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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 성녀 마르타 기념일 (7월 29일) 독서와 복음
조회수 | 1,952
작성일 | 08.07.29
요한 1서 4,7-16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느님께서 우리 안에 머무르시는 것입니다.

7 사랑하는 여러분, 서로 사랑합시다. 사랑은 하느님에게서 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이는 모두 하느님에게서 태어났으며 하느님을 압니다.
8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하느님을 알지 못합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9 하느님의 사랑은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났습니다. 곧 하느님께서 당신의 외아드님을 세상에 보내시어, 우리가 그분을 통하여 살게 해 주셨습니다.
10 그 사랑은 이렇습니다. 우리가 하느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 그분께서 우리를 사랑하시어 당신의 아드님을 우리 죄를 위한 속죄 제물로 보내 주신 것입니다.
11 사랑하는 여러분, 하느님께서 우리를 이렇게 사랑하셨으니 우리도 서로 사랑해야 합니다.
12 지금까지 하느님을 본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느님께서 우리 안에 머무르시고 그분 사랑이 우리에게서 완성됩니다.
13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당신의 영을 나누어 주셨습니다. 우리는 이 사실로 우리가 그분 안에 머무르고 그분께서 우리 안에 머무르신다는 것을 압니다.
14 그리고 우리는 아버지께서 아드님을 세상의 구원자로 보내신 것을 보았고 또 증언합니다.
15 누구든지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고백하면, 하느님께서 그 사람 안에 머무르시고 그 사람도 하느님 안에 머무릅니다.
16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시는 사랑을 우리는 알게 되었고 또 믿게 되었습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사랑 안에 머무르는 사람은 하느님 안에 머무르고 하느님께서도 그 사람 안에 머무르십니다.

요한 11,19-27 <또는 루카 10,38-42> 주님께서 메시아시며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믿습니다.

그때에
19 많은 유다인이 마르타와 마리아를 그 오빠 일 때문에 위로하러 와 있었다.
20 마르타는 예수님께서 오신다는 말을 듣고 그분을 맞으러 나가고, 마리아는 그냥 집에 앉아 있었다.
21 마르타가 예수님께 말하였다. “주님, 주님께서 여기에 계셨더라면 제 오빠가 죽지 않았을 것입니다.
22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주님께서 청하시는 것은 무엇이나 들어주신다는 것을 저는 지금도 알고 있습니다.”
23 예수님께서 마르타에게, “네 오빠는 다시 살아날 것이다.” 하시니,
24 마르타가 “마지막 날 부활 때에 오빠도 다시 살아나리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하였다.
25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셨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 나를 믿는 사람은 죽더라도 살고,
26 또 살아서 나를 믿는 모든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다. 너는 이것을 믿느냐?”
27 마르타가 대답하였다. “예, 주님! 저는 주님께서 이 세상에 오시기로 되어 있는 메시아시며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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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타 성녀는 라자로의 동생이자 마리아의 언니로서 예루살렘에서 가까운 베타니아에서 살았다. 나흘이나 무덤에 묻혀 있던 라자로는 예수님의 기적으로 다시 살아난 인물이다. 예수님께서 그들의 집에 머무르실 때 언니 마르타는 갖가지 시중드는 일로 분주하였으나 동생 마리아는 가만히 앉아 그분의 말씀을 듣고 있었다. “주님, 제 동생이 저 혼자 시중들게 내버려 두는데도 보고만 계십니까?”(루카 10,40) “마르타야, 마르타야! 너는 많은 일을 염려하고 걱정하는구나. 그러나 필요한 것은 한 가지뿐이다. 마리아는 좋은 몫을 선택하였다”(루카 10,41-42). 주님의 이 말씀에 따라 마르타 성녀는 활동적인 신앙인의 모범으로, 마리아 성녀는 관상 생활의 모범으로 공경받고 있다.
  | 07.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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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타의 오빠 라자로가 죽었습니다. 마르타는 하나밖에 없는 오빠를 잃었기 때문에 그 슬픔은 누구보다도 깊었습니다. “주님, 주님께서 여기에 계셨더라면 제 오빠가 죽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주님께서 청하시는 것은 무엇이나 들어주신다는 것을 저는 지금도 알고 있습니다.”

반쯤은 볼멘 소리이고, 반쯤은 원망에 가깝습니다. 주님께서 “네 오빠는 다시 살아날 것이다.”라고 하시는 말씀에도 가시 돋친 대답을 합니다. “마지막 날 부활 때에 오빠도 다시 살아나리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마르타의 소망은 오빠가 지금 여기에서 다시 살아나는 것밖에는 없습니다.

주님께서는 죽은 지 나흘이나 지난 라자로를 다시 살려 내십니다. 이는 마르타의 신앙 고백이 있었기에 가능했습니다. 마르타는 주님이 원망스럽지만, 끝까지 주님의 말씀을 믿고 따랐습니다. “예, 주님! 저는 주님께서 이 세상에 오시기로 되어 있는 메시아시며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믿습니다.”

과연 그렇습니다. 주님은 그리스도이시며, 부활이시요 생명이십니다. 우리는 주님께서 마련해 주신 영원한 생명을 얻습니다. 미사 때마다 주님의 몸을 모시며, 마르타의 신앙 고백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에게도 주님께서 베푸시는 기적의 힘이 주어질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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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2010년 7월 29일
  | 07.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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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서를 쓴 목적이 “예수님께서 메시아시며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여러분이 믿고, 또 그렇게 믿어서 그분의 이름으로 생명을 얻게 하려는 것”(요한 20,30)이라 하였습니다. 복음서의 목적처럼, 예수님께서 공생활 내내 사람들에게 간곡하게 바랐던 것은 ‘믿음’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무엇을 믿어야 하는지요?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마르타에게 말씀하셨듯이, 예수님께서 바로 ‘부활이시요 생명’이시라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주님의 부활과 생명은 오로지 우리의 믿음으로만 가 닿을 수 있습니다. 믿음이 깊어지면 보이지 않는 것이 보이고 들리지 않는 것이 들리게 됩니다. 그 깊은 깨달음에서 주님의 부활과 생명을 마주할 수 있습니다.

믿음이 깊어질 때 삶과 죽음은 분리되지 않고 하나가 됩니다. 지상에 살면서도 주님의 부활과 생명의 자리에 이미 가 있기 때문입니다. 믿음이 깊어지면 삶이 주님의 생명에 뿌리를 내리게 되어 중심이 잡히고, 웃고 울리는 세상일에 흔들리지 않게 됩니다. 삶의 풍파가 몰아쳐도 ‘모든 것을 선으로 이끄시는 주님’을 믿고 따르며 절망에 빠지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우리의 믿음이 더 깊어질 수 있겠습니까?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믿음을 주시려고 생명의 말씀을 주셨다고 하셨습니다. 따라서 『성경』을 읽고 묵상하고 기도하는 가운데 우리의 믿음이 깊어질 것입니다. 말씀을 얼마나 가까이하며 살고 있습니까? 그것이 자신의 믿음의 잣대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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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2011년 7월 29일
  | 07.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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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주님께서 이 세상에 오시기로 되어 있는 메시아시며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믿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마르타는 예수님에 대한 믿음을 이와 같이 고백합니다. 복음에서 예수님을 두고 ‘메시아’ 또는 ‘하느님의 아드님’이시라고 고백하는 경우를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첫 번째는 베드로의 고백입니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마태 16,15)라고 물으시는 예수님께 베드로는 “스승님은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이십니다.”(마태 16,16) 하고 대답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뒤이어 예수님께서 당신의 수난과 죽음을 예고하시는 것에 반박하다가 꾸지람을 듣습니다(마태 16,21-23 참조). 곧 그의 고백은 아직 성숙하지 못한 것이었습니다.

두 번째로는 마귀의 고백입니다. 더러운 영이 들린 사람이 무덤에서 나와 예수님과 마주치자 엎드려 절하며 “지극히 높으신 하느님의 아들 예수님, 당신께서 저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하느님의 이름으로 당신께 말합니다. 저를 괴롭히지 말아 주십시오.”(마르 5,7) 하고 외칩니다. 이는 예수님을 섬기려는 것이 아니라 대적하려고 한 고백이므로 신앙 고백의 가치가 전혀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그 마귀를 쫓아내십니다(마르 5,8-13 참조).

세 번째로는 한 백인대장의 고백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숨을 거두시는 모습을 본 백인대장은 “참으로 이 사람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셨다.”(마르 15,39) 하고 고백합니다. 이 고백이야말로 예수님의 기적과 능력이 아니라, 패배와 죽음 안에서 하느님의 뜻을 실현하셨다는 사실을 깨달은 진정한 고백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만난 마르타의 고백 또한 백인대장의 고백에 못지않습니다. 자신의 오빠가 죽어서 절망에 빠져 있을 때 한 고백이기 때문입니다. 마르타는 한없는 슬픔과 불행을 느끼면서도 예수님을 원망하지 않는 가운데 그분에 대한 자신의 변함없는 믿음을 고백한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을 어떻게 고백하고 있습니까? 항구하게 우리의 구세주로 고백하고 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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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2013년 7월 29일
  | 07.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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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마르타 성녀의 기념일에는 라자로의 부활에 관한 요한 복음만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길을 가시다가 마르타와 마리아 자매를 방문하시는 루카 복음의 장면(10,38-42)도 봉독될 수 있습니다. 이 장면에서 마르타는 주님을 시중드는 데 분주한 반면 동생 마리아는 주님의 발치에 앉아 그분의 말씀만 듣고 있는 모습을 봅니다.

마르타는 예수님께 마리아에게 언니를 도우라고 일러 주십사고 합니다. 그러자 주님께서는 마르타에게 많은 일을 염려하고 걱정하지만 정작 중요한 일은 하나이며, 마리아는 좋은 몫을 택하였고 그것을 빼앗기지 않을 것이라고 하십니다.

신학생 시절, 중세 독일의 위대한 신비주의 사상가였던 도미니코회 사제 에크하르트의 『독일어 설교』에서 루카 복음의 이 대목을 접할 기회가 있었고, 그때 받은 인상은 매우 신선했습니다. 이 구절에 대한 일반적인 주석은 마르타로 상징되는 활동적 삶보다 마리아가 대표하는 관상 생활의 우위성을 뜻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에크하르트는 마르타를 삶의 풍부한 경험을 지니고 영적으로나 인격적으로 깊이 성숙한 인물로 묘사합니다.

그에 따르면, 그녀는 이미 관상적 사랑을 잘 알고 있으며, 이제 마음에서 우러나와 주님께 봉사하는 것으로 그 사랑의 열매를 보여 줍니다. 그 반면, 마리아는 이제 막 영성적 기쁨에 눈을 뜨기 시작했고, 아직은 봉사를 통하여 사랑의 결실을 맺는 단계에 이르지는 못했습니다.

또한 마르타가 주님께 한 부탁은 동생에 대한 질투나 불평이 아니라 마리아가 혹시 영적인 위로에만 집착한 나머지 ‘섬기는 삶’으로 나아가지 못할까 하는 진심 어린 염려에서 나온 것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마르타에게 마리아에 관하여 하신 말씀 또한 마르타에 대한 힐난이 아니라 마리아가 마르타의 바람대로 활동과 관상을 통합하는 길을 잘 가리라는 믿음을 주시는 말씀으로 이해해야 한다고 합니다.

마르타 성녀를 기억하면서 저도 주님께서 주신 봉사와 기도의 보화를 잘 간직하고 열매 맺을 수 있도록 힘쓰리라 다짐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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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2014년 7월 29일
  | 07.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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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에 따르면, 라자로와 그의 동생 마르타와 마리아는 예수님을 자기 집에 자주 초대할 정도로 주님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었는데, 오늘 복음을 통하여 중요한 계시가 드러납니다.

예수님께서 죽은 라자로를 다시 살리신 표징 앞에서, 사람들은 상반된 반응을 보입니다. 요한 복음의 표징들 가운데 예수님께서 당신의 부활을 예고하신 가장 중요한 표징인 이 사건은, 역설적으로 머지않아 최고 의회가 예수님을 죽이기로 결정하는 동기가 될 것입니다(요한 11,53 참조). 그들은 군중이 모두 예수님을 따라갈 것을 두려워하여 이와 같이 결정하였습니다.

그러나 마르타는 예수님이 부활이요 생명이심을 믿었고, 라자로가 다시 살아나는 표징을 통하여 그 믿음을 확인받습니다. 이렇게 하나의 사건이, 어떤 이들에게는 예수님을 거부하는 계기가 되고 어떤 이들에게는 그분을 하느님의 아드님으로 고백하게 되는 은총의 기회가 되기도 합니다.

오늘 독서의 표현을 빌리자면, 마르타는 하느님의 사랑을 깨달았습니다. 하느님의 사랑은 당신 외아드님을 보내시는 것으로 나타났는데, 마르타는 그분을 뵙고 그분이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알았으며 그분을 맞아들였기 때문입니다.

어느 쪽에 속하는 이들이 더 많을까요? 우리는 과연 어느 쪽에 속할까요? 복음서에 기록된 예수님의 말씀과 행적을 읽을 때에, 그분께서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알아보고,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심을 깨닫고, 하느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나타났음을 느끼는지요?

우리가 스스로 점검할 수 있는 기준을 요한 1서는 제시하는데, 그것은 우리가 형제를 사랑하면서 주님의 사랑 안에 머물고 있다면 하느님의 사랑을 제대로 알거나 깨달은 것이라고 일러 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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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2015년 7월 29일
  | 07.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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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타는 라자로의 누이이며 마리아의 자매입니다. 베타니아에 있던 그들의 집은 예수님께서 복음 선포에 지치셨을 때 찾아와서 쉴 수 있는 오아시스와 같은 곳이었습니다. 마르타는 그때마다 예수님을 편안히 모시려고 지극정성을 다했던 사람입니다.

마르타에 대해 묵상할 때마다 선하고 활동적인 모습을 떠올릴 수 있습니다. 어느 날 예수님께서 자기 집에 드셨을 때, 마르타는 매우 분주히 주님을 대접하려고 뛰어다니며, 상대적으로 조용히 주님의 말씀을 듣던 마리아와 분명한 대조를 이루기도 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마르타는 오빠 라자로의 죽음에 주님께 나아가서 자신의 신앙을 강하게 고백합니다. 마르타는 예수님께서 부활이요 생명이시라고 고백하면서, 예수님께서는 생명을 주관하시는 분이시라는 믿음을 표현하고, 이 표현으로 오빠를 다시 살리시는 주님의 기적을 직접 체험하게 됩니다.

마르타를 보면서 사랑과 믿음은 표현하는 것이라는 것을 배우게 됩니다. 비록 때로는 서툴 때도 있지만, 서로 사랑을 표현하면서 그 사랑과 믿음은 더욱 굳건해지게 됩니다. 마음이 중요한 거라고 외적으로 사랑을 표현하지 않는다면, 후에 사랑의 표현이 서툴러지게 될 것입니다.

오늘 독서의 말씀에서 사랑의 사도 요한이 표현하듯이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느님께서 우리 안에 머무르시고 그분 사랑이 우리에게서 완성”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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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2016년 7월 29일
  | 07.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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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타는 동기간인 마리아, 라자로와 함께 예수님의 사랑을 많이 받았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라자로가 죽어 무덤에 묻힌 지 나흘이나 지났을 때에야 도착하신 것입니다(요한 11,17 참조).

마르타는 예수님을 맞으러 나가 아쉬운 마음을 표현합니다. “주님께서 여기에 계셨더라면 제 오빠가 죽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예수님에 대한 믿음을 토로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주님께서 청하시는 것은 무엇이나 들어주신다는 것을 저는 지금도 알고 있습니다.”

마르타는 아직도 예수님의 정체를 정확히 파악하지는 못하였지요. 예수님께서 “네 오빠는 다시 살아날 것이다.”라고 말씀하시자 “부활 때에 오빠도 다시 살아나리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라고 대답했기 때문입니다.

당시 사두가이들은 부활을 믿지 않았지만 바리사이들은 부활을 믿었습니다. 마르타는 라자로가 살아날 것이라는 예수님 말씀을 바리사이들처럼 세상 마지막 날 부활한다는 의미로 받아들인 것이지요.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생명의 주관자, 죽은 이마저도 살리실 수 있는 분이심을 명확히 밝히십니다.

이제 마르타는 확고한 신앙을 고백합니다. “저는 주님께서 이 세상에 오시기로 되어 있는 메시아시며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믿습니다.” 그런 마르타의 신앙을 보시고 예수님께서는 죽은 라자로를 살려 내십니다(요한 11,43-44 참조). 결국, 하느님에 대한 확고한 믿음은 우리가 상상하지 못하는 기적을 만들어 내지 않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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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준철 토마스 아퀴나스 신부
매일미사 2017년 7월 29일
  | 07.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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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타는 예수님께서 사랑하시던 라자로와 마리아의 누이로 예수님을 극진히 모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파스카 축제 엿새 전 당신께서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일으키신 라자로의 집을 방문하시는데(요한 12,2 참조), 그때부터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서 잡히시던 날까지 그분을 모셨던 이가 바로 마르타였습니다. 오늘 복음은 바로 그 마르타의 믿음을 보시고 예수님께서 라자로를 되살려 주시는 이야기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라자로의 죽음을 슬퍼하시며 그들 집, 곧 베타니아로 가십니다. 그러자 마르타는 주님이 계셨더라면 라자로가 죽지 않았을 것이라고 말하며 오빠를 살려 달라고 청합니다. 그러면서 마르타는 예수님이야말로 메시아이자 하느님의 아들이심을 깊이 믿고 있다고 고백합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마르타의 믿음을 보시고 라자로에게 생명을 되돌려 주십니다. 이렇게 보니 마르타는 예수님에 대한 믿음과 봉사로 똘똘 뭉친 여인이 분명합니다.

주님을 믿는 이들은 누구나 영원한 생명을 얻을 뿐만 아니라, 다른 이들도 살릴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되돌려 주시는 것은 단순한 육신의 숨이 아닙니다. 주님께서 되찾아 주시고자 하는 것은 우리가 잃어버린 영원한 생명입니다.

그 생명은 창조 이전부터 우리에게 계획된 생명으로 이 땅에서 이미 우리 모두가 누리고 있는 생명이며 육신의 숨이 끊어진다 하더라도 계속 이어지는 그런 생명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라자로에게 되돌려 주시고자 하는 생명은 육신의 숨이 아니라 바로 이 영원한 생명이었습니다. 라자로가 되돌려 받은 육신의 생명은 다시 끊겼지만 그가 되돌려 받은 영원한 생명은 세상 종말이 오더라도 영원히 이어질 것입니다.

오늘 마르타는 믿음으로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된 많은 인물들 가운데 한 사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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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교구 염철호 요한 신부
매일미사 2019년 7월 2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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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 복음은 다른 복음보다 대화를 중요하게 보여 줍니다. 등장인물 사이에 오가는 대화는 일상적인 대화를 넘어 신앙의 견지에서 예수님을 바라보도록 우리를 초대합니다. 라자로의 죽음에 관한 소식을 들으신 예수님께서는 슬픔에 잠기시어 그가 살고 있던 마을인 베타니아로 가십니다. 그리고 거기에서 마르타를 만나십니다.

오늘 복음에서 우리는 마르타의 믿음을 엿볼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 여기에 계셨더라면 제 오빠가 죽지 않았을 것입니다.” 이 표현은 마르타의 예수님에 대한 믿음과 안타까움을 잘 보여 줍니다. 예수님과 함께라면 죽음을 맞지 않았을 것이라는 마르타의 생각은 예수님에 대한 신뢰와 함께 예수님께서 어떤 분이신지 알려 줍니다.

그러나 마르타의 믿음은 여전히 부활에 대한 믿음까지는 이르지 못하였습니다. 그녀는 “네 오빠는 다시 살아날 것이다.”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마지막 부활 때에 일어날 일로 받아들입니다. ‘지금 여기에서’ 그것이 일어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합니다. 예수님의 설명을 들은 마르타는 믿음으로 그것을 받아들입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

마르타의 믿음은 이미 우리에게 대단해 보입니다. 요한 복음은 예수님과의 대화를 통하여 믿음이 한층 더 깊어지는, 예수님을 좀 더 알아 가는 마르타를 보여 줍니다. 이제 예수님께서는 하느님께서 이 세상에 파견하신 당신의 아드님이시자 부활과 생명이신 분으로 표현됩니다. 예수님과의 대화는 이렇게 우리를 더 깊고 굳은 믿음으로 이끌어 줍니다. 믿음은 성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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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허규 베네딕토 신부
2020년 7월 2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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