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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천/수원/청주] 남을 섬길 줄 아는 사람이 될 때 모든 것에서 자유
조회수 | 1,992
작성일 | 08.07.24
우리는 모두 욕망과 기대감을 갖고 있다. 자식에 대한 부모의 바람과 나자신의 인간적인 성취와 건강과 행복…. 인간이 얻고자 하는 많은 바람이 있기 마련인데 오늘 이야기는 두 아들에 관한 어머니의 마음이 특히 돋보인다. 주님께 무엇을 바라는가 하는 것도 참으로 중요하다. 자기 자신을 위한 청원인가, 아니면 다른 사람을 위한 청원인가?

우리의 기도는 어느 선에 머물고 있는 것일까? 나 자신도 많은 기도를 하면서 살아가지만 늘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원하는 것이 무엇이냐?” 하고 물으실 때 나 자신을 위한 것에 집착하기가 일쑤였다. 그러나 살아갈수록 참된 믿음은 자신을 위한 청원보다 다른 사람을 위한 기도가 더 값지고 소중하며 참 기쁨을 얻는 지름길임을 깨닫게 된다.

부모의 마음이 바로 하느님의 마음을 닮았기 때문에 오늘 어머니의 청원은 참으로 진솔하고 솔직한 마음이라고 생각된다. 주님은 바로 이런 마음에서 더한층 높은 삶으로 우리를 이끌어 주시며 으뜸과 종의 삶이 서로 교차하는 그 선에서 우리가 어느 쪽을 선택하는 의지가 작동되어야 하는지 매순간 부딪치게 된다.

남을 섬길 줄 아는 사람이 될 때 모든 것에서 자유롭고 참 삶의 맛을 얻어 누리게 되지 않을까? 그럼 오늘 하루 중 어느 순간에 이런 삶을 살 수 있을 것인가? 오늘이 가장 소중한 날이라는 점을 잊지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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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천교구 하화식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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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는 물보다 진하다

제가 좋아했던 자매와 단 둘이 차를 몰고 데이트를 할 때였습니다. 시골길을 달리고 있었는데 이상한 냄새가 나는 것이었습니다. 밖에서 들어오는 퇴비 냄새와는 확실히 차이가 있었습니다. 그 때 저는 주책없게 “방귀 뀌었어?”하고 물었습니다. 그 자매는 정색을 하면서 “아니? 자기가 껴놓고 왜 나한테 그래?”하고 대답하였습니다. 순진한 마음에 ‘내가 뀌었나?’하고 생각해 보았지만 저는 그러지 않은 것이 확실했습니다. 그래서 계속 추궁을 하였더니 “그래, 내가 뀌었다. 내가 뀌었어. 아니, 그냥 넘어가 주면 되지, 그렇게 눈치가 없냐?”라고 도리어 열을 냈습니다. 저는 눈치 없었던 제 자신을 책망해야만 했습니다. 아직 방귀를 안 틀 때의 이야기였습니다.

이 밖에도 여자에 대해 잘 알지도 못하는 시절, 통화하다가 목소리에 힘이 없어 보여서 왜 그러느냐고 물으니 계속 아무 일도 아니라고 하다가, 제가 너무 다그쳐 물으니 그 날이라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그런 것도 모르는 제가 한탄스러웠습니다.

이런 사이에서는 항상 불안합니다. 어떤 말에 상처를 받을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두 사람이 조금씩 가까워지기 위해서는 이렇게 조심스러워야 할 때가 있습니다. 그만큼 조심스럽다는 것은 아직까지는 그만큼 거리가 있다는 뜻일 것입니다. 관계라는 얼음이 그만큼 두텁게 얼지 못했기 때문에 조심스러워야 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복음을 보십시오. 예수님은 전혀 조심스럽지 않습니다. 당신을 만나기 위해 와 있는 어머니와 형제들을 두고 “누가 내 어머니고 누가 내 형제들이냐? 이들이 내 어머니고 내 형제들이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다.”라고 말씀하십니다.

다른 복음에 따르면 예수님의 친척들과 형제들은 예수님이 미쳤다고 하며 찾으러 다녔다고 합니다. 아마 이것이 그런 상황일 것입니다. 당시 사회적 상황으로는 자신의 집안에 유다 지도자들로부터 미움 받는 사람이 하나라도 생긴다는 것은 가문의 위기였기 때문입니다. 이 위기를 초래한 것에는 당연히 어머니의 책임도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친척들은 어머니를 데리고 예수님을 만나러 온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아버지의 뜻을 따르는 이들이 자신의 참된 가족이라고 하시며 그들을 꾸짖습니다. 이 말을 듣는 형제들이나 친척들은 매우 기분이 나빴을 것입니다. 예수님이 가문의 수치로 여겨졌을 것입니다. 그래도 예수님은 비겁자가 될 수 없었습니다.

형제들에게 이해를 받지 못하는 것이 마음이 아픈 반면, 예수님은 성모님께로부터 위로를 받으십니다. 당신이 그렇게 말해도 어머니는 당신의 말로 상처받지 않을 것을 아시기 때문입니다. 어머니도 당신만큼 아버지의 뜻을 따르는 사람이었음을 잘 알고 있고, 그래서 당신만큼 아드님의 어머니가 될 사람이 없었기에 당신께서 그 분의 어머니가 되실 수 있었음을 잘 아시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아버지의 뜻이 그리스도께서 세상에 오셔서 인류를 구원하시게 하는 것이었다면, 그 뜻을 ‘아멘’하고 받드셨기에 아드님이 세상에 오실 수 있으셨던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우리에게 고통이 오면 하느님이 계시지 않다고 말하거나 그런 하느님은 믿지 않겠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믿음이 약한 사람들에게는 매우 조심스럽습니다. 그러나 성인들에겐 알 수 없는 고통을 내리십니다. 성인들은 매우 고통스런 상황에서도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을 버리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그런 사람들 때문에 위로를 받는 것입니다. 우리는 자신의 마귀 들린 딸을 고쳐달라고 끝까지 따라와서 자신의 믿음으로 예수님을 기쁘게 했던 이방인 여자를 잘 알고 있습니다.

예수님도 위로가 필요하신 분이십니다. 그 수많은 믿음이 약한 사람들에 대한 위로는 그만큼 믿음이 큰 사람들의 몫입니다. 이태리 몬테팔코의 십자가의 글라라라는 성녀는 슬픈 얼굴로 당신의 십자가를 꽂을 굳은 땅이 없다하시며 십자가를 지고가시는 예수님을 위로해 드리기 위해 그 십자가를 자신의 심장에 꽂으라고 하였습니다. 나중에 성녀의 심장을 열어보니 그 심장엔 그리스도의 수난도구들이 근육이 응고되어 새겨져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글라라 성녀로부터 위로를 받으셨습니다. 우리의 굳은 믿음은 항상 조심해야만 하는 부족한 믿음들에 대한 위로가 됩니다.

저도 어렸을 때 밖에서 안 좋은 일이 있으면 어머니에게만 짜증을 더 냈던 기억이 있습니다. 그 이유는 다른 사람은 몰라도 어머니는 지금은 기분이 나쁠 지라도 영원히 어머니이실 수밖에 없음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피는 물보다 진합니다. 예수님께 어머니는 피로 맺어진 그런 분이셨던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아픔을 주어도 잘 받아줄 수 있는 성모님과 성인들처럼 위로를 주는 사람입니까, 아니면 예수님께서 조심조심해야 하는 그런 사람입니까?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
  | 07.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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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 종이 된다는 것

이 말씀을 대하면 늘 마음이 불편해진다. ‘으뜸이 되고 싶은 것은 아니라고요.’ 하면서도 ‘종까지야…’ 하는 마음이 있는 것이다. 으뜸은 아니어도 남보다는 모자라고 싶지 않은, 남보다는 조금 더 낫고 싶은 욕구가 내 안에 있음을 거부할 수 없음에 말이다. 그러고 보면 으뜸이 되거나 종이 된다는 것은 혼자 사는 삶에는 성립되지 않고, 남과 함께 있는 관계 속에서 만들어지는 세계다.

그랬었다. 시골로 내려오기 전까지 나는 ‘목사’였지만 나름 민주적이고, 비권위적인 꽤 괜찮은 목회자라는 자부심이 내 안에 있었다. 하지만 섬기는 것보다는 섬김을 받는 데 익숙해져 있었음을 발견한 것은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어르신들이 “여~” “새댁~” 이렇게 부를 때, 나와 거의 동년배인 마을 아낙들이 내게 “후임 씨~” 이렇게 부를 때 엄청나게 낯설고 무시당하는 느낌마저도 들었다.

나이 서른에 들어선 목회자의 길에서 나는 섬김을 받는 것에 익숙해졌던 것이다. 섬긴다고 했던 것은 그저 생각뿐이었고 교회의 지도자로서 지시하고 지적하는 데 익숙했고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그곳에서 벗어나 교회가 아닌 마을 속으로, 목사가 아닌 마을 아낙으로 그저 있을 때에야 알아차릴 수 있었다. 그 사실을 받아들이는 과정이 쉽지는 않았지만 그 과정이 나를 살렸다. 그래서 감사한 마음으로 다시 시작한다. 섬기러 오신 그분처럼 나도 기쁨으로 섬겨야 함을 기억하며 ….

<박후임 목사(봉곡교회)>
  | 07.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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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 지금 와서 후회 합니다

칠순이 되신 할머니께서 남편을 존경하지 못한 마음을 고백하셨습니다. 남편이 ‘남편을 존경할 줄 알아라.’ 하면, ‘존경 받을 행동을 하면 존경하지 말래도 존경한다.’고 대꾸하였답니다. 나와 다른 남편을 존경은 못해도 존중은 해주어야 했는데 사사건건 말대꾸를 하며 남편을 이기려고 했던 마음이 지금은 제일 후회가 된다고 하셨습니다. 왜 진작 이런 마음이 생기지 않고 남편을 잃고서야 후회를 하는지 모르겠다고 하시는 할머니의 눈이 촉촉하였습니다.

존경받고 싶은 마음, 인정받고 싶은 마음은 누구에게나 있습니다. 그러나 존경의 대상이 되는 것은 자기가 내세운다고 되는 것이 아닙니다. 삶의 모범을 통한 표양이 될 때 다른 사람이 높여주게 됩니다. 하느님 안에서 충실하게 살면 존경과 사랑은 자연스럽게 따라 옵니다. 물론 세상의 존경은 권위에서 오기 보다는 권력에서 옵니다. 높은 자리를 차지해서 아랫사람을 부리는 것을 존경 받는다고 착각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겉으로 그렇게 보일 뿐입니다. 참된 존경은 권위에서 나옵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제베대오의 두 아들의 어머니가 예수님께 “스승님의 나라에서 저의 두 아들이 하나는 스승님의 오른쪽에, 하나는 왼쪽에 앉을 것이라고 말씀해 주십시오”(마태20,21).하고 말하였습니다. 그 시대에도 치맛바람이 있었나봅니다. 어머니로서 아들이 잘 되는 것을 바라는 것은 당연하다고 하겠으나 줄서기를 잘하고, 청탁을 해서 한 자리를 차지하려는 마음은 예수님의 마음과는 너무 동떨어져 있는 것입니다.

어찌 되었든 이런 상황을 지켜보던 다른 열 제자들도 화가 나있었던 것을 보면 시기질투의 마음과 더불어 그들도 한 자리를 차지하려는 마음이 있었던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자기중심의 잇속을 차지하려는 마음은 누구에게나 있습니다. 불공정한 경쟁으로 생각 했든, 그 형제들의 무례에 화가 났든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너희 가운데 높은 사람이 되려는 이는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또한 너희 가운데에서 첫째가 되려는 이는 너희의 종이 되어야 한다. 사람의 아들도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고, 또 많은 이들의 몸값으로 자기 목숨을 바치러 왔다”(마태20,27-28)고 하시며 생각을 바꾸도록 새 가르침을 주셨습니다. 제자들의 생각과 스승의 생각이 폭을 좁혀 하나가 된다는 것은 너무 어려운 일인가 봅니다.

스승께서 본을 보여주셨다면 제자는 당연히 그 삶을 따라야 합니다. 그래야 제자입니다. 그렇지만 아직도 상대로부터 대접을 받으며 권력을 휘두르려는 마음이 있습니다. 오늘 하루만이라도 내가 원하는 대로 끌고 가려 하지 말고 상대방에게 맞춰주려고 노력하는 가운데 은총을 입으시기 바랍니다.

낮은 자리로 내려간다고 서운해 하거나 실망하지 마십시오. 오히려 내려감으로써 주님을 본받게 되고 영혼들을 사랑하기 위해 주님께서 택한 방법을 우리도 선택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추호도 “우리 자신에 대해 자랑하지 말고 주님을 자랑합시다.” 세상은 높이 오르는 자에게 머리를 숙이지만 하느님의 나라에서는 그 반대입니다. 뒤늦게 후회하지 말고 더 많이 낮아질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주님 앞에서 겸손은 우리의 갈 길입니다. 미루지 않는 사랑을 희망하며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 청주교구 반영억 신부 : 2016년 7월 25일
  | 07.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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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 섬기러 오신 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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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나 지금이나 높은 자리를 차지하고
존경 받고 싶은 마음,
인정받고 싶은 마음은 누구에게나 있습니다.

그러나 존경의 대상이 되는 것은
자기가 내세운다고 되는 것이 아닙니다.

각자의 위치에서 충실하게 살면 자연스럽게 따라오는 것입니다.

그러나 세상은 존경을 권위에서
오기 보다는
권력에서 오는 것으로 착각합니다.

그래서 높은 자리를 차지해서
아랫사람을 부리는 것을 존경 받는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그렇게 보일 뿐입니다.
그 권력은 10년을 못갑니다.
권력을 소유했던 우리 역대 대통령이 얼마나 존경을 받고 있나요?
성철스님이나 김수환 추기경님,
이태석 신부님이 권력을 추구했다면 존경과 사랑을 받으셨을까요?
지금 우리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 주목받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삶으로 예수님을 보여주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제베대오의 두 아들의 어머니가 예수님께 “스승님의 나라에서 저의 두 아들을 하나는 스승님의 오른쪽에, 하나는 왼쪽에 앉을 것이라고 말씀해 주십시오”(마태20,21).하고 말하였습니다.

어머니로서 아들이 잘 되는 것을 바라는 것은 당연하다고 하겠으나 줄서기를 잘하고, 청탁을 해서 한 자리를 차지하려는 마음은 예수님의 마음과는 너무 동떨어져 있는 것입니다. 이때부터 벌써 치맛바람이 불었나봅니다.

어찌 되었든 이런 상황을 지켜보던 다른 제자들도 불쾌하게 여기며 화가 나있었던 것을 보면 그들도 한 자리를 차지하려는 마음이 있었던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불공정한 경쟁으로 생각했든,
그 형제들의 무례에 화가 났든 개의치 않고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너희 가운데 높은 사람이 되려는 이는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또한 너희 가운데에서 첫째가 되려는 이는 너희의 종이 되어야 한다. 사람의 아들도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고, 또 많은 이들의 몸값으로 자기 목숨을 바치러 왔다”(마태20,27-28).고 하시며 생각을 바꾸도록 새 가르침을 주셨습니다. 사실 예수님께서는 모두의 속을 꿰뚫고 계셨습니다.

모든 능력을
지니신 스승 예수님께서 몸소 섬기는 삶에 본을 보여주셨다면 제자는 당연히 그 삶을 따라야 합니다. 그래야 제자입니다.

그렇지만 그리스도의 제자라고
하는 많은 믿는 이들이 아직도 상대로부터 대접을 받으며 권력을 휘두르려는 마음을 지니고 있음을 부인하지 못합니다. 우리는 순간순간 양다리 걸치기를 합니다.

마음은 간절한데
몸이 말을 듣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오늘 하루만이라도 내가 원하는 대로 끌고 가려 하지 말고 주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을 선택하며 상대방에게 맞춰주려고 노력하는 가운데 은총을 입었으면 좋겠습니다.

세상은 높이 오르는 자에게
머리를 숙이지만 하느님의 나라에서는 그 반대입니다. 그러므로 뒤늦게 후회하지 말고 더 많이 낮아질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의 죽음에 이르기까지 섬기는 자의 모범을 보여주셨습니다. 섬기러 오신 예수님과 함께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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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신부
2020년 7월 25일
  | 07.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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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 사랑하는 만큼 마시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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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 나라에도 좋은 자리 나쁜 자리가 있을까요?
하늘 나라 자리는 다 좋을 것입니다.
그래도 더 좋은 자리가 있고 덜 좋은 자리는 있습니다.
하늘 나라에서 큰 사람도 있고 작은 사람도 있기 때문입니다.
이 자리는 주님의 계명을 얼마나 충실히 따랐느냐에 의해 결정됩니다. 아주 작은 계명 하나라도 어기도록 가르친 사람은 하느님 나라에서 가장 작은 사람 취급을 받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야고보와 요한의 어머니는 예수님께 “스승님의 나라에서 저의 이 두 아들이 하나는 스승님의 오른쪽에, 하나는 왼쪽에 앉을 것이라고 말씀해 주십시오.”라고 청합니다.

이는 분명 하늘 나라에서
주님과 가까운 자리가 있고 먼 자리가 있을 것이란 생각에서 비롯된 청입니다. 예수님은 하늘 나라에 들어오면 똑같이 행복할 것이라 말씀하시지 않습니다. 분명 차이는 있습니다. 당신의 잔을 얼마나 마시느냐입니다.

“너희는 너희가 무엇을 청하는지 알지도 못한다.
내가 마시려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느냐?”

당신이 메어주시는
멍에를 얼마나 충실히 메고 순종했느냐에 따라 하느님 나라에서의 위치가 결정됩니다. 만약 다 마시지 못한 잔이 있다면 어쩌면 그 속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영원히 헤매야 할 수도 있습니다.

영화 ‘디스커버리’(2017)는 사후세계를 다루었습니다.

한 과학자가 사후세계가 있다는 사실을 과학적으로 증명해 낸 것입니다. 이 발견(디스커버리)은 전 세계에 엄청난 파장을 불러일으킵니다. 수백만 명이 자살을 시도한 것입니다.

이런 혼란 속에서도 과학자는 연구를 계속합니다. 사후세계가 있다는 것은 증명해 냈지만, 사후세계가 어떠한 모습인지는 증명해 낼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영한실에 있는 시체를 훔쳐서 그의 머릿속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영상으로 출력하려 하였습니다.

그 시체의 머릿속에서는 차를 달려 어떤 병원에 도착한 자신의 모습이 영상으로 그려지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이것이 과거의 기억인지 저승 세계에서 체험하는 일인지 확인하기 위해 그 사람의 인적사항을 조사해 그의 어머니를 찾아갔습니다. 그의 어머니는 그 시체가 병원에서 보고 있었던 여인이었습니다. 과거의 기억을 회상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 여인은 시체의 머릿속에 있는 기억과 정반대의 말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놈은 어머니가 병들고 아버지가 돌아가실 때도 병원에 찾아오지 않았어요. 부모를 버리고 도망친 놈입니다. 만약 그 애가 병원에 찾아왔었다고 말했다면 그것은 거짓말이에요.”

시체는 사후세계에서 헛된 꿈을 꾸고 있었던 것입니다.

박사가 이것을 직접 체험하기 위해 자신이 죽음 직전까지 가서 자신의 뇌를 영상으로 촬영하였습니다. 그랬더니 역시 아내가 자살하던 날 자상한 남편이 되어 아내와 함께 있어 주는 장면이 찍혔습니다. 사후세계는 결국 이 세상에서 가장 후회스러웠던 일에 갇혀 그것을 되돌려 놓으려는 안타까움만 가득한 곳이었습니다. 지옥이란 바로 그 후회스럽고 용서받지 못한 기억에서 빠져나오지 못하는 것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 기억을 지워주시기 위해 우리가 내미는 쓰디쓴 잔을 마시셨습니다.

일반 대학교 다닐 때
술을 마시지 않는 자매에게 건배를 권하며 “사랑하는 만큼 마시기!”라고 한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 자매는 잘 마시지 못하는 술을 벌컥벌컥 다 마셔버렸습니다. 그리고는 다 마셨다는 뜻으로 자신의 머리 위에 술잔을 뒤집었습니다. 그리고는 놀라서 아직 마시지 못하고 있는 저의 술잔을 응시하였습니다. 저도 기쁜 마음에 술잔을 단숨에 들이키고 머리에 부었습니다. 사랑이 확인되는 순간이었습니다. 그 잔에 조금이라도 술이 남으면 그만큼 관계가 멀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모든 인간관계가 이것과 같을 것입니다.
우리 각자는 상대가 따라준 쓰디쓴 술잔을 쥐고 있습니다. 그 잔은 처음엔 쓰지만, 끝은 달콤합니다. 마시기 싫어도 상대가 주는 잔을 마실 수 있다면 관계가 좋아지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드리는 잔을 다 마시셨습니다.
우리를 절대 죄책감의 굴레에 빠져있지 않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당신이 우리 각자에게 잔을 내밀고 계십니다. 사랑하는 만큼 마시면 됩니다. 마시고 남은 양만큼 하늘나라에서 그분과 멀리 떨어져 살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내미는 잔이란 바로 이것입니다.

“너희 가운데에서 높은 사람이 되려는 이는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또한 너희 가운데에서 첫째가 되려는 이는 너희의 종이 되어야 한다. 사람의 아들도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고, 또 많은 이들의 몸값으로 자기 목숨을 바치러 왔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잔은
평생 그 잔을 마시는 것에만 집중해도 남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최대한 후회스럽지 않게 죽음을 맞으려면, 하나도 남기지 않을 마음으로 최대한 많이 마시고 그분 앞에서 머리에 술잔을 부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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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신부
2020년 7월 25일
  | 07.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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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고보 사도는
제베대오의 아들이며, 요한이 그의 동생이다.
그들은 갈릴래아 출신으로 어부가 직업이었는데
예수님께 부름을 받았다.

야고보는
베드로와 요한과 함께 항상 중요한 사건의 증인으로 복음에 나타난다. 시몬의 장모의 열병을 고쳐주실 때,
회당장 야이로의 딸을 살리시는 현장에,
예수님께서 당신의 모습을 영광스럽게 변모하셨던 그 현장에,
겟세마니 동산의 기도하시는 현장에 증인으로 꼭 등장하는 분이었다.

사도는 헤로데 아그리빠 1세에 의해
예루살렘에서 순교하심으로써 사도로서는 첫 번째 순교자가 되셨고,
성인의 유해는 지금 스페인의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에 모셔져 있으며 스페인의 수호자로 공경을 받고 있다.

복음 : 마태오 20,20-28 : 너희도 내 잔을 마시게 될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으로 가시면서 당신의 수난을 예고(20,18-19)하시는데 제자들은 그 말씀이 무슨 뜻인지 알아듣지를 못한다. 엉뚱하게도 제배대오의 두 아들의 어머니가 자기 아들들과 함께 예수님께 가서 특별한 지위를 청한다. “스승님의 나라에서 저의 두 아들이 하나는 스승님의 오른쪽에, 하나는 왼쪽에 앉을 것이라고 말씀해 주십시오.”(21절) 예수님 시대에도 치맛바람이 있었던 것 같다.

“내가 마시려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느냐?”(22절)

마르코 복음에는 “내가 마시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으며, 내가 받는 세례를 너희가 받을 수 있느냐?”(10,38)고 하신다.

잔과 세례는 같은 것이 아니다.
잔은 수난을 의미하며 세례는 죽음 그 자체를 말한다. 그들 모두는 실로 주님의 잔을 마셨지만, 그분께서 받으신 세례는 받지 않았다.

그들은 “할 수 있습니다.”(22절)고 대답한다.

이렇게 대답한 것은
그들의 마음이 담대해서가 아니라, 예수님의 수난에 대해 전혀 알지 못했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도 수난 앞에서 “아버지, 하실 수만 있으시면 이 잔이 저를 비켜 가게 해 주십시오.”(마태 26,39) 하셨다. 그 죽음의 시련이 어떤 것인 줄 알았다면 어떻게 “할 수 있습니다.”라고 말했겠는가? 수난의 괴로움은 아주 큰 것이다. 그러나 죽음은 훨씬 더 무서운 것이다.

“너희는 내 잔을 마실 것이다.”(23절)

그렇게 되었다.
야고보 사도는 헤로데에게 목이 베였고(사도 12,2 참조), 요한은 파트모스로 귀양을 갔다. 이렇게 그들은 잔을 마신 것이다. “그러나 내 오른쪽과 왼쪽에 앉는 것은 내가 허락할 일이 아니라, 내 아버지께서 정하신 이들에게 돌아가는 것이다.”(23절) 하늘 나라는 주는 이의 것이 아니라, 받는 이의 것이라는 의미이다. 하늘 나라에 합당한 사람만이 받는 것이라는 의미이다.

“다른 열 제자가 이 말을 듣고 그 두 형제를 불쾌하게 여겼다.”(24절)

예수님을 따르는 것이
세속적이었기 때문에 그런 청을 했으며, 동시에 불쾌해 했던 다른 제자들도 아직은 세속적인 마음 때문이었다. 선한 일을 하고자 하는 것은 좋은 일이지만 첫 자리를 탐하는 것은 허영이다. 선행은 우리의 의지와 활동과 수고로 이루어지는 것이기에 그 보상도 받는 것이지만, 첫 자리를 쫓는 것은 하느님의 판단에 끼어드는 것이다.

세속적인 첫 자리를 찾는 것은
다른 민족의 통치자들의 모습이지, 제자들의 모습은 아니라고 하신다. 그런 욕망은 사람을 압제자로 만든다. 아무리 위대한 사람이라고 해도 이 욕망으로 끊임없이 방해를 받는다. 이런 욕심은 엄격하게 다루어야 한다.

제자들 가운데는 꼴찌,
즉 섬기는 사람이 첫째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예수님의 삶에서 그 증거를 보고 있다. 그분은 그분이 가르치는 대로 행하셨다. 그분은 하느님이시면서도 인간이 되셨고 경멸과 악의에 찬 대접을 받으셨고 죽임까지 당하셨다.

“너희 가운데에서 높은 사람이 되려는 이는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26절)

우리는
그리스도의 뜻과 행동을 본받는 사람들이 되도록 그분의 모상으로 만들어졌다. 그러니 우리는 그분과 같이 보고 행할 수 있어야 한다. 그분은 겸손한 분이시니, 만일에 자랑거리를 좇는 사람은 그리스도의 모상이 아니다. 스승을 본받지 않는 사람은 참된 제자가 아니며, 자기를 창조하신 분과 닮지 않은 것은 참된 모습이 아니다.

“사람의 아들도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고, 또 많은 이들의 몸값으로 자기 목숨을 바치러 왔다.”(28절)

우리는 아무리 낮아져도
주님께서 낮아지신 만큼 낮아지지 못한다. 그분이 낮아지심으로써 우리 모두가 올라가게 되었다. 주님께서는 당신을 낮추셔서 사람이 되시고 십자가에 돌아가시기까지 당신을 낮추셨기 때문에 가장 큰 영광, 즉 부활의 영광을 입으셨다.

야고보 사도가 처음에는
주님의 뜻을 잘 알지 못하고 주님을 따르고 있었지만, 부활하신 주님을 체험한 후에는 그분을 위해 목숨을 바치신 분이다. 처음에는 주님께 당신을 따르라고 하였지만, 나중에는 진정으로 주님을 따르게 되었고 그분을 위해 순교하신 분이시다. 이제는 우리도 주님의 뜻이 무엇인가를 생각하면서 그것을 실천하고 십자가의 길을 통하여 그분을 닮아갈 수 있는 우리 되도록 결심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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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신부
2020년 7월 25일
  | 07.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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