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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 순교란?
조회수 | 3,390
작성일 | 07.09.22
어떤 신부님께서 쓰신 편지의 한 부분을 읽어드리겠습니다. “저의 어머니는 10년 동안 못 본 아들을 불과 며칠동안 만나보았을 뿐 또다시 홀연 잃고 말았으니, 주교님께 간절히 바라건대, 슬픔에 잠긴 저의 어머니를 잘 위로하여 주십시오. 저는 사랑하올 부친이요 공경하올 주교님께 마지막 하직의 인사를 드리는 바입니다. 천당에서 만나 뵙겠습니다. 예수를 위하여 옥에 갇힌 김 안드레아 신부”

이 편지는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께서 순교를 당하시기 얼마 전에 감옥에서 쓰신 편지입니다. 사제가 되기 위해 10년 동안 다른 나라에서 갖은 고생을 하며 공부하였고, 마침내 신부가 되어 조선에 입국한지 1년 남짓 지나 체포되어 모진 고문을 이겨내고 죽음을 기다리며 주교님께 쓴 편지 입니다.

오늘은 최초의 조선인 사목자였던 사제 김대건 안드레아와 훌륭한 평신도 정하상 바오로와 동료순교자 대축일입니다. 우리 모두는 순교자들이 뿌리신 피의 대가로 이렇게 신앙생활을 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순교’란 누가 뭐라고 해도 내가 믿는 예수님이 하느님이시며 구원자이시라는 것을 증명하는 것입니다. 물론 이 증명은 자기가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을 다 바쳐서,
비록 하나밖에 없는 목숨까지라도 걸고서라도 해내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순교’라는 단어에 너무 익숙합니다. 너무 익숙하기 때문에 ‘순교’라는 두 글자만 머리에만 맴돌 뿐 진실한 의미는 몸과 마음속에 쉽게 다가오지 않습니다.

하느님을 위해서 목숨을 바치는 것.’ 말은 쉬운 것 같지만 막상 우리의 삶 속에서 실천하기는 쉬운 일은 아닌 듯싶습니다. 사람 많은 식당에서 십자성호를 긋고 식사하기위해 큰 용기가 필요하듯이 말입니다. 요즘에는 하느님을 믿는다는 사실 하나 때문에 사람을 죽이고 감옥에 가두지는 않습니다. 옛날처럼 신앙생활을 해나가는데 어떠한 큰 박해가 있는 것도 아닙니다. 하지만 어떤 사람들은 오늘날이 그리스도교 신자로서 살아가기가 더욱 어렵다고들 합니다. 하루가 다르게 변하고 있는 현대사회에서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일이 어떻게 보면 불가능하게만 보일수도 있습니다. 과연 오늘날 우리는 이 시간 이 자리에서 순교할 수 있겠습니까?

자발적으로 하는 희생과 자선, 기도 등 신앙을 증거하는 모든 것들이 현재의 우리에게 필요한 순교정신일 것입니다. 우리들이 실제로 살아가고 있는 삶 속에서 할 수 있는 순교는 우리의 생각과 말과 행동이 그리스도를 닮아가고 또한 그분의 사랑을 친구와 형제들에게 전하고 실천하는 것입니다. 순교자들이 하느님께 목숨을 바친 것처럼 우리도 우리의 모든 것을 그분께 드린다는 마음으로 생활해야 할 것입니다.

김대건 신부님께서는 순교 당하기 직전에 큰소리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나의 마지막 때가 왔습니다. 여러분 귀를 기울여 들어주시오. 내가 외국사람과 만난 것은 오직 종교를 위해서 입니다. 하느님을 위하여 나는 죽어갑니다. 여기서 영원한 생명이 시작됩니다.”

우리도 순교성인들을 본받아 우리 삶 속에서 하느님을 증거해야 되겠습니다. 그러면 우리 삶 한가운데서 영원한 생명이 시작될 것입니다.

예진광(이레네오)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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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보게 부디 나를 단 칼에 베어 주시게...”

“여보게 부디 나를 단 칼에 베어 주시게...” 이 말씀은 우리 신앙 선조께서 결코 포기할 수 없는 신앙때문에 사형을 언도받고 형장에서 자신의 목을 베기 위해 준비하는 사형집행인에게 마지막으로 부탁하신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결코 죽음이 두려워서 하신 말씀이 아니라 자신의 소망을 이루기 위한 것이었음을 다음 말씀을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자네가 그렇게만 해 주면 나는 그만큼 빨리 우리 주님을 뵐 수 있다네...부탁하네!”

수많은 박해를 통해서 신앙 선조들께서 흘리신 순교의 피는 결코 헛되지 않았습니다. 그 피는 우리 신앙의 씨앗이 되었고 밑거름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대체 얼마나 충실하게 사셨으면 그렇게 마지막 순간까지 주님을 향한 뜨거운 열정을 드러낼 수가 있었을까 하고 생각해 봅니다.

우리는 세상 안에서 신앙의 삶을 산다는 것이 참으로 힘들고 어렵다고 느낄 때가 많습니다. 조그만 고통이 주어져도 그 고통의 의미를 생각하고 주님의 위로를 구하며 그분께 자신을 맡기려 노력하기 보다는, 고통 앞에 약해져 가는 우리의 모습을 자주 봅니다. 또 세상의 유혹 앞에 약해지고 흔들리는 자신을 발견하면서도 신앙으로 채워가는 모습을 가지려하기 보다는 자꾸만 세상을 핑계로 뒷걸음치고 변명하려는 모습을 보입니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 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루카 9,23) 주님께서는 누구나 당신을 따라 영원한 행복을 누릴 수 있게 되기를 원하십니다. 하지만 그냥 따르는 사람들을 원하시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삶을 통해서 주어지는 고통의 십자가를 지고 진정으로 따르기를 원하십니다. 당신이 받으셨던 고통이 영광이 되고, 맞이했던 죽음이 부활이 됨을 믿고 따르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우리 신앙 선조들께서는 순교를 두려워하지 않으시고 우리가 걸어가야 하는 길을 충실하게 걷기 위해 노력하셨습니다. 박해를 피해 모든 것을 버리고 이리저리 다니던 힘겨운 여정 속에서도 희망의 눈으로 주님의 영광에 동참하기를 원하셨고 기회가 주어진다면 두려움 없이 기꺼이 자신을 내어놓을 용기를 주십사하고 날마다 기도하셨습니다. 그래서 그분들은 날마다 새롭게 주님으로 자신의 삶을 채워가는 신앙의 삶이 어떠한 것인지 체험하셨고 순교의 가치를 우리에게 보여 주셨습니다. 우리도 신앙 선조들의 모범을 따라 그렇게 살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주님을 따른다는 것은 한순간의 다짐이나 생각만으로는 결코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주어진 삶의 하루들을 항상 새롭게 살기 위해서는 먼저 세상의 유혹 앞에 약해질 수 있는 자신을 인정해야 합니다. 그래서 부족하고 나약한 자신이 주님을 따르는 길에서 벗어나지 않고 참된 영광에 동참할 수 있도록 지켜 주십사 하고 끊임없이 기도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나는 확신합니다.”(로마 8,38) 조금이라도 더 빨리 주님을 뵙기 위하여 기왕이면 한번 만에 자신의 목을 베어 달라고 부탁하시는 신앙 선조의 확신에 찬 얼굴을 떠 올려 봅니다. 그 확신에 찬 얼굴은 믿음과 희망으로 다져진 사랑으로 세상을 산 사람만이 지닐 수 있는 것입니다. 피 흘리는 박해의 여정 속에서도 몸과 마음을 다하여 사랑하는 주님을 따르기 위해 매순간 충실하게 준비한 삶의 흔적을 우리는 그 마지막 순간에 너무나 선명하게 볼 수가 있습니다.

우리도 세상 속에서 선조들께서 보여준 그 확신에 찬 삶을 드러낼 수 있도록 살아야 합니다. 그래서 세상의 유혹도, 우리 자신들의 약함도 주님을 위하여, 주님 때문에 용감히 이겨낸 사랑의 얼굴을 지닐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언젠가 우리를 천상가족으로 당신 품안에 안아주실 주님을 향해 주저함이 없이 자신 있게 달려갈 수 있도록 주어진 하루들을 충실히 살아가도록 노력합시다. 일상의 순교는 바로 지금 사랑하는 것입니다 !!

대구대교구 장병배 베드로 신부
  | 09.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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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구한 신앙을 고백하는 순교자적인 삶을...

오늘은 자랑스러운 한국교회의 순교자 성인성녀 103위를 특별히 기념하며 우리들의 신앙을 되돌아 보아야 할 것입니다. 우리 한국의 성인성녀 순교 자들은 마땅히 기억되어야 할 분들이지만 무명의 순교자로 박해시대를 살아오신 그 분들도 잊어서 는 아니 될 것입니다. 성인성녀로서의 시성을 받 은 순교자들과 더불어 시성의 반열에 오르지 못한 순교자들께서도 한국교회의 신앙초석을 다지는 데 커다란 힘이 되신 분들입니다.

한국교회뿐만 아니라 세계의 어느 곳에서도 순 교자들의 신앙은 세상의 흐름에 휩쓸려 사는 우 리들에게 경종을 울리는 하느님의 사랑이라고 생 각합니다. 하느님의 사랑으로 사신 순교자들은 세 상적인 복락에는 아랑곳하지 않았고 자신들의 마음을 온전히 하느님께로 향하여 사신 분들입니다.

그런데 오늘을 사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신앙은 과연 어떠하다고 생각하는지 모르겠습니다. 한마디로 표현해 보자면 시소놀이처럼 느껴지기도 합니다. 내가 생각하는 대로 세상이 다가오면 하느님의 존재를 인정하는 듯 하고 내가 생각하는 반대의 모습이면 하느님의 존재를 부인하는 삶의 패턴을 지니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인간관계에 있어서도 마음에 들면 오장육부까지 빼어 줄 듯 하다가도 미워하게 되면 철천지원수가 따로 없을 정도로 변해 버리는 것이 우리들의 모습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즉, 시소놀이처럼 올라갈 때는 사정없이 좋아하다가도 내려가면 곧바로 신앙까지도 저버리는 모습이 안타깝기만 합니다.

만약 우리 한국의 순교자들께서도 우리들처럼 시소놀이 하듯 수시로 변하는 신앙의 삶이었다면 한국교회의 신앙초석은 좀 더 시간이 요구되었을 것입니다. 신앙생활을 영위하는 데에 있어서는 어떠한 조건이나 상황, 환경 등을 변명으로 내세울 수는 없습니다. 흔들리지 않는 신앙으로 하느님께로 달려 나아가는 것이 곧 신앙인의 기본적 모습이고, 우리 한국교회의 신앙선조들인 순교자들의 열정과 사랑으로 살아가는 것이 신앙인의 참된 삶의 길인 것입니다.

혹시라도 우리들의 신앙에 있어서 조금이라도 흔들리는 낌새가 엿보인다면 목숨을 내어놓고 예수님의 십자가를 따르신 순교자들의 삶을 되새기며 우리들의 나약한 신앙을 굳건하게 가다듬을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만이 우리들을 영원히 살 수 있게 할 것입니다. 우리들 모두는 항상 용기를 가지고 순교자들께서 지니셨던 신앙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성령의 도우심을 청하며 예수님의 십자가 사랑을 통하여 하느님 안에 항구히 머물며 살아가는 은총도 열심히 간구하여야 할 것입니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루카 9:23)”

대구대교구 남종우 그레고리오 신부
  | 09.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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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주를 만유 위에 공경하라

오늘은 ‘성 김대건 안드레아와 성 정하상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 대축일’의 경축 이동 날입니다. 한 마디로 한국 순교자 대축일이지요. 1984년 5월 6일 서울 여의도 광장에서 있었던 시성식의 그 감동을 지금도 잊을 수가 없습니다. 그 당시 저는 군종신부로서 강원도 인제 원통에서 근무하고 있었는데 신자들을 버스 한 대에 태우고 밤새 서울로 달려서 103분의 우리 순교복자들이 드디어 성인으로 선포되는 그 거룩한 현장에 함께 할 수 있었습니다.

그로부터 꼭 20년이 지난 지금 우리는 다시 순교자 시복시성 운동을 펼치고 있습니다. 이번에는 우리나라에 총 124분이 ‘하느님의 종’(시복 후보자를 말함)으로 선정되어 시복을 위한 예비심사(재판)가 진행 중에 있습니다. 103위 성인 중에 대구의 순교자는 이윤일 요한 성인 한 분 밖에 계시지 않지만 이번 124위 하느님의 종 중에는 20위가 대구의 순교자입니다. 우리는 이분들의 시복시성을 위한 기도를 더욱 열심히 바쳐야 하겠습니다.

사실 우리가 순교자 시복시성 운동을 하는 것은 그분들에게 필요해서가 아니라 우리에게 유익이 되기 때문에 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나약해지고 흐트러진 우리의 믿음을 굳건히 하는 데 있어서 순교자의 신앙보다 더 좋은 것은 없는 것 같습니다.

정해박해(1827년) 때 체포되어 사형선고를 받고 경상감영 옥에서 8년이 넘도록 옥생활을 하다가 1835년에 옥사하신 안군심(리카르도)는 경상감영으로 압송되기 전에 상주 관아의 관장이 “국법에서 금하는 천주교를 신봉하는 것은 상감께 불충하는 것이 아니냐?”는 심문에 이렇게 대답하였다고 합니다. “천주는 온 우주의 임금이시요, 모든 인류의 아버지시니 우리는 그분을 만유 위에 공경하는 것입니다. 임금님과 관장님과 부모님은 천주 다음으로 공경해야 합니다.” 옛날에 누구한테 교리도 제대로 배우지 못했던 우리 신앙의 선조들이 어떻게 그렇게 명쾌한 대답을 할 수 있었는지 참으로 놀랍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한 분이신 천주를 만유 위에 흠숭하라’는 것은 십계명 중에서 제1계명입니다. 이것보다 더 큰 계명은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들은 이 첫째가는 계명을 잘 지킵니까? ‘빠빠라기’라는 책을 보면 아프리카의 어느 추장이 이런 말을 합니다. “백인들이 하느님을 공경한다는 것은 새카만 거짓말이다. 그들은 하느님보다 돈이라는 것을 더 섬기는 것 같다.”

우리도 하느님보다 돈을 더 좋아하고 자기 자신을 더 섬기며 자신의 학문과 지식을 더 따르는 것이 아닙니까? 성당에 와서는 ‘주님, 주님!’하고 부르지만 밖에 나가서는 전혀 주님 뜻하고는 상관없이 살아가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주님!’이라고 부르는 것은 ‘나의 주인님!’이라는 뜻인데, 말은 주님을 내 가운데 모신다고 하고서는 실제로는 가운데가 아니라 구석방에 모셔놓고 “거기 가만히 계십시오. 나오시지 마시고” 하고는 자기 마음대로 살아가는 것이 아닙니까?

믿는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한 마디로 하느님을 만유 위에 공경하는 것입니다. 세상 만물 위에 가장 높으신 분, 나의 주님, 나의 임금님, 나의 아버지로 섬기고 공경하며 그분의 뜻을 따라 사는 것이 바로 ‘믿는다’는 것입니다.

을해박해(1815년) 순교자 김종한(안드레아)의 옥중편지 중에 교우 이씨와 유씨에게 보낸 편지가 있는데 그 내용은 자기 아내를 이들 교우들에게 부탁하는 것입니다. 의지할 데 없는 자기 부인을 잘 돌봐달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자기가 하느님 안 믿는다고 하고 감옥에서 나가서 부인과 함께 행복하게 살면 될텐데 왜 다른 사람한테 구차하게 그런 부탁까지 합니까? 그것은 하느님을 만유 위에 공경하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을 만유 위에 공경하는 것이 순교자들의 신앙이요 우리들 신앙의 근본인 것입니다.

대구대교구 조환길(타대오) 주교
  | 09.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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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자신을 버리고 매일 우리 십자가를 잘 짊어지면서 주님을 따르자

불란서에서 유학하던 시절, 성 빈첸시오 수도원에서는 한국교회의 축일을 맞이할 때 마다, 수도원에 머물고 있던 유일한 한국인 사제였던 저에게 미사집전을 할 수 있도록 항상 배려해주었습니다. 저는 강론 때 기쁜 마음으로 한국교회에 대해서 소개하곤 했었는데, 미사에 참석했던 모든 사람들은 제 말을 귀담아 듣곤 했었습니다. 특히 아시아 선교에 주력해온 파리외방전교회에서는 9월 20일이 되면 한국교회의 대축일을 축하하기 위해 한국식당에서 100인분 이상의 음식을 주문해서 아시아 여러 나라 신부들과 함께 한국음식을 먹기도 했습니다. 그럴 때면 제가 한국인이고, 또 자랑스러운 순교자들의 후손이라는 사실에 가슴이 뿌듯해지곤 했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우리는 예수님을 따르기 위한 조건들을 알게 됩니다. 자기 자신을 버리는 것과 매일 자신의 십자가를 지는 것 2가지입니다.

각자 저마다 갖고 있는 알량한 자존심을 과감하게 버리지 않으면 예수님을 올바로 따라갈 수 없습니다. 또한 예수님을 잘 따라가기 위해서는 매일 자신의 십자가를 짊어져야 합니다. 살아가는 동안 누구나 자신의 십자가가 있습니다. 부모, 가족, 건강, 사업, 결혼생활 등 남들이 알든 모르든 십자가 없는 사람은 이 세상에 아무도 없습니다. 어린 아이라고 해서 십자가가 하나도 없겠습니까? 아무리 나이가 어려도 분명 십자가는 있을 것입니다.

또 나이 든 노인이라고 해서 세상 모든 십자가 중에서 가장 무거운 십자가를 지겠습니까?그것도 아닐 것입니다. 밖으로 나타나든지 그렇지 않든지 누구나 십자가는 갖고 있게 마련입니다.

때때로 내 십자가보다는 남의 십자가가 더 가벼워 보이기도 하지만, 십자가의 무게는 저마다 다 무겁습니다. 그런데 이 세상에서 가장 무겁고 힘든 십자가는 예수님이 짊어지고 가셨습니다. 예수님에 비하면 우리가 짊어지는 십자가는 너무나 작고 가벼운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자신들에게 주어진 십자가에 대해서 어떻게 대처해나가는지 크게 2가지로 구분해본다면 한 가지는 늘 불평불만하면서 짊어지는 것, 그리고 다른 한 가지는 무슨 일에나 늘 감사하며 기쁘게 극복해나가는 것입니다. 적극적이고 낙관적으로 살아가야 하는 우리 신앙인들은 분명 후자를 선택해야 할 것입니다. 그 이유는, 우리가 믿고 따르려는 예수님이 그렇게 말씀하셨고, 또 그렇게 사셨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아무 죄도 없으시면서도, 죄 많고 부족한 우리를 위해서 세상의 모든 죄와 가장 무겁고 험난한 십자가를 기꺼이 짊어지셨습니다. 우리는 이토록 고마우신 예수님께 진심으로 감사드리면서 기쁘게 살아가야 합니다. 오늘 우리가 경축하는 한국의 순교자들은 영원히 변치 않으시는 주님을 위해서 단 하나뿐인 목숨을 기꺼이 버렸습니다.

사랑하는 예수님을 더욱 더 굳게 믿고 따르기 위해서 우리는 우리 자신을 버리고, 매일 우리 십자가를 잘 짊어지고 따를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합시다. 아멘.

정재성 사도요한 신부
  | 09.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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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의 삶 속에서 순교를

오늘은 이 땅의 신앙 선조들을 기리는 순교자 대축일입니다. 복음이 전파되었던 초기시대에 수 없이 죽어간 순교자들! 성 테르툴리아누스 교부는 “순교자들의 피는 신앙의 씨앗”이라고 말했습니다. 이 땅에 살아가는 모든 신앙인들이 기억하고 되새겨야 하는 날입니다. 그분들이 있었기에 오늘날 우리들의 신앙이 가능하다는 것을 말입니다.

오늘 우리의 현실은 그 옛날 순교자들의 상황과는 많이 다릅니다. 그러나 오늘날에도 신앙을 위협하는 장애물과 유혹은 참 많습니다. 특히 물질이 모든 것에 우선하는 현대인의 삶 속에서 신자들이 자신의 신앙을 지키는 것은 순교시대만큼이나 어렵다고 할 수 있습니다. 순교자들의 정신을 가장 잘 계승하는 것은 결국 신앙인들 각자가 신앙생활을 충실하게 하는 것입니다. 신앙이란 하느님의 존재와 그분의 말씀을 믿는 것뿐 아니라, 삶 속에서 전적으로 수용하고 실천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신앙은 생활과 불가분의 관계를 지닙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예수님은 “나를 따르려는 사람은 누구든지 자기를 버리고 매일 제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한다”(루가 9,23)고 분명히 가르치고 있습니다. 이처럼 신앙은 추상적인 것이 아니라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매일 나의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라야 합니다. 자신의 십자가를 진다는 것은 묵묵히 받아들이고 견디는 것입니다. 참다운 신앙의 길은 결코 쉽지 않은 고난의 길입니다. 어쩌면 세속의 거센 유혹과 악의 힘을 거슬러 믿음을 지키는 것 자체가 고통스러운 일일지 모릅니다. 그러나 영원한 생명, 구원에 도달하는 길은 어렵고 험난하지만 불가능하지만은 않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오늘도 우리를 격려해 주시고 힘을 북돋아 주십니다.

“제 목숨을 살리려고 하는 사람은 잃을 것이요,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는 사람은 살 것이다"(루가 9,24).

허남진 마누엘 신부
  | 1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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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하다 순교자, 주님의 용사여!

해마다 9월이면 순교자 성월을 지내며 신앙을 위해 하나 밖에 없는 고귀한 생명을 바치신 순교자들의 삶을 기리게 됩니다. 그 분들이 계셨기에 이 땅에 복음의 씨앗이 뿌려졌습니다. 그 분들은 한 알의 밀알이 되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리하여 오늘날 우리들에게 너무나 고귀한 신앙의 유산을 남겨주셨습니다.

우리 신앙의 선조들은 학문적 연구를 통해 신앙을 받아들이셨습니다. 이는 세계 교회사에서 찿아볼 수 없는 유일한 사례입니다. 한국 교회는 1784년 이승훈이 베드로라는 세례명으로 북경에서 세례를 받은 후 1886년 한불조약이 체결될 때까지 100년 동안 크고 작은 박해를 받으며 신앙을 지켜왔습니다. 신유, 기해, 병오, 병인 4대박해를 받으며 만여 명의 신자들이 신앙을 위해 생명을
바쳤습니다.

특별히 우리나라 최초의 방인 사제인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은 1845년 8월 17일 중국 상해 금가항성당에서 사제로 서품된 후 이듬 해 9월 16일 한강변 새남터에서 순교하셨습니다. 순교 때 신부님은 큰 소리로 신앙을 증거했습니다

“나의 마지막 때가 왔습니다. 여러분 귀를 기울여 들어주시오. 내가 외국 사람과 통한 것은 오직 종교를 위해서 입니다. 하느님을 위해서 나는 죽어갑니다. 여기서 영원한 생명이 시작됩니다. 여러분도 죽은 후 행복을 얻고자 하시면 천주교 신자가 되십시오.”

이처럼 한국 천주교회는 순교자들의 피위에 세워진 교회이며, 우리는 자랑스러운 순교자들의 후손입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만여 명의 순교자들이 신앙을 위해 피로써 하느님을 증거하였지만 성인품에 오르신 분은 103위 밖에 계시지 않습니다.
주교회의에서 추진하는 124위 순교자 시복시성운동은 참으로 필요하고 중요한 일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우리 모든 신자들은 자랑스러운 순교자들의 후손으로서 이 분들이 하루빨리 성인품에 오르도록 기도하고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오늘 날의 순교지금의 한국 교회는 내적, 외적으로 눈부신 성장을 거듭하고 있습니다. 신자 수 500만명, 성직자수 4천여 명,수도자 수 1만 2천여 명에 이르고 있습니다. 이러한 성장은 우리 신앙의 선조들이 죽음으로써 그리스도를 증거하고 이를 밑거름으로 하여 우리 한국 천주교회가 세워졌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오늘 한국 순교자 대축일을 맞이하여 그들의 신앙을 칭송하고 자랑하는데 그쳐서는 안됩니다. 물론 지금은 신앙을 증거하기 위해 생명을 내놓을 필요는 없습니다. 그렇지만 순교자들의 신앙과 삶은 본받아야하지 않겠습니까?

휴가철이면 주일 미사에 성당이 텅텅 비어버립니다. 날씨가 덥다고, 날씨가 춥다고 미사에 빠져버리고, 조금만 시련이 다가오면 하느님을 떠나버리는 나약한 신앙. 우리들 가운데 아침, 저녁기도를 바치는 신자는 과연 얼마나 될까요? 우리 신앙의 선조들은 신앙을 위해 하나밖에 없는 생명까지 바쳤습니다. 우리는 과연 하느님을 위해, 교회를 위해 무엇을 봉헌하고 있습니까?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 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들에게 주어지는 시련과 십자가를 거부하지 말고 이겨냄으로써 순교 성인들처럼 하느님 나라를 차지하는 자랑스러운 순교자의 후손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백명흠 바오로 신부
  | 09.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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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릉도를 떠나 매천성당에 자리 잡은 지 한 달이 되었습니다. 떠났다고 하지만, 그곳에는 또 다른 신부님이 파견되었습니다. 그래서 울릉도에는 신부님이 항상 계십니다. 그래도 떠날 때의 슬픔은 참 큽니다. 남아있는 교우들도 아쉬워했습니다. 또 다른 신부님이 오심에도 불구하고. 그 옛날 박해시기에 신부님들이 교우촌을 방문하고 떠나실 때의 이별의 아픔은 얼마나 클까를 생각해봅니다. 다시 보지 못할 수도 있고, 언제 오신다는 기약도 없던 시절에.

대축일 미사를 봉헌하는 이날, 김대건 신부님과 같은 날 순교하신 성인 중에 임치백 요셉이란 분을 소개하겠습니다. 그는 포도대장 앞에 끌려가 심문을 받는데, “너는 사실 천주교를 믿고 있느냐?”하고 묻자, 그는 “예, 감옥에 들어온 후 기도문을 배우고 있습니다.”하고 대답했습니다. “그러면 천주십계를 외워보라.”했습니다. 그가 아무 말도 못하자“십계명도 알지 못하면서 어떻게 천국에 갈 수 있느냐? 천국에 가려면 여기 있는 이규식(이승훈의 아들)처럼 유식해야 하느니라.”하고 포도대장이 말하자,그는 “자녀들이 많은 집안에는 큰 자식도 있고 작은 자식도 있습니다. 또 영리한 자식도 있고 둔한 자식도 있으며 어머니께 매달리는 젖먹이도 있습니다. 그러나 모든 자식들이 아버지를 사랑하는 마음은 한결 같습니다. 우리 교회 집안에서 나는 갓난아기입니다. 비록 하느님을 잘 모르지만 우리 아버지이신 줄은 잘 압니다. 나는 그분을 사랑하기를 원하며 그분을 위해 죽기를 기다리고 있습니다.”라고 대답을 했답니다. 결국 임치백 요셉 성인은 감옥에서 교수형을 당하였고 그가 죽은 후 그분의 몸은 이상한 빛에 둘러싸여 옥 안을 훤하게 비추었다고 합니다. 이러한 알 수 없는 일에 감동을 받은 옥지기는 임치백 성인의 시신을 거두어 감옥에서 5리쯤 떨어진 언덕에 묻어주었다고 전합니다.

성인들의 이러한 신앙고백의 이야기가 신앙인들에게 힘이 되었으면 합니다. “나는 교리를 잘 모르고 신앙심도 약해서”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태어나서도 어머니와 아버지가 어떤 분이시고 누구인지를 잘 모릅니다. 오히려 자식을 낳고 길러보면 그때 가서야 부모의 심정을 더 잘 알 수 있다고 합니다. 과거 우리의 신앙 선조들은 우직하게 주님께 대한 믿음을 삶으로 고백했습니다. 죽음을 맞아들이는 것을 오히려 기쁨으로 생각하였기에, 많은 이들이 그들의 순교를 보면서,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는 천주교가 무엇인가에 대해 관심을 가지게 되기도 했습니다.

“자기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나 때문에 자기 목숨을 잃는 그 사람은 목숨을 구할 것이다.”하신 예수님의 말씀이 그저 말씀으로만 있지 말아야하겠습니다. 세상 사람들로부터 어리석다는 말을 들을 때 오히려 우리의 신앙을 드러낼 수 있는 기회가 되지 않겠습니까? 주님께로 향한 나의 어리석음이 오히려 세상에 희망을 전하는 순교자의 삶이 될 것입니다.

대구대교구 한창현 신부
  | 09.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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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는 길

사람이 사는 이유가 무엇인지를 누가 물어 온다면 어떻게 대답하시겠습니까? “죽지 못해 서 산다.”고, 아니면 “살아 있으니 산다.”고 대답 하실 것입니까? 사람이 사는 이유는 ‘죽기 위해서 산다.’고 할 수 있으며, “왜 죽기 위해서 사느냐?”고 물으면 ‘살기 위해서 죽는다.’고 대답 할 수 있습니다. 보통 사람들은 자신이 살기 위해서는 남을 죽여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남을 죽이면 자신도 누군가에 의해서 죽게 되어 있습니다. 사람은 남을 위해서 자신을 죽일 때만이 살 수 있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자신에 대해서 스스로 죽을 수 있어야 합니 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정녕 자기 목 숨을 구하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나 때문에 자기 목숨을 잃는 그 사람은 목숨을 구 할 것이다”(루카 9,23-24)라고 말하십니다.

거룩한 강론에서 이런 말을 하려니 좀 부끄럽습니다만, 제가 고스톱을 쳐 보면, 화투만 쥐면 ‘고’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속칭 ‘불나비’라고 이야기하지요. 이런 사람들치고 따는 것을 본적이 잘 없습니다. 고스톱에서는 얼마나 잘 죽을 줄 아느냐가 제일 중요합니다. 죽고 살 패를 정 확히 읽을 줄 안다면 기본이 된 것입니다. 세상살이도 제일 잘 죽는 사람이 제일 잘 사는 것 입니다. 혹시 오늘 이 주보를 보시는 분들 중에 늘 아내에게, 남편에게, 친구들에게 이기려고 만하는 사람은 없습니까? 그러면 내가 인생에 있어서 얼마나 초보자인가를 깨달아야 합니다. 멋진 아내, 멋진 남편, 멋진 친구는 서로에게 져줄 줄 아는 사람이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사람은 몸 바칠 줄을 알아야 합니다. 다른 말로 ‘순교’할 줄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도 우리를 위하여 순교하셨습니다. 우리 죄인들을 위하여 몸을 내놓으셨습니다. 그 사랑에 힘 입어 오늘 제2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그 어떠한 것도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갈라놓을 수 없다고 합니다. 즉 환난, 역경, 박해, 굶주림, 헐 벗음, 위험, 칼, 죽음… 어떠한 피조물도 떼어 놓을 수 없다고 합니다. 이 모든 것을 그분 사 랑에 힘입어 이겨내고도 남는다고 합니다(로마 8,35-39 참조).

오늘 축일을 지내는 우리나라의 순교성인들 은 이러한 것을 몸소 세상에 드러내신 분들이 십니다. 성 안드레아 김대건 신부님께서는 옥중 서간에서 하느님을 ‘임자’로 표현하시면서 “임자를 모르는 것은 세상 삶의 보람을 모르는 것이고, 알면서도 배신하는 것은 태어나지 않은 것 만 못하다.”고 하셨습니다. 삶의 의미와 사는 길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멋진 삶은 ‘멋진 사랑’을 하는 것인데 곧 ‘사랑을 위해서 자신의 목숨을 내놓는 것’입니다. 이것을 우리는 ‘순교’라고 이야기 합니다. “어리석은 자들 의 눈에는 이런 사람들이 어리석어 보이지만 그들은 원한 생명 안에서 평화를 누리고 있다.” 라고 오늘 1독서 지혜서에서 말하고 있습니다. 얼마 전 8월 16일 한국교회는 프란치스코 교황님을 모시고 순교자 124위를 복자품에 올리는 광을 얻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순교자들을 현양하는 것은 그분들에게는 영광이 되고, 우리 후손들에게는 귀감이 되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우리 후손들은 늘 순교성인들의 삶을 가슴에 새기며 우리 삶의 지표로 삼아야 할 것입니다. 한국의 순교성인들이여, 저희 교구를 위하여 빌어주소서. 아멘.

<대구대교구 박수태 비오 신부>
  | 09.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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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 6. 16. 2. 15. 10. 16. 3.

위의 숫자는 무엇을 의미할까요? 『피어라 순교의 꽃』에 따르면 서울, 경기, 강원, 충청, 전라, 경상, 제주에 흩어져 있는 성지와 사적지의 숫자이다. 이 땅 어디서나 하느님의 부르심에 따라 신앙인들이 피를 흘려 주님을 증언하였음을 알게 된다.

요즘 순교신앙터전에 방문하여 기도하는 발길을 보게 된다. 순교를 통하여 그 시대의 소명을 다한 분들을 묵상하는 발길을 보며 하느님의 은총을 새롭게 발견하는 계기가 되도록 기도로 함께 한다. 성지를 찾아 나서듯 일상의 삶의 중심에 그리스도의 희생, 성체성사에서 하느님의 풍성한 은총에 힘입어 찬미와 감사를 드렸으면 한다. 성녀 파우스티나의 글을 통해서 보면, 제대 위에서 그리고 감실에서 은총을 나누어 주시고자 하시는 예수님의 간절한 바람을 알게 된다.

“오늘날 제대 위에서 그리고 감실 안에서 그분께서는 같은 힘을 지니신다. 이 뜻을 깨달은 사람이라면 누구나 미사와 성체조배 시간을 아까워하지 않을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파우스티나 수녀님에게 말씀하셨다. ‘내 성심은 영혼들을 위한, 특히 불쌍한 죄인들을 위한 크나큰 은총으로 흘러넘친다. 나는 그들에게 가장 좋은 아버지이다. 자비로 흘러넘치는 샘인 나의 성심에서 흘러나온 피와 물이 그들을 위한 것임을 알기만 한다면 그들을 위해 나는 자비의 임금으로서 감실 안에 머물고 있다. 나는 영혼들에게 은총을 주기 바라나 그들은 그 은총을 받아들이기를 원하지 않는다. 너라도 가능한 한 자주 나에게 와서 그들이 원치 않는 이 은총을 받아라.’”

『자비가 풍성하신 하느님』이라는 책에서 우리를 기다리시는 예수님을 발견한다. 영혼들에게 은총을 주기 바라는 예수님께 응답을 드리기 위하여 찾아가는 다양한 발길에서도, 또 미사에 자주참여하며 하느님의 은총으로 살아가는 순교성월이 되자.

► 2015년 9월 20일 대구주보
► 대구대교구 정석수 유스티노 신
  | 09.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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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
새벽빛 와 닿으면 스러 지는 /
이슬 더불어 손에 손을 잡고,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
노을빛 함께 단 둘이서 /
기슭에서 놀다가 구름 손짓하면은,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내는 날, /
가서, 아름다웠더라고 말하리라.”
천상병 시인의 “귀천”이란 시입니다.

죽음을 앞두고 삶을 이렇게 노래할 수 있다면 얼마나 아름다울까 생각해 봅니다. 우리 신앙선조들은 모진 박해와 고통, 심지어 죽음으로 내몰리면 서까지도 소풍가듯 기쁘게 노래하며 하늘 길 을 걸어가셨습니다.

최경환 프란치스코. 최양업 신부님의 부친이 십니다. 그분은 안양 수리산 자락에 삶의 기반을 잡으시고 교우촌을 건설하셨습니다. 모범적인 신앙생활로 인해 곧 마을 사람들의 적지도자가 되셨습니다. 평소 순교에 대한 강한 열 망으로 불타오르던 그분은 언제든지 순교의 때가 다가오기만을 손꼽아 기다리셨습니다. 다른 교우들에게도 자상하게 ‘순교 교육’을 시키며, 함께 순교의 길을 걸어가길 바라셨습니다. 마침내 올 것이 왔습니다. 한밤중에 포졸들이 들이닥친 것입니다. 결박을 당하면서도, 심한 구타를 당하면서도 그분께서는 태연한 모습으로 이렇게 말하셨습니다. “잘들 오셨습니다. 이 먼 곳까지 오시느라 얼마나 수고들이 많으셨습니까? 저희는 오래전부터 여러분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우선 조금 쉬십시오. 곧 식사를 준비해 올리겠습니다. 요기하시는 동안 저희는 떠날 준비를 하겠습니다.”

그분께서는 교우들을 모두 한자리에 모이게 한 다음에 말하셨습니다. “여러분, 드디어 때 가 왔습니다. 다 함께 기쁜 얼굴로 순교의 길 을 떠납시다.” 해 뜰 무렵, 그분은 포졸들을 깨워 정성껏 아침식사를 대접하시고, 남루한 옷을 입은 포졸들에게는 잘 다려진 새 옷을 나누어 주셨습니다. 최경환 프란치스코 회장님과 40여명이나 되는 교우들은 마치 잔칫집에 가듯이, 단체 소풍이라도 가듯이 그렇게 순교의 길을 떠나셨습니다. 관헌으로 끌려가는 동안 어떤 사람들은 ‘사이비 교도들’, ‘천주학쟁이’라고 욕하며 돌을 던지기도 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마치 징그러운 동물이라도 바라보듯이 그 들을 쳐다봤습니다. 그러나 교우들은 함께 기도하며 성가를 부르고 서로 격려하고 위로하면서 그렇게 갈바리아산을 향해 올라가셨습니다.

그들이 참혹한 죽음 앞에서도 그리 당당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이겠습니까? 그들은 눈에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눈앞에 뵙는 듯이 살았기 때문이라 생각합니다. 세상 사람들은 아직 보지도 알지도 못했던 천국을 일찌감치 맛 보며 살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기에 그들에게는 죽음으로 가는 길이 끝이 아니라 하늘로 가는 원의 길이었던 것입니다.

형제 여러분, 우리가 살아가는 이 길이 힘들고 험할지라도 주님 함께 계시면 이 또한 기쁘고 광스럽지 않겠습니까? 우리도 이 풍진 세상을 살아가면서도 신앙의 선조들처럼 손에 손잡고 서로 격려하며 하느님을 찬미하면서, 다 함께 하늘 길로 힘차게 나아갑시다.

▮ 대구대교구 주민기 베네딕토 신부 : 2016년 9월 18일
  | 09.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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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스스로 순교자의 후 손이라 말합니다. 순교자의 후손으로 그 정신을 이어받았다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순교자의 후손으로 그 정신을 이어받은 우리는 ‘순교’를 어떻게 실천할 수 있겠습니까?

‘순교’라는 말을 할 때 보통 죽음을 떠올리게 됩니다. 죽음으로 증거한 신앙 말입니다. 그런데 우리 순교자들은 결코 죽음만으로 끝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들은 죽음으로 우리 신앙을 살리셨습니다. 그냥 용감하게 죽음을 맞이한 것만이 아니라 죽음으로써 살리십니다. 어떻게 죽었느냐 하는 문제보다 무엇을 살렸느냐 하는 문제가 더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에게는 더 이상 옛날과 같은 순교가 요구되지 않습니다. 그럼 순교는 옛날이야기일 뿐입니까? 아닙니다. 지금 우리에게도 순교는 계속되어야 합니다. 어떻게 말입니까? 우리의 순교자들이 죽음으로 우리 한국 교회의 신앙을 살리셨듯이, 우리 역시 이 교회와 이 세상을 살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죽어 가는 것을 살리는 일에 앞장서는 것, 그것이 바로우리에게 요구되는 순교입니다.

지금 우리 주위에 죽어 가는 것은 무엇입니까? 첫째, 하느님의 빛이 점점 죽어 가고 있습니다. 하느님께 의지하며 하느님의 뜻대로 살아가기가 쉽지 않는 요즘입니다. 하느님 자리를 다른 무언가로 대신 채우려고 하는 이때, 하느님께서는 우리 안에서 점점 사라져 갑니다. 둘째, 사람이 죽어 갑니다. 이익을 위해, 손해를 받지 않기 위해 사람은 어느새 수단이 되어 버립니다. 이제 사람은 죽음에 내몰리기도 하고, 고통과 무관심 속에 스스로 죽기도 합니다. 이렇게 사람이 사람답게 살지 못하고 죽어 가고 있습니다. 그리고 셋째, 자연이 죽어 갑니다. 우리는 늘 한결같은 햇살과 적당한 비를 기대하지만 이미 무분별하게, 무절제하게 사용해서 죽어 가고 있는 자연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이처럼 우리 주위에는 죽어가는 것 투성입니다. 이렇게 죽음이 힘을 키울 때 그것에 대해 깨어 저항하고 생명을 지켜내려 하는 것, 바로 그것이 우리에게 요구되는 순교입니다.

이러한 순교를 실천하기 위해서 예나 지금이나 꼭 필요한 것이 있습니다. 바로 ‘희생’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듯이 자기 십자가를 기꺼이 질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 마음속에서 사라져 가는 하느님을 잃지 않기 위해서, 사람이 사람답게 살도록 하기 위해서, 또 우리가 사는 이 땅을 오랫동안 잘 유지하기 위해서 우리 각자의 ‘희생’이필요합니다. 내가 좀 불편하더라도, 내가 좀 부담되고 손해 보더라도, 좀 돌아가는 길이라도 희생할 수 있는 용기가 필요합니다. 그러한 희생이 하나 둘 모여 우리 주위에 죽어 가는 것들을 살릴 수 있습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우리는 위대한 순교자들의 자랑스러운 후손입니다. 선조들이 죽음을 선택함으로써 우리에게 물려주었던 그 신앙을 이젠 우리가 생명을 위한 희생을 선택하여 우리의 후손들에게 당당히 물려줍시다. 이번 한주간 큰 것이든 작은 것이든 희생할 수 있는 용기를 결심합시다.

▥ 대구대교구 최호 요한 보스코 신부 - 2017년 9월 17일
  | 09.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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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 가장 한국적인 것

가장 한국적인 것이 가장 세계적인 것입니다. 가장 한국적인신앙은 우리나라 순교자들의 신앙입니다. 우리 신앙의 선조들은 스스로 신앙을 찾아 나섰고, 천주님에 대한 믿음 때문에 자기 자신마저 기꺼이 버렸습니다. 하느님께서 그들을 지켜주심을 알았기 때문에 어느 누구와 대적하는데도 두려움이 없었습니다. 그것은 아무것도내세울 것 없는 여인에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남녀차별이 있던 조선 시대에 천주교를 믿는다고 여자가 끌려오니 관장이 “너는 왜 왔느냐?”하고 모욕적으로 묻습니다. 여인은 조용히 대답합니다. “저 또한 천주님을 믿는 사람이니 국법대로 다스림을 받으러 왔습니다.” 관장이 언짢은 목소리로 묻습니다. “네가 믿는 천주가 도대체 어느 책에 적혀 있느냐?” 여인은 대답합니다. “저는 글을 읽을 줄 모릅니다.” 어처구니없는 관장은 글도 모르는 게 와서 국법 운운하니까 머리끝까지 화가 나서 “글도 모르는 게 뭘 안다고 천주를 믿느냐, 너는 천주를 본 적이 있느냐?”하며 다그칩니다. 그러니 여인은 “저는 본 적이 없습니다.”하고 대답합니다. “봐라! 글로 아는 게 있느냐, 본 적이 있느냐, 너는 뭘 가지고 믿는다고 큰 소리를 치느냐?”하고 관장이 아주 무시합니다. “나리, 제가 보지 않았기 때문에 믿지 말아야 할 것으로 말한다면 저는 이 나라의 임금님을 본 적이 없습니다. 그러나 임금님께서 나리님을 보내셔서 오셨기에 저는 임금님이 계신 줄 믿나이다. 마찬가지로 세상이 있는 걸 보고 이 세상을 만드신 분을 어찌 믿지 않겠나이까!”

가장 개인적인 것이 가장 보편적인 것입니다. 가장 개인적인 신앙은 저의 수호성인이신 정하상바오로의 신앙입니다. 1801년 신유박해가 일어나 아버지 정약종과 맏형 정철상이 순교하고, 유세실리아는 당시 일곱 살이던 정하상과 다섯 살 정정혜를 돌보아야 했기 때문에 풀려납니다. 천주교 집안으로 몰락하면서 정하상이 겪어야 할 고초는 참으로 컸습니다만 그는 열심히 교리를 익히고 신앙생활을 하며 이 땅에 사제를 영입하기 위해 노력합니다. 1816년 22살의 청년이 처음으로 마부로 위장하여 북경을 방문하여 사제를 요청한 이래, 1837년 조선 2대 교구장 엥베르 주교를 모시기까지 정하상은 21년 동안 9번 북경을 방문했습니다. 그동안 그의 노력으로 1831년 조선교구가 설정되고 몇몇 신부가 조선 땅을 밟을 수 있었습니다. 엥베르 주교는 교회를 위해 모든 것을 바친 43세 총각 정하상의 인품과 신앙을 보고 그를 신학생으로 선발하여 교육하였으나 1839년 기해박해가 일어나 모두 순교하게 됩니다. 비록 정하상은사제가 되고자 하는 꿈을 이루지는 못하였으나 성인이 되어 이 땅의 많은 이들에게, 특히 보잘것없는 저에게 빛이 되고 있습니다. 주님의 은총 아래생각보다 더 빨리 기쁜 소식을 안고 북한 땅으로 걸어 들어가기를 꿈꿔봅니다. 정하상 바오로가 걸었던 그 길을 말입니다.

▦ 대구대교구 김성래 하상 바오로 신부 : 2018년 9월 23일
  | 09.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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