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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 우리의 봉헌은 주님처럼
조회수 | 82
작성일 | 23.02.01
[대구] 우리의 봉헌은 주님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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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건을 받들어 바침, 삼가 공경하는 마음으로 바침.” 사전에서 정의하는 ‘봉헌(奉獻)’의 의미입니다. 봉헌이 봉헌다운 이유는 정성과 공경의 마음이 있어야 한다는 것을 드러내 주는 말입니다. 주일미사에서의 봉헌도 정성과 공경이 없다면 봉헌이 아니라 단순한 기부나 참가비 납부가 될 뿐입니다. 우리 봉헌의 기원이 되신 예수님의 봉헌을 보면서 우리의 봉헌은 어떠한지를 되돌아보면 좋겠습니다.

성전에 바쳐지는 아기 예수님의 봉헌은 십자가의 봉헌으로 그 의미가 이어진다는 것이 시메온의 말에서 드러납니다. 자신의 모든 부분을 전적으로 다 바치며 하느님과 인간, 인간과 인간, 인간과 온 우주를 연결하는 십자가의 봉헌은 또한 전적인 ‘자기 비움’입니다. 생명까지 아버지의 뜻에 따라 자신을 내어 놓는 자기 비움은 또한 전적인 ‘내어 맡김’입니다.

우리가 봉헌할 때 자기를 전적으로 비우고, 아버지께 자신을 전적으로 내어 맡김이 이루어질 수 있을까요? 하느님께 좋은 것만을 봉헌해야 한다고 여긴다면 전적인 자기 봉헌이 불가능합니다. 우리 속에 좋은 것만을 가지지 못한 것이 현실이기 때문입니다. 내 속에 있는 부정적인 부분들까지도 하느님께 바치게 될 때, 전적인 자기 봉헌이 이루어질 수 있게 됩니다. 특히 우리 속에 오랫동안 방치되고 외면되어 있는 상처는 어 쩌면 제일 먼저 하느님께 봉헌되어야 하는 것이 아닐까 합니다. 사람, 장소, 사건, 심지어 하느님께 대한 거부감이나 싫어지는 경향이 있다면 그것은 그 사람, 그 장소, 그 사건으로 인한 상처가 있음을 나타내기도 합니다. 내 기억 속에 남아있는 것은 적어도 나에게는 소중한 가치를 지닙니다. 그것이 지닌 윤리나 도덕적인 가치를 따지기 이전에 그 자체로 소중한 나 자신입니다. 갓난아기를 다루듯이 자신의 상처를 대하며 하느님께 바칠 수 있다면 그 빈자리에 하느님께서 자리하시고 상처를 치유해 주실 것입니다.

올 한해 ‘치유의 해’를 살면서 우리가 회복해야 하는 것은 사랑입니다. 예수님의 봉헌이 그러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봉헌은 죄와 그 상처에서 우리를 구해내시고 하느님과 인간, 그리고 모든 창조물을 올바른 관계, 곧 사랑으로 이끌어 주셨습니다. 그 사랑 안에 머무를 때에만 행복할 것입니다. 우리 모두의 행복을 온 마음으로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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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대교구 허남호 마르코 신부
2020년 2월 2일 주보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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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예수님께서 탄생하신 지 꼭 40일째 되는 날로서, 아기 예수님을 성전에 바친 날을 기념하는 '주님 봉헌 축일'입니다. 이 축일의 기원은 요셉과 마리아가 구약의 율법에 따라 하느님의 성전에 아기 예수님을 봉헌한 데서 유래합니다.

봉헌이란 말은 글자 그대로 '받들어 바친다', '정성을 모아 바친다'는 뜻입니다. 받들어 바침으로써, 정성을 모아 바침으로써 봉헌물은 받는 사람의 것이 됩니다. 따라서 요셉과 마리아가 아기 예수님을 하느님의 성전에서 바쳤다는 것은 아기 예수님을 하느님의 것으로 온전히 내어 드렸다는 것을 뜻합니다. 하느님께 아기 예수님을 완전히 내어 맡겼다는 것을 말합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이제는 하느님께서 아기 예수님을 키우게 되셨습니다.

이제 예수님께서는 하느님께 봉헌되심으로써 하느님의 뜻을 앞세우는 사람이 되셨습니다. 하느님의 일을 하는 하느님의 참다운 일꾼이 되셨습니다. 아울러 아기의 부모는 하느님께 바쳐진 아들을 위해 기도하고, 그 아들의 삶을 위해 헌신하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무엇을 누구한테 봉헌할 때 그 봉헌물을 받을 대상을 전적으로 신뢰합니다. 전적으로 그를 믿고 온전히 내어 맡깁니다. 우리의 부모님들도 자식들을 자주 봉헌합니다. 특히 입시 때 또는 혼사 때가 되면 자식을 쉽게 봉헌하게 됩니다. 자식들을 유명한 점쟁이에게 봉헌하는 사람들도 있고, 심지어는 신령한 힘이 있다고 하는 큰 바위나 고목에 봉헌하는 부모들도 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봉헌 행위를 자세히 살펴보면, 대부분은 개인 욕심에 치우쳐 있습니다. 자신의 욕망이나 욕구를 채워 보려는 기복주의 신앙에 빠져 있습니다. 한마디로 이러한 봉헌 행위는 이기적인 봉헌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래서 이러한 봉헌 행위는 오직 자식의 성공만을 바랄 뿐입니다. 자식의 능력이야 어떻든 간에, 노력이야 얼마를 했든 간에 그저 무조건 잘되기만을 바랄 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자식이 시험에 낙방하거나 혼사가 잘되지 않으면 금방 돌아서서는 욕을 합니다. 투자한 만큼 얻지 못했기 때문에 그저 손해만 봤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결국 자식을 봉헌했던 그 대상을 원망하고 부정합니다. 그렇다면 이렇게 되는 근본적인 원인은 과연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로 자식을 봉헌했던 그 대상을, 믿었던 그 대상을 온전히 신뢰하지 못한 데 있습니다. 온전히 믿지 못하고 투자한 만큼 얻어내야겠다는 이기적인 욕심이 앞섰기 때문입니다.

한마디로 참되게 진실로 봉헌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자식을 위해 기도하고, 미사를 봉헌하고, 하느님께 조건 없이 온전히 봉헌한다고 말은 하지만 하느님을 온전히 신뢰하지 않았기 때문에 하느님을 원망하게 되는 것입니다. 솔직히 말해서 이런 봉헌 행위는 결코 참된 봉헌이 될 수 없습니다. 이런 행위는 단순히 하느님과 타협하고자 하는 흥정일 뿐입니다. 만일 하느님을 온전히 믿고 봉헌했다면 그 사람에게서 일어나는 모든 일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야 할 것입니다. 결과야 어떻든 간에 주어진 대로, 있는 처지 그대로를 겸손하게 받아들여야 할 것입니다. 설령 그 일이 자기 뜻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손 치더라도 말입니다.

오늘 우리는 주님 봉헌 축일을 지내면서 아기 예수님을 하느님께 온전히 봉헌한 요셉과 마리아의 삶을 다시 한번 깊이 생각해 보아야겠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언자 시므온은 아들을 하느님께 바치려는 마리아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 아기는 많은 사람들의 반대를 받는 표적이 되어 당신의 마음은 예리한 칼에 찔리듯 아플 것입니다." 실제로 예수님의 삶은 지지리도 못난 삶, 철저하게 실패한 삶처럼 보였습니다. 고향에서조차도 환영받지 못했고, 언제나 온갖 죽음의 위협을 받고 세상 사람들에게 버림받은 모습으로 결국 십자가상의 죽음으로 최후를 맞이했습니다. 그러나 이런 아들의 삶 앞에서 마리아는 과연 어떤 태도를 취하였습니까? 복음서는 마리아의 태도를 이렇게 전해 주고 있습니다. "이 모든 일을 마리아는 마음속 깊이 새겨 간직하였다."

한마디로 말해서 마리아는 아들의 고통과 아픔과 죽음 속에서도 하느님을 굳게 믿고 의지하였습니다. 아들을 봉헌한 하느님께 전적인 신뢰심을 가졌던 것입니다.

마리아는 결코 한 자식의 어머니로서 욕심이나 기대를 앞세우지 않았습니다. 언제나 하느님의 뜻에 아들 예수님을 온전히 맡겼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뜻을 앞세우지 않고, 자신의 욕심을 앞세우지 않고, 언제나 겸손한 마음으로 기도하면서 하느님의 뜻을 앞세웠습니다. 결국 마리아는 참으로 하느님께 아들의 모든 것을 봉헌하였던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주님 봉헌 축일을 맞이해서 초를 축복합니다. 하느님께 봉헌하는 기도와 전례, 모든 신심 행위에서 초는 결코 빼놓을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초는 바로 하느님께 봉헌된 예수님을 상징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초는 우리가 잘 알고 있듯이 자신을 태움으로써 빛을 냅니다.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바로 빛이십니다. 어둠을 밝히시는 참 빛이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스스로 태우심으로써 우리에게 빛을 밝혀 주셨습니다. 구원의 빛을 주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세상의 빛이다. 누구든지 나를 따르려는 사람은 어두움 속을 걷지 않는다." 우리는 이 빛을 믿습니다. 우리는 빛이신 예수님을 믿습니다. 우리 구원의 빛이신 예수님, 우리에게 기쁨과 사랑과 평화와 정의를 내리시는 빛이신 예수님을 믿습니다.

우리의 참 빛이신 예수님을 진실로 믿고 따르는 사람은 예수님께 자신을 참되게 봉헌할 수 있습니다. 자기 자신을, 자기 자식을, 자기 가정을 온전히 봉헌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나의 뜻, 나의 의지, 나의 욕심을 내세우지 않고 오로지 하느님의 뜻대로 이루어지기를 기도합니다. 이런 사람이야말로 참으로 마리아를 닮은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이야말로 참으로 자신을 하느님께 봉헌한 예수님을 닮은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은 그 어떤 역경이나 환난이나 모진 고통 속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고 다시 일어설 수 있는 용기를 가진 사람입니다. 절망 속에서 주저하지 않고, 슬픔 속에서도 자포자기하지 않으며 다시 하느님의 손을 잡고 일어설 수 있는 힘을 지닌 사람입니다. 왜냐하면 하느님께서 이루시는 모든 일을 전적으로 신뢰하기 때문입니다. 자기에게 주어지는 모든 처지 그대로를 하느님의 섭리로, 하느님께서 자신의 구원을 위해서 마련하신 선물로 받아들이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 자신을 봉헌한 형제 자매 여러분!
주님 봉헌 축일을 맞이하여 아기 예수님을 하느님께 온전히 봉헌한 성모님의 믿음과 신앙을 바라봅시다. 오로지 하느님께 대한 믿음 속에서 아들을 바라보며 숨어서 기도한 마리아의 삶을 바라봅시다. 하느님의 일을 위해 자신의 욕심과 자신의 뜻을 포기할 줄 알았던 마리아, 그리하여 아들에게 일어나는 그 모든 일을 하느님의 뜻으로 받아들인 마리아의 철저한 신앙을 바라봅시다.

실패와 어려움 속에서 그것을 하느님의 손길로 받아들인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그럴 때마다 우리는 이렇게 마음속으로 외쳐 봅시다. '내 욕심을 버리자! 내 생각을 버리자! 사랑하는 아들을 온전히 하느님께 봉헌한 마리아를 바라보자!'

그리고 언제나 이렇게 기도 드립시다. "이제 저의 모든 것을 당신께 봉헌합니다. 제가 하고 싶어했던 모든 일, 제가 욕심부렸던 모든 일, 제가 기대했던 모든 일, 그것을 모두 당신께 봉헌합니다. 오로지 당신께서 원하시는 대로 이루어지게 하소서. 저는 오로지 당신의 것이오니 당신 마음대로 하십시오. 저는 저에게 주어지는 모든 처지, 있는 그대로를 당신께서 저에게 주시는 선물로 받아들이겠습니다. 하느님 아버지! 저의 모든 것을 온전히 당신께 봉헌할 수 있는 믿음과 용기를 주십시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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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대교구 이창영 신부
  | 0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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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 하느님의 부르심에 잘 응답하면서 살아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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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초등학교 다녔을 때의 기억을 되살려보면, 대개 여름방학 숙제는 ‘곤충 채집’이었습니다. 저도 곤충채집을 하기 위해서 잠자리채를 들고 이리저리 쫓아다녔습니다. 그렇게 곤충을 잡으러 다니면서 ‘파브르’라는 이름을 자연스럽게 알게 되었고, 저도 파브르처럼 훌륭한 사람이 되겠다고 결심했었습니다.

19C 불란서의 곤충학자로서 곤충에 관한 많은 작품을 남겼던 파브르는 날벌레들의 생태를 주의 깊게 관찰하다가, 날벌레들 중에서 늘 앞에서 날고 있는 벌레만 따라다니다가 결국 굶어죽는 벌레들이 있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그 벌레들은 방향도, 목표도 없이 무턱 대고 날아다녔던 것입니다. 사람들 중에서도 그런 사람들이 있습니다. 남들이 좋다고 하니까, 아무 생각 없이 남들을 흉내 내고 따라가다가, 진정한 의미도 알지 못하고, 결국 실패하고 좌절하는 사람들입니다.

2.

살아가는 동안, 인생의 뚜렷한 목표가 없다면 자주 쉽게 방황하게 되고, 욕구와 열정이 없는 생활이 되기 쉽습니다. 작은 것이라도 자신의 목표를 분명히 세우고, 거기에 도달하려고 하는 사람이야말로 지혜롭고 행복한 사람일 것입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충실한 도구로서 살겠다.’는 분명한 결심과 목표를 갖고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물론 세례를 통해서 하느님의 자녀로 태어났지만, 특별한 부르심에 응답하면서 성직자와 수도자, 평신도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우리에게 고귀한 생명을 주셨고, 또한 험난한 인생여정 속에서 든든한 이정표가 되어주시는 주님께 우리의 몸과 맘, 정신, 열정 모두 바쳐드려야겠습니다.

3.

오늘은 ‘주님 봉헌 축일’입니다. 예수님이 탄생하신 지 40일째 되던 날, 성모 마리아와 성 요셉이 구약의 율법에 따라, 아기 예수님을 예루살렘 성전에 봉헌하신 것을 기념하는 날입니다. 그러한 의미에서 교회는 오늘, 앞으로 1년간 성당과 각 가정에서 사용할 초를 봉헌하고 축성합니다. 초가 자신의 몸을 아낌없이 태워서 밝은 빛을 내는 것처럼, 우리도 우리의 몸과 마음을 태워서 세상을 밝히는 빛이 되어야 합니다.

돌아가신 요한 바오로 2세 교황님은 오늘을 또한 ‘봉헌생활의 날’로 정하셨고, 수도자뿐만 아니라 봉헌생활을 하는 모든 사람들이 자기 생애를 온전히 주님께 봉헌하는 의미를 올바로 깨닫고, 또 그 고귀한 소명을 되새기도록 당부하셨습니다.

현재 우리는 하느님의 특별한 부르심에 잘 응답하면서 살아가고 있는지 재삼 우리 모습을 찬찬히 성찰해보면서, 지금까지보다 더 나은 수도생활, 봉헌생활이 될 수 있도록 끊임없이 노력하겠다고 결심하고, 또 생활 중에서 구체적으로 실천해야겠습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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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대교구 정재성 신부
  | 0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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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 예수님과의 만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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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일상에서 수없이 많은 만남을 갖는다. 일을 하면서 만나고 놀기 위해서도 만난다. 또 보금자리에서도 만남이 있다. 그뿐이 아니다. 교통과 통신이 발달하여 만남도 다양한 방법으로 이루어진다. 보고 싶은 사람이 있으면 교통수단을 이용하여 손쉽게 그 사람을 만난다. 또 편지를 통해 그의 마음을 읽으며, 전화로 생생한 목소리를 통해 그의 생각과 만나고, 선물을 받음으로써 그의 정성스런 마음과 만난다.

그렇다면 누구를 만난다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 그것은 '함께 있기 위한 욕구' 때문이다. 사람은 함께 살도록 하느님께서 만드셨다. 그러기에 수없이 많은 만남을 가지며 사는 것이다. 비록 시간적으로 또는 공간적으로 제한되어 있어서 헤어지고 또 다시 만나기를 되풀이하지만, 만남은 '함께하려는' 인간의 근본적인 욕구인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 누구를 만나기 위해 부지런히 움직이고 길을 떠나고, 전화를 걸고 편지나 카드를 보내고, 또 마음을 담은 정성의 선물이나 꽃을 전하기도 한다. 경우에 따라서는 만나야 할 그를 무한정 기다리기도 한다.

해마다 2월 2일에 교회는 '주님 봉헌 축일'을 지낸다. 이날은 주님의 성탄과 공현을 마무리 짓는 축일이기도 하다. 전례주년에서 성탄시기는 주님 공현 대축일 다음인 주님 세례 축일로 공식적으로 마감하지만, 주님 봉헌 축일은 성탄 축일과 연결된 축일이다. 이날은 예수 성탄 대축일에서 꼭 40일째가 되는 날이다.

우리는 주님의 성탄을 지내면서 우리를 찾아오신 주님을 만났다. 인간으로 오신 겸손한 모습의 주님을 만나뵈었다. 그리고 그분이 탄생하신 지 40일째 되는 날 유다 전통에 따라 아기 예수님을 성전에 봉헌했던 사건을 기념하는 것이다. 하지만 기억해야 할 것은 성전에서 주님의 봉헌에 앞서 예언자 시므온이 고대하고 기다리던 '메시아'를 만나뵙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날 '주님 봉헌 축일'은 두 가지 내용을 기념한다. 평생을 기다려온 시므온 예언자처럼 주님을 만나 함께 지내게 되었고 그 기쁨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크다는 것이며, 주님께서 당신 자신을 봉헌하셨듯이 우리 자신도 만나서 함께 계시는 주님과 하나되어 봉헌의 삶을 산다는 것이다.

그러면 이 축일은 어떤 과정을 거쳐 오늘에 이르게 되었는가? 교회는 일찍부터 이 축일을 지내왔다. 4세기말에 예루살렘 교회에서 이 축일을 기념하였고, 5세기 중엽에 초 봉헌 행렬을 시작하였다. 6세기에 이미 이웃 동방 교회들에 이 축일이 전파되어 기념하였다. 이때에는 시므온 예언자가 주님을 만났던 것에 초점을 맞추어 '만남'의 축제를 지냈다. 7세기 후반 이후로 로마 교회에 들어오게 되었고 다른 서방 교회에도 전파되었다. 처음에는 동방 교회들처럼 '만남의 축제일', 또는 '성 시므온의 날'로 지냈다가 성모 신심과 성모 축일이 발달하여, '성모 취결례(정화예식)'로 불리게 되었다. 주님의 축일이 성모의 축일로 바뀌어 오랫동안 지내게 된 것이다.

또 중세 후반기에는 촛불을 들고 행렬하는 것 때문에 한때 '성촉절(聖燭節)'이라고도 불렸다. 그러나 오늘날의 전례는 이 축일의 본디 모습을 되찾아 시므온 예언자의 '만남'의 의미, 축복받은 초를 들고 성당으로 들어가는 행렬 등의 의미를 강조하고 원래대로 주님의 축일로 제자리를 잡게 되었다.

이날 우리는 기도할 때 쓸 초를 축복하고 또 봉헌한다. 초는 자신을 태워서 미약하지만 불을 켜서 어둠을 밝히는 빛이다. 그래서 교회는 전례에서 일찍부터 제대와 함께 빛이신 그리스도를 상징하는 전례표지로 초를 써왔다. 이날 교회에서 초를 봉헌하고 촛불 행렬을 하는 것은 주님 봉헌 축일의 의미에 가장 알맞은 것이다.

우리는 흔히 본당에서 이날 기도할 때 켤 초를 갖고 와서 축복을 받고 또 본당에서 쓸 초들을 봉헌한다. 완전한 봉헌은 자신을 봉헌하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자기 자신을 드리는 것이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므로, 그 결과물이나 몫을 드린다. 초를 드리는 것은 주님께서 성전에 봉헌되셨듯이, 우리도 주님과 일치하여 나 자신을 봉헌하는 것이다. 시므온이 주님을 만나 함께했듯이, 봉헌하기 이전에 이미 우리는 주님과 만나야 한다. 그것이 시므온이 주님을 만난 사건을 기억하는 것이다.

오늘날 우리는 초를 들고 행렬하는 것을 잘 볼 수 없다. 주님 봉헌 축일이 교우들이 많이 참석하지 않는 춥고 이른 평일 아침에 미사가 거행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초를 들고 행렬하는 것은, 우리를 만나러 오신 주님을 찾아 불을 밝혀 들고 하느님의 집(또는 제대)으로 나아가는 의미를 더 잘 드러내준다.

우리는 '주님 봉헌 축일'을 지내면서 우리를 찾아오신 주님의 성탄의 의미를 다시 되새기자. 더 나아가 우리도 주님을 찾아 만나고 함께하는 기쁨으로 주님의 봉헌에 동참하여 나 자신을 봉헌하도록 하자. 성전에 봉헌되신 주님의 봉헌 축일에 성탄을 기억하고 나의 새 삶을 기쁜 마음으로 드려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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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대교구 나기정 신부
  | 0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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