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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 선교는 신자들의 진정한 생활의 표양이다.
조회수 | 1,995
작성일 | 08.10.14
영국이 인도를 점령하여 식민지 통치를 할 때, 영국군 장성들의 모임에 초청을 받은 간디는 연단에 올라가 영국군 장교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당신들이 가는 곳마다 십자가가 달린 교회를 짓는데, 당신들이 그리스도인이라면 교회 건물이나 선전 벽보가 아니라 당신들의 삶으로 예수를 보여주시오. 당신들이 믿는 예수가 부당하게 폭력을 휘두르며 살인하라고 가르쳤습니까? 당신들의 예수가 나약한 여인들을 겁탈하라고 가르쳤습니까? 가난한 이들의 재산을 약탈하라고 가르쳤습니까? 내 조국 인도를 그냥 놓아 두시오! 당신들의 예수가 아니더라도 행복하게 살 수 있습니다. 나는 예수를 사랑하지만 ‘그리스도인’들은 싫어합니다.”

영국군은 교회를 짓고 벽보를 붙이며, 온갖 말로 그리스도를 전했지만 간디의 말대로 그리스도를 보여주지 못했다. 오히려 그리스도를 그릇되게 보여주었다. 그런데 똑같은 인도에 마더 데레사가 갔다. 데레사수녀는 아무 말 없이 가장 가난한 도시 캘커타의 빈민가에 들어가 길거리에서 죽어가는 병자들을 돌보았다. 데레사수녀는 교회도 짓지 않고 십자가도 세우지 않고 벽보도 붙이지 않고 예수님을 믿으라고 외치지도 않았다. 오로지 하느님의 자비와 사랑을 삶으로 보여주었다.

“교회로서 복음 선교를 위한 첫째 방법은 신자들의 진정한 생활의 표양이다. 끊을 수 없는 하느님의 친교로 봉헌하고 동시에 무한한 열성으로 이웃에게 봉사하는 생활의 표양은 복음선교의 첫째 수단이라고 인정한다”(현대의 복음 선교, 41항).

내가 사는 곳에서, 내가 일하는 곳에서 하느님의 삶을 사는 것이 전교이다. 하느님의 삶은 바로 ‘자비’와 ‘사랑’이다. 그것을 사는 것이 바로 하느님을 전하는 것이다. 우리가 그리스도교 신자이면서 그리스도의 삶을 살려고 힘쓰지 않는다면, 우리가 하느님을 비추어주는 거울이 되지 못한다면 어떻게 전교가 가능할까? 우리 삶의 모습이 전교의 힘이다. 사람들은 우리의 말을 듣기보다는 우리의 행동을 본다.

전교는 신앙인에게 있어 해도 되고 안해도 되는 것이 아니다. “온 세상으로 가서 모든 사람에게 복음을 선포하라”(마르 16,15)는 예수님의 지상 명령이다. 전교는 자기 신앙의 표현이며 결론이다. 그렇기 때문에 “기쁜 소식을 전하는 이들의 발이 얼마나 아름다운가!”라는 바오로 사도의 노래를 이해할 수 있다. 따라서 ‘복음이 닿는 곳에 사랑이 닿는다’라고 하셨던 교황 바오로 6세의 말씀을 기억하며, 나의 입이 하느님을 선포하고, 나의 눈이 사랑을 말하게 하며, 나의 손이 이웃의 손을 잡아 끌도록 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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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배명섭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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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 민족 복음화를 이루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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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전교주일이다. 오늘 독서와 복음의 주제라고 할 수 있는 것은 복음선포이다. 복음선포를 통하여 모든 민족들이 복음화 되어 하느님 안에 진정한 평화와 자유를 누릴 수 있는 세상의 변화를 이룩하기로 결심하는 날이다. 더욱이 우리는 분단의 현실을 갖고 있다. 오늘 이 미사를 통해 온 민족의 염원인 평화적 통일을 기원하는 민족 복음화를 위하여 기도하여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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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 : 마태 28,16-20: 모든 사람들을 내 제자로 삼아라

그래서 오늘 복음에서 예수께서는 부활하신 후 갈릴레아에 나타나셔서 만민에게 세례를 베풀고 당신의 계명을 지키도록 가르침으로써 만민을 제자로 삼으라고 명하신다. 부활하신 주님께서는 세상 끝까지 교회 공동체와 함께 계시겠다고 약속하신다. 구약에서 야훼 하느님께서 이스라엘 백성과 함께 계셨듯이, 이제 부활하신 예수께서 하느님의 새 백성인 교회 공동체와 함께 계시는 것이다. 그러기에 부활하신 예수님은 “우리와 함께 계시는 하느님, 임마누엘”(1,23)이시다. 그러기에 교회는 모든 민족들을 주님의 제자로 삼아 세례를 베풀고 주님의 기쁜 소식을 전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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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독서 : 로마 10,9-18: 말씀을 전해주는 사람이 없으면...

2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전교의 의미를 이렇게 고백하고 있다. “기쁜 소식을 전하는 이들의 발이 얼마나 아름다운가!”(15절). “그들의 소리가 온 땅에 울려 퍼졌고 그들의 말이 땅 끝까지 이르렀다”(17절).

이 말씀에는 우리로 하여금 신앙인으로써 적극적이고 능동적인 삶의 방식을 갖도록 해 준다. 즉 우리 주위에는 도움의 손길을 필요로 하는 복음의 가난한 형제들이 있다는 사실이다. 이들에게 우리는 기쁜 소식을 선포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가 믿고 따르는 그분을 다른 사람들도 믿고 고백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믿지 않는 분의 이름을 어떻게 부를 수 있겠습니까? 또 들어보지도 못한 분을 어떻게 믿겠습니까? 말씀을 전해주는 사람이 없으면 어떻게 들을 수 있겠습니까?”(14절). 즉 세상에 구원을 주는 말씀도 전해주는 사람이 있어야 들을 수 있다고 하시면서 선교의 사명을 강조하신다.

“교회는 그 본성상 선교하는 것을 사명으로 한다”(선교 2항). 선교야말로 교회가 이 세상에 존재해야 할 확실한 이유임을 분명하게 천명한 선언이다. 이 선언으로 제2차 바티칸공의회는 선교 역사에서 길이 기억될 공의회로 남을 것이다. ‘본성상 선교해야 하는 교회’라는 말 안에는, 교회는 “믿지 않는 만백성의 빛이 되고 구원이 되기 위해 파견된 자”임을 의식하고 있다는 뜻이 내포되어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사실 “교회는 예수님과 열 두 사도들의 복음선교 활동에서 생겨났고, 그 활동의 당연한 결과요, 그 활동이 원한 것이며, 그 활동에 가장 가까울 뿐만 아니라 그 활동에서 볼 수 있는 결과가 교회인 것”이다(현대의 복음선교 15항).

이와 같이 교회는 예수님과 같은 사명 완수를 위해 예수님께로부터 파견되는 것이며, 「떠나셨지만 머물러 계신」 예수님의 새로운 현존에 대한 명백한 표징으로 계속 역할을 수행해야 하는 것이다(같은 곳).

다시 말해서 교회는 성령의 인도 아래 그리스도의 사명을 이 세상에서 계속 수행하기 위해 불린 것이다. 그리스도 파견의 연장(延長)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교회는 그 본성상 선교하는 것을 사명으로 하니 이것은 성부의 계획을 따라 교회가 성자의 파견과 성신의 파견에서 그 기원을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교회는 성부의 구원계획을 이루기 위해서 성부와 성자와 성령에 의해 파견되며, 궁극적으로 성자와 성령을 파견하신 성부의 「원천적 사랑」을 파견의 최종 근거로서 인식하며, 마르지 않고 끊이지 않는 샘인 이 「원천적 사랑」에서 끊이지 않고 활력과 열성을 길어내는 것이다.

“선(善)은 자기 확산성(自己擴散性)을 지닌다”(Bonum est diffusivum sui). “샘 같은(원천적) 사랑”이신 하느님의 사랑이 끊임없이 자신(사랑)을 확산시켜 나가기를 바랄 것은 당연한 결론이다. 왜 성부의 “원천적(샘 같은) 사랑”이 선교의 최종 근거가 될 수 있는지, 그 이유를 조금은 알 것 같지 않은가? 조금 더 들어보자. “선은 자기를 확산시킨다”고 했다. 그러므로 선하면 선할수록 자신을 더욱 확산시켜 나가야 마땅하다. 따라서 하느님은 선의 최상의 결과를 위해서 자신을 최대한으로 확산시켜야 했다. 그런데 하느님이 할 수 있는 선의 최상의 결과는 무엇일까? 인류의 구원사업이었다. 그러므로 하느님은 인류 구원을 위하여 자신을 최대한으로 쏟아 부으며 최상의 결과를 기대할 것은 자명한 이치이다(Bonum estdiffusivum sui, ergo magis bonum magis diffusivum, ergo in maximo effectu bonitatis maxime se debet diffundere; sed maximus effectus bonitatis divinae fuit redemptio generis humani: congruebat, quod maxime se diffunderet.(전집, 제3권 2, 2절, 문제 3).

그러므로 선교는 <하느님의 자기확산>이라고 할 수 있다. 하느님의 자기확산인 선교는 <선=사랑=하느님>에 너무 잘 어울리고, “기원을 갖지 않으시는 기원”이신 성부의 사랑에까지 거슬러 올라가 귀속되는 것이 당연하다. 따라서 선교의 최종 근거는 결국 성부의 자기 확산적인 “샘 같은(원천적) 사랑”에 귀착된다.

하느님은 만선의 근원이요 사랑 자체이시다. 지선(至善)하신 사랑 자체이신 하느님은 그 본성상 선과 사랑을 확산시키지 않을 수 없는 분이시다. 선과 사랑은 합일시키고 합성시키는 힘일 뿐 아니라 동시에 자신을 확산시키는 힘을 가졌기 때문이다.

최고선이요 최고 사랑이신 하느님께서 자기확산의 일환으로 하신 최상의 사업이 바로 “만민 구원”이 아니겠는가? 이처럼 “만민 구원”은 하느님의 “샘 같은(원천적) 사랑”에서 나오고, 하느님은 당신 사업의 성취를 위하여 최선의 방법으로 성자와 성령을 파견하시게 되는 것이다. 여기서 교회의 파견이 이루어지고, 이로써 하느님은 ‘선교하는 하느님’이 되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선교라는 것은 바로 하느님을 확산시키는 일이다. 이 세상의 모든 이들이 하느님을 우리와 같이 아버지로 부를 수 있도록 확산시키는 것이다. 그리하여 우리 모두가 한 형제요, 자매로서 구원의 길로 나아갈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지금 이 시대에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다른 것이 아니다. 우리가 처한 위치에서 자기 자신의 본분과 책임, 의무를 다하는 삶이라고 할 수 있다. 지금 이 시기는 그것이 더 필요한 때이다. 특히 오늘 우리의 삶과 신앙의 현주소를 다시 한번 되돌아보며 복음화의 소명을 새롭게 하도록 하자. 이러한 모든 은총을 주님께 구하면서 이 미사를 봉헌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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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신부
  | 1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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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 대(代)가 끊어지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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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주일학교 꼬맹이 녀석이 쫄래쫄래 다가오더니 “저는 신부님이 좋아서요, 크면 신부님이 될 거예요.” 하데요. 너무 기특하고 대견해서 머리를 쓰다듬어주고 있는데, 느닷없이 들려온 어떤 분의 한마디. “얘, 신부님이 되면 대(代) 가 끊어지잖아!” ‘헉!!!’ 순간, 기가 막혀 아무 말도 못하고 그냥 성당으로 들어왔습니다.

신부가 되면 대가 끊어진다? 외아들은 물론 형제 모두 신부가 되고, 쌍둥이 형제까지도 모두 신부가 되는 일이 많으니, 핏줄을 중시하는 우리 민족 고유의 정서로 보면 그리 놀랄 일만은 아니겠지요. 허나 사제 한 명이 태어나면 하느님의 대를 이어나갈 자손들이 얼마나 많이 태어나게 됩니까? 세상 끝 날까지 영원히 끊어지지 않고 사라지지 않을 하느님 사랑의 아름다움과 풍요로움의 신비가 이 땅 위에 더 깊이 뿌리 내리지 않겠습니까? 결국 신부가 되면 대가 끊기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 나라를 이룰 하느님 백성들을 탄생시켜 하느님의 대를 이어나가는 것이 되기 때문에 오히려 더욱 영광스럽고 보배로운 것이 아닐까요?

가만히 보면 우리 민족의 복음화는 이렇게 이뤄진 것 같습니다. 모진 환난과 박해 속에서도 현세의 고통이나 인간적인 굴레보다는 더 큰 것을 볼 줄 알았던 우리 신앙 선조들의 희생과 극기, 봉헌의 삶이 토대가 되었고, 그분들의 피와 땀, 가슴시린 눈물이 거름되어 건실한 성장을 해 오게 된 것입니다.

왜 그분들이라고 쉽고 안락한 삶을 추구하고 싶지 않으셨겠습니까? 신앙만 포기하면 모든 것을 보장받을 수 있는 상황 속에서 무엇 때문에 모든 것을 버리고 신앙을 붙잡았을까요?

하느님을 증거하고 하느님을 전해서 하느님의 대를 이어나가고자 했던 눈물겨운 ‘자기 봉헌’이 아니었을까요?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들도 신앙 선조들의 모습을 본받아 복음이 더욱 깊이 뿌리 내릴 수 있도록 기도하며 우리 자신을 봉헌해야겠습니다.

해마다 성소 주일이 되면 고인이 되신 ‘김 안젤로 주교님’의 말씀이 귓가에 생생하게 맴돕니다. “아들 딸 많이 낳아 신부, 수녀 만드십시오.”주교님께서는 ‘우리 모두가 우리 교구의 복음화와 우리나라, 더 나아가 전 세계의 복음화를 위해서 필요한 일꾼들을 계속 배출해 내고, 그 안에서 하느님 나라가 완성될 수 있도록 노력하자’고 말씀하셨던 것이 아닐까요? 저는 주교님의 이 말씀이 우리 민족의 복음화를 위해 커다란 역할을 했다고 믿습니다. 이는 비단 주교님만의 바람은 아니었습니다. 세상 끝 날까지 언제나 함께 해주시겠다고 약속하신 예수님의 뜻이기도 했기 때문입니다.

우리 모두 앞으로도 계속 우리 자신을 통해서 복음이 전해질 수 있도록 노력하며, 하느님의 대가 끊어지지 않도록 힘써야겠습니다. 우리의 작은 노력과 봉헌이 복음화의 초석이 되고 이를 앞당기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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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노성호(요한보스코) 신부
  | 10.17
450 66.8%
[수원] 왜 주저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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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전교 주일이다. 특별히 선교율 저하가 교회의 큰 문제로 제기되고 있는 시점에서 전교 주일의 의미를 다시 한 번 깊이 새겨야 할 것이다.

오늘 복음에서는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마지막으로 당부하신 말씀이 나온다. 아니 예수님의 말씀은 당부가 아니라 오히려 명령이다. 즉 “너희는 가서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을 내 제자로 삼고, 세례를 베풀고, 내가 너희에게 명한 모든 것을 지키도록 가르치라.”는 명령이다. 그 명령과 결부된 내용은 이렇다. 선교 활동 무대에서 “모든 사람들”이라는 대상에게 세례를 베풀어야 한다. 그리고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라.”는 말씀을 하심으로 자기의 사람이 아니라 하느님의 사람으로 만들어야 한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내 제자로 삼으라.”고 덧붙이신다.

더 나아가 우리는 주님께서 알려주신 계명을 알도록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지키도록 가르쳐야” 한다. 이것이 ‘선교 명령’에 담겨져 있는 내용이다. 이렇게 주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당부가 아닌 명령으로 선교할 것을 말씀하신다.

그런데 왜 주저하는가!

오늘 제2독서에서는 “들어보지 못한 분을 어떻게 믿겠습니까? 말씀을 전해주는 사람이 없으면 어떻게 들을 수 있겠습니까?”라면서 복음을 전하지 않으려는 그리스도인들을 향해 다시 한 번 선교 사명을 일깨워줄 뿐만 아니라 선교 사명을 수행할 것을 독려한다.

그런데 왜 주저하는가!

우리는 혹시 지금까지 신앙생활을 하면서 복음을 전할 수 있다는 희망을 미리 포기하지는 않았는지, 아니면 들어야 믿을 수 있다고 했는데 들을 수 있는 기회마저 이웃에게 배려하지 않고 우리의 책임을 회피하지는 않았는지, 아니면 말씀을 전하는 사람이 있어야 들을 수 있다고 했는데 모두가 “내가 아니더라도 다른 사람이 하겠지.”하며 너무 무관심하지는 않았는지 반성해야 한다. 그리고 “기쁜 소식을 전하는 이들의 발이 얼마나 아름다운가!”라는 말씀처럼 우리가 기쁜 소식을 전하지 않는다면 그리스도인들이 걸어야 할 바른 인생길에서 벗어난 삶이라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그런데 왜 주저하는가!

우리들은 복음을 전할 수 있다는 희망을 미리 포기하지 말아야 한다. 들어야 믿을 수 있는 것처럼 우리 모두 기쁜 소식을 들려주는데 인색하지 말아야 하겠다. “누구든지 사람들 앞에서 나를 안다고 증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그를 안다고 증언하겠다.”(마태 10,32)는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하고, 증인으로서 증언해야 한다. 이럴 때 “주님의 집이 서 있는 산으로 만국이 물밀듯이 밀려들리라.”라는 예언의 말씀이 이루어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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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이강건(빈첸시오) 신부
  | 1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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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지오 단원으로 활동하고 있는 바오로 형제님은 올해 본당의 사목 목표인 ‘쉬는 교우 찾기’ 운동에 열심히 참여하고 있습니다. 사실 쉬는 교우를 다시 주님의 품으로 인도하기 위해 그의 가정을 방문하는 것은 그리 쉽지 않았습니다. 처음에는 굳게 닫혀있는 아파트 현관 앞에서 한두 시간을 허비하다 그냥 발길을 돌린 적도 여러 번 있었습니다. 그럴 때면 ‘내가 왜 이렇게 사서 고생하는 걸까!’ 하는 생각으로 포기하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어느 때부터인가 쉬는 교우의 회두는 자신이 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하시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면서, 닫힌 현관이 열리기를 기다리는 시간동안 그 가정을 위해 묵주기도를 봉헌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성모님께서 이곳 쉬는 가정의 회두를 위해 주님께 전구해 주시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기도드리자, 그때부터는 기다리는 시간이 더는 지루하지 않았고, 오히려 은혜로운 시간임을 체험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기도하면서 쉬는 가정을 방문하자 오히려 그 전보다 결과도 좋았습니다. 예전에는 문도 열어주지 않던 쉬는 교우의 가정들이, 기도와 함께 웃는 모습으로 방문하자 감사의 인사까지 전해주는 것이었습니다. 그때 바오로 형제님은 체험하였습니다. ‘전교는 내가 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하시는 것이며, 나는 그저 주님의 도구였다는 것을…’ 오늘도 쉬는 교우 한 가정을 주님께 초대하는 성과(?)를 주님께 봉헌하였습니다. 그리고 자신을 당신의 도구로 써 주시는 주님께 감사의 기도를 드리며, 기쁜 마음으로 귀가합니다.”

봉사자로 활동하다보면 쉬는 교우를 방문하거나, 비신자 가정을 방문해 전교해야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지금과 같은 아파트 주거 형태에서는 집 현관은 커녕 아파트 동 현관도 들어가기가 쉽지 않습니다. 굳게 닫힌 아파트 동 현관은 마치 빈틈없는 요새(?)같습니다. 그러다보니 봉사자들은 각자의 노하우로 철통같은 요새(?)를 들어가는 방법을 터득해 낸다고 합니다. 이렇게 하느님 나라의 복음 선포를 위해 노력하시는 모든 봉사자에게 감사의 인사를 드리고 싶습니다.

오늘 복음 말씀에서 예수님께서는 지상에서의 구원 사업을 다 이루시고 승천하시기에 앞서, 제자들에게 중요한 지상 사명을 주십니다. 그 사명은 바로 모든 민족들에게 복음을 선포하여,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가르치라는 말씀이었습니다(마태 28,18-20 참조). 그리고 이 사명은 바로 주님을 믿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실천해야 하는 신앙의 목표가 되었습니다. 이 목표야말로 교회가 가야할 가장 중요한 본연의 사명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복음 선포를 위해 수많은 난관과 고통을 극복하면서, 이러한 선포의 삶이 바로 그리스도인의 삶임을 강조하고 있습니다(로마 10,14-15 참조). 그리고 그러한 삶을 사는 이들이 얼마나 축복받은 사람인지를 알려주고 있습니다. 또한 이사야 예언자는 미래에 모든 민족들이 주님의 말씀을 듣고 주님의 집에 모이는 때가 올 것이라고 예언하고 있습니다(이사 2,2-3 참조). 그러므로 이 모든 것을 이루어내기 위해서는 모든 민족들이 주님의 말씀을 듣고 복음화 될 수 있도록 주님께 초대하는 복음 선포가 바로그리스도인들의 중요한 사명임을 기억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오늘 ‘민족들의 복음화’를 위해 미사를 봉헌하는 ‘전교 주일’을 지내고 있습니다. 특별히 교회 본연의 사명인 선교를 위해 힘들고 어려운 선교지역에서 노력하고 있는 선교사들을 위해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선교 사명은 선교사들만의 몫이 아니라, 세례를 통해 하느님의 자녀가 된 우리 그리스도인들 모두의 사명이고 소명임을 마음에 새겨야 할 것입니다. 바로 그때 오늘 복음 말씀에서 약속하셨듯이 주님께서는 언제나 항상 우리와 함께 하실 것입니다. 이 약속이 바로 주님께서 우리 신앙인들에게 주신 축복이며, 은총임을 기억합시다. “내가 세상 끝 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마태 28,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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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이재현 요셉 신부
2016년 10월 23일
  | 10.17
450 66.8%
[수원] 삶이 곧 전교가 되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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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쁜 소식을 전하는 이들의 발이 얼마나 아름다운가!”(로마 10,15) 이 구절을 읽고 있는 지금, 왜 마음이 들뜨고 기분이 좋아지는 것일까? 기쁜 소식이라면 일단 기뻐할 만한 일이고, 축하해야할 일이고, 함께 행복해질 수 있는 일이다.

기쁜 소식을 접하면 얼굴에 자연스레 미소가 번지고 기쁨으로 마음이 충만해진다. 그리고 당장 달려가서 아직 그 소식을 듣지 못한 이들에게 전하고 싶어진다. 또한 그 기쁜 소식을 듣고 기뻐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며 다시 한 번 기쁨을 느낀다.

예전에 타교구에서 ‘선교왕’으로 뽑히신 분에 관한 기사를 읽은 적이 있다. 그분은 2년 반 동안 무려 70명을 하느님께로 인도하셨다고 한다. 기사에 나온 사진을 통해 그분의 얼굴을 볼 수 있었는데, 얼굴에 번져있는 미소가 가장 먼저 눈에 띄었다. 그분의 선하고 밝은 모습은 ‘이분은 기쁘게 사시는 분이구나.’라는 생각을 갖게 했다. 얼굴에 미소를 담고 기쁘게 살아가는 사람에게는 이웃들이 다가오기 쉬울 것이다. 또 사람들로 하여금 ‘저 사람은 뭐가 좋아서 저렇게 항상 웃으며 다닐까? 저 사람에게는 무언가 특별한 것이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하게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실제로 그분에게 비슷한 질문을 하는 이웃들도 있다고 한다. 그러면 그분은 ‘하느님을 만나면 항상 즐거워요.’라고 말씀하신다고 한다. 하느님을 알고 주님과 함께 살아가기에 웃을 수 있고 기쁘게 살아갈 수 있다는 이야기이다. 그러면 그를 보고 다가온 이웃들은 그가 알고, 믿고 있는 하느님에 대해 관심을 갖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저 사람이 저렇게 기쁘게 사는 이유가 하느님 때문이라는데, 그런 좋은 하느님을 나도 좀 알아보자.’하는 마음을 갖게 되는 것이다.

하느님을 알리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다. 길거리에 나가 알지도 못하는 사람들에게 책자를 건네는 방법도 있겠지만, 이는 돌밭에 씨를 뿌리는 것과 다름이 없다. 가장 좋은 선교는 바로 ‘모범’이다. 신앙인답게 사는 것이다.

지금 나의 모습을 바라보자. 하느님을 알고 믿는 나는 지금 어떤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는가? 내 생활과 모습은 하느님의 향기를 풍기고 있는가? 내가 하느님과 함께 기뻐하며 살아간다면, 나를 보고 나와 만나는 모든 사람들의 마음에 저절로 복음의 씨앗이 심어진다. 억지로 심으려고 한다고 심어지는 것이 아니다. 그들이 알아서 씨앗을 받아가고, 씨앗을 천천히 잘 키워나갈 것이다.

전교 주일을 맞아 전교를 위한 전교가 아니라 삶으로 보여주는 전교를 하자. 내가 먼저 성실하게 살고, 보람 있게 살며, 늘 웃음을 머금고 사는 하느님 자녀로서의 모습을 보여준다면 전교는 순조롭게 이루어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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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정지용(베드로) 신부
  | 1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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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되지는 않았지만 타국에 와 있다 보니, 언어가 다른 사람들에게 하느님의 말씀을, 하느님의 사랑을 전달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절실히 깨닫고 있습니다. 매번 용기를 내야만 하는 상황과 마주하면, 멈칫거리고 주저하기 일쑤입니다. 그러면서 남미나 아프리카에서 선교 중인 우리 수원교구 신부님들이 정말 존경스럽고, 자랑스럽다는 생각을 거듭하게 됩니다.

“기쁜 소식을 전하는 이들의 발걸음이 얼마나 아름다운가!” 라는 바오로 사도의 말씀처럼, 하느님 말씀의 씨앗을 뿌리는 선교사들의 삶이 아름다움으로, 감사함으로 늘 새롭게 다가옵니다. 그러면서 우리 주변에 선교의 영역이 너무나도 많다는 것을 다시금 실감합니다. 이주 노동자들, 다문화 가정들, 북한 이탈주민들, 다양한 사회적 소외 계층들 등등.

우리가 모두 조금씩만 더 관심을 가지고 그들을 도와주고 하느님께로 이끌어 준다면 얼마나 많은 열매를 맺을 가능성이 있는지 생각해 보게 됩니다. 하느님을 모르는 우리 이웃들에게, 신앙생활을 하지 않고 하느님에게서 멀어진 교우들에게 하느님의 사랑, 하느님의 자비 그 기쁜 소식을 전하는 분들의 발걸음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감사하는 마음으로 바라보게 됩니다.

아인슈타인이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습니다.“배는 해변에 묶여 있을 때 가장 안전하다. 그러나 그러라고 배를 만든 건 분명 아니다.” 물론 도전하는 삶을 살라는 의도로 한 말이지만, 신앙인의 정체성을 깨닫게 해 주는 좋은 비유가 되기도 합니다. 우리가 나 자신에게만 묶여있다면, 복음을 전하러 이 세상이라는 바다에 나아가지 않는다면, 그렇다면 나는 신앙인으로서의 나 자신의 존재 이유를 잃어버린 것입니다. 교황 바오로 6세께서는 『현대의 복음선교』를 통해 이렇게 확언합니다. “교회가 존재하는 것은 바로 복음 선포를 위해서입니다.”즉, 복음 선포를 하지 않는 교회는 존재 이유를 잃어버린 교회라는 말씀입니다.

예수께서 죽음에서 부활하셨다고 기쁨에 가득 차 온 세상에 복음을 선포하던 제자들의 그 열정과 가슴 벅참을 우리도 함께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해 봅니다. 어둡고 지치고 힘든 내 삶속에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찾아 오셨다고, 그리고 그분은 세상 끝날까지 나와 함께 계시리라고 가슴 벅차게 선포할 수 있는 우리가 되었으면 합니다.

성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1990년대를 ‘새로운 복음화를 위한 대림 시기’라고 부르셨습니다. 말하자면 새로운 천 년대를 시작하는 이 세기야말로 복음화의 탄생과 공생활이 시작되는 시기인 셈입니다. 우리도 이런 마음가짐과 지치지 않는 선교의 열정으로, 복음 선포의 마라톤을 잘 달릴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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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김영삼 요셉 신부
2017년 10월 22일
  | 1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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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 예수님 사랑을 전하는 방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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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학교 학생이 주일학교 교감 선생에게 이어폰을 끼워주며 ‘이 노래를 들어 보라.’고 했다. 그 음악은 ‘방탄소년단’이라는 그룹의 노래였다고 한다. 이 학생처럼 사람들은 자기가 좋아하는 음식, 노래, 영화, 책 등을 주위 사람들에게 보여주고 나눠주고 들려주고 싶어 한다. 그렇다면 우리 천주교 신자들은 사람들에게 무엇을 들려주고 싶어야 할까? 당연히 하느님 자비의 얼굴이신 예수님을 전하고 함께 복음을 나누고 싶어 해야 할 것이다.

오늘 독서인 이사야 예언서는 모든 민족들이 주님의 집을 중심으로 모여 평화의 왕국을 이룰 것임을 예언한다. ‘모든 민족들이 모여든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통해서 ‘모든 민족들이 주님 앞에 돌아올 것임’을 말하는 것이다. 또한 로마서는 사람이 입으로 고백하고 마음으로 믿어 구원에 이르는 일이 어떻게 이루어지는지, 그 과정에 대해서 설명한다.

인간 구원은 어떻게 실현되는가? 구원 앞에서 우리는 주님의 이름을 부른다. 부름 앞에는 믿음이 있고, 믿음 앞에는 들음이 있다. 들음 앞에는 전파가 있고, 전파 앞에는 보내심이 있다. 이것은 바로구원의 계단이다. 이 구원의 계단에서 가장 첫 단계는 하느님의 보내심이다. 하느님의 보내심은 우리 모두에게 해당된다.

전교는 예수님의 명령이다. “너희는 온 세상에 가서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선포하여라”(마르16,15). 나만 구원을 간직하거나 독점할 수 없다. 내가 구원받았다면 그 구원을 남에게 전하고 싶은 열망이 있기 마련이다. 내가 주님으로부터 용서받고 사랑받고 있다면, 사랑을 주신 그분을 전하고 싶어지고 결국 예수님의 사랑을 전하게 되는 것이다. 곧 우리 죄로 인해 돌아가신 예수님의 희생적인사랑을 전하는 것이다.

우리는 하느님께서 사람들을 사랑하시고 구원하신다는 ‘기쁜 소식’을 사람들이 알도록 선포해야한다. 이 ‘기쁜 소식’이란, 하느님께서 아드님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은총과 자비의 선물인 구원을 모든 인간에게 주신다는 선포이다. 선포 후에는 전교의 대상을 정하고 그 사람을 위한 끊임없는 기도가 이어지도록 해야 한다. 그러면 그 기도는 분명히 이루어진다. 예수님께서도 기도가 아니면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하셨다.

전교의 첫째가는 수단은 ‘그리스도인 생활의 증거’다. 어느 자매가 결혼했는데, 시아버지는 ‘가톨릭 그리스도교’ 신자가 아니었다. 시아버지가 처음에는 가톨릭 신자인 며느리를 못마땅해 하다가 진정한 가톨릭 신앙인의 삶을 지켜본 어느 날, 천주교로 개종할 생각을 넌지시 비쳤다고 한다. 현대인은 머리로 그려지는 이론보다 눈에 보이는 구체적인 삶과 행동을 더 신뢰한다. “현대인은 스승의말보다 좋은 표양을 주는 사람의 말을 기꺼이 듣습니다”(교황 바오로 6세 권고, 『현대의 복음 선교』 41항). 그러므로 입으로만 하는 전교가 아닌 하느님께 헌신하고 동시에 무한한 열성으로 이웃에게 헌신하는 삶의 표양이 전교의 첫째 수단이다.

끝으로, 교황 성 요한 바오로 2세의 말씀을 마음에 새기자. “그리스도인이란 결국 누구입니까? 바로 그리스도께 붙들려 땅 끝에 이르기까지(사도 1,8), 어디에서나 그리스도님을 알리고 사랑하도록 애쓰는 사람입니다. 신앙은 우리에게 선교사가 되라고, 그분의 증인이 되라고 재촉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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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박정배 베네딕토 신부
2018년 10월 21일
  | 1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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