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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도회] 성인들의 삶은 우리를 성덕으로 부르는 강한 초대장
조회수 | 1,695
작성일 | 08.07.20
성녀 마리아 막달레나는 복음서에서 일곱 마귀가 나간 막달라 여자라고 하는 마리아(루가 8,2)로 전해집니다. 또 교회의 전승은 복음서에 언급되는 용서받은 죄 많은 여자(루가 7, 37)를 마리아 막달레나로 보고 통회와 관상의 이상적인 모델로 믿어왔습니다.

이처럼 마리아 막달레나는 예수님의 사랑을 많이 받았습니다.

마귀의 종에서 주님의 종으로 거듭날 수 있었습니다. 사회적으로 죄에 얽혀 꼼짝 못하는 상황 속에서 예수께로부터 죄를 용서받았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처음으로 뵙는 영광의 주인공이 되기도 하였습니다. 그는 사랑받은 만큼 사랑을 되갚을 줄 알았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매달려 계실 때 그 밑에서 자리를 지켰습니다(요한 19, 25). 예수께서 부활하셨음을 제자들에게 가장 먼저 알렸습니다. 수난과 부활의 목격자요, 증거자이며 부활 소식을 전함으로써 선포자가 된 것입니다. 성인들의 삶은 우리를 성덕으로 부르는 강한 초대장입니다. ‘그가 할 수 있었는데 나는 왜 못하랴’라는 생각을 갖게 하고 우리를 분발시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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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장동현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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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오감을 통하여 세계를 경험하며 정보의 의미를 해석하고 그 바탕 위에서 행동을 한다. 말하자면 체험이란 우리의 시각·청각·체각을 통하여 하고, 그것들을 통하여 체험한 것을 해석하고 의미를 부여한다는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듣는 것보다 보는 것이 더 발달하고, 어떤 사람들은 보는 것보다 듣는 것이 더 발달하여 들을 때 더 신속하게 정보를 알아듣고 수집하며, 그리고 어떤 사람들은 몸으로 느끼는 것을 다른 기관보다 빨리 알아듣는 경우가 있다고 한다.

사람은 네 가지 눈이 있다고 한다. 사물을 보는 육안, 지혜를 터득하는 지안, 마음으로 세상을 보는 심안, 그리고 하느님을 믿고 영원한 세상을 보는 영안이다. 세상 어떤 사람도 이 네 가지 눈을 모두 가진 사람은 없을 것이다. 대부분 한두 가지 눈이 부족한 채 세상을 바라보고 있는 셈이다.

오늘 복음에서 마리아가 두 천사와 대화하고 나서 뒤로 돌아서자 예수님이 서 계셨지만 알아보지 못하였다. 예수님이 “여인아, 왜 우느냐? 누구를 찾고 있느냐?” 하고 물으셨다(요한 20,14­-15). 그러고 나서 예수님께서 “마리아야!” 하고 부르셨다(요한 20,16). 그 순간 마리아는 예수님이시라는 것을 알아들은 것이다. 예수님께서 마리아를 부르는 그 순간에 마리아의 영안이 뜨여 스승님을 알아본 것이다. 그동안 예수님을 따라다니면서 예수님에 대하여 체험한 모든 것이 한순간에 통합되는 것이다. 누군가는 “인생이란 자신이 인생을 아는 만큼 살 수 있다”고 한다. 마찬가지로 예수님을 체험한 만큼 신앙생활을 할 수 있는 것은 당연한 이치다.

정원순 신부(구속주회)
  | 07.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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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롱하고 찬란한 신제품, 마리아 막달레나

유리병의 제조과정을 가까이서 지켜 본 적이 있습니다. 유리를 만들기 위해서는 규사, 소다회, 탄산석회 등의 원재료가 필요합니다. 이런 재료들을 고온으로 가열하여 녹인 다음, 냉각시키는 과정에서 고체화가 이루어지는데, 이것이 바로 유리입니다.

소주병을 만들려면 유리가 고체화되기 전에 틀로 흘려보내고 나서 서서히 냉각시키면 됩니다.

중요한 것 한 가지, 유리제품들은 파손되었다 할지라도, 때로 산산조각 났다 할지라도, 또 다른 유리제품의 원재료로 재활용이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멋진 유리제품이 한번 깨트려졌다 해도 언젠가 또 다른 아름다운 유리제품으로 재탄생이 가능하다는 것, 얼마나 근사합니까?

이런 재활용, 재탄생은 오늘 우리 인간에게도 똑같이 적용됩니다.

한 주부가 귀한 손님들을 맞이하느라 요리에 신경을 많이 썼다고 합시다. 정성껏 요리를 준비했습니다. 귀한 손님인 만큼 평소에 잘 쓰지 않던 아주 비싸고 멋들어진 수입품 고급 식기세트를 꺼냈습니다. 수저도 은수저입니다. 티스푼은 18K입니다.

다들 정성에 탄복하며 감사하는 마음으로 맛있게 식사를 끝냈습니다. 이런 저런 음식물을 담느라 지저분해진 식기세트들, 주부로써 어떻게 하겠습니까?

한번 지저분해졌으니, 귀찮으니, 쓰레기통으로 던져버리겠습니까? 정신 나가지 않은 이상 절대로 그렇게 하지 않을 것입니다.

아주 값비싼 고급 식기 세트인 만큼 설거지 할 때도 아주 조심스럽게 다룰 것입니다. 혹시라도 접시 이빨이라도 빠질까봐, 혹시 금이라도 갈까봐 지극정성으로 금 쪽 같이 다룰 것입니다.

다음 기회에 또 다시 활용하기 위해 잘 건조시켜서 조심스럽게 진열장에 넣어둘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도 분명히 우리를 이렇게 다루실 것입니다.

우리가 한번 죄지었다고 해서, 우리가 심각한 병에 걸렸다고 해서, 우리가 한번 옆길로 샜다고 해서, 우리가 한번 방황했다고 해서, 우리를 쓰레기통으로 절대 던져버리지 않으십니다.

당신의 부드러운 손길로 다시금 조심조심 우리를 닦아주실 것입니다. 우리를 고이고이 당신 품에 안으실 것입니다. 다시 한 번 찬란한 명품으로 재탄생시켜주실 것입니다.

이런 하느님의 마음은 오늘 우리가 기억하는 마리아 막달레나 성녀의 삶 안에서 그대로 재현됩니다.

예수님을 만나 뵙기 전까지만 해도 그녀의 삶은 한 마디로 깨진 소주병이었습니다. 아주 산산조각났습니다. 어떻게 해볼 도리가 없는 구제불능의 삶이었습니다.

그녀는 일곱 마귀가 들린 사람이었습니다. 하나 둘도 아니고 일곱이나 되는 마귀와 대적하느라 그녀의 심신은 완전히 바닥까지 내려갔습니다. 그녀의 삶에서 기쁨, 희망, 사랑, 감사...이런 긍정적인 단어들은 찾아볼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녀 삶의 부서진 조각들을 하나하나 주워 모으셨습니다. 그리고 당신 자비의 용광로에 집어넣어, 당신의 뜨거운 사랑으로 가열하고, 새로운 모습으로 탄생시키셨습니다.

그 영롱하고 찬란한 신제품이 열두 사도 못지않은 열성 여제자 마리아 막달레나입니다

살레시오회 양승국 신부
  | 07.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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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을 만났습니다.

오늘 축일을 지내는 마리아 막달레나는
제자들에게, "제가 주님을 만났습니다!"고 말한다.
주님을 만나뵈어야
우리는 확신을 갖고 주님을 증거할 수 있게 된다.
그런데 그게 잘 안된다.
그분을 어떻게 만나뵈어야 할 지 막막하기만 하다.
그렇다면
"제가 주님을 만나뵈었다!" 고 증언하는
마리아 막달레나를 통해서 그 비법을 배울 수 있지 않을까?

그 방법은 간단하다.
만나려면 그분을 찾아야 한다.
간절히 찾기만 하면 된다.
아가서의 여인처럼
사랑하는 내 님 못보셨나요 하며 찾아헤메야 한다.
마리아 막달레나는
주님께서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셨다는 것을 믿을 수가 없었다.
그분이 너무도 보고싶고 그리워서
여인의 몸으로 새벽 동이 트기 전에
예수님의 무덤으로 달려간다.
그 정도로 그분을 만나뵙고 싶었다.
그리워서 못 견딜 정도였다.
그렇게 간절히 그분을 찾아 헤메기만 하면
그분은 당신 자신을 나타내 보이실 수밖에 없다.

그런데 자칫 잘못하면 아무리 찾아도 그분을 만나지 못할 수도 있다.
우리 육신의 눈으로 그분을 찾으려고 아무리 노력해도 그분을 만날 수가 없다.
마리아 막달레나마저 그분이 동산지기인 줄 알지 않았던가!
그분을 만나기 위해서는
그분이 나를, 내 이름을 부르시는 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말씀 안에서,
성체 성사 안에서,
형제 자매들 안에서,
세상 사건들 안에서
그분은 나를, 내 이름을 부르신다.
그리고 소명을 주신다.
제자들에게 갈릴래아로 가라고 전하라는 소명을 마리아 막달레나에게 주셨던 것처럼...
우리는 주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이렇게 하기만 하면
우리는 그분을 만나뵈올 수 있다.
이것이 하느님체험이다.
우리와 함께 계신 하느님,
임마누엘 하느님을 만나는 길이다.
그때 우리도 마리아 막달레나처럼,
"나는 주님을 만났습니다!" 하고 자신있게 고백할 수 있으리라!

작은 형제회 오상선 신부
  | 07.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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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리아 막달레나와 함께 주님께로>

요한 20장1-2, 11-18절 | “누가 저의 주님을 꺼내 갔습니다.”

오늘 이 시간 저는 복음서 안에서 열두 사도 못지않게 중요한 인물로 언급되고 있는 마리아 막달레나의 신앙여정에 대해서 함께 살펴보고자 합니다.

마리아 막달레나가 어떤 사람이었는지, 어떤 기구한 운명을 살아온 여인이었는지, 어떤 상처를 받았었는지, 어떻게 예수님을 만났는지, 그리고 어떻게 예수님을 받아들였는지, 어떻게 신앙생활을 해나갔는지 살펴보다보면 우리 신앙생활의 아주 좋은 지침이 되리라 생각됩니다. 왜 이 여인은 왜 ‘막달라 여자 마리아’, 혹은 ‘마리아 막달레나’라고 불렸을까요?

이 여인의 이름은 당시 가장 흔한 이름 가운데 하나였던 ‘마리아’였습니다. 그런데 당시 예수님 주변 인물 가운데는 마리아란 이름을 지니 사람만 해도 아주 많았습니다. 그래서 그들을 구분하기 위해서 이름 앞에 지명을 붙였습니다.

‘막달라’란 곳은 예수님 시대 당시 갈릴래아 호수 서쪽 편에 위치한 도시였습니다. 오늘 날 메이델이라는 지명으로 불리고 있습니다. 막달라 여자 마리아는 바로 이것 막달라 출신이었습니다. 그래서 막달라 여자 마리아, 또는 막달라 마리아, 또는 마리아 막달레나 이렇게 부르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호칭은 요즘 우리도 많이 사용하고 있지 않습니까? 저도 제가 알고 있는 분들 가운데 글라라란 본명을 가진 자매님들이 여러 명이라서 이렇게 구분합니다. 압구정동 글라라, 불광동 글라라. 아무튼 마리아 막달레나는 갈릴래아 호수 서쪽 편에 위치한 막달라라는 도시 출신의 사람이라는 것이 확실합니다.

교회 전통 안에서 마리아 막달레나를 이야기할 때 마다 큰 혼선이 빚어졌습니다. 왜냐하면 전통적으로 교회는 그녀가 한때 행실이 좋지 않던 여자, 매춘부였다. 그러다 예수님을 만나 회개한 회개의 모범으로 제시했습니다.

특히 루가 복음 7장 36절에 등장하는 여자와 동일시했는데, 그 여자는 자신의 눈물로 예수님의 발을 적시고, 자신의 긴 머리카락으로 예수님의 발을 닦아드렸으며, 그 발에 입을 맞추고 거기다 값진 향유까지 발라드를 발로 여겼습니다. 당시 유다 사회 안에서 머리카락으로 남정네 발을 닦고 발에 입을 맞추는 행위는 매춘부들이나 하는 행위였기에 그렇게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통념상 마리아 막달레나 하면 통회와 회개의 전형적인 인물로 여겨왔습니다. 그러나 최근 여러 성서학자들께서는 그러한 주장들이 성서상의 정확한 근거를 토대로 한 것이 아니라고 강조하십니다. 그래서 보다 설득력 있는 주장은 이것입니다. 마리아 막달레나는 다른 무엇에 앞서 심각한 질병을 앓고 있던 환자였다. 그런데 예수님을 만나면서 치유를 받게 되었다. 죽음으로부터 자신을 구해내신 예수님이 너무나 고마워서, 은혜에 보답하기 위해서 열심히 노력했던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이 세상 그 누구보다도 예수님께 대한 애정이 깊었던 여인, 애정이 깊었던 만큼 예수님으로부터 가장 큰 격려와 지지를 받은 여인임이 분명합니다.

루가복음 8장 1-3절에서는 마리아 막달레나에 대해서 이렇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 뒤에 예수님께서는 고을과 마을을 두루 다니시며, 하느님의 나라를 선포하시고 그 복음을 전하셨다. 열두 제자도 그분과 함께 다녔다. 악령과 병에 시달리다 낫게 된 몇몇 여자도 그들과 함께 있었는데, 일곱 마귀가 떨어져 나간 막달레나라고 하는 마리아, 헤로데의 집사 쿠자스의 아내 요안나, 수산나였다. 그리고 다른 여자들도 많이 있었다. 그들은 자신들의 재산으로 예수님의 일행에게 시중을 들었다.”

여기서 보시다시피 확실한 것 한 가지가 있습니다. 마리아 막달레나는 한때 일곱 마귀가 들렸던 여인이었습니다.

마귀가 한 마리 두 마리가 아니라 일곱 마리입니다. 일곱 마귀에 들렸다는 표현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예수님을 만나기 전 그녀의 삶은 갈 때 까지 갔었다는 말입니다. 죽음을 향해가는 깊은 수렁 속에 빠져 허우적거렸다는 것입니다. 1마리도 아니고 7마리의 마귀가 들린 사람의 상태가 어떠했는가에 대해서는 깊이 생각해보지 않아도 우리가 잘 상상해볼 수 있겠습니다. 매일 매 순간 발작은 거듭됐을 것입니다. 수시로 하느님을 모독하는 불경스런 말이 입에서 끊이지 않았을 것입니다. 7마귀의 횡포로 심신은 지칠 대로 지쳐 몰골은 말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사람들은 7마귀 들린 그녀를 보고 뭐라고 했겠습니까?

“얼마나 몹쓸 짓을 많이 했으면 7마귀까지 들렸을까?” 손가락질하며 그녀를 피해갔을 것입니다.

이런 마리아 막달레나를 통해 우리가 얻을 수 있는 교훈 혹은 위로가 있습니다. 제 개인적으로 마리아 막달레나만 생각하면 힘이 생깁니다. 희망이 생깁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바라다 볼 때 이토록 구제불능으로 보이는 여인 안에 깃든 가능성과 희망을 포기하지 않으십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의 사랑입니다. 예수님은 그 여인에게서 7마귀를 쫒아내 주시고 그뿐만 아니라 당신의 제자로 불러주시는 것입니다.

마리아는 이제 가장 예수님의 측근에서 예수님을 잘 보필하는 ‘여비서’ 역할을 담당하게 되었고, 그 누구보다도 섬세하게 예수님을 구체적으로 배려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한때 일곱 마귀 들렸던 마리아는 마침내 가장 예수님으로부터 사랑 받는 여 제자가 된 것입니다.

우리도 어떻게 보면 마리아 막달레나와 별반 다를 바 없는 삶을 살아갑니다. 끊임없이 악령에 시달리며, 고통당하며 살아갑니다. 때로 심각한 죄 속에서 인간 이하의 삶을 살아갑니다.

이런 우리지만, 마리아 막달레나에게 하듯이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향한 기대와 희망을 끝까지 버리지 않습니다. 최악의 상황 앞에서도 개선에로의 가능성을 배제하지 않습니다. 마지막 순간까지 인내하십니다. 우리의 죄가 하늘을 찌른다 할지라도, 우리의 죄가 진홍빛 같이 붉다 하더라도 다시 한 번 기회를 주십니다. 우리의 하느님은 이토록 기다림의 주님, 자비의 주님이십니다.

다시 한 번 마리아 막달레나에게로 돌아오겠습니다. 예수님과의 만남을 통해서 마귀로부터 해방되어 극적으로 인생을 전환하게 된 마리아 막달레나는 그 뒤로 삶이 완전히 바뀝니다. 그녀에게 있어 예수님은 삶의 의미요 전부가 되었습니다. 마리아 막달레나에게 있어 예수님은 휴대폰 입력 넘버 1번이 되셨습니다.

그 뒤로 마리아 막달레나는 줄곧 예수님을 따라다닙니다. 여기서 우리가 한 가지 주목할 것이 있습니다. 마리아 막달레나는 예수님을 아무 생각 없이 따라다니지 않았습니다. 스토커처럼 집요하게 따라다니지도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 가장 필요로 하는 순간 도움의 손길을 드리면서 따라다녔습니다. 예수님께서 가장 고통스러운 순간, 바로 옆에 서서 위로를 드렸습니다. 예수님께서 가장 위험에 처한 순간 더욱 가까이에서 예수님을 극진히 보필해드렸습니다.

특별히 한때 예수님을 위해서 목숨까지 바칠 정도로 기세가 등등하던 제자들이나 추종자들이 거의 다 도망가 버린 갈바리아 십자가 아래 그녀는 꿋꿋이 자리를 지키고 있었습니다.

이런 사실은 요한복음 19장 25절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곁에는 그분의 어머니와 이모, 클로파스의 아내 마리아와 마리아 막달레나가 서 있었다.”

그런가 하면 예수님의 장례식 때도 마리아 막달레나는 그야말로 눈에 불을 켜고 장례식을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마르코 복음15장 46절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마리아 막달레나와 요셉의 어머니 마리아는 그분을 어디에 모시는지 지켜보고 있었다.” 또 한 가지 복음구절이 예수님을 향한 마리아 막달레나의 열렬한 사랑을 엿보게 합니다. 요한복음 20장 13절에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안식일 다음날 이른 새벽, 마리아 막달레나가 예수님의 무덤가에 도달했을 때 하얀 옷을 입은 두 천사가 마리아에게 나타나 물었습니다. “여인아, 왜 우느냐?” 마리아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누가 저의 주님을 꺼내갔습니다. 어디에 모셨는지 모르겠습니다.”

보십시오. 마리아 막달레나에게는 오직 예수님뿐이었습니다. 예수님의 부재가 너무나 안타깝고, 너무나 슬프고, 너무나 허전했던 그녀는 안식일 내내 안절부절 했습니다. 빨리 안식일이 지나기만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당시 안식일에는 무덤을 방문할 수도, 향유를 가져다 바를 수도 없었기 때문입니다.

안식일 다음날 이른 새벽 예수님 시신에 대한 걱정 때문에 한 잠도 눈을 붙이지 못했던 마리아 막달레나는 예수님 무덤을 향해 달려갔습니다. 여기 보십시오. 마리아 막달레나는 그리도 애통해하면서 그리워하면서 예수님의 죽음을 가슴아파하고 있었습니다. 그 누구보다도 열렬히 예수님을 흠모하고 있었습니다.

이상의 몇몇 복음구절들을 종합해보면 마리아 막달레나란 인물에 대해서 몇 가지 정리를 해볼 수 있겠습니다.

마리아 막달레나는 예루살렘 부인회 회장, 예수님 팬클럽 회장이었습니다. 마리아 막달레나는 예루살렘 부인회 회장, 예수님 팬클럽 회장으로서 손색이 없을 정도로 좋은 조건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다른 무엇에 앞서 예수님을 열렬히 사랑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왕성한 활동력, 추진력, 자금동원력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과 그 일행의 먹거리며, 숙소며, 활동비며, 판공비 등등을 제공하고 있었습니다. 공생활 당시 예수님 주변에는 12제자뿐만 아니라 72제자를 비롯한 많은 추종자들이 있었는데, 때로 그들은 큰 무리를 이루어 예수님을 따라다녔습니다. 그러다보니 한 끼 해결하려고 하면 막대한 돈이 들어갔습니다. 마리아 막달레나와 몇몇 여인들은 자신의 전 재산을 다 팔아서 예수님을 돕고 있었는데, 마리아 막달레나는 그들 가운에 회장격이었습니다. 성모회장님이었습니다.

마리아 막달레나는 스토커였는가?

절대로 그렇지 않았습니다. 막무가내로 예수님을 따라다니면서 골치 아프게 하고, 시간 엄청 빼앗고, 마음 산란하게 만들면서 공생활을 방해하던 그런 스토커와는 질적으로 달랐습니다. 조용히 뒤에서 예수님과 그 일행의 불편한 점들을 알아서 척척 해결해주던 분별력 있던 여인이 마리아 막달레나였습니다.

장례식 주관자 마리아 막달레나

마리아 막달레나는 아리마태아 사람 요셉과 더불어 예수님의 장례식 일체를 꼼꼼하게 총괄했습니다. 세심하게 예수님의 시신을 챙겼습니다. 다들 두려워서 감히 나서지 못하던 판국에 마리아 막달레나는 주도적으로 장례절차 일체를 진두지휘했습니다.

마리아 막달레나에게 어떻게 이런 용기가 생겼을까요? 자칫 잘못했으면 반역자와의 한패로 몰려 똑같이 죽음에 처해질 가능성도 많았습니다만, 그녀는 전혀 개의치 않았습니다. 용감하게 앞장섭니다. 향유를 삽니다. 무덤으로 달려갑니다. 도무지 겁이 없었습니다.

그 이유는 하나뿐입니다. 마리아 막달레나는 예수님의 극진한 사랑을 체험했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온몸으로 극진한 예수님의 자비를 맛본 마리아 막달레아였기에 이제 죽음조차도 두렵지 않습니다.

한때 일곱 마귀가 들렸다는 말을 들을 정도로 심각한 병고로 고통당하던 마리아 막달레나였습니다. 늘 사람들로부터 무시당하고, 늘 이상한 사람 취급 받으면서, 그렇게 인간사회로부터 철저하게 따돌림 당했던 마리아 막달레나였습니다.

그러나 단 한 사람, 예수님만은 처음으로 그녀에게 인격적인 대우를 해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한 평생 겪어왔던 극심한 고통을 눈여겨보시며 함께 눈물 흘려주셨습니다. 일곱 마귀에 걸려 비참한 몰골을 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따뜻한 시선을 보내시며 힘내라고 용기를 불어넣어주시던 예수님이셨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자신을 그 지긋지긋한 마귀의 세력으로부터 벗어나게 도와주셨습니다.

새 삶을 되찾아주신 예수님 앞에 마리아 막달레나는 너무도 감격해서 목이 메일 뿐입니다. 이제 그녀에게 있어 예수님은 존재의 유일한 이유가 되셨습니다. 마리아 막달레나에게 있어 예수님은 삶의 전부였습니다. 예수님으로 인해 그녀는 의미를 지니게 되었습니다. 이제 그녀의 삶에서 예수님이란 존재를 빼버리고 나면 아무것도 남는 것이 없게 되었습니다.

그런 마리아 막달레나였기에 빈 무덤가에서 이런 표현을 씁니다.

“누가 제 주님을 꺼내갔습니다.”

보십시오. 냥 주님이 아니라, 우리의 주님이 아니라, 제 주님입니다.

예수님으로부터 극진한 사랑을 받고 새 삶을 살게 된 마리아 막달레나에게 있어 앞으로 남아있는 유일한 과제 한 가지는 무엇이겠습니까? 그간 예수님으로부터 받은 사랑을 온전히 예수님께로 돌려드리는 것입니다. 마리아 막달레나를 통해 얻을 수 있는 또 하나의 교훈입니다. 마리아 막달레나는 예수님께서 힘드실 때, 필요로 하실 때, 가장 곤경에 처하셨을 때, 결국 십자가에 못 박히셨을 때, 장례식 때 끝까지 함께 하였습니다.

우리가 행하는 사랑이 진정한 사랑인지 아닌지를 확인해볼 수 있는 순간이 있습니다. 그 순간은 상대방의 상황이 잘 풀릴 때, 모든 것이 잘 돌아갈 때가 결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반대로 진정한 사랑은 죽음과도 같은 고통의 순간, 임종의 순간 보다 확연히 드러난다고 합니다. 마리아 막달레나가 예수님께 보여준 사랑과도 같이 말입니다.

진정으로 그 누군가를 사랑한다면 상대방이 잘 나갈 때보다도 상대방이 아프거나 병들었을 때 함께 합니다. 끝도 없는 방황을 거듭할 때 지속적으로 위로와 격려를 그치지 않는 사람이 진정으로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죽음을 목전에 앞둔 순간 그 죽음이 너무 아쉬워 피눈물을 흘리는 사람이라면 진정으로 사랑하는 사람이라고 봐도 무방할 것입니다.

<살레시오회 양승국 신부>
  | 07.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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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인아, 왜 우느냐? 누구를 찾느냐?"

예수님을 위해 사무치게 울었던 막달레나의 눈물을 만납니다. 죄보다 더 큰 것은 언제나 하느님 사랑뿐입니다. 하느님 사랑은 결코 잊혀 질 수 없습니다. 판단의 돌을 내려놓게 한 막달레나는 아무도 흉내 낼 수 없는 맑은 사랑을 실천합니다. 예수님께 바칠 것은 우리의 마음뿐입니다.

"마리아야!"

십자가의 죽으심으로 마리아 막달레나의 마음을 부활케 합니다. 자신 또한 소중한 생명임을 받아들이게 됩니다. 주님의 부활은 언제나 마리아 막달레나의 마음속에 있습니다. 이와 같이 진정한 부활은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우리의 마음이 부활하는 것입니다. 사랑의 마음만이 막았던 돌을 치울 수 있습니다. 사람의 마음이 사랑으로 길을 열어놓아야
우리의 부활이 될 수 있습니다.

고통을 이겨낼 수 있는 것은 사랑뿐입니다. 어둠을 물리칠 수 있는 것은 사랑뿐입니다. 사랑이 빛입니다. 빛을 받아들인 마리아 막달레나의 기쁨처럼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기쁘게 만나야 합니다. 죽음보다 강한 십자가의 사랑이 막달레나를 일으켰듯이 우리를 일으켜 세울 것입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부활은 있습니다. 사랑하기에 아름답고 사랑하기에 영원한 생명입니다.

"라뿌니!"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
  | 07.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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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인아, 왜 우느냐? 누구를 찾느냐?"(요한20,1-2.11-18)

<제자 중의 제자, 마리아 막달레나>

비록 열두 제자단 안에 들지는 못했지만, 열두 사도 이상으로 열렬히 예수님을 추종했고 보필했으며, 열렬하고 극진히 예수님을 사랑했던 여제자가 있었으니, 그녀의 이름은 마리아 막달레나였습니다. 예수님을 향한 마리아 막달레나의 사랑이 얼마나 깊고 뜨거운 것이었는지는 ‘부활사화’안에 잘 소개되고 있습니다.

마리아 막달레나는 피투성이였던 예수님의 시신을 제대로 수습하지도 못한 채 서둘러 장례절차를 치룬 것이 못내 마음에 걸렸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 앞에 마리아 막달레나는 성모님 못지않은 큰 슬픔과 고통을 느꼈습니다. 밤새 대성통곡하면서 필요한 장례용품들을 준비했을 것입니다. 밤을 꼬박 지새운 마리아 막달레나는 짙은 어둠이 가시기 시작하면서 마음이 급해졌을 것입니다. 그리고 기다렸다는 듯이 예수님 무덤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리운 누군가를 만나기 위해 달려가 본 적이 있습니까? 정말 깊이 사랑하면 천리 길도 마다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를 만나기 위해 눈썹이 휘날리도록 달려가게 되어있습니다. 마리아 막달레나가 그랬습니다. 다른 때도 아니고 아직 깜깜한 꼭두새벽에 예수님의 무덤을 향해 서둘러 달려가는 마리아 막달레나의 모습은 그녀가 얼마나 예수님을 극진히 사랑했는가를 잘 드러내고 있습니다.

그것뿐이 아니었습니다. “왜 우느냐?”는 천사의 질문에 대한 마리아 막달레나의 대답을 한번 보십시오. “누가 저의 주님을 꺼내갔습니다.” 스승님도 아니고 예수님도 아닙니다. 우리 주님도 아닙니다. 바로 ‘저의 주님’입니다. 이미 마리아 막달레나에게 있어 예수님은 제3자가 아니었습니다. 그녀의 마음을 독차지하고 있었던 연인이자 주인이 예수님이셨습니다.

예수님을 부르는 우리의 호칭은 어떻습니까? 멀고도 먼 곳에 계시는 하느님은 아닙니까? 실체가 불분명하고 애매모호한 그런 대상이 아닙니까? 그리고 무엇보다도 “마리아야!” 하고 부르시는 예수님의 음성에 대응하는 마리아 막달레나의 태도를 한번 보십시오.

그동안 긴가민가했었는데 드디어 마리아 막달레나는 너무나도 낯익고 친밀한 예수님의 음성에 직감적으로 그분이심을 파악합니다. 예수님임을 확인한 그녀는 그야말로 ‘총알처럼’ 예수님의 발치 앞에 엎드립니다. 그리고 그분의 두 발을 자신의 가슴으로 꼭 끌어안았습니다.

내가 그분을 잃고 얼마나 가슴 아팠는데, 그분의 부재로 인해 내 가슴은 엄청나게 큰 구멍이 뚫렸었는데, 그 구멍으로 드나드는 바람 때문에 얼마나 가슴 미어졌는데... 이제 더 이상 이분을 놓치지 말아야지, 잃어버린 주님을 이제 다시 되찾았다는 환희에 마리아 막달레나는 그분의 두발을 움켜쥔 것입니다. 참으로 큰 마리아 막달레나의 예수님 사랑입니다. 정말 극진한 사랑입니다. 이런 그녀의 큰사랑 앞에 예수님께서도 큰 사랑으로 응답하십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향한 가장 큰 사랑의 소유자였던 마리아 막달레나에게 가장 먼저 발현하십니다. 그녀의 큰 사랑과 봉사 헌신을 기쁘게 받아들이십니다. 그녀를 제자 가운데 제자로 받아들이십니다.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 07.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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