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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 장하다. 순교자
조회수 | 2,921
작성일 | 07.09.22
오늘은 성 김대건 안드레아와 성 정하상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 대축일입니다. 아마도 우리 한국 천주교회에게는 가장 특별한 대축일이며, 순교 성인들의 후손으로서 대단한 자부심을 품어야 하는 날입니다. 성교회의 무수한 선교 역사 중에서도 특별한 사례로서 평가 받는 것이 우리 한국 천주교회의 역사입니다. 그러한 신앙의 역사의 시작부터 엄청난 박해와 시련이 함께 이루어졌고, 수많은 순교자들이 있었다는 사실이 당연한 역사적 실제의 사건이라기 보다는 마치 하느님께서 직접 이 땅에 역사(役事)하셔서 이루어내신 신비로서 받아들이고 싶은 마음입니다.

제가 어렸을적 들었던 한국 순교 성인들에 대한 이야기를 기억합니다. 그때 잔혹하고 모진 고문과 박해를 견디어 내고, 심지어 죽음으로까지 자신의 신앙을 간직하며 증언했던 성인들의 모습을 상상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당시 순교 성인들께 가해졌을 단순한 폭행에 대해서도 마음이 편치가 않은데 여린 살갗을 불로 달궈서 시뻘건 인두로 지졌고, 심지어는 그 불덩어리를 입에 넣어 버렸다는 것, 그리고 그 외의 성인들께 가해졌던 잔혹한 고문 방법들을 전해 듣고는 더 이상 상상하고 싶지 않을 정도로 고통에 대한 두려움을 먼저 느낄 수 있었습니다.

‘어떻게 박해자들은 그토록 잔혹한 방법으로 천주교 신자들을 고문할 수 있었으며, 이와 함께 천주교 신자들은 그 극심한 고통을 어떻게 감수할 수 있었다는 말인가?’, 어린 마음에는 극심한 고문을 이겨내시고 기꺼이 순교를 선택하신 성인들께 놀라운 신앙에 대한 경탄과 존경에 못지않게 놀라움과 두려움이 너무나 컸습니다. 그러면서 제발 나는 그러한 위험에 처하게 되지 않기를 간절한 마음으로 기도했었습니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서 저는 신학생이 되었고 부제가 되기 전 30일간 영신 수련을 했었습니다. 피정 막바지에 이르렀을 때 순교를 주제로 묵상을 했었습니다. 묵상 중에 내 자신이 순교 성인들께서 겪었던 것처럼 하느님께 대한 신앙을 이유로 반대자들로부터 고문을 당하고 있는 상상을 해야 했습니다. 당시의 고문 도구들을 들고 있는 박해자들이 머릿속에 떠올려지면서, 온 몸에 소름이 끼치면서 묵상에서 벗어나기를 여러 차례 반복했습니다. 땀이 나고 호흡이 가빠지면서 잠심 중에 묵상을 계속할 수가 없었습니다. 결국 그러한 고문의 고통을 견디어 내겠다는 다짐을 하고 나서야, 비로소 묵상을 마칠 수 있었고, 무척이나 평온한 마음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물론 그때 결단의 순간이 단 한번으로 평생동안 지속되는 것은 아닌 듯합니다. 아무래도 지금도 순교에 관한 묵상을 다시 하게 된다면 하루 종일, 아니 한달 내내 끝나지 않을 듯 싶습니다.

신앙인의 삶의 완성을 순교로 여기셨던 우리의 신앙 선조들께서는 정말 평온하고 순결하고 확신에 찬 모습으로 죽음에 임하셨다고 합니다. 하지만 그러한 모습 이면에는 ‘성인들께서도 무척 고뇌하시고, 갈등하시지 않으셨을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아무튼 조금의 갈등과 동요도 없이 그 모든 것을 평화롭게 받아들이셨다면, 아마도 성인들께서는 ‘이미 인간이기 이전에 천사들이셨지 않았을까?’하는 엉뚱한 상상도 해 볼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우리 현대의 신앙인들은 일상의 사회 생활을 하면서 가끔 종교적인 문제와 충돌하게 되고, 그에 따른 선택과 결단의 상황에 처하게 됩니다. 현대의 우리들에게도 물리적인 강압만 없을 뿐 신앙 앞에서 현실의 환경은 많은 갈등을 제공할 것입니다. 믿지 않는 다른 사람들처럼 사회 생활에만 목표를 정하고 전력하기만 한다면 커다란 어려움이 아닐 것입니다. 하지만 순교의 상황은 신앙 선조들에게만 허락된 특은이 아니라는 사실을 명심해야 합니다.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버리고 포기하는 것으로 신앙을 선택한 것으로도 부족해 자신의 귀한 목숨과 맞바꿀 만큼의 진지한 선택과 결단을 보여준 우리 신앙 선조들의 모습이 갈등을 겪고 있는 우리 후손들에게 가장 훌륭한 대답이 되어 주실 것입니다.

우중근 라이문도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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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교자들의 피는 신앙의 씨앗

1984년 여의도에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께서 전 세계 교회에 신앙의 귀감이 될 한국의 순교자들 중 103위를 성인품에 올리신다고 장엄하게 선포하셨습니다. 과연 우리 한국 천주교회는 그분들과 다른 많은 순교자들의 피흘린 신앙의 증거위에 세워진 교회입니다. 떼르뚤리아누스 교부께서 “순교자들의 피는 신앙의 씨앗이다.”말씀하신 바가 그대로 이루어진 것이라 하겠습니다. 20여년이 지났지만 그분들의 축일이 우리에게 주는 가르침은 그분들의 생활은 “하느님이 전부”였다는 것입니다. 100여년의 박해중에 2만명 이상의 순교자들의 생활은 하느님 한분을 위해 생활뿐 아니라 생명까지를 봉헌한 하느님 중심의 삶이었습니다.

103위 성인들중에 어떤이는 학자였지만 어떤이는 일자 무식에 아침기도, 저녁기도도 못하고 교리도 모르는 분도 있었습니다. 오직 “예수, 마리아”밖에 모르던 김성임 마르타 성녀도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그들 모두 하느님을 섬김에 있어서는 다른 무엇과도 바꿀 수 없었던 지극히 하느님 사랑에 열렬한 분들이었습니다. “사대부나 다른 이들에게 죄를 얻을지언정 하느님께는 죄를 지을 수 없다.”고 천명한 생활들이었습니다. 기억력이 둔하여 교리문답과 기도문을 외우지 못했던 박 안나 성녀는 “나는 천주를 내가 원하는 대로 알지 못하지만 적어도 마음껏 사랑하기로 힘쓰겠다”고 하며 신앙을 지키다가 순교하셨습니다.

또한 우리 순교자들은 진리를 배우고 깨우치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셨습니다. 스스로 모여 연구하고 배우는 정신은 세계 교회사의 유래없는 자생의 교회를 만들었고, 100여년간의 박해 기간중에 30여년 밖에 성직자를 모시지 못했지만 60여년간을 찾고 배끼고 쓰고, 외우면서 신앙을 유지하고 신앙을 전해왔습니다.

성교회의 도리를 더 알기 위해 한양에서 함경도 무산까지 조동섬을 찾아가는 정하상 성인의 노력은 실로 경탄스러운 것입니다. 순교자를 심문한 기록에 “천주교 신자들은 모두가 하나같이 유식하냐?”하고 관장이 감탄합니다.

성인들의 문초기록에서 두드러진 것 하나는 어려움, 고통에 대한 인내심입니다. 모진 고문과 형벌, 그리고 병고에도 끝까지 굴하지 않는 정신은 우리들 생활에 많은 채찍이 됩니다. 고문하다가 화가 난 관장이 고문 중에 신음 소리만 내어도 배교를 간주하겠다는 말에 입을 꾹 다물고 신음 소리하나 내지 않았다는 성인들의 기록을 보면서 우리들의 고통에 대한 태도를 많이 반성하게 됩니다.

우리에게도 희망이 있습니다. 이러한 순교자들이 살으셨던 그곳에 우리도 살고 있어서 우리도 성인이 될 수 있는 희망이 있습니다. “나는 하늘을 바라보며 하느님께로 가겠다.”고 청해서 하늘을 향해 머리를 들고 참수 치명하신 정하상 바오로 성인의 아버지 정약종 아우구스띠노 순교자의 하늘을 우리도 보고 있으니 말입니다.

이성만 토마스 신부
  | 1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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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9월 5일에 본당 교우들과 함께 ‘미리내’성지로 성지순례를 다녀왔습니다. 순례일정을 준비하면서 먼저 김수환 추기경님의 묘소를 찾아가 참배를 하고, 추기경님의 삶을 묵상해보기로 결정을 하였습니다. 교우들이 순교자들의 성지를 순례하면서 혹 ‘순교’를 오래전에 있었던 옛이야기로 생각하며 순례를 마치지는 않을까? 하는 걱정에서였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루카 9,23)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을 묵상하면서 저는 “날마다”라는 표현이 마음에 와 닿았습니다. 오늘날 ‘순교’의 의미는 일상 속에서 날마다 자기 십자가를 지는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분명 자신의 ‘목숨’을 내어놓는 것 뿐 아니라, 매일의 삶속에서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성실히 지는 것 역시 의미 있는 ‘순교’입니다. 그렇다면 오늘날 우리가 일상 속에서 실천할 수 있는 ‘순교’란 어떤 것이 있을까요?

- ‘옳은 것’을 위해 ‘이익’을 포기하고, ‘불편’을 감수하는 용기 있는 선택
- 지나친 ‘욕망’을 버리고 ‘절제와 균형 잡힌 삶’을 살기위한 노력
- 재물에 대한 ‘욕심’을 비우고, ‘나눔’을 실천하는 애덕
- 잦은 ‘짜증’이나 습관적인 ‘불평’을 버리고, 매사를 ‘긍정적’으로 대하는 태도
- 따뜻한 마음으로 ‘작은 친절’을 베풀고 기쁜 마음으로 ‘칭찬’을 아끼지 않는 배려
- 다른 이들을 편견 없이 바라보고 받아들이려는 열린 마음

이 모든 것들이 일상 속에서 우리가 실천할 수 있는 ‘순교’의 다양한 모습들입니다.

이제 여러분도 ‘103위 순교성인들의 대축일’을 지내면서, 우리 신앙선조들의 순교정신에 감탄만 할 것이 아니라 각자가 실천할 자신만의 ‘순교목록’을 만들어 보시기 바랍니다.

이재화 안셀모 신부
  | 09.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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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이 강하면 강할수록 그림자는 더욱 짙게 나타납니다

순교는 ‘증거’라는 말에서 유래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순교자는 증거자를 뜻하며 증거는 삶으로 증명하면서 보여주는 행위일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에게 순교는 200년 전과 같은 모습은 아닐 것입니다. 하지만 현실의 상황에서 배교에 버금가는 선택을 하고 살아가고 있지는 않은지 반성하게 됩니다. 거짓말을 너무 쉽게 하는 오늘의 모습에서 순교자들의 신앙과는 동떨어진 모습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103위 성인 중에서 정하상 바오로(45세)와 정정혜 엘리사벳(43세), 그리고 어머니 유 체칠리아(79)는 기해박해(1839) 때 순교하셨고, 아버지 정약종 아우구스티노는 이들보다 38년이나 앞선 신유박해(1801년) 때 순교하셨습니다.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 정하상 바오로는 7살이었고, 정정혜엘리사벳은 5살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들도 아버지가 믿었던 신앙을 이어받아 순교함으로써 가족 전체가 순교를 하게 되었습니다.

성인의 아버지 정약종은 ‘주교요지(主敎要旨)’라는 최초의 한글교리서를 집필하였고, 아들 정하상은 ‘상재상서(上宰相書)’를 써서 한국 최초로 교회를 수호하는 호교론을 펼쳤습니다. ‘상재상서’란 ‘재상에게 올리는 글’이라는 뜻으로, 당시 우의정으로 있던 이지연에게 올린 글로써 총 3,644자로 된 짧은 글입니다.

이로부터 7년 후, 한국의 최초의 사제 성 김대건 안드레아는 병오박해(1846년) 때, 그리고 성 우세영 알렉시오는 그로부터 20년 후인 병인박해(1866년) 때 순교하였습니다. 우세영 알렉시오는 혹형을 참지 못해 배교했다가 곧 뉘우치고 자수하여 순교한 21세의 젊은이입니다.

십자가는 피하고 싶습니다. 그러나 빛이 강하면 강할수록 그림자는 더욱 짙게 나타납니다. 이처럼 은총의 빛이 강렬하면 강렬할수록 십자가의 그림자는 더 짙게 나타난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으
로 우리를 초대하고 계십니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루카 9,23)

김남철 바르톨로메오 신부
  | 09.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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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가 뿌리 없이 존재할 수 없으며, 어느 것 하나 태어남을 받지 않은 것이 없듯이 인간도 자기존재의 근원과 뿌리 없이는 존재할 수 없는 것이다. 즉 자기 존재의 근원과 뿌리에 대한 깊은 자각 없이는 자신의 현존재 또한 위태롭기 마련이다. 우리 가톨릭 신앙인의 뿌리는 무엇일까? 어떻게 해서 오늘날 우리가 가톨릭 신앙을 받아들이게되었을까?

바로 우리의 자랑스런 순교자들이다. 온갖 환난과 괴로움 속에서도 자신의 목숨을 바칠지언정 하느님을 배반하지 않았던 바로 이 땅의 순교자들이다.

반쯤 떨어진 목을 치켜들고 거기서 흘러나온 피를 두 손으로 받쳐 들고서도 하느님을 찬미할 수 있었던 분들, 아들의 목에 칼을 들이대고 위협하는 포졸에게 부모로서 쓰린 가슴을 부여잡고 그래도 배교할 수 없다고 하던 분들, 산채로 묻으려고 자신들 위로 흙을 퍼붓는 사람들을 위하여 하느님께 용서의 기도를 올리시던 분들, 굶주림과 목마름 속에서도 차라리 바닥의 흙을 한줌 주어먹을지언정 하느님을 배반하지 않았던 분들, 유일한 식량이라고는 곪아터진 상처에서 나오는 구더기와 썩어 문드러진 짚단이 전부였던 그분들, 그리고도 배교하기는커녕 같이 잡혀있던 교우들을 서로 격려하던 그분들, 하느님께 대한 열정으로 모든 고문과 역경과 죽음의 위협까지도 물리쳤던 그분들, 우리에게 하느님을 전해주신 분들이다.

우리에게 생명을 전해주신 분들이 부모님들이라면, 자신의 생명을 바쳐 신앙을 전해주신 우리 신앙의 선조들은 우리에게 무엇이며 무슨 의미일까? 우리는 너무 사치스런 신앙생활을 하고 있지는 않은가, 어떻게 해서 우리에게까지 전달된 신앙인지에 대해 돌아봐야할 것이다. 오늘날 우리는 어쩌면 바쁘다는 이유로, 세태가 변했다는 이유로 우리의 순교자들을 우리 삶의 자리에서 너무 뒷전으로 밀어낸 것은 아닌지 깊이 반성해야겠다.

그분들의 삶을 가까이 느낄 필요가 있다. 그분들의 신앙과 순교정신을 오늘날 되살릴 필요가 있다.
순교자들의 관한 서적을 많이 읽고 성지순례를 많이 하고 순교자 현양 대회에 빠지지 않고 참석하며 순교자들이 아니면 신앙생활을 못할 것처럼 떠들고 다닌다고 해서 순교자들을 현양하는 것이 아니다. 오늘날 우리의 삶 속에서 순교자들의 삶을 살지 못하고 그분들의 정신을 기리지 못한다면 그것은 알맹이 빠진 허상에 지나지 않는다.

자그마한 일상에서 순교하는 삶, 모든 것 안에서 하느님을 제일 먼저 생각하고 그분을 위해 많은 자리를 비워 놓으며 그분을 위해 많은 것을 포기하는 신앙생활, 바로 오늘날의 순교라고 할 수 있겠다. 이러한 자세로 신앙생활을 할 때, 그 옛날 우리의 순교자들이 목숨 바쳐 지킨 신앙을 우리도 우리의 자녀와 후손들에게 퇴색됨 없이 전해 줄 수 있을 것이다.

그 옛날 순교자들처럼 주님, 나 일상에서 죽게 하여 주소서. 가져도 가져도 지칠 줄 모르는 탐욕을 매질하여 주시고, 느닷없는 시기와 미움과 분열을 족쇄 채워 주소서. 형제들에 대한 무관심과 저 자신의 오만에 목마르게 하시고, 아집과 편견과 독선에 굶주리게 하소서.

날마다 나로부터 죽게 하소서. 죽음으로 생명 풍요로워짐을 깨닫게 하소서. 당신과 하나 되게 하소서. 그 옛날 순교자들처럼.

의정부 교구 최종운 신부
  | 09.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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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 자신을 버린다는 것

살아오던 삶의 방식들을 송두리째 바꾸고 이전과는 전혀 다른 모습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습니다. 그들은 바로, 큰 병에 걸려 죽음의 위협 앞에 선 사람들입니다. 도저히 끊을 수 없을 것 같던 술과 담배를 한순간에 끊어버리기도 하고, 기존 인간관계를 단칼에 끊어버리기도 합니다. 놓을 수 없다던 일들도 다 내려놓고 산속으로 떠나버리기도 합니다. 직접적인 경고를 받기 전까지는 실행하기에 너무도 어려웠던 일들을 한순간에 선택하고 실행합니다. 생명의 위협 앞에서 인간이 보여주는 모습입니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루카 #9:23)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따르는 사람의 자세로 ‘자신을 버릴 것’을 요구하십니다. 자신을 버린다는 것은, 자기가 살아온 삶의 방식뿐만 아니라, 사고방식과 가치관, 심지어 인간관계까지도 바꾸는 것을 말합니다. 하느님의 자녀가 된 후에는 그 전에는 지키지 않던 하느님의 법을 지키고 하느님께 희망을 두어야 합니다.

예수님의 제자가 되기 위해서는,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삶의 태도들을 닮기 위해서 이전에 살았던 삶의 습관들은 버리고 새로운 방식으로 세상을 살아가야 합니다. 때로는 불안하고 비합리적인 것 같은, 심지어는 나의 생명을 위태롭게 하는 것까지도 받아들이고 살아가려고 애써야 합니다. 그렇게 하느님의 말씀을 지키기 위해서 자신의 모든 것을 버리고 새로운 삶을 받아들인 이들을 성경에서는 “의인”이라고 부르고, 목숨까지 바친 이들을 우리는 “순교자”라고 부릅니다.

그러나 그들의 생명이 그렇게 죽음으로 끝나버리지 않고, 하느님께서 그들을 살리시고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해주신다는 것이 우리가 가진 믿음입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 성모님의 승천을 통해서 우리에게 미리 그 희망을 보여주셨습니다. 생명의 위협 앞에서 변화된 이들과는 다르게, 우리는 그것을 느끼기 전에 새로운 삶을 살아야 합니다. 영원한 삶을 희망하며 예수님을 따라가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자신을 버려야 하고, 그것은 내가 살아온 세속적인 삶의 태도들을 버려야 함을 의미합니다.

세상의 논리나 가치보다 하느님의 가르침과 영적인 가치들이 우선되어야 합니다. 두 가치가 충돌할 때, 하느님의 가치를 선택해야 합니다. 그것이 세상에서는 불이익을 가져오고, 심지어는 나의 생명을 위협할지라도 말입니다. 이 시대에도 순교는 여전히 우리에게 유효하게 요구되고 있습니다. 오히려 더 교묘하게 요구되고 있어서, 판단하고 선택하기 더 어렵기도 합니다. 영원한 생명에 대한 더 큰 갈망과 지혜와 용기를 가질 수 있도록 신앙의 선조들께 전구를 청하며 기도해야하겠습니다.

▮ 의정부교구 이진원 십자가의바오로 신부 : 2016년 9월 18일
  | 09.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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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은 고해소에 죄를 고백하러 들어오시는 신자 분들 중에 죄에 대한 고백을 길게 설명하시는 분들이 계십니다. 아니 정확하게는 자신이 지은 죄에 대한 고백이라기보다 죄를 짓게 된 상황과 속상함, 그리고 자신의 고민거리를 이야기하시는 분들이 계십니다. 물론 이런 이야기도 필요하기는 합니다. 그러나 그 이야기가 너무도 길게 이어질 때는 저도 고민에 빠집니다. 한편으로는 뒤에 서 있을지도 모르는 분들을 생각하며 ‘“짧게 죄만 말씀하세요”라고 말씀을 드려야 하나?’라는 생각과 ‘오죽 답답하셨으면 이렇게라도 이야기를 하실까?’라는 생각 안에서의 고민이 그것입니다.

그래서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분들이 고해소에서 그토록 자신의 사정을 구구절절이 말씀하시는 이유가 무엇일까를 말입니다. 아마도 그건 불안감 때문인 것 같습니다.전능하신 하느님께선 이미 우리가 지은 죄가 무엇이고, 어떠한 상황에서 그와 같은 일이 벌어졌는지 다 알고 계시죠. 그분이 원하시고 기대하시는 건, 우리가 지은 죄를 진심으로 뉘우치고 당신께로 돌아가 용서와 화해를 청하는 것, 그것뿐일 것입니다. 이미 우리 죄의 모든 것을 알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우리의 고백은 그렇게 길지 않아도 됩니다. 자신이 진정 잘못한 것이 무엇인지를 주님 앞에 겸손 되이 말씀드리면 그것으로 충분합니다.

그런데 가끔은 이것만으론 뭔가 모자라다는 느낌을 갖게 됩니다.‘이렇게 간단히 말해도 되나? 뭔가를 좀 더 자세히 말씀드려야 하느님께 용서받을 수 있는 거 아니야?’라고 생각합니다. 불안해합니다. 바로 그러한 불안감을 해소하고자 고해소에서의 말씀이 길어지는 게 아닐까란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사실 우리의 일상은 늘 상 불안합니다. 나에 대해서도, 이웃에 대해서도, 그리고 너무나도 복잡하게 돌아가는 세상에 대해서도 늘 불안해합니다. 우린 그렇게 늘 불안해하면서 지내야 하는 것인지요?

오늘은 우리의 자랑스러운 선조이신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와 성 정하상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들 대축일입니다. 이분들은 우리가 느끼는 불안을 하느님께 대한 굳은 믿음으로 승화시키신 분들이시죠. 든든한 백이신 주님 계심을 굳게 믿으며 자신들에게 주어진 박해와 칼날 앞에서도 두려워하지 않고 믿음을 증거하신 분들이십니다.

우리도 우리의 순교 선조들과 같이 주님께서 나와 함께 계심을 굳게 믿으며, 그분께 의지하며, 세상의 어떠한 두려움 앞에서도 당당할 수 있는 모습을 가진 신앙인이 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 의정부교구 김연상 비오 신부 - 2017년 9월 17일
  | 09.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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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 신앙인의 정체성

살아가면서 정체성이 정말 중요하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정체성이 흔들리면 마음이 무너지고, 마음이 무너지면 생활도 무너지기 때문입니다. 모든 사람에게는 각자의 역할이 있고, 이에 따른 정체성 역시 부여됩니다. 가정과 사회에서 우리는 나름의 역할을 지닌 채 살아갑니다. 그러나 정체성을 잃어버린 사람은 자기 역할에 따른 의무와 책임을 외면해 버립니다. 이럴 경우 본인도 힘들고, 주변 사람들도 힘들어지기 마련입니다.

특히 우리는 세상 안에 있지만, 세상 사람들과는 다른 정체성 하나를 더 지닌 채 살아갑니다. 바로 신앙인이라는 정체성입니다. 신앙인의 정체성은 이름 그대로 믿는 데에 있습니다. 우리는 하느님께서 우리들의 주님이심을 믿습니다.

오늘은 성 김대건 안드레아와 성 정하상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들 대축일 경축 이동일입니다. 우리들의 신앙선조들은 박해의 엄중함 속에서도 믿음을 증거했습니다. 목숨을 걸고 신앙인으로서의 정체성을 드러내었던 것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이 시대에는 더 이상 조선 시대 때와 같은 박해는 없습니다. 그러나 다양한 사조들이 뒤섞여 세상은 점점 혼란스러워져 갑니다. 서로 자기가 옳다고 주장하는 가운데 진리라는 말의 의미는 퇴색되어갑니다. 무엇이 옳고 그른지 판단하기가 쉽지 않은 시대가 되어가고 있습니다.

이런 세상 속에서 우리는 신앙인으로서 살아갑니다. 신앙인의 정체성이 믿음을 증거하는 데에 있다면, 이 믿음은 신앙 선조들과 마찬가지로 우리들의 삶 안에서 드러나야 하겠습니다. 우리는 세상 사람들과는 다르게 진리를 따라 살아가야 합니다. 복음을 삶으로 실천해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들의 믿음이 증거됩니다.

세상 사조에 흔들리지 않고 신앙인의 길을 걸어가야 하겠습니다. 그렇게 한다면 하느님께서 살아계신 주님이심역시 우리들의 삶을 통해 드러날 것입니다.“사람이 온 세상을 얻고도 자기 자신을 잃거나 해치게 되면 무슨 소용이 있느냐?” (루카 9,25)

▦ 의정부교구 김승연 프란치스코 신부 : 2018년 9월 23일
  | 09.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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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92   (녹) 민족들의 복음화를 위한 미사 (전교주일) 독서와 복음  [5] 1925
491   (백) 수호천사 기념일 독서와 복음 (10월 2일)  [1] 12
490   [부산/마산/광주] 한 어린아이의 작은 길  [6] 2671
489   [수도회] 어디사세요  [7] 22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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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축일/명절강론 코너 ( 대축일/명절 미사에 관련된 강론자료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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