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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축일/명절강론 코너 ( 대축일/명절 미사에 관련된 강론자료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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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 길
조회수 | 2,723
작성일 | 08.08.13
길이란 우리를 한 지점에서 다른 지점으로 안내하는 사명을 맡고 있다. 그런데 어떤 길을 가느냐에 따라 그 받은 느낌은 무척이나 다르다.

고속도로는 인위적으로 만든 길이다. 산을 가르고 굴을 뚫어 지면을 가르며 만든 길이다. 또 그 길을 달리다보면, 모두가 누가 더 빨리 가는가를 경쟁하는 것처럼 보인다. 혹시 사고라도 나서 막히기라도 한다면, 한정없이 기다려야 하는 짜증나는 길이다. 그러면서도 꼭 통행료를 내어야만 갈 수 있는 길이다.

반면 시골길은 먼지는 좀 나지만 흙냄새를 느낄 수 있는 길이다. 빨리 경쟁하며 가는 길이 아니라, 나무와 숲과 꽃과 물을 느끼며 천천히 걸어가는 길이다. 오르막과 내리막이 있지만 그 나름대로의 의미를 찾아볼 수 있는 길이다. 나아가 고향의 잘 아는 시골길이라면 사랑스럽고 친숙한 느낌을 주어 마치 나에게 무언가 말을 거는 것 같은 착각에 빠지기도 하는 길이다.

도시의 벌판과 모래먼지 사이를 지치도록 헤매다가 문득 짐을 싸서 떠나고 싶을 때가 있다. 숲과 나무와 흙이 있고, 지치면 조금은 쉴 수 있는 그늘이 있고, 잠깐 두 발을 담글 수 있는 개울이 있는 시골길을 걷고 싶다. 오늘 복음의 성모님께서 걸으신 유다산골의 시골길을 걸어가고 싶다.

사람을 ‘길을 가는 존재’라고도 표현한다. 그래서 어떤 일의 처음 시작을 첫걸음, 첫발을 내딛는다고도 하고, 출세길이 열렸다 하며, 인생길의 마지막을 저승길이라고도 한다. 성모님께서 가신 인생길은 쉬운 길이 아니었다. 첫걸음, 첫시작부터 무척이나 어려운 길이었다. 보통 사람의 관점에서 본다면 결코 행복할 수 없는, 오히려 불행한 여인의 삶을 사셨다. 그러나 그분은 그 어려운 길을 가시면서도 한번도 불평하시지 않았다. 마치 흐르는 물은 멈춤이 없고, 어떠한 장애가 있어도 다 이겨내고 결국에는 바다로 흘러가는 것처럼 그분은 당신의 길을 멈추지 않고, 묵묵히 겸손되이 걸어가셨다. 그리하여 마침내는 모든 장애를 극복하고, 하느님께로 올라가셨다. 성모님께서는 불행의 길을 가시면서도 그 불행을 모두 다 행복의 길로 바꾸어 놓으셨다.

불이 지나간 자리에는 재가 남고, 물이 지나간 자리에는 새로운 생명이 움트는 것처럼, 성모님 자신의 길을 새로운 생명의 길로 변화시켜 주셨다. 그래서 그분이 가신 길을 따라서 걷다보면, 마음이 평화로워지고, 깨끗하게 되며, 아름답게 변화된다. 때묻은 영혼의 껍질을 한 꺼풀씩 벗게 되어 적어도 정신적으로는 풍요로워지고 넉넉한 사랑으로 살 수 있게 된다.

세상이 갈수록 어렵고 힘들수록 더욱 더 성모님께서 가신 길을 따라 걷도록 하자. 성모님께서는 올라가는 길을 가셨지만 사실은 우리에게 내려오는 길을 가신 것이며 오늘 우리를 아버지를 향한 그리움으로, 길을 떠나도록 초대하신다.

길이 끝나는 곳에서도
길이 있다
길이 끝나는 곳에서도
길이 되는 사람이 있다
스스로 봄길이 되어
끝없이 걸어가는 사람이 있다
강물은 흐르다가 멈추고
새들은 날아가 돌아오지 않고
하늘과 땅 사이의 모든 꽃잎이 흩어져도
보라
사랑이 끝난 곳에서도
사랑으로 남아 있는 사람이 있다
스스로 사랑이 되어
한없이 봄길을
걸어가는 사람이 있다

정호승, 봄길

대구대교구 김준우(마리오)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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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하십니다.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리라고 믿으신 분!

최근 개신교가 벌이는 자정운동에 관한 기사들이 종종 언론에 등장한다. 개신교를 변질시킨 요인 중 하나가 목회자들이 성직을 직업으로 생각하는 의식이라고 지적하는 것이 눈에 띈다. 오갈 데 없는 목회자들이 ‘개척교회’를 세워 하루 빨리 성장하고픈 세속적 욕심에 복음선포가 아니라 ‘예수무당’을 전한다고 개탄하기도 한다.

그와 같은 기사를 접할 때마다 우리 가톨릭교회의 모습은 어떠할까를 생각하게 된다. 70-80년대 가톨릭교회에 대한 세상 사람들의 평가는 참으로 신뢰적이었고, 엄청나게(?) 많은 이들이 입교하였다. 하지만 현재의 가톨릭교회의 현주소는 “예비자 감소와 냉담자 증가!”인 것 같아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우리 교구는 여러 해 동안 교구설정 100주년을 준비해오고 있다. 하느님의 오묘하신 섭리에 감사를 드림과 동시에 ‘새 시대 새 복음화’의 터전을 마련하기 위해 교구민들의 역량을 결집하자고 외치면서, 슬로건도 “다시 새롭게 2011”로 정하였다. 올바른 신앙을 회복하기 위해 여러 영성운동 실천과 더불어 이미 우리는 “은총의 100주년, 1·3운동”도 시작하였다. ‘하느님과의 올바른 관계’, ‘이웃과의 올바른 관계’, ‘자신과의 올바른 관계’를 회복하기 위해서이다.

그간 100주년 준비에 골몰하다 보니까 성모승천대축일에 관한 묵상도 100주년이란 생각의 틀을 벗어나질 못하겠다. 하긴 100주년 준비에 성실히 참여하는 신앙인은 ‘성모승천대축일’ 의미도 잘 깨달을 것이다. ‘성모승천’을 성대하게 기념하는 것은 성모님께서 주님의 은총에 힘입어 구원의 완성에 앞서 들어가셨음이 우리 신앙인들의 구원 희망의 표징이기 때문이다.

“사람의 아들을 누구라고들 하느냐?”(마태 16,13)는 예수님의 물음에 세상 사람들이 다양하게들 대답하였지만, 올바른 신앙고백은 “스승님은 살아계신 하느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십니다.”(마태 16,16)라는 그 하나이었듯이, 교우들에게 왜 신앙생활을 하느냐고 물으면 다양하게들 대답하겠지만, 신앙생활의 올바른 목적도 ‘주님과의 온전한 일치’(구원) 그 하나밖에 없다. 이를 위해서 우리는 성모님이 모범을 보이신 ‘신앙의 복종’부터 실천해야 한다. “보십시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루카 1,38).

“행복하십니다.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리라고 믿으신 분!”(루카 1, 45) 우리도 이 인사말씀을 듣는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매일 성경을 읽고 마음에 간직하고픈 성경 말씀 단 한 구절이라도 필사를 한다면, 우리의 구원은 ‘주님과의 일치’임을 깨달을 것이다. ‘은총의 100주년, 1·3운동’을 실천하는 목적도 여기에 있다. 오늘 성모승천대축일을 경축하며 우리의 참 행복은 주님과의 일치라는 구원에 있음을 새삼 깨달으면 좋겠다.

하성호 사도요한 신부
  | 08.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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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이 광복절이기도 하다 보니 해방이란 단어가 먼저 떠오른다. 우리 민족이 일제의 속박으로부터 해방되었고 그리고 그 이후 ‘가난’으로부터도 해방되었지만 많은 사람들에게 삶은 여전히 힘겹다. 그러다보니 세상은 아직도 영웅을 기다리고 메시아를 기대한다. 우리의 불안을, 우리의 욕망을 해결해줄 초능력자 메시아를. 그러나 그런 기대는 실망을 더 크게 안겨주지 않던가?

우리는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메시아로 믿는 사람들이다. 예수님만이 진정한, 유일한 메시아라고 믿는다. 내세만이 아니라 현세에서도 그분만이 메시아시다. “주님의 영이 내 위에 내리셨다. 주님께서 나를 보내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잡혀간 이들에게 해방을 선포하며 … 주님의 은혜로운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루카 4,18-19).

메시아이신 예수님이 가져다주시는 그 해방과 자유를 우리는 누리며 살아야한다. 그런데 그분께서 우리가 고통과 불행, 고뇌를 겪을 때마다 해결해 주셔서 해방과 자유를 누리게 해주시던가? 그렇지 않을 것이다. 아무리 예수님을 열심히 믿고 따라도 뜻밖의 불행을 만나고, 암담한 처지에 놓이기도 한다.

그렇다면 그분의 해방과 자 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하느님 나라의 기쁜 소식이 가져다주는 해방과 자유이다.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로 열린 영원한 생명의 나라 자체가 우리에겐 해방과 자유이다. 지금 여기가 전부가 아니니 여기에 전적으로 매이지 않아도 되는 것이다. 여기가 전부고 여기가 끝이라면 어쩔 수없이 여기에 모든 것을 걸어야 하겠지만, 여기가 전부가 아닐뿐더러 잠시 머물다 가는 곳이니 이 세상에 대해서, 이 세상의 것들에 대해서 해방과 자유를 누리는 것이다. 덧없는 이 세상의 것들이 좀 있어도 그만, 좀 없어도 그만인 것이다.

아마도 우린 둘 다를 얻고 싶어 한다. 이 세상에서 필요한 것들도 넉넉히 누리고 싶고 이 세상이 주지 못하는 영원한 세계의 보화도 얻고 싶다. 그게 가능할까? 그것이 가능하다 하더라도 우리의 초점을 영원한 세계에 두고 살아야 한다. “너희는 하느님과 재물을 함께 섬길 수 없다”(마태 6,24). 뿐만 아니라 만일 내가 남들보다 좀 더 가지고 있다면 나는 없는 이들과 나누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나중에 하느님께서 나를 내치실지 모른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불행하여라, 너희 부유한 사람들! 너희는 이미 위로를 받았다. 불행하여라, 너희 지금 배부른 사람들! 너희는 굶주리게 될 것이다”(루카 6 ,24-25). 왜냐하면 하느님께서는 한쪽에서는 헐벗고 굶주리는데 한쪽에서는 누리고도 남는 그런 세상을 싫어하시고 그 책임을 더 가진 자들에게 물으시겠다고 하시기 때문이다.

성모님께서는 그런 하느님의 뜻을 깊이 깨닫고 사셨다. 오늘 복음이 그것을 말해주고 있다. 성모님께서는 이렇게 노래하신다. “그분께서는 당신 팔로 권능을 떨치시어 마음속 생각이 교만한자들을 흩으셨습니다. 통치자들을 왕좌에서 끌어내리시고 비천한 이들을 들어 높이셨으며 굶주린 이들을 좋은 것으로 배불리시고 부유한 자들을 빈손으로 내치셨습니다.”(루카 1,51-53).

더 가지려고 하기에 앞서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세상이 되기를 더 바라야 할 것이다. 성모님께서는 영원한 세상에 초점을 맞추고 하느님의 뜻이 어디에 있는지를 확실히 분간하며 사셨고 세상적인 것에서 해방과 자유를 누리셨다. 그 성모님을 하느님께서는 높이 높이 올리셨다.

대구대교구 박석재 가롤로 신부
  | 08.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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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 성모님의 기준

교회의 어머니이신 성모님의 천상탄일을 경축하는 날이다. 성모님의 영광이 자동으로 우리에게 승계되는 것은 아니니 성모님에게서 우리 구원을 위해서도 필요한 교훈을 얻는 날이 되어야 하겠다. 성모님이 보여 주신 것은 ‘기본’이다. “이 몸은 주님의 종이오니 당신의 뜻대로 이루어지소서.” 내 뜻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추구하는 것, 이것이 신앙의 기본이다. ‘주님의 기도’는 결국 아버지의 뜻을 먼저 찾으라는 것이다. ‘기본’은 집의 기초나 골격과 같아 없거나 부실하면 전체가 허물어지는 가장 중요한 것, 가장 우선적인 것이다.

그런데 하느님의 뜻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 하느님의 뜻을 우선적으로 따르고 싶지만 무엇이 하느님의 뜻인지 알아야 용기라도 낼게 아닌가? 그렇다. 그런데 성모님은 성경공부를 열심히 하셨는지 하느님의 뜻을 아는데 필요한 몇 가지 중요한 ‘기준’을 확실히 알고 계셨다. 성모님의 노래 마니피캇이 그것을 말해준다. 하느님은 “비천한 이들을 들어 높이시는” 분, “굶주린 이들을 좋은 것으로 배불리시는” 분이시다. 반면에 “마음속n생각이 교만한 자들을 흩으시는” 분, “통치자들을 왕좌에서 끌어내리시는” 분, “부유한 자들을 빈손으로 내치시는” 그런 분이시다. 이것이 성모님이 아셨던 기준이며 우리도 하느님의 뜻을 찾을 때 ‘기준’으로 삼아야 하는 중요한 원칙이다.

올 해 초 베네딕토 16세 교황님께서 사임을 발표하셔서 우리를 놀라게 하셨는데, 이어서 선출된 새 교황님은 우리를 더욱 놀라게 하고 계시다. 프란치스코라는 교황명의 선택에서부터 첫 방문지를 비롯한 그 분의 행보, 여러 기회에서 말씀하시는 주제들이 하나같이 예사롭지가 않다. 새 교황님께서 일관되게 강조하시는 것이 가난과 섬김이다. 그리고 헛된 우상숭배를 경고하신다. 최근 브라질 세계청년대회에서도 교황께서는 ‘돈’과 ‘권력’, ‘세속적 성공’과 같은 우상숭배를 멀리하고 믿음 안에서 희망과 기쁨의 삶을 살아야한다고 가르치셨다. 하느님의 어머니이신 성모님이 특권을 누리고 즐기신 분이 아니듯 새 교황님도 성모님의 모범을 철저히 따르시는 분으로 보인다. 교황님의 모든 것이 마니피캇의 정신에서 우러나오는 것처럼 느껴진다.

예수님께서는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만이 아니라 이 땅에서도 이루어지도록 기도하라고 가르치셨다. 그것이 우리 힘만으로 되는 것은 분명 아니지만, 또한 기도만 한다고 되는 것도 아니다. 아버지의 뜻이 이 땅에서 이루어지소서라고 기도하면서 실제로는 아버지의 뜻에 거꾸로 가는 길을 한사코 고집하는 모습이 내 모습이고 우리 모습일수도 있는 것이다. 성모님의 기본과 기준으로 살려고 끊임없이 애쓰는 사람이 진정한 하느님의 자녀요, 성모님의 자녀가 아니겠는가? 성모님께 기도만 할 게 아니라 우리도 성모님을 닮고, 하느님께서 보내주신 이 시대의 예언자,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말씀을 귀담아 들어야 하겠다.

<대구대교구 박석재 가롤로 신부>
  | 08.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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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 성모님처럼, 착한 사마리아인처럼

“그리스도께서는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나셨습니다.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는 것과 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살아 날 것입니다. 그러나 각각 차례가 있습니다…(1 코린 15,20-23)” 오늘 축일의 2독서입니다. 성 모님의 승천을 제대로 기뻐하고 경축하기 위해서도 우리의 부활, 죽음을 넘어서는 영원한 생명에 대한 믿음과 희망이 필요합니다.

“성모님은 지상 생활의 여정을 마치시고 육신과 영혼이 하늘의 영광으로 올림을 받으셔서 죄와 죽음에 대한 승리자이신 당신 아드님과 더욱 완전히 동화되셨다.(교회헌장 59)” 예수님이야 하느님이시니 부활이 당연하다 쳐도 인간 가운데 이미 부활의 은총을 누리고 계신 분이 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겠습니까?

우리야 언젠가는 지상 생활의 여정을 마치게 되면 육신이 땅에 묻히고 흙으로 돌아가는 운명을 피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성모님께서 누리고 계신 그 영광을 우리도 언젠가 누리게 될 것이라는 믿음이 우리를 그리스도인으로 살게 합니다.

평화롭고 인간다운 삶이 더 증진되는 세상을 누구나 바라겠지만 우리가 체감하는 현실은 점점 암울해져 가고 있습니다. 젊은이는 젊은이대로, 노인은 노인대로 희망보다는 불안을 더 크게 느끼는 오늘입니다. 함께 문제를 풀어 가기 보다는 서로 대립하고 불신하며 골만 깊어져가고 이러다 돌이킬 수 없는 파국을 맞이하게 되는 건 아닌지 조마조마하고 걱정이 됩니다. 우리나라도 걱정스럽고 지구촌 전체를 봐도 그렇습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만 희망을 두고 사는 사람 이 아닌 것이 그나마 다행스럽지만, 세상의 방관자나 이방인처럼 살아서도 안 될 것입니다. 하느님의 자녀로 자처하는 우리가 하느님이 만드신 세상이 하느님의 뜻과 점점 멀어져가는 것을 속수무책으로 지켜보기만 해서는 안 될 일입니다. 올해는 자비의 특별 희년입니다. 공의회 폐막 50주년을 기념해서 희년이 선포되었습니다. 공의회의 정신은 한마디로 ‘세상 속으로’입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표현대로라면, 교회가 교회 안에서만 안주하면 안되며 깨지고 더렵혀지는 한이 있더라도 거리로 나가야 한다는 것 입니다. 한 사람이라도 더 교회 안으로 데려오기 위해서가 아니라 세상의 아픔과 신음에 함께하는 교회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교구 100주년을 지내면서 교구가 채택한 성서구절은 “가서 너희도 그렇게 하여라.(루카 10,37)”입니다. 강도를 만나 쓰러진 이를 보고 지나치는 사제나 레위인처럼 살아서는 안 되고 제 피붙이에게 하듯 다가가서 그 사람에게 필요한 것을 구체적인 행동으로 실천하는 사마리아인처럼 살겠다는 다짐입니다. 그 가르침을 잊어버리지 않기 위해 교구청 입구에 돌로 새 겨두었습니다.

하느님의 부르심에 믿음으로 응답하고 온갖 고난을 겪어내시고 십자가의 현장에 끝까지 함께 하시고 제자들과도 고락을 같이 하신 성모님. 육신과 영혼이 함께 들어 높여지셔서 우리의 희망이 되신 성모님. 우리도 용기를 내어 멀리 바라보며 희망을 가지고 오늘 주어진 내 몫을 다하도록 노력해야 하겠습니다.

▮ 대구대교구 박석재 가롤로 신부 - 2016년 8월 15일
  | 08.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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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 너무나 당연한 일

지난 6년간 한국 카리타스 업무를 하면서 전 세계 곳곳의 분쟁지역과 자연재해 지역을 다니면서 한국 천주교회의 사랑을 전했습니다. 그래서 제 방에는 세계 여러 나라, 여러 부족들의 전통적인 토산품이 좀 있습니다. 그런데 한 가지 재미있는 사실은 전통의상을 입은 미녀들의 모습과 성모님의 모습이 너무나 닮았다는 것입니다. 옷만 바뀌었을 뿐, 얼굴은 참 많이 닮았습니다. 그리고 성모님은 나라나 부족마다 참 아름다운 여인의 모습으로 표현하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한번은 미얀마에서 성모상을 조각하는 신자에게 이런 질문을 했더니 오히려 사제인 내가 이상하다는 듯, ‘너무나 당연한 것 아니냐’는 대답을 들었습니다. “세상의 어떤 작곡가나 화가나 조각가도, 그가 신자라면 당연히 일생에 한번쯤 성모님의 일생을 글이나 그림, 음악이나 작품으로 표현하고 싶지 않을까요?”

오늘은 우리나라가 일본의 강점에서 해방된 것을 기념하는 광복절이자, 교회의 어머니며 우리의 어머니이신 성모 마리아의 승천을 기념하는 대축일입니다.

‘사람들은 성모님의 무엇 때문에, 어떤 모습에 이끌려 너무나 당연히 가장 아름다운 모습으로 성모님을 표현하는 것일까?’

내가 기억하는 성모님은 인간적으로 볼 때 행복한 여인은 아니었습니다. 성령으로 말미암은 일이라지만 처녀의 몸으로 임신을 합니다. 받아야할 오해와 모욕은 또 어떠했는지… 마구간에서의해산하며, 십자가에서 피 흘려 죽어가는 아들을 지켜봐야만 했던 불행한 여인이었습니다. 이를 두고서 ‘당연히’라는 말은 쓸 수가 없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엘리사벳의 입을 빌어 당위성의 한 부분을 이야기합니다.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리라고 믿으신 분!”(루카 1,45) 말씀이 이루어지리라 믿는 것은 자기 삶의 희생이 반드시 동반되어야 함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성모님의 믿음에 동반된 순명과 순결과 희생의 봉헌이 구원자이신 주님을 세상에 초대하였고, 그분의 영원한 생명을 우리가 나누어 받게 된 것입니다. 더 나아가 주님을 믿는 우리가 장차 어떻게 될 것인지를 미리 보여주셨습니다.

그러기에 너무나 당연한 것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인으로 표현하는 것이!“티 없이 깨끗하신 동정녀께서는 지상 생활의 여정을 마치시고 육신과 영혼이 하늘의 영광으로 올림을 받으(교회헌장 59항)”셨음이!

▥ 대구대교구 이종건 시메온 신부 - 2017년 8월 15일
  | 08.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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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모님은 영혼만 아니라 그 육신도 부패 없이 하늘로 올라가셨습니다. 이것에 대해 의문을 가지는 사람도 많습니다. 사람이 죽으면 일단 땅 속에 묻히고 썩게 마련입니다. 그 다음 부활과 승천이 따릅니다. 그런데 어떻게 마리아의 육신은 썩지 않고 하늘로 올라갈 수 있는지? 도대체 인간적으로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인간적으로 생각해 봅니다. 사실 죽은 사람이 다시 살아난다는 것 자체가 이해가 되는 것입니까? 이것이 가능하다면 오로지 하느님께서 하시기 때문입니다. 죽은 이를 살려 낼 수 있는 분이시라면, 죽은 이의 육신을 썩지 않게 할 수 있음은 또한 당연하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내게도 그런 능력이 있다면 누구보다 우선 내 어머니에게만큼은 그렇게 하는 것이 지극히 인간적인 생각이 아니겠습니까?

마리아의 부활 · 승천은 예수님 부활 · 승천과는 분명 다릅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이시기에 스스로부활 · 승천하셨습니다. 그러나 인간 마리아의 부활 · 승천은 스스로가 아닌 그분에 의해 올림을 받았다는 사실이 중요합니다. 그래서 성모 승천을 몽소승천(蒙召昇天)이라고 했습니다. ‘몽(蒙)’은 능동형을 수동형으로 나타내는 한자로써 ‘부름’을 뜻하는 ‘소(召)’ 앞에 붙어 ‘불리어졌음’을 피력한 것입니다. 즉 ‘몽소승천(蒙召昇天)’은 마리아가 아닌 하느님의 권능과 은총을 품고 있는 말입니다.

성모 승천을 설명하면서 마리아는 ‘예수님의 어머니’라는 인간적인 면을 말했지만, 사실 이 육적인 이유만으로 마리아가 그런 영광을 받은 것은 아닙니다. 오늘 복음은 세상 모든 사람 가운데서 가장 복된 사람으로 마리아를 소개하는데, 그 아들은 살아있는 어미 앞에서 십자가에 못 박혀죽었습니다. 그렇다면 어찌 마리아를 두고 ‘세상에서 가장 복된 어미’라 할 수 있겠습니까? 세상에서 입신출세한 아들의 어미가 정말 행복한 어미란 말입니까? 인간적인 면에서 생각할 때는 과연 그렇습니다. 그러나 진짜로 복된 어미란, ‘하느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어미’임을 예수님은 자신의 어머니 면전에서 분명히 천명하셨습니다.(루카11,28 참조) 그리고 하느님 말씀을 듣고 그 말씀을 지켜낼 수 있었음은 ‘하느님께서 약속하신 말씀은 꼭 이루어진다는 믿음’이 마리아의 신앙이었고 과연 ‘성모 몽소승천(聖母蒙召昇天)’의 복은 하느님 말씀을 믿고 실행했던 마리아에게 주어진 하느님의 약속이었던 것입니다.

육신의 부패 없는 마리아의 부활 · 승천은 개신교가 생기기 훨씬 전, 4∼5세기부터 갑론을박되어 왔지만, 1950년에야 비로소 교황 비오 12세께서 믿을 교리로 선포하셨는데, 이는 성모 승천이 ‘어느 날 아침’에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정통신앙의 틀 안에서 오랫동안 숙고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하느님이시면서 사람이 되신 예수님의 부활 · 승천은 인간에게 있어 죽음은 마지막이아님에 대한 계시지만, 하느님이 아닌 성모님의 부활 · 승천은 모든 사람의 부활과 승천을 확인시켜주는 사건이며 그래서 마리아의 신앙은 하느님을 향한 전교회 신앙인 것입니다.

오늘 8월 15일, 일본 식민지 생활에서의 해방을 넘어 원죄 조차 없으셨던 성모님을 본받아 우리의 일상 죄에서의 해방을 기도해야 하겠습니다.

▦ 대구대교구 노광수 그레고리오 신부 : 2018년 8월 15일
  | 08.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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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축일/명절강론 코너 ( 대축일/명절 미사에 관련된 강론자료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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