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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 새로이 동방박사의 여정을 시작합시다.
조회수 | 3,302
작성일 | 08.01.06
오늘 복음은 동방박사들이 예수님의 탄생을 알고 별의 인도를 받아 구유의 아기예수님을 만나 경배하고 예물을 드리고 딴 길로 돌아갔다는 내용입니다.

동방박사는 누구일까요? 동방박사는 멜키올, 발타살, 가스팔로 불리는 유다인이 아닌 외국인들이었습니다. 공현이란 세상 사람들에게 예수님 자신을 계시하신 사건입니다. 하느님으로부터 선택받은 백성인 유다인들이, 구세주를 학수고대하던 유다인들이, 특히 지도층이던 수석사제와 율법학자들이 당연히 먼저 그분을 만나 뵙고 축하해야 마땅하거늘, 그들은 그분의 탄생을 알아채고도 딴 짓을 하고 있었습니다. 왕이란 작자는 왕 자리 빼앗길까봐 오히려 그 아기를 죽이려 하였습니다. 구유란 낮춤과 마음 가난을 상징합니다. 그분을 만나려면 낮춤과 마음 가난이 필요합니다. 동방박사는 유다인 아닌 세상 사람들 전체를 대표하는 사람들입니다. 성서에는 없지만 그 예물을 드린 세 분은 흑인, 백인, 황인이라고 합니다. 이들은 온 인류를 상징합니다. 어디에 살든, 무엇을 하든, 어떤 지위에 있든 상관없이 모든 사람이 그분을 세상의 구세주로 모신다는 것을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그들은 유향과 황금과 몰약을 예물로 드렸습니다. 유향은 하느님께 드리는 향이요, 황금은 세상의 임금께 드리는 최고의 선물이요, 몰약은 죽은 이에게 바르는 방부제였습니다. 예수님의 신원과 죽음, 부활을 잘 나타냅니다. 우리의 헌금 정성도 이를 본받아야 하겠습니다. 동방박사들은 별의 인도를 받아 예수님을 만났다고 했습니다. 우리도 주님께로 인도하는 별이 있었기에 주님을 만나 뵈올 수 있었습니다. 그 별은 사람마다 다릅니다. 나의 신앙인도별은 무엇일까요? 신앙의 행로를 밝혀주는 별입니다. 처음엔 인도자로부터 시작되었으나 우리 신앙을 이끄시는 분은 성령이십니다. 동방박사들은 다른 길로 돌아갔다 했습니다. 여기서 ‘다른 길’이란 주님을 만난 후 다른 사람으로 변신했음을 뜻합니다. 새해를 맞아 우리도 신앙인도별의 지시대로 그분을 찾아뵙고 ’다른 길‘로 가기로 합시다. 새해 새 마음으로 새로이 동방박사의 여정을 시작합시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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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교구 방윤석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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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어나 비추어라

빛이신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오시어 이 세상을 비추십니다. 언젠가 서해바닷가에서 밤하늘의 별을 보았던 추억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온 세상이 어둠에 덮여있는 시간이라서 더욱 잘 보이던 밤하늘에 찬란히 빛나는 수많은 별들은 무언가를 말 하려는 듯한 어떤 희망의 메시지를 알려 주려는 듯한 순간이었습니다. “우리는 동방에서 그 분의 별을 보고 그 분께 경배하러왔습니다”(마태2,2). 동방박사들은 별의 인도로 빛이신 예수님을 만나 경배를 드렸고 너무나 기쁨에 찬 그들은 그 빛을 마음에 담고서 돌아갔습니다. 그들은 다른 이들에게 빛이 되어 오신 예수님을 전해주는 또 다른 빛이 되었겠지요.

큰 기쁨은 많은 수고와 노력 끝에 때로는 큰 실망 후에 얻어집니다. 별의 인도를 받아서 주님을 찾아 그 먼 길을 떠났던 동방박사들에게 그 여정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지만 결국 큰 기쁨을 얻게 되었습니다. 신앙인으로서의 삶을 살면서 기쁨을 얻게 되는 것이 결코 쉽지만은 않습니다. 여기에는 분명 오랫동안의 고달픔이 있고 때로는 실망의 여정을 거치기도 합니다. 그런 면에서 내 삶의 시련들은 빛이신 주님을 만나는 축복의 여정입니다.

“민족들이 너의 빛을 향하여 임금들이 떠오르는 너의 광명을 향하여 오리라”(이사60,3)는 말씀대로 주님께서는 이미 온 세상의 빛이심이 선포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빛을 받아“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복음을 통하여 공동 상속자가 되고 한 몸의 지체가 되며 약속의 공동 수혜자가 되는”(에페3,6) 우리는 세상에 빛이신 주님을 선포합니다.

대전역 동광장에서는 매 주 토요일 낮에 행려자들을 위해서 무료급식봉사를 하는데 한 달 전에 그곳엘 갔었습니다. 추운 날임에도 불구하고 많은 분들이 한 끼 식사를 위하여 줄을 서서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드디어 자기의 차례가 와서 당당하게 빈자리를 차지하고 식사하는 그 분들의 얼굴은 무척이나 행복한 표정이었습니다. 그 곳에서 봉사하시는 많은 봉사자들의 얼굴에도 사랑과 행복이 가득 깃들어 있었습니다.
“일어나비추어라”(이사60,1) 주님께서는 내게도 이 세상의 작은 빛이 되어 빛이신 당신을 널리 선포하라고 하십니다. 어둠을 비추는 한 줄기 작은 빛이 되어 산다는 것은 분명 신명나는 일입니다. 거기에 주님께서 주시는 커다란 행복이 있습니다.

이정업 바오로 신부
  | 0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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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 성탄, 부활이 가까워오면 성탄 카드, 부활 카드를 주위 분들에게 보냈던 기억이 납니다. 지금은 문자 메시지가 그 자리를 차지하고 있지만, 성탄 대축일 혹은 부활 대축일이 되면 이 카드를 받게 되실 분들을 한 분, 한 분 생각하면서 열심히 카드를 적었던 기억이 있습니다. 그때에 항상 카드의 첫머리를 “그리스도, 우리의 빛!”이라는 구절로 시작했습니다. 왜냐하면 성탄 혹은 부활의 의미를 잘 드러내는 여러 가지 좋은 표현들이 많지만, 개인적으로 이 구절이 가장 마음에 들었고 또한 의미도 가장 잘 드러내는 표현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오늘 주님 공현 대축일을 맞이해서 성탄 대축일의 연장선상에서 제1독서의 이사야 예언자도 주님께서 빛으로 드러나심을 말하고 있습니다. “일어나 비추어라. 너의 빛이 왔다. 주님의 영광이 네 위에 떠올랐다.”(이사60,1) 그리고 이 빛은 곧 모든 민족들을 비춘다고 이야기합니다. 이 빛이 하느님의 백성이라 자처하던 이스라엘 백성에게만 국한된 것이 아님을 깨닫게 합니다. 마찬가지로 제2독서의 바오로 사도도 “다른 민족들도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복음을 통하여, 공동 상속자가 되고 한 몸의 지체가 되며 약속의 공동 수혜자가 된다.”(에페 3,6)는 것을 깨닫게 합니다. 즉 이 빛을 통해 우리 인류 모두가 하느님 안에서 한 몸의 지체가 되며, 하느님께서 맺으신 약속의 공동 수혜자가 된다는 사실을 증언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빛은 우리에 대한 하느님의 사랑, 하느님의 구원의지를 분명히 보여줍니다. 그리고 이 빛을 오늘 동방박사들이 별을 통해 보고, 아기 예수님께 경배를 드리고 예물을 드릴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이 빛으로 말미암아 동방박사들은 주님께 신뢰를 둘 수 있었고, 많은 고난과 역경을 뒤로하고 아기 예수님을 찾아올 수 있는 힘을 얻을 수 있었고, 희망하고, 기뻐하고, 행복해 할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요즘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는 삶을 팍팍하게 만드는 여러 사건들로 얼룩져 있습니다. 경제적인어려움, 정치적인 혼돈, 이기적이고 탐욕으로 가득 찬 모습들로 때로는 우리조차도 우리답지 못한 모습으로 살아가는 모습을 종종 발견하게 됩니다. 이럴 때일수록 좌절하고 슬픔에 빠져 있을 수는 없습니다. 동방박사들이 본 빛을 우리도 바라보고 희망과 기쁨, 행복을 회복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이 거룩한 빛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 빛 속에서, 이 빛을 통해, 이 빛 안에서 희망하고 사랑하는 하느님의 자녀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빛을 세상에서, 우리 삶의 자리에서 비추어야합니다. 우리가 보았던 그 빛을 확연히 드러내야 합니다. 그래서 이 빛을 통해 세상이, 우리 주변의 사람들이 하느님을 만날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아기 예수님을 찾는 길에서 겪었던 많은 고난과 역경에도 불구하고 비로소 그 빛을 보았을 때에 기뻐하며 행복해하던 동방박사들처럼, 아직도 고통과 어둠 속에 있는 많은 사람들이 또 다른 동방박사들이 될 수 있게 해야 합니다. 이것이 주님 공현 대축일을 맞이하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소명입니다.

<대전교구 신백철 베드로 신부>
  | 0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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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12월 31일, 이른 아침부터 눈이 내리고 있습니다. 12월의 시작과 끝을 눈과 함께 하고 있습니다. 한겨레신문 1면의 표지 사진을 보고 먹먹함이 밀려왔습니다. 빈 책상이 눈에 아른거립니다. 신부라는 호칭으로, 어른이라는 호칭으로 불리는 것에 대한 부끄러움을 느끼고 살았습니다. 시대를 역류하면서 살아야 하는 삶의 상태를 잃어버리고 살았던 시간에 대한 죄스러움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아프다”는 말조차도 사치로 느껴졌던 시간을 보냈습니다. 그리고 그 느낌은 아직도 진행 중입니다. 그래서 본당 미사 전 세월호참사 희생자들과 가족들을 기억하는 기도를 신자분들과 함께 봉헌합니다. 잊지 않기 위해서가 아니라 기억하기 위해서입니다.

오늘은 주님 공현 대축일입니다. 복음을 통해서 들려주는 동방박사의 이야기는 위대한 성경의 예언이 성취되었음을 알려 주고 있습니다. 참된 메시아의 도래가 널리 알려져 있는 가운데 일어납니다. 유대 땅이나 유대 민족의 테두리를 넘어서 시야가 전 세계로 확장됩니다.

우리는 구세주의 탄생을 기뻐합니다. 구세주가 구세주인 이유는 세상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구세주의 탄생은 어떤 한 지역을 넘어서 세상을 위한 축제이고 창조된 모든 피조물을 향한 하느님 사랑의 표지입니다.

동방에서 온 박사들이 누구인지 성경은 알려 주지 않습니다. 다만 동방에서 온 박사들은 학식 있는 사람들로서 별의 운행과 출현에 관해 잘 알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별의 기이한 현상 때문에 길을 떠났고 별의 인도를 받아 예루살렘에 도착했습니다. 그리고 로마 황제라는 사람으로부터 왕이라는 호칭을 부여받은 표면적인 유대인의 왕에게 참된 유대인의 왕이 어디에 계신지 묻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찾고 있는 분이 참된 왕이라는 것을 이렇게 알려 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분의 별을 보고 왔습니다.”

그런데 궁금합니다. 당시 유대라는 지역은 아무런 영향력을 갖추지 못한 지역입니다. 유대민족들도 로마의 식민지의 사람들이었습니다. 사절이나 특사를 보내어서 확인하고 축하해도 충분한 지역임에도 불구하고, 여행이라는 과정에서 있을 수 있는 위험을 감수하면서 수고를 마다하지 않았던 이유가 무엇인지 궁금합니다. 그들은 별의 운행을 관찰하면서 무엇을 보았던 것일까? 그리고 그들이 보고 아는 것이 무엇이기에 그토록 그분 앞에 가서 경배 드리고 싶어 하는 것일까?

물어볼 수가 없습니다. 확인하기도 어렵습니다. 다만 한 가지 확신할 수 있는 것은 그들이 세상을 직시하는 눈이 다른 사람들과는 다르다는 것입니다. 하늘을 쳐다보며 별의 운행을 관찰하던 수많은 사람들 가운데 그들만이 외적인 현상을 통해서 그러한 현상의 본질과 목적이 무엇인지를 알아차릴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사절이나 특사를 파견하지 않고 직접 그분을 뵙기를 희망합니다. 길을 떠난다는 것은 새로운 삶의 상태에 대한 시작입니다. 그동안 쌓아 왔던 모든 것을 잃어버릴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마치 귀한 진주를 발견한 상인이 자신이 가지고 있는 것을 다 팔아서 진주를 사듯이, 새로운 삶의 상태를 시작한 사람은 길 위에 자신을 던집니다.

언젠가 이런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명동성당이 사람들로 북적거리는데 수많은 사람들이 관광을 하기 위해서 온다는 것입니다. ‘관광지 명동성당!’ 이상하고 어색합니다. 교황님 방문 이후로 성지에 많은 사람들이 찾아온다고 합니다. 그중 전부는 아니겠지만 일부는 관광을 위한 방문입니다. 교황님이 찾아오셨던 곳, 그곳에 기념물과 기념관을 지으면 장사는 잘 되겠지요.

가끔 서울을 갑니다. 공부를 위해서 올라갑니다. 그런데 보고 싶지 않은 것이 있습니다. 관광지가 된 성지입니다. 민주화와 신앙의 성지가 관광 상품화 되어 가는 모습을 바라보는 것만큼 고통스러운 것은 없습니다. 왜냐하면 제가 지금껏 걸어 왔고 앞으로 걸어가야 하는 길이 인간을 사랑하신 특히 가난한 사람들을 사랑하신 예수의 길이기 때문입니다.

귀한 진주를 발견한 상인은 자신의 소유를 다 팔아서 귀한 진주를 삽니다. 우리는 귀한 진주가 누구인지 그리고 무엇인지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귀한 진주가 이 세상 가운데 우리와 함께 현존한다는 것을 고백합니다. 그런데 현실에서 경험하는 것은 우리의 고백과 다릅니다.

손에 쥔 귀한 진주를 슬그머니 내려놓고 자신의 부를 늘려 나갑니다. 그래서 ‘가난한 사람들이 찾기 어려운 신앙’, ‘정의에 대한 외침을 부정하는 신앙’, ‘좀 더 빨리 그리고 더 많이’가 신앙이 성취해야 하는 목표가 되어갑니다.

외적인 현상 속에서 그 현상을 움직이는 본질을 보아야 합니다. 본질을 볼 수 있는가 아닌가에 따라서 우리는 동방에서 온 박사들이 될 수도, 아기의 모습으로 오신 왕을 두려워하고 계략을 꾸미는 헤로데가 될 수도 있습니다. 헤로데는 자신이 부여받은 표면적인 유대인의 왕이라는 호칭을 유지하기 위해서 손쉬운 방법을 선택합니다. 헤로데의 선택은 속임과 파괴입니다.

현상을 움직이는 본질을 볼 수 있는 사람은 들을 수 있습니다. 동방박사들은 헤로데에게 가지 말라는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다른 길로 고향에 돌아갑니다. 그들은 다른 길로 돌아갑니다. 익숙하지 않은 길입니다. 그러나 그 길은 말씀이 인도하는 길입니다. 곧 하느님과 함께 하는 길입니다. 그런데 갑자기 이런 의문이 생깁니다. 오늘 우리는 하느님 말씀을 들을 준비는 하고 있는 것일까? 아니 하느님 말씀을 듣기 원하기나 하고 있는 것일까?

잠시 멈춰서 성찰해 봅니다.

<대전교구 임상교 신부 (대건 안드레아)>
  | 0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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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멀리서 이방인들조차 온갖 고초를 무릅쓰고 예수아기를 찾아와 경배를 드리는데, 가장 가까이 있었던 유태인들, 헤로데를 비롯한 온 예루살렘은 깜짝 놀라 아기예수를 없애버리려 작당을 하고 있다. 왜 깜짝 놀랐을까? 새로운 왕으로 말미암아 정권이 바뀌면 자기들이 누리고 있는 풍요와 안정이 깨지고 신상이 해로워질까 두려웠기 때문이다.

오늘날에도 마찬가지로 하느님을 모르는 이방인 비신자들보다 오히려 하느님을 잘 안다고 자처하는 신자들, 특히 조상대대로 하느님의 은총을 넘치게 받아온 구교신자들이 신앙 때문에 자기 생활 리듬이 깨질까봐 휴가 운동 취미 생활 못할까봐 전전긍긍 온통 마음이 술렁거리면서 하느님을 멀리하고 불편해하고 부담스러워하는 모습 얼마나 많은가?

신자라 해서 비신자 이방인들보다 더 착하게 더 많이 봉사하고 더 많이 자선하는 것도 아니고 윤리적으로 더 잘 사는 것도 아니다. 평생 남을 위해 희생 봉사 자선 한 번 안하는 천주교 신자들도 많다. 하느님을 믿는다는 사람들이 예수아기께 귀한 예물,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아까워서 게을러서 바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아무리 복음을 선포하고 예언하고 강조해도 귓등으로도 말을 듣지 않는다. 자식 손자 손녀들 말 안 듣는다고 야단치고 요즘 애들은 왜 이러느냐고 한심하다고 말세라고 한탄하는 어른들이 오히려 애들보다 훨씬 더 말을 잘 안 듣고 완고하고 고집불통이다. 왜 그럴까? 귀찮고 힘들고 신경 쓰기 싫고 생활리듬이 깨질까봐 자기 껍질을 싸고 들어앉아 있기 때문이다.

예수아기는 화려한 궁궐이 아니라 가장 누추하고 귀찮고 냄새나고 불편한 마굿간에서 탄생하셨다. 그분을 만나려면 낮고 불편하고 냄새나는 것을 감수해야 한다. 마굿간을 싫어하고 귀하고 아까운 것을 내놓지 않고 겸손도 희생도 없이 구중궁궐 안방에서 게으름 피우며 편안하게 안주하는 생활 속에서는 구세주 예수아기를 만날 수 없는 것이다.

희미한 별빛을 바라보며 수천 리 고생길을 걸어와 구세주를 만난 동방박사들처럼 어리석고 바보 같다는 비웃음을 각오하고 신앙의 별빛을 따라 험난하고 지루하고 불편할 수도 있는 길을 인내로이 항구하게 걷도록 하자. 그래야 메시아 주님을 만날 수 있다.

▥ 대전교구 이한영 마르코 신부 2016년 1월 3일
  | 12.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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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주님 공현 대축일입니다. 공현(Epiphania)의 뭇은 ‘나타나다’,‘나타내 보이다’라는 뜻입니다. 즉 존귀하신 하느님의 외아드님께서 ‘이방인의 빛’으로서 당신 모습을 공적으로 나타내 보이심을 기념합니다.

그래서 오늘 전례는 제1독서를 통해 하느님이 이스라엘을 당신의 백성으로 삼으셨지만,제2독서에서 유대인들에게 약속된 복음이 이방인들에게 전파된다고 강조합니다.

한걸음 더 나아가 구세주의 탄생을 알리는 베들레헴의 그 별빛은 단지 그리스도인들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어둠에 빠진 만백성을 위한 구원의 빛이라는 점을 알려줍니다.

사실 교회는 보다 넓은 차원에서 수많은 민족들과 종교들을 포용합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만일 우리가 하느님의 모상대로 창조된 사람들 기운데 한 사람이라도 형제로 대하기를 거절한다면 우리는 하느님을 감히 모든 사람들의 아버지라고 부를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교회는 인간과 인간 사이의 온갖 차별과 혈통이나 피부색이나 사회적 조건이나 종교적 차별의 이유로써 생겨난 모든 박해를 그리스도의 뜻에 어긋나는 것으로 알아 배격하는 바이다"라고 선언한 바 있습니다.(비그리스도교에 관한 선언 5항)

예수님은 민족과 종교나 종파를 뛰어넘어 구원의 빛을 선물로 주시기 위해 오셨습니다. 그래서 별은 이방인 박사들을 구세주께로 인도합니다. 동방박시들은 세상을 구원하러 오시는 그 빛이신 구세주를 보게 된 것을 ‘더없이 기뻐하였고’(10절)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예물로 드렸습니다.(11절) 이는 우리 교회가 지속해야 할 성실한 인도자로서의 사명을 생각하게 합니다.

동방박사들이 메시아를 찾기 위해 멀리 동방에서 베들레헴까지 오는 길은 그다지 유쾌하지만은 않았을 것입니다. 온갖 고난과 생명의 위협이 있었을 것입니다. 늑대나 이리를 만나거나 산적을 만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갈증과 허기를 겪어야 했을 것이고 강한 햇볕과 질병에 시달리고 오랜 기간 동안 불편한 잠자리에서 잠을 청해야 했을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께 가는 길에도 수많은 장애요인들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님을 만나기 위해 얼마나 간절한 마음을 갖고 있으며 얼마나 노력하고 있는지 갚이 생각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열정이 부족하고 너무 쉽게 좌절하거나 포기하지는 않습니까? 우리의 삶이 주는 여러 장애물들 세상과 물질의 박해들을 기꺼이 물리치고 참 빛이신 예수님을 만나기 위해 최선을 다할 마음이 되어 있는지 깊이 새겨 보았으면 합니다.

▥ 대전교구 김명현 미카엘 신부 : 2017년 1월 8일
  | 0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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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께 드리는 가장 좋은 예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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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사목하는 곳은 이름엔 시가 붙어 있지만, 전형 적인 시골 성당입니다. 시골 성당과 도시 성당의 차이점이 혹시 무엇이라고 생각하시나요? 전 얼마나 자주 하늘을 바라보는가에 따라 다르다고 생각합니다. 도시에서는 아무래도 하늘을 바라보아야 별도 보기 어렵고, 주변에 있는 가게들의 화려한 조명을 바라보기 바쁘지만, 시골은 밤만 되면 깜깜해서 주변을 바라보아도 잘 알아보기 어렵고, 그래서인지 하늘을 더 자주 보게 되는것 같습니다. 얼마 전 주일 저녁 미사가 끝나고 무심코 하늘은 바라보았습니다. 그날따라 미세먼지가 없어서인지 밤하늘에 별이 유난히 많이 보이더군요. 반짝이는 작은 별들을 바라보면서 답답하던 마음이 뻥 뚫리는 것 같아 기분이 상쾌해졌습니다. 왠지 하느님께서 저에 게 주시는 선물 같은 느낌이 들더군요.

오늘은 주님 공현 대축일입니다. 오늘 복음은 주님을 경배하기 위해 별을 쫓아 먼 길을 온 동방 박사들의 이야기를 전해 줍니다. 오랫동안 기다려 왔던 메시아를 만나기 위해 예물을 준비하고 어딘지 모를 그곳을 오직 별의 인도에만 의지하던 동방 박사들은 예루살렘에 오면서 별을 잃어버립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의 왕으로 오실 분이니 왕궁에 가서 물어보면 되겠다는 생각으로 헤로데를 찾아가게 됩니다. 예루살렘은 이스라엘의 수도이니 사람들이 많이 사는 곳이고 대도시입니다. 도시의 화려한 불빛과 번화함이 작은 별빛을 가려 동방 박사들은 별빛을 잃어버렸고, 상식적으로 왕이 태어날 곳은 왕궁이니 왕궁으로 찾아간 것이겠지요.

우리도 신앙생활을 하다가 보면 동방 박사들과 같은 실수를 저지를 때가 있습니다. 외적으로 화려하고 큰 것만이 좋은 것이라 생각하거나, 우리의 경험과 상식이 언제나 옳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지요. 하지만 정말로 그럴까요? 동방 박사들이 베들레헴에 가서 만난 아기 예수님은 초라한 마굿간에 있는 구유에 누워 계신 분이었습니다. 지극히 높으신 하느님께서 사람을

사랑하신 나머지 사람의 모습으로 오신 것만으로도 황송한 일인데, 그분은 가장 높은 곳에서 가장 낮은 곳으로 오셨던 것입니다. 그분이 당신의 모습을 보여 주신 사람은 낮은 신분의 목자들과 이방인인 동방 박사들이었습니다. 그렇게 하느님께선 이 세상에서 가장 낮은 곳에, 가장 소외받던 사람들에게 당신의 모습을 처음 보여 주셨습니다. 이 놀라운 사실에서 우리가 깨달을 수 있는 것은 주님을 만나기 위해 우리가 가야 할 곳은 가난하고 소외받는 사람들, 성당에 오는 것조차 어려워하는 사람들 옆이라는 것입니다. 오늘 나의 어려운 이웃을 찾아가 나를 통해 주님의 모습을 보여 줄 수 있다면 주님께 드리는 가장 좋은 예물이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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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전교구 오기환 사도요한 : 2019년 1월 6일
  | 0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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