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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축일/명절강론 코너 ( 대축일/명절 미사에 관련된 강론자료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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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도회] 윗자리는
조회수 | 1,891
작성일 | 08.07.24
우리 학교 학생 전체와 함께 미사를 드릴 때의 일입니다. 관구장 신부님이 주례를 하고 저와 다른 신부님들이 옆에서 거들었습니다. 부탁을 받고 제가 복음낭독을 하였습니다. 복음낭독 후 저는 자리로 돌아오고 관구장 신부님이 강론대로 가셨습니다. 신부님 강론을 듣고 있다가 뭔가 이상한 것을 발견했습니다. 제가 주례석에 앉아 있는 것이었습니다.

늘 윗자리에, 그리고 가운데에만 앉다보니 저도 모르게 그만 주례석에 떡하니 앉아버린 것이었습니다. 깜짝 놀라 황급히 제자리를 찾아 앉는데 앞줄에 앉은 선생님들이 그 모습을 보고 막 웃어 조금 겸연쩍었습니다.

윗자리는 겸손의 자리입니다.
윗자리는 책임의 자리입니다.
윗자리는 고난과 희생의 첫째 자리입니다.
섬기는 사람의 자리이고 종의 자리입니다.

어린 나이에 일찍 높은 자리(?)에 앉게 되어 생긴 병치레를 했습니다. 자리의 본질을 잊은 값을 톡톡히 치른 에피소드였습니다. ‘아차!’ 하며 다시 한번 깨닫는 기회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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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장동현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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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승님의 나라에서 저의 이 두 아들이 하나는 스승님의 오른쪽에, 하나는 왼쪽에 앉을 것이라고 말씀해 주십시오.” 마태오 20,20-28

공동체 쇄신과 성장의 비결

오늘 복음은 그 누군가와 함께 부대끼며, 상처받고, 괴로워하며 그렇게 살아가는 우리 모두에게 큰 위안을 주는 복음이기도 합니다.

완벽하고 이상적일 것이라고 생각했던 제자공동체 역시 완벽하지도 이상적이지도 않았음을 오늘 복음은 잘 설명하고 있습니다. 제자공동체 역시 너무나도 부족했고, 구성원 상호간에 마음이 맞지 않아 서로들 괴로워했었고, 때로 심각한 균열이 있었음이 확연하다는 것을 오늘 복음은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숱한 공동체 가운데, 그나마 가장 이상적인 공동체로 여겨지는 제자공동체 역시 문제가 있었습니다. 구성원들의 정화되지 않은 신앙, 자기중심주의, 이기주의, 세속주의로 인해 자주 티격태격했습니다.

서로간의 이권, 알력, 시기심, 질투심이 첨예한 대립각을 세웠습니다. 서로간의 경쟁심, 권력욕으로 치열한 심리전이 펼쳐지기도 했습니다. (R)

오늘 축일을 맞은 야고보 사도 같은 경우도 보십시오. 어머니까지 동원해서 예수님께 인사 청탁을 강요합니다. 예수님의 나라가 서거든 ‘물 좋은’ 자리 하나를 미리 부탁드리고 있습니다. 그 표현이 너무도 노골적이고 직접적이어서 제 얼굴까지 다 후끈거립니다.

“스승님의 나라에서 저의 이 두 아들이 하나는 스승님의 오른쪽에, 하나는 왼쪽에 앉을 것이라고 말씀해 주십시오.”

이 말을 들은 다른 열 제자들이 또 가만있지 못하고 따집니다.

우리가 그리도 염원하고 꿈꾸는 완벽한 공동체는 이 세상 어디 가도 없습니다. 완벽한 상호일치, 완벽한 평화, 완벽한 친교, 완벽한 나눔과 섬김이 이루어지는 성화된 공동체는 ‘꿈’, 혹은 ‘희망사항’일 뿐입니다. 본성상 부족한 인간들이 모인 공동체, 부족한 것은 너무도 당연합니다.

그러나 그리도 부족했던 제자 공동체였지만, 머지않아 철저하게도 쇄신됩니다. 거룩한 모습으로 변화됩니다. 날로 거듭납니다. 끝도 없이 성장합니다.

그 배경이 무엇일까요?

제자공동체는 비록 부족했지만, 그 중심에 늘 스승 예수님께서 자리하고 계셨습니다. 제자공동체는 비록 형편없었지만, 매일 스승 예수님의 말씀을 경청했습니다. 제자공동체는 불안하고 늘 흔들렸지만 그럴 때 마다 스승 예수님께로 달려갔습니다.

그 결과 스승 예수님을 위해서, 복음을 위해서, 이웃을 위해서, 형제를 위해서 목숨까지 바치는 영웅적인 공동체로 새로 태어나게 된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기억하는 야고보 사도의 신앙 여정 역시 예수님과 줄곧 함께였기에 비약적인 도약과 상승을 거듭할 수 있었습니다.

야고보 사도는 불같은 성격의 소유자였습니다. 언제 폭발할지 모르는 활화산 같은 사람이었습니다. 심사숙고하지 않고 함부로 말을 해서 다른 제자들에게 상처도 주었습니다.

야고보는 다른 제자들보다 부유한 가문 출신이어서 그랬는지, 다른 제자들에 대한 우월감도 없지 않았습니다. 그런 연유로 ‘물 좋은 자리’를 청했습니다.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은 이후에도 야고보 사도는 어머니의 치맛바람을 벗어나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야고보의 어머니는 이것저것 사들고 자주 예수님과 제자공동체를 찾았겠지요. 그런 과정에서 인사 청탁까지 하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런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야고보는 제자공동체를 떠나지 않았기에, 늘 스승 예수님 가까이 머물렀기에, 그분 가르침에 자신의 전 생애를 맡겼기에 급격한 성장을 하게 되었습니다.

전승에 따르면 야고보는 예수님 승천 이후 복음 선포를 위해 스페인까지 건너갔습니다. 백성들을 현혹시키던 헤르모게네스란 유명한 마술사와 용감하게도 정면 대결을 펼쳐서 승리하고 그를 회개시킵니다. 자신을 박해하던 요시아스란 율법학자를 개종시키기도 합니다.

야고보 사도는 AD 44년경 헤로데 아그리파 1세에 의해 예루살렘에서 참수 당함으로써 사도들 가운데 첫 순교자가 되었습니다.

야고보 사도의 뛰어난 지도력과 복음 선포를 위한 지칠 줄 모르는 열정, 깊은 신앙, 유다와 사마리아 전역에 널리 알려진 그의 이름에 위기감을 느낀 헤로데 아그리파는 야고보를 처형하기로 마음먹었던 것입니다.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 07.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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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 가운데에서 높은 사람이 되려는 이는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또한 너희 가운데에서 첫째가 되려는 이는 너희의 종이 되어야 한다. 마태 20,20-28

너희 가운데

오늘 복음에 보면 제베대오의 두 아들이 어머니와 함께 예수께 와서 주님의 나라가 서면 자신의 두 아들을 예수님의 오른편과 왼편에 앉게 해 달라고 부탁한다. 그러자 이 말을 듣고 있던 다른 열 제자들이 그 형제를 보고 화를 냈다(마태 20,24)는 보도가 나온다. 이것은 제자들 사이에도 자리다툼이 있음을 암시하는 것이다.

사람들은 높은 자리에 오르기 위해 온갖 방법을 동원한다. 올라가는 과정에 다른 사람에게 비인간적인 처신을 하기도 한다. 그런데 최정상 자리는 한 사람만 앉을 수 있다. 그러기에 올라가면 얼마 못 가서 내려와야 한다. 정상의 자리는 좁기 때문이다. 혼자 있어야 하기에 고독하기도 하다. 다른 사람이 앉을 자리가 없다.

이에 비하여 낮은 자리로 가면 많은 사람들이 붐비고 앉을 자리도 많고 서로 다투기보다는 공존한다. 골짜기의 물, 크고 작은 지류의 강물, 하천은 바다로 흘러들어간다. 바다는 가장 낮은 자리에 있기에 때문이다. 자기를 낮추면 사람들이 모이기 마련이다. 예수님 주변에 사람들이 많이 모인 이유 가운데 하나는 예수께서 겸손하셨기 때문이다.

낮아졌다면 아무것도 가릴 것이 없다. 누구와도 만날 수 있고 어디라도 갈 수 있다.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낮아져야 한다고 말씀하신 이유는 세상 을 품기 위해서다. 자기와 비슷한 사람, 자기가 좋아하는 사람만 찾지 말라는 것이다. 자기 입맛에 맞는 사람하고만 자리를 함께하고 일을 하게 되면 그 사람의 생각과 시야는 좁아질 수밖에 없다. 그래서 나이가 들수록 변화에 적응하기가 쉽지 않은 것이다. 나이가 들수록 넓어지고 낮아지려고 노력해야 한다. 그래야 바다처럼 모든 것을 품을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너희 가운데서 높은 사람이 되려는 이는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또한 너희 가운데에서 첫째가 되려는 이는 너희의 종이 되어야 한다”는 예수님의 말씀을 가슴 깊이 새겨야 한다

구속주회 정원순 신부
  | 07.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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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 넘치는 술잔

오늘의 첫 번째 독서는 질그릇 같은 우리 안에 담긴
보물에 대한 얘기로 시작됩니다.
바오로 사도는 인간을 우선 그릇으로 이해한 것입니다.
무엇을 담는 그릇......
얼마나 적절하고도 심오한 비유인지 모릅니다.
저는 우리 인간을 표현할 다른 적절한 비유가 무엇일까
생각해보았습니다.
예를 들어 마더 데레사는 자신을 주님 손의 몽당연필이라고 하였는데
연필, 종이, 막대기, 몽둥이, 칼, 도마, 빗자루, 쓰레기통, 걸레, 촛불 등
어떤 것이 가장 적절할까 생각해봤는데
그릇처럼 적절한 비유가 없었습니다.

그릇은 우선 담는 것입니다.
무엇을 담는가, 이것은 사람마다 다를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오늘 독서의 말씀처럼 보물을 담을 것이고
어떤 사람은 쓰레기와 똥물을 담을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욕심으로 채우는가 하면
어떤 사람은 온갖 쓰레기와 욕심을 비워내고 빈 그릇으로 있습니다.
그릇이란 결국 만족과 공허의 인간 존재를 비유하는 것입니다.
세속의 욕심으로 채우면 언젠가는 반듯이
스스로건 다른 사람에 의해서건
비워내야 하는 허무의 고통이 있습니다.
그러나 비울 때 채워지는 것이 그릇이고
궁극적으로는 보물로 채워지는 만족스런 그릇, 행복한 그릇입니다.

그런데 바오로 사도는 그릇은 그릇이로되 질그릇이라고 합니다.
귀한 그릇이 아니라는 뜻도 되고, 깨지기 쉬운 그릇이라는 뜻도 됩니다.
그릇 자체로 고귀한 금으로 된 그릇이나 보석이 박힌 잔이 아닙니다.
존재 자체가 허약하기 이를 데 없고
담긴 내용물이 귀하지 않으면 그 자체로는 똥 그릇이 될 수도 있고
아무 쓸모가 없는 쓰레기일 수도 있습니다.
약하고 소박하더라도 보물을 담고 있다면 다행인데
그릇도 형편없고 담긴 것도 형편없을 수 있고
아예 아무 것도 담을 수 없게 깨어진 그릇일 수 있습니다.

깨어진 그릇, 똥 그릇, 보물단지 중에 우리는 지금 어떤 그릇일까요?
보물단지가 아니라 욕심으로 가득 찬 똥 그릇은 아닐까요?
욕심으로 차 있다면 어떤 욕심으로 가득 차 있을까요?
오늘의 야고보 사도처럼
높은 자리를 차지하려는 욕심으로 가득 차 있지는 않을까요?

오늘 높은 자리를 차지하려는 야고보에게 주님은
내가 마시려는 잔을 마실 수 있는지 물으십니다.
그리고 마실 수 있다고 장담하는 야고보에게 주님은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오신 당신처럼 섬기라 하십니다.
그런데 형제들을 섬긴다는 것이 어떤 것입니까?

섬긴다는 것은 형제들 밑에 있는 것입니다.
위에서 형제들을 자기 입맛대로 좋다 나쁘다 평가하고
자기 입맛에 맞게 이렇게 저렇게 요구하고 지시하는 것이 아니라
형제들의 입맛에 자신을 맞추는 것이고, 그리하여
수난의 쓴잔을 마시는 것입니다.
“에잇, 더러워서 못해 먹겠네!”하고
하인 노릇의 쓰디씀을 뱉어버리지 않고
모든 형제들을 받아들이고 받드는 것입니다.
이런 형제도 좋고, 저런 형제도 좋다고
어떤 요구를 어떻게 해와도 좋다고
형제들을 주인으로 받드는 것입니다.
형제들에 대해 뭐 저런 것이 있어 하고 쓰레기 취급하는 것이 아니라
나의 주인님, 나의 보물로 받드는 것입니다.
오히려 자신을 보잘 것 없는 질그릇으로 생각하며
그럼에도 귀한 형제들을 모시고 섬길 수 있음을 감사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형제들을 보물로 여길 때,
내가 형제들을 예수 그리스도처럼 보물로 여길 때
사실은 전에 쓰레기 같던 형제들이 이제 나에게 보물이 되는 것이고
전에 쓰레기더미 가운데 살던 내가
이제 보물 가운데서 살게 되는 것입니다.
이처럼 자기중심성을 버리고 형제를 섬기기 시작하면
질그릇 같은 내 안에 보물을 담고 살아가게 됩니다.
그리고 욕심을 부리며 살 때는 죽음이 자리하였는데
예수 그리스도처럼 자기를 죽이니 생명이 질그릇 안에 넘칩니다.

작은 형제회 김찬선 신부
  | 07.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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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많은 이들의 몸값으로 자기 목숨을 바치러 왔다."

가야할 길을 기쁘게 가는 사람은
언제나 행복한 사람입니다.
우리 신앙인이 가야할 길은
언제나 섬기는 봉사의 길을 우리가 가는 것입니다.

우리의 자리는 욕심의 자리가 아니라
봉사의 자리입니다.

봉사가 권력이 되었어는 안됩니다.
군림하는 직분이 아니라
섬기는 봉사자가 되어야합니다.

모두에게 행복을 주는 이는 섬기는 사람입니다.
섬기는 사람은 거짓을 벗겨내고
참다운 사랑을 실천합니다.

오늘은 성 야고보 사도 축일입니다.
우리의 신앙은 야고보 사도처럼
목숨을 내놓고 얻은 신앙입니다.

목숨을 내놓지 않고는 고귀한 사랑에
도달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목숨을 내놓는 길을 가르쳐주십니다.

목숨보다 더 좋으신
영원한 사랑의 하느님을 알았기에
기꺼이 목숨을 바칠수 있었습니다.

우리 시대가 잃어버린 것은 하느님의 가치입니다.
하느님의 가치는 사랑의 가치입니다.

날마다 목숨을 바쳐
주님께로 돌아가는
봉사의 하루되시길 기도드립니다.
진정한 죽음과 진정한 부활은 이미 하나입니다.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
  | 07.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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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도회] 참다운 권력은 섬김

제베대오의 두 아들 야고보와 요한 사도가 아직 결정적인 회심과 깨달음을 얻지 못하던 시절의 모습은 정말이지 세속적이면서도 유치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따라나섰지만 그 동기가 순수하지 못했습니다.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의 제자가 됨으로 인한 반대급부를 은근히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스승께서 건설할 그리스도 왕국에 대해서 전혀 그릇된 이미지를 지니고 있었습니다. 스승 예수님을 여타 다른 지상적 통치권자와 동일선상에 놓고 있었으며, 곧 도래할 그리스도 왕국에서 ‘물 좋은 자리’를 얻었으면 하고 기대하고 있었습니다.

더 비겁한 일이 한 가지 있었습니다. 그런 야심을 가지고 있었더라면 솔직하게 직접 스승님을 찾아와 남자답게 “스승님, 나중에 아시죠? 저 꼭 한 자리 부탁합니다!”라고 청했으면 나았겠습니다. 그러나 두 사람은 치사하게도 어머니를 방패삼아 예수님께 인사 청탁을 한 것입니다.

“스승님의 나라에서 저의 이 두 아들이 하나는 스승님의 오른쪽에, 하나는 왼쪽에 앉을 것이라고 말씀해 주십시오.”

이런 한심하고 어색한 상황을 직면한 예수님께서 얼마나 난감해 하셨을까, 생각해봅니다. 무엇보다도 그렇게 제자 교육에 열정을 기울이셨지만 아직도 갈 길이 먼 두 제자의 모습을 보니 많이 안타까우셨으리라 생각합니다.

야고보와 요한 두 사도에게는 아직 참 깨달음의 순간이 남아있었습니다. 아직도 예수님의 구원 사업 전체를 조망하는 큰 그림을 못보고 있으니, 그들의 눈을 가로막고 있는 비늘을 벗겨내는 아픔이 필요한 것입니다. 아프겠지만 껍질을 깨고 나오는 고통이 남아있는 것입니다.

우리 가톨릭교회의 영성은 ‘물 좋은 한 자리’를 추구하는 출세주의자들의 정신과는 거리가 멉니다. 개인적인 야심이나 이기심은 그리스도교 정신과는 어긋납니다. 교회를 이용하여 개인적인 성취나 야욕을 추구하려는 사람은 백이면 백 그리스도교를 망신시킬 것입니다.

종교는 절대로 개인의 야심을 실현시켜주는 도구가 되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제자들은 자신의 계획과 개인적인 이익에 관심을 둘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구원 계획에 자발적으로 자신의 계획을 맞추어나가야 할 것입니다.

헌신과 희생 없는 종교처럼 위험한 것이 다시 또 없습니다. 그리스도인에게 야망이 있다면 그것은 그리스도를 사랑하고 그분과 동일시되려는 야망이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들에게 욕심이 있다면 그것은 이웃을 섬기려는 욕심이어야 합니다.

“참다운 권력은 섬김임을 잊지 맙시다. 우리 교회는 가장 가난하고, 힘없고, 보잘 것 없는 이들을 끌어안아야 합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 즉위미사 강론 중에)

<살레시오회 양승국 신부>
  | 07.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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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도회] 낮은 자리를 탐하라.

사람은 다른 사람보다 더 낳은 자리에 오르고 권력과 재력과 명예를 누리려고 하지만 그러려면 자신에게 있어야 할 것과 없어야할 것을 분별력이 있어야 합니다. 권력은 권력을 가진 자 옆에 있어야하고 재력과 명예도 같습니다. 그러나 그 자리에 있으려면 자신의 인격에 더하고 뺄 것이 무엇인지를 알아야합니다. 컵에 담긴 더러운 물을 버리지 않고는 깨끗한 물을 담을 수 없듯이 자신의 없어야 할 것들이 없어져야 있어야 할 것이 있게 됩니다.

오늘 야고보와 그 형제들이 주님의 좌우에 앉아 주님이 누리는 것을 누리려하는 사람은 쓴잔을 마시고 섬김을 받으려하지 말고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하십니다. 이는 낮은 자리를 탐하라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사람은 낮은 자리보다 높은 자리를 탐함으로 벼랑 밑으로 떨어져 나가게 됩니다.

자살 하는 사람은 낮은 자리에 있는 사람이 아니라 높은 자리에 있었던 사람입니다. 자신을 내려놓지 못하고 더하기만 하면 감당하지 못하는 자리에 있어 자신의 오르려는 짐으로 인하여 주저앉게 됩니다. 하느님이신 주님이 나는 섬김을 받으려 하지 않고 섬기려 왔고 많은 이를 위하여 몸값으로 자기 목숨을 바치려 왔다 하십니다.

우리는 손해 보지 않고 자기 이익만 보려하면 이기주의로 인하여 사랑가 존경을 잃어버리고 인격의 손상을 입습니다. 공동체 안에 행복하게 살려면 욕심을 버리고 언제나 양보 하는 사람으로 살고 너를 통해 이익을 보려 하지 말고 손해 보는 삶을 살아야합니다. 자존심으로 인하여 남 보다 더 나은 자리 더 나은 삶을 살려고 하면 자기 욕망의 억눌려 고생하는 사람도 생각해 주어야 합니다. 어느 날 실패를 직감하고 더 어려운 일을 만나면 남의 탓보다 자기 탓이라 생각하고 자세를 더 낮추어야 합니다. 겸손과 온유함이 간난의 본질입니다.

오늘 저는 자기 낮은 자리에 만족하고 남 보다 더 높이 오르려는 마음이 있으면 더 낮은 자리를 의식적으로 선택하며 살기를 기도합니다. 저는 오늘부터 7월 30일 까지 숨을 마신 것을 내어 쉬기 위하여 휴가를 떠납니다. 기도 부탁합니다. 강론은 못 올려도 유익한 내용은 올리겠습니다.

▮ 분도회 이석진 신부 : 2016년 7월 25일
  | 07.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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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도회] 질그릇에 담긴 보물 -하느님의 힘, 예수님의 생명-

오늘 코린토 2서 말씀의 소제목이 좋아 그대로 ‘질그릇에 담긴 보물’을 강론 제목으로 택했습니다.

질그릇이란 표현은 바오로 자신의 나약함을 가리킬 수 있고, 창세기 2장 7절과 관련하여 ‘흙으로 된 육신’으로 이해될 수 있습니다. 아니 우리 육신을 지닌 인간 모두를 총칭하는 상징적인 말마디가 ‘질그릇’입니다. 얼마나 다치기 쉽고, 깨지기 쉽고, 병들기 쉬운 질그릇처럼 허약한 사람들인지요.

그러나 주목할 것은 질그릇이 아니라 질그릇에 담긴 보물입니다. 이 보물을 발견하여 사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 보물들로 인해 빛나는 질그릇이요 점차 주님의 몸으로 변모되는 질그릇 같은 몸입니다. 보물을 발견할 때 질그릇 같은 우리 육신을 더욱 사랑하고 잘 보살필 수 있을 것입니다. 질그릇이 없으면 그 좋은 보물들도 담을 수 없을 것입니다.

바오로는 물론이고 오늘 기념하는 야고보 사도는 물론 모든 사도들과 성인들이 질그릇에 담긴 보물을 발견하여 그 보물을 최대한 활용한 이들입니다. 산티야고 순례지가 널리 알려지고 있는데 바로 산티아고 역시 사도 야고보에게서 유래합니다. 스페인어로 성 야고보를 발음하면 산티아고입니다.

사도는 특별히 9세기이후 스페인의 콤포스텔라(Compostela)에서 존경받았고, 이 유명한 산티아고 순례지로부터 영향을 받아 라틴아메리카의 많은 도시들이 산티아고(Santiago)로 명명했다 합니다. 성 야고보 사도뿐 아니라 모든 사도들과 성인들의 질그릇에 담겼던 보물은 지금도 여전히 빛을 발하고 있음을 봅니다.

질그릇에 담긴 보물은 헤아릴 수 없이 많습니다. 믿음, 희망, 사랑, 참됨, 착함, 아름다움, 평화, 기쁨, 찬미, 감사, 겸손, 온유, 섬김, 환대, 친절, 성령 등 끝이 없습니다. 모두가 하느님의 선물들임을 깨닫습니다. 우리 안의 참보물인 하느님의 모상에서 기원하는 것들입니다. 이런 보물을 발견하여 살아가야 합니다. 오늘 복음의 제자들은 예수님으로부터 섬김이란 보물을 배워 깨닫습니다. 주님은 세상의 권력욕과 명예욕의 허상虛想, 허욕虛慾, 허영虛榮 속에 휘둘리는 제자들에게 자신의 질그릇에 담긴 보물이 무엇인지 깨우쳐 주십니다. 사실 질그릇에 담긴 보물을 발견하여 살지 못하면 허욕과 허영이 질그릇안에 가득 채워지기 마련이며 허상의 헛된 세상을 살게 됩니다. 주님은 제자들이 백성위에 군림하고 통치하는 세상 지도자처럼 되어선 안된다며 단호히 선을 그으며 말씀하십니다.

“너희 가운데에서 높은 사람이 되려는 이는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또한 너희가운데에서 첫째가 되려는 이는 너희의 종이 되어야 한다. 사람의 아들도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고, 또 많은 이들의 몸값으로 자기 목숨을 바치러 왔다.”

주님의 말씀에 따라 분도 성인은 당신 제자들의 수도공동체를 주님을 섬기는 배움터라 명명합니다. 사랑, 겸손, 순종, 믿음 역시 모두 섬김안에 들어 있습니다. 질그릇에 담긴 보물이 바로 ‘섬김의 영성’임을 깨닫습니다. 어제 연노해 가는 수도자들을 대할 때의 깨달음이 새삼스러웠습니다. 예전에도 언급했던 깨달음입니다.

'바닷물이 증발하면 흰 소금만 남듯이, 세월이 흐르면서 질그릇 같은 육신도 노쇠해가면서 미모도, 젊음도, 재능도, 기억력도, 체력도, 점차 사라져 가면서 믿음만 남게 되겠구나. 나이들어 가면서 질그릇 육신은 서서히 낡아갈수록 질그릇에 담긴 보물은 더욱 빛을 발하겠구나.'

질그릇에 담긴 보물이 없는 말년 인생이라면 얼마나 허망하겠는가 묵상도 했습니다. 참으로 인간을 품위있고 고귀하게 하는 것이 질그릇에 담긴 보물임을 깨닫습니다. 자주 내 질그릇 안에 담긴 보물이 무엇인지 확인해야 할 것입니다. 바오로 사도에게 보물은 바로 하느님의 힘이며 예수님의 생명임을 봅니다. “우리는 온갖 환난을 겪어도 억눌리지 않고, 난관에 부딪혀도 절망하지 않으며, 박해를 받아도 버림받지 않고, 맞아 쓰러져도 멸망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언제나 예수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지고 다닙니다. 우리 몸에서 예수님의 생명이 드러나게 하려는 것입니다.”

백절불굴의 믿음을, 섬김의 삶을 살게하는 질그릇에 담긴 보물은 바로 하느님의 힘이자 예수님의 생명임을 깨닫습니다. 주님은 매일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질그릇 같은 우리 안에 영원한 참 보물인 당신의 생명과 사랑을 담아 주시어 섬김의 삶에 항구하게 하십니다. 아멘.

▮ 분도회 이수철 신부 : 2016년 7월 25일
  | 07.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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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도회] "내가 마시려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느냐?"(마태 20, 22)

모든 관계의 출발점은 십자가에 있습니다. 예수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십자가를 사랑한다는 것입니다. 십자가를 받아들일 수 없기에 세속적인 괴물이 되는 것입니다. 언제나 사람이 되게 하는 것은 십자가였습니다. 우리를 지탱하게 하는 것이 십자가이기 때문입니다.

관계의 변화는 우리 또한 예수님의 잔을 마시는 것에 있습니다. 모든 관계의 단절은 십자가를 받아들이지 않는 데서 일어납니다. 예수님과 우리의 관계를 채워주는 것이 십자가의 잔이기 때문입니다. 십자가의 잔을 함께 마실 수 있기에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영원한주님이 되십니다.

오늘 이 야고보 사도 축일이 십자가의 잔을 받아들이고 마시는 결심의 시간이 되시길 기도드립니다. 삶이라는 식탁 위에는 피할 수 없는 십자가의 잔이 언제나 놓여있음을 깨닫습니다. 참된 관계의 시작은 십자가의 잔을 이제는 나누어 마시는 것입니다.

▮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 : 2016년 7월 2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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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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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제1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질그릇에 담긴 보물의 비유”를 통해서, 그리스도로 인한 고난과 영광에 대해서 전해주고 있습니다. 곧 질그릇처럼 깨어지기 쉬운 인간이지만, 그 속에 담긴 복음의 능력으로 결국에는 승리를 거두고 영광을 입을 것임을 말해줍니다.

“우리는 온갖 환란을 겪어도 억눌리지 않고, 난관에 부딪혀도 절망하지 않으며, 박해를 받아도 버림받지 않고, 맞아 쓰러져도 멸망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언제나 예수님의 죽음을 짊어지고 다닙니다. 우리 몸에서 예수님의 생명도 드러나게 하려는 것입니다.”(2코린 4,8-10)

오늘 <복음>에서는 제베대오의 두 아들, 야고보와 요한의 열정과 투신을 보여줍니다. 그것은 지나치리만큼 대단합니다. 어떻게 보면, 무모하리만큼 강렬합니다. 그리하여 예수님께서 마시게 될 잔을 같이 마시겠다고 선뜻 나섭니다. 그들의 어머니 역시, 대단한 열망을 가졌습니다. 자식을 향한 그의 사랑과 열망은 다른 이들에게 눈총이 될 만큼 차고 넘쳤습니다. 그렇지만,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열망과 투신을 나무라시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이를 보고 화를 내는 다른 제자들을 불러놓고서 당부하십니다.

“높은 사람이 되고자 하는 사람은 남을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하고, 으뜸이 되고자 하는 사람은 종이 되어야 한다.”(마태 20,26-27)

사실, 이 말씀은 사회적 지위에 대한 원리로는 얼토당토 않는 말씀으로 여겨집니다. 곧 통상적 의미에서의 권력과 재물을 지닌 사회적 지위의 높낮이라기보다, 영적 높낮이에 대한 말씀으로 알아들을 수 있습니다.

섬기는 사람이 높은 사람이 되고, 종이 되는 사람이 으뜸이 된다는 이 말씀을 바꾸어 말하면, 섬기지 않기 때문에 높은 사람이 되지 못하고, 종이 되지 않기 때문에 으뜸이 되지 못하고 있다는 말씀이 됩니다. 결국, 섬기는 사람이 섬김 받는다는 말씀입니다. 마치 예수님께서 아버지를 섬기셨듯이 말입니다. 아니 우리의 발을 씻기시고, “먼저” 우리를 섬기셨듯이 말입니다. 끝내는 당신께서 섬기신 제자들에게 배반당하고도 그들을 죽기까지 섬기셨듯이 말입니다. 참으로 당신께서는 “나는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다.”(마태 20,28)고 하신 말씀처럼, 섬기셨습니다. 그리하여 섬김을 받으셨습니다.

그러니 섬김을 받기보다, 마땅히 “먼저”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할 일입니다. 그런데 섬기기 위해서는 먼저 내려가야만 한다는 사실이 있습니다. 먼저 자신을 낮추어야만 한다는 사실이 있습니다. 그런 까닭에 예수님께서는 종의 모습으로 오셨습니다. 그러나 단지 낮은 자라고 해서 섬기는 자인 것은 아닐 것입니다. 혹은 누군가를 희생으로 도와주고 봉사한다고 해서 섬기는 자인 것도 아닐 것입니다. 왜냐하면, 섬긴다는 것은 자기만 낮아진다고 되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을 높이는 데 있기 때문입니다. 상대방을 존중하고 소중히 여기며, 나아가 상대방을 받아들여 경배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아무리 자신을 낮추고 봉사한다하더라도 상대방을 귀하게 여기는 마음이 없다면, 진정한 섬김이라 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런 까닭에 예수님께서는 죄인 하나도 소중히 여기셨습니다. 길 잃은 양 한 마리도, 부러진 갈대도, 꺼져가는 심지도 결코 하챦게 여기지 않으셨습니다. 그리하여 진정 섬기는 분이 되셨습니다.

우리는 교회라는 그리스도의 학교에서 “주님 섬기기”를 배우는 학생들입니다. 또한 우리는 성 베네딕도의 학교에서 “주님 섬기기”를 배우는 학생들입니다. 묘하게도 섬기는 사람은 섬기는 그 사람을 닮아갑니다. 곧 섬기면서 섬기는 그분이 되어갑니다. 스승이신 예수님을 섬기면 예수님이 되어가고, 진리를 섬기면 진리가 되어 갑니다.

예수님께서는 세족례 때 말씀하셨습니다.

“여러분이 형제를 섬기게 되면, 곧 나를 섬기는 것이요 또한 나를 보내신 분을 섬기는 것이다.”(요한 13,20)

그러기에, 우리는 오늘 내 곁에 있는 내 형제를 섬김으로써, “주님 섬기기”를 배워가야 할 일입니다. 형제를 섬기되, 섬길 수밖에 없는 “예수님의 마음”으로 섬겨야 할 일입니다. 곧 섬김을 불러일으키는 그 마음, 섬김이 절로 터져 나오게 하여 절로 섬길 수밖에 없는 “예수님의 마음”으로 말입니다. 그것은 ‘먼저 사랑하는 마음이요, 사람을 소중히 여기는 마음’일 것입니다.

-오늘 말씀에서 샘 솟은기도 -

“너희는 내 잔을 마실 것이다.”(마태 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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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
제가 원하는 것이 아니라, 당신이 원하시는 것을 주소서.
깨지기 쉬운 질그릇 같은 제 몸에 당신 생명을 담아주소서.
언제나 당신의 죽음을 짊어지고 다니면서
당신의 생명이 드러나게 하소서.
오늘도 제 몸이 깨지고 부서져,
당신의 생명을 드러내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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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주 올리베따노 이영근 신부
2020년 7월 25일
  | 07.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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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는 그래서는 안 된다.(마태오 20,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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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련과 역경에 둘러싸인 우리들 삶입니다. 전혀 예상하지 못한 삶으로 우리를 데리고 갑니다. 예수님을 통해 아직까지 한 번도 가 본적이 없는 삶을 가게 되고 보게 됩니다.

그래서 삶은 하느님을 향한 가슴 뛰는 여행입니다. 사랑으로 시작되는 사랑의 여행입니다. 사랑이 지나간 길에는 사랑의 온기가 있습니다. 이 여행은 고난의 잔인 십자가로 더욱 깊어지는 여행입니다.

하느님의 사람이 되어가는 은총의 여정입니다. 다시 찾게 되는 섬김과 종이 되는 자유의 삶입니다. 수 없이 만나게 되는 가난한 마음을 야고보 사도 또한 수 없이 봉헌하며 복음의 길을 걸어갔을 것입니다.

이 길에서 만났던 모든 이들은 예수님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우리 삶의 시간 또한 성 야고보 사도 같이 가장 좋으신 하느님께 바쳐지는 삶이길 기도드립니다. 복음은 여행처럼 우리를 영글어가게 합니다. 두려움을 깨뜨리는 성 야고보 사도의 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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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
2020년 7월 25일
  | 07.25
461 42.8%
영광의 길은
수치와 모멸의 어두운 골짜기를
무사히 통과한 사람들에게 주어지는 상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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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과 24시간 동고동락했던 사도 공동체 역시 구성원 상호간에 분열과 다툼, 시기와 질투가 있었다는 것, 공동체 생활과 인간 관계로 인해 큰 스트레스를 받고 있는 오늘 우리에게 큰 위안으로 다가옵니다.

야고보와 요한 사도의 어머니 인사청탁 사건은 사도 공동체의 미성숙과 불협화음을 가장 단적으로 드러내고 있는 예라고 볼수 있습니다. 갑작스레 등장한 어머니는 대뜸 예수님 앞에 엎드려 절하며 한 가지 청을 드립니다. 그 어머니는 요즘으로 치면 자식에게 목숨을 거는 극성 엄마, 자식 주변만 맴도는 헬리곱터형 엄마였습니다.

“스승님의 나라에서 저의 이 두 아들이 하나는 스승님의 오른쪽에, 하나는 왼쪽에 앉을 것이라고 말씀해 주십시오.”(마태오 복음 20장 21절)

노골적인 인사 청탁을 스스럼없이 하고 있는 야고보와 요한 사도, 그리고 그들의 어머니의 모습에 다른 열제자들은 엄청 불쾌해했고, 벼락같이 화를 냈습니다.

“어떻게 저렇게 뻔뻔스러울수가 있지?
그 어머니에 그 아들들이로군!”

그러면서 다른 한편으로 이런 생각을 했을지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우리 어머니는 대체 뭐하시나?”

예수님의 직제자들의 모임인 사도단이었기에 그저 거룩하고, 화기애애하며, 완전에 가까운 조직이라고 생각했었는데, 막상 뚜껑을 열어보니, 그 안에는 티격태격, 아웅다웅, 우리와 별반 다를 바가 없었습니다.

복음사가들은
사도단의 미성숙으로 인해 벌어진 부끄러운 일들, 감추고 싶었던 흑역사들을 아무런 가감없이 적나라하게 소개하고 있습니다. 오늘만 해도 사도단 안에서도 핵심 인사들이었던 야고보와 요한 사도의 부족함을 조금도 감싸주지 않고 있는 그대로 적고 있습니다.

사도들,
겉으로 보기에 대단해보이지만, 사실 그들도 한 부족하고 미성숙한 인간이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정체와 신원에 대해 크게 오해했었고, 그분의 가장 주된 사명에 대해서도 잘못 이해하고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시시각각 당신을 향해 다가오고 있는 모욕과 고통에 대해서 생각하고 있었는데, 제자들은 조만간 다가올 현세 왕국에서의 영광을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조금씩 조금씩 골고타 언덕 십자가를 향해 나아가고 계셨는데,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세우실 왕국에서 그분께서 나누어주실 물좋은 자리를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아직도 갈 길이 먼 제자들이었습니다.
제자들의 생각은 한창 낮은 곳에 머물러 있었습니다. 예수님 벌써 저 위쪽을 바라보고 계시는데, 제자들은 아랫쪽만 눈여겨보고 있었습니다.

영광의 길은
수치와 모멸의 어두운 골짜기를 무사히 통과한 사람들에게 주어지는 상급입니다. 참된 영광의 옥좌에 앉기 위해서는 먼저 고통의 쓴 잔을 비워야만 합니다.

아직도 갈 길이 먼 제자들,
영적으로 눈을 뜨지 못한 제자들의 모습이 너무나 안타까웠던 예수님께서 당신의 사명 전체가 요약된 한 말씀을 제자들에게 건네십니다.

“너희 가운데서 첫째가 되려는 이는 너희의 종이 되어야 한다. 사람의 아들도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고, 또 많은 이들의 몸값으로 자기 목숨을 바치러 왔다.”(마태오 복음 20장 27~28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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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신부
2020년 7월 25일
  | 07.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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