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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우리 시대의 순교
조회수 | 3,875
작성일 | 07.10.04
그리스도인이란 누구인가? 그는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을 그리스도요, 주님으로 고백하는 사람이다. 그리고 그는 자기를 버리고 날마다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의 뒤를 따르는 사람이다. 한국 순교자 대축일을 맞이하여 한국 교회는 예수님의 십자가의 길을 가장 온전하게 뒤따른 103명의 순교 성인을 기리고 있다. 순교자들은 어떻게 그 혹독한 고문 앞에서도 신앙을 고수할 수 있었을까? 성 김 대건 안드레아 신부님은 옥중서간에서 “천주를 위하여 나는 죽습니다. 바야흐로 영원한 생명이 내게 시작되려 합니다. 여러분이 죽은 뒤에 행복해지려면 천주를 믿으십시오”라고 말씀하셨다. 여기서 성인은 하느님을 위하여 그리고 영원한 생명을 위하여 기꺼이 한 목숨을 바쳤음을 알 수 있다. 순교자들은 “온 세상을 얻고도 자기 자신을 잃는다면 무슨 소용이냐”는 오늘 복음의 말씀을 가장 올곧게 실천한 분들이다. 이처럼 순교 신앙의 본질은 하느님 고백과 영원한 생명에 대한 그리움으로 요약된다.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은 하느님을 ‘임자’라 부르고 그분을 천지의 주인으로 섬기며 그분이 주실 영원한 생명을 한 점 의혹 없이 믿었기에 박해를 임자가 주시는 시련으로 달게 받았다.

순교자들의 열절한 신앙은 우리의 졸고 있는 신앙을 일깨우고 우리의 나약한 신앙에 경종을 울린다. 우리의 신앙은 현세 중심적이고 개인주의적인 경향을 띠기 일쑤이다. 우리는 신앙을 통해 인간적인 행복을 추구하거나 아니면 각자 마음의 평화를 찾는 것에 만족하는 경우가 많다. 세상살이에서 지친 마음에 위로를 받고 마음의 평화를 구하는 것은 분명 하느님 신앙으로 얻을 수 있는 소중한 은총이다. 그러나 그보다 더욱 중요한 것은 예수님이 선포하신 하느님 나라와 영원한 생명에 대한 믿음과 투신이다. 우리는 일상 안에 매몰되어 초월적이고 영원한 것에 대한 감수성을 잃어버리고 살아간다. 순교 신앙은 신앙의 목표와 이에 도달하는 방법의 치열함을 우리에게 일러 준다. “하느님의 사랑에서 우리를 떼어놓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하신 사도 바오로의 말씀처럼 순교자들이 경험한 것은 온몸이 찢겨나가는 혹독한 고통 속에서 더욱 피어나는 하느님의 사랑과 영원한 생명에 대한 확신이었다.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를 선포한다는 것은 능력과 성공을 추구하는 이들에게는 걸림돌이고 지혜를 찾는 이들에게는 어리석음이다(1코린 1,22-23 참조). 믿는 이들 가운데서도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심히 부담스러워하거나 부끄러워하는 이들이 있고 십자가를 단지 하나의 장식품으로 삼기도 한다. 그러나 예수님의 십자가는 키레네의 시몬처럼 모든 그리스도인이 나누어져야 할 나의 십자가이기도 하다. 물론 지금은 피의 순교시대가 아니다. 그 대신 예수님은 자기를 버리고 날마다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주님의 뒤를 뒤따르는 땀과 눈물의 순교를 요구하고 계신다.

서울대교구 백운철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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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때문에 자기 목숨을 잃는 사람

오늘은 성 김대건 안드레아와 성 정하상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 대축일입니다. 김대건 안드레아 성인은 최초로 한국인 사제가 되신 분으로 25세에 신부가 되어서 26세에 돌아가신 분입니다. 또 정하상 바오로 성인은 박해 시대 때 신부님들을 모시고 다니면서 복사도 하고 길 안내도 했던 훌륭한 평신도로서 45세의 나이에 역시 돌아가셨습니다. 두 분 다 목이 잘려 돌아가셨는데 오늘이 이 분들과 또 그 밖의 동료 순교자들을 기념하는 대축일입니다.

어떤 분들을 우리는 순교자라고 부릅니까? 하느님을 위해서 목숨을 바친 사람을 말합니다. 김대건 안드레아, 정하상 바오로, 그리고 그 밖의 순교자들과 103명의 성인들 축일이 오늘 순교자 대축일입니다. 그런데 그 많은 사람들이 왜 죽었을까 하고 의아해 하는 사람들이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지금은 천주교를 믿는다고 감옥에 갇히거나 처형되는 경우는 없습니다. 종교의 자유가 있는 이 시대에는 특정 종교를 믿는다고 목이 잘린다거나 감옥에 갇히는 일은 없지요.

우리나라에 처음 천주교가 들어왔을 때 뿌리 깊은 유교 사회에서 천주교는 대대적으로 박해를 받았고 배교하지 않은 사람은 모두 처형되었습니다. 불과 200여 년 전의 역사입니다. 처음으로 우리나라에 천주교가 알려지기 시작한 해는 1784년입니다. 일반적으로 천주교가 들어올 때는 선교사들이 먼저 그 나라에 들어오게 됩니다. 선교사들이 들어와서 선교를 하고 차차 신자의 수가 늘어나기 시작하는 것이지요. 그런데 우리나라에는 선교사가 단 한 명도 들어오지 않았습니다. 중국에도 선교사는 파견되었고 일본에도 들어갔지만 천주교가 시작된 1784년의 우리나라에는 파견된 선교사는 없었습니다.

그럼 어떻게 천주교가 들어올 수 있었을까요? 우리나라에는 선교사가 들어오기 전에 먼저 천주교 관련 서적이 들어왔습니다. 1700년대 우리나라는 새로운 문화나 문물을 모두 중국으로부터 받아들이고 있었습니다. 중국을 왕래하던 사람들이 그곳의 여러 새로운 문물을 우리나라에 가지고 왔던 것이지요. 그 때 끼어 들어온 책이 바로 이탈리아 예수회 소속의 마태오 릿치 신부가 쓴 「천주실의」라는 책이었습니다. 이 책은 북경에 성당을 세운 마태오 릿치 신부가 중국 사람들을 위한 예비신자 교리서로 쓴 책입니다. 당시 우리나라 학자들은 오랫동안 유교 사회 속에서 특정 계급만 그 지위를 누리는 사회 상황과 공리공론에만 빠져있는 정치권 등에 싫증을 느끼고 새로운 학문을 추구하고 있었던 터였습니다. 이 때 그들의 눈에 띈 책이 이 「천주실의」였습니다. 이 책에는 이제까지와는 전혀 다른 새로운 가르침과 새로운 우주관, 새로운 인생관이 펼쳐져 있었지요. 그 당시 내노라하는 학자들은 큰 관심을 가지고 천진암 󰡐주어사󰡑라는 암자에 모여 강학회를 열기 시작합니다. 우리 시대로 보면 세미나 같은 모임을 갖게 된 것입니다.

천주학은 공부를 할수록 이들에게 참으로 놀라운 세계를 제시해 주었습니다. 전혀 접해보지 못했던 우주관, 신관, 인간관을 접하면서 이들은 점점 천주학에 매료되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더욱 공부에 매진하게 되지요. 그런데 책이 없는 겁니다. 관련 서적도 없고 그 학문을 알고 있는 사람도 찾기 어려웠습니다. 마침 그 때 그들과 함께 했던 󰡐이승훈󰡑이라는 사람이 중국 사절단인 동지사의 일원으로 중국으로 가게 되었습니다. 이승훈은 북경에 있던 예수회 소속 그라몽 신부를 찾아가 5개월 정도 예비자 교리겸 천주교에 관련된 지식을 배우고 󰡐베드로󰡑라는 이름으로 세례를 받습니다. 한국인 최초의 천주교 신자가 탄생한 것입니다.

이승훈은 베드로로 세례를 받고 교회의 많은 관련 서적을 가지고 1784년 봄에 귀국을 하였습니다. 이제 이들 학자들의 모임은 천진암 주어사에서 지금의 명동 성당 자리인 김범우의 집으로 자리를 옮겨 󰡐명례방󰡑이라는 이름의 모임으로 더욱 새롭게 자리를 잡아갔습니다. 당시 유명한 학자들이었던 이벽, 권일신, 정약전 형제 등 많은 사람들이 모여 공부를 하기 시작했는데 공부를 하면 할수록 천주학은 이들을 사로잡아 이제 천주학은 학문의 차원을 넘어서 신앙의 차원으로 발전하게 되었습니다. 이들은 중국에서 많은 것을 보고 배웠던 이승훈 베드로를 주축으로 주일을 지키고 미사를 드리며 고백성사를 집행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선무당이 사람을 잡는다고 자기들 식으로 천주교를 세워가기 시작한 것이지요. 이들은 자기들끼리 주교와 신부를 뽑고 미사도 하고 성사도 주었습니다. 이것을 가성직(假聖職) 제도라고 합니다. 놀랍지요. 이들은 선교사도 없이 스스로 공부하고 깨우쳐서 교회를 열어간 것입니다.

이렇게 목자 없이 교회를 창설한 학자들은 교리 연구에 더욱 노력하고 공부에 힘을 쏟는 가운데 몇 가지 의문을 갖게 되었습니다. 사제는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 것이지요. 즉 자기들이 거행하는 성사 집전의 타당성에 의문이 생기기 시작한 것입니다. 또 한가지, 제사에 관한 문제가 풀리지 않는 의문으로 남았습니다. 제사를 지내서는 안 된다는 교리가 당시 유교 사회와는 너무나도 어긋난 교리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 문제로 고심하던 그들은 북경에 있는 주교에게 문의를 하기로 하고 편지를 써서 보냈습니다.

󰡒우리가 지금 이렇게 시행하고 있는데 계속 해도 무방하겠습니까?󰡓

북경의 주교는 두 가지 모두 부당하다고 금지시키는 답변을 보내왔습니다. 이에 순종한 학자들은 이제까지 행했던 모든 성사의 집행을 중단하고 성직자의 파견을 애타게 요청하게 됩니다. 이렇게 이제와는 달리 모든 제사를 금지하게 되니까 학문에 매료되었던 양반사회 학자들이 슬슬 빠져나가고, 많은 사람들이 천주교를 신앙으로 받아들이기를 두려워하였습니다.

이 때 전라도 진산 지방에 살고 있던 윤지충과 권상연 형제가 제사를 지내려고 온 가문이 모여 있는 자리에서 하느님의 뜻에 어긋난다며 신주를 불살라 버리는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일파만파로 나라는 이들의 반 유교적인 행동에 큰 난리가 나고, 조상의 신주를 불사르고 제사를 거부한 이들 형제는 나라의 기강을 무너뜨린 죄인이 되어 귀향을 가고 처형을 받기에 이르렀습니다. 천주교에 대해서 가뜩이나 경계를 늦추지 않았던 나라에서는 이 사건을 계기로 천주교를 사교, 즉 사악한 종교로 단정하고 이를 믿는 사람은 모두 다 잡아서 감옥에 가두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리고 감옥에서도 배교를 하지 않으면 목을 잘라 죽이라는 법을 정하고 본보기를 보이기 위해 목을 잘라 장대에 걸어놓는 국문효수의 극형을 내리기까지 합니다. 천주교를 믿으면 이렇게 된다는 것을 사람들에게 알리기 위한 극형이었지요.

이런 박해는 100년 동안이나 계속되었습니다. 1886년 한불통상 조약으로 신앙의 자유가 공식적으로 선포되기까지 100년 동안 박해는 끊임없이 이어졌고, 천주교 신자는 만 명이 넘게 죽어갔습니다. 놀라운 것은 이승훈 베드로 단 1명으로 시작된 천주교 신앙이 만 명이 죽어도 계속해서 퍼져 나갔다는 사실입니다. 백년의 박해 기간 동안 국법으로 사형이라는 극형을 내렸음에도 불구하고 그리고 수많은 사람을 잡아 가두고 목숨을 빼앗았음에도 불구하고 천주교의 세력은 꺾이지 않았습니다. 이것이 신비입니다. 천주교를 믿는 그 자체가 바로 패가망신과 죽음으로 이어졌는데도 어떻게 그렇게 신자의 수는 늘어만 갔을까요? 지금 여러분들에게 천주교를 믿으면 당장 사형이라고 했을 때 다음 주 이 자리에 몇 분이나 나올지 궁금합니다.

더군다나 천주교를 믿으면 바로 극형에 처해지는 이 상황에서 믿지 않는 사람에게 천주교를 믿으라고 얘기할 수 있겠습니까? 아마 미친 소리 하지 말라고 근처에도 오지 못하게 할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그 많은 신자들이 죽음을 무릅쓰고 신앙을 갖는 결단을 내렸는지 놀라울 뿐입니다. 이유는 있습니다. 죽어가면서도 전혀 다른 차원의 죽음을 신자들이 살았기 때문입니다.

죽음에도 종류가 많습니다. 죽는다고 다 똑같은 죽음이 아닙니다. 불의의 사고로 인한 죽음이나, 절망에 빠져 스스로 목숨을 끊는 죽음은 한 많은 죽음일 것입니다. 속된 말로 이런 죽음은 개죽음일 수밖에 없는 것이지요. 그러나 정말 사랑하는 자식을 위해서, 아내와 남편을 위해서, 부모를 위해서, 또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서 죽는다는 것은 이런 헛된 죽음과는 전혀 다른 행복한 죽음일 것입니다. 그를 위해서 죽을 수 있을 만큼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은 너무나 행복한 일일 것입니다. 죽어 가는 그는 얼마나 행복한 사람입니까? 차원이 다릅니다. 이러한 죽음을 맞이하는데 얼굴이 찌그러지겠습니까? 죽기 싫다고 발버둥을 치겠습니까? 나를 통해서 내 자녀가 살고 사랑하는 사람이 살 수 있다면 너무나도 기쁘게 죽음을 택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정도가 아니라 우리 신앙의 순교 선조들은 하느님을 위해서 또 영생을 위해서 자신의 목숨을 하느님께 봉헌한 사람들입니다. 이것을 보고 사람들이 놀란 것이지요. 천주교를 믿는다는 그 자체가 죽음인데 죽음을 무릅쓰고 신앙을 택하였고, 휘광이가 휘두르는 칼날 아래 너무나도 태연한 모습으로 오히려 하느님을 찬양하는 그 신자들의 모습 속에서 사람으로는 느껴지지 않는 힘을 보았던 것입니다. 정말 하느님이 그들 안에 함께 하신다는 것을 볼 수 있었기 때문에 천주교의 불길은 끊이지 않았던 것이지요. 사람의 힘이 아니라 성령의 힘으로 신앙의 불길은 번져 갔던 것입니다.

순교자들은 오로지 하느님만을 위해서 모든 것을 바쳤습니다. 선교사들도 모든 것을 바쳐서 신자들과 하느님을 위해서 살았습니다. 그 당시 외국인 선교사로 프랑스인 신부들이 우리나라에 들어왔는데 잡히면 바로 사형에 처해지는 위급한 상황에서 위험을 조금이나마 피하기 위해 상복을 입게 하였습니다. 상주는 얼굴을 들추어볼 수 없는 사회 풍습을 이용하여 숨어 다니게 한 것이지요. 충청도 어느 산골에서 미사가 있다고 하면 전국에서 신자들이 며칠을 걸어 걸어서 찾아옵니다. 산 속을 누비며 밤길을 숨어서 찾아와 미사를 드리고 성체를 모시고는 그 힘으로 또 어려운 난관을 극복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들은 이렇게 지킨 신앙의 씨앗을 자손들에게 물려주었고 이것이 바로 지금 우리가 󰡒순교자 믿음 본받아 죽도록 충성하겠다.󰡓고 노래하는 우리 신앙 선조들의 믿음인 것입니다. 전 세계적으로 보아도 이렇게 자발적으로 발생하고 성장한 신앙의 역사는 없습니다. 이토록 놀라운 신앙의 선조를 모시고 있는 신앙인이 바로 우리들 자신입니다. 이런 신앙을 본받자고 9월을 순교자의 달로 정하고 우리는 선조들의 믿음을 본받자고 노래하고 기도합니다.

그런데 지금 우리의 신심은 부끄럽기 짝이 없습니다. 비만 와도 미사에 신자들 수가 줄어드는 형편입니다. 축구 중계가 있어도 신자들이 보이지 않습니다. 또 날씨가 좋으면 놀러 가는 신자들 때문에 성당 안은 여기저기 비어 있습니다. 그러면서 입으로는 󰡒순교자 믿음 본받아 충성하리라.󰡓고 노래하고 있으니 얼마나 부끄러운 일입니까? 뿐만 아니라 우리는 작은 유혹에도 흔들리고 게으름에도 흔들리며, 너무나도 많은 사람들이 하느님과 세상의 선택에 있어서 쉽게 신앙이 무너지고 마는 것이 우리가 살고 있는 요즈음의 세태입니다. 순교와 배교는 너무나도 간단합니다. 하느님을 택하면 순교이고 재물을 택하고 세상의 유혹에 무너지면 배교입니다.

우리는 하느님을 믿으면서 또 세상을 살아가면서 많은 십자가를 만나게 됩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루카9,23)

우리에게는 경제적으로 가정적으로 또 이웃 간에 힘에 겨운 십자가가 많이 있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것을 피하지 말고 기꺼이 지고 하느님께 나아가야 합니다. 순교자들은 이것만 진 것이 아니라 집안이 패가망신되어 가는 것을 보아야 했고 자식들이 처참하게 죽어 가는 과정을 보아야 했습니다. 그러면서도 꺾이지 않고 주님의 십자가를 따르기 위해 모든 것을 봉헌하고 마지막에는 자신의 목숨까지도 주저하지 않고 바쳤습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 신앙의 선조 순교자들의 삶입니다.

오늘 순교자 대축일을 지내면서 이 분들의 신앙이 우리의 신앙이 될 수 있기를 하느님께 기도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하느님을 믿는 사람은 죽음 앞에서 또 그 어떠한 어려움 앞에서도 결코 좌절하거나 두려워하지 않으며 하느님을 배반하지 않습니다.

박해가 심하면 심할수록 삶의 노고가 깊으면 깊을수록 하느님께로부터 받는 은총은 크고 깊습니다. 많은 경우 우리는 어렵고 힘든 삶을 만나면 하느님을 떠나서 다른 곳에서 길을 찾고자 합니다. 그 결과는 어떻습니까? 길은 더 꼬이고 얼굴은 흉해지면 결국 어려움은 어려움대로 더욱 나를 짓누르게 됩니다. 그러나 어렵고 힘들 때일수록 하느님 안에서 기도하고 기꺼이 십자가를 지려고 순명할 때 평화롭고도 아름다운 모습으로 하느님의 은총을 풍성히 받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순교 선조들의 믿음이 나의 믿음이 될 수 있도록, 또 순교자들이 졌던 십자가를 나도 짊어질 수 있도록 은총을 청하면서 이번 한 주간을 보내시기 바랍니다.

서울대교구 이기양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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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 넘어선 순교자들의 신앙

순교자 성월인 9월이 무르익어가는 오늘은 하느님을 위해 목숨을 바쳐 신앙을 증거한 순교자들을 기리는 대축제의 날입니다. 김대건 안드레아 성인은 최초로 한국인 사제가 되신 분으로 26살에 돌아가셨고, 정하상 바오로 성인은 박해시대 때 신부님들을 모시고 다니면서 복사도 하고 길 안내도 했던 훌륭한 평신도로서 45살 나이에 돌아가셨습니다. 오늘은 이 분들과 1만여 명 동료 순교자들을 기념하며 한국 천주교회의 뿌리를 생각해보는 날이기도 합니다.
 
일반적으로 천주교가 들어올 때는 선교사들이 앞장을 서지만 우리나라에는 먼저 천주교 관련 서적이 들어왔습니다. 중국을 왕래하던 사람들 틈에 마테오 리치 신부가 중국인들을 위해 예비신자 교리서로 쓴 「천주실의」라는 책이 들어왔고, 당시 내로라 하는 학자들은 이 책에 큰 관심을 가지고 천진암 '주어사'에 모여 강학회를 열게 됩니다.
 
천주학은 공부를 할수록 이들에게 놀라운 세계를 제시해 주었고 새로운 우주관, 신관, 인간관을 접하면서 이들은 점점 천주학에 매료되기 시작합니다. 그런데 더 이상 공부할 책을 구할 수 없게 되자 마침 그들과 함께 했던 '이승훈'이라는 사람이 중국으로 가게 되었고, 그는 그라몽 신부를 찾아가 천주교에 관련된 지식과 신앙을 배우고 한국 천주교의 반석이 되라는 의미에서 '베드로'라는 이름으로 세례를 받습니다.
 
이승훈 베드로는 세례를 받고 교회에 관한 많은 서적을 가지고 1784년 봄에 귀국을 했고 이제 학자들의 모임은 천진암에서 지금의 명동 성당 자리인 김범우의 집으로 자리를 옮겨 '명례방'이라는 이름으로 발전합니다. 당시 유명한 학자들이었던 이벽, 권일신, 정약전 형제 등 많은 사람들이 모여 공부를 하기 시작했는데 공부를 하면 할수록 천주학은 이들을 사로잡아 이제 학문의 차원을 넘어서 신앙의 차원으로 발전하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목자 없이 신앙생활을 시작한 학자들은 교리 연구에 더욱 노력하는 가운데 몇 가지 의문을 갖게 되었습니다. 사제는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 것이지요. 또 한 가지가 바로 제사에 관한 문제가 풀리지 않는 의문으로 남았습니다. 이 문제로 고심하던 그들은 북경에 있는 주교에게 문의를 하기로 하고 편지를 써서 보냈습니다.
 
"우리가 지금 이렇게 시행하고 있는데 계속해도 무방하겠습니까?"
 
주교는 두 가지 모두 안된다는 답변을 보내왔습니다. 이에 순종한 신자들은 이제까지 행했던 '가성직제도'를 폐지하고 성직자의 파견을 애타게 요청함과 동시에 조상제사 문제로 혼란에 빠지게 됩니다. 이런 와중에 엄청난 파장을 불러일으킬 사건이 전라도 진산에서 발생합니다.
 
윤지충과 권상연 형제가 제사를 지내려고 온 가문이 모여 있는 자리에서 하느님 뜻에 어긋난다며 신주를 불살라 버리는 사건이 일어난 것입니다. 조정에서는 국가의 기반을 흔드는 천주교를 엄격히 금지하게 되고, 조상의 신주를 불사르고 제사를 거부한 이들 형제는 대역 죄인이 되어 귀향을 가고 처형을 당하게 됩니다.
 
조정에서는 조상제사를 거부하고 남녀노소가 평등하다고 주장하는 천주교를 나라의 기강을 흔드는 사학으로 규정해 대역죄로 엄하게 다스려 뿌리 뽑으라는 명을 내렸습니다.

1791년 신해년에 처음으로 박해가 일어나 이승훈, 권일신이 귀향을 가고 죽게 되면서 100여 년간의 박해동안 1만여 명의 신자들이 처형당하는 아픔을 겪고서야 마침내 1886년 한불통상조약의 체결로 종교의 자유를 보장받게 됩니다. 1893년에 우리나라 최초로 약현성당이 들어서고 이승훈 베드로 한 명으로 시작된 한국 천주교회는 지금 500만 명이 넘는 신자수를 헤아리게 되었습니다. 참으로 놀라운 한국 천주교의 역사입니다.
 
그토록 엄청난 박해 속에서도 끊임없이 신자 수가 늘어간 이유는 무엇이었을까요? 도대체 무엇이 죽음을 넘어선 신앙을 선택하게 했을까요? 비신자들은 죽음 앞에서도 두려워하지 않고 희광이의 칼날 아래에서도 기쁘게 주님을 찬양하는 순교자들의 모습에서 살아 계신 하느님을 체험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정녕 자기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나 때문에 자기 목숨을 잃는 그 사람은 목숨을 구할 것이다"(루카 9,23-24).
 
오늘 복음 말씀대로 순교자들은 교회의 초석이 되기 위해 십자가를 짊어졌고, 목숨을 잃음으로써 영원한 생명을 얻으셨습니다. 순교자들의 목숨을 넘어선 신앙이 우리 신앙으로 뿌리내리길 기원합니다.

서울대교구 이기양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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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우리 한국이 낳은 자랑스러운 순교자 103位를 기리고 경축하는 날이다.

우리 한국 천주교회의 시작은 세계 어느 나라와도 달리 전무후무하게 독보적인 가치가 있다. 즉, 우리나라의 천주교회는 외국 선교사의 복음전파로 시작된 것이 아니라, 우리 민족이 스스로 찾아가서 수입해온 종교이다. 그뿐만 아니라 초창기부터 박해가 휘몰아쳐서 많은 희생을 강요당했지만 교세는 줄어들지 않고 오히려 점점 불어났다. 박해는 약 100년 간 계속되었지만 교세는 그럴수록 더욱 확장되었다. 그래서 10,000 여명이 넘는 순교자가 탄생했고, 그 중에서 모든 증거자료가 확실한 103명만이 지난 1984년에 여의도 광장에서 성인으로 諡聖되었다. 바로 그 103위의 순교 성인을 기리는 축일이 오늘 우리가 지내고 있는“성 김대건 안드레아와 성 정하상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 대축일”인 것이다.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는 우리나라 최초의 사제이고, 성 정하상 바오로는 우리나라 최초의 평신도 회장이었다.

오늘 우리는 우리 先祖들이 목숨을 바쳐 증거한 신앙이 무엇인지, 과연 순교가 무엇인지를 먼저 알아보아야 할 것이다.

순교란 하느님께 대한 확고한 믿음과 희망을 갖고 하느님의 진리와 정의를 수호하기 爲해서 자기 목숨을 바치는 것을 말한다.

오늘 제1독서인 지혜서의 말씀을 들어보면 : “어리석은 자들의 눈에는 의인들이 죽는 것처럼 보이고 그들의 말로가 고난으로 생각되며, 우리에게서 떠나는 것이 파멸로 여겨지지만, 그들은 평화를 누리고 있다. 사람들이 보기에 의인들이 벌을 받는 것 같지만, 그들은 불사의 희망으로 가득 차 있다.”는 말씀이 나온다. 그래서 순교란 외인들이 보기에는 매우 어리석은 것 같은 무모함이 있지만 실제로 그들의 행동은 世世 代代로 추모와 존경을 받는 위대한 성인으로서 하느님 나라를 차지한 사람이 되는 것이다. 오늘 복음을 보면 예수님께서“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정녕 자기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나 때문에 자기 목숨을 잃는 그 사람은 목숨을 구할 것이다.”하셨다.

여기서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는 사람”이란 아주 구체적으로 말하면 복음 때문에 또는 주님의 이름 때문에 목숨을 잃는 유혈의 순교자를 말한다.

그러나 사실 오늘날에는 복음이나 주님의 이름 때문에 목숨을 요구하는 박해는 없다. 그렇다면 더 이상 순교란 있을 수 없고, 주님의 이름으로 제 목숨을 버리는 일은 없다는 말인가...? 아니다! 자기를 버린다는 것이 어떤 의미에서는 더 어려운 박해이며 진정 자기를 버리는 사람은 무혈의 순교 또는 백색 순교를 하는 것이다.‘자기를 버린다’는 것은 자기를 완전히 정복한다는 것인데 이것은 이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싸움이다. 그래서 “자기를 이기는 사람은 세계를 정복할 수 있는 사람”이라고 일찍이 현자들은 말해 왔다.

그렇다면 구체적으로 ‘자기와의 싸움’에서 싸워야 하는 적은 누구인가? 그것은 바로 자기 자신이다. 즉 자신의 지나친 욕심과 이기심, 자애심과 교만, 쓸데없는 자존심 등과의 싸움이 바로 자기와의 싸움이다. 그러니까 ‘자기와의 싸움’에서 이긴다는 것은 자기를 꺾고 자기의 지나친 욕심과 사리사욕을 버리는 것이다. 이것은 바로 나보다 이웃을 먼저 생각하는 것을 말하며 남의 유익이나 편리를 위하여 나 자신을 희생하고 내 욕심을 버리는 것을 말한다. 그러나 사람들은 누구나 자기 자신을 아끼고, 자기를 제일 중요시하고, 자기가 제일 잘났다는 생각을 한다. 나 아닌 다른 사람이 나보다 잘 났거나, 일이 잘 되거나 행복해지면 어쩐지 마음이 슬퍼지는 병이 바로 이기심, 자애심이라는 병이다. 이것은 아무도 못 고치는 병이다. 오직 자기 자신의 수양으로써만 고칠 수 있는 병이다.

이러한 자기주장과 자기 위주의 모든 생각을 뜯어고친다는 것이 바로 자기를 버리는 것이며 주님을 따르는 참된 믿음의 생활이다. 물리적인 박해가 없는 이 시대에도 순교의 의미는 바로 여기에 있다. 자기를 버리고 남을 위해서 무엇인가 유익한 사람이 되려는 노력과 그 구체적인 삶이 제 십자가를 지고 주 예수님을 따르는 길이다. 그래서 순교에는 두 가지 종류가 있다는 것이다. 물리적으로 피를 흘리는 유혈의 순교가 바로 우리 조상들이 받은 순교였고, 피를 흘리지 않고도 매일같이 정신적으로 순교할 수 있는 것이 바로 자기를 버리는 일이며, 이것이 바로 무혈의 순교 또는 백색순교라고 하는 것이다.

103位 순교성인들이 유산으로 남겨주신 신앙의 유산이란 다른 것이 아니라 바로 '자기를 버리는 삶'의 모범이다. 자기를 버리지 않고는 아무도 진정한 신앙의 생활을 할 수 없다. 십자가를 진다는 것은 바로 자기를 버리는 생활이다. 아무런 물리적인 힘이나 무게를 주지 않으면서도 사실상 제일 힘들고 무거운 십자가가 바로 자기를 버리는 행위다. 자기를 버리기를 꺼려하는 사람은 언제나 자기 욕심과 교만의 노예로 항상 주 예수님의 십자가의 길을 어리석게 생각하며 거부하면서 사는 사람이다. 그러한 십자가의 거부는 언제나 이 세상에 안주하려는 생각과 이웃과의 불일치를 초래하고, 맹목적인 신앙생활을 하게 될 뿐이다. 매일같이 자기를 버리는 무혈의 순교 또는 백색 순교가 바로 오늘날 우리가 지고 가야 하는 십자가인 것이다.

서울대교구 김충수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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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령 조선시대에 신앙의 박해가 없었고 그래서 우리 한국 교회가 어떤 선교사에 의하여 전교되었다고 가정한다면 어떠할까? 아마 지금의 교회와 별반 다를 바 없을 것이다. 그래도 분명 다른 것 하나가 있을 것이니, 그것은 한국 교회의 영성을 찾는 일이 어려울 것이라는 사실이다. 영성은 한 존재를 빛나게 하는 눈과 같다. 개인이나 공동체나 국가나 영성을 지니지 못하면 정신세계를 가질 수 없게 된다.

한국 교회의 영성은 ‘순교의 영성’이다. 우리 교회에 순교의 영성이 살아나면 신앙이 살고 교회가 살고 사회도 복음화된다. 그러나 순교의 영성이 시들거나 왜곡되면 신앙도 교회도 죽고 세상도 변하지 않는다. 순교자 영성은 첫째, ‘신앙의 절대성’ 둘째, ‘사회적 평등주의’ 셋째, ‘관습과 제도에 대한 탈법성’ 넷째, ‘평신도 주체운동’으로 정리할 수 있다.

참수형도 불사한 하느님께 대한 순교자들의 절대적 신앙은 오늘날 사주 궁합 을 예사로 보는 우리를 부끄럽게 한다. 가부장적 전통과 유교관습으로 양반 상놈, 여필종부로 억압한 신분 계급, 성차별을 과감하게 뛰어넘었던 평등주의는 오늘날 교회법과 본당 공동체 안에서 남성 중심주의와 성차별을 예사로 여기는 우리를 부끄럽게 만든다. 엄연히 금지된 국법을 일축하고 예배와 집회를 열며 전교하다가 형장으로 끌려갔던 순교자들의 삶은 오늘날 국가보안법과 불평등한 한미협정 등 부당한 법에 대해 ‘그래도 법은 지켜야 한다.’고 외치는 우리를 부끄럽게 한다. 평신도들만으로도 훌륭한 신앙공동체를 이끌었던 주인의식은 오늘날 성직자 중심주의에 안주하는 우리를 부끄럽게 한다. 순교 성월 마지막 주간을 보내며 한국 교회의 순교자 영성을 생각한다.

서울대교구 박기호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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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을 섬기고 이웃을 아끼는 삶

1. 성서이야기

제1독서 지혜서 3,1-9은 의인들이 누리게 될 복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의인들도 이 세상에서 고통을 당하지만 그것은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한 준비 단계의 시련이라는 것입니다. 결국 의인들은 종말에 하느님 나라에서 모든 민족들과 백성들을 다스릴 것입니다.

제2독서 로마서 8,31-39에서 바울로는 이 세상 어느 것도 어느 누구도 하느님 사랑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그리스도인들을 떼어 놓을 수 없다고 선언합니다. 성령을 따라 나날의 삶을 꾸려가는 그리스도인들은 이 두 가지 사랑을 지니고 살기 때문에 어떠한 고통과 고난도 능히 이겨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 루가 9,23-26에는 예수의 짤막한 말씀 네 가지가 나옵니다. 어느 날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여러분은 나를 누구라고 하겠습니까?”하고 물으셨을 때 제자들을 대표하여 베드로는 당신은 “하느님의 그리스도이십니다”라고 고백합니다. 베드로의 고백이 있고나서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당신을 따르는 자세에 대해서 말씀하십니다.

첫째, 자기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라는 것입니다(23절). 예수님을 따르는 데 장애가 되는 이기적인 욕심들을 버리고 매일매일 겪게 되는 어려움을 감수하라는 말씀입니다.

둘째, 목숨을 잃을 각오를 하라는 것입니다(24절). 일시적인 목숨을 보존하려고 하느님 나라에서 누리게 될 영원한 생명을 놓치는 어리석음을 범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셋째, 재물보다 영원한 삶을 더 중시 여기라는 것입니다(25절). 돈을 많이 벌어들이고 목숨을 잃어버리는 어리석음을 탓하는 말씀입니다.

넷째, 지금 여기에서 예수님께 대하여 취하는 태도가 중요하다는 것입니다(26절). 지금 예수님께 대하여 취하는 태도대로 장차 종말에 예수께서도 똑같은 모양으로 대하시겠다는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현재'는 신앙인들에게 매우 중요한 때라 하겠습니다.

2. 우리의 이해

한국의 순교 성인들은 독서와 복음의 말씀처럼 십자가 희생으로 보여 준 그리스도의 사랑, 우리를 위하여 그리스도를 희생하면서 보여 준 하느님의 사랑에 따라 살다가 목숨을 잃은 분들입니다. 교회와 예수님의 아름다운 가르침을 곧이곧대로 지키면서 그리스도와 운명을 같이 한 분들입니다. 하느님과 부활한 그리스도의 사랑에 매료되어 하느님을 섬기고 이웃을 아끼는 일에 투신하다가 모함도 받고 박해도 받고 마침내 목숨까지 바친 분들입니다. 영혼의 구원과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하여 이 세상의 덧없는 명예와 부귀영화와 쾌락을 버린 분들입니다. 온 천하를 주고도 바꿀 수 없는 영원한 생명을 누리기 위하여 일시적인 자신들의 목숨을 내놓은 분들입니다. 한국의 모든 순교 성인들이 이와같은 삶을 살 수 있었던 원동력은 사도 바울로의 고백처럼 하느님 사랑, 그리스도의 사랑이었습니다. 이 사랑으로 그들은 어떠한 고통과 고난도 능히 이겨낼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분들은 지금 천상에서 복을 누리고 계실 것입니다.

올해는 신유박해(1801년)가 일어난 지 200년이 되는 해입니다. 남을 배려할 줄 모르고 자신들의 이익만을 추구하는 현대 사회에서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은 참다운 성인 공경이 무엇인지 깊이 깨달아야 할 것입니다. 성지 개발도 필요하지만 성인들이 지녔던 하느님 사랑, 그리스도 사랑에 따라 하느님을 섬기고 이웃을 아끼는 삶이야말로 이 시대의 성인공경이라 하겠습니다.

2001년 9월 23일 서울대교구 사무처 홍보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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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의 삶이 곧 순교의 현장

한국의 103위 자랑스러운 순교성인 중 가장 연소자는 14세에 순교를 한 유대철 베드로(1826-1839)입니다. 그는 서울에서 통역을 하는 관리인 역관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그의 세례는 신앙이 열심한 아버지 유진길의 영향이 컸습니다. 1839년 기해(己亥)박해가 일어나자 그의 아버지도 체포되었습니다. 그러자 소년 유대철도 순교하기로 결심하고 관가에 자수를 했습니다. 어린 나이에도 극심한 고문을 잘 견뎌냈다고 합니다.

한 번은 형리가 허벅지의 살을 뜯어내며 배교하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유대철은 “저는 천주님을 배반할 수 없어요” 하며 단호하게 대답했습니다. 화가 난 형리가 이번에는 화로에서 시뻘겋게 타고 있는 숯덩이를 입에 넣으려고 하자, 유대철은 눈 하나 깜짝 안하고 태연하게 입을 크게 벌렸다고 합니다. 그는 총 14차례의 고문과 100여 대의 매를 맞아 피투성이가 되었으나 결코 배교하지 않았습니다. 결국 유대철 베드로는 1839년 10월31일, 교수형을 받고 순교했습니다.

유대철 베드로는 1984년 5월6일, 전 세계 그리스도교의 공경을 받는 성인품에 오르게 되었습니다. 수만 명의 순교자를 배출한 우리 교회는 전 세계에서 유례가 드문 특별한 역사를 지니고 있습니다. 한국천주교회는 선열들의 순교의 피로써 시작되고 발전된 교회라고 해도 지나친 말은 아닙니다.

오늘 우리의 현실은 그 옛날 순교자들의 상황과는 많이 다릅니다. 그러나 오늘날에도 신앙을 위협하는 장애물과 유혹은 즐비합니다. 특히 물질이 모든 것에 우선하는 현대인의 삶 속에서 신자들이 자신의 신앙을 지키는 것은 순교시대만큼이나 어렵다고 할 수 있습니다. 순교자들의 정신을 가장 잘 계승하는 것은 결국 신앙인들 각자가 신앙생활을 충실하게 하는 것입니다. 신앙이란 하느님의 존재와 그분의 말씀을 믿는 것뿐 아니라, 삶 속에서 전적으로 수용하고 실천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신앙은 생활과 불가분의 관계를 지닙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예수님은 “나를 따르려는 사람은 누구든지 자기를 버리고 매일 제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한다”(루가 9,23)고 분명히 가르치고 있습니다. 이처럼 신앙은 추상적인 것이 아니라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매일 나의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라야 합니다. 자신의 십자가를 진다는 것은 묵묵히 받아들이고 견디는 것입니다. 참다운 신앙의 길은 결코 쉽지 않은 고난의 길입니다(루가 14,27 참조). 어쩌면 세속의 거센 유혹과 악의 힘을 거슬러 믿음을 지키는 것 자체가 고통스러운 일일지 모릅니다. 그러나 영원한 생명, 구원에 도달하는 길은 어렵고 험난하지만 불가능하지만은 않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오늘도 우리를 격려해 주시고 힘을 북돋아 주십니다.

“제 목숨을 살리려고 하는 사람은 잃을 것이요,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는 사람은 살 것이다”(루가 9,24).

서울대교구 허영엽 마티아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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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를 단련시키는 하느님


오늘 복음인 루가 9,23-26은 집필자료인 마르 8,34-38과 함께 보아야 그 뜻을 제대로 파악할 수 있습니다.

마르 8,34-38과 루가 9,23-26은 예수님께서 장차 닥칠 자신의 수난을 예고한 후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예루살렘에 올라갔다가 유다인들에게 잡혀 십자가에 달려 죽을 것을 예견하십니다. 역사적으로 신빙성이 있는 내용입니다. 예수님은 3년 동안의 공생활에서 유다교 종교 지도자들에게 미운 털이 박힌 분이었습니다. 게다가 예수님의 인기 역시 대단해 수많은 사람들이 그 주변에 몰려들었습니다. 그런 여세를 몰아 예루살렘으로 들어온다면 그들이 예수님을 가만히 놓아둘 리 있겠습니까? 그런데 유다인들은 로마의 속국인지라 사형권이 없었습니다. 따라서 로마 총독에게 예수님을 정치범으로 몰아붙여 십자가형을 내리게 한 것입니다. 이런 이유로 1세기 교회에서 '십자가'란 고난의 표시, 순교의 표시가 되었습니다. 23절에 '제 십자가를 지라'는 요구나 24절에 '목숨을 잃으면 오히려 목숨을 구하리라'는 말씀은 그 같은 정황을 고려하면 쉽게 이해가 갑니다.

마르코는 34절에서 분명히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고 한 반면 루가는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23절)고 합니다. 문장 머리에 '날마다' 라는 부사가 들어가 있습니다. 마르코가 박해 끝의 순교를 생각했다면 루가는 일상(日常)에서 경험하는 십자가를 염두에 두었던 것입니다. 이는 복음서 작가 루가의 사상에서 기인합니다. 마르코는 곧 종말이 닥치리라는 기대를 했습니다. 그러니까 일상보다는 종말이 훨씬 중요했고 현재의 삶은 언제나 종말을 겨냥한 것이어야 했습니다. 그에 비해 루가는 종말과 더불어 현재라는 시간도 존중했던 사람입니다. 따라서 매일의 삶을 얼마나 진지하게 영위해야 하는지 스스로 질문을 던지고 있는 것입니다. '날마다'라는 한 마디 말에서 우리는 신앙 선배들이 겪었던 고민을 읽어낼 수 있습니다. '날마다'는 루가가 애용하던 단어입니다(11,3; 19,47; 사도 17,11).

지혜 3,1-9에서는 의인과 악인의 길을 비교해서 보여 줍니다. 그 중에서 특히 4-6절이 오늘의 주제인 순교와 관련이 있습니다. 하느님은 인간을 시험하십니다. 그러나 그 시험을 잘 거친 이는 진리를 깨닫고 하느님의 사랑 안에서 영원히 살 것입니다.

로마 8,31ㄴ-39에서 바오로는 어떤 역경도 하느님의 사랑에서 우리를 떼어놓을 수 없다는 사실을 여러 가지 예를 들어 강조합니다. "누가 감히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떼어 놓을 수 있겠습니까? 환난입니까? 역경입니까? 박해입니까? 굶주림입니까? 헐벗음입니까? 혹 위험이나 칼입니까? … 그러나 우리는 우리를 사랑하시는 그분의 도움으로 이 모든 시련을 이겨 내고도 남습니다."

우리는 어려운 일을 당할 때, 이 시련을 당당하게 맞설 수 있는 용기를 달라고 기도합니다. 그런 기도는 순교와 같은 극한 상황에서도 필요하지만 매일의 삶에서도 필요합니다. 하느님은 그렇게 우리를 단련시키십니다.

2002년 9월 22일 서울대교구 사무처 홍보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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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 해설

1. 오늘 독서에서 저자는 의인들의 이해할 수 없는 죽음에 대한 신학적 설명을 시도합니다. 그는 영혼의 불멸성을 강조하면서 "하느님께서는 당신 본성의 모습을 따라 인간을 불멸의 존재로 창조하셨습니다"(지혜 2,23)라고 말합니다. 의인이나 악인이나 똑같이 죽음을 맛보게 됩니다. 이것은 육체의 죽음입니다. 그러나 이 죽음 뒤에는 또 다른 죽음이 있는데 이것이 바로 영혼의 죽음으로서 요한 묵시록은 이를 "둘째 죽음"(묵시 2,11; 20,14; 21,8)이라고 부릅니다. 악인들은 이 둘째 죽음을 맛보게 될 것이지만 의인들은 이를 맛보지 않고 하느님 품안에서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공의로운 하느님께서 의인들에게 주시는 최상의 상급이라고 지혜서는 가르치고 있습니다. 영원한 생명에 대한 희망, 다시 말해 서 "영혼의 불사(不死)에 대한 희망"(4절)을 가지고 있었기에 신앙의 의인들은 주님을 증거하는데 있어서 기꺼운 마음으로 자신의 목숨을 내놓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2. 바울로 사도는 자신 있고 확신에 찬 목소리로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갈라놓겠습니까?"(로마 3,35)라고 말하면서 "우리 모두를 위해 당신의 친아드님마저 아끼지 않고 넘겨주신"(32절) 하느님의 사랑에 의지할 것을 피를 토하는 듯한 격정적인 어투로 우리에게 호소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하느님의 이 지극한 사랑 안에 머물 때 우리는 그 어떤 어려움도 극복해 나갈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실제로 가능한 일이라는 것을 순교 성인들이 증거하고 있습니다.

정장표 레오 작은 형제회

복음 해설

1. 복음이야기(루가 9,23-26)

예수께서는 주로 갈릴래아에서 백성들과 제자들을 상대로 가르치셨습니다. 그런데 백성들은 예수님이 어떤 분인지 알아보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백성들을 상대로 하신 예수님의 가르침은 실패한 셈입니다. 그러나 제자들을 상대로 한 가르침은 그런대로 성공하였습니다. 베드로는 제자들을 대표하여 "당신은 하느님의 그리스도이십니다"(루가 9,20) 라고 고백합니다. 베드로의 고백이 있고 나서 예수께서는 예루살렘으로 활동무대를 옮기면서 제자들에게 당신을 따르는 자세 네 가지를 언급하십니다.

첫째, 자기 부정과 십자가 수락입니다(23절). 이는 예수님을 따르는 데 장애가 되는 이기적 아집을 버리고 십자가를 지는 고통을 감수하라는 말씀입니다.

둘째, 예수님과 함께 목숨을 잃을 각오를 하라는 것입니다(24절). 지금 일시적인 목숨을 보존하려고 애쓰는 사람은 장차 하느님 나라에서 영원한 생명을 잃게 될 것이고, 반대로 지금 일시적인 목숨을 버릴 각오가 되어 있는 사람은 장차 하느님 나라에서영원한 생명을 얻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셋째, 재물보다는 영원한 삶을 더 중시 여기라는 것입니다(25절). 이 세상에서 돈은 많이 벌었지만 신앙을 잃어버린 어리석음을 탓하는 말씀이라 하겠습니다.

넷째, 지금 여기에서 예수님에 대하여 취하는 태도가 중요하다는 것입니다(26절). 그리스도인이 지금 예수님에 대하여 취하는 태도 그대로 종말에 예수께서도 똑같은 모양으로 대하겠다는 종말론적 동태보상률을 뜻하는 말씀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현재'는 지극히 중요한 때입니다. 미래는 우리의 현재를 환히 들추어 낼 뿐입니다.

2. 우리의 이해

순교 성인들은 그리스도의 말씀을 곧이곧대로 지키면서 그리스도와 운명을 같이 하며 살아간 분들입니다. 예수님의 발자취를 따라 하느님을 섬기고 이웃을 아끼는 일에 투신하다가 모함도 받고 박해도 받고 마침내 목숨까지 바친 분들이 순교 성인들입니다. 순교 성인들은 영혼의 구원과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해서 이 세상의 덧없는 명예와 부귀영화와 쾌락을 포기한 분들입니다. 예수님을 본받아 온 천하를 주고도 바꿀 수 없는 귀한 생명을 얻고 누리기 위하여 자신들의 목숨을 내 놓은 분들입니다. 한마디로 순교 성인들은 복음의 증인들이라 하겠습니다.

오늘은 한국의 103위 순교 성인들을 기리는 대축일입니다. 2000년 대희년을 맞아 참다운 성인 공경이 무엇인지를 깊이 생각하는 교회가 되었으면 합니다.

2000년 9월 24 일 서울대교구 홍보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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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교자의 모범을 따르는 신앙생활

1. 순교자란

그리스도인들은 하느님께 대한 신앙을 고백하고,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실천하는 사람들이다. 순교자란 자신의 목숨을 바쳐 하느님께 대한 신앙을 고백한 이들이다. 순교자들은 그리스도의 모범과 가르침에 따라 자신의 생명을 바쳐서 하느님께 대한 신앙과 이웃에 대한 사랑을 실천했던 사람들이었다.

신약성서에서 '순교'라는 말의 어원은 '증거하다' '증인이 되다' '증언하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그렇다면 순교란 말이 생겨날 당시에 이 낱말은 자신이 옳다고 믿는 바를 증언하는 것이고, 하느님을 증거하고 그 증인이 되는 것이라는 뜻을 함축하고 있었다.

2. 순교의 역사

세계 교회의 역사에 무수한 순교자들이 등장하고 있다. 또한 자신의 목숨을 바치지는 않았다 하더라도 하느님의 가르침을 증언하고 실천했던 많은 사람들을 만날 수 있다. 이들 가운데 극히 일부가 시복·시성되어 오늘의 교우들에게 신앙인의 모범이 되고 있다. 우리도 순교자를 모범으로 삼음으로써 또 다른 성인이나 증거자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우리 나라에서도 박해시대를 통하여 수많은 순교자들이 나왔다. 이 순교자 가운데 103명이 1984년에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서 성인으로 선포되어 우리들에게 믿음의 사표(師表)가 되고 있다. 세계 교회에서도 이 땅에서 순교한 103명의 순교성인들을 기념하고 본받기를 다짐한다. 특히 한국교회에서는 9월을 '순교자 성월'(聖月)로 정하여 유명·무명의 수많은 순교자들을 현양하고 있다.

3. 순교자의 모범을 따라서

우리가 순교자를 현양하는 까닭은 그들의 모범을 본받고 따르고자 하기 때문이다. 특히 103명의 순교성인들은 우리에게 신앙인의 좋은 모범을 제공해주고 있다. 또한 우리는 아직까지 성인품에 오르지 못하고 있는 많은 순교자들의 시복과 시성을 위해서 노력해야 한다. 그들의 시복과 시성을 위한 노력은 오늘의 우리가 그들의 삶과 믿음을 본받기 위한 노력의 첫걸음이 될 것이다.

현재 서울대교구 순교자 현양위원회에서는 1801년을 전후하여 순교한 분들의 시복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 이를 위해 이미 8권의 자료집을 정리해 내었고, 앞으로 3권의 자료집과 여러 권의 연구논문집을 간행할 예정이다. 자료정리와 연구 없이 그분들의 시복과 시성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오늘 우리가 기리는 순교자들은 자신의 믿음을 고백하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가르치신 바를 실천하기 위해서 하나뿐인 목숨까지도 바쳤다. 그와 같이 절박하고 강인한 심정으로 우리도 신앙을 고백하며 실천해나가야 할 것이다. 이것이 순교자의 모범에 따라 진정한 구원에 이르는 길이기 때문이다.

서울대교구 배갑진 베드로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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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을 살아가는 순교 정신

호주 시드니에서 있었던 세계 청년 대회(7월15일~20일)를 마치고 생드니 교구의 교구장이신 오영진(Olivier de Berranger) 주교님과 청년 120여 명이 프랑스로 귀국하는 길에 열흘 간의 일정(7월21일~31일)으로 한국에 들렀습니다. 1976년부터 17년간 서울 구로와 영등포에서 노동자들을 위한 사목을 하셨던 오영진 주교님은 청년들에게 한국 교회의 역동성을 보여 주고, 1800년대 조선에서 선교하다 순교한 프랑스 파리 외방 전교회 신부님들의 순교 정신을 그들의 마음에 심어 주고 싶었습니다. 평화방송․평화신문에서는 명동성당을 방문하는 날, 주교님과 두 명의 청년을 인터뷰하기로 했습니다.

방문단은 오전 덕수궁의 문화체험을 마치고 명동성당에 12시30분에 올 예정이었지만, 교통이 지체되어 오후 1시15분쯤 도착했습니다. 늦게 도착하신 주교님은 죄송하다며, 인터뷰와 방송 녹음을 하기 위해 길 건너편의 평화방송․평화신문 빌딩으로 빠른 걸음을 옮겼습니다. 방송실에 가기 전에, 승강기 안에서 제가 주교님께 말을 건넸습니다. 󰡒점심 식사를 아직 못하셨으니, 우리가 준비한 샌드위치를 먼저 드시고 인터뷰를 하시죠.󰡓 주교님은 이렇게 대답하셨습니다. 󰡒저와 청년들이 우리 프랑스 선교사들의 순교 정신을 체험하러 왔는데, 그분들이 겪었을 고생과 고통에 비하면 점심 조금 늦게 먹는 것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방송 녹음부터 먼저 합시다.󰡓

순교 정신으로 점심의 허기를 이겨 내자는 주교님의 생활에서 살아 숨쉬는 순교 영성은 방송 녹음과 신문 인터뷰가 끝난 후, 샌드위치를 먹으면서 함께 나눈 대화에서 더욱 분명해졌습니다. 󰡒호주에서 세계 청년 대회 마치신 후 바로 한국에 들어오셔서 또 다시 강행군을 하시는데, 무척 피곤하시겠습니다.󰡓 󰡒파리 외방 전교회의 선교사들이 사제서품을 받고 젊은 나이에 모든 것을 버리고, 이역만리 이 곳 조선에서 신앙을 위해 자신의 생명을 아끼지 않고 바쳤던 것에 비하면, 우리들이 한국에서 열흘 간의 일정 동안 잠시 머무르면서 겪는 고생은 아무것도 아니죠.󰡓

󰡒갈매못 순교성지 순례 감동을 잊을 수 없습니다. 한국에서 17년을 살았지만 갈매못 순교성지를 이번에 처음 가봤습니다. 1866년 병인박해 때 용감하게 순교의 칼을 받은 다블뤼(Antoine Daveluy, 조선교구 5대 교구장) 주교님 모습이 눈앞에 어른거립니다. 프랑스 청년들은 이번에 한국 천주교회 역사와 프랑스 선교사들의 순교를 생생하게 배우고 느꼈습니다󰡓. 방송국에 녹음을 하기 위해 함께 자리한 프랑스의 앳된 두 청년도 그 옛날 고국의 선교사가 동방의 이 먼 곳까지 와서 복음을 전하다 순교의 피를 흘렸다는 사실에 놀라웠고, 자신들의 신앙 선조들을 본받아 어떠한 자세로 신앙생활을 해야 하는지를 깨달았다고 말했습니다.

이 땅에서 목숨을 바쳐 신앙을 증거한 순교자들의 순교 정신이 이제 가톨릭 신앙의 종가라 할 수 있는 프랑스 젊은이들의 가슴에도 새겨지게 되었습니다. 그들이 한국에서 체험한 순교 정신을 일상의 삶 안에서 살아내기를 희망합니다. 그리고 모진 박해에도 굴하지 않고 자신의 생명을 신앙의 제단에 바친 수많은 순교자를 신앙 선조로 모시고 있는 우리에게도 순교 정신이 삶의 현장에서 굳건히 이어지기를 희망합니다. 한국의 모든 순교자들이여, 저희를 위하여 빌어 주소서.

김영춘 베드로 신부
  | 09.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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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조 있는 신앙인

“제 목숨을 살리려고 하는 사람은 잃을 것이요,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는 사람은 살 것이다."

몇 년 전 ‘평화신문’에 이런 기사가 났습니다. 수능 시험을 앞두고 유명하다는 어느 점쟁이를 찾아가 문의를 했더니 고객 10명 중의 2명은 천주교 신자라는 것이었습니다. 심지어 어떤 천주교 신자 두 사람은 부적을 받아간 후 자식이 명문대에 합격했다면서 고마움을 표시하러 다시 찾아와 웃돈을 얹어 주며 점쟁이가 차려놓은 신단에 큰절까지 하고 가더랍니다. 이처럼 어려운 일이 생기면 하느님을 신뢰하지 못하고 다른 데로 눈을 돌리는 지조 없는 신앙인들이 적지 않습니다.

오늘 우리가 기억하는 한국의 순교 성인들은 지조를 지킨 분들이었습니다. 1839년 기해·1846년 병오·1866년 병인박해 때 순교한 103명의 성인들은 하나뿐인 목숨까지 버려가면서 하느님을 증거하였습니다. 그들 가운데 한국 최초의 사제였던 김대건 성인은 서품 후 1년도 채 안되어서 체포되어 많은 고초를 겪었습니다. 관헌들은 그분의 박학한 지식과 고결한 인품에 감동하여 신앙만 버린다면 높은 관직까지 주겠다고 회유하였지만, 그분은 이에 굴하지 않고 죽음으로 신앙을 지켰습니다. 작은 시련과 유혹 앞에서도 쉽게 신앙을 뒷전으로 밀어놓는 우리의 모습과는 정반대입니다.

또한 정하상 성인은 대표적인 평신도 지도자로서, 1801년 신유박해로 피폐해진 조선 교회의 재건을 위해서 무진 애를 썼던 분입니다. 위험을 무릅쓰고 북경까지 왕복 5천리의 길을 아홉 차례나 다녀오고, 마침내 교황청에 청원서를 보내어 앵베르 주교님을 비롯한 선교사들의 영입과 조선교구가 설정되는 데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습니다. 체포된 후에도 자신이 저술한 ‘상재상서’라는 글을 통해서 박해자들에게 천주교의 입장을 밝히며 박해를 그치도록 역설하였습니다. 악조건 속에서도 하느님과 교회를 위해 일신의 안위를 아랑곳하지 않았던 성인을 생각하면 좋은 조건에서도 바쁘다, 피곤하다는 핑계로 신앙생활을 소홀히 하는 우리 자신이 부끄러울 뿐입니다.

순교 성인들은 끝까지 지조를 지켰습니다. 그들은 고통 후에 큰 축복을 주실 하느님께 희망(제1독서)을 두고, 그분의 사랑이 늘 자신들과 함께 있다는 것(제2독서)을 굳건하게 믿으면서 죽기까지 신앙을 버리지 않았습니다. 우리도 순교 성인들의 후손답게 지조 있는 신앙인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들이 박해에 굴하지 않고 지조를 지켰듯이 우리는 그릇된 세태에 맞서 지조를 지켜야 할 것입니다. 부와 출세, 권세를 얻기 위해서 인간 사이의 신의는 물론 신앙마저도 저버리는 것이 요즘의 세태입니다. 지조 있는 신앙인이라면, 비록 손해를 보더라도 세속의 영화보다는 하느님께 희망을 둘 것입니다. 또한 남을 생각하지 않고 자신의 욕망과 이익만을 쫓아가는 것이 요즘의 세태입니다. 지조 있는 신앙인이라면, 설령 어리석다는 소리를 듣더라도 하느님의 뜻대로 이웃과 교회를 위해 자신을 나누어줄 것입니다. 지조를 지킨 신앙인에게는 영원한 생명이 상급으로 기다리고 있습니다.

손희송 베네딕토 신부
  | 1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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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의 사막에서 꿋꿋이 신앙을 전파한 순교성인들

언젠가 그동안 보지 못했던 친구 수사를 만나 그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는 몇 년 동안 미국 남서쪽의 어느 사막 한가운데 있는 수도원에 살면서 진정한 수도승의 삶을 살고 있다고 말하였습니다. 그러면서 디비디(DVD) 하나를 주었습니다. 다름 아닌 그가 살고 있는 사막 수도원의 전경과 하루 일과, 그리고 함께 살고 있는 수도승들의 모습 등을 찍은 것이었습니다. ‘세상에 아직도 저런 곳이 있구나!’ 저는 감탄했습니다. 단순하면서도 고독한 모습 속에 기도와 노동으로 세상을 정화시키는 수도원의 모습이 정겨웠습니다.

세상과 스스로 격리된 삶, 고독과 적막 속에 하느님을 찬미하는 사막 한가운데의 수도승 삶은 현재 우리의 생활과는 꽤 다른 삶이었습니다. 그 후 일 년 정도가 흐른 뒤, 그에게서 메일 한통이 전해 왔습니다. 사막 체험 3년을 마치면서 사막은 공간적이고 지리적 사막이 아니라, 마음의 사막이라고 깨달았다고 합니다. 그래서 다시 한국 수도원으로 와서, 또 다른 사막에서의 삶을 시작한다고 말했습니다. 마음은 얼마든지 고독하고 외로울 수 있습니다. 그런 마음의 사막에서 주님께 바치는 기도는 참으로 절박하고 힘이 있는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오늘은 한국 순교자 대축일입니다. 순교자들도 역시 당시 박해라는 고독과 고난의 사막체험을 뼈저리게 했습니다. 그들은 박해하는 자를 피해, 산골짜기에서 옹기를 구워 생기를 유지하면서 자신들의 신앙을 묵묵히 지키며 살았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박해라는 사막에서 그것을 피하기만 하지 않았습니다. 적극적으로 사막 속으로 들어 갔습니다. 서슬 퍼런 칼날 속에서도 순교자들은 신앙을 전파하였습니다. 친척들을 입교권면하고, 나아가 촌락을 선교하여 ‘교우촌’을 형성할 정도였습니다. 그들은 또한 자녀들에게 구전으로 “성경직해”, “천주가사”의 교리를 가르치면서 굳건한 신앙을 이어갔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박해라는 사막도 없습니다. 그렇다고 수도승처럼 사막 속에서 살면서 고독을 인내하며 하느님을 찬미할 수도 없습니다. 그러나 그 친구 수사의 말이 생각납니다. “마음의 사막”이 오늘날 우리가 찾을 수 있는 박해입니다. 세상살이 속에서 체험되는 고독과 소외 그리고 아픔 등은 우리의 사막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피하기 위해 주님께 기도합니다. 하지만 적극적으로 그 속에서 주님을 만날 수 있도록 하면 어떻겠습니까? 박해시기에 그것을 피하지 않고, 신앙 전파에 온 힘을 쏟으신 순교자들처럼 말입니다. 세상의 고독과 아픔이라는 사막 속에서 우리는 더욱 하느님을 찬미하고 더욱 열심히 전교하여, 우리 신앙을 빛내면 어떻겠습니까?

그런데 미국의 사막에서도, 박해라는 사막에서도, 좌절하지 않고 하느님을 찬미하면서 신앙을 지킬 수 있었던 것은 ‘공동체’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나 홀로만 체험되고 아파하는 사막이 아니라, 나를 위안하고 보호하는 수도승들의 공동체가 있었고, 같은 신앙을 나누었던 선조들의 신앙 공동체가 있었기 때문에, 그 사막에서 주님께 의지 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 역시 현대의 사막에서 나 혼자 느끼는 적막감이 아니라, 신앙 공동체와 함께 그 사막속에서 주님을 체험하고 만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그 공동체 속에서 주님을 믿고 고백하는 신앙인이 되었으면 합니다.

양해룡 사도요한 신부
  | 09.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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준비 된 순교 준비된 배교

‘무엇을 위해 사느냐?’ 하는 질문은 ‘무엇을 위해 죽을 수 있느냐?’ 하는 질문과 같은 질문입니다. 오늘은 하느님 신앙을 위해 목숨 바치신 우리나라 순교자들을 기리는 날 입니다. 우리는 순교자들의 후예입니다. 그러나 과연 우리는 순교할 수 있는 신앙인인지 묻고 싶습니다.

순교는 참 어려운 결단입니다. 낭만적으로, 감성적으로, 즉흥적으로 이루어지는 일이 결코 아닙니다. ‘후미에(踏繪)’라는 것이 있었습니다. 일본 에도(江戶)시대에 천주교 신자들을 배교시킬 때 사용했던 구리로 만든 성상(聖像)입니다. 그것을 밟고 지나가면 배교이고 목숨을 건집니다. 그런데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그것을 밟고 지나갔는지 성상의 예수님, 성모님 얼굴이 다 닳아 없어졌답니다.

순교는 어려운 일입니다. 참 신앙을 살아온 사람만이 순교할 수 있습니다. 마음과 목숨과 정신을 다하여 하느님을 사랑하며 벗을 위하여 목숨 바치는 사랑실천이 참 신앙입니다. ‘예.’ 할 것은 ‘예.’ 하고 ‘아니오.’ 할 것은 ‘아니오.’ 하는 것이 참 신앙입니다. 부모를 부정하며 그 가정에서 살 수 없고, 국가이념을 부정하며 그 나라에 살수 없듯이, 생명의 창조주 하느님을 부정하면서 생명을 부지할 이유가 없다는 믿음이 참 신앙입니다. 이런 참 신앙만이 순교를 가능하게 합니다.

배교도 갑자기 이루어지는 일이 아닙니다. 준비된 배교입니다. 하느님을 찾지 않고 ‘무엇을 먹을지, 무엇을 마실지, 무엇을 입을지’를 먼저 걱정하는 삶, 자기 가정의 안정과 건강을 위해서만 하느님을 찾는 삶, 재물과 명예를 지키려고 하느님도 포기하는 삶, 좋은 머리로 때로는 하느님을 이용하고 하느님과 거래하고 자신의 욕심을 합리화하는 삶, 이런 삶이 배교를 준비하는 삶입니다. 모래 위에 지은 집 같은 신앙입니다.

요즈음 주일미사 참례자수가 대개 전체신자의 ⅓ 수준이랍니다. ⅔의 신자분들은 주일에 어디 가신 걸까요? 신앙인으로서 신자공동체에 속하고 그 의무를 다하는 일은 취미생활이나 친교모임을 하는 것과 전혀 다른 일입니다. 그것은 하느님의 아들 주 예수 그리스도의 목숨을 나누어 먹고, 우리도 목숨 바쳐 사랑하기를 다짐하고 실천하는 일입니다. 우리가 테니스를 치지 못하게 한다고, 자전거를 타지 못하게 한다고 목숨을 내놓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신앙생활은 매일 매일 목숨 걸고 하느님을 선택하는 치열한 여정입니다. 힘든 선택이지만 세상이 주는 평화가 아니라 참 평화를 얻는 길입니다.

우리는 신앙선조들께서 목숨 바쳐 보존하여 물려주신 신앙을 누리고 있습니다. ‘하느님을 모릅니다.’ 그 한 마디 말을 차마 못해 재산과 명예 모두 버리고, 멀쩡한 하늘 아래 자녀들이 보는 앞에서 망나니 칼에 목을 내민 분들의 신앙입니다. 우리가 하느님께 영광 드리고, 세상을 아름답게 만들고, 자녀들에게 참된 인생길을 가르쳐 주게 할 소중한 신앙인 것입니다.

고찬근 루카 신부
  | 09.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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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최초의 사제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은 사형 집행 전 마지막 설교를 했습니다. “나의 마지막 때가 왔습니다. 나는 천주님을 위해 죽습니다. 이제 영원한 생명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여러분도 죽은 후 행복을 찾으려면 천주님을 믿으십시오.” 설교가 끝나고 김 신부님은 의연하게 관리들을 향해 “자! 이렇게 하면 나의 목을 쉽게 자르겠느냐?”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마지막까지 흔들리지 않던 기백과 용기는 주변 사람들을 감동시켰습니다. 이모든 것은 하느님께 대한 굳은 믿음으로 가능했습니다.

한국 가톨릭 교회에는 김대건 안드레아 성인을 비롯한 103위의 순교성인이 계십니다. 103명 중 79명은 1925년 에, 그리고 24명은 1968년에 시복된 후 1984년 한국 천주교회 창설 200주년을 기념해 방한하신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5월 6일 모두 성인품에 오르게 되었습니다. 9월 순교자 성월을 맞아 많은 분들이 순교성인들의 굳은 신앙을 되새기며 성지를 순례합니다.

그런데 우리나라의 최대 순교 성지는 어디일까요? 바로 서소문 밖 네거리, 현재의 서소문 근린공원(서울 중구 의주로) 일대입니다. 조선 시대 남소문(현재의 광희문)과 함께 서울 도성의 유해를 성 밖으로 운반하는 곳이었던 서소문 밖 네거리는 신유(1801년)·기해(1839년)·병인(1866년) 박해를 거치며 가장 많은 천주교우들이 처형된 한국 최대 순교지입니다. 103위 성인 가운데 44위, 125위 하느님의 종 가운데 21위가 이곳에서 신앙을 증거하며 처형되었으니 국내 최대이자 세계적 성지라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닙니다. 우리나라 최초의 영세자 이승훈을 비롯해 정약종, 최창현, 강완숙 등 초기 교회의 대표적인 평신도 지도자들이 순교의 피를 흘린 곳이 바로 이곳 서소문입니다.

1984년 103위 순교성인 시성을 기념해 서소문 근린공원 내에 ‘순교자 현양탑’을 세우고 많은 신자들이 성지를 찾아 기도를 바치고 있습니다. 그런데 서소문 근린공원 지하에는 재활용품 집하장과 공영주차장 등이 위치하고 있고, 철길로 가로막혀 접근이 쉽지 않습니다.

서소문 성지는 학문 연구를 통해 신앙을 찾고 자발적인 노력으로 교회를 세우고 신앙을 실천했던 대부분의 평신도들의 순교지라 할 수 있습니다. 교회사뿐 아니라 사회, 종교, 근대사적 가치를 지닌 서소문 순교 문화역사공원 조성이 된다면 세계 최대 천주교 순교성지가 될 뿐 아니라 우리나라의 국격을 높이게 될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 무엇보다 먼저 우리 신자 모두가 한마음으로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이곳이 우리 신앙인에게 얼마나 소중한 곳인지 잘 알아야 할 것입니다. 순교성인들의 정신을 본받기 위해 우리 신앙인들 각자가 자신의 자리에서 신앙생활을 성실하게 해야 할 것입니다. 순교 성인들의 후예답게 이 어지럽고 혼탁한 세상에 신앙의 빛을 전하고, 복음을 증거하는 참 신앙인이 되도록 더한층 노력해야 하겠습니다. “한국의 순교성인들이여, 저희를 위하여 빌어주소서. 아멘.”

서울대교구 허영엽 신부
  | 09.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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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 좀 내 주실 수 있으신지요?

우리는 지난 8월16일 시복된 124위 복자(福者) 탄생과 더불어 1984년 시성된 103위 성인을 모시고 있습니다. 신앙의 선조들 덕분에 자랑스럽고 행복한 신앙을 느끼고 있습니다. 감사할 따름입니다. 오늘 우리가 기억하는 성 인들의 당시 신분계층을 보면 농민, 공인(工人), 역관(譯官), 군인(軍人), 관리, 무직(無職)의 여성, 성직자, 회장(會長) 등 다양합니다. 그 중에 역관으로 성직자 영입을 위해 힘쓰던 유진길의 아들이었던 유대철 베드로(1827~1839)는 한국 순교 성인 103위 중에서 가장 나이가 어린 소년(당시 13 세)입니다. 박해가 일어나자 그의 마음속에는 순교에 대한 열망이 강하게 일어나 스스로 관가에 찾아 갔다고 합니다. 좀 더 긴 인생을 살 수도 있었는데 나머지 시간을 하느님께 맡겨버립니다.

우리가 잘 아는 김대건 신부님(1821~1846)도 20대 나이 에 신부가 되어 1년 남짓 사제 생활 후 순교의 길을 선택 하셨습니다. 또 다른 모든 순교자분들께서도 결국 이 세상의 시간을 기꺼이 자신을 위해 남겨 두지 않고 내어 놓으셨습니다. 순교자들은 자신의 나머지 인생과 더 누릴 수 있는 자신의 ‘시간’을 하느님께 바쳤습니다. 그렇습니 다! 삶의 시간을 봉헌하는 것이 순교의 한 모습일 수 있습니다.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은 ‘시간이 돈이다.’라고 할 정 도로 시간에 아주 인색합니다. 누군가에게 시간 좀 내어 달라고 하는 것은 조심스럽기 짝이 없는 요구가 되었습니다. 입에 붙어있는 말이 ‘바쁘다’, ‘시간이 없다’ 등입니다.

다른 이들에게 시간 없다는 말을 달고 살면서 바쁜 내 모 습을 보며 내가 중요 인사가 된 착각조차 즐거워(?) 하기도 합니다. 자기만을 위한 시간 쓰기에 흠씬 빠져서 삽니다.

나의 하루 24시간은 어떻게 분배되는지 한번 살펴보시길 바랍니다. 분위기 좋은 음식점이 있다고 하면 기가 막히게 찾아갑니다. 멀어도 갑니다. 산 넘고 물 건너 요리조리 골목을 헤매서라도 찾아갑니다. 그러나 성당이 조금 외진 곳에 있고, 주차가 좀 힘들고, 걷는 시간이 걸린다면 너무 일찍 성당 가는 것을 포기합니다. 술 한 잔 하는 시 간은 두세 시간이 가볍게 흘러도 아깝지 않고, 성경 공부를 생각하면 시간도 없고 허리도 아픈 것 같습니다. 내가 아쉬울 때는 누군가의 도움이 절대적으로 필요한데, 누군 가 어려움을 말해올 때는 왜 그리 바쁠 것 같은 일들이 머릿속 가득히 떠오르는지 모르겠습니다. 결론은 ‘다음에 뵙죠….’ 하고 도망치듯 사리지는 것입니다. 하느님과 이웃 에게 내어줄 수 없는 ‘시간에 대한 인색함’은 우리 삶을 서 로 삭막하게 만들었습니다.

타인을 위해, 하느님을 위해, 시간을 조금씩 더 내어놓도록 합시다. 우리도 순교자의 후예답게 ‘시간 순교’를 합 시다. 그래서 우리 서로 삭막하지 않은 세상을 만들어 봅시다.

<서울대교구 강귀석 신부>
  | 09.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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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하느님을 소유한 사람은 하느님만으로 만족하도다.

1. “단련 받은 뒤에 은혜를”(제1독서: 지혜 3,5 참조)지난달 8월에 스페인의 ‘엘 까미노 데 산티아고(ElCamino de Santiago)’를 도보순례하고 왔습니다. 저를 포함하여 30명이 6일간에 걸쳐 약 120Km를 걸었습니다. 저희는 이 여정(旅程)을 마친 뒤에 가진 체험 나눔을 통하여, ‘까미노’는 ‘만남, 다짐, 인생, 성장, 사랑, 뺄셈, 바른길, 살리는 길, 자유, 채움, 화살표, 새로운 시작, 행복, 출발, 여유,이별, 나눔, 여럿이 또 혼자, 숙제, 독립, 감사, 떠남, 여정, 선물, 환희, 짬뽕, 놀라움, 소리, 동행, 비움, 버림’이라고표현해 보았습니다. 저는 이 모든 표현이 ‘하느님과의 만남’ 안에 수렴(收斂)된다고 생각합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는 하느님을 온전히 믿고 충실히 따른영혼들이 누리게 되는 은총과 자비의 여정을 생생하게 보여줍니다. 비록 그 여정에는 분명히 단련을 받는 과정이 따르겠지만, 마침내 하느님을 만나서 큰 은혜를 누리게 되는 길이라고 「지혜서」는 깨우쳐줍니다.

2. “누가 우리를 대적하겠습니까?”(제2독서: 로마 8,31) 오늘 제2독서를 통하여 바오로 사도께서는 자신은 하느님께서 우리 편이시라고 확신하기 때문에, 감히 이 세상의 그 어떤 피조물도 우리를 그분의 사랑에서 떼어 놓을 수 없다고 단언하십니다. 이와 같은 가르침을 성 정하상(丁夏祥)바오로께서도 「상재상서(上宰相書)」에서 다음과 같이 명쾌하게 지적하십니다. “이 몸이 한번 죽으면 부귀공명(富貴功名)도 반드시 허무(虛無)로 돌아가고 맙니다. 부귀공명마저 일평생 애써도 얻지 못하는 것인데 이 헛된 꿈을 깨기가 그다지 어렵단 말입니까?” 이 때문에 성인께서는 “오직 스스로 잘못을 고치고 새로운 사람이 되어 천주의 계명을 지키려는 것 뿐”이라고 당당히 하느님께 대한 신앙을 고백하셨습니다.

3. “나 때문에 자기 목숨을 잃는”(복음: 루카 9,24)작년 광화문 광장에서 봉헌된 시복미사 강론에서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는 “순교자들은 그리스도를 모든 것 위에최우선으로 모신” 분들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또한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님께서는 “순교자들은 예수 그리스도와의 만남 안에서 인생의 진리를 발견하신”(「신앙과 이성」 32항 참조) 분들이라고 가르쳐주셨습니다. 참으로 순교자들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와의 만남을 통하여, 그분만이 자신의 인생을 진정으로 채우실 수 있는 분임을 깨달으셨습니다. 그래서 우리 103위 순교성인들께서도 ‘주님 때문에’ 자신의 목숨을 초개(草芥)와 같이 버릴 수 있었습니다.

4. 교형자매 여러분, 오늘 우리 순교성인들의 대축일을 지내면서 이제는 우리가 그분들처럼 피를 흘려 신앙을 고백하지는 못할지라도, 오직 ‘하느님과의 만남’을 통하여 자신을 온전히 채울 수 있는 ‘순교자적 삶’을 택하는 믿음을 배워야 하겠습니다. 부디 여러분 모두가 우리 순교성인들을 본받아 항상 자비와 은총의 하느님을 만나는 여정을 은혜롭게 걸어가시길 빕니다. 아멘.

► 2015년 9월 20일 서울대교구 정연정 신부
  | 09.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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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자신을 버리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도대체 이해하기 어려운 말씀입니다. 누구든지 당신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따르라니요.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목숨을 잃는 사람은 또 목숨을 구한다니 이게 대체 무슨 말씀입니까?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파견하시면서 “지팡이도 여행 보따리도 빵도 돈도 여벌 옷도 지니지 마라’(루카 9,3)고하신 것까지는 그래도 이해해 보겠습니다. 하지만 이번에는 아예 ‘자신을 버리라’고 하시네요! 도대체 자신을 버린다는 것이 무슨 뜻입니까? 그리고 막상 자신을 버린다면 십자가는 누가 어떻게 지나요?

얼마 전 저는 어떤 분들과의 대화 중에, 제가 해야 할 일을 그저 ‘하고 싶지 않다’는 이유로 안 하겠다고 결심한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그런데 그것은 제가 당연히 해야 할 일이고 필요한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거기에 이기적인 제 ‘마음’이 끼어들었던 것입니다. ‘에이~그냥 하지 말자!’라고 말입니다. 무슨 일이든 자기 마음대로가 아니라, 그것이 필요한 일인지, 또 꼭 해야 할 일인지를 살펴 ‘無心히’ 하는 것이 중요한데도 말입니다. 하지만 그 앞에서 ‘제 마음’은 이것저것을 따집니다. 이 ‘따지는 마음’이 문제입니다. 이 마음은 정 반대 방향으로도 저를 유혹합니다. 예를 들어 필요도 없고, 해서도 안 되는 일을 ‘한번 해보라’고 자꾸 부추깁니다. 말하자면 해야 할 것은 못하게 하고, 해서는 안 될 일은 자꾸 하라고 충동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맡겨 주신 삶, 일, 시간, 재물 등을 주님의 뜻대로 처리하고 살아야 하는데, 거기에 자기 마음, 욕심이 개입되어서 자기 좋은 대로만 행동한다면 주님의뜻을 헤아릴 수도 없고, 그분을 따르지도 못하게 됩니다.그런 마음이 곧 죄입니다. 그러니 그 마음을 버려야 합니다. 그렇게 보면 오늘 주님 말씀에 공감이 갑니다. 내 뜻, 내 방식이 아니라 주님이 원하시는지, 이웃과 공동체에 필요하고 유익한 일인지를 먼저 생각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것에 비추어 내 ‘마음’ 곧 ‘자기를 버리고’, 무심하게(!) 주어진 길을 가는 것이지요.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따르라’고 하셨는데, ‘날마다’라는 구절이 저에게는 위로가 됩니다. 언제일지는 몰라도 세상 떠날 때까지, 저를 버리고 그분을 따를 기회가 아직은 남아있음을 상기시켜주기 때문입니다. 어제의 실패를 오늘은 만회할 기회가 있는 것이니, 오늘이 또한 얼마나 소중한 은총의 기회입니까?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와 성 정하상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들은 오늘 복음 말씀에 딱 들어맞는 분들이십니다. 세상과 자신에 대한 애착을 내려놓으시고 오직 주님만을 선택하셨으니 말입니다. 한국의 모든 순교 성인들이여, 저희도 주님만을 따를 수 있도록 빌어주소서. 아멘.

▮ 서울대교구 유경촌 티모테오 보좌주교 : 2016년 9월 1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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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고통 안에 함께 계시는 주님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문득 ‘날마다’라는 단어에 시선이 머무릅니다. 주님을 따르는 길이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걸어가야 하는 삶이라는 것을 모르지 않는 우리이지만, 그 고통의 십자가를 ‘날마다’짊어져야 한다는 데 생각이 미치면, 가벼운 한숨이 나오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예수님이 ‘나를 따르기만 하면 모든 고통과 수고로움에서 해방시켜주마’라고 말씀해주신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하지만 고통은 사실 누구에게나 어김없이 주어지는 보편적인 삶의 현실입니다. 부자든 아니든, 사회적 지위가 높든 낮든, 어른이든 아이이든, 여자든 남자든, 모두가 나름의 고통을 견디어내며 하루하루를 살아갑니다. 우리 신앙인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죠. 우리의 믿음이 우리를 고통의 현실에서 제외시켜주지는 않습니다.

이렇게도 일상적인 우리의 고통이 고통스러운 이유는, 그것의 의미 없음 때문이 아닐까요. 왜 유독 우리 집은 이렇게 불화에 시달려야 하는지, 왜 나에게만 취직의 길은 이리도 험난한지, 왜 내가 집단 따돌림의 피해자가 되어야 하는지 등. 왜 내가 당사자가 되어야 하는지 도대체 이유를 알 수 없는 갖가지 고통의 무게가 우리를 짓누를 때, 숨통을 끊어버릴 듯 달려들어 우리를 질식시키는 것은 바로 그 고통의 무의미함입니다. 왜 이런 고통을 겪고 있는지 이유라도 알았더라면, 극심한 출산의 고통 후에도 그 고통이 이렇게 소중한 아기를 낳기 위함 이었구나 고개를 끄덕이며 미소 짓는 산모처럼 기꺼이 그 고통을 감내할 텐데. 기도하고 애원해도 지겹게도 반복되는 고통의 현실에 우리 영혼은 차츰 지쳐갑니다.

이렇게 힘들어하는 우리에게 예수님은 무의미하게만 보이는 우리 일상의 고통이 사실은 그 안에 심원한 의미를 담고 있는 신비임을 알려주십니다. 곧 고통은, 달리 피할 길이 없기에 감당해야만 하는 부조리한 인간의 숙명이 아니라, 우리가 주님을 따르는 길에서 짊어져야 할 ‘십자가’라는 것입니다. 십자가. 인간에 대한 지극한 사랑 때문에 죽음마저 감내하셨던 예수님 삶의 정수. 당신의 그 십자가 삶에, 예수님은 우리가 우리 자신의 고통을 통해 동참하도록 초대하시는 것입니다. 내가 겪고 있는 고통이 인간 실존의 무의미한 한 단면이 아니라 예수님의 십자가 길을 함께 걸어가는 여정임을 깨달을 때, 우리는 일상의 고통 안에서 나와 함께 계시며 나와 함께 아파하시는 예수님의 현존을 경험합니다.

오늘 우리가 미사에서 기억하는 한국의 순교자들은, 삶의 고통을 십자가 삼아 기꺼이 짊어지고 주님을 따랐던 신앙의 증거자들입니다. 그분들처럼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당신을 따르라는 주님의 말씀에 충실하고자 한다면, 우리도 매일의 삶에서 ‘주님, 제게서 이 십자가들을 거두어주십시오’라고 기도하기보다는 ‘주님, 제가 이 십자가들을 짊어지고 끝까지 갈 수 있도록 힘을 주십시오’라고 기도하는 것은 어떨까요.

▥ 서울대교구 최규하 다니엘 신부 - 2017년 9월 1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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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순교자들의 피는 내 신앙의 씨앗

오늘 한국 교회는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와 성 정하상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들 대축일 미사를 이동하여 경축합니다. 초대교회에서 가장 위대한 신학자 가운데 한 사람이었던 테르툴리아누스는 「호교론」에서 “순교자들의 피는 그리스도교의 씨앗이다”라고 거침없이 선언합니다. 참으로 우리의 신앙은 헤아릴 수 없는 순교자들이 흘리신 피의 대가입니다.

그들은 단련을 조금 받은 뒤 은혜를 크게 얻을 것이다(지혜 3,5)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께서는 순교하시기 얼마 전에 교우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주은(主恩)으로 세상에 나고 주은으로 영세 입교하여 주의 제자 되니 이름이 또한 귀하거니와 실이 없으면 이름을 무엇에 쓰며, 도리어 배주배은(背主背恩)하니 주의 은혜만 입고 주께 득죄(得罪)하면 아니 남만 못하리”라고 하시면서, 신앙을 굳건히 지킬 것을 당부하셨습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는 하느님을 온전히 믿고 충실히 따른 영혼들이 누리게 되는 은총과 자비의 여정을 생생하게 보여줍니다. 비록 그 여정에는 단련을 받는 과정이 마땅히 따르겠지만, 마침내는 하느님을 만나서 큰 은혜를 누리게 되는 길이라고 밝혀줍니다. 왜냐하면 “불사의 희망으로 가득 한 의인들은 하느님과 함께 사랑 속에 살게 될 것”(지혜 3,1-9 참조)이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 우리 편이신데 누가 우리를 대적하겠습니까?(로마 8,31)

성 정하상 바오로 성인께서는 「상재상서(上宰相書)」에서 “이 몸이 한번 죽으면 부귀공명도 반드시 허무로 돌아가고 맙니다. 부귀공명마저 일평생 애써도 얻지 못하는 것인데 이 헛된 꿈을 깨기가 그다지 어렵단 말입니까?”라는 말씀으로 깨우쳐주시면서, “오직 스스로의 잘못을 고치고 새로운 사람이 되어 천주의 계명을 지키는 것”이 우리의 신앙이라고 새겨주셨습니다.

오늘 제2독서에 보면, 사도 바오로께서는 “우리는 우리를 사랑해 주신 분의 도움에 힘입어 이 모든 것을 이겨 내고도 남습니다”(로마 8,37)라는 확신을 드러내십니다. 성서학자 J. 보르톨리니는 「로마서 읽기」에서 “여기서 말하는 승리는 먼 장래에 거둘 승리가 아니다. 현재의 갈등 가운데서 이미 거두고 있는 승리다”라고 설명합니다. 모름지기 우리의 신앙은 일상 안에서 본연(本然)의 모습을 사는 것입니다.

나 때문에 자기 목숨을 잃는 그 사람은 목숨을 구할 것이다(루카 9,24)

2014년 8월 16일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 123위 시복미사 중에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는 “이 땅에 믿음의 첫 씨앗들이 뿌려진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순교자들과 그리스도인 공동체는 예수님을 따를 것인가 아니면 세상을 따를 것인가 중에서 하나를 선택해야만 했습니다. 그들은 엄청난 희생을 치를 각오가 되어 있었습니다. 그들은 오직 그리스도 한 분만이 그들의 진정한 보화임을 알았기 때문입니다”라고 말씀하시면서, 우리가 순교자들의 후손임을 일깨워주셨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군중들에게 “자신을 버리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루카 9,23)고 말씀하시면서, “자기 자신을 잃지 말라”(루카 9,25 참조)고 신신당부하십니다. 이 땅의 우리 순교자들께서 이 길을 이미 사셨습니다. 이제 우리의 결단만이 필요합니다.

박해받은 교회에서 박해받는 교회에게

교형 자매 여러분, 오늘 우리는 순교성인들의 대축일을 지내면서 이제는 우리가 그분들처럼 피를 흘려 신앙을 고백하지는 못할지라도, 오직 ‘하느님과의 만남’을 통하여 자신을 온전히 채울 수 있는 ‘순교자적 삶’을 택하는 믿음을 배워야 합니다. 아울러 지금 이 시간에도 신앙때문에 박해받고 있는 우리 형제들을 기억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지금 이 시간에도 그들이 흘리는 피가 우리 신앙을 굳건히 하는 영적 토대이기 때문입니다. 부디 여러분 모두가 우리 순교자들의 신앙 안에서, “자비로우신 하느님의 사랑을 믿고”(로마 8,37-39 참조) 그분을 따르는 길에 온전히 투신할 수 있는 은총으로 충만하시길 빕니다. 아멘.

▥ 서울대교구 정연정 신부 - 2017년 9월 1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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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매일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는 사람들

중학교 시절 할아버지가 나에게 해주신 이야기가 있었습니다. 아마 그때 내가, “할아버지, 아버지, 작은아버지들, 그리고 친척들 모두 왜 옹기 공장을 하거나 옹기 가게를 하세요?” 할아버지는 잠깐 나를 보시더니 말씀하셨습니다. “이 할아버지의 할아버지가 천주교를 믿으면서 그렇게 되었단다. 나의 할아버지는 지방에서 작은 벼슬을 하고 계셨단다. 그 할아버지의 선조들 중에는 아주 높은 직책에 오른 분들도 있었단다. 그분들은 높은 직책에 있었지만 아주 가난하게 사셨고 사람들에게 존경도 많이 받았단다. 그런데 이 할아비의 할아버지가 천주교를 믿으면서 가족들과 함께 사형을 당했단다. 묘지도 어딘지 모른 채 묻히게 되었고 집안은 풍비박산이 나서 나머지 가족과 친척들은 모두 깊은 산속으로 몰래 숨어 들어가 교우촌을 이루어 옹기를 구워서 입에 풀칠을 했단다. 그래서 지금까지도 우리 친척 중에는 옹기공장과 장사를 하는 분들이 많단다.”

나는 그때 그 이야기가 잘 이해되지 않았지만 더 이상 질문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 당시 할아버지의 표정이 몹시 슬퍼 보였기 때문입니다. 나는 어린 시절엔 옹기 가게를 하는 부모님이 몹시 창피했습니다. 그래서 가능하면 친구들을 우리 집에 데려오지도 않았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흘러 우리 집안이 신앙을 위해 죽은 순교자 집안이란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집안은 망하고 가족들이 흩어졌어도 그때 그 할아버지, 할머니들이 죽음을 불사하고 하느님을 아버지로 선택했던 것입니다. 그분들이 자랑스럽고 믿음의 정신이 내 안에도 흐르고 있음에 감사드립니다.

오늘은 성 김대건 안드레아와 성 정하상 바오로와 동료순교자들 대축일입니다. 교회는 9월을 순교자 성월로 정하고, 오늘 특별히 성 안드레아 김대건과 바오로 정하상과 동료 순교자 대축일을 맞이하여 거룩한 순교자들을 공경하고 있습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매일 자신을 버리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따르라고 하십니다. 이는 자기중심적인 삶에서 벗어나 어려움과 희생을 감수하라는 뜻입니다. 순교자들은 믿음을 위해 하나뿐인 생명을 바쳐 하느님을 증거한 분들입니다. 한마디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산다는 것은 우리 선조들이 보여 주신 순교자적 삶을 사는 것입니다. 순교는 인간의 능력이 아니라 신앙의 힘, 성령께서 내려주시는 은총으로 가능합니다.그래서 신앙인이 된다는 것은 하나의 선택이요 결단입니다. 근본적으로 지금까지의 삶을 송두리째 바꿔야 할지도 모릅니다.

우리는 가끔 이기심에 빠져 자기 자신만을 주장하고 자신이 삶의 주인이 되고자 합니다. 그런데 진정한 신앙인은 내 삶의 주인이 내가 아니라 하느님이심을 고백합니다. 오늘 우리가 공경하는 순교 성인들을 기억하며 그분들의 삶을 본받도록 노력해야겠습니다.

“한국의 성인성녀들이여! 우리를 위해 빌어주소서!”

▦ 서울대교구 허영엽 마티아 신부 : 2018년 9월 2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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