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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 늘 준비하는 삶
조회수 | 1,943
작성일 | 08.10.31
어떤 할아버지가 있었는데, 이 할아버지는 식사 예법이 매우 엄격하기로 유명했습니다. 그래서의 그의 손자들은 할아버지와 함께하는 식사 시간을 상당히 두려워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어느 날 아침, 할아버지와 식사를 하던 손자가 “저... 할아버지...”하고 더듬거리며 할아버지에게 무언가를 말하려고 합니다.

이 모습에 버럭 화를 내며 “식사 중에는 아무 말도 하지 말라고 했지! 식사가 끝나고 말해라!”고 소리를 지르는 것이 아니겠어요. 손자는 깜짝 놀라서 하려던 말을 하지 못하고 그냥 입을 다물고 말았지요.

식사 후 할아버지는 손자에게 묻습니다.

“아까 하려던 말이 무엇이니?”

“이미 늦었어요. 아까 제가 말하려했던 그 순간, 할아버지 음식에 벌레가 들어 있었거든요.”

식사 시간에 조용히 하는 것이 식사 예법인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할아버지는 손자의 얘기를 듣지 않고 자신의 고집대로만 하려고 화를 내는 바람에 벌레를 먹게 되었고, 손자는 겁을 먹고 주저하다가 바른 말을 해야 하는 타이밍을 놓치게 되었습니다.

이 이야기를 통해서 어떤 일이든 적당한 타이밍이 있다는 깨달음을 얻을 수 있게 되네요. 그런데 우리들은 그 타이밍을 놓쳐 버릴 때가 너무나 많지요. 좋은 일을 할 타이밍인데, 남의 눈치를 보다가 못하게 되는 경우가 많지요. 자신의 잘못을 용서 청할 수 있는 타이밍에서도, 한발자국 앞으로 나아가는 용기가 없어서 못하게 되는 경우가 또 얼마나 많았던 지요. 그리고 사랑해야 할 타이밍에서는 이것저것 따져보다가 아무런 행동도 하지 못하고, 그냥 생각으로만 그쳐 버릴 때도 참으로 많았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타이밍을 놓치게 되면 어떻게 됩니까? 100% 그 뒤를 따르게 되는 것이 바로 후회입니다. 그래서 끊임없이 과거에 연연하면서 아쉬움을 말하곤 하지요. 그렇다고 자신이 놓친 타이밍을 다시 회복할 수 있을까요?

오늘은 위령의 날입니다. 즉, 우리 가톨릭교회가 죽음에 대해서 깊이 묵상하면서 죽은 이들을 위해 특별히 기도하는 날입니다. 그런데 여기에는 우리들의 모습도 되돌아 볼 수 있는 성찰의 의미도 담겨 있습니다.

죽음은 그 누구도 피해갈 수가 없는 것이지요. 그런데 죽음이 왔을 때, 내가 이 세상에서 놓쳐버린 타이밍들을 회복할 수가 있을까요? 그때는 아무리 후회를 해봐야 소용이 없다는 것입니다. 아직 준비가 안 되었다고 생각하는 우리들에게, 어느 날 갑자기 죽음이 찾아왔을 때, “아직 준비가 안 되었어요. 제가 해야 할 일들을 모두 마친 마음에 가겠습니다.” 이렇게 말한다고 피할 수 있을까요?

위령성월 안에는 죽음을 깊이 묵상하고, 지금 현재를 보다 더 충실하게 살아가라는 의미도 담겨 있습니다. 즉, 지금 자신이 해야 할 일에 대한 타이밍을 잘 맞추는 삶을 간직해야 하는 것입니다. 바로 그 모습이 죽음을 가장 잘 준비하는 것이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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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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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새벽에 있었던 일 하나 말씀드립니다. 잠을 자다가 문득 눈이 떠졌습니다. 그리고 습관적으로 시계를 보았지요. 12시 30분. 억울했습니다. 너무 일찍 일어났다는 생각이 들었거든요. 그래서 곧바로 다시 잠을 청했습니다.

어느 정도의 시간이 지난 뒤 다시 눈이 떠졌고 또 다시 시계를 보는 순간, 깜짝 놀라고 말았습니다. 글쎄 시계에서 가리키고 있는 시간이 12시 30분인 것입니다. 어떻게 된 것일까요? 한참을 잤다고 생각했는데도 시계가 그대로라는 것은 무엇일까요? 혹시 머리로만 한참 잤다고 생각하고 실제로는 잠을 자지 않은 것이 아닌가 했습니다. 그래서 더 자려고 했습니다. ‘혹시?’라는 생각에 휴대전화의 시간을 확인했습니다. 휴대전화의 시간이 가장 정확하니까요.

다시금 깜짝 놀랐습니다. 글쎄 휴대전화에서 가리키는 시간은 4시였습니다. 맞습니다. 시계가 작동되지 않았던 것이지요. 즉, 12시 30분쯤 시계가 멈추었던 것이고, 제가 일어났던 시간은 원래 일어나던 시간이었던 2-3시쯤 되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저는 아직도 일어날 시간이 멀었다고 생각하면서 또 잠을 청했었던 것이지요.

문득, 이제까지 살아오면서 내가 옳다고 판단했던 것이 정말로 올바른 것이었을까 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마치 잘못된 시계를 보고서 아직도 시간이 많이 남았다고 생각했던 것처럼, 잘못된 모습이 진실인 양 나의 주장과 판단만을 내세우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을까요?

오늘은 위령의 날입니다. 세상을 떠난 이들을 기억하면서 그들을 위하여 기도하는 날이지요. 그런데 이렇게 세상을 떠난 분들을 기억하면서 동시에 현재를 살고 있는 내 자신에 대해서도 다시금 생각하는 시간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주님께서는 복음에서 말씀하시듯이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라면서 우리에게 다가오시려는데, 우리는 정녕 주님께 모든 것을 의탁하고 있었을까요? 나의 잘못된 주장과 판단으로 주님께 가까이 가기보다는 이 세상의 것에 더 가까이 가려고 했던 것은 아닐까요? 하지만 우리가 세상을 떠난 분들을 보면서 그 누구도 이 세상에서만 머물러 있지 못했다는 진리를 잊어서는 안 됩니다. 죽음을 겪지 않고 살아가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다는 것이지요.

따라서 우리가 주님께 무조건 가까이 가야 한다는 것은 너무나도 자명합니다. 그런데 내 주장과 판단만을 내세우면서는 결코 주님께 가까이 갈 수 없습니다. 주님 앞으로 나아갈 때에는 누구보다도 겸손된 모습으로, 주님께서 그토록 강조하신 사랑의 마음을 간직하고서야 다가설 수 있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런 모습과 이러한 마음을 간직하는 것이 먼 미래, 주님께서 약속하신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가장 멋진 준비 작업이 될 것입니다. 이러한 작업을 행하는 오늘이 되셨으면 합니다. 세상을 떠난 이들을 위하여 기도합시다.

조명연 신부
  | 10.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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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곶성지에는 기도틀이라는 것이 있어서, 순례객들이 자신의 기도를 적어서 꽂아놓습니다. 그리고 제가 새벽에 일어나서 이 기도들을 하나하나 뽑아서 저 역시 같은 지향으로 기도합니다. 제 기도의 힘이 대단하지는 않겠지만, 둘이나 셋이 모인 곳에 나도 함께 하겠다는 주님의 말씀을 기억하면서 저 역시 조금이라도 보탬이 될까 싶어서 기도를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기도 내용들을 보면 경제적인 부분이 가장 많습니다. 다음으로 많은 것은 시험에 합격하기를 바라는 것이지요. 즉, 이 세상 안에서의 성공과 영광을 누리길 바라는 내용이 참으로 많습니다.

이런 기도가 잘못되었다는 것은 아닙니다. 먹고 살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의 경제적인 부분이 충족되어야 하고, 또한 자신의 앞날을 위해서 시험에 합격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기도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종종 이런 생각이 들 때가 있습니다. 꼭 이런 세속적인 내용의 기도가 이루어진다고 행복할까 라는 것이지요.

어떤 미래학자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어느 정도의 의식주가 해결되면 그만큼 더 많은 안전감을 느낄 수 있지만, 그 이상이 되면 이제 돈을 많이 벌고 더 좋은 음식을 먹고 더 고급차를 굴린다고 해서 더 큰 안전감을 느낄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돈으로 배를 채울 수는 있지만 마음을 채울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여러 직종 중에서도 경제적 안정과 사람들의 존경을 받는 의사들의 자살률이 가장 높고 그들의 암 발생률은 보통 사람들보다 3배나 높다고 하더군요.

세상의 가치에 휘둘리는 모습에 벗어나는 길이 바로 신앙입니다. 이 신앙을 통해서 내 자신으로부터 그리고 뭐든지 이용하려고 하는 욕심으로부터 진정한 자유를 찾게 해 줍니다.

오늘 우리들은 죽은 모든 이, 특별히 연옥 영혼들의 하루빨리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기를 기도하는 ‘위령의 날’을 보냅니다. 세상에서 모든 만족을 누렸다고 해도 하느님 나라에서 영원한 생명을 누릴 수가 없다면 진정한 행복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세상의 삶은 짧고, 하느님 나라에서의 삶은 영원의 시간이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죽은 모든 이들의 구원을 위해 우리들은 기도합니다.

그리고 동시에 우리 자신의 모습 역시 새롭게 생각하게 됩니다. 과연 내 모습은 구원의 길에서 가까운지, 혹시 잠시 동안의 시간이라고 할 수 있는 이 세상 안에서의 만족만을 위해서 주님의 뜻과 정반대의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는지를 말입니다.

주님께서는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마태 11,27)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처럼 이제는 주님 곁으로 가야할 때입니다. 더 이상 후회의 삶이 아니라, 주님 안에서 만족할 수 있는 삶을 사는 우리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인천교구 조명연 신부 : 2016년 11월 2일
  | 1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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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를 보면 심심치 않게 등장하는 소식이 교통사고로 인명피해를 입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뉴스를 보고 있으면서 남 이야기가 아님을 깨닫습니다. 왜냐하면 저 역시도 차를 소유하고 있으며 운전을 꽤 많이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또한 내 자신만 똑바로 운전한다고 해서 사고의 위협으로부터 자유로운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사실 이 자동차를 처음 만든 사람의 마음은 어떠했을까요? 앞으로 이 자동차로 인해서 많은 사람들이 죽음으로 나아갈 수 있다는 것을 알았을까요? 분명히 사람들의 삶을 더욱 더 풍요롭기를 바라면서 이 자동차를 만들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자신의 의도를 채우기도 했지만 그와 반대로 사고로 인한 절망 속에서 슬픔을 갖게 하는 도구가 되기도 했습니다.

자신의 의도와 다른 뜻밖의 결과를 가져오는 일들이 끊임없이 계속되는 삶입니다. 하지만 절대로 변하지 않는 진리가 하나 있습니다. 여기에는 뜻밖의 일도 있을 수 없습니다. 바로 죽음입니다. 우리의 삶은 하루하루 죽음에 가까워지고 있다는 사실은 절대로 변하지 않습니다.

이 진리를 인식하면서, 이 진리를 위해 지금 무엇을 해야 할 지를 늘 명심하면서 살아야 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차피 죽을 것이니까 그냥 즐기면서 이 세상을 살면 그만일까요? 우리는 정해진 시간에 식사를 합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 어차피 배고플 텐데 뭘 먹으려고 하느냐고 말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배고파지기는 하겠지만, 식사를 해야지만 지금을 잘 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삶이 끝나는 날에 가까워진다고 해도 그것 자체로 절망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지금 이 순간을 더욱 더 의미 있게 살아간다면 우리가 맞이할 죽음 역시 절망이 아닌 또 다른 희망의 이름이 되지 않을까요?

오늘은 위령의 날입니다. 세상을 떠난 이들을 기억하면서 그들을 위하여 기도하는 날이지요. 그런데 이렇게 세상을 떠난 분들을 기억하며 기도하는 동시에 현재를 살고 있는 내 자신에 대해서도 다시금 생각하는 시간이 되어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복음에서 말씀하시듯이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라면서 우리에게 다가오시려는데, 우리는 정녕 주님께 모든 것을 의탁하고 있었을까요? 이렇게 주님께 모든 것을 의지하고 맡기는 사람은 지금 이 순간을 함부로 살 수 없습니다. 주님 안에서 큰 용기와 힘을 얻으면서, 이 순간을 보다 더 충실하게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삶이 바로 그 누구에게도 예외 없이 찾아오는 죽음을 잘 맞이하는 길이며, 주님께서 약속하신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가장 멋진 준비가 될 것입니다.

▦ 인천교구 조명연 신부 : 2018년 11월 2일
  | 1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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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트레스에 대한 관심이 많습니다.
암의 원인이 이 스트레스에서 온다는 연구 결과가 있고, 스트레스로 인해 우울증이 온다고 알려져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스트레스가 아예 없다면 어떨까요?
정말로 행복해질 수 있을까요?

주요 신경 내분비계로 스트레스에 대한 반응을 보이는 동물의 HPA 축을 제거한 뒤에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를 살펴보았습니다. 이 동물들은 만사에 심드렁하고 아무런 일도 하지 않았습니다. 일부는 심지어 먹는 것조차 관심을 보이지 않았습니다. 스트레스를 받는 부분의 손상으로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것은 사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스트레스에 대해 부정적인 뉘앙스를 갖게 되지만, 인간의 제 기능을 위해서는 필요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특히 단기간의 스트레스는 집중력을 높이고 사고 기능을 예리하게 만드는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스트레스를 없애는 것이 아니라,
적당한 스트레스는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무조건 스트레스를 거부한 것, 이것 역시 또 다른 스트레스는 아닐까요? 따라서 적당한 스트레스로 여기면서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모습이 필요합니다. 나 자신의 발전은 바로 이런 인정과 수용을 통해서 시작됩니다.

우리의 스트레스 중에서 가장 큰 부분은 죽음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은 어마어마한 스트레스로 다가오게 됩니다.

그렇다면 이 죽음을 무조건 피할 수가 있을까요?
어떤 사람도 죽음에서 벗어날 수는 없습니다.
누구나 한 번은 죽음의 경계를 지나야만 합니다.
그런데도 이를 스트레스를 받아들고 힘들어하는 것은
죽음 자체를 인정하지 못하고 수용하지 못하기 때문은 아닐까요?

오늘은 죽은 모든 이를 기억하는 위령의 날입니다.
특히 연옥 영혼들이 하루빨리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서 영원한 생명을 누리기를 기도하는 날입니다.

이 취지에 맞게 당연히 고인을 위해 기도를 해야 하겠지만,
우리 자신을 바라볼 수 있는 시간도 가져야 합니다. 이 세상 안에서 영원히 살 수 없다는 것을, 그리고 죽음이 죽음으로 끝나고 마는 것이 아니라 영원한 생명의 세상으로 넘어가는 하나의 단계라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래야 주님께서 말씀하신 행복 선언처럼, 세상 안에서 누리는 순간의 만족이 아니라 주님 안에서 영원한 만족을 누릴 수가 있게 됩니다.

죽음을 인정하고 수용하는 과정 안에서 나의 진정한 성장이 이루어지게 됨을 오늘 위령의 날을 맞이해서 묵상해 보셨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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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신부
2020년 11월 2일
  | 1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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