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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안동/대구/부산/수원] 생자필멸(生者必滅)이라 했던가?
조회수 | 2,411
작성일 | 08.10.31
생자필멸(生者必滅)이라 했던가?
태어나는 순간부터 죽음을 향해 매일 다가서고 있다. 하루 하루를 사는 것이 결국 죽음에로 가는 여정인 것을. 그러나 우리는 부활한 예수님이 들어간 그 참 생명을 믿기에, 현세의 삶도 의미가 있다.

1. 사는 것이 죽는 것이다.

11월은 위령(慰靈)의 달입니다.
교회력으로 한해를 마감하는 때입니다. 그리고 온갖 초목들도 무성했던 잎사귀들을 떨어뜨리고 자신들의 생을 마무리하는 조락(凋落)의 계절입니다. 교회는 이러한 자연의 섭리에 맞게 '위령의 달'을 지내며 돌아가신 분들의 영원한 안식을 빌고, 우리들의 삶도 되돌아보게 합니다.

누구도 생자필멸(生者必滅)이라는 자연의 질서를 뛰어 넘을 수는 없습니다.
활시위를 떠난 화살이 되돌아설 수 없듯이, 모든 인간은 태어나는 그 순간부터 한 순간도 쉴새없이 죽음에로 한 걸음씩 다가가고 있음을 누가 부인하겠습니까? 우리는 태어나는 그 순간부터 죽음을 향해 쏘아진 화살처럼 한 순간도 쉬지 않고 죽음을 향해 내닫고 있음이 사실입니다.

우리는 매일 어떤 일을 결정하고 선택하면서,
베틀에서 베를 짜듯 하루 하루를 엮어가며 삶을 영위하고 있습니다. 그런 면에서 우리는 "매일 살아간다."는 말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뒤집어보면 그렇게 하루 하루를 사는 것은 결국 죽음에로 다가서는 일이기에 "매일 죽어간다."는 말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사는 것이 죽는 것이다."는 말이 또 다른 의미로 다가옵니다.

이렇게 죽음은 우리가 태어나는 그 순간부터
생명의 시작과 함께 우리 안에 이미 있었고, 삶 안에서 싹이 텄고, 우리가 매일 사는 삶의 여정에서 자라고 있는 것입니다. '적과의 동침'이라는 말이 있듯이 이렇게 우리의 인생에 있어서, 죽음은 생명과 함께 시작되었고, 매일의 삶 안에 함께 있으며, 사는 만큼 가까이 오고 있는 것입니다.

2. 영원한 생명을 믿나이다.

그리스도교 신앙은
인간이 생물학적으로 죽어도 영혼은 '불사불멸(不死不滅)'한다는 것을 믿습니다. "죽음으로 모든 것이 끝나지 않고 어떤 모양으로든지 새로운 차원의 삶을 계속한다."는 이 믿음은 인류가 동굴에서 살던 때부터 가장 오래 동안, 모든 민족이 보편적으로 지켜온 믿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주님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죽은 라자로를 소생시킨 후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사람은 죽더라도 살겠고 또 살아서 믿는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다."(요한11,25-26) 하시며 당신이 바로 생명을 주인이심을 선언하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의 부활이 없었더라면, 아마도 사형수 예수를 구세주로 믿는 그리스도교는 이 세상에 생겨나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그리스도교는 바로 부활 신앙 위에 서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지상의 삶이 끝나는 그 연장선상에서
시작되는 '새로운 차원의 영원한 생명'을 믿지 못하는 사람은 참 신앙인이라 할 수 없습니다. 오늘 이렇게 앞서 가신 분들을 기억하며 기도하기 위해 한자리에 모인 것 자체가 하나의 신앙고백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부활신앙이란 예수님의 부활을 믿을 뿐 아니라, 우리도 예수님처럼 하느님과 이웃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삶을 살 때, 부활한 예수께서 들어가신 그 영원한 생명을 누릴 것을 믿는 믿음이 아니겠습니까?

사도 바오로는
이사야 예언자의 말을 빌어 성령을 통해 하느님의 자녀들이 누릴 차원에 대해 "눈으로 본 적이 없고 귀로 들은 적이 없으며 아무도 상상조차 하지 못한 일을 하느님께서는 당신을 사랑하는 사람들을 위하여 마련해 주셨다."(1고린2:9)라고 영원한 생명에 대한 자신의 믿음을 고백하셨습니다.

3.매일 영원한 생명을 가꾸는 삶을 살자.

사실 우리는 죽음 후의 세계에 대해서 많은 것을 알지 못합니다.
아무도 저 세상을 경험해 본 사람이 없기 때문에 자신 있게 대답할 수도 없습니다. 그러나 스스로 죽음을 넘어 영원한 생명에로 건너가시고, 진리자체이시고 거짓을 말할 수 없는 주님께서 "나를 믿는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다."고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약속하셨기에 우리는 그분의 진실하심에 의지하여 믿는 것입니다.

그러나 2000여 년 전 예수님께 실제로 일어났던
그 부활이 어떻게 우리에게도 가능한지 논리적으로 설명하기는 불가능합니다. 여기서 우리에게 이해의 실마리를 던져주시는 바오로 사도의 말씀을 들어보고자 합니다. 사도 바오로는 "비록 여러분의 몸은 죄 때문에 죽었을지라도 그리스도께서 여러분 안에 계시면 여러분은 이미 하느님과 올바른 관계에 있기 때문에 여러분의 영(靈)은 살아 있습니다.

그리고 예수를 죽은 이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분의 성령께서 여러분 안에 계시면, 그리스도를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분께서 여러분 안에 살아 계신 당신의 성령을 시켜 여러분의 죽을 몸까지도 살려 주실 것입니다."(로마 8,10-11)고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어떻게 예수님의 부활에 참여할 수 있는지를 깨닫기 위해, 사도 바오로께서 로마인들에게 써 보낸 이 말씀을 깊이 묵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여러분 안에 계시면....
여러분의 영(靈)은 살아 있습니다." 하신 이 말씀은 무슨 뜻입니까? 돌감나무에 단감을 접붙이면 무슨 감이 열립니까? 단감이 열리지요. 이처럼 우리는 비록 원죄로 인해 악으로 기울어지고 자주 죄에 떨어지고 불완전하기 이를 데 없는 돌감나무와 비슷하지만, 예수를 하느님의 아들로, 구세주로 믿고, 그분의 영을 내 안에 모시고, 그분의 뜻을 따라 그분의 가르침대로 산다면, 우리도 그리스도와 일치되어 그분의 생명이 우리 안에 자라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그리하여 우리의 삶이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가 내 안에서 사시는 것입니다."(갈라2,20)하신 바오로 사도처럼 주님과 일치하는 삶을 살면 우리 안에 계시는 그분의 성령을 통해, 우리는 포도나무와 그 가지처럼 주님과 하나가 되어 그분의 부활에 동참하게 된다는 설명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그 가지이다. "(요한15,5)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내 안에서 살고, 나도 그 안에서 산다."(요한 6,56)고 말씀하시지 않으셨습니까?

그래서 사도 바오로는
"예수를 죽은 이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분의 성령께서 여러분 안에 계시면, 그리스도를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분께서 여러분 안에 살아 계신 당신의 성령을 시켜 여러분의 죽을 몸까지도 살려 주실 것입니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죽음이 우리의 삶 안에서 자라고 있듯이, 나날이 늙고 쇠퇴해 가는 우리의 육신생명 안에서 영원한 생명이 자라고 있음을 우리는 믿을 수밖에 없습니다.

알이 애벌레가 되고,
애벌레는 번데기가 되고, 번데기는 꼬치 안에서 변신의 죽음을 거치면서 나비로 날아가는 새 차원의 삶을 시작하듯이 말입니다. 우리가 육체의 껍질을 벗는 순간 새로운 차원의 영원한 생명을 가꾸기 위해서는 참으로 바오로 사도의 말씀대로 "성령께서 내 안에 살아 계시어 내가 참으로 주님의 성전"(1고린3,16)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내 몸이 참으로 하느님의 성령이 거처하시는
성전이 되기 위해서 우리는 매일 이기적이고 자기 중심적인 묶은 껍질을 벗기 위한 자신과의 진한 싸움을 해야 할 것입니다. 이기적인 껍질을 벗기 위한 자신과의 싸움은 하나의 죽음입니다. 이렇게 매일 자신에게 죽어야 그만큼 부활의 싹이 자라는 것입니다. 죽는 만큼 새롭게 사는 것, "죽어야 산다."는 이 빠스카의 삶을 사는 것이 바로 그리스도 신자의 삶이 아니겠습니까?

4. 그리스도 신자에게 있어서 죽음의 의미

오늘 위령의 날은 단순히
여기 누워 계신 분들과 생전에 맺었던 인연의 기억들을 나누고 되새기는 날로 그치지 않습니다. 오늘은 우리보다 앞서가신 분들의 묘소 앞에서 매일 죽고 그만큼 부활하는 우리의 빠스카의 삶이 어떻게 가꾸어지고 있는지 되돌아보는 성찰과 회개의 피정을 하는 날입니다.

신앙인에게 있어서 죽음은 파멸의 날이 아니라,
마루에서 문턱을 넘어 안방에로 건너가듯이, 시간에서 영원에로, 부활한 예수가 들어가신 그 생명에로 건너가는 빠스카의 축제임을 되새기는 날입니다.

뿐만 아니라,
신앙인에게 있어 죽음은 가장 큰, 가장 어려운, 순명입니다. 그것은 자신의 전 존재가 전적으로 하느님의 손에, 그분의 뜻에 달려 있음을 온 존재로 받아들이며 그분께 온전히 자신을 내 맡기는 행위입니다.

또한 신앙인에게 있어서 죽음은 마지막 세례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받으신 생명에서 죽음에로 건너가는 임종의 고통을 통해 세상의 죄를 다 씻으셨듯이 우리는 임종의 고통을 통해 우리가 저지른 모든 죄와 허물 그리고 세상의 죄까지도 대신 속죄하는 속죄의 큰 제사요, 세례인 것입니다.

우리는 오늘 주님이신 예수님의 말씀을 믿고,
그분께 희망을 걸고, 그분과 일치하는 삶을 추구했던 모든 분들, 믿음 안에서 우리와 인연을 맺었던 이들이 그분의 부활에 동참하며 참된 생명을 누리시기를 기도해야겠습니다. 영원한 생명은 매일의 우리 삶 안에서 움트고 자라는 것임을 명심합시다. 그럼으로써 우리는 더욱 주님과 일치하여 매일 죽고 부활하는 삶을 살아 주님께서 당신을 믿고 따르는 사람들을 위해 마련하신 영원한 생명을 매일 가꾸어가도록 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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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유영봉 몬시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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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 본 고향을 준비하며

오늘은 위령의 날입니다. 우리 보다 먼저 가신 조상들을 기억하고, 본 고향, 하느님 나라에서 영원한 안식을 누리도록 기도하면서, 자신의 죽음에 대해서도 생각해 봅시다.

1980년 3월 프랑스 파리의 어느 병원에 한 세기를 떠들석하게 하던 존경받는 한 지성인이 급성 폐기종 때문에 입원했습니다. 그는 한달 동안 이 병원에서 문자 그대로 발악을 했습니다. 소리를 지르고 찾아온 사람들에게 고함을 치고 절규했습니다. 그러면서도 죽음에 대한 불안과 공포 때문에 자기의 병명이 무엇인가를 곁에 서있는 자기 아내에게 조차 묻지 못했다고 합니다. 소리치고 발악하고 괴로워하고 있는 바로 그 사람은, 자유라는 이름하에 수많은 글을 남기고, 커다란 발자취를 남겼던 무신론적 실존주의 철학자 사르트르였습니다. 이것이 그의 말로였습니다. 1980년 4월 16일 입원한지 한 달만에 사르트르는 병원에서 그렇게 세상을 떠났습니다.

사르트르가 세상을 떠나고 난 후에 프랑스의 신문들이 떠들기 시작했습니다. “사르트르가 왜 이렇게 죽어야 하는가? 죽음으로부터의 자유를 그렇게도 외쳤던 그의 말로가 이렇게 비참했던 이유가 무엇인가? 그것은 사르트르에게 돌아갈 본 고향이 없었기 때문이다.”라고 대서특필했던 것입니다.

그 본 고향이 어디겠습니까? 바로 하느님 나라입니다. 사르트르는 하느님을 믿지 않고 살았기에, 죽음이 두려운 존재였고, 불안과 공포 속에서 죽었습니다. 신앙인에게 있어서 죽음은 새로운 삶의 시작입니다. 우리에게는 돌아갈 본 고향이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행복합니다. 그 본 고향으로 잘 돌아가기 위해 현세적인 것보다 영적인 것에 마음을 두고 살아갑니다.

바오로 사도는 “우리가 현세만을 위하여 그리스도께 희망을 걸고 있다면, 우리는 모든 인간 가운데에서 가장 불쌍한 사람일 것입니다”(1고린 15,19)라고 말씀하십니다. 오늘 복음의 진복선언도 같은 점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슬퍼하는 사람들, 온유한 사람들, 의로움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들, 자비로운 사람들, 마음이 깨끗한 사람들, 평화를 이루는 사람들, 의로움 때문에 박해를 받는 사람들’(마태 5,3~10 참조)은 하느님으로부터 행복을 약속받습니다. 이 사람들은 현세만을 위해 살지 않고, 현세에만 희망을 두고 살지 않고, 하느님에게 마음을 두고 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부유한 사람들, 지금 배부른 사람들, 지금 웃는 사람들, 지금 칭찬받는 사람들’(루가 6,24~26 참조)은 불행하다고 말씀하십니다. 현세만을 위해 살고, 현세에 마음을 다 빼앗기며 사는 사람들을 말합니다. 하느님이 있어야 할 자리에 세상적인 것들로 가득 차 있어 더 이상 하느님은 함께 하실 수 없게 됩니다.

나의 모습은 어떻습니까? 혹 하느님을 자기의 중심에서 밀어내고 있지는 않습니까? 부유하고, 배부르고, 남에게 칭찬받기 위해서만 부지런히 노력하고 있지는 않은지요. 신앙인은 현세만을 위하여 희망을 걸고 사는 사람들이 아니라, 본고향으로 돌아갈 준비를 하며 사는 사람들입니다.

묘지를 돌면서 묘비를 읽고 있던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떤 묘비 앞에서 발걸음을 멈추었는데, 그 묘비의 글이 흥미로웠기 때문입니다. 묘비의 글은 세 줄이었습니다. "나도 전에는 당신처럼 그 자리에 그렇게 서 있었소." ‘무슨 이런 묘비가 다 있는가’하고 웃었습니다. 그런데 두 번째 줄을 읽고 난 뒤에 순간 ‘이게 아니구나’ 싶었습니다. "나도 전에는 당신처럼 그곳에 서서 그렇게 웃고 있었소." 마음이 콱 찔려옴을 느꼈습니다. 그래서 자세를 가다듬고 긴장된 마음으로 세 번째 줄을 읽었습니다. "이제 당신도 나처럼 죽을 준비나 하시오."

형제 자매 여러분!
본 고향으로 돌아갈 준비를 지금부터 철저히 하며 살도록 다짐합시다. 현세가 아니라 하느님께 마음을 두는 삶을 통해, 나눔과 섬김의 삶을 통해, 천상에서 누릴 참된 행복을 꿈꿔봅시다.

▮ 안동교구 허춘도 토마스 신부
  | 1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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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 예수님의 삶을 따라 살아갑시다.

하느님이 아담과 하와를 창조하시고 그들에게 명령하셨습니다. “너희들이 죽지 않으려거든 선과 악을 알게 하는 열매만은 따먹지 말아라.” 그러나 첫 사람들은 하느님의 명령에 불순명했고 그 댓가로 죽음의 고통을 겪게 되었습니다. 첫 사람들의 원죄 이후 그들의 후손들은 원죄의 결과인 죽음의 고통을 예외없이 겪게 되었습니다.

이 세상에 죽음을 피할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과거의 모든 사람들은 죽었고 현재의 모든 사람들도 죽고 있으며 미래의 모든 사람들도 앞으로 죽을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모두 죽음을 향하여 나아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은 알지 못하는 죽음의 때, 즉 시한부 삶을 살고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죽음 때문에 많은 사람들은 삶의 의미에 대해서도 생각하고, 죽고 나면 다 끝나는 데 무슨 의미가 있는가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또한 사람이 한번 죽으면 끝이 나는데 선한 일을 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는가라고 생각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우리의 삶을 의미있게 만드는 분이 계십니다. 그분은 당신이 사랑하시는 사람들을 살리시기 위하여 성부께서 파견하신 그리스도라고 불리고 주님이라고 불리며 하느님의 아드님이라고 불리는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을 체험한 사람들은 그분에게서 기쁜 소식을 듣습니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 그러면 너희가 안식을 얻을 것이다. 정녕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짊어주시는 이 멍에는 하느님을 사랑하라는 첫째 계명과 이웃을 자신처럼 사랑하라는 둘째 계명입니다. 또한 그분은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영원한 생명을 얻으려거든 계명을 지켜라. 그러면 영원히 살게 될 것이다. 이 계명은 하느님을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여 사랑하는 것이고 너의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하는 것이다.” 예수님을 체험하고 그분으로부터 이러한 계시를 받은 사람들은 영원히 살기 위하여 그분의 법인 계명을 마음을 다하여 목숨을 다하여 받들어 실천해 나갑니다. 이 멍에와 계명인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실천함으로써 예수님으로부터 영원한 생명을 얻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사람들에게 명하신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라는 멍에와 계명은 예수님 당신이 먼저 실천하셨습니다. 그 실천은 그분이 십자가에서 처참한 죽음을 당하심으로서 그 절정에 이르렀습니다. 그분의 십자가에서의 죽음은 예사로운 죽음이 아니라 하느님 사랑의 표현이자 이웃 사랑의 표현이기 때문입니다. 그리하여 성부께서는 목숨을 바쳐 당신을 사랑하시고, 목숨을 바쳐 사람들을 사랑하신 예수님의 육체를 영원히 살리시고 그분을 모든 사람들의 구원자로 세우셨습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따르는 그리스도인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 성실히 예수님이 주신 멍에와 사랑의 이중계명을 실천한다면 예수 그리스도처럼 영원한 생명을 성부께로부터 얻을 것입니다. 우리가 이렇게 산다면 참된 행복에 도달할 것입니다. 우리는 부활의 희망을 지니고 먼저 세상을 떠난 사람들을 생각하고 주님께서 그들에게 자비를 베푸시어 지복직관에 도달하게 해 달라고 그들을 위해 기도하고, 우리도 살아 있는 동안 예수님께서 실천하신 멍에와 계명을 우리의 삶의 자리에서 실천하여 하느님 나라에서의 영원한 삶을 지향하여 도달해야 할 것입니다.

▦ 대구대교구 소요한 사도요한 신부
  | 1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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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교회는 어제 모든 성인의 날을 지냈고, 오늘은 위령의 날을 지냅니다. 그 이유는 ‘통공’ 교리에 있습니다. 우리는 사도신경에서 이렇게 믿음의 내용을 고백합니다. “… 성령을 믿으며 거룩하고 보편된 교회와 모든 성인의 통공을 믿으며 ….” 여기서 통공은 산 이가 죽은 이를 위해 기도하고, 죽은 이가 산 이를 위해 기도할 때 그 기도가 통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산 이와 죽은 이의 경계 없이 기도하는 것이 모든 성인의 날과 위령의 날의 취지입니다.

얼마 전에 50년을 개신교에서 독실한 신앙생활을 하다가 개종하신 분이 쓴 『개신교가 저버린 보화들』(임승만 안토니오, 좋은 땅, 2014)이라는 책을 읽었습니다. 그분은 이 책에서 개신교에서 가톨릭으로 개종한 이유 가운데 하나가 바로 죽음 이후의 교리 문제였다고 합니다. 그는 부모님 생전에 부모님을 잘 모시지 못했고 또 부모님의 구원을 위해 굳은 신앙으로 인도하지 못한 죄책감에 사로잡혀 마음이 무거웠습니다. 그러나 돌아가신 부모님을 위해 개신교의 입장에서는 아무 것도 해 드릴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개신교에는 연옥교리나 통공교리가 없기 때문입니다. 즉 개신교에서는 죽고 나면 천국 아니면 지옥에 가기 때문에, 사람이 죽으면 그것으로 모든 것이 단절되고 맙니다. 따라서 추모예배를 하지만 이는 산 자들을 위한 기념예배인 것이며, 따라서 돌아가신 부모를 위해 기도하는 것은 비신앙적인 것이며 죽은 이들에게 불필요하고 전혀 무익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불효자로서 그리고 부모님께 송구스런 마음으로 살아가던 터에 가톨릭의 ‘연옥’ 교리와 ‘통공’교리에 대해 알게 되면서 아내와 함께 부모님의 영혼을 위해 개종할 것을 결심했다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가톨릭교회는 전통적으로 연옥(煉獄: Purgatorium)이라는 개념을 가지고 있습니다.(마카베오 12,41-45 참조) 그래서 대죄(大罪)를 지은 사람은 곧바로 지옥으로 가지만, 대죄를 모르고 저지른 영혼이나, 소죄(小罪)를 지은 영혼들은 연옥에서 잠벌(暫罰)의 정화과정을 통해서 정화되어 천국으로 들어간다고 가르칩니다. 잠벌(暫罰: Poenatemporalis)이란 영원히 지속되지 않는 잠시당하는 벌, 즉 연옥에서 잠시 받는 벌을 의미합니다. 이는 우리가 비록 고해성사를 통해서 용서를 받는다고 해도 잠벌은 남아서 연옥에서 정화 과정을 거치고 난 후 천국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죽은 이들이 아직도 연옥에서 정화의 과정을 거치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가정 하에 미사도 드리고 기도도 드리는 것입니다. 또한 연옥영혼을 위한 이러한 미사나 기도는 그 분들뿐만 아니라 기도하는우리들에게도 커다란 이익을 줍니다. 왜냐하면 바로 무서운 대죄를 미워하도록 가르칠 뿐만 아니라 보속을 위한 희생과 사랑을 실천하게 되고 또한 그 기도를 받은 이들을 통해서도 은총을 받기 때문입니다.

죽음은 참으로 두려운 일입니다. 그것은 살아있는 우리가 아직 가보지 않은 미지의 길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아는 우리는 죽음을 두려워 할 이유가 없습니다. 죽음은 생명으로 가는 문이며, 예수님께서 그것을 당신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 보여 주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다행히도 그 길은 혼자 가는 길이 아니라, 산 이와 죽은 이들 모두 함께 그 길을 가기 때문입니다.

▦ 대구대교구 박영일 바오로 신부
  | 1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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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슬퍼하는 사람이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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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세상을 떠난 이들을 위하여 기도하는 위령의 날입니다.
더 엄밀히 말하면 천국에 오르지 못하고 연옥에서 우리의 도움을 바라고 있는 영혼을 위해 기도하는 날입니다.

어제 모든 성인의 날을 통해
천국에 계시는 모든 분들에게, 특히 공식적으로 교회에서 성인으로 지정하지는 않았지만 우리가 모르는 모든 성인들에게 존경을 표시하고 그 분들의 도움을 바라며 그분들처럼 되고자 하는 우리의 각오를 다지는 날 이였다면, 오늘은 돌아가신 분들 중에 아직 연옥에서 고통 받고 있는 영혼들을 위로하며 우리도 우리 자신의 죽음 역시 얼마 남지 않았음을 상기하는 날입니다.

사실 계절적 배경도 이 날의 의미를 더욱 밝혀준다.
여름 한철 생기 있고 푸르렀던 자연이 이 시기에 그 화려한 옷을 벗고 스스로 유한한 존재임을 알려주는데 우리들 역시 언젠가는 죽을 운명임을 이 시기는 알려주고 있는 것입니다.

교회는 오랫동안
죽음 뒤에 반드시 찾아오는 하느님심판의 두려움을 강조해 왔습니다. 그리고 죽은 사람을 위해 기도하는 것 역시 오래된 우리의 전통 중에 하나입니다. 근데 이 사실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역시 연옥의 존재가 그 안에 들어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초창기 교회에서는
부활에 대한 확신으로 어서 주님의 나라가 임하시기를 고대하면 희망과 열정으로 가득 차 있었죠. 우리의 현세는 이런 부활의 삶으로 넘어가는 과정이었기에 죽음 역시 두려운 것이 아니었고 모든 것의 끝이 아니었다. 한마디로 심판에 대한 두려움보다는 부활에 대한 희망이 훨씬 강했던 시기였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하느님의 심판과 죽음이 주는 두려움은 점점 더해갔고 그 이면에는 지옥처럼 완전히 희망을 상실한 곳은 아니지만 지옥과 똑같은 고통을 당해야하는 연옥. 그리고 자신은 천국에는 바로 가지는 못할 것이고 죽음 이후에는 이 엄청난 연옥의 고통을 겪어야 함을 미리 걱정하고 두려워했던 것입니다.

또한 죽은 사람을 위해
기도하는 것 역시 논리적으로 따져 봐서 연옥에 있는 영혼들을 위한 것일 수밖에 없습니다. 먼저 지옥에 던져진 영혼은 아무리 기도하여도 거기서 나올 수 없다. 영원히 벌 받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천국으로 바로 올라간 영혼은?
천국은 개선한 교회요 영광된 교회로서 거기에 계신 분들로부터 오히려 우리가 도움을 받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결론적으로
우리의 도움이 필요한 곳은 연옥이며 결국 죽은 자들을 위해 기도한다는 것은 연옥에서 고생하고 있을지도 모르는 죽은 자들이 하루빨리 천국으로 올라가도록 도움을 주는 행위인 것입니다. 이렇게 천국과 연옥과 현세의 교회가 서로에게 도움을 주고받을 수 있는 것을 교회는 성인들의 통공이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일단 위령의 날 의미와
그 안에 담겨 있는 연옥의 존재 설명은 이 정도로 하고 이제 오늘의 독서와 복음으로 넘어가 보자.

오늘 미사는 세 가지 다른 미사를
자유로이 선택할 수 있는데 본 강론은 첫 미사로 한다. 오늘 복음 말씀은 마태오 복음서에 나오는 유명한 산상설교로서 예전에 진복팔단이라고 해서 참 행복 여덟 가지에 관한 말씀이라고 불렀던 내용입니다.

이 설교의 의미는
예수님께서 처음으로 대중들을 상대로 한 연설이라는 점에서 크게 드러납니다. 누구나 자신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을 가장 먼저 말하기 마련입니다.

물론 긴 교육과정 중에서는
처음에는 쉬운 내용부터 시작해서 핵심으로 가기도 하겠지만 여러 곳을 두루 다니시며 불특정 다수에게 여러 가지 말씀을 한 예수님의 입장에서는 자신에게 담겨있는 하느님의 말씀 중에 핵심에 가까운 내용이 오늘 발표되었을 것이고 제자들에게 마음속 깊이 그 장면이 각인되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중요한 연설을 들여다보면
예수님의 입장에서 행복하다고 생각되는 일단의 사람들이 쭉 나열됩니다. 대충 왠만한 사람들은 이해가 됩니다. 상식적이건 우리가 그리스도교와 관계없이 배워왔던 도덕적인 맥락에서든 대체로 이해가 되는데 가장 중요하다고도 할 수 있는 젤 처음과 두 번째로 행복하다고 선언하신 내용은 선득 납득하기가 힘듭니다.

마음이 가난한 사람은 행복하다.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입니다.
슬퍼하는 사람은 행복하다.
그들은 위로를 받을 것입니다.

자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이 말씀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우리는 보통 마음을 넓게 가져 라고 말하죠.
그리고 마음이 풍요롭다는 말도 있습니다. 근데 마음이 가난한 사람이 행복하다니? 게다가 다른 복음서에는 아예 마음이라는 말도 빠져있다.

이 점은
예수님의 원 가르침에서 핵심은 가난 자체였다는 것을 암시한다.
아니 대체 가난한 것이 왜 행복한 것 일까?
그리고 뒤이어 나오는 슬픔은 더욱 이해가 안 된다.
청빈은 나름 되로 동서양에서 부끄러워해야할 것이 아니라
좀 더 높은 경지로 나아가기 위한
디딤돌로서의 역할을 인정했다손 치더라도
아니 슬퍼하는 사람이 행복하다니 이게 무슨 말씀인가?

사실 가난은
복음서 전체를 통해서 볼 때도 예수님께서 중요하게 생각하신 덕목 중에 하나다.

부자들이
얼마나 하늘나라에 들어가기 힘든가를 말씀하시고 제자들에게 정말 필요한 물품 말고는 절대 많이 가지지 말라고 당부하시거나 부자보다 가난한 자들의 헌금을 귀하게 여기시는 대목. 그 외에도 여러 곳에서 예수님은 직간접으로 가난의 중요성을 이야기 하셨다. 분명 예수님이 모자라는 듯이 사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했다는 것은 명백한 사실입니다. (물론 현대의 자본주의 시대에 이르러서는 이 점을 그리스도교회가 많이 강조하지 않는 점도 있습니다.)

근데 오늘 복음말씀에서는
마음이 앞에 첨가되어 있습니다. 마음이 가난하다는 것은 대체 어떤 것을 말하는 것일까요? 마음이 넓고 풍요롭지 못하고 옹졸한 경우? 아닐 것입니다. 그럼 어떤 것일까요?

사실 이 말씀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가난을 강조하신 예수님의 의도를 알아야 합니다. 부자가 되기 위해서는 혹은 유지하기 위해서는 많은 시간과 정성을 그것에 집중해야 한다는 거죠. 왠만한 노력이 없이는 결코 부자가 되지 못한다는 것. 즉 하느님이 그 안에 들어갈 공간이 없다는 것입니다.

머리에는
온통 돈 생각뿐이고 육체도 쉬지 않고 일해야 돈을 벌수 있죠. 게다가 풍요로운 상태에서는 죄를 지을 수 있는 환경과 기회는 더욱 주어지고 뼛속 깊이 하느님을 체험할 수 있는 기회는 오히려 멀어집니다.

이런 점을 생각한다면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이란 역시 그 안에 하느님을 채울 수 있는 공간이 많은 사람을 의미할 것입니다. 온갖 이 세상 걱정으로 가득 차있는 사람이 아니라 단순하고 진실한 마음을 가진 사람. 그 사람이야 말로 예수님이 말씀하신 마음이 가난한 사람이리라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슬퍼하는 사람들이 행복하다라고 하신 의미는 무엇일까요?

슬프다는 것은
결코 행복과는 거리가 먼 심리적 상태입니다. 물론 문학적 작품에서의 비극의 카타르시스를 제외하고 일상생활에서 말입니다. 분명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슬픔은 정신의 순화적 차원을 이야기하시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그 이유는 그 담에 나오는 말씀 즉 그들은 위로를 받을 것입니다 라는 말씀을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 슬픔은 무엇일까요?

인간의 모든 슬픔과 고통은 인간이 저지른 죄의 결과입니다.
이 세상의 모든 죄들이 인간을 슬프게 하는 것입니다. 하느님 나라에 가까이 가 있는 사람은 보통 자신의 죄를 지극히 슬퍼할 뿐 아니라 다른 사람이 저지른 죄와 그 결과에 대해서 깊은 슬픔을 느낍니다.

이 세상에는
자신만을 위해 살지 않고 정말 남을 위해 보이지 않는 곳에서 일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그들은 대체적으로 이 세상의 부조리와 죄악과 그 결과로 초래되는 현실의 비참함에 너무나 슬퍼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바로 잡기 위해 열심히 노력합니다. 따라서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슬퍼하는 사람이란 바로 자신과 인류에 죄에 대해 깊은 반성과 참회를 하는 사람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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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교구 차공명 프란치스코 드 살 신부
  | 10.31
463 49.6%
일전에 상여를 매었을 때 일입니다.
어느 더운 여름 신앙학교 준비로 잠시 나가있던 공소에 초상이 났습니다. 그 마을 할머니 한분이 돌아가셨는데, 상여를 맬 사람이 없어서 저와 함께 가 있던 남자 교사들이 꽃상여를 들었습니다. 장례미사를 마치고 상여를 들었을 때, 마을 공터에 나와 있던 동네 어르신들이 너무 좋아하셨습니다. 어느 할머니 복도 많다고. 그래서 젊은 사람들이 상여도 들어준다고. 그때까지만 해도 제 마음이 조금 우쭐했습니다. 뭐, 이정도 가지고. 거의 작은 집채만한 꽃상여가 보기보다는 가볍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러나 역시 세상은 제 마음 먹은 대로만 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저 큰 길까지 가려니 했는데, 가다보니 반대 방향으로 가는 것이었습니다. 장의차에 실는 것이 아니라, 그 길로 산 정상 비탈까지 2시간을 올라갔습니다. 설마설마 했는데 정말 꽃상여 매고, 장지까지 갔습니다. 등산 코스치고는 30분거리의 완만한 비탈이었을지 몰라도, 상여를 매고 올라가기에는 멀고 힘든 길이었습니다.

앞에서 상두꾼이 곡을 하고
뒤에는 베옷에 짧은 지팡이 짚은 유족들이 흐느끼고, 함께 상여를 매고 있는, 아니 상여에 매달려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 키 작은 아저씨들은 틈만 나면 멈춰 서서 유족에게 넘지시 뭐 주는 것 없냐며 시위를 했습니다.

상여를 들 때, 절대 하지 말아야 할 말이 ‘무겁다’라는 말이랍니다.
왜냐면 정말 무겁기 때문입니다. 느릿느릿 올라가는 운구길에 매고 있는 관 속에 있는 할머니 원망도 많이 했습니다. 돌아가신 할머니 체구는 작아도, 왜 이리 관은 무거운 것을 쓰셨는지, 그것도 이렇게 큰 꽃가마는 왜 쓰는지, 정말 내가 왜 이걸 들고 있어야 하는지. 그 할머니께서 생전에 무슨 좋은 일을 많이 하셨는지는 몰라도, 면식도 없는 내가 왜 이 무거운 상여를 매고 알지도 못하는 장지까지 가야하는지 길에서 원망 많이 했습니다.

올라 가는 내내 오늘 복음 말씀인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
하신 말씀을 생각하며 자신을 달랬습니다.

힘겹게 장지에 도착해서 하관을 하고
매고 온 꽃상여를 불에 태웠습니다. 그렇게 무겁게 느껴졌던 관이 내려 놓는 순간엔 너무 가벼웠습니다. 망자에 관에 흙을 뿌리면서 사람들이 망자에게 건넨 말이 ‘이제 주님 품에서 편히 쉬세요’ 였습니다.

그 순간 관을 매고 온 내가 그 무게를 졌다고 생각했는데,
돌아가신 분 역시 무거운 짐을 지고 살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주님 안에서 편히 쉬기 위해, 영원한 안식을 누리기까지 허리가 휠 정도로 세상의 무거운 짐을 안고 오셨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렇게 사셨습니다.

마더 데레사 성녀의 말이 있습니다.
“힘들고 지치면 쉬라구요?
좋든 싫든 주님 곁에서 앞으로 영원히 쉴 텐데,
그때가도 늦지 않습니다”.

그렇습니다.
내가 무겁다고 원망한 그 상여의 무게, 사실은 내가 감당할 수 있는 무게였습니다. 살면서 언제 한번 들어보겠다며, 언제 한번 해 보겠냐며, 하느님이 좋은 일 하라고 주신 공로의 무게였습니다.

하느님은 우리가 구원에 이르는데 있어
짐을 덜어주시는 것만이 아니라 우리에게 맞는 짐을 지도록 살피십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알맞은 짐을 지게 하시며 충분히 버틸 수 있는 힘과 보람을 주십니다. 지금 무거운 이 짐이 사실 내가 천국으로 가져갈 공로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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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교구 서진영 신부
  | 10.31
463 49.6%
“이들은 모두 믿음으로 인정을 받기는 하였지만
약속된 것을 얻지는 못하였습니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더 좋은 것을 내다보셨기 때문에 우리 없이 그들만 완전하게 될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히브리서 11장 39절).

이 구절은 완벽한 삶을 살았던 욥이나
수많은 구약 속 성인들도 결코 오늘 우리가 누리는 이 ‘특별한 은혜’는 누리지 못했다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도
아들을 보고 믿는 사람은 누구든지 영원한 생명을 보장받았다고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무엇이기에 이렇게 귀하게 여기시는지, 다윗 왕처럼 기도하고 싶어집니다 (사무엘 2권 7장 18절 참조). 그리고 자신의 처절한 삶이 너무나 비통해서 주저앉아 하소연할 수밖에 없었던 욥에게 너무 미안한 생각이 듭니다.

특별한 오늘,
이렇게 좋은 약속을 다시 확인해주시는 것을 보니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마음을 온통 사로잡고 싶으신 모양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삶이 성인들처럼 완벽하지 못해도, 아들 예수님의 귀한 피로 얻으신 자식이기에 애지중지하십니다. 우리들이 아들 예수님으로 인해 새로워지고 더 사랑스러워지는 것을 보시는 것은 하느님의 가장 큰 기쁨이신 게지요.

“우리가 받은 성령을 통하여
하느님의 사랑이 우리 안에 부어졌다”는 말로 힘을 실어주신 바오로 사도께도 감사하고 싶네요. 내 안에 하느님 사랑이 이렇게 가득 채워졌으니 우리는 예수님만큼 하느님을 사랑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정말 큰 복을 받고 태어난 복덩이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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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교구 장재봉 신부
  | 10.31
463 49.6%
[수원] ‘연령을 위하여 빌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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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000, 연령을~~위~하여~~빌으소서”

위령성월을 생각하면
‘연도하는 모습’이 가장 먼저 떠오른다. 어렸을 때 조상님들 제사 때마다 온 가족이 모여서 함께 바쳤던 연도…. 아직도 기억이 생생하다. 그중에서도 ‘연령을 위하여 빌으소서.’라는 기도문만큼은 뚜렷이 기억난다. 기도문 할 때의 목소리와 어떠한 톤으로 해야 되는지도 정확히 기억한다. 아마도 반복되는 기도문이고, 한두 번만 접해도 누구나 쉽게 할 수 있는 기도문이기 때문인 것 같다.

연도 기도문 중에서 자주 반복되고,
그러기에 누구나가 쉽게 따라할 수 있는 이 기도. 그런데 이 기도는 중요한 의미를 담고 있다. 그것은 바로, ‘세상을 떠난 사람들을 위한 기도’라는 점이다.

우리는 세상을 떠난 사람들을 위해 기도한다.
장례미사와 연미사를 포함한 모든 미사 안에서, 식사할 때마다 바치는 식사 후 기도에서, 그리고 위에서도 언급한 연도를 통해서이다. 물론 이외에도 많은 기도가 있겠지만, 한 가지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 그것은 ‘우리는 세상을 떠난 사람들을 위해 기도할 수 있다.’는 것이다.

‘세상을 떠난 사람들을 위해 기도할 수 있다.’
당연한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어떠한 마음으로 기도하는지 생각해본다면 중요한 의미를 발견할 수 있다.

왜 세상을 떠난 사람들을 위해서 기도하는가?
그래야 마음이 편해지기 때문인가?
아니다.
우리는 세상을 떠난 사람들이 기도의 도움을 받아서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를 바라기에 기도를 하는 것이다. 이는, 세상에 살고 있는 우리와 세상을 떠난 사람들이 단절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로 연결되어 있음을 드러낸다. 하나로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이러한 기도가 가능한 것이다. 그리고 그 연결고리는 바로 ‘주님’이시다.

세상의 모든 것이 주님에 의해서 창조되었고,
우리 모두는 주님이라는 거대한 줄기에 긴밀히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주님 안에서 주님을 통할 때 세상을 떠난 사람들을 위해서 기도할 수 있다. 이는 결국, 세상을 떠난 사람들을 위한 기도는 주님께서 우리에게 베풀어주신 은총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해준다.

우리는 위령성월이 다가왔다고 하면,
막연히 죽음, 묘지, 연도, 절기상 추워지는 계절 등을 떠올린다. 그러기에 조금은 가라앉은 마음에서 삭막하고 차가운 느낌으로 위령성월을 대할 때가 있다. 만약 내 마음이 그랬다면, 이제는 이러한 마음을 따뜻하게 녹일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세상을 떠난 사람들을 위한 기도는 주님께서 우리에게 마련해 주신 은총이기 때문이다. 주님의 사랑 안에서 이루어지는 은총이라는 것이다.

위령성월을 시작하는 첫 주일이자 위령의 날인 오늘,
주님의 사랑을 마음으로 느끼면서 그리고 주님의 은총에 감사드리면서, 기쁘고 활활 타오르는 마음으로 세상을 떠난 사람들을 위해 기도하는 시간이 되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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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11월 2일 수원교구 주보
  | 10.31
463 49.6%
오늘은 우리보다 먼저 하느님의 생명에 참여하여
새로운 삶을 살고 계시는 분들을 기억하며 그 은혜에 대하여 감사드리고, 아직 연옥에 남아있는 분들을 위해 하느님께 자비를 청하는 날이다.

그리고 우리도 언젠가는 맞이하게 될 죽음을 생각하고
현재의 나의 삶을 되돌아보는 날이기도 하다. 오늘은 연옥이 어떤 곳인가를 한번 보겠다.

연옥은 끝이 있는 일시적인 정화의 장소라고 할 수 있다.
인간은 나약한 존재로서 누구나 결점은 있으며, 완전한 인간은 없다. 그래서 스스로 죄스런 인간이라고 한다. 그리고 죽은 후에는 더 이상 어떻게 해볼 수가 없다. 하느님을 뵙는 순간 자기 자신 스스로 판단하게 되기 때문이다. 더 이상의 발전 가능성은 죽은 다음에는 없다. 그러므로 결점이 있는 부당한 인간으로서 완전하신 하느님께 나아갈 수가 없다는 것은 당연하다.

하느님은 정의로운 분이시기 때문에
조그마한 결점도 용납이 안 된다. 이같이 인간이 하느님을 향해서 살아갔지만 인간적 약점 때문에 가지게 된 부족한 것과 결점을 기워 갚는 그것을 연옥이라고 한다.

이 연옥은 마지막 정화단계라고 보는 것이 좋겠다.
하느님께 나아가는데 죄스러운 결점이 하느님의 완전하심을 통해서 정화되고 구원이 성취되는 마지막 단계라고 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교회가 가르치고 있는 연옥론(煉獄論)은
하느님의 성성(聖性), 정의, 자비를 명백히 보여주며, 인간을 절망과 윤리적인 경솔함으로부터 지켜주고, 더구나 죽은 사람도 도와 줄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증하여 줌으로써 많은 위로와 도움을 주고 있다.

교회가 연옥에 대한 가르침을 정식으로 정의한 것은
리용 및 피렌제 공의회(1274년 및 1439년), 그레고리오 13세 및 우르바노 8세의 신경(信經), 그리고 프로테스탄트에 반대하여 열린 트리엔트 공의회(1545-1563)에서 이었다.

연옥에서의 영혼은 자신의 죄에 대해 정화를 받는다.
이 세상에서는 죄에 대한 보속을 선행이나 기도로써 대신할 수 있으나 연옥의 영혼은 더 이상 무엇을 할 수 없고, 수동적인 형태로 하느님의 정의에 의해 내려진 벌의 고통을 견디는 것으로 정화와 속죄가 되는 상태이다. 이 영혼은 하느님이 내리시는 고통을 즐겁게 수용함으로써 죄에 대한 유한적(有限的)인 벌의 보상을 하면 확실하게 정화되는 것이다.

연옥의 고통이란 모든 사람에게 동일하지는 않다.
각자가 지은 죄에 상응하는 벌을 받게 된다. 그 다음 연옥 영혼은 하느님을 마음으로부터 사랑하고, 천국에 도달할 수 있다는 것이 확실하므로 고통으로 마음의 평화와 기쁨이 흔들리지는 않는다. 그 고통의 기간이나 엄중함도 지상교회의 기도와 선업(善業), 즉 신자들의 기도에 의해 단축 또는 경감시켜줄 수 있다.

연옥의 영혼들을 도와줄 수 있고
그들의 고통을 경감 내지 단축 시켜줄 수 있다는 것은 우리의 현실의 삶 속에서도 그 예를 들어 충분히 이해가 가고 납득할 수 있는 일이다. 예를 들면, 아버지가 빚을 다 갚지 못하고 돌아가셨다고 한다면, 그 자녀는 아버지의 명예를 위해서 그 빚을 대신 갚으려 할 것이다.

죽음을 통해서
더 이상 어떻게 해 볼 수 없는 상태에 있는 그 사람을 위해서 아직은 무엇을 할 수 있는 우리들이 대도(代禱)를 한다고 할 때, 즉 대신 고행(苦行)을 한다든지 대신 속죄(贖罪)의 선행을 하느님께 보여 드린다고 할 때 그 노력은 헛된 것이 아니다.

그 영혼을 위해서,
그 영혼의 명예회복, 즉 하느님의 모습을 닮음을 완전히 회복시켜 주기 위한 이 행위는 돌아가신 부모의 빚을 갚아서 그분들의 명예를 회복시켜드리는 것 이상으로 하느님께서는 기쁘게 받아주실 것이다.

이 때문에
우리는 자주 돌아가신 분들을 위해서 미사를 봉헌하며, 이 미사를 통해서 지상교회는 연옥의 영혼들과 통공을 나누고, 만일에 그 영혼이 정화되어 하늘 나라에 있다면, 그 기도의 은혜는 다른 영혼에게 베풀어지며, 천상에 있는 그 영혼은 아직도 이 지상에서 순례를 하고 있고, 많은 어려움과 박해 속에 있는 지상교회를 위해 기도해줄 것이다.

이렇게 우리는 또한
“모든 성인의 통공을 믿나이다."하고 고백하는 것이 아닌가?

연옥의 영혼은
그곳에서 자신의 죄를 다 보속한 후에는 하느님의 생명에 나아갈 것이며, 천국에서 하느님을 직접 뵙게 되고, 그분의 신비에 잠기게 될 것이다. 그리고 일시적 정화의 장소인 연옥은 모든 영혼들이 하늘 나라에 들어감으로써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게 될 것이다.

교회는 이 영혼들을 위한 특별 기간(위령성월)도 마련하고 있지만,
그들이 하루 빨리 완전한 구원에 이르도록, 하느님께 일치하도록 선행으로써, 기도로써, 미사를 통하여 우리가 도움을 줄 수 있어야 할 것이다. 항상 “모든 성인의 통공”을 기억하면서이다.

그들을 위한 기도나 선행은
그들을 위한 것이기도 하지만, 모든 성인의 통공 안에서 본다면 바로 우리 자신들을 위한 기도이다. 이 미사 동안 우리가 사랑했고, 우리를 사랑했던 돌아가신 부모와 형제 그리고 친지들이 하느님의 생명에 참여할 수 있도록 주님의 자비를 간구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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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신부
2016년 11월 2일
  | 10.31
463 49.6%
[수원] 왜 이리 심각하냐? (Why are you so seriou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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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같은 본당 출신 신부들과 저녁자리를 가졌습니다.
저녁을 먹고 간 곳은 ‘스크린 야구장’이었습니다. 스크린 골프장은 들어봤어도 스크린 야구장은 처음 가 봅니다. 앞 화면에서 투수가 공을 던지는 동작을 하면 작은 구멍에서 진짜 공이 튀어나옵니다. 그것을 받아치면 스크린에 공이 표시되어 안타인지 아웃인지 볼 수 있게 됩니다. 지금은 한국시리즈 야구가 한창입니다. 그 곳에선 작은 실수 하나가 일 년의 노력을 허사로 만들 수 있는 매우 심각한 영향을 줍니다.

그러나 스크린 야구장에서는
동료들에게 농담 섞인 꾸지람 한 번 들으면 끝입니다. 게임이 너무 재미있어서 우리는 한 번 더 연장하며 두 시간 가량을 즐겁게 놀았습니다. 그러면서 ‘한국시리즈에서 뛰고 있는 선수들은 과연 야구를 즐기고 있는가?’가 궁금해졌습니다.

언젠가 축구선수 이동국이
자신은 축구를 즐겨본 적이 한 번도 없다고 한 말이 생각납니다. 심각하면 즐길 수 없습니다. 그게 전부라 느끼면 심각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요즘 인터넷 댓글은 예측하기 매우 쉽습니다.
잘못한 사람에 대한 글이 올라오면 댓글은 모두 죽여야 한다느니, 이런 나라에서 어떻게 사냐느니 하는 말들이 주류를 이룹니다. 선행을 한 사람에 대한 글이 올라오면 천사라느니 앞으로 잘 되기를 바란다는 칭찬 일색입니다. 여기에서 반대 의견을 올리는 사람이 있으면 질타의 대상이 되어 덧글이 달리며 뭇매를 엄청 맞게 됩니다.

예를 들면
김연아 선수가 오십억이 넘는 액수를 기부했다는 글에 어떤 사람이 그 사람은 부동산도 많이 샀다는 글을 올렸다가 거의 매장되다시피 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이젠 자신의 의견이
세상 일반 사람들의 의견과 조금만 다르더라도 입을 막아야하는 매우 심각한 시대가 되어버렸습니다. 언론의 자유를 외치면서도 실제로 자신의 뜻에 맞지 않는 말들은 눌러버려야 속 시원한 세상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그래서 잘못한 사람들은 죽어야하고 잘한 사람들은 건들지 말아야 한다고만 말해야 되게 돼 버렸습니다.

배트맨 영화에 보면 조커라는 악당이 나옵니다.
입 꼬리가 항상 위로 올라가있는 광대의 모습을 하고 있는데, 그 이유는 그가 항상 심각했기 때문에 그 아버지가 “넌 왜 이렇게 심각하기만 한 거냐? (Why are you so serious?)”라고 하며 그의 입을 그렇게 만들어버렸기 때문입니다. 영화에서 정작 심각한 인물은 세상을 지켜야하는 배트맨입니다. 그는 착한 사람이기는 하지만 조커에 비해 재미는 없는 인물입니다. 항상 심각합니다. 그리고 그렇게 심각해야만 지구를 지킬 수 있다는 메시지를 주는 듯도 합니다.

그러나 저는 이 모든 것들이
너무 현세에만 사람을 집착하게 만드는 역효과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 세상은 본 게임이 아니라 연습입니다.
이 세상은 전부가 아니라 거쳐 가야 할 통로입니다. 이 세상은 목적지가 아니라 경유지입니다. 그런데도 마치 이 세상에서 성공하지 못하면 인생의 낙오자나 되는 것처럼 심각해합니다.

그냥 스크린 야구장에서 연습한다고 생각하면 안 될까요?
그렇다고 인생을 막 살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본 게임을 앞에 두고 연습을 게을리 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다만 실패해도, 성공해도, 크게 절망하지 않고 크게 기뻐하지 않습니다. 진정한 승부는 나중에 오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은 연습입니다.
이것을 알려주는 날이 오늘이 아닌가 싶습니다. 성공한 사람도, 실패한 사람도 다 죽습니다. 위령의 날이라고 해서 그들을 위로할 필요는 없습니다. 각자가 이 세상에서 연습한 대로 심판을 받겠기 때문입니다.

이 상황에서는 누구도 위로할 수 없습니다.
바뀌는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정작 그 심판을 바꿀 수 있는 사람들은 우리 자신들이고 그 시간은 바로 지금입니다.

오늘 독서에서 욥은 자녀들을 다 잃고 모든 재산을 다 잃고 자신의 건강까지도 잃고 나서도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나 나는 알고 있다네, 나의 구원자께서 살아 계심을. 그분께서는 마침내 먼지 위에서 일어서시리라. 내 살갗이 이토록 벗겨진 뒤에라도, 이 내 몸으로 나는 하느님을 보리라.”

욥은
이 세상에서 귀중하다고 하는 것을
다 빼앗겼어도 희망을 놓지 않습니다.
끝이 아님을 알기 때문입니다.

연습인 이 세상에서 물론 최선은 다할지라도
이 세상이 전부인 것처럼 절망하거나 이세상이 끝인 것처럼 살아가지 맙시다. 착한 사람이나 악한 사람이나 땅에 묻혀 썩어버릴 인생입니다. 그분들이 계신 그 저 먼 곳에서 그분들이 우리가 어떻게 살기를 바라고 계신지 생각해봅시다.

이 세상은
주님의 나라에서 죄짓지 않고 행복하게 살아가기 위해 연습하는 곳이고 자신을 시험하는 곳입니다. 저 세상에 계신 분들을 바라보며 이 세상은 과정임을 되새겨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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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
2016년 11월 2일
  | 10.31
463 49.6%
[수원] 연옥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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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냇가에서 아리따운 처녀가 물을 건너지 못해 어쩔 줄 몰라 하며 발을 동동 구르고 있었습니다.마침 길을 가던 한말의 대선사 경허 스님과 그를 따르는 젊은 수도승이그곳을 지나가게 되었습니다.

처녀는 부끄러움을 참으며 젊은 스님에게 도움을 구하자,젊은 스님은 처녀에게 정색을 하며 화를 내었습니다.

“우리 불가에서는 여자를 가까이 하면 파계라 하여 내쫓김을 당하는데어찌 젊은 처자가 그런 요구를 하십니까?”

난처해진 처녀는 노승 경허에게 다시 도움을 청했습니다.

그러자 경허는 선뜻 등을 내밀며 “그거 어려울 것 없소이다.”라고 말했습니다.

경허는 처녀를 등에 업어다 건너편에 내려주고는 계속해서 갈 길을 갔습니다.

그러나 뒤따라가는 젊은 스님의 마음에는 갈수록 온갖 의심이 생겨나기 시작했습니다.

“혹시 땡중이 아닐까?”

젊은 스님은 자기의 스승 경허에게 따지고 싶었지만 이를 꾹 참고 십리 길을 더 갔습니다.

그러나 젊은 스님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마침내

“스님, 어찌 그럴 수 있단 말입니까?

수도하는 스님이 어떻게 젊은 여자를 업을 수 있습니까?”

하고 따지며 대들고 말았습니다.

젊은 제자의 화난 목소리를 듣던 경허 스님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놈아, 나는 벌써 그 처자를 냇가에 내려놓고 왔는데, 네놈은 아직도 그 처자를 업고 있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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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세례 받을 때나
고해성사 받을 때 죄를 용서받고 깨끗해진 상태에서 살다가 죽습니다. 그래서 죽으면 바로 천당 간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겉으로는 내려놓은 죄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아직도 지고 있는 죄가 있습니다. 과연 죽기 전에 교만이나 성욕, 욕심 등을 완전히 버리고 가는 사람이 얼마나 되겠습니까?

예수님은 음탕한 눈으로
여인을 바라만 보아도 간음죄를 짓는 것이라 하십니다. 바라보는 것은 죄가 아닙니다. 그 마음 안에 보이지 않게 도사리고 있는 음탕한 마음이 곧 죄인 것입니다.

우리는 끝까지 내려놓지 못하고 가는 죄들이 많이 있습니다.
한 때 조류독감이나 신종플루 등의 전염성이 강한 병이 발생했을 때는 비행기를 타기 전에, 혹은 외국에서 들어올 때 체온계 등으로 일일이 검사하여 그런 병이 걸린 사람이 들어와 다른 사람들에게 전염되지 않게 철저히 관리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죄는 확실히 전염성이 있습니다.
만약 어린 아이가 불량한 부모 밑에서 자랐다면 보고 듣는 것들이 좋지 않기 때문에 그 아이가 매우 건전하게 크는 것은 굉장히 힘듭니다.

이와 같은 의미로 예수님은
하늘나라에서 가장 작은이라도 세례자 요한보다는 크다고 합니다. 여자의 몸에서 태어난 사람 중에 세례자 요한보다 큰 사람은 없다고 하는데, 하늘나라 들어가기 위해서는 세례자 요한이 가지고 있었던 아주 작은 결점조차도 지니고 있으면 들어갈 수 없음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교회는
따라서 그렇게 완전하지 않으면 들어갈 수 없는 곳이 하느님 나라이기에 연옥을 거치지 않는 사람은 거의 없다고 가르칩니다. 만약 개신교가 말하듯이 믿음이 있으면 천국, 없으면 바로 지옥이라 한다면 부족한 우리 모두는 지옥에 떨어져야 마땅할 것입니다.

물론 개신교에서는
믿음으로 구원받는다고 하지만 예수님은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라도 있다면 나무더러 명령하여 뽑혀져 바다에 심기라면 그렇게 된다고 하셨는데 어떤 누가 겨자씨만한 믿음이라도 있어서 산과 사물을 움직일 수 있습니까?

따라서 이런 부족함을 지닌 인간들이
우리 모습이기에 연옥이란 곳은 오히려 과거의 모든 양심의 가책과 하늘나라 들어가기에 부족한 모든 부분들을 완벽하게 보완하는 곳이기에 벌 받는 곳이 아니라 은총의 장소인 것입니다. 예수님은 현세에서뿐만 아니라 내세에서도 용서받는 것이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사람의 아들을 거슬러 말하는 자는 용서받을 것이다.
그러나 성령을 거슬러 말하는 자는
현세에서도 내세에서도 용서받지 못할 것이다.”(마태오 복음 12장 32절)

또 구약의 마카베오는 작은 우상을 지니고 다니다 전사한 병사들의 죄사함을 위해 제물을 바칩니다.

“그들은 숨은 일을 모두 드러내시는 주님을 찬양하였다.
그리고 죽은 자들이 범한 죄를 용서해 달라고 애원하면서 기도를 드렸다. 그리고 유다는 각 사람에게서 모금을 하여. 그것을 속죄의 제사를 위한 비용으로 써 달라고 예루살렘으로 보냈다. 그가 죽은 자들을 위해서 속죄의 제물을 바친 것은 그 죽은 자들이 죄에서 벗어날 수 있게 하려는 것이었다.” (마카베오 하권 12장 41절-45절)

진정으로
내세에서 죄를 용서받고 완전히 깨끗해지는 연옥의 단계가 없다면 천국에 바로 들어갈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로마에 있는 연옥성당에는
연옥에서 고통 받는 영혼들이 잠시 나타나 자신들의 고통이 너무 크다고 기도와 미사를 부탁하며 남겨놓고 간 흔적들이 모아져있습니다. 불에 탄 손자국 모양의 탁자나 옷, 성경 책 등이 인상적입니다.

성인들은 연옥의 고통에 대해 이렇게 정의합니다.

“이 세상에 있는 모든 괴로움을 한데 합친 것보다 연옥의 아주 미소한 괴로움이 더 혹독합니다.”(성 치릴로)

“연옥에서 일순간 받는 고통은 석쇠 위에서 순교한 성 라우렌시오의 고통보다 더 무섭습니다.” “현세에서 받는 모든 괴로움보다 연옥불은 혹독합니다.” (성 아우구스띠노)

그러면 왜 우리는 현세에서 보속하는 것보다
연옥에 가서 보속하는 것이 더 혹독할까요?

연옥에서 바칠 수 ‘없는’ 공로가 있기 때문인데,
바로 ‘믿음’의 공로입니다. 연옥에선 멀리서나마 하느님을 뵐 수 있기에 그 바치는 보속에 믿음의 공로가 없기에 현세에서 보속하는 것보다 훨씬 더 혹독한 고통으로 정화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어제는 저희 교구 신부님들이
묻혀계신 교구성직자 묘지를 방문해 기도하고 왔습니다. 밑으로 내려오면서 ‘이쯤이 나중에 내가 묻힐 자리가 되겠지?’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리고 묻혀계신 모든 신부님들이 고맙다고 말씀하시는 것 같았습니다.

돌아가신 분을 위해 슬퍼한다고 무슨 도움이 되겠습니까?
그런 혹독한 고통을 당하시는 분들을 위해 기도해 드리는 것이 가장 보잘 것 없는 형제에게 해 주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 분들은 하느님과 아주 가까이서 당신들을 위해 기도했던 우리들을 위해기도해 줄 것입니다. 이것이 성인들과의 통공입니다.

암브로시오 성인은 이런 말을 하십니다.

“눈물을 줄이고 기도에 힘쓰십시오. 운다는 것이 잘못은 아니지만 당신을 떠난 영혼을 위해 기도해 주는 것이 더 필요합니다.”

결국 연옥영혼을 위해 기도하는 것은
지상의 교회와 천상의 교회와의 일치를 이룸을 의미하며나 자신도 연옥 벌을 면하기 위해 더 열심한 정화의 삶을 살아가게 만듭니다. 그래서 교회는 전례력에 위령성월이란 귀중한 시간을 배정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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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신부
2018년 11월 2일
  | 10.31
463 49.6%
[수원] 자기 자신만 만나다 죽는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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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우리는 ‘죽은 모든 이를 기억하는 위령의 날’을 지냅니다.
다 아시는 바와 같이 11월 1일부터 8일까지 묘지를 방문하여 세상을 떠난 이들을 위해 기도하면 그들에게 전대사가 주어집니다. 전대사를 받으면 연옥의 모든 잠벌을 용서받는다고 합니다. 그러니 연옥에서 고통받는 많은 이들을 위해 사랑을 실천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입니다.

연옥에 있는 이들은 부족하게나마
이 세상에서 주님을 만나고 간 이들입니다. 그러니 주님께 “나는 너를 안다”라고 인정받은 이들입니다. 한 번을 만났더라도 주님께서 안다고 증언해주실 것입니다.

하지만 오늘 복음처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나는 너희를 알지 못한다”라는 말씀을 들으면 큰일일 것입니다. 미련한 처녀들은 신랑이 올 때 기름을 간직하지 못하고 있어서 신랑을 맞으러 나가지 못했습니다. 우리는 죽음과 그 죽음을 잘 준비한 이들을 기념하며 우리 또한 그 대열에 들기 위해 어떻게 하면 주님으로부터 “나는 너를 안다”라는 말을 들을 수 있을지 깊이 묵상할 필요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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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통사고로 심각한 뇌 손상을 입었음에도
이를 극복하고 TED 강연으로 유명해진
‘에이미 커디’는 이런 경험을 소개합니다.

그녀가
사고로 인한 지능 저하로 남들보다 4년 늦게야 대학을 졸업하고 사회심리학을 전공하며 박사학위를 준비하고 있을 때였습니다. 이때 교수직을 따기 위해 지도교수와 여러 중소 규모의 콘퍼런스에 참여하게 됩니다. 세계적으로 저명한 교수들이 함께 모이는데 박사과정에 있는 이들은 이 교수들에게 아주 짧은 시간에 자신의 매력을 어필해야만 합니다.

이때 준비해야 하는 것이 ‘엘리베이터 스피치’라고 합니다.
엘리베이터를 탔을 때 함께 탄 교수에게 약 90초 동안 자신이 연구한 모든 것을 핵심적으로 쏟아내어 그 교수가 자신을 채용할 수 있게 만들어야 합니다. 이미 박사학위를 취득하고도 몇 년 동안 교수직을 얻지 못해 이런 콘퍼런스를 배회하는 사람도 많았습니다.

에이미 커디도
단단히 준비하고 중소도시 평범한 콘퍼런스에 지도교수와 함께 참석하였습니다. 개회 만찬장으로 올라가기 위해 엘리베이터를 탔을 때 사회심리학 분야에서 세계적으로 이름을 떨치고 있는 세 명의 거장이 타고 있었습니다. 이런 사람 한 명을 만나는 것도 행운인데 세 명의 스타 교수들을 마주하니 정신이 멍멍하였습니다.

이때 한 교수가
“아하, 우리가 엘리베이터를 함께 탔네요. 연설 한 번 들어볼까요?”라고 말했습니다. 에이미 커디는 갑자기 얼굴이 화끈거리고 입안이 바짝바짝 타는 것을 느꼈습니다. 하늘의 별과도 같은 사람들이 함께 있는 그 비좁은 공간에서 초긴장한 상태로 연설을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단어들이 제멋대로 튀어나오는 것이었습니다.
첫 문장부터 엉망이었습니다.

“그러니까 ... 저, 잠깐만요, 그걸 말씀드리기 전에 ...”

에이미는 말하면서도
‘아, 이렇게 망하는구나!’라고 생각했습니다. 다른 사람들 같으면 한 번도 잡기 힘든 기회를 세 번이나 동시에 날려버리는 셈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자신들이 아는 다른 교수들에게 자신의 이야기를 할 테니 그녀의 교수직은 물 건너간 것 같았습니다. 또 자신을 여기까지 믿고 데려온 지도교수를 볼 면목도 생기지 않았습니다.

이런저런 걱정 속에
세 스타 교수들의 얼굴을 빠르게 살피며 이런저런 말들을 쏟아냈습니다. 그리고 자신을 지지한다거나 인정한다거나 공감한다거나 하는 아주 작은 표정만이라도 애타게 갈구하였습니다.

마침내 엘리베이터는 20층에 도착했고 문이 스르르 열렸습니다.
두 교수는 머리를 숙인 채 내렸고 마지막 교수는 “여태까지 내가 들었던 엘리베이터 스피치 중 최악이었네”라고 말하며 내렸습니다. 에이미는 그들과 함께 내리지 못했고 자궁 속 아기처럼 엘리베이터 벽에 기대어 쭈그리고 앉았습니다. 엘리베이터는 다시 로비로 내려왔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 안도감이 느껴지는 것이었습니다. 무지막지한 압박감에서 해방된 느낌이었습니다.

‘4년 넘게 공부한 내용에 대해 어째서 단 한마디도 말하지 못했단 말인가? 게다가 실패하고 나서 안도감이라니? 그리고 왜 이제야 준비한 내용이 떠오르는가?’

그녀는 이 경험을 깊이 성찰하며
‘프레즌스’라는 심리학 용어에 집중하게 되었습니다. 프레즌스는 ‘지금 여기 내가 존재하게 할 수 있는 능력’ 정도로 번역하면 될 것입니다. 그녀는 ‘내가 왜 그때 나로 존재할 수 없었을까?’를 깊이 생각한 것입니다.

[참조: 『자존감은 어떻게 시작되는가』, 에이미 커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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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련한 처녀들은
분명 그렇게도 기다리던 신랑이 왔지만 그를 만날 수가 없었습니다. 이런 상태는 아마도 예수님께서 “그날에 많은 사람이 나에게, ‘주님, 주님! 저희가 주님의 이름으로 예언을 하고, 주님의 이름으로 마귀를 쫓아내고, 주님의 이름으로 많은 기적을 일으키지 않았습니까?’ 하고 말할 것이다. 그때 나는 그들에게, ‘나는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한다. 내게서 물러들 가라, 불법을 일삼는 자들아!’ 하고 선언할 것이다”(마태 7,22-23)라고 말씀하시는 것과 같을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하느님을 만난다고 하면서 자신들이 만든 금송아지를 경배했습니다. 자신들은 하느님을 만나고 있다고 믿었지만 실제로는 ‘자기 자신을 만나고 있었던 것’입니다. 금송아지는 각자 자신이 섬기는 자기 자신입니다.

에이미 커디는
그때 ‘나는 세계의 유명한 스타 교수들을 만나고 있다. 나는 나 자신을 증명해야 한다!’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다시 말해 자기 자신을 만나고 있었지 그 교수들을 만나고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자기 생각이 우선이고 교수들은 자신을 증명하게 만들 도구에 불과했습니다.

이런 상태로는 누구도 진정으로 만날 수 없습니다.
내가 누군가를 진정으로 만나려면 ‘그들을 만나고 있는 나를 잊어야’ 합니다. 내가 살아 있으면 그들이 나를 내가 원하는 대로 인정해주지 않을까 봐 불안해하고 초조해집니다. 그리고 그렇게 두려워하는 대로 흘러갑니다. 나의 뜻을 이루려 누군가를 만나면 나를 만나는 것이지 상대를 만나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누군가를 만나려면 상대의 뜻과 만나야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에게 ‘주님, 주님!’ 한다고 모두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이라야 들어간다.”(마태 7,21)

주님의 뜻을 만나면 내 뜻은 죽습니다.
내 뜻이 죽을 때 평화가 옵니다.

그런데 내가 죽었다면 누가 나의 주인이 될까요?

바로 주님이십니다.
내가 주님을 나의 지배자로 두면 그분이 나의 주인이 되시고 그분을 위해 나는 봉사해야 합니다. 나의 이익을 챙길 수가 없습니다. 이때 비로소 ‘프레즌스’가 성취됩니다. 자아는 끊임없이 과거의 걱정과 미래의 불안을 불러일으킵니다. 그러나 주님께 집중하면 현재 주님의 뜻에만 집중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현재에 머물 수 있는 것입니다.

진정 하느님을 만나고
이웃을 온전히 만나려면 자기 생각에 빠져있어서는 안 됩니다.
주님의 뜻에만 집중하고 있어야 합니다.
꾸준한 연습을 할 필요가 있지만,
아주 잠시라도 이 프레즌스가 이루어졌다면
주님은 “잠깐이지만 나는 너를 만난 적이 있다.
나는 너를 안다”라고 증언해주실 것입니다.


프레즌스를 연습하는 방법은
짧은 기도를 통해 자주 주님이 나의 주인이심을 기억하는 것입니다. 자주 짧은 대화를 나누어도 되고 그저 예수님의 이름을 자주 불러도 됩니다.

나의 의식을 나에게 두지 말고
주님의 뜻에만 두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그렇게 자신을 봉헌할 때 나를 바라보는 사람은 내가 자아의 불안으로부터 해방되었음을 보게 되어 나를 더 신뢰할 수 있는 사람으로 여기게 됩니다.

사람은 자아에 사로잡힌 사람을
좀처럼 믿으려 하지 않고 그 불안함을 금방 알아챕니다.
속이려 해도 소용없습니다.
사람들은 내가 말하는 내용이 아니라
나의 프레즌스를 먼저 봅니다. 이것은 생존본능입니다.

자아에 사로잡힌 사람에게 항상 피해를 봐 왔기 때문에
우리 유전자에 그런 사람들을 회피하도록 시스템 되어있습니다.
아주 짧은 시간이라도
내 안에 계신 주님의 뜻에
집중하는 시간을 갖는 연습을 한다면
이것이 깨어있는 연습이고 죽음과 심판을 준비하는 자세입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도 나를 쉽게 신뢰하게 될 것입니다.
주님, 주님 하면서 살았지만
결국 자기 자신만 만나다 죽는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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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
2020년 11월 2일
  | 1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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