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요안 신부의 가톨릭

 l Home l Bestsite l Search l Freeboard l E-mail l

 
 

주일강론

평일강론

축일강론

대축일/명절강론

혼인강론

장례강론

예 화

사설/칼럼

♣ 현재위치 : 홈 > 강론자료실 > 대축일/명절강론

대축일/명절강론 코너 ( 대축일/명절 미사에 관련된 강론자료입니다... )

 


( 쪽지보내기 스크랩하기 프린터하기 홈페이지 )
463 49.6%
(백) 위령의 날(11월 2일) 첫째 미사 독서와 복음
조회수 | 1,917
작성일 | 08.10.30
제1독서 : 나는 알고 있다네, 나의 구원자께서 살아 계심을.
욥기 19장 1절, 23절-27ㄴ절

1 욥이 말을 받았다.

23 아, 제발 누가 나의 이야기를 적어 두었으면! 제발 누가 비석에다 기록해 주었으면!
24 철필과 납으로 바위에다 영원히 새겨 주었으면!
25 그러나 나는 알고 있다네, 나의 구원자께서 살아 계심을. 그분께서는 마침내 먼지 위에서 일어서시리라.
26 내 살갗이 이토록 벗겨진 뒤에라도 이내 몸으로 나는 하느님을 보리라.
27 내가 기어이 뵙고자 하는 분, 내 눈은 다른 이가 아니라 바로 그분을 보리라.

--------------------------------------------------------

제2독서 : 이제 그분의 피로 의롭게 된 우리가 그분을 통하여 하느님의 진노에서 구원을 받게 되리라는 것은 더욱 분명합니다.
사도 바오로의 로마서 5장 5절-11절

형제 여러분,
5 희망은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받은 성령을 통하여 하느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어졌기 때문입니다.
6 우리가 아직 나약하던 시절, 그리스도께서는 정해진 때에 불경한 자들을 위하여 돌아가셨습니다.
7 의로운 이를 위해서라도 죽을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혹시 착한 사람을 위해서라면 누가 죽겠다고 나설지도 모릅니다.
8 그런데 우리가 아직 죄인이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돌아가심으로써, 하느님께서는 우리에 대한 당신의 사랑을 증명해 주셨습니다.
9 그러므로 이제 그분의 피로 의롭게 된 우리가 그분을 통하여 하느님의 진노에서 구원을 받게 되리라는 것은 더욱 분명합니다.
10 우리가 하느님의 원수였을 때에 그분 아드님의 죽음으로 그분과 화해하게 되었다면, 화해가 이루어진 지금 그 아드님의 생명으로 구원을 받게 되리라는 것은 더욱 분명합니다.
11 그뿐 아니라 우리는 또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느님을 자랑합니다. 이 그리스도를 통하여 이제 화해가 이루어진 것입니다.

--------------------------------------------------------------

복음 :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너희가 하늘에서 받을 상이 크다.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 5장 1절-12ㄴ절

그때에
1 예수님께서는 군중을 보시고 산으로 오르셨다. 그분께서 자리에 앉으시자 제자들이 그분께 다가왔다.
2 예수님께서 입을 여시어 그들을 이렇게 가르치셨다.
3 “행복하여라,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4 행복하여라, 슬퍼하는 사람들! 그들은 위로를 받을 것이다.
5 행복하여라, 온유한 사람들! 그들은 땅을 차지할 것이다.
6 행복하여라, 의로움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들! 그들은 흡족해질 것이다.
7 행복하여라, 자비로운 사람들! 그들은 자비를 입을 것이다.
8 행복하여라, 마음이 깨끗한 사람들! 그들은 하느님을 볼 것이다.
9 행복하여라, 평화를 이루는 사람들! 그들은 하느님의 자녀라 불릴 것이다.
10 행복하여라, 의로움 때문에 박해를 받는 사람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11 사람들이 나 때문에 너희를 모욕하고 박해하며, 너희를 거슬러 거짓으로 온갖 사악한 말을 하면, 너희는 행복하다!
12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너희가 하늘에서 받을 상이 크다.”
463 49.6%
프랑스의 문학 평론가 피에르 바야르의 『나를 고백한다』라는 매우 인상적인 책이 있습니다. 저자는 제2차 세계 대전 중에 나치스 같은 불의한 권력 집단에 저항한 의로운 사람들의 용기 있는 결단이 어떻게 가능했는지를 묻습니다.

그가 각별히 주목하는 이들 중에는 나치스를 비판하다가 사형된, 뮌헨 대학교의 학생 셋도 있습니다. 그는 ‘혼자가 아니라는 내밀한 느낌’이 이들에게 매우 중요한 역할을 했을 것으로 짐작합니다. 그리고 법정에서 보여 준 그들의 모습에 대한 증언을 인용합니다. “기소당한 세 젊은이가 앉아 있었다. 아주 바른 자세로, 침착하고 고독하게 앉아 있었다. 그들은 솔직하고 차분하게 대답했다. 한 아이는 말을 거의 하지 않았다. 하지만 딱 한 번 이렇게 말했다. ‘우리가 말하고 쓴 것은 사실 많은 사람이 생각하는 거예요. 단지 그들은 감히 그것을 말로 표현하지 못할 뿐이죠.’”

저자는, 혼자가 아니라는 그들의 확신에 찬 감정이 단지 동시대인들만을 향하는 것이 아니라 훗날 역사 안에서 그들의 행위가 옳다는 것을 확인해 줄 이들에 대한 믿음이기도 했을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그들은 현재의 폭력과 불의의 권력에서 자유로운 보편적인 정의와 인간성의 공동체에 속해 있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저자는 그들이 고립감을 이겨 내고 꿋꿋이 올바른 일을 행할 수 있었던 데는 그들의 가톨릭 신앙 또한 크게 작용했을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오늘 모든 성인 대축일에 우리는 ‘모든 성인의 통공’을 생각합니다. 이는 모든 그리스도인이 주님 안에서 현세와 내세, 지상과 천국을 포괄한 영원한 ‘공동체’를 이루고 있다는 믿음입니다. 우리는 이 믿음을 단지 죽은 뒤의 삶을 위한 ‘영적 구원’에만 관련해서 생각할 수 없습니다.

‘성인들의 공동체’는 그리스도인들이 지금 여기서 구체적으로 선과 정의와 애덕을 위해 투쟁하고 헌신하는 삶을 이끄는 원천임을 깨달아야 합니다. 선을 행하는 이는 결코 외롭지 않으며, 정의와 평화를 위해 일하는 이는 ‘이미’ 성인들의 공동체에 속해 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가 걷는 주님의 길에 ‘모든 성인’이 있기에 외롭지 않다는 것을 기뻐하면서, 성인들이 감지하고 의지했던 진리의 빛을 굳건히 따르도록 결심해야 하겠습니다.

<매일미사 2014년 11월 2일>
  | 10.29
463 49.6%
위령의 날이 되니 신학생 시절 해마다 전교생이 용인이나 용산의 성직자 묘역에 미사를 드리러 간 일이 떠오릅니다.

미사 전에는 선종하신 신부님들의 묘소를 둘러보며, 또 그분들의 묘비에 새겨진 성함을 보며 잠깐씩 기도를 올리기도 하였습니다. 숙연한 마음보다는 오히려 할아버지의 품속에 안긴 듯한 따스함과 평온함을 얻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아마도 그분들이 ‘달릴 길을 다 달리고’ 모든 것을 주님께 맡긴 가운데 참된 평화를 누리고 계신다는 생각이 들어서 그러했을 것입니다.

생전에 직접 모시거나 뵐 기회가 있었던 ‘할아버지 신부님’들의 성함을 묘석에서 발견하였을 때에는 반갑기도 하면서, 세상을 떠난 이들에게만 주시는 주님의 영원한 평화를 저도 잠시나마 나누어 받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죽음은 인간의 슬픈 운명의 확증인 것만이 아니라 주님 안에서 얻게 되는 진정한 평화에 이르는 문이기도 한 점을, 그분 품에 먼저 안긴 분들을 참배하면서 다시 깨닫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듯, 자신의 것을 다 내어놓고 주님 안에서 ‘철부지’가 된 이에게는 죽음이 끝이 아니라 주님께서 주시는 구원과 평화의 시작입니다. 지혜서가 말하듯, 세상의 눈에는 의인들이 죽음으로 끝장에 이르렀다고 보일지 모르지만, 주님의 ‘아이’들인 그들은 하느님의 손안에서 평화를 누릴 것입니다.

오늘 위령의 날에 돌아가신 분들이 말없이 전해 주는 ‘죽음의 신비’에 잔잔한 마음으로 머물러 봅니다.

<매일미사 2014년 11월 2일>
  | 10.29
463 49.6%
저는 스물일곱에 처음으로 외국에 나가 볼 기회가 있었습니다. 신학교에서 불어 초급반에 등록했는데, 운 좋게도 여름 어학연수로 프랑스에 갈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때 체험했던 여러 장소와 사건이 지금도 희미하게나마 눈앞에 그려집니다. 유명한 관광지와 성지도 둘러보며 재미있는 일도 많았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가장 잊히지 않는 것은 파리에서 며칠 머문 숙소였던 대학교 기숙사의 한 방문에 붙어 있는 그림 한 장이었습니다. 그 방의 주인은 학생일 것이고, 그는 여름 방학이어서 고향에 갔던 것 같습니다. 머무는 동안 늘 닫혀 있던 그 방문에는 도화지에 그려진 수채화 한 장이 붙어 있었습니다. 왠지 그 방의 학생이 그렸을 것이라는 직감이 들었습니다. 소박하면서도 밝은 색채로 그린 어느 공원의 아름다운 모습이었습니다. 그 그림의 하단에는 몇몇 낱말이 쓰여 있었습니다. “꽃, 태양, 하늘, 아름다움 …… 그러나 이것들이 다가 아니다. 죽음!”

그림을 다 그린 뒤 이 낱말들을 하나하나 쓰면서 곰곰이 생각에 잠겼을 그 학생의 모습을 떠올려 봤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합니다. 화창한 공원의 아름다운 모습에 어울리는 낱말과 ‘죽음’이라는 낱말의 만남에 조금은 충격을 받았던 것 같습니다. 우리 인생의 아름다운 것들이 ‘죽음’이라는 말을 만났을 때 우리의 자세가 어떠한지 지금도 가끔씩 생각하게 됩니다. 그것이 우리의 삶을 불안하게 하거나 힘들게 하고, 때로는 고귀하게도 합니다.

오늘은 위령의 날, 우리의 죽음을 생각합니다. 죽음이라는 말은 여전히 근심과 함께 찾아오는 반갑지 않은 손님입니다. 그래도 주님과 함께 걷는 인생 여정에서 죽음이 인생의 아름다움을 다 삼켜 버리는 잔인한 그림자만이 아니라, 그 아름다움을 비로소 감사하게 하는 계기이기도 하다는 점을 조금씩 배워 가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매일미사 2014년 11월 2일>
  | 10.29
463 49.6%
▬ 전대사에 대하여!

현재 한국 교회는 위령성월 중인 11월 1일부터 8일까지 열심한 마음으로 묘지를 방문하고, 세상을 떠난 이들을 위해 기도하는 신자들은 날마다 한 번씩 연옥에 있는 이들에게만 양도될 수 있는 전대사를 받을 수 있다고 가르칩니다.

전대사를 얻기 위해서는 위의 조건 외에 고백과 영성체를 하고 교황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바라면서 주님의 기도와 사도신경을 해야 합니다.

한번 고백성사를 받음으로써 여러 번 전대사를 받을 수 있으나, 한 번 교황의 뜻대로 기도함으로써는 한 번만 전대사를 받을 수 있습니다.

▮ 수원교구 조욱현 신부 : 2016년 11월 2일
  | 11.02
463 49.6%
죽음은 모든 생명체가 숙명으로 받아들여야 하는 생의 마지막 말입니다. 살아 있는 한 죽음을 피할 수 없고, 설령 죽음을 부정하며 잊고 살더라도 죽음의 시간은 언젠가 찾아옵니다. 죽음을 피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오직 죽음 너머의 영원한 생명에 대한 희망을 간직하는 길뿐입니다.

욥기는 인간이 겪는 고통의 신비를 숙명처럼 받아들여야 하는 지혜의 책입니다. 욥이 누린 세상의 행복은 결코 영원할 수 없음을 깨닫게 해 주고, 고통 속에 차라리 죽는 것이 낫다고 탄원한 욥의 마지막 기도는, “내가 기어이 뵙고자 하는 분, 내 눈은 다른 이가 아니라 바로 그분을 보리라.”는 희망의 외침이었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우리가 간직한 희망이 우리를 어떤 처지에서도 부끄럽게 하지 않는다고 고백합니다. 죽음을 당당하게 받아들이시고, 십자가의 고통 속에서도 하느님에 대한 희망을 잃지 않으신 예수님 덕분에 우리는 구원자 그리스도를 얻게 되었고, 사탄의 힘인 죄와 죽음에서 해방되었다고 바오로 사도는 기쁨에 차 선포합니다.

사람들은 행복의 기준을 세상에 두지만, 그리스도인의 행복은 세상 너머에 있습니다. 그렇다고 세상에서 도피하고, 세상을 혐오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참된 행복은 세상 속에서 씨앗처럼 자라나는 하느님의 능력과 지혜를 볼 줄 아는 사람에게 주어진 행복입니다. 그 행복은 우리가 맞이할 죽음의 두려움을 넘어서는 하느님의 선물이 됩니다.

▦ 송용민 사도 요한 신부 : 매일미사 2018년 11월 2일
  | 11.01
463 49.6%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 복음서에서 가장 위로가 되는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성당에 다니는 개인적인 이유야 다양하겠지만, 신앙생활은, 삶에 지치고, 상처받으며 고통을 겪는 내가 조금이라도 마음의 평화를 얻으려는 것입니다. 비록 열심히 기도 생활은 못해도 주일 미사만큼은 빠지지 않으려 하고, 묵주를 주머니에 넣어 다니며, 판공성사의 의무라도 지키려는 데에는, 신자로 사는 것이 그래도 위로와 행복의 이유가 될 수 있다는 믿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찾는 평화가 늘 교회의 방식대로 얻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하느님께서 계시다고 믿어도 그분이 느껴지지 않고, 교회의 가르침이 시대에 뒤떨어진 낡은 이념처럼 여겨지기도 합니다. 신앙생활은 역동적인 현대인의 삶에 역행하는 것처럼 보이고, 교회 생활은 동료 신자와의 관계와 인맥이 끊기면 냉담의 길로 들어서는 사회생활의 일부로 느껴집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새로운 박해의 시대입니다. 배교의 칼날 앞에 용맹하게 신앙을 증언한 순교자들의 시대와는 다릅니다. 현대는 교묘한 방법으로 하느님을 부정하고, 신앙을 개인적인 취향으로 둔갑시키며, 교회를 제도와 규율로 사람들을 통제하려는 조직으로 끌어갑니다. 현대의 악은 인간의 영혼을 죄와 불순종의 종으로 만들고, 하느님 없는 삶을 꿈꾸게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선하신 뜻이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에게는 감추어지고, 철부지들에게 드러났다고 말씀하십니다. 세상의 무거운 짐과 멍에를 벗는 지혜를 당신의 십자가의 길에서 배우는 철부지들이 참된 지혜를 얻는다고 말씀하십니다.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는 예수님의 역설은 오직 주님을 신뢰하는 사람만이 얻게 될 선물임에 틀림없습니다.

▦ 송용민 사도 요한 신부 : 2018년 11월 2일
  | 11.01
463 49.6%
열 처녀의 비유는 우리가 어떻게 죽음을 맞이해야 할지를 일깨워 주는 복음입니다. 우리가 맞이할 신랑은 이 세상을 마치고 만나 뵙게 될 주님이십니다. 그러나 그 시간과 그 때를 알지 못하기에 우리는 늘 깨어 죽음을 준비해야 합니다. 갑작스럽게 찾아온 신랑 때문에 기름을 준비하지 못해 당황하는 어리석은 처녀가 되어서는 안 되기 때문입니다.

현대인은 의학의 발전으로 말미암아 장수의 세상에 들어섰습니다. 그렇다고 오래 사는 것이 행복한 것은 아닙니다. 지혜서는 “의인은 때 이르게 죽더라도 안식을 얻는다.”고 말하고, “영예로운 나이는 장수로 결정되지 않고 살아온 햇수로 셈해지지 않는다.”고 합니다. 오래 살면서 추하게 늙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악에 타협하고 살아 이성이 변질되면 “좋은 것들을 무색하게 만들고, 솟구치는 욕망은 순수한 정신을 훼손”하기 때문입니다.

살아 있는 동안 행복하려면 먹고 살아야 할 물질적인 필요는 채워져야 합니다. 그러나 가난하다고 불행한 것은 아니며, 병들고 외로운 사람이 실패한 인생이 되라는 법은 없습니다. 심리학자들은 행복이란 내가 기대하지 않았던 일상의 작은 기쁨이 누적되어 찾아오는 만족감이라고 말합니다. 한마디의 위로, 작은 물질적 나눔, 환한 미소와 따뜻한 손길, 희망의 복음이 세상 너머의 희망의 표지가 됩니다.

세례로 하느님의 자녀가 된 그리스도인은 예수님과 함께 죽고 부활한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죽음은 인생의 마지막 말이 될 수 없습니다. 시편 저자의 노래처럼, 주님께서 나의 목자이시기에, 세상살이가 각박해도 아쉬울 것이 없습니다. 이제 그 행복을 찾아 나갑시다.

▦ 송용민 사도 요한 신부 : 2018년 11월 2일
  | 11.01
463 49.6%
주님께서는 우리를 참행복으로 초대하십니다. 참행복은 곧 당신 자신이시고, 당신의 말씀이십니다. 당신 안에, 당신의 거룩하신 그 말씀 안에 하느님 나라가 있고, 하느님 나라야말로 우리가 얻어 누려야 할 참행복입니다.

이미 우리보다 앞서 돌아가신 분들은 그분의 나라에서 영원한 생명, 참행복을 누리고 있을 것입니다. 아직까지 그 나라에 들어가지 못한 연령들이 있다면, 하루빨리 주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도록, 우리는 기꺼이 그들을 위하여 기도해야 합니다.

참행복은 세상을 떠난 사람들만이 누리는 특권이 아닙니다. 이 세상에 살고 있는 우리 또한 마음을 비우고, 슬퍼할 줄 알며, 온유한 사람이 되어 평화의 일꾼으로 살아간다면, 우리도 이미 이 땅에서부터 주님의 나라에 속한 사람이 된 것입니다. 주님의 나라에 속한 사람이 결국 주님께서 주시는 참행복, 영원한 생명에 참여하게 됩니다.

---------------------------------------------

매일미사 2010년 11월 2일 첫째 미사
  | 11.01
463 49.6%
저울에 행복을 달면
불행과 행복이 반반이면
저울이 움직이지 않지만
불행 49% 행복 51%면
저울이 행복 쪽으로 기울게 됩니다.

행복의 조건엔
이처럼 많은 것이 필요 없습니다.

……
단 1%가 우리를 행복하게
또 불행하게 합니다.
나는 오늘 그 1%를
행복의 저울 쪽에 올려놓았습니다.
그래서 행복하냐는 질문에
웃으며 대답했습니다.
행복하다고 …….

이해인 수녀님의 “1%의 행복”이라는 시에서 일부 발췌한 것입니다.
행복과 불행은 내 마음의 무게를 어디에 두었느냐에 따라 기울기가 달라진다는 뜻입니다.

우리 삶이라는 것이
온전히 행복할 수도 그렇다고 온전히 불행할 수도 없습니다. 우리가 기쁘고 행복하다고 하는 순간에도 그 안에는 말 못할 슬픔이 잠겨 있고, 슬프고 고통스럽다고 생각하는 순간에도 그 안에는 보이지 않는 희열과 행복이 감추어 있습니다. 사실 행복과 불행은 우리 마음이 어디에 기울어 있느냐의 차이입니다.

영성 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세상 한가운데 살아야 하는 신앙인은 늘 성(聖)과 속(俗)의 경계를 걷는 사람입니다. 1%의 차이가 우리의 모습을 다르게 만들어 놓습니다. 이 말은 성과 속의 저울 양편에 놓인 우리 마음처럼 1%만 더 주님께 관심을 기울여도 우리는 거룩한 삶을 살 수 있다는 뜻입니다.

신앙인의 삶에는 가난해도,
슬퍼도, 때로는 시련과 고통 속에서도, 세상이 주는 행복과 다른 행복이 숨겨져 있습니다. 이것 역시 하느님과 세상 사이에서 1%의 마음 기울기에 달려 있습니다.

--------------------------------------------

매일미사 2011년 11월 2일 첫째 미사
  | 11.01
463 49.6%
사람은 누구든지 행복하기를 바랍니다.
그런데 그 행복의 조건을 물질적인 풍요로움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물론 매일 끼니를 걱정해야 하는 사람이 행복하다고 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많이 가진 사람이 반드시 행복하게 사는 것은 아닙니다.
경제적으로 잘사는 나라일수록 가난한 나라보다 이혼율이 높습니다. 자살률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이는 무엇을 말해 주고 있는 것일까요? 물질적인 풍요가 행복을 보장해 주지 못한다는 뜻일 것입니다.

우리나라는 짧은 시간 안에 놀라운 경제 성장을 이루었습니다.
절대적 빈곤에서 벗어난 것은 참으로 다행스러운 일입니다. 그런데 성장의 대가로 치르는 통증 또한 매우 심각합니다. 우리나라는 경제 협력 개발 기구(OECD) 회원국 34개 나라 가운데 자살률과 이혼율이 제일 높다는 통계가 나왔습니다. 경제적으로 잘살면 삶의 질과 행복 지수도 높아져야 하는데 현실은 그 렇지 못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늘 복음에서
‘참행복’에 대하여 가르치시면서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이야말로 행복한 사람들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마음이 가난한 사람이란
주님께 모든 것을 맡기며 사는 사람입니다. 주님께 의지하며 살기 때문에 가진 것이 적어도 그분께서 채워 주시리라고 믿으며 살아갑니다.

그리고 가진 것을
주님께서 주신 선물이라고 여기며 모든 일에 감사드립니다. 모든 일에 감사드리며 사는 사람은 행복합니다. 우리의 처지를 주님께 맡겨 드리며 늘 감사하는 마음으로 살아갈 때 행복은 선물로 주어집니다.

--------------------------------------------

매일미사 2012년 11월 2일 첫째 미사
  | 11.01
파란색 글자 빨간색 글자 녹색 글자 밑줄 글자 진한 글자 빨간색 테이블 파란색 테이블 녹색 테이블
이름 :   
암호 :
· d41d8cd98f * 왼쪽의 글자중 빨간글자만 순서대로 입력하세요.
 목록보기 스크랩하기  프린터하기
519   [수도회] 천부당만부당한 예수님의 세례  [6] 2279
518   [인천] 증거자의 모습으로  [12] 2179
517   [부산] 세례는 예수님의 실천 안으로 들어가는 입문 의례  [9] 2217
516   [마산] 신앙생활은 세례를 완성하는 생활  [5] 1784
515   [수원]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9] 2286
514   [서울] 세례의 의미  [17] 2538
513   [안동] 우리가 받은 세례의 의미는?  [3] 2128
512   [대구] 세례성사의 은총을 보존하자!  [6] 2346
511   [전주] “지금은 내가 하자는 대로하여라...."  [6] 2051
510   [광주] 불멸의 사랑  [1] 362
509   [청주] 주님 세례로 드러난 새로운 소식  [3] 322
508   [원주] 하느님의 자녀답게 살아갑시다.  [3] 404
507   [군종] 주님의 형제요 하느님의 자녀  [6] 339
506   [의정부] 세례의 완성  [5] 347
505   [대전] 주님은 세례 받으시러 오십니다.  [6] 2049
504   [춘천] 그리스도 따라 세상의 때 벗자  [5] 2210
503   (백) 주님 세례 축일 독서와 복음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  [16] 1765
502   [수도회] 일어나 비추어라!  [12] 2666
501   [서울] 공평화의 동체인 인류 가족  [12] 2946
500   [대전] 새로이 동방박사의 여정을 시작합시다.  [6] 3277
1 [2][3][4][5][6][7][8][9][10]..[26]  다음
 

 

대축일/명절강론 코너 ( 대축일/명절 미사에 관련된 강론자료입니다... )

 관리자 Profile  l  홈페이지이용안내  l  즐겨찾기추가  l  추천사이트  l  가톨릭검색사이트  l  관리자 E-mail

Copyright ⓒ 2003 - 2005 www.ocatholic.com All rights reserved.   Ver 4.01_0502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