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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축일/명절강론 코너 ( 대축일/명절 미사에 관련된 강론자료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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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도회] 하느님의 자비
조회수 | 1,735
작성일 | 08.10.31
셋째 형님이 대장암으로 오랫동안 투병하다
올해 하느님의 품으로 돌아갔습니다. 형님은 3년 전에 세례를 받았지만 신앙이 그리 깊지 못했습니다. 신앙 안에서 죽음을 받아들이지 못하면 어쩌지 하는 불안이 컸습니다. 동생인 제가 형님을 위해서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기도하는 것뿐이었습니다. 형님이 사경을 헤매기 시작할 때 가족 모두가 그의 곁에 있었습니다. 엄청난 고통을 겪고 있는 형님을 바라보는 것은 너무 힘든 일이었고 형님이 가족을 영원히 떠난다는 것은 더 큰 슬픔이었습니다. 용기를 내어 형님의 임종을 돕기로 했습니다. 고통 중에 있던 형님께 이제 하느님께 돌아가야 한다고, 그분께서 이제 고통 없이 편히 쉬게 해 주실 거라고 이야기해 주었습니다.

불안했던 형님의 얼굴이 평온해졌고,
가족 모두와 힘겹게 마지막 작별인사를 했습니다. 용서를 청하는 형님의 마지막 말은 제가 이 세상에서 지금껏 들어 왔던 말들 중 가장 아름다운 말이었습니다. 그렇게 떠난 형님은 우리 가족 모두에게 복음을 믿게 했습니다. 형님이 겪어야 했던 엄청난 고통은 우리 모두를 위한 것이었음을 깨달았습니다. 형님은 하느님의 자비로 구원되었습니다. 형님의 구원이 나의 희망이며 우리 모두의 희망이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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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백광현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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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동안 부모님과 동료 수도자의 죽음 등 적지 않은 죽음을 보아왔다. 가슴을 에이는 아픈 죽음도 있었고, 평화로운 죽음도 있었다. 한 수녀님의 어머님은 시신을 기증하셨기 때문에 장례미사를 마친 후 병원으로 떠나보내며 마음을 달랠 무덤조차 포기해야만 했다. 또 몇 달 사이에 부모님을 차례로 떠나보낸 동료 수녀님도 있다. 영원한 생명을 믿지 않는다면 이런 슬픔을 어떻게 견뎌낼 수 있을까? 하느님이 하신 일 중에 가장 공평한 것은 누구나 죽는다는 사실이다. 당신도 죽음에 동참하지 않으셨던가!

우리의 인생은 아무리 화려하게 장식해도 한순간이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자전거를 타는 것과 같다. 바로 서 있기를 바란다면 계속 달려야 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주님과 더불어 계속 앞으로 걸어가야 한다. 우리는 하느님이 허락하신 생명의 시간만큼 아름답게 삶의 여행을 이루어 가야 한다. 우리의 삶이 인간답기보다는 그리스도인답게 살기를 원해야 한다.

죽은 이들을 기억하고 기도하는 오늘, 교회는 그리스도교 신앙의 가장 위대한 사건인 예수님의 부활을 믿고 고백한다. 예수께서는 부활로써 죽음을 극복하셨고 당신을 믿는 이들이 다시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게 하셨다. 죽음은 항상 우리와 함께 있다. 우리가 죽음의 실체를 알지 못한다 할지라도 죽음은 항상 그곳에 있다. 우리는 대부분 죽음에 대한 생각을 묻어두고 살아간다. 물론 늘 죽음에 대해 생각할 필요는 없지만 우리가 아무것도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예수께서 우리를 위해 돌아가셨고 죽음을 이기셨으며 당신을 믿는 사람들에게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릴 것을 약속하셨기 때문이다.

김희자 수녀(성바오로딸수도회)
  | 10.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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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도회] 위령의 날 -영원히 기다리시는 하느님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

교회가 위령성월에 초하루에는 모든 성인의 날을 지내고 이렛날에는 위령의 날을 보내는 것은 당연하다 하겠지요.

전례력으로 마지막 달인 11월에는 우리가 자연스레 이 세상의 마지막, 곧 종말을 생각하고, 이 세상만 있는 것이 아니라 저 세상도 있음을 생각하며, 또 이 세상을 떠나 저 세상에로 간 분들도 생각게 되지요.

그런데 저 세상에로 간 분들 중에서 성인들에게서는 덕을 보고 그렇지 못한 영혼들에게는 우리가 기도를 해줘야 한다는 거지요. 이는 우리가 산 이들 중에서 잘 된 이들에게서는 덕을 보고 잘못된 이들에게는 위안과 격려를 하는 것과 같은 이치지요. 그래서 저는 올해 위령의 날에는 우리의 기도가 필요한 사람들, 그 중에서도 자살을 생각하거나 자살한 사람들을 생각해봅니다.

왜냐면 자살한 사람들에 대한 얘기를 주변에서도 많이 듣고 언론을 통해서도 자살 현상의 심각성을 자주 듣기 때문이며, 다른 한 편으로는 이들에 대해 그러면 교회가 어떻게 해야 하고,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 깊이 숙고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지금은 그러지 않지만 과거에 자살은 하느님께서 주시고 하느님께만 달려있는 생명권을 인간이 제 맘대로 끊어버리는 가장 큰 죄이기에 이런 죄를 범한 사람들은 지옥에 간다고 생각하고 그리고 이런 사람을 위해서는 장례미사도 드려주지 않았었지요.

그런데 우리 인간의 단절이 하느님의 사랑마저 단절케 한다는 말인가요? 우리가 하느님의 뜻을 어기고 생명을 끊었다고 하느님께서도 당신의 사랑을 거두시고, 그것도 영원히 거두신다는 말입니까?

우리 인간의 한 번의 결정과 행동이 영원을 결정하고 이 세상에서의 마지막 결정이 내세에서마저 어찌 할 수 없게끔, 다시 말해서 어떻게 돌이킬 수 없게끔 내세마저 결정짓는다는 말입니까?

그렇다면 우리가 사도신경에서 고백하는 통공의 교리는 무엇입니까? 이 세상과 저 세상은 자살 한 번으로 완전히 단절되고 하느님의 뜻을 우리 인간이 어긴 것이 우리에 대한 하느님의 사랑을 영원히 그리고 완전히 단절케 한다는 말입니까? 하느님께서는 한 번 노여우시면 영원히 우리를 저버리신다는 말입니까?

그 반대입니다. 하느님의 사랑의 불은 영원히 타오르고, 그래서 하느님의 사랑은 영원하시며, 그러므로 하느님은 영원히 기다리십니다. 아무리 우리가 큰 죄와 많은 죄를 짓고, 자살까지 하였어도 우리가 당신 사랑에로 돌아오기를 영원히 기다리십니다. 그런데 그럼에도 우리가 영원히 돌아가지 않는다면 그것이 지옥이고, 얼마간 하느님 사랑 밖에 있다면 그것이 연옥이고 연옥의 기간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기도가 필요한 것입니다. 영원히 기다리시는 하느님 사랑에로 돌아가 영원한 안식을 누리도록.

그러나 기도가 필요한 사람은 자살한 사람뿐 아닙니다. 다시 말해서 죽은 사람의 영혼을 위해서만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죽고 싶을 정도로 괴롭고 불행한 영혼들을 위해서도 기도해야 합니다.

▮ 작은 형제회 김찬선(레오나르도) 신부 : 2016년 11월 2일
  | 1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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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도회] 죽음에 쫒기는 사람과 맛서는 사람

11월은 10월의 문턱을 넘어 마지막 나무에 붙어 있는 잎과 과일을 내려놓고 동면의 시간으로 들어가는 계절입니다. 자연의 한 부분인 사람도 세월이 지나 마무리를 생각해야 할 시간입니다. 자연과 더불어 생각하면서 지난날의 과와 공을 생각하면 좀 더 의미 있게 살았으면 좋았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죽음에 쫒기며 사는 사람은 죽지 않으려고 온갖 방법을 다써가며 사는데 급급한 사람이며, 죽음을 맞서 사는 사람은 자기 삶을 다스리며 사는 사람입니다.

죽음은 우리에게 가장 두려움을 주는 것이며, 죽음을 통해 세상과의 모든 인연을 끊어지고 세상과 아무런 관계도 없어집니다. 그러나 죽음 만큼 모든 사람에게 공편한 것도 없습니다. 권력자, 재력가, 높은 명예를 지니고 있어도 죽음앞에 무릎을 끓어야 합니다.

11월은 이미 죽은 이들을 통하여 자신의 죽음을 깊이 생각하고 나머지 인생을 어떻게 사는 것이 가치 있게 살아야 하는지를 깊이 반성하고 죽음의 준비를 해야 할 시기입니다.

여름이 지나 가을이 오고 겨울이 오듯이 분명이 오는 계절을 준비하듯이 죽음을 준비하면서 삶의 가치를 드높여야 합니다. “ 반듯이 죽는다. 얼마 살지 모른다. 언제 죽을지 모른다. 어떻게 죽을지 모른다.” 그런데 나는 살아있다. 아름다운 마무리를 하고 살아 있는 시간 한시도 악에 물들지 않고 선으로 가득찬 행복한 삶을 살려면 사람을 섬기고 나누고 친교를 맺으며 살아야 합니다.

죽음을 마주하고 사는 사람 오늘 저녁이 나의 마지막이다. 라고 생각 하는 죽음은 죽음에 맛서는 사람이며 두려움 없이 죽음을 맞이하고 죽음을 승리하는 사람입니다. 주님은 십자가의 죽음에 쫒기지 않고 죽음에 맞서 앞으로 나가셨습니다. 우리도 죽음에 쫒기는 사람이 되지 않고 죽음에 맛서는 사람으로 살아갈 때 죽음에서 자유롭고 죽음 앞에 웃으며 행복한 죽음을 마지 할 수 있습니다.

주여! 죽음을 깊이 묵상 하면서 죽음뒤에 참 생명을 기대하며 믿음의 삶을 살도록 기도합니다.

▮ 분도회 이석진 신부 : 2016년 11월 2일
  | 1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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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 <마태 11,25-30>

11월은 정녕 신비의 달입니다. 절로 죽음과 비움의 신비를 묵상하게 합니다. 우리의 내면을 들여다보게 만들고, 우리를 존재의 심연으로 이끌고 갑니다.마른 풀 한 줄기를 침대로 삼아 내려앉은 서리에서도, 뒹구는 낙엽을 깨우며 소스라치게 부는 바람에서도, 우리는 그 죽음과 만남의 신비를 봅니다. 그것은, 이미 우리 안에 있는 것을 보는 것입니다. 이미 우리 안에 있는 죽음을 보는 것이요, 이미 우리 안에 계시는 그분과의 만남입니다.

그렇습니다. 죽음은 하나의 통로요, 만남입니다. 우리가 희망하다가, 마침내 그 희망한 분과 만나는, 바로 그 일입니다. 우리가 죽음에 대해 묵상하는 것은 죽은 다음에 오는 미지의 세계가 아니라, 생사가 갈라질 수 없게 펼쳐져 있는 삶의 세계를 성찰하기 위해서입니다. 곧 현재를 충실히 사는 것이요, 현재를 충실히 죽기 위한 것입니다.

결국, 죽음의 질이 삶의 질을 결정지으며, 삶의 질이 죽음의 질을 결정짓기 때문입니다. 곧 웰 빙(well being)과 웰 다윙(well dying)은 같은 것입니다. 바로 지금 이 순간이 완성을 향한 삶이요, 죽음인 까닭입니다. 그래서 파우스티나 성녀는 말합니다.“우리 삶의 모든 순간이 첫 순간이고 마지막 순간이며 유일한 순간이다”

오늘은 위령의 날입니다.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 죽음은 단순히 모든 것이 끝난다는 의미가 아니라, 새로운 삶으로 옮아간다는 고귀한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죽음이 인생의 한 과정의 마감일 뿐, 결코 허무한 끝이 아니라는 믿음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마태 11,28)

듣기만 하여도 벅찬 감격이 밀려오는 말씀입니다. 당신께서 안식을 주겠다는 이 벅찬 초대에서 우리는 참된 사실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곧 “참된 안식”은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주어지는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선사되고 베풀어지는 은혜라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다음 구절에서도 이어서 말씀하십니다. “너희의 영혼이 안식을 얻을 것이다”(마태 11,29)

“얻을 것이다”의 원어의 뜻은 “찾다”, “발견하다”는 뜻이라 합니다. 곧 참된 “안식”은 자신이 스스로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이미 있는 것을 찾고 발견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것을 예수님 안에서 찾고 발견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참된 스승이신 예수님 안에서만이 참된 “안식”을 얻게 됩니다. 왜냐하면 오로지 예수님만이 참된 “안식”을 가지고 계시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요한 14,6) 까닭입니다.

그러기에, “참된 안식”, 그것은 그것을 가지신 분으로부터 얻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공로로써 얻어진다기보다는 믿음으로 얻어지는 것이요, 탐구함으로써 얻어진다기보다는 순명으로 얻어지는 것이요, 알음으로써 얻어진다기보다는 사랑함으로 얻어지는 것입니다. 참으로, 그것은 그분의 선물이요, 사랑이요, 자비요, 호의인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참된 안식은 참된 주인에게서 옵니다.

그러기에, 오늘 우리는 주님을 찬미하며, 이미 세상을 떠난 영혼들을 기리며, 주님의 축복과 은총에 감사를 드립니다. 특히 오늘 우리는 가족과 공동체 식구들뿐만 아니라, 특히 소외된 영혼들, 곧 아무도 기억하지 않는 이들과 잊혀 진 이들을 위해서 기도를 바쳐야 할 것입니다.

‘세월호 참사’로 세상을 떠난 영혼들과 억울하게 죽은 사람들과 무죄한 사람들의 죽음을 함께 아파하며, 그들을 위해서도 기도를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그리고 전쟁의 살육 속에서 희생된 이들, 테러와 폭력의 희생자들, 고문과 억압으로 희생된 이들 등 이루 헤아릴 수없는 타력에 의해 희생된 이들을 위해서도 기도하는 하루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특별히 제도적 폭력의 물대포를 맞고 317일 동안 사경을 헤매다가 지난 10월 25일 세상을 떠나, 아직도 한 달이 넘어도 장례식을 치루지 못하고 있는 백종기 엠마누엘 형제님의 영혼을 위해서도 기억해야겠습니다. 아멘.

▮ 파주 올리베따노 분도회 이영근 신부 : 2016년 11월 2일
  | 1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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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도회] 슬기로운 삶

어제는 하늘과 땅위에 있는 모든 성인들 (All saints)을 기리는 잔칫날이라면 오늘은 정화과정 중에 있는 모든 연옥 영혼들 (All souls)을 위한 잔칫날입니다. 하늘의 성인들은 우리를 위해 전구하고 지상의 우리들은 연옥영혼들을 위해 기도하니 주님 안에서 모두 하나로 연결되어 있는 교회공동체임을 깨닫습니다. 천상의 성인들보다 연옥영혼들에 더 애착이 갑니다. 살아있는 우리들과 더 긴밀히 연결되어있다는 생각 때문입니다. 천국도 연옥도 지옥도 이미 지상에서 시작됩니다.

며칠 전 한 피의자가 검찰청사 정문을 들어설 때 무수한 취재진들이 달려드는 모습이 흡사 지옥문에 들어설 때 악마들이 몰려드는 장면처럼 상상되었습니다. 그런가 하면 강할 때는 꿈쩍 못하던 이들이 약해졌을 때 하이애나 처럼 달려드는 모습들을 보면 역시 지옥을 연상하게 됩니다. 천국이 지옥이 연옥이, 천사와 악마가 따로 있는 게 아니라 우리 안에 있습니다.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고생하는 모습을 보면 이미 연옥과정을 겪고 있고나 하는 생각이 들 때도 있습니다. 좌우간 힘든 세상살이 힘껏 믿음으로 살아 냈다는 자체가 구원이고 세상 연옥 살이에서 충분히 정화되었을 때 연옥과정을 거치지 않고 직접 천국으로 갈 수 있다는 즐거운 상상도 해 봅니다.

오늘은 우리의 죽음에 대해 생각해 보는 날입니다.

옛 사막교부들은 물론 베네딕도 성인도 강조한 ‘죽음을 날마다 눈 앞에 환히 두고 살라’는 말씀입니다. 죽음을 눈앞에 환히 두고 처음이자 마지막처럼 종말론적 깨어있는 삶을 살 때 모든 환상은 걷히고 오늘 지금 여기를 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저는 죽음을 무無에의 환원還元이 아니라 아버지의 집으로의 귀가歸家라 합니다. 죽음이 무에의 환원이라면 허무의 절망이겠지만 아버지의 집으로의 귀가라면 구원의 희망을 지니게 될 것입니다. 그러니 11월은 나름대로 죽음을 묵상하며 아버지의 집으로 귀가준비를 해보는 시기이기도 합니다.

하느님을 모르고 나를 모르는 무지가 참으로 심각한 마음의 병입니다. 무지의 어리석음입니다. 반대로 하느님을 알고 나를 아는 이가 진정 슬기로운 사람입니다. 어리석은 삶이 아니라 슬기로운 삶보다 더 좋은 아버지의 집으로의 귀가준비도 없을 것입니다.

어리석어서 탐욕과 교만의 유혹에 빠지고 어리석음이 자초하는 지옥이요 연옥입니다. 슬기로운 삶은 그대로 겸손한 삶임을 깨닫습니다. 오늘 복음의 슬기로운 처녀들과 어리석은 처녀들의 비유가 우리들에겐 좋은 공부가 됩니다. 오늘 강론 주제는 ‘슬기로운 삶’이 되겠습니다.

첫째, 찬미하는 삶입니다.

끊임없는 하느님 찬미와 감사의 삶과 기도가 슬기로운 삶입니다. 하느님 사랑의 표현에 찬미보다 더 좋은 기도도 없습니다. 찬미의 종교인 그리스도교요 찬미의 기쁨으로 사는 찬미의 사람인 우리 수도자들입니다. 세상에 찬미의 기쁨을 능가하는 것은 없습니다. ‘알렐루야’ 찬미로 살다가 ‘아멘’ 감사로 끝나는 삶이라면 참으로 아름답고 슬기로운 삶일 것입니다. 하여 매일 평생 끊임없이 찬미와 감사의 시편성무일도와 미사를 봉헌하는 우리 수도자들입니다. 며칠 전 마음을 사로잡았던 미사 중 퇴장성가 프란치스코 성인의 ‘태양의 찬가’가 참 감미로웠습니다. 하느님 찬미가 얼마나 좋은지 새삼 깨달았습니다. 예전부터 좋아했던 성인이었기에 세례명도, 수도명도 프란치스코로 했습니다. 미사 후에도 방에서 틈틈이 불러보면서 하나의 소원이 떠올랐습니다. 세상 떠나는 날 임종 시 형제들이 불러주는 ‘태양의 찬가’를 들으며 잠들 듯이 선종한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하는 소원이었습니다. 끊임없이 하느님을 찬미하다 세상을 떠난다면 이보다 더 좋은, 아름다운, 거룩한 죽음도 없을 것입니다.

둘째, 깨어있는 삶입니다.

깨어있는 삶이 슬기로운 삶입니다. 끊임없는 찬미기도의 삶이 깨어 있게 합니다. 끊임없는 기도의 궁극목표도 깨어 있는 삶입니다. 깨어있는 삶은 활짝 열려있는 삶입니다. 과거와 현재, 미래에 활짝 열려있는 삶입니다. 하느님과 이웃에 활짝 열려있는 삶입니다. 깨어있는 삶은 늘 죽음을 환히 두고 준비하며 기다리는 삶입니다. 바로 오늘 복음의 슬기로운 처녀가 그 모범입니다. 주님을 사랑하기에 찬미의 삶이며 깨어있는 삶입니다. 복음의 슬기로운 처녀들은 기름을 충분히 준비해 뒀기에 결정적인 순간 신랑인 주님과 함께 혼인잔치 축제에 참여할 수 있었습니다. 깨어있는 삶은 늘 새롭게 시작하는 삶입니다. 웅덩이에 고인 썩은 물이 아니라 끊임없이 하느님을 향해 맑게 흐르는 강물같은 삶입니다.

제2독서에서 바오로의 말씀처럼 그리스도께서 아버지의 영광을 통하여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나신 것처럼, 우리도 세례성사와 성체성사의 은총으로 새로운 삶을 살아가게 되었습니다. 그러니 늘 새로운 삶을 살아야 하겠습니다. 주님은 우리 모두 새로운 삶을 살라고 매일 이 거룩한 미사를 통해 새날, 새 땅, 새 하늘을 우리에게 선사하십니다.

셋째, 때를 아는 삶입니다.

모든 것은 때가 있습니다. 때를 알아 때에 맞게 처신하는 삶이 슬기로운 삶입니다. 때가 될 때까지 기다리는 것이 인내의 믿음입니다. 지혜서의 말씀대로 영예로운 나이는 장수로 결정되지 않고 살아온 햇수로 셈해지지 않습니다. 사람에게는 예지가 백발이고, 티없는 삶이 곧 원숙한 노년입니다. 때를 알아 때에 맞게 처신할 때 이런 예지에 티없는 삶입니다. 제가 기회가 될 때마다 피정자들에게 상기시키는 예화가 있습니다. 내 인생순례여정을 일일일생, 하루로 압축하면 어느 시점에 와 있겠느냐 하는 것입니다. 오전인가 오후인가, 과연 몇 시 지점에 와 있는가 때를 생각해 보라는 것입니다. 이어 일 년 사계로 내 나이를 계절로 하면 봄, 여름, 가을, 겨울 중 어느 때에 있느냐 생각해 보라는 것입니다. 저절로 때를 알아 때에 맞는 처신으로 슬기로운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

죽어서 가는 천국이 지옥이 연옥이 아니라 이미 지금 여기서부터 시작되는 천국의 삶, 지옥의 삶, 연옥의 삶입니다. 무지의 어리석은 삶을 살 때 자초하는 지옥의 삶, 연옥의 삶입니다. 반면 슬기롭고 겸손한 삶을 살 때 이미 지금 여기서 부터 펼쳐지는 천국의 삶입니다. 이미 지금 여기서 천국의 삶을 살게 하는 슬기로운 삶이 찬미하는 삶, 깨어 있는 삶, 때를 아는 삶입니다. 은총과 자비가 주님께 선택된 슬기로운 이들에게 주어지고 그분께서는 슬기로운 이들을 돌보십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모두 슬기롭고 겸손한 삶을 살게 하십니다.

“그러니 깨어 있어라. 너희가 그 날과 그 시간을 모르기 때문이다.”(마태25,13). 아멘.

▮ 분도회 이수철 신부 : 2016년 11월 2일
  | 1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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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가 안식을
얻을 것이다."(마태 11, 29)

죽음 또한 하느님의 아름다운 부르심입니다. 생명의 주인이 누구신지를 묻게 됩니다. 죽음처럼 우리가 누군지를 잘 일깨워주는 스승도 없을 것입니다. 죽음과 더불어 살아가는 우리의 삶이기 때문입니다.

오늘은 우리와 함께 머물다 떠난 소중한 이들을 위해 기도하는 날입니다. 우리들 또한 남기고 가는 삶의 의미가 사랑이었으면 좋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죽음을 두려워하는 우리들을 당신의 죽음과 부활로 위로하여 주십니다. 불쌍하고 어리석은 우리들이 죽음을 통해 하느님 안에 있다는 것을 다시 깨달았으면 좋겠습니다. 떨어져 내리는 고운 단풍처럼 삶의 마지막 또한 아름다웠으면 좋겠습니다.

우리 자신의 죽음은 끝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로 돌아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돌아가신 이들을 통해 우리 자신을 들여다보는 시간이 되기를 기도드립니다. 겸손치 못한 우리들을 일깨워주는 죽음은 다시금 생명이 어디를 향해야할지를 가르쳐줍니다.

모든 순간순간이 하느님께로 돌아가는 기쁨이기를 기도드립니다. 하느님 안에서 삶과 죽음은 이미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하느님, 어리석은 저희를 용서하소서. 하느님, 저희를 버리지 마소서.

▮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 : 2016년 11월 2일
  | 1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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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은 정녕 신비의 달입니다. 절로 죽음과 비움의 신비를 묵상하게 합니다. 우리의 내면을 들여다보게 만들고, 우리를 존재의 심연으로 이끌고 갑니다. 마른 풀 한 줄기를 침대로 삼아 내려앉은 서리에서도, 뒹구는 낙엽을 깨우며 소스라치게 부는 바람에서도, 우리는 그 마남과 죽음의 신비를 봅니다. 그것은, 이미 우리 안에 있는 것을 보는 것입니다. 마치 잎이 새싹일 때 ‘이미’ 단풍을 품고 있듯이 ‘이미’ 우리 안에 있는 죽음을 보는 것이요, 꽃이 몽우리일 때 ‘이미’ 씨앗을 품고 있듯이 ‘이미’ 우리 안에 있는 생명을 보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죽음은 하나의 통로요, 만남입니다. 우리가 죽음에 대해 묵상하는 것은 죽은 다음에 오는 미지의 세계가 아니라, 생사가 갈라질 수 없게 펼쳐져 있는 삶의 세계를 성찰하기 위해서입니다. 곧 현재를 충실히 사는 것이요, 현재를 충실히 죽기 위해서입니다. 바로 지금 이 순간이 완성을 향한 삶이요, 죽음이기 때문입니다. 곧 죽음의 질이 삶의 질을 결정짓고, 삶의 질이 죽음의 질을 결정 짓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파우스티나 성녀는 말합니다.

“우리 삶의 모든 순간이 첫 순간이고 마지막 순간이며 유일한 순간이다”

오늘은 위령의 날입니다.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 죽음은 단순히 모든 것이 끝난다는 의미가 아니라 새로운 삶으로 옮아간다는 고귀한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죽음이 인생의 한 과정의 마감일 뿐, 결코 허무한 끝이 아니라는 믿음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마태 11, 28)

듣기만 하여도 벅찬 감격이 밀려오는 말씀입니다. 당신께서 안식을 주겠다는 이 벅찬 초대에서 우리는 참된 사실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곧 “참된 안식”은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주어지는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선사되고 베풀어지는 은혜라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이어서, 다음 구절에서 말씀하십니다.

“너희의 영혼이 안식을 얻을 것이다.”(마태 11, 29)

“얻을 것이다”의 원어의 뜻은 “찾다”, “발견하다”는 뜻이라 합니다. 곧 참된 “안식”은 자신이 스스로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이미 있는 것을 찾고 발견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것을 예수님 안에서 찾고 발견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참된 스승이신 예수님 안에서만이 참된 “안식”을 얻게 됩니다. 왜냐하면 오로지 예수님만이 참된 “안식”을 가지고 계시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요한 14, 6) 까닭입니다.

그러기에, “참된 안식”, 그것은 그것을 가지신 분으로부터 얻게 됩니다. 그것은 공로로 얻어지기보다 믿음으로 얻어지는 것이요, 탐구로 얻어지기보다 순명으로 얻어지는 것이요, 앎으로 얻어지기보다 사랑으로 얻어집니다. 참으로, 그것은 그분의 선물이요, 사랑이요, 자비요, 호의입니다. 그렇습니다. 참된 안식은 참된 주인에게서 옵니다.

그러기에, 오늘 우리는 주님을 찬미하며, 이미 세상을 떠난 영혼들을 기리며, 주님의 축복과 은총에 감사를 드립니다. 오늘 우리는 가족과 공동체 식구들뿐만 아니라, 특히 소외된 영혼들, 곧 아무도 기억하지 않는 이들과 잊혀 진 이들을 위해서도 기도해야 할 일입니다. 또 평화를 위해 일하다 세상을 떠난 영혼들과 억울하게 죽은 사람들과 무죄한 사람들의 죽음을 함께 아파하며, 그들을 위해서도 기도를 잊지 말아야 할 일입니다. 그리고 전쟁의 살육 속에서 희생된 이들, 테러와 폭력의 희생자들, 고문과 억압으로 희생된 이들, 이루 헤아릴 수없는 타력에 의해 희생된 이들을 위해서도 기도해야 할 일입니다. 아멘.

▦ 양주 올리베따노 이영근 신부 : 2018년 11월 2일
  | 1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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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하여라,
슬퍼하는 사람들!(마태 5, 4)

늦가을의 울음소리와 늦가을의 외로운 길입니다. 그 길들을 위해 기도드립니다. 떠난 뒤에야 비로소 알게 되는 소중한 그리움의 빛깔입니다. 삶도 죽음도 기도도 구원도 모두 하느님의 것임을 깨닫습니다.

죽음은 결코 우리 삶의 끝이 될 수 없습니다. 우리는 하느님께로 가고 있는 사랑의 순례자들입니다. 사랑은 언제나 기억하고 기도하는 구원의 기쁜 소식 입니다. 애절한 기도와 하느님의 사랑을 간절히 기다리는 이들이 참으로 많습니다.

하느님의 자비 안에선 절망이란 존재하지 않습니다. 구원만이 있을 뿐입니다. 우린 죽음을 그리워하는 존재가 아니라 하느님을 간절히 그리워하는 하느님의 자녀들입니다.

죽은 이들을 통해 사랑을 다시 배우게 됩니다. 우리를 위해 기도해 주셨던 떠난 많은 이들을 위해 우리도 기도할 수 있는 위령의 날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사람을 살리시고 구원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자비를 진심으로 믿기 때문입니다. 주님, 떠난 모든 이들을 당신의 자비로 받아주소서.

▦ 구속주회 한상우 신부 : 2018년 11월 2일
  | 1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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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도회] 만일 죽음이 없다면,
이 끝도 없이 계속되는 고통과 비참함을 어떻게?

언제인지는 모르겠지만 반드시 우리에게 다가올 죽음, 너무 두려워하지 말아야겠습니다. 망망대해를 항해하는 작은 배 한척인 우리가, 거친 파도를 뒤로 하고,잔잔한 항구인 주님 안에 정박하는 것이 곧 죽음이기 때문입니다.

지상 생활 동안 이곳 저곳 떠도는 나그네인 우리가, 파란만장했던 여정을 마무리 짓고, 영원한 고향인 주님 안에 정착하는 것이 곧 죽음이기 때문입니다.

항해를 계속해온 배 한척이 종착지로 입항하지 않고, 쉼없이 바다 위에서 떠돌기만 한다면, 그 항해는 얼마나 피곤한 항해이겠습니까? 한 나그네가 종착지에 도착하지 않고, 늘 이곳저곳 떠돌이 생활만 계속해 나간다면, 그 인생은 얼마나 가련한 인생이겠습니까? 한 인간의 생명이 150세, 200세가 되도록 죽음에 이르지 않고, 계속 지상에 머물러 있으면, 그 삶은 얼마나 지루하고 구차한 삶이겠습니까?

따지고 보니 죽음은 축복입니다.

중환자들의 임종을 옆에서 지켜보면서, 더욱 죽음이 은총임을 실감합니다. 만일 죽음이 없다면, 이 끝도 없이 계속되는 한 인간 존재의 비참함을 어떻게 견뎌낼 수 있겠습니까?만일 죽음이 없다면, 끝도 없는 결핍과 한계, 고통과 죄를 어떻게 감당할 수 있겠습니까?

뿐만 아니라 우리는 죽음을 통해 그리도 그리워하던 주님의 얼굴을 뵈올 수 있습니다.죽음이라는 사다리를 건너가야만 ‘지복직관’이라는 평생 소원을 이룰 수 있습니다.

죽음을 통해서 우리는 그리도 극복하기 힘겨웠던 ‘나’와 ‘너’라는 산을 넘어설 수 있습니다.그래서 죽음은 모든 것을 해결하는 해결사인 것 같습니다.

그런데 죽음과 관련해 한 가지 중요한 과제가 우리 앞에 주어집니다. 출생에 못지 않게 중요한 단계인 죽음에 대한 더 많은 가치와 의미를 부여하는 작업입니다.

나의 죽음, 너의 죽음, 세상 모든 존재들의 죽음이 보다 존중받도록 노력하는 일입니다. 그 어떤 사람의 죽음이든 숭고한 죽음, 아름다운 죽음이 되도록 도와주는 일입니다.

이런 면에서 요즘 우리 가톨릭 교회에서 크게 강조하고 있는 존엄사를 위한 운동, 착한 죽음의 연습, 웰다잉을 돕기 위한 호스피스 운동 등은 너무나 소중한 노력입니다.

생명이 붙어있는 한 모든 존재는 존귀합니다. 희망으로 가득 찬 신생아나 청소년의 생명도 존중받아야 하지만, 오늘 내일 하시는 환우들의 생명도 존중받아야 마땅합니다.

죽음과 관련해 바오로 사도가 남긴 말씀을 한번 들어보십시오. 그가 얼마나 죽음 앞에 초연했었는지를 잘 확인할 수 있습니다.주님께서 한 존재의 전부가 되었을 때, 죽음조차도 기쁨이요 선물이요 축복이 될 수 있음을 바오로 사도는 온 몸으로 외치셨습니다.

“나의 간절한 기대와 희망은, 살든지 죽든지 나의 이 몸으로 아주 담대히 그리스도를 찬양하는 것입니다. 사실 나에게는 삶이 곧 그리스도이며 죽는 것이 이득입니다. 그러나 내가 육신을 입고 살아야 한다면, 나에게는 그것도 보람된 일입니다. 그래서 어느 쪽을 선택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나는 이 둘 사이에 끼여 있습니다. 나의 바람은 이 세상을 떠나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것입니다. 그편이 훨씬 낫습니다. 그러나 내가 이 육신 속에 머물러 있는 것이 여러분에게는 더 필요합니다.”(필리피서 1장 20~24절)

▦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 2018년 11월 2일
  | 1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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