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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마산] 거룩한 성전
조회수 | 2,204
작성일 | 08.11.07
신축중인 성당에서 본당 사목을 처음으로 시작하였는데, 모든 것이 낯설고 힘들 수밖에 없었습니다. 더구나 신자 수도 작고 본당 재정도 빈약했기에 건축비 때문에 많은 고민을 해야 했습니다. 성전 지붕을 값비싼 재질인 동판으로 해야 하느냐는 문제로 몇 달을 성전 건축위원회에서 씨름을 해야 했고 성전바닥을 값싸고 튼튼한 재질을 찾느라고 한 달 이상 백화점과 호텔 건물 바닥만 보고 다녀야했습니다. 4년 간의 우여곡절 끝에 성전 공사를 마무리했고 그즈음에 주교님께서 이탈리아로 피정을 다녀오라고 했습니다. 성전 공사를 막 끝내고 온지라 제 눈에는 로마에 있는 성당 건물만 눈에 들어왔습니다. 피렌체의 어느 성당에 갔을 때 제 눈을 의심했는데 성전 내부가 온통 금으로 장식되어 있고 성전 바닥은 마치 화가가 붓으로 그려 놓은 듯이 그 비싼 대리석으로 장식해 놓은 것이 아닙니까? 그 화려함과  웅장함에 성전 바닥에 발을 딛고 서 있기가 부담스러울 정도였습니다.

신학자 본회퍼가 다음과 같은 심오한 말을 남겼습니다. "오로지 고통 받는 하느님만이 봉사하는 하느님만이 우리를 도와주실 수 있다"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세상을 살아가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닐 것입니다. 이러한 삶의 비참함 속에서 인간은 자신의 부족함과 욕망의 실천을 보장해 줄만한 하느님을 만들어내려 노력했습니다. 인간은 자신이 가난하기에 부요한 하느님을 상상했고, 부요한 성전을 건축했었고, 인간이 빈약했기 때문에 강한 하느님을 모시려했고 웅장한 성전건축에 매달렸습니다. 인간의 변덕스럽고 의존적인 모습과 달리 하느님은 언제나 홀로 자립적이고 변하지 않는 강인한 하느님이어야 했기에 백 년, 천 년 가도 허물어지지 않는 하느님의 거처가 필요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성경에 나타난 그리스도교적 계시는 겸손하고 온화한 하느님, 가난하고 상처받은 하느님, 자비로운 하느님의 계시를 통해 우리 인간을 해방시키고 구원하려 하신 구세주였습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예수님께서 탐욕과 사심으로 가득 찬 유다인들을 채찍으로 내려치시며 유다인들이 마흔 여섯 해나 걸려 지은 웅장하고 화려한 성전을 허물라고, 인간의 왜곡된 생각을 버리라고 하십니다. 당신께서 우리의 깨끗한 손을 빌려 손수 하느님의 집을 지어 만들라고 하십니다. 사도 바오로도 에페소서에서 참된 성전에 대해서 한 말씀하십니다. "여러분들은 사도들과 예언자들의 기초 위에 세워진 건물이고 그리스도 예수님께서는 바로 모퉁이돌이십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전체가 잘 결합된 이 건물이 주님 안에서 거룩한 성전으로 자라납니다. 여러분도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을 통하여 하느님의 거처로 함께 지어지고 있습니다.

이윤벽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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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의 양식이 되고 약이 되고

우리는 하늘과 땅의 주인이신 예수님을 내 안에 모시고 살아가는 하느님의 성전입니다. 내 안에 오신 예수님께서 지금 무슨 일을 하고 계십니까? 전혀 죄를 모르시는 그분께서 오신 자리에 낯설기만한 ‘죄악’이 떡하니 버티고 있다면 예수님이 편치 못하실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우리는 ‘나를 허물고 다시 세워달라’고 청해야 합니다. 메마른 벌판 같은 내 영혼을 찾아주신 예수님께서 사해와 같이 죽어 있는 나를 살리실 것입니다. 치유의 대가이신 그분께 나를 맡겨드리는 오늘이면 정말 좋겠습니다. 이것은 설령 지금의 내 모습이 초라할지라도, 하느님의 몫에 미치지 못할지라도, 그의 발치에 앉기에 부끄러운 것밖에 없을지라도 가장 우선적으로 주님을 부르고 청해야 하는 까닭입니다.

하느님 집에 대한 열정으로 내 안에 오셔서 불결한 모든 것을 쏟아 내버리고 엎어 내버리고 몰아내주십니다. 믿음으로 그분의 이름을 부르는 데에는 우리 예수님도 꼼짝 못하십니다. 지금 이 시간, 내 삶의 두려움과 걱정 근심을 치유하시는 그분을 느껴보십시오. “이것들을 여기서 치워라” 하시며 내 상처를 당신의 피와 살로 새롭게 채우시는 그분의 사랑에 젖어드십시오. 그리고 우리에게는 이미 세상에 양식이 되고, 약이 되는 힘까지 주어져 있다는 사실도 기억하십시오. 세상의 상처를 예수님처럼 낫게 할 수 있는 우리들이 맨날 맨날 예수님을 불러서 청소만 시킨다면 하느님 자녀로서의 체면이 말이 아니라는 사실도 꼭 기억해주십시오.

장재봉 신부
  | 1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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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교회 신자들은 예루살렘과 팔레스티나에서 일어난 박해를 피하여 뿔뿔이 흩어지게 되었고 더러는 로마에도 자리잡게 된다. 로마 제국에서는 250여년 동안 박해가 계속되다 313년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밀라노 칙령에 의해 그리스도교는 종교의 자유를 누리게 되었다.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324년 라테라노 대성전을 세웠다. 이 성전은 처음에는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궁전이었으나 그는 ‘구세주 대성전’이라는 이름으로 교황이 교회 업무를 볼 수 있도록 헌정하였다. 그러나 이 성전은 지진으로 파괴되었고 세르지오 3세 교황이 그 자리에 ‘성 요한 라테라노 대성전’이라는 이름으로 세례자 요한에게 다시 봉헌하였다. 이후 이 성전은 로마 교구의 주교요, 전세계 교회의 수장인 교황이 머무는 교황좌 성당의 역할을 하게 되었다. 그래서 라테라노 대성전 입구에는 라틴어로 ‘Omnium Ecclesiarum Urbis et Orbis Mater et Caput’, 곧 ‘로마와 전세계 모든 교회의 어머니이며 머리’라는 글귀가 새겨져 있다.

그런데 우리가 오늘 저 멀리 로마에 있고, 보지도 못한 이 성당을 기념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이 성당이 성 베드로좌의 권위를 상징할 뿐 아니라 세상의 모든 대성당의 모델이 되고 사랑의 공동체를 이끄는 베드로좌에 대한 존경과 일치의 표지를 드러내기 때문이다. 마치 각 교구의 주교좌 성당이 그 교구 중심이 되는 것처럼 라테라노 대성전은 전세계 가톨릭 교회의 성전 중심에 있는 성전이다. 그러나 단순히 한 성당 건물을 기억하는 것에서 그 의미를 찾는 것이 아니라 성전이 우리에게 의미하는 바를 새기는 데 더 깊은 의미가 있다 하겠다.

성전은 예수님이 머무시는 곳이다. 그곳에서 예수님 말씀이 선포되고, 그분 삶이 재현된다. 그리고 매일 봉헌되는 미사를 통해 예수님을 모시고 그분을 기억하는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다 성전이 된다. 그러나 아무리 많은 사람들이 성전에 모인다 할지라도 거기에 예수님의 말씀과 삶이 자리잡지 않는다면 그곳은 교회가 아니라 단순한 집단에 지나지 않는다.

많은 사람들이 교회를 비판한다. 그리고 교회에 대해 실망하며 떠나가고 냉담하기도 한다. 그러나 교회를 비판하는 바로 그 사람이 바로 교회이다. 성체를 받아 모시는 우리 각자는 세상 앞에 하느님이 거처하시고 현존하시는 성전이며 감실이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모두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대변자이다.

하느님의 자녀들인 우리는 성령을 모시는 또 다른 성전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몸을 하느님을 모시는 성전으로 가꾸고 보존해야 한다. 우리 자신인 성전이 거룩할 때 교회 공동체도 하느님의 성전으로 변화된다. 우리는 이 성전에 생명을 심을 수도 있고 멸망을 심을 수도 있다. 주님을 모시는 우리는 그분을 따라 부활하는 거룩한 성전이 될 수 있도록 잘 가꾸고 보존하도록 하자.

오창일 신부
  | 1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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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복음을 통해 예수님을 흔히 개혁가로 시대의 반항아로 바라보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예수님의 삶을 온전히 바라보지 못했을 때 생기는 억측들입니다. ‘유다인들의 파스카 축제가 가까워지자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에 올라가셨다(Jn 2, 13).’의 말씀처럼 예수님께서는 그 당시의 상황에 무조건적인 반대한 것이 아니라 그 상황에 적극적으로 동참하신 분이십니다. 유다인들의 파스카 축제에 동참하기 위하여 예루살렘으로 향하셨지만, 그곳 성전에서 행해지는 갖가지 추잡스런 행위에 분노하신 것입니다.

성전의 사전적 의미를 굳이 떠올리지 않더라도 성전은 거룩한 곳이라는 개념이 이미 사람들의 인식이 갖추어져 있음에도 불구하고 성전을 거룩한 곳이 아니라 성전을 등에 업고 상행위로 혼란스럽게 만든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이해될 수 없지만 이미 그러한 행위가 통용되고 자리 잡음에 대해 예수님께서는 분노하신 것입니다.

이러한 상황은 오늘날에도 이어져오고 있습니다. 성당을 주님께 대한 신앙심으로 열심히 다니는 사람이 대부분이겠지만, 성당을 자신의 처세에 관련하여 성당을 이용하려는 이들도 존재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사람은 주님의 존재보다 자신의 존재를 더 크게 바라보고 자신의 안위만을 생각하는 지극히 이기적인 사람이라는 것에 애청자 여러분들도 공감할 것입니다. 하지만 교회는 이러한 사람을 내치기 보다는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보여주신 그 사랑으로 안으려 노력합니다. 그러하기에 교회를 죄인들의 공동체라고 표현하기도 하며 죄가 많은 곳에 은총이 더욱 풍성하다는 말씀을 성경에서 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예수님의 소위 성전 정화사건을 바라 보면서 무엇을 발견해야 하겠습니까?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고자 하시는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바로 외적 행위보다 내적 자세가 중요함을 알려주시고 계시는 것입니다. 성전에서 우리가 바쳐야 하는 제물의 수와 종류 그 외적인 것이 아니라 주님을 바라보며 주님께 우리의 몸과 마음을 오롯이 되돌려 드리는 것이 중요함을 피력하시는 것입니다.

오늘날 성전을 ‘이곳은 기도하는 곳입니다’라고만 말을 한다면 그 말을 하는 사람에게 ‘저 사람은 뭘 모르는구만’하고 응대하실 분들이 대부분일 것입니다. 하지만 성전. 이 성전을 앞서 언급한 것처럼 예수님께서는 우리와 다른 관점에서 보셨고, 다른 방식으로 이해하셨습니다. 그분께서는 ‘성전은 내 아버지의 집이다.’라고 말씀 하십니다. 그러자 그 자리의 사람들은 ‘당신이 이런 일을 하다니 무슨 표징을 우리에게 보여주겠소?’라고 반문합니다. 그 자리의 사람들이 바로 우리들의 모습이 아니겠습니까? 이러한 우리들의 모습에 예수님께서는 ‘이 성전을 허물어라. 내가 사흘 안에 다시 세우겠다.’라고 대답하십니다. 바로 여기에서 우리는 또 하나 발견할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 살고 계시고, 예배를 받으시고, 당신의 영광이 드러나는 ‘아버지의 집’이 바로 성전이고 그 성전이 곧 예수님 자신이라는 것을 발견할 수 있는 것입니다.

또한 코린토 전서 6장 19절의 말씀처럼 사람의 몸은 성령께서 계시는 성전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고 내 이웃의 모든 사람을 주님 모시듯 함께 사랑하며 살아가는 자세가 바로 예수님의 성전 정화 사건의 핵심이라는 것을 잊지말아야 겠습니다.

이상윤 신부
  | 1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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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 없는 성전은 건물이다.

오늘 전세계 가톨릭교회는 라테라노 대성전 봉헌 축일을 기념한다. 라테라노 대성전은 324년 로마제국의 콘스탄티누스(274-337) 황제가 세웠고, 실베스터 1세 교황이 축성하여 로마의 주교인 교황의 주교좌성당으로 삼았다. 대성전에 인접한 라테라노 궁전에 4세기부터 14세기까지 역대 교황들이 거주하였다. 라테라노 대성전은 그 후 "전세계 모든 교회의 어머니요 머리" 라는 명칭으로 베드로좌에 대한 전세계 교회의 존경과 일치의 표징적 역할을 수행하였다. 12세기부터는 세례자 요한의 대성전으로 불리기도 했다. 그 후 수세기를 걸쳐 화재, 지진, 약탈로 말미암아 훼손된 부분을 복구하였고, 1726년 베네딕토 13세 교황이 대대적으로 증축하여 "가장 거룩한 구세주 예수"께 성전을 봉헌하고, 11월 9일을 봉헌축일로 확정하였다. 오늘날 교황은 성목요일 주님 만찬미사를 이곳 대성전에서 집전한다.

라테라노 대성전은 예루살렘 성전에 뒤지지 않을 만큼 웅장한 성전이다. 우리고 오늘 라테라노 대성전 봉헌 축일을 지낸다고 해서 대성전의 건축물을 놓고 기념하거나 축하하는 것은 아니다. 오늘은 로마의 주교인 교황의 주교좌성당을 중심으로 전세계 가톨릭 교회의 믿음과 사랑의 일치를 기원하고 기념하는 축일이다. 오늘은 곧 하느님의 백성이며, 그리스도 신비체요, 신앙의 공동체인 교회의 축일인 셈이다. 이 축일에 우리는 예수님의 예루살렘성전 정화에 관한 복음을 듣게된다.

예수님의 예루살렘성전 정화는 네 복음서 모두가 전하고 있는 사건이다. 그런데 공관복음서들이 이를 예수님의 공생활 말기에 있었던 사건으로 전하고 있는 데 비해, 요한복음은 예수님의 공생활 시작에 두고 있다는 점이 흥미롭다. 예수님의 성전정화사건이 정확히 어느 시점에서 발생했던 간에 그 내용은 같다. 요한복음사가는 이 사건을 예수님의 공생활 서두에 둠으로써 성전정화의 의미가 공생활 시작과 큰 관련이 있음을 암시한다.

예수께서 의로(義怒)와 열정으로 정화하시는 예루살렘성전은 이스라엘의 종교와 삶의 모든 것이었다. 그 안에 계약의 궤가 모셔져 있었고 이는 야훼 하느님의 현존과 그들의 선민(選民)과 구원을 상징하였다. 그러나 성전의 참된 상징은 장사꾼들의 지나친 상혼(商魂)에 가려있었고, 그 뒤엔 제사장들의 권력과의 결탁이 있었으리라. 이제 이스라엘만이 아니라 전 인류의 구원을 위한 사역(使役)의 시작에서 예수님은 빗자루를 손에 들었다. 이는 유다교를 말끔히 청소하기 위함이다. 구약(舊約)을 폐기하고 신약(新約)을 세우시기 위함이다. 무슨 권한으로 정화행위를 하느냐(18절)는 유다인들의 비난에 맞서, 예수님 스스로가 "새로운 성전"임을 암시한다. 예수께서는 이 성전을 세우시기 위하여 이제 공생활을 시작하시는 것이다. 죽음과 부활을 통하여 예수님 스스로가 새로운 성전이 되신다는 것은 유다인들은 물론이고, 제자들까지도 나중에 가서야 알게된다.

신약의 참된 성전은 사람의 손으로 지어 바치는 건물이 아니라 바로 예수님의 몸이다. 신약의 성전이 또 하나 있으니, 그것은 바로 성체성사를 통하여 예수님의 몸을 받아 모시는 우리 자신들의 몸이다. 물론 신앙의 공동체가 하느님을 찬미하고 기도하며 성체성사를 거행하기 위하여 함께 모이는 성당 또한 하느님의 성전이다. 성전은 인간이 하느님을 만나는 곳이요, 하느님의 자비와 용서와 사랑을 체험하고, 우리 가운데 있는 하느님의 나라를 체험하는 곳이다. 성전은 무엇보다 기도하는 곳이다. 기도가 없는 성당은 성전이기보다 하나의 건물이 되고 만다.

박상대 신부
  | 1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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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 아름다운 성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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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께서는 ‘이 성전을 허물어라. 내가 사흘 안에 다시 세우겠다.’ 하고 대답하셨다. 그런데 예수께서 성전이라 하신 것은 당신의 몸을 두고 하신 말씀이었다.

사도 바울로는 이렇게 말합니다. “여러분은 자신이 하느님의 성전이며 하느님의 성령께서 자기 안에 살아 계시다는 것을 모르십니까? 만일 누구든지 하느님의 성전을 파괴하면 하느님께서도 그 사람을 멸망시키실 것입니다. 하느님의 성전은 거룩하며 여러분 자신이 바로 하느님의 성전이기 때문입니다.”(1고린3,16-17)

성전을 아름답게 만드는 것은 대리석이나 금은보화가 아닙니다. 대리석으로 지어 금은으로 장식한 성전일지라도 강도들이 드나들면 ‘강도의 소굴’(마태21,13)이 됩니다.

아름다운 사람이 아름다운 성전을 만듭니다. 사람을 아름답게 만드는 것은 돈과 재물, 지위와 명예, 지식과 학식 따위가 아닙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값비싼 명품과 고급 화장품 그리고 귀금속 장신구로 자신을 치장한 사람이 드나드는 성전이 아름다운 성전이 아닙니다. 맑고 밝은 가난한 마음, 온유하고 자비로운 마음이 사람을 아름답게 만듭니다. 하느님은 돌로 지은 건물 안에 계시는 분이 아니라 아름다운 사람 안에 머물러 계십니다. 아름다운 사람이 드나드는 성전이 아름다운 성전이 됩니다.

예수는 아름다운 사람입니다. 우리는 아름다운 사람 예수를 통해서 하느님을 만나고,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하느님 자비의 손길을 체험합니다. 당신도 하느님의 성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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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강영구 신부
  | 1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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