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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 목숨 보다 소중한 하느님의 사랑
조회수 | 3,702
작성일 | 07.09.22
매달 둘째 주일은 “새친구 환영주일”이고, 매달 넷째 주일은 “새친구 영세주일”이다. 초등부는 지난 달 주일학교에 한 번이라도 출석한 어린이, 중고등부는 지난 달 청소년 예비자반에 등록한 청소년이 대상이다. 청소년 예비자반의 대상은 초5~고3까지, 12개의 과를 마치면 “새친구 영세주일”의 청소년 미사 중에 영세식이 있다. 어느 과에서 시작하든 무조건 12개의 과를 마치면 영세하는 그야말로 “연중무휴 수시접수”반이다. 청소년 새영세자는 본당의 모든 청소년들의 기도와 화려한 축하 가운데 장엄하고 거룩하게 하느님의 새자녀로 태어난다. 청소년 예비자반의 특징은 기다릴 필요가 없이 바로 예비자반에 들어갈 수가 있다. 그 반에는 이미 다른 시간에 시작한 친구들이 있다. 신자인 친구들의 격려와 지지가 있다.

청년 예비자반과 성인 예비자반은 성경(성부, 성자, 성령, 성모, 교회 중심 3개월)과 미사경본(7성사 중심 3개월)을 중심으로 짜여진 1시간 교리, 30분 기도, 20분 나눔, 10분 기도문 외우기로 2시간 프로그램이다. 조별로 준비된 테이블에서 조담임과 조손발이 봉사자들의 도움을 받아 가족적인 분위기에서 수업을 받는다. 본 예비자반에서는 신앙생활에 가장 필요한 기도에 맛들이기, 하느님의 사랑을 느끼는 성경 교리, 나눔을 통해 결속되는 공동체, 전례의 아름다움에 스스로 참여하기로 만들어져있다. 6개월 과정이 끝나면 의무적으로 성서모임에 등록해야 하고, 한 개의 단체 활동을 해야 한다.

왜 영세 후 얼마 안 되서 냉담에 들어갈까? 이러한 현실을 보면서 생각한 예비자반 프로그램이다. 이 예비자 교리반에는 많은 봉사자들이 필요하다. 각 조에서 봉사하는 신자들을 냉담했었거나 주일미사만 나오던 사람들로 심어놓으면, 교육 과정을 거치면서 아주 열심한 봉사자로 거듭나는 효과가 있다. 성경, 기도와 전례, 나눔과 공동체를 통하여 우리 안에 하느님의 사랑이 어떻게 섭리하시는지 느끼는 것이 핵심인데, 지금까지는 잘 되고 있다.

그 옛날 신앙을 증거하고 선교하기 위해 목숨을 바치셨던 우리 신앙의 선조들은 도대체 어떤 신앙을 가지고 계셨을까? 어떤 공동체를 이루고 사셨을까? 얼마나 소중한 신앙이었기에 자신의 재산을 바쳐서 성직자 영입운동을 했을까? 하느님이 얼마나 귀중한 분이셨기에 박해의 칼이 춤추는 가운데 자신의 생명을 바쳐 선교했을까?

신앙이라는 것이 이제는 가벼운 장신구, 불안한 세상을 살아가는데 필요한 안정제나 보험과 같은 어떤 것이 되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교리서에 나와 있고, 강론 때 들어 알고 있는 내용 말고, 내가 만나고 있는 하느님, 체험하고 있는 예수님, 나누고 있는 성령의 은총은 어떤 것인가? 내 보잘것없는 체험으로 볼 때, 하느님은 우리의 작은 삶의 문을 열 때 풍요롭게 다가오신다. 예수님은 우리의 작은 사랑을 나눌 때 차고 넘치게 채워주신다. 성령님은 우리의 작은 정성을 뿌리고 다닐 때 엄청난 능력을 주신다. 적어도 복음말씀을 전하는 일과 가난한 이웃과 사랑을 나누는 일을 할 때, 그분은 너무나 우리와 가까이 계신다. 이것만큼은 확실하게 말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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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이재천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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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는 화요일, 제가 쉬는 날입니다. 신부가 쉬어서 뭐하나 라고 생각하시는 분도 계시겠지만, 사실 하루를 쉬고 안 쉬고는 큰 차이를 보인답니다. 하루를 쉼으로 인해서 일주일간의 피로를 풀 수가 있거든요. 그리고 또 일주일 동안을 아주 힘차게 보낼 수가 있습니다.

아무튼 어제도 오전에 약간의 일을 한 뒤에, 오후에는 자전거를 타면서 쉼의 시간을 가지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오후에 전화 한 통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전화로 큰 걱정거리가 생겼습니다. 글쎄 다음 주에 있을 순교자 현양대회 준비를 지금 계속해서 하고 있는데, 그 작업을 모두 중지하게 된 것입니다.

물론 저의 실수였지요. 어떤 단체에 공사를 하겠다는 협조를 먼저 청해야 하는데, 강화군에만 하면 되는 줄 알고서 그 과정을 건너뛴 것입니다. 따라서 그곳에서는 공사를 당장 그만두고서 절차를 받은 뒤에 공사를 하라는 것이었습니다. 맞는 말이지요. 그런데 문제는 현양대회까지의 시간이 너무나 없다는 것입니다.

앞이 캄캄해졌습니다. 재정 낭비와 시간적 손해를 떠나서 지금까지의 모든 노력이 물거품이 될 수도 있다는 생각에 마음이 점점 급해졌습니다. 그리고 이곳저곳에 전화를 걸었습니다. 저의 실수를 이야기하고 어떻게 처리를 해야 하는지 조언을 구했습니다. 그런데 그 과정 안에서 너무나 쉽게 해결할 수 있는 방안을 찾게 되었고, 실제로 공사를 계속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작업 중지라는 통보를 받은 지 1시간 만에 다시 할 수 있다는 통보를 받은 뒤에 제가 얼마나 기뻤을까요? 그 기쁨은 말과 글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너무나 컸습니다. 불과 1시간의 차이인데, 그 1시간이 지난 뒤에 얻은 기쁨은 이 세상을 모두 다 가진 것 같은 느낌이더라는 것입니다.

고통과 시련 뒤에 얻은 기쁨은 이렇게 큰 것이 아닐까요? 특히 고통과 시련의 크기가 더욱 더 클수록 그 뒤에 얻는 기쁨은 더욱 더 크게 될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이라는 것은 뒤에 있을 기쁨을 위해서 사는 사람입니다. 주님께서 약속하신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기쁨을 얻기 위해서, 지금 현재의 삶을 주님께서 원하는 방향으로 맞추는 것이지요. 그런데 우리들은 이 뒤에 있을 기쁨보다는 지금 한 순간의 기쁨에 초점을 맞출 때가 얼마나 많았던지요? 그래서 끊임없이 고통과 시련을 피하려 하고, 편한 자리만을 추구하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요?

과거의 우리 순교자들은 어떠하셨을까요? 한 순간의 기쁨을 위해서 자신의 모든 것을 바쳤을까요? 아니지요. 그렇다면 순교하지 않으셨을 것입니다. 바로 영원한 기쁨이 가득한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해서 자신의 가장 소중한 목숨까지도 내어 놓는 주님께 대한 뜨거운 사랑을 표현하셨습니다. 그래서 그 순교의 순간은 너무나 힘들었겠지만, 지금은 하느님과 함께 영원한 생명을 누리시면서 누구보다도 가장 행복하다는 것입니다.

고통이 클수록 이겨낼 때의 기쁨은 더욱 더 큰 법입니다. 더군다나 주님께서는 고통을 겪는 우리들은 그대로 두지 않으십니다. 이 사실을 기억하면서, 잠깐의 기쁨을 위해서 노력하는 우리들이 아니라, 영원한 기쁨을 위해서 노력하는 우리들이 되었으면 합니다. 나를 고통스럽게 하는 것들을 주님께 기도로써 맡겨드립시다.

인천교구 조명연 신부
  | 09.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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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의 신앙

한국 천주교 223년 역사 이래 오늘날 기쁘고 자유롭게 신앙생활을 할 수 있는 이유는 눈에 보이는 외적인 교회 성장보다는 우리 신앙선조들의 목숨 바친 신앙심 때문입니다.

오늘은 성 김대건 안드레아와 성 정하상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 대축일입니다. 과거에는 순교가 믿느냐 안 믿느냐의 여부에 달려있었습니다. 그래서 배교하면 살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하면 죽음에 처해졌습니다. 그런데 순교자들은 기꺼이 죽음을 맞이하였을 뿐만 아니라, 자기를 죽이는 망나니에게 “이렇게 머리를 대면 자르기 좋으냐 저렇게 머리를 돌리면 자르기가 쉽냐?”라고 하며 물어서 많은 사람들에게 경이감을 안겨주었다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1886년 한불 수호조약이 맺어져 종교자유가 이 땅에 허락된 뒤, 오늘날까지 우리가 천주교 신자이기 때문에 박해받는 일은 없어졌습니다. 그럼 오늘날 우리는 어떻게 선조들의 순교정신을 이어 살 수 있습니까? 순교 즉, 예수님을 따라 목숨 바치는 행위는 주님을 믿는다는 것을 증거하기 위해 선택한 신앙행위입니다. 한 10년전만 해도 “과연 천주교 신자는 뭐가 달라도 달라!”하는 소리를 들으면서 살았습니다. 그 때는 남들이 “아, 천주교 신자야?”라고 할 때 도둑질 안 하고, 정직하고, 남에게 해 안 끼치고 착하게 사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전부 다 착했던 것만은 아니지만 사회에서 천주교 신자들을 바라보는 평이 전반적으로 좋았습니다. 물론 이러한 사실은 지금에도 마찬가지입니다만, 모든 것이 도전받고 모든 것이 회의되는 오늘날의 사회환경은 천주교 신자인 사람들과 아닌 사람들과의 외견상의 차이는 별로 없어보일 정도입니다.

오늘날 경제, 사회, 정치적으로 힘들다고는 하지만, 우리 순교 성인들께서 사실 때보다는 더 하느님께 영광을 드릴 수 있는 좋은 기회를 우리 모두 가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과연 이 좋은 기회를 잘 활용하면서 살고 있습니까?

그 옛날 우리 순교 성인들을 박해하던 것은 자신의 목숨을 끊어버리는 망나니의 칼이었지만, 오늘날 우리를 박해하는 것은 우리의 신앙생활을 유혹하고 방해하는 여러 가지 사회구조와 현상들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의 신앙은 단순한 우리 삶의 악세사리가 아닙니다. 단순히 일주일에 한번 미사 참례하는 것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한다면, 옛날 우리 선조가 배교한 것처럼 현재 우리를 유혹하고 방해하는 것들에 쉽게 굴복될 것입니다.

사도 바오로는 오늘 제2독서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어떠한 피조물도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님에게서 드러난 하느님의 사랑에서 우리를 떼어놓을 수 없습니다.”

바오로 사도 말씀에 용기를 얻고, 한치 앞도 섣불리 판단할 수 없는 이 세상을 슬기롭게 이겨나가는 신앙인이 되시길 기도합니다. 아멘.

인천교구 송준회 베드로 신부
  | 09.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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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느리들이 명절 때 시어머니에게 가장 듣기 싫은 말은 과연 무엇일까요?

어떤 사이트에서 추석을 앞두고 기혼여성 1천500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온라인 설문조사 결과에 따르면 명절 때 시어머니에게 가장 듣기 싫은 말로 가장 많은 응답자인 33.8%가 “더 있다 가라. 벌써 가게?”를 꼽았다고 합니다. 그리고 2위는 동서 지간에 비교하는 말(20.2%), 3위는 음식 준비할 때 잔소리(12.7%)로 나타났습니다. 반면 시어머니에게 가장 듣고 싶은 말은 “준비하느라 수고했다.”(31.3%)와 “어서 친정에 가야지.”(22.1%)가 각 1,2위로 조사되었다고 합니다.

저는 가장 듣기 싫은 말이 “더 있다 가라. 벌써 가게?”라는 사실에 깜짝 놀랐습니다. 왜냐하면 이 말이 결코 나쁜 말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부모님의 입장에서 오랜만에 온 가족이 얼마나 반갑겠습니까? 그래서 명절 제사가 끝나자마자 자기 집으로 떠나려는 가족이 아쉬워서 한 말인데 이 말이 가장 듣기 싫은 말이라니요. 하지만 다시 생각해보니 세상에서 가장 듣기 싫은 말도 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왜 그럴까요? 아마도 오랜만의 만남으로 갖게 되는 즐거움보다는 일하는 어려움이 더 크기 때문이 아닐까요? 사실 일하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이 어디에 있을까요? 그러나 만약 일하는 어려움보다 만남의 즐거움이 더 크다면 이러한 말을 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오늘은 성 김대건 안드레아와 성 정하상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 대축일로 한국의 모든 순교자들에 대해서 다시금 깊이 생각해보는 날입니다. 그들의 삶이 과연 평안했을까요? 부와 명예를 모두 버린 것은 물론 육신의 고통까지 겪어야 하는 상황이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순교자들은 세상이 아닌 예수님을 선택했습니다. 자신의 목숨보다 더 중요한 것은 예수님이었고, 예수님 때문에 죽임을 당하는 것을 기쁘게 받아들였습니다.

왜 그럴까요? 바로 예수님을 통해서 참된 행복을 체험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영원한 생명이 보장되는 하느님 나라를 굳게 믿었기 때문에 피의 순교를 할 수가 있었던 것이지요. 오늘날 그러한 피의 순교는 없습니다. 그러나 저는 지금 현재도 순교와 배교의 생활은 계속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들에게 가장 중요한 계명으로 ‘사랑’을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이 사랑을 실천하는데 최선을 다할 것을 명하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따른다고 말하면서도 이 사랑을 실천하지 않는다는 것은 무엇일까요? 예수님께서 원하시는 삶을 반대하는 것으로 현대 사회에서의 배교자의 모습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반대로 세상의 유혹에 굴하지 않고 적극적으로 사랑을 실천한다면 이것이 바로 주님께서 가장 원하는 삶으로 현대의 순교자의 삶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남 듣기 싫은 말을 하기 보다는 듣기 좋은 말을 하는 것, 그리고 남들이 모두 꺼리는 일들을 주님께 대한 사랑 때문에 웃음 지으며 행하는 것 역시 현대의 순교입니다. 또한 내가 그리스도인임을 자랑스러워하고 남들 앞에 그리스도인답게 사는 것 역시 또 하나의 순교입니다. 지금 나는 과연 우리 순교자들의 삶을 본받아 그들처럼 살고 있을까요?

인천교구 조명연 신부
  | 09.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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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를 아파하고 세속에 분개하지 않는 시(詩)는 시(詩)가 아니다."

제가있는 성당에는 유치원이 있습니다. 어린 아이들은 성모상 앞에서 성모송을 노래하고 유치원으로 들어갑니다. 이런 모습을 보면 기쁜 웃음이 나올 때도 있지만 이유 없이 슬퍼질 때도 있습니다. 작은 아이들이 겪게 될 고통들이 눈앞에 보일 때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럴 때마다 조용히 기도합니다. ‘주님. 아무것도 모르는 저 아이들도 십자가를 져야만 합니까? 삶이 지니고 있는 고통들이 저 아이들을 지나쳐 가게 해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저희들이 지고 있는 십자가만으로는 부족하십니까!’

다산(茶山) 정약용은 “시대를 아파하고 세속에 분개하지 않는 시(詩)는 시(詩)가 아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이는 시대가 겪고 있는 불의한 상황에 체념하거나 못 본 척 하지 말고 같이 아파하며 변화시켜 나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사회의 구조적인 악으로 인해 고통스러워하는 사람들에게 듣기 좋은 소리와 녹아 없어질 위로를 말한 것이 아니라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한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진리와 정의를 선포하시다가 외로이 십자가에서 돌아가셨습니다. 모순되고 불합리하며 부조리한 사회 속에서 진리와 정의에 목말라 하던 민초들은 그리스도 예수님의 삶 속에서 갈증을 해결했습니다. 그래서 두 눈으로 보고 들은 진리를 목숨을 바쳐 선포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우리 신앙의 선조들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높기만 한 양반과 평민의 벽 앞에서 좌절하고, 정치적인 혼탁함 속에서 몸을 사리며, 물질적인 궁핍 속에서 고통 받던 선조들은 정의로움에 목말라 했습니다. 이들은 목숨을 바쳐 진리와 정의를 외친 그리스도 예수를 책을 통해 보고 들었습니다. 선조들은 보고 들은 진리를 실천했습니다. 세상의 억압과 폭력 속에서 기도하고 서슴없이 진리를 증언하다 망나니의 칼 아래 죽어갔습니다.

지금의 우리는 어떻습니까? 예수님의 가르침대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불의한 시대에 영합하며 살고 있지는 않습니까? 뒤쳐질까 두려워 아이들을 사교육 시장에 밀어놓고 ‘우리 아이’만 좋은 학교와 직장에 들어가면 된다고 여기지는 않습니까?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눈물을 못 본 척하며, 다른 이들을 착취하는 경제적 구조 속에서 나만 잘 살면 된다는 ‘웰빙’의 주문에 걸려 있지는 않습니까? 누군가가 흘리고 있는 피눈물을 비웃지는 않습니까? 그리스도와의 친교가 아니라 신자들의 사교 모임에 치중하며, 진리와 정의의 외침이 아닌 기교가 난무하는 듣기 좋은 소리로 공동체를 활성화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진리와 정의에 목말라 하시던 신앙의 선조들은 이 땅에 피와 눈물의 시(詩)를 새기셨습니다. 선조들이 쓰신 순교의 시(詩)에 우리의 눈물로 마침표를 찍지는 못할지언정 그분들을 팔아먹는 신앙생활을 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신앙생활은 다른 것이 아니라 보고 들은 진리와 정의를 실천하는 것이며, 불의한 사회를 하느님 나라의 의로움으로 바꾸기 위해 희생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노력하지 않고 침묵한다면, 티 없이 맑고 깨끗한 우리의 아이들은 더 큰 십자가를 져야 할 것입니다.

김태영 사도요한 신부
  | 09.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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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가난한 청년이 있었습니다. 이 청년은 주님의 인도하심으로 영세를 받아 열심히 성당을 다니게 되었지요. 그리고 다짐을 했습니다. 자기 수입의 십분의 일은 꼭 주님께 봉헌을 하겠다고요.

그는 당시의 수입이 겨우 십만 원밖에 안되었기 때문에, 만원을 십일조로 봉헌하면서 자신이 큰 부자가 될 수 있도록 해달라고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더 벌어야 주님께 더 많이 봉헌할 수 있지 않겠냐면서 말이지요. 그런데 하느님께서 이 청년의 기도를 들어주셨는지 얼마 지나지 않아 월 소득이 백만 원이 되었습니다. 이제 십만 원을 십일조로 드려야 하는데 조금 아깝다는 생각이 들었지요. 그래도 한번 작정한 약속이니 계속 드리기로 했습니다.

그런데 또 얼마 지나지 않아서 월 소득이 천만 원이 되는 사업가가 된 것입니다. 이제 백만 원을 십일조로 봉헌해야 하는데 너무나 아깝다는 생각이 들어서 도저히 십일조를 드릴 수 없었습니다.

‘나처럼 헌금 많이 하는 사람이 어디 있어? 나도 다른 이처럼 약간의 성의만 표시해야지.’

바로 그 순간 하느님께서는 이 청년에게 이러한 말씀을 하셨다고 합니다.

“많은 액수의 십일조에 부담을 느낀다니 어쩔 수 없지 뭐. 그렇다면 이제 부담 없이 십일조를 봉헌할 수 있도록 만들어줄게. 한 달에 예전처럼 십만 원만 벌도록 해주마.”

자신이 받은 은혜에 대해서 감사하기 보다는 늘 자신이 손해 받고 있다는 느낌을 가지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러다보니 받는 것에 익숙해있지, 주는 것에는 너무나도 낯선 우리들이 아닐까 싶어요. 하긴 묵상을 하다 보니 저 역시도 여기에 예외가 아니더군요.

저는 간석 4동 성당으로 재작년 12월 부임한 이후 참으로 많은 은혜를 받고 있습니다. 좋은 신자들과 함께 살고 있고, 좋은 환경에서 잘 살고 있습니다. 더군다나 종교미술학부를 인수해서 이제 넓은 공간까지도 마음껏 쓸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감사하지 못하고, 왜 나한테는 이렇게 많은 일거리만 주워질까를 생각했지요. 또한 지금 공사를 하는데 있어서도 ‘어떻게 하면 싸게 할까?’만을 생각했습니다. 물론 부지구입비 마련에 어려움이 있기에 공사를 최대한 싸게 해야 한다는 핑계만을 대고 있었지요.

그러나 지금보다도 훨씬 어렵게 살았던 중세 시대의 화려한 성당과 멋진 성물들을 보면서 깊은 반성을 하게 됩니다. 바로 그곳에서 주님께 가장 좋은 것을 봉헌한 선조들의 마음을 볼 수 있지요. 또 우리가 오늘 기념하는 성 김대건 안드레아와 성 정하상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들을 통해서도 깊은 반성을 하게 됩니다. 그들은 가장 귀하다는 생명을 하느님께 봉헌하면서 순교했지요. 그런데 지금 나는 과연 주님께 최고의 것을 봉헌하고 있을까요?

아니었습니다. 그렇게 많은 은혜를 받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나의 편함만을 생각하면서, 주님께 나의 소중한 것들을 봉헌하겠다는 마음을 갖지 못했습니다.

우리가 받은 은혜에 대해 먼저 감사하는 마음을 간직해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순교자의 마음이었고, 이 현재를 순교자의 마음으로 살 수 있게 됩니다. 바로 그때 순교 성인들에게 열린 하느님 나라가 우리에게도 활짝 열리게 될 것입니다.

순교자의 마음으로 최고의 것을 주님께 봉헌합시다.

조명연 신부
  | 09.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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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도록 기꺼이 내어놓는 신앙인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정녕 자기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나 때문에 자기 목숨을 잃는 사람은 그 목숨을 구할 것이다.”(루카 9, 23-24).

누구든지 예수님의 뒤를 따르려면 먼저 자기 자신을 ‘버려야’합니다. 9장 23절에서 예수님은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라고 말씀하시기 전에, 왜 먼저 ‘자신을 버려라.’라고 가르치시는지 생각해 봅니다. ‘버리다.’라고 번역된 뜻은 문자 그대로는 “‘아니요.’라고 말하다, 부정하다, 거부하다.”라는 뜻입니다. 하느님을 소유하고 싶어 하는 영혼의 자기중심적 성향에 대해 단호하게 우리는 “아니요.”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예를 들어 수능시험을 100일 앞둔 아이에게는 신경을 써주지 않고, 무조건 하느님께만 기도했다가 아이가 덜컥 진학을 못했다는 이유로 하느님을 원망한다면, 그것은 하느님을 내 영혼의 중심으로 소유하려는 신앙입니다. 또한, 남편과 아내, 시댁과 처가댁 등 상대방의 말과 행동에 귀 기울이지 않고, 무조건 기도를 통해 그들이 바뀌기만을 기도하는 것도 하느님을 내 멋대로 소유하려고 하는 행동입니다.

그래서 오늘 예수님께서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라는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나의 현실이 외면하고 싶을 정도로 고통스럽고 힘이 들어 주저앉고 싶을지라도 가족과 이웃 그리고 내 영혼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책임과 노력(자신의 십자가)이 뒤따르며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신앙인. 그것이 진정 참다운 신앙인의 모습이 아닐까요?

이같은 모습은 성모님과 예수님을 통해서도 찾을 수 있습니다. 성모님께서 가브리엘 천사를 통해 “보십시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루카 1, 38)라며 자신의 뜻보다는 주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원의 하였고, 주님께서도 겟쎄마니 동산에서 “제 뜻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게 하십시오.”(루카 22, 42)하며 당신의 뜻보다는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바라셨습니다.

자신이 믿는 것(敎)을 따라서 죽는(殉) 사람을 순교자(殉敎者)라고 합니다. 순교자들의 삶 역시 이 땅에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바라며, 기꺼이 자신의 생명을 내놓으셨던 분들이십니다. 이웃이 밀고하여 심지어는 가족이 밀고하여 관아에 끌려가도, 주님을 원망하지 않고 오히려 기꺼이 증거가 되며 신앙인의 모범을 보이셨습니다. 이렇듯 우리도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도록 기꺼이 자기 자신을 내어 놓을 수 있는 신앙인이 되도록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김보성 베드로 신부
  | 09.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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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에게 잘 알려진 한자어 중에‘전화위복’이라는 말이 있습니다.‘화가 바뀌어 오히려 복이 된다는 뜻으로, 어떤 불행한 일이라도 끊임없는 노력과 강한 의지가 있다면 불행을 행복으로 바꿀 수 있다는 말’입니다. 순교자 성월을 지내며 순교자들의 희생정신과 그들에게 용기를 주신 하느님의 이끄심을 기억하는 이때에, 전화위복의 뜻은 우리에게 많은 위로와 강한 신념을 갖게 하는 원동력이 됩니다.

오늘은 온갖 역경과 박해 속에서도 꿋꿋이 자신의 신앙을 지켰던 성 김대건 안드레아와 성 정하상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들을 기억하는 대축일입니다. 이날은 우리나라의 103위 순교성인들 뿐만 아니라, 아직 성인품에 오르지 못한 순교자들과 이름조차 모르는 많은 순교자들의 삶을 기념하는 날이기도 합니다. 어떻게 우리의 선조는 자신의 목숨까지 내놓으면서 자신의 굳은 믿음을 버리지 않았을까요? 목숨을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아서일까요? 우리와 다른 특별한 은총을 받아서일까요?

죽음이라는 것은 예수님께서도 받아들이기 힘든 순간이었습니다. 겟세마니 동산에서 피땀을 흘리시며 기도하실정도로 피하고 싶었던 고통과 시련이었습니다.

“아버지, 아버지께서 원하시면 이 잔을 저에게서 거두어 주십시오.”(루카 22, 42)

이렇게 예수님께서도 잔을 거두어 주십사고 청할 정도로 죽음이라는 것은 두려운 것이었습니다. 당시 우리의 선조들 또한 마찬가지로 죽음이라는 것은 피하고 싶은 고통과 시련 그 자체였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어떠한 상황에서도 결코 포기하지 않고 오로지 주님께 매달리며 주님의 자녀임을 잊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하느님의 더 큰 영광을, 그리고 우리가 삶의 목표로 삼고 있는 구원을 이루어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순교자 성월을 맞이하며 우리는 어떠한가요? 목숨을 내놓는 순교로써 신앙을 지키는 시대는 아니지만 우리 또한 마찬가지로 갖가지 시련과 고통의 위기를 맞이하게 됩니다. 목숨을 내놓는 순교가 아닌 정신적인 박해들이 우리 앞에 시련과 고통으로 다가 옵니다. 외부 환경과 부딪히는 경우, 수많은 물질적인 유혹들, 세상의 쾌락을 알려주는 유혹들, 이러한 외부환경과의 마찰 속에서 누구나 세상의 고통과 시련이라는 위기를 만나게 됩니다. 그 누구도 세상의 고통과 시련을 한 번도 느끼지 못하고 겪어보지 않은 사람은 없습니다. 언제, 그리고 어떠한 상황으로 다가오는지는 모르지만 위기는 언제든지 내게 올 수 있습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우리는 얼마나 이러한 위기의 상황을 극복하기 위해 노력했는가 입니다.‘전화위복’의 뜻처럼 화가 바뀌어 복이 되기 위해서는 끊임없는 노력과 강한 의지가 필요합니다. 그리고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인은 세상의 정신적인 박해 안에서 내가 끊임없는 노력과 강한의지를 갖기 위한 힘을 하느님께 청하는 것입니다. 좌절과 포기가 아닌 신앙의 주관과 확신을 갖고 극복해나가는 것이 이 시대의 또 다른 순교 방식일 것입니다.

이번 한 주간 우리 앞에 다가오는 고통과 시련을 없애달라고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갖가지 고통과 시련을 극복하기 위한 힘을 청하는 시간이 되셨으면 좋겠습니다.

인천교구 배희준 신부
  | 09.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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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루카 9, 23)

9월은 자신의 신앙을 증거하며 죽음을 당한 한국 순교 성인?성녀들을 특별히 공경하고 그들의 행적을 기림으로써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고 하느님의 구원 은총에 감사하는 순교자 성월입니다. 그리고 오늘 우리는 특별히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와 성 정하상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들을 기억하며, 순교 성인들께서 보여주신 신앙의 모범을 다시 한 번 되새겨봅니다. 그중에서도 서소문 밖에서 순교한 성녀 김누시아 루치아의 이야기를 통해 이 땅의 순교자들의 신앙을 함께 나누고자 합니다.

시골 처녀였던 성녀는 피바람이 몰아치던 기해년에 천주교도들을 쫓던 형리를 스스로 찾아가 당당하게 자신이 천주교 신자라고 밝히며 옥고를 치르고 곤장형을 맞게 됩니다. 며칠 후 형리들은 그녀에게 천주교를 버리고 목숨을 구하라고 회유를 해보지만, 성녀는 죽어도 배반할 수 없음을 밝히면서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나에게 배교를 권하는 것은 헛되이 시간을 보낼 뿐이외다. 내가 관청에 스스로 찾아온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증명하고자 함이었습니다……. 진정한 천주교인은 천주를 위하여 살고 그를 위하여 죽는 것이외다!” 계속되는 심문에서 “너는 천주를 보았느냐?”라는 형리의 질문에 성녀는 “시골 사람들이 나라의 임금님을 보지 못하였다고 임금님 계신 것을 믿지 않더이까? 나랏일이 되어가는 것을 보면 임금님이 계심을 믿을 수 있듯이, 천지 만물을 보고 이것들을 만드신 최대의 임금님이신 천주님이 계심을 믿는 것”이라고 대답합니다. 이처럼 성녀 김누시아 루치아는 비록 배우지 못한 시골 처녀였지만 자신의 신앙을 떳떳하게 고백하고, 죽음으로써 그 신앙을 지켜냈습니다.

“무엇이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갈라놓을 수 있겠습니까? 환난입니까, 역경입니까, 박해입니까, 굶주림입니까, 헐벗음입니까, 위험입니까, 칼입니까?”라고 하신 사도 바오로의 말씀처럼 이 땅의 순교자들은 비록 자신들을 핍박했던 인간들 앞에서 비참하게 죽어갔지만, 그들은 더 높고 깊은 진리 속에서 이 세상을 살아갔으며, 그리고 그들을 사랑하신 주님의 도움으로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됩니다. 지금 이 순간을 살아가고 있는 우리는 순교 성인?성녀들과 같이 더 이상 피로써 우리들의 신앙을 증거 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이 땅의 순교자들께서 보여주신 것처럼 우리들의 신앙을 고백하고 더 나아가서 우리들의 삶 안에서 주님의 사랑을 실천하며 복음 말씀을 온 세상에 전파하는 증거자로서 살아가야 됨을 알고 있습니다. 따라서 지금 이 시대의 순교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의 삶으로 보여주는 선교라고 생각됩니다. 매년 순교자 성월을 맞을 때마다 “장하다. 순교자 주님의 용사여…….”라고 목메어 노래하면서 단순히 그들을 칭송만 하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 장한 의미를 우리들의 삶으로 보여주어야 할 것입니다.

<인천교구 송태일 안셀모 신부>
  | 09.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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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 필요한 것을 필요한 만큼!

오늘 복음에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를 지고 당신을 따르는 것이 자신을 잃거나 해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신을 구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군에 와서 해야 하는 것 중에 체력측정이 있습니다. 체력측정 종목 중에 다른 것들은 크게 신경이 쓰이지 않았지만, 3km 달리기는 부담스러웠기 때문에 체력측정 전에 오래달리기 연습을 따로 해야만 했습니다. 가벼운 옷과 운동화 등 오래달리기 연습에 필요한 것들을 준비했습니다. 그리고 혹시 모른다는 생각에 모자와 선글라스, MP3 그리고 음료수를 사 먹을 약간의 돈까지도 준비했습니다.

그런데 막상 달리기를 시작해보니 필요할지 모른다고 생각하여 준비한 것들이 정작 달리기를 하는 동안에 꼭 필요하지 않고 오히려 방해가 된다는 것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런 준비물보다 더 중요한 무언가를 잊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그것은 바로 제 몸에 항상 무겁게 들러 붙어있는 살! 이 살을 빼는 것이었습니다.

평소에 필요 이상으로 많이 먹던 음식들, 먹을 때는 제 몸에 도움이 된다고 믿으며 만족감도 많이 느꼈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오래달리기를 하면서 그러한 마음이 모두 저의 욕심이고 식탐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만들어진 살들을 모두 껴안고 오래달리기를 하는 것이 정말 힘든 일임을 다시 한 번 느끼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준비하는 동안에 점차 음식을 줄이며 필요한 만큼만 먹으려 노력하였습니다.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른다는 것이 어쩌면 오래달리기하는 것과 비슷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해 봅니다. 만약 우리의 삶이 너무 무겁게 느껴지고 그것이 예수님께서 주신 십자가라는 부담으로 다가온다면 그 십자가가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정말 우리에게 필요한 십자가인지, 혹시 나의 만족과 욕심을 위해서 필요할지도 모르는 것을 스스로에게 지게 하는 것은 아닌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기억하는 순교자들은 “신앙”을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가치로 여기셨습니다. 그래서 신앙이라는 꼭 필요한 십자가를 지고 걸으신 것입니다. 순교자들의 삶이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 고통과 고난의 길로 보일지라도 그분들의 삶은 평화와 희망으로 가득 찰 수 있었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과거에 비해서 너무 많은 생각과 물질적인 것들로 가득 찬 세상에서 살고 있습니다. 그래서 필요하지 않은 것을 꼭 필요한 것으로 착각하거나, 너무 많은 것들로 우리의 삶을 스스로 무겁게 하는지도 모릅니다. 이번 주간을 보내며 과연 내가 지고 있는 십자가는 무엇인지, 그리고 내가 지고 있는 것들이 꼭 필요한 것인지 생각해 보면 좋겠습니다.

▮ 인천교구 김학신 야고보 신부 : 2016년 9월 18일
  | 09.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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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가 그들의 신념과 선택을 우습게 여겼습니다. 보이지 않고 만져지지 않는 불확실 함 속에 주어질 상급 따위를 자신의 생명과 저울질하는 것 자체만으로도 어리석다 말했습니다. 망설임 없이 죽음을 선택한 그들을 보며 그 누군가는 어렴풋이나마 생각했을지 모릅니다. ‘그들이 외치는 하늘나라는 무엇인가? 자신의 생명보다 귀한 것이 대체 무엇인가?’

하지만 이 고귀한 앓은 오로지 순교자들만의 소유입니다. 이는 그 누구도 침범할 수 없는 하느님과의 깊은 유대이며 온 몸과 마음으로 기억하고 간직해온 사량이기 때문입니다. 시편의 말씀처럼 ‘맛보고 눈여겨보지 않으면 결코 알 수 없는 주님의 좋으심"(시편 34,9)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오로는 이들을 두고 로마서에서 이렇게 전합니다. "나는 확신합니다. 죽음도 삶도 천사도 권제도 현재의 것도 미래의 것도 권능도 저 높은 곳도 저 깊은 곳도 그 밖의 어떠한 피조물도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님에게서 드러난 하느님의 사랑에서 우리를 떼어 놓을 수 없습니다."(로마 8,38-39)그 무엇도 진리를 깨닫고 하느님의 말씀으로 사는 기쁨과 위로가 가득한 그들의 영혼을 흔들지 못했습니다.

이러한 굳건함은 제게 신비롭게 다가옵니다. 죄의 유혹에 쉽사리 흔들리는 저와는 달리 그렇게 복음이 주는 기쁨에 머물고 살아갔던 그들이 부럽습니다. 호수처럼 잔잔하고도 봄바람처럼 부드러운 듯 한 고요와 평온 안에서 주님과 나누던 우정의 순교자들이 그리운 건 그 만큼 신부로 살면서도 세속에 물들고 주님을 찾지 않았다는 반증일 것 입니다. 어쩐지 요즘 사는 꼬락서니를 돌아보니 텅텅 비어있는 듯합니다.

‘희생은 무엇일까. 과연 나는 무엇을 희생할 수 있을까?’ 오늘 그들의 ‘순교’는 제게 ‘주님을 위혜 무엇을 희생하겠느냐’고 날카로운 물음을 내던집니다. 오늘날 세상은 우리에게 ‘순교’를 바라지 않습니다. 또한 그러기에 앞서 희생에 무뎌진 우리 마음을 주님과 함께 가다듬어가는 일을 우선 시 해야 할 것입니다. 다만 무엇이 숭고한 희생이고 무엇이 작은 희생인지와 같은 무의미한 구분은 제쳐두고 ‘오늘 여기에’ 서서 주님을 사랑하기 위해 이웃을 사랑하기 위해 현실적으로 가능한 것부터 찾고 실천하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순교자들이 척박한 신앙의 영역에서 주님을 위해 기꺼이 생명을 내놓았다면 보다 안정화된 영역 안에 사 는 우리로서는 주님을 위해 내어놓을 수 있는 것들이 더욱 많을 것입니다. 가정에서든지 사회에서든지 교회공동체 안에서든지 다양한 영역 안에 살아 계시는 주님의 얼굴을 볼 수 있다면 말입니다. 때로는 베로니카처럼 이웃의 얼굴에 묻은 피땀을 닦아주고 때로는 마리아처럼 사랑하는 이의 지친 발에 마음의 향유를 부어줄 수 있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바랍니다.

오늘 하루 다시금 순교자들의 믿음과 정신을 묵상하며 부족했던 우리의 모습을 돌아보고 성령께 필요한 은총 을 간청합시다. 또한 오늘도 이상향을 찾으며 괴로워하지 말고 진정 내가 주님을 위해 내어드릴 수 있는 것을 찾고 실천하는 하루를 만들어 봅시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 오려면,자신을 버리고 날마다 제 십자 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루카 9,23)

▥ 인천교구 방성수 야고보 신부 - 2017년 9월 17일
  | 09.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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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 부끄러움에 노래

순교자의 끓는 심장을 느끼지 못하고서 순교자를 공정하고자 하는 것은 도리가 아닐 것입니다. 김대건 안드례아가 남긴 옥중서간에 어린 비장한 슬픔을 모르고서 그를 예찬하는 것은 무례일터요, 정 하상바오로가 그의 명문<상재상서>에 실은 천주교인들의 탄원을 외면하고서 그를 기리고자 하는 것은 결례일터입니다. 차제에 저들의 육성 한 마디씩에라도 귀 기울여 보고 싶습니다.

먼저, 김대건 안드레아의 목 메인 음성입니다. 당시 소팔가자에 머물고 있 던 페레올주교에게 보낸 고별의 편지 한 대 목 입니다.-[---]이런 대답을 하였다고 주리를 틀고서, 관장이 또 말하기를 “네가 배교하지 않으면 때려 죽이겠다”하기에, ‘마음대로 하십시오. [---] 관장께서 내가 천주를 사랑하기 때문에 이런 형벌을 당하게 해주시니 관장께 감사합니다. 그리고 우리 천주님이 이런 은공을 갚고자 당신을 더 높은 관직에 올려 주시기를 바랍니다” 라고말하자, 이 말을 듣고는 관장과 모든 사람이 비웃었습니다. [---]이후 천당에서 만나 뵙겠습니다.“

저 조 선의 1호 사제 김대건을 소시적부터 눈여겨 보았다가 사제가 될 것을 권유했던 인물이 바로 정하상바오로였습니다. 그는 19세기 초 조선천주교회의 실질적 지도자로서 오랜 세월 성직자 영입에 공을 들이다가, 조선교구 제2대 교구장이었던 앵베르 주교의 슬하에서 면대면 신학생 수업을 받기에 이릅니다. 하지만 그는 사제의 꿈을 이루지 못한 채 순교함으로써,1호 사제의 기회를 후대로 양보한격이 되었습니다. 그는 1839년 기해박해 때 피비린내 나는 고문을 당하던 중 조정에 올린글 <상재상서(上宰相書)>에서 오장육부의 소리로 천주신앙의 정당함을 이렇게 애소했습니다.“[---] 세상에 있을 때에 정신이 흐려져 깨닫지 못하다가 육신이 죽은 뒤에 뉘 우친다 해도 때는 이미 늦었습니다. 그러기에 목을 벨 도끼가 눈앞에 있고 몸을 삶을 가마이 제 뒤에 있어도 꿋꿋이 굽히지 않은 사람이 대대에 적지 않습니다. 이것도 참된 종교의 증거입니다. [---]대체로 삶을 손해보고 목숨을 다하고激命),주님의 참된 가르침을 증거하며, 주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것은, 우리 무리가 해야 할 본분입니다. [---] 차라리 사대부들에게 죄를 얻을지 언정, 천주교에 죄를 얻기는 바라지 않습니다. [---]"

무엇을 더하겠습니까? 극한 고통의 순간 초연히 박해자를 위해 기도했던 저 대장부의 기개, 한편 바깥 신자들이 눈에 밟혀 영 자신의 단명이 아쉬웠을 목자의 슬픔, 그 앞에 먼 발치의 후배는부끄럽기 짝이 없습니다. 천주 신앙에 올인하여 발과 가슴으로 이윽고 목숨 건 변론으로 진리를 증거한 국가적 영재의 갓 퍼스트(God first)정신 앞에, 늘 우리의 구시령 기도는 얼마나 옹색한지 절감합니다.

“사람이 온세상을 얻고도 자기 자신을 잃거나 해치게 되면 무슨 소용이 있느냐?”(루카 9,25.)이 무서운 물음에도 우리는 도무지 무성찰로 “온 세상”을 탐하는 데만 골몰하지 않았는지 거슬러 혜아려 봅니다.

우리들의 어리석음 위로 순교자들의 영광이 세세에 빛나고 있음에 화들짝 정신을 차리고 “백 풀린 손과 힘 빠진 무릎을 바로”(히브 12,12)세워봅니다.

▦ 인천교구 노베르토 신부 : 2018년 9월 23일
  | 09.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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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넷에서 흥미로운 영상 하나를 볼 수 있었습니다. 아이의 자존감에 영향을 미치는 것이 무엇인지를 실험을 통해서 보여주는 것이었습니다. 우선 아이와 엄마를 한 방에 단 둘이 들어가게 한 뒤에 아이가 퍼즐 조각을 맞출 수 있게 합니다. 그런데 이 퍼즐을 어린 아이가 맞추기에는 너무나 어려웠지요. 아이는 이렇게도 맞춰보고 저렇게도 맞춰보지만 뜻대로 되지 않습니다. 이에 어떤 엄마는 아이를 지지하면서 혼자서 풀 수 있도록 했고, 또 다른 엄마는 계속해서 관여를 합니다. 여기서 누구의 자존감이 클까요? 혼자 풀었던 아이의 자존감이 훨씬 더 높았습니다.

자존감을 높이려면 성공의 체험을 많이 있어야 한다고 합니다. 특히 다른 사람의 도움을 통해서가 아니라 자기 자신의 노력을 통한 성공의 체험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많은 부모들이 기다리지 못합니다. 대신 자신이 관여해서 쉽게 문제를 풀 수 있게 하는 것이 아이를 도와주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지요. 그러나 실제적으로는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많은 학자들이 말합니다.

야구의 포지션은 타자, 투수, 야수로 크게 나눌 수가 있는데, 이중에서 누가 더 미신을 많이 믿을까요? 타자, 투수, 야수의 순이라고 합니다. 야구 경기를 보면 포지션 별로 성공확률이 다릅니다. 타자는 세 번 타석에 들어가서 딱 한 번만 안타를 치면(3할 타율) 뛰어난 선수가 됩니다. 그에 반해서 야수는 한 경기에서 실책할 확률이 거의 없지요. 투수는 그 중간 정도입니다.

성공 확률이 낮을수록 스스로를 믿지 못하면서 미신 등의 징크스를 만들어내는 것입니다. 이처럼 자기 스스로 성공을 만들 수 없다고 생각하면 이상한 것을 믿으면서 자존감도 떨어지게 됩니다. 기도도 마찬가지가 아닐까요? 기도의 응답을 많이 느낀 사람이 자존감이 높아질 수밖에 없습니다. 이를 위해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요? 멈추지 않고 기도를 해서 성공률를 높이는 것입니다.

오늘은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와 성 정하상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들 대축일입니다. 과거의 우리 순교자들을 떠올려봅니다. 자기 자신에게 제일 중요하다고도 말할 수 있는 생명까지도 주님을 위해서 내어놓을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일까요? 바로 주님께 대한 굳은 믿음 때문입니다. 주님 안에서 참 기쁨의 체험을 많이 했었기 때문에 그들은 스스로 선택해서 기쁜 마음으로 순교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 결과는 하늘 나라에서 영원한 생명을 얻는, 진정으로 목숨을 구할 수 있었습니다.

주님 안에서 성공의 체험을 많이 하는 우리가 될 수 있습니다. 바로 주님과의 대화인 기도를 통해 굳은 믿음을 갖게 된다면 분명히 진정한 성공의 체험을 하게 될 것입니다. 이를 위해 그 모범을 보여주신 순교자들의 삶을 묵상해 보십시오.

▦ 인천교구 조명연 신부 : 2018년 9월 20일
  | 09.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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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 시(視)와 견(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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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視)와 견(見). 우리말로 번역하면 둘 다 ‘보다’를 의미한다. 하지만 일반적으로 시(視)는 보여진 것(示, 표시된 것)이 눈에 들어오는 것이라면 견(見)은 눈동자에 맺혀진 것 이상의 어떤 것을 알아챔(각, 覺)과 연관된다. 흔히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니라는 말도 같은 의미다. 보이는 것 너머에 있는 의미를 깨달아야 한다는 것이다.

시(視)는 어떤 의미에서 매우 수동적이다. 자기의 의지와 관계없이 비춰지는 것을 보는데 그치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텔레비전을 시청(視聽)한다고 하지 견문(見聞)한다고 말하지 않는다. 이에 반해 견문(見聞)을 넓힌다고 할 때 견(見)은 단순히 여러 가지 것들을 보고 저장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무언가를 찾아나서는 모험을 감행하는 것이다. 모험은 언제나 두렵지만 희망적이고 이때 희망을 지탱해 주는 것이 믿음이다. 깨달음이란 이러한 모험과 희망 그리고 믿음에 의한 결단을 통해 얻어지는 것이다.

희망은 언제나 불확실하지만 그 안에는 신뢰나 믿음이 바탕이 돼 있기 때문에 삶에 생동감을 불어넣어 주는 원동력이다. 신뢰나 믿음이 사라진다면 그것은 희망이 아니라 환상이거나 망상에 불과하다. 동물적인 삶과 인간적인 삶은 희망하느냐 하지 않느냐에 달려 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희망하지 않는 삶은 주어진 대로 보거나(視) 들을(聽)뿐이다. 생각한대로 살지 않으면 사는 대로 생각하게 되는 법.

희망함의 두려움을 견딜 수 있는 믿음이 없다면 우리는 주어진 조건들에 자신의 삶을 억지로 끼워 맞출 수밖에 없다. 예수님도 죽음의 고통이 두려웠지만 새로운 하느님 나라에 대한 희망과 아버지에 대한 믿음으로 그것을 극복하셨다. 이러한 희망과 믿음이 부족할 때 취하게 되는 선택은 단순한 생존을 유지하는 것이다. 생존을 위해 탐하고 적립하며 다투는 것이다. 동물의 삶과 다를 것이 없다.

“어리석은 자들의 눈에는 의인들이 죽은 것처럼 보이고 그들의 말로가 고난으로 생각되며 우리에게서 떠나는 것이 파멸로 여겨지지만 그들은 평화를 누리고 있다. 사람들이 보기에 의인들이 벌을 받는 것 같지만 그들은 불사의 희망으로 가득 차 있다.”(지혜 3,2-4)

오늘 제1독서 지혜서 말씀이다. 어리석은 자들의 ‘눈’에 의인들은 생존만을 위해 사는 그들과 다른 삶을 살기에 죽은 것처럼 ‘보일(視)’ 것이다. 똑같은 눈이지만 의인들의 눈은 하느님을 향해 있다. 생존을 유지하면서도 그것만이 전부가 아니라는 부정할 수 없는 초현실에 정직하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것에 눈을 감는다. 왜냐하면 생존 너머의 가치들은 삶이 대면하고 있는 다양한 불안을 해결해 줄 것 같지 않은 두려움 때문이다.

하지만 의인들은 생존 너머에 존재하는 삶에 희망을 두고 하느님에 대한 믿음으로 두려운 길을 개척해 나간다. 예수님의 모습과 닮아 있는 것이다. 그들은 ‘불사의 희망’으로 가득 차 있는 것이다. 육체적 생명이 소멸하지 않는 희망이라기보다 육체적 생존을 넘어선 영원한 가치에 대한 희망이다.

누구나 죽음보다는 삶을 원하지만 때론 삶보다도 더 중요한 것으로 인해 죽음도 마다하지 않는다는 맹자의 살신성인(殺身成仁)도 같은 의미다. 목숨을 무가치하게 여기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전부가 아님을 알아챈(見) 것이다. 죽음도 마다하지 않고 완성하려는 그것은 바로 사랑(仁)이다. 누군가를 사랑해 모든 것을 포기해도 두렵지 않았던 과거의 기억들을 통해 우리는 이것을 간접적으로 이해할 수 있다. 우리는 사랑할 때 그것이 가져다 줄 것이 무엇인지 명확하지 않음에도 모험을 감행한다. 눈에 보이는 것 이상을 희망하고 믿기 때문이다.

“나는 확신합니다. 죽음도, 삶도, 천사도, 권세도, 현재의 것도, 미래의 것도, 권능도, 저 높은 곳도, 저 깊은 곳도, 그 밖의 어떠한 피조물도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님에게서 드러난 하느님의 사랑에서 우리를 떼어 놓을 수 없습니다.”(로마 8,38-39)

바오로 사도는 믿음에 기초한 하느님의 사랑을 깊이 있게 이해한 인물이다. 그는 하느님에 대한 나의 사랑이라 하지 않고 예수님에게서 드러난 하느님의 사랑이라고 말한다. 이는 자신의 사랑 고백이라기보다 나에게 베풀어 주시는 하느님 사랑에 대한 믿음이다. 자녀로서의 사랑은 믿음으로 시작된다. 하느님께서는 당신 아드님의 목숨마저도 인류에 대한 사랑으로 희생하신다. 인류와 세상의 주인이신 하느님께서 나에 대한 사랑으로 인해 당신을 포기하신 것이다.

우리 모두는 이러한 사랑을 받는 존재다. 모든 것인 하느님께서 우리를 선택하셨으니 죽음이나 삶, 천사나 권세, 현재와 미래 이 모든 것들은 그분 앞에서 상대적인 것에 지나지 않는다. 우리는 결국 모든 것을 소유한 것이다. 이러한 사랑이 모든 이에게 베풀어졌지만 그것을 알아챌(見) 만한 눈을 가진 사람은 많지 않다. 아니 오히려 삶에 대한 두려움으로 이것을 외면하려 할 뿐이다. 그래서 이미 선포된 복음을 듣고도 “나와 내 말을 부끄럽게” 여기게 되는 것이다.

오늘은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와 정하상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들 대축일이다. 새로운 세상을 꿈꿨고 그에 대한 희망과 믿음으로 죽음을 마다하지 않으신 분들이다. 순교자들은 죽음을 희망한 것이 아니다. 단지 우리에 대한 하느님의 사랑을 믿었기 때문에 이 세상 것 너머의 삶을 희망해 육체적 생존에 연연하지 않았을 뿐이다. 희망이 지닌 불확정성에 대한 두려움으로 생존만을 추구하던 자들은 생명을 얻고 유지하려 했지만 결국 육체적 죽음으로 더 이상의 생명을 얻지 못한다. 그들에게 죽음은 모든 것이 소멸되는 완전한 종말의 순간이기 때문이다. 오직 보이는 것에 자신을 매어 둔 탓이다.

그러나 예수님의 사랑에 대한 믿음 때문에 자기 목숨을 잃었던 그분들은 모든 것이신 하느님으로 인해 육체적 목숨 이상의 것을 얻게 된다. 목숨에 연연하지 않았으므로 육신의 죽음이 종말이 아니게 된 것이다. 오늘 복음의 말씀이 바로 이것이다.

“정녕 자기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나 때문에 자기 목숨을 잃는 그 사람은 목숨을 구할 것이다.”(루카 9,24)

순교자들께서 목숨을 잃은 이유는 단 한가지다. 바로 그리스도의 사랑에 대한 믿음 때문이다. 그분들보다 앞서 목숨을 내놓으신 그리스도의 사랑을 본(見) 것이다. 그에 비해 바리사이들은 예수님에게서 죽음만을 보았을(視) 뿐이다. 그런 자들에게 부활이 보일 리 만무하다.

당장 눈앞에 보이는 것들에 휘둘리며 살 것인가 아니면 그 너머를 희망하며 살 것인가. 순교자들의 증거에서 그것을 읽어내지 못한다면 우리의 눈은 무엇을 위해 있는 것일까. 사람의 아들은 요나의 기적 말고 따로 보여줄 것이 없다던 예수님 말씀도 같은 의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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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서강휘 신부
가톨릭신문 2019년 9월 22일
  | 09.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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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8   [청주] 행복에로의 초대  [1] 357
507   [안동] “예수님께 기도드리면 빨리 나을 거예요.”  [2] 634
506   [원주] 전교는 우리의 마음에서  [3] 351
505   [수원] 선교는 신자들의 진정한 생활의 표양이다.  [7] 1970
504   [서울] 선교는 말과 행동으로 함께 해야 합니다.  [5] 2082
503   [대구] 전교와 신앙인의 삶  [5] 2035
502   [의정부] 불리움에서 파견으로  [5] 2014
501   [수도회] 세상 끝까지 퍼져나가야할 복음  [5] 1719
500   [마산] 신앙보다 더 좋은 선물은 없다  [7] 2193
499   [부산] 그리스도 신앙인은 하늘과 땅을 새롭게 이해합니다.  [9] 2181
498   [군종] 내 삶이 내 메세지  [2] 360
497   [인천] 선교방법은 두 가지  [8] 2186
496   [전주] 믿는 것을 삶으로 증거하자.  [2] 1918
495   [춘천] 전교는 왜 해야 하는 것일까요?  [7] 2252
494   [광주] 우표붙이기  [2] 390
493   [대전] 복음화로 세상에 희망을  [4] 861
492   (녹) 민족들의 복음화를 위한 미사 (전교주일) 독서와 복음  [5] 1925
491   (백) 수호천사 기념일 독서와 복음 (10월 2일)  [1] 12
490   [부산/마산/광주] 한 어린아이의 작은 길  [6] 2671
489   [수도회] 어디사세요  [7] 2227
1 [2][3][4][5][6][7][8][9][10]..[26]  다음
 

 

대축일/명절강론 코너 ( 대축일/명절 미사에 관련된 강론자료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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