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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 성 야고보 사도 축일 (7월 25일) 독서와 복음
조회수 | 1,623
작성일 | 08.07.24
사도 바오로의 코린토 2서 4,7-15 우리는 언제나 예수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지고 다닙니다.

형제 여러분,
7 우리는 이 보물을 질그릇 속에 지니고 있습니다. 그 엄청난 힘은 하느님의 것으로, 우리에게서 나오는 힘이 아님을 보여 주시려는 것입니다.
8 우리는 온갖 환난을 겪어도 억눌리지 않고, 난관에 부딪혀도 절망하지 않으며,
9 박해를 받아도 버림받지 않고, 맞아 쓰러져도 멸망하지 않습니다.
10 우리는 언제나 예수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지고 다닙니다. 우리 몸에서 예수님의 생명도 드러나게 하려는 것입니다.
11 우리는 살아 있으면서도 늘 예수님 때문에 죽음에 넘겨집니다. 우리의 죽을 육신에서 예수님의 생명도 드러나게 하려는 것입니다.
12 그리하여 우리에게서는 죽음이 약동하고, 여러분에게서는 생명이 약동합니다.
13 “나는 믿었다. 그러므로 말하였다.”고 성경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와 똑같은 믿음의 영을 우리도 지니고 있으므로 “우리는 믿습니다. 그러므로 말합니다.”
14 주 예수님을 일으키신 분께서 우리도 예수님과 함께 일으키시어 여러분과 더불어 당신 앞에 세워 주시리라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15 이 모든 것은 다 여러분을 위한 것입니다. 그리하여 은총이 점점 더 많은 사람에게 퍼져 나가 하느님의 영광을 위하여 감사하는 마음이 넘치게 하려는 것입니다.

마태오 20,20-28 너희는 내 잔을 마실 것이다.

20 그때에 제베대오의 두 아들의 어머니가 그 아들들과 함께 예수님께 다가와 엎드려 절하고 무엇인가 청하였다.
21 예수님께서 그 부인에게 “무엇을 원하느냐?” 하고 물으시자, 그 부인이 “스승님의 나라에서 저의 이 두 아들이 하나는 스승님의 오른쪽에, 하나는 왼쪽에 앉을 것이라고 말씀해 주십시오.” 하고 말하였다.
22 예수님께서 “너희는 너희가 무엇을 청하는지 알지도 못한다. 내가 마시려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느냐?” 하고 물으셨다.
그들이 “할 수 있습니다.” 하고 대답하자,
23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내 잔을 마실 것이다. 그러나 내 오른쪽과 왼쪽에 앉는 것은 내가 허락할 일이 아니라, 내 아버지께서 정하신 이들에게 돌아가는 것이다.”
24 다른 열 제자가 이 말을 듣고 그 두 형제를 불쾌하게 여겼다.
25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가까이 불러 이르셨다. “너희도 알다시피 다른 민족들의 통치자들은 백성 위에 군림하고, 고관들은 백성에게 세도를 부린다.
26 그러나 너희는 그래서는 안 된다. 너희 가운데에서 높은 사람이 되려는 이는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27 또한 너희 가운데에서 첫째가 되려는 이는 너희의 종이 되어야 한다.
28 사람의 아들도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고, 또 많은 이들의 몸값으로 자기 목숨을 바치러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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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와 입으로 하는 사랑에는 향기가 없다.
진정한 사랑은 이해, 포용, 자기 낮춤이 선행된다.
사랑이 머리에서 가슴으로 내려오는 데 칠십 년이 걸렸다.”
김수환 추기경님께서 들려주신 인생 덕목의 한 대목입니다.

겸손한 사람이 훌륭한 일을 했을 때는 사람들에게 존경하는 마음을 불러일으키지만, 교만한 사람이 같은 일을 했을 때에는 오히려 시기와 질투가 생긴다고 했습니다.

김수환 추기경님이
한국 교회뿐 아니라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어른이 되실 수 있었던 것은 그분이 하신 큰일보다 더 큰 겸손함을 지니셨기 때문입니다.

누군가 성인(聖人)과 범부(凡夫)의 차이를 물었습니다.

토마스 머튼은
“범부는 세상을 이용하여 자신을 섬기려 하지만, 성인은 세상을 통하여 하느님을 섬기려 한다.”라고 대답하였습니다.

교회 안의 모든 구성원은 섬기고자 봉사직에 부름 받은 사람들입니다. 자신을 섬기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을 섬기고 이웃을 섬깁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는 목표는 성인(聖人)이 되는 것입니다.

성인이 되는 수련은 섬기는 연습에서 시작됩니다. 우리의 머릿속에 든 모든 사랑의 지식은, 섬김의 삶으로 비로소 가슴으로 내려와 따뜻하고 생생한 사랑이 됩니다. 내가 누구를 섬기고 살 때 하늘의 천사는 그 시간 나를 섬기고 돌보아 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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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2011년 7월 25일
  | 07.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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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정이나 공동체 안의 권위는 다른 사람들이 성장하도록 도와주고 격려해 주는 데 그 의미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 권위를 행사하는 사람 자신을 위해 권위가 사용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한 가정에서 부모가 권위를 잘못 행사함으로써 자녀가 권위에 대해 부정적인 생각을 가질 수 있습니다. 권위적인 아버지는 무조건 자녀를 통제하려 하거나, 반대로 자녀에게 전혀 신경을 쓰지 않습니다. 어떤 어머니는 자녀에 대한 소유욕이 강해서 자녀의 자유를 지나치게 억압하거나 언제나 자기 곁에 두려는 애착을 가집니다. 이렇게 자란 아이들은 ‘권위는 나쁜 것, 해로운 것, 자유를 제한하는 것’ 등으로 인식하게 됩니다. 권위에 대한 부정적인 경험을 한 아이들은 어른이 되어서도 어떻게 책임을 지고 권위를 행사해야 할지 몰라서 어려움을 느낍니다. 어릴 때에 좋은 본보기를 경험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교황님은 자신을 “하느님의 종들의 종”이라고 표현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시면서 권위를 어떻게 행사하는지 몸소 보여 주셨습니다. 어떠한 일을 하라고 부여받은 권한을 자신의 명예를 쌓거나 힘을 행사하는 데 쓰지 말라는 본보기입니다. 부모로서, 공동체의 책임자로서 우리에게 주어진 권한을 어떻게 사용하고 있는지 곰곰이 살펴보아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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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2012년 7월 25일
  | 07.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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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는 너희가 무엇을 청하는지 알지도 못한다. 내가 마시려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느냐?”

예수님의 이 말씀에 대하여 네덜란드 출신의 헨리 나웬 신부는 『이 잔을 들겠느냐』라는 자신의 책에서 깊이 통찰하였는데, 요약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잔’에 술을 따를 때에는 ‘건배’를 합니다. 물이나 음료수를 마실 때에는 그렇지 않은데 왜 술을 마실 때에는 건배하는 것일까요? 온 인류가 이러한 건배 문화를 가지고 있는 것은 술을 따르고 잔을 부딪치는 행위가 서로의 삶을 축복해 주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곧 술을 따르는 것은 그 사람이 그동안 살아오며 느낀 슬픔, 기쁨, 절망, 보람, 긍지, 각오 등을 담는 것이고, 잔을 높이 드는 것은 이 모든 삶의 내용을 다른 이들에게 드러내는 행위로 생각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또 잔을 부딪친다는 것은 각자의 느낌을 서로 교감하면서 나누는 것입니다. 그렇게 나누면서 서로의 삶을 축복해 주었던 것입니다.

‘잔’에 이러한 뜻이 담겨 있다면, 예수님의 잔을 마신다는 것은 그분 삶의 방식을 받아들인다는 것을 뜻할 것입니다. 그분께서 사람이 되시어 느끼셨던 모든 것을 자신의 느낌으로 삼는다는 말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날마다 또는 주일마다 제대 위에서 그리스도의 잔을 높이 들고 그것을 나누어 마십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삶이 어떠해야 하겠습니까? 예수님께서 보여 주신 삶을 살아가고, 그 삶 속에서 그분께서 지니셨던 마음을 우리의 마음으로 삼아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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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2013년 7월 25일
  | 07.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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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제1독서에서 우리는 자신의 ‘사도적 실존’을 요약한 ‘질그릇에 담긴 보물’이라는 바오로 사도의 아름다운 표현을 만납니다. 이 말에서 떠오르는 심상을 잘 간직하면 좋겠습니다. 이를 제대로 바라보는 사람은 그리스도인 인생의 의미란 무엇이며, 험한 인생길을 쓰러지지 않고 끝까지 충실하고 행복하게 걸어가는 힘이 어디에서 오는지를 잊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질그릇 속의 보물은 ‘약함 안의 강함’이자 ‘고난 속의 영광’이며, ‘죽음 안의 부활’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이러한 ‘역설적 실존’을 온몸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우리의 존재 전체는 충격을 받아 깨어지는 무력한 질그릇과 같습니다.

우리의 부서질 수밖에 없는 유약함을 주님께서 모르시어 그 안에 당신의 복음을 담아 주신 것이 아닙니다. 주님께서는 오히려 우리가 인간적 강함에 기대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더없는 약함마저도 치유하는 엄청난 힘이 당신에게서 오는 사실을 깊이 체험하기를 원하셨습니다.

사도들이 그러하였듯,
고난과 환난과 박해를 온몸으로 받아 안는 삶을 통해서만 복음 선포는 빛을 발합니다. 또한 예수님의 죽음을 몸에 새기듯 끊임없이 자신의 이기심을 버리고 십자가를 지려고 하는 사람에게서, 부활하신 주님께서 선사하신 생명 가득한 삶이 드러납니다.

약함과 고난과 죽음을 의미하는 질그릇은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주님의 현존이라는 보물을 증언하는 도구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이러한 우리의 한계를 기꺼이 받아들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당신이 마시려는 잔을 마실 수 있는지 물으십니다. 그 잔을 받아 마실 때 주님께서는 보잘것없는 질그릇 같은 우리에게 보물 같은 주님의 현존을 선사하실 것입니다. 그것이 그리스도인 삶의 목적이고 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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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2014년 7월 25일
  | 07.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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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마시려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느냐?”

술잔을 생각하시면 이해하시기가 아주 쉽습니다. 내 앞에 있는 잔은 내가 마실 분량입니다. 그래서 잔은 어떤 사람의 몫, 그의 운명을 나타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잔을 함께 마시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야고보와 요한은 자기들이 예수님의 잔을 마실 수 있다고 대답합니다. 그들이 청하는 것이 무엇인지 모르고 그 잔이 어떤 잔인지도 아직 알지 못하기 때문에 그렇게 대답한 것일까요?

당신의 잔이 무엇인지를 아셨던 예수님께서는 오히려 아버지께 “이 잔이 저를 비켜 가게 해 주십시오.”(마태 26,39) 하고 기도하셨습니다. 너무나 고통스러우셨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야고보를 비롯하여 대부분의 사도들은 예수님의 잔을 결국 마십니다. 예수님께서 하시던 일을 그들이 계속하고, 그분께서 선포하신 하늘 나라를 선포하며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분을 하느님이시라고 고백하면, 당연히 그 잔을 마실 수밖에 없는 운명이었습니다.

사도들 가운데 가장 먼저 순교한 야고보는,
그가 마실 잔이 무엇인지 분명히 알게 되었을 때에
그 잔을 거부하지 않았고 예수님의 고난을,
그분의 죽음을 함께 지고 갔습니다.

바오로 사도의 고백처럼 예수님의 죽음을 몸에 지니지 않고서는 부활을 선포할 수 없습니다.

죽음 없이는 부활이 없습니다.
은연중에 죽음 없는 부활만을 바라고 있지는 않은지, 또한 적극적인 자세로 우리의 신앙에서 십자가와 죽음은 어떤 의미를 갖는지 곰곰이 살펴보는 시간을 가져 보면 어떨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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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2015년 7월 25일
  | 07.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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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베대오의 아들이요,
요한 복음사가의 형인 야고보 사도는,
성급하고 격렬한 성격으로
‘천둥의 아들들’이라는 뜻인 보아네르게스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지만,
베드로와 동생 안드레아와 함께 늘 예수님의 사랑을 받던 제자들 가운데 하나입니다.

그래서
베드로의 장모의 급작스러운 치유에서도, 야이로라는 회당장의 딸의 소생 장면에도, 그리고 타볼 산에서 예수님의 거룩한 변모 장면에도 함께했으며, 겟세마니 동산에서도 예수님과 함께 밤을 새우도록 베드로와 요한과 같이 초대를 받았습니다.

오늘 복음의 장면은 야고보와 요한의 어머니가 그 두 아들을 예수님의 가장 측근에 앉혀 달라고 청탁하는 모습이 나옵니다.

이 때문에 권력만을 탐하던 제자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너희는 내 잔을 마실 것이다.”라고 하신 예수님의 예언처럼 사도들 중 맨 처음으로 헤로데 아그리파 1세에 의해 순교를 하게 됩니다(사도행전 12,1-2).

사람마다 성격이 다르고,
그래서 때로는 다른 사람을 이해하는 것이 힘들 때가 있습니다.

특히 성격이 급하고 강한 사람은 다른 사람에게 부담을 주기도 하고,
반대로 성격이 여리고 내성적인 사람은 답답하게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모습이 다 하느님께서 주신 선물이고,
그분께서 쓰실 도구들입니다.
야고보 사도도 그 어머니가 원하던 모습은 아니지만,
주님께서 원하시는 방법으로 하늘 나라의 영광을 차지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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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2016년 7월 25일
  | 07.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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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복음을 보면, 제베대오의 두 아들의 어머니는 예수님께 청합니다. 하느님 나라가 오게 되면, 자신의 두 아들을 주님의 양편에 앉게 해 달라는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영광을 차지하려면 반드시 고난의 잔을 마셔야 한다고 일러 주지 않으십니까? 고난의 잔은 십자가를 지는 것을 말합니다. 십자가 없는 영광이란 생각할 수도 없지요.

아울러 예수님께서는 봉사하는 자세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그것은 세상 사람과는 달리 남을 섬기는 삶이 되어야 한다는 말씀이지요. 남을 섬기려면 무엇보다 자신을 낮추어야만 합니다. 아울러 상대방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그의 처지가 되어야 하지요. 늘 공동선을 생각해야만 합니다.

우리는 본의 아니게 다른 이들에게 불편이나 손해를 끼치곤 합니다. 그런데도 정작 자기 자신은 이를 의식하지 못할 때가 많지 않습니까? 상대방의 처지보다는 자기 본위로 생각하고 행동하기 때문이지요.

오늘날 우리 신앙인에게는 남을 배려하는 마음이 더욱 필요하기만 합니다. 그만큼 성격이나 환경, 취미, 관심사, 신앙의 성숙도 등이 서로 다른 이들이 함께 모여 신앙생활을 하기 때문이지요.

그런 만큼 누군가가 무심코 한 말이나 행동에 뜻밖에 깊은 상처를 받기도 합니다. 말과 행동에서 다른 이들에 대한 배려의 마음이 절실하기만 합니다. 따라서 다른 이들을 어떻게 배려할 수 있는지 묵상했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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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김준철 토마스 아퀴나스 신부
매일미사 2017년 7월 25일
  | 07.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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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께서 활동하시던 유다 사회에는
메시아께서 오실 것을 희망하며 새 시대를 꿈꾸는 다양한 형태의 공동체들이 있었습니다.

율법에 충실하며
이방 민족에 물들지 않고 경건하게 살고자 했던 율법 학자와 바리사이들, 정치권력에 기대어 세속적 이익을 누리던 사두가이파, 혁명을 꿈꾸던 열혈당(젤롯), 세상의 종말을 기다리며 은수 생활을 하던 에세네파도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도
예수님의 말씀과 표징들 속에서 메시아의 희망을 발견했고, 그분과 함께 새로운 형태의 제자 공동체를 이루고자 했습니다.

제베대오의 두 아들이었던
야고보와 요한을 데리고 예수님께 다가와 그들에게 예수님께서 메시아로서 선포하실 새 나라의 중책을 맡겨 달라는 그들의 어머니의 청은 인상적입니다.

두 형제를 불쾌하게 여긴 제자들의 마음에서
아들의 성공을 바라는 모든 시대의 어머니들의 마음을 엿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역설적이지만
이 어머니의 청과 그녀의 두 아들의 바람은 자신들이 꿈꾸던 세상의 방식은 아니었지만, 예수님의 부활 이후 시작된 교회 공동체를 통하여 성취됩니다.

예수님의 공동체는 경쟁과 적자생존으로 높은 자리에 올라 남을 지배하려는 권력 공동체가 아니라, 첫째가 되려는 이는 종이 되어야 하고, 섬김을 받는 것이 아니라 섬기며, 많은 이들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바치신 예수님의 길을 따르는 새로운 형태의 공동체였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몸담고 있는 교회는
단순히 제도와 규율에 묶여 있는 인간 공동체만이 아닙니다. 세례 때 받은 성령을 통해 서로의 “질그릇 속에 담긴 보물”을 찾아 주며 친교를 맺는 영적 공동체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교회 생활에서
진정으로 청하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되돌아보는 하루였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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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송용민 사도 요한 신부
매일미사 2018년 7월 25일
  | 07.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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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베대오의 아들 야고보는 베드로, 요한과 더불어 예수님께 가장 총애를 받던 제자였습니다. 복음서는 예수님께서 영광스럽게 변모하실 때에, 겟세마니에서 기도하실 때에 이 세 제자와 함께 동행하셨다고 증언합니다. 이토록 예수님의 총애를 받던 제자였지만 오늘 복음에서 야고보는 자기 어머니와 동생 요한과 함께 예수님께 엉뚱한 청을 드립니다. 예수님께서 영광을 받으실 때 하나는 오른쪽에, 하나는 왼쪽에 앉혀 달라고 청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당신의 사형 선고와 죽음, 그리고 부활을 예고하시자마자 이런 청을 드린 것을 보면, 그들이 예수님을 얼마나 잘못 이해하고 있었는지가 드러납니다.

이 말을 들은 다른 열 제자가 두 형제를 불쾌하게 여긴 것도 충분히 이해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엉뚱한 요구를 기꺼이 받아들이시고, 그들이 청하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밝혀 주시며, 그것을 위하여 그들이 해야 할 바가 무엇인지를 알려 주십니다. 바로, 당신의 나라에서 영광의 자리를 차지하려면 당신께서 드시려는 잔, 곧 당신께서 걸으셔야 할 십자가의 길을 걸어야 할 뿐만 아니라, 남을 위하여 자신의 목숨을 기꺼이 내어놓는 봉사의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야고보 사도는 예수님의 말씀처럼 기꺼이 당신의 목숨을 내어 바칩니다. 아그리파 1세는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하려고 44년경, 곧 예수님께서 돌아가신 뒤 10여 년 뒤에 요한의 형제인 야고보를 예루살렘에서 참수형에 처합니다(사도 12,1-2 참조). 이렇게 야고보는 주님의 말씀에 따라 자신의 목숨을 기꺼이 내어놓음으로써, 그토록 바라던 영광의 자리를 차지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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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교구 염철호 요한 신부
매일미사 2019년 7월 25일
  | 07.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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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보물을 질그릇 속에 지니고 있습니다.”

바오로 사도의 말씀은 우리와 하느님의 관계를 알려 주는 적절한 표현입니다. 질그릇은 글자 그대로 화려하지 않고 투박하며 값지지 않은 평범한 그릇입니다. 그리고 질그릇은 쉽게 깨지고 부서질 수 있는 성질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는 질그릇과 같은 존재입니다.

이 비유는 우리의 현실을, 인간이 지닌 나약함을 잘 보여 줍니다. 이렇게 우리는 인간으로서 나약한 존재이지만 무엇보다 값진 보물을 지니고 있습니다. 하느님의 말씀과 그분께서 보여 주신 구원의 업적입니다.

우리 스스로는 힘이 없지만
우리 안에 담긴 보물을 통하여, 하느님의 힘을 통하여 어려움 속에서도 말씀을 선포하고 구원을 향하여 갑니다.

복음은 제자들의 모습을 통하여
우리의 나약함을, 인간적인 욕심과 생각들을 이겨 내도록 일깨워 줍니다. 세상은 높은 자리에 앉는 것을 좋아하고 다른 이들을 다스리는 것을 추구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가르침은 그와 정반대입니다.
“너희 가운데에서 높은 사람이 되려는 이는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높은 사람은 섬김을 받고 낮은 사람은 섬겨야 한다는 세상의 생각을 뒤집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임금으로 이 세상에 오셨지만,
누군가의 위에 군림하신 것이 아니라 ‘많은 이들’을 위하여 당신의 목숨을 바치신 분이십니다. 제자들과 신앙인에게 요구되는 것은 세상의 생각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삶을 본받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삶의 중심에 두라는 말씀입니다.

우리 역시 하느님의 힘을 통하여
세상에서 그리스도를 따르는 삶을 살아갑니다. 세상의 어려움과 우리의 나약하고 부족한 모습 역시 넘어설 수 있습니다. 우리 안에는 보물 같은 하느님의 힘이 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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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허규 베네딕토 신부
매일미사 2020년 7월 25일
  | 07.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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