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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성인의 날 성경 말씀 해설
조회수 | 165
작성일 | 22.11.01
행복을 선택하는 용기가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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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하여라,
주님을 경외하고
그분의 계명들로 큰 즐거움을 삼는 이!”(시편 112,1)

이 묵상을 준비하고 있는데
깊은 우울감에 빠진 지인이 메시지를 보냈습니다.
“선생님은 말씀을 가르치면서 행복하세요?
저는 지금 세상이 뽀얗게 보여요.”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19(코로나19)가
우리 삶에 가져온 변화 가운데 하나는 우리가 삶에서 추방했던 주제인 고통, 죽음과 내세의 삶, 부활, 참 행복에 대해 진지하게 질문하고 함께 나누기 시작했다는 사실입니다.

아우구스티노 성인이 「행복론」이라는 책을 쓴 것도
건강이 아주 좋지 않아 아무 것도 하지 못하고 가족과 함께 집에 머물러야 할 때였습니다. 행복의 본질과 행복에 이르는 길을 가르치는 것은 건강한 자아를 지니고 살도록 돕습니다.

오늘 예수님은
산으로 오르시어 여덟 가지 참된 행복을 가르치십니다. ‘참된 행복의 교육자’인 예수님은 우리 신앙 자아, 곧 하느님 자녀의 틀을 빚고, 하느님 자녀로서 우리 행복을 느끼는 능력을 성장시킵니다.

■ 복음의 맥락

행복선언(마태 5,1-12)은 세 가지 구조로 돼 있습니다.

첫째는 행복하여라 선언,
둘째는 행복해지는 데 필요한 태도,
셋째는 이 행복의 근거입니다.

하느님 현존과 그분의 역사하심은
처음부터 마지막 행복까지 모든 참된 행복의 근본이며 전제입니다. 행복선언은 우리가 어디에서 무엇을 하든 우리 인생을 인도하는 예수님의 시편입니다. 예수님이 “행복하여라”를 후렴처럼 반복하는 이유는 우리가 보통 생각하는 행복에 대한 고정관점이 하느님 판단과 너무나 다르기 때문에 우리를 회심하도록 초대하기 위해서입니다.

■ 행복하여라?

참된 행복선언은
예수님이 창안한 것이 아니라 구약성경의 오랜 전통과 맥을 잇습니다.

“행복하여라”로 번역된
그리스어 ‘마카리오스’는
고전 그리스어에서 신들의 상태,
거기에 참여한 사람들을 가리켰습니다.

신약의 ‘마카리오스’를 이해하려면
행복의 상태를 가리키는 데 사용한 구약 히브리어 ‘아세르’의미를 살펴보는 것이 도움이 됩니다.

이 히브리어의 어원은
‘가다’, ‘앞으로 나아가다’를 뜻합니다.
그러므로 구약에서 행복은 주님의 길,
그분 계명을 지키는 삶의 맥락에서 사용됩니다.

“저는 꿋꿋이 걷고
당신 길에서 제 발걸음 비틀거리지 않았습니다.”(시편 17,5)

행복선언도 우리가 걸어가야 할 길,
선택하고 살아야 할 지침입니다.

■ 행복하려면 선택해야 할 태도

예수님은 이어 참된 행복을 얻기 위해
실천해야 할 여덟 가지 태도를 가르치는데, 이는 우리가 하늘나라에 들어가기 위해 열어야 하는 문과 같습니다. 각자 상황과 은사를 존중하는 예수님은 우리가 ‘저마다 자기 길에서’ 도움이 되는 요소를 실천하며 거룩한 사람이 되기 원했을 것입니다. “행복선언을 실천하는 것이 성덕입니다.”(프란치스코 교황 권고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63-69항)

제 상황에서 특히 마음에 깊이 남는 것은 세 가지 행복입니다.

첫째,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다.”(마태 5,3)

‘가난한’으로 번역된
그리스어 ‘프토코스’의 어원은 ‘거지, 걸인’입니다. 빈손이라 살기 위해 모든 것을 외부에 의존해야 하는 사람입니다. 인간은 가난할 때만 하느님 섭리에 의존하며 산다는 것이 무엇을 뜻하는지 절절히 깨닫습니다. 마음이 꺾인 사람, 가난한 사람은 우월감을 느끼거나 완고할 수 없습니다. 그는 예수님처럼 온유하고 겸손합니다.

온유와 겸손이라는 말은
구약 역사 안에서 슬퍼하는 이들, 의로움에 굶주리고 목마른 이들, 평화를 이루기 위해 노력하다 박해와 모욕을 당한 이들이 지닌 하느님을 신뢰하는 태도인데, 이는 모든 것을 아버지에게 받았던 최고의 걸인 예수님과 하느님 자녀의 본질적인 상태를 함축합니다. 이런 사람이 행복하다고 불리는 이유는 하느님이 그에게 하늘나라, 곧 하느님 자신을 주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움직였던 것과 같은 영을 갖고 살아가도록 이끌기 때문입니다.

둘째,
“마음이 깨끗한 사람들! 그들은 하느님을 볼 것이다.”(마태 5,8)

우리 마음은 나약함 때문에
하루에도 수십 번씩 더러워질 위험이 있습니다. 내 안에, 다른 사람 안에 있는 하느님을 보려면 매일 마음의 거울을 정성스럽게 닦아야 합니다. 십계명, 성경 말씀, 교회 가르침, 기도, 봉사는 모두 흐려진 양심의 거울을 닦는 수건입니다.

화답송인 시편 24편은
성전에 들어가기 전 문 앞에서 거행하던 전례를 묘사하는데, 하느님 사시는 곳에 가까이 갈 수 있는 이의 조건을 여러 가지로 설명합니다. 제일 중요한 조건은 하느님 얼굴을 찾고 깨끗한 손과 결백한 마음을 지니는 것입니다.(시편 24,3-4) 매일 다윗처럼 기도합니다. “하느님, 깨끗한 마음을 제게 만들어 주시고 굳건한 영을 제 안에 새롭게 하소서.”(시편 51,12)

셋째
“평화를 이루는 사람들! 그들은 하느님의 자녀라 불릴 것이다.”(마태 5,9)

평화를 이루기 위해서는
앞서 말한 행복선언의 모든 태도가 필요하니 가장 어렵습니다. 하느님 자녀가 된다는 것은 다른 어떤 행복보다 가장 뛰어나고 귀한 행복이기 때문입니다.

평화는 이웃과 조화를 이루는 선한 영혼의 상태입니다. 평화와 반대되는 것은 미움, 분노, 질투, 격분, 위선입니다. 왜 평화를 이루는 사람이 하느님 자녀라고 불립니까? 그는 타인에게 평화를 선물하며 평화를 내려 주시는 하느님을 닮기 때문입니다. 평화를 이루는 사람이 행복한 또 다른 이유는 그가 자신 안에서 육과 영 사이의 싸움에서 승리하고 하느님과 화해하며 하느님과 평화를 누리기 때문입니다.

■ 성인, 행복의 촉진자

모든 성인들의 축일에
행복선언을 자기 삶으로 해석한 성인들 생애를 떠올립니다. 바오로부터 체칠리아, 에디트 슈타인, 성삼의 엘리사벳, 마더 데레사 등 성인들 생애는 대부분 인간적인 시각으로 보면 행복이 아니라 실패입니다. 참으로 메마르고 비극적인 생애입니다.

그러나 고통 안에서
희망을 증언한 성인들은 ‘행복의 촉진자’로서 후세대에 ‘희망하는 것의 행복’을 유산으로 남겨 줬기에 행복합니다. 성인들은 오늘도 우리가 저마다 자기 길에서 행복선언의 길을 선택하도록 용기와 영감, 행동하도록 하는 힘을 주고 있습니다. 그들의 한결같은 동반과 기도에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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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숙희 레지나 - 엔아르케성경삶연구소 소장
2020년 11월 1일 <가톨릭신문>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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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 기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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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은 우리에게 ‘참 기쁨’을 주려고 오신 분입니다.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다.
너희는 내 사랑 안에 머물러라.
내가 내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분의 사랑 안에 머무르는 것처럼,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머무를 것이다.
내가 너희에게 이 말을 한 이유는,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고
또 너희 기쁨이 충만하게 하려는 것이다(요한 15,9-11).”

신앙생활은 예수님께서 주시는 기쁨을 받아 누리는 생활입니다.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게 되면 그 기쁨이 완성되고 충만해질 것입니다.
지금은 그 완성과 충만함을 향해서 나아가는 과정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하느님의 나라는 먹고 마시는 일이 아니라, 성령 안에서
누리는 의로움과 평화와 기쁨입니다(로마 14,17).”라고 증언합니다.
먹고 마시며 노는 세속의 일을 기쁨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것은 기쁨이 아니라 잠깐 스치고 지나가는 즐거움일 뿐입니다.
세속의 속된 즐거움 끝에는 ‘허무’만 남습니다.

그래서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가 현세만을 위하여 그리스도께 희망을 걸고 있다면, 우리는
모든 인간 가운데에서 가장 불쌍한 사람일 것입니다.(1코린 15,19).”
(여기서 ‘불쌍한 사람’이라는 말은 ‘어리석은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신앙생활을 하면서도 하느님 나라의 영원하고 참된 기쁨을 목표로
삼지 않고 현세적인 복이나 빌고 있고, 바라던 일이 이루어지면
그것으로 만족하고 그치는 것은 참으로 어리석은 일입니다.

하느님 나라는 이 세상과 상관없는, 또는 따로 떨어져 있는
다른 세상이 아니라, 이 땅에서 시작되고, 이 땅에서 이루어지고,
이 땅에서 완성되는 나라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주님의 기도’를 바치면서 이 땅에 아버지의 나라가 오기를,
또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기를
기도하고 있습니다.
하느님 나라의 참 기쁨을 얻기를 원한다면,
지금 이곳에서부터 그 기쁨만을 추구하는 생활을 해야 합니다.

하느님 나라는 이미 내 안에(우리 가운데에) 있습니다(루카 17,21).
(‘우리 마음 안에’가 아니라 ‘우리 삶 안에’입니다.)
그것을 찾아서 완전히 내 것으로 만드는 노력을 하기만 하면 되는데,
우리는 자꾸 한눈을 팔고 딴 생각을 하면서,
예수님께서 주시는 하느님 나라의 참 기쁨을 스스로 놓칠 때가 많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의 가르침대로 살면서, 예수님께서 주시는
참 기쁨을 받아 누리려고 해도, 그 생활을 방해하는 것들이 너무 많습니다.
가난, 질병, 박해, 그 외에도 많은 것들이
우리의 신앙생활을 방해하고 흔들어댑니다.
예수님의 ‘참 행복’ 선언 말씀은, 그런 것들 때문에 힘들어 하는 사람들에게
주시는 위로와 격려 말씀입니다.

“행복하여라,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행복하여라, 슬퍼하는 사람들! 그들은 위로를 받을 것이다.
행복하여라, 온유한 사람들! 그들은 땅을 차지할 것이다.
행복하여라, 의로움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들! 그들은 흡족해질 것이다.
행복하여라, 자비로운 사람들! 그들은 자비를 입을 것이다.
행복하여라, 마음이 깨끗한 사람들! 그들은 하느님을 볼 것이다.
행복하여라, 평화를 이루는 사람들! 그들은 하느님의 자녀라 불릴 것이다.
행복하여라, 의로움 때문에 박해를 받는 사람들!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다(마태 5,3-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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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가난’에 관한 예수님 말씀은,
“가난해져야만 하느님 나라를 차지할 수 있다.”가 아니라,
“물질적인 가난에 굴복하지 말고 하느님 나라만 추구하여라.”입니다.
(그렇게 노력하는 사람에게는 하느님 나라를 주시겠다는 약속입니다.)
가난 자체는, 신앙생활을 방해하는 것들 가운데 하나이기 때문에 ‘악’입니다.
우리는 악을 물리치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가난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노동을 하는 것은 ‘선’입니다.)
성직자들과 수도자들은 일부러 ‘가난한 삶’을 선택하는데,
그것은 재물을 섬기는 ‘악’에서 벗어나기 위해서입니다.

가난에 관한 말씀은, 부유한 사람들에게도 그대로 적용됩니다.
“부유함에 굴복하지 말고 하느님 나라만 추구하여라.”
가난에 굴복하는 것과 부유함에 굴복하는 것은
겉모습만 보면 완전히 다르게 보이지만, 사실은 같은 일입니다.
부유함에 굴복한다는 것은 가지고 있는 재물에 만족하면서
하느님 나라를 잊어버리는 것입니다.
가난한 사람이든지 부유한 사람이든지 간에 재물만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재물을 섬기는 것이고, 하느님 나라를 등지는 것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어떠한 처지에서도 만족하는 법을 배웠습니다. 나는 비천하게
살 줄도 알고 풍족하게 살 줄도 압니다. 배부르거나 배고프거나 넉넉하거나
모자라거나 그 어떠한 경우에도 잘 지내는 비결을 알고 있습니다. 나에게
힘을 주시는 분 안에서 나는 모든 것을 할 수 있습니다(필리 4,11ㄴ-13).”

이 말은 세속의 재물에 대해서 완전히 초월했음을,
그래서 참된 자유와 기쁨을 누리고 있음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그 어떠한 경우에도 잘 지내는 비결”은 바로
“힘을 주시는 분 안에서, 즉 주님 안에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성인들’은 바로 그 경지에 도달한 분들입니다.
물론 한 번에 그렇게 될 수 있는 것은 아니고,
끊임없이 노력하고 또 노력해서 된 일입니다.
우리도 노력하면 누구나 성인이 될 수 있습니다.
“나는 될 수 없다.”라는 생각을 버리고 “나도 될 수 있다.”라고
믿어야 합니다.
우리가 그렇게 믿고 노력하면 수많은 성인들이 우리를 도와줄 것입니다.

<그 도움이 누구에게나 저절로 주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받으려고 노력하는 사람만 받고,
안 받으려고 하는 사람은 자기가 안 받아서 못 받게 됩니다.
결국 우리의 선택과 결단에 달린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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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
2022년 11월 1일
  | 1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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