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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부산] 주님께서는 그리스도이시며 하느님의 아들이십니다
조회수 | 1,613
작성일 | 08.07.29
[수원] 주님께서는 그리스도이시며 하느님의 아들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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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성녀 마르타 축일이다.

성경에 보면 예수께서 라자로의 집에 들르셔서 쉬고 계실 때에, 마르타는 부엌에서 열심히 음식 준비를 하고 있었고, 마리아는 예수님 발치에 앉아 예수님의 말씀을 열심히 듣고 있었다.

자기는 부엌에서 고생하고 있는데 예수님 앞에 앉아서 자기를 도와줄 생각도 않고 있는 마리아에게 자기 일 좀 거들어 주게 하라고 예수님께 말하였던 마르타였다.

예수님께서는 마르타를 보고, "너는 너무나 많은 일로 걱정하며 마음을 쓰고 있는데, 실상 필요한 것은 한가지뿐이다"라고 말씀하신 것으로 보아 매우 활동적인 사람이었던 것 같다.

이 때문에 마르타는 활동적인 그리스도인의 상징이고 동생 마리아는 관상생활의 모델로 공경을 받는다. 또한 성녀 마르타는 요리사의 수호성인으로 공경을 받고 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께서는 당신 자신이 "부활이요 생명이라"(25절)고 하시면서 당신 자신을 드러내신다.

예수님의 이 말씀은 초기 교회 공동체에서 예수님께 대해서 고백한 신앙 내용이기도 하다. 예수께서 공생활을 하시는 중에 여러 번 죽은 사람을 살리시는 것을 보았다.

회당장 야이로의 딸, 죽은 과부의 외아들 그리고 오늘 복음에 나오는 라자로를 다시 살리시는 장면을 보고 그분이야말로 생명을 주실 수 있는 분임을 체험하였기 때문이다.

그러한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마르타는 "주님, 주님께서 여기에 계셨더라면 제 오빠는 죽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이라도 주님께서 구하시기만 하면 무엇이든지 하느님께서 다 이루어 주실 줄 압니다"(21-22절)라고 할 수 있었던 것이다.

여기서 예수님은 "네 오빠는 다시 살아날 것이다"(23절) 하시고 라자로를 살려 주시면서 "부활이요 생명이라"는 말씀을 하신 것이다.

오늘의 복음에서 우리에게 주시고자 하는 메시지는
예수님이 마지막 날에 죽은 자를 살려주시는 분으로서가 아니라, 구원은 "지금 여기서" 주시는 분이시라는 것이다.

구원은
바로 지금 내가 살고 있는 "지금 여기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구원이 단지,
내가 죽은 다음에, 하느님의 심판을 받은 다음 결정되는 것이라고 한다면, 이것은 잘못된 생각이다.

구원은 이 세상에서부터 체험되고 누릴 수 있는 것이어야 한다. 내가 지금 구원을 체험하지 못한다면, 죽은 다음에 구원을 받을 수 없다. 구원이 무엇인지 모르기 때문이다.

이것은 구원을 주시는 그분을 믿고,
따르면서, 즉 그분의 가르침을 실천하면서 "지금 여기서"부터 살기 시작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은 주님을 닮아가기 위해
하느님의 뜻 때문에 나 자신을 죽일 수 있는 삶, 죽으려 노력하는 삶을 통해 우리는 부활의 신비를 체험할 수 있다.

이 부활의 신비를 체험하기 전에
이미 고통의 신비를 체험하게 되며, 이를 통해 우리는 우리 자신 안에, 혹은 이웃에게 구체적으로 그리스도를 낳아줄 수 있다.

이 때에 우리도
"주님, 주님께서는 이 세상에 오시기로 약속된 그리스도이시며 하느님의 아드님이신 것을 믿습니다"라고 고백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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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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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신도] 생명의 입김

이 지상에서 살아가는 생명의 원천이자 주인이 예수님이심을 선언하는 오늘 복음을 읽다가, 좋아하는 시편을 떠올렸습니다. “그러다가 당신께서 외면하시면 어쩔 줄 모르고 숨을 거두어들이시면 먼지로 돌아가지만 당신께서 입김을 불어넣으시면 다시 소생하고 땅의 모습은 새로워집니다.”(시편 104,29-­30)

저는 한 해 전례 가운데 재의 수요일을 가장 좋아합니다. 영혼이 떠나면 우리 몸은 욕망의 찌꺼기까지 모아 담고 한줌 재로 돌아갈 것임을 그날만큼 절절하게 느끼는 경우가 없습니다. 이마와 머리카락 사이에 묻었을 재가 떨어지지 않도록 조심조심 집에 가서 세면대 거울을 봅니다. 희끗한 재의 흔적에서, 머지않아 우리 생명이 남겨놓을 먼지와 재를 미리 봅니다. 살아 있는 기쁨과 죽을 운명의 허망함이 얼마나 가까이 어깨를 맞대고 있는지 새삼 깨닫습니다. 태초에 불어넣어 주신 입김에 활력을 얻어 뛰고 있는 심장 소리에 귀를 기울여 봅니다. 그러고 있노라면 볼멘 심정, 미운 마음, 쫓기는 두려움이 사라지고 오로지 두려워할 것이 하느님의 뜻을 거스르는 일임을 깨닫습니다.

오빠를 잃은 마르타에게 예수님은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라고 하십니다. 이미 죽은 오빠는 세상 끝 날에 다시 살아날 터이니 걱정 말라고 위로하십니다. 이 말씀으로, 조물주께서 이 세상에 들어와서 우리의 고통을 함께 겪으심으로 우리 생명이 새로워진다는 그리스도교 신앙의 바탕이 마련됩니다. 생명의 원천을 믿는가 아닌가가 신앙과 불신을 가르고 소생과 파멸을 정하는 기준이라고 하십니다.

하느님의 입김으로 다시 소생하여 하느님과 한 몸이 되면 우리가 아는 우주의 모습도 달라질 것이라고 하십니다. 그러니 “예, 주님! 저는 주님께서 이 세상에 오시기로 되어 있는 메시아시며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믿습니다.” 하고 신앙을 고백하는 마르타는 얼마나 복이 많은 사람인가요. 창에 찔리신 상처에 손가락을 들이밀어 보기 전에는 아무것도 믿지 못하겠다는 마음으로 살아온 제가 한없이 부끄러워집니다. 해마다 이마에 재를 받으면서 육신의 생명이 짧다는 것과 죽음이 조물주께 돌아가는 여정의 시작이라는 것을 배우고 또 깨달으면서도, 의심은 그늘진 숲의 넝쿨처럼 길고도 질깁니다.

<여상훈(도서출판 시유시)>
  | 07.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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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 죽음 앞에서

그때에 19많은 유다인이 마르타와 마리아를 그 오빠 일 때문에 위로하러 와 있었다. 20마르타는 예수님께서 오신다는 말을 듣고 그분을 맞으러 나가고, 마리아는 그냥 집에 앉아 있었다. 21마르타가 예수님께 말하였다. “주님, 주님께서 여기에 계셨더라면 제 오빠가 죽지 않았을 것입니다. 22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주님께서 청하시는 것은 무엇이나 들어주신다는 것을 저는 지금도 알고 있습니다.” 23예수님께서 마르타에게, “네 오빠는 다시 살아날 것이다.” 하시니, 24마르타가 “마지막 날 부활 때에 오빠도 다시 살아나리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하였다. 25그러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셨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 나를 믿는 사람은 죽더라도 살고, 26또 살아서 나를 믿는 모든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다. 너는 이것을 믿느냐?” 27마르타가 대답하였다. “예, 주님! 저는 주님께서 이 세상에 오시기로 되어 있는 메시아시며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믿습니다.” (요한 11,19-27)

<묵상>

나는 시골에 내려온 지 3년째 되던 해부터 봉곡교회에서 ‘행복한 노인학교’를 열었다. 처음 ㄱ,ㄴ부터 시작한 한글반이 지금은 자서전 쓰기를 하고 있다. 맨 처음에는 자서전 쓰기를 못하겠다 하시면서도 숙제를 꼬박꼬박 해오시는 어르신들을 보면 너무 예쁘고 고마웠다. 내가 자서전 쓰기를 하는 이유는 할머니들이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기쁘게 맞이했으면 하는 바람에서다. 주마다 한 번씩 모여 자신이 살아왔던 것을 나누고, 쓰고, 읽고 하며 울기도 하고, 웃기도 했던 시간들이 내게 참 귀한 선물로 다가온다. 오늘 말씀을 대하니 그 할머니들이 떠오른다. 특히 다 큰 자식의 죽음을 경험했던 할머니는 그 일을 이야기하면서 얼마나 우셨는지 지금도 가슴이 저려온다. 사랑했던 사람, 그가 가족일 경우 그 슬픔과 아픔은 말로 다할 수 없다.

‘주님이 여기에 계셨더라면 오빠가 죽지 않았을 텐데….’ 오빠 라자로에 대한 마르타의 사랑이 보인다. 사랑하는 오빠를 다시 보지 못한다는, 함께 있지 못한다는 슬픔인 것이다. 마르타가 만난 죽음은 몸의 죽음이다. 그리고 우리가 두려워하는 죽음 또한 무덤에 묻히는 몸의 죽음일지 모른다. 관계의 단절이라는 다시 볼 수 없는 그리움이, 사랑이 죽음을 거부하게 했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주님은 말씀하신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 나를 믿는 사람은 죽더라도 살고, 또 살아서 나를 믿는 모든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다.”

주님이 보시는 삶과 죽음은 몸 너머에 있다. 몸을 입고 살고 있다 할지라도 죽음을 살고 있는 자들이 있고, 몸은 주검으로 사라졌어도 살아 있는 자들이 있다. 주님은 부활이고, 생명이시다. 이것을 ‘믿습니다.’ 하고 받아들인 마르타처럼 우리도 이 말씀을 받아들이길 간절히 바란다.

<박후임 목사(봉곡교회)>
  | 07.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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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주님께서는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사람은 죽더라도 살겠고 또 살 아서 나를 믿는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다.”라고 말씀하시며 본문 다음 말씀 에서는 이 말씀을 입증하시기 위하여 죽은 지 나흘이나 지난 라자로를 죽음에서 소생시켜 주신 기적을 보여주셨습니다.

이 기적은
언제나 죽음을 직면하고 사는 우리에게 참으로 큰 위안이며 더없이 반가운 소식이 아닐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누구나 죽지 않고 영원히 살기를 원하면서도 사실상 죽어야 하는 가련한 신세에 놓여있기 때문입니다. 과연 주님은 오늘의 복음을 통하여 삶과 죽음을 지배하시고 생사의 대권을 가지신 구세주라는 사실을 더욱 확실하게 알려 주십니다.

성경을 보면
예수님은 눈물을 흘리신 적이 두 번 나오는데 한 번은 회개하지 않는 예루살렘의 멸망을 예견하시고 한탄하시면서 눈물을 흘리셨으며, 또 한 번은 라자로의 부음을 듣고 비통한 마음이 북받쳐 눈물을 흘리셨다고 합니다. 주님께서 우신 것을 보면 죽음이란 역시 인간에게 있어서 가장 슬프고 비참한 일인 가 봅니다.

그래서 마르타는
오빠의 죽음을 슬퍼한 나머지 처음엔 주님을 원망하는 어조로 이렇게 말합니다. “주님, 주님께서 여기에 계셨더라면 제 오빠는 죽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이라도 주님께서 구하시기만 하면 무엇이든지 하느님께서 다 이루어 주실 줄 압니다.”고 말하면서 주님께 대한 믿음을 고백했습니다.

이때 주님은
그의 믿음을 가상하게 여기시고는 네 오빠는 다시 살아 날 것이라고 말하자 마르타는 유대인들이 믿었던 것처럼 마지막 날 부활 때에 다시 살아나리라는 일반적인 부활신앙을 고백하였습니다.

주님은 그의 부활 신앙이 옳다는 것을 인정하시면서도 한 걸음 더 나아가 그 부활 신앙이 이미 당신 안에서 성취된다는 사실을 알려주시기 위하여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라고 선언하셨던 것입니다.

이 말씀은 주님이 이 세상에 오심으로써 인간 부활의 효력이 이미 실현되었고, 부활은 먼 훗날의 일이 아니라 지금 여기에서부터 현실화되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하지만
부활의 은총 역시 신앙이 전제되어야 하기때문에 주님은 마르타에게 “너는 이것을 믿느냐?”하고 물으셨습니다.

“예, 주님, 주님께서는 이 세상에 오시기로 약속된 그리스도이시며 하느님의 아드님이신 것을 믿습니다.”하고 대답하자 주님께서는 믿기만 하면 하느님의 영광을 보게 되리라 는 당신 말씀을 상기시켜 주신 다음, 이미 시신이 부패하기 시작한 라자로를 소생시켜 주셨습니다.

이 세상에는 많은 사람들이
태어나 살아 가고 그리고 죽어갑니다. 그러나 예수님 외에는 아무도 죽었다가 다시 부활한 사람이 없습니다. 다만 주님께서 잠시 동안 소생시켜 주 신 과부의 외아들이나 야이로의 딸 그리고 라자로를 제외하고는 어느 누구도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다는 기록이 없습니다. 이처럼 죽음은 아무도 경험해 보지 못한 일이기 때문에 우리에게 불안과 두려움을 안 겨주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동서고금의 많은 성현들이 죽음의 문제를 해결하고 인생의 수수께끼를 풀어보려고 노력하였지만 아무도 속 시원한 해답을 주지 못했습니다. 오직 주님만이 죽은 후 에 전개될 부활과 영생을 제시해 주셨고 죽음의 신비를 명확히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친히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써 인간이 그처럼 갈망하는 부활과 영생을 실제로 보여주셨으며 심지어 죽음까지 도 지배할 수 있는 권한이 있음을 보여주었습니다.

부활을 믿지 못한다고 해서
부활을 제쳐 놓으면 남는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결국 죽음입니다.

이 세상에서 죽음만큼 확실한 것은 없습니다.
우리에게 있어서 가장 큰 불행은 죽음의 문제이고 아무도 이 죽음을 외면할 수 없는 그야말로 심각한 문제가 죽음의 문제입니다. 죽음이 무서운 것은 죽음 그 자체를 모르기 때문이며 죽음의 세계를 다녀온 사람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죽음의 세게 속으로 뛰어 들어가서 그 캄캄한 어둠의 휘장을 열 어 보이게 하신 분이 있는데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님은
다시 살아나셔서 우리 에게 죽음 그 뒤에 하느님 나라가 있음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구원의 기쁜 소식을 우리에게 전 해주기 위해서 이 세상에 오셨고, 우리의 죄를 대신 지시고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시고 사흘 만에 부활 하시어 우리의 주님이 되셨습니다.

인류는
이제 죽음의 공포에서 해방되었고 영원한 삶의 길이 열리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이야말로 인류에게 참으로 큰 축복을 안겨주신 고마운 생명의 은인이십니다.

형제 자매 여러분 !
삶이 기쁘십니까 ?
행복하십니까 ?

우리 주님이 부활하셨기 때문에
우리는 기뻐해야 합니다. 부활하신 주님의 현존은 우리 인생의 참 의미를 깨닫게 해 줍니다. 주님이 중심이 되지 않는 삶은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아무리 많은 일을 하고, 아무리 많은 성공을 거두어들인다 해도 주님 없이 행한 것은 헛 그물질과 같습니다.

우리 삶이
현세에서만 끝나면 인간은 너무나 비참하고 주님 부활이 없다면 우리의 신앙생활과 봉헌생활은 하나의 장식에 불과합니다. 그리고 부활은 나 혼자만 내적으로 간직하고 즐기는 소유물이 아닙니다.

부활을 믿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이웃 형제들에게 부활이요 생명이신 주님을 선포하여 그들이 더 이상 죽음의 자리에서 삶의 의미를 찾지 않도록 부활의 신비를 가르쳐 주며 선포해야 합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사람은 죽더라도 살겠고 또 살아서 나를 믿는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다. 너는 이것을 믿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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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교구 이차룡 바오로 신부
  | 07.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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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 예수님의 제자 성녀 마르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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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교회가 기념하는 성녀 마르타는
예루살렘 근처 베다니아 출신으로 성서상의 성인이다. 마르타의 이름은 신약성서에 총 16번 언급된다.

그것도
대단히 단편적으로 언급 되고 있는데, 루가복음 10장에 3번(38, 40, 41절), 그리고 요한복음 11장에 12번, 12장에 1번(12,2)이다. 복음서에 언급된 마르타의 이름과 함께 등장하는 사람은 그의 오빠 라자로와 그의 동생 마리아이다.

베다니아에
살았던 라자로와 마르타와 마리아는 예수님과 각별한 친분을 가지고 있었던 가족이다. 이 가족은 성서상의 문맥을 살펴볼 때 그리 대단한 가문도 아니고 당대에 명성을 떨친 위인도 아니고 재산이 많고 세력도 있는 부호(富豪)도 아니었다. 그냥 평범한 가족, 이스라엘의 대다수 가족이 그랬듯이 평범하다 못해 가난하고 소외된 그런 가족이었다.

그러나
이 가족이 우리 그리스도교 교회사에 미친 영향은 결코 간과할 수 없는 대단한 것이다. 라자로의 죽음 앞에 하느님의 눈물을 보이신 예수께서 마르타의 청을 받아들여 그를 죽음으로부터 소생(蘇生)시킴으로써 자신을 부활이요 생명으로 계시하셨다.(요한 11,1-44)

루카복음에서
보듯이 동생 마리아는 예수님의 발치에서 말씀을 청취하는 일을 즐겨하고, 마르타는 마리아의 행동을 다소 시기했지만 예수님과 그 일행을 시중드는 일을 즐겨하였다.

물론 예수께서는
마르타가 많은 일에 신경을 쓰지만 실상 필요한 것은 한 가지 뿐으로써 그것을 마리아가 택했다고 하셨다.(루가 10,38-42) 그러나 누구도 하느님의 말씀만으로 이 세상을 살아갈 수는 없다.

금강산도 식후경이란 말이 있듯이
예수께서도 굶주린 군중을 빵의 기적으로 먼저 배불리신 후에 생명의 빵에 대한 가르침을 내리지 않으셨는가.(요한 6장)

교회는
성서가 전해주는 마리아의 태도에서 ‘관상적 모범’을, 마르타의 태도에서 ‘활동적 모범’을 예수님을 따르는 방법으로 받아들였다.

관상(觀想)과 활동(活動),
이 둘은 동시에 행할 수 없는 덕목(德目)이지만 어느 하나가 다른 하나보다 더 낫다고 말하기는 어렵고, 균형과 조화를 필요로 하는 덕목이다. 그래서 일찍이 베네딕토 성인(470-547)은 “일하며 기도하라!”(ora et labora)고 말했을 것이다.

2,000년 교회사는
마르타의 가정적이며 활동적 태도를 한번도 과소평가하지 않았다. 그것은 성녀 마르타의 마음속에 예수님께 대한 굳센 신앙심이 있었기 때문이며(요한 11,27), 그녀 또한 다른 여인들과 함께 예수님의 충실한 제자였기 때문이다.

마르타 성녀의 축일에
듣게 되는 오늘 복음의 핵심은 대화를 통한 예수님의 자기계시적 말씀(25-26절)과 마르타의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신앙고백(27절)이다. 예수께서는 당신의 친구로 알려진 라자로가 병으로 앓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도 그 병이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것이라며 이틀씩이나 여유를 부리시다가(11,3-6),

결국 라자로가
죽어 무덤에 묻힌 지 나흘째 되는 날(11,17) 베다니아에 있는 마르타와 마리아의 집을 방문하셨다. 라자로가 무덤에 묻힌 지 나흘째 되었다는 말은 라자로가 확실히 죽었다는 것을 뜻하며,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은 사람이 죽어 사흘이 지나면 무덤에 안장하였다.

많은 유다인들이
상가(喪家)를 찾아와 유족을 위로한다는 것은 당시 관례로 이웃사랑의 실천이라고 할 수도 있지만, 그들은 잠시 후에 벌어질 놀라운 기적의 증인들이 될 것이다.

예수께서 오셨다는
소식을 듣고 언니 마르타는 마중을 나갔고, 동생 마리아는 집에 그대로 머물러 있었다는 설명은 마르타의 활동적 성격과 마리아의 관상적 성격을 잘 대변하는 대목이라 하겠다.(루가 10,38-42 참조)

요한복음사가는
마르타의 굳센 신앙을 토대로 예수께서 죽음을 이기는 부활이요 생명이심을 계시한다. 이는 복음의 주제이기도 하다.

죽은 사람이
다시 살아난 일을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마르타가 오빠가 소생하기도 전에 예수께 고백한 신앙은 다소 표면적이기도 하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죽은 라자로를 소생(蘇生)시키심으로써 마르타의 부족한 신앙을 넘치게 채워주셨다.

우리의 믿음도
마르타의 그것처럼 표면적인 경우가 많다. 현대를 사는 우리의 약점은 인간의 이성(理性)이 미치지 않는 곳에서 예수님의 믿음을 언급한다는 것을 ‘어리석은 짓’으로 여기는 것이며, 내 자신의 힘으로 할 수 있는 곳에서 예수님의 능력을 언급한다는 것을 ‘무능한 짓’으로 여기는 것이다.

따라서
이렇게만 생각하는 현대인들에게 믿음이 머무를 수 있는 자리는 거의 없다. 그들은 죽음을 죽음으로만 받아들인다. 그러나 예수님께 대한 믿음은 죽음 다음에도 생명이 있음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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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교구 박상대 신부
  | 07.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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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루살렘 가까운 마을 ‘베다니아’에는
지금도 낮은 한숨 소리와 무거운 구름이 잔뜩 내리누르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내 커다란 통곡과 울음이 온 마을을 뒤덮습니다. 마르타와 마리아의 형제인 라자로가 결국 병으로 삶을 마치게 된 것입니다.

복음서에
이들 남매에게 아버지나 다른 남자 형제들의 이야기가 나오지 않는 것을 보아, 아마도 라자로는 이 집의 유일한 주춧돌이요 버팀목이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버팀목이, 마르타와 마리아를 지켜주던 그 든든한 성곽이 한 순간에 무너져 내리고 만 것입니다.

지금도 한 가정에
남성이 사라지고 없다는 것은 남아있는 이들에게 얼마나 큰 상실인지를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더군다나 2천년 전 중동 지방에서 그 가정의 유일한 남성 라자로가 사라져버렸다는 것은 하늘을 이고 있던 그 기둥이 사라져 버린 것과 마찬가지였을 것입니다.

‘집안에 돈이 조금만 더 있었더라면
더 좋은 약을 써 보았을 것을, 집안에 힘있는 사람이 한 명이라도 있었더라면 더 좋은 의사를 찾아가 보였을 것을’하는 원망과 설움이 마르타를 휘감습니다.

그러나
가장 원망스러운 분이 한 분 계십니다. ‘그 분만 계셨더라면, 그 분만 여기에 우리와 함께 계셨더라면, 지금 나와 마리아를 위해 곡을 하고 있는 이 사람들이 모두 다 라자로와 이 집안의 복을 축하하며 잔치를 벌이고 있었을 터인데’

그러나
그 분은 함께 계시지 않았습니다. 도리어 사람을 보낸지가 몇 일 전인데, ‘그 병은 죽을 병이 아니다. 그것으로 오히려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고 하느님의 아들도 영광을 받게 될 것이다.’라는 뜻 모를 말씀만을 남기셨답니다.

하지만
내 오라비는 죽었고 장사를 지낸지 벌써 나흘이나 되어 시신에서는 이제 냄새까지 납니다. 불쌍한 라자로! 여자들만 남은 이 집안은 이제 이 거친 세상을 무슨 힘으로 헤쳐나갈꼬!

그 순간
한 사람이 허겁지겁 문을 열어제치며 곡을 하고 있는 여인들 사이로 주님께서 오신다고 외칩니다. ‘옳다구나!’ 마르타는 벌떡 일어납니다. 슬픔에 지쳐있는 마리아를 집안에 그대로 둔 채 한달음에 뛰쳐나갑니다.

라자로를
친구라 부르셨던 예수님. 마리아를 극진히 위해주셨던 예수님. 그 분이 이제 내 눈앞에 계십니다. 그리곤 세상 모든 원망을 담아 쏟아냅니다. “주님, 주님께서 여기에 계셨더라면, 제 오라비는 죽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한 편 혹시나 하는 일말의 기대도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이라도 주님께서 구하시기만 하면 무엇이든지 하느님께서 다 이루어 주실 줄 압니다.”

“네 오빠는 다시 살아날 것이다.”

그럼 그렇지, 입에 발린 소리,
누구나 다 알고 있는 그렇고 그런 얘기. 마르타는 되바라지게 톡 쏘아 붙입니다. “마지막 날 부활 때에 다시 살아나리라는 것은 저도 알고 있습니다.” 그 정도는 돈 없고 못 배운 여인네인 나도 안다는 투로 말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다음 말씀이 하늘의 천둥처럼 들려옵니다. 보통의 랍비들이였다면 머쓱해하며 헛기침을 하다가 자리를 피하였을 터인데, 예수님의 말씀 하나하나는 너무나도 힘있게, 또렷 또렷 제 귀에 들려옵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사람은 죽더라도 살겠고
또 살아서 믿는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다.”

그 옛날 가장 위대한 예언자 모세가
타오르는 가시덤불 속에서 들었다던 그 말씀 ‘나는 곧 나다’(창세기 3장 14절)하신 말씀이 지금의 예수님 말씀만큼 우렁찼을까요! 과연 주님은 생명의 창조자, 생명의 주관자, 모든 것 위에 계시는 분이십니다.

“너는 이것을 믿느냐?”
산들바람 타고 오는 한 겹 꽃송이처럼 부드러운 주님의 말씀에 이제 마르타는 다른 것을 되돌아볼 겨를이 없습니다.

“예, 주님,
주님께서는 이 세상에 오시기로 약속된 그리스도이시며 하느님의 아드님이신 것을 믿습니다.” 놀라운 고백이 이루어집니다. 천국의 열쇠를 맡아 쥔 베드로가 하였던 그 고백이 지금 이 순간 마르타의 입에서도 쏟아집니다. 그리고 마르타는 곧장 달려갑니다, 아직도 집안에서 슬픔에 잠겨있을 마리아에게로.

교형자매 여러분,
우리의 신앙생활이 항상 평탄할 수만은 없습니다. 세상 어느 길에도 오르막과 내리막이 있듯, 우리의 신앙 여정 또한 실패의 순간과 영광의 순간이 함께 있습니다.

우리가
이 길에서 늘 성공하기만을 바란다면 우리에게 주어질 영광은 없습니다. 라자로의 죽음 앞에서 마르타가 마지막 순간 예수님을 거부했었다면 베다니아에서의 기적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마르타가 우리에게 보여주는 모범은 쓰러지면서도 쓰러지면서도 마지막 순간 예수님을 붙들었다는 사실입니다.

때론
주님이 원망스럽고 때론 그 분이 하찮게 여겨지더라도, 주님은 늘 계시는 분, 생명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교형자매 여러분, 우리의 희망은 오직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만 있음을 항상 기억합시다. 그분 만이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실 수 있는 분이심을 항상 가슴에 새기며 살아갑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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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교구 서유승 세례자 요한 신부
  | 07.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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