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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축일/명절강론 코너 ( 대축일/명절 미사에 관련된 강론자료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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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 자랑스러운 이름
조회수 | 3,349
작성일 | 07.10.04
2000년 대희년을 맞아 로마에서 세계청년대회가 열렸고, 당시 신학생이었던 저는 교황님과 함께하는 마지막 전야 행사에 참가하고자 광장으로 걸어가고 있었습니다.  해지는 노을녘 타는 듯한 더위로 피곤에 지친 몸을 끌고 한참을 걸어가고 있을 때 이미 행사는 시작되었고, 20대에 성인이 되신 분들의 이름이 장엄한 음악 속에서 호명되며 행사장 가득 울려 퍼지고 있었습니다. 그때 여타의 성인들의 이름 속에서 성 안드레아 김대건!이라는 이름이 또렷하게 들렸습니다. 그 이름을 듣는 순간, 뭐라 형용할 수 없는 뿌듯한 기쁨과 감격에 전율을 느꼈습니다. 타향살이에 지쳐가던 저에게 샘솟는 용기를 주는 순간이었습니다. 한마디로 한없이 자랑스러웠습니다. 그리고 그분께서 현대의 우리들을 위해 무엇을 하셨는지를 분명히 느낄 수 있었습니다.

만 스물다섯 살 한국인 최초의 사제, 갓 서품 받은 청년 사제의 꿈은 순교의 칼날 앞에 섰습니 다. 당신은 당신이 할 수 있었던, 하고 싶었던 모든 꿈과 희망, 그 모든 것을 고이 접어 증거자의 꽃으로 봉헌하십니다. 끝이 없을 것 같이 이어지던 한국교회의 기나긴 박해의 칼날도 그리스도를 따르는 이들의 강인한 신앙의 불길을 끌 수 없었습니다. 우리가 자랑스러워하는 순교의 업적은 흔들리지 않는 신앙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업적은 삶으로 드러나는 끝없는 결단의 고백이었습니다. 갖은 문초와 고문 속에서도 자신을 구하려 하기보다는, 사람들로부터 거부당하고 조롱당하며 비웃음을 사는 그리스도를 구하려 했기 때문입니다.

현대를 사는 우리들은 누구를 구하려 하는지를 가슴깊이 헤아리고 반성하게 됩니다. 내 안에서 나는 과연 그리스도를 어떻게 구해드리려 하고 있는지를 말이지요. 순교는 커다란 업적보다는 작은 사건과 일상의 삶 속에서 시작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일상에 얽매어있는 나의 악습에서 벗어나 그리스도의 사랑과 모범을 따르려는 결단과 고백이야말로, 그리스도를 구해드리려는, 목숨을 걸고 우리가 해야 하는 ‘순교’입니다. 이를 통해 ‘순교자’는 갈림 없는 일치의 신앙을 고백합니다. 세상의 그 어떠한 것도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갈라놓고 떼어놓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세상이 주는 온갖 유혹과 어려움은 분명 우리를 약하게 만들 수도 있겠지만, 그리스도와 일치하려는 우리 믿음의 결단과 선택을 결코 빼앗지는 못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전 세계 교회에 우리 순교선열의 뜨거운 신앙을 자랑합니다. 그것은 분명 세상이 수여하는 그 어떠한 상장과 명예보다 자랑스러운 것입니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그리스도와 하늘나라의 기쁨과 자랑스러움 안에 우리 자신 또한 함께 있어야 할 것입니다.

수원교구 한만삼(하느님의 요한)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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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꺼야, 내꺼!”

대형 할인 마트에서 물건을 고르고 있는데, 장난감 코너에 형제인 듯 보이는 어린 아이 둘이 하나의 장난감을 두고 “내꺼야, 내꺼!”라며 서로 가지려고 다투는 것을 보았습니다. 피식 웃으면서도 ‘우리 사람들이 하는 짓이 꼭 이 아이들과 같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서로 무언가를 더 가지려고 아귀다툼을 하는 우리들, 이런 우리들에게서 세상의 죄악이 다 나오는 것은 아닌지?!

예전에 부제품을 준비하면서 영적독서 하나를 골랐습니다. 그것은 최양업 신부님의 편지글을 담은 책이었는데, 그 중에서 이 대목을 읽을 때에 한참 눈물을 흘린 기억이 납니다.

“성사를 받지 못한 다른 신자들은 다음날 저를 뒤쫓아 백 리나 되는 험준한 길에도 불구하고 다른 교우촌까지 와서 성사를 받았습니다. 마을에서 나올 수 없었던 그 밖의 신자들은 실망과 한숨 속에 그냥 내버려졌습니다. 저는 교우촌을 두루 순회하는 중에 지독한 가난에 찌든 사람들의 비참하고 궁핍한 처지를 자주 목격하게 됩니다. 그럴 때마다 저들을 도와 줄 능력이 도무지 없는 저의 초라한 꼴을 보고 한없이 가슴이 미어집니다. 저들은 포악한 조정의 모진 학정 아래 온갖 종류의 가렴주구(세금을 혹독하게 징수하고, 강제로 재물을 빼앗음)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얽히고 설켜서 도저히 헤어날 수 없는 비참한 곤경에 빠져도 손가락 하나 옴짝달싹할 자유조차 없습니다.

동포로부터 오는 박해, 부모로부터 오는 박해, 배우자로부터 오는 박해뿐 아니라, 친척들과 이웃들로부터도 박해를 받습니다. 그들은 모든 것을 빼앗기고 험준한 산 속으로 들어가 이루 형언할 수 없이 초라한 움막을 짓고 2년이나 3년 동안만이라도 마음 놓고 편안히 살 수만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행복하다고 여기고 있습니다.”

지금 우리와는 정말로 너무나도 상반된 신앙생활을 해 오신 분들이 바로 우리 순교자들입니다. 그런데 지금 그분들은 하느님 안에서 영원한 복락을 누리시고, 그분들의 후손인 우리들은 “내꺼야, 내꺼!”를 외치며 주님께서 주신 십자가를 - 우리 선조들에 비하면 초라하기 그지없는 - 져야 하는지 말아야 하는지를 고민하고 살아갑니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한다.”는 말씀은 아마도 두 주먹 안에 쥐었던 욕심을 놓으라는 말씀 같습니다. 재물을 추구하는 나, 명예욕에 승부하는 나, 온갖 재미와 말초신경을 자극하는 것들에 물들은 나, 그리고 하느님마저도 소유하려 했던 나를 버리고 온전히 주님의 뜻을 따랐던 선조들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오늘 우리는 위대한 우리 선조 성인들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남들은 “내꺼야!”를 외쳐도 그분들은 모든 것을 버리고 주님께서 주신 십자가를 용감히 지셨습니다. 우리도 그분들의 후손들답게 “내꺼야!”를 외치며 움켜쥐었던 손을 펴고 주님께로 나아갑시다.

수원교구 김진범(바오로) 신부
  | 1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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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으로부터 20년 전, 1984년 5월 6일 서울 여의도 광장에서 100만 명이 넘는 인파가 모인 가운데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께서는 한국 순교자 103분을 성인으로 선포하시며 장엄 미사를 봉헌하셨습니다. 그분들은 오늘 복음의 예수님 말씀처럼 '주님을 따르려고 자기를 버리고 매일 제 십자가를 진' 이 땅의 순교자들이십니다.

또한 오늘 바오로 사도의 말씀처럼, 예수님의 편이 되었기에 맞설 상대가 없었던 승리자들이 바로 순교자들이십니다. 이 땅의 순교자들에게는 포졸과 판관들의 엄포도, 매서운 매질도, 뜨거운 인두 형벌도 두려움에 사로잡히게 할 수 있는 무기가 되지 못했습니다. 무수한 고문도, 심지어는 가족들의 혈육의 정(情)도, 가산몰수도 예수님께 대한 사랑, 하느님께 대한 사랑에서 갈라 놓을 수 없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우리들에게 두 가지를 부끄럽게 여기지 말라고 경고하십니다. 바로 ‘나(예수님)’와 ‘내 말(예수님 말씀)’입니다. 과연 나 자신은 예수님을 부끄럽게 여기며 살지 않았는지 되물어야 합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생활 속에서 ‘예수님’과 ‘예수님의 말씀’을 부끄럽게 여겼을 열 가지 유형을 찾아보았으면 합니다.

① 예수님의 뒤를 따른다고 하면서 자신의 십자가만 무겁다고 악을 쓰며 살아갔다면…,

② 이웃 사랑을 말로만 외쳐대고 마음에는 온갖 미움과 증오로 가득 채우고 살았다면…,

③ 기도하며 주님을 성실히 섬기고 살기보다는 일이 잘 안풀린다고 허황된 미신(점집, 철학관 등)을 찾아 다녔다면 …,

④ 자녀들에게 주님을 따르는 길보다는 성적 오르기만을 강조했다면 …,

⑤ 사회적 체면 때문에 잔칫집에는 가면서 주일 미사를 제쳐두었다면 …,

⑥ 지갑이나 통장의 돈은 수시로 확인하면서 성서나 신앙 서적은 들쳐보지 않았다면 …,

⑦ 자신의 죄가 부끄럽다는 이유로 '고해성사'를 멀리하는 인간적 교만에 빠졌다면 …,

⑧ 천상 잔치(미사)에서의 영성체보다 맛난 음식과 술에 더 관심을 갖고 탐했다면 …,

⑨ 이웃들과 세상 돌아가는 소식과 농담은 즐기면서 예수님 말씀과 신앙에 관한 대화를 피했다면 …,

⑩ 노래방에서 유행가는 목청 높이 부르면서 미사때 성가는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부르고 배우려고도 안했다면 … 바로 ‘예수님’과 ‘예수님의 말씀’을 부끄럽게 여긴 삶이라 하겠습니다. 목숨을 바쳐 오롯이 주님께 대한 사랑을 드러냈던 우리 순교자들의 삶을 묵상하면서 우리도 조그만 생활 속의 실천을 통해 주님을 증거하는 삶을 살기로 다짐해야 하겠습니다.

“누구든지 나와 내 말을 부끄럽게 여기면 사람의 아들도 아버지의 영광에 싸여 거룩한 천사들을 거느리고 영광스럽게 올 때에 그를 부끄럽게 여길 것이다.”(루가 9,13)

수원교구 안병선(요한 사도) 신부
  | 1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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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교자, 하느님이 전부였던 이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루카 9,23).

우리 스스로에게 진지하게 물어보자. 왜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가? 무언가 나에게 이득이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인가? 사실 사도들조차도 예수님 뒤에서 자리싸움을 했다. 수많은 군중들도 예수님을 자신들의 왕으로 세울 생각을 했다. 우리 또한 그런 생각에 예수님을 따르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뒤를 따른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오늘 분명하게 말씀하신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자신을 버려야 한다. 그리고 날마다 자신의 십자가를 짊어져야 한다. 그래야지만 그분의 뒤를 따를 수 있다.

그런 마음가짐이 아니라 예수님께로부터 무언가 이득을 바라고 따른다면, 결국 우리는 예수님을 외면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제자들이 3년이나 예수님을 따라다녔으면서도 결국 십자가의 길에선 예수님을 배반한 것처럼, 그리고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 땐 환호를 외치던 군중들이 그분의 십자가의 길에서는 돌변하여 야유를 외쳤던 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진정 예수님을 따르겠다고 다짐한 이들은 그 어떤 환난과 역경 속에서도 끝까지 예수님의 뒤를 따를 것이다. 교회의 수많은 순교자들처럼 말이다.

오늘 우리가 기억하는 우리나라의 103위 순교성인과 수많은 순교자들은 신앙을 위해 자신을 포기한 채 날마다 십자가를 짊어지고 예수님을 따른 분들이다. 자신의 지위뿐만 아니라 자신을 위한 모든 것을 포기하였고, 박해의 고통이라는 십자가도 마다하지 않았으며, 예수님을 따르기 위해 ‘죽음’도 피하지 않으신 분들이다. 순교자들이라고 자신이 소중하지 않았거나 고통과 죽음이 두렵지 않았겠는가! 단지 그분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철저히 따를 수 있었던 이유는, 예수님께 성부 하느님이 전부였듯이 그들에게도 하느님이 전부였기 때문일 것이다.

죽음도 말릴 수 없었던 우리나라 순교자들의 하느님을 향한 사랑! 바오로 사도의 말씀이 이를 잘 표현하고 있다.

“무엇이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갈라놓을 수 있겠습니까? 환난입니까? 역경입니까? 박해입니까? 굶주림입니까? 헐벗음입니까? 위험입니까? 칼입니까? 그러나 우리는 우리를 사랑해 주신 분의 도움에 힘입어 이 모든 것을 이겨내고도 남습니다. 나는 확신합니다. 죽음도, 삶도, 천사도, 권세도, 현재의 것도, 미래의 것도, 권능도, 저 높은 곳도, 저 깊은 곳도, 그 밖의 어떠한 피조물도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님에게서 드러난 하느님의 사랑에서 우리를 떼어 놓을 수 없습니다”(로마 8,35.37-39).

표창연(프란치스코) 신부
  | 09.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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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교는 아무나 하나?

경상도 상주의 은재에서 태어난 김윤덕 아가타 막달레나는 고향 인근에서 복음을 전해 듣고 입교하여 신앙생활하다 1815년 2월 22일경 교우들과 함께 체포되었다.

“대관절 무엇 때문에 죽으려 하느냐?”고 묻는 관헌에게 그녀는 “아무리 비천하고 무식하다 하더라도 조물주이신 천주님의 은혜를 몰라보고 그분을 배반할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라며 큰소리로 신앙을 증거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신앙 고백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결국 다시 혹독한 형벌을 받던 중 마음이 약해져 배교를 하고 만다. 경주 감사는 이내 그녀를 풀어주었고 그녀는 자유의 몸으로 감영의 문을 나서고 있었다.

이때 그녀는 안동에서 이송되어 온 김종한 안드레아를 만나게 되는데 안드레아는 배교를 하고 집으로 돌아가는 그녀에게 ‘이처럼 좋은 기회를 놓치지 말라’고 하면서 힘써 순교를 권면하게 된다. 안드레아와 짧은 대화를 나누는 동안 아가타 막달레나는 다시 신앙의 불꽃이 피어나게 되었다. 그녀는 다시 포졸들을 밀치고 감영 안으로 들어가 이렇게 큰 소리로 외친다. “아까는 혹형을 견디기가 너무 어려워 천주님을 배반하였지만, 이것은 크나큰 죄입니다. 그래서 저는 그것을 뉘우치고 다시 관장님 앞으로 온 것입니다. 원하시면 저를 죽여주십시오. 저는 그 어느 때보다도 더 진실한 신자입니다.”

관장은 화가 나서 미친 사람으로 몰아 그녀를 내쫓게 하였으나 그녀는 또다시 관내로 포졸들을 밀치고 들어와 이전의 배교를 다시 한 번 큰소리로 취소하며 하느님을 증거하였다. 매우 화가 난 관장은 그녀를 심하게 매질하도록 하여 그녀의 살점은 어느 덧 하나 둘씩 떨어져 나갔으며 얼마 되지 않아 하얀 뼈가 드러나게 되었다. 이내 그녀는 의식을 잃은 채 감옥으로 끌려갔으며 감옥에 도달하자마자 곧 50여생의 인생을 순교로 마감하게 되었다.

이루 헤아릴 수 없는 우리나라의 수많은 순교자들 중 최양업 신부님과 124명의 순교자들이 현재 성인품에 오르기 위한 시복시성 재판 절차를 밟고 계신다. 내년에 현장조사를 거쳐 2007년 정도에는 현 103위 성인들과 함께 하느님의 영광스러운 순교성인 반열에 오르실 예정이다. 김윤덕 아가타 막달레나 순교자는 이 124명의 순교자들 중 한 분으로서 순교자들이 우리와는 전혀 다른 사람들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좋은 모범을 보여주는 분이다. 순교자들은 바로 우리와 같은 인간적 약점과 본성을 지니면서도 끊임없이 하느님께로 나아가려고 했던 바로 그 약하디 약한 우리 자신들이었던 것이다.

박현민(베드로) 신부
  | 1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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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이 아닌 또 다른 ‘시작’, 십자가의 길

1800년대 초반 조선, 사람들이 신앙을 위해 자신의 터전을 버리고 어디론가 떠납니다. 마치도 하느님 말씀에 따라 길을 떠난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처럼 모든 것을 버리고 떠납니다. 그들은 함께 모여 미사를 봉헌하고, 성가를 부르며, 기도를 한다는 이유로 옥에 갇힙니다. 배교하라는 고문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자신의 목숨을 바칩니다. 그들은 우리 한국 천주교회의 자랑스런 순교 성인들과 이름 모르는 순교자들입니다. 이런 한국 순교자들을 보면, “자신을 버리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루카 9,23)”는 주님의 말씀이 절로 떠오릅니다.

어쩌면 무참히 칼에 찔리거나, 옥중에서 병으로 세상을 떠난 한국 순교자들은 인간적으로 볼 때, 실패자처럼 여겨질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정작 그분들은 하느님 안에서 평화를 누리고 계셨고, 불사(不死)의 희망으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지혜 3,3-4). 너무나 힘든 고통스러운 고문으로 배교하고픈 순간의 유혹에서도 그들이 이겨낼 수 있었던 것은, 하느님 나라에 대한 깊은 희망과 열정이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지혜 3,4). 그 희망과 열정 안에서 맞이한 순교는 ‘끝’이 아닌 또 다른 ‘시작’이었습니다. 그들은 정녕 하느님께서 보시기에 의인들이었습니다.

순교자들은 한순간의 죽음으로 위대해진 것이 아닙니다. 신앙생활을 하기 힘든 상황 속에서도 깊은 신앙과 실천으로 올바른 신앙인으로서의 생활을 하셨기에, 의인이 될 수 있었습니다. 그 무엇이 순교자들을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갈라놓을 수 있겠습니까? 그 어떤 것도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님에게서 드러난 하느님의 사랑에서 순교자들을 떼어놓을 수 없었습니다. 순교자들은 죽음의 순간에 마치 로마서에서 바오로 사도가 외쳤던 것처럼, “하느님께서 우리 편이신데, 누가 우리를 대적하겠습니까?(로마 8,31ㄴ)” 라는 마음으로 두려움에서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

9월 순교자 성월과 오늘 대축일을 지내면서 우리가 이렇게 한국 순교자들을 기억하는 것은, 더 교묘한 방법으로 우리의 신앙이 위협받는 지금 이 시대에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할것인가’를 순교자들의 삶을 통해 배워나가자는 것입니다. 어떤 의미에서 이 시대의 박해자는 천주교에 대해 편견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과 험악한 세상 분위기가 아니라, 신앙에 확신이 없고 열성을 갖지 못하는 나 자신일 것입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우리는 자기 스스로를 박해하는 사람이 아니라, 예수님처럼 살아가고 예수님처럼 죽어갔던 순교자가 되어야 합니다. 주님께서 마련해 주신 하느님 나라에서의 ‘또 다른 시작’을 위해, 자신의 십자가를 날마다 지고 주님을 따릅시다. 우리는 할 수 있습니다. “그 어떤 것도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님에게서 드러난 하느님의 사랑에서 우리를 떼어 놓을 수 없습니다(로마 8,39).”

남승용(십자가 요한) 신부
  | 09.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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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물의 씨앗

인간의 삶에서 가장 풀리지 않는 난제가 있다면 ‘고통과 죽음’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이에 대한 답을 구하기 위한 물음은 오래전부터 계속 던져져 왔고, 어떤 이들은 그것을 자신의 예술작품에 고스란히 담아 다른 많은이들에게 울림을 주기도합니다.

그런 작품 중 믿는 이에게나, 믿지 않는 이에게나 인간의 고통과 죽음에 대해 깊이 묵상할 수 있도록 돕는 예술품이 있습니다. 미켈란젤로의 ‘피에타상’이 대표적인 예입니다. ‘그리스도의 죽음을 애도하는 성모’라는 의미가 담긴 이 작품을 감상하다 보면, 죽음의 공포와 고통이 아니라 그것을 넘어서는 무언가가 내면에 남게 됨을 느낍니다. 그리스도교 신앙 안에서 인간의 한계 상황 - 고통과 죽음-은 인간으로 하여금 그 너머의 것을 바라보게 하는 구도를 지니기 때문이 아닐는지요.

성 김대건안드레아 사제와 성정하상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들 대축일인 오늘 말씀은 이 문제에 대해 깊이 성찰하도록 우릴 초대합니다. 아울러 우리 신앙의 선조들은 어떠한 정신으로 살아가셨는지 이를 통해 엿볼 수 있습니다.

제1독서인지혜서에서는 하느님께 대한 믿음을 지키며 살아가는 의인들이받는 고통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주님께 대한 믿음을 버리지 않던 이들이 현실적인 고통 가운데에서도 오히려 이를 넘어서는 무언가를 발견한 것입니다. 신앙 안에서 고통이란 “단련을 조금 받은 뒤 은혜로 나아가게” 하는, 마치 “용광로 속의 금”처럼 믿음을 순수하게 만드는 촉매제의 역할을 하는 것이지요.

이와 함께 제2 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고통의 의미를 그리스도의 십자가 안에서 풀어 냅니다. 그것은 바로 인간의 고통과 죽음에 동참하시는 ‘하느님의 사랑’입니다. “당신의 친아드님마저 아끼지 않으시고 우리 모두를 위하여 내어주신 분께서, 어찌 그 아드님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베풀어주지 않으시겠습니까? (로마 8,32)”

또한, 하느님께 의지하여 고통 가운데에서도 그분께 나아가라고 격려 합니다. “우리는 우리를 사랑해 주신 분의 도움에 힘입어 이 모든 것을 이겨내고도 남습니다.…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님에게서 드러난 하느님의 사랑에서 우리를 떼어놓을 수 없습니다(로마 8,37).”

주님이신 예수님은 우리에게 저마다의 십자가를 지고 당신을 따르라 말씀하시면서,“나 때문에 자기 목숨을 잃는 그 사람은 목숨을 구할 것이다”라고 약속하셨습니다. 우리에게 요구되는 몫은 매순간 “주님을 신뢰하는 이들은 진리를 깨닫고, 그분을 믿는 이들은 그분과 함께 사랑 속에 살 것(지혜 3,9)”이라는 말씀을 기억하는 것입니다. 어려움 속에서도 믿음을 통해 그분과 더욱 가까워지는 우리가 되길 기도해야 하겠습니다.

박유현(빈첸시오) 신부
  | 09.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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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복음에서 ‘십자가’는 우리를 위한 예수님의 수난 전체를 가리킵니다. 따라서 우리가 십자가를 지는 것은 그리스도를 위하여 죽을 준비를 하는 것입니다.

신앙을 위해 목숨을 아끼지 않았던 순교 성인들에게는 죽음이 두려움의 대상이 아니라, 오히려 기꺼운 일이었습니다. 쾌락과 재물은 사라지지만 의로움은 사람을 죽음에서 구원해 줍니다. 세상을 사랑하기에 자기 목숨을 구하려는 자는 목숨을 영원히 잃을 것입니다. 자기 목숨을 구하려 함으로써 사람의 아들을 부끄럽게 여기는 사실이 드러날 것이기 때문입니다. 반면, 자기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영원히 얻을 것입니다. 사람의 아들이 영광스럽게 다시 왔을 때 그를 부끄럽게 여기 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 다(루카9,23).” 우리는 이 말씀을 새겨들어야 합니다. 이는 ‘내 영혼이 너희를 위하여 그러했듯이, 너희 영혼이 십자가를 질 준비가 되어있지 않으면 너희는 나의 제자가 될 수 없다’는 뜻입니다. 혹시 우리는 십자가 없는 따름만을 원하는 것은 아닌지 자신에게 물어 보아야 합니다.

우리는 자신을 버리고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지고 그분을 따라야 합니다. 자기를 버린다는 것은 과거를 모두 잊고 자신의 의지를 완전히 하느님께 내맡기는 것을 뜻합니다. 복잡한 세상에 살면서 철저하게 순종하는 것이 불가능한 일이라고는 할 수 없지만,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게다가 세속 풍습에 물든 삶이 요구하는 사회적 교류는 자기 십자가를 지고 그리스도를 따르는 데 큰 장애입니다.

그리스도를 위하여 죽을 준비를 함, 이 땅에서의 육신의 금욕, 그리스도의 이름 때문에 겪게 될 위험을 기꺼이 감수함, 이승의 삶에 초연함, 이런 것이 ‘자기 십자가를 지는 사람’의 자세입니다. 한국 103위 순교 성인들께서는 오로지 하느님께 모든 것을 내어맡긴 의로운 분들이셨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의 눈에는 그분들이 죽은 것처럼 보이지만, 그분들은 불사의 희망으로 가득차 하느님께 로 나아가셨던 것입니다.

“의인들의 영혼은 하느님의 손 안에 있어, 어떠한 고통도 겪지 않을 것이다(지혜 3,1).”

수원교구 박희훈 신부
  | 09.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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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에게서 배워라

제가 초등학교 때 복사를 서기 위해 옆집 친구와 함께 한 시간씩 시골길을 걸어 성당에 오가면서 가 장 많이 불렀던 노래는 ‘장하다 순교자, 주님의 용사여~’로 시작하는 ‘순교자 찬가’였습니다. 특히 새벽이나 밤같이 어두울 때 집과 성당 사이를 오가며 무서움을 쫓는 데는 순교자 성가만한 것이 없었습니다. 그것은 아마도 순교자들의 용감한 모습이 담긴 이야기나 그림을 통해 그분들의 강인함이 저희 마음속에 새겨졌기 때문일 것입니다. 특히 순교자들 그림 중에서도 가장 제 뇌리에 깊이 새겨진 것은 스스로 손등을 물어뜯어 살점을 떼어 내는 장면의 그림이었습니다. 그분은 바로 손자선 토마스(1844-1866) 성인입니다. 관장은 그를 고문하다 못해 스스로 자신의 살을 한 점 떼어내지 못한다면 배교한 것으로 여기겠다고 말합니다. 이에 질세라 토마스는 자신의 신앙을 증거하기위해 양 팔뚝을 한 입씩 물어 살점을 떼어 냈습니다. 어렸을 때지만 순교자 성가들을 부를 때마다 이런 분들이 옆에서 지켜주시고 계시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그런 분들의 삶이 부러웠습니다. 가능하다면 따라하고 싶은 마음까지 생겼었습니다.

그러나 요즘 아이들에게도 과연 이런 순교자들의 삶이 가장 따르고 싶은 모범이 되는지 궁금해집니다. 혹시 그리스도를 따른다고 하는 우리 또한 아이들에게 순교보다는 출세가 더 좋다고 가르치지는 않습니까? 자격증이나 졸업장이 중요하니 경쟁해서 남들을 이겨야 한다고 가르치지는 않습니까? 경쟁에 서 이기기 위해 성당에 너무 오래 있지 말라고 하지는 않습니까? 교육의 목적이 자녀의 성공입니까, 아니면 행복입니까? 순교자들은 어떤 삶이 참 행복의 삶인지 당신들의 죽음으로 보여주었습니다.

예수님은 당신의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당신을 보고 배우라고 하십니다. 당신 삶을 모델로 삼으라는 뜻입니다. 그리스도는 어떤 본보기를 남겨놓으셨습니까? 바로 세상을 이기는 것이었습니다. 낮아지고 낮아지셔서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셨고, 당신 자신을 십자가에 매달아 그 피 한 방울까지도 내어주 셔서 완전하게 가난해지는 그런 모습이었습니다.

지금은 더욱 순교자들의 본보기가 필요한 시대입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은 우리에게 좋은 본보기를 보여주셨습니다. 교황님은 세상을 이기는 가난과 겸손함 그리고 온유함을 보여주셨고 보는 사람마다 그분을 본받고 싶어지게 만드셨습니다. 그러나 세상에서 자신을 죽이지 않고 어떻게 본보기가 될 수 있겠습니까? 초가 타지 않는다면 어떻게 어둠을 밝힐 수 있겠습니까? 소금이 녹지 않는다면 어떻게 세상을 짜게 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가 먼저 순교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 순교가 많은 이들을 일깨워주기 때문에 선교가 되는 것입니다. 이태석 신부님이 세상의 성공을 버리고 참 행복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삶을 보여주신 것이 곧 순교이고 선교입니다. 우리 또한 세상에서 자신을 죽여 어둠을 밝히는 작은 순교의 빛이 되어야겠습니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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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 죽음마저 넘어선 ‘향기로운 신앙’

매년 이맘때면 한국 천주교회는 김대건 신부님을 포함한 우리 순교성인들의 대축일을 지냅니다. 그러나 이분들 가운데 상당수는 여전히 신자들에게 이름과 행적조차 생소합니다. 순교자 공경은 영성적이고, 문화적이며, 학술적인 노력이 동반된 순교자‘현양운동’을 통해 신앙인의 생활 안에서 점진적으로 정착되어야 바람직한 과정일 터인데, 순교자 ‘현양대회’와 같은 기념행사 정도로만 맴도는 것 같아 다소 안타깝게 비춰집니다. 지금까지 우리 교회가 성지를 새롭게 발굴하고 조성하는 성역화 기반사업에 치중했다면, 앞으로는 조성된 성지마다 그에 걸맞은 고유한 영성 개발과 신심의 공유가 지금보다는 더 원활히 이루어졌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저 역시 일상에서 얼마나우리 순교성인들을 잘 알고자 노력했으며 얼마나 이분들과 친교생활을 유지해왔는가를 성찰해볼 때, 누구보다도 저 자신에게 큰 반성과 노력이 요구됩니다.

그렇다고 모두 저와 비슷하다는 말은 아닙니다. 신자들 가운데 세례 이후 지금까지 답보상태에 빠진 자신의 미지근한 신앙을 진지하게 되돌아보고 순교자들의 신앙과 전구에 힘입어 신앙에 심기일전하려는 노력이 적지 않습니다.그 한 예로, 배우자나 가족 단위 또는 가까운 지인과 함께 주말마다 전국 교구에 산재해 있는 수많은 순교지와 순례지를 찾아 기도하며 신앙에 새로운 불씨를 댕기고 있는 분들이 있습니다. 사실 우리가 고된 발품을 팔아가며 순교자들에게서 본받고자 하는 것은 그들의 고귀한 ‘죽음’만이 아니라 죽음을 넘어선 그들의 향기로운 ‘신앙’입니다. 내가 소유한 재산, 그리고 사랑하는 가족을 포함한 가까운 지인은 죽음 직전까지 나와 함께 할 수 있지만, 그 이상은 어찌할 수 없습니다. 죽음을 넘어서 내 곁을 지킬 동반자는 바로 ‘신앙’입니다. 신앙은 평상시에는 눈에 잘 띄지 않지만 죽음을 맞이한 후 끝까지 나와 동행할 수 있는 유일한 ‘벗’입니다. 우리 순교성인들은 바로 이 마지막 벗을 선택하였습니다. 이 분들의 신앙은 그리스도를 위해 기꺼이 받아들인 순교의 죽음을 통해 그들을 따라 하느님께 바쳐진 향기로운 제물이 되었습니다.

우리가 각 순교지에서 알게 된 성인의 행적 속에는 하나같이 자기중심적인 생활을 과감히 청산하고 신앙 안에서 하느님 중심으로 옮겨가는 드라마틱한 삶의 전환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정녕 자기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나 때문에 자기 목숨을 잃는 그 사람은 목숨을 구할 것이다”(루카 9,23-24). 이러한 삶의 변화가 누구에게는 아직 엄두조차 내지 못할 부담으로 다가와 지금은 계속해서 유예하고 싶은 순간일 수 있습니다. 또 누구는 ‘주님께서 나에게 짊어질 만한 십자가를 주고 계시는데 한 번 용기를 내어보자.’며 삶의 변화에 용단을 내리기도 합니다.

나는 죽음 직전까지만 행복을 보장받는 유한한 삶에 가치를 두고 있습니까? 아니면 성인들이 앞서 보여준 죽음마저 넘어선, 죽음 이후의 향기로운 삶을 동경하며 지금 이 자리에서 용기 있는 변화의 첫걸음을 내딛고 있습니까.

▮ 수원교구 박현창 베드로 신부 : 2016년 9월 18일
  | 09.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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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세상의 일들에만 목적을 두고 사는 이들, 잠시 있다가 이내 사라질 것들에만 희망을 두고 사는 사람들에게 지금 겪고 있는 시련과 상실, 그리고 죽음은 오직 두려움 가득한 파멸, 불행, 벌로만 여겨질 뿐입니다. 그러나 하느님 나라를 향한 여정을 이어가고 있는 우리에겐 그렇지 않습니다.

어떤 일로 깊은 고민과 실망에 젖어 있던 저에게 어느 신부님께서 해주신 말씀이 기억납니다.“우리의 목적지는 여기가 아니고 하느님 나라잖아. 그러니 믿음을 가진 우리에게 이 세상은 하느님 만나러 가는 순례의 여정이고, 그래서 지금 걷고 있는 이 길은 지나가는 나그넷길일 뿐이야. 그러니 자네의 궁극적인 희망을 어떤 일이나 관계에만 두지 말고 하느님 나라에 두기를 바라네. 그럼 지금보다는 훨씬 편안하고 자유로워질 걸세.”돌이켜 보면 같은 고통과 시련을 겪더라도, 마음과 삶이 하느님께 정초되어 있을 때는 그 고통과 시련마저 하느님께 희생 제물로 봉헌하며 평화와 안식을 누렸지만, 그렇지 못할 때는 그 고통과 시련에 짓눌리며 불행한 나날을 지냈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 지혜서가 말하는 의인(義人)이란 마음과 삶이 온전히 하느님께 정초되어 있는 사람이고, 그가 간직한 ‘불사의 희망’이란 주님의 진리와 사랑에 대한 신뢰와 믿음이며, 그 희망을 가슴에 품고 날마다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걸어 가는 그 한 걸음 한 걸음이 진정으로 자신의 목숨을 구하는 길이라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루카 9,23-24 참조).

오늘 기념하는 한국의 순교자들의 처지와 믿음을 우리는 온전히 공감하며 헤아릴 수는 없을 것입니다. 순교자들이 박해 중에 참혹하게 느끼고 겪었던 그 두려움과 슬픔, 고통과 환난, 역경과 위협은 가히 상상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확신할 수 있는 한 가지 사실은 순교자들이 하느님께 마음과 삶을 두고 그 모든 시련을 이겨내게 했던 희망과 믿음의 위대함입니다. 하느님의 권능과 풍요, 정의와 사랑에 대한 순교자들의 희망과 믿음이 그들에게 얼마나 풍요로운 보화였고 그들을 얼마나 강하게 만들었는지 순교를 통해서 확증되었기 때문입니다.

순교자들의 그 풍요와 강함이 바오로 사도의 음성을 통해서 오늘 우리에게도 전해지고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를 사랑해 주신 분의 도움에 힘입어 이 모든 것을 이겨 내고도 남습니다(로마8,37)”. 그리고 이 말씀 안에서 순교자들이 하느님나라를 향해 걸어가는 순례자요 이 세상에서 나그네로 사는 당신의 후손들에게 이렇게 격려하며 말해 주는 것 같습니다. ‘여러분도 우리가 지녔던 바로 그 희망과 믿음으로 모든 것을 이겨내고 마침내 우리와 함께 하느님 나라의 행복을 누리십시오.

▥ 수원교구 강희재 요셉 신부 - 2017년 9월 17일
  | 09.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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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 신앙 선조들은 사제들을 사랑했다.

한국천주교회는 선교사의 도움 없이 책을 통해 자발적으로 신앙을 시작했습니다. 중국을 통해 전해진 천주교 서적을 접한 당시 지식인들은 충격을 받았고, 이내 천주교에 빠져 들었습니다. 하느님 앞에 만인은 평등하고 모두 하느님의 자녀로서 한 형제이며 자매라는 가르침은 양반과 천민, 남자와 여자라는 엄격한 신분차별이 있던 조선 사회에서 참으로 파격적인 가르침이었습니다.

성직자 없이 시작한 한국 교회는 시행착오 끝에 사제를 요청합니다. 그래서 중국인 복자 주문모신부가 1794년에 입국했지만, 1801년 신유박해로 인하여 순교합니다. 그 후 한국 교회는 성직자 없이 30여 년을 지내다가 신앙 선조들의 피나는 노력을 통해 성직자를 다시 모셔오게 됩니다.

성 정하상 바오로는 신유박해 이후, 흩어진 신자들을 찾아 신앙의 열기를 북돋우면서 성직자 영입을 위해 북경을 아홉 번, 변문을 세 번이나 왕래했습니다. 또한 성직자 파견을 요청하는 청원서를 북경 주교를 통해 교황청에 보내는 열의를 보였습니다. 성직자를 영입하기 위한 이 같은 지속적 노력의 결실로, 한국 교회는 마침내 중국인 유방제 신부와 프랑스인 선교사 샤스탕 신부를 비밀리에 모실 수 있었습니다. 또한 조선교구 제2대 교구장 성 앵베르 범 주교도 모시게 되었습니다.

성 유진길 아우구스티노는 성 정하상 바오로를 만나, 역관이라는 자신의 신분을 이용하여 북경교회와 연락하면서 성직자 영입운동에 참여했습니다. 그는 8회에 걸쳐 북경에 왕래하면서 조선 교회 상황을 알렸습니다. 당시에는 사제 한 분 한 분이 귀중했기에, 박해기간 중 신앙 선조들은 자기가 대신 피해를 감수하기도 했습니다. 복자 최인길 마티아는 주문모 신부가 피신할 시간을 벌기 위해 신부로 위장하고 집에서 포졸들을 기다리기도 했습니다. 복자 강완숙 골룸바는 자기 집에 몇 년 동안 주문모 신부를 모시기도 했습니다.

앞서 언급한 성인들과 복자들에게는 한 가지 공통점이 있습니다. 바로 박해시기에 성직자들을 모셔오기 위해 헌신했거나 성직자를 존중하고 사랑했던 분들입니다. 초기 한국 교회 신자들은 ‘조선 정부 정책과 이념에 반하는 행동’으로 박해받고 심지어 순교까지 했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신자들 중 일부이기는 하지만 교회 가르침보다 정부 정책이나 사람을 신앙처럼 떠받드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런 분들 중에는 교회가 정부 정책 -정부 정책은 절대 진리가 아니다!-을 비판하면 전례를 방해하거나, 심지어 사제의 ‘옷을 벗기겠다!’고 소리 지르는 행태까지 보입니다. 이러한 모습은 선량한 신자들과 사제들의 마음을 아프게 합니다.

성 요한 비안네 신부님이 하신 말씀입니다.“사제는 자기를 위한 사제가 아닙니다. 그는 자기 죄를 용서하지 못하고, 자기에게 성사를 주지 못합니다. 그는 자신을 위해서 있지 않고 여러분을 위해서 있습니다.”

▦ 수원교구 박정배 베네딕토 신부 : 2018년 9월 23일
  | 09.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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