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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 그리스도 신앙인은 하늘과 땅을 새롭게 이해합니다.
조회수 | 2,212
작성일 | 08.10.14
오늘 복음은 부활하신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당부하신 말씀입니다. 모든 민족을 가르쳐 당신의 제자가 되게 하고 세례를 베풀라는 말씀입니다. ‘나는 세상 끝날까지 항상 너희와 함께 있다’는 말씀도 하셨습니다. 초기 신앙인들은 부활하신 예수님이 당신을 따르는 사람들 안에 항상 살아 계신다고 믿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삶을 배워 실천하기 위해 노력하였습니다. 그 노력은 성령이 그들 안에 일으키는 일이라고 그들은 믿었습니다. 그래서 초기 교회는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었습니다. 요한복음서는 후에 이 세 분에 대해 예수님의 입을 빌려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아버지께서 보내실 협조자 성령께서 모든 것을 가르쳐 주시고 내가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해 주실 것입니다”(14,26). 예수님이 가르치신 바를 성령이 생각나게 또 실천하게 하여 아버지의 자녀 되어 살게 한다는 뜻입니다.

이런 믿음이 있어 그들은 예수님이 행하신 일을 실천하였습니다. 예수님이 하느님의 나라를 가르치는 데 혼신의 힘을 다하셨듯이, 그들도 사람들에게 하느님의 나라를 가르쳤습니다. 오늘 복음은 부활하신 예수님이 ‘나는 하늘과 땅의 모든 권한을 받았다’고 말씀하셨다고 말합니다. 옛날 사회는 권한으로 조직되었습니다. 황제가 모든 권한을 가졌고, 신하들이 그 권한을 부분적으로 위임받아 행사합니다. 권한을 가진 사람들이 그 권한을 행사하기에 그 사회는 혼란 없이 유지되고 실효성 있게 움직일 수 있었습니다. 옛날 사회를 유지하고 움직이는 것은 권한이었습니다. 오늘 복음이 말하는 ‘하늘과 땅의 모든 권한’은 하늘과 땅을 움직이는 최종적 원리를 가리킵니다.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하늘과 땅, 곧 하느님과 인간에 대한 기본 원리를 알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이 세상 모든 사람을 내 제자로 삼아’라는 말씀이 있었습니다. 세상 모든 사람이 예수님을 배워서 하느님을 알고 이웃을 사랑하는 사람이 되도록 하라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을 잘못 이해하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사람들을 모두 교회 안으로 끌어들이라는 명령으로 알아들을 수 있습니다. 4세기 그리스도 신앙이 로마제국의 국교가 되었을 때, 교회는 이 말씀을 그런 뜻으로 이해하였습니다. 5세기부터 야만인들이 대거 유럽대륙으로 이동하여 정착하는 혼란한 시기에, 그리스도 신앙인이 되는 것은 야만 상태를 벗어나 로마제국의 문화권으로 진입하는 것을 의미하였습니다. 로마제국의 국교인 그리스도 신앙을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강요하여 사람들을 그 문화권 안으로 편입시켜야 했습니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사람을 교회 안으로 끌어들여야 한다는 생각은 오늘과 같이 인간 자유를 소중히 생각하는 현대인에게는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그것은 하느님이 주신 인간의 고귀한 자유를 외면하고 말살하는 일입니다. 거리에서 행인들을 붙들고 믿으라고 강요하는 현상이나, ‘신자 배가 운동’을 하라고 지시하는 종교 지도자들의 행태는 모두 과거 인류가 아직 몽매할 때, 통용되던 관행을 답습하는 일입니다. 신앙은 강요로 발생하지 않고, 신자는 우리의 노력으로 배가 생산할 수 있는 제품이 아닙니다. 신앙은 자유로운 사람이 심사숙고한 후에 스스로 하는 결단의 산물이라야 합니다. 하느님은 인간이 자유롭게 살 것을 원하십니다. 신앙은 하느님으로 말미암은 참다운 자유를 찾아나서는 길입니다. 물질에 대한 집착, 인간에 대한 무질서한 애착, 또한 이 세상의 헛된 영광에서 인간을 자유롭게 하는 길입니다. 그리스도 신앙은 자유로운 사람이 예수님의 말씀과 실천에서 하느님의 자유를 읽어내고, 그것을 배워 하느님의 자녀로 자유롭게 사는 길을 배우는 데에 있습니다.

그리스도 신앙인은 하늘과 땅을 새롭게 이해합니다. 먼저 하늘을 새롭게 이해합니다. 예수님을 원리로 하느님을 생각하는 사람에게 하느님은 저 멀리 하늘 높은 곳에 앉아서 사람에게 상이나 벌을 주는 분이 아닙니다. 그것은 이 세상의 권력자가 하는 일입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을 아버지라 부르셨습니다. 아버지는 자녀에게 생명을 주고, 자녀를 아끼고 사랑하고 용서합니다. 아버지는 자녀가 발전하고 행복할 것을 원합니다. 예수님을 배우는 신앙인이 믿는 하느님은 자애로우신 아버지이십니다. 신앙인은 자기의 삶에 발생하는 어떤 역경도 하느님이 하시는 복수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어려움은 이 세상을 사는 생명체에 당연히 있는 것입니다. 신앙인은 생명을 베푸신 하느님을 은혜롭게 생각합니다.

그리스도 신앙인은 땅을 달리 이해합니다. 땅은 자기 한 사람 잘 되기 위해 사는 곳이 아닙니다. 땅은 소중한 이웃들이 사는 곳입니다. 이웃을 불쌍히 여기고 측은히 여기면서 은혜롭게 살아야 하는 땅입니다. 은혜로우신 하느님의 자녀들이 함께 사는 곳입니다. 하느님이 우리 생명의 아버지로 또한 우리 삶의 원리로 살아 계셔야 하는 땅입니다. 요한복음서는 예수님의 입을 빌려 이렇게 말합니다.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처럼 나도 그대들을 사랑했습니다. 내 사랑 안에 머무시오...내가 명하는 바는 이것입니다. 서로 사랑하시오”(요한 15,9.17). 이 땅에 사는 신앙인은 이웃을 사랑합니다. 예수님을 원리로 사는 신앙인은 하느님이 사랑하시는 분이라, 자기도 이웃을 사랑합니다. 사람을 사랑하는 일은 말 같이 쉽게 되는 일이 아닙니다. 사람에게 피해를 주고도 전혀 뉘우치지 않는 사람이 있습니다. 열등의식에 젖어 사사건건 사람을 괴롭히는 사람도 있습니다. 우리 앞에 전혀 사랑스럽지 못한 모습들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 신앙인은 그런 사람도 불쌍히 여기면서 미워할 기회를 피합니다.

민족들의 복음화를 위한 우리의 노력은 이런 하늘과 이런 땅을 사람들에게 알리는 데에 있습니다. 복음은 어떤 특권도 주지 않습니다. 어떤 이유에서라도 신앙을 빙자하여 우월감을 가지지 말아야 합니다. 예수님을 삶의 원리로 배우는 신앙인이 하늘에 대해 땅에 대해 가진 이해와 실천이 사람들에게 구원으로 보일 때, 사람들은 신앙에 대해 흥미를 가질 것입니다. 자연 재해와 인간이 만든 재해의 해악에 짓눌리고 찢겨서 사는 우리들입니다. 우리의 선한 마음은 이웃의 악의로 짓밟히기도 합니다. 이런 세상에서 우리는 자폐적 자세로 남을 원망하고 미워하면서 무자비를 실천의 원리로 삼고 살 수도 있습니다. 그리스도 신앙은 예수님을 원리로 하늘과 땅을 바라봅니다. 하늘에서는 아버지이신 하느님 자비의 숨결이 들리고, 땅에는 우리가 사랑해야 하는 이웃과 우리가 감당해야 할 십자가가 보입니다. 예수님으로부터 배우고 그분이 우리 안에 함께 살아 계셔서 체험하는 ‘새 하늘과 새 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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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교구 서공석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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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의 제자다운 삶

“너희는 가서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을 내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그들에게 세례를 베풀고, 내가 너희에게 명한 모든 것을 지키도록 가르쳐라.”

오늘은 “전교주일”입니다. 전교, 선교를 한다는 것은 오늘 복음의 말씀처럼 세상 사람들을 주님의 제자로 삼는 것입니다. 주님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주님께서 명하신 모든 것을 지키도록 가르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세상의 자녀들을 하느님의 자녀로 다시 태어나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단지,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만을 전해주는 것, 교회 구성원의 양 불리기가 곧 선교는 아닐 것입니다. 선교는 주님의 제자가 되게 하는 것, 주님의 제자다운 삶을 살도록 이끄는 것입니다.

만약 우리 스스로가 주님의 복음을 살아가지 못한다면, 주님의 복음을 우리 마음 속 깊이 간직하고 있지 못한다면, 우리는 이웃에게 복음을 전해줄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의 이름은 전해 줄 수 있어도, 그리스도 자체를 전해 줄 수는 없습니다. 만약 우리가 주님의 말씀을 실천한다 하면서도, 그 안에 기쁨이 없다면, 주님의 기쁜 소식, 복음을 전해 줄 수 없습니다. 주님을 따르기 위한 율법은 전해 줄 수 있어도, 주님의 자비와 용서를 통한 참된 기쁨을 전해줄 수 없습니다. 만약 우리가 주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물질과 권력과 명예를 추구하는 데에 더 많은 관심을 둔다면, 이웃에게 또 하나의 우상을 전해주는 것 밖에 되지 않을 것입니다. 주님을 단순한 부적이나 보험처럼 여기게 만들 것입니다. 이렇게 우리 스스로가 복음화 되지 않은 상태에서는, 이웃들을 주님의 제자로 만들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나 자신이, 세상이 주는 기쁨보다 더 큰 기쁨과 평화를 주님으로부터 얻어 누리고 있다면, 세상 사람들은 그 기쁨의 원천을 찾기 위해, 그리스도를 향해 뛰어들 것입니다.

우리는 좋은 물건이 있으면, 자랑하고 싶어합니다. 자신이 아끼는 사람에게 소개해주고, 그 역시도 그 좋음을 느끼게 해주고 싶어합니다. 또 경치 좋은 곳을 발견하면 아끼는 사람과 함께 그곳에 가고 싶어합니다. 맛좋은 음식점을 발견하면 아끼는 사람을 데려가 함께 먹습니다. 이렇게 우리의 신앙도, 좋은 경치처럼, 맛좋은 음식처럼만 느낄 수 있어도, 우리의 신앙을 아끼는 사람들에게 소개하고 함께 그 평화 속에 머물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먼저 우리 스스로가 신앙의 참 맛을 알아야 합니다. 맛을 알기 위해서는 음식을 입안에 넣는 행동이 필요한 것처럼, 신앙의 참 맛을 알기 위해서는 주님의 말씀을 우리 마음에 담고 살아가는, 복음의 실천이 필요합니다. 우리 스스로가 주님의 제자가 되어야 하며, 주님의 제자다운 삶을 살아가도록 노력해야 하겠습니다.

김윤근 베드로 신부
  | 1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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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교의 현주소

오늘은 모든 민족의 복음화를 위하여 기도하는 전교주일입니다. 예수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창설하신 이후 초기 사도들로부터 시작해서 오늘날까지 수많은 선교사들이 세상 복음화를 위해 노력해 왔습니다. 오늘날 우리나라의 경우를 보면 외국 선교사에 의해서가 아닌 자발적인 교회 창설 이후 200여 년이 지났으며 복음화율은 전 국민의 8∼9%정도입니다. 외적인 신자의 숫자를 증가시키는 양의 문제보다는 신자들이 내적으로 얼마나 회개와 증거의 삶을 살고 또 보여주는가가 중요하겠지만 그래도 우리나라는 선교 대상국으로 되어 있으며 아직도 선교해야할 일들이 많은 것도 사실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4복음서의 마지막마다 그리스도인의 지상사명으로 명하신 복음 선포에 대한 실천을 오늘날 우리 한국의 천주교 신자들은 어떻게 실현하고 있는지 반성해 볼 일입니다.

선교에 대한 무관심, 신앙교육에 대한 부족 그리고 자신의 신앙관에 대한 확고한 의지의 결여도 문제이겠지만 개신교처럼 봉고차나 만원 권 지폐에 ‘예수천당, 불신지옥’을 붉게 칠해 복음 선포를 마치 협박처럼 강요하는 것도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복음 선포는 목적이요 교세 확장은 그 결과일 뿐인데, 결과에 얽매여 복음 선포의 의미를 잃어버린다면 이는 주객이 전도된 모습이라 하겠습니다.

참된 복음화란 세상 사람들에게 기쁨을 주고, 가난, 질병, 기아, 무지와 같은 묶인 세상에서 해방을 약속하는 삶을 증거로서 살아내는데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이웃과의 만남을 통한 구체적인 선교의 경우는 선교주체에 대한 확고한 인식도 중요한 요소일 것입니다. 즉 내가 선교하는 것이 아니라 나와 함께 하시는 주님께서 선교하신다는 사실입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세상 모든 사람들에게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가르치라고 명하신 후에 내가 세상 끝 날까지 항상 너희와 함께 있겠다고 약속하십니다. 그런데도 우리 가톨릭 신자들은 복음 선포에 있어서 너무도 주저하고 있습니다. 제가 아는 모 신자 교수님은 자신의 명함에 항상 다음과 같은 글을 새겨 다니십니다. Good-God=O 즉 선한 것, 좋은 것에서 하느님을 빼면 아무것도 없다는 말입니다. 그 교수님이 만나는 사람마다 하느님은 이처럼 좋은 분이시니 주님을 믿는 신앙인이 되도록 권하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선교란 말이 missio 즉 파견이라는 뜻임을 감안할 때 초대교회 시대의 사도들만이 파견된 자들이 아니라 우리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주님으로부터 복음 선포의 사명을 위하여 파견된 자들이라는 사실을 기억하고 이제 나 자신부터 회개와 증거의 삶을 위해 쇄신된 모습으로 변화되어야 할 것입니다. 아멘.

전수홍 안드레아 신부
  | 1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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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 하느님 감사합니다.

‘주님과 함께 가서 복음을 전합시다.’주례사제는 미사에 참례한 모든 신자들을 향해 크게 외칩니다. 신자들은 모두 함께 큰소리로 화답합니다.‘하느님 감사합니다.’

무엇에 대한 감사인가요? 물론 미사 때 받은 은혜에 대한 감사입니다. 그러나 또 한 가지 기꺼이 복음을 전하겠다는 응답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과연 이 응답을 얼마나 의식하며 성당 문을 나설까요?

‘민족들의 복음화’란 곧 세상의 복음화를 의미합니다. 미사를 드리고 성당 문을 나서는 것은 내가 만나는 너라는 존재에게 기쁜 소식, 즉 하느님께 대한 믿음을 전하는 것입니다.“성경도“그를 믿는 이는 누구나 부끄러운 일을 당하지 않으리라.”하고 말합니다. 같은 주님께서 모든 사람의 주님으로서, 당신을 받들어 부르는 모든 이에게 풍성한 은혜를 베푸십니다. 과연“주님의 이름을 받들어 부르는 이는 모두 구원을 받을 것입니다.””(로마 10, 11∼13)

성당 문밖에서, 믿는 이로서 나는‘선교에 대한 의식’을 얼마나 굳건하게 가지고 있습니까? 하느님의 가르침을 아는 것에서 나아가 구체적인 삶 속에서 얼마만큼 실천하고 있습니까? 하느님의 가르침을 함께 실행하기 위해선 서로 간에 굳건한 신뢰로“주님의 빛 속에”(이사 2, 5) 걸어가야 합니다.

구원의 길을 걸어가는 사람은 구원된 자로서의 품위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 품위는 주님께서 가르쳐 주신 것을 제대로 지키며 살아가는 데서 나오는 것입니다. 또한 믿는 이의 소리가‘온 땅으로’퍼져나가고, 믿는 이들의 말은‘누리 끝까지 퍼져’ 나갈 것을 확신하는 데 있습니다.

만민의 구원을 위해 우선 이웃인 너를 성부·성자·성령의 삼위께 의탁하며 세례를 받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이 세례는 하느님과 함께하는 생활로 이끌어주는 세례인 것입니다.

‘보잘것없는 신앙’을 가진 자로서 모든 민족을 빛으로 인도하는 그 중대한 일을 제대로 수행하기는 무척 힘이 들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몸소 우리를 도와주시는 힘이 되십니다.“내가 세상 끝 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마태 28, 20) 라는 약속의 말씀을 굳게 믿습니다. ‘하느님 감사합니다.’

▮ 부산교구 김영곤 시몬 신부 : 2016년 10월 23일
  | 1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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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 ‘전교’는 우리의 사명

오늘은 민족들의 복음화를 위한 전교주일입니다. 오늘 복음 이이야기 하듯이 전교란 “모든 민족들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예수님께서 명령한 모든 것을 가르쳐서 그들이 지키도록 하는 것(마태 28,19-20)으로 교회가 예수님께 받은 본질적인 사명입니다. 이는 하느님께서 세상 창조 때부터 계획하신 것으로 예수님을 통하여 이루고자 하셨던 일이고, 성령의 이끄심에 따라 교회가 행하고 있는 일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 민족을 사랑하시어 그들을 당신의 백성으로 삼으셨습니다. 하지만 오늘 1독서에서 이사야 예언자가 이야기하듯이 하느님은 이스라엘만이 아니라 모든 민족이 예루살렘으로 모여들어 당신을 찬양하도록 하고자 하셨습니다. 이는 이미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신 바였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아브라함을 선택하시면서, 모든 민족들이 그를 통하여 복을 받게 하셨습니다(창세 12,2). 왜냐하면 이 세상은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것이고, 하느님은 모든 만물의 하느님이시기 때문에 그 누구도 당신 구원에서 제외되기를 바라지 않으시기 때문입니다.

이런 하느님의 계획으로 인해 새로운 이스라엘 백성으로 선택된 그리스도인들은 유다인이든 그리스인이든 상관없이 예수님을 믿음으로써 하느님의 축복을 얻어 누리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이것으로 하느님의 계획이 끝난 것이 아닙니다. 하느님은 당신께서 선택하신 새로운 이스라엘을 통해 이제 모든 민족을 그리스도 안에서 당신께로 불러 모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에페 1,10).

예수님께서 승천하시며 당신 제자들에게 맡기셨던 사명도 바로 이것입니다. 제자들로 하여금 당신이 하시던 일, 곧 말씀과 행적으로 모든 이들을 가르쳐 세례를 주고 그들을 당신의 제자가 되도록 하여 하느님께로 불러 모으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오늘은 이러한 우리들의 사명을 기억하는 날입니다.

사실, 우리 가운데 그 누구도 예수님께 직접 배운 사람은 없습니다. 오늘 2독서에서 바오로가 이야기하듯이 선포하는 이들이 없다면 우리 가운데 그 누구도 예수 그리스도를 올바로 알지 못했을 것입니다. 말과 행동으로 우리에게 복음을 전해준 이들이 있었기에 예수님께 모여와 세례를 받고, 하느님을 섬기는 신앙인들이 될 수 있었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다른 이들에게 복음을 전해 주는 것은 하느님의 계획, 곧 모든 이를 당신께로 불러 모으시는 계획을 이루는데 너무나도 중요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물론, 오늘날 다양한 문화와 종교들 속에서 살아가는 우리에게 전교는 대단히 어려운 문제입니다. 그리고 간혹 잘못된 방법으로 전교하게 되면 사람들을 하느님께로 불러 모으는 일에 오히려 방해를 주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전교하기를 포기해서는 안 됩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맡기신 사명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그러니 전교주일을 맞아 다시 한 번 각자의 자리에서 자신이 살고 있는 복음의 기쁨을 다른 이와 나누는 일에 다시금 동참하겠다고 다짐합시다. 만약 우리가 전교에 동참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해야 할 바를 다하지 않는 게으른 종이라 불릴 것입니다.

▮ 부산교구 염철호 신부 : 2016년 10월 23일
  | 1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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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 내 안에 먼저 복음의 빛을 밝히자

피정의 집을 운영하다 보면 가끔 답답할 때가 있습니다. 신앙의 성장을 위한 피정을 준비하고 초대하였으나 유료 피정에는 사람이 없고 무료 피정에만 사람들이 몰려올 때입니다. 자기 영성 생활의 성장을 위해서 이토록 투자하지 않는가 하는 마음이 들어 슬퍼집니다. 물론 강사가 유명하지 않아서라고 자책도 하지만 세속화의 흐름을 더 강하게 피부로 느끼게 됩니다.

오늘 우리는 전교 주일을 지내며 민족들의 복음화를 위한 미사를 봉헌합니다.“온 세상에 전파하리 복음 말씀을...”이 성가를 부를 땐 저도 좀 뻔뻔하고 부끄럽게 여겨집니다. 하지만 오늘은 우리가 복음을 잘 전하지 못하는 점을 일깨우는 날이 아닙니다. 오히려 세상을 향한 구원의 소식, 십자가와 부활의 사건을 통해서 부활의 영광에 참여할 수 있는 자격을 우리가 받았다는 이 놀라운 사실을 세상에 알리는 날입니다. 복음 전파는 의무가 아니라 권리라는 말이지요. 백성으로서, 자녀로서, 제자로서 누리는 권리 말입니다.

‘제 곡조를 못 이기는 사랑의 노래는 님의 침묵을 휩싸고 돕니다.’라는‘님의 침묵’의 시 구절처럼 음악이 끝나도 흥을 멈출 수 없는 사랑의 마음같이, 전교는 주님을 사랑하는 우리의 열정이고, 사랑받은 사람으로서, 용서받은 사람으로서 전할 수밖에 없는 사명인 것입니다.

자랑하고 싶은 큰 상을 아들이 받았는데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 하면 형벌이 되지 않겠습니까. 우리가 하느님의 사랑을 받고 있다는 이 기쁜 소식을 말하지 말라하면 벌과 같은 것 아니겠습니까. 일찍이 아우구스티노 성인은 말씀하셨습니다.“네가 남들에게 불을 붙이고자 하는 그 불은 이미 네 안에 불타고 있어야 한다.”

형제 자매 여러분, 우리가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는 우선 복음이 내 안에서 내 삶의 모습을 변화시켜야 합니다. 그리고 영으로 태어난 내 모습을 내 이웃이 보게 되는 것, 내가 그리스도 때문에 삶의 방향을 바꾸었음을 알리는 것이 복음 전파의 시작일 것입니다. 내가 그리스도의 제자임을 내 이웃이 알아차리는 그 모습은 예수님과 함께 사는 것입니다. 그것은 예수님이 생각하시는 것처럼 생각하고 예수님이 행하시는 것처럼 행동하고 예수님이 고통받으시는 것처럼 고통받으며 사는 것입니다. 또한 내 안에 불붙은 복음도 예수님과 함께 살면서 빛을 발하게 됩니다. 우리 안에 복음의 빛을 밝히고 영적인 성장을 위해서 노력함으로써 세상에 복음의 빛을 비추도록 합시다.

▦ 부산교구 김경욱 신부 - 2017년 10월 22일
  | 1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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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 기쁜 소식 온 세상에 전하자

오늘 제1독서에서 이사야는 세월이 흐른 뒤 주님의 집이 서 있는 시온 산이 모든 산들 위에 굳게 세워지고, 모든 언덕들보다 높이 솟아오르게 될 것인데, 그때 모든 민족이 그리로 밀려들 것이라고 예언합니다. 그들은 예루살렘으로 모여와 주님의 길을 배우고 그분의 길을 걷게 될 것입니다. 이제 주님이 모든 민족들 사이에 재판관이 되고, 수많은 백성들 사이에 심판관이 되실 것입니다. 그리고 세상은 더 이상 불의와 전쟁, 죄악이 없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모두가 주님의 빛에 따라 걸을 것이기 때문입니다.(이사 2,1-5)

이사야의 예언은 예수님에게서 온전히 이루어집니다. 모든 민족은 온 산들 위에 굳게 서 있는 새 도성 예루살렘이자 성전이신 예수님께로 모여올 것입니다. 그분께 주님의 길을 배워 주님의 길을 걷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이루어진 기쁜 소식, 그분께서 전하신 복음입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파견하면서, 이 기쁜 소식을 온 세상에 선포하라고 명하십니다. 가서 모든 민족들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당신께서 가르쳐주시고 명령하신 모든 것, 곧 아버지의 뜻인 주님의 길을 가르치고 모두가 그 길을 걷게 하라고 명하신 것입니다.(마태 28,18-19)

교회는 예수님을 따라 그분의 길을 걷는 이들이면서 동시에 자신에게 맡겨진 복음을 세상에 선포하며 모두가 예수님의 길을 따르도록 초대하는 공동체입니다. 예수님께서 이루신 일을 이어받아 이사야가 예언한 그 일들이 이루어지도록 해야 하는 이들입니다. 교회가 자신에게 맡겨진 이 임무에 따라 복음을 충실히 전할 때 교회는 세상의 빛과 소금으로서의 존재 가치가 드러날 것입니다.(마태 5,13-16) 왜냐하면 전교 자체가 교회의 본질이기 때문입니다.

만약 교회가 세상에 나가서 복음을 선포하지 않는다면 아무도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할 것입니다. 오늘 제2독서에서 사도 바오로가 이야기하듯이 선포하는 사람이 없다면, 아무도 기쁜 소식을 들을 수 없을 것입니다. 우리도 예수님이 주님이라고 선포하는 이들의 증언을 듣고 예수님의 길로 따라나선 이들입니다. 예수님에 관해 전해 들은 우리는 신앙의 선조들이 고백하던 신앙, 곧 예수가 주님이심을 입으로 고백하며 마음으로 믿음으로써 의롭게 되었고, 또 구원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도 우리가 믿는 바를 세상 사람들에게 선포함으로써 그들이 구원의 기쁜 소식을 전해 듣게 합니다.

그런데 바오로가 입으로 고백한다고 표현을 하다 보니 당신을 주님, 주님 한다고 모두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는 말씀이 떠오릅니다.(마태 8,21) 예수님께서는 분명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이들만이 하늘나라에 들어간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렇게 보니 전교란 말로 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뜻을 실천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져야 함이 분명합니다. 하지만 아무도 예수님이 주님이라고 입으로 선포하지 않는다면, 아무도 예수님이 누구인지 설명하지 않는다면 그 누구도 예수님을 알 수 없을 것입니다. 이 때문에 예수님께서도 제자들에게 가만히 앉아서 기다리고 있지 말고 세상 곳곳에 가서 사람들을 가르치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사도 바오로도 믿음은 들음에서 온다고 말하며 기쁜 소식을 전하는 이들의 발이 참으로 아름답다고 노래합니다.(로마 10,15-16)

오늘은 세상 모든 민족들의 복음화를 위해 기도하는 전교 주일입니다. 이런 오늘 독서와 복음 말씀을 묵상하면서 다시 한 번 기쁜 소식을 전하기 위해 세상으로 나가겠다고 다짐합시다. 그리고 우리가 알고 있는 바를 입으로 고백하고 마음으로 믿겠다고 다짐합시다. 물론 전교라는 것이 그렇게 쉬운 문제는 아닙니다. 하지만 주님께서 세상 끝날까지 항상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것을 기억하면서, 세상 곳곳에서 그분만이 참으로 우리 주님이심을 고백합시다. 그렇게 우리들이 믿는 바를 선포할 때 세상 모든 이들은 예수님께로 모여들어 그분의 길을 따라 걸을 것입니다.

▥ 부산교구 염철호 신부 - 2017년 10월 2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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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하늘과 땅의 모든 권한을 받았다.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들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명령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여라. 보라, 내가 세상 끝 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다.’ 이 말씀은 마태오복음서가 부활하신 예수님의 말씀이라며 전하는 것입니다. 이제 율법 위주의 유대교는 그 실효성을 잃었고, 예수님이 하신 말씀과 실천이 하늘과 땅을 위해서 결정적인 것이 되었다는 말씀입니다. 그리스도 신앙인은 예수님의 말씀과 삶을 실천하는 사람들 안에 예수님이 살아계신다고 믿습니다. 이 세상 모든 사람이 예수님을 배우는 제자가 되어 그분의 말씀을 실천하도록 하겠다는 마태오복음서 공동체의 결의가 담긴 말씀입니다.

오늘은 선교에 대해 생각해 보는 날입니다. 유럽 중세 사회는 그리스도 신앙을 근본이념으로 한 사회였습니다. 유럽 그리스도 사회가 아시아를 알게 된 것은 16세기 교역을 위한 상선(商船)과 더불어 선교사들이 중국과 일본에 오면서였습니다. 그 시대 유럽의 기술 문명은 아시아의 것보다 우월하였습니다. 유럽 출신의 선교사들은 기술 문명의 우월함과 백인이라는 우월감에 젖은 시선으로 아시아 현지의 종교들을 보았습니다. 그들에게 “교회 밖에 구원 없다.”는 유럽 중세의 격언은 만고(萬古)의 진리였습니다. 따라서 그들의 눈에 아시아의 종교들은 모두 퇴치해야 하는 미신(迷信)에 불과하였습니다. 선교는 구원받지 못할 불쌍한 유색인종에게 구원의 말씀을 전하는 시혜(施惠)적인 것이라고 그들은 생각하였습니다. 그들의 복음 선포는 우월감에 젖어 있었고, 권위주의적이었습니다. 오늘도 거리나 전철 안에서 “예수 믿고 구원 받으라”고 외치는 사람들의 독선적 태도에서 우리는 그 우월감과 권위주의의 잔재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이 우월감과 권위주의는 19세기에 들어오면서 타민족을 지배하는 식민주의로 표현되었습니다. 유럽 각국은 경쟁적으로 아시아와 아프리카를 무력으로 점령하고 식민지로 삼으면서 그것이 원주민에게 혜택을 주는 일이라 생각하였습니다. 19세기에 유럽 문물을 전폭적으로 수용한 일본이 20세기 초에 한국과 중국을 식민지화하려 했던 것은 유럽의 식민주의에서 한 수 배운 결과였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식민주의가 사라지면서, 유럽 교회는 처음으로 편견 없이 아시아 문화권을 보기 시작하였습니다. 기술 문명에 있어서는 유럽 사회보다 뒤졌었지만, 정신문화에 있어서 아시아는 열등하지 않을 뿐 아니라, 깊은 영적 가치들이 살아 있다는 사실도 깨달았습니다. 그러면서 “교회 밖에 구원 없다.”는 격언이 더 이상 통용될 수 없는 오늘이라는 사실도 알게 되었습니다.

복음에 대한 이해도 발전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유다교 안에만 구원이 있다는 당시 유다교 지도자들을 거슬려 말씀하신 분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어떤 사람도 버리지 않으시는 하느님을 믿고 가르치셨습니다. 예수님은 유다교 지도자들이 하느님이 버렸다고 가르치던 죄인들과도 어울리셨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옹졸한 집단이기주의를 곱지 않은 시선으로 보셨습니다. 예수님에게 하느님은 모든 사람을 위하고 아끼고 배려하시는 아버지였습니다.

오늘 우리가 우리 이웃을 신앙으로 인도하는 것은 지옥에 갈 수밖에 없는 그들을 구원하는 일이 아닙니다. 그리스도 신앙인이 아니면서도 신앙인보다 더 관대하게 이웃을 사랑하며 사는 사람들도 많이 있고, 이웃을 위해 희생적으로 봉사하는 이들도 많이 있습니다. 하느님은 그들 모두를 사랑하십니다. 예수님은 서로 사랑하라 또 섬기는 사람이 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신앙인은 예수님의 가르침에 수긍하고 그 가르침 안에 인간 삶의 풍요로움과 아름다움을 보기에 자기가 아끼는 이웃에게 신앙생활을 권하는 것입니다.

신앙인이 되느냐 되지 않느냐는 문제는 각자의 마음 깊은 곳에서 결단할 일입니다. 가두(街頭)에서 보험 가입을 권유하듯이 신앙을 권할 수는 없습니다. 신앙으로 말미암은 인간 삶의 풍요로움과 아름다움을 스스로는 실천하지 않으면서 이웃에게 신앙을 권할 수는 없습니다. 복음화를 위한 노력은 교세확장이나 신자배가 운동과 같은 사업적인 성격을 지니지 않습니다. 기업이 수입을 올리기 위해 사세확장을 하고 제품 판매 배가 운동을 합니다. 그러나 교회는 그런 사업체가 아닙니다. 교회는 예수님이 가르치신 하느님을 믿고, 그분 안에서 삶의 보람을 찾는 사람들이 모여서 그분을 기억하고 그분으로부터 배우는 모임입니다.

우리의 신앙이 오늘의 사회를 위해 과연 보탬이 되는 지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오늘의 사회가 안고 있는 문제들을 위해 우리가 구원적 실천을 하는 사람들인지도 생각해보아야 합니다. 환경오염은 인류를 위협하고 있습니다. 기술문명의 발달은 인간의 존엄성을 훼손하는 일이 많습니다. 경제적 어려움이나 병고 혹은 고령으로 소외당한 이들은 우리 주변에 많습니다. 이런 문제 앞에서 우리는 구원적 선택을 하고 있는지도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대단한 실천을 요구하지 않습니다. 자기가 처한 상황에서 이웃에게 도움이 되는 실천입니다. 신앙 공동체가 그런 노력을 할 때 비로소 신앙이 구원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과거에는 남녀 성(性), 계급과 직업 등이 모두 차별을 의미하는 것이었습니다. 과거에는 높은 사람들의 권위가 인간차별을 당연시하면서 사회의 질서를 만들었습니다. 오늘 우리의 사회에서는 모든 차별은 극복할 장애로 생각됩니다. 오늘의 사회는 이웃을 위한 배려를 소중히 생각합니다. 이 배려로써 인간차별을 극복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예수님이 하신 말씀과 실천도 인간 차별을 없애는 것이었습니다. 병자를 고쳐 주고 마귀를 쫓으신 것은 건강한 자와 병자의 차별을 없애는 배려였습니다. 예수님은 굶주린 이에게 먹을 것을, 목마른 이에게 마실 것을 주는 배려로써 인간차별을 없애라고 가르치셨습니다. 신앙 공동체가 이 배려의 노력을 진지하게 하지 않는다면 복음화는 하나의 구호로 끝날 것입니다. 교회는 내세를 위한 보험회사가 아닙니다. 교회는 하느님의 은총으로 현세에도 내세에도 잘 살아 보겠다는 이기주의자들의 모임이 아닙니다.

오늘 복음에서 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오늘 우리의 언어로 표현하면 이렇습니다. “하늘과 땅을 위해 중요한 것은 내가 보여준 하느님의 자비와 사랑이고 그 자비와 사랑을 실천하는 배려이다. 내가 실천한 사랑이 하느님의 자비를 사는 길이고 이웃을 위한 배려라는 것을 너희의 실천으로 사람들에게 보여서, 그들도 그것을 배워서 나의 제자가 되게 하여라. 이웃을 위한 너희의 배려 안에 나는 세상 끝 날까지 어느 날이나 항상 너희와 함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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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교구 서공석 신부
  | 1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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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 먼저 자신을 비우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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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해외 선교에 나섰던 이들이 탈레반에게 납치되어 전 국민을 애타게 만든 일이 있었습니다. 이 사건은 적지 않은 논란을 불러 일으켰고, 이들의 활동에 대한 평가들이 엇갈리면서 서로 다른 주장들이 불거져 나오기도 했습니다. 가령, 어떠한 대가를 치르더라도 순교를 각오하고 선교를 위해 나서야 한다는 주장이 있는가 하면, 선교도 중요하지만 실정법을 준수하는 범위 안에서 활동해야 한다는 조심스러운 의견도 대두되었습니다.

이미 지난 일에 대해 왈가왈부 하자는 의도는 아닙니다만, 오늘 민족들의 복음화를 위한 미사를 봉헌하면서 선교의 참 뜻은 어디에 있는지 생각해 보았으면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모든 민족들을 제자로 삼아 세례를 주고, 당신께서 명하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고 명하십니다. 제자들을 뽑으신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었고, 교회를 세우신 뜻이 바로 이것이었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교회가 선교를 최상의 사명으로 인식하고, 이를 수행하기 위해 모든 역량을 다 쏟아 부어야 하는 것은 틀림없는 일입니다. 하지만, 선교의 진정한 의미는 과연 무엇이겠습니까? 진리의 길을 따르라고 가르치고, 믿음을 북돋우도록 격려하는 일도 중요하지만, 정작 나 자신이 그 길을 따르지 않는다면, 바리사이들의 위선적 행태와 다를 바 없을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나 자신이 먼저 복음 정신으로 채워져 있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바오로 사도께서는 코린토 전서 9장 22절에서 "약한 이들을 얻으려고 약한 이들에게는 약한 사람처럼 되었습니다." 하고 말씀하십니다. 선교는 기득권을 지닌 자가 베푸는 시혜가 아닙니다. 오히려 상대방에게 같은 눈높이의 모습으로 다가가는 참여입니다. 참여하기 위해 존중해야 하고, 함께 하기 위해 배려해야 합니다. 참으로 나를 비우고 겸손해져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인간을 구하기 위해 인간의 지위까지 내려오신 예수님의 본보기를 따라야 합니다. 실상 우리 자신을 돌이켜 볼 때, 남들 앞에 내세우고 싶어하는 교만한 마음이 자리 잡고 있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러한 마음으로는 제 아무리 아름다운 언어와 출중한 웅변술로 주님의 가르침을 전한다고 해도 참된 복음화를 이루기 어렵고, 선교의 결실 또한 허약함을 보게 됩니다.

주님께 부르심을 받고 구원의 은총으로 채워진 진실한 제자라면 섣불리 선교한답시고 나서기에 앞서 먼저 겸손의 덕을 쌓아야 합니다. 그리하여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모습을 지니게 될 때에 사도행전 2장 42절 이하에서 나타나듯이 그 삶의 모범으로 인해 참된 복음화의 물결이 세상을 향하여 번져가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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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교구 김승주 요한 크리소스토모 신부
  | 1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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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 또 하나의 열매를 바라시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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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깨닫지 못했었는데 내가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지! 당신은 사랑받기 위해, 그 사랑 전하기 위해 주께서 택하시고 이 땅에 심으셨네. 또 하나의 열매를 바라시며…"

지난 시월 첫 주, 묵주기도 성월, 시월을, 저희 본당에서는 청년들이 주관한 작은 음악회로 문을 열었습니다. 함께 부른 위의 노래도 좋았지만, 우리 모두가 얼마나 소중한 하느님의 자녀이며, 사랑받는 존재인지를 깨닫게 해주어 더욱 좋았습니다. 이렇게 아름다운 성가로 시작한 첫 주를 지내고 난 후, 그 다음 주, 둘째 주는 이기대 바닷가에서 '2004년 주일 학교 교리 교사의 날'행사가 있었습니다. 많은 주일학교 선생님들이 함께 노래하며 즐기고 끝날 무렵 근속 상을 받으셨는데, 그 중에서 한 분은 장장 25년의 주일학교 근속으로 상을 받으셨습니다. 행사를 바라보며, 저는 무엇이 우리로 하여금 이 쌀쌀한 날씨에도 불구하고 자리를 뜨지 않고 이 자리에 이렇게 함께 모여, 한마음이 되어 노래할 수 있게 할 수 있는지를 생각해 봤습니다. 또 무엇이 그 많은 주일학교 선생님들로 하여금 그렇게 자신을 희생하며 주일학교 교사로서 그 오랜 시간을 그렇게 희생하고 봉사할 수 있었는지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오늘은 민족들의 복음화를 위한 미사를 드리는 전교 주일입니다. 저는 복음화란 말이 그렇게 거창한 그 무엇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배를 타고 혹은 비행기를 타고 멀리 나가 복음을 전하는 전교 활동도 아름다운 일이지만, 우리가 각자, 우리의 삶의 자리 한 가운데서 내 가족, 이웃과 함께 서로를 배려해주고 아껴주는 것, 그리고 나는 물론 우리 모두가 얼마나 소중한 하느님의 딸이며 아들인지를 우리가 가진 따뜻한 마음으로 기억시켜 주는 것, 그리고 그렇게 함께 매일의 삶을 살아가는 것, 그것이야말로 복음화고 참된 전교라고 생각합니다.

디지털, 정보화, 웰빙… 하루가 다르게 쏟아지는 이러한 이름들이 결코 우리를 행복하게 해주지는 못한다는 것을, 우리는 그다지 어렵지 않게 볼 수 있습니다. 오히려 더많은 사람들이 무엇이 길이고 진리인지를 몰라 방황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런 어지러운 세상 한 가운데서 살면서 진리의 빛, 희망의 빛을 보이는 복음의 전달자로 불리움 받았습니다. 그런 불리움을 받은 우리는 얼마나 소중한 존재이며, 또 그런 희망의 기쁜 소식을 전하는 우리의 발걸음은 얼마나 또 얼마나 아름다운지…

예수님은 우리가 얼마나 소중한 하느님의 자녀이며 사랑받는 존재인지를 세상에 알리라고 오늘도 우리를 부르십니다. 세상 속에서 또 하나의 열매를 맺으라고, 가서 세상 모든 이들 세례를 베풀고, 내가 명한 모든 것을 지키도록 가르치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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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교구 최병권 대건 안드레아 신부
  | 1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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