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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축일/명절강론 코너 ( 대축일/명절 미사에 관련된 강론자료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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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춘천] 사랑의 방식
조회수 | 1,780
작성일 | 08.07.20
칼릴 지브란의 책 <사람의 아들 예수>에는 예수님께서 마리아 막달레나에게 아래와 같이 말씀하시는 대목이 나옵니다.

“사람들은 그 자신을 위해 너를 사랑하나 나는 너를 위하여만 너를 사랑한다.”

너를 위해 너를 사랑하는 그 사랑에는 너의 모든 유익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너의 사랑을 꽃피우면 또한 삶의 풍요와 성숙에 다다르게 합니다.

그러나 우리 주변에는 사랑의 거부, 사랑의 단절이 얼마나 많습니까?

항상 사랑을 갈구하는 듯하지만 일단 자신의 입맛을 거스르는 사람에 대해서는 가차 없이 이를 모멸하고 짓밟아버립니다. 언제나 내 사랑만을 위주로 충동, 욕구, 이기심, 타산, 기분 등을 잡풀처럼 키워내고 있는 것에 불과한 것은 아닌지 한번 반성해보아야 합니다.

사실 마리아도 자신만의 사랑에 빠져 있습니다. 그래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보지 못하고 있습니다. 예전의 사랑했던 예수님만을 찾으니 부활하신 예수님을 볼 수 없습니다.

그녀에게 예수님께서 질문합니다. “너는 왜 울고, 누구를 찾고 있느냐?” 사실 너를 위한 사랑으로 예수님을 사랑했다면 마리아는 죽기 전의 예수님을 찾지 않았을 겁니다. 예수님의 시신을 찾지 않았을 겁니다. 과연 우리는 어떤 사랑을 하고 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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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여성국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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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천] 누군가가 제 주님을….

막달라 마리아의 열정은 그 삶을 통해 잘 드러나 있다. 주님을 위해서 자신의 모든 것을 내어던진 이 여인은 그만큼 자신의 삶의 체험 현장에서 모든 것을 깨닫고 주님을 만남으로써 삶이 완전히 바뀐 대표적 인물이기도 하다. 예수님의 구원 여정에서 가장 가까이할 수 있었던 이 여인이 자신이 갖고 있는 삶의 열정을 오로지 한 곳으로 모아 마지막 순간까지 온전히 바친 이 여인 안에서 우리 자신의 모습을 되돌아보게 한다.

누군가가 제 주님을…. 어느 누구의 주님도 아니고, 제 주님이라고 강조한 이 대목에서 잠시 멈춰 생각한다. 주님이 나에게 그렇게 밀접히 살아 계시는가, 아니면 그냥 머릿속에서 하나의 표징으로만 존재하는 분인가? 나도 이 여인과 같이 주님을 만나기 위해 내 삶의 가장 밑바닥까지 내려가 정말로 내 삶의 주인으로서 그분을 맞이하고 받아들이며 살아가는가? 정말 사랑하는 사람은 자신의 삶이 없어지고 오로지 자신을 몽땅 내어놓을 수 있는 용기와 힘이 생긴다고 하던데….

내 삶의 주인이신 그분을 누군가 꺼내갔다면 그건 정말 가만있을 수 없는 엄청난 일이다. 매일 영성체를 하면서 주님을 모시고 살아가는 우리는 누군가 꺼내가도록 내버려두기는커녕 주님을 밖으로 내쫓는 것은 아닌지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다.

<춘천교구 하화식 신부>
  | 07.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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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신도] 무엇을 찾고 있소?

요한복음에서의 예수님의 첫 말씀은 이렇다. "너희가 바라는 것이 무엇이냐?"(요한 1,38) 공동번역의 이 말씀을 직역하면 이렇다. "당신들은 무엇을 찾고 있소?" 첫 말씀에서 드러나듯이, 요한복음 안에는 무엇인가 찾아 헤매는 군중들의 모습이 유난히 많다 . "당신들은 무엇을 찾고 있소?" 인간 존재에 근원적인 질문을 던지시는 예수. 우리의 가장 깊은 욕구와 갈망을 꿰뚫는 질문이다.

"밤마다 잠자리에 들면, 사랑하는 임 그리워 애가 탔건만, 찾는 임은 간데없어, 일어나 온 성을 돌아다니며, 이 거리 저 장터에서, 사랑하는 임 찾으리라 마음먹고, 찾아 헤맸으나 찾지 못하였네."

한낮에는 바쁜 일상에 쫓겨 자신도 잊어버리고 살아가는 우리. 그러나 어둔 밤이 오면 근원으로 회귀하려는 깊은 갈망이 슬며시 찾아온다. 하지만 그 갈망과 욕구는 언제나 다른 무엇에로, 다른 누구에게로 전이(轉移)되고. 그 무엇에, 그 누구에 실망하고 상처를 입고 또 다른 무엇을 찾아 나서는 우리.

마리아 막달레나도 그러했다. 루가 복음에서는 그녀가 "일곱 마귀가 나간 여자"였다고 한다. 온갖 것으로 자신을 채우려했어도 그녀의 허기는 채워지지 않았다는 뜻이 아닐까? 그녀의 갈증과 허기는 예수를 만난 후, 비로소 잦아들어갔다. 그러나 이제 그분이 돌아가셨다는 사실이 그녀를 다시 못견딜 슬픔 속으로 빠뜨렸다.

사랑하던 분의 무덤. 그리울 때 찾아와 지난날의 추억을 회상할 수 있는 곳. 살아가기 힘이 들 때, 울고 싶을 때, 아무 때나 찾아와 용기를 얻고, 힘을 얻고, 다짐을 하고 일어설 근거지가 지금 비어있다는 것이다. 자기 존재의 근원지를 상실한 마리아의 슬픔은, 사랑하는 사람과 이 세상에서 다시 못 만난다는 인간적 슬픔과도 다르다.

예수의 무덤 앞에서 하염없이 울고만 있는 마리아. 부활하신 예수께서 그 마리아에게 물으신다. "누구를 찾고 있느냐?” 그분이 누구신지 아직도 모르는 마리아. 그분이 누구신지 몰랐던 것은 비단 이번만이 아니다. 사실상 마리아는 그분이 누구신지도 모르고 이제까지 마음의 안식을 느껴왔던 것이다.

"마리아야!"

평소의 다정한 부르심을 듣고서야 그분이 "라뽀니"라는 것을 알아본다. "라뽀니는 선생님이라는 뜻이다"라고 복음사가는 친절하게 해설해 주고 있지만, 정확하게 말하면 라뽀니는 "나의 선생님"이라는 뜻이다.

마리아는 아까부터 동산지기로 보이는 사람에게 누가 "제 주님"을 모셔갔다고 말했고, 여기서는 "라뽀니"(나의 주님)이라고 부르고 있다. 자신에게 한정된 분, 자신만이 그분을 차지하고 싶은 것이다. 그분의 시신이라도 자기가 모시고 싶어 하는 마리아. 그런 마리아에게 예수께서는 말씀하신다. “내가 아직 아버지께 올라가지 않았으니 나를 붙잡지 말고 어서 내 형제들을 찾아가거라." 자기 혼자 지속적으로 그분과 개인적인 친밀감을 나누고 위안을 받고 안식을 얻으려는 마음은 이제는 그만두어야 한다. 이제는 그동안 받은 그 사랑을 공동체의 형제들과 나누어야 한다. 마리아 안에 그분이 머물러 살듯, 그분의 형제들 안에 그분이 머물러 살기 때문이다.

"막달라 여자 마리아는 제자들에게 가서 자기가 주님을 만나 뵌 일과 주님께서 자기에게 일러 주신 말씀을 전하였다." 그렇다. 안식일 다음 날 이른 새벽, 아직 어두울 때에, 주님의 무덤에 가보니 무덤을 막았던 돌이 이미 치워져 있는 것을 보았던 마리아. 이젠 거꾸로 마리아, 자신만의 세계 속으로 가두어 놓았던 무덤 앞 돌이, "이미 치워져 있는 것을" 보게 된 것이다. 부활하신 그분과의 만남을 통해.

이젠 그녀만의 무덤에 갇혀있는 일은 없을 것이다. 세상에서 더 이상 혼자가 아님을 느낄 것이다. 더 이상 다른 대상들을 찾아 떠돌아다니지 않을 것이다. 그분이 없는 빈자리를 그분의 형제들과 함께 채워 나갈 테니까.

오! 주님, 저희도 당신을 찾습니다.
진리이신 당신을.
생명이신 당신을.
빛이신 당신을.
무한한 사랑이신 당신을.

당신 안에 이 고단한 영혼의 닻을 내리게 하소서! 당신이 만들어준 이 아름다운 항구에서 당신이 맺어준 사랑하는 형제들과 함께 저희의 삶을 새롭게, 고결하게, 의미가 있게 변화시켜 주소서!

<이인옥 님>
  | 07.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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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 라뽀니!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김춘수 시인의 글로 오늘복음 묵상을 시작합니다.

그녀는 주님께서 가까이 계셨음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이름 '마리아야!'라고 부르기 전에는 무덤을 지키는 동산지기로 알았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그녀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라뽀니"하고 대답하면서 복된 여인이 되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곁에는 항상 주님이 함께하고 계십니다. 그리고 언제든지 원하면 불러주실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대답할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합니다.

어제복음에서 우리는 들을 귀가 있는 사람만 들어라, 볼 수 있는 눈만 있는 사람이 보아라...고 하시던 주님의 말씀과 같이 오늘 복음에서 그런 대표적인 인물이 소개되고 있습니다. 막달레나 마리아 여인입니다. 그녀는 부활하신 주님이 함께 계심을 처음에는 몰랐습니다. 그러나 부활하신 주님으로부터 "마리아야!"라는 부르심을 듣는 귀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주님의 음성만 듣고도 주님이심을 확인하며, "라뽀니!"라고 부르면서 부활하신 주님을 볼 수 있는 눈도 있었습니다.

당시 상황으로는 죽은 사람의 부활이란 상상도 하지 못하는 일이었고, 단지 무덤에서 시신만 수습하려던 여인이었지만, 그녀는 이미 귀와 눈이 열려진 위대한 믿음의 사람이었기에 주님의 부활을 처음 보는 복된 열매를 맺게 되었습니다. 성서에는 많은 인물이 등장하지만 이 여인이 참으로 복된 여인입니다. 물론 이 말은 이 여인이 태생부터 복되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이 여인은 갖가지 설이 있습니다만 처음부터 고결한 여인이 아니고, 죄 많은 여인, 마귀들린 여인으로 표현되다시피 파란만장한 삶을 살아간 여인입니다.

주님께서 이 세상에 오신 이유가 '죄인을 부르러 왔다'고 하신다면, 이 여인은 죄 지은 자의 가장 대표적인 인물이며, 또 주님의 죄 사함을 통해서 가장 영적으로 완성(구원)된 대표적 사람이기도 합니다. 그러기에 이 여인은 성서에서 가장 많이 이름이 오르는 사람 중의 하나가 되었으며, 가장 영광스러운 핵심장면이 부활의 첫 증인이 되는 영광을 않았습니다. 이러한 영광을 않게 된 원인은 바로 이 여인의 위대한 신앙입니다. 다시 말하면 마음과 행동으로 온전히 주님과 일치하는 신앙의 길을 걸어온 열매입니다.

우리도 막달레나와 같은 신앙의 길을 걸어가고 있다고 말들은 잘 합니다. 그런데 막달레나가 볼 수 있던 것을 우리는 보지 못하고 있습니다. 우리들보다 더 심각한 시련과 근심 걱정 속에서도 막달레나는 주님의 음성을 들었는데, 우리는 그녀 보다는 훨씬 편한 상황인데도 주님이 부르는 음성을 듣지 못하고 있습니다.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는 신앙.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는 신앙, 그런 모습이 바로 우리들 신앙의 현주소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오늘은 부활의 첫 증인으로서 예수님의 수난과 영광의 길에 함께 동행을 했던 위대한 믿음의 여인, 성녀 마라아 막달레나의 기념일로서 요한복음 11-18을 묵상합니다.

예수님의 빈 무덤을 바라보고 있던 마리아! 그녀는 아직도 예수님의 부활을 아직 생각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렇게도 부활에 대한 말씀을 주셨음에도 불구하고 마리아를 포함한 모든 사람들은 부활을 믿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녀는 누군가가 예수님을 꺼내 갔다고 생각했기에 슬픔에 잠겨서 울고 있었던 것입니다.

"누군가가 제 주님을 꺼내 갔습니다. 어디에다 모셨는지 모르겠습니다."

여기서 마리아는 참으로 멋진 말씀을 하십니다. “제 주님”이라는 말씀. 참으로 가슴 깊이 다가오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을 통해 마리아가 얼마나 예수님을 따랐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나의 주님”이라고 고백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나의 주님! 나의 하느님이라고...

부활 예수님께서 마리아에게 물으십니다. 왜 울고 있느냐고?
하지만 마리아는 그분이 부활 예수님인줄 모르고 있습니다. 그곳(무덤)의 동산지기인줄로 알고 있습니다. 그럴만도 한 것이 이렇게 이른 새벽에 무덤에서 돌아다닐 사람은 동산지기 밖에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마리아는 동산지기에게 간청을 합니다. "여보셔요. 당신이 그분을 옮겨 갔거든 어디에다 모셨는지 알려 주셔요. 내가 모셔 가겠습니다."...여기서도 너무나 감동적인 말이 또 나옵니다. "제가 모셔가겠습니다!!!"

마리아는 동산지기가 예수님의 시신을 옮겨 놨다고 생각을 했습니다. 참으로 대단한 사랑입니다. 죽은 시신까지도 사랑할 수 있다는 것이...이렇게 슬픔에 잠겨서 무덤 안을 바라보고 있는 마리아를 향하여 부활 예수님이 뒤에서 부르십니다...너무나 극적인 장면입니다. "마리아야!"... "라뽀니"

그러자 마리아는 들을 귀가 있는 복된 여인이었기에, 뒤에서 부르는 주님의 목소리만 듣고도 그 분이 주님임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뒤돌아서면서 "라뽀니"라고 부릅니다. 흔히 모습만을 보고는 알지 못하더라도 음성을 듣는다면, 그것도 그 사람이 기억하는 음성으로 부른다면 귀가 밝은 사람은 어둠 속에서도 그 사람을 알아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모습을 보고는 마리아가 알아차리지 못했지만, 예수님의 음성을 듣고는 단숨에 알아차립니다.

마리아는 너무 기쁜 나머지 엎드려 예수님의 발을 잡고 예의를 표하려고 하였을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아직 아버지께 올라가지 않았으니 나를 붙잡지 말고 어서 내 형제들을 찾아 가거라. 그리고 '나는 내 아버지이며 너희의 아버지 곧 내 하느님이며 너희의 하느님이신 분께 올라간다.' 고 전하여라"

마리아는 예수님 발밑에 꿇어 앉아 있어서는 안 됩니다. 왜냐하면 제자들에게 가서 예수님의 말씀을 전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사실을 전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제 제자들은 마리아의 기쁜 소식을 전해 듣게 될 것이고 예수님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막달라 여자 마리아는 제자들에게 가서 자기가 주님을 만나 뵌 일과 주님께서 자기에게 일러 주신 말씀을 전하였다. 막달라 마리아는 사도들의 사도가 되어 예수님의 명령을 이행했습니다.

우리는 오늘 참된 귀와 눈을 가진 복된 여인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사도들의 사도가 되어 부활의 증인이 된 복된 여인을 보았습니다. 그 여인은 미라아 막달레나입니다. 그녀는 막달라라는 작은 마을에서 보잘 것 없이 살았던 죄 많은 여인이었으며, 주님을 만난 이후 영적성숙을 거듭하여 완전하게 주님과 일체(Co-incidence)가 된 믿음의 여인이었으며, 주님 부활의 첫 증인으로, 또 부활을 증거 하는 첫 사도로 부름 받은 영광의 여인이었습니다.

그런 영광스러운 여인이 주님을 부를 때, "라뽀니!"라고 했습니다. 주님이 그녀의 이름 '마리아!'를 불러주었을 때, 그녀는 주님께 나비같이 날아가서 '라뽀니!'라고 부르고는 꽃이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부활을 체험한 우리도 주님을 "라뽀니"하고 부르면서 나비같이 날아가서 부활의 기쁜 소식을 전해야 되지 않게습니까?

<보나 님>
  | 07.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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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 여성들에게 영광을

얼마 전 어느 시위 현장에 갔습니다. 거기에는 옛날 이른바 시국 현장에서 날리던 남성들은 오간 곳이 없고, 소박한 여성들이 자리를 메우고 있었습니다. 홀어머니에 누나만 네 분인 제가 타고난 페미니스트인 걸까요? 달변도 웅변도 아닌 그들의 외침이 가슴을 흔드는 소프라노로 울려 퍼졌습니다. 세상사 득실 계산이 복잡하고 성정이 변덕스러운 남성들이 눈치 보면서 숨어 있는 동안 이건 아니지, 하는 생각 하나로 길바닥에 주저앉는 여성들이 주먹질 한번 없이 강력한 저항의 펀치를 날리고 있었습니다.

지혜의 스승, 카리스마 넘치는 왕, 무한능력의 초월자, 제자들이 이 모든 표현을 동원해서 떠받들던 예수님이 돌아가셨습니다. 어리석은 이스라엘 백성이 상위 5퍼센트 세도가들에게 눈엣가시 같았을 나자렛 출신 교주를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다. 추종자 가운데 핵심 인물에 속하던 열두 제자는 절망에 빠졌습니다. 그분의 전지전능하심으로 하늘나라가 이 땅에 오면 자신들이 복락과 권세의 주인공이 되리라고 기대했는지 모르겠습니다. 너를 이 세상에서 제일 행복하게 해줄 거야, 하고 약속했던 연인이 그 사회의 가치관을 뒤흔드는 반역자가 되어 세상 사람들의 손가락질을 받으면서 처형당한 꼴이었겠죠. 구원의 메시지를 전하시는 예수님과 함께 풍찬노숙하며 온 나라를 헤매던 그들은, 너무나 무섭고 허망해서 숨어버렸습니다.

오로지 몇몇 여성만 비명횡사하신 분에 대한 믿음을 간직했습니다. 살아 계실 때도 허드렛일, 뒤치다꺼리만 맡았던 여성들이었습니다. 그분의 장례를 예비해서 향유를 발라드린 사람도 베타니아의 어느 여성이고, 무덤을 지키다가 부활하신 그분을 처음 만난 사람도 두 여성이었습니다. 예수님을 포위한 군인의 귀를 칼로 베던 남성들의 기개는 어디로 간 것일까요? 누군가가 스승의 시신을 빼돌린 것 같지만, 여성들은 아무것도 할 수 없어 슬픔의 눈물만 흘리고 있었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마리아야!” 하고 부르셨습니다. 여성들이 흘렸을 기쁨의 눈물 이야기는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다만 부활 소식을 전할 영광이 그들 것이었음은 분명합니다. 예수님의 무덤을 지키다 부활하신 그분을 만난 여성들 이야기를 들으며, 세상을 이기는 것은 산을 무너뜨릴 힘과 열정, 무쇠 주먹이 아니라 가냘픈 손, 작은 목소리, 욕심 없는 헌신임을 배웁니다. “제가 주님을 뵈었습니다.” 부활을 증언하는 마리아 막달레나의 울먹이는 목소리가 더없이 힘 있는 웅변으로 들립니다.

<여상훈 님>
  | 07.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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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인아, 왜 우느냐?” (요한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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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달레나의 노래>

1.

나의 모든 삶은 저주였습니다.
어이 살아왔다고 입 밖으로 내기조차 싫은 삶이었습니다.
이름 없이 그저 몸을 파는 여자, 일곱 마귀 들린 여자, 죄 많은 여자라 불리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드디어 저주를 마감하는 날이 찾아왔습니다.

2.

군중의 조롱과 비웃음 그리고 쳐죽이라는 아우성 속에, 옷은 찢기고 머리채는 억샌 사내의 손에 잡힌 채로 돌팔매질 당할 장소로 끌려갔습니다.
무섭지도 않았습니다.
모든 것을 내려놓았었거든요.
차라리 이 피곤한 세상 잘 되었다 싶었습니다.

3.

그런데 당신께서 계셨습니다.
그리고 나를 끌고 온 이들은 당신에게 나를 죽여야 하는데 어떻게 생각하냐고 물었지요.
당신께서는 아무 말 없이 계시다가 죄 없는 이가 먼저 돌을 던지라 하셨지요.
무슨 이유인지 모르지만 당신의 그 말씀에, 당신과 나만을 남겨두고 모두들 사라졌지요.
“너에게 죄를 묻던 이들은 어디 있느냐?”
“예, 아무도 없습니다.”
“나도 너에게 죄를 묻지 않겠다. 다시는 죄를 짓지 말아라.”

4.

당신과 그렇게 헤어진 후, 몇 날 몇 일을 울었습니다.
울다 지쳐 잠이 들다 다시 눈이 떠지면 밑도 끝도 없이 울었습니다.
얼마나 지났는지 모릅니다.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러고 보니, 당신께 감사하다는 말 한 마디 하지 못했습니다.
당신을 찾아야 합니다.
5.

어느 마을 권세 있는 집에 당신께서 식사를 하시러 오신다고 합니다.
향유 병을 들고 달려갔습니다.
당신의 발 앞에 무릎을 꿇고 눈물을 흘리고 말았습니다.
또 멈추지 않는 눈물입니다.
머리카락으로 당신의 젖은 발을 훔칩니다.
그리고 향유를 당신의 발에 발라드립니다.

6.

결심을 했습니다.
허락이 된다면 당신의 뒤를 따르면서 당신을 돕고 싶었습니다.
그저 있는 듯 없는 듯 허드렛일이라도 하면서 내가 걸어온 죄의 길을 보속하고자 합니다.
그렇게 저의 두 번째 인생이 시작되었습니다.

7.

감동입니다.
당신의 말씀에, 당신의 결정과 행동에 그저 곁에 있기만 해도 행복해졌습니다.
눈살을 찌푸리는 이들도 있었지만, 가난하고 병든 이들, 보잘것없어 보이는 사람들은 하나같이 당신을 사랑했습니다.
힘든 여정은 계속되었지만, 모두들 행복해 했습니다.
당신을 정말 사랑합니다.

8.

요즘 분위기가 이상합니다.
당신과 당신의 제자들이 주고 받는 이야기가 심상치 않습니다.
당신을 죽이려는 이들이 많다는 이야기도 자연스럽게 들려옵니다.

9.

당신께서는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신다고 합니다.
그래서는 안 된다는 제자들의 의견이 강합니다.
하지만 당신께서는 고집을 굽히시지 않습니다.

10.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솟구칩니다.
결국 당신께서 잡혀가셨다고 사람들이 전합니다.
그것도 제자였던 유다가 당신을 밀고했다고 합니다.
무섭습니다.
이를 어쩌면 좋겠습니까?

11.

높은 계단 위에 당신께서는 고개를 떨구시고, 로마인 총독이라는 사람과 함께 군중들을 앞에 두고 서계십니다.
군중은 소리를 칩니다.
“십자가에 못박으시오! 십자가에 못박으시오!”
모두들 미쳐 날뛰고 있습니다.

12.

사형이 언도 되었다고 합니다.
당신께서 돌아가신다고 합니다.
가슴이 떨리고 눈물이 앞을 가립니다.
돌 맞아 죽을 뻔했을 때도 이리 두렵지 않았었는데,
표현할 수 없는 아픔과 두려움 그리고 슬픔을 어찌할 수 없습니다.
설마, 당신께서 진짜 돌아가시는 것은 아니겠지요?

13.

온몸이 피투성이가 된 채, 머리에는 가시관을 쓴 채 당신께서는 감당하기 힘들 것 같은 십자가 횡목을 지시고 비틀비틀 처형장으로 끌려가십니다.
제자 요한을 제외한 다른 제자들은 웬일인지 보이지를 않습니다.
조금이라도 머뭇거리면 여지없이 채찍질이 날아옵니다.
오, 주여!
오, 주여!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것인가요?
어머니 마리아를 부축하면서 당신을 따라갑니다.

14.

로마 군인들이 십자가에 당신을 눕히고 거침없이 양 팔뚝에 못질을 합니다.
그렇게 당신께서는 우리 곁을 떠나가시고 말았습니다.

15.

당신과 함께 한 날들이 생생하게 하나하나 떠오릅니다.
내게 이제 살 이유는 없어졌습니다.
처음으로 사랑이라는 것을 알게 해주신 당신께서는 내 곁에 계시지를 않습니다.
살아야 할 이유를 찾을 수가 없습니다.

16.

사흘이 지났습니다.
당신이 보고 싶습니다.
동이 트기 전까지 기다릴 수 없습니다.
어떻게 왔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눈앞에 당신께서 묻히신 돌무덤이 보입니다.
어디서 오는 슬픔입니까?
어떻게 표현해야 하는 아픔입니까?

17.

슬픔 가득 안고 돌무덤으로 들어갑니다.
그런데, 당신께서 보이지를 않으십니다.
곧바로 무덤 밖으로 뛰쳐나옵니다.
주변을 둘러봐도 아무도 없습니다.
미치겠습니다.
당신께서 없어지셨습니다.

18.

또 울음이 터져나옵니다.
뭐가 뭔지 하나도 모르겠습니다.
누가 당신을 어디로 옮겨갔다는 말입니까?

19.

울고 있는 나에게 누군가 말을 걸어옵니다.
“여인아, 왜 우느냐? 누구를 찾느냐?”
“그분을 옮겨 가셨으면 어디에 모셨는지 저에게 말씀해 주십시오. 제가 모셔 가겠습니다.”
“마리아야!”
소리치고 맙니다.
“라뿌니! 나의 선생님!”

20.

이제서야 알았습니다.
당신께서 하셨던 말씀, 당신의 행동의 의미를 말입니다.
나의 영원하신 사랑이시여.

<하늘호수 마리아>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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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주간 첫날 이른 아침, 아직도 어두울 때에 마리아 막달레나가 무덤에 가서 보니, 무덤을 막았던 돌이 치워져 있었다. 2그래서 그 여자는 시몬 베드로와 예수님께서 사랑하신 다른 제자에게 달려가서 말하였다. “누가 주님을 무덤에서 꺼내 갔습니다. 어디에 모셨는지 모르겠습니다.” 11마리아는 무덤 밖에 서서 울고 있었다. 그렇게 울면서 무덤 쪽으로 몸을 굽혀 12들여다보니 하얀 옷을 입은 두 천사가 앉아 있었다. 한 천사는 예수님의 시신이 놓였던 자리 머리맡에, 다른 천사는 발치에 있었다. 13그들이 마리아에게 “여인아, 왜 우느냐?” 하고 묻자, 마리아가 그들에게 대답하였다. “누가 저의 주님을 꺼내 갔습니다. 어디에 모셨는지 모르겠습니다.” 14이렇게 말하고 나서 뒤로 돌아선 마리아는 예수님께서 서 계신 것을 보았다. 그러나 예수님이신 줄은 몰랐다. 15예수님께서 마리아에게 “여인아, 왜 우느냐? 누구를 찾느냐?” 하고 물으셨다. 마리아는 그분을 정원지기로 생각하고, “선생님, 선생님께서 그분을 옮겨 가셨으면 어디에 모셨는지 저에게 말씀해 주십시오. 제가 모셔 가겠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16예수님께서 “마리아야!” 하고 부르셨다. 마리아는 돌아서서 히브리말로 “라뿌니!” 하고 불렀다. 이는 ‘스승님!’이라는 뜻이다. 17예수님께서 마리아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아직 아버지께 올라가지 않았으니 나를 더 이상 붙들지 마라. 내 형제들에게 가서, ‘나는 내 아버지시며 너희의 아버지신 분, 내 하느님이시며 너희의 하느님이신 분께 올라간다.’ 하고 전하여라.” 18마리아 막달레나는 제자들에게 가서 “제가 주님을 뵈었습니다.” 하면서, 예수님께서 자기에게 하신 이 말씀을 전하였다. (요한 20,1-2.11-18)

<왜 울고 있느냐? 누구를 찾고 있느냐?>

울고 있는 사람에게, “왜 울고 있니?” 이렇게 물으면 어떤 느낌이 들까? 순간, 울음을 멈추고 울고 있는 이유를 살펴보게 될까? 아니면 울고 있는 자신의 아픔을 몰라준다고 서운해 할까?

마리아는 울고 있다. 스승님의 죽음도 가슴 아픈데 누가 그분의 시체까지 가져갔다고 생각하니 슬픔이 더해져 울음을 그칠 수가 없는 것이다. “왜 우느냐?”고 묻는 천사들한테 마리아는 대답한다. “누가 저의 주님을 꺼내 갔습니다. 어디에 모셨는지 모르겠습니다.” 또 묻는다. 이번에는 주님이시다. “왜 우느냐? 누구를 찾느냐?”

사랑하는 주님이 몸소 나타나셨지만 마리아는 주님을 알아보지 못한다. 왜 알아보지 못했을까? 마리아가 애타게 찾는 것은 살아 계신 주님이 아니라, 주님의 시체였기 때문이다. 주님의 주검을 찾으려는 그 마음과 생각이 그의 눈을 가린 것이다. 주님은 자신의 생각에 빠져 당신을 알아보지 못하는 마리아를 탓하지 않으시고, 이젠 이름을 불러주신다. “마리아야!” 그 부르심이 마리아로 하여금 돌아보게 한다.

몸을 돌려 뒤를 돌아본다. 바라봄의 전환이 이루어진 것이다. 자신이 보는 세계가 아니고 보이는 세계다. 이제야 보이는 마리아. 자신의 울음이 보인다. 자신의 생각이 보이는 것이다. 주님의 죽음에만 머물러 슬픔에 빠져 있던 자신의 부족한 믿음이 보이고, 몸을 돌리니 부활하신 주님이 보인다. 부활하신 주님을 보니 삶이 달라진다. 주님의 시체를 찾으러 올라왔던 산을, 부활하신 주님을 전하러 내려간다. 울음을 그치고, 발걸음도 당당하게 신명이 난 마리아의 모습이 그려진다.

<박후임 목사(봉곡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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