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요안 신부의 가톨릭

 l Home l Bestsite l Search l Freeboard l E-mail l

 
 

주일강론

평일강론

축일강론

대축일/명절강론

혼인강론

장례강론

예 화

사설/칼럼

♣ 현재위치 : 홈 > 강론자료실 > 대축일/명절강론

대축일/명절강론 코너 ( 대축일/명절 미사에 관련된 강론자료입니다... )

 


( 쪽지보내기 스크랩하기 프린터하기 홈페이지 )
449 52.4%
[마산] 우리의 신앙생활, 취미생활이 아닌가?
조회수 | 3,284
작성일 | 07.09.21
묵상 길잡이 : 선조들은 스스로 복음의 진리를 깨달아 신앙의 길을 찾았다. 그리고 평신도들의 힘으로 교회를 세우고 키우며 지켰다. 자신의 인생을 걸만한 확신이 없는 우리의 신앙생활은 신앙생활이라기보다 취미생활이 아닌가?

1. 스스로 깨닫고 실천한 진리

18세기 주자학(朱子學)에 젖어 있던 조선 사회는 갖가지 병폐와 한계에 봉착하고 있었다. 새로운 학문과 사조를 갈망하던 학자들은 중국으로부터 들어오는 '천주실의(天主實義)', '칠극(七極)'등의 서적들을 통해 신앙에 눈뜨게 되었고, 단순히 학문의 차원에서 끝나지 않고 그 가르침을 따라 살기 시작했던 것이다. 초이레, 열 나흘, 스무 하루 등 날 자를 정해 놓고, 7일마다 육신 일을 파(罷)하고, 상제(上帝)이신 하느님을 섬기며 기도하고, 이웃에 봉사하며 나름대로 수계생활(守誡生活)에 전념하였다. "하느님 앞에 만인이 평등하다."는 교회의 가르침은 남녀와 반상(班常)의 신분차이가 뚜렷하던 당시의 상황에서는 가슴 벅찬 깨달음이었다.

우리 신앙의 선조들은 1784년 이승훈이 영세하고, 1836년 프랑스 선교사들이 입국할 때까지 50여 년을 중국인 사제 두 분이 잠시 사목했을 뿐, 평신도들이 스스로 교회를 일으키고 박해 중에서 신앙을 지켜나갔다. 참으로 놀라운 일이 아닌가?

2. 순교는 믿음의 증거이다.

'순교자(martyr)'는 원래 '증거자'란 뜻이다. 자신의 생명을 바쳐 하느님을 증거하는 것이다. 우리나라는 백여 년 동안 4-5회의 큰 박해를 받으며 만여 명의 순교자들이 신앙을 위해 생명을 바쳤다. 자신의 하나밖에 없는 생명을 바쳐 순교한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깊이 생각해 봐야 한다.

우리나라의 두 번째 사제인 최양업(토마) 신부의 부친 최영환(프란치스꼬)는 1839년 7월 아들을 유학시킨 사학죄인으로 체포되어 배교를 강요당하며 100대가 넘는 곤장을 두 번 이상 맞고, 고문을 당한 끝에 장독(杖毒)으로 9월12일 돌아가셨다. 그 어머니 이성례(마리아)는 최도마 신부의 동생들인 5명의 자녀들과 함께 옥에 갇혔다. 둘째 12세 최희정(야고보), 셋째 최선정(안드레아), 넷째 최우정(바실리오), 다섯째 최신정(델네시포로)는 나이 어려 석방되었고, 세 살 짜리 젖먹이(최 스데파노)만 옥에 남았다. 그런데 굶주림과 고문으로 몸이 쇠약해지자 유도(乳道)가 막혀 젖이 나지 않아 젖먹이가 어머니 무릎에서 굶어죽기에 이르렀다. 차마 눈뜨고 볼 수 없는 처참한 광경이었다. 자기 자녀가 무릎 위에서 굶어죽자, 이 마리아는 한 때 관장에게 배교(背敎) 한다는 말을 한 적도 있었다. 그러나 수감 중인 여러 교우들의 위로와 격려로 다시금 순교의 뜻을 굳힐 수 있었다. 옥에서 풀려 나온 둘째인 '최 야고보'는 동생들과 함께 푼푼이 동냥한 돈으로 음식을 마련하여 옥중의 어머니를 면회하고, 동생들을 잘 돌볼 것을 약속하며 격려하였다.

순교의 때가 가까이 오자 어머니 목을 벨 휘겡이(회자수- 子手)를 찾아가 구걸한 돈을 건네고, 어머니의 모습을 상세히 일러주면서 '칼을 잘 갈아 어머니가 고통을 많이 받지 않고 죽을 수 있도록' 한 칼에 목을 베어 주십사 부탁하였다. 이렇게 순교자들은 상상도 할 수 없는 혹독한 고통 가운데서도 자신들이 믿는 하느님을 배반하지 않기 위해 생명을 바쳤던 것이다.

3. 취미생활인가? 신앙생활인가?

하나밖에 없는 생명을 내 놓을 각오로 신앙생활을 하였던 선조들에게 비하면, 우리의 신앙생활은 신앙생활이라기보다 차라리 취미생활이라고 하는 것이 더 알맞은 표현일 것이다. 우리시대엔 똑똑한 사람은 많지만, 자신이 옳다고 믿는 바를 위해서 생명을 바칠 수 있는 자기 진리나 신념을 지닌 사람을 보기는 힘들다. 우리 사회는 어떤가? 철새 정치인과, 정권이 바뀔 때마다 권력자를 찬양하기에 바쁜 매스컴과, 실직한 남편과 자녀들을 미련 없이 버리고 자기 행복을 찾아 떠나는 여자들이 보여주는 세태는 신앙을 위해 칼 앞에 목을 내던진 순교자들의 대열을 비웃기에 충분하다. 만일 우리나라에 "천주교 신자는 자녀를 대학에 보낼 수 없다."든가, 이스라엘처럼 "국가 공무원이 될 수 없다."는 법이라도 있다면, 그래도 성당에 나올 신자가 몇 명이나 될까?

우리와 순교선열들과 근본 차이는 무엇인가? 우리에게는 하느님의 살아 계심을 믿는 믿음이 없고, 부활한 예수가 들어간 그 세계 즉 죽음 후의 영원한 생명을 믿는 믿음도 없다. 이 세상이 전부인 이들이 어떻게 생명을 바칠 수 있겠는가? 경제가 어려워지면서 빈부격차가 점점 극심해지고 있는 현실이다. 신앙의 선조들은 순교자들의 자녀들을 자기 친자식처럼 돌보며 어려움을 함께 나누었다. 부도와 폐업으로 고통받는 이웃이 너무나 많다. 내 친척 내 본당만 생각하지말고 이웃의 아픔을 내일처럼 지극 정성으로 함께 나누어야 한다. 그 안에서 하느님을 현존을 체험토록 하자. 그리하여 죽음도 두렵지 않는 참 믿음을 가꾸도록 하자.

마산교구 유영봉 신부
449 52.4%
자랑스러움과 부끄러움

어느새 완연한 가을 기운과 함께 9월 순교자의 성월도 절반이 지나갑니다. 오늘은 성 김대건 안드레아와 성 정하상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 대축일. 22년 전 103위 한국 순교 성인 성녀 시성식에 참여하기 위해 밤새 묵주알을 돌리며 단체로 버스를 타고 상경하던 기억이 새롭습니다. 교황님을 멀리서 나마 볼 수 있으리라는 기대감과 함께 시성(諡聖) 미사에 참여한다는 설렘, 이제 우리나라에도 비로소 성인 성녀가 탄생한다는 기쁨, 너도 나도 순교자 성인 성녀의 후예가 된다는 자랑스러움… 참으로 기쁘고 가슴 벅찬 시간들이었습니다. 한국 순교 성인 성녀들에 대한 관심은 높아져갔고 다양한 측면에서의 학문적인 연구와 함께 그분들의 신앙과 삶의 모범이 강조되었습니다. 많은 성당들과 신영세자들은 다투어 그분들의 이름을 본뜨기 시작했고 여기저기에 103위 순교 성인 성녀들의 벽화가 그려지고 성화(聖畵)가 걸리기 시작했습니다. 우리는 순교자들의 후예요 수많은 성인 성녀를 둔 자랑스러운 한국 천주교인들이었습니다. 너무나 자랑스러웠습니다.

한국 순교 성인 성녀들의 높은 기개와 탁월한 신앙적인 모범을 온 세상 만방에 알리고 한국 천주교회의 위상을 높여야 한다는 숙제가 주어지기도 했습니다. 실제 한국의 외방 선교회가 파푸아 뉴기니아에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 성당을 세우고 그곳 주민들에게 세례를 주면서 한국 순교 성인 성녀들의 이름을 세례명으로 삼았다는 소식이 전해지기도 하였습니다. 어깨를 으쓱이며 우쭐했던 기억이 있고 참으로 자랑스러웠습니다. 제가 선교사로 사목을 했던, 라틴 아메리카의 에콰도르(Ecuador)에서도 그랬습니다. 성당 이름도 성 안드레아 김대건(San Andres Kim)이었고 가장 목이 좋은 자리에 갓을 쓰고 도포를 입은 김대건 신부님 상(像)이 있었습니다. 전혀 다른 조상의 뿌리, 이질적인 문화, 전혀 상반된 신앙의 역사를 넘어서 이제 남미(南美) 땅에도 한국 순교 성인 성녀들의 신앙이 심어졌다며 우리 한국 사람들은 기뻐했습니다. 에콰도르 원주민 성당의 주보성인이 한국성인이라는 사실에 또 자랑스러웠습니다.

그런데 문제가 있었습니다. 주보성인의 비중이 큰 라틴 아메리카 사람들에게 갓을 쓰고 도포를 입은 주보성인의 모습이 아무래도 이해가 잘 되지 않았던 모양입니다. 설명하기에 바빴습니다. 게다가 “신부님 나라의 성인”이라는 말을 수시로 듣게 되면서 고민하기 시작했습니다. 분명 전 세계 보편 교회 안에서 같은 마음으로 공경 받으셔야 할 성인이신데 말입니다. 그럼 베드로, 바오로, 데레사는 에콰도르 성인 성녀란 말인가? 남미 토착민들은 스페인 식민지 과정에서 가톨릭 신앙을 받아들이지 않았다는 이유로 이루 헤아릴 수 없을 만큼의 피를 흘린 아픔의 민족이었습니다. 이들에게 신앙 때문에 피를 흘린 이들의 삶의 모범을 강조하는 것이 얼마나 큰 모순인가? 하는 갈등을 겪었습니다. 이 땅의 문화와 신앙의 역사, 민족성을 존중하고 신중하게 배려하지 않은 사실 앞에 참으로 부끄러웠습니다. 그저 조용히 묵묵하게 순교하는 마음으로 선교 사목의 길에 매진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수많은 순교자와 성인 성녀를 모시고 있다는 사실이 자랑스럽기보다는, 순교자들의 후예답게 하느님과 세상에 더욱 충실한 이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또 다시 124위 순교자들의 시복시성을 추진하고 있습니다. 진정한 순교자의 후예들이 되었으면 합니다.

마산교구 양태현(그레고리오) 신부
  | 09.22
449 52.4%
십자가의 삶

“나를 따르려는 사람은 누구든지 자기를 버리고 매일 제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한다(루가 9, 23).”

우리 신앙인들은 입만 열었다 하면 십자가 이야기요 귀만 열었다 하면 십자가 이야기를 듣는다.

고해소에서 신자들의 한숨 섞인 고해를 듣노라면 나도 모르게 습관적으로 십자가를 들먹이며 위로 아닌 위로를 늘어놓곤 한다. 그리고는 고해가 끝나기 무섭게 왠지 모를 무거운 마음으로 고해실을 도망치듯 빠져나온다.

말이 쉬워 십자가의 삶이지 정말로 예수님처럼 나의 하루하루를 십자가의 삶으로 살아가기란 쉽지 않다. 솔직히 살아갈수록 편한 자리가 눈에 잘 띄고 쉬운 길이 더 잘 보인다.

이렇게 하면 분명히 편하고 수월한데 왜 저렇게 할까 하는 생각이 들 때가 부지기수요, 일단 내 손에 더 큰떡이 쥐어지면 다른 것은 눈에 들어오지도 않고 입이 벌어져 어쩔줄 모를 때가 많다. 별로 좋지 않은 머리에서 소위 말하는 잔머리만 굴린다.

이런 나의 잔머리가 언제까지나 통할까? 하느님이 언제까지 참아주실까? 하는 생각이 들 때가 많다. 나는 하느님으로부터 많은 기다림을 받으면서도 정작 내 자신은 고해소에 들어올 때마다 반복적으로 자신의 어려움을 호소하는 신자들의 한탄을 잘 참아주지 못하고 짜증스러워했다. 그러고 보면 확실히 나의 공력은 모자라도 한참 모자란다. 이 부족한 공력을 하루 아침에 채울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 하는 조급증이 또다시 스멀스멀 솟아오른다.

김대건 신부님이 붙잡히시어 조정에서 문초를 받으실 때 조정 관리로부터 온갖 회유를 받으셨다고 한다. 빈말이라도 하느님을 버린다고 하면 높은 벼슬과 많은 재물을 주겠노라고 말이다.

어찌보면 그 방법이 전교에는 더 효과적일 수도 있을 것이다. 높은 관직에 오르고 많은 재물을 가지면 전교하기도 더 쉬울 것이다.

그러나 김대건 신부님은 그러한 조정 관리의 제의를 일언지하에 거절하셨다. 하느님을 그 마음에서 버리고 효과적으로 전교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하는 마음에서일 것이다. 차라리 돌아서 천천히 가는 한이 있더라도 하느님을 가슴에 품고 죽는 것이 더 올바른 길이라 생각하셨을 것으로 감히 미루어 짐작해본다.

하느님을 가슴에 품고 살기 위해서 온갖 수고와 불편함을 감수할 수 있는 것이 바로 십자가의 삶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기합 한 번 넣고 새로운 마음으로 용기를 내어 새롭게 살아보자. “이야압! 공력이여 솟아라!”

마산교구 이재영 바실리오 신부
  | 09.22
449 52.4%
순교=신념에 대한 투신(投身)

오늘의 성서 말씀은 모두 현실을 뛰어 넘어 영원한 가치를 추구하는 삶을 말해 주고 있습니다. 지혜서는 의인들의 죽음이 결코 헛되지 않고 하느님 나라에서 그 상급을 받을 것이라는 희망을, 로마서간은 이 세상 어느 것도 어느 누구도 하느님의 사랑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우리를 떼어 놓을 수 없기에 어떤 두려움도 가질 필요가 없음을, 복음은 인간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이 바로 구원과 영원한 삶에 있기에 자기 십자가를 지고 그리스도를 충실히 따를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공경하는 순교 성인들은 바로 이러한 신념속에 부끄러움 없이 자신의 전 삶을 투신해서 살았던 사람들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목숨을 걸면서까지 자신의 신념과 진리를 지켜본 적이 있습니까?

우리는 두렵기 때문에, 혹은 현실적 이익과 욕망 때문에 신앙까지도 때로는 뒷전으로 밀고 있지는 않습니까?

오늘도 우리는 입으로 ‘순교자 믿음 본 받아 충성하리라’고 노래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우리는 작은 유혹에도 흔들리고 게으름에도 흔들리며 세상에 대해 너무 쉽게 신앙이 무너지고 있지는 않습니까?

이러한 우리에게 예수님께서는 나를 따르는데 장애가 되는 이기적인 욕심을 버리고 매일 매일 신앙생활을 하는데서 오는 어려움을 잘 견디어 내라고, 또한 일시적인 목숨을 부지할려고 하다가 영원한 생명을 놓치는 어리석음을 범하지 말라고, 세상 재물을 탐하다가 목숨을 잃어버리는 어리석음을 범하지 말라고, 현재, 지금 신앙의 태도를 어정쩡한 상태로 살다가 훗날 주님으로부터 버림받지 않도록 살라고 당부하고 계신 것입니다.

황병석신부
  | 09.20
449 52.4%
순교=신념에 대한 투신(投身)

오늘은 성 김대건 안드레아와 성 정하상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 대축일입니다. 한국 천주교회는 태동 초기부터 박해로 인해 많은 순교자를 낳게 하였는데 우리에게 알려진 순교자가 있는가 하면, 무명 순교자도 많은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그중에서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는 우리나라 최초의 사제였고, 성 정하상 바오로는 우리나라 최초의 평신도 회장이었다. 이들을 대표로하여 오늘 한국의 모든 순교자들을 현양하는 참으로 기쁜 날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오늘의 성서 말씀은 모두 현실을 뛰어 넘는 영원한 가치를 추구하는 삶을 말해 주고 있습니다. 제 1독서, 지혜서는 의인들의 죽음이 결코 헛되지 않고 하느님 나라에서 그 상급을 받을 것이라는 희망을, 제2독서 로마서간은 이 세상 어느 것도 어느 누구도 하느님의 사랑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우리를 떼어 놓을 수 없기에 어떤 두려움도 가질 필요가 없음을, 복음은 인간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이 바로 구원과 영원한 삶에 있기에 자기 십자가를 지고 그리스도를 충실히 따를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공경하는 순교 성인들은 바로 이러한 신앙으로 부끄러움과 두려움 없이 자신의 전 삶을 투신해서 살았던 사람들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목숨을 걸면서까지 신앙의 신념과 진리를 지켜려 해본 적이 있습니까? 우리는 두렵기 때문에, 혹은 현실적 이익과 욕망 때문에 신앙까지도 때로는 뒷전으로 밀고 있지는 않습니까?

오늘도 우리는 입으로 ‘순교자 믿음 본받아 충성하리라’고 노래하고 있지만 우리는 작은 유혹에도 흔들리고 게으름에도 흔들리며 세상에 대해 너무 쉽게 신앙이 무너지고 있지는 않습니까?

이러한 우리에게 예수님께서는 나를 따르는데 장애가 되는 이기적인 욕심을 버리고 매일 매일 신앙생활을 하는데서 오는 어려움을 잘 견디어 내라고, 또한 일시적인 목숨을 부지할려고 하다가 영원한 생명을 놓치는 어리석음을 범하지 말라고, 세상 재물을 탐하다가 목숨을 잃어버리는 어리석음을 범하지 말라고, 현재, 지금 신앙의 태도를 어정쩡한 상태로 살다가 훗날 주님으로부터 버림받지 않도록 살라고 당부하고 계신 것입니다.

무엇이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갈라놓을 수 있겠습니까? 여행입니까? 스포츠입니까? 낚시입니까? 가난입니까? 장사입니까? 결혼입니까? 돈입니까? 그러나 우리는 우리를 사랑해 주신 분의 도움에 힘입어 이 모든 것을 이겨내고도 남습니다.

나는 확신합니다. 죽음도, 삶도, 여행도, 스포츠도, 낚시도, 가난도, 장사도, 결혼도, 돈도, 그 밖의 어떠한 피조물도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님에게서 드러난 하느님의 사랑에서 우리를 떼어 놓을 수 없습니다

황병석 파스칼 신부
  | 09.18
449 52.4%
자신을 죽임으로써 얻는 영원한 생명과 기쁨

한국 천주교회는 외국선교사의 직접적인 도움을 받지 않고 스스로의 노력에 의해 자발적으로 세워진 교회입니다. 우리 신앙의 선조들은 진리를 향한 열정으로 학문적인 차원에서 교리를 받아들이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속에서 신앙의 가치를 발견하고 그 가르침을 몸소 실천하며 살았습니다. 하지만 그 당시의 정치․사회적 상황이 교회의 가르침과 달랐기에 박해를 받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신앙의 선조들은 신앙의 진리를 실천하며 지켰기에 오늘날의 우리가 이 자리에 있을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오늘날의 우리는 신앙을 가지는데 있어서 박해의 시련은 없습니다. 하지만 신앙인으로 살아감에 있어서는 많은 시련이 있을 것입니다. 물질만능주의와 무한 경쟁의 시대에서 다른 이들을 밟고 일어서야 대접을 받는 것이라 생각하는 많은 사람들 속에서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더러는 자신의 이익을 위하여 나보다 약하고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의 입을 막고 그들의 손발을 묶어 꼼짝 못하게 할 때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행위는 도리어 자신을 끌어내리고 죽음에 이르는 길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정녕 자기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나 때문에 자기 목숨을 잃는 그 사람은 목숨을 구할 것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과거 우리 신앙의 선조들이 신앙을 지키기 위하여 목숨을 바쳤다면 오늘날 우리들은 신앙을 지키기 위하여 세속적인 부와 권력과 명예를 추구하는 자신의 욕망과 집착으로부터 자신을 죽여야만 합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영원한 생명에 대한 희망을 가집니다. 이 때문에 우리는 고난을 견디어 낼 수 있는 힘을 얻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자신을 버리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갈 수 있는 것은 영원한 생명에 대한 희망 때문만은 아닐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마태오 복음 11장에서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 그러면 너희가 안식을 얻을 것이다. 정녕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하고 말씀하십니다.

우리 신앙의 선조들은 신앙의 진리를 실천하는 가운데서 기쁨을 누렸을 것입니다. 육신의 삶은 고통스러울지라도 영원한 생명에 대한 희망과 더불어 하느님의 뜻을 따름에서 오는 진정한 자유와 평화를 누렸을 것입니다.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며 살아가는 가운데에서 오는 고통, 즉 십자가를 짊어진 삶이 단순히 고통이 아니라 기쁘고 편한 멍에이기에 기꺼이 예수님의 뒤를 따라갈 수 있었을 것입니다.

우리도 선조들의 삶을 기억하며 모든 이들 앞에서 나 자신을 죽임으로써 하느님께 대한 믿음을 증거하며 기쁨을 느끼는 삶을 살아갔으면 합니다.

신재욱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신부
  | 09.16
449 52.4%
이번주 우리는 이 땅에서 우리보다 먼저 하느님을 알고 하느님의 말씀을 따르다 순교한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와 성 정하상 바오로와 동료순교자들의 대축일을 지내고 있습니다.

순교자 대축일을 지내며 무엇이 이 분들로 하여금 순교까지 마다하지 않고 받아들였을까를 묵상해봅니다. 무엇보다도 순교자들은 하느님께 대한 철저한 신앙을 가지신 분들이었습니다.

“전능하신 천주 성부 천주의 창조주와 그 외아들 예수그리스도와, 성령과 교회와....
영원한 삶”을 온 몸과 마음으로 믿었던 분들이었습니다.

이러한 굳센 믿음을 바탕으로 하느님과 영원한 것을 꿈꾸던 분들이었습니다. 믿음을 바탕으로 영원한 것을 꿈꾸던 그들이었기에 ‘환난도, 역경도, 박해도, 굶주림도, 위험도, 칼도 그들을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갈라놓을 수 없었습니다. (로마 8,35)

이러한 순교자들의 신앙이 우리에게도 전파되었습니다. 순교자들이 하느님과 영원한 것을 꿈꾸던 사람들이었기에 우리 역시 하느님과 영원한 것을 꿈꾸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단언할 수는 없지만 오늘날 많은 신앙인들이 순교자들처럼 하느님과 영원한 것을 꿈꾸는 것이 아니라 사라지고 말 세상을 꿈꾸고 있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더 많은 재물을 소유하고, 더 높은 지위를 바라고, 더 많은 즐거움을 목표로 살아가고 있지는 않은가 생각하게 됩니다.

이 세상을 꿈꾸는 사람들에게는 순교자적인 삶은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이들에게는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신앙인을 갈라놓을 수 있는 요소가 너무나 많습니다. 환난이 닥쳐와도 역경이 닥쳐와도 박해가 다가와도 굶주림이나 헐벗음, 위험이나 칼, (로마 8,35) 형제들 간에 작은 갈등마저도 그리스도와 교회로부터 이들을 갈라놓을 수 있습니다.

이제 우리가 하느님으로부터 부여받은 신앙의 의미를 묵상해보고 새롭게 시작해 보면 좋겠습니다. 참으로 큰 기쁨과 희망을 가지면서 살아갈 수 있도록 순교자들처럼 하느님을 꿈꾸고 영원한 것을 꿈꾸는 사람으로 변화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사람들이 보기에 의인들이 벌을 받는 것 같지만 그들은 불사의 희망으로 가득차 있다.(지혜 3,4)는 성경말씀처럼 순교자들의 후손인 우리들도 영원한 것을 꿈꾸는 사람, 불사의 희망으로 가득 찬 신앙인으로 살다가 마침내 순교자들과 함께 하느님 안에서 영원한 행복을 누리는 사림들이 되기를 희망해봅니다.

마산교구 장민현 신부
  | 09.27
449 52.4%
목숨 바쳐 남긴 가치

한국의 103위 순교성인에 이어 순교자 124위를 교황님께서 방한하시어 복자로 선포하셨습니다. 그분들은 나라에 의해 죽을 죄인으로 처단된 이들입니다. 교황님 방한과 시복을 천주교회만이 아니라 정부와 온 나라가 환영하였습니다.

이는 이제 그분들이 목숨 바쳐 지킨 가치가 복된 것임을 이 사회가 인정하고 받아들인 것입니다. 그 가치가 무엇입니까? 인간존엄성과 평등과 자유 그리고 하느님에 대한 믿음과 영생에 대한 희망과 사랑입니다. 이는 기존의 전통 가치와 질서에 위배되는 것이고, 위정자에게는 위험으로 여겨졌습니다.

선조들은 신앙인이 되면서 노비들을 해방하고 천민 등신분이 다른 이들을 형제로 대했습니다. 신앙이 머릿속에만 머물지 않고 발견한 진리를 충심을 다해 실천하며 신앙을 육화하였습니다. 박해를 피해 모든 것을 잃고 모여든
교우들은 신앙공동체를 이루어 곤궁 속에서도 고난을 이겨냈습니다.

극심한 흉년에 세상 사람들은 굶주림에 허덕여도 교우촌은 콩 한 쪽도 나누며 모두가 끼니를 거르지 않았다고 합니다. 아침저녁에 함께 기도하고 같이 생업에 종사하며 돕고 격려하며 사는 모습은 평화와 행복이었습니다. 이런 사랑 체험은 큰 기쁨이었고 이렇게 ‘좋은 신앙’과 ‘아름다운 공동체’를 전하지 않고는 배길 수 없었습니다. 교리서 없고 글도 모르던 시절에 기도문과 교리 내용,순교자들 이야기를 외워서 자녀와 이웃에게 전했습니다.

순교자의 후손인 형제 여러분,
우리의 순교 조상들이 꿈꾸었던 그 아름다운 공동체와 사람이 사람답게 사는 세상을 오늘날 어떻게 이룰 수 있습니까? 우리나라는 자살률 세계 1위를 기록하고 세월호참사 등 대형 인명 사고가 끊이지 않습니다. 사회에 만연한 물질주의와 현세적 가치관이 초래한 죽음의 문화가 자초한 것입니다. 이 사회를 살리기 위해 우리는 무엇을 할것입니까? 조상님들은 묻고 계십니다. 아멘.

<마산교구 강윤철 요한 보스코 신부>
  | 09.20
449 52.4%
[마산] 순교자의 삶, 사랑 안에서의 삶

찬미예수님.
오늘은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와 성 정하상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들 대축일입니다. 또한 우리는 지금 순교자 성월을 보내고 있습니다. 우리 신앙인들이 순교자 성월과 더불어 순교자들의 축일을 기억하며 지낸다는 것은 순교자들의 삶을 이제는 우리들의 삶으로 받아들이면서 살아가겠다는 다짐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알고 있듯이 오늘 우리가 기념하는 순교자들은 박해라는 어려움 속에서 신앙을 지켜오셨습니다. 박해 속에서 신앙을 지켜 오셨다는 것은 자신의 온 삶을 하느님께 온전히 맡기고 살아가셨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순교자들은 내일 아니 오늘 어떠한 일이 다가올지 모르는 불안함 속에서 의지할 곳은 하느님밖에는 없으셨습니다. 그리고 생명을 잃을 수 있는 순간에도 오로지 하느님께 의지하고 하느님께 모든 것을 맡겨드렸습니다. 순교자들이 하느님께 오로지 의지할 수 있었던 이유 중 하나는 하느님께서 순교자들에게 베풀어 주신 사랑을 온전히 느끼고 받아들였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느님께서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해 우리에게 베풀어 주신 사랑을 순교자들은 자신들의 십자가로 표현하셨습니다.

우리들도 이제는 순교자들처럼 하느님의 사랑을 온전히 받아들이고, 우리들의 십자가로 하느님께 사랑을 표현해야만 합니다. 지금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세상은 순교자들이 사셨던 것처럼 어려움이 없는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여전히 우리의 주변에는 우리를 하느님의 사랑으로부터 멀어지게 하는 일들이 많이 있습니다.

우리는 순교자들이 사셨던 것처럼 하느님의 사랑 안에서 하느님께 의지하며 살아가야만 합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주어진 십자가를 가지고 우리가 걸어가야만 하는 길을 걸어가야만 합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십자가를 충실히 지고 걸어갈 때 십자가에는 어려움과 괴로움이 있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은총이 가득 차 있음을 깨닫게 됩니다. 또한 지금 이 세상에서 내가 하느님께 받은 사랑을 우리 주변의 다른 사람에게,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에 끊임없이 전달할 수 있게 됩니다.

오늘 우리가 기념하는 우리나라 순교자들의 삶을 기억하며 그분들의 삶이 우리들의 삶이 될 수 있도록 노력해나갔으면 좋겠습니다.

▮ 마산교구 이동진 안셀모 신부 : 2016년 9월 18일
  | 09.16
449 52.4%
[마산] “나를 따라야 한다”(루카 9,23)

오늘 우리는 이 땅의 순교자들을 기억하고 기념합니다. 먼저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와 정하상 바오로를 포함한 103위 순교 성인들을 기억합니다. 그리고 우리 교구 순교 복자 다섯 분과 119위의 순교 복자를 기억합니다. 그밖에 이름 없는 수많은 순교자들을 기억합니다. 이분들은 자신들이 믿는 하느님 신앙을 죽음으로 증거 하였습니다.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신 예수 그리스도를 죽음으로 따랐습니다. 이분들의 신앙이 지금 우리의 신앙입니다.

순교는 말과 행동으로 하느님 신앙을 세상에 증거 하는 것입니다. 그냥 그렇게 적당히 한번 해 보는 것이 아니라, 죽기를 각오해야 하는 것입니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힘을 다하고 정신을 다하여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한다는 것”(루카 10,27)을 드러내 보이는 것입니다. 그렇게 순교자들은 죽음보다 더 강한 사랑을 드러내 보여주신 분들입니다. 자신들의 소중한 신앙을 세상 그 어떤 것과도 바꿀 수 없었습니다. 죽음도 그분들의 신앙을 굴복시킬 수 없었습니다.

우리가 오늘 기억하고 기념하는 순교자들은 그리스도인들입니다. 우리 역시 그리스도인들입니다. 그리스도인이란 “나를 따라야 한다.”(23절)라는 예수님의 말씀대로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 그리스도를 입고 사는 사람, 그리스도께 속한 사람에게 붙여진 이름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앞으로 일어날 일을 두고 제자들에게 처음으로 예고하시면서 당신을 따르라고 말씀하십니다. 통상 처음 하는 말이나 처음 듣게 되는 말은 알아듣거나 말거나 참으로 중요하고, 그래서 진지하게 받아들여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앞으로 당하실 일은 그분을 따르는 사람들도 앞으로 겪게 될 일이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당신을 따르는 사람들에게 처음 들려주신 말씀은 신앙의 삶에 있어서 기본이 되고 원칙이 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기본과 원칙을 “자신을 버리는 것”과 “제 십자가를 지는 것”(23절)이라고 분명하게 제시하십니다. “자신을 버리는 것”은 자신보다 하느님 중심의 삶을 사는 것, 곧 자신보다 하느님을 더 사랑하라는 가르침입니다. 그리고 “자기에게 주어진 십자가를 지는 것”은 삶의 멍에와 짐을 남에게 지우지 않고 기꺼이 받아들이는 것, 곧 자신보다 이웃을 더 사랑하라는 가르침입니다.

오늘 우리가 기억하고 기념하는 이 땅의 순교자들은 예수님의 이 가르침을 그대로 받아들여 마음과 목숨과 힘과 정신을 다하여 실천한 참다운 그리스도인들이었습니다. 우리 역시 순교자들의 신앙의 모범을 이어받아, 주님께서 “부끄럽게 여기지 않은”(26절) 그리스도인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 마산교구 차광호 파스칼 신부 - 2017년 9월 17일
  | 09.15
449 52.4%
[마산] 진정한 크리스천Christian

성인 중 한 분으로서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Johannes Chrisostomus 344∼407) 주교는 로마 황제가 그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포기하라고 명했으나, 그는 세상 모든 것은 포기할 수 있으되 예수 그리스도만은 포기할 수 없다고 답하며 맞대응하였다.

결국 로마 황제는 그를 체포하여 감옥에 가두되 누구와도 대화하지 못하도록 고독한 개인 감방에 처넣으라고 했다.

그러자 신하 하나가 황제에게 “폐하, 그는 크리스천입니다.”라고 말했다.

황제는 “크리스천이면 별다른 사람이냐? 빨리 집어넣어라.”라고 호통을 쳤다.

신하는 “폐하,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은 혼자 있는 것을 좋아합니다. 그 사람을 혼자 감옥에 가두어 놓으면, 하루 종일 싱글벙글하며 기도를 하느라고 중얼거립니다. 그러니 혼자 감방에 넣으면 그를 위하여 좋은 일을 하는 셈입니다.”라고 말했다.

화가 난 황제는 “그러면 극악무도한 죄인들이 있는 감옥에 집어넣으라.”라고 명령을 했다.

신하는 다시 고개를 들어 황제에게 말하기를, “황제 폐하, 그것은 더더욱 안됩니다. 그 사람은 오히려 전교할 기회를 얻었다고 매우 기뻐할 것입니다. 크리스천에게는 이상한 힘이 있어 극악무도한 죄인도 변화를 시키며, 그리하여 죽이려고 하던 크리스천을 다시 살게 하도록 상을 내린 적도 있었습니다.”라고 하였다.

황제가 “그렇다면 그놈을 잡아다 당장 목을 쳐 죽여라. 내가 감방에 넣어 고생을 시키다 죽이려고 했더니 안 되겠구나, 지금 당장 그를 죽여라.”라고 명령하자, 엎드려 있던 신하는 다시 고개를 들며, “황제 폐하, 그토록 모르십니까? 크리스천들은 제일 좋은 상급을 순교라고 생각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크리스천들은 목 베임을 당하러 나올 때, 우는 사람은커녕 오히려 얼굴에 광채를 띠고 기뻐합니다.”라고 말하였다.

그러자 황제는 “그렇다면 저 크리스천 놈을 어떻게 해야 좋단 말이냐?”라며 탄식을 했다고 한다.

현대의 우리 신앙인 크리스천을 세상 사람들은 무엇이라 평가할까요?

기도도 하지 않고, 전교도 하지 않고, 순교(희생)도 하지 않는 현대의 신앙인들. 개인의 자유와 휴식을 중요시하며 신앙 공동체보다 자신을 중시하는 교회의 모습들 속에서 우리에게 신앙을 물려준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와 성 정하상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들을 떠올리면 오늘 주님의 말씀처럼 자신을 버리고 날마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라야 할 것입니다.

크리스천이란 세상의 모든 것, 심지어 자기 목숨까지도 포기할 수 있으되, 예수 그리스도만은 포기할 수 없는 자이며, 어떠한 상황이 닥치더라도 끝까지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며, 죽음을 향하여 담대하게 전진하는 자입니다.

순교자의 달, 나는 크리스천으로서 주님을 용기 있게 증거하며 살아가고 있는지 생각하게 합니다.

▦ 마산교구 최태식 필립보 신부 : 2018년 9월 23일
  | 09.21
파란색 글자 빨간색 글자 녹색 글자 밑줄 글자 진한 글자 빨간색 테이블 파란색 테이블 녹색 테이블
이름 :   
암호 :
· d41d8cd98f * 왼쪽의 글자중 빨간글자만 순서대로 입력하세요.
 목록보기 스크랩하기  프린터하기
508   [청주] 행복에로의 초대  [1] 357
507   [안동] “예수님께 기도드리면 빨리 나을 거예요.”  [2] 634
506   [원주] 전교는 우리의 마음에서  [3] 351
505   [수원] 선교는 신자들의 진정한 생활의 표양이다.  [7] 1970
504   [서울] 선교는 말과 행동으로 함께 해야 합니다.  [5] 2082
503   [대구] 전교와 신앙인의 삶  [5] 2035
502   [의정부] 불리움에서 파견으로  [5] 2014
501   [수도회] 세상 끝까지 퍼져나가야할 복음  [5] 1719
500   [마산] 신앙보다 더 좋은 선물은 없다  [7] 2193
499   [부산] 그리스도 신앙인은 하늘과 땅을 새롭게 이해합니다.  [9] 2181
498   [군종] 내 삶이 내 메세지  [2] 360
497   [인천] 선교방법은 두 가지  [8] 2186
496   [전주] 믿는 것을 삶으로 증거하자.  [2] 1918
495   [춘천] 전교는 왜 해야 하는 것일까요?  [7] 2252
494   [광주] 우표붙이기  [2] 390
493   [대전] 복음화로 세상에 희망을  [4] 861
492   (녹) 민족들의 복음화를 위한 미사 (전교주일) 독서와 복음  [5] 1925
491   (백) 수호천사 기념일 독서와 복음 (10월 2일)  [1] 12
490   [부산/마산/광주] 한 어린아이의 작은 길  [6] 2671
489   [수도회] 어디사세요  [7] 2227
1 [2][3][4][5][6][7][8][9][10]..[26]  다음
 

 

대축일/명절강론 코너 ( 대축일/명절 미사에 관련된 강론자료입니다... )

 관리자 Profile  l  홈페이지이용안내  l  즐겨찾기추가  l  추천사이트  l  가톨릭검색사이트  l  관리자 E-mail

Copyright ⓒ 2003 - 2005 www.ocatholic.com All rights reserved.   Ver 4.01_0502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