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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 나를 필요로 하시는 주님
조회수 | 1,929
작성일 | 08.11.07
어느날 예루살렘 성전에 들어선 이사야는 날개달린 천사들에 둘러싸여 찬미 받으시는 주 하느님을 뵙는 영적 체험을 합니다. 바로 그 체험 현장에서 이사야는 주님으로부터 예언자로 부르심 받아 파견됩니다(이사 6, 1-10). 한편 예언자 에제키엘은 일찍이 성전 밖으로 나오는 하느님 영광을 볼 수 있었습니다(에제 10, 18-22; 11, 22-23). 그로부터 얼마 후 그는 주 하느님의 영광이 새로 지은 성전 안으로 돌아오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43, 1-9; 44, 2).

오늘 1독서에서 에제키엘은 주 하느님이 당신 백성에게 어떤 모습으로 구원을 가져다주시는 지를 그려줍니다. 여기서 에제키엘은 성전에서 흘러나오는 물(이사 8, 6-8)과 물이 풍부한 에덴동산의 모습(창세 2, 10-14)을 연관시킵니다. 한마디로 모든 풍요로움과 축복은 다 주 하느님으로부터 유래한다는 뜻입니다. 오늘 독서의 끝 구절이 이 모든 말씀을 잘 요약해줍니다. “이 강가 이쪽저쪽에는 온갖 과일나무가 자라는데, 잎도 시들지 않으며 과일도 끊이지 않고 다달이 새 과일을 내놓는다. 이 물이 성전에서 나오기 때문이다. 그 과일은 양식이 되고 잎은 약이 된다.”(에제 47, 12)

그로부터 수백 년이 지난 뒤 요한은 묵시록에서 에제키엘 예언자가 그리던 구원받은 이들의 세상, 곧 하늘나라로 독자들을 초대합니다. “목마른 사람은 오너라. 원하는 사람은 생명수를 거저 받아라.”(묵시 22, 17ㄷ) 신구약에서 물은 삶과 기쁨의 상징이며 성령을 뜻하기도 합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목마른 사람은 다 나에게 와서 마셔라. 나를 믿는 사람은 성경말씀대로 ‘그 속에서부터 생수의 강들이 흘러나올 것이다.’ 이는 당신을 믿는 이들이 받게 될 성령을 가리켜 하신 말씀이었다.”(요한 7, 37-39ㄱ).

한편 사도 바오로는 오늘 2독서에서 ‘하느님의 성전’은 다름 아니라 ‘모든 믿는 이들’이라고 말합니다. “여러분이 하느님의 성전이고 하느님의 영께서 여러분 안에 계시다는 사실을 여러분은 모릅니까?”(1코린 3, 16)

본디 이사야는 하느님 백성에게 타락한 삶을 떠나 주님께로 돌아오라고 외쳤습니다. 백성은 예언자의 외침에 귀 기울이지 않아 결국 바빌론으로 유배를 떠나게 됩니다. 유배생활에 힘겨워하는 백성에게 에제키엘은 ‘주님의 입’이 되어 희망을 일깨웠습니다. 요즘처럼 살기 힘든 때일수록 주님은 우리와 가까이 계십니다. “내가 하느님을 필요로 하는 그만큼 그분도 나를 필요로 하십니다. God needs me as much as I need God.”( J. H. Nouwen). 열심히 살다보면 나도 모르는 사이에 거룩하게 되어 이사야나 에제키엘처럼 주님을 체험할 수 있는 날이 올 것입니다.  

신교선 가브리엘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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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새벽에 있었던 황당한 사건을 하나를 말씀드립니다. 며칠 전, 새벽 묵상 글에도 썼지만, 첫눈을 볼 수 있었는데 간발의 차이로 아쉽게 보지 못했지요. 그런데 어제 새벽에 기도하러 경당에 들어가는데 하늘에서 무엇인가가 내리는 것입니다. 저는 ‘눈이구나.’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드디어 첫눈을 나도 보게 된다는 생각을 하게 되니 기분이 좋아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첫눈을 온 몸으로 한번 느껴보고 싶었습니다.

저는 성지의 마당 한 가운데에 서서 양 손을 벌리고 하늘을 쳐다보았습니다. 아직 날이 밝기 전이라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 캄캄한 어둠 속에서, 하나씩 사뿐히 내려앉는 그 눈을 이 몸으로 느끼고 싶었거든요. 그런데 생각지도 않은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글쎄 갑자기 하늘에서 무엇인가가 쏟아지는 것입니다. 눈이 아니라 비였습니다. 소나기처럼 쏟아지는 그 비를 온 몸으로 맞을 수밖에 없었지요. 결국 저는 물에 빠진 생쥐의 모습이 되고 말았습니다.

어두워서 눈인지 비인지 분간할 수 없었지요. 그렇지만 천천히 몸에 부딪히는 그 느낌이 눈일 것이라고 생각했었는데, 아니었습니다. 결국 첫눈을 맞을 수 있다는 기대가 완전히 무너지고 대신 비만 쫄딱 맞고 말았습니다. 만약 저의 이 모습을 누군가 보았다면 어떠했을까요? ‘아니, 저렇게 멍청한 사람이 다 있을까?’라면서 흉보지 않았을까요?

그런데 이런 모습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혹시 더 멍청하고 어리석은 행동을 하고 있는 내 자신은 아니었을까 라는 생각을 해봅니다. 주님께서는 구원으로 나아가는 길을 우리에게 매 순간 가르쳐 주시지요. 그런데 얼마나 그 길을 제대로 따르고 있었나요? 말로는 따르겠다고 말하면서, 나에게 편하고 쉬운 길만을 선택하고 있는 그 모습을 우리 주님께서는 얼마나 한심하게 생각하실까요?

오늘 복음에서 이러한 주님의 생각이 분명히 드러납니다. 사람들은 하느님이 계신다는 성전에서 자신의 이익을 취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사랑이 넘쳐야 할 성전에서 물건이 매매되는 시장처럼 장사가 이루어지고 있었습니다. 이렇게 어리석은 행동을 하는 사람들을 향해서 예수님께서는 채찍을 휘두르시고 탁자를 엎어 버리십니다. 그리고 말씀하시지요.

“이 성전을 허물어라. 그러면 내가 사흘 안에 다시 세우겠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성전이란 바로 당신의 몸 자체를 두고 하신 말씀인 것이지요. 즉, 부활을 통해서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사랑이 가득한 완전한 성전을 완성하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들의 몸도 바로 성전이 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들은 매 미사 때마다 주님의 몸을 모시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과연 나의 몸을 사랑이 가득한 완전한 성전으로 만들고 있을까요?

기도는 하지 않고 세상의 재물과 명예만을 쫓는 나의모습. 나의 편함과 인정받고자 하는 마음들. 다른 사람에 대한 배려보다는 나에 대한 배려만 하고 있는 이기적인 모습들. 바로 기도해야 할 성전에서 장사를 하고 있는 유다인들의 어리석은 모습들이 바로 내 안에서도 이루어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제는 어리석은 행동은 그만두고 지혜로운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그 모습은 나를 버려야지만 가능합니다. 세상의 욕심을 버리고 주님의 뜻에만 집중해서 나아갈 때, 참으로 지혜로운 사람이 될 것입니다.

조명연 신부
  | 1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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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가 한 방울도 내리지 않는 사막을 한번 떠올려보세요. 따라서 물이라고는 눈을 씻고 찾아보기 힘든 사막입니다. 그곳에는 무엇이 있지요? 아무리 생각해봐도 모래밖에 떠올려지지 않습니다. 그런데 그곳에서도 많은 식물들이 자라고 있다고 하네요. 물론 물이 많은 지역의 식물처럼 무성한 잎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 어떻게든 자리고 있는 이 식물들을 보면 대단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런데 물 없는 곳에서 어떻게 자라고 있는 것일까요?

정답은 바로 ‘뿌리’라고 합니다.

‘목초’라고 불리는 사막 식물은 그 부리가 땅 속의 물이 있는 곳까지 뻗쳐 있는데, 보통 7-9미터까지 그 뿌리를 땅속으로 곧게 뻗는다고 하네요. 또한 사막이나 황무지에서도 잘 자라는 ‘포아풀’도 마찬가지입니다. 한겨울 박토 속에서도 죽지 않고 잘 자라는 이 식물의 생존 비결은 역시 뿌리라고 합니다. 글쎄 높이 5센티의 작은 키이지만, 뿌리는 600킬로미터가 넘는다고 하네요.

바로 이런 식물들이 뿌리를 깊이 내림으로써 살 수 있는 것처럼, 우리 역시 어디에 뿌리를 내리고 있는지를 생각해봐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예수님께 얼마나 깊이 뿌리를 내리느냐에 따라서 살 수도, 또 반대로 죽을 수도 있다는 것이지요.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성전을 정화하십니다. 즉, 사랑이 가득 넘쳐야 할 성전에서 사람들은 자신들의 이익을 취하기만 급했기 때문에, 채찍을 휘두르시지요. 그러자 한 유다인이 말합니다.

“당신이 이런 일을 하는데, 당신에게 이럴 권한 있음을 증명해 보시오. 도대체 무슨 기적을 보여 주겠소?”

예수님께서는 이제까지 많은 기적을 보여주셨지요. 그 기적을 보여준 이유는 무엇인가요? 바로 하느님께서 우리 곁에 오셨다는 것을 알려주기 위해서, 하느님 나라가 왔다는 것을 알려주기 위해서였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예수님의 그 기적들을 단순히 하나의 재주, 능력 정도로밖에 보고 있지 않습니다. 그래서 또 다시 기적을 요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로 예수님을 메시아로, 구세주로 받아들이고 있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지요.

이렇게 예수님께 뿌리를 깊이 내리지 못하기 때문에 그들은 예수님의 어떠한 말도 이해할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역시 이렇게 살고 있는 것이 아닐까요? 그래서 이 세상 안에서 신기한 일들이, 도저히 과학적으로 증명되기 힘든 일들만이 내 앞에서 이루어지길 원하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요?

예수님께서는 당신 스스로의 몸을 성전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들의 몸 또한 성전이 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매일의 미사를 통해 예수님의 몸을 직접 받아 모시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우리들의 몸을 어떤 식으로 만들어야 할까요? 예수님의 몸을 받아서 성전이 된 지금, 당시의 유다인들처럼 재물과 명예만을 쫓는 성전으로 만드는 곳이 아니라, 기도와 사랑으로써 주님께 뿌리를 내리는 성전으로 만들어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세운 성전이 있는 우리들 각자를 어떻게 보실까 라는 생각을 해봅니다. “이 성전은 가짜야.”하면서 채찍을 들고 나타나시는 것은 아닐까요?

조명연 신부
  | 1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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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가재는 밀물 때 해변으로 밀려오면 바다로 돌아가려고 노력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래서 바닷물이 다시 돌아와 자신을 데리고 가면 좋은 것이고, 그렇지 않으면 해변에서 죽음을 맞이할 수밖에 없지요. 어떻게든 바다로 돌아가려고 노력해야 살 수 있습니다. 그런데 다시 자기를 데리고 갈 바닷물만을 기다리는 모습이 얼마나 어리석어 보입니까?

하지만 우리 역시 이 바다가재의 모습을 취할 때가 참으로 많은 것 같습니다. 혹시 내 운명 속에서 그리고 내 고통 속에 자신을 그저 내 맡기는 바다가재와 같은 어리석음을 범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자신의 처지를 그저 하느님의 뜻이라면서 아무 것도 하지 않는 어리석음을 행한다면 우리에게 주시는 주님의 큰 은총에 대한 배반이라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주님께서는 우리가 다가갈 수 있도록 환경만을 지정할 뿐, 알맹이를 아름답게 채우는 것은 우리의 몫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이렇게 어리석은 사람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들은 하느님이 계신다는 성전에 사랑을 채우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이익을 채우는데 정신이 없습니다. 즉, 사랑을 채워야하는 것은 우리 인간의 몫인데도 불구하고, 마치 하느님의 몫인양 아무것도 안하고 눈에 보이는 것에만 관심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지요. 이렇게 ‘사랑하라’는 계명의 실천은 포기하고, 세속적인 부분만을 신경 쓰고 있는 그들의 모습을 예수님께서는 도저히 보실 수가 없었지요. 그래서 채찍을 휘두르십니다.

“끈으로 채찍을 만드시어 양과 소와 함께 그들을 모두 성전에서 쫓아내셨다. 또 환전상들의 돈을 쏟아 버리시고, 탁자들을 엎어 버리셨다.”

예수님의 평소 모습과 정반대의 모습이지요. 얼마나 화가 나셨으면 이렇게까지 하실까요? 그리고 분명하게 말씀하십니다.

“이것들을 여기에서 치워라. 내 아버지의 집을 장사하는 집으로 만들지 마라.”

예수님께서는 이 성전을 허물면 사흘 안에 다시 세우시겠다고 말씀하시지요. 바로 당신 자신이 성전임을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몸이 성전이라면, 우리들의 몸 또한 성전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들은 매일의 미사를 통해 예수님의 몸을 모시기 때문이지요. 그렇다면 성전인 우리들의 몸을 어떻게 만들어야 할까요? 어떤 재물과 명예만 쫓는 성전으로 만들 것이 아니라, 사랑을 실천하면서 사랑으로 가득 찬 성전으로 만들어야 하는 것이 너무나도 당연하지 않습니까?

예수님의 또 다른 성전이라고 말할 수 있는 우리 자신을 주님께서는 어떻게 보실까요? 혹시 사랑이 아닌 다른 것만을 추구하고 있는 우리의 모습에, ‘이 모습은 내가 세운 성전이 아니다.’라고 하시면서 채찍을 들고 나타나시지는 않을까요?

조명연 신부
  | 1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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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냥한 목소리로 “사랑합니다. 고객님!”이라고 말하는 상담사의 말에 ‘정말로 나를 사랑하는구나.’ 라고 생각하십니까? 회사에서 이렇게 하라고 하니 억지로 하는 것이지요. 심지어 고객이 심한 말을 해도 자신의 감정을 표현하지 않고 웃으면서 상대해야 합니다. 이렇게 자신의 감정을 숨길 때에서 생기는 스트레스가 매우 크다고 합니다. 그래서 감정 노동자의 어려움에 대한 이야기가 매스컴에서 자주 소개합니다. 물론 자신의 감정을 마음껏 표현하면서 살 수 있는 세상은 아닙니다. 그러나 자신의 감정이 깨지면서까지 살아야 하는 것은 아닐까 싶습니다.

어떤 분과 이야기를 나누던 중에 “저는 고등학교 때 감정이 완전히 깨졌습니다.”라는 표현을 듣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 깨진 감정으로 40년을 사셨다는 것입니다. ‘얼마나 힘드셨을까?’라는 생각은 들지만, 이 깨진 감정의 회복을 위해서 어떤 노력을 하셨는지가 궁금해졌습니다. 이 분의 노력은 ‘원망’이었습니다. 자신의 감정을 깨뜨린 상대를 향한 ‘원망’을 지금까지 계속해서 간직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니 자신의 깨진 감정을 회복할 수가 없었던 것이지요.

부정적인 감정은 나의 모습을 인정할 수도 사랑할 수도 없게 만듭니다. ‘나는 안 돼.’, ‘틀려 버렸어.’라는 말을 계속해서 입 밖으로 내뱉으면서 과연 나를 인정할 수 있을까요? 또 그렇게 부정적인 감정을 표현하는 나를 사랑할 수 있을까요?

자신의 감정이 깨졌다면 이를 회복하기 위한 긍정적인 노력이 필요합니다. 이를 위해 자신을 인정하고 사랑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렇게 자기 자신에 대한 자존감이 세워졌을 때, 다른 이들을 향한 사랑도 가능해질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라테라노 대성전 봉헌 축일을 맞이하여 복음은 성전을 정화하시는 주님의 모습을 우리들에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주님께서 성전을 정화하시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주님의 말씀에 그 이유가 담겨 있지요. 아버지의 집은 장사하는 집이 아니라 기도하는 집이 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는 곧 기도하는 곳, 사랑이 완성되는 곳, 그래서 아버지 하느님을 만날 수 있는 곳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것은 모두 배제되어 있었고, 대신 세속적이고 물질적인 욕심과 이기심이 판치는 곳이 되어 있었기 때문에 정화하셔야 했던 것입니다.

우리 자신 역시 주님을 모시는 또 다른 성전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과연 주님께서 원하시는 성전의 모습일까요? 기도하는 곳이고, 사랑이 완성되는 곳이고, 주님을 만나는 곳이었을까요? 내 자신이 제대로 세워지지 않으면 결코 주님의 훌륭한 성전이 될 수 없습니다. 따라서 계속해서 미움, 화, 다툼 등의 부정적인 마음들을 깨끗이 치우고, 대신 주님의 사랑으로 가득 차 있을 수 있도록 성전 정화가 이루어져야 합니다. ‘나’라는 성전이 바로 세워져 있을 때, ‘나’를 진정으로 사랑하고 그 힘으로 세상에 사랑을 힘차게 전할 수 있습니다.

▦ 인천교구 조명연 신부 : 2018년 11월 9일
  | 1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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