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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마산] 주님의 목소리를 귀 기울려 듣자
조회수 | 1,755
작성일 | 08.07.20
오늘날 대부분의 성서학자들은 마리아 막달레나, 즉 막달라 여자 마리아는 예수께서 일곱 마귀를 쫓아내신 바로 그 사람이라는 것에 대체로 동의합니다. 아마도 그는 그 이후 줄곧 예수를 따라 다니면서 그 일행의 뒷바라지를 한 것 같습니다. 그뿐 아니라 그는 예수께서 십자가에 처형되실 때에도 그 곁을 지키고 있었고 돌아가신 후 아직 어두울 때 제일 먼저 무덤에 갔습니다. 막달레나는 예수를 완전히 신뢰하여 의지하고 있었으며, 또 신의에 있어서 그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았습니다. 아마도 부활하신 예수께서 베드로와 다른 제자보다 먼저 그에게 나타나신 이유도 바로 이러한 점 때문이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그는 예수께 충실하였습니다.

그런 그도 자신의 눈앞에 서 계신 부활하신 예수를 알아보지 못합니다.

예수께서는 돌아가셨다는 자신의 판단에만 머물렀던 탓인 것 같습니다. 하지만 예수께서 부르시자 그는 곧 예수를 알아봅니다. 우리도 역시 때때로 우리의 생각에 빠져서 주님을 제대로 알아보지 못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막달레나가 예수의 부르심에 귀 기울였듯이 주님을 만나기 위해 우리도 항상 주님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면서 살아가야 되겠습니다. 나에게 말씀하고 계시는 주님의 목소리를 귀 기울여 들어보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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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교구 구경국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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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의 주검을 마음속에 묻은 성녀

오늘은 신약성서상의 인물이자 예수님 당대에 살았던 마리아 막달레나, 또는 막달라 여자 마리아의 축일이다. 마리아 막달레나! 막달레나는 그녀의 고향을 딴 이름이다. 성녀는 갈릴래아 서쪽에 위치한 막달라 지방 출신으로서 성녀의 이름은 단지 복음서에만 12번 언급된다. 그것은 마태오복음에 3번(마태 27,56; 27,61; 28,1), 마르코복음에 4번(마르 15,40; 15,47; 16,1; 16,9), 루가복음에 2번(루가 8,2; 24,10), 그리고 요한복음에 3번(요한 19,25; 20,1; 20,18)이다.

복음서에서 성녀를 언급하는 곳은 거의 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 및 부활과 관련이 있다. 막달라 마리아가 예수와 어떠한 관계에 서 있는 지에 대하여 정확히 기록하고 있는 곳은 루가복음에서 ‘예수를 도와 드린 여자들’의 명단을 기록한 대목이다.(8,2) 여기서 마리아는 일곱 마귀가 들려 시달리다가 예수님으로부터 치유된 여인으로 지목되며, 이 사실은 마르코복음에도 증언된다. “일요일 이른 아침 부활하신 예수께서 막달라 여자 마리아에게 처음 나타나셨는데, 그녀는 일찍이 예수께서 일곱 마귀를 쫓아내어 주셨던 여자이다.”(마르 16,9) 이 점을 미루어 볼 때 마리아 막달레나 성녀는 예수님으로부터 구마치유를 받고 줄곧 예수님을 따라다니면서 다른 여인들과 함께 선교활동에 협조하였으며, 예수님의 마지막 십자가 죽음과 부활의 증인이라 결론지을 수 있다.

종합하여 보면, 막달라 지방 출신의 마리아는 일곱 마귀에 들려 고생하다 예수로부터 치유되어 그분의 제자가 되었다.(루가 8,2) 그렇다면 예수의 제자단은 12제자뿐 아니라 여인들까지 포함한 큰 규모였음을 알 수 있다. 마리아는 여성제자단에서 중요한 인물이었고, 다른 여인들과 함께 재산을 털어 예수와 그 일행의 시중을 들었고, 그들의 의식(衣食)을 돌보았다.(루가 8,3) 마리아는 예수를 따라 모든 제자들과 예루살렘까지 갔다. 그러나 예수의 예루살렘 마지막 날에는 많은 제자들이 스승을 버리고 도망가 버렸지만, 마리아 막달레나는 다른 두 여인과 함께 예루살렘뿐 아니라 스승의 십자가 죽음 끝까지 따라 갔다.(마태 27,55-56) 마리아는 아리마태아 사람 요셉이 예수를 장례 치르는 동안 줄곧 스승을 잃은 슬픔에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마태 27,61; 요한 20,11)

그녀는 경황이 없어 스승의 시신에 다 하지 못한 예를 갖추기 위해 안식일 다음날 새벽 동이 트기도 전에 다른 여인들과 함께 스승의 시신에 향유를 바르기 위해 무덤을 찾아갔다. 그 일로 그녀는 빈무덤의 첫 증인이 되었고, 예수부활에 관한 천사의 기쁜 소식을 맨 처음 들은 자가 되었고, 이 소식을 모두에게 전해야 할 사명을 받게 되었다.(마르 16,6-7) 요한복음은 부활절 이른 새벽에 마리아 막달레나가 혼자 예수님의 무덤에 있었으며 그녀 혼자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 본 것으로 전한다.(요한 20,15-17) 마리아는 예수님의 살아생전뿐 아니라 부활하신 예수님의 현존에도 각별한 친분으로 함께 한 증인이었다. 마리아 막달레나에 관한 더 이상의 기록은 찾아볼 수 없다.

그런데 복음서를 읽다보면 헷갈리는 부분이 있다. 그것은 복음서 여기저기에 등장하는 다른 ‘마리아’로서 그녀가 마리아 막달레나와 동일한 인물인 듯한 인상을 주기 때문이다. 우선 요한복음에 의한 마르타와 라자로의 누이로서의 마리아인데, 이 마리아가 예수님의 발에 향유를 붓고 자기 머리카락으로 닦아드린 적이 있다는 것이다.(요한 11,1-2)

요한복음사가는 실제로 예수님의 예루살렘입성 바로 전, 마지막 과월절을 엿새 앞두고 라자로를 다시 살렸던 베다니아에서의 환영만찬에서 마르타가 시중을 들고 있던 중에 마리아가 나타나 매우 값진 순 나르드 향유를 예수님의 발에 붓고 자기 머리털로 닦아 드렸다는 사실을 증언하고 있다.(요한 12,1-8) 이 대목은 마태오(26,6-13)와 마르코(14,3-9)복음에도 똑같이 실려 있는데, 시기적으로 예수님의 최후만찬 직전에 있었던 사건으로 매우 신빙성이 있다. 가리옷 사람 유다는 비싼 향유를 아까워했으나 예수께서는 이 사건을 자신의 죽음을 예고하는 것으로 풀이하셨다.

문제는 루가복음이다. 루가복음에는 이 대목이 생략되었다. 그러나 루가복음에도 예수님의 갈릴래아 활동기 중에 이름 없이 죄인으로 묘사된 한 여인이 예수께 와서 그 발치에서 눈물을 흘리고는 자기 머리카락으로 닦고 나서 향유를 발랐다는 기록이 있다.(루가 7,36-50) 여기서 이 여인은 예수께 행한 사랑의 행위를 통하여 자신의 죄를 용서받는다. 이 여인이 베다니아에 살고 있던 마르타의 누이 마리아(루가 10,38-39)인지는 확실하지 않다. 그런데 후대의 사람들은 같은 마리아 막달레나로 본다는 것이다.

확실한 사실은 마리아 막달레나가 빈무덤과 예수부활의 첫 증인이며, 일찍이 일곱 마귀가 들렸던 여자라는 것이다.(마르 16,9; 마태 28,1; 루가 24,10; 요한 20,1; 마르 16,9; 루가 8,2) 오리게네스(185-254?)는 마리아 막달레나와 마르타의 누이 마리아와 이름 없이 묘사된 죄 많은 여인을 모두 구분하였으나, 373년 시리아 출신 에프라임의 복음주석서에는 모두 동일한 인물로 주장되었고, 교황 대 그레고리오(540-604)는 이를 재차 확증하였다.

이후 성녀 마리아 막달레나에 관한 많은 이야기들이 만들어졌다. 동방정교회의 증언에 의하면 마리아 막달레나는 성모 마리아가 살았던 에페소에 살다가 죽었으며, 그녀의 유해는 899년 콘스탄티노플로 옮겨졌다고 한다. 독일에서는 13세기부터 뉘우치는 여인들을 위한 막달레나 수녀회가 창설되었고, 덴마크와의 전쟁에서 막달레나의 전구로 승리하였다는 것을 기념하여 ‘뤼벡’이라는 도시가 건설되기도 했다.

14세기부터는 ‘멀리 서서 지켜보고 있던 여자들’(루가 23,49) 가운데서 마리아 막달레나를 예수님의 십자가 바로 아래로 끌어와 그린 성화들이 등장하였다. 마리아 막달레나는 뉘우치고 용서받고 구원받은 죄인으로 중세기 시인들과 화가들의 모티브가 되기도 했다. 1844년 프리드리히 헤벨스의 ≪마리아 막달레나≫나 1983년 루이제 린저의 ≪미리암≫은 이런 모티브를 사용한 대표적인 작품이다.

오늘 교회가 기억하는 성녀 마리아 막달레나가 과거 행실이 나쁜 죄인이었다는 주장은 그 정확성의 여부(與否)를 접어두고라도 교회적으로 볼 때 마음에 걸리는 부분이다. 그러나 죄인이 아닌 사람이 세상 어디에 있겠는가? 중요한 것은 마리아가 예수께 믿음과 사랑을 가졌었고, 이 믿음과 사랑으로 말미암아 죄를 용서받았다는 것이다. 누구든지 마리아처럼 눈물로 예수님의 발을 적시고, 자기 머리카락으로 닦으며, 발에 입을 맞추고 향유를 발라드리는 극진한 사랑을 보인다면, 그 또한 그만큼 많은 죄를 용서받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이렇게 예수님으로부터 죄를 용서받고 그분의 사랑을 받은 자는 예수님과 마지막까지를 함께 한다. 제자들은 예수를 버리고 모두 달아났지만(마르 14,40), 그는 십자가 곁을 떠나지 않고 예수님의 죽음을 아파하며, 그분의 주검을 마음속에 묻었다.(마르 15,40-41)

예수님의 시신(屍身)을 마음에 묻고 사는 사람은 더 이상 송장을 묻어두고 있는 것이 아니라 살아 계신 예수님을 품고 사는 사람이다. 죽음으로부터 예수님은 부활하셨기 때문이다. 살아 계신 예수님을 마음에 품고 사는 사람은 매일 아침 부활한 예수님을 만나 뵈올 것이며, 성녀 마리아 막달레나처럼 부활의 기쁜 소식을 세상에 전하는 증인이 될 것이다.(요한 20,18).

박상대 신부
  | 07.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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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에게 예수님은 누구입니까?

예수님을 따르던 제자들은
자신을 출세시켜 줄 막강한 권력자로써의 메시야를
꿈꾸었을지 모릅니다.
세상 사람들에게는
자신의 목숨도 단도리하지 못하는 어리석은
뻥쟁이로 생각되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바리사이나 율법학자들에게는
죽어 없애야 할 걸림돌일 뿐이었습니다.

오늘 복음은
삶과 죽음조차 갈라놓을 수 없고
상관될 수 없는 사랑의 현장을 전해 줍니다.
예수님의 죽음을 목격했던 마리아 막달레나에게는

그분의 처참한 죽음도
예수님의 끔찍한 몰골도 사랑하는 마음을 버리게 하지 못했습니다.
사랑은
좋은 일보다 궂은일에 아린 연민이며
상대의 못난 구석이 더 애잔하게 밟히기 마련인 것이지요.

아직 어둔 길을 달려가는 마리아 막달레나의 마음은
아무것도 원하는 것이 없었습니다.
접혀 버린 예수의 꿈도
못나게 죽어간 예수라는 청년의 비참한 모습도
아무 상관이 없었습니다.
그저 자기가 사랑했던 그 사람
이제는 잃어버리고 곁에 없는 그 사람을
잊을 수 없어서 무덤으로 달려갑니다.
자기가 할 수 있는 일
해 주고 싶은 일을 하기 위해 달려갔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사랑하는 마음뿐이었기에
예수님의 시신이 사라진 것을 알고도
경악하지 않으며 의심하지도 않으며
왜 라고 묻지도 않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다시 보고 싶을 뿐이라는 사실을
마리아 막달레나의 곱디고운 말투로 알 수 있습니다.
알 수 없이 벌어진 상황에서도
자신의 사랑을 숨기지 않고 안타깝게 울고만 있습니다.

그런데
불쑥 예수님께서 나타나셨다는 사실이 뜻하는 의미를 새겨봅니다.
마리아 막달레나의 마음이 정말 깨끗했다는 것을
알려주는 것이 아닐까요?
예수님께서는
“마음이 깨끗한 사람들은 하느님을 볼 것”이라고 하셨으니까요.
그 날 어느 제자도
예수님을 볼 수 없었던 것은
아직 그들의 마음이 깨끗지 못했던 이유는 아닐까
감히 생각해 봅니다.
오늘 우리가 그분을 뵙지 못하는 것도 마찬가지가 아니겠는지요.

신앙은 세상의 무엇을 얻기 위한 방편이 아닙니다.
신앙은 그 자체로 우리의 목적이며 가치가 되어야 합니다.
신앙은 남이 닦은 길을 쫒아가는 일이 아닙니다.
그분께서는
늘 새로운 방법으로 새로운 길로
오직 나 한 사람을 위한 방법으로 찾아오시기에 그렇습니다.

우리에게 오시는 주님께서는
무언가를 바라고 오는 것이 아니라
사랑하려고 오십니다.
예수님은 우리와 함께 사랑하고 싶어 오십니다.
복음이 전하는 마리아 막달레나의 모습처럼
그 사랑을 만나러 오신 주님처럼
이렇게
애절하기도 한 것이 주님과 우리의 사랑입니다.

어떤 마음으로 기도하십니까?
무슨 생각으로 예수님을 따르십니까?
아무 계산 없이
정말 원하는 것은 하나도 없이 그분을 사랑하십니까?
그분을 생각하면
울기도 웃기도 슬프기도 아프기도 해서
토라졌다가도
도무지 돌아설 수도 내칠 수도 없어서,
너무나 그리워서 다시
어둔 새벽을 달려 나가는 그 사랑을 하고 있습니까?

아, 그 깨끗한 마음은 예수님을 볼 것입니다.

장재봉 신부
  | 07.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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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 마리아야! 라뽀니!

오늘은 성녀 마리아 막달레나의 날입니다. 복음서의 증언으로는 막달라 여자 마리아가 어떤 여인인지는 정확히 알 수 없습니다. 복음서는 그녀가 일곱 마귀에게 시달리다가 치유를 받고 예수님의 제자가 되었다는 사실(루가8,2, 마르코16,9)과 십자가 아래에서 예수님의 최후를 지켜보았다는 사실(마태오27,56 마르코15,40 요한19,25), 그리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가장 먼저 만났다는 사실(마태오28,1 마르코16,1루가24,10 요한 20,1)을 증언하고 있을 뿐입니다.전통적으로 그녀가 창녀였다거나 예수의 발을 눈물로 씻고 값진 나르드 향유를 바르고 머리털로 닦아드린 여인(루가7,36 요한 12,1이하)이라고 해석하지만 베다니아에 살았던 나자로의 누이 마리아와 막달라에 살았던 마리아는 분명히 다른 여인입니다.

막달라 마리아가 어떤 인물인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녀가 예수님을 극진히 사랑했고 예수님으로부터 사랑받았다는 사실이 중요합니다. 사랑은 죽음을 뛰어넘습니다. 마리아는 무덤 안에서 예수를 찾지만, 예수는 무덤 안에 없습니다. 무덤은 미워하고 증오하고 원한과 원망을 쌓는 사람들이 갇혀서 썩는 자리이지 사랑의 사람 예수가 머물 자리가 아닙니다. 마리아는 사랑하는 사람을 무덤 밖에서 만납니다.

오늘 아침 성무일도의 찬미가 중 한 구절을 옮기려고 합니다.

‘막달라 향기로운 고운 꽃이여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불타신이여
당신의 타오르는 사랑의 불로
우리의 찬 마음도 데워주소서.’

당신도 예수님을 사랑하고 예수님으로부터 사랑받는 사람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마산교구 강영구 신부>
  | 07.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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