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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의정부] 들을 빛과 평화의 나라로
조회수 | 2,120
작성일 | 08.10.31
오늘은 위령의 날입니다.
세상을 떠난 이들을 위하여 기도하며 그들을 기억하고, 우리도 언젠가는 죽음을 맞이할 것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우리가 살아온 삶을 되돌아보는 날이지요. 특별히 오늘, 위령의 날에 교회는 돌아가신 분들을 위해서 세대의 미사를 봉헌하는 관습이 있습니다.

저는 위령 성월과 위령의 날을 맞으면서
"왜 우리나라 사람들은 아들을 선호할까" 하는 엉뚱한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바로 얼마 전까지도 우리의 유교 사회에서는 아들을 얻기 위하여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음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심지어는 아들을 낳지 못하는 여인을 칠거지악(七去之惡)이라 하여 쫓아내기까지도 하였던 역사가 우리에게 있지요. 유교 사회에서는 왜 그토록 아들에 집착을 하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아들을 얻으려고 애를 썼을까요?

이유는 이렇습니다.
유교를 종교라고 보기에는 좀 그렇습니다만 유교에는 내세관이 없습니다. 영생관이 없는 것입니다. 죽은 후의 영원한 생명이라는 개념이 없다는 이야기지요. 그래서 나의 생명이 지속이 된다는 것을 확인하는 방법은 오로지 자식, 특히 아들에게서 찾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또 후손들이 조상의 위패와 제사를 모시는 것, 이것이 바로 영생을 확인하는 자리였습니다. 아들이 조상의 위패를 모시고 제사를 지내며 그 자리에 후손들이 함께 참여하는 것은 과거와 현재와 미래가 한 자리에서 이어지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과거와 미래가 지금 한 자리에서 어우러져 나의 존재를 확인해주는 연결장이 바로 제사였던 것입니다.

유교에서는
자식과 제사로 자기의 영생이 지속되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으므로 아들을 낳지 못한다는 그 자체는 자기의 생명이 단절됨을 의미하는 것이었습니다. 또 제사를 지내지 못하는 것은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를 확인하지 못한다는 것을 의미했으므로 어떠한 수단을 동원해서라도 아들을 낳아야만 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제사를 꼭 받아들여야 하는 상황이 영생관과 함께 이어졌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천주교 신자들은 이럴 필요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죽은 후의 영원한 생명을 믿기 때문입니다. 누구나 영원한 생명으로 나아감을 믿기 때문에 굳이 그럴 필요가 없는 것이지요. 뿐만 아니라 성직자, 수도자들은 결혼을 하지 않아도, 그래서 후손이 없어도 자신의 생명이 영원한 세상에 나아가는데 지장이 없다는 것을 확신합니다. 오히려 모든 것을 바치면 하느님께서 영원한 세상에서 더 크게 갚아주시리라고 희망하면서 살아가지요. 그래서 유교에서의 영생관이나 우리 천주교의 근본적인 지향은 같을 수가 있습니다.

그러면 이런 영생관과 내세관이 있는
천주교 신자라고 해서 모두가 영원한 생명을 살수가 있겠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뜻을 따라 산 사람만이 영생을 산다고 믿습니다. 이 세상을 살면서 하느님의 뜻을 살려고 노력하고 그 뜻에 부합한 사람만이 영원한 생명으로 나아갈 수 있다고 확신합니다. 이 세상을 마치고 하느님 대전에 나아가 심판을 받을 때 하느님의 뜻에 맞게 산 사람은 영원한 세상인 천국에 들겠지만 하느님의 뜻과 거리가 멀게 산 사람은 영원한 생명이 아니라 영멸(永滅) 즉, 영원히 멸망하는 지옥에 떨어진다고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보속할 것이 남은 사람들은 연옥에서 보속의 시간을 보내고 하느님을 만나 뵙게 된다고 믿고 있습니다.

그래서 연옥에 있는 사람들을 감옥에 갇혀 있는 사람으로 비유하기도 합니다.
그들은 그들만의 힘으로는 그 곳에서 나올 수가 없는 사람들입니다. 많은 사람들의 기도를 통해서 빠져나올 수가 있는 것이지요. 이렇게 기도가 쌓여서 연옥에서의 보속이 끝나야 비로소 천국으로 들 수 있다고 우리는 믿습니다.

우리 신자들은 연옥 영혼을 위해 기도를 많이 드립니다.
그 대표적인 기도로 매 식사 때마다 바치는 식후기도를 들 수 있습니다.

"세상을 떠난 모든 이가 하느님의 자비로 평화의 안식을 얻게 하소서."

뿐만 아니라 묵주기도를 하면서도
특히 "연옥 영혼을 돌보시며 가장 버림받은 영혼을 돌보소서." 하고 기도하지요. 이렇게 천주교 전례에서는 연옥 영혼들을 위한 기도가 빠짐없이 이어집니다. 연옥 영혼이 천국에 들기를 기원하는 뜻에서 잊지 않고 바치는 것입니다.

그러면 위령성월을 맞아 신자 여러분께 한번 물어보겠습니다.

"내가 지금 죽게 된다면 나는 천국에 갈 것 같습니까?
지옥에 갈 것 같습니까?
아니면 연옥에 갈 것 같습니까?"

아마도 대부분이 연옥에 갈 것 같다고 겸손하게 표현하실 것입니다.
자, 여기서 우리는 심각한 문제를 하나 제기해 볼 수 있습니다. 많은 분들이 죽으면 연옥에 갈 것 같다고 표현하시는데 그렇다면 연옥에 있는 여러분을 위해 기도해 줄 사람이 있으십니까?

연옥에서 몹시 힘겨운 보속의 기간을 겪고 있는
여러분을 위해서 기도해줄 사람이 있겠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내가 나의 젊음과 모든 정성을 다 바쳐서 키운 자식들이
내가 죽으면 나를 위해서 기일에 기도를 하고 미사를 봉헌해 주겠는지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또 평생을 함께 한 남편이나 아내가 나를 위해 기도해 주겠는지를 한번 헤아려 보십시오. 기도할 것이라고 자신 있게 대답할 수 있는 분은 참으로 행복한 분입니다. 그러나 나를 위해 기도해 줄 사람이 없다면 참으로 불행한 일입니다. 아마도 많은 분들이 이 부분에 자신 없어 하실 지 모르겠습니다.

그렇다면 나를 위해 기도해 줄 사람이 왜 없는 것일까요?

그것은 내가 너무나도 세속적으로 살았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이 전부인 것처럼 살았으며 내 자녀들에게도 그렇게 가르쳤기 때문입니다. 영원한 세상에 대해서는 별 관심이 없었기 때문이지요. 마치 이 세상의 삶이 다인 것처럼 생각한 때문입니다. 이 세상에서 천년 만년 살아갈 사람처럼 산 결과인 것입니다. 이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삶이었는지는 불을 보듯 명약관화합니다.

지금까지 죽지 않고 살아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이 세상에서 영원무궁 살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지요. 지금 지구상에는 50~70억 인구가 어우러져 살고 있지만 이들 모두는 100년이 지나지 않아 하나도 살아남지 못하고 다 죽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 또한 반드시 죽습니다. 그런데도 마치 죽지 않을 것처럼 살아가고, 이 세상이 다인 것처럼 어리석은 생각으로 가득 차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안타깝기 짝이 없는 일입니다. 우리 모두는 하느님 앞으로 돌아갈 날이 얼마 남지 않았는데 관심은 여전히 건강이나 재물뿐입니다. 얼마나 어리석습니까?

죽을 날이 얼마 남지 않았는데
나를 위해서 기도해 줄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것은 너무나도 비참한 상황입니다.

노년을 위해서는 보험을 들고 저축을 하면서도
내가 죽은 후 연옥에서 고생하는 나를 위해 기도 한마디 해줄 사람을 염두에 두지 않는 사람은 참으로 어리석은 인생을 사는 사람입니다. 우리 모두는 하느님께 갈 날이 멀지 않았습니다. 굉장히 오래 남은 것처럼 생각하고 살아가지만 그렇지 않은 것이지요.

이 위령 성월은 우리에게 그 순간이
곧 닥친다는 것을 깨우쳐 줍니다. 정신을 차리고 살아가라고 우리를 자극합니다. 이 세상이 다인 것처럼 살아온 그 정신을 새롭게 고치라고 강조해 줍니다. 우리의 조상들이 다 죽어갔듯이 지금 우리가 관심을 갖고 욕심을 내는 그 모든 것들이 아무 의미가 없다는 것을 알려줍니다.

우리는 기도해야 합니다.
그리고 또 자녀들에게 가르쳐야 합니다. 연옥에서 힘겨운 삶을 살고 있을 때 아무도 나를 위해 기도해 주는 사람이 없다면 얼마나 고통스럽겠습니까? 나부터가 기도해야 합니다. 나 보다 먼저 돌아가신 부모님을 위해서 미사를 드리고 기도를 드려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기도할 줄 모르는 자녀에게 기도하는 법을 가르치는 것이야말로 부모로서 당연히 해야 할 의무 중의 의무입니다.

오늘은 돌아가신 분들의 영원한 안식을 위해서 특별히 기도하는 날입니다.
예전의 우리 신앙의 선조들은 지금 우리와는 다른 모습이었습니다. 부모님이 돌아가신 기일이 되면 마치 제사를 지내듯이 자녀들을 모두 불러놓고 함께 연도하고 미사를 봉헌하였으며 돌아가신 분들이 하느님의 자비하심으로 천국에 들기를 간절히 기도하였습니다. 그 모습은 그대로 자녀들에게 이어져 내려갔지요.

우리에게 부족한 부분은 빨리 깨닫고 채워나가야 합니다.
노후를 위한 보험만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죽은 후에 하느님의 자비를 얻기 위한 대책도 그 이상으로 중요하다는 것을 하루 빨리 깨달아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궁극적으로 돌아가야 할 곳은 하느님 나라입니다. 이 세상의 삶은 눈 깜빡할 사이에 지나가고 만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되겠습니다. 우리보다 먼저 돌아가신 많은 선조들이 하느님의 자비하심으로 영원한 안식을 얻을 수 있도록 미사 중에 함께 기도해 주시기를 바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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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이기양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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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은 우리들보다 앞서 돌아가신 분들의 영혼을 위해서 기도하는 위령 성월입니다. 날씨도 음산한 11월이라 우리들의 죽음을 묵상하기에도 좋은 달입니다.

우리는 죽음과 관련해서 󰡒돌아가다󰡓라는 동사를 흔히 사용합니다.
󰡒아버님께서 돌아가셨습니다.󰡓
󰡒선생님께서 돌아가셨습니다.󰡓
주님께서도 󰡒돌아간다󰡓는 표현을 사용하셨습니다.
󰡒나는 아버지께로부터 왔다가 이제 아버지께 돌아갑니다󰡓(요한 11,28).
주님께서는 진리이신 하느님께로부터 온 존재임을 몸소 느끼셨습니다. 또한 진리이신 그분께로 돌아가는 존재임을 잘 알고 계셨습니다.

주님뿐만 아니라 모름지기 인간은 하느님 아버지께로부터 와서 하느님께로 다시 돌아가는 존재입니다. 그러니까 인간은 우리를 보내주신 하느님과 우리가 돌아가야 하는 하느님 사이에 끼어있는 존재입니다. 나를 보내주신 분이 하느님이고 죽음 후에 나를 기다리는 분이 하느님입니다. 우리네 인간은 이렇게 하느님과 하느님 사이에 있는 사이 존재인 것입니다. 여기에 우리 인간의 행복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사람들은 나이가 들어갈수록 점점 더 흙과 친해진다고 합니다. 흙과 날로 친해지다가 흙과 완전히 하나가 되는 사건, 그것이 우리의 죽음입니다. 신앙 안에서는 하느님께로부터 와서 하느님께로 돌아간다고 이야기합니다. 살다가 죽는 것이 아니라 왔다가(如來 여래) 가는 것 (善逝 선서)입니다. 흙과 친해지다가, 흙을 닮아가다가, 마침내 흙으로 돌아가 흙과 하나 되듯이, 하느님과 친해지다가, 하느님을 닮아가다가, 마침내 하느님께로 돌아가 하느님과 하나 되는 사건! 그것이 우리의 죽음입니다. 그렇기에 죽음은 못난 인간이 하느님과 완전히 하나 되는 은총의 사건입니다.

박성철 신부
  | 10.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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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회 없는 신앙인

'후회 없는 인생을 살자'는 말이 있지만 일반적으로 사람은 죽음 앞에서 다음 세 가지를 후회한다고 합니다.
 
첫째는 '베풀지 못한 것에 대한 후회'라고 합니다. 가난하게 산 사람이든 부유하게 산 사람이든 죽을 때가 되면 "좀 더 나누면서 살 수 있었는데…. 긁어모으고, 움켜쥐어 봐도 별 것 아니었는데 왜 좀 더 나눠주지 못하고 베풀며 살지 못했을까? 참 어리석게 살았구나" 이런 생각이 자꾸 나서 이것을 가장 크게 후회한다는 것입니다.
 
둘째는 '참지 못한 것에 대한 후회'라고 합니다. "그때 내가 조금만 더 참았더라면 좋았을 걸, 왜 쓸데없는 말을 하고 쓸데없이 행동했던가"하고 후회한다고 하지요. 당시에는 내가 옳다고 생각했습니다. 그것이 최선이라고 생각했고 그럴 수밖에 없었다고 생각했지요. 그러나 지나고 보니 그 때 참았더라면 내 인생이 많이 달라졌을 텐데 하며 후회가 된다는 것입니다.
 
셋째는 '좀 더 행복하게 살지 못한 것에 대한 후회'라고 합니다. "왜 그렇게 빡빡하고 재미없게 살았던가? 왜 그렇게 짜증스럽게 힘겹고 어리석게 살았던가? 얼마든지 기쁘고 즐겁게 살 수도 있었는데…"하며 복되게 살지 못한 것을 후회하며, 또한 그러한 나로 인해 주위 사람들이 힘들었을 것을 뒤늦게 깨닫고 후회한다고 합니다.
 
하지만 열심히 신앙생활을 한 천주교 신자들은 이러한 후회와 미련에서 자유롭습니다. 영원한 생명을 확신하기에 죽음 앞에서 두려움도 후회도 훨씬 적을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특히 마태오 복음 25장에 나와 있는 최후 심판의 기준대로 가장 가난한 이에게 베푼 것이 나에게 베푼 것이라는 주님 말씀을 실천하며 살아온 이라면 베풀지 못한 것에 대한 후회대신 평생을 나누며 살아왔다는 보람으로 흐뭇할 것이고 하늘에 쌓은 보화에 더 큰 희망을 가질 것입니다.
 
또 세상 사람들은 좀 더 참지 못한 것에 대한 후회를 많이 한다고 하지만 신자들은 이 부분에서도 자유로울 것입니다.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 그리고 너희를 박해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 그래야 너희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자녀가 될 수 있다"(마태 5,44-45)는 말씀을 수도 없이 들었고 이 말씀을 지키기 위해 인고의 세월을 기도와 실천으로 보낸 사람은 고진감래(苦盡甘來)라는 말을 실감하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신자들은 미신자들과는 달리 최후의 심판을 믿고 착하게 산 사람은 죽은 후에 천국에, 악하게 산 사람은 지옥에, 보속할 것이 남은 사람은 연옥에 간다고 믿습니다.
 
그러면 위령성월을 맞아 신자 여러분께 물어보겠습니다.
 
"내가 지금 죽게 된다면 나는 천국에 갈 것 같습니까? 지옥에 갈 것 같습니까? 아니면 연옥에 갈 것 같습니까?"
 
아마도 대부분이 연옥에 갈 것 같다고 겸손하게 표현하실 것입니다. 자, 여기서 우리는 심각한 문제를 하나 제기해 볼 수 있습니다. 많은 분들이 죽으면 연옥에 갈 것 같다고 표현하시는데 그렇다면 연옥에 있는 여러분을 위해 기도해 줄 사람이 있으십니까? 내가 나의 젊음과 모든 정성을 다 바쳐서 키운 자식들이 내가 죽으면 나를 위해서 기일에 기도를 하고 미사를 봉헌해 줄 것인지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또 평생을 함께 한 남편이나 아내가 나를 위해 기도해 주겠는지를 한번 헤아려 보십시오. 기도할 것이라고 자신 있게 대답할 수 있는 분은 참으로 행복한 분입니다. 그렇지 못한 분이라면 노력해야 합니다.
 
노년을 위해서는 보험을 들고 저축을 하면서도 죽은 후 연옥에서 고생하는 나를 위해 기도 한마디 해줄 사람이 없다면 참으로 어리석은 인생을 사는 사람입니다.
 
오늘은 돌아가신 분들의 영원한 안식을 위해서 특별히 기도하는 날입니다. 예전의 우리 신앙의 선조들은 부모님이 돌아가신 기일이 되면 마치 제사를 지내듯이 돌아가신 분들이 하느님의 자비하심으로 천국에 들기를 미사와 연도를 통해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전통을 그대로 자녀들에게 물려줬지요. 의미 깊고 아름다운 이 전통을 지킬 의무가 이제 우리에게 있습니다.
 
우리보다 먼저 돌아가신 선조들이 하느님의 자비하심으로 영원한 안식을 얻을 수 있도록 기도해 주시기 바랍니다.

이기양 신부
  | 10.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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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 성인들의 통공을 믿으며

11월은 죽은 영혼들을 위해 특별히 기도하는 위령성월이면서, 오늘(11월 2일)은 세상을 떠난 모든 신자들을 기억하는 위령의 날이기도 합니다. 오늘 이렇게 특별히 기도하는 것은, 성인품에는 오르지 못했지만 그리스도를 믿고 살아온 평범한 백성에게도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승리로 인한 몫이 부여되기를 바라는 희망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우리가 죽은 이들을 위해서 기도하고, 또 이미 돌아가신 성인들께 기도를 부탁드릴 수 있는 것은 “성인들의 통공”을 믿고 고백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일반적인 의미에서 성인(聖人)은 은총의 상태에 있는 모든 사람을 가리킵니다. 그러므로 “성인들의 통공”은 세례 받은 모든 이를 삼위일체의 신비 안에 하나로 결합시키는 신앙과 사랑의 통교를 의미합니다. 그러니 지상에 있는 신도들과 천상에 있는 복자들과 연옥 영혼들이 모두 그리스도와 일치를 이루며 영적인 것들을 서로 나누는 것이 가능한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죽은 이들을 위해서 기도할 수 있고, 또 이미 하늘나라에 오르신 성모님과 복자들께는 우리를 위한 기도를 청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죽은 이를 기억하고 그들을 위해 기도하는 날인 오늘, 복음에서는 예수님의 행복선언이 담겨있는 진복팔단을 들려주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행복하다고 하시는 사람들은 세상의 눈으로 보면 행복할 것 없는 사람들입니다. 소위 고생을 사서 하는 사람들, 자신만 배불리기를 포기한 사람들, 편안하게 살기를 포기한 사람들, 불의와 타협하기를 포기한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을 행복하다고 하시는 이유를 보면, 예수님의 행복의 기준은 하늘나라에 있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지금이 슬픈 것도 아닙니다. 하느님 나라에서 영원한 생명을 누리며 살기를 지향하고 계명을 지키며 살아가는 모습이 세속적인 가치관으로 보면 고생스럽고 멍청해 보이지만, 그들에게는 남들이 보지 못하는 희망과 기쁨을 보고 누릴 수 있기 때문에 더 행복합니다. 그것은 부모들이 사랑하는 자녀를 위해 세상의 각박함 속에서 기쁘게 힘을 내서 일하는 것이나, 출산 때 나올 아이를 위해 태교에 정성을 들이고 산모들이 고통을 참아내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는 희망을 지상에 두지 말고 하느님 나라에 두어야 합니다. 세례를 통해서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게 된 것을 기뻐해야 하고, 많은 어려움과 유혹과 고난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지켜내야 합니다. 하느님 나라에서 누릴 것을 희망하며, 지상에서의 힘겨운 삶을 이겨내는 사람이 진정으로 행복한 사람입니다.

▮ 의정부교구 문화미디어국
  | 11.01
463 49.6%
지난 10월에 새남터에서 절두산 성지까지 4번 순례를 하였습니다. 복음화 학교의 공동체, 성소 후원회 임원, 교구청 직원들과 함께 했습니다. 지인과 함께 순례를 하였습니다. 여러 사람들과 순례를 할 때는 자세히 볼 수 없었지만 지인과 함께 하면서 새남터 성당의 도록도 보았고, 전시된 성물도 보았고, 기념관에서 순교자들에 대한 기록물도 보았습니다. ‘주마간산(走馬看山)’이라는 말처럼 행사로 순례를 할 때는 바쁘다는 이유로 제대로 순례를 하지 못하였습니다. 가끔씩 혼자서 성지순례를 한다는 지인은 성지순례의 의미를 다시 생각하게 해 주었습니다.

함께 사는 동창신부님은 무슨 일을 할 경우, 늘 기본을 생각합니다. 그래야 제대로 배울 수 있고, 실력이 늘 수 있고, 오래 할 수 있다고 합니다. 익지도 않은 과일을 먹으려했던 것처럼 무슨 일이든지 서두르는 저와는 많이 달랐습니다. 기도, 운동, 만남은 모두 기본이 중요합니다. 조금 힘이 들어도 하나씩 배우면 이치를 알게 되고, 이치를 알게 되면 힘이 빠지고, 힘이 빠지면 내가 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이끌어 주심을 느끼게 됩니다. 기본을 모르면 편법을 쓰게 되고, 힘으로 하기 때문에 본인도, 이웃도 힘들게 하기 마련입니다.

지난 40년 동안 한국교회는 많은 성장을 하였습니다. 매 10년마다 신자는 100만 명씩 증가하였습니다. 성직자의 수도 늘었습니다. 성당도 많이 생겼습니다. 한국사회에서 천주교회는 듬직한 믿음을 주었습니다. 사회복지 시설도 천주교에서 많이 운영하였습니다. 감사할 일이고, 보람 있는 일이고, 앞으로도 더 발전하면 좋겠습니다. 빛이 있으면 그림자가 있듯이 한국교회는 그늘도 있습니다. 주일 미사 참례를 하는 신자가 20%을 조금 넘고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세례를 받았지만 신앙생활을 제대로 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대형화, 중산층화 되면서 가난한 이들, 아픈 이들, 장애인들에 대한 배려가 적어지고 있습니다. 물질주의와 자본주의는 교회의 심장에도 깊이 들어와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이야기 하십니다. ‘마음이 가난한 사람, 옳은 일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 정의를 위해서 일하는 사람, 자비를 베푸는 사람, 주님 때문에 모욕을 받고 박해를 받는 사람’들입니다. 그와 같은 삶을 사는 사람들은 한분도 빠짐없이 하느님께로 갈 것입니다. 하느님 나라에는 머물 곳이 많기 때문입니다. 우리들 또한 우리의 이웃을 상대평가하기 보다는 잘한 것 그 하나만으로도 이해하고 받아 줄 수 있는 절대평가를 하면서 지냈으면 좋겠습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은 기본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이야기 하십니다. ‘고통 앞에 중립은 없다고 하시고, 양 냄새 나는 목자가 되어야 한다고 하시고, 상처를 입더라도 세상 속에서 복음을 증거해야 한다고 하십니다.’ 교황님께서 발표하신 ‘복음의 기쁨’은 우리가 가야할 길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위령의 날을 지내면서 천상병 시인의 ‘귀천(歸天)’이라는 시를 함께 하고 싶습니다.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새벽빛 와 닿으면 스러지는
이슬 더불어 손에 손을 잡고,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노을 빛 함께 단 둘이서
기슭에서 놀다가 구름 손짓하며는,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내는 날,
가서, 아름다웠다고 말하리라”

▮ 서울대교구 조재형 신부 : 2016년 11월 2일
  | 1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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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에 들어서면 가을 산하를 울긋불긋 색색이 곱게 물들였던 나무 잎들이 하나 둘 힘없이 떨어지기 시작하면서, 우리는 자연스레 삶의 마지막을 떠올리게 됩니다. 또한 이즈음에 우리는 우리보다 먼저 아름다웠던 삶의 여정을 마치고 하느님의 품으로 돌아간 사랑하는 이들을 기억하면서, 바쁜 일상에 쫓겨 잠시 잊고 지냈던 그들과의 깊고 애틋한 친교를 다시금 이루게 됩니다.

그러기에 교회는 해마다 늦가을 11월을 세상을 떠난 이들의 영혼을 특별히 기억하며 기도하는 ‘위령성월’로 지냅니다. 11월 위령성월은 교회 전례력으로 보면, 새로운 한 해를 시작하는 대림시기를 앞 둔 한 해의 마지막 달로서, 일 년이라는 삶의 마지막을 더욱 정성껏 보듬으며, 삶과 죽음을 하나로 이어주는 때입니다.

오늘은 위령성월 가운데 특별히 우리를 떠나 하느님께 돌아간 이들을 기억하는 위령의 날입니다. 우리는 오늘 세상을 떠난 이들을 위해 기도할 뿐만 아니라, 이 세상에서의 마지막 날, 곧 거룩한 죽음을 맞이하는 날을 향해 나아가는 우리 삶의 여정을 돌아봅니다.

사람의 죽음을 나타내는 여러 가지 단어가 있지만, 우리 천주교 신자들은 ‘선종(善終)’이라는 단어를 즐겨 씁니다. ‘선종’은 착한 죽음, 거룩한 죽음이라는 뜻의 참으로 곱고 따뜻한 단어입니다. ‘착하게 살다가 복되게 끝마침’을 의미하는 ‘선생복종(善生福終)’의 줄임말일 수도 있습니다.

누구나 선종을 희망합니다. 그러나 모든 이가 선종을 맞이하는 것은 아닙니다. 안타까운 죽음, 비참한 죽음, 억울한 죽음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애써 선종이라고 말하고픈 까닭은 모든 죽음은 아름답고 치열했던 삶을 담고 있기 때문입니다.

올해 위령의 날에는 인간적으로는 더없이 비통하고 안타까운 죽음이지만, 어느 누구보다도 더 귀한 선종(善終)을 맞이했던 한 사람을 기억하고 싶습니다. 바로 지난 9월 25일 하느님 품으로 떠나신 백남기 임마누엘 형제가 그 사람입니다. 임마누엘 형제는 서울대병원 병상에서 317일간의 사투 끝에 선종(善終)하였습니다. 분노할 수밖에 없는 억울한 죽음이지만 굳이 선종이라고 부르고 싶은 이유는, 젊은 시절 군사독재정권에 항거하고 귀향 후 평생 농부로서 생명을 보듬었던 그의 삶의 이력과 이 땅의 죽어가는 농민과 농업을 살려야 한다고 외치다 살인적인 물대포에 맞아 쓰러졌던 작년 11월 14일 이후 죽음의 여정이 예수님의 삶과 죽음과 닮았기 때문입니다.

임마누엘 형제뿐만 아니라, 수많은 선종한 이들이 우리 곁에 있습니다. 믿음의 벗님들의 애틋한 기억 속에도 선종한 이들이 많이 있을 것입니다. 그 누가 되었든 선종한 이들을 위해 기도하면서, 매일의 삶 안에서 우리 자신의 선종에 대해서 미리 미리 마음 깊이 새길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 모두는 선종을 맞이하고 싶습니다. 우리의 죽음 역시 선종이라 불리기를 바랍니다. 하지만 언젠가 선종을 맞이하기 위해서만, 지금여기의 삶을 정성껏 보듬는 것은 아닙니다. 선종은 단 하나 고귀한 삶의 목적이 아니라, 지칠 줄 모르는 뜨거운 사랑으로 채워진 아름답고 의로우며 거룩한 삶의 열매이기 때문입니다.

선종은 제 살 길 찾아 불의와 타협하는 사람들이나 스스로 한계를 모르는 비인간적인 탐욕의 노예가 된 사람들이 아니라, 정의와 평화를 향한 헌신과 벗을 살리기 위해서 자신을 기꺼이 내어놓은 섬김과 나눔을 사는 이들에게 마침내 주어질 주님의 편한 멍에이고 가벼운 짐이며, 영원한 안식입니다(마태 11,29-30 참조). 선종은 십자가 죽음이라는 의로운 행위로 모든 이를 의롭게 하신 예수 그리스도처럼 살고, 예수 그리스도처럼 죽는 이들에게 주어질 하느님의 선물입니다(로마 5,18 참조).

그러기에 오늘 제1독서는 선종한 의인들의 삶과 죽음, 그리고 부활을 다음과 같이 아름답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의인들의 영혼은 하느님의 손안에 있어, 어떠한 고통도 겪지 않을 것이다. 어리석은 자들의 눈에는 의인들이 죽은 것처럼 보이고, 그들의 말로가 고난으로 생각되며, 우리에게서 떠나는 것이 파멸로 여겨지지만, 그들은 평화를 누리고 있다. 사람들이 보기에 의인들이 벌을 받는 것 같지만, 그들은 불사의 희망으로 가득 차 있다. 그들은 단련을 조금 받은 뒤 은혜를 크게 얻을 것이다. 하느님께서 그들을 시험하시고, 그들이 당신께 맞갖은 이들임을 아셨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선종을 향한 거룩하고 아름다운 삶의 여정에 함께 하는 사랑하는 믿음의 벗님들 모두, 위령의 날인 오늘을 단지 막연하게 선종을 희망하는 날로 여기지 않고, 가난하고 깨끗한 마음으로 세상의 아픔을 슬퍼하며 사랑과 정의와 평화를 위해 헌신하는 영원을 향한 순간으로 보듬으시기를 바랍니다(마태 5,3-11 참조).

▮ 서울대교구 조재형 신부 : 2016년 11월 2일
  | 1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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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세상을 떠난 모든 영혼을 기억하는 ‘위령의 날’입니다.

한국에 있을 때입니다.
‘위령의 날’에는 용산 성당에 있는 성직자 묘지엘 갔습니다. 교구장님과 사제들은 세상을 떠난 사제들을 위해서 미사를 봉헌했습니다. 용산 성당에서 보좌신부로 있었습니다. 위령의 날은 본당의 큰 행사였습니다. 주교님과 신부님들이 많이 오시고, 교우들도 많이 오시기 때문입니다. 성직자 묘지를 가득 메운 교우들과 함께 미사를 봉헌하면서 우리는 살아서도, 죽어서도 같은 신앙 공동체를 이루고 있다고 생각하였습니다. 성직자 묘지를 바라보면서 성모상이 있었습니다. 성모님께서 세상을 떠난 사제들을 따뜻한 마음으로 바라보시는 것 같았습니다. 사제들을 사랑하시는 성모님께서 세상을 떠난 모든 사제들이 하느님의 품에서 영원한 생명을 누리도록 전구하시는 것 같았습니다.

2020년 위령의 날은 저에게는 특별한 날입니다.
지난 9월 10일어 어머니께서 하느님의 품으로 가셨습니다. 아버님은 9년 전인 2011년 5월 5일에 하느님 품으로 가셨습니다. 비록 한국으로 가서 부모님을 위한 미사를 하지는 못하지만 이곳 뉴욕에서 부모님을 위한 미사를 봉헌합니다.

오늘 미사 전례는
위령의 날을 지내는 우리에게 많은 위로와 용기를 줍니다.

오늘 감사송은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복된 부활의 희망을 주셨기에 저희는 죽어야 할 운명을 슬퍼하면서도 다가오는 영생의 약속으로 위로를 받나이다. 주님, 믿는 이들에게는 죽음은 죽음이 아니요 새로운 삶으로 옮아감이오니 세상에서 깃들이던 이 집이 허물어지면 하늘에 영원한 거처가 마련되나이다.”

신앙 안에서 살았으니
부모님께서 세상에서 깃들이던 집은 허물어졌지만 하느님의 품에서 영원한 거처를 마련하였으리라 믿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사람들이 나 때문에 너희를 모욕하고 박해하며, 너희를 거슬러 거짓으로 온갖 사악한 말을 하면, 너희는 행복하다!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너희가 하늘에서 받을 상이 크다.”

이 세상의 고통 중에서도
우리가 감사할 수 있는 것은 이 세상이 끝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의 절망 중에서도
우리가 희망을 가질 수 있는 것은 이 세상이 끝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의 어둠 속에서도
우리가 빛을 볼 수 있는 것은 이 세상이 끝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가난한 사람도 행복할 수 있습니다.
자비를 베푸는 사람, 슬퍼하는 사람, 온유한 사람, 옳은 일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 평화를 위해서 일하는 사람이 행복한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이 하느님과 함께 영원한 생명을 누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모든 성인 대축일인 11월 1일부터 8일까지 정성껏 묘지를 방문하여 세상을 떠난 이들을 위해 기도할 것을 권장하고 있습니다.

시간이 되시는 분들은 묘지를 방문하고 세상을 떠난 이들을 위해서 기도하면 좋겠습니다. 우리들의 기도가 연옥의 영혼들에게는 큰 위로가 될 것입니다. 세상을 떠난 이들을 위해서 기도하는 것은 우리 자신의 성화에도 큰 도움이 됩니다. 그것은 죽은 이들을 위하여 기도하면 자연히 하느님의 나라에 대하여 묵상하게 되고, 자신의 생활을 반성하여 성실한 신앙생활을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위령의 날을 지내면서
천상병 시인의 ‘귀천(歸天)’을 함께 하고 싶습니다.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새벽빛 와 닿으면 스러지는
이슬 더불어 손에 손을 잡고,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노을빛 함께 단둘이서
기슭에서 놀다가 구름 손짓하면은,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내는 날,
가서, 아름다웠다고 말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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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신부
2020년 11월 2일
  | 1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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