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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축일/명절강론 코너 ( 대축일/명절 미사에 관련된 강론자료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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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서울/의정부] 욕심
조회수 | 2,067
작성일 | 08.07.24
요즘 날씨가 참으로 덥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날씨가 덥다고 일을 하지 않을 수는 없겠지요? 여전히 성지의 청소 및 풀 베는 것, 그 밖의 정리를 하는데 많은 시간을 소비하고 있습니다. 더군다나 새롭게 시작된 공사로 인해서 비록 날은 덥지만 또다시 정신없는 생활을 하고 있답니다. 이렇게 밖에서 일하는 시간이 많아지는 요즘, 더운 날씨라는 걸림돌도 있지만 더 큰 걸림돌이 제가 하는 일을 방해하고 있어요. 그것은 바로 ‘모기’ 랍니다.

바닷가의 모기는 어찌나 강한지, 이 모기가 한번 물면 금방 피부가 부어오르면서 상당히 간지럽게 됩니다. 사실 이 모기는 시커멓고, 다른 모기보다 훨씬 큰 것이 괜히 보기만 해도 ‘싫다’라는 생각을 갖게 됩니다. 그래서 저는 모기에게 물렸을 때를 대비해서 많은 약을 소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요즘에는 모기를 쫓아내는 약도 소지해서, 밖에서 일을 할 때 미리 몸에 뿌리고 밖으로 나갑니다.

며칠 전에도 저는 이 모기에게 물리지 않기 위해서, 모기 쫓는 약을 얼굴과 팔 그리고 목에 발랐습니다. 이 부위는 모두 외부에 노출되는 부분이지요. 따라서 이 부분만 바르면 모기한테는 물릴 염려는 없을 것 같았습니다. 하지만 결과는 어떻게 되었을까요? 모기한테 전혀 물리지 않았을까요?

사실 이 모기를 쫓는 약의 효과는 대단했습니다. 인터넷을 뒤져서 가장 효과가 크다는 것을 선택해서 그런지, 제가 바른 부분에는 단 한 방도 물리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뜻밖의 부분을 물린 것입니다. 글쎄 이곳은 옷을 입고 있어서 물리지 않을 곳이라고 생각했던 엉덩이 부분이었습니다. 어찌나 어이가 없던지…….

결국 저는 바지를 내리고 엉덩이에 모기가 물린 뒤에 바르는 약을 바를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면서 이러한 생각을 해봅니다.

안심이라고 생각할 때, 그때가 더 주의를 해야 할 때라는 것이지요. 특히 죄라는 것도 그렇지요. 내가 안일한 생각을 할 때, 내가 모르는 사이에 슬쩍 내 마음 속에 들어오는 것이 바로 죄가 아닐까 싶습니다.

‘남들도 그렇게 하니까 뭐…… , 아무도 보는 사람도 없는데 뭐…….’

이런 안일한 생각들을 마음속에 머금는 순간 곧바로 죄는 그 날카로운 바늘로 우리를 찌릅니다. 그리고 곧바로 우리들은 후회합니다. 하지만 우리들은 그 순간을 어떻게 모면해야 하는지를 잘 모릅니다.

모기에게 물린 뒤에는 벌레 물렸을 때 바르는 약으로 곧바로 그 가려움을 이겨낼 수 있는 것처럼, 죄를 이겨낼 수 있는 방법은 주님께 온전히 매달려야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들은 죄의 바늘이 박힌 뒤에 오히려 주님을 떠날 때가 얼마나 많았을까요? 그래서 모기에게 물린 곳을 긁어서 더 간지럽고 피부는 부어오르는 것처럼, 우리들의 죄도 얼마나 더 커졌던가요?

오늘 복음에서는 제베대오의 두 아들과 어머니가 예수님께 하늘나라에서의 자리를 청합니다. 바로 이들은 예수님을 따라다니면서 예수님과 함께 한다는 것이 얼마나 행복한 것인지를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이제는 그 행복이 영원하기를 바라면서 하늘나라에서도 그 자리를 보장받기를 청하고 있습니다. 바로 여기에 또 하나의 욕심이라는 죄가 자리를 잡았던 것입니다.

이렇게 예수님을 따라다니면서도 죄를 지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물며 내가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다면 어떨까요?

정신 바짝 차려야 합니다. 특히 기도로 죄를 쫓는 약을 열심히 발라야 합니다. 그것도 이 부분은 칠하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하는 부위까지도 열심히 발라서 죄가 내 근처에 전혀 올 수가 없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그때에 하늘나라는 저절로 내 앞에 펼쳐지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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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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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많은 사람들이 제가 있는 갑곶성지를 싫어하십니다. 아니, 싫어한다기보다는 무서워하시는 것 같습니다. 왜 이 성지를 무서워하실까요? 혹시 제가 잡아먹을까요? 물론 아닙니다. 그렇다면 여기 성지에 사람들이 무서워할 커다란 동물이 생겨서 그럴까요? 그것 역시 아닙니다. 그렇다면 왜 성지를 무서워할까요?

바로 모기 때문입니다. 특히 바닷가를 끼고 있는 섬 모기가 얼마나 독합니까? 그래서인지 이곳의 모기에게 한번 물리신 분들이 얼마나 힘들어하시는지 모릅니다. 순식간에 부어오르면서 심한 간지러움을 느끼게 되지요. 그래서 십자가의 길을 하시고 나면 제게 꼭 이야기를 하십니다.

“신부님, 모기 때문에 여기 못 오겠어요. 왜 이렇게 모기가 많아요. 저 십자가의 길을 하면서 다섯 방 이상은 물린 것 같아요.”

그러면 제가 모기에게 물렸을 때 바르는 약을 드리면서 말씀드리지요.

“저는 이곳에서 매일 다섯 방 이상 물리면서 살고 있어요.”

제 방에도 모기가 들어와 있는지, 어젯밤에도 몇 군데 물렸다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특히 자면서 저도 모르게 긁어서인지 두 군데가 퉁퉁 부어올랐네요. 사실 모기에게 물렸을 때, 재빠른 조치 사항은 만지지 않고 가만히 놔두는 것입니다. 그런데 간지럽다고 손으로 박박 긁으면 어떻게 될까요? 그 순간은 시원하겠지만, 그것이 해결방안이 아니었음을 금방 느끼게 되지요. 더욱 더 가려워지는 것은 물론, 물린 부위가 더욱 더 부어오르거든요. 이렇게 부어오른 모습을 보면서 문득 이런 생각이 듭니다.

우리들의 생활 가운데에서도 긁어서는 안 되는 것들이 많은데, 우리는 그 사실을 너무나도 자주 잊는다는 것이지요. 특히 첫 번째 자리, 제일 윗자리를 차지하기 위해서 남에 대해서 얼마나 많은 이야기들을 하고 있는지요? 부정적인 말, 그 사람의 지위를 깎아 내리는 말들……. 제일 재미있는 것이 남에 대해서 말하는 것이라고도 하지만, 그렇게 말하고 나면 자신의 마음이 편할까요? 그런 말들은 분열만을 가져올 뿐이며, 바로 이런 말들이 긁어서는 안 될 것들이 아닐까요?

오늘 복음만 해도 그렇지요. 제베대오의 두 아들의 어머니가 예수님께 특별히 청하지요. 자신의 아들들을 예수님의 오른쪽과 왼쪽에 앉게 해달라고 말이지요. 이 말을 들은 다른 제자들은 어떠했을까요? 흐뭇했을까요? 기분이 좋았을까요? 자신들도 앉고 싶은 자리는 바로 예수님이 옆자리였을 것입니다.

우리들도 이렇게 분열을 일으키는 말을 너무나 자주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힘주어서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그래서는 안 된다. 너희 가운데에서 높은 사람이 되려는 이는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맞습니다. 분열을 일으키는 말을 하는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자신을 낮춤으로써 분열이 아닌 일치의 길로 나아가야 하는 것이 바로 주님의 뜻인 것입니다.

모기에 물려서 빨갛게 부풀어 오른 저의 손과 발을 보면서 이렇게 다짐을 해 봅니다.

“주님, 당신의 말씀처럼 섬기는 사람이 되겠습니다.”

조명연 신부
  | 07.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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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하게도 아이들은 콩을 대체적으로 싫어하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밥에 콩이 들어있으면, 아이들은 인상을 쓰면서 하나씩 그 콩을 골라서 따로 빼어놓지요. 한번은 저 역시 이런 모습을 우연히 보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그랬지요.

“콩이 얼마나 맛있는데, 그리고 그렇게 골라 놓으면 누가 먹니?”

그러자 그 꼬마가 아주 강한 어조로 말합니다.

“저는 콩밥이 싫어요.”

그런데 그 순간 이런 생각이 드는 것입니다.

‘왜 이 밥이 콩밥이지? 콩보다 쌀이 더 많은데……. 따라서 당연히 쌀밥 아닌가?’

이 꼬마에게 싫어하는 콩이기 때문에, 콩보다 훨씬 많은(아마도 70% 이상은 쌀일 것입니다) 쌀은 보지 못하고 콩만 보이는 것이지요. 이것은 우리들의 삶과도 상당히 유사합니다. 사실 우리가 생활하면서 많은 일을 겪는데 그중에서 나를 힘들게 하는 일들은 아주 극소수에 불과합니다. 오히려 나를 발전시키고, 나에게 미소를 가져다주는 일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하지만 그러한 것들은 잘 보이지 않고, 나에게 아픔과 상처를 주는 힘들게 하는 일들만 눈에 띄는 것이지요.

하루를 생각해보세요. 나를 힘들게 했던 것들이 얼마나 많았는지를……. 아마 한두 개에 불과할 것입니다. 이제 반대로 내게 힘을 주었던 것들을 생각해보세요. 아침에 일어나서 깨끗하게 씻을 수 있는 것, 맛있는 식사를 하는 것, 누군가를 만나서 지식을 얻고 대화중에 웃음을 간직할 수 있었던 것, 텔레비전 등의 대중매체를 통해서 새로운 재미와 흥미를 얻는 것, 피곤함을 풀 수 있는 잠을 자는 것 등등……. 하루의 삶에서 내게 유익한 것들이 얼마나 많았습니까?

자기에게 일어나는 일 중 95%가 무난하게 지나가고 5%가 제대로 풀리지 않을 경우, 풀리지 않는 5%의 일을 생각하는 데에만 95%의 에너지를 쓰는 사람이 종종 있습니다. 그런데 과연 행복할까요? 아마 늘 우울하고, 괴롭고, 짜증날걸요?

주님께서는 우리가 이러한 불안감과 부정적인 마음으로 힘들게 사는 것을 원하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당신께 대한 굳은 믿음으로 가지고 새로운 삶으로 나아갈 수 있음을 가르쳐 주시는 것이지요. 이 점은 과거의 제자들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아마 제자들은 세상의 종말이 얼마 안남은 것으로 생각했나 봅니다. 그래서 불안하고 세상의 모든 것에 대해서 부정적인 마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세상의 종말이 되어 새로운 세상이 올 때, 세상의 주인이 되실 예수님 곁에서 높은 자리를 미리 예약하고 싶었던 것이지요. 그래서 제베대오의 두 아들과 그 어머니가 예수님께 다가와 말합니다.

“스승님의 나라에서 저의 이 두 아들이 하나는 스승님의 오른쪽에, 하나는 왼쪽에 앉을 것이라고 말씀해 주십시오.”

이 말에 다른 제자들은 두 형제를 불쾌하게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자신들도 불안한 마음에 그 자리에 미리 예약하고 싶은데, 미리 선수를 친 것이니까요.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세상의 관점이 아닌 하느님의 관점을 말씀하십니다.

“너희 가운데에서 높은 사람이 되려는 이는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또한 너희 가운데에서 첫째가 되려는 이는 너희의 종이 되어야 한다.”

세상의 관점인 불안하고 부정적인 마음이 아니라, 주님의 관점인 긍정적이고 희망적인 마음으로 바꾸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낮아져야 합니다. 예수님도 한없이 낮아짐으로 인해서, 우리 모두를 구원하실 수 있었습니다. 이처럼 우리 역시 낮아질 때, 긍정적이고 희망의 메시지가 우리 마음에 언제나 함께 할 것입니다.

조명연 신부
  | 07.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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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주님의 잔을 마시고 하느님의 벗이 된 사람

오늘은 야고보 사도 축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직접 열두 명의 사도를 뽑으셨는데 그 중의 한 분이 야고보 사도이지요. 사도들 중에 제일 먼저 예수님을 위해서 목숨을 바쳤던 사도입니다. 열두 명의 제자 중에는 예수님께서 특별히 사랑했던 세 제자가 있었습니다. 베드로와 요한, 그리고 오늘 축일을 맞는 야고보 사도이지요. 요한과 야고보 사도는 형제지간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세 제자를 아끼고 사랑하셨던 것을 우리는 성경 곳곳에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영광스러운 변모를 보여주실 때에도 󰡒엿새 뒤에 예수님께서 베드로와 야고보와 그의 동생 요한만 따로 데리고 높은 산에 오르셨󰡓(마태17,1)고, 겟세마니 동산에서 근심과 번민에 싸여 기도하실 때에도 󰡒베드로와 제베대오의 두 아들을 데리고 가셨󰡓(마태26,37)습니다

알다시피 요한 사도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실 때 끝까지 자리를 지켰으나 똑같이 사랑을 받았던 베드로와 야고보는 자리를 지키지 못했습니다. 특히 베드로 사도는 예수님을 세 번씩이나 배반했었지요.

하느님 나라를 위해서 예수님께서 뽑으신 열두 명의 사도들은 똑똑하거나 판단력이 냉철하거나 인망이 높은 사람이 아니라 거의 대부분이 무식한 어부들이었습니다. 놀라운 것은 이렇게 무식하고 절개도 없었으며 욕심에 가득 찬 제자들이 어떻게 그렇게 훌륭한 사도로 변화될 수 있었는가 하는 점입니다. 사도행전을 보면 처음에는 똑똑하지도 못했고 절개도 없었던 제자들이 죽음 앞에서 당당하게 예수님을 증거하는 용감하고 지혜로운 사도로 변화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제자들은 어떻게 그 모든 인간적인 약점에서 하느님의 사람으로 변화될 수 있었을까요? 어떻게 인간적으로 전혀 뛰어나지 않은 사람들이 초대교회의 초석이 되고 복음서를 쓰며, 예수님을 위해서 목숨을 바칠 수가 있었겠습니까?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어떻게 교육시키셨을까요? 오늘 우리는 이 부분에 초점을 맞춰서 야고보 사도와 제자들의 삶을 묵상해보고자 합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야고보와 요한의 어머니 살로메가 얼마나 속된 욕심을 품고 있었는지를 단적으로 알 수가 있습니다. 사도의 어머니가 예수님을 찾아와 이렇게 간청하지요.

󰡒스승님의 나라에서 저의 이 두 아들이 하나는 스승님의 오른쪽에, 하나는 왼쪽에 앉을 것이라고 말씀해 주십시오.󰡓(마태20,21)

욕심이 가득 차 있지요. 다른 제자들도 같았던 것 같습니다. 야고보와 요한 형제를 보고 화를 내며 먼저 선수치지 못한 것을 안타까워하지요.

그런데 요한과 야고보의 어머니가 아들들의 출세에 대해서 지대한 관심을 보이고 다른 제자들도 술렁거리는 이 와중에 응답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이 참으로 놀랐습니다. 전혀 나무라지 않으시고 이렇게 말씀하시지요.

󰡒너희 가운데에서 높은 사람이 되려는 이는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또한 너희 가운데에서 첫째가 되려는 이는 너희의 종이 되어야 한다. 사람의 아들도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고, 또 많은 이들의 몸값으로 자기 목숨을 바치러 왔다.󰡓(마태20,26-28)

서로 높은 자리를 차지하려는 제자들에게 오히려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가르치시지요. 그 후 예수님께서는 최후의 만찬 석상에서는 몸소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시며 실천으로 보여주시기까지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당신 손에 내주셨다는 것을, 또 당신이 하느님에게서 나왔다가 하느님께 돌아간다는 것을 아시고, 식탁에서 일어나시어 겉옷을 벗으시고 수건을 들어 허리에 두르셨다. 그리고 대야에 물을 부어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시고, 허리에 두르신 수건으로 닦기 시작하셨다.󰡓(요한13,3-5)

바로 이러한 실천적인 모습이 제자들을 변화시킨 핵심 요인이 되었던 것이지요.

예수님께서는 인내하시는 분이셨습니다. 죽음을 앞에 두고 세 번씩이나 당신을 배반한 베드로를 부활하신 후 처음 만난 자리에서 예수님께서는 오늘 복음에서처럼 결코 나무라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나를 사랑하느냐?󰡓(요한21,17)고 세 번씩이나 애정 어린 질문을 각별하게 던지심으로써 배반의 아픔을 사랑으로 감싸 주셨지요. 바로 이러한 실천적이고 사랑을 담아 인내하는 교육 방법이 제자들을 변화시켰던 것입니다. 서투르고 정리되지 않은 제자들이 예수님을 위해서 목숨을 바치는 사도로 변화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예수님의 사랑을 담은 인내와 실천적인 교육 방법에 기인한 것이지요.

우리 대부분은 이렇게 행동하기가 쉽지 않지요. 많은 부모들이 자녀를 다그치고 따지고 혼을 냅니다. 이러한 교육 방법은 속시원하고 그 결과가 당장은 눈에 보이는 것 같지만 그리 오래가지 못하지요. 참으로 사람을 변화시키는 것은 사랑의 마음으로 참고 기다리는 인내에서 비롯됩니다.

아마도 교육자들은 매번 경험할 이러한 교육의 방법을 사목자인 저도 자주 경험하게 됩니다. 지금도 초등학생들이 여기 앉아있습니다만 유치부 어린이들이 처음 어린이 미사에 와서 자리를 차지하고 앉아 있는 모습은 가히 오합지졸 그 자체입니다. 부모 밑에서 갖은 응석을 다 부리다가 성당에 와서 앉아 있으니 얼마나 힘이 들겠습니까? 학년초에 보면 자는 놈, 옆 아이와 떠드는 놈, 우는 놈 등 갖거지 모습을 다 볼 수 있지요. 어린이들은 몸을 뒤틀고 움직이면서 잠시도 가만히 있지 못합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조용히 해. 자세가 그게 뭐야!󰡓하고 야단을 치면 깜짝 놀라서 정지한 채 쳐다보는데 그 시간이 딱 3초갑니다. 3초만 지나면 또 난리가 나지요. 그런데 방법을 달리 쓰면 영 다른 결과가 나옵니다. 미사가 끝나고 나면 유치부 어린이들을 향해 칭찬을 해 주는 것입니다.

󰡒오늘 유치부 어린이들이 제일 조용하고, 미사 태도도 정말 좋았어요.󰡓

자기들이 떠든 것을 다 알고 있는 아이들이 깜짝 놀라 서로 쳐다봅니다. 󰡒그래요, 안 그래요? 유치부가 제일 조용했지요?󰡓하고 물으면 대답을 못합니다. 두 세 번 물으면 서너 명이 모기 만한 소리로 󰡒예.󰡓하고 대답하고 세 번 네 번 물어보아야 󰡒네!󰡓하고 큰 소리가 나옵니다. 그리고 그 다음 주부터는 떠들지 않습니다. 역시 사람을 바꾸는 것은 야단치는 것이 아니라 사랑의 마음으로 칭찬하면서 기다리는 것입니다. 교육에 있어서 제일 중요한 것은 사랑하는 마음으로 인내하는 것이라는 것을 새삼 깨닫게 됩니다. 속 시원히 크게 야단 한 번 치고 싹 바뀌기를 바라는 것이 우리의 마음이지만 그렇게 되지 않는다는 것이지요.

야고보 사도와 많은 제자들이 놀랍게 변화될 수 있었던 힘은 예수님이 지니고 계셨던 사랑과 인내에 기인한 것이었습니다. 세속적인 욕심을 드러냈던 야고보 사도의 어머니와 제자들 앞에서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인간적인 원의를 이해하시면서 끝까지 사랑으로 인내하시어 섬기는 자의 모습을 찾기까지 승화시켜주셨습니다. 오늘 하루도 많은 부모들이 자녀 교육에서 오는 크고 작은 고통과 부담을 안고 살아갈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보여 주신대로 몸소 실천하고 사랑을 담고 기다리는 마음이 사람을 변화시킨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서울대교구 이기양 신부>
  | 07.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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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마태오 복음 20장 20-28절 “너희 가운데에서 높은 사람이 되려는 이는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줄서기를 잘하자>

예수님 시대에도 인사 청탁과 로비가 있었던 모양입니다. 그때도 치맛바람이 좀 불었던 듯합니다. 한자리 차지하고 싶은 암투도 발견됩니다. 한 명은 오른쪽에 한 명은 왼쪽에 앉아서 세도를 부리고 싶어서 어머니를 앞세워 예수님을 만나는 제베대오의 두 아들을 보면 자리 욕심과 성공의 욕망이 얼마나 끈질긴지를 알게 됩니다. 소위 ‘줄서기’를 하려는 것입니다.

야고보 사도의 축일에 들리는 복음은 이렇게 별로 향기롭지 않은 적나라한 내용입니다. 성공을 위해 ‘ㄲ’으로 시작하는 6가지 요소가 필요하답니다.

꿈(비전),
깡(용기),
꾼(전문성),
꼴(외모),
끼(재능)
그리고 끈(연줄)이랍니다.

끈을 만들려고 양심도 자존심도 다 팔기도 합니다. 실력으로 모자라니 은밀한 뒷거래도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높은 이가 되려면, 첫째가 되고자 하면 섬기는 사람, 종이 되라고 초대하십니다. 예수님과 인연을 맺으려면 봉투를 준비할 일이 아닙니다. 그분이 몸값으로 목숨바쳐 보여주신 것은 오로지 섬기는 사랑만이 참 권위라는 가르침이었습니다. 내가 원하는 것보다 하나쯤 낮은 자리에 머무는 것이 참된 삶이라는 깨우침이었습니다.

<서울대교구 남상근 신부>
  | 07.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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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에 저를 비판하는 분을 만난 적이 있습니다. 그리고 1시간 정도 이야기를 나누었지요. 그런데 점점 화가 나는 것입니다. 그분의 말씀을 도대체 이해하기가 힘들었고, 더군다나 무조건 잘못했다고 몰아세우는데 더 이상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다보니 저 역시 화가 나서 목소리를 높이게 되었네요.

결국 마무리는 안 좋았습니다. 서로 목소리를 높이면서 끝나고 말았으니까요. 그 뒤 찜찜한 마음이 사라지지 않는 것입니다. ‘너는 잘못한 것이 없어. 그 사람이 문제인거야.’라고 제 자신에게 이야기를 했지만, 무엇인가 큰 잘못을 하고 있다는 생각을 금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던 중에 어떤 책에서 성조 아브라함에 대한 숨겨진 이야기 하나를 읽게 되었습니다.

하루는 아브라함이 사막에서 한 손님을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는 아브라함이 너그러이 대접한 음식과 포도주, 숙소와 침대 등이 형편없다며 큰 소리로 불평불만을 늘어놓는 것이 아닙니까? 모든 것을 다 자신의 호의로 베푼 것인데, 이것을 불평불만으로 받아들이는 이 손님을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던 것이지요. 참다못한 아브라함은 분노가 치밀어 올랐고 그를 내 쫓으려고 했습니다. 바로 그 순간, 하느님께서 나타나시어 이렇게 말씀하셨답니다.

“아브라함아. 나는 사십 년 동안 이 사람을 참아 왔는데, 너는 단 하루도 참을 수 없단 말이냐?”

하느님의 인내를 깨닫게 된다면, 우리 역시 다른 이들의 결점을 참아 내는 데 그리 어렵지 않습니다. 문제는 하느님을 생각하지 않고 자기 자신만을 바라보면서 스스로 참을 수 없다고 말하는 것이지요. 저 역시 저의 입장에서만 생각했었기 때문에 그렇게 화를 냈던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제베대오의 두 아들의 어머니가 치맛바람을 일으키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즉, 두 아들이 예수님의 양쪽에 앉을 수 있게 해달라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욕심을 부린다고 혼내지 않습니다. 그저 “내 아버지께서 정하신 이들에게 돌아가는 것이다.”라고 말씀하실 뿐이었지요. 그런데 다른 열 제자가 이 말을 듣고 이 두 형제를 불쾌하게 여긴다는 것입니다. 왜 그러했을까요?

인간적인 차원으로만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즉, 하늘 나라에서 높은 자리를 차지하는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따라서 다른 제자들 위에 군림하는 것으로 여겼기에 불쾌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지요. 하지만 하늘 나라는 인간 세계의 법칙과는 정반대였습니다. 첫째가 되려는 이는 종이 되어야 하는 곳이 바로 하늘 나라라고 하십니다.

다른 이를 통해 화가 날 때, 인간적인 측면을 생각하기보다 사랑가득하신 하느님의 인내를 생각했으면 합니다. 화를 참을 수 있는 힘을 얻게 될 것입니다.

▮ 인천교구 조명연 신부 : 2016년 7월 25일
  | 07.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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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발을 새로 샀습니다. 처음에는 몰랐는데, 신발을 신으면서 약간 부자연스러웠습니다. 왼쪽 발은 편하고 약간 헐거운 느낌이고, 오른쪽 발은 조금 불편하고, 꽉 끼는 느낌이었습니다. 특히 아침에 하루를 시작하면서 신발을 신으면 더욱 그랬습니다. 오른 쪽 발에 문제가 있는 것이라는 생각도 했습니다. 똑같은 신발이기 때문입니다. 오른발이 아침이면 붓는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은근히 건강에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닐까 걱정도 했습니다. 헐거운 왼쪽 신발을 벗으려고 하면 바닥의 깔창이 벗겨지려고 했습니다. 신발을 산 곳에서 수리를 맡기려고 부탁을 했습니다. 신발을 수리하는 직원이 제게 이렇게 이야기 하였습니다. ‘손님은 오른쪽 신발에 깔창이 2개 있습니다.’ 깔창을 하나씩 나누어서 놓으니, 착용감도 좋았고, 발도 불편하지 않았습니다. 원인을 알고 나니, 해결책도 쉽게 찾을 수 있었습니다.

조정래 선생님의 ‘풀꽃도 꽃이다.’라는 작품을 읽고 있습니다. 우리의 교육 현장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성적을 비관해서 자살하는 학생들이 있습니다. 많은 학생들이 사교육에 의존하고 있습니다. 배보다 배꼽이 더 크다는 말처럼, 공교육이 들러리가 되고, 사교육이 중심이 되는 형편입니다. 학교는 인격을 수양하는 못자리가 되지 못하고 있습니다. 지금 우리의 교육이 자리를 잡지 못하는 것은 누구의 책임일까요? 올바른 교육정책을 수립하지 못하는 정부의 책임이 크다고 합니다. 성적 위주로 학생들을 줄 세우는 학교의 책임도 크다고 합니다. 자식의 성공과 출세를 바라는 어머니의 책임도 있다고 합니다. 세상의 기준으로 행복을 추구하기 때문입니다. 예전에 그런 모습을 ‘치맛바람’이라고 부르기도 했습니다.

제가 학교 다닐 때, 선생님께서 하신 말씀이, 아직도 제게는 진한 감동으로 남아있습니다. ‘여러분은 좋은 성적으로, 성공하는 난 사람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배운 지식이 여러분의 삶을 이끌어 주는, 든 사람이 되면 좋겠습니다. 더욱 중요한 것은 여러분이 배운 것들을 기쁜 마음으로 나눌 수 있는, 된 사람이 되면 좋겠습니다.’ 교육의 목적은 성공과 출세가 아니라고 하셨습니다. 교육의 목적은 진리를 배워서 험한 세상의 다리가 되는 것이고, 어둠 속에 있는 이들에게 희망의 빛이 되어 주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오늘 우리는 야고보 사도의 축일을 지내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식의 성공과 출세를 바라는 어머니에게 이야기 하십니다. ‘제자가 된다는 것은 세상의 기준으로 성공하고, 출세하는 것이 아닙니다. 제자가 된다는 것은 높은 권력과 재물을 얻는 것도 아닙니다. 제자가 된다는 것은 남을 지배하고, 다스리는 것이 아닙니다.’

오늘 바오로 사도는 제자가 된다는 것의 의미를 명확하게 전해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보물을 질그릇 속에 지니고 있습니다. 그 엄청난 힘은 하느님의 것으로, 우리에게서 나오는 힘이 아님을 보여 주시려는 것입니다. 우리는 온갖 환난을 겪어도 억눌리지 않고, 난관에 부딪혀도 절망하지 않으며, 박해를 받아도 버림받지 않고, 맞아 쓰러져도 멸망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언제나 예수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지고 다닙니다. 우리 몸에서 예수님의 생명도 드러나게 하려는 것입니다. 우리는 살아 있으면서도 늘 예수님 때문에 죽음에 넘겨집니다. 우리의 죽을 육신에서 예수님의 생명도 드러나게 하려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우리에게서는 죽음이 약동하고 여러분에게서는 생명이 약동합니다.”

제자가 된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처럼 살아가는 것입니다. 벗을 위해서 목숨을 바치는 삶입니다. 죽어야 많은 열매를 맺는 것처럼 기꺼운 마음으로 희생하며, 헌신하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섬김을 받을 수 있지만, 섬기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 서울대교구 조재형 신부 : 2016년 7월 25일
  | 07.25
463 42.4%
[의정부] 섬기러 오신 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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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인은 예수님을 닮는 만큼 참 그리스도인입니다.
예수님의 마음으로 예수님의 말씀을 전하며 예수님처럼 행동할 때에
그리스도인이라 불릴 자격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당신을 섬김을 받으러 오신 이가 아니라 섬기러 오신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는 곧 우리가 참 그리스도인이려면 예수님처럼 섬기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달리 말하면 섬김을 받는 것을 즐기는 이는 참 그리스도인이라고 할 수 없다는 뜻입니다. 세례를 받았고 언제나 열심히 기도하며 큰 목소리로 예수님을 전하기 때문에그 리스도인이라 자부해도 말입니다.

섬김이란 무엇일까요.

섬김은 함께 함입니다.
쓰러져 뒤쳐진 이를 일으켜 세우기 위해 부족한 이의 모자람을 채우기 위해 아픈 이를 온전하게 하기 위해 가던 길 멈추어 그와 함께 머무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섬김은 치열한 경쟁과 함께 할 수 없습니다.

섬김은 돌봄입니다.
홀로 살아갈 수 없는 작고 약한 이들에게 누군가의 돌봄에 삶을 맡길 수밖에 없는 이들에게 아무런 조건 없이 자신을 내어주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섬김은 권력자의 통치와 다릅니다.

섬김은 살림입니다.
섬김을 받는 이가 더욱 그다울 수 있도록 그가 생명의 꽃을 활짝 피울 수 있도록 든든한 밑거름이 되어 썩어 없어지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섬김은 자신의 삶을 위한 다른 이의 피눈물 나는 희생을 요구하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섬김을 받으러 오신 분이 아니라 섬기러 오신 분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버지 하느님을 창조주 하느님께서 만드신 아름다운 세상을 하느님을 닮은 한 사람 한 사람 모든 이를 섬기러 오신 분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섬김을 받으러 오신 분이 아니라 섬기러 오신 예수님께서 그리스도라고 섬김의 삶을 통해 고백하는 사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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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신부
2016년 7월 25일
  | 07.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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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 신부님 모임에서, 오랜만에 만난 후배 신부들에게 “잘 지내니?”라고 물었습니다. 그런데 거의 모두가 “피곤해요.”라는 답변입니다. 사실 요즘을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잘 지내냐고 물으면 제1순위의 답변이 ‘피곤하다’라고 하더군요.

지구란 땅덩어리에 사니 피곤한 것이 당연할지도 모릅니다. 지구는 허공에 뜬 채 매일 시속 108,000km로 공전하고 시속 1,660km로 자전하고 있으니 말입니다. 이렇게 빠르게 움직이는 지구에 몸담고 있어서 피곤한 것이 당연하지 않을까요?

그런데 어떤 신부에게 “잘 지내니?”라고 묻자, “잘 지내고 있습니다. 관심을 주어서 감사합니다.”라고 답하는 것입니다. 순간 다르게 보였습니다.

피곤하다는 말이 열심히 살고 있다는 것을 표시하는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오히려 그 질문에 긍정적인 답과 감사를 표현하는 이 신부가 제일 잘살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모두가 하는 뻔한 답보다 남들과 다른 긍정과 감사를 표현하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부정적인 마음이 사라지고 긍정의 마음으로 살아가는 세상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제베대오의 두 아들과 그의 어머니가 예수님께 청을 올립니다. 즉, 하늘나라에서 이 두 아들이 예수님의 양쪽에 자리를 잡을 수 있도록 해달라는 청이었습니다. 발 빠르게 치맛바람을 일으키고 있는 어머니의 모습입니다. 문제는 세상의 관점과 주님의 관점은 다르다는 것입니다. 하늘나라에서 주님의 양쪽을 차지하기 위해서는 주님께서 마시려는 고통과 수난의 잔을 함께 마실 수 있어야 했습니다. 그 나라는 누군가의 위에 군림하는 자리가 아닌, 서로 사랑하는 나라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높은 사람이 되려 하기보다, 섬기는 사람이 되라고 명하십니다.

주님께서 짊어지신 십자가를 고통과 시련이라는 부정적인 마음으로만 바라보는 사람은 세상의 관점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 십자가를 사랑의 또 다른 표현으로 주님과 함께 하는 기쁨의 십자가로 받아들이는 사람은 주님과 함께 하느님 나라의 영광을 누릴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주님을 생각하면서 고통과 시련을 기쁘게 받아들일 수 있는 믿음이 있는지 묵상해 보았으면 합니다. 사도 바오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언제나 예수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지고 다닙니다. 우리 몸에서 예수님의 생명도 드러나게 하려는 것입니다.”(2코린 4,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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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신부
2020년 7월 25일
  | 07.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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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3년입니다. 독일에서 공부하고 오신 본당 신부님과 보좌 신부로 함께 지내게 되었습니다. 신부님께서는 온화함과 배려로 저를 따듯하게 대해 주셨습니다.

저의 실수를 나무라거나 탓하기 전에 기다려 주셨고, 이해해 주셨습니다. 식사를 마치면 신부님과 함께 동네 산책을 하였습니다. 교우분들도 함께 산책하는 저희의 모습이 참 보기 좋았다고 하였습니다. 수도자들이 기도할 수 있도록 자리를 마련해 주셨고, 사목의 동반자로 함께 하셨습니다.

중요한 결정은 사목회장님과 미리 상의를 하셨고, 저녁이면 묵주를 들고 성당 마당을 걸으셨습니다. 아쉽게도 신부님은 신학생들을 가르치기 위해서 신학교로 가셨지만, 제게는 영적으로, 사목적으로 많은 길을 보여주셨습니다. 가끔 안타가운 소리를 듣곤 합니다. 공동체의 갈등과 분열에 대한 소리입니다. 본당 신부와 보좌신부, 사제와 수도자, 사제와 교우들의 케미가 잘 맞지 않는 이야기입니다.

케미는 영화나 드라마 속 주인공들이 실제로도 잘 어울리고 호흡이 척척 맞을 때 사용하는 신조어라고 합니다.

가톨릭평화신문의 지면 중에 이백만(요셉) 주교황청 한국대사의 ‘바티칸 산책’이 있습니다. 즐겨 읽는 지면입니다.

오늘은 ‘베드로와 바오로, 인류 역사상 최고의 케미’라는 내용을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베드로는 흙수저 출신이고, 바오로는 금수저 출신입니다. 베드로는 예수님께서 직접 뽑으셨고, 함께 지냈습니다. 바오로는 예수님을 몰랐고, 교회를 박해하였습니다. 베드로와 바오로는 도저히 함께 할 수 없는 조합같이 보입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베드로와 바오로를 교회의 두 기둥으로 세우셨습니다. 베드로 사도는 천국의 열쇠로, 바오로 사도는 성령의 칼로 당대 최고의 국가인 로마에 십자가와 교회를 세울 수 있었습니다. 베드로는 교회의 몸통이고, 바오로는 교회의 두뇌였습니다. 베드로는 교회의 몸통으로서 지휘권(수위권)을 행사했고, 바오로는 교회의 두뇌로서 역할을 하였습니다. 몸통 없이 두뇌가 존재할 수 없고, 두뇌 없이 몸통이 제 역할을 할 수 없습니다. 상하 관계가 없는 투톱 시스템 같지만, 조직 운용에서는 상하 관계가 있었고, 상하 관계가 있는 투톱 시스템 같지만, 역할 분담에서는 상하 관계가 전혀 없었습니다.

공동체에 어려움이 있다면 베드로와 바오로 사도의 케미를 배우면 좋겠습니다.

오늘 우리는 야고보 사도의 축일을 지내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식의 성공과 출세를 바라는 어머니에게 이야기하십니다. ‘제자가 된다는 것은 세상의 기준으로 성공하고, 출세하는 것이 아닙니다. 제자가 된다는 것은 높은 권력과 재물을 얻는 것도 아닙니다.

제자가 된다는 것은 남을 지배하고, 다스리는 것이 아닙니다.’ 오늘 바오로 사도는 사제의 부모가 된다는 것, 사제가 된다는 것, 신앙인이 된다는 것에 대해서 분명하게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보물을 질그릇 속에 지니고 있습니다. 그 엄청난 힘은 하느님의 것으로, 우리에게서 나오는 힘이 아님을 보여 주시려는 것입니다. 우리는 환난을 겪어도 억눌리지 않고, 난관에 부딪혀도 절망하지 않으며, 박해를 받아도 버림받지 않고, 맞아 쓰러져도 멸망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언제나 예수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지고 다닙니다. 우리 몸에서 예수님의 생명도 드러나게 하려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사제의 부모님이 되어야 할 기준,
사제가 되어야 할 기준,
신앙인으로 살아가야 할 기준을 명확하게 말씀하십니다.

“여러분도 알다시피 다른 민족들의 통치자들은 백성 위에서 군림하고, 고관들은 백성에게 세도를 부립니다. 그러나 여러분은 그래서는 안 됩니다. 높은 사람이 되려는 사람은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첫째가 되려는 사람은 종이 되어야 합니다. 사람의 아들은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고, 또 많은 이들을 위한 몸값으로 자기 목숨을 바치러 왔습니다.”

제자가 된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처럼 살아가는 것입니다. 벗을 위해서 목숨을 바치는 삶입니다. 죽어야 많은 열매를 맺는 것처럼 기꺼운 마음으로 희생하며, 헌신하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섬김을 받을 수 있지만, 섬기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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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신부
2020년 7월 25일
  | 07.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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