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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수원/의정부] 예수님을 간절히 사랑했던 여인, 부활의 증인이 되다
조회수 | 2,010
작성일 | 08.07.20
오늘은 마리아 막달레나 기념일입니다. 막달레나는 성녀의 고향을 딴 이름입니다. 갈릴래아 서쪽에 위치한 막달라 지방 출신으로 부활하신 예수님을 제일 처음 만나는(마르16,1-8) 큰 은총을 받은 마리아 막달레나는 무척 죄가 많은 여인으로 전해집니다. 얼마나 죄가 많았으면 루카복음 저자는 그녀 몸 속에 마귀가 일곱 마리나 들어 있었다고 전합니다.(루카8,2)

그런데 이렇게 손가락질 받던 죄 많았던 여인, 마리아 막달레나는 예수님을 만나면서 완전히 변화되었습니다. 몰라보게 달라졌을 뿐만 아니라 모든 것을 다 바쳐 예수님을 섬기는 제자가 되지요. 예수님을 만난 마리아는 일생을 예수님에게 헌신하며 살기를 결심하였고, 자신의 전 재산은 물론 목숨을 바쳐야 하는 위험 앞에서도 예수님 곁에 머물렀습니다.(루카8,3) 예수님께서 돌아가신 후에도 무덤을 지키며 죽기까지 예수님께 대한 존경과 믿음을 버리지 못했던 여인이었습니다.

복음서를 읽다보면 인물 때문에 종종 헷갈리는 부분이 있습니다. 신약성경에 󰡐마리아󰡑라는 인물이 6~7명이 등장하기에 오늘 기념일로 지내는 이 분이 어떤 분이신 지 명확히 구분하기가 쉽지 않은 것이지요.

「교부들의 증언과 전승에 따르면 오리게네스와 그 밖의 초기 성경학자들은 막달라 여자 마리아를 눈물로 예수의 발을 적시고 향유를 발라 드린 죄인으로 소문난 여인(루카7,36-50)과, 마르타와 자매지간인 마리아(루카10,38-42), 베타니아 마을 라자로의 누이 마리아(요한11,1-12)가 서로 다른 사람이라고 보았습니다. 그러나 그레고리오 1세 교황(590-604)은 이들을 모두 동일 인물로 간주하였고 그 후부터 막달라 마리아에 대한 공경이 성행하기 시작하였습니다.(한국 가톨릭 대사전 제4권 󰡐마리아, 막달라의󰡑참조)」

우리는 교회의 이러한 가르침을 기억하며 오늘 복음을 통하여 마리아 막달레나의 삶을 묵상하도록 합시다.

오늘 복음에 따르면 그렇게 그리던 예수님께서 다시 살아나셔서 눈앞에 나타나셨을 때 마리아 막달레나는 전혀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그저 동산지기인 줄만 알았지요. 많은 제자들이 스승을 버리고 도망가 버렸지만 다른 두 여인과 함께 예루살렘뿐 아니라 스승의 십자가 죽음 끝까지 따라 갔으며(마태 27,55-56), 아리마태아 사람 요셉이 예수를 장례 치르는 동안 줄곧 스승을 잃은 슬픔에 눈물을 흘렸던 마리아 막달레나였습니다.(마태 27,61; 요한 20,11) 그토록 예수님을 추종하였으며, 사랑과 투신으로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시는 예수님의 임종을 지켜보았지만(마르15,40) 마리아 막달레나는 막상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예수님께서 다른 모습으로 살아나셨기 때문일까요?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돌아가시기 전과 똑같은 모습으로 살아나셨지만 마리아 막달레나는 알아 뵙지 못했습니다. 마리아가 찾아 헤맨 것은 돌아가신 예수님이었기 때문입니다. 돌아가신 예수님만을 찾았기 때문에 살아 계신 예수님이 바로 옆에 서 계셔도 알아보지 못한 것입니다.

이렇게 우리는 어떤 한 곳으로만 관심을 쏟으면 다른 것은 놓치고 맙니다. 다시 말하자면 내 이웃의 안타까운 점, 잘못된 점만 보고 있으면 그에게 있는 좋은 점들은 결코 보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미워하는 마음이 크면 상대방의 좋은 모습은 놓치게 되는 것이지요. 반대로 아주 잘해주고 싶고 사랑해주고 싶은 이웃이 있다면 그가 무슨 일을 해도 무조건 좋아 보이는 것이 우리들 마음입니다. 내 주변의 모든 이웃을 이렇게 너그러운 마음과 열린 눈으로 보고 맞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이 뿐만이 아니지요. 한가지 일에 몰두하고 집착하면 우리는 중심을 잃고 표류하기가 쉽습니다. 예를 들어 요즈음 참으로 불행하게 보이는 것 중의 하나가 돈에 대한 사람들의 집착입니다. 돈에 욕심을 부리고 집착하면 부모도 형제도 보이지 않게 됩니다. 그래서 심지어는 돈 때문에 부모를 살해하고 형제간에 의를 끊으면서까지 오로지 내 욕심만 채우고 싶어합니다. 돈만 보이고 부모도 자식도 부부도 아무 것도 보이지가 않게 되는 것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누구에 대해 미움이 내게 있으면 그가 아무리 좋은 언행을 보여도 나에게는 안보이고 무엇이든 그에 관한 것은 곱게 보이지가 않습니다.

모든 관계는 사랑으로 출발해야합니다. 사랑이 있을 때에야 잘못을 덮어줄 수 있고 미운 모습도 받아들일 수 있는 여유가 생깁니다. 많은 경우 우리는 자칫 한쪽으로만 관심을 가지게 되고 생각이 기울어져서 보여도 못 보는 잘못을 범할 수가 있습니다. 바른 눈과 바른 마음을 회복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우리 시대는 너무나도 많은 사람들이 돈이나 건강, 명예 등 보여지는 것에 치중하여 소중한 것들을 잃어가고 있는 것 같습니다. 살아가면서 정작 보아야 할 것들을 보지 못하고, 눈 뜬 장님이 되어 잘못된 길을 걸어가느라고 헛된 노력들을 하는 안타까운 모습들을 심심찮게 볼 수가 있습니다.

오늘 마리아 막달레나 축일에 나는 내 옆에 계시는 예수님을 제대로 잘 알아보고 있는지 한번 깊이 묵상해 보아야 하겠습니다. 우리 안에 계신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하면, 이웃 사람의 좋은 점도, 또 간절한 갈망도 알아볼 수가 없고 오로지 이웃도 나의 필요 대상으로 밖에 보이지 않습니다. 이것이 요즈음 세상의 불행이고 비인간화의 모습이지요.

오늘 하루 예수님을 제대로 알아보는 바른 눈과 바른 마음을 위해 내가 해야할 일이 무엇인지 곰곰이 생각해 보는 시간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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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이기양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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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절히 원하는 일

우리에게는 누구나 소원이 있습니다. 사람에 따라서는 그 소원의 내용이 다르기는 하지만, 현실의 우리가 갖고 있지 않거나 지금이나 앞으로나 내가 가질 수 있었으면 하는 것이라는 데에는 변함이 없는 것이 바로 소원에 해당하는 것이 바로 그 대상일 것입니다. 그 바라는 것을 무엇이라고 표현할 수 있느냐에 따라 현실 삶에서 욕심쟁이가 될 수 있기도 하고, 다른 사람들이 생각할 때에 그 정도가 되지 않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여러분의 삶에 반드시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소원에 해당하는 것으로 여러분은 어떤 것을 기억하고 사십니까?

돈을 바라고 사는 분도 있을 것이고, 좀 더 넓은 집이나 가족들의 건강이나 어른신의 평안함을 바라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어떤 것이 되었든 현실의 나에게 없는 것을 바라거나 찾는 사람이라면 그것을 얻기에 합당한 노력을 해야 할 일입니다.

오늘은 마리아 막달레나 성녀의 축일입니다. 이 분이 구체적으로 언제 태어났는지, 어떤 삶의 본보기를 남기셨는지 찾는 것이 쉽지는 않은 일입니다. 우리가 읽을 수 있는 복음서에 나오는 몇몇 가지 일들이 그분과 관련된 것으로 전해지는 정도뿐입니다. 막달라 지방 출신의 마리아가 가졌던 삶의 자세가 오늘 복음에 나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비명횡사하신 뒤,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었던 안식일 다음날 무덤을 가장 먼저 찾은 여인으로 막달라의 마리가 등장합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에게 예수님에 관한 현실을 가장 먼저 알린 것도 마리아였고, 부활하신 그 분을 가장 먼저 만난 것도 마리아였습니다. 예수님과 막달라의 마리아가 만난 이야기는 소설 같은 모습을 보입니다. 마리아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으면서도 그분이 누구신지 알아보지 못합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동산지기로 보았다고 요한복음사가는 적고 있습니다.

사람이 제 아무리 간절히 원하는 일이었다고 해도 자기 생각의 세계에만 잡혀있다면 바뀐 현실을 알아볼 수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는 내용입니다. 우리는 복잡하고 힘든 세상에서 하느님의 뜻을 따르는 신앙인들로 살아갑니다. 쉽지 않은 그 길을 가면서도 올바른 삶의 결과를 맺을 수 있도록 해야 할 일입니다. 그래야만 간절히 원하고 바라는 것이었으면서도 정말로 그 일이 이루어졌을 때 그 중요함을 잃지 않을 수 있는 지혜를 얻을 수 있어야 할 일입니다. 이러한 자세는 내가 원하는 것을 큰소리로 말하는 것만큼이나 중요한 일입니다.

익명
  | 07.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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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를 부르시는 주님

제가 어렸을 때 초등학교는 그야말로 아이들이 많아 콩나물시루 같았습니다. 그래서 선생님이 학생들의 이름을 외우는 데도 몇 달이나 걸렸고, 오랫동안 거의 익명(?)으로 지내는 학생이 많았습니다. 그런데 성당 주일학교에서는 첫날부터 제 이름을 불러주었습니다. 주일학교 선생님이 “마티아” 하고 항상 웃으면서 세례명을 불러주는 것이 참 따뜻하게 느껴졌습니다. 그래서인지 저는 어렸을 때 성당 주일학교를 학교보다 더 좋아했습니다.

이름을 안다는 것, 그리고 이름을 부르는 것은 특별한 의미를 갖습니다.

김춘수 시인의 ‘꽃’이란 시의 일부입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이처럼 이름을 부른다는 것은 ‘나’와 ‘너’로 관계를 맺고, 또한 서로에게 ‘의미가 있는 무엇’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름을 부른다는 것은 존재의 의미를 인식하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슬픔에 빠져 울고 있는 마리아에게 예수님이 “마리아야!” 하고 먼저 이름을 부르십니다. 얼마나 감동적인 순간입니까? 어느 성인의 말씀처럼 주님은 지금 이 순간에도 우리를 부르고 계십니다. 그것은 우리를 특별하게 기억하고 있다는 의미입니다. 눈을 감고 나를 부르시는 고마운 주님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보시지 않겠습니까? 그전에 물론 마리아처럼 우리의 영혼도 주님을 애타게 찾아야 하겠지요.

허영엽 신부
  | 07.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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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 부활의 증인

성녀 마리아 막달레나는 루가 복음에 "일곱 마귀가 들였던 여자"(루가 8,2)로 나타나고 있고, 요한 복음에는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려 계실 때에 그 밑에 있던 부인들 중의 하나로 지목하고 있으며(참조:요한 19,25), 마르코 복음에는 예수께서 부활하신 후에 제일 먼저 막달라 여자 마리아에게 나타나셨고, 또한 예수님의 부활을 제자들에게 제일 먼저 알렸던 분으로 묘사하고 있다(참조: 마르 16,9- 11). 전승에 의하면, 교회는 마리아 막달레나를 "용서받은 죄 많은 여자"로 보고 통회와 관상의 이상적인 모델로 공경해 왔다. 성령강림 후 마리아 막달레나는 성모 마리아와 성 요한과 함께 에페소로 가서 선교하다가 그곳에서 선종 하였다고 한다.

프랑스 마르세이류 근처에 가면 막달레나 동굴이 있다. 그곳이 막달레나 성녀가 거처하시며 기도하셨던 곳이라고 전해진다. 전설에 의하면, 승천하시는 예수님께서 성녀의 손을 잡고 하늘에 오르시면서 성녀를 그곳에 내려 주셨고 성녀는 그곳에서 관상과 기도로 일생을 바치셨다는 전설이 있고, 지금도 그곳은 성지로 꾸며져, 잘 보존하고 있다. 아마 성녀를 공경하던 사람들이 모여 수도공동체를 이루고 살았던 곳으로 추정된다.

<부활의 증인>

마리아 막달레나는 복음을 통해서 진정한 부활의 증인으로 나타나고 있다. 막달라 마리아는 새벽녁 `아직 어두울 때`에 무덤으로 가서 `돌이 치워져 있는 것`을 보고 본능적으로 누군가 밤중에 주님의 시신을 훔쳐갔다고 생각하고 베드로와 요한에게 전한다(1-2절). 그런데 예수님이 마리아 막달레나에게 나타나셨을 때 막달레나는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하고 있다. 왜 그랬을까? 그 이유는 자기 위주의 눈물 때문이었고, 그녀의 눈은 예수님이 계시지 않은 빈 무덤에 고정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예수님으로부터 등을 돌리고 있었기에 예수님을 볼 수가 없었다. 돌아가신 것에만 그의 생각을 고정시켰기 때문에 예수님의 참 모습은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이때에 예수님께서는 "마리아!" 하고 부르신다.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그 한 마디로 "선생님!" 하고 기뻐한다.

이제 울고 있던 마리아는 왜 예수님을 보면서도 알아보지 못했을까? 막달레나는 완전히 자기 자신의 사고에 사로잡혀 있었기에 부활하신 예수님을 동산지기로 밖에 보지 못하고 있다. 빈 무덤에서 눈을 돌리지 못하기에, 즉 자기 고집에서 벗어나지 못하였기에, 자신의 판단이 옳은 줄로만 알았기에 결과적으로는 예수님에게서 등을 돌리고 있게 되는 것이다. 우리도 흔히 그와 같은 태도를 취하면서 살아가기 일쑤라 하겠다. 그럴 때 우리도 차디찬 무덤, 땅에만 쏠리는 것이다. 이제 우리는 그 곳에서 눈을 돌려 승리를 거두시고 서 계시는 주님을 알아 볼 수 있어야 한다.

부활의 체험이란 것은 이제 막달레나가 체험하는 것 같이, 부활하신 주님을 뵈옵는 것 뿐 아니라, 그 체험을 전하는 것이다. 그녀는 제자들에게 예수님의 부활의 소식을 전하는 사명을 받는다. 그리고 달려가서 그 소식을 전하고 있다. 우리의 삶도 마찬가지이다. 먼저 신앙인으로서 부활을 매일 체험하여야 하며, 그 부활체험을 기쁘게 선포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이것은 흔히 새로이 주님 안에 태어나는 삶의 모습에서 나올 수 있는 것이며, 우리는 이 때 진정으로 감사하며 살 수 있고 그것을 이웃에게 전할 수 있다.

부활하신 주님께서는 막달라 여자마리아가 주님을 애타게 찾았으나 제대로 알아 보지 못하여 예수께서 먼저 다가가시고 마리아를 불러주시듯이 언제나 우리에게 먼저 다가오시고, 나를 먼저 부르시고 계시다. 그러나 우리가 나 자신의 고정관념이나 나의 편견에 사로잡혀 있을 때에는 내 옆에 계신 주님도 엉뚱한 동산지기로 만들 수 있음을 명심하여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항상 깨어있는 자세로 그분을 뵙고 "나의 주님!"으로 맞아들일 수 있어야 한다. 우리의 삶이 언제나 마리아 막달레나 성녀처럼 부활을 체험하고 그 체험을 용감히 전할 수 있도록 하여야 한다.

<수원교구 조욱현 신부>
  | 07.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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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 그리움, 그리고 만남

요즈음 제게는 자그마한 기쁨이 생겼습니다. 본당 식구들 뿐만 아니라, 같은 믿음을 고백하는 벗이라는 점 외에는 아무 것도 아는 것이 없는 분들로부터 뜻하지 않은 E-mail이 오기도 하고, 게시판 제가 올린 묵상 글에 대한 회신이 가끔씩 달리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저의 부족한 묵상 글들을 읽으시고 고맙다는 뜻으로 보내주시기도 하고, 자신의 이야기나 묵상을 보내주시기도 합니다. 제게는 커다란 격려가 아닐 수 없습니다. 요즈음 본당의 여름 행사 관계로 일일히 답신을 제대로 하지 못해 죄송한 마음입니다.

애초에 제 자신의 신앙 생활을 위한 복음 묵상을 좀 더 책임감 있게 해 나가자는 뜻에서 본당 게시판과 교구 게시판에 올리기 시작한 이 작업이 제가 생각하지 못했던 만남을 이루어 주었습니다. 이제 어느덧 저의 묵상 글을 읽으실 벗들에게 조그마한 도움이 바라는 마음으로 누구인지는 모르지만 그 분들을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믿음의 벗들에 대한 그리움과 반가움이라고나 할까요. 비록 직접 얼굴을 맞대고 이야기를 나누지는 못하지만(물론 본당 식구들은 다르겠지만 말입니다.) 이미 마음으로는 서로 함께 하고 있다는 느낌을 가집니다.

그리움은 사랑을 담고 있습니다. 그리움은 어떠한 모습이든 만남으로 이어지고 만남은 반가움을 줍니다. 이 반가움은 서로에 대한 사랑과 믿음과 희망으로 이어져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삶의 변화를 가져옵니다. 어두웠던 마음에 생기가 돋고, 억누를 수 없는 힘을 느끼게 됩니다. 그래서 축쳐진 어깨를 다시 세우고 흐뜨러진 다리를 곧게 하여 힘찬 발걸음을 내딛을 수 있습니다. 더 이상 혼자가 아니라 누군가와 함께라는 느낌은 이렇듯 한 사람의 삶을 완전히 바꿀 수 있는 힘이 있습니다. 그리움이 간절할수록 이 모든 것은 보다 더 확실합니다. 그래서 누군가를 간절히 그리워하고 있는 사람은 행복합니다.

막달라 여자 마리아는 행복한 여인이었습니다. 누구보다도 더 간절히 예수님을 그리워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막달레나의 그리움은 예수님을 만나뵙고 알아볼 수 있는 혜안이었습니다. 물론 이 그리움만으로 예수님과의 재회가 이루어진 것은 아니었습니다. 막달레나도 처음에는 예수님을 동산지기로만 알았으니 말입니다. 그렇지만 "마리아야!" 라는 예수님의 부르심에 막달레나가 "라뽀니!"라고 대답할 수 있었던 데는 그녀의 그리움이 큰 몫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알아본 순간 막달레나는 커다란 변화를 겪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당신의 부활을 전하라는 엄청난 사명을 주실 만큼 말입니다. 예수님으로부터 떨어져 있던 외로움과 슬픔에서 다시 함께 한다는 기쁨으로, 절망에서 희망으로 넘어간 것입니다.

막달라 여자 마리아의 사랑 담긴 그리움을 가지고 싶습니다. 예수님에 대한, 그리고 믿음의 벗들에 대한 그리움 말이지요. 지금까지 가지고 있던 사랑 담긴 그리움을 더욱 간절히 가꾸고 싶습니다. 그리움 자체가 목적은 아니지만, 그리움이 일구어낼 값진 만남을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이 만남이 가져올 참된 삶을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세상을 이기는 승리의 길은 곧 우리의 믿음입니다."(1요한 5,4)

<의정부교구 상지종 신부>
  | 07.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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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그들이 마리아에게 “여인아, 왜 우느냐?” 하고 묻자, 마리아가 그들에게 대답하였다. “누가 저의 주님을 꺼내 갔습니다. 어디에 모셨는지 모르겠습니다.” 14이렇게 말하고 나서 뒤로 돌아선 마리아는 예수님께서 서 계신 것을 보았다. 그러나 예수님이신 줄은 몰랐다. 15예수님께서 마리아에게 “여인아, 왜 우느냐? 누구를 찾느냐?” 하고 물으셨다. 마리아는 그분을 정원지기로 생각하고, “선생님, 선생님께서 그분을 옮겨 가셨으면 어디에 모셨는지 저에게 말씀해 주십시오. 제가 모셔 가겠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16예수님께서 “마리아야!” 하고 부르셨다. 마리아는 돌아서서 히브리 말로 “라뿌니!” 하고 불렀다. 이는 ‘스승님!’이라는 뜻이다.(요한 20,13-16)

<묵상>

마리아 막달레나는 마귀에게 시달려 오다가 예수님께 치유를 받은 여자였습니다. 그녀는 고마운 마음에 그분을 보살피는 여자들의 무리에 끼었으며(루카 8,2-3), 그분을 따라 갈릴래아에서 예루살렘으로 가면서(마태 27,55-56) 그분의 말씀을 매일 듣고 그분의 기적을 보았습니다. 많은 이들이 두려움에 달아났을 때에도 마리아 막달레나는 끝까지 참된 제자로 남아 십자가 곁을 충실하게 지켰으며,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시는 것을 지켜보았습니다.(요한 19,25) 그러나 그런 용기 있는 행동도 그녀의 헌신적인 열정을 달래주기에는 부족했습니다.

슬픔에 겨운 마리아는 예수님과 조금이라도 가까이 있고자, 그래서 그분과의 추억에 잠기고자 예수님의 무덤에 애도하러 갔습니다. 그러나 빈 무덤을 발견하고 곧 이어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나신 예수님과 마주치자, 그녀의 슬픔은 기쁨으로 바뀌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마리아의 이름을 불러 주시며 그녀를 한 번 더 해방시키셨습니다. 이번에는 그분의 죽으심을 지켜볼 때 그녀를 삼켜버린 비탄에서 해방시키신 것입니다. “마리아야”라는 단 한 마디에 그녀는 기운을 되찾았으며, “라뿌니” 곧 스승님이라고 한 그녀의 대답에는 안도와 기쁨만이 아니라 그분과 그분의 부활을 믿는다는 맹세가 담겨 있었습니다.

생각해 보세요. 예수님은 이스라엘의 사제나 통치자도 아니고 열두 사도도 아닌, 순탄치 않은 과거를 지닌 여자에게 가장 먼저 나타나셨습니다. 이 여자가 예수님께서 부활의 첫 증인으로 택하신 사람이었습니다. 이 여자가 ‘사도들의 사도’, 부활의 첫 전령이 되는 영예를 누리도록 그분이 정하신 사람이었습니다.

다시 한 번 하느님께서는 전혀 뜻밖의 미천한 이에게 당신을 드러내신 것입니다. 마리아가 무엇에 얽매여 고통스러워했든지 간에 - 정신적으로 아팠든, 죄에 빠져 있었든, 아니면 간질 같은 쇠약성 질환에 시달렸든지 - 예수님이 보시기에는 그런 것이 그녀의 자격을 앗아갈 수 없었습니다. 우리 또한 과거의 죄나 현재의 장애로 인해 자격을 잃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로 그런 이유로 오신 것입니다. 곧 우리를 죄에서 구하시고 하느님이 선택하신 사랑받는 자녀로서의 존엄을 우리에게 가득 불어넣어 주시고자 말입니다. 그분은 그분과 함께 영원한 생명을 나누자고 우리의 이름을 한 사람씩 부르시며, 성령의 권능으로 우리를 변화시키시어 우리 또한 그분 부활의 증인이 될 수 있게 하십니다.

<기도>

“오 예수님, 부활하신 주님이시며 구세주시여,
당신은 영광 중에 오시는 희망이십니다!
당신 목소리에 제 마음 기쁩니다.
제 안의 희망을 깨우시고 주님 안에서 누리는
새 삶으로 저를 높여 주시니 감사드립니다.”

<서울대교구 통합사목연구소>
  | 07.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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