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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의정부/서울] 주님께 대한 굳은 믿음을 간직합시다.
조회수 | 1,610
작성일 | 08.07.29
지난주일 저녁 미사 때였습니다. 저는 주일의 마지막 미사를 하기 위해서 제의를 갈아입고 복사들과 입장을 했지요. 제대에 인사를 한 후, 신자들과 함께 성가를 부르던 중 저는 갑자기 당황스러웠습니다. 글쎄 있어야 할 것이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전례예식서 등 제대 위에 있는 책들 사이를 꼼꼼하게 살펴보았지만 제가 찾는 것은 보이지 않았습니다. 제가 찾는 것이 무엇이었냐면 바로 ‘미사 강론 원고’였지요.

사실 주일에 있는 각 시간 때의 미사마다 똑같은 내용의 강론을 하거든요. 따라서 하나의 원고를 가지고 새벽미사 때부터 저녁미사 때부터 똑같이 하기 때문에, 강론 원고를 전례예식서 맨 뒤에 끼워놓고서 미사 때마다 꺼내서 강론을 합니다. 그런데 그 강론 원고가 저녁 미사 때 사라진 것입니다.

얼마나 당황스럽던지……. 그리고 그 순간 제대를 준비하시는 분들에 대한 부정적인 마음이 확 생기는 것입니다. 제대 미사 준비를 하면서 제 원고를 치웠다고 판단되었기 때문이지요. 평소에도 원고를 잘 보지 않고 강론을 하지만, 강론 원고가 있고 없고의 차이는 무척이나 크더군요.

물론 강론은 무사히 잘 끝났습니다. 그러나 원고가 없어진 것에 대한 부정적인 생각은 그렇게 쉽게 지워지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다보니 다른 부분에 대해서도 부정적인 생각을 하게 되네요. 청년 미사 중에 이루어진 청년들의 실수들, 결제 관련 가운데에서 이루어진 사소한 일들, 평소에는 아무렇지도 않게 쉽게 넘어갈 것들인데도 불구하고 괜히 민감하게 생각하고 있더라는 것입니다.

하지만 어차피 지난 일이지요. 지난 시간으로 다시 되돌아가서 고칠 수도 없는 것입니다. 따라서 어차피 바꿀 수 없는 시간에 계속 연연함으로 인해서 지금이라는 시간까지도 엉망진창으로 만들고 있던 것이었지요.

오늘은 성녀 마르타 기념일로 복음도 마르타 성녀에 관한 이야기가 나오지요. 마르타는 라자로의 동생으로, 글쎄 라자로가 병으로 그만 죽고 말지요. 하지만 마르타는 과거의 이 사건에 연연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계셨더라면 죽지 않았을 오빠 라자로이지만, 예수님께 원망을 드리기보다는 오히려 굳은 믿음을 예수님께 보여줍니다.

“주님께서 이 세상에 오시기로 되어 있는 메시아시며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믿습니다.”

마르타의 이 고백은 바로 어떠한 상황에서도 예수님을 굳게 믿는 자만이 할 수 있음을 깨닫게 됩니다. 그렇다면 내 자신은 과연 이러한 고백을 주님께 할 수 있을까요? 자그마한 일에도 계속해서 연연하는 밴댕이 소갈딱지 같은 마음을 가지고 과연 가능할까요?

좀 더 넓은 마음이 필요할 때입니다. 그 마음을 굳은 믿음으로만 가능하다는 것을 기억하면서 주님께 대한 굳은 마음을 간직하는데 최선을 다하는 오늘이 되었으면 합니다. 주님께 대한 굳은 믿음을 간직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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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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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유명한 모스 전신기 회사에서 사람을 뽑는다는 광고를 냈습니다. 워낙 유명한 회사인 동시에 전망 있는 회사이기에 많은 사람이 모여서 면접을 기다렸지요. 그런데 갑자기 한 청년이 벌떡 일어나 사무실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 아니겠어요? 그리고 몇 분 뒤 그 청년과 그 회사의 사장이 함께 나왔습니다. 사장은 사람들에게 말했지요.

“이제 모두 돌아가십시오. 저희는 이 업무에 적합한 인재를 찾았습니다.”

사장과의 면접을 기다리고 있었던 사람들은 술렁이기 시작했습니다. 그 중 한 사람이 흥분된 목소리로 물었습니다.

“도저히 저희는 납득할 수가 없습니다. 어떻게 모두에게 면접 볼 기회도 주지 않고 사람을 뽑을 수 있습니까?”

그러자 사장이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저희는 모스 부호로 쓴 문구를 안내판에 계속 내보냈습니다. 그 안내판에는 ‘이 문구를 해석한 사람은 즉시 안으로 들어오시오. 우리는 당신을 채용할 것입니다.’라고 적혀 있었지요. 여기에 있는 이 젊은이만이 모스 부호를 알아보고 사무실로 들어왔습니다. 자~~ 더 불만이 있습니까?”

다른 구직자들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던 것은 너무나 당연하겠지요?

종종 하느님께서는 불공평하신 분이라고 말씀하시는 분들을 만나게 됩니다. 하느님께서는 특별한 사람에게만 사랑을 베푸신다고, 그래서 자신은 이제 더 이상 하느님께 의지하지 않겠다고 하면서 주님 곁을 떠나는 것을 공공연하게 말씀하시는 분들까지도 보게 됩니다. 그런데 정말로 하느님께서는 침묵하셨을까요? 그래서 정말로 불공평하신 하느님일까요?

어쩌면 앞선 그 사장이 안내판을 통해서 표시를 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그 사실을 몰랐던 다른 사람들처럼, 우리 역시 주님의 메시지를 보지 못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그러면서도 주님께 화를 내고 있는 불충한 모습을 간직하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요?

오늘 마르타 기념일을 맞이해서 복음에서는 마르타의 강한 믿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녀는 자신의 오빠인 라자로가 무덤에 묻힌 지 나흘이나 지난 뒤에 나타난 예수님께 화를 내거나 원망하지 않습니다.

사실 마르타의 입장에서 볼 때, 화를 내는 것이 너무나 당연할 것 같습니다. 예수님께서 얼마나 놀라운 기적을 많이 행하셨습니까? 더군다나 라자로와 마르타와 마리아 남매를 얼마나 예뻐하셨습니까? 따라서 정말로 예뻐하고 사랑한다면 라자로가 죽기 전에 와서 그 병을 고쳐줘야 하는 것이 당연하겠지요. 그런데 예수님은 사람이 완전히 죽었다라고 판정을 받는 무덤에 묻힌 지 나흘이 되어서야 찾아오셨던 것입니다.

이러한 상황에서도 예수님께 대한 굳은 믿음을 보여주는 마르타였습니다. 마르타는 예수님께서 보내고 있는 구원의 메시지를 하나도 빠짐없이 보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러한 상황에서도 예수님께 실망하지 않고 강한 믿음으로 다가설 수가 있었던 것이지요.

그렇다면 우리는 주님의 메시지를 얼마나 제대로 보고 있었을까요? 마르타의 그 믿음이 너무나 부러울 뿐입니다.

오해하지 맙시다.

조명연 신부
  | 07.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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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에 많은 유다인이 마르타와 마리아를 그 오빠 일 때문에 위로하러 와 있었다. 마르타는 예수님께서 오신다는 말을 듣고 그분을 맞으러 나가고, 마리아는 그냥 집에 앉아 있었다. 마르타가 예수님께 말하였다. “주님, 주님께서 여기에 계셨더라면 제 오빠가 죽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주님께서 청하시는 것은 무엇이나 들어주신다는 것을 저는 지금도 알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마르타에게, “네 오빠는 다시 살아날 것이다.” 하시니, 마르타가 “마지막 날 부활 때에 오빠도 다시 살아나리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하였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셨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 나를 믿는 사람은 죽더라도 살고, 또 살아서 나를 믿는 모든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다. 너는 이것을 믿느냐?” 마르타가 대답하였다. “예, 주님! 저는 주님께서 이 세상에 오시기로 되어 있는 메시아시며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믿습니다.” (요한 11,19-27)

<사랑과 믿음>

누군가 상대방을 온전히 받아들여 하나가 되고자 할 때, “사랑한다” “믿는다”라는 말을 씁니다. 그런데 사랑과 믿음은 떨어질 수 없습니다. 신앙인에게 있어서 사랑하는 대상, 믿음의 대상은 크게 ‘하느님’과 ‘사람’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흔히 하느님에 대한 사랑이나 믿음과 사람에 대한 사랑이나 믿음을 따로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이 두 가지는 다른 것이 아니라 하나입니다.

오늘 복음에 나오는 마르타의 고백은 이 점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마르타가 고백하는 예수님께 대한 믿음은 곧 오빠인 라자로에 대한 사랑과 깊이 연결되어 있습니다. 마르타는 오빠의 죽음으로 깊이 상심했습니다. 사랑하는 오빠의 죽음 앞에서 마르타는 오직 예수님께 의탁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주님, 주님께서 여기에 계셨더라면 제 오빠가 죽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주님께서 청하시는 것은 무엇이나 들어주신다는 것을 저는 지금도 알고 있습니다.” 이 말은 예수님께 죽은 오빠를 살려내라고 억지를 부리는 말이 결코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죽은 오빠를 다시 살릴 수 있다는 희망의 고백이고, 바로 예수님의 도우심으로 사랑하는 오빠와 다시 만나고픈 간절한 염원의 표현입니다.

마르타에게 있어서 오빠의 죽음은 단지 절망적인 사건에 머무르지 않고, 오히려 예수님을 통해 하느님께 드리는 굳은 믿음을 고백하게 하는 신앙 고백의 계기가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빠에 대한 마르타의 사랑을 외면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라자로를 다시 살리심으로써 마르타의 굳은 믿음이 결코 헛된 것이 아님을 보여주셨을 뿐만 아니라, 마르타의 사랑이 인간의 상상을 초월한 결실을 맺게 하셨습니다.

라자로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마르타와 라자로의 관계는 더 이상 살아있는 사람 사이의 관계가 아니라 산 자와 죽은 자의 관계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라자로를 소생시킴으로써 이 관계를 다시금 살아있는 사람 사이의 관계로 만들어 주셨습니다. 오빠 라자로에 대한 마르타의 사랑은 예수님의 마음을 움직였던 것입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수많은 인간관계를 맺습니다. 참으로 기쁘고 아름다운 관계도 있지만, 그렇지 못한 관계도 많이 있습니다. 지금 당장에는 불편한 관계를 맺고 있지만 상대방을 진실로 사랑하고 있다면, 예수님께서 좋은 관계로 바꿔주신다는 것을 굳게 믿고 인내를 가지고 예수님께 간절한 기도를 드리는 것이 필요합니다.

나에게 상처를 준 사람들을 떠올려봅시다. 부모님일수도 있고, 자녀들일수도 있습니다. 친한 친구나 교회 안에서 함께 생활하는 믿음의 벗일 수도 있고, 직장 동료나 옆집에 사는 이웃일 수도 있습니다. 이제 이 사람들이 나에게 준 상처를 뒤로 하고 과연 이 사람들을 사랑하고 있는지, 이 사람들에 대한 믿음을 가지고 있는지 자신에게 물어봅시다.

사랑하지 않는다면, 믿지 않는다면 더 이상 아무런 해결 방법이 없습니다. 신앙인으로서 자신의 삶에 대해 가장 밑바닥부터 다시 짚어보아야 합니다. 우리 신앙인이 믿음으로 고백하는 하느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인간적으로는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입고 여전히 갈등을 느끼고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이신 하느님을 믿기에 마음 한 구석에는 상대방에 대한 사랑과 믿음이 남아 있습니까? 그러면 됐습니다. 예수님께 기도하면 됩니다. 그리고 인내를 가지고 기다리면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사람들을 변화시켜주실 것입니다. 죽은 라자로를 살리신 것처럼 말입니다. 그리고 이 사람들을 대하는 우리 자신을 변화시켜 주실 것입니다. 우리가 진실로 우리에게 아픔을 준 사람들을 미워하지 않고 사랑한다면,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간절한 기도를 외면하지 않으실 것입니다.

예수님에 대한 믿음과 사랑은 우리를 우리가 만나는 사람들에 대한 믿음과 사랑으로 인도할 것입니다. 또한 사람들에 대한 믿음과 사랑은 예수님에 대한 믿음과 사랑으로 완성될 것입니다.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느님께서 우리 안에 머무르시고 그분 사랑이 우리에게서 완성됩니다”(1요한 4,12).

<의정부교구 상지종 신부 (베르나르도)>
  | 07.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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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세상을 떠난 작가 박경리 씨의 빈소에서
정의채 몬시뇰이 장례미사를 집전했습니다. 강론에서 몬시뇰은 고인과의 각별한 인연을 이야기했습니다.

몬시뇰을 처음 만난 자리에서 박경리 씨는
“도저히 해결할 수 없는 문제가 죽음 문제”라고 하면서 “모르는 것을 아는 척 쓸 수가 없어서 소설을 쓸 때마다 항상 죽음 문제를 외면하게 된다”며 죽음에 대한 진지한 고민을 털어놓았다고 합니다.

이에 몬시뇰은 박경리 씨가 세례를 받는 데에 도움을 자청했고 박경리 씨는 교리 공부를 다 마치고 세례를 받게 됐다고 합니다.

죽음에 대한 문제는 인간이면 누구나 피할 수 없는 문제입니다.

인생이라는 여행길의 마지막은 죽음입니다.
그 죽음을 넘어서지 못한다면 우리의 삶은 의미를 잃게 됩니다. 왜냐하면 죽음은 모든 것을 물거품으로 만들어버리기 때문입니다. 지금 내가 보는 것, 느끼는 것, 깨닫는 것, 가진 것, 그것들만이 결코 전부가 아닙니다.

우리 신앙인은
죽음을 초월하는 삶이 있음을 믿습니다. 죽음 너머의 삶을 지향하는 삶이야말로 현재의 삶을 더 충실하게 살 수 있게 할 것입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
나를 믿는 사람은 죽더라도 살고,
또 살아서 나를 믿는 모든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다.”
예수님의 이 말씀을 여러분은 믿고 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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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허영엽 신부
  | 07.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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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이 드러나는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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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사람들 사이에서는 듣거나 보기 힘든 말입니다만, 서양 영화를 보면서 그들이 수시로 말하는 한 가지는 ‘입에 달려있는 것처럼 느껴지는 사랑’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말로 그렇게 많이 해야만 사랑을 하는 것이냐고 물을 수 있다면, 한국 사람들처럼 많은 경우 감정을 가슴속에만 묻어두는 것도 사랑의 표현이냐고 물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요즘에는 우리 문화도 서양의 영향을 베낀 탓인지, 서양 사람들이 했던 모습을 본받는 경향이 있습니다만, 그런 행동에 마음도 담겨 있는지는 따로 볼 수 있어야 합니다. 물론 겉으로 드러나는 행동을 살핀다고 해서 마음까지 볼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오늘은 성녀 마르타 기념일입니다. 마르타는 자기 몸을 움직여 예수님을 모셨고, 그 행동으로 자신이 갖고 있던 사랑을 표현한 사람입니다. 마르타가 보이는 사랑의 모습과 상대적인 태도로는 동생 마리아가 보이는 모습을 기억할 수 있습니다만, 오늘 묵상할 내용은 아닙니다.

오늘 복음에서 볼 수 있는 것은 마르타의 믿음을 볼 수 있습니다. 오빠, 나자로가 세상을 떠난 뒤, 예수님과 마르타가 주고받는 이야기가 오늘 복음의 주된 내용입니다. 우리 그리스도교 신앙인들이 받아들이고 사는 가장 중요한 믿음의 요소는 ‘부활’입니다. 제가 말은 이렇게 합니다만, 부활이 무엇인지 체험한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현실에서 겪는 일들로 표현할 때는 ‘잠자리에 들었다가 다음날 잘 일어나는 것도 부활 체험’이라고 설명합니다만, 우리는 그것을 가리켜 부활이라고 받아들이는 것은 아닙니다. 워낙 많은 사람들이 자연스럽게 그 일을 반복하기 때문입니다.

부활을 체험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입니다. 아니 체험은 쉬운 것의 하나일 수도 있지만, 내가 느낀 일상의 일을 부활이라고 받아들이는 경우는 대단히 드물다고 말하는 것이 옳은 말일 것입니다. 그 부활을 이야기하는 것 대신에 요한의 편지에 나오는 것처럼, 삶에서 진정한 사랑을 느끼고 전할 수 있다면 그것을 새로운 의미의 부활이라고 인정하는 것도 올바른 태도일 것입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사랑을 실천하고 사는 사람이라면 우리는 각자의 삶에 하느님을 모시고 사는 사람이라고 사도 요한은 말합니다. 이 요한의 말을 우리가 얼마나 제대로 받아들이고 사는지에 따라 내 안에 머물러 계신 하느님께 영광을 드릴 수 있는지 그 삶이 달라질 것입니다. 사랑은 생각이 아니라 행동입니다. 그런 입장을 십분 고려한다면 서양 사람들이 보이는 태도가 훨씬 더 진정한 사랑에 가까울 수 있을 거라는 생각도 합니다. 여러분은 사랑을 어떻게 표현하고 사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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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이철희 요한 크리소스토모 신부
  | 07.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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