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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 성 요한 세례자의 수난 기념일(8월 29일) 독서와 복음
조회수 | 136
작성일 | 22.08.28
▥ 제1독서 : 내가 너에게 명령한 모든 것을 그들에게 말하여라. 너는 그들 앞에서 떨지 마라.
▥ 예레미야 예언서 1,17-19

그 무렵 주님의 말씀이 나에게 내렸다.
17 “너는 허리를 동여매고 일어나,
내가 너에게 명령한 모든 것을 그들에게 말하여라.
너는 그들 앞에서 떨지 마라.
그랬다가는 내가 너를 그들 앞에서 떨게 할 것이다.
18 오늘 내가 너를 요새 성읍으로,
쇠기둥과 청동 벽으로 만들어 온 땅에 맞서게 하고,
유다의 임금들과 대신들과 사제들과 나라 백성에게 맞서게 하겠다.
19 그들이 너와 맞서 싸우겠지만 너를 당해 내지 못할 것이다.
내가 너를 구하려고 너와 함께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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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복음 : 당장 세례자 요한의 머리를 쟁반에 담아 저에게 주시기를 바랍니다.
✠ 마르코가 전한 거룩한 복음 6,17-29

그때에 17 헤로데는 사람을 보내어
요한을 붙잡아 감옥에 묶어 둔 일이 있었다.
그의 동생 필리포스의 아내 헤로디아 때문이었는데,
헤로데가 이 여자와 혼인하였던 것이다.
18 그래서 요한은 헤로데에게,
“동생의 아내를 차지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하고 여러 차례 말하였다.
19 헤로디아는 요한에게 앙심을 품고 그를 죽이려고 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20 헤로데가 요한을 의롭고 거룩한 사람으로 알고
그를 두려워하며 보호해 주었을 뿐만 아니라,
그의 말을 들을 때에 몹시 당황해하면서도 기꺼이 듣곤 하였기 때문이다.
21 그런데 좋은 기회가 왔다. 헤로데가 자기 생일에
고관들과 무관들과 갈릴래아의 유지들을 청하여 잔치를 베풀었다.
22 그 자리에 헤로디아의 딸이 들어가 춤을 추어,
헤로데와 그의 손님들을 즐겁게 하였다.
그래서 임금은 그 소녀에게, “무엇이든 원하는 것을 나에게 청하여라.
너에게 주겠다.” 하고 말할 뿐만 아니라,
23 “네가 청하는 것은 무엇이든, 내 왕국의 절반이라도 너에게 주겠다.” 하고
굳게 맹세까지 하였다.
24 소녀가 나가서 자기 어머니에게 “무엇을 청할까요?” 하자,
그 여자는 “세례자 요한의 머리를 요구하여라.” 하고 일렀다.
25 소녀는 곧 서둘러 임금에게 가서,
“당장 세례자 요한의 머리를 쟁반에 담아 저에게 주시기를 바랍니다.”
하고 청하였다.
26 임금은 몹시 괴로웠지만, 맹세까지 하였고 또 손님들 앞이라
그의 청을 물리치고 싶지 않았다.
27 그래서 임금은 곧 경비병을 보내며, 요한의 머리를 가져오라고 명령하였다.
경비병이 물러가 감옥에서 요한의 목을 베어,
28 머리를 쟁반에 담아다가 소녀에게 주자,
소녀는 그것을 자기 어머니에게 주었다.
29 그 뒤에 요한의 제자들이 소문을 듣고 가서,
그의 주검을 거두어 무덤에 모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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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헤로데 임금은 예수님 당시 갈릴래아를 다스리고 있던 ‘헤로데 안티파스’입니다. 기원전 4년, 헤로데 임금이 죽자 로마의 아우구스투스 황제는 아들이었던 그를 갈릴래아 지방의 임금으로 임명합니다. 그때까지 그의 아내는 인접 국가 나바테아의 공주였습니다.

임금이 되자 그는 아내와 이혼하고 이복동생의 아내였던 헤로디아와 재혼합니다. 모세 율법의 엄연한 위반입니다. 권위는 즉시 추락했고 비난은 멈추지 않았습니다. 그 선봉에 섰던 인물이 세례자 요한입니다. 헤로디아가 더 분노하지요. 그녀는 헤로데를 부추겨 요한을 감옥에 가두고 제거할 기회를 찾기 시작합니다.

세례자 요한은 이렇게 해서 억울한 죽음을 당합니다. 그렇지만 기꺼이 받아들입니다. 예수님의 죽음을 미리 보여 주는 것과 같습니다. 그의 일생은 철저하게 구세주의 앞날을 예고하는 삶이었음이 입증된 것입니다.

잘못을 지적해 주는 사람은 반드시 필요합니다. 불이익을 각오하며 정의를 외치는 사람이 많을수록 건강한 사회입니다. 세례자 요한은 그러한 삶을 살다가 희생되었습니다. 훗날 로마의 황제는 ‘헤로데 안티파스’의 영지를 빼앗고 이스라엘 밖으로 추방합니다. 헤로디아 역시 남편과 함께 떠돌다 비참한 최후를 맞이합니다. 의인의 죽음을 선동한 대가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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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2008년 8월 29일
  | 08.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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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의 헤로데는 예수님 당시 이스라엘 북쪽을 다스리던 ‘헤로데 안티파스’입니다. 그의 아버지는 저 유명한 ‘헤로데 대왕’입니다. 예수님의 탄생을 메시아의 출현으로 여겨 죽이려 했던 사람입니다. 자신의 왕권을 위협한다고 생각했던 것이지요. 결국 그는 예루살렘에 살던 두 살 이하의 남자 아이들을 모두 살해합니다. 헤로데 임금의 잔인한 성격으로 보아 능히 그랬을 것입니다.

말년의 그는 아무도 믿지 못합니다. 그리하여 아내와 장남까지 처형하는 광기를 드러내다가 죽습니다. 그의 유언에 따라 이스라엘은 삼등분되었고, 그의 아들들이 다스렸습니다. 북쪽의 갈릴래아 지방을 맡았던 아들이 ‘헤로데 안티파스’입니다.

안티파스는 로마에서 공부할 때 이복동생의 아내였던 ‘헤로디아’와 가까워졌습니다. 왕이 되자, 그는 아내를 버리고 헤로디아와 재혼합니다. 그녀는 ‘마카베오 가문’의 공주였던 ‘미리암’의 딸로, 정통 유다인이었습니다. 하지만 헤로데 가문은 이방인 출신입니다. 안티파스는 헤로디아와의 혼인으로 신분 상승을 원했던 것이 분명합니다.

그러기에 요한의 죽음을 원하는 아내의 청을 거절하지 못합니다. 의로운 사람인 줄 알면서도 묵인합니다. 세례자 요한은 두 사람의 공모로 살해된 셈입니다. 하지만 요한은 죽음을 기꺼이 받아들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어떻게 돌아가실지를 자신의 죽음으로 증명했던 것입니다. 그의 일생은 철저하게 구세주의 앞날을 준비하는 삶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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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2009년 8월 29일
  | 08.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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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에게 충고를 하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더구나 그 대상이 상관이거나 손윗사람일 때 더욱 그렇습니다. 특히 우리 사회는 수평적 관계보다 수직적 위계를 가지고 있어서 올바른 토론 문화가 이루어지지 않는 때가 많습니다. 이런 상하 관계의 분위기에서는 중요한 사안들이 일방적으로 결정되기 쉽습니다. 그래서 책임자 주변에는 충언을 해 줄 사람이 드물고 결정권자의 입맛에 맞장구나 치는 간사한 무리들이 자리를 잡기 쉽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의인 요한이 희생된 모습을 보면 책임자와 그 주변 사람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보여 줍니다. 복음에 등장하는 인물을 보면 헤로데 임금과 그의 생일잔치에 초대된 고관들과 무관들, 갈릴래아의 유지들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그리고 요한을 희생시키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하는 간악한 헤로디아와 그녀의 딸이 있습니다.

그런데 헤로디아의 잘못된 요청에 대하여 그 누구도 거부를 하거나 임금에게 올바르게 말하는 사람이 없습니다. 고관과 무관, 갈릴래아의 유지들이 어떻게 그 기득권을 유지할 수 있었는지를 침묵하고 있는 그들의 태도에서 짐작할 수 있습니다. 자신만 피해 받지 않으면 아무리 의인의 죽음이라도 대수롭지 않습니다.

이런 일은 상하 관계가 존재하는 사회에서, 무릇 교회 안에서조차 일어날 수 있습니다. 결정권자가 사회적으로 영향력이 큰 사람일수록 그 주변의 인물도 중요합니다. 이런 사람들이 끊임없이 바르게 식별하고, 용기 있게 진실을 말하고, 자신 또한 바르게 서 있지 않으면 이 땅의 정신세계를 더욱 황폐하게 만들 수 있습니다.

악은 늘 누군가를 희생시키고 어둠의 세력을 넓혀 나갑니다. 사회적으로 책임이 큰 사람과 그 주변에 있는 사람들이 저버린 양심만큼 사회는 병들어 갑니다. 그 사람들이 져야 할 죄 또한 그만큼 크다는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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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2011년 8월 29일
  | 08.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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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 세례자의 죽음은 불의한 자들과 죄인들을 대신하여 돌아가신 예수님의 죽음을 예고해 줍니다. 요한 세례자는 탄생부터 주님의 길을 마련하였고, 마지막 생명까지도 그렇게 바쳤습니다. 요한은 생명의 위협 속에서도 진실을 말하였고, 하느님의 정의에서 벗어나는 일에는 추호의 타협도 하지 않았습니다.

국문학자로서 시인으로 활동한 조지훈은 정치적 혼란기에 권력에 야합하면서 신의를 저버린 정치 지도자들에 대해 호된 비판을 서슴지 않은 사람입니다. 그는 『지조론』(志操論)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변절은 단순히 ‘절개를 바꾼다.’는 의미가 아니라, 개인의 이익을 위하여 옳은 신념을 버리는 것이다. 지조가 없는 지도자는 믿을 수 없고, 믿을 수 없는 지도자는 따를 수 없다.”

변절자는 저마다 구실과 핑계를 댑니다. 지조를 지키기란 매우 어려운 일입니다. 부정과 불의 앞에서 타협하지 않고 자신의 신념을 지키려면 곤욕을 치를 각오가 있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지조를 지키려면 때로 목숨까지도 걸어야 합니다.

의로운 요한 세례자의 모습을 보면서 우리 자신을 돌아보게 됩니다. 체면 때문에 신의를 저버린 적은 없는지요? 자신의 이익을 위해 남에게 피해를 주지는 않았는지요? 욕심은 언제나 부패하기 마련이고 거기에 물들기도 쉽습니다. 우리는 병든 세상이라고 탓하기보다는 스스로 세상의 빛이 되어 어둠을 밝히는 신앙인이었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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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2012년 8월 29일
  | 08.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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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복음에서 우리는 명백한 대조를 봅니다. 바로 요한 세례자와 헤로데 임금입니다. 요한은 주님께서 이 세상에 오시기에 앞서 그분의 길을 닦으며 준비한 선구자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예수님을 받아들일 수 있도록 회개를 촉구하면서 세례를 베풀었습니다. 그는 들꿀과 메뚜기를 먹으면서 광야에서 살아가는 사람이었고, 그만큼 세상의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말씀에 만족하는 사람이었습니다.

헤로데는 그 반대입니다. 그는 교활하고 야심 많은 통치자로, 동생의 아내를 차지한 탐욕스러운 사람이었습니다. 예수님의 탄생을 두려워하여 베들레헴과 그 온 일대에 있는 두 살 이하의 사내아이를 모조리 죽인 헤로데 대왕이 바로 그의 아버지이며, 자신 또한 예수님의 죽음에 동참하며 하느님의 뜻을 거부하였습니다.

이 두 인물이 오늘 복음에서 만났습니다. 그리고 이 만남을 통하여 두 사람의 대조가 더욱 선명하게 드러납니다. 요한이 정의를 대변하는 사람이라면, 헤로데는 불의를 대변하는 자이며, 요한이 하느님의 진리를 세상에 전하는 사람이라면, 헤로데는 거짓으로 세상을 헤쳐 나가는 자입니다. 요한이 수난을 당하는 사람이라면, 헤로데는 폭력을 행사하는 자입니다. 결국 요한은 자신의 의로움으로 말미암아 불의한 헤로데에게 죽임을 당합니다.

저는 이 두 사람을 두고 ‘당당한 패자’와 ‘부끄러운 승자’라 부르고 싶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교 전통은 바로 ‘당당한 패자’의 길을 걷는 것이라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렇게 당당한 패자의 삶을 사시다가 돌아가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당당한 패자’에게 ‘참승리’를 주셨습니다.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당당한 패자’입니까,
아니면 ‘부끄러운 승자’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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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2013년 8월 29일
  | 08.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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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복음을 묵상하며 우리는 세례자 요한의 죽음이 뜻하는 두 가지 성격을 볼 수 있습니다. 그의 마지막은 무죄한 이의 억울한 죽음이었습니다. 세례자 요한은 항변이나 저항 한번 하지 못한 채 권력의 횡포에 소리 없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교회가 해마다 성탄 시기에 헤로데의 손에 죽은 죄 없는 아기들을 순교자로 이해하며 기억하듯, 오늘 복음은 무죄한 이로서 죽은 세례자 요한의 모습을 똑똑히 전해 줍니다.

그의 죽음은 예언자의 운명의 완성이었습니다. 그는 예언자의 사명에 끝까지 충실했습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 주님께서는 예레미야 예언자에게 ‘허리를 동여매고’ 당신의 말씀을 지체 없이 전하는 것이 예언자의 사명임을 알려 주십니다. 또한 예언자가 사람들을 두려워하는 순간 그의 존재 의미는 흔들릴 것이라고 하십니다. 세례자 요한은 예언자의 전통에 따라 죽음마저 두려워하지 않고 불꽃처럼 주님의 말씀을 전하였고, 무죄한 그의 죽음은 이러한 예언자의 실존의 완성이었습니다.

이러한 그의 운명을 보며, 우리는 역사 안에서 반복되었고 지금 이 시대에도 끊이지 않는 죄 없는 이들의 희생이 떠올라 마음이 무겁습니다. 그러나 이해할 수 없는 모순과 악의 횡포 속에서도 주님께서는 무죄한 이의 희생과 의인의 죽음을 잊지 않으시리라는 믿음을 되새깁니다.

세례자 요한의 죽음이 던져 주는 의미를 생각하면서 지난봄 내내 마음을 적셨던 ‘천개의 바람이 되어’라는 노래의 원작인 메리 엘리자베스 프라이의 ‘내 무덤에 서서 울지 마라’라는 시를 다시 음미해 봅니다.

“내 무덤에 서서 울지 마라.
나는 거기 없단다. 나는 잠들지 않았단다.
나는 천 개의 바람이 되어 날고 있단다.
(중략)
아침 고요 속에서 네가 눈을 뜰 때면
나는 빙글빙글 힘차게 비상하는
조용한 새의 날갯짓.
나는 한밤에 빛나는 부드러운 별들.
내 무덤에 서서 울지 마라.
나는 거기 없단다. 나는 죽지 않았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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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2014년 8월 29일
  | 08.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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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소에 헤로데는 세례자 요한의 설교는 싫어하였지만, 진리 편에서 말하는 그에게 강렬한 매력을 느끼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헤로디아의 딸과 무모한 약속을 하고, 그것을 지키지 못할 경우에 쏟아질 비난과 비웃음이 두려워 요한의 목을 베도록 지시한 뒤, 괴로워하기까지 하였습니다.

헤로디아는 자기의 불의를 질타하는 요한을 죽이려고 자기 딸마저 이용합니다. 목적을 달성하려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비정한 여인! 세상에서 요한을 다시는 만나지 않겠지만, 언젠가는 하느님을 만나야 한다는 사실을 잊고 사는 여인이었습니다.

헤로데와 헤로디아의 모습에서 우리는, 예언자를 대하는 인간의 양면적인 태도를 보는 듯합니다. 한편으로 우리는 예언자가 전하는 말이 옳다는 것을 압니다. 그래서 그를, 또는 그의 말을 가두어 두기는 하지만 죽이기까지는 두렵습니다. 가두어 두는 것, 그저 진실을 꼭 덮어 두려는 시도겠지요. 그런데 다른 한편으로는 그를 없애야 할 것 같습니다. 허튼 소리를 하는 사람이라면 마음대로 하게 내버려 두어도 되겠지만, 그의 말이 진실이라는 것을 알고 있기에, 없애 버려야 끝날 것 같습니다.

그래서 악인들은 의인을 보는 것만으로도 짐이 되어 그에게 덫을 놓으려 하고(지혜 2,12-14 참조), 그럴 듯한 핑계나 이유로 포장하고 과장해서 상대방을 제거하기도 하는데, 세례자 요한의 죽음이 그렇습니다.

헤로데처럼 다른 사람의 비웃음이 두려워서 진리보다는 거짓을 선택하는 잘못을 범하지 않도록 오늘도 옷깃을 여며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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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2015년 8월 29일
  | 08.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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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복음을 통해 몇 가지 부류의 사람을 만납니다. 정의를 외치는 세례자 요한, 입바른 소리를 하는 것이 미워 요한을 죽이려는 헤로디아, 그리고 무엇이 옳은 줄 알면서도 헛된 약속과 체면 때문에 불의를 택하고 마는 헤로데입니다.

헤로디아는 남편의 형인 헤로데와 결혼했으면서도, 오히려 이를 비난한 요한을 죽이려고 어린 딸을 이용하지 않습니까? 더 큰 문제는 헤로데에게 있습니다. 복음을 보면 그는 요한이 의롭고 거룩한 사람임을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도 자신의 체면을 지키려고, 그 약속이 부당하다는 것을 잘 알면서도 요한의 목을 베도록 명하고 맙니다.

반면 요한은 하느님과의 약속을 지키려고 자신의 목을 기꺼이 내놓지 않았습니까? 약속이란 중요한 것입니다. 어떠한 경우에라도 지켜야만 하는 것이지요. 신뢰의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 약속의 내용이 정의로운 것이 아니라면, 즉시 그 약속을 철회해야만 하지 않습니까? 나의 아집이나 체면 때문에 그 부당한 약속에 연연한다면, 또 다른 불의가 나오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기억하는 세례자 요한은 그 누구보다 예수님께서 오시기를 기다렸고, 그런 만큼 예수님께서 걸으실 길을 미리 준비한 분이라 하겠습니다. 자신의 영광보다는 철저하게 예수님의 영광만을 위해 사신 분이지요.

우리도 주님의 도구가 되도록 비록 작은 일이라도 실천 가능한 것을 한 가지씩 결심했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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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2016년 8월 29일
  | 08.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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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례자 요한이 탄생하였을 때, 유다의 온 산악 지방 사람들은 “이 아기가 대체 무엇이 될 것인가?”(루카 1,66) 하고 말하였습니다. 아기의 아버지 즈카르야는 성령으로 가득 차 “아기야, 너는 지극히 높으신 분의 예언자라 불리고 주님을 앞서 가 그분의 길을 준비하리니”(루카 1,76)라고 예언하였습니다. 요한은 예수님을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양”(요한 1,29)이라고 부르며, 자신의 사명은 그분을 이스라엘에 알리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세례자 요한은 요르단 부근의 모든 지방을 다니며 죄의 용서를 위한 회개의 세례를 선포하였습니다. 요한은 사람들에게 여러 가지로 권고하면서 기쁜 소식을 전하였고, 헤로데 영주에게 바른말을 하여 결국 감옥에 갇히게 되었습니다. 요한에게 앙심을 품은 헤로디아는 그를 죽일 기회를 얻습니다. 그녀의 딸 살로메는 고관대작들이 모여 있는 잔치에서 춤을 잘 춰 헤로데의 환심을 사자, 상으로 요한의 목을 청합니다. 물론 이는 헤로디아의 간계입니다.

헤로데 임금의 명으로 참수당한 요한의 목을 본 헤로디아는 승리감에 도취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요한의 수난은 하느님의 섭리로 이미 준비된 것이었습니다. ‘하느님의 어린양’의 길을 준비하는 요한의 죽음은 예수님의 죽음을 미리 알리는 것이었습니다. 구약의 마지막 예언자인 요한은 자신의 수난과 죽음으로 이 세상의 권력자들이 메시아를 어떻게 다룰지 예언하였습니다. 요한의 수난은 우리에게 회개의 세례와 수난의 세례를 받도록 초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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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류한영 베드로 신부
매일미사 2017년 8월 29일
  | 08.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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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복음은 세례자 요한의 폭력적인 죽음 소식을 들려줍니다. 열두 제자의 파견 이야기가 펼쳐지는 중간에 요한의 죽음이 놓여 있는 것은, 그 표징의 가치를 강조하는 것입니다. 요한의 순교는 예수님과 하늘 나라의 기쁜 소식과 회개하라고 전한 제자들의 마지막 운명을 미리 보여 줍니다. 이것이 예언자들의 운명입니다.

이름이 널리 알려진 나자렛 예수님에 대한 사람들의 소문은 다양합니다. 이런 소문에 헤로데 안티파스가 보인 반응, 곧 “내가 목을 벤 그 요한이 살아났구나!”를 통하여 세례자 요한이 어떻게 죽었는지 알 수 있습니다. 요한의 죽음에 관한 두 가지 이야기가 있습니다. 하나는 역사가 요세푸스 플라비우스(1세기, 『유다 고대사』)가 전하는 것입니다.

요세푸스에 따르면 헤로데 안티파스는 정치적인 이유로 세례자 요한을 체포하였고 마케론테 요새에서 목을 베어 살해하였습니다. 헤로데는 나바테아 임금의 딸을 아내로 맞아들였다가, 헤로디아와 혼인하려고 그 여자를 버렸고, 세례자 요한은 이를 옳지 않다고 반박하였던 것입니다. 나중에 헤로데는 나바테아 임금에게 패배한 일을 세례자 요한을 살해한 것에 대한 하느님의 벌로 여겼습니다.

다른 하나는 마르코가 전하는 것인데 예수님과 관련되지 않은 유일한 이야기입니다. 마르코의 종교적 관심을 보여 주는 요한의 이야기는, 요한의 삶과 죽음이 메시아의 죽음을 미리 보여 주는 선구자로서 중요한 역할임을 보여 줍니다. 의로운 요한의 죽음은 헤로데의 나약한 성격과 헤로디아의 복수에 따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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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안봉환 스테파노 신부
매일미사 2018년 8월 29일
  | 08.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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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가 요세푸스 플라비우스에 따르면, 세례자 요한은 헤로데 안티파스, 곧 헤로데 2세의 명령으로 죽음을 당합니다. 헤로데 1세의 손녀이며 아리스토불루스의 딸인 헤로디아가 자기 형제의 아내였음에도, 헤로데는 페트라의 임금 아레타스의 딸인 합법적인 아내와 이혼하고, 아직 남편이 살아 있는 헤로디아를 남편과 헤어지게 하여 자기 아내로 삼았다고 합니다.

헤로데는 바로 헤로디아 때문에 세례자 요한을 죽였고, 딸이 모욕받은 사실에 분개한 아레타스와 전쟁을 벌입니다. 이 전쟁에서 헤로데의 군대는 전멸하였는데, 이는 요한을 죽인 죄의 대가를 치른 것이라고 요세푸스는 기록하고 있습니다(『유다 고대사』 18,5,2 참조).“동생(필리포스)의 아내를 차지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세례자 요한이 혼인에 관한 성스러운 명령을 폐기한 헤로데를 향하여 대담하게 외쳤던 말입니다. 시대의 예언자를 열린 마음으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헤로데는, 요한에게 앙심을 품고 살인 계획을 세워 실행해 보았지만 뜻을 이루지 못합니다.

사람을 보내어 붙잡아 감옥에 묶어 둔 요한을 죽일 기회를 찾던 헤로데는, 자신의 생일을 맞이하여 호사스러운 왕실에서 죽음의 연회를 베풉니다. 외모를 뽐내고 고개를 까닥거리며 머리카락을 풀어헤치고 음탕한 춤을 추는 헤로디아의 딸, 손님들의 쾌락과 방탕 속에서 헤로데의 무모하고 경솔한 맹세가 요한의 죽음을 앞당깁니다.

쟁반 위에 담은 요한의 머리가 춤에 대한 상으로 주어집니다. 자신의 혀를 다스리지 못한 헤로데는 요한의 머리를 베었지만 그의 소리는 없애지 못하였습니다. 요한의 혀는 잠잠하게 만들었지만 의로움과 마음의 회개를 전하는 그의 소리는 가라앉히지 못하였습니다. 세례자 요한은 폭력적인 죽음을 당하였지만 오늘도 폭군의 죄악을 침묵하지 않고 고발하는 의인의 모습으로 자주 나타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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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안봉환 스테파노 신부
매일미사 2019년 8월 2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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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코는 “하느님의 아드님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마르 1,1)을 전개하는 과정에서, 세례자 요한의 죽음을 예수님에 대한 나자렛 사람들의 무시와 열두 제자의 파견(마르 6,1-13 참조) 그리고 헤로데가 예수님의 소문을 듣는 이야기와 빵의 기적(마르 6,14-16.30-44 참조) 사이에, 헤로데 안티파스 임금을 매개로 한 예수님의 정체성에 대한 사람들의 여론(마르 6,14-16 참조)을 함께 놓고 있습니다.

헤로데 안티파스는 배다른 동생 필리포스의 아내 헤로디아를 차지하여 세례자 요한에게서 비난을 받았습니다. 모세의 율법은 살아 있는 형제의 부인과 혼인을 시도하는 것을 근친상간이라 하며 금지하였기 때문입니다(레위 18,16; 20,21 참조). 헤로데는 비록 세례자 요한을 감옥에 가두었지만 의롭고 거룩한 사람으로 여겨 바로 죽이지 않고 보호해 주며 때로는 요한의 말을 기꺼이 듣고는 하였습니다. 오히려 입장이 불편하였던 헤로디아가 앙심을 품고 세례자 요한을 죽일 기회만 노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기회는 쉽게 왔습니다. 헤로데 안티파스는 자신의 생일잔치 때 헤로디아의 딸인 살로메의 춤에 넋이 나가 허튼 맹세를 지키고자 세례자 요한을 참수하였습니다. 사람들 앞에서 체면을 구기고 싶지 않았기에 인식이 흐려진 것입니다.

마르코가 이렇게 세례자 요한의 죽음에 대하여 언급한 것은, 그의 죽음이 예수님의 길을 준비하는 요한의 사명뿐만 아니라 예수님의 죽음을 암시하기 때문입니다. 세례자 요한은 예수님께서 보시기에 참으로 의로웠습니다. 담대히 진리를 외치고 또 증언함으로써 순교하였기 때문입니다. 세속 권력자 헤로데 안티파스는 자신의 생일 잔칫상에 사람의 목을 잘라 올렸지만, 하느님의 아드님이시며 그리스도이신 예수님께서는 몇 개의 빵과 몇 마리의 물고기로 많은 이를 먹이시어 하늘 나라의 풍성한 잔치를 보여 주십니다. 요한의 죽음과 연결된 이러한 대조를 통하여 세례자 요한의 수난 기념일인 오늘의 의미를 더욱 잘 깨우칠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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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박기석 사도 요한 신부
매일미사 2020년 8월 29일
  | 08.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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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세례자 요한의 수난과 죽음을 기념하는 날입니다. 여인에게서 태어난 모든 사람 가운데 가장 큰 사람인 요한은 부당한 죽음을 변호할 어떤 기회도 얻지 못한 채 죽임을 당합니다. 예수님의 선구자로서 증언의 삶을 살아온 요한의 사명의 끝은 순교였습니다. 순교는 가장 완전한 증언입니다. 고전 그리스어에서 ‘증언하다’는 곧 ‘순교하다’입니다.

어제 주일 복음 말씀은 잔치에 초대받았을 때 끝자리에 가서 앉고, 또 우리가 누군가를 식사에 초대하려거든 가난한 이들, 장애인들, 다리저는 이들, 눈먼 이들과 같이 우리에게 되갚을 수 없는 이들을 초대하여 함께 음식을 나누라는 것이었습니다(루카 14,7-14 참조). 오늘 복음에서 세례자 요한은 공교롭게도 첫자리에 앉으려는 이들이 벌이는 잔치에서 죽임을 당합니다. 이 잔치는 임금인 헤로데가 베푼 잔치였고, 여기에 초대된 이들은 저마다 세상에서 높은 위치에 있는 이들이었습니다. 마르코 복음사가는 궁궐에서 벌어진 헤로데 임금의 잔치 이야기 다음에 곧바로 광야에서 벌어진 예수님의 잔치를 소개합니다(6,30-44 참조). 이렇게 하여 두 잔치를 대비시킵니다.

오늘 복음의 이야기가 세례자 요한의 잘린 머리로 끝나는 죽음의 식사라면, 이어지는 이야기는 남자만도 오천 명가량이나 배불리 먹은 예수님과 군중의 생명의 잔치입니다. 이는 삶의 기준에 따라 그 결과가 정반대로 나올 수 있음을 암시합니다. 곧 우리의 본보기가 누가 되느냐에 따라, 우리가 누구를 본받아 사느냐에 따라 삶이 달라진다는 뜻입니다. 헤로데의 궁전에는 부와 권력, 교만과 허영, 음모와 계략, 증오와 원한, 불의 그리고 쟁반 위의 잘린 머리가 있습니다. 예수님의 광야에는 동정과 연민, 사랑과 친교 그리고 배불리 먹고 남은 빵과 물고기로 가득 찬 열두 광주리가 있습니다. 우리가 머물러 살고 싶은 곳은 어디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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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정용진 요셉 신부
매일미사 2022년 8월 29일
  | 08.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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