을 들으시면서 실컷 먹게 해주셨건만 아무런 반응이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섬기는 사람으로서 자기들 가운데 계시는데도(22,27) 아무도 몰라봅니다. 마치 매주일 미사에 참여해도 아무런 맛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들처럼 말입니다.

제2독서(1코린 11,23-26)는
예수님께로부터 전승되는 성찬의 전례를 말해줍니다.

바오로는 성찬의 전례의 뜻과 봉헌하는 예절을 잘 가르쳐주었건만, 개별적인 식사인데도, 모여서 먹기만 하거나 술에 취해 있었음에도(11,17-22) 주님의 만찬이라고 하는 코린토 공동체 무질서와 믿음이 없음을 꾸짖습니다. 바오로가 전해준 대로(51년) 빵과 포도주 잔을 드신 다음 감사를 드리면서 거행했던 성찬의 전례가 “주님(그리스도)으로부터 받은 것”이라는 뜻은 바오로가 편지를 쓰기 전부터 있었던 예절임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초기교회가 아주 일찍부터 빵을 들고 감사를 드리신 다음 떼어주었다는 것은 모든 공동체에서 똑같이 실천했던 것으로서 예수님께서 빵을 당신의 몸으로 변화시키셨다는 믿음으로 거행한 것입니다. 축성된 이 빵과 포도주는 우리를 위하여 죽음에 당신 자신을 내놓으신 그리스도(갈라 2,20)의 몸과 피와 똑같은 것입니다. 그래서 잘못된 성찬의 전례를 거행한다면, 그것은 곧 주님을 모독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바오로는 예수님의 죽음이 옛 계약을 어긴 인간의 죄를 없애기 위한 어린양의 희생제사임을 강조하기 위해 예수님께서는 두 번에 걸쳐서 “나를 기억하여 이를 행하여라.”라고 하셨음을 강조하고, 동시에 “주님께서 오실 때까지, 여러분은 이 빵을 먹고 이 잔을 마실 적마다 주님의 죽음을 전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예수님의 몸과 피로 변화된 빵과 포도주를 함께 마시는 이들은 예수님과는 물론 이웃들과 친교를 나누어야 하고, 자신을 잘 분별해야 하며, 믿음과 지극한 흠숭의 마음으로 거행해야 합니다(11,27-34).

코린토 공동체가 주님의 몸과 피를 받아먹고 마시면서 공동체의 일치와 친교를 잘 이루었어야 함에도 분열과 교만, 그리고 자기자랑과 술 취함이라는 추태를 부렸기 때문에 질책하는 것입니다. 성찬의 전례에 대한 근본적인 정신과 올바른 전승을 거론하면서 그리스도께서 공동체 한 가운데 계시니 올바른 지향으로 성찬의 전례를 거행하라는 권고합니다. “부당하게 주님의 빵을 먹거나 그분의 잔을 마시는 자는 주님의 몸과 피에 죄를 짓게 됩니다. 그러니 각 사람은 자신을 돌이켜보고 나서 이 빵을 먹고 이 잔을 마셔야 합니다.”(11,27-28) 빵과 포도주를 축성한 뒤에 우리가 외치는 것처럼 “사실 주님께서 오실 때까지, 여러분은 이 빵을 먹고 이 잔을 마실 적마다 주님의 죽음을 전하는 것”이라는데, 이는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기념하며 재림을 기다리는 성찬의 전례의 참된 의미를 일깨우는 것이며, 잘 준비된 상태로 참여하지 못하면서 그리스도의 몸과 피를 모시는 것도 역시 그리스도를 모독하는 것이므로 그분의 재림을 잊어버리는 나태한 신앙생활을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루카는 예수님을 모세(탈출 16장)와
엘리야(1열왕 17,14)와 엘리사(2열왕 4,42-45)처럼, 그리고 살렘의 임금이며, 영원한 사제인 멜키체덱처럼 묘사하면서 말씀과 성찬의 식탁을 소개합니다. 제자들은 오직 예수님과 함께 할 때에만 나눠줄 게 있고, 많은 이들이 풍요로움을 느끼게 할 수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성찬의 전례는 주님의 죽음과 부활을 선포하고 주님의 재림을 기다리기 위해 세상을 살아갈 힘과 은총을 얻는 잔치이므로, 함께한 모든 이가 기쁨으로 주님을 받아 모시는 친교의 잔치입니다. 또한 내 영혼을 치유해주시는 주님을 모신다는 기쁨과 충만함 때문에 서로에게 축복(평화의 인사)을 빌어주는 열정과 사랑이 넘실거리는 잔치입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제대로 이해하지도 못한 채, 그리고 합당한 준비가 되지 않았는데도 성체만 받아 모시는 미사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영원한 생명을 위한 양식이며, 교회를 살게 하는 거룩한 음식인 “주님(의 몸과 피를)을 분별없이 먹고 마시는 자는 자신에 대한 심판을 먹고 마시는 것입니다.”(1코린 11,29)

하느님의 말씀을 이해하지 못하고, 증거하려는 다짐도 없다면 사랑과 구원의 잔치인 미사의 참된 의미를 절대로 이해하지 못할 것입니다. 미사는 우리 구원을 위한 기쁨의 잔치이며, 빵과 포도주가 그리스도의 몸과 피로 변화되는 기적의 현장입니다. 좋은 잔치에 참여한 사람은 함께 하지 못한 이에게 그 잔치 분위기와 음식이 무엇인지 말해주는 것은 매우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미사에 왔다가서 이웃에게 그리스도의 몸과 피를 받아 모시는 기적을 체험했다는 말을 하지 못합니다. 기적을 보았다는 표현은 고사하고 미사의 분위기, 강론, 그리고 성체와 성혈의 의미를 전해주지(증거하지)도 못합니다. 반대로 부득이한 사정 때문에 미사에 참여하지 못한 사람들도 미사에 참여했던 이에게 아무것도 묻지 않습니다. 주님께서 다시 오실 때까지 주님의 죽음과 부활을 선포하겠다는 다짐과 더불어 본당의 모든 이가 잔치 집처럼 흥겹게 들끓는 미사, 그리고 하느님의 뜻을 깨닫기 위해 하느님의 말씀을 미리 읽고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미사가 되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

수원교구 방효익 바오로 신부
2022년 6월 19일
  | 06.19
510 63.6%
영원한 생명의 양식

-------------------

먹고 싶은 것을 마음껏 먹을 수 있는 것은 큰 은총입니다.
너무 가난해서 먹고 싶은 것을 먹지 못하고
남이 먹는 모습을 구경만 해야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런 경우에 가난한 사람은 비참한 심정이 되고,
마음에 ‘한’을 품을 수도 있습니다.

(배고픈 사람이 옆에 있는데도 외면하고 혼자서만 배불리 먹는 것은
‘큰 죄’입니다.)

어떤 병에 걸려서 마음대로 먹지 못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 경우를 죄에 연결해서 생각할 필요는 없을 것이고,
어쩌다가 그런 일이 생기면,
그 일은 하느님을 찾게 되고, 하느님의 은총을 갈망하는 계기가 될 것입니다.
우리가 희망하는 하느님 나라는
먹고 싶은 것을 마음껏 먹을 수 있는 나라입니다.

“만군의 주님께서는 이 산 위에서 모든 민족들을 위하여 살진 음식과
잘 익은 술로 잔치를, 살지고 기름진 음식과 잘 익고 잘 거른 술로
잔치를 베푸시리라(이사 25,6).”

그 나라는 가난도 질병도 차별도 없는 나라입니다(묵시 21,4).
모든 사람이 똑같이 배불리 먹는 나라, 모두가 똑같이 행복한 나라입니다.
그런데 묵시록을 보면,
특별히 ‘생명나무의 열매’가 언급되어 있습니다(묵시 22,2).
‘생명나무’는 하느님께서 아담과 하와를 에덴동산에서 내보내실 때,
인간들의 접근을 차단하셨던 나무입니다.
“주 하느님께서 말씀하셨다. ‘자, 사람이 선과 악을 알아 우리 가운데
하나처럼 되었으니, 이제 그가 손을 내밀어 생명나무 열매까지 따 먹고
영원히 살게 되어서는 안 되지.’ 그래서 주 하느님께서는 그를 에덴동산에서
내치시어, 그가 생겨 나온 흙을 일구게 하셨다. 이렇게 사람을 내쫓으신 다음,
에덴동산 동쪽에 커룹들과 번쩍이는 불 칼을 세워,
생명나무에 이르는 길을 지키게 하셨다(창세 3,22-24).”

예수님은 우리를 에덴동산으로 데리고 들어가려고 오신 분이고,
아담과 하와 때부터 인류가 먹지 못했던 생명나무 열매를
우리에게 먹이시려고 오신 분입니다.

<하느님 나라에서 생명나무 열매가 사람들의 양식이 된다는 말은,
사람들이 생명나무 열매만 먹으면서 산다는 뜻이 아니라,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된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려고 오신 분입니다.
그런데 그 생명은 무슨 나무 열매 같은 것을 통해서 얻게 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과의 결합과 일치를 통해서 얻게 됩니다.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빵이다. 누구든지 이 빵을 먹으면 영원히
살 것이다. 내가 줄 빵은 세상에 생명을 주는 나의 살이다(요한 6,51).”

성체성사는 예수님을 ‘먹는’ 성사이고,
예수님께서 주시는 ‘영원한 생명’을 ‘받는’ 성사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바로 생명나무라고,
또는 생명나무 열매라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영성체 한 번으로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되는 것은 아닙니다.
지상에서의 영성체는 영원한 생명의 시작입니다.
그 생명의 완성은 하느님 나라에서 이루어집니다.
우리는 날마다 영성체를 통해서 하느님 나라에서의 영원한 생명을
미리 맛보게 되고, 그 생명의 완성을 향해서 한 걸음씩 나아가게 됩니다.>

“나는 주님에게서 받은 것을 여러분에게도 전해 주었습니다.
곧 주 예수님께서는 잡히시던 날 밤에 빵을 들고 감사를 드리신 다음, 그것을
떼어 주시며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너희를 위한 내 몸이다. 너희는 나를
기억하여 이를 행하여라.’ 또 만찬을 드신 뒤에 같은 모양으로 잔을 들어
말씀하셨습니다. ‘이 잔은 내 피로 맺는 새 계약이다. 너희는 이 잔을 마실
때마다 나를 기억하여 이를 행하여라.’ 사실 주님께서 오실 때까지,
여러분은 이 빵을 먹고 이 잔을 마실 적마다
주님의 죽음을 전하는 것입니다(1코린 11,23-26).”

이 말은, 예수님께서 성체성사를 세우실 때 하셨던 말씀을 그대로 전해 주는
말인데, 바오로 사도가 강조하는 것은,
“성체성사는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에 참여하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수난과 죽음은 우리를 구원하기 위한,
즉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기 위한 희생과 사랑입니다.
따라서 성체성사는 예수님의 희생과 사랑에 참여하는 일이고,
희생과 사랑으로 예수님의 사랑에 응답하는 일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 말 다음에 바로 이런 말을 합니다.
“그러므로 부당하게 주님의 빵을 먹거나 그분의 잔을 마시는 자는
주님의 몸과 피에 죄를 짓게 됩니다. 그러니 각 사람은 자신을 돌이켜보고
나서 이 빵을 먹고 이 잔을 마셔야 합니다(1코린 11,27-28).”

영성체를 하려면 예수님을 믿어야 하고,
예수님께서 세우신 성체성사를 믿어야 하고, 사랑을 실천해야 합니다.

바오로 사도가 이 말을 한 것은, 코린토 신자들을 꾸짖기 위해서였습니다.
당시에 코린토 신자들 가운데에서 부자들은, 자기들끼리만 어울리면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상처를 주는 죄를 짓고 있었습니다.

“여러분이 한데 모여서 먹는 것은 주님의 만찬이 아닙니다. 그것을 먹을 때,
저마다 먼저 자기 것으로 저녁 식사를 하기 때문에 어떤 이는 배가 고프고
어떤 이는 술에 취합니다. 여러분은 먹고 마실 집이 없다는 말입니까?
아니면, 하느님의 교회를 업신여기고 가진 것 없는 이들을 부끄럽게 하려는
것입니까? 내가 여러분에게 무슨 말을 해야 하겠습니까? 여러분을 칭찬해야
하겠습니까? 이 점에서는 칭찬할 수가 없습니다(1코린 11,20-22).”

(당시에는 각자 집에서 음식을 가져와서 성찬의 전례를 거행했습니다.)
바오로 사도의 말은 대단히 엄하게 꾸짖는 말입니다.
사랑 없는 이기심으로 성체성사에 참여하는 것은,
성체성사가 아니라 ‘성체 모독죄’ 라는 것이 바오로 사도의 가르침입니다.
그리고 바오로 사도는 이런 말도 했습니다.
“우리가 축복하는 그 축복의 잔은 그리스도의 피에 동참하는 것이
아닙니까? 우리가 떼는 빵은 그리스도의 몸에 동참하는 것이 아닙니까?
빵이 하나이므로 우리는 여럿일지라도 한 몸입니다.
우리 모두 한 빵을 함께 나누기 때문입니다(1코린 10,16-17).”

성체성사의 성체는 실제로 예수님의 몸이고, 성혈은 실제로

예수님의 피라는 것이 우리 교회의 믿음입니다.
우리는 성체성사를 통해서 예수님과 실제로 한 몸을 이루게 됩니다.
그러니 예수님의 마음과 예수님의 사랑과도 하나가 되어야 하고,
이웃과도 사랑으로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

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
2022년 6월 19일
  | 06.19
510 63.6%
“받아라, 이는 내 몸이다”

----------------------------

오늘의 묵상 말씀은 미사 때마다 우리의 심장을 강하게 건드리는 부분입니다. 어쩌면 우리는 이 순간을 기다리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자주 접하지만 언제나 가슴이 먹먹해지고 두근거리게 됩니다. 그 거룩함은 나를 깊게 침잠시키고 온전히 받아들이고자 하는 나의 열망으로 온몸이 긴장합니다. 어느 한 절도 그냥 지나칠 수 없지만 오늘은 그리스도 수난의 의미와 제자들 간의 신비적 결합을 보여주는 22절 중심으로 묵상할까 합니다. 예수께서 중요한 순간에 행하신 일들로 이루어진 이 구절은 당신의 전 생애를 함축한 것이요, 성경의 전부를 요약한 것이며, 사랑받는 아들로서 자신의 전부를 아버지와 우리에게 기꺼이 내어주신 사건입니다. 이 엄청난 사건은 우리 존재의 의미를 새롭게 하고, 내어주는 몸의 혼인성에 우리 각자를 초대합니다. 우리는 이를 통해 내 존재의 이유와 내가 바라봐야 할 정점을 갈망하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빵을 들고 찬미를 드리신 다음, 그것을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며 말씀하셨다. “받아라. 이는 내 몸이다.””(22절)

“빵을 들고…”, ‘들다’는 자신의 의지가 들어간 적극적이고 능동적인 자세입니다. 아버지의 뜻에 기꺼이 자신을 내어 놓을 사건에 동의한다는 의미이지요. 그런데 이 대목에서 의문이 하나 듭니다. 예수님께서는 어떻게 만찬 후 당신에게 몹쓸 일이 일어날 줄 알면서도 심란함에 묶이지 않고 자유롭게 빵을, 또 잔을 들 수 있었을까요?

이 행위는 우리에게 당신의 사랑이 어디로 정향 되어 있는지를 드러냅니다. 하느님과 인간에게 자신을 내어주는 것을 허락한다는 뜻이지요. “아무도 나에게서 목숨을 빼앗지 못한다. 내가 스스로 그것을 내놓는 것이다.”(요한 10,18) 그러므로 예수께서 드신 것은 단순히 빵이 아니라 당신의 전 생애에 우리를 담았던 것입니다. 고통과 실패들, 좌절과 기쁨들, 인간의 모든 것들을 받아들여, 그 전부를 들어 올린 그곳에 우리를 초대하십니다. 만약 우리가 이 사랑을 알고 받아들이기를 원한다면, 내어주신 당신 몸 안에서 우리의 변화를 받아들이는 것이 됩니다. 새로운 준비를 하는 사랑의 첫 번째 몸짓은 곧 나를 들어올리는 행위인 것이지요.

“찬미를 드리신 다음…”, “축복하다” “감사하다”의 뜻을 가진 이 단어가 마르코복음에서는 ‘찬미’라고 번역되었네요. ‘축복하다’는 히브리어권 안에서 하느님께 감사를 드러내는 방법이며, 그리스어로는 ‘감사하다’라는 뜻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집트를 탈출 한 후, 광야에서 고통과 어려움을 만날 때면 주저 없이 걱정과 비탄을 쏟아내었고, 실제 그들은 하느님께 직접 대들기도 했습니다.(탈출 16,2-3; 17,2-3; 민수 11,4-5)

하지만 우리 예수님은 현재 이 상황에서도 찬찬히 찬미 드리며 덤덤히 받아들이고 계십니다. 빵과 포도주는 식사 때마다 가장 기본적인 음식이요 매일 수고의 삶이 어떻게 이루어지는지를 드러냅니다. 이 둘의 공통적인 부분은 형태 변화를 갖는다는 것입니다. 밀은 분쇄되어 가루가 되는 변화를 겪어야 하고, 포도는 으깨어져 자신의 모습을 찾을 수 없게 됩니다. 그렇게 변화된 빵과 포도주는 먹는 이에게 기쁨과 힘을, 나누는 이들 간에는 유대감을 줍니다. 앞으로 일어날 일에 대한 앞선 감사요, 쪼개는 빵과 함께 나눌 포도주를 통해 현재를 감사하는 힘이 찬미로 드러난 것입니다. 이는 오직 아들과 아버지 간에 나누는 사랑의 내적 일치에서만 가능합니다. ‘축복’과 ‘감사’가 새롭고 영원한 계약으로 변화됩니다. 이 변화는 우리에게 질책이 아니라 희망으로 다가옵니다.

“그것을 떼어…”, 이제 ‘빵의 조각’이 됩니다. 한 조각으로 나에게 오심은 우리가 그분 안에서 한 몸을 이루기 위해서입니다. 그 어느 조각도 버려짐 없이 모아지기를 그분께서 원하신 것입니다. 떼어진 그 빵이 이제 새로운 생명의 근원이 되고 우리는 그 근원에 참여하여 그리스도의 모습으로 변화되고 그의 ‘신비적 몸’ 안에서 하나 됩니다. 우리가 완성시켜야 할 몫을 남겨 주신 것이지요.

“주시며 말씀하셨다…”, ‘주다’, ‘넘겨주다’. 다른 사람들 손에 ‘자신을 놓다’는 의미입니다. 하나의 사명과 함께 하나의 빵, 하나의 몸이 쪼개어졌고 그리고 넘겨졌습니다. 믿고 따르는 제자들에게도 유다에게도 빌라도에게도 최고 사제들에게도 지금 우리들에게도 당신 자신을 넘기신 것입니다. 단순하게 준 것이 아니라 인계된 몸입니다. 맡기신 것입니다. 누군가 그것을 수용하는가 하지 않는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유다의 손에도 군인들의 손에도 자신을 인계했기 때문입니다. 사실 그들보다 먼저 아버지께 인계했습니다. 아버지의 자비를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에 대한 자비를 아버지께 청하며 예수님은 그들을 위해서 쪼개어진 것입니다.

“받아라, 이는 내 몸이다”, “받아라”로 번역된 ‘라베테(Λάβετε)’는 ‘손으로 잡다’라는 뜻으로 ‘너희들 각자가 받으라’는 의미입니다. 이제 빵이 아니라 몸이 되셨습니다. 몸은 생명을 넘어 몇 가지 의미를 더합니다.

몸은 선물입니다. 받은 것입니다. 나의 존재 자체가 형이상학적 특징을 갖는 이유입니다. 이 몸은 자기 자신을 선물로 내어주는 사랑을 통하여 자기 자신을 되찾게 됩니다. 스스로를 다스릴 수 있는 힘을 통하여 ‘줄 수’ 있는 힘으로 흐르는 것입니다. 하지만 자신 안에 갇힌다면 자신을 발견할 수도 되찾을 수도 없습니다.

몸은 혼인적 속성을 갖고 있습니다. 자신을 내어주고 너를 받아들여 한 몸이 됩니다. 구약과 신약 모두에 계시된 하느님은 인간을 부르고 혼인적 사랑을 나누고자 하셨습니다. 받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받고 내어줌이 상호 교환되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몸은 ‘사랑의 언어’를 갖고 대화합니다. 이 언어는 자기 자신을 드러내는 인격 표현의 수단이 됩니다. 선물, 혼인적 속성, 사랑의 언어, 이 셋은 서로 분리되지 않고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습니다. 매일 그분의 몸은 자신을 내어주는 선물로 우리에게, 신부와 일치하는 신랑의 혼인적 속성으로, 한몸을 이루는 사랑의 언어로 우리에게 오십니다. 받아들이는 그 자체가 곧 내어줌(상호교환)이 되어 이제 자신의 몸이 성사요 거룩함의 주체임을 깨닫게 되고, 그 충만한 완성, 놀라운 기쁨, 완전한 행복을 맛보고 갈망하게 됩니다.

희생의 피가 승리의 잔에 담겨있음을 보십시오. 이제, 승리의 잔을 들고 우리가 일어나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세상을 향해 걸어가야겠습니다. “당신께서는 제물과 예물을 원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저에게 몸을 마련해 주셨습니다.”(히브 10,5)

※ 김혜숙(막시마)선교사는 교황청립 라테라노대학 신학과 교황청립 안토니오대학 영성학과를 졸업하고, 교황청립 혼인과 가정 연구를 위한 요한 바오로 2세 대학에서 석·박사 학위를 받았다. ‘그리스도 왕직 재속 선교사회’ 회원이며, 대전가톨릭대 혼인과 가정대학 신학원을 비롯해 전국 각지에서 강의 활동을 하고 있다.

--------------------------------

가톨릭신문 2018년 6월 3일
  | 06.19
510 63.6%
밥만 먹는 밥보가 아니라 밥이 되는 바보의 사랑

------------------------

찬미 예수님!
오늘은 지극히 거룩하신 그리스도의 성체 성혈 대축일입니다. 교회는 이날을 예수 그리스도께서 세우신 7성사 중 특별히 성체성사를 특별히 기념하고 그 신비를 묵상하는 날로 지냅니다.

우리 가톨릭 교회에는 개신교에 없는 것으로 7성사가 있는데 그 중에서 가장 중요한 성사가 바로 성체성사입니다. 2차 바티칸 공의회는 성찬례에 대해서󰡒그리스도인의 생활 전체의 원천이요 그 절정󰡓(교회헌장 제11항)이라고 선포하였습니다. 성체성사는 우리 가톨릭 영성의 바탕이고 신앙생활의 기초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한 마디로 성체성사는 우리 가톨릭 교회의 보배입니다.

우리 천주교 신자는 말씀 뿐만 아니라 성체에 배고파하는 사람들입니다. 신앙생활의 열심 정도를 판단하는 기준은 성체에 대한 갈망 유무 즉 미사참례 정도에 달려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요즘 내가 신앙생활을 제대로 하고 있는지 아니면 엉망으로 하고 있는지 알려면 간단합니다. 내가 성체를 얼마나 자주 영하고 있는지 혹은 자주 영하고 있지 않는지를 보면 대번 알 수 있습니다.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는 사람의 영혼은 영적양식인 성체를 갈망하고 성체에 배고파합니다. 죽은 사람이 배고파 합니까? 육체적으로도 죽은 사람은 배고파하지 않습니다. 병든 사람에게 밥맛이 좋겠습니까? 병들고 아픈 사람에게는 밥맛이 좋을 리가 없고 입맛이 좋을리 없습니다. 영혼의 사정도 마찬가지입니다. 살아있는 영혼을 가진 사람은 성체에 배고파합니다. 영혼이 죽은 사람이거나 병든 사람은 성체를 영하지 않고도 배고프지가 않습니다. 열심한 신앙인은 성체를 영해도 또 영하고 싶습니다.

그런데 일주일에 한 번도 성체를 영하지 않는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입니까 이런 저런 핑계로 주일 미사에 빠지는 사람은 어떤 사람이겠습니까 이런 사람들은 영적으로 죽어가고 있는 사람입니다. 성체를 영하지 않고도 배고픈 줄 모르고 갈증을 느끼지 못한다면 그 영혼은 무언가 잘못되어도 한참 잘못된 영혼입니다. 영성체를 계속 하지 않았는데도 영혼이 전혀 배고파 하지 않는 사람은 영적으로 이미 죽은 사람입니다. 성체는 우리 신자 생활의 원천이고 절정입니다.

사실 우리가 지금까지 전례 안에서 기념해 왔던 육화, 파스카, 성부, 성자, 성령의 삼위일체의 신비 전체까지도 바로 지극히 거룩하신 성체 성혈 대축일의 의미 안에 함축되어 있고, 오늘 그 절정에 이르게 됩니다. 그리스도의 성체 성혈이야말로 하느님 사랑과 보편적이고 구체적인 구원 의지의 가장 탁월한 표현이요 그 실질적인 구현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은 오병이어의 기적 이야기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이야기입니다. 예수님께서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고 5,000 명을 배불리 먹인 사건입니다.

오늘 복음의 장소적 배경은 에레모(ἐν ἐρήμῳ) 즉 광야입니다. 에레모는 고독한, 황량한, 비어있는 등의 의미입니다. 우리 성경은 ‘황량한 곳’이라고 번역하였습니다. 보통 사람이 살지 않는 땅을 말합니다. 광야는 하느님의 역사하심을 체험하는 시간이자 장소입니다. 육안으로 볼 때 광야 는 생명이 자라기 힘든 장소로 보이만 영안으로 볼 때 광야는 백성들의 신앙을 성장케 하는 곳입니다. 광야하며 빼놓을 수 없는 이야기가 ‘만나’입니다. 만나는 이집트를 탈출했던 이스라엘의 모든 사람들이 예외없이 먹은 일용할 양식이었습니다. 탈출기 16,15에 보면 "이게 무엇이냐?"라는 표현이 등장하는데 바로 이 표현에서 '만나'라는 독특한 이름이 유래했다고 봅니다. "이게 무엇이냐?"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표현은 '만 후'인데, 이 표현에서 '만나'가 파생되었다고 보는 것입니다.
만나는 광야 여정 중에 단순히 배를 채우는 음식이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이 그들과 함께하시는 '하느님의 현존'을 확인할 수 있게하고 상징적인 음식이었습니다. 사도 바오로는 이 광야의 만나가 성체를 미리 표상하는 예표라고 이해햇습니다. “모두 똑같은 영적 양식을 먹고, 모두 똑같은 영적 음료를 마셨습니다. 그들은 자기들을 따라오는 영적 바위에서 솟는 물을 마셨는데, 그 바위가 곧 그리스도이셨습니다.”(1코린 10,3-4).

다른 한편 "이게 무엇이냐?"라는 뜻을 지니고 있는 정체 모를 먹을거리인 만나가 광야에서 이스라엘을 구해내는 양식이었듯이, 이제 요한 복음에서는 더 신비한 양식 '생명의 빵'이라는 이름의 양식을 주장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 자신을 계시하실 때 비유적으로 만나를 들어 생명의 빵과 연관하여 말씀하십니다(요한 6장). 예수님께서는 당신 자신을 먹어도 결국 죽을 수밖에 없는 구약의 만나와는 다르게 하늘에서 내려온 참된 만나로서 세상에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빵이라고 선언하신다."이것이 하늘에서 내려온 빵이다. 너희 조상들이 먹고도 죽은 것과는 달리, 이 빵을 먹는 사람은 영원히 살 것이다"(요한 6,58). 이제부터 하늘에서 내려온 빵은 만나가 아니라 예수님 자신이었다. “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하늘에서 너희에게 빵을 내려 준 이는 모세가 아니다. 하늘에서 너희에게 참된 빵을 내려 주시는 분은 내 아버지시다. 하느님의 빵은 하늘에서 내려와 세상에 생명을 주는 빵이다.”(요한 6,32-33) 교회는 전통적으로 성찬례와 성체성사의 예비적 표징으로 탈출기에 나오는 출애굽의 만나 사건(탈출 16장)을 언급합니다.

이렇듯이 오병이어 기적의 공간적 배경이 광야라면 시간적 배경은 ‘날이 저물기 시작’할 때입니다. 시간은 흘러 어느덧 저녁식사 시간이 다가왔음을 의미합니다. 제자들은 군중과 자신들이 있는 곳이 고립된 황량한 곳이고 시간은 날이 저물었기에 먹거리와 잘 곳에 관해 걱정하기 시작합니다. 제자들이 예수님께 상황을 설명하고 방법을 제안합니다.

등장인물은 예수님, 군중 그리고 열 두 제자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을 마태와 마르코가 제자들을 막연하게 “그 제자들”)이라고 밝히는 것과 구별되게, 오늘 루카 복음은 열 두 제자임을 명백히 지칭합니다. 다른 복음서에는 나오지 않는 내용인데, 루카는 예수님의 열두 제자를 아주 중요하게 여깁니다.

군중은 장전만도 오천 명가량이나 됩니다. 기적 사건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하시는 분은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은 빵을 많게 하시고 질서를 잡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께 기적을 요청하거나 기대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지시에 순종하여 나름대로 자기 역할을 열심히 합니다. 특별히 음식을 분배하는 일을 합니다. 그리고 군중들은 수동적으로 시키는대로 하고 먹어줍니다.

여기서“열 둘”로 지칭된 제자들은 오늘 복음 바로 앞 10절에서 ἀπόστολοι(아포스톨로이, 사도들)로 불렸는데, 이것은 아포스톨로스 ἀπόστολος의 복수형입니다. ‘보내다’라는 뜻의 동사 아포스텔로 ἀποστέλλω의 명사형이 아포스톨로스입니다. 사도란 파견받은이, 보냄을 받은이 등의 뜻을 지닙니다. 그런데 이 사도들이 그들의 사명과 관련하여 1절에서는 “열둘”로 불립니다. “열둘”과 “사도들”이란 두 표현의 연결은 일전에 산에서 예수님의 부름을 받아 사도들이라고도 불린 열둘의 사명을 상기시킵니다.“날이 새자 제자들을 부르시어 그들 가운데에서 열둘을 뽑으셨다. 그들을 사도라고도 부르셨는데”(루카 6,13). “열둘”과 “열두”제자가 자연스럽게 연결됩니다. 이 표현은 루카 복음사가가 열두 제자들의 사명을 의식하고 오병이어 사건을 기록하고 있음을 시사합니다. 또한 제자들을 “열둘”로 명백하게 표기함으로 배불리 먹고 남은 음식을 담은 바구니가 열두 바구니가 구약의 백성 12지파를 뛰어넘어 12사도로 대표된 신약의 백성을 상징적으로 지시합니다. 이 점에도 제자들이 거둔 음식은 상징적으로 신약의 백성을 먹일 영적인 양식인 성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다시 본문으로 돌아오면, 황량한 벌판에서 날이 저물기 시작하여 밥 때가 되었을 때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제자들이 주님께 제의합니다.

“군중을 돌려보내시어, 주변 마을이나 촌락으로 가서 잠자리와 음식을 구하게 하십시오. 우리가 있는 이곳은 황량한 곳입니다.”

얼핏 제자들의 이 말을 들으면 그들이 백성들을 생각해서 걱정하는 말 같습니다. 사실은 이들의 제안은 책임을 피하자는 뜻입니다. 자기들 문제는 자기들이 알아서 하도록 보내어 버리자는 의도입니다, 제팔 제가 흔들라는 뜻입니다. 군중들을 데리고 있으면 그들의 욕구와 필요를 채워야 할 책임이 자기들에게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을 돌려보내면 개인의 안전과 필요는 각자의 책임이 됩니다. 그러니 일단 제자들은 그 무거운 책임에서 벗어나고자 한 말입니다. 열 두 사도들의 속마음은 골치 아픈 문제에서 벗어나고 싶었습니다.

이 제안은 예수님께 그리 흡족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은 하느님 나라의 이름으로 받아들인 사람들을 온전하게 환대하고 싶으셨습니다. 텍스트를 확장해서 컨텍스트를 거슬러 올라가면 오늘 말씀 전에 제자들은 자신의 사명을 마치고 돌아왔고 예수님은 그들을 따로 데리고 물러가셨다는 구절이 나옵니다. 따로 데리고 물러가신 목적을 마르코 복음사가는 휴식과 재충전을 위한 시간이 필요했기 때문입니다(6,31-32). 하지만 그분을 따라왔던 군중은 사실 예수님께서 초대하지 않은 불청객이며 어떤 의미에서 권리를 침범하는 무례한 사람들입니다. 그런데도 예수님은 그들을 ‘맞이하셨다’고 합니다. 매일미사 책에는 무슨 이유인지 몰라도 성경에는 9장 11절에“그들을 맞이하시어”라는 대목이 나옵니다. “그러나 군중은 그것을 알고 예수님을 따라왔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맞이하시어, 하느님 나라에 관하여 말씀해 주시고 필요한 이들에게는 병을 고쳐 주셨다.” ‘맞이하다’는 그리스어 동사'ἀποδεξάμενος'(apodexamenos, 아포덱사메노스)는 ‘환대하다’라는 의미를 갖고 있기에 예수님께서는 불청객의 방문도 기분나쁘게 생각하지 않았다는 것을 암시합니다.

열두 사도들은 군중을 돌려보내어 제팔 제가 흔들게 하자는 생각을 했지만 주님의 반응은 제자들의 생각과는 달랐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너무도 단호합니다.

“너희가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어라.”

걱정만 하지 말고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는 말씀입니다. 군더더기가 없습니다. 책임을 회피하려 했던 제자들의 마음을 정확히 집어 내십니다. 이 말을 들었을 때 제자들은 얼마나 황당했겠습니까? 이 황당한 답변에 제자들은 다시 차분하게 상황을 설명합니다.

“저희가 가서 이 모든 백성을 위하여 양식을 사 오지 않는 한, 저희에게는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밖에 없습니다.”

루카가 기록한 제자들의 반응은 그래도 얌전합니다. 마르코의 기록을 보면 상당히 노골적인 불만이 나타나 있습니다. "그러면 저희가 가서 빵을 이백 데나리온어치나 사다가 그들을 먹이라는 말씀입니까?”그러나 기본적으로 군중을 대하는 예수님의 마음은 ‘가엾은 마음’입니다. 루카나 요한과는 달리 마태오와 마르코는 사건의 서두에 예수님의 마음을 ‘가엾은 마음’으로 자락을 깔았습니다. 예수님께서 어려움을 당한 이들을 보실 때 이들과 공감하는 마음을 그리스어로 스플랑크니조마이(σπλαγχνίζομαι)라고 신약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스플랑크니조마이 σπλαγχνίζομαι 는 스플랑크논 σπλάγχνον에서 유래하는데 그것은 인간의 창자나 심장 등 오장육부를 가리키는 단어입니다. 애간장이 녹고 창자가 끊어지는 아픔입니다. 이것에 해당되는 히브리어는 '라카밈'인데, 이것은 야훼의 자궁을 일컫는 말입니다. 며칠 동안 예수님을 따라다니던 수천 명이 지치고 배고픈 것을 보시고 예수님은 바로 이런 가엾은 마음을 가지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제자들과 예수님은 군중을 대하는 그 마음자세의 근본이 서로 다릅니다.

여하간 이 대목에서 루카 복음사가는 극적인 효과를 노리고 모인 사람의 숫자를 언급합니다.

”사실 장정만도 오천 명가량이나 되었다“

남자만 5천명(10절)이라고 했는데, 사실은 그 이상이 됩니다. 병행 구절인 마14:21을 보면 이 숫자는 성인 남자만 해당됩니다. 그 외에 여자와 아이들 숫자까지 합치면 아마 1만 명, 아니 그 이상이었을 겁니다. 그러니 이 모든 백성이 다 먹을 양식을 마련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입니다. 그들이 가진 것은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는 자기들끼리 먹기에도 부족합니다. 이들을 보내어 스스로 먹을 것을 마련하게 하는게 지극히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판단이라는 것을 강조합니다.

망설이고 있는 제자들에게 예수님께서 역시 주도적으로 구체적인 행동의 지침을 주십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답변은 또 제자들의 기대와 다릅니다.

“대충 쉰 명씩 떼를 지어 자리를 잡게 하여라.”

즉, 저녁 먹을 준비를 하라는 것입니다. 제자들은 이해하기 어려웠지만 순종합니다. 불평하는 사람이 있을 법도 한데 그래도 제자들 중에는 반발하는 사람이 없습니다. 제자들이예수님의 말씀대로 다 자리에 앉힙니다. 예수님께서는 줄세우기를 하시지 않습니다. 편가르기도 하지 않습니다. 남자만 오 천명이 되는 큰 군중이 가족들과 함께한데 뒤섞여 있을때에는 그 규모가 쉽게 파악되지 않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말씀대로 약 50명씩 자리를잡고 앉히니 비로소 대략적인 윤곽이 파악됩니다. 결과의 평등을 이루기도 중요하지만 과정의 공정함도 중요합니다. 먼저 자리를 잡게 하시는 것은 편리를 위해서 하는 것 같지만 분배의 공정함을 위함입니다. 공정하지 않으면 소란이 일어나기 마련이지만 오늘 과정에서 말썽이 생기지 않았습니다.

이렇게 준비를 마치자 예수님께서 오병이어를를 가지고 축복하여 나누어 주도록 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손에 들고 하늘을 우러러 그것들을 축복하신 다음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며, 군중에게 나누어 주도록 하셨다.”

루카는 의도적으로 주님이 어떻게 하시는지 행동 하나하나를 다 자세히 묘사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손에 들고 하늘을 축복하시고 떼어서 나누어 주도록 하십니다. 예수님께서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고 감사와 축복의기도를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떼어 제자들에게 주십니다. 예수님께서 직접 군중에게주시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손에서 제자들을 거쳐 군중에게 나뉘어집니다. 예수님은 빵 물고기를 떼어서 제자들에게 나누어 주셨고, 제자들이 예수님께 받은 떡과 물고기를 군중에게 나누어 줍니다. 분배의 과정도 중요합니다. 그 과정은 예수님께서 열 두 사도들에게 또 제자들이 군중에 나누어 주는 방식입니다. 빵을 나누는 과정에서 소란이 있었다는 말은 없습니다. 이것은 공정함이 유지되었다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이 자기의 것을 꺼내서 보탰다는 말은 없고 또 보탤 틈도 없습니다. 제자들과 백성들이 먹는 양식은 결국 그들의 주머니에서 나온 것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의 풍성한 축복에서 나온 것입니다. 초자연적인 기적이 일어난 것입니다. 이 음식을 제공하시는 분은 예수님이시며, 제자은 예수님이 주시는 것을 받아 나누어주는 것이고 군중을 공짜로 받아 먹을 뿐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빵과 물고기를 떼어 주셨고, 제자들은 예수님께 받은 것으로 무리들에게 나누어 주었는데 그 결과는 놀라울 정도로 충만합니다. 그 결실에 관한 묘사는 오늘 본문 마지막 17절에서 언급됩니다.

“사람들은 모두 배불리 먹었다. 그리고 남은 조각을 모으니 열두 광주리나 되었다.”

오병이어 사건의 결과를 두 가지로 묘사합니다. 첫 번째 것은 ‘사람들은 모두 배불리 먹었다.’입니다. 누구는 배가 터지고 누구는 배가 주리고 하지 않았습니다. 모두 만족스럽게 먹고도 남았다고 합니다. 최종적인 결과는 ‘남은 조각을 모으니 열두 광주리나 되었다.’입니다. 열두 광주리를 모은 제자들은 모두 열두 제자입니다. 즉 열 두 명의 제자들이 열 두 바구니를 거두었습니다. 그러니 열심히 돌아다니며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었던 제자들 모두가 각각 한 바구니씩 거두었다는 의미입니다. 결과가 너무 풍요롭고 정의로웠습니다. ‘부족함’이 ‘차고 넘쳐 남는 상황’으로 전환되었습니다.

처음에는 모두가 배가 고팠지만 하느님의 정의는 풍요로움입니다. 그리고 남은 조각을 모두 모았습니다. 그것을 어떻게 했다는 것은 성경에 나오지 않습니다. 그러나 일차적으로 사적인 영역이 아니라 공공의 영역으로 돌려졌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것은 예수님과 함께 이미 와 있는 하느님 나라의 풍족함입니다. 기회와 과정 그리고 결과가 모두 만족스럽습니다. 처음에 모두 배고프다는 점에서 평등했지만 이제 결과적으로 배고픈 사람도 없고 배아픈 사람도 없습니다. 예수님과 함께 할 때, 또 예수님의 말씀에 순명할 때 기적은 이루어집니다. 오병이어가 그냥 나에게 있을 때는 한 끼 식사에 불과하지만, 그것이 예수님의 손에 있으면 오천 명 이상을 먹이고도 남는 기적의 음식이 됩니다. 음식물이든 사람이든 예수님과 함께 있을 때 그 빛을 발합니다. 행복과 풍요로움은 예수님의 손과 품 안에 있느냐 혹은 없느냐에 달려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빵을 많게 하는 기적은 마태오, 마르코, 루카 세 공관 복음서와 심지어 요한복음에까지 실려있는 내용입니다. 복음서마다 조금씩 강조점이 다르지만 이 이야기는 예수님의 기적들 중 유일하게 네 복음서에 다 기록되었다는 것은 그만큼 사람들에게 널리 알려진 사건이고 복음사가들이 중요하게 기억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로 하여금 한 가지 생각할 거리가 생깁니다. 그것은 ‘예수님의 기적들 중에는 더 멋있고 감동적인 사건들도 많이 있는데 왜 그 많은 것 중 꼭 이 이야기가 중요할까?’하는 의문입니다.

그것은 이 기적이 교회의 성체성사를 겨냥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루카 복음사가가 본문을 성찬례와 연관 짓고 있다는 암시가 여러 군데에 나옵니다.

16절에서 우리가 특별히 주목해야 할 몇 개의 단어들이 있는데, 그것은 예수님의 행동을 나타내는 동사들입니다. 16절을 다시 보십시오. 예수님께서 오병이어를 어떻게 하십니까?

“예수님께서는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손에 들고 하늘을 우러러 그것들을 축복하신 다음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며, 군중에게 나누어 주도록 하셨다.”(루카 9,16)

첫째로 ‘들고’ 둘째로 ‘축복하시고’ 셋째로 ‘떼어’ 넷째로 제자들에게 ‘주십니다’. 이런 동사들을 생각할 때 떠오르는 장면이 또 있지 않습니까?

이 동사와 관련된 단어나 그 유의어가 사용되는 장면은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최후의 만찬에서 성체성사를 제정하시는 모습의 표현에서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또 빵을 들고 감사를 드리신 다음, 그것을 떼어 사도들에게 주시며 말씀하셨다.”(루카 22,19)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기 위해 잡히시던 바로 그날 밤, 1 빵을 들고 2 축복하시고 3 떼어 4 나누어 주셨습니다. 좀더 구체적으로 표현하면, 먼저 빵과 물고기를 들어 λαβὼν, 축복하시고 εὐλόγησεν, 떼어 ἐδίδου 주시는  예수님의 행동(9,16)은 성체성사를 제정해 주시는 마지막 만찬 때에 그대로 재현됩니다.(22,19) 그리고 오늘 복음 15절에서 ‘자리를 잡았다.’(9,14.15)라고 번역된 동사'κατέκλιναν'는 본래 비스듬히 눕는 자세를 지칭하는데 이것 또한 마지막 만찬 때에 파스카 잔치에 함께한 제자들의 자세와(루카 22,14) 비슷합니다.

뿐만 아니라 이렇게 오병이어 기적에서 예수님의 행동과 최후만찬에서의 예수님의 행동 즉 축복하시고 떼어서 나누어 준다는 예수님의 행위는 엠마우스의 제자들과 함께한 식탁에서도 거의 그대로 반복됩니다.

“그들과 함께 식탁에 앉으셨을 때, 예수님께서는 빵을 들고 찬미를 드리신 다음 그것을 떼어 그들에게 나누어 주셨다. 그러자 그들의 눈이 열려 예수님을 알아 보았다.(루카 24,30-31)”

엠마오로 가는 제자들의 이야기에서 이 때 사용된 동사들과 유사한 표현이 데자뷔로 겹쳐집니다. 스토리의 전개는 예수님의 십자가 처형 후를 시간적 배경으로 하고 엠마오로 가는 길이 공간적 배경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 후 두 제자가 엠마오로 향해서 가고 있었습니다. 그때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나타나십니다. 그런데도 이 두 제자가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합니다. 결정적으로 두 제자가 예수님을 알아보게 된 것은 함께 식탁에 앉았을 때입니다. 빵을 가지고 축복하시고 떼어주시니까 최후의 만찬에서 빵을 떼어 주시던 그 주님을 떠올리게 된 것입니다. 재빠르지 못한 그 두 제자도 "빵을 가지고 축복하시고 떼어주시던" 주님의 독특하신 모습이 주님을 알아보게 하십니다.

빵을 손에 들고 축복하시고 떼어서 나누어 주도록 한다는 이야기를 들으면 최후만찬이나 엠마오 사건은 생각나지 않는다 해도 성당 다니는 사람은 누구나 연상하는 장면이 있는데 바로 오늘날 미사의 모습입니다. 미사에 최후의 만찬을 하시던 주님의 모습과 엠마오에서 제자들이 만난 주님의 기억이 담겨 있고, 또한 오병이어 기적의 말씀이 비취어지고 있습니다. 빵을 많게 한 기적이 저녁에 이뤄진 것 또한 성체성사가 제정된 저녁과 엠마우스의 제자들이 예수님을 알아본 저녁식사와 시간적으로도 연결되어 있습니다.

이렇게 오늘 복음의 오병이어 기적 사건은 그만큼 초대 교회의 지도자들에게는 중요한 사건이었습니다. 이 기적 사건은 예수님을 만나고 알아보는 자리이자 교회의 핵심적 성사를 상징하고 있기에 다른 어떤 기적보다 더 중요하고 네 복음서 즉 마태, 마르코, 루카, 요한복음서에 모두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러한 성체성사의 근거는 오늘 제2독서에서 사도 바오로가 확정을 짓습니다. 사도는 지금까지 말씀드린 것과 같은 맥락에서 명시적으로 ‘주님에게서 받은 것’이라면서 성찬례를 거의 같은 어휘를 사용하며 전해줍니다. 사도께서는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나누신 최후만찬 장면을 상세히 전해주고 있습니다.

“주 예수님께서는 잡히시던 날 밤에 빵을 들고감사를 드리신다음, 그것을 떼어주시며말씀하셨습니다.”(1코린 11,24)

주님께서는 제자들과 함께 나눈 최후의 만찬 때에 성체성사를 세우셨음을 밝힙니다. 이런 연유로 바오로 사도는 이 예식을 계속 기념하고 있다고 말하십니다. “주님께서 오실 때까지, 여러분은 이 빵을 먹고 이 잔을 마실 적마다 주님의 죽음을 전하는 것입니다.”(1코린 11,26)

그런데 주님께서는 최후만찬을 거행하시고 당신을 기념하여 그것을 반복하라고 명하셨습니다(루카 22,19; 1코린 11,24 참조).

교회는 이 명령에 따르고자 성경에 기록된 대로 주님께서 최후만찬에서 하셨던 모든 행위를 그대로 거행합니다. 그리고 그것이 오늘날 미사의 성찬의 전례의 본질적인 요소가 되고 있습니다.

오늘날 교회가 거행하는 성찬례는 (1) ‘빵의 예식 + 감사기도’, (2) ‘잔의 예식 + 감사기도’의 순으로 거행됩니다. 그래서 성체성사 ‘제정 요소’는 다음과 같이 세분됩니다.

주님께서는 (1) 빵을 드시고, (2) 감사를 드리시고, (3) 쪼개어, (4) 나누어주시고, (5) …라고 말씀하셨다. 또한 (6) 잔을 드시고, (7) 감사를 드리시고, (8) 건네주시고 (9) …라고 말씀하셨다. 이 제정 요소는 미사 중 성찬 전례의 각 부분에 배당되어 있습니다. ‘빵과 잔을 드는 것’은 예물 준비 기도에, ‘감사를 드리는 것’은 감사기도에, ‘빵을 쪼개는 것’은 영성체 직전 빵 쪼개는 예식에, ‘빵을 나누어주고 잔을 건네주는 것’은 영성체 예식에 각각 해당됩니다.

성체성사의 설정과정을 볼 때 그것이 예수님의 죽음을 앞둔 최후의 만찬을 통해 이루어졌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수난과 죽음의 때가 온 것을 아시고 제자들에게 당신 자신을 생명의 양식으로 내주시며 이 성체성사를 세우신 것입니다. 결과적으로 최후만찬이 되었던 식사가 바로 첫 성체성사가 된 것입니다. 성체성사는 식사이면서 제사입니다. 한편으로는 예수님께서 당신의 몸과 피를 우리들에게 생명의 양식으로 주시는 잔치이며 다른 한편 예수님의 십자가상 죽음을 기념하는 제사입니다.

그래서 여기에서 우리가 하나 꼭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성체성사는 단순히 최후만찬만을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강생과 파스카 사건 전체 즉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죽음과 부활 전체를 현재 안에 현실화시키는 거룩한 일이라는 사실입니다. 이 거룩한 일은 단순히 상징이 아니라 실체적인 현존의 일입니다. 그래서 교회는 트리엔트 공의회 선언에서 이렇게 가르칩니다. "만일 누가 성체성사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몸과 피와 그의 영혼과 천주성과 함께 온전히 실제로 실체적으로 존재함을 부인하거나 혹은 다만 어떤 표지나 현상이나 상징적으로만 계신다고 말한다면 파문을 받아 마땅하다"

성체 성사 안에서 우리가 받아 모시는 몸과 피는 죽은 몸과 피가 아니라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살아있는 몸과 피입니다. 우리도 성체성사 안에서 그리스도의 몸이 됩니다. 예수님과 우리는 혈맹입니다. 그리스도의 몸 안에서 우리는 모두 그리고 우리와 세계 모두가 성사적 결합으로 하나가 됩니다. 나와 그리스도, 물질세계 그리고 모든 인류와 하나로 모이게 됩니다. 이런 의미에서 성체성사는 7성사 중에서 가장 존엄하고 모든 성사중의 성사라고 볼 수 있습니다. 다른 성사에서는 하느님의 은총이 그냥 내리지만 성체성사에서는 은혜가 내릴 뿐만 아니라 그 은총의 주인이신 하느님께서 몸소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왜 예수님께서는 성체성사를 세웠겠습니까? 성체성사의 의미가 무엇입니까?

성체성사를 세우신 이유와 의미는 한 마디로 사랑입니다. 예수님께서 죽기 전에 마지막 상징적 행위가 바로 성체성사가 되었는데, 이것은 가장 강한 유언이며 가장 강력한 파토스적 사랑의 고백이며 희생의 행위입니다. 파토스와 로고스의 결합인 아가페가 그 존재이유이며 존재가치입니다.

종종 성체성사의 의미를 나눔으로 환원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 나오는 오병이어 기적도 나눔의 기적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습니다. 이런 주장은 지성의 시대에 기적을 합리적으로 해석하고자 했던 노력의 산물인데, 신학적으로 보면 두 다리, 세 다리 건너서만 할 수 있는 말입니다. 현실적인 관점에서 사실 남몰래 후원을 받은 것 혹은 각자 먹을 것을 내놓은 것이 아니냐는 주장 등이 여기에 해당됩니다. 가톨릭 해방신학이나 일반 개신교회 및 관련 단체 혹은 신천지같은 사이비 종교에서 나눔과 기부의 정신을 강조하며 이와 비슷한 해석을 내놓습니다. 사실 수많은 군중이 몰래 각자 자기 먹을 것을 조금씩 갖고 있었는데, 분위기에 휩쓸려서 서로서로 내놓고 나누다 보니 그런 기적(?)이 나왔다는 해석입니다. 나름대로 감동적이면서 그럴듯해 보이기도 한다.

가장 가까운 예로 김수환 추기경님의 장례미사에서 정진석 추기경님이 하신 추도사 중에 이러한 해석이 언급된 바 있습니다. 중앙일보 기자와의 인터뷰에서도 정 추기경님은 이렇게 말했다고 보도된 적 있습니다. “성경을 보세요. 물고기 한 마리가 두 마리, 세 마리로 불어났다는 기록은 어디에도 없어요. 하늘에서 떨어졌다는 이야기도 없어요. 그럼 뭘까요. 예수님께서 하늘에 올리신 기도를 듣고 감동한 사람들이 품속에 숨겨둔 도시락을 꺼냈던 겁니다. 낯선 사람들을 향해 그렇게 마음을 연 거죠”

단도직입적으로 말하면, 이러한 해석은 자칫 잘못하면 우리의 성체성사가 부정되는 개신교의 술수(術手)이며 이성주의의 덫에 걸리게 됩니다.

성경의 본문은 분명히 나눔의 기적이 아니라 빵의 기적입니다. 그것은 다르게 해석할 여지가 없는 글자 그대로 기적사건입니다. 오병이어 사건의 해석에서 나눔이 기적보다 먼저일 수는 없습니다. 가지고 있던 것의 나눔이 기적을 덮을 수 없습니다. 물론 기적의 여러 가지 의미를 설명하면서 그 의미 중 하나로 나눔을 강조할 수는 있습니다. 기적의 결과로 인해 나눔이 발생할 수는 있지만 애초 기적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전제로 기적을 빼고 슬쩍 나눔으로 물타기를 할 수는 없습니다. 가지고 있는 것을 내놓았다는 해석은 예수님의 천주성과 그리스도성을 의심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하느님의 아들이심을 증거하는 사건입니다. 하느님의 능력으로 못하는 것이 없고 기적이 가능합니다. 자연법칙을 깨는 기적이 일어날 수 없기에 성경의 기적을 부인하는 극단적인 지성주의의 사람은 교회에서 이미 단죄한 적이 있습니다.

오병이어로 오천 명 이상을 먹이는 일은 이성적으로는 불가능하지만 하느님의 능력으로는 가능합니다. 만일 이것이 부정되면 신비를 바탕으로 하는 모든 천주교 4대교리와 7성사의 근거가 모두 무너집니다. 이것은 신앙이 이성에 영합하는 일입니다. 신앙은 반지성주의는 아니지만 극단적 지성주의는 아닙니다. 또한 신앙은 합리주의 혹은 지성주의와 반대되는 것은 아니지만 분명히 비지성적인 측면을 가지고 있습니다. 요컨대 어떤 이유로든지 오병이어 기적이 문자 그대로 일어나지 않았다고 말할 수 있는 근거는 없습니다. 이것을 받아들이느냐 받아들이지 않느냐는 전적으로 우리 자신의 믿음의 결단에 달려 있을 뿐입니다.

오병이어의 기적이나 성체성사의 의미는 나눔 이전에 사랑입니다. 성체성사는 실체적인 변화에 기반하는 성사이며 사랑의 성사입니다.

가수 윤시내의 노래 중에 ‘열애’가 있습니다. 그 노랫말은 시한부 삶의 절망 앞에서 쓴 한 남자의 유서입니다. DJ 배경모가 암에 걸려 죽음을 대면하고 써내려간 사랑의 연서입니다. 다음은 특별히 좋아하는 부분입니다.

“뜨거운 마음속 불꽃을 피우리라 태워도 태워도 재가 되지 않는 진주처럼 영롱한 사랑을 피우리라 그리고 이 생명 다하도록 이 생명 다하도록 뜨거운 마음속 불꽃을 피우리라”

‘이 생명 다하도록 이 생명 다하도록’이라고 두 번이나 반복합니다. 생명을 다해서 불꽃을 피우는 마음이 바로 예수님의 마음입니다. 즉 죽음 앞에서 예수님께서 세운 성체성사가 바로 여기에 해당됩니다. 바로 죄 많은 인간들에 대한 사랑 때문에 당신 자신을 영적양식으로 내놓으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멸망할 운명을 지닌 우리 죄인들을 먹여 살리고 구원하기 위해 당신의 몸과 피를 내놓아 성체성사를 제정하셨습니다.

지난 2008년 중국 쓰촨성 즉 사천성에서 대지진이 있었습니다. 거의 7만명이 죽었습니다. 그런데 이때 놀라운 일이 있었습니다. 구조대원이 무너진 건물더미 속에서 앞으로 구부러져 있는 한 여인의 시체를 발견했습니다. 여인은 밥 먹다가 젓가락을 쥔 채 놓을 새도 없이 자신의 아기를 안은 채 숨져있었습니다. 구조대원이 죽은 여인의 시신을 들어 올리는 순간 한 아기가 여인의 품안에서 울음을 터트렸습니다. 엄마는 허리가 부러졌는데도 그 고통을 참고 두 살짜리 딸에게 젖을 먹이며 콘크리트 더미 속에서 죽어간 것입니다. 그리고 주변에서 여인의 핸드폰이 발견됐는데 이런 글이 적혀 있었습니다. “아기야 만일 네가 살아난다면 이 엄마가 너를 정말 사랑한다는 것을 잊지 마렴” 비극적이고 슬픈 사건이지만 얼마나 감동적인 이야기입니까?

바로 이 엄마의 마음이 바로 우리를 사랑하시는 예수님의 마음입니다. 엄마는 지진 잔해에 깔려 자신은 죽기까지 아기를 보호하고 젖을 주고 먹여 살리고 또 사랑의 유언까지 남겼습니다. 예수님께서 최후만찬 때 하신 일도 바로 이런 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 못 박혀 죽기까지 죄인들을 사랑하시고 또 우리 죄인들을 먹여 살리기 위해 당신 살과 피까지 영적 양식으로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신 나머지 십자가 상의 죽음도 마다하지 않으시고 당신의 몸과 피를 우리에게 밥과 빵 그리고 젖으로 내어주신 것입니다.

성체성사는 사랑의 성사, 사랑의 신비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극진히 사랑하셨기에 강생하시어 사람이 되셨고, 우리 속죄를 위하여 하느님의 속죄의 어린양이 되시어 십자가에서 죽으셨으며, 결국 당신 몸과 피를 몽땅 내어 주시는 생명의 빵, 사랑의 성체성사가 되셨습니다. 성체성사는 당신 자신을 없애심으로써 나누는 사랑의 극치입니다. 당신 존재를, 당신의 생명을, 당신의 몸과 피를 나누어 주십니다. 그 분은 먹히러 오셨고 먹힌 상태에서 우리에게 힘과 용기와 구원을 주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 죄인들을 사랑하셔서 죄인들이 영원한 죽음에 떨어지지 않고 영원한 생명에 나아가도록 하기 위해 당신 자신의 살과 피를 밥으로 내놓으신 것입니다. 성체성사는 밥의 성사입니다.

제가 첫 본당신부로 불로성당에 있을 때 총회장을 새로 뽑는데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사실 총회장은 누구나 할 수 있지만 아무나 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수녀님들과 의논도 하고 다른 교우들에게도 물어보니 아무개가 적임자라고 해서 사제관에 모셔 조심스럽게 부탁을 드렸습니다. 그런데 그분 첫마디가 너무 의외였습니다. "신부님, 저는 신부님의 밥입니다. 신부님 뜻에 따르겠습니다." 저는 그 대답을 듣고 순간 가슴이 울리고 마음이 떨렸습니다. ‘괜히 걱정했네’ 하면서 많은 것을 배웠습니다. "신부님, 저는 신부님의 밥입니다.“라는 이 말은 지금까지 내 귀에 생생하게 남아있습니다. 요즘 본당신부하려면 ‘밥이 되겠다’는 사람이 없어 문제가 많습니다. 뒤에서 도와주겠다는 둥 숟가락만 얹을려고 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할만 한 분은 안할려고 하고, 물러났으면 싶은 사람은 계속할려고 합니다.

김수환 추기경님은 살아생전 스스로를 '바보'라 불렀습니다. 이는 단순히 겸손의 말이라기 보다 하느님 앞에 선 한 인간의 진솔한 고백이며 자신의 자세를 가다듬는 죽비였습니다. 바보라는 말이 밥보에서 나왔다는 설이 있습니다. ‘바보’의 ‘-보’는 ‘떡보’, ‘심술보’ 등에 보이는 ‘-보’와 같이 “접두어의 특성을 지닌 사람”의 뜻을 더하는 접미사입니다. 바보는 ‘밥+보’인데 동음 ‘ㅂ’이 탈락한 현상이라고 봅니다. 국어사전에 바보는 “어리석고 못나게 구는 사람을 얕잡거나 비난하여 이르는 말”입니다. 그러나 오늘날 바보라는 말은 ‘딸 바보 아빠’, ‘바보 노무현’,‘김수환 추기경의 자화상 바보야‘ 등에서 사용되는 바보는 뉘앙스가 다릅니다. 저는 원래 바보라는 말이 밥보에서 기원하는 것은 맞는데 오늘날에는 어의가 긍정적으로 변하여 ’밥이 되는 사람‘을 의미한다고 생각합니다. 남에게 밥이 되어주는 사람이 바보입니다. 원래는 바보가 아니지만 사랑 때문에 바보처럼 밥이 되는 ’딸바보 아빠‘같은 사람을 미세하게 의미합니다. 밥이 되는 밥보가 바보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밥으로 오셔서 바보처럼 죽으셨습니다. 그리고 바보처럼 자신의 몸과 피를 우리 밥상에 내 놓으셨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 음식을 무상으로 먹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생명의 빵으로까지 자신을 내어놓으신 바보이시기에 그를 따르는 그리스도인 역시 결국 "자신을 밥으로 주는 바보" 일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하느님을 위해 밥으로 제공 해야 합니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매일 영성체를 하고 성체 앞에서 살다시피 성체조배를 한다 하더라도 나와 더불어 함께 살아가는 사람들을 밥으로만 생각하고 사랑하는 마음이 없다면 그 모든 노력은 헛된 것이 됩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원하시는 것은 하나도 지키지 않으면서 자기 원하는 것만 비는 성체공경은 예수님께서 원하시는 바가 아닙니다. 그러한 신앙인들에게 예수님은 간청하고 계십니다. "제발 내가 바라는 것 좀 해라. 나를 공경한다는 명분으로 쓸데없는 것들

우리나라 방인 수녀회 중에 한국순교복자수녀회가 있는데 그 수녀회의 대표하는 영성이 바로 면형무아(麵形無我)라는 성체 영성입니다. 면형무아라는 말 자체는 좀 낯선 말이고 우리나라에만 있고 외국에서는 아마 발견하기 어려운 표현일 것입니다. 면형무아((麵形無我)란 말은 복자 수녀회가 설립되는 과정에서 창설자에 의해 고안된 사자성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면형무아라는 말은 분석해보면 면형과 무아의 합성어입니다. 면형(麵形)이란 단어는 밀가루로 만든 빵 떡 제병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무아(無我)란 단어는 ‘자기가 없다’는 말입니다. 종교적으로 자기비허, 자아포기, 자기무화(自己無化)를 의미합니다.

無我라고 할 때 무는 없을 無자입니다. 없을 無자는 제일 아래 불이 있고 그 위에 장작이 있고 그 위에 사람이 있다. 타는 장작위에 있는 사람이 있습니다. 사람이 나무 위에서 불에 활활 타는 모양입니다. 사람이든 장작이든 불에 타면 남는 것은 재 뿐 입니다. 인간은 원래 먼지에서 와서 먼지로 가는 것입니다. 면형무아라 할 때 무아란 말은 말 그대로 내자아가 다 타서 없다는 말입니다. 간도 쓸개도 다 없다는 것입니다. ‘태워도 태워도 재가 되지 않는 진주’를 노래하는 윤시내의 노래 열애와는 달리 태워서 재가 되는 사랑이 면형무아의 사랑이고 성체성사의 사랑입니다.

우리의 면형무아를 위해 예수님께서는 예수님은 비우고 또 비우시고 죽고 또 죽으십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어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지금은 성체가 되어 또 죽으십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사욕편정의 미세먼지에서 벗어나게 하도록 우리를 위해 우리에게 먹히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자아의 자존심, 체면, 옹고집과 편견 그리고 미워하는 마음에서 벗어나도록 만들기 위해 우리의 밥이 되어 주시고 면이 되어주시고 빵이 되어 주십니다. 면형무아는 이기심과 시기심으로 가득 찬 자아가 없어지고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을 말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늘 이 미사 중에 우리를 면형무아로 초대하십니다. 내 자신이 먼저 죽으라는 것입니다. 또한 예수님께서는 당신 자신을 우리의 밥으로 내놓으심으로써 우리 역시 밥이 되도록 초대하십니다. 누구에게나 속상한 일이 있고 힘든 문제가 있습니다. 로고스는 사라지고 파토스만이 나를 지배할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 성체 앞에 나가 이렇게 한마디 하면 영혼이 맑아옵니다. "주님, 저는 밥입니다. 마음대로 잡수십시오."하고 나면 내 마음이 홀가분해집니다. 나를 주님께 밥으로 내드리고 다른 사람의 밥이 되겠다고 다짐하면 문제될 것이 없습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우리는 황량한 광야에서 밤이 깊어오는 것 같은 느낌을 받을 때가 자주 있습니다. 그럴 때면 성체를 영하고 성체를 묵상합시다. 그리고 하느님께서 주신 오늘 하루를 내 이웃을 내 밥으로 그리고 내 희생으로 만드는 하루로 만들려는 노력과 생각을 포기해야 하겠습니다. 오히려 내가 먼저 밥이 되어주고 내가 먼저 희생하고 내가 먼저 죽는 하루가 되도록 해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다가오는 이번 한 주간도 면형 안에 숨어 임재하시는 예수님을 본받아 우리 역시 면형안에 녹아들어가 일치하여 무아하는 삶을 살면 좋겠습니다. 그리하여 내 안에 꽉 닫혀 있는 달팽이 같은 자아가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나의 살과 피가 되어 내 안에 사시며 향기를 풍기는 한 주간이 될 수 있도록 기도해야 하겠습니다. 아멘.

------------------------

대구대교구 박태범 라자로 신부
2022년 6월 19일
  | 06.19
파란색 글자 빨간색 글자 녹색 글자 밑줄 글자 진한 글자 빨간색 테이블 파란색 테이블 녹색 테이블
이름 :   
암호 :
· d41d8cd98f * 왼쪽의 글자중 빨간글자만 순서대로 입력하세요.
 목록보기 스크랩하기  프린터하기
544   성모승천대축일 해설  [3] 49
543   [수도회 2] 우리도 은총을  [6] 219
542   [수도회 1] 마리아의 노래  [13] 4149
541   [전주/제주] 마니피캇  [4] 4092
540   [수원] “우리의 희망인 성모 승천”  [10] 3405
539   [인천] 행복하십니다, 마리아여!  [13] 3579
538   [서울 2] "내 영혼이 주님을 찬송하고"  [4] 371
537   [서울 1] 교회의 어머니, 신앙의 어머니 ‘성모 마리아’  [14] 4175
536   [의정부] 하늘에 올림을 받으신 복되신 성모 마리아님  [8] 3767
535   [군종] ‘하느님을 찬미하는 노래(Magnificat)’  [1] 842
534   [원주] 성모승천 대축일 맞이하여  [1] 781
533   [춘천] 어느 예비신학생의 일기  [4] 1144
532   [청주] 희망을 주시는 어머니  [2] 667
531   [대전] “이분이 네 어머니시다.”(요한 19,27)  [6] 3312
530   [마산] 성모님의 침묵속의 믿음  [7] 3904
529   [부산] 성모 마리아는 어떤 분이셨는가?  [2] 1224
528   [안동] 평화의 모후  [7] 3543
527   [대구] 길  [8] 3386
526   (백) 성모승천 대축일(8월 15일) 독서와 복음  [14] 3635
525   [수도회] 참 보화를 얻기 위해 썩어 없어지는 밀알  [16] 742
1 [2][3][4][5][6][7][8][9][10]..[28]  다음
 

 

대축일/명절강론 코너 ( 대축일/명절 미사에 관련된 강론자료입니다... )

 관리자 Profile  l  홈페이지이용안내  l  즐겨찾기추가  l  추천사이트  l  가톨릭검색사이트  l  관리자 E-mail

Copyright ⓒ 2003 - 2005 www.ocatholic.com All rights reserved.   Ver 4.01_0502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