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요안 신부의 가톨릭

 l Home l Bestsite l Search l Freeboard l E-mail l

 
 

주일강론

평일강론

축일강론

대축일/명절강론

혼인강론

장례강론

예 화

사설/칼럼

♣ 현재위치 : 홈 > 강론자료실 > 대축일/명절강론

대축일/명절강론 코너 ( 대축일/명절 미사에 관련된 강론자료입니다... )

 


( 쪽지보내기 스크랩하기 프린터하기 홈페이지 )
449 52.4%
(홍) 한국 순교자 이동 대축일 독서와 복음 (9월 20일)
조회수 | 2,642
작성일 | 07.10.04
제1독서 지혜서 3,1-9

1 의인들의 영혼은 하느님의 손안에 있어, 어떠한 고통도 겪지 않을 것이다. 2 어리석은 자들의 눈에는 의인들이 죽은 것처럼 보이고, 그들의 말로가 고난으로 생각되며, 3 우리에게서 떠나는 것이 파멸로 여겨지지만, 그들은 평화를 누리고 있다.
4 사람들이 보기에 의인들이 벌을 받는 것 같지만, 그들은 불사의 희망으로 가득 차 있다.
5 그들은 단련을 조금 받은 뒤 은혜를 크게 얻을 것이다. 하느님께서 그들을 시험하시고, 그들이 당신께 맞갖은 이들임을 아셨기 때문이다.
6 그분께서는 용광로 속의 금처럼 그들을 시험하시고, 번제물처럼 그들을 받아들이셨다.
7 그분께서 그들을 찾아오실 때에 그들은 빛을 내고, 그루터기들만 남은 밭의 불꽃처럼 퍼져 나갈 것이다. 8 그들은 민족들을 통치하고 백성들을 지배할 것이며, 주님께서는 그들을 영원히 다스리실 것이다.
9 주님을 신뢰하는 이들은 진리를 깨닫고, 그분을 믿는 이들은 그분과 함께 사랑 속에 살 것이다. 은총과 자비가 주님의 거룩한 이들에게 주어지고, 그분께서는 선택하신 이들을 돌보시기 때문이다.

제2독서 로마서 8,31ㄴ-39

형제 여러분, 31 하느님께서 우리 편이신데 누가 우리를 대적하겠습니까? 32 당신의 친아드님마저 아끼지 않으시고 우리 모두를 위하여 내어 주신 분께서, 어찌 그 아드님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베풀어 주지 않으시겠습니까?
33 하느님께 선택된 이들을 누가 고발할 수 있겠습니까? 그들을 의롭게 해 주시는 분은 하느님이십니다. 34 누가 그들을 단죄할 수 있겠습니까? 돌아가셨다가 참으로 되살아나신 분, 또 하느님의 오른쪽에 앉아 계신 분, 그리고 우리를 위하여 간구해 주시는 분이 바로 그리스도 예수님이십니다.
35 무엇이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갈라놓을 수 있겠습니까? 환난입니까? 역경입니까? 박해입니까? 굶주림입니까? 헐벗음입니까? 위험입니까? 칼입니까? 36 이는 성경에 기록된 그대로입니다. “저희는 온종일 당신 때문에 살해되며 도살될 양처럼 여겨집니다.”
37 그러나 우리는 우리를 사랑해 주신 분의 도움에 힘입어 이 모든 것을 이겨 내고도 남습니다. 38 나는 확신합니다. 죽음도, 삶도, 천사도, 권세도, 현재의 것도, 미래의 것도, 권능도, 39 저 높은 곳도, 저 깊은 곳도, 그 밖의 어떠한 피조물도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님에게서 드러난 하느님의 사랑에서 우리를 떼어 놓을 수 없습니다.

복음 루카 9,23-26

그때에 23 예수님께서 모든 사람에게 말씀하셨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24 정녕 자기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나 때문에 자기 목숨을 잃는 그 사람은 목숨을 구할 것이다. 25 사람이 온 세상을 얻고도 자기 자신을 잃거나 해치게 되면 무슨 소용이 있느냐?
26 누구든지 나와 내 말을 부끄럽게 여기면, 사람의 아들도 자기의 영광과 아버지와 거룩한 천사들의 영광에 싸여 올 때에 그를 부끄럽게 여길 것이다.”
449 52.4%
예수님께서 열두 살이 되던 해, 부모가 예루살렘에 올라갔다가 예수님을 잃어버렸을 때입니다. 사흘 만에 부모를 만났는데, 예수님께서는 “왜 저를 찾으셨습니까? 저는 제 아버지의 집에 있어야 하는 줄을 모르셨습니까?”(루카 2,49) 하고 말씀하셨지요. 오랜 시간 애가 탔을 부모의 마음은 헤아리지도 않고 이렇게 말씀하시는 예수님께 성모님께서는 참으로 섭섭하셨을 것 같습니다. 어쩌면 장차 하느님 일을 할 때 부모라는 혈육의 정을 희생할 수밖에 없음을 미리 예고하는 듯합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그때와 비슷한 모습을 보여 주십니다. 어머니가 아들이 보고 싶어 예수님을 찾아왔으나 예수님께서는 어머니를 만나려고도 하지 않고 “내 어머니와 내 형제들은 하느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이 사람들이다.” 하고 말씀하십니다. 아들 예수님의 이런 반응에 성모님께서는 그 옛날 섭섭했던 기억을 다시 떠올리셨을지도 모릅니다.

사실 예수님께서 불효자여서 그런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어머니 마리아를 육정을 넘어서는 진정한 신앙의 어머니가 되게 하시려는 것이었습니다. 장차 아들 예수님에게 닥칠 수난과 죽음을 육친의 정으로 어떻게 견딜 수 있겠습니까? 모자의 육정에만 매달려 더 큰 하느님의 뜻을 바라보지 못하면 어떻게 구세주의 어머니가 되실 수 있었겠습니까? 예수님께서는 제자들과 모인 사람들에게 당신과 어머니의 관계가 육정에 매인 관계가 아니라 하느님의 큰 뜻을 이루는 관계임을 보여 주시는 것입니다.

가족 간의 혈육의 정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주님 말씀을 듣고 실천하는 주님의 가족으로 거듭나는 것입니다.

매일미사 2011년 9월
  | 09.16
449 52.4%
렉시오 디비나에 따른 복음 묵상

그때에 예수님께서 모든 사람에게 말씀하셨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정녕 자기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나 때문에 자기 목숨을 잃는 그 사람은 목숨을 구할 것이다. 사람이 온 세상을 얻고도 자기 자신을 잃거나 해치게 되면 무슨 소용이 있느냐? 누구든지 나와 내 말을 부끄럽게 여기면, 사람의 아들도 자기의 영광과 아버지와 거룩한 천사들의 영광에 싸여 올 때에 그를 부끄럽게 여길 것이다.” (루카 9,23-­26)

► 묵상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못지않게 예수님을 어떻게 따라야 하는가도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는 큰 고민거리입니다. 예수님은 믿어야 할 진리이시기도 하지만, 그 이전에 본받아야 할 인격이시며 따라가야 할 구체적인 길이십니다. 그분을 알려면 그분의 삶과 가르침을 배워야 하고 그분 제자가 되려면 그분이 가신 길을 그대로 따라가야 합니다. 오늘 말씀은 예수님 닮는 삶이 어떤 것인지 그 답을 가르쳐 줍니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9,23). 지금까지 제자들을 단속하는 데 여념이 없으셨다면 이제부터는 군중들 차례입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데는 제자건 군중이건 구별이 없습니다. 또한 그분의 가르침은 예수님을 따르고자 하는 모든 시대, 모든 사람을 향해 열려 있습니다.

다른 무엇에 앞서 자신을 버리라고 당부하십니다. 나를 버리는 것이 무엇일까? 쉽게는 나 자신을 낮추어 보는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나보다 이웃의 가치를 높이 보는 것이기도 합니다. 나를 잃어버릴 각오가 되어 있어야 남이 소중해질 것 같습니다. 내 욕망과 내 이익을 쫓는 것이 가장 나를 위한 삶이라고 여겼던 가치관도 ‘던져 버려야 할 나’입니다. 역설적이게도 자신을 버리는 것이 자아를 실현하는 길일 수도 있겠다 싶습니다. 버리고 비워야 새것이 들어설 수 있고, 그래야 또 예수님으로 채울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분을 따르는 삶에서 분명 고난의 문제는 피해갈 수 없습니다. 십자가는 곧 죽음을 향한 것이었고, 그래서 루카 시대에는 목숨을 내놓는 일까지도 감수해야 했습니다. 날마다 예수님 때문에 지고 가야 할 우리의 십자가는 일상생활에서 겪는 난관과 반대와 모욕 등을 견디는 일부터 시작될 것입니다. 내가 짊어질 십자가는 다름 아닌 나일 수도 있습니다. 자신을 버리고 따른다면 그분을 따르는 십자가의 길이 막막하고 고단하지만은 않을 것입니다.

“정녕 자기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나 때문에 자기 목숨을 잃는 그 사람은 목숨을 구할 것이다”(24절). ‘목숨’이란 것이 살고 죽는 명줄일 수도 있으나, 이 지상의 생명을 능가하는 생명, 죽은 다음에도 보존되는 그 무엇으로서, 영원한 생명일 수도 있고 자아나 인격을 가리키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은 그분과 맺은 인격적 관계를 통해 자아를 실현할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진정 무엇이 내가 살 길인가? 살려고 발버둥치면 칠수록 사는 게 더 힘겨워지고, 움켜쥐면 쥘수록 다 놓친다는 것, 살면서 저절로 깨치게 되는 세상 이치입니다. 안간힘을 쓸수록 자신은 더욱 비참해집니다. 인정받는 일에만 급급하고 배척받는 일은 피하여 자기 목숨을 보존하려는 사람은 결국 자기 영혼을 잃고 맙니다. 현재의 삶에 집착하다 다가올 시대의 더 가치 있는 삶을 놓치게 될 것을 경고하십니다. 예수님과 그분의 메시지를 위해서 얻게 될 영원한 생명이 세상보다 귀한 줄 알아야 합니다. 참으로 값진 삶과 죽음이 어떤 것인지는 예수님만 봐도 잘 알 수 있습니다. 그분을 따르는 것이 결코 잃는 것이 아님을 다시금 일깨워 줍니다.

“사람이 온 세상을 얻고도 자기 자신을 잃거나 해치게 되면 무슨 소용이 있느냐?”(25절) 온 세상을 얻으려다 그 과정에서 자신을 잃는다면, 하느님 대신 세상을 얻는 것이 과연 무슨 소용이 있을까요? 이 세상 것은 죽음 앞에서 아무런 쓸모가 없습니다. 세상의 가치로 얻는 안정은 공허하고 허황되어 곧 허물어지고 맙니다. 정말 소중한 것이 무엇인지 생각해 볼 일입니다.

“누구든지 나와 내 말을 부끄럽게 여기면, 사람의 아들도 자기의 영광과 아버지와 거룩한 천사들의 영광에 싸여 올 때에 그를 부끄럽게 여길 것이다”(26절). 이와 비슷한 말씀이 여러 군데에서 발견됩니다. “누구든지 사람들 앞에서 나를 안다고 증언하면, 사람의 아들도 하느님의 천사들 앞에서 그를 안다고 증언할 것이다. 그러나 사람들 앞에서 나를 모른다고 하는 자는, 사람의 아들도 하느님의 천사들 앞에서 그를 모른다고 할 것이다”(루카 12,8-­9). 바오로는 당당히 외칩니다. “나는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습니다. 복음은 먼저 유다인에게 그리고 그리스인에게까지, 믿는 사람이면 누구에게나 구원을 가져다주는 하느님의 힘이기 때문입니다”(로마 1,16).

아버지의 영광과 거룩한 천사들의 영광에 싸여 오실 사람의 아들은 세말의 심판을 집행하실 분입니다. 하느님을 등진 세상을 사람의 아들은 부끄러워하실 것입니다. 예수님께 냉담하고 교회의 복음 선포를 경멸했던 이들을 부끄럽게 여기실 것입니다.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이곳에 서 있는 이들 가운데에는 죽기 전에 하느님의 나라를 볼 사람들이 더러 있다”(27절). 예수님의 재림을 열렬히 고대하던 초대 교회에, 그리스도의 재림이 지연되더라도 교회 공동체가 복음 선포에 충실할 것을 격려하시는 말씀입니다. 하느님 나라는 자신의 계획과 꿈을 포기하고 목숨의 위험까지 무릅쓰며 예수님을 따른 이들에게 돌아올 축복입니다. 그들은 하느님 나라를 체험하고 부활과 영원한 생명을 체험할 것입니다. ‘참으로’ 하시는 말씀입니다.

아무래도 예수님 따르는 일이 밑지는 장사 같습니다. 고생문이 훤한 데다 세상에서 성공하기는 애초에 글렀습니다. 도대체 왜 이리 겁을 주시는 걸까요. 그런데 곰곰 곱씹어보니 예수님 말씀은 다 우리 잘되라고 하시는 말씀이었습니다. 참다운 인간으로 살기를 바라셨습니다. 진정 우리 모두가 함께 살아남는 길, 인간답게 사는 길, 이 세상이 하느님 나라가 되는 길을 가르쳐 주신 것입니다. 내가 좀 포기하고 양보하면, 내 십자가 내가 지고 떳떳하게 예수님 믿고 그분 가르침대로 산다면, 나도 살고 우리 식구도 살고 이웃도 살고 세상도 산다는 것을요. 버리는 것이 버리는 게 아니고 잃는 것이 잃는 게 아니며 죽는 것이 죽는 게 아니었습니다. 가치를 뒤집으십니다. 그러고 보니 예수님은 실패를 통하여 승리를 거두시는 분이셨네요.

► 강지숙(한님성서연구소 수석 연구원)
  | 09.15
449 52.4%
모든 생물에는 한계가 있듯이 우리 인간도 한계를 지니고 사는데, 그것이 바로 죽음이겠지요. 그러나 우리는 죽음이 삶의 한 부분이며 삶을 완성시키는 것이라는 사실도 알고 있습니다. 죽음이 하나의 현실이므로, 이것 때문에 두려워하거나 위축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죽음을 통하여 마지막 가능성을 실현할 수 있다는 생각으로 삶을 더욱 보람 있고 알차게 살아야 할 것입니다.

인생의 한계를 잘 알고 있던 우리 순교자들은 누구보다도 삶을 아끼고 사랑하던 분들이었지만, 죽음을 하느님과 하느님 나라를 위한 제2의 세례로 받아들여 기꺼이 순교의 길을 선택하였습니다.

생명에 대한 애착이야말로 가장 본능적인 것인데, 하느님을 위하여 이것마저도 기꺼이 포기하고 순교하신 우리 선조들은 참으로 장하신 분들입니다. 103위 성인 가운데는 열네 살짜리 어린이에서 여든 살 고령에 이르는 분도 계시고, 하인에서 종3품 고관도 있었습니다. 교회 직위도 주교에서 평신도 어린이에 이르기까지 다양하였습니다. 학자들이 있는가 하면 아무것도 배운 것이 없는 촌부도 있었습니다.

열네 살밖에 되지 않는 꼬마가 어떻게 순교할 수 있었을까! 고령의 노인이 어떻게 순교의 고통을 참아낼 수 있었을까! 하느님께서 함께하셨기 때문에 그분의 도움으로 이 모든 것이 가능했습니다. 그래서 “성인은 우연히 만들어지지 않으며, 순교자들은 인간의 선택이 아니라 하느님의 선택으로 만들어진다.”, “성령은 순교자들의 영이시다.”라는 토마스 머튼의 고백이 마음에 와 닿습니다.

현대는 피를 흘리는 순교보다는 땀과 노력, 봉사와 희생이라는 새로운 의미의 ‘백색 순교’를 요구합니다. 결혼과 가정생활에도 피를 흘리지 않는 순교가 요청되고 있습니다. 하느님과 진실과 정의를 위하여 평신도 신분으로 마치 수도자처럼 살아가는 분들도 종종 만나게 됩니다. 이분들의 삶이야말로 새로운 의미의 백색 순교, 순교자의 여정이 아닐까요?

► 매일미사 2015년 9월 20일
  | 09.15
449 52.4%
주님께서는 “어떠한 종도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다.”(루카 16,13)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에게 하느님과 재물 중 하나를 선택하라고 하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아마도 우리는 입으로 하느님을 선택한다고 말하겠지만, 마음속에서는 많은 유혹과 핑계가 생겨날 것입니다.

우리가 오늘 경축하는 103위 순교 성인들은 하느님을 주인으로 섬기는 징표로 자신의 목숨을 내 놓으신 분들입니다. 그중에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은 만 25세의 나이로 사목 생활의 꽃도 피우지 못한 채 자신의 목숨을 ‘천주님’께 바치셨습니다. 성인은 죽기 전에 이렇게 설파하셨습니다. “내가 외국 사람들과 통한 것은 오직 천주님을 위해서입니다. 나는 지금 그 천주님을 위해 죽어 갑니다. 그러나 여기서 바로 나에게 영원한 생명이 시작됩니다.”

복자 정약종 아우구스티노의 아들인 성 정하상 바오로는 한국 천주교회의 재건을 위해 투신한 평신도입니다. 성인은 북경 왕래를 아홉 차례, 의주 변문까지는 열한 차례를 왕복하며 유방제 신부, 성 모방 신부, 성 샤스탕 신부, 성 앵베르 주교를 영입하였습니다.

103위 순교 성인들은 임금보다 더 큰 임금을 선택하여 충성을 바치고, 부모보다 더 큰 부모를 섬겨 효도를 다한 하느님의 자녀들입니다. 그들은 ‘대군 대부’이신 하느님을 믿는다고 고백하여 영원한 생명의 표지를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보여 주었습니다. 영원한 생명을 얻으려면 하느님을 믿어야 한다고 선포하였습니다. 죽음도 그들을 하느님의 사랑에서 떼어 놓을 수 없었습니다. 103위 순교 성인들이 보여 준 하느님의 사랑을 마음에 지닙시다.

▮ 류한영 베드로 신부 : 매일미사 2016년 9월 18일
  | 09.16
449 52.4%
‘불사의 희망’, 죽음도 꺾지 못하는 희망이 있다면 우리는 그 희망에 목숨을 걸 수 있을까요? 그런 희망이 있다면 그것은 단순히 생각이나 기대일 수는 없습니다. 확고한 신념이 생기려면 바오로 사도처럼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직접 뵙고, 수많은 역경과 고난 속에서도 주님께서 지켜 주고 계신다는 체험이 필요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그분의 뒤를 따라 불사의 희망, 곧 영원한 생명에 대한 확신을 얻으려면, “자신을 버리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고 가르치십니다. 누구나 저마다 짊어져야 할 삶의 십자가가 있습니다. 책임져야 할 가족, 살기 위해 다녀야 하는 직장, 보기 싫지만 만나야 하는 사람들, 힘겨운 학업, 떨쳐 버리지 못하는 지병, 경제적인 빈곤, 희망 없는 인생, 맞이해야 할 두려운 죽음에 이르기까지 자신이 짊어진 십자가의 무게가 가장 크게 다가옵니다.

배교를 강요하는 이들의 칼 앞에 당당하게 신앙을 증언한 103위 한국 순교 성인들이라고 이런 인생의 십자가가 없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마지막 순간까지 순교자들이 배교의 유혹을 이겨 낼 수 있었던 것은, ‘날마다’ 자신들의 십자가를 짊어지는 고행 속에서도 ‘불사의 희망’, 영원한 생명에 대한 확신을 버리지 않았기 때문일 것입니다.

우리 시대에는 피를 흘리는 순교는 없지만, 삶의 무게를 짊어져야 할 땀과 희생의 순교는 요청됩니다. 한두 번 순교하는 마음으로 참고 살 수는 있지만, ‘날마다’ 십자가를 지기란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삶은 수행의 연속이고, 그 수행의 끝 날에 세상의 그 어떤 것도 우리를 떼어 놓을 수 없는 ‘하느님의 사랑’의 품에 안기는 것이 우리의 희망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요?

▥ 송용민 사도 요한 신부 - 매일미사 2017년 9월 17일
  | 09.14
449 52.4%
한국 천주교회는 역사가 짧지만 수많은 순교자와 함께 신앙의 여정을 걷고 있습니다. 순교자들은 신앙을 받아들임으로써 무엇을 얻었습니까? 오히려 명예와 재산, 가족마저 잃지 않았습니까? 결국, 자신의 목숨까지 잃고 말지요. 그런데 도대체 무엇을 얻으려 했던 것입니까?

당시 사회는 상당히 혼란스러웠지요. 오랫동안 사회를 지탱해 주던 가치관이 무너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많은 이들이 새로운 가치관, 새로운 정신적 지주를 갈망하고 있었습니다. ‘참된 삶은 무엇인가?’ ‘진정한 인간의 길이란 어떤 것인가?’ 이런 문제에 직면해 있던 그들은 그리스도교에서 해답을 찾은 것입니다.

그 옛날, 우리 신앙 선조들이 복음을 접하면서 가장 깊이 매료되었던 점은 인간 존중 사상과 인간 평등사상이었습니다. 바로 이 점 때문에 복음이 빠른 시간 안에 널리 퍼질 수 있었지요.

그러나 복음이 전해진 지 몇 백 년이 지났음에도 우리 사회는 여전히 혼란에 빠져 있습니다. 복음의 가치와 대립하는 살인, 자살, 낙태 등 생명 경시 풍조, 인간 복제, 유전자 조작, 환경 파괴, 물질주의 등이 널리 확산되고 있습니다.

그 옛날 신앙 선조들은 잘못된 가치관을 버리고, 참된 삶과 인간의 존엄성을 지키려고 목숨까지 바쳤습니다. 신앙의 후손인 우리가 인간 존중의 정신을 회복시키고, 이를 확산시켜 나가야 합니다. 이런 노력 속에서 세상이 지니고 있는 많은 문제는 하나하나 풀려 나갈 것입니다.

▦ 김준철 토마스 아퀴나스 신부 : 매일미사 2018년 9월 23일
  | 09.22
449 52.4%
제2차 바티칸 공의회를 개최하였던 성 요한 23세 교황은 ‘나’라는 1인칭 주어를 사용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나’라고 할 수 있는 권한은 하느님밖에 없다고 배웠기 때문입니다. 나를 더 생각하면 이웃을 덜 생각하게 됩니다. 이웃을 더 사랑하려면 나를 잊어야 합니다.

또 그는 길을 다닐 때, 눈에 보이는 것들에 정신을 팔지 않으려고 고개를 들지 않았다고 합니다. 하루하루의 삶이 자기 자신과의 작은 싸움이었기에 성인이 되었습니다. 성인은 하루아침에 되는 것이 아니라 하루의 작은 순교들이 모여 완성됩니다.

오늘은 성 김대건 안드레아와 성 정하상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들의 모범을 본받고자 그분들의 순교 정신을 기억하는 날입니다. 그런데 현시대에는 이런 피의 순교를 할 기회가 거의 없습니다. 그래서 그분들의 순교 정신이 멀게만 느껴질 수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순교 없는 신앙생활은 없습니다. 매일의 작은 순교가 모여 목숨까지 아낌없이 내어 놓을 수 있는 큰 순교에 이르는 것입니다.

아침에 조금 일찍 일어나 기도하는 것도 나 자신을 죽이는 작은 순교입니다. 성경 한 줄을 읽으며 주님의 뜻을 찾는 것도 순교입니다. 내 몸이 원하지 않는 것을 하기 때문입니다. 더 사랑하고자 나의 욕구를 죽일 때 그것이 순교인 것입니다.

미국의 유명한 해군 장교는 “세상을 바꾸고 싶습니까? 이불 먼저 개십시오.”라고 말합니다. 순교자들을 기리고 그들을 기쁘게 하고 싶다면, 오늘 하루 단 1분이라도 순교의 삶으로 나아가려는 구체적인 결심을 해야 합니다. 십자가 없는 믿음이 없듯 순교 없는 신앙도 없습니다. 아침에 1분 더 일찍 일어나 성경 한 줄이라도 읽는 작은 순교부터 시작해 보는 것은 어떨까요?

----------------------------------------------------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
매일미사 2019년 9월 22일
  | 09.16
파란색 글자 빨간색 글자 녹색 글자 밑줄 글자 진한 글자 빨간색 테이블 파란색 테이블 녹색 테이블
이름 :   
암호 :
· d41d8cd98f * 왼쪽의 글자중 빨간글자만 순서대로 입력하세요.
 목록보기 스크랩하기  프린터하기
508   [청주] 행복에로의 초대  [1] 357
507   [안동] “예수님께 기도드리면 빨리 나을 거예요.”  [2] 634
506   [원주] 전교는 우리의 마음에서  [3] 351
505   [수원] 선교는 신자들의 진정한 생활의 표양이다.  [7] 1970
504   [서울] 선교는 말과 행동으로 함께 해야 합니다.  [5] 2082
503   [대구] 전교와 신앙인의 삶  [5] 2035
502   [의정부] 불리움에서 파견으로  [5] 2014
501   [수도회] 세상 끝까지 퍼져나가야할 복음  [5] 1719
500   [마산] 신앙보다 더 좋은 선물은 없다  [7] 2193
499   [부산] 그리스도 신앙인은 하늘과 땅을 새롭게 이해합니다.  [9] 2181
498   [군종] 내 삶이 내 메세지  [2] 360
497   [인천] 선교방법은 두 가지  [8] 2186
496   [전주] 믿는 것을 삶으로 증거하자.  [2] 1918
495   [춘천] 전교는 왜 해야 하는 것일까요?  [7] 2252
494   [광주] 우표붙이기  [2] 390
493   [대전] 복음화로 세상에 희망을  [4] 861
492   (녹) 민족들의 복음화를 위한 미사 (전교주일) 독서와 복음  [5] 1925
491   (백) 수호천사 기념일 독서와 복음 (10월 2일)  [1] 12
490   [부산/마산/광주] 한 어린아이의 작은 길  [6] 2671
489   [수도회] 어디사세요  [7] 2227
1 [2][3][4][5][6][7][8][9][10]..[26]  다음
 

 

대축일/명절강론 코너 ( 대축일/명절 미사에 관련된 강론자료입니다... )

 관리자 Profile  l  홈페이지이용안내  l  즐겨찾기추가  l  추천사이트  l  가톨릭검색사이트  l  관리자 E-mail

Copyright ⓒ 2003 - 2005 www.ocatholic.com All rights reserved.   Ver 4.01_0502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