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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 한국 성직자들의 수호자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 순교자(7월 5일) 독서와 복음
조회수 | 2,918
작성일 | 08.07.03
역대기 하권 24,18-22 너희는 성소와 제단 사이에서 즈카르야를 살해하였다.

그 무렵
18 요아스 임금과 유다의 대신들은 주 저희 조상들의 하느님의 집을 저버리고, 아세라 목상과 다른 우상들을 섬겼다. 이 죄 때문에 유다와 예루살렘에 진노가 내렸다.
19 주님께서는 그들을 당신께 돌아오게 하시려고 그들에게 예언자들을 보내셨다. 이 예언자들이 그들을 거슬러 증언하였지만, 그들은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20 그때에 여호야다 사제의 아들 즈카르야가 하느님의 영에 사로잡혀, 백성 앞에 나서서 말하였다. “하느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어찌하여 주님의 계명을 어기느냐? 그렇게 해서는 너희가 잘될 리 없다. 너희가 주님을 저버렸으니 주님도 너희를 저버렸다.’”
21 그러나 사람들은 그를 거슬러 음모를 꾸미고, 임금의 명령에 따라 주님의 집 뜰에서 그에게 돌을 던져 죽였다.
22 요아스 임금은 이렇게 즈카르야의 아버지 여호야다가 자기에게 바친 충성을 기억하지 않고, 그의 아들을 죽였다. 즈카르야는 죽으면서, “주님께서 보고 갚으실 것이다.” 하고 말하였다.

사도 바오로의 로마서  5,1-5 우리는 환난도 자랑으로 여깁니다.
형제 여러분,
1 믿음으로 의롭게 된 우리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느님과 더불어 평화를 누립니다.
2 믿음 덕분에, 우리는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가 서 있는 이 은총 속으로 들어올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하느님의 영광에 참여하리라는 희망을 자랑으로 여깁니다.
3 그뿐만 아니라 우리는 환난도 자랑으로 여깁니다. 우리가 알고 있듯이, 환난은 인내를 자아내고
4 인내는 수양을, 수양은 희망을 자아냅니다.
5 그리고 희망은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받은 성령을 통하여 하느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어졌기 때문입니다.

마태오 10,17-22 너희는 나 때문에 총독들과 임금들 앞에 끌려가, 그들과 다른 민족들에게 증언할 것이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사도들에게 말씀하셨다.
17 “사람들을 조심하여라. 그들이 너희를 의회에 넘기고 회당에서 채찍질할 것이다.
18 또 너희는 나 때문에 총독들과 임금들 앞에 끌려가, 그들과 다른 민족들에게 증언할 것이다.
19 사람들이 너희를 넘길 때, 어떻게 말할까, 무엇을 말할까 걱정하지 마라. 너희가 무엇을 말해야 할지, 그때에 너희에게 일러 주실 것이다.
20 사실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라 너희 안에서 말씀하시는 아버지의 영이시다.
21 형제가 형제를 넘겨 죽게 하고 아버지가 자식을 그렇게 하며, 자식들도 부모를 거슬러 일어나 죽게 할 것이다.
22 그리고 너희는 내 이름 때문에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다. 그러나 끝까지 견디는 이는 구원을 받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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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은 1821년 8월 21일 충남 당진군 우강면 솔뫼 마을에서 태어났습니다. 피난 교우였던 부친 김제준 이냐시오와 모친 고 우르술라 사이의 장남이었습니다. 16세 때인 1836년 모방 신부에게 신학생으로 발탁되어 최양업 토마스, 최방제 프란치스코와 함께 ‘마카오’에서 공부하게 됩니다.

오랜 세월 숱한 고생 뒤에 마침내 사제품을 받습니다. 1845년 8월 17일 상하이 인근의 김가항 성당에서 페레올 주교가 집전한 서품식이었습니다. 그러고는 즉시 8월 31일에 조선 입국을 시도합니다. ‘라파엘 호’라 명명한 작은 목선으로 서해 횡단을 감행한 것입니다. 그리하여 1845년 10월 12일 충청도 나바위 인근 바닷가에 상륙하였습니다. 이후 선교 활동에 힘쓰며 선교사들의 입국을 위해 노력합니다.

이듬해 6월, 서해를 통한 뱃길을 알아보려 백령도 부근으로 갔다가 관헌에 체포됩니다. 수차례 문초와 회유를 받았지만 끝내 변치 않았습니다. 마침내 군문효수형을 받고 한강 백사장에서 순교합니다. 사제 생활 1년 1개월 만인 1846년 9월 16일의 일이었고 당시 나이 26세였습니다.

그분이 한국의 첫 사제였기에 성인으로 모시는 것은 아닙니다. 첫 사제답게 사셨기에 성인으로 받들고 있습니다.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은 그토록 어렵게 사제가 되셨지만 기꺼이 교회의 거름으로 자신을 바쳤기에 우리는 섬기고 있는 것입니다.

매일미사 2009년 7월
  | 07.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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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첫 사제 김대건 안드레아 성인은 1846년 9월 16일 장렬히 순교하셨습니다. 다음은 순교하시기 전, 신자들에게 보낸 ‘옥중 서신’의 일부입니다.

“여기에 갇혀 있는 몇몇 교우들은 하느님의 은총으로 잘 있습니다. 그들이 사형을 받게 되면 그 가족들을 잊지 마십시오. 여러분에게 할 말이 많습니다만, 그것을 어떻게 편지로 다 말할 수 있겠습니까? …… 우리는 얼마 안 있어 싸우러 나갑니다. 제발 여러분은 덕을 닦아 하늘 나라에서 만납시다. 내가 잊을 수 없는 사랑하는 교우들이여, 이 험한 시기에 쓸데없는 걱정을 하지 마십시오. 밤낮으로 천주의 도움에 힘입어, 세 가지 원수, 즉 세 가지 욕정과 싸우고, 박해를 인내로 견디어 나가며, 천주의 영광을 위하여, 남아 있을 이들의 구원에 힘쓰십시오. …… 재앙으로 인하여 겁을 내지 마시고, 용기를 잃지 말고, 천주를 섬기는 데에 뒷걸음치지 말며, 오히려 성인들의 뒤를 따라 교회의 영광을 더하고, 여러분이 주님의 참된 군인이고 선택된 백성이라는 것을 보여 주십시오. 비록 여러 사람일지라도 여러분의 마음은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애덕을 잊지 마시고, 서로 참고, 서로 도우며, 천주께서 여러분을 불쌍히 여기실 때를 기다리십시오. 시간이 없어서 더 쓰지 못하겠습니다. 사랑하는 교우들이여, 여러분을 천국에서 만나 함께 영원한 복을 누리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에게 간절한 인사를 드립니다.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성 김대건 신부 가문의 순교자들과 증거자들』, 392-393면).

매일미사 2010년 7월
  | 07.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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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매에 걸린 시어머니를 모시고 사는 어느 여교우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는 몇 년 동안 시어머니의 대소변을 받아 내면서 지냈습니다. 시간이 흐르면서 치매 환자를 돌보는 것이 그에게 벅찬 짐이 되었습니다. 너무도 힘든 나머지 심지어 죽고 싶은 마음까지도 들었답니다. 그는 자신의 신세를 원망하며 왜 이러한 고통을 겪어야 하는지 예수님께 따졌답니다.

어느 날 그는 하도 힘이 들어 혼자서 엉엉 울었답니다. 그런데 시어머니가 다가와서는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얘야, 왜 울고 있느냐?” 하고 말씀하시더랍니다. 그 순간 그는 예수님의 무덤 밖에서 울고 있는 마리아에게 천사가 한 말이 생각났습니다. “여인아, 왜 우느냐?”(요한 20,13) 그는 ‘이분이 바로 예수님이시구나!’라는 생각이 퍼뜩 들더랍니다. 그 뒤로는 시어머니를 모시는 일이 바로 예수님을 모시고 사는 것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답니다.

오늘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의 대축일을 맞이하여 ‘이 시대의 순교란 무엇인가?’ 생각해 봅니다. 요즈음 우리 시대에는 김대건 신부님 당시의 박해는 없습니다. 그러나 이 시대에도 여전히 순교자들이 있습니다. 가정에서 치매 든 어르신을 모시고 사는 이들, 장애인과 함께 살면서 그들을 정성껏 돌보는 이들이 이 시대의 사랑의 순교자들이라고 생각합니다.

매일미사 2012년 7월
  | 07.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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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렉시오 디비나에 따른 복음 묵상 ▬

거센 풍랑에 중형 기선이 나뭇잎처럼 파도에 흔들리고 있었습니다. 승객들은 공포와 불안에 떨었습니다. 살아있다는 생각마저도 없어졌습니다. 그런데 한 어린 아이만은 파도 구경이 재미있다는 듯이 태연하게 즐기고 있는 것입니다. 하도 이상해서 중년 여성이 아이에게 묻습니다. “얘야, 너는 무섭지도 않니?” 했더니 그 아이는 “아니오. 아주머니는 무서운가요?”라고 되묻자 그녀는 “무섭다마다, 나는 죽을 지경이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아이는 “전 아무렇지도 않아요. 우리 아버지가 이 배의 키를 잡고 계시거든요. 우리 아버지는 일등 선장이세요. 그러니 걱정 마세요. 아주머니도 무사하실 거예요.”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거센 풍랑 속에서도 공포에 떨지 않는 아이는 아버지가 일등 선장이라는 사실을 믿고 신뢰하기 때문에 가능한 것입니다. 우리는 내 능력 안에서 할 수 있는 일들은 걱정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내 능력 밖의 거센 풍랑이 닥치면 걱정을 합니다.

노먼 빈센트 필 박사는 ‘쓸데없는 걱정’ 이라는 글에서 한 연구기관의 조사를 인용해 다음과 같이 밝혔습니다. 사람이 걱정하는 것 중에 실제로 일어나지 않을 사건에 대한 걱정이 40퍼센트, 이미 지나간 과거 사건에 대한 걱정이 30퍼센트, 별로 신경 쓰지 않아도 될 것에 대한 걱정이 22퍼센트, 걱정의 4퍼센트는 우리가 바꿔놓을 수 있는 일에 대한 것이고, 나머지 4퍼센트는 우리 힘으로는 어찌할 도리가 없는 일에 대한 것이라고 합니다. 결국 우리가

해결해야 할 걱정은 4퍼센트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96퍼센트의 쓸데없는 걱정으로 기쁨도 웃음도 마음의 평화도 잃어버린 채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열두 제자를 가까이 부르고 그들에게 파견 받은 이의 자세와 각오를 말씀해 주셨습니다. 제자들이 복음을 알지 못하는 이들에게 복음을전하러가는것은마치양을이리떼가운데보내는것과 같다고하시며 너희는 “뱀처럼 슬기롭고 비둘기처럼 순박하게”(마태 10,16)되고 “사람들을 조심”(17절)하며 “사람들이 너희를 넘길 때, 어떻게 말할까, 무엇을 말할 까 걱정하지 마라. ”(19절)하고 특별한 당부를 하셨습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쓸데없는 걱정을 하며 살아갑니다. ‘걱정도 팔자다. ’ 란 속담이 있듯이 우리는 날마다 걱정이란 물동이를 머리에 이고 근심이란 멍에를 지고 살아갑니다. 우리는 문제가 생기면 걱정부터 합니다. 최근 들어 부쩍 많이 사용하는 단어가 있다면 아마도 ‘스트레스 ’ 일 것입니다. 스트레스는 일종의 걱정이 만들어 낸 부산물입니다. 몸이 건강해도 암에 걸릴까 걱정하고, 재산이 많아도 그 재산을 관리하기 위해 걱정, 지금 행복하면서도 혹시 불행이 찾아들까 걱정을 합니다. 사랑하는 순간에도 그 사랑이 어느 날 떠나버릴까봐 걱정합니다. 집에 있어도 걱정, 나가 있어도 걱정입니다.

이렇게 걱정을 안고 살아가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 이유는 모든 것을 주님께 맡기고 신뢰하며 살지 않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걱정은 어떠한 경우에도 우리 삶에 긍정적으로 작용하지 않습니다. 걱정은 문제를 해결하기는커녕 건강을 해칠 뿐만 아니라, 주님의 말씀 안에서 성장하는 것을 가로 막습니다. 사탄이 우리에게서 주님의 말씀을 앗아가는 것 중에 하나가 바로 ‘걱정’ 입니다. 계속적인 걱정은 ‘교만’ 과 같습니다. 이는 문제 해결에 주님이 필요 없음을 뜻합니다. ‘겸손’ 은 주님께 의지하는 것이지만 걱정은 우리가 자신을 돌보려는 행위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문제를 감당할 수 없습니다.

우리의 모든 문제를 주님 발 앞에 내려놓고 주님께 맡기면 주님께서 친히 내 삶을 도와주시고 책임져 주십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기회 있을 때 마다 “네 길을 주님께 맡기고 그분을 신뢰하여라. 그분께서 몸소 해주시리라. ”(시편 37,5) “네 근심을 주님께 맡겨라. ”(55,23) “네가 하는 일을 주님께 맡겨라. 계획하는 일이 이루어질 것이다. ”(잠언 16,3)라고 우리 삶을 당신께 맡기라고 당부하십니다. 맡긴다는 것은 위탁한다는 뜻입니다. 마치 환자가 의사에게 몸을 맡기는 것과 같습니다. 의사가 환자에게 고혈압 증세를 일주일 동안 기록하라고 하면 그대로해서 의사에게 보고하는 것과 같이 주님께 순종하고 보고하는 것입니다. 주님께 모든 것을 맡긴다는 것은 주님께 생활 속에 일어나는 모든 것을 보고하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내 삶을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 맡겨드려야 합니다. 내 삶을 내가 살겠다고 하면 나는 ‘과거의 짐, 현재의 짐, 미래의 짐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무엇을 마실까? 어떻게 살까?’ 를 내가 짊어지고 가야 합니다. 우리의 삶을 주님께 맡기느냐, 않느냐에 따라 우리의 행복과 불행이 결정됩니다. 주님께 맡기고 사는 사람은 기쁨과 감사와 축복의 삶을 살게 되지만, 주님께 맡기지 못하는 사람은 걱정과 불안과 절망 속에서 살 수밖에 없습니다. 어떤 문제로 고통당하고 좌절과 실의에 빠져 있는 상황에 처한다 하더라도 “보라, 내가 세상 끝 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 ”(마태 28,20)라고 약속하신 주님의 말씀을 신뢰해야 합니다. 더욱이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 ”(11,28) 라고 하신 주님의 약속을 굳게 믿고 의지해야겠습니다. 그러면 주님께서는 나의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책임지고 무거운 짐까지 맡아주 주실 것입니다.

창조주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선택할 수 있는 자유의지를 주셨지만 내가 주님께 90퍼센트만 맡기고 10퍼센트 수고하기를 원하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자유의지 100퍼센트를 온전히 맡기길 원하십니다. 이렇게 온전히 맡겼을 때 주님께서는 우리의 삶을 주관하십니다. 또한 주님께서는 우리의 삶 전부를 맡기는 것을 기뻐하십니다. 우리는 주님께서 인도하시는 길을 따라가도록 우리 삶을 성령께 맡겨야 합니다. 날마다 주님의 말씀을 신뢰하며 그 말씀을 따라 한 걸음, 한 걸음 걸어가도록 은혜를 청합시다.

▦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 수녀회 정애경 수녀
  | 07.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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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자들은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음을 전하기 위해 파견되었습니다(7절). 사람들을 가르치고 그들의 아픔을 치유할(8절) 소명을 받은 제자들입니다. 그들은 목자 없는 양들처럼 이리 떼 가운데 보내집니다(16절). 오늘 복음은 제자들이 장차 당하게 될 고통과 그 고통에 어떻게 맞서야 하는지를 비장한 어조로 당부합니다.

“사람들을 조심하여라.”(17ㄱ절) 세상은 하느님의 계획대로 돌아가 주지 않습니다. 온갖 차원의 불평등과 불의가 주변에 도사리고 있어, 예수님의 일과 제자들의 실천은 저항에 부딪치게 될 것입니다. 그들의 선포는 세상에 엄청난 충격을 불러올 만합니다. 부조리한 세상이 정의와 진리 앞에 발버둥치고 반발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기존 질서를 무너뜨리려 한다고 제자들을 몰아세울 것입니다. 제자들은 공격과 저항을 받습니다. 어디에도 황홀한 환상 같은 것은 없습니다. 제자들은 ‘뱀처럼 슬기롭고 비둘기처럼 순박하게’(16절) 이 상황에 맞서야 합니다. 맑은 시야와 깨어 있는 정신으로 자신들의 소명을 인식해야 합니다. 적대자들의 논리에 혹하여 넘어갈 수도 강압에 못 이겨 끌려갈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정의와 진리를 지키기 위해서는 예수님의 완전한 가르침에 충실히 머무는 길뿐입니다.

“그들이 너희를 의회에 넘기고 회당에서 채찍질할 것이다.”(17ㄴ절) 예수님이 범죄자로 고발당해 그분을 박해하는 사람들에게 넘겨진 것처럼, 제자들도 똑같은 일을 당할 것입니다. 스물세 명의 유지로 구성된 지방의회에 끌려가 유죄 판결을 받으면 회당에서 매질을 당하게 됩니다. 신명 25,1­3에 따르면 마흔 번까지 매질할 수 있다고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실제로는 서른아홉 대까지만 때립니다. 바오로 사도는 유다인 회당에서 다섯 차례나 서른아홉 대 매질을 당했습니다(2코린 11,24-­25). 앞서 예수님께서 참행복을 선언하시면서 암시하신 박해입니다. 그들의 활동이 사람들한테는 범법 행위로 비쳐 죄인들처럼 법정에 끌려가 처벌받을 상황이 올 것입니다. “또 너희는 나 때문에 총독들과 임금들 앞에 끌려가, 그들과 다른 민족들에게 증언할 것이다.”(18절) 제자들은 이러한 박해를 통해 예수님의 운명에 동참하게 됩니다. 유다인과 이방인 모두에게 불려가 예수님을 증거해야 합니다.

복음을 선포하느라 받는 박해는 복음 선포를 위한 또 하나의 기회입니다. 그들의 ‘죄’는 법정에서 해명되어 모든 사람에게 알려집니다. 벌을 받아 고통을 당하는 것 역시 자신들의 확신을 증언하는 일입니다. 박해는 오히려 주님의 증인으로 서는 길이고 주님과 일치할 수 있는 기회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증언해야 할지 걱정이 앞섭니다. 아무것도 미리 알 수 없습니다.

“사람들이 너희를 넘길 때, 어떻게 말할까, 무엇을 말할까 걱정하지 마라.”(19ㄱ절) 주님이 무력해서 박해를 겪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 때문에 고난도 겪지만 예수님께 도움도 받습니다. “너희가 무엇을 말해야 할지, 그때에 너희에게 일러주실 것이다. 사실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라 너희 안에서 말씀하시는 아버지의 영이시다.”(19ㄴ-20절) 일찍이 하느님께서 모세에게 비슷한 약속을 하신 적이 있습니다. “그러니 이제 가거라. 네가 말할 때 내가 너를 도와, 무슨 말을 해야 할지 가르쳐 주겠다.”(탈출 4,12) 그들은 자기 이름으로 복음을 선포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이름으로 선포하는 것이니, 사람들 앞에 홀로 서 있는 것이 아닙니다. ‘아버지의 영’을 협조자로 약속하셨으므로 그들이 용기를 내기만 한다면 그리스도를 당당히 증언할 수 있습니다. “내 도움과 내 영광이 하느님께 있으며 내 견고한 바위와 피신처가 하느님 안에 있네.”(시편 62,8) 주님은 우리를 위험에 버려두지 않으십니다.

안팎에서 박해의 그림자가 밀려듭니다. 최악의 상황입니다. “형제가 형제를 넘겨 죽게 하고 아버지가 자식을 그렇게 하며, 자식들도 부모를 거슬러 일어나 죽게 할 것이다.”(21절) 본성적으로 사랑으로 묶여 있어야 할 가정에 파괴와 미움이 자리한다면 이것만큼 가혹한 고통은 없을 것입니다. 이 지경에 이르면 혹시 내가 틀린 것이 아닐까, 이런 바보짓을 그만두고 다른 사람들처럼 살아야 하지 않을까, 모든 것을 포기할 수 있을까 등 온갖 상념에 사로잡히게 됩니다. 결단을 내리기 어렵습니다. 예수님도 혼란과 고독 속에서 죽음 앞에 섰습니다.

평화롭고 조화로운 삶을 포기해야 할 때도 있습니다. “너희는 내 이름 때문에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다.”(22ㄱ절) 그 ‘이름’은 제자들이 입에 달고 다닐 이름이고 그들의 삶에 영감을 불러일으킬 이름입니다.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고 그분을 주님이라고 고백하는 사람은, 가족들에게 버림받는 고독과 사람들의 증오심까지도 견뎌야 합니다. “그러나 끝까지 견디는 이는 구원을 받을 것이다.”(22ㄴ절) 예수님께 대한 충실함으로 미혹되지 않고 끝까지 견뎌야 합니다. 그분께 대한 충실은 그들에게 많은 어려움을 안겨주는 동시에 구원을 보증합니다. 예수님의 ‘이름’ 때문에 미움을 받지만 그 ‘이름’이 끝까지 그들을 지켜줄 것입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은 그분처럼 살아갑니다. 그분의 고난에 연대하지 않는 삶은 제자의 삶이 아닙니다. 제자가 되는 것도 교회가 되는 것도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 때문에 겪는 시련이 나를 반대한 가족과 이웃을 구원합니다. 꿋꿋이 지킨 의로움은 하늘나라를 앞당깁니다. 예수님이 그 모범이십니다.

“행복하여라, 의로움 때문에 박해를 받는 사람들!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사람들이 나 때문에 너희를 모욕하고 박해하며, 너희를 거슬러 거짓으로 온갖 사악한 말을 하면, 너희는 행복하다!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너희가 하늘에서 받을 상이 크다. 사실 너희에 앞서 예언자들도 그렇게 박해를 받았다.”(5,10-­12)

▦ 한님성서연구소 강지숙 빅토리아 위원
  | 07.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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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작 기도

하느님, 아빠, 아버지, 우리 인생에서 시험을 겪을 때, 성령의 힘으로 끝까지 견뎌낼 수 있게 해주소서.

▬ 독서

오늘 본문은 “이제 양들을 이리 떼 가운데로 보내는 것처럼 너희를 보낸다.” (마태 10, 16ㄱ) 라고 말씀하시며, 제자들을 파견하는 앞 구절과 직접 연결됩니다.

마태오가 복음서를 쓸 때, 그리스도인들은 유다인들과 이방인들한테서 박해를 받고 있었습니다. 오늘 본문은 교회가 이스라엘을 향해 선교 활동을 할 때, 의회에 넘겨지고 회당에서 채찍질 당하던 과거의 체험을 말합니다. “나 때문에” (18절) 라는 표현은 제자들이 겪는 박해가 그들이 행한 복음 선교의 결과에서 비롯된 것임을 분명하게 알려줍니다. 19절과 21절에서 두 번이나 되풀이되는 ‘넘겨지다(paradi,dwmi)’ 라는 동사는 예수님이 수석사제들과 경비대장에게 ‘넘겨져’ 최고 의회에서 신문을 받으시고 (루카 22, 66 – 71 참조) 헤로데 앞에서 업신여김과 조롱당하는 (루카 23, 11 참조) 것과 똑같은 체험을 통과하게 된다는 것을 알려줍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을 구원하기 위해 이 세상에 오셨지만 바로 그 사람들의 손에 의해 공생활 말기에 고통을 당하고, 제자들은 ‘예수님 때문에’ 유다인들과 이방인들한테서 오는 박해와 고통을 겪습니다. 교회가 과거에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복음을 선포할 때 겪었던 박해 체험은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선포하면서 겪는 독자들의 현재 체험이자, 미래의 체험이기도 합니다. 마태오는 이런 식으로 복음을 선포하는 사람들이 현재 겪는 고통은 예수님이 가신 고통과 박해의 길을 걸어가는 것임을 받아들이도록 준비시킵니다. (마태 10, 24 – 25 참조)

제자들이 ‘예수님 이름 때문에’ 박해를 당하게 될 때, 그들은 고아처럼 홀로 버림받게 되지 않을 것입니다. 그들이 ‘총독들과 임금들’ 앞에서 예수님에 대해 증언하게 될 때, 자신한테서 나오는 힘이나 능력이 아니라 제자들 안에 있는 ‘아버지의 영’ 이 말씀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실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라 너희 안에서 말씀하시는 아버지의 영이시다.” (20절) 구약성경에서도 하느님은 이스라엘 백성을 이집트의 노예살이에서 구해 내기 위해 파견하시면서, 두려움에 떠는 모세에게 같은 말씀을 하십니다. “그러니 이제 가거라. 네가 말할 때 내가 너를 도와, 무슨 말을 해야 할지 가르쳐 주겠다.” (탈출 4, 12)

사실 사람들 안에 있는 하느님의 영이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증언한다는 것은 신약성경 여러 곳에서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죽음을 앞두고 제자들에게 당신이 떠나신 후, 성령께서 제자들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당신이 제자들에게 말한 모든 것을 기억하게 해주실 것이라고 제자들을 격려하십니다. (요한 14, 26) 예수님이 승천하신 후, 복음을 전하다가 감옥에 갇혀 있던 베드로와 요한은 유다 지도자들과 원로들과 율법학자들이 예루살렘에 모였을 때, 성령의 힘으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담대하게 증언합니다. “그분 말고는 다른 누구에게도 구원이 없습니다. 사실 사람들에게 주어진 이름 가운데에서 우리가 구원받는 데에 필요한 이름은 이 이름밖에 없습니다.”(사도 4, 7 – 12 참조)

마태오는 공동체 안에 예수께서 현존하신다고 믿었기 때문에, 그리스도인들에게 성령이 주어질 것이라는 말을 거의 하지 않습니다. 복음서를 마무리하는 28장 19절의 세례 도식을 제외하고, 마태오가 유일하게 그리스도인들에게 성령이 주어질 것이라고 말하는 부분이 이 구절입니다. (20절) 이것은 박해 상황에서 나약함과 무력감을 느끼던 초대 그리스도인들이 내면 깊은 곳에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증언하도록 자신들을 북돋는 하느님의 힘을 느끼던 체험을 반영합니다.

제자들 안에 머무는 성령은 박해를 당하는 사람들에게 “끝까지 견딜 수” 있는 힘을 주십니다. (22절) ‘견딤’ 이라는 말은 신약성경에서 단지 개인적 노력이나 내면 자세를 뜻하는 것이 아니라 항상 종말론적 희망과 관련되는 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 때문에’ 제자들이 온갖 종류의 박해와 몰이해, 소외와 고독 가운데서도 희망으로 살아가는 것은 제자들의 마음 안에 있는 하느님의 영이 그들의 나약한 마음을 담대하게 만들고, 하느님이 당신 자녀들에게 상속받도록 마련해 놓으신 영원한 삶에 대한 희망으로 제자들의 마음을 들어 올리기 때문입니다.

▬ 성찰

그리스도의 이름 때문에 모든 것을 ‘견디는’ 자세는 ‘희망’ 을 낳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우리는 환난도 자랑으로 여깁니다. 우리가 알고 있듯이, 환난은 인내를 자아내고 인내는 수양을, 수양은 희망을 자아냅니다.” (로마 5, 3 – 4)

▬ 기도

주님은 저의 바위, 저의 성채이시니 당신 이름 생각하시어 저를 이끌고 인도하소서. (시편 31, 4)

▦ 성 바오로딸 수도회 임숙희 수녀
  | 07.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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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을 무릅쓰고 자신의 신념을 지키려는 사람에게는 어떠한 위협과 박해도 통하지 않습니다. 그 신념이 영원한 희망의 하느님을 향하고 있는 것이라면 더욱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훗날 당신을 증언하려고 박해를 받게 될 것임을 예고하시며, 그들이 맞서야 할 것이 무엇인지 명확히 알려 주십니다. 바로 인정과 혈연, 두려움과 절망과 싸우는 일입니다. 가장 가까운 사람에게 외면당하고, 배신당하며, 채찍질과 죽음에 이르는 공포는 신념을 지키는 데 가장 큰 걸림돌입니다.

한국 성직자들의 수호자인 김대건 신부님 또한 어린 나이에 낮선 이국땅으로 떠나며 비슷한 두려움을 가졌을 것입니다. 그리고 힘든 여건 속에서 사제가 되어 고국 땅에서 복음을 전하고자 할 때, 그가 가졌던 신념만큼이나 체포되어 고문과 박해를 당해야 하는 두려움도 컸을 것입니다. 그러나 김대건 신부님을 비롯하여 그리스도를 증언한 수많은 순교자들은, 자신의 능력이 아니라 하느님 아버지의 영을 마음에 간직하고 믿음을 증언하는 데 주저하지 않았습니다.

“어떻게 말할까, 무엇을 말할까?” 하는 것은 인간적인 고뇌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아니라 우리 안에서 말씀하시는 아버지의 영’이 이끌고 계시다는 신념을 가지면, 환난 속에서도 인내하고 수양하며, 희망을 얻게 됩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 희망이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한국 교회는 김대건 신부님을 비롯한 순교자들의 피로 세워진 교회입니다. 세상의 지배자들을 두려워하기보다는 ‘보고 갚으시는’ 주님을 두려워할 때, 순교는 신앙의 증인이 되는 길이 됩니다.

▦ 송용민 사도 요한 신부 : 매일 미사 2018년 7월 5일
  | 07.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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