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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천] 전교는 왜 해야 하는 것일까요?
조회수 | 2,273
작성일 | 08.10.14
"아버지, 하느님을 믿으세요?” “그럼, 믿고 말고.” 그러자 이 아이는 다시 아버지에게 말했습니다. “그러면 아버지는 왜 전교하지 않으세요?”

전교는 왜 해야 하는 것일까요?

1. 주님께서 전교하셨고, 주님의 명대로 사도들이 전교했으며, 초대교회 신자들이 전교했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세상에 오셔서 하신 일이란 오직 전교하시는 것이었습니다. 주님께서는 먹고 마시고, 기적을 행하시고, 말씀하신 모든 것이 아버지 하느님을 전하시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리고 승천하시면서 제자들에게 당부하셨습니다(마르 16,15). 그래서“사도들은 날마다 이집 저집에서 쉬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가 그리스도라는 것을 전했으며”(사도 5,42),“흩어져간 신도들은 두루 돌아다니며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였다”하였습니다(사도 8,4).

2. 열매 맺지 못하는 무화과나무와 같이 잘라져서 버려질 것이기 때문입니다(루가 13,6-9). 생명의 중요한 특징 중의 하나는 자기 복제입니다. 죽은 나무는 열매를 맺지 못합니다. 살아도 살아 있는 것이 아닙니다. 전교하지 못하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며, 죽은 믿음은 열심이 아니라 자기 만족이요 이기심일 뿐입니다.

3. 받은 달란트를 묻어두는 어리석은 종과 같이 가진 것마저 빼앗기고 말 것이기 때문입니다(마태 25,14-30). 가르치며 배운다는 말처럼 전교하면 우리의 믿음은 더욱 풍요롭게 됩니다. 그러나 전교하지 않으면 우리는 말씀에 빈곤하게 되며 받은 은총마저 잃게 됩니다.

4. “만일 복음을 전하지 않는다면 나에게 화가 미칠 것”(1고린 9,16)이기 때문입니다. 바오로 사도는“복음을 전하는 것은 자랑거리가 아니라 마땅히 해야 할 일”이라고 하십니다. 주님께서는“죽은 자의 장례는 죽은 자들에게 맡겨두고 너는 가서 하느님 나라의 소식을 전하라”(루가 9,60) 하셨고, 제자들을 파견하시며“누구와 인사하느라고 가던 길을 멈추지도 말고”(루가10,4) 지체 없이 전교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전교를 하지 않는 것은 안하면 그만인 것이 아니라 마땅히 해야 할 일을 안하는 것이며, 안하면 화가 미치는 불순종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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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천교구 김재복 모세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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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9보다 더 큰 숫자가 1입니다.

양을 돌보는 2명의 목동이 살았습니다.

한 목동은 99마리의 양을 지키기 위해, 다수를 위해 보잘것없는 1마리는 이리의 공격에서 내버려 두었습니다. 그는 이렇게 주님께 말하였습니다. “주님, 다수 민중을 위해 보잘것없는 1마리는 그냥 두었습니다. (…) 그리고 또 다음에도 98마리 다수(민중, 대중)를 지키기 위해 보잘것없는 1마리는 어쩔 수 없었습니다. (…) 그렇게 하면서 그 목동의 양들은 그 수가 점점 줄어들었습니다.

다른 한 목동은 1마리의 양을 지키기 위해 끝까지 이리의 공격을 막아냈습니다. 그리고 또 다음에도 1마리 양을 지키려고 자신의 목숨을 걸고 이리와 싸워 물리쳤습니다. 그렇게 하여 그 목동의 양들은 100마리가 온전하게 살아남았습니다.

주님께서 어느 종이 일을 잘 했다고 칭찬하실까요? 그리스도교 신앙 안에서는 다수(99 민중)를 위해 하나(1 보잘것없는 이)를 업신 여길 수 없습니다. 그러나 세상 정치적인 대의논리에서는 99의 민중을 위해 하나는 감수하기도 합니다.

어쩌면 ‘정의’라는 명목으로 ‘사람’을 버리기도 하는 것이 세상의 정치 논리입니다. 1마리 양이 바로 그대 당신 자신이 되었다면…. 99의 민중, 대중들에게 곡해의 비난을 받을지라도, 어린 양 하나를 위해 자기 목숨을 바치시는 분이, 99 민중들의 영웅 ‘바라빠’를 원하는 그 민중의 실체 속으로 자기 십자가를 지고 들어가신 그가 우리의 착한 목자입니다.

99보다 큰 숫자가 1입니다. 사람들이 사랑에서 버려지는 것은 하느님께서 그들을 돌보시지 않아서가 아니라, 바로 당신과 내가 자비롭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손 안에 있는 사랑을 나누어 주는 도구가 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자비로운 사랑의 마음이 없이는, 사랑의 결핍을 느끼는 이 무서운 마음의 병을 구제할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우리 자신의 포기에 대한 보상으로 주신 상은 바로 하느님 자신입니다.

기억합시다. 주님은 우리가 당신을 믿는 자가 되기를 바라시는 것이 아니라 당신의 말씀을 가르치고 지키는 충직한 제자가 되기를 바라십니다.

정형준 바오로 신부
  | 1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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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천] 복음을 진정 기쁘게 사십시오

켈커타

마더 테레사 수녀님의 사랑의 선교회가 있는 인도의 켈커타를 다녀오신 분들은 켈커타가 아니라 콜카타로 불러야 옳다고 합니다. 제 동창신부는 현재 콜카타에서 봉사를 하고 있습니다.

아직 운전면허가 없는 동창신부는 왜 그리도 인도가 좋으냐고 물었더니 운전을 할 수 없어 차도로 갈 수 없기 때문에 인도가 좋다고 농담을 하였습니다.

오늘도 동창은 새벽에 일어나 환자들과 그곳 수녀님들과 미사를 봉헌하고 온갖 궂은 일들을 하고 있을 것입니다. 마더 테레사 수녀님은 살아 생전에 절대 세탁기를 쓰지 못하도록 하셨다고 합니다. 환자들의 빨래를 손으로 직접 빨아야 사랑을 느낄 수 있고 고통 받는 이들의 아픔을 체험하기 때문이라고 하였습니다.

동창신부는 아침을 먹고 그 같은 환자 빨래를 하고 있을 것입니다. 그곳 사랑의 선교회에는 세계 각국의 젊은이들이 모여 자비를 쓰며 봉사하고 있다고 합니다. 한번 그곳에서 봉사하셨던 분들은 마법에 걸린 듯 계속 그곳을 찾는다고 합니다.

사랑의 힘은 과연 위대합니다. 어떤 대가를 바라서가 아니라, 그저 그 일이 좋아서 기쁘게 봉사합니다.

인도 콜카타에서 그 같은 기쁨을 체험하였던 ‘조병준’님은 그곳에서 만났던 천사들을 소개하는 <제 친구들하고 인사하실래요?>라는 책을 썼습니다.

그이는 그곳에서 만난 독일인 친구 ‘안디’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안디’는 처음 콜카타에서 일주일을 지냅니다. 두 번째는 여섯 달, 세 번째는 1년, 네 번째는 4년, 그리고 다섯 번째는 5년을 머무를 예정이라고 합니다. 안디는 평생을 콜카타에서 지낼 결심을 하고 있다고 합니다.

5년마다 한 번씩 독일에 돌아가 돈을 벌어 일부를 사랑의 선교회에서 쓰고, 나머지는 아껴 모아서 언젠가는 마더 테레사가 다 돌볼 수 없는 할아버지 환자들을 위한 집을 만들어 그들과 함께 자신의 노년을 보낼 꿈을 꾸고 있다고 합니다.

BMW를 몰던, 잘 나가던 은행원 시절을 접고 그는 인도에서 사랑의 나무를 가꾸어 열매 맺을 가장 소중하고 가치 있는 일에 인생을 투신한 것입니다. 무엇이 그로 하여금 그런 삶을 선택하게끔 만들었는지 조병준님이 물어봤나 봅니다. 안디의 대답은 의외로 아주 단순했습니다.

“헤이, 준, 그건 아주 간단해. 이 일을 하면 우선 내가 행복하거든. 그리고 내가 조금 도움을 주는 저 아프고 가난한 사람들도 아마 조금은 행복할 거야. 그러면 저 위에서 세상을 보고 계시는 그분께서도 행복해 하시지 않겠어?”

돈키호테

세계 최고의 작가 100인이 선정한 문학 역사상 가장 위대한 작품은 ‘미켈 데 세르반테스’(1547~1616)의 <돈키호테>라고 합니다. 조금은 엉뚱한 이상향의 꿈을 품고 우스운 기사가 되어 좌충우돌하는 돈키호테의 이야기는 누구나 들어 보았을 것입니다. 책에서 돈키호테는 이 같은 심오한 말을 합니다.

“행복한 시절, 행복했던 수세기를 황금시대라 이름 붙였던 이유는 오늘날 이 철기 시대에 높이 평가되는 황금이 복된 그 시기에 쉽게 구할 수 있어서가 아니라, 그 시절의 사람들은 ‘네 것, 내 것’이라는 두 단어를 모르고 살았기 때문이었소. 저 성스러운 시대에는 모든 것을 공동으로 소유했지요. 그 누구라도 일용할 양식을 얻기 위해서는 달콤하게 익은 열매를 아낌없이 주는, 잎이 무성한 떡갈나무에 손만 뻗으면 되었소이다. 맑은 샘물과 흐르는 강물은 사람들에게 맛 좋고 투명한 물을 충분히 제공해주었지요.”

세상 모든 사람들이 자유롭고 행복하며 넉넉히 살기를 원하신 하느님 아버지의 뜻, 이를 우리는 기쁜 소식, 복음이라 부릅니다. 어느 한 사람이나, 한 민족만이 배부르고 등 따스한 안락의 삶을 사는 것이 아니라 모두가 행복한 세상을 살아가는 것이 하느님의 바람이셨습니다.

그 같은 일이 도무지 이루어질 수 없을 것 같고 불가능해 보여도, 기쁨의 세상을 위한 이상향을 꿈꾸고 설령 사람들의 몰이해와 비웃음이 쏟아져 온다 하여도 세상의 평화를 위한 발걸음을 멈추지 않는 것, 때론 돈키호테 같다는 핀잔을 듣더라도 끊임없이 그 길을 걷는 이들이 있기에 세상은 아직도 살만한 가치가 있는 것입니다. 복음 선포는 우선 자신이 복음을 사는 것입니다.

자신이 이미 천국의 기쁨을 이 세상에서부터 살 때, 세상이 복음화되는 것입니다. 사실 복음은 전하는 것이 아니라 사는 것입니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복음을 진정 기쁘게 살 때, 오늘 바오로 사도의 말씀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들의 소리는 온 땅으로, 그들의 말은 누리 끝까지 퍼져 나갔다”(로마 10, 18)

오늘도 세상 곳곳에는 기쁨의 복음을 사는 이들이 많습니다. 그들은 발만 아니라 손과 얼굴, 마음도 밝고 아름답습니다.

► 춘천교구 배광하 신부
  | 1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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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 꽃을 몸에 피워 천당에 올랐어라.” 성가 289번 ‘병인 순교자의 노랫말’ 입니다. 최민순 신부님이 지었습니다. 피를 흘리는 순교의 비극적 실재를 ‘아름다움’으로 느끼게 해 줍니다. 진정한 예술가들은 성령의 카리스마를 느끼게 해 줍니다.“어지신 주교신부 웃으며 칼을 받고, 겨레의 선열들이 기꺼이 쓰러졌다. 피 꽃을 몸에 피워 천당에 올랐어라. 찰나의 죽음으로 영생을 얻었어라.”

생 택쥐베리의 ‘어린왕자’ 에 보면 술꾼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어린왕자가 술꾼에게 묻습니다. “왜 술을 마셔요?” 술꾼이 대답합니다. “술을 마신다는 부끄러움을 잊기 위해 마시지.” 어린왕자는 그를 떠나며 이렇게 중얼거립니다. “어른들은 참 이상해.”

사도 바오로는 로마인들에게 이렇게 편지를 씁니다. “형제 여러분, 여러분이 예수님은 주님이시라고 입으로 고백하고 하느님께서 예수님을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일으키셨다고 마음으로 믿으면 구원을 받을 것입니다. (…) 성경도 ‘그를 믿는 이는 누구나 부끄러운 일을 당하지 않으리라.’ 하고 말합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들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명령한 모든 것을 가르쳐지키게 하여라.”

전교주일에 생각해 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전하는데 우리는 ‘부끄러움’을 느끼고 있지는 않은지, 천주교 신자임을 드러내는 것을 부끄러워하지는 않는지 반성해 봅니다. 땅 끝까지 복음을 전하는 선교사들의 영웅적 삶과 선조들의 순교의 영광 앞에 한없이 초라해 집니다. 예수님의 말씀의 회초리가 몹시 따갑게 느껴집니다. “누구든지 나와 내 말을 부끄럽게 여기면, 사람의 아들도 자기의 영광과 아버지와 거룩한 천사들의 영광에 싸여 올 때에 그를 부끄럽게 여길 것이다.”

▮ 춘천교구 홍기선 히지노 신부 : 2016년 10월 23일
  | 1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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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천] 사랑이 사랑에게

제가 어렸을 때의 기억이 납니다. 어느 평일 저녁 미사가 끝난 후 본당 신부님께서 오늘은 특별한 분을 모셨다고 하면서 어떤 자매님을 제단 앞으로 부르셨습니다. 그 때 그 자매님은 자신의 신앙체험에 대해 말씀해 주셨는데 그분의 이야 기를 들으면서 주변 신자 분들이 울길래 어린 마음에 저도 같이 따라 울었던 생각이 납니다.

그 분은 어린 두 자녀를 둔 젊은 자매님이셨는데 항암 치료로 인해 머리카락이 다 빠져서 털모자를 쓰고 계셨습니다. 비록 그 모습은 야위고 수척해 보였으나 얼굴은 굉장히 밝고 편안한 느낌이었습니다. 뭐랄까, 이제는 세상의 모든 것들 에 대해 이해할 것 같고, 받아들일 것 같은 표정이었다고 할까요? 그 때 그 분 말씀이 정확히 다 기억나지는 않지만 그 분은 자신의 질병에 대해 하느님께 원망 했던 순간과 어린 두 자녀에 대한 걱정, 그리고 앞으로 얼마나 살 수 있을지에 대한 두려움을 담담히 이야기하셨습니다. 비록 원망과 절망에서 시작했지만, 이제는 자신의 삶이 모두 하느님의 선물임을 느낄 수 있고, 두 자녀들도 처음에 많이 걱정되었으나 마냥 어리기만 했던 아이들이 엄마가 아프다는 것을 알게 되면 서 점점 성장하는 모습을 지켜볼 수 있었다고……. 그래서 지금은 매일이 감사 하다는 눈물어린 고백이었습니다.

그 자매님의 그 이후 이야기에 대해서는 잘 모릅니다. 저도 그 때 처음 뵌 분이 었으니까요. 하지만 그 때 그 자매님의 모습과 이야기는 아직도 저에게 남아있어서 지금도 가끔 떠오르곤 합니다. 신앙인으로 산다는 것은 하느님을 통해 세상을 보고, 하느님과 함께 사람들을 만나며, 매 순간을 하느님 안에서 살아가는 것임을 그 자매님의 모습을 통해 다시금 돌아보곤 합니다. 그 자매님은 화려한 언변 도, 많은 교리 지식도 지니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느리고 작은 그 말 속에 진심 으로 우러나는 하느님을 이야기 할 수 있었기에 저의 지난 시간 속에 그렇게 또렷이 각인된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오늘 전교주일을 맞이하면서 그런 질문을 해봅니다. 만약 하느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하느님을 전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그 답은 이러합니다. 하느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은 하느님을 믿고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을 통해 하느님을 만납니다. 나를 통해 하느님이 어떤 분인지 남들이 알게 하시기 바랍니다. 나의 말과 나의 생각과 나의 행동을 통해 다른 이들은 내 안에 계신 하느님 을 봅니다. 그렇게 하느님은 나를 통해 다른 누군가에게 말을 건네십니다. 그렇게 사랑은 전해집니다. 하느님의 사랑을 닮은 누군가로부터 하느님의 사랑을 닮 아갈 그 누군가에게…….

▥ 춘천교구 김혜종 세례자 요한 신부 - 2017년 10월 2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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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천] 우리는 서로가 서로에게 복음입니다.

세례를 받고 신앙인이 된다는 것에 대해 베네딕도 16세 교황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윤리적 선택이나 고결한 생각의 결과가 아니라, 삶에 새로운 시야와 결정적인 방향을 제시하는 한 사건, 한 사람을 만나는 것” 입니다. [베네딕도 16세, 회칙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Deus Caritas Est), 1항 참조]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단지 윤리적 측면에서 바르고 착하게 살고자 하는 차원에 머무르지 않습니다, 아울러 ‘내가 종교가 필요한데 가만히 보니 천주교가 이미지도 좋고, 신자들도 괜찮은 것 같아서’ 선택하는 그런 차원의 것도 아닙니다. 신앙은‘윤리적 선택’ 이나 ‘생각의 결과’ 가 아니라, ‘삶에서 그리스도를 만나는 것’입니다.

나로 하여금 잃어버린 삶의 의미를 다시 찾게 하고, 죽음의 두려움을 이긴 참된 부활의 기쁨을 살아가게 하며, 내 삶에 잃어버린 따뜻함을 건네시는 그분을 매 순간 만나는 것입니다. 그렇게 신앙은 ‘그리스도를 통한 삶의 느낌표’ 를 찾는 순간들입니다.

이 모든 것이 가능한 이유는 그분이 먼저 우리에게 ‘착한 사마리아 사람’ 이 되어주셨기 때문입니다. 세상에 상처받고, 삶에 지친 나에게 먼저 손을 내미시고 다가오는분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진정 그분을 만난 사람은 삶의 어둠 속에서도 빛을 봅니다. 슬픔 속에서도 가려진 기쁨을 봅니다. 이렇게 신앙인은 그리스도를 통해 빛을 보며, 그리스도 안에서 기뻐하는 사람들입니다. 세상의 어둠이 짙을수록 빛은 더 선명해지고, 슬픔이 깊을수록 기쁨은 더 소중하듯, 이제 우리는 그 빛과 기쁨을 이웃과 나눠야 합니다.

오늘 우리가 돌아보는 전교주일은 “누구에게 어떻게 신앙을 전할 것인가?” 라는 질문에 대한 답을 생각하는 날이기도 하지만, 또한 “나는 정말 내 삶의 빛과 기쁨이신 그리스도를 만났고, 지금도 만나고 있는가?” 라는 보다 근본적인 질문에 대한 대답을 마련하는 날이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가장 좋은 전교는 스스로가 먼저 빛과 기쁨 속에 살아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이 도대체 어디 계시냐고 질문하는 이들에게 바로 우리 자신이 하느님 존재의 증거가 되는 것입니다. ‘저 사람을 보니 정말 하느님이 계시는 것 같아…….’ 라고 누군가 이야기 할 수 있다면, 그것이 바로 우리가 복음을 제대로 살아가고 있음을 드러내는 증거가 될 것입니다. 그러니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것처럼, 우리도 사랑하는 사람이 되어 다른 이들도 그 사랑에 동참할 수 있도록 초대해야 합니다.

우리는 서로가 서로에게 복음입니다. 그리스도를 통한 빛과 기쁨을 건네는 사람들입니다. 우리가 진정 빛과 기쁨 속에 살아가는 사람들이 될 수 있다면 어둠을 이긴 빛이, 슬픔을 넘어선 기쁨이 언젠가 우리 모두의 삶 속에 살아 숨 쉬게 될 것입니다.

▦ 춘천교구 김혜종 세례자 요한 신부 : 2018년 10월 21일
  | 1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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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천] 마지막 유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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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 어느 마을에 게으른 두 아들 때문에 늘 골머리를 앓고 있는 부자 영감이 있었습니다. 큰 아들은 머리가 좋으나 공부하기를 싫어했고, 둘째 아들은 힘이 세고 재주는 좋으나 일하기를 싫어했습니다. 부자 영감은 어떻게 하면 두 아들을 사람 구실을 할 수 있도록 만들 수 있을까 궁리하였지만 뾰족한 수가 떠오르지 않았습니다. 부자 영감은 세상을 뜨기 직전에 마지막 유언을 남겼습니다.

“이제 나는 세상을 떠날 때가 가까웠다. 내가 가지고 있던 것을 너희들에게 공평하게 나누어 주겠다. 첫째에게 줄 것은 서가에 꽂힌 책 속에 있다. 둘째에게 줄 것은 밭에 묻어두었다. 열심히 찾아서 유용하게 쓰도록 해라.”

말을 마친 아버지는 조용히 눈을 감았습니다. 큰아들은 아버지가 남겨 주신 유산을 찾기 위해 서가에 있는 책들을 샅샅이 뒤졌으나 보물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큰아들은 매우 실망하였으나 이것저것 뒤져보는 사이에 눈에 띈 책의 내용에 마음이 쏠리기 시작했습니다. 마침내 큰아들은 마음을 다잡아 공부하여 과거에 급제하였습니다.

한편, 둘째 아들도 밭에 나가 보물을 찾기 위해 열심히 밭을 갈아 엎었으나 금싸라기 한 알도 나오지 않았습니다. 할 수 없이 둘째 아들은 이미 갈아놓은 밭에다 여러 가지 씨앗을 뿌리고 농사를 짓기 시작했습니다. 오래지 않아서 곡식이 무럭무럭 자라나 많은 수확을 거두게 된 그는 큰 부자가 되었습니다. 둘째 아들 역시 열심히 일하는 기쁨 속에서 아버지가 남겨 주신 유산이 무엇인지를 비로소 깨닫게 된 것입니다.

민족들의 복음화를 위해 기도하는 오늘, 우리들은 예수님의 마지막 유언을 듣습니다.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들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명령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여라”(마태 28,19-20).

우리는 이 마지막 유언의 말씀을 위 이야기의 큰아들과 작은아들에 대한 비유를 통해서 잘 새겨 듣는 신앙인이 되도록 합시다.

나는 과연 큰아들과 같은 지혜와 지식으로 말씀을 듣고 실천하는 사람인가? 아니면 작은 아들과 같이 몸과 행동으로 말씀을 실천하는 사람인가? 생각해 보고 자신의 위치에서 복음 말씀을 잘 실천하여 주님의 ‘마지막 유언’을 잘 따르는 신앙인이 됩시다.

또한 주교님의 담화문 내용을 잘 읽고 묵상하여 실천하도록 합시다. 그리고 세계 곳곳에서 나름대로의 삶의 방식으로 전교에 힘쓰고 있는 많은 선교사들이 결과에 연연하지 않고, 주어진 임무에 충실하여 좋은 결실을 거둘 수 있도록 기도 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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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천교구 차흥길(미카엘 비안네) 신부
  | 1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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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천] 선교, 진정한 나눔의 기쁨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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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쁜 소식을 전하는 이들 그들의 수고를 기억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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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 아프리카에서 선교하시던 분의 글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발가락 사이가 계속해서 무척 가려워, 어느 날 예리한 칼을 소독하여 조심스럽게 발가락을 갈라 보았다고 합니다.

그랬더니 발가락 사이에 애벌레들이 우글우글 하더랍니다. 샌들을 신고 맨발로 다니니 눈에 보이지 않는 벌레 유충들이 땀구멍 속으로 들어가 성장한 모양이라 하였습니다. 그 글을 읽는 순간 징그러움의 전율이 느껴졌습니다.

더운 여름과 벌레들을 유독 싫어하는 저는 습기와 벌레가 많은 곳에서의 복음 선포는 정말 자신이 없습니다. 더구나 워낙 토종 음식을 좋아하는지라, 김치와 두부, 된장찌개 없는 식단은 생각하고 싶지도 않습니다.

때문에 이역만리 낯선 곳에서 기후, 언어와 풍습, 음식 등의 불편을 감수하며 복음을 전하시는 분들의 숭고함에는 절로 고개가 숙여집니다.

진정 복음을 선포하는 분들의 수고와 눈물과 땀이 있었기에 하느님 안에 사는 기쁨을 선교지의 백성들이 맛볼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자기가 믿지 않는 분을 어떻게 받들어 부를 수 있겠습니까? 자기가 들은 적이 없는 분을 어떻게 믿을 수 있겠습니까? 선포하는 사람이 없으면 어떻게 들을 수 있겠습니까? 파견되지 않았으면 어떻게 선포할 수 있겠습니까? 이는 성경에 기록된 그대로입니다. ‘기쁜 소식을 전하는 이들의 발이 얼마나 아름다운가!’”(로마 10, 14~15).

작년 한 해에도 세계 여러 곳에서 복음을 선포하던 선교사들이 피살되거나 의문의 죽음을 당하였습니다. 순교는 아직도 끝나지 않았습니다. 박해는 아직도 세계 도처에 눈을 부릅뜨고 복음 선포자들의 목숨을 위협하고 있습니다.

많은 선교사들이 불편과 고통, 목숨의 위협 속에서도 복음을 선포하는 까닭은, 예수님의 사랑 안에서 참 기쁨을 맛본 때문이며, 그분께서 길이요 진리이심을 분명히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신앙 안에서 기쁨을 느꼈던 이들이 참 기쁨인 복음을 전할 수 있습니다. 이 지상에서 천국을 살아가는 이들이 천국을 만들 수 있고, 천국의 기쁜 소식을 전할 수 있는 법입니다.

그 같은 숭고한 일을 하시는 분들이 계시기에 세상은 아직도 살만한 곳이며 기쁨이 존재하는 평화의 낙원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언제나 너희와 함께

얼마 전 온 국민을 경악케 하였던 분당 모 개신 교회의 아프카니스탄 선교 피랍 사건은 복음 선포의 본질이 무엇인지를 잘 깨닫게 한 소중한 교훈의 사건이었습니다.

어떤 자매님은 그 개신 교회가 “순교를 하더라도 이슬람 지역의 선교는 계속할 것이다” 하는 이야기를 듣고 분개하면서, “순교란 목숨을 내 놓으며 신앙을 증거 하는 것이지 그렇게 살려달라고 애걸하는 것이 무슨 순교란 말이냐?” 하였습니다. 의미 있는 분노란 생각이 들었습니다.

정말 다행스러운 것은 가톨릭 선교사들의 아름다운 선교의 모습입니다. 가난한 나라에 복음 선포 때문이 아니라, 진정 그들의 고통에 함께 하며 동고동락하는 모습, 언제나 그들과 함께 하며 희망과 기쁨을 주는 모습을 자주 보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승천하시면서 당신 지상 삶의 마지막 명령을 제자들에게 하셨습니다. 그것은 복음 선포였습니다. 그런데 떠나가시는 스승님께서 남겨진 제자들에게 하신 끝 말씀은 분명 복음 선포의 자세가 어떠해야 하는지 잘 가르쳐 주시는 말씀이라 생각됩니다.

“보라, 내가 세상 끝 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마태 28, 20).

함께 있어 주는 것, 무엇을 전하는 것이 아니라 철저히 그들의 삶 속에 그리스도의 정신으로 융화되는 것, 가난한 이들에게 교만과 우월의 그릇된 정신으로 다가가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낮추어 예수님의 삶으로 살아가는 것, 그것이 진정한 복음 선포의 정신이라 하겠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주교회의 사무처장이신 배영호 신부님의 글을 나누고 싶습니다. 가치관을 잃은 인류, 근원을 망각한 인류, 돌아갈 고향을 잃은 인류에게 복음 선포는 더욱 절대적으로 다가오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근원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다행스럽게도 우리 곁에는 이 점을 깨우친 예언자들이 있어 왔습니다. 우리 시대에도 예언자들은 자꾸만 근원을 향한 길, 자칫 망각하고 지내온 근원을 향한 길이 본연의 길이라고 일러줍니다.

망각되고 상실된 우리 현 존재의 근원이자 고향을 다시 찾아 우리에게 데려다 주는 이른바 ‘존재의 목동’, ‘근원의 배달부들’이 우리 곁에 있고, 우리는 이러한 현대의 ‘착한 목자들’이 전하는 메시지를 듣는 행복을 나눕니다.”

이 시대에 참된 예언자로 살아가는 것, 그것이 진정한 복음 선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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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천교구 배광하 신부
  | 1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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