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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 성 김대건 사제와 정하상 동료 순교자들 대축일(9월 20일) 독서와 복음
조회수 | 2,792
작성일 | 07.10.04
우리나라는 18세기 말 이벽을 중심으로 한 실학자들 몇몇의 학문적 연구로 천주교 신앙을 받아들였다. 이들 가운데 이승훈이 1784년 북경에서 ‘베드로’로 세례를 받고 돌아와 신앙 공동체를 이룸으로써 마침내 한국 천주교회가 탄생한 것이다. 선교사의 선교로 시작된 다른 나라들의 교회에 비하면 매우 특이한 일이다. 그러나 당시 한국 사회는 전통을 중시하던 유교 사상에 뿌리를 두고 있어, 그리스도교와 크게 충돌하였다. 결국 조상 제사에 대한 교회의 반대 등으로 천주교는 박해의 시대를 맞이하였다. 신해박해(1791년)를 시작으로 병인박해(1866년)에 이르기까지 일만여 명이 순교하였다.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은 ‘한국 천주교회 200주년’의 해인 1984년 우리나라를 방문하여 이들 순교자들 가운데 한국인 최초의 사제인 김대건 안드레아와 평신도인 정하상 바오로를 비롯한 103명을 시성하였다.

이에 따라 9월 26일의 ‘한국 순교 복자 대축일’을 9월 20일로 옮겨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와 성 정하상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들 대축일’로 지내고 있다. 현재 한국 교회는 ‘주교회의 시복시성 주교특별위원회’를 중심으로 아직 시성되지 못한 순교자들의 시복 시성을 위하여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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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9월 20일 매일미사>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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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1독서 : 하느님께서는 번제물처럼 그들을 받아들이셨다.
▥ 지혜서 3,1-9

1 의인들의 영혼은 하느님의 손안에 있어, 어떠한 고통도 겪지 않을 것이다.
2 어리석은 자들의 눈에는 의인들이 죽은 것처럼 보이고, 그들의 말로가 고난으로 생각되며,
3 우리에게서 떠나는 것이 파멸로 여겨지지만, 그들은 평화를 누리고 있다.
4 사람들이 보기에 의인들이 벌을 받는 것 같지만, 그들은 불사의 희망으로 가득 차 있다.
5 그들은 단련을 조금 받은 뒤 은혜를 크게 얻을 것이다. 하느님께서 그들을 시험하시고, 그들이 당신께 맞갖은 이들임을 아셨기 때문이다.
6 그분께서는 용광로 속의 금처럼 그들을 시험하시고, 번제물처럼 그들을 받아들이셨다.
7 그분께서 그들을 찾아오실 때에 그들은 빛을 내고, 그루터기들만 남은 밭의 불꽃처럼 퍼져 나갈 것이다.
8 그들은 민족들을 통치하고 백성들을 지배할 것이며, 주님께서는 그들을 영원히 다스리실 것이다.
9 주님을 신뢰하는 이들은 진리를 깨닫고, 그분을 믿는 이들은 그분과 함께 사랑 속에 살 것이다. 은총과 자비가 주님의 거룩한 이들에게 주어지고, 그분께서는 선택하신 이들을 돌보시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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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2독서 : 죽음도, 삶도 하느님의 사랑에서 우리를 떼어 놓을 수 없습니다.
▥ 사도 바오로의 로마서 8,31ㄴ-39

형제 여러분,
31 하느님께서 우리 편이신데 누가 우리를 대적하겠습니까?
32 당신의 친아드님마저 아끼지 않으시고 우리 모두를 위하여 내어 주신 분께서, 어찌 그 아드님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베풀어 주지 않으시겠습니까?
33 하느님께 선택된 이들을 누가 고발할 수 있겠습니까? 그들을 의롭게 해 주시는 분은 하느님이십니다.
34 누가 그들을 단죄할 수 있겠습니까? 돌아가셨다가 참으로 되살아나신 분, 또 하느님의 오른쪽에 앉아 계신 분, 그리고 우리를 위하여 간구해 주시는 분이 바로 그리스도 예수님이십니다.
35 무엇이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갈라놓을 수 있겠습니까? 환난입니까? 역경입니까? 박해입니까? 굶주림입니까? 헐벗음입니까? 위험입니까? 칼입니까?
36 이는 성경에 기록된 그대로입니다. “저희는 온종일 당신 때문에 살해되며 도살될 양처럼 여겨집니다.”
37 그러나 우리는 우리를 사랑해 주신 분의 도움에 힘입어 이 모든 것을 이겨 내고도 남습니다. 38 나는 확신합니다. 죽음도, 삶도, 천사도, 권세도, 현재의 것도, 미래의 것도, 권능도,
39 저 높은 곳도, 저 깊은 곳도, 그 밖의 어떠한 피조물도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님에게서 드러난 하느님의 사랑에서 우리를 떼어 놓을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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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복음 : 나 때문에 자기 목숨을 잃는 그 사람은 목숨을 구할 것이다.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 9,23-26

그때에
23 예수님께서 모든 사람에게 말씀하셨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24 정녕 자기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나 때문에 자기 목숨을 잃는 그 사람은 목숨을 구할 것이다.
25 사람이 온 세상을 얻고도 자기 자신을 잃거나 해치게 되면 무슨 소용이 있느냐?
26 누구든지 나와 내 말을 부끄럽게 여기면, 사람의 아들도 자기의 영광과 아버지와 거룩한 천사들의 영광에 싸여 올 때에 그를 부끄럽게 여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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렉시오 디비나에 따른 복음 묵상

그때에 예수님께서 모든 사람에게 말씀하셨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정녕 자기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나 때문에 자기 목숨을 잃는 그 사람은 목숨을 구할 것이다. 사람이 온 세상을 얻고도 자기 자신을 잃거나 해치게 되면 무슨 소용이 있느냐? 누구든지 나와 내 말을 부끄럽게 여기면, 사람의 아들도 자기의 영광과 아버지와 거룩한 천사들의 영광에 싸여 올 때에 그를 부끄럽게 여길 것이다.” (루카 9,23-­26)

► 묵상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못지않게 예수님을 어떻게 따라야 하는가도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는 큰 고민거리입니다. 예수님은 믿어야 할 진리이시기도 하지만, 그 이전에 본받아야 할 인격이시며 따라가야 할 구체적인 길이십니다. 그분을 알려면 그분의 삶과 가르침을 배워야 하고 그분 제자가 되려면 그분이 가신 길을 그대로 따라가야 합니다. 오늘 말씀은 예수님 닮는 삶이 어떤 것인지 그 답을 가르쳐 줍니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9,23). 지금까지 제자들을 단속하는 데 여념이 없으셨다면 이제부터는 군중들 차례입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데는 제자건 군중이건 구별이 없습니다. 또한 그분의 가르침은 예수님을 따르고자 하는 모든 시대, 모든 사람을 향해 열려 있습니다.

다른 무엇에 앞서 자신을 버리라고 당부하십니다. 나를 버리는 것이 무엇일까? 쉽게는 나 자신을 낮추어 보는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나보다 이웃의 가치를 높이 보는 것이기도 합니다. 나를 잃어버릴 각오가 되어 있어야 남이 소중해질 것 같습니다. 내 욕망과 내 이익을 쫓는 것이 가장 나를 위한 삶이라고 여겼던 가치관도 ‘던져 버려야 할 나’입니다. 역설적이게도 자신을 버리는 것이 자아를 실현하는 길일 수도 있겠다 싶습니다. 버리고 비워야 새것이 들어설 수 있고, 그래야 또 예수님으로 채울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분을 따르는 삶에서 분명 고난의 문제는 피해갈 수 없습니다. 십자가는 곧 죽음을 향한 것이었고, 그래서 루카 시대에는 목숨을 내놓는 일까지도 감수해야 했습니다. 날마다 예수님 때문에 지고 가야 할 우리의 십자가는 일상생활에서 겪는 난관과 반대와 모욕 등을 견디는 일부터 시작될 것입니다. 내가 짊어질 십자가는 다름 아닌 나일 수도 있습니다. 자신을 버리고 따른다면 그분을 따르는 십자가의 길이 막막하고 고단하지만은 않을 것입니다.

“정녕 자기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나 때문에 자기 목숨을 잃는 그 사람은 목숨을 구할 것이다”(24절). ‘목숨’이란 것이 살고 죽는 명줄일 수도 있으나, 이 지상의 생명을 능가하는 생명, 죽은 다음에도 보존되는 그 무엇으로서, 영원한 생명일 수도 있고 자아나 인격을 가리키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은 그분과 맺은 인격적 관계를 통해 자아를 실현할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진정 무엇이 내가 살 길인가? 살려고 발버둥치면 칠수록 사는 게 더 힘겨워지고, 움켜쥐면 쥘수록 다 놓친다는 것, 살면서 저절로 깨치게 되는 세상 이치입니다. 안간힘을 쓸수록 자신은 더욱 비참해집니다. 인정받는 일에만 급급하고 배척받는 일은 피하여 자기 목숨을 보존하려는 사람은 결국 자기 영혼을 잃고 맙니다. 현재의 삶에 집착하다 다가올 시대의 더 가치 있는 삶을 놓치게 될 것을 경고하십니다. 예수님과 그분의 메시지를 위해서 얻게 될 영원한 생명이 세상보다 귀한 줄 알아야 합니다. 참으로 값진 삶과 죽음이 어떤 것인지는 예수님만 봐도 잘 알 수 있습니다. 그분을 따르는 것이 결코 잃는 것이 아님을 다시금 일깨워 줍니다.

“사람이 온 세상을 얻고도 자기 자신을 잃거나 해치게 되면 무슨 소용이 있느냐?”(25절) 온 세상을 얻으려다 그 과정에서 자신을 잃는다면, 하느님 대신 세상을 얻는 것이 과연 무슨 소용이 있을까요? 이 세상 것은 죽음 앞에서 아무런 쓸모가 없습니다. 세상의 가치로 얻는 안정은 공허하고 허황되어 곧 허물어지고 맙니다. 정말 소중한 것이 무엇인지 생각해 볼 일입니다.

“누구든지 나와 내 말을 부끄럽게 여기면, 사람의 아들도 자기의 영광과 아버지와 거룩한 천사들의 영광에 싸여 올 때에 그를 부끄럽게 여길 것이다”(26절). 이와 비슷한 말씀이 여러 군데에서 발견됩니다. “누구든지 사람들 앞에서 나를 안다고 증언하면, 사람의 아들도 하느님의 천사들 앞에서 그를 안다고 증언할 것이다. 그러나 사람들 앞에서 나를 모른다고 하는 자는, 사람의 아들도 하느님의 천사들 앞에서 그를 모른다고 할 것이다”(루카 12,8-­9). 바오로는 당당히 외칩니다. “나는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습니다. 복음은 먼저 유다인에게 그리고 그리스인에게까지, 믿는 사람이면 누구에게나 구원을 가져다주는 하느님의 힘이기 때문입니다”(로마 1,16).

아버지의 영광과 거룩한 천사들의 영광에 싸여 오실 사람의 아들은 세말의 심판을 집행하실 분입니다. 하느님을 등진 세상을 사람의 아들은 부끄러워하실 것입니다. 예수님께 냉담하고 교회의 복음 선포를 경멸했던 이들을 부끄럽게 여기실 것입니다.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이곳에 서 있는 이들 가운데에는 죽기 전에 하느님의 나라를 볼 사람들이 더러 있다”(27절). 예수님의 재림을 열렬히 고대하던 초대 교회에, 그리스도의 재림이 지연되더라도 교회 공동체가 복음 선포에 충실할 것을 격려하시는 말씀입니다. 하느님 나라는 자신의 계획과 꿈을 포기하고 목숨의 위험까지 무릅쓰며 예수님을 따른 이들에게 돌아올 축복입니다. 그들은 하느님 나라를 체험하고 부활과 영원한 생명을 체험할 것입니다. ‘참으로’ 하시는 말씀입니다.

아무래도 예수님 따르는 일이 밑지는 장사 같습니다. 고생문이 훤한 데다 세상에서 성공하기는 애초에 글렀습니다. 도대체 왜 이리 겁을 주시는 걸까요. 그런데 곰곰 곱씹어보니 예수님 말씀은 다 우리 잘되라고 하시는 말씀이었습니다. 참다운 인간으로 살기를 바라셨습니다. 진정 우리 모두가 함께 살아남는 길, 인간답게 사는 길, 이 세상이 하느님 나라가 되는 길을 가르쳐 주신 것입니다. 내가 좀 포기하고 양보하면, 내 십자가 내가 지고 떳떳하게 예수님 믿고 그분 가르침대로 산다면, 나도 살고 우리 식구도 살고 이웃도 살고 세상도 산다는 것을요. 버리는 것이 버리는 게 아니고 잃는 것이 잃는 게 아니며 죽는 것이 죽는 게 아니었습니다. 가치를 뒤집으십니다. 그러고 보니 예수님은 실패를 통하여 승리를 거두시는 분이셨네요.

► 강지숙(한님성서연구소 수석 연구원)
  | 09.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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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천주교회는 하느님의 섭리가 순교자들을 통하여 이루어진 신앙 공동체입니다.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와 성 정하상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들 대축일’을 보내면서, 우리는 다시 신앙 선조들의 순교자적인 영성을 기억해 봅니다. 특히 한국 천주교 주교회의 시복시성 주교특별위원회에서는 박해 시대 때 순교한 분들을 발굴하여 시복 시성을 추진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분들이 하루빨리 시복 시성될 수 있도록 기도와 관심을 아끼지 말아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모든 사람에게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고 하시고, 또 “나 때문에 자기 목숨을 잃는 그 사람은 목숨을 구할 것이다. 사람이 온 세상을 얻고도 자기 자신을 잃거나 해치게 되면 무슨 소용이 있느냐?”고 하십니다.

이 땅에는 주님 때문에 치명한 순교자들이 참으로 산을 이루고도 남습니다. 그 많은 순교자들은 생명의 하느님이신 주님을 증언하면서, 하나밖에 없는 목숨을 아낌없이 내놓으신 분들입니다.

교회 공동체는 그러한 순교자들을 기억합니다. 그들의 숭고한 신앙 정신을 기억하고, 그들의 모범을 따르고자 노력합니다. 뿐만 아니라, 주님의 말씀과 성찬의 식탁에서 그분들을 통하여 주님의 사랑을 더욱 깊이 느낍니다. 그러므로 공동체의 구성원인 우리 각자는 순교자들의 신앙적 용기와 결단을 본받아, 이 시대에 참된 신앙인으로 살아갈 것을 다짐해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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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2010년 9월 19일
  | 09.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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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께서 열두 살이 되던 해, 부모가 예루살렘에 올라갔다가 예수님을 잃어버렸을 때입니다. 사흘 만에 부모를 만났는데, 예수님께서는 “왜 저를 찾으셨습니까? 저는 제 아버지의 집에 있어야 하는 줄을 모르셨습니까?”(루카 2,49) 하고 말씀하셨지요. 오랜 시간 애가 탔을 부모의 마음은 헤아리지도 않고 이렇게 말씀하시는 예수님께 성모님께서는 참으로 섭섭하셨을 것 같습니다. 어쩌면 장차 하느님 일을 할 때 부모라는 혈육의 정을 희생할 수밖에 없음을 미리 예고하는 듯합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그때와 비슷한 모습을 보여 주십니다. 어머니가 아들이 보고 싶어 예수님을 찾아왔으나 예수님께서는 어머니를 만나려고도 하지 않고 “내 어머니와 내 형제들은 하느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이 사람들이다.” 하고 말씀하십니다. 아들 예수님의 이런 반응에 성모님께서는 그 옛날 섭섭했던 기억을 다시 떠올리셨을지도 모릅니다.

사실 예수님께서 불효자여서 그런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어머니 마리아를 육정을 넘어서는 진정한 신앙의 어머니가 되게 하시려는 것이었습니다. 장차 아들 예수님에게 닥칠 수난과 죽음을 육친의 정으로 어떻게 견딜 수 있겠습니까? 모자의 육정에만 매달려 더 큰 하느님의 뜻을 바라보지 못하면 어떻게 구세주의 어머니가 되실 수 있었겠습니까? 예수님께서는 제자들과 모인 사람들에게 당신과 어머니의 관계가 육정에 매인 관계가 아니라 하느님의 큰 뜻을 이루는 관계임을 보여 주시는 것입니다.

가족 간의 혈육의 정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주님 말씀을 듣고 실천하는 주님의 가족으로 거듭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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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2011년 9월 20일
  | 09.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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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한국의 순교자들을 기억하는 날입니다. 충남 홍성 출신으로 1801년 신유박해 때에 붙잡혀 순교한 황일광 시몬은 평소 이런 말을 하였습니다. “나의 이러한 신분에도 사람들이 너무나 점잖게 대해 주니, 천당은 이 세상에 하나가 있고, 후세에 하나가 있음이 분명하다.” 그는 백정 출신으로 멸시만 당하며 살다가 세례를 받게 됩니다. 황일광 시몬은 사회적 신분의 장벽을 넘어 모두가 같은 형제자매로 부르는 신앙 공동체에서 ‘새 하늘과 새 땅’을 체험합니다.

순교자들은 이 새로운 세상을 위해 그들의 목숨을 바쳤습니다. 그들은 유다교 지도자들을 거슬러 하느님의 일을 실천하다가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의 뒤를 따른 것입니다. 그들은 바오로 사도의 말씀처럼 이 세상의 그 무엇도 ‘하느님의 사랑에서 우리를 떼어놓을 수 없다.’(로마 8,39 참조)는 사실을 믿으며 숱한 고통을 겪고 목숨까지도 잃었습니다. 우리의 신앙은 과분하게도 이렇게 전해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따르려면 자기 자신을 버리고 날마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자기 자신을 버린다는 것은 이기심과 욕심, 세속적인 생각을 버리고 남들의 처지를 헤아리는 자세입니다. 그리고 자기 십자가를 진다는 것은 주님께서 우리 삶에 주신 모든 책임을 온전히 받아들이는 자세입니다. 자기 자신을 버리고 날마다 우리에게 주어진 십자가를 기꺼이 지는 자세, 이것이 바로 오늘의 우리가 할 수 있는 순교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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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2012년 9월 20일
  | 09.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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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한국 순교 성인의 대축일입니다. 이 땅의 103위 순교 성인은 오늘 복음에서 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그대로 믿고 실천하신 분들이라 할 수 있습니다. “정녕 자기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나 때문에 자기 목숨을 잃는 그 사람은 목숨을 구할 것이다.”

그런데 종교의 자유가 보장된 오늘의 우리에게는 선조들의 영웅적인 순교 이야기가 가슴 깊이 와 닿지 않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예수님의 말씀을 우리가 어떻게 실천할 수 있을까요?

오늘 복음 말씀에 나오는 ‘목숨’이라는 말은 영어로 ‘라이프’(life)입니다. 이 ‘라이프’는 ‘생명’ 또는 ‘목숨’으로 번역할 수도 있지만, ‘인생’이나 ‘생활’이라고도 번역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면에서 오늘의 말씀을 다음과 같이 두 가지로 되새겨 볼 수도 있을 것입니다.

첫 번째로 ‘정녕 나 때문에 자기 인생을 바친 사람은 그 인생을 살리게 되는 것이다.’라고 새겨봅니다. 이는 수도자의 삶을 가리킨다고 볼 수 있습니다. 자신의 삶을 온전히 바쳐 주님을 증언하는 이가 바로 수도자이기 때문입니다. 두 번째로 ‘정녕 나 때문에 자기 생활을 바친 사람은 그 생활을 살리게 되는 것이다.’라는 생각입니다. 이 경우에는 우리 교우들, 곧 평신도들의 삶을 새겨볼 수 있습니다. 여가 활동이나 취미 생활 등 삶의 여러 부분에서 자신을 희생하며 주님을 증언하기 때문입니다.

공인된 말은 아니지만, 이 땅의 수많은 순교자들처럼 목숨을 바쳐 신앙을 지킨 것을 ‘적색 순교’라고 표현합니다. 또한 일생을 바쳐 신앙을 증언한 삶을 ‘백색 순교’, 일상생활을 주님께 봉헌하며 희생하는 삶을 ‘녹색 순교’라고도 합니다.

종교 박해가 없는 시대에 살고 있는 우리는 순교의 또 다른 의미를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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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2013년 9월 20일
  | 09.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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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기리는 한국의 순교 성인들은 하느님에 대한 철저한 헌신을 통하여 이 땅에 새로운 삶의 모습을 보여 준 분들입니다. 그분들의 죽음만이 아니라 신앙을 통해 깨닫고 실천했던 복음적 삶 또한 당시의 사회적 한계와 모순을 뛰어넘는 위대한 것이었습니다.

이러한 점을 지난봄 순교 성인에 대한 매혹적인 연구서 한 권을 읽으면서 다시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국어 국문학과 교수인 이 책의 저자는 천주교 신자가 아님에도 유중철 요한과 함께 동정 부부로 살다가 순교한 이순이 루갈다의 옥중 편지에서 깊은 감동을 받고 그것을 박해 당시의 역사적 문화적 사회적 상황과 함께 연구하게 되었다고 밝힙니다. 저자는 당시 사회가 몰랐던 새롭고 위대한 인간상이 순교자들과 함께 등장했음을 이순이의 글에서 발견한 것은 참으로 경이로운 일이었다며 이렇게 고백합니다.

“이순이는 죽음을 목전에 두고 차분하고 담담하게 자신이 겪은 일을 적고, 슬퍼할 친정 식구들을 위로하는 편지를 썼다. 처음 이 글을 읽었을 때의 감동을 잊지 못한다. 순교자의 자기를 넘어선 숭고한 정신세계에 마음이 크게 울렸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조선 시대 문학 전공자로서 조선 사회에 나타난 새로운 인간형을 보았다. 현세를 넘어서서 천상을 지향하면서도, 현실에서도 누구보다 성실했던 사람, 어떤 경우에도 감사를 잊지 않았던 사람. 이 새로운 인간형에 대해 교회는 주목하지 않았고 교회 밖은 무관심했다”(정병설, 『죽음을 넘어서: 순교자 이순이의 옥중 편지』).

순교자들의 장렬한 죽음은 복음으로 변화된 새로운 삶의 완성이었습니다. 그것은 교회만이 아니라 이 땅의 참된 인간화를 위한 한 알의 밀알과도 같은 봉헌이었습니다. 순교자들의 후예로서 우리 또한 사회의 새로운 변화를 위하여 복음의 가치를 증언하는 이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그것이 진정한 순교 정신의 계승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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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2014년 9월 20일
  | 09.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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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생물에는 한계가 있듯이 우리 인간도 한계를 지니고 사는데, 그것이 바로 죽음이겠지요. 그러나 우리는 죽음이 삶의 한 부분이며 삶을 완성시키는 것이라는 사실도 알고 있습니다. 죽음이 하나의 현실이므로, 이것 때문에 두려워하거나 위축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죽음을 통하여 마지막 가능성을 실현할 수 있다는 생각으로 삶을 더욱 보람 있고 알차게 살아야 할 것입니다.

인생의 한계를 잘 알고 있던 우리 순교자들은 누구보다도 삶을 아끼고 사랑하던 분들이었지만, 죽음을 하느님과 하느님 나라를 위한 제2의 세례로 받아들여 기꺼이 순교의 길을 선택하였습니다.

생명에 대한 애착이야말로 가장 본능적인 것인데, 하느님을 위하여 이것마저도 기꺼이 포기하고 순교하신 우리 선조들은 참으로 장하신 분들입니다. 103위 성인 가운데는 열네 살짜리 어린이에서 여든 살 고령에 이르는 분도 계시고, 하인에서 종3품 고관도 있었습니다. 교회 직위도 주교에서 평신도 어린이에 이르기까지 다양하였습니다. 학자들이 있는가 하면 아무것도 배운 것이 없는 촌부도 있었습니다.

열네 살밖에 되지 않는 꼬마가 어떻게 순교할 수 있었을까! 고령의 노인이 어떻게 순교의 고통을 참아낼 수 있었을까! 하느님께서 함께하셨기 때문에 그분의 도움으로 이 모든 것이 가능했습니다. 그래서 “성인은 우연히 만들어지지 않으며, 순교자들은 인간의 선택이 아니라 하느님의 선택으로 만들어진다.”, “성령은 순교자들의 영이시다.”라는 토마스 머튼의 고백이 마음에 와 닿습니다.

현대는 피를 흘리는 순교보다는 땀과 노력, 봉사와 희생이라는 새로운 의미의 ‘백색 순교’를 요구합니다. 결혼과 가정생활에도 피를 흘리지 않는 순교가 요청되고 있습니다. 하느님과 진실과 정의를 위하여 평신도 신분으로 마치 수도자처럼 살아가는 분들도 종종 만나게 됩니다. 이분들의 삶이야말로 새로운 의미의 백색 순교, 순교자의 여정이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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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2015년 9월 20일
  | 09.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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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께서는 “어떠한 종도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다.”(루카 16,13)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에게 하느님과 재물 중 하나를 선택하라고 하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아마도 우리는 입으로 하느님을 선택한다고 말하겠지만, 마음속에서는 많은 유혹과 핑계가 생겨날 것입니다.

우리가 오늘 경축하는 103위 순교 성인들은 하느님을 주인으로 섬기는 징표로 자신의 목숨을 내 놓으신 분들입니다. 그중에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은 만 25세의 나이로 사목 생활의 꽃도 피우지 못한 채 자신의 목숨을 ‘천주님’께 바치셨습니다. 성인은 죽기 전에 이렇게 설파하셨습니다. “내가 외국 사람들과 통한 것은 오직 천주님을 위해서입니다. 나는 지금 그 천주님을 위해 죽어 갑니다. 그러나 여기서 바로 나에게 영원한 생명이 시작됩니다.”

복자 정약종 아우구스티노의 아들인 성 정하상 바오로는 한국 천주교회의 재건을 위해 투신한 평신도입니다. 성인은 북경 왕래를 아홉 차례, 의주 변문까지는 열한 차례를 왕복하며 유방제 신부, 성 모방 신부, 성 샤스탕 신부, 성 앵베르 주교를 영입하였습니다.

103위 순교 성인들은 임금보다 더 큰 임금을 선택하여 충성을 바치고, 부모보다 더 큰 부모를 섬겨 효도를 다한 하느님의 자녀들입니다. 그들은 ‘대군 대부’이신 하느님을 믿는다고 고백하여 영원한 생명의 표지를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보여 주었습니다. 영원한 생명을 얻으려면 하느님을 믿어야 한다고 선포하였습니다. 죽음도 그들을 하느님의 사랑에서 떼어 놓을 수 없었습니다. 103위 순교 성인들이 보여 준 하느님의 사랑을 마음에 지닙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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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류한영 베드로 신부
매일미사 2016년 9월 18일
  | 09.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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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사의 희망’, 죽음도 꺾지 못하는 희망이 있다면 우리는 그 희망에 목숨을 걸 수 있을까요? 그런 희망이 있다면 그것은 단순히 생각이나 기대일 수는 없습니다. 확고한 신념이 생기려면 바오로 사도처럼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직접 뵙고, 수많은 역경과 고난 속에서도 주님께서 지켜 주고 계신다는 체험이 필요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그분의 뒤를 따라 불사의 희망, 곧 영원한 생명에 대한 확신을 얻으려면, “자신을 버리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고 가르치십니다. 누구나 저마다 짊어져야 할 삶의 십자가가 있습니다. 책임져야 할 가족, 살기 위해 다녀야 하는 직장, 보기 싫지만 만나야 하는 사람들, 힘겨운 학업, 떨쳐 버리지 못하는 지병, 경제적인 빈곤, 희망 없는 인생, 맞이해야 할 두려운 죽음에 이르기까지 자신이 짊어진 십자가의 무게가 가장 크게 다가옵니다.

배교를 강요하는 이들의 칼 앞에 당당하게 신앙을 증언한 103위 한국 순교 성인들이라고 이런 인생의 십자가가 없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마지막 순간까지 순교자들이 배교의 유혹을 이겨 낼 수 있었던 것은, ‘날마다’ 자신들의 십자가를 짊어지는 고행 속에서도 ‘불사의 희망’, 영원한 생명에 대한 확신을 버리지 않았기 때문일 것입니다.

우리 시대에는 피를 흘리는 순교는 없지만, 삶의 무게를 짊어져야 할 땀과 희생의 순교는 요청됩니다. 한두 번 순교하는 마음으로 참고 살 수는 있지만, ‘날마다’ 십자가를 지기란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삶은 수행의 연속이고, 그 수행의 끝 날에 세상의 그 어떤 것도 우리를 떼어 놓을 수 없는 ‘하느님의 사랑’의 품에 안기는 것이 우리의 희망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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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송용민 사도 요한 신부
매일미사 2017년 9월 17일
  | 09.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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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천주교회는 역사가 짧지만 수많은 순교자와 함께 신앙의 여정을 걷고 있습니다. 순교자들은 신앙을 받아들임으로써 무엇을 얻었습니까? 오히려 명예와 재산, 가족마저 잃지 않았습니까? 결국, 자신의 목숨까지 잃고 말지요. 그런데 도대체 무엇을 얻으려 했던 것입니까?

당시 사회는 상당히 혼란스러웠지요. 오랫동안 사회를 지탱해 주던 가치관이 무너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많은 이들이 새로운 가치관, 새로운 정신적 지주를 갈망하고 있었습니다. ‘참된 삶은 무엇인가?’ ‘진정한 인간의 길이란 어떤 것인가?’ 이런 문제에 직면해 있던 그들은 그리스도교에서 해답을 찾은 것입니다.

그 옛날, 우리 신앙 선조들이 복음을 접하면서 가장 깊이 매료되었던 점은 인간 존중 사상과 인간 평등사상이었습니다. 바로 이 점 때문에 복음이 빠른 시간 안에 널리 퍼질 수 있었지요.

그러나 복음이 전해진 지 몇 백 년이 지났음에도 우리 사회는 여전히 혼란에 빠져 있습니다. 복음의 가치와 대립하는 살인, 자살, 낙태 등 생명 경시 풍조, 인간 복제, 유전자 조작, 환경 파괴, 물질주의 등이 널리 확산되고 있습니다.

그 옛날 신앙 선조들은 잘못된 가치관을 버리고, 참된 삶과 인간의 존엄성을 지키려고 목숨까지 바쳤습니다. 신앙의 후손인 우리가 인간 존중의 정신을 회복시키고, 이를 확산시켜 나가야 합니다. 이런 노력 속에서 세상이 지니고 있는 많은 문제는 하나하나 풀려 나갈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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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김준철 토마스 아퀴나스 신부
매일미사 2018년 9월 23일
  | 09.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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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차 바티칸 공의회를 개최하였던 성 요한 23세 교황은 ‘나’라는 1인칭 주어를 사용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나’라고 할 수 있는 권한은 하느님밖에 없다고 배웠기 때문입니다. 나를 더 생각하면 이웃을 덜 생각하게 됩니다. 이웃을 더 사랑하려면 나를 잊어야 합니다.

또 그는 길을 다닐 때, 눈에 보이는 것들에 정신을 팔지 않으려고 고개를 들지 않았다고 합니다. 하루하루의 삶이 자기 자신과의 작은 싸움이었기에 성인이 되었습니다. 성인은 하루아침에 되는 것이 아니라 하루의 작은 순교들이 모여 완성됩니다.

오늘은 성 김대건 안드레아와 성 정하상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들의 모범을 본받고자 그분들의 순교 정신을 기억하는 날입니다. 그런데 현시대에는 이런 피의 순교를 할 기회가 거의 없습니다. 그래서 그분들의 순교 정신이 멀게만 느껴질 수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순교 없는 신앙생활은 없습니다. 매일의 작은 순교가 모여 목숨까지 아낌없이 내어 놓을 수 있는 큰 순교에 이르는 것입니다.

아침에 조금 일찍 일어나 기도하는 것도 나 자신을 죽이는 작은 순교입니다. 성경 한 줄을 읽으며 주님의 뜻을 찾는 것도 순교입니다. 내 몸이 원하지 않는 것을 하기 때문입니다. 더 사랑하고자 나의 욕구를 죽일 때 그것이 순교인 것입니다.

미국의 유명한 해군 장교는 “세상을 바꾸고 싶습니까? 이불 먼저 개십시오.”라고 말합니다. 순교자들을 기리고 그들을 기쁘게 하고 싶다면, 오늘 하루 단 1분이라도 순교의 삶으로 나아가려는 구체적인 결심을 해야 합니다. 십자가 없는 믿음이 없듯 순교 없는 신앙도 없습니다. 아침에 1분 더 일찍 일어나 성경 한 줄이라도 읽는 작은 순교부터 시작해 보는 것은 어떨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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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
매일미사 2019년 9월 22일
  | 09.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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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카 복음에서 주님을 따르는 십자가의 길은 일상입니다.
예수님 말씀에 ‘날마다’라는 말마디가 추가되는 까닭입니다. 특정한 순간의 어려움을 겪는 것이 십자가의 길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살면서 마주치는 수많은 어려움들은, 실제로는 십자가와 무관한 경우가 많지요. 삶의 처세를 위한 고난을 예수님의 십자가와 엮는 것은, 꽤나 부끄러운 일입니다.

무엇보다 십자가는 예수님을 위하고,
예수님께서 위하신 이웃을 향하는 삶에서 시작합니다. 하느님 사랑이 이웃 사랑과 다르지 않다고 수없이 듣고 들어 온 신앙인들에게, 십자가는 낯선 이들과의 연대, 불편한 사람과의 동행, 부조리한 사회에 대한 비판을 겸한 공동체적 삶의 지렛대가 되어야 합니다. 물론 이 모든 것에 앞서서, 뜻이 달라도, 부족하고 어눌하더라도 제 이웃을 사랑하겠노라는 다짐은 십자가를 짊어지기 전에 점검해 보아야 할 삶의 기본입니다.

일상이 녹록하지 않다는 사실은 세상 처음부터 그러하였을 것입니다.
원시 시대든, 인공 지능(AI)이 인간을 지배할 것 같은 미래의 어느 시간이든 사는 것이 왜 안 힘들겠습니까. 다만, 시대의 순간순간 함께하는 삶의 이질성에 질문을 던지고 그 질문에 함께 답할 이웃이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는 이와, 제 삶에만 천착하여 다른 삶에 대한 질문은커녕 제 삶의 의미마저 속세의 천박한 유혹에 저당 잡힌 이들의 간극은 천국과 지옥보다 더 큰 것이겠지요. 십자가의 삶은 타인의 삶 안에서 제 삶의 가치를 깨닫는 이들에게 주어지는 선물입니다.

오늘 우리가 기억하는 한국의 순교자들은 큰 선물을 미리 받은 이들입니다.
‘그들의 희생이 대단하다. 그들의 순교를 감히 누가 따를 수 있겠는가?’ 하는 정도로만 오늘을 기억한다면, 그것은 십자가를 질 마음이 우리에게 없다는 방증입니다.

순교자들을 기억하면서 부러워해야겠습니다.
부러워서 나도 얼른 그 선물을 움켜쥐고 싶어야겠습니다. 십자가를 진다는 것이 설레는 기쁨이 되어야겠습니다. 그러기 위해서 얼른 이웃을 찾아 나서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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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대교구 박병규 요한 보스코 신부
매일미사 2020년 9월 20일
  | 09.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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