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요안 신부의 가톨릭

 l Home l Bestsite l Search l Freeboard l E-mail l

 
 

주일강론

평일강론

축일강론

대축일/명절강론

혼인강론

장례강론

예 화

사설/칼럼

♣ 현재위치 : 홈 > 강론자료실 > 대축일/명절강론

대축일/명절강론 코너 ( 대축일/명절 미사에 관련된 강론자료입니다... )

 


( 쪽지보내기 스크랩하기 프린터하기 홈페이지 )
449 3.6%
[마산] 성모님의 침묵속의 믿음
조회수 | 3,007
작성일 | 08.08.13
묵상 길잡이 이 축일은 지상생활을 마치신 성모님께서 영혼과 육신이 함께 하늘나라로 들려 높여졌음을 기념하는 축일이다. 4세기 이후 ‘복되신 동정녀 기념일’이 성모님의 죽음과 승천 축일로 받아들여졌으며, 7세기경에 서방교회에 전해졌고, 8세기에 8월 15일로 확정되었다. 1950년 비오 12세 교황은 교회의 오랜 전통으로 믿어오던 성모 승천을 ‘믿을 교리’로 선포하였다. 성모님의 승천은 모든 이의 희망의 징표이며, 마지막 날의 완성을 미리 보여준다고 하겠다. 오늘은 성모님의 축일 가운데 가장 큰 축일이다.

1. 1950년 비오 12세 교황은 성모 승천을 ‘믿을 교리’로 선포함

우리는 일반적으로 교회가 어떤 교리를 ‘믿을 교리’로 선포했다고 하면 갑자기 교회가 그런 교리를 만들어 법을 선포하듯이 발표하는 것으로 생각하기가 쉽다. 그러나 결코 그렇지가 않다. 오히려 교회가 전통적으로 믿어오던 교리를 교회의 권위로 공적으로 확인했다고 하는 것이 더 적절한 표현일 것이다. 그런 면에서 성모 승천 교리도 마찬가지이다.

비오 12세 교황은 이 교리를 ‘믿을 교리’로 선포하면서 ‘사도 성 바오로’를 비롯한 여러 사도들의 믿음과 ‘다마스쿠스의 성 요한’, ‘콘스탄티노폴리스의 성 제르마누스’ 등 수많은 교부들의 한결같은 믿음의 증거를 제시하였다. 말하자면 교회가 사도시대부터 교부들과 함께 믿어왔던 교리를 교황이 교회의 권위로서 공적으로 확인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2. 성모님의 승천은 그 믿음의 결과이다

성모 승천은 성모님께서 무덤의 부패를 겪지 않으시고 영혼과 육신이 함께 승천하셨음을 고백하는 교리이다. 그러면 교회는 왜 이 교리를 주저 없이 받아들였던가? 한마디로 성모님의 승천은, 세상 종말 곧 세상이 완성될 때에 모든 신앙인이 누리게 될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들어가신 그 영원한 세계를 성모님께서 가장 먼저 누리게 되셨다는 것을 믿는 것이다. 세상 종말의 본질은 흔히 생각하듯이 비극적인 파멸이나 재난이 아니라, 그 재난을 겪어낸 정화된 이들이 누릴 세상의 완성이 그 핵심이다.

오늘 복음에서 엘리사벳은 마리아를 향해 “주님께서 약속하신 말씀이 꼭 이루어지리라 믿으셨으니 정녕 복되십니다.”(루가 1,45) 하고 말한다. 마리아는 “이 몸은 주님의 종입니다. 지금 말씀대로 제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루가 1,38) 하시며, 인간적으로는 도저히 이해되지 않는 상황인데도 주님께 당신의 운명을 송두리째 맡기시고 전적인 신뢰를 드렸던 것이다. 마리아의 하느님께 대한 그 믿음은 변함이 없으셨다.

아들 예수님의 행동이 이해할 수 없었을 때에도, 아들이 수많은 사람들의 반대를 받는 표적이 되고, 급기야 십자가의 형틀에 매달려 비참하게 죽게 되었을 때에도 마리아는 이해할 수 없는 주님의 계획에 자신을 온전히 내맡기신 채 묵묵히 따르신 것이다. 참으로 마리아는 믿는 이들의 모범이셨다.

3. 마리아는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에 가장 깊이 동참하신 분이시다

얼마 전에 ‘그리스도의 수난(Passion of Christ)’이라는 영화가 화제가 되었다. 예수님의 수난을 너무나 사실적으로 묘사하여 오랜 신앙생활을 한 신자들도 그 영화를 보고 예수님의 수난이 얼마나 혹독한 고통이었는지를 다시 깨달았다고 하였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숨을 거두신 다음에도 성모님의 고통은 끝없이 밀려왔음을 생생히 보여주었다.

흔히 우리는 “아들이 부모보다 먼저 죽으면, 부모는 그 아들을 자기 가슴에 묻는다.” 하고 말한다. 마리아야말로 십자가 아래서 사형수로서 가장 수치스럽고 비참한 십자가의 죽음을 당하는 아들을 바라보셔야만 했다. 유명한 ‘피에타 상’은 십자가에서 내린 아들의 시신을 품에 안으신 마리아의 모습이다.

성모님의 가슴은 갈가리 찢기듯 얼마나 아팠을 것인가? 생각해 보면 마리아는 예수님보다 더 혹독한 고통을 겪었을 수도 있다. 예수님의 고통은 십자가에서 숨을 거두심으로써 끝이 났다고 할 수 있지만 마리아의 고통은 그때부터 더욱 크게 밀려오고 있었다. 그뿐만 아니라, 박해받는 사도들과 함께 지내신 성모님은 그 뒤에도 줄곧 쫓기는 사도들과 함께하셔야만 했다. 이렇게 성모님의 생애는 참으로 고통으로 점철된 일생이었다. 그러므로 어느 누구도 성모님보다 주님의 수난에 더 깊이 동참한 사람은 없을 것이다.

이렇게 모든 믿는 이의 모범일 뿐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에 가장 깊이 동참하신 마리아께서 예수님의 구원 공로를 가장 먼저 입고, 그분의 부활의 영광을 가장 먼저 체험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라 해야 할 것이다. 그래서 마리아는 우리 신앙인이 가야 할 길을 앞서가신 분이며, 우리의 희망을 놀랍게 실현하신 분이라고 할 수 있다.

마리아는 우리 모두의 모범이며 선구자이시기에, 성모님의 승천은 단순히 마리아 개인의 영광이라기보다 마리아처럼 신앙의 길을 가고 있는 우리 모두의 기쁨이며 희망이라 할 수 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에 교회는 마리아에게 ‘교회의 어머니’라는 칭호를 부여했다. 그렇다. 마리아는 하느님 백성(곧 교회)의 어머니이시다.

마리아는 하느님의 백성이 가야 할 길을 당신 친히 먼저 가시고 또 우리도 그 길을 갈 수 있도록 전구해 주시고 돌보아주신다. 그러므로 우리도 날마다 그분의 믿음의 길을 묵묵히 따라가면 마리아께서 승천하셔서 누리고 있는 그 영광에 반드시 함께 참여하게 될 것이다.

----------------------------------------------------------------

유영봉 몬시뇰
449 3.6%
친애하는 교형자매 여러분, 8월 15일 오늘은 성모 승천 대축일이며 우리 민족이 일제의 치하에서 해방된 광복절이기도 합니다.

오롯이 하느님의 말씀을 명심하고, 하느님의 구원사업에 적극 협력하신 구세주의 어머니 성모 마리아의 승천축일을 기뻐하면서 또한 분단의 아픔을 겪고 있는 이 땅에 하느님의 은총과 평화가 임하시고 하루 속히 조국의 통일이 이루어지기를 성모님께 간구해야 하겠습니다.

우리 신앙인은 성모 마리아께서 원죄 없이 잉태되어 나시고, 평생 동정이시며, 구세주의 어머니로서 이 지상생활을 마치신 후 영혼과 육신을 간직한 채 하늘로 들어올림을 받으셨다는 사실을 믿고 있습니다.

우리는 마리아가 단순히 예수님을 낳으셨기 때문에 위의 사실을 믿는 것이 아닙니다. 성모님께서 참으로 하느님의 말씀을 믿고, 성령의 인도하심에 따라 자신을 하느님의 도구로 하여 구원사업에 적극 협력하셨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말씀에 대한 계산되지 않은 마리아의 <믿음>과 하느님께서 주도권을 가지시고 성모님께 이루어주시는 모든 행위에 대한 완전한 <의탁>, 이것이 우리가 갖추어야 할 신앙의 덕목이며, 마리아를 우리의 어머니이게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성령을 가득히 받은 엘리사벳은 “모든 여자들 가운데 가장 복되시며 태중의 아드님 또한 복되십니다. 주님의 어머니께서 나를 찾아주시다니… 주님께서 약속하신 말씀이 꼭 이루어지리라 믿으셨으니 정녕 복되십니다.” 라고 노래하고 있습니다.

마리아를 <주님의 어머니>로 고백하고 있으며, 믿기 어려운 일을 <믿을 줄> 알았기 때문에 가장 행복한 분으로 칭송하고 있습니다. 이 말을 들은 마리아는 “이제부터는 온 백성이 나를 복되다 하리니 전능하신 분께서 나에게 큰일을 해주신 덕분입니다. …” 라고 노래하며 자신을 들어높이기 보다는 오히려 당신 사랑의 도구로 뽑아주신 주님을 찬양하고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성모님을 통해 ‘전능하신 팔’을 펼칠 수 있도록 성모님 자신을 온전히 하느님께 내 맡기심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바로 마리아의 이 <믿음과 의탁>이 주님의 어머니이게 하며, 이 세상에서 가장 복된 분이게 합니다.

사과 속에 든 씨앗을 볼 수 있는 것은 누구에게나 쉬울 수 있지만 씨앗 속에 든 사과를 바라 볼 줄 아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성모님께서는 주님의 말씀이 이루시는 결실을 볼 줄 아는 믿음을 지니셨고, 그 믿음에 따라 주님의 역사하심에 자신을 완전히 의탁하셨습니다.

바로 성모님의 이 믿음과 의탁을 오늘 성모 승천 대축일을 지내고 있는 우리 신앙인들이 본받아야 할 가장 큰 가치이지 않겠습니까?

곽준석 요셉 신부
  | 08.13
449 3.6%
영광의 어머니……!

“공산 폴란드 치하에서 순교한 37살 사제가 순교 26년 만에 복자품에 올랐다. 지난 6월 1일로 정확히 만 100살이 된 노모는 시복식에 앞서 주송자로서 신자들의 묵주기도를 인도한 후 아들이 시복되는 현장을 지켜봤다. 시복식에는 14만 명이 넘게 참석했다. 6일 폴란드 수도 바르샤바 필수드스키 광장에서 거행된 예르지 포피엘루슈크 신부의 시복식이 그랬다.” 지난 6월의 평화신문의 기사입니다. 저는 이 보도를 보면서 그 어머니를 생각했습니다. “죽은 자식은 부모의 가슴에 묻는다.”는 말이 있듯이, 그 어머니 역시 긴 시간 동안 잃었던 아들 때문에 고통의 시간을 보냈을 것입니다. 이제 그 어머니는 신앙 안에서 큰 영광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순교자의 어머니, 성인의 어머니, 영광의 어머니로 불리게 될 것이며, 많은 이의 존경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오늘 우리는 또 한 분의 어머니를 경축하고 있습니다. 이 분 역시 당신의 아드님 때문에 많은 고난을 겪었습니다. 그리고 이제 하늘에 오르심으로 그 고난에 대한 보상을 받으셨습니다. 영광의 어머니로 칭송을 받게 되셨습니다. 그분은 성모 마리아이십니다.

하지만 성모님을 우리가 칭송하는 것은 단지 아드님이 예수님이셨기 때문만은 아닙니다. 성모님의 삶이 보통 사람들과는 다르게 예수님을 어느 누구보다도 사랑하셨고, 따르셨고, 닮으셨고 또 하나가 되시기 위해 평생을 다 바치셨기 때문입니다. 일생을 사시면서 한 인간으로서 누구도 이룩할 수 없는 것을 이룩하셨고, 누구도 도달할 수 없는 곳에 도달하셨고, 누구도 올라갈 수 없는 곳에 올라가셨고, 누구도 실천할 수 없는 것을 실천하신, 예수님의 가장 가까웠던 이웃이요, 최초의 그리스도교 신자요, 사도였습니다. 그러기에 성모님은 예수님의 삶을 누구보다 깊이 이해하셨고 사랑하셨으며 배우셨던 분이셨습니다. 그래서 성모님의 일생은 예수님을 떠나서 존재할 수도, 있을 수도 없습니다. 그분은 오로지 이 세상에 예수님 밖에 없으며 모든 것은 예수님과의 관련 안에서 보고 받아들여 평가하고 수행하신 분입니다. 즉 성모님은 모든 일을 오직 예수님을 위해, 예수님 안에서, 예수님과 함께 수행했습니다. 어머니의 존재가 자기 자신을 위해서 있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식을 위해서 있는 것처럼 모든 관심과 사랑이 온통 예수님에게 쏠려있는 것입니다. 일생 동안 마리아는 예수님에게 눈을 뗀 적이 없습니다. 그분의 시선은 오로지 예수님에게 그 초점이 맞추어져 있었습니다. 그래서 마리아도 예수님과 같은 인생을 사셨고 함께 고난의 길을 걸으셨고 아들이 십자가에 못 박힐 때 같이 못 박히셨으며 아들이 숨을 거둘 때 같은 마음으로 숨을 거두셨습니다. 이렇게 성모님의 일생은 예수님의 삶처럼 파란만장하고 고난과 가시밭길의 연속이었습니다. 보통 엄마들이 생각하고 추구하는 안락하고 행복한 길과는 너무나도 대조적인 인생을 사시면서 아들이 억울한 죄인의 누명을 쓰고 죽음을 당한 사형수의 어머니, 한 죄인의 어머니였다는 사실입니다. 이 사실을 사실로서 받아들이기엔 한 어머니로서의 고통과 슬픔은 감당할 수 없을 만큼 너무나도 컸을 것입니다. 그분의 생애는 하느님의 뜻을 따르기 위해 이렇게 비극적이었고 처참했습니다. 인간적인 행복과 기쁨을 누리기는커녕 하느님 때문에 하느님을 위해 아들과 모든 것을 잃으신 분입니다. 하지만 이제 그분은 하늘로 오르심으로 그 모든 고난에 대한 보상을 받으셨습니다. 그리고 우리 모두의 어머니로서 우리를 보살피십니다.

우리의 삶이 비록 고난의 삶이라고는 하나, 예수님 안에서 예수님과 일치된 삶을 이루게 된다면 우리 역시 그 어머니와 같은 하늘로 오를 수 있는 보상을 받으리라는 희망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이 희망 안에서 우리를 돌보아 주시는 성모님을 축하드립시다.

김국진 가우덴시오 신부
  | 08.14
449 3.6%
다시, 사람만이 희망이다.

박노해 시인은 “사람만이 희망이다.”라고 노래합니다. 하지만 사람이 절망이라는 것은 역사뿐 아니라 성경 전체를 통해서도 끊임없이 전해주고 있습니다. 원죄에서부터 예수님에 이르기까지 몇몇 예언자를 제외하고 절망이 아닌 사람이 누가 있었습니까? 그 이후 오늘에 이르기까지 절망이 아닌 사람이 또 얼마나 있었습니까? 정의와 진리를 외치지만 자신의 이익과 안위를 위하여서만 살아가는 사람들이 아닙니까? 대의를 외치지만 따지고 보면 자신들의 안락과 욕망만을 위해서만 살아가지 않습니까? 세상이 그러하기에 복음의 말씀도, 교회의 가르침도 뒷전으로 흘려버리는 우리가 아닙니까?

오늘은 광복절입니다. 우리나라가 일제의 압박으로부터 해방된 날입니다. 절망에 갇혀 있던 이 나라의 모든 이들이 새로운 희망으로 날아오른 날입니다. 이 나라를 온갖 잡설로 일본에 팔아먹은 이들에게는 청천하늘에 날벼락 같은 날입니다. 일본에 빌붙어서 그렇게 하지 않으면 살아갈 수 없기에 그렇게 하루하루를 자신들을 억누르며 살아가던 모든 이들에게 희망이 된 날입니다. 하지만 오늘에 이르기까지 청산하지 못한 과거를 안고 신음하는 날이기도 합니다. 그것을 어쩔 수 없는 선택이라고 자위하는 날이기도 합니다.

교회는 오늘을 ‘성모 승천 대축일’로 지내고 있습니다. 성모 승천을 교회는 “거룩한 동정녀가 당신 아들의 부활에 참여한 것이며, 다른 그리스도인들의 부활을 앞당겨 실현한 것”(가톨릭교회 교리서,966항)이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주님의 탄생 예고에 믿음으로 동의하시고, 십자가 밑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믿음으로 구세주의 활동에 협력하셨던 마리아께서는 하늘에 올림을 받으신 후에도 인간을 위한 구원의 은혜를 얻어주시고자 전구하시는 분이십니다. 성모님의 승천은 마니피캇에서 보듯이 이 세상의 비천한 이들과 굶주린 이들의 희망입니다. 나아가 모든 피조물의 희망이기도 합니다.

절망인 이 세상을 하느님께서는 그냥 두시지 않으셨습니다. 수많은 예언자를 보내주셨으며, 당신의 외아들까지 보내주셨습니다. 충실한 협력자이신 마리아를 통하여 절망인 세상에 희망을 주셨습니다. 우리는 더 이상 절망인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지금까지 우리가 살아왔던 절망의 삶을 벗어던져야 합니다. 희망의 삶은 과거를 청산하는 삶입니다. 희망의 삶은 세상이 그러하더라도 예수님의 가르침을 따르는 삶입니다. 희망의 삶은 마리아처럼 꿋꿋이 주님의 수난의 길을 따르는 삶입니다. 그것을 통하여 우리는 성모님의 승천에 함께할 수 있을 것입니다. 다시 “사람만이 희망이다.”라는 말을 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마산교구 박창균 시메온 신부
  | 08.14
449 3.6%
[마산] 다이어트 (Diet)

몇 해 전 성모 승천 대축일에 어린이 미사를 할 때였습니다.
“성모님께서 하늘로 올라가셨는데,
여러분은 성모님처럼 하늘로 올라갈 수 있나요?”
“네!”
“왜 하늘나라로 올라갈 수 있죠?”
“가볍잖아요.”
“그럼 신부님은 하늘나라에 올라갈 수 있을까요?”
“아니요!”
“왜요?”
“엄청 무거우니까요.”
이 어린이의 현명한 답에 저는 꿀밤으로 답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높이 올라가는 방법을 가벼워지는 것으로 생각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많이 가지는 것, 쌓아서 높아지는 것, 강해지는 것을 올라간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아이들은 가벼운 것이 올라갈 수 있다는 사실을 분명 알고 있었습니다.

예수의 십자가 여정에 어머니는 함께 하십니다. 고통스런 채찍질과 사람들의 모욕과 침 뱉음을 지켜보십니다. 가브리엘 천사가 말했던 큰 인물이, 지극히 높으신 분의 아드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셨습니다. 처참한 추락이자 비참한 죽음입니다. 어머니는 그 십자가의 들어 올림 아래서 추락과 승천의 의미를 돌아봅니다. 모든 것을 잃어버린 아들의 낮아짐과 가벼워짐이 얼마나 거룩하고 높아지는 일인지를 바라보십니다.

십자가 아래에서 어머니는 비천한 이들과 굶주린 이들에게 베풀어주시는 하느님의 은총을 기억합니다. 자신의 뜻이 아니라 당신의 뜻을 따르는 이들을 들어 높이시는 은총을 기억합니다. 가브리엘 천사와 함께 자신을 주님의 종이니 주님의 뜻대로 하시길 원한다고 답했던 날을 기억합니다. 하느님을 따르는 것은 모든 것을 잃어 한없이 가벼워져야 한다는 것을 기억합니다.

하느님은 가벼움 안에 모든 것을 온전히 채워주십니다. 이 세상 사람들이 하는 채움과는 전혀 다른 방식입니다. 조금씩 채워 완전해지는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을 비워낸 자리에 완전히 채워주십니다. 다 비워내지 못한 사람들은 죽음을 통해 온전히 비워집니다. 그 가벼움으로 하늘나라의 문을 두드립니다. 하지만 구원 사업을 위해 모든 것을 내어놓은 어머니께서는 얼마나 가벼우셨겠습니까? 하느님께서는 이 어머니를 거룩함으로 가득 채워 주십니다. 그 가벼우신 분을 하늘로 불러올리시어 완전히 채워주십니다.

우리가 승천하지 못하는 이유는 가볍지 않아서가 아닐까요? 저도 그만큼 가볍지는 않습니다. 그래서 다이어트 중입니다. 함께 하시겠습니까?

▮ 마산교구 김인식 대철 베드로 신부 - 2016년 8월 15일
  | 08.13
449 3.6%
[마산] “당신 종의 비천함을
굽어보셨기 때문입니다”(루카 1,39-56)

오늘은 성모 승천 대축일입니다. 우리나라에서는 광복절이기도 한 이 날, 성모님께서는 장차 우리도 하늘에서 받게 될 구원의 영광을 미리 보여주시며 위로와 희망의 표지가 되셨습니다.

성모님의 승천은 단지 성모님 자신만의 영광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참된 신앙의 모범으로서 교회의 어머니이신 성모님께서 ‘우리보다 앞서’ 예수님의 부활에 참여하여 그 영광을 받은 것을 의미합니다.

교회는 이에 대해 성모님 자신의 권능과 권한 때문이 아니라 “거룩한 동정녀의 승천은 당신 아들의 부활에 특별히 참여한 것이며, 다른 그리스도인들의 부활을 앞당겨 실현한 것이라고 가르칩니다.”(가톨릭 교리서 966항)

또한 성모님의 승천은 성모님께서 하늘에서도 우리를 위해 전구해 주신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실제로 하늘에 올림을 받으신 성모님께서는 이 구원 임무를 그치지 않고 계속하시어 당신의 수많은 전구로 우리에게 영원한 구원의 은혜를 얻어 주신다.”(교회헌장 62항)라고 합니다.

그런데 성모님의 올려지심, 즉 그분의 영광됨은 비천한 여종이 갖는 겸손함에서 비롯된 것이었습니다. 오늘 복음에 나오는 ‘마리아의 노래’에서 “당신 종의 비천함을 굽어보셨기 때문”이라고 하셨습니다. 이처럼 성모님의 하느님 안에서의 낮아짐은 높아짐이 되셨습니다.

이렇게 성모님은 하느님 앞에서 자신은 작고 보잘것없음을 고백하고, 하느님께서 당신에게 베푸신 은총과 권능의 위대함을 찬양하였습니다. 성모님은 모든 신앙인의 모범이시고 그분의 겸손은 우리가 본받아야 할 덕입니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루카 1,38)

▥ 마산교구 장병욱 신부 - 2017년 8월 15일
  | 08.14
449 3.6%
[마산] 빛 속에 숨다

한 유명 화백이 그린 바퀴벌레 그림을 본 적이 있습니다. 바퀴벌레는 많은 사람들이 싫어하는 정도를 넘어서 혐오의 대상이기도 하죠. 이 그림에서는 바퀴벌레가 뒤집어진 상태로 죽어있습니다. 뒤집어져 있는 모양처럼 나의 생각의 전환을 가져오게 한 것은 바로 이 작품의 제목이었습니다. 제목은 “빛 속에 숨다” 입니다. 혐오대상의 별 의미 없는 죽음이 아니라 어둠과 구석에서 벗어나 이제는 빛 속에 머물면서 빛과 하나 된, 미물이지만 비천한 미물로만 편협하게 보지 말고 아름다움을 발견하라는 화백의 초대였습니다.

아름다움을 살펴 찾는 안목을 일컬어서 심미안이라고 합니다. 궁극의 심미안은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모든 것에서 하느님을 발견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오늘의 복음에서는 심미안을 지닌 두 여인의 만남이 있습니다. 세례자 요한의 어머니이신 엘리사벳과 예수 그리스도의 어머니이신 마리아이십니다. 마리아께서는 교만한 자들을 흩으셨고 비천한 이들을 들어 높이시는 하느님을 찬양하십니다.

바로 그 하느님께서 복되신 동정 마리아를 하늘로 불러올리심을 기리는 대축일을 맞이하고 있습니다. 하늘로 올림을 받으셨다는 것은 단순히 저 위쪽으로 공간의 이동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저 아래 비천한 상태에 있다고 하더라도 하느님께서는 우리와 함께하심을 믿고 우리가 하느님의 현존 안에 머문다면 하늘나라로 향하는 승천의 영광 속에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성모님처럼 저도 승천을 희망해봅니다. 그러려면 먼저 저의 삶의 방향이 뒤집어져야할 것입니다. 빛 속에 숨기를 빕니다.

▦ 마산교구 박인수 요한 신부 : 2018년 8월 15일
  | 08.13
파란색 글자 빨간색 글자 녹색 글자 밑줄 글자 진한 글자 빨간색 테이블 파란색 테이블 녹색 테이블
이름 :   
암호 :
· d41d8cd98f * 왼쪽의 글자중 빨간글자만 순서대로 입력하세요.
 목록보기 스크랩하기  프린터하기
!   [수도회] 마치 소풍이라도 가듯이  [6]
!   [인천] 목숨 보다 소중한 하느님의 사랑  [12]
!   [수원] 자랑스러운 이름  [11]
!   [서울] 우리 시대의 순교  [20]
!   [군종] 순교자 가문  [5]
!   [춘천] 위대한 신앙  [10]
!   [의정부] 장하다. 순교자  [7]
!   [원주] 순교적인 삶  [4]
!   [청주] 선조들 처럼  [2]
!   [대전] 흔연히 웃고 낙락하니라.  [5]
!   [광주] 주님의 십자가  [3]
!   [전주] 일생의 순교자들  [8]
!   [부산] 순교자 대축일  [11]
!   [마산] 우리의 신앙생활, 취미생활이 아닌가?  [10]
!   [안동] 한국 순교 성인의 특성  [11]
!   [대구] 순교란?  [12]
498   (홍) 한국 순교자 이동 대축일 독서와 복음 (9월 20일)  [6] 2579
497   [전주] 세월은 유수와 같다.  218
496   [광주] 십자가의 진정한 의미  2601
495   [원주] 내 영혼이 하느님 속에서  128
1 [2][3][4][5][6][7][8][9][10]..[26]  다음
 

 

대축일/명절강론 코너 ( 대축일/명절 미사에 관련된 강론자료입니다... )

 관리자 Profile  l  홈페이지이용안내  l  즐겨찾기추가  l  추천사이트  l  가톨릭검색사이트  l  관리자 E-mail

Copyright ⓒ 2003 - 2005 www.ocatholic.com All rights reserved.   Ver 4.01_0502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