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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도회] 깨지고 금간 항아리
조회수 | 1,905
작성일 | 08.07.29
후원회 피정 강사로 오신 신부님께서 하셨던 말씀 하나가 오래도록 제 마음 안에 남아있습니다.

큰 장독대 위에 많은 물 항아리들이 줄지어 서있었습니다. 큰 항아리, 작은 항아리, 투박한 항아리, 맵시 나는 항아리 그리고 ‘깨지고 금간 항아리!’ 그런데 주인은 특별한 사람이었습니다. 예쁘고 성한 항아리들도 많은데, 하필 물 길으러 갈 때 마다 ‘깨지고 금간 항아리’를 머리에 이고 가는 것이었습니다. 한 두 번이면 모르겠는데, 매번 ‘깨지고 금간 항아리’와 함께 하니, ‘깨지고 금간 항아리’의 불만이 이만저만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날도 어김없이 ‘깨지고 금간 항아리’에 물을 가득 담아 돌아오는 주인을 향해 참다 참다 못한 ‘깨지고 금간 항아리’가 따졌습니다.

“주인님, 왜 하필 나입니다. 저 많은 쌩쌩한 항아리들 다 놀고먹는데, 왜 꼭 깨지고 금간 저만 이렇게 부려 먹으십니까?”

그때 주인은 ‘깨지고 금간 항아리’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애야, 뒤를 한번 돌아 보거라!”

깨진 항아리가 뒤를 돌아보니 아주 특별한 광경이 펼쳐져 있었습니다. 다른 곳은 다 황무지인데, 주인과 ‘깨지고 금간 항아리’가 늘 물을 흘리며 다니던 그 길에만 예쁘고 앙증맞은 들꽃들이 무수히 피어있었습니다.

주인은 다정한 목소리로 ‘깨지고 금간 항아리’를 향해 이렇게 타일렀습니다.

“애야, 보거라. 깨지고 금간 네 상처 사이로 뿌려진 물들이 저토록 많은 생명들을 싹트게 했구나. 그렇다면 우리가 결코 밑진 장사 한 것은 아니지 않겠느냐?”

오늘 우리에게도 똑같이 적용되는 예인 것 같습니다. 우리도 가끔씩 하느님 앞에 ‘깨지고 금간 항아리’와 똑같은 투정을 늘어놓을 때가 많습니다.

“하느님, 왜 하필 저입니까? 건강하고 능력 많고 훌륭한 사람들 저렇게 많은데, 저 사람들, 저렇게 하루 종일 놀고먹는데, 그 사람들 놔두고 왜 하필 저입니까? 보시다시피 저는 몸도 성치 못하고, 능력도 없습니다. 시간도 부족하고, 자신감도 없습니다. 있는 죄 없는 죄 다 짓고 살고, 도무지 자격이 없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왜 하필 저입니까?”

우리의 하느님, 참으로 신비스런 분이십니다. 각자에게 맞는 역할을 부여하십니다. 때로 불공평해보일 때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시키실 만하니 시키시는 것입니다. 맡길만하니 맡기시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교회 안에서 관상가의 대명사인 마리아와 극명하게 대비되는 활동가, 언니 마르타의 축일을 지내고 있습니다. 특별히 오늘은 교회 안에서, 가정 안에서, 공동체 안에서 마르타처럼 온몸으로 뛰는 역할을 하고 계시는 분들의 축일이기도 합니다. 사실 그분들이 하시는 ‘작은 일들’, 하느님 앞에 절대로 작은 일들이 아님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모든 사람들이 다 무대 위에서 각광과 찬사를 한 몸에 받는 우아한 주연배우로 존재할 수만은 없지 않겠습니까? 모두가 다 세상과 완벽히 격리된 봉쇄 수도원에서 하루 온종일 거룩하고 엄숙한 분위기 속에 관상생활에만 전념할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하프 연주자라고 하면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아름다운 여신의 이미지를 떠올립니다. 우아하고 부드럽게 하프 줄을 뜯는 부드러운 손놀림이 떠오릅니다. 그러나 긴 드레스 자락에 감춰진 발에 주목하는 사람은 별로 없습니다. 관객들이 쉽게 바라볼 수 있는 우아하고 부드러운 손놀림도 아주 중요합니다. 그러나 보이지는 않지만 치마 밑에서 쉼 없이 움직이고 있는 발동작은 더 중요합니다. ‘보이지 않는 발’ 없이 아름다운 하프 연주는 불가능합니다.

정성껏 가족들의 식탁을 준비하는 어머니의 모습은 미사를 봉헌하는 사제의 모습과도 크게 차이나지 않습니다. 때로 귀찮고, 때로 지긋지긋한 일상의 모든 작은 일들이 결국 생명과 사랑, 하느님께로 연결되는 은총의 끈이며, 성화(聖化)의 장이며, 기도 중의 기도임을 기억하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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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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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 공동체의 살림꾼

오늘 우리가 축일로 지내는 마르타는
늘 동생 마리아와 함께 얘기되어집니다.
마리아가
주님의 사랑 안에 머무는(Being) 관상생활을 대표한다면
마르타는
주님을 위해 무엇을 하는(Doing) 활동생활을 대표하는 것으로.

루카 복음에만 나오는 얘기에 의하면
마리아가 주님으로부터 좋은 몫을 택했다는 칭찬을 들은데 비해
마르타는 많은 일을 염려하고 걱정한다는 꾸중을 듣습니다.
마르타는 매우 억울했을 것입니다.
가정이건 공동체건 여러 가지 일을 건사하는 사람이 없으면
공동체가 돌아가지 않습니다.
우리 교회 공동체를 봐도 여러 가지 일을 도맡아 하는 분이 있습니다.
이런 분들은 좋은 강사가 와서 특강을 해도 뒷바라지를 하느라
정작 자기는 좋은 얘기를 듣지 못합니다.
집에서 어머니들이 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명절이 되어 다른 가족들은 먹고 떠들고, 웃고 즐겨도
어머니만은 음식 뒷바라지 하랴 설거지 하랴 혼자 바쁩니다.
명절 때 뿐이 아니라 어머니의 모든 삶은 가족을 위한 삶입니다.
그래서 어머니의 모든 활동을 우리는 살림을 산다고 합니다.
이 얼마나 좋은 말입니까?
어머니의 모든 일은 살림, 즉 가족을 살리는 일입니다.
그런데 어머니는 이러한 살림을 티내지 않고 하십니다.
어느 정도로 티내지 않느냐 하면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나야
그 빈자리가 얼마나 큰지를 알 수 있을 정도입니다.
그리고 이토록 많고 큰 일을 일생 티내지 않고 했다는 것은
사랑이 아니고는 어느 하나도 하기 어려운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어머니는 살림을
일로서 하지 않고 사랑으로 하시는 것입니다.

마르타는 바로 주님 공동체의 어머니이고 살림꾼입니다.
마르타는 일이 좋아서 공동체의 모든 일을 떠맡은 일꾼이 아니라
주님을 누구보다 사랑하기에
주님 공동체의 모두를 살리는 사랑의 마당발입니다.

작은 형제회 김찬선 신부
  | 07.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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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속 깊은 곳에 숨기고 있는 것을 털어놓는 일은 땀나는 일이다. 아울러 털어놓는 일에 동반하는 가장 공통적인 형태의 감정상태는 불안이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고백하는 데는 불안 심리가 따르기 마련이다. 그 불안 심리는 자신의 비밀을 누군가 알게 되었다는 것과 노출에 따른 양심의 부담감이 뒤따르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고백을 하고 나면 마음이 홀가분하다. 마음의 짐을 벗어버렸기 때문이다. 그러니 고백은 사람을 살리는 것이다.

그런데 오늘 복음에서 마르타는 “주님, 저는 주님께서 이 세상에 오시기로 되어 있는 메시아시며 하느님의 아들이심을 믿습니다”라고 고백하고 있다. 고백은 자신의 전존재를 걸고 하는 것이다. 곧 지금까지 지니고 살아온 자신의 가치관으로 살지 아니하고 주님의 가치관대로 살겠다고 결심하는 것이다. 마르타는 예수님을 주님으로 자신의 삶의 중심으로 모시고 살겠다는 것을 드러낸 것이다. 우리 역시 매일 마르타처럼 고백하고 살아가고 있는지 뒤돌아보아야겠다.

구속주회 정원순 신부
  | 07.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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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인(聖人)의 삶

얼마 전 형제들과 잠시 웃으며 나눈 이야기가 생각납니다.
형제들이 서로 섬기기 경쟁을 한다면
그 공동체 얼마나 활력이 넘칠까 하는 내용이었습니다.

이상(理想)입니다만
낮아지기 경쟁,
작아지기 경쟁,
비우기 경쟁,
섬기기 경쟁,
성인되기 경쟁의 공동체가 실현된다면 바로 거기가 천국일 것입니다.

누가 진정 성인이요 크리스천입니까?
오늘 새벽기도 시 감동적인 독서 부분을 길다 싶지만 인용합니다.
“두 손에는 정의의 무기를 들고
영광을 받으나 수치를 당하나, 비난을 받으나 칭찬을 받으나,
언제든지 하느님의 일꾼답게 살아갑니다.
우리는 속이는 자 같으나 진실하고,
이름 없는 자 같으나 유명하고, 죽은 것 같으나 이렇게 살아 있습니다.
또 아무리 심한 벌을 받아도 죽지 않으며,
슬픔을 당해도 늘 기뻐하고,
가난하지만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만들고,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지만 사실은 모든 것을 가지고 있습니다(2코린6,8-10).”
바로 이런 이가 성인입니다.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지만 모든 것을, 하느님을 가진 부자가 성인입니다.
참으로 주님을 믿고 사랑할 때 이런 성인이 됩니다.
그 영혼 주님께 깊이 뿌리 내린 믿음 있을 때 이런 성인입니다.

어제 밤, 수도원 길가에 자리 잡고 있었던
수도원의 상징과도 같은 노(老) 오동나무가
계속된 폭우에 장엄하게 쓰러졌습니다.

넘어진 나무 밑동을 보니 뿌리가 더 썩어 있었습니다.
순간 연상되는 게 영혼이었습니다.
“보이지 않는 뿌리가 썩으면 저절로 나무들 죽듯이,
보이지 않는 영혼이 썩으면 육신도 저절로 죽기 마련이겠다.
보이지 않는 뿌리와도 같은 영혼이 튼튼해야
육신의 고통이나 시련도 능히 견뎌낼 수 있겠다.”

보이지 않는 영혼,
믿음으로 깊이 주님께 뿌리내려야
언제 어디서나 하느님의 일꾼답게, 성인되어 삽니다.

하느님은 사랑입니다.
사랑 안에 머무르는 사람은 하느님 안에 머무르고
하느님께서도 그 사람 안에 머무르십니다.

사랑 안에서 하느님과 일치된 삶이 영혼의 뿌리를 튼튼하게 합니다.
바로 매일 미사의 은총이기도 합니다.
진정 주님을 믿고 사랑할 때 튼튼한 영혼의 뿌리요, 성인입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
나를 믿는 사람은 죽더라도 살고,
또 살아서 나를 믿는 모든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다.”
주님 말씀대로 주님을 믿는 우리들,
지금 여기서부터 죽음을 넘어 영원한 삶을 삽니다.
또 좋은 믿음과 더불어
영원한 생명을 선사하시는 성체성사의 주님이십니다.

우리 모두 감사하는 마음으로 마르타 성녀와 함께 주님을 고백합시다.

“주님! 저는 주님께서 이 세상에 오시기로 되어있는 메시아시며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믿습니다.” 아멘

베네딕토회 이수철 신부
  | 07.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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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께서 가장 두려워하는 사람들

이 한 세상 살아가면서 정녕 견디기 힘든 일 가운데 하나가 사랑하는 사람과의 영원한 이별입니다. 엊그제까지만 해도 작은 일에 마음 상해 다투기도 하고, 그러다가 화해하고, ‘지지고 볶고’ 티격태격 살아가던, 어쩌면 내 분신 같던 그의 영원한 부재, 참으로 견디기 힘든 일입니다.

그 따뜻했던 미소, 부드러운 음성, 함께 했던 좋은 추억들을 더 이상 공유할 수 없다는 것, 참으로 큰 상실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죽음 앞에서, 특히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 앞에서, 미처 준비되지 않은 죽음 앞에서 그리 서글피 통곡하는 것입니다.

죽음의 특징 가운데 하나가 소리 없이 다가온다는 것입니다. 사전 예고 없이 갑작스럽게 다가온다는 것입니다. 순서가 없다는 것입니다. 나이와 상관없다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자주 이런 연습을 할 필요가 있습니다. 매일 잠들기 전 사랑하는 사람과 작별인사를 하는 것입니다. 매일 아침 눈을 뜨면 오늘이 이 사람과 보내는 마지막 날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런 노력이야말로 상대방을 지속적으로 사랑할 수 있는 가장 좋은 비결이 될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는 사랑하는 오빠의 갑작스런 죽음 앞에 애통해하는 마르타의 모습이 잘 소개되고 있습니다.

너무나도 사랑했던 오빠였기에, 아직 갈 길이 창창했던 오빠였기에, 아직 떠나보낼 준비가 안 되었던 오빠였기에 마르타는 이 현실을 도무지 용납할 수 없었습니다.

나자로와 절친했던 예수님이셨기에 초상집을 찾아오십니다. 예수님께서 오신다는 소문을 듣고 마리아는 집안에 그냥 앉아있었던 반면, 열혈여성이었던 마르타는 좀 따져봐야겠다며 집 밖으로 나옵니다. 볼멘 목소리로, 노기가 가득 표정으로 이렇게 외칩니다.

“주님, 주님께서 여기에 계셨더라면 제 오빠가 죽지 않았을 것입니다.”

마르타의 이 말은 꽤 힐난조의 말입니다. 이 말은 ‘예수님 당신은 오빠의 친한 친구가 되어가지고, 친구가 죽어가는 데 왜 빨리 오지 않았냐, 아무리 공사다망하다고 하지만 어떻게 그럴 수가 있는가’며 따지는 말입니다.

여기까지 마르타의 모습은 우리와 별반 다를 바가 없습니다. 우리도 많은 경우 이렇게 따지지 않습니까? 도무지 수용하기 힘든 참혹한 현실 앞에서, 난 데 없이 다가온 큰 십자가 앞에서 ‘당신은 사랑과 자비의 하느님이시면서 어떻게 이런 몹쓸 일을 제게 허락하십니까? 어쩌면 이러실 수가 있습니까?’라며 하느님께 따지지 않습니까?
그러나 마르타가 우리와 다른 것 한 가지가 있습니다. 하느님을 원망하고 미워하는 데 그치지 않습니다. 주님의 능력에 대한 강한 믿음이 있었습니다. 그분이 하시는 일은 그 어떤 이해하지 못할 일이라 할지라도 반드시 내 인생에 의미가 있는 일일 것이라는 확신이 있었습니다. 이런 믿음을 바탕으로 마르타는 이렇게 간구합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주님께서 청하시는 것은 무엇이나 들어주신다는 것을 저는 지금도 알고 있습니다.”

이런 마르타의 굳건한 신앙, 단순한 신앙, 어찌 보면 집요하고 지나칠 정도로 강한 주님께 대한 신뢰심에 예수님께서도 기쁜 마음으로 응답하십니다.

“네 오빠는 다시 살아날 것이다.”

예수님이 가장 두려워하는 사람들이 몇 부류 있습니다. 착해빠진 사람들, 그래서 단순한 사람들, 앞뒤 재지 않고 무조건 달려드는 집요한 사람들, 한 마디로 마르타 같은 사람들 무서워하십니다. 그런 사람의 요구를 들어주지 않으실 수 없었습니다.

나자로의 죽음과 부활을 바라보며 생각해봅니다.

어제도, 그리고 오늘도 우리는 많은 분들과 작별하며 살아갑니다. 가까웠던 친구들도 떠나갑니다. 축의금보다 조의금 액수가 점점 더 늘어가는 것, 받아들이기 힘들지만 어쩔 수 없이 수용해야만 하는 슬픈 현실입니다.

그런 죽음을 바라볼 때 마다 가장 바람직한 자세는 무엇이겠습니까? 내 죽음도 멀지 않았구나, 나도 언젠가 저 관속에 누워있겠구나, 생각하며 더욱 겸손하게, 더욱 하느님 두려워하며, 더욱 성실히 살아가야 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이 있습니다. 나자로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지만, 지금까지 살아있는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많은 사람들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치유활동을 통해, 기적을 통해, 많은 사람들의 기도를 통해 불치병에서 회복되어 다시 한 번 새 삶을 찾았습니다. 그러나 그것 역시 유한한 것입니다. 영원히 기적이 반복되는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어차피 우리 모두는 이 세상의 거처를 떠나야 합니다. 이 세상에 꾸며놓았던 장막을 치워야 합니다. 그 누구도 예외 없이 이승을 떠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남은 것은 단 한 가지 하느님 아버지께로 나아가는 빈손이요, 빈 영혼입니다.

그 순간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재물도, 명예도, 자식도, 유산도 결코 아닙니다. 예수님을 구세주 하느님으로 고백했던 굳은 신앙심입니다. 비록 부족했지만, 많이 부끄러웠지만 예수님 말씀에 충실하려고 노력했던 우리들의 신앙여정입니다. 열렬했던, 확고했던 마르타의 신앙입니다.

“예, 주님! 저는 주님께서 이 세상에 오시기로 되어 있는 메시아시며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믿습니다.”

살레시오회 양승국 신부
  | 07.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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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타는 예수님의 일행을 자기 집에 모셔들여 정성껏 대접합니다. 마리아는 예수님 발치에 앉아 말씀에 귀를 기울입니다. 마르타는 예수께 동생한테 자기를 도우라는 말을 해달라고 청합니다. 예수님은 많은 일에 마음을 쓰며 걱정하다가 실상 필요한 것을 놓치지 말고 마리아처럼 좋은 몫을 택하라고 합니다(루가 10, 38-42). 속뜻은 따로 있었겠지만 인간적으로 보면 서운했을 법한 일화입니다.

라자로가 죽었을 때 예수께서 문상을 오신다는 소식을 듣고 마중을 나간 것도 마르타입니다. 그래도 예수님은 마리아만 찾고 마리아는 예수님이 찾는다는 말을 듣고야 동구 밖으로 달려나갑니다(요한 11, 28-29). 성녀 마르타는 부지런하고 봉사하는 여성이었습니다.

오늘은 마르타의 날입니다. 엄청 봉사하는데 크게 드러나지 않고 남이 잘 알아주지도 않는 언니, 가끔씩 오버해서 원성은 사지만 본성은 한없이 착한 언니, 자기도 먹고살기 바쁘면서 가난한 사람을 보면 그냥 지나치지 못하는 언니들. 마르타 같은 이런 자매, 왕언니를 찾아 감사하는 날입니다.

살레시오회 장동현 신부
  | 07.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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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 주님께서 여기에 계셨더라면 제 오빠는 죽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주님께서 청하시는 것은 무엇이나 들어주신다는 것을 저는 지금도 알고 있습니다.”(요한 11,19-27)

<사별(死別)의 슬픔 앞에서>

우리 인간이 이 한세상 살아가면서 겪게 되는 가장 큰 상실, 가장 깊은 슬픔, 가장 큰 고통은 아마도 ‘사별(死別)’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금쪽같은 아들, 삶의 희망이요 보루이던 아들, 앞길이 창창하던 아들을 불의의 사고로 잃고 그 비통함에 늘 울고 다니시는 어머님, 그 어떤 위로의 말도 소용이 없었습니다. 아들이 먼저 떠난 후 가장 힘든 일은 밥숟가락 뜨는 일이었습니다. 아들이 저리도 황망히 먼저 떠나갔는데, 아들이 더 이상 이 세상에 없는데, 세상은 언제 그랬냐는 듯이 잘 돌아가고, 아직도 나는 살아서 어제와 다름없는 하루를 보낸다는 것은 참으로 혹독한 일이었습니다. 아침에 일어나면 늘 드는 생각이 혹시라도 이게 꿈이었으면, 혹시라도 시계바늘을 뒤로 되돌렸으면, 하는 생각이었습니다. 가끔씩 마당에 인기척이라도 나면 아들인가 싶어 자동적으로 몸을 일으키셨습니다.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마르타 역시 사랑하는 오빠 라자로를 잃고 깊은 슬픔에 잠겨 있었습니다. 한편 예수님을 향한 원망의 마음도 컸습니다. 말만 ‘절친’이지 소용이 없었습니다. 오빠 라자로가 위독하다고 사람까지 보냈는데 늑장을 부리신 나머지 오빠가 저리 세상을 떴다는 생각에 예수님을 향한 섭섭한 마음이 끓어올랐겠지요. 화가 머리끝까지 났지만 마르타는 꾹꾹 눌러 참으며 예수님을 향해 이런 말씀을 드립니다.

“주님, 주님께서 여기에 계셨더라면 제 오빠는 죽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 순간 예수님께서 건네시는 말씀을 들어보십시오. 이 말씀을 통해 우리는 예수님께서 삶과 죽음의 지배자요, 이 세상과 저 세상의 지배자란 사실을 잘 알 수 있습니다.

“네 오빠는 살아날 것이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

예수님의 육화강생이전에 죽음은 정녕 풀 수 없는 신비, 이해할 수 없는 고통이었습니다. 특히 그 죽음이 안타까운 죽음, 황당한 죽음, 어이없는 죽음, 너무 빠른 죽음일 때 더욱 그렇습니다.

그런데 이 땅에 오신 예수님으로 인해 죽음에 대한 해답이 내려졌습니다. 죽음을 극복하기 위해 직접 죽음을 체험해보신 예수님이셨습니다. 죽음을 정복하기 위해 죽음까지 내려가신 예수님이셨습니다. 이 땅에 오신 예수님께서는 이 세상뿐만 아니라 죽음의 세상까지 당신의 영역으로 만드셨습니다. 이제 우리는 살아도 주님의 것, 죽어도 주님의 것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으로 인해 우리는 이 세상에서나 저 세상에서나 예수님과 함께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 07.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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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 주님! 저는 주님께서 메시아시며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믿습니다."

오늘 우리는 우리와 함께 고통을 나누시는 예수님을 만나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고통자체에만 머무르시는 분이 아니라 고통조차 신앙을 고백하게 하는 살아계신 우리의 메시아가 됩니다. 예수님은 고통과 죽음을 통해 새 생명을 얻는 신비를 보여주셨습니다. 고통과 죽음을 새롭게 보시는 예수님에게서 진정한 희망을 발견해야합니다. 부활은 고통과 죽음을 통해 완성됩니다. 고통과 죽음을 직시하고 고통을 견디어내게 하는 것이 우리의 믿음입니다.

이렇듯 고통과 죽음을 통하여 우리는 새 생명으로 나아가게 됩니다. 예수님의 무한한 사랑은 고통과 죽음까지도 하느님을 체험하는 은총이 되게 했습니다. 우리는 마르타처럼 고통 속에서도 예수님을 신뢰해야 합니다. 고통과 죽음은 하느님 사랑과 자비가 절대적으로 필요한 우리들의 신앙고백이 되어야합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믿음입니다. 고통을 통해 우리의 믿음은 더욱 깊어갑니다. 고통과 죽음의 순간에서도 믿음을 잃지 않는 굳센 신앙을 청하는 하루되십시오.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
  | 07.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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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처럼 한계를 잘 표현하는 단어는 없다. 의학의 역사는 죽음이 찾아오는 시간을 늦추려는 노력, 즉 생명을 연장시키려는 노력을 끊임없이 해왔다. 성과도 있었고, 앞으로도 더욱 진전을 보일 것이다. 하지만 끝은 반드시 온다.

인간의 가장 원초적인 두려움은 죽음에서 온다. 늘 미지의 세계로 우리 앞에 서 있는 죽음. 그저 타인의 죽음이라는 간접적 체험으로 그 존재만을 확신케 하는 죽음. 그러기에 어떤 종교도 죽음이라는 주제를 다루고자 했고, 모아진 생각을 답으로 내놓으려 하고 있다. 어쩌면 가장 가깝고도 먼 세계가 죽음이 아닐까 싶다.

우리 신앙의 근거는 그리스도 예수님이다. 그분의 말씀을 믿고 따르는 것을 신앙이라고 한다. 그분께서는 말씀하시고 우리에게 물으신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 “나를 믿는 사람은 죽더라도 살고, 또 살아서 나를 믿는 모든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다.” “너는 이것을 믿느냐?”

우리는 믿는다고 고백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그 고백이 진실해야 한다는 것이다. 진실한 고백이라면 우리의 삶에는 절대적 희망이 허락된다. 죽음을 넘어선 희망. 남은 시간 잘 살아야 한다는 희망.

죽음을 생각하지 않고는 우리는 성숙할 수 없다. 죽음을 생각하지 않고 이 삶을 제대로 볼 수도 없다. 죽음을 생각하지 않고서는 삶의 의미가 무엇이고, 어떻게 사는 것이 옳은지를 제대로 알 수 없다. 죽음 앞에서 우리 모두는 솔직해진다. 더 이상 감출 일도 숨길 일도 없다.

영원한 생명으로 넘어가는 문으로서 우리는 죽음을 이해한다. 하지만 그 문이 영원한 죽음으로 넘어가는 문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을 의식해야 한다. 부활의 삶을 믿는 사람처럼 살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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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글라렛선교수도회 김대열 신부
  | 07.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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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5   (홍) 성 김대건 사제와 정하상 동료 순교자들 대축일(9월 20일) 독서와 복음  [12] 2717
504   [수도회] 내 안에서 칼이 울었다  [2] 9
503   [부산/대구/마산/수원] 십자가없는 부활이 있을 수 없듯, 고통없는 영광이란 있을 수 없다.  [8] 15
502   [인천/서울] 기다린다는 것, 사실 말처럼 쉽지 않다.  [2] 14
1 [2][3][4][5][6][7][8][9][10]..[27]  다음
 

 

대축일/명절강론 코너 ( 대축일/명절 미사에 관련된 강론자료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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