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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축일/명절강론 코너 ( 대축일/명절 미사에 관련된 강론자료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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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도회] 일어나 비추어라!
조회수 | 2,716
작성일 | 09.01.04
산드로 보티첼리 <동방박사의 경배>
2021년 1월 1일 가톨릭신문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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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의 탄생은 빛이었다.
그 빛은 온 세상을 비추고도 남을만한 것이었다. 그것을 세상이 알아보고 깨우친 날이 바로 공현대축일이 의미하는 바이다. 주님 측에서 볼 때 자신을 드러내심이요, 우리 측에서 볼 때는 그 빛을 알아 채림이란 뜻이다.

이사야 예언자는 노래한다.[일어나 비추어라!]이제 나의 차례다. 주님께서 나를 비추신다. 어둠의 질곡 속에 헤매고 있는 나를 비추어 주신다. 그 빛은 너무도 강렬하여 그 어떤 어둠도 그 광채 앞에서는 맥을 못 춘다. 그 빛을 받아라.

주님을 비추었던 그 빛, 온 세상 사람들이 알아차렸던 그 빛을 주님께서는 바로 나에게 비추어 주신다. 이제 내가 그 역할을 해야 한다고 말씀하시듯이...나는 가난하고 보잘 것 없지만 그 빛이 나를 비춘다. 내가 일어서도록 재촉한다.

그리고 나는 동방박사들처럼 그분께 예물을 드려야 한다. 황금도 유향도 몰약도 없는 나는 가난과 정결과 순종을 예물로 다시 바친다. 공현은 이렇게 나로 하여금 나의 삶을 통해 예수님이 다시 온 인류의 빛이 되게 재촉하시는 그분의 초대이다. 그 초대에 기쁘게 응답하면서나는 나의 서약을 새롭게 갱신한다.

오늘 지긋이 눈을 감은 채 나를 비추시는 그 빛을 깊이 받아드리자. 그리고 내가 드릴 수 있는 가장 고귀한 선물을 그 분께 다시 바쳐드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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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형제회 오상선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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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들이 쏟아져 내리는 밤하늘의 감동

한 형제의 강론이 오늘따라 유난히 큰 감동으로 다가왔습니다.

‘별이 유난히도 별이 밝다’라는 표현들을 씁니다. 별이 유난히 밝게 보이는 곳이 어딥니까? 도심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바닷가나 산속입니다. 산자락에서 올려다보는 하늘은 그야말로 별이 쏟아져 내릴 것만 하늘입니다.

도심에서 올려다보는 하늘과 바닷가에서 올려다보는 하늘은 왜 그리도 차이가 날까요? 시골의 하늘은 도심의 하늘보다 별들의 수효가 더 많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도심이건 시골이건 별의 숫자와 밝기는 동일합니다. 도심의 밤은 전깃불로 밝혀져 있는 화려한 밤이기에 별들의 수효가 적게 보입니다. 바닷가의 밤은 아무런 빛이 없는 어두운 밤이기에 별들의 수효가 많아 보입니다.

‘별들이 쏟아져 내리는’ 아름다운 밤을 느끼고 싶으십니까? 그렇다면 전깃불이 없는 어두운 곳으로 가야만 합니다.

우리에게 오신 찬란한 별이자, 구세주 하느님을 뵙고 싶습니까? 그렇다면 휘황찬란한 곳, 화려한 곳이 아니라 소박하고 가난한 곳으로 내려가야만 합니다.

주변 빛이 화려한 예루살렘에서는 사람들이 구세주의 별빛을 보지 못했습니다. 늘 별빛을 예의주시하면서 어둡고 한적한 곳으로 내려간 동방박사들이었기에 구세주의 별빛을 늘 따라갈 수 있었습니다.

오늘 우리의 일상 한가운데서도 희망을 상징하는 구원의 별이 우리의 삶을 하느님께 인도합니다. 그러나 그 별은 우리가 화려한 불빛 속에 머무를 때는 잘 보이지 않습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하느님을 만나고 싶다면, 정녕 구세주 하느님을 뵙고 싶다면 화려한 불빛을 떠나서 고요함을 추구해야 합니다. 어두운 곳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가난함을 선택해야 합니다.

휘황찬란한 샹드리에가 드리워진 화려한 연회 홀에서 멋진 음악을 들으면서 식사를 하는 사람은 결코 별들이 쏟아져 내리는 밤하늘의 감동을 맛볼 수 없을 것입니다.

구세주 하느님의 별빛에 우리의 시선을 고정시키기 위해 좀 더 내려가고, 좀 더 비우고, 좀 더 겸손해지는 하루가 되길 바랍니다.

아기 예수님의 구유 바로 그 옆에 십자가가 있습니다. 성탄은 빛의 축제입니다. 당연히 기쁨과 환희의 축제입니다. 그러나 그 빛, 기쁨, 환희는 영혼을 위한 것이지 단지 우리의 육체적인 기분을 흥겹게 하기 위한 것이 절대 아닌 것입니다. 일 년에 단 한번 휘황찬란하게 잘 꾸며진 구유 앞에 무릎 꿇는 것으로 충분치 않습니다. 성탄절이 주는 외적인 매력에 휩싸이는 것만으로 충분치 않습니다.

이제 성탄의 기쁨을 우리 마음 깊이 간직하고, 또 다시 골고타 언덕이란 신앙의 정점을 향해, 예수님께서 지셨던 십자가란 우리 인생의 최종의미를 향해 다시금 먼 길을 떠날 순간입니다.

언제까지나, 한없이 구유 앞에서 머물러 있을 수만은 없습니다. 이제 구세주를 뵌 기쁨을 가슴에 담고 또 다시 일상생활로 돌아가야 합니다. ‘주님 공현’은 우리에게 또 다른 떠남을 요구합니다. 이 세상에 오신 아기 예수님께서는 앙증맞은 작은 두 손을 벌리고 우리의 선물을 기다리고 계십니다. 우리가 구세주 하느님께 드릴 선물 중에 가장 좋은 선물은 어떤 것일까요?

세속적인 모든 재물에서 벗어난 깨끗한 마음의 순수한 황금, 예수님의 삶과 고난에 참여하기 위한 대가로 지불하게 될 이 세상의 모든 행복에 대한 포기로서의 몰약, 하느님의 뜻에 자신을 내맡기기 위해 스스로 자신을 포기하는 위로 향해 곧게 솟아오르는 의지의 유황...이런 것들이 아닐까요?

순수한 마음으로 바치는 사랑의 헌신보다 그분 마음에 드는 봉헌은 다시 또 없습니다. 순결한 마음을 가진 사람만이 우리 가운데 매일 태어나시는 구세주 하느님을 뵐 수 있을 것입니다.

살레시오회 양승국 신부
  | 0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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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동방에서 그분의 별을 보고 그분께 경배하러 왔습니다."

사람이 아름다운건 하느님을 찾아 앞으로 나가기 때문입니다. 모든 희망과모든 기쁨은 오직 하느님께 있음을 알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을 향해 나아가는 모든 길이 실은 새 길이기 때문입니다.

참된 경배는 우선 먼저 하느님을 향하는 것이며 가난한 하느님의 외침을 결코 외면하지 않는 것입니다. 진정한 경배는 생각 속에만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따뜻하고 아름다운사랑을 실행하는 것입니다.

동방박사들은 가는 도중에 온갖 기쁨과 온갖 슬픔들을 다 맛보았을 것입니다. 어디로 가야할지를 모르는 우리들에게 주님 공현 대축일은 다시금 주님을 향해 가도록 용기를 우리에게 건넵니다. 사랑의 가장 먼 곳은 언제나 우리의 가슴입니다.

우리의 가슴 안에 탄생하신 주님을 경배하는 길은 주님의 존재를 드러내는 따뜻한 사랑의 실천뿐입니다. 어떤 마음과 실천으로 우리의 걸음을 시작할지를 동방박사들은 잘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주님을 향하는 기쁨으로 모두가 아름다워지는 한 해 되시길 기도드립니다.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
  | 0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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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분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그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었다.”(요한 1,4) 이 세상에 빛이 없다면 다른 어떠한 것도 있을 수 없고 생명도 없게 되기에 빛은 곧 생명입니다. 하느님은 이 세상을 만드실 때에 빛을 제일 먼저 창조하셨습니다.(창세 1,3) 그러나 인간의 범죄로 인하여 빛은 가려져 어둠이 땅에 드리워졌습니다. 그래서 요한은 “그 빛이 어둠 속에서 비치고 있지만 어둠은 그를 깨닫지 못하였다.”(요한 1,5)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이 헤로데 왕 때에 유다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자 동방 박사들은 “그분의 별을 보고”(2,2) 빛을 찾아 먼 길을 떠났고, 마침내 베들레헴에 도착해서 말구유 위에 떠 있는 별을 보고는 더없이 기뻐한 사람들이었습니다. 동방 박사들이라고 모든 면에서 다른 이들과 특별히 달랐다고는 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유독 이들만이 메시아를 찾아 먼 길을 떠날 수 있었던 것은 다른 사람들처럼 이 땅 위에서 먹고사는 일에만 관심을 두지 않고 ‘하늘’의 일에도 깊은 관심과 갈망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들은 하늘을 쳐다보며 하늘의 일에 관심을 가졌기에 하늘에 이상한 별 하나를 발견한 것입니다. 별을 보고 깨달았을 때 가만히 앉아 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곧 예물을 준비해 유다인의 왕을 경배하기 위해 길을 떠납니다. 그 길은 가까운 길도 쉬운 길도 아니었습니다. 낙타를 타고 터벅터벅 몇 달을 걸어가야 하는 먼 여행입니다. 사막을 지날 때 물이 없어 고통을 겪어야 하고, 골짜기를 지나갈 때 맹수와 도둑의 위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들은 메시아를 만나고자 그 험난한 길을 “그분의 별을 보고”(2,2) 그 별이 움직이는 대로 따라갔을 때 예루살렘에 이르게 된 것입니다. 그들은 다른 생각 없이 별이 인도하는 대로 온전히 별에 의존하여 찾아온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아기 예수님의 탄생 소식을 세상에 많고 많은 사람들 중에 하늘에 관심을 가지고 하늘의 일을 살피는 동방 박사들에게 허락해 주셨습니다.

그러나 동방 박사들은 하느님이 허락해 주신 놀라운 기회를 놓치지 않고 붙잡고 오다가 자신들의 생각에 빠져들게 됩니다. 이스라엘 왕은 당연히 예루살렘 궁궐에서 태어날 것이라는 자신들의 생각과 일반 상식에 의지해 궁궐로 향했기에 더 이상 별에 의지할 필요가 없어진 것입니다.

우리도 신앙생활을 잘해 오다가 가끔씩 엉뚱한 길로 빠질 때가 있습니다. 우리 역시 하느님의 말씀을 제쳐놓고 인간의 상식과 자기의 판단을 의지할 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성령의 인도를 저버리고 경험에 의지하거나 자신의 능력과 기술을 의지하기에 때로는 실패해 넘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동방 박사들은 자기들의 생각과 상식대로 예루살렘에 이르러 왕이 살고 있는 궁궐로 찾아가 왕이 나신 곳을 물어보니 “헤로데 임금을 비롯하여 온 예루살렘이 깜짝 놀랐습니다.”(2,3) 그래서 결국엔 이 일로 헤로데 왕이 두 살 이하의 사내아이를 살해한 것입니다. 물론 요셉과 마리아 그리고 예수님은 이집트로 피신합니다.(2,13-­18 참조) 우리가 아무리 경험이 많고 아무리 지혜롭다 해도 “하느님의 어리석음이 사람보다 더 지혜롭고 하느님의 약함이 사람보다 더 강하기 때문에”(1코린 1,25) 하느님께만 의지해야 합니다.

과연 우리도 내 경험과 상식에만 의지한 결과 실패를 경험하고 어려움에 처할 때가 얼마나 많았는지요? 빛을 따라가지 못해 실패할 때가 얼마나 많았습니까? 빛 가운데로 향하지 못해 절망 가운데 있을 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우리는 빛을 찾아 빛 가운데로 걸어가야 합니다. 빛이 되신 주님의 말씀을 붙잡고 말씀대로 살 수 있어야 합니다. “나는 세상의 빛이다. 나를 따르는 이는 어둠 속을 걷지 않고 생명의 빛을 얻을 것이다.”(요한 8,12)라는 말씀을 마음 깊이 새기며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동방 박사들은 베들레헴에서 왕이 나실 것이라는 구약의 예언된 말씀을 듣고 곧바로 그 말씀을 붙잡고 말씀대로 다시 길을 나설 때 “동방에서 본 별이 그들을 앞서 가다가 아기가 있는 곳 위에 이르러 멈추는 것”을 보게 됩니다.(2,6-­9 참조) 우리도 성경 말씀을 붙잡고 그 말씀대로 나설 때 다시 별의 인도를 받게 됩니다.

사도 바오로는 “여러분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아났으니, 저 위에 있는 것을 추구하십시오. 거기에는 그리스도께서 하느님의 오른쪽에 앉아 계십니다.”(콜로 3,1)라고 했습니다. 위에 있는 것을 바라보면 거기는 우리의 희망이신 예수님이 계십니다. 그러나 땅을 내려다보면 걱정·고통·괴로움·절망이 문제가 됩니다. 그래서 사도 바오로는 “위에 있는 것을 생각하고 땅에 있는 것은 생각하지 마십시오.”(콜로 3,2)라고 했습니다.

오늘 하느님의 말씀은 그동안 우리가 어떻게 살아왔는지, 어디를 보면서 살아왔는지 다시 한 번 돌이켜 보라고 초대하십니다. 주님의 일은 관심 밖이었고 세상일만 바라보며 육신을 생각하여 어떻게 하면 재산을 많이 모을까, 어떻게 하면 즐길까, 어떻게 하면 출세를 할까 등 이러한 것에만 관심을 두며 살지는 않았는지 살펴보아야겠습니다.

그래서 이제 우리도 동방 박사처럼 ‘하늘’ 주님의 일에 마음의 우선순위를 둘 줄 아는 삶을 살 수 있도록 기도해야겠습니다. 우리가 하느님께 관심을 가지고 하느님의 일을 할 때 하느님을 뵙게 되는 은혜를 베풀어 주실 것입니다. 우리는 하늘의 일에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우리를 인도하시는 성령님만 바라보고 그분만을 믿고 의지하며 따라가야 하겠습니다.

이렇게 우리 삶의 중심과 우선순위가 하느님이 되는 바로 그때, 그래서 날마다 그분의 ‘별’을 쳐다보며 성령의 인도에 의지하여 하루하루 인생길을 걸어갈 때, “너희의 머리카락까지 다 세어두신”(마태 10,30) 하느님께서 우리 일상의 다른 필요도 몸소 챙겨주실 것입니다.

▥ 정애경 수녀 (올리베따노 성베네딕도수녀회)
  | 12.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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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에서 특별한 별 하나를 발견한 동방의 점성가들이 길을 나섭니다. 진정한 임금이 태어나셨으니 하늘에 징조가 나타나는 것은 당연한 일이겠지요. 그들은 추호도 의심하지 않고 유다의 도읍에 임금이 태어나셨을 것이라 짐작하여, 예루살렘에 와서 그분을 수소문합니다. “유다인들의 임금으로 태어나신 분이 어디 계십니까? 우리는 동방에서 그분의 별을 보고 그분께 경배하러 왔습니다.”(2절) 그러나 동방 박사들의 방문에 헤로데 임금과 온 예루살렘은 깜짝 놀랍니다(3절). 먼 길을 마다 않고 선물까지 준비하여 알현을 온 이방인 동방 박사들과, 그토록 오랫동안 메시아를 기다려 왔으면서 정작 메시아의 탄생에 금시초문인 유다인들의 반응이 어이없는 대조를 이룹니다. 탄생 소식을 반가워하기는커녕 전혀 달가워하지 않는 눈치입니다.

헤로데는 대왕이라는 칭호가 따라 붙을 만큼 권세를 누렸지만 정당한 임금이 아니었습니다. 오로지 로마의 권력에 의지하여 자신의 이익을 도모하는 꼭두각시 임금에 지나지 않았지요. 그래서 친아들마저 의심하고 죽일 정도로 늘 불안에 휩싸여 있었는데, 난데없이 동방의 현인이 찾아와 대뜸 새로 나신 유다인들의 임금을 경배하겠다니요. 새로운 임금이 태어났다는 소식에 늙은 왕이 당황하는 것은 당연한 이치일 것입니다. 급기야 헤로데는 무고한 어린이들을 희생시키는 씻을 수 없는 잘못을 저지르고 맙니다(16절 이하).

폭군 헤로데는 그렇다손 치더라도 ‘온 예루살렘’이 경악할 것까지야 없었을 텐데요. 그 당시 예루살렘은, 외세의 침략과 나라 잃은 슬픔에서 유다인들의 자존심과 정체성을 지켜주던 예전의 그 당당한 예루살렘이 아닙니다. 예루살렘 또한 헤로데와 한통속으로, 헤로데 편에서 백성들을 억압하고 착취하는 특권층 사람들의 아지트가 되어버렸습니다. 헤로데에게 불려온 수석 사제들과 율법학자들도(4­-6절) 메시아의 탄생 소식에는 침묵합니다. 동방 박사들의 출현으로 한바탕 유다 전체가 들썩였을 텐데 먼 길을 찾아온 이방 손님들만 아기 예수님께 경배하였다는 걸 보면(11절), ‘온 예루살렘’이 예수님의 탄생을 환영하지 않은 것이 분명합니다. 이처럼 예수님의 탄생부터 사람들의 반응은 둘로 갈라집니다. 그분의 탄생을 두려워하고 경계하는 사람들과 그분을 환영하고 예배하는 사람들. 예수님은 공생활 내내 이런 배척과 환대의 변덕스런 무리 속에서 지내셔야 했습니다.

예루살렘에서는 임금의 별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먼 곳에서도 알아보고 찾아온 별이 지척에 사는 사람들 눈에는 보이지 않았습니다. 무엇이 그들의 별을 가렸을까요? 서울에서도 별을 볼 수 없게 된 지 오래이지만, 그 시절 예루살렘에서도 인간들의 부조리와 탐욕이 하늘의 별을 가렸나 봅니다. 아! 그래서 예수님이 별 볼 일 없는 예루살렘을 마다하시고, 별들이 총총한 시골 마을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셨나 봅니다. “유다 땅 베들레헴아 너는 유다의 주요 고을 가운데 결코 작은 고을이 아니다. 너에게서 통치자가 나와 내 백성 이스라엘을 보살피리라.”(6절; 미카 5,1) 베들레헴은 내세울 것 없는 곳이지만, 정의로운 임금 다윗이 태어난 고을입니다. 구원은 이렇게 거룩한 도성 예루살렘이 아니라 초라하고 이름 없는 마을 베들레헴에서 시작되었습니다.

권력자 헤로데는 동방 박사들을 몰래 불러들여 아기를 찾거든 알려 달라고 부탁합니다(7­-8절). 아예 아기일 때 싹을 잘라 이제 막 새롭게 태동하려는 희망의 역사를 꺾어버리려는 심산에서입니다. 동방 박사들의 의로운 뜻을 비겁하게도 악한 계획에 끌어들이려 하고 있습니다.

동방 박사들은 진정한 임금의 오심을 알리는 ‘별’을 구별할 줄 아는 사람들입니다. 고향에서부터 쫓아온 별이 아기가 있는 곳 위에 이르러 멈추었을 때, 그들은 더없이 기뻐하였습니다(9­-10절). 예수님의 첫 손님들은 마리아와 함께 있는 아기 앞에 무릎을 꿇고 땅에 엎드려 경배합니다(11ㄱ절). 마태오 복음사가는 ‘땅에 엎드린다.’는 표현을 오로지 예수께만 연관지어 사용합니다. 최고의 예배를 받으실 분은 오로지 예수님뿐이라는 뜻이겠지요. 그들은 또한 고향에서 들고 온 진귀한 보물을 예물로 내놓습니다. 충성과 순종의 뜻으로 바친 그들의 세 가지 예물은 매우 의미심장합니다(11ㄴ절). 교부들의 해석에 따르면 황금은 예수님이 진정한 임금이심을, 유향은 아기의 신성을, 몰약은 그분의 십자가상의 죽음을 가리킨다고 합니다. 황금·유향·몰약은 이스라엘의 메시아뿐 아니라 온 세상의 구원자이신 분께 바칠 합당한 예물인 것입니다. 동방에서 온 이방인들은 이처럼 궁벽한 시골 마을에 태어나신 아기 예수님을 알아보고 최고의 충성과 순종의 예를 갖추어 경배하였습니다.

아기 예수님은 그들의 선물을 사양하지 않으셨습니다. 이방인 손님들의 정중한 인사도 묵묵히 받으셨습니다. 마치 자신의 운명을 순순히 받아들이시듯, 온 세상 누구에게나 구원의 약속이 활짝 열려 있음을 선포하시듯 말입니다. 헤로데에게 들르지 말라는 소임까지 완수한 동방 박사 일행은 자신들의 순례 여정을 마무리하고 고향으로 돌아갑니다(12절). 하늘의 징조를 알아본 현인으로서 줄곧 한 별을 쫓아 세상을 떠돌다가, 진정한 임금을 만나 알현하고 돌아서는 그들의 뒷모습이 많은 여운을 남깁니다. 첫 손님들한테서 두고두고 배워야겠습니다. 큰 희생을 치를 예수님의 출생을 부담스러워한 적은 없는지, 구원이 시작될 우리의 베들레헴은 어디인지, 기꺼이 바칠 최고의 예물은 무엇인지, 도대체 별을 쫓고 있기나 하는지….

이사야 예언자가 하늘을 가리키며 외칩니다. “일어나 비추어라. 너의 빛이 왔다. 주님의 영광이 네 위에 떠올랐다. …민족들이 너의 빛을 향하여, 임금들이 떠오르는 너의 광명을 향하여 오리라.”(이사 60,1)

▥ 강지숙 (한님성서연구소 수석 연구원)
  | 12.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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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을 따라 예수를 찾아가던 동방박사들이 예루살렘에 와서 왕을 찾는 데서부터 오늘 말씀은 펼쳐지고 있다. “유다인 왕으로 나신 분이 어디 계십니까?” 이 말을 듣고 헤로데 왕은 물론 온 예루살렘이 술렁거리게 된다.

헤로데는 혈안이 되어 그분이 나신 곳을 수소문한다. 그는 백성의 대제관과 율법학자들을 모아놓고 왕이 나실 곳을 알아본 뒤 동방박사들을 베들레헴으로 보내면서 자기도 경배하러 갈 테니 찾거든 꼭 알려 달라는 말을 덧붙인다. 헤로데의 안내를 받은 동방박사들은 왕이 나신 곳을 찾아 떠나고 별은 다시 그들을 인도한다. 마침내 그들은 아기 예수를 찾아 기뻐하며 경배를 드리고 나서 꿈에서 말한 대로 헤로데에게 가지 않고 다른 길로 해서 자기네 고장으로 돌아간다.

우리는 여기서 예루살렘까지 길을 안내하던 별이 사라졌다가 다시 앞서가면서 오늘의 사건이 전개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별이 사라졌다가 다시 나타남으로써 어떤 일이 벌어졌는가?

대제관과 율법학자들은 그들의 전공분야인 예언서에서 그 장소를 알아냈으며, 헤로데 역시 동방박사들의 방문과 예언서 말씀대로 왕이 나셨음을 인정하였기에 그들에게 베들레헴에 가라고 한다. 그리고 헤로데 왕은 물론 온 예루살렘이 술렁거린다. 이는 예루살렘의 모든 사람들이 왕이 나셨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는 것이다. 예수, 유다의 왕이 나셨음은 이처럼 별이 예루살렘에서 사라져 버린 현상으로 왕이 나셨음을 알려주는 역할을 한다. 왕이 나셨음은 모두에게 드러나(공현) 알려진 사실이 되었다.

좀더 살펴보기로 하자. 동방박사들만이 아니라 온 예루살렘이 술렁거릴 정도로 알려졌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는 헤로데, 백성의 대제관과 율법학자들, 온 예루살렘 사람들은 유다 베들레헴에서 왕이 나셨음을 알았지만 동방에서 온 점성가들만 왕께 경배를 드렸다.

하느님을 아는 사람이라 하여 모두 신앙인은 아니다. 점성가들은 별을 보고 위대한 분이 나실 것을 알고 먼길을 떠났으며, 다시 예루살렘에서 헤로데의 안내로 베들레헴이라는 것을 전해 듣고 그곳을 찾아갔으며, 꿈에 들은 대로 다른 길로 해서 자기네 고장으로 떠났다. 그들은 알아들은 대로 길을 떠났고, 베들레헴을 향해 나섰고 다른 길로 떠났다. 알아들은 대로 실행하여 옮기고 있다. 그래서 그 알아들은 바가 참 현실이 되어 왕을 뵈옵고 경배를 드릴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반면에 하느님의 성전이 있는 예루살렘 사람들과 성서 말씀과 하느님께 드리는 예배로서 생을 살아가는 말씀의 전문가인 율법학자와 대제관들은 전문가답게 예언서의 말씀에서 그 답을 알아내어 헤로데에게 유다 고을 베들레헴이라고 알려준다. 그들은 결코 작은 고을이 아니라는 그 말씀의 의미를 알고 그곳이 왕이 나신 곳이라고 가르쳐 주고 있으나 예언서의 말씀이 그들의 삶을 움직이지는 못하고 있다. 하느님은 그들의 실생활 안에 살아 계신 분으로 말씀하시지 못하고, 예언서의 글에 그치고 그 어떠한 영향도 미치지 못하는 죽은 하느님으로 남아 있을 따름이다.

헤로데 역시 왕이 나셨다는 사실도 알았고 그곳이 베들레헴이라는 구체적인 사실까지 알았다. 그가 그곳이 어딘지 알려주면 나중에 가서 경배하겠노라는 음모를 꾸미고 있는 것은 미루어보건대 그 누구보다도 그 사실을 확신하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헤로데는 왕이 태어났다는 얘기를 듣고 위협을 느낀다. 이는 결국 임마누엘이신 그리스도가 오심으로 그의 왕권이 얼마나 허망한 것인지 확인한 셈이다. 참 왕이 난 진실, 이 앎은 16절 이하의 점성가들에게 캐물었던 정확한 때를 계산하여 무죄한 아기들을 죽이는 것만 보아도 분명히 알 수 있다. 왕이 나셨다는 것 때문에 수많은 무죄한 생명을 죽이는 악을 감행하게 된 것이다. 헤로데는 알아들은 그 말씀에 대한 해석을 참 왕을 죽여 왕위를 유지하려 한 것이다. 그의 믿음은 진리를 거슬러 자기 이기심, 악에서 기인함을 알 수 있다. 헤로데의 왕권이 충돌을 일으키고 있다. 빛이 비추임으로써 숨겨진 사실이 드러나고 거짓이 밝혀지게 된다. 참된 왕이신 분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악을 따름으로 자기의 이기심을 유지하고자 한다. 예수께서 기적을 행하실 때 마귀가 “당신이 누구신지를 압니다”라고 한 외침을 떠올리게 한다. 오히려 주님을 먼저 알아본 것이 마귀였다.

말씀을 듣고 그 말씀에 따라 실천하는 사람, 그 사람이야말로 하느님 말씀이 우리 삶의 굽이굽이에서 드러나게 하는 사람, 하늘의 별을 보고 길을 나서는 희망의 사람, 희망을 가지고 찾는 수고를 게을리 하지 않는 하느님의 사람이며, 하느님이 지시하는 말씀을 듣고 길을 나섬으로써 희망이 우리 안에서 이루어지게 하는 사람, 희망으로 살아 계신 하느님께 경배 드리는, 하느님이 하느님으로서 내 안에서 빛을 내며 드러나게 하는 하느님의 사람이 되는 것이라고 가르친다. 지식인과 신앙인은 다르다. 신앙인은 하느님과 관계를 맺고 알아들은 말씀을 살아간다. 특히 오늘 예루살렘의 율법학자와 대제관들의 모습은 나의 태도를 돌아보게 한다. 하느님 말씀에 따라 살기로 생을 걸어온 나의 수도 삶, 더구나 매일 아침 말씀으로 기도하는 렉시오 디비나의 알아들음이 나를 어떻게 이끌고 있는지? 단지 온 예루살렘 사람들이 술렁거리듯 모든 예언서 말씀을 뒤적여 알아내듯, 모든 것을 동원하여 캐내기만 하고 참 왕이신 분께 경배 드리지 않고 매일의 삶에서 의례적으로 익숙한 예배와 일상에 눌러앉아 버리는 오늘 또 하나의 대제관, 율법학자의 모습을 꼬집어 주고 있다.

새해 새날을 주신 주님, 당신의 별을 따라 올 한 해를 걸어가는 희망을 사는 사람, 알아들은 말씀을 실천하는 생활하는 신앙인이 되게 하소서. 그리하여 당신이 나의 모든 삶을 주관하시고 다스리시는 왕이 되어주소서.

▥ 이 안나마리 수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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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작기도

오소서 성령님, 새해의 여정을 하느님 손에 맡기도록 우리를 이끄소서.

▸세밀한 독서(Lectio)

지난주 말씀은 유다인 목동들이 천사의 말을 통해 베들레헴에 아기 예수님을 경배하러 오는 이야기를 담고 있는데(루카 2,16­21) 오늘 주님 공현 대축일에는 이방인들이 예수님께 경배하러 오는 이야기를 듣게 됩니다.(마태 2,1­12) 예수님은 유다인과 이방인 모두에게 “임마누엘, 우리와 함께 계시는 하느님”(1,23)이시기 때문입니다.

유다인에게 메시아의 탄생을 알리는 것은 그들이 하느님의 메시지를 전해 준다고 믿어온 천사들의 말이지만 다른 이민족을 대표하는 동방박사들의 여정을 인도하는 것은 소리 없는 자연계의 표징인 하늘의 ‘별’입니다. 하늘은 하느님의 영광을 이야기한다고 사람들은 믿어왔습니다.(시편 19,2) 동방박사들은 유다 임금의 별은 보았지만 성경 말씀을 모르기에 유다인의 임금이 태어날 곳은 왕이 사는 수도인 ‘예루살렘’이라 여기고 그곳으로 가서 유다의 임금이 어디에서 태어났는지를 질문합니다.(마태 2,2)

이제 다시 동방박사들은 사라져 버린 별 대신 유다인 ‘성경’의 도움을 받는데 아이러니하게도 그들을 도와준 사람은 당대 유다인의 임금 헤로데였습니다. 하느님은 모든 사람을 당신의 구원계획을 위해 사용하십니다. 헤로데가 소집한 믿음 깊은 유다의 수석 사제와 율법학자들은 미카서 5장 1절의 말씀을 통해 ‘유다인의 임금’이 아니라 ‘그리스도, 메시아’가 베들레헴에 태어나셨다고 선포합니다. 그러나 놀랍게도 별을 따라 ‘유다인의 임금’을 찾는 동방박사들의 방문에는 온 예루살렘이 깜짝 놀라지만(마태 2,3) 그들이 그토록 고대하던 ‘메시아’, “당신 백성을 죄에서 구원하실”(1,21) 메시아가 태어났다는 성경 말씀에 대해서는 아무 반응도 보이지 않습니다.

성경의 예언을 그대로 믿었던 사람은 동방박사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지혜로운 사람들이라 여정의 가난과 고독을 미리 알면서도 떠나기로 선택했을 때부터 일어나는 사건에 온전히 자신들을 내어 맡기기로 결정한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이들은 여정의 초점이 이제 태어난 아기에게 있기에 예루살렘 사람들의 냉담함과 헤로데의 과장된 태도에 담긴 속셈에 아무 영향을 받지 않습니다. 그들은 본질적인 목표에 충실하고 부차적인 것들을 내버려 둡니다.

그들이 성경 말씀을 믿고 베들레헴 근처에 왔을 때 그들을 앞서 가다가 신호를 하며 길을 인도하던 별이 그들이 찾는 아기의 머리 위에 멈추어 섰습니다. 그것은 바로 ‘너희가 찾는 분이 여기 계시다.’라고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별은 소리 내어 그분을 알려줄 수 없지만 그 자리에 멈추어 섬으로써 그분이 계시는 곳을 알려주었고 동방박사들은 그 별을 보고 더없이 기뻐합니다.(2,10) 그들은 베들레헴에 도달했을 때에야 비로소 자신들을 떠받치는 어떤 위대한 힘이 자신들을 떠나게 했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그들은 아기 예수님을 만나 경배하고 선물을 바치는데 그들이 바치는 예물은 초라한 마구간 구유에 있는 아기의 신성을 알아보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들은 아기에게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선물합니다. 황금은 이 동방의 현자들이 가진 ‘지혜’를 상징하고, 유향은 그들의 마음 안에 들어 있는 절대자에 대한 ‘갈망’을 의미합니다. 몰약은 죽은 몸을 썩지 않도록 보관하는 기능을 하는데 언젠가 죽어야 할 인간의 죽을 ‘몸’을 상징합니다. 그들이 가진 지혜와 갈망과 몸을 아기 예수에게 드릴 때 그들은 바로 자기 자신들을 선물로 드린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그들은 다시 별의 지시에 따라 자신들의 나라로 돌아갑니다. 박사들이 다른 길로 돌아간 것은 하느님께 대한 그들의 내어 맡김의 깊이를 다시 보여줍니다. 그들은 그리스도를 만나 새로운 사람이 되었기에 하느님에 대한 무지에서 비롯되는 죄로 가득 찬 옛 고향으로 돌아갈 수 없습니다. 별을 따라 베들레헴에 와서 아기 예수님을 경배한 동방박사들은 그리스도의 “공동 상속자가 되고 한 몸의 지체가 되며 약속의 공동 수혜자”(에페 3,6)가 된 첫 이방인들, 우리 믿음의 조상입니다.

▸ 묵상(Meditatio)

주님, 동방박사들의 여정 가운데 저도 함께 있습니다. 여정에 필요한 것은 별과 성경을 통해 하느님이 주시는 마음의 권고와 하느님의 섭리에 대한 믿음입니다. 주님, 우리가 날마다 달려가고 있는 여정의 초점이 무엇인지를 잊지 않게 해주십시오. 그리고 우리 마음의 조언을 따라가되 그것이 하느님의 뜻에 따른 것이 되도록 기도하게 해주십시오.

▸ 기도(Oratio)

모든 임금들이 그에게 경배하고 모든 민족들이 그를 섬기게 하소서.(시편 72,11)

▥ 임숙희 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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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의 공현은 세 가지 사건을 기념합니다. 세례 때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드러내보이심, 가나 촌의 혼인 잔치에서 첫 번째 기적으로 능력을 드러내보이심, 오늘 예수님께서 삼왕에게 당신을 보여주심을 기념합니다. 그런데 오늘 아기 예수의 드러내심은 어른 예수의 드러내심과 사뭇 다릅니다. 어른 예수님께서는 장엄하게 드러나십니다. 세례를 받으시면서는 하느님의 아들이심이 장엄하게 드러나고 가나 촌 잔치에서는 물을 포도주로 바꾸시는 큰 능력이 드러납니다. 이에 비해 아기 예수는 장엄하게 자신을 드러내지 못함은 물론 스스로 드러나지도 못하십니다. 삼왕이 찾아왔기에 아기 예수님은 당신을 보여주실 뿐입니다. 그러므로 아기 예수께서는 당신을 보여주실 능력이 없으시다는 뜻입니다. 삼왕처럼 찾아나서는 사람에게만 당신을 보여주신다는 뜻입니다.

그러니 아기 예수를 보기 위해서는 첫 번째로 찾아나서야 합니다. 찾아 나서지 않는 사람은 볼 수 없습니다. 그래서 현재 자기 삶에 안주하는 사람은 볼 수 없고 새 해가 되어도 전에 살던 대로 살려는 사람은 볼 수 없으며 예수님이 태어나셨어도 상관없이 살려는 사람, 즉 예수님이 없어도 아무 상관없는 사람은 볼 수 없습니다.

성탄 날 새벽, 이 날은 아침 기도를 늦게 하기 때문에 일찍 일어나는 저는 그 시간까지 혼자 기도를 하고 있었습니다. 아침 7시가 되면 저희 집 옆 공사장은 어김없이 국민 체조를 하고 같이 구호를 외치고는 일을 시작하는데 그 날도 혼자 묵상을 하던 중 그 소리를 듣고서 문득 예수님께서 탄생하셨는데도 다른 날과 마찬가지로 일을 하고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예수님께서 탄생하신 것이 그들에게는 아무 것도 아닌 것입니다.

그러나 실제 우리 가정에서는 어떻게 됩니까? 아이가 태어나는 날 다른 일 제쳐놓고 아기 보러 갑니다. 그리고 모든 것이 아기 중심으로 바뀝니다. 그러나 아이의 탄생이 아무런 상관이 없는 사람은 아기가 탄생해도 거들떠보지도 않을 것이고 거들떠보지도 않으니 돌보지 않을 것이며 돌보지 않으니 그 아이는 결국 죽고 말 것입니다. 아기 예수님도 우리에게 이렇게 되고 말 수 있습니다. 우리가 아기를 찾아 나서도 아기 예수를 쉽게 볼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찾아 가는 길이 험난하기 때문입니다. 인도자가 필요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아기 예수를 보기 위해서는 두 번째로 좋은 인도자를 만나야 합니다. 삼왕을 아기 예수께로 인도했던 별과 같은 인도자를 만나야 합니다.

진정 캄캄한 밤에는 별이 필요합니다. 요즘같이 어려운 때에도 희망을 주는 별이 필요합니다. IMF의 어려운 때에는 박 찬호라는 야구 스타가 국민에게 희망을 줬고 요즘은 김연아 같은 빙상 스타가 희망을 줍니다. 별이 빛나는 것은 어둡기 때문이듯 이런 스타들이 우리의 큰 희망이 되는 것은 어렵기 때문입니다. 들은 얘기인데 김 연아 선수가 세례를 받은 다음에는 경기를 하러 나올 때 성호경으로 기도를 한다고 합니다. 모든 사람들이 바라보는 스타가 하느님을 향하여 기도드리니 스타를 바라보는 사람들도 자연스럽게 하느님을 바라보겠지요.

이런 스포츠 스타들도 우리로 하여금 하느님을 바라보게 하기에 필요하지만 우리에게 진정 필요한 것은 하느님의 빛을 받아 그 빛을 반사하는 진정한 영적 스타(Spiritual Star)가 필요합니다. 스포츠 스타를 바라보는 것 이상으로 우리는 이런 분들을 바라봐야 하고 이들의 인도를 받아야 합니다. 대중적 인기를 쫓아 몰려다니지 말고 우리를 진정 주님께로 인도해줄 영적인 스승을 우리는 따라가야 합니다. 그리고 마침내는 우리가 이런 영적인 별이 되어 다른 사람을 인도해야 할 것입니다.

▥ 작은 형제회 김찬선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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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맛, 삶의 향기

좋은 술 일수록 맛과 향기가 좋습니다. 술만 그런게 아니라 삶도, 글도, 말도 좋을수록 맛과 향기가 좋습니다. 성인들의 삶이 바로 그러합니다. 성인들의 삶을 렉시오 디비나 해보면 다 고유의 맛좋고 향기로운 삶, 관상적 삶이 었음을 담박 느낄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의 동방박사들의 삶도 맛있고 향기로워 보입니다. 모두가 하느님의 맛과 향기를 닮았습니다. 과연 하느님이 보실 때 내 삶의 맛과 향기는 어떨런지요. 몇 가지 예화로 강론을 시작합니다. 1.1일 대축일 저녁식사후 마신 술 맛이 좋고 향기로웠지만 저는 미쳐 몰랐고 옆자리의 마티아 수사님 말을 듣고 알았습니다.

"술은 이렇게 코로 향기를 맡으면서 서서히 음미하며 마시는 것입니다. 단 번에 훌쩍 마시면 안 됩니다.“

수사님은 서서히 향기를 맡고 맛을 음미하며 얼마 동안 시범을 보여줬고, 이어 저의 즉각적인 언급입니다.

"아, 바로 그것이 렉시오 디비나의 원리입니다. 성경은 최고의 술과 같습니다. 서두르지 말고 주님이 얼마나 좋으신지 서서히 맛보고 향기를 맡으면서 읽어야 합니다.“

너무나 확실히 깨달아 각인된 렉시오 디비나의 원리입니다. 술만 그런게 아니라 모든 삶에 두루 적용되어야 할 렉시오 디비나의 원리요, 이래야 비로소 관상적 삶, 영적 삶의 성취입니다. '삶의 렉시오 디비나'가 참으로 심오합니다.

어제 수도원 묘지를 방문했을 때 한 눈에 들어 온 묘비 마다의 생몰연대 였습니다. 90세 이상 사신 분이 거의없고 그 생몰 연대가 다 달랐습니다. 한 평생 삶이 어떠했을까 잠시 상상으로 렉시오 디비나 했습니다. 세상에 죽지 않는 사람은 하나도 없다는 평범한 진리를 새롭게 깨닫습니다. 그 어떤 성인도 다 죽는 다는 사실이 새삼 위로가 됩니다. 예외 없이 탄생 날짜가 있으면 임종 날자가 있습니다.

평생 살 것처럼 죽음을 잊고 지내지만 실상 얼마 남지 않은 삶임을 깨닫습니다. 일일일생(一日一生), 하루를 평생으로 압축하면 내 인생은 어느 지점에 와 있는지요. 죽음 있어 삶이 얼마나 소중한 선물인지 알게 됩니다. 죽음을 통해 분명해 지는 삶의 감격과 고마움, 기쁨입니다. 저절로 '하느님의 눈'으로, 내 '삶의 문장'에 주어를 하느님으로 하여 내 삶을 렉시오 디비나 하게 됩니다.

여기 수도원 묘지를 방문할 때마다 늘 그 삶을 되새기는 분이 있습니다. 바로 1950년, 그가 수도원 입회 전 6.25 사변시 흥남 철수 작전 때, 선장으로 있던 그의 배로 14000명의 피난민을 구조한 마리너스 수사님(1914-2001)입니다. 수사님의 묘비앞에 휘날리는 2개의 미국 성조기가 수사님의 영웅적 행위를 기리고 있습니다. 여기 뉴튼수도원에 와서 얻은 최고의 수확은 마리너스 수사님을 새롭게 만났다는 사실입니다.

"미국 정부가 훈장을 주기 위해 그의 속명을 찾아 여기에 왔을 때야 비로소 그가 전쟁의 영웅인 것을 수도원 사람들이 알았어요. 그가 너무 말이 없었기에 우리는 신문을 통해 그의 활약상을 알 수 있었죠.“

인터뷰 기사 중 죠엘 아빠스님의 답변입니다. 수사님은 옛 이야기를 하지 않았고, 47년 수도여정 중 평생 이곳을 떠나지 않았으며, 휴가 때 역시 수도원에 머무르며 언제나 기도하고 자기의 소임을 다했다 합니다(공지영의 수도원 기행 2권72-83쪽 참조). 얼마나 매력적인 숨겨진 겸손한 삶인지요! 한권의 '살아있는 성경' 처럼 깊고 아름다운 삶이기에 묘지를 방문할 때 마다 수사님의 삶을 렉시오 디비나 하게 됩니다. 이제 오늘 주님 공현 대축일의 최고의 조연(물론 주인공은 탄생하신 아기 예수님이심)인 동방박사들에 대한 본격적 렉시오 디비나로 세 측면에 걸친 묵상 나눔입니다.

첫째, 동방박사들의 내면에서 끊임없이 샘솟았던 하느님을, 진리를 찾는 불굴의 열정입니다. 구도자의 우선적 기본조건이, 영성생활의 시발점이자 원동력이 바로 열정입니다. 주님은, 삶의 이정표는 누구나 볼 수 있는 객관적 실재가 아닙니다. 하느님을, 진리를 찾는 백절불굴의 열정이, 갈망이 있을 때 눈이 열려 발견되는 선물이 주님이요 삶의 이정표입니다. 열정이 없어 눈이 열리지 않으면 눈 먼 맹인일뿐입니다. 동방박사들은 과연 하느님만을 찾는 열정의 구도자들로 우리 수도승들은 물론 믿는 모든 이들의 귀감입니다.
둘째, 삶의 이정표입니다. 진리를 찾는 열정에 눈이 열린 동방박사들에 은혜로이 계시 된 주님의 별, 삶의 이정표였습니다. 그대로 이사야 예언의 실현입니다.

"예루살렘아, 일어나 비추어라. 너의 빛이 왔다. 주님의 영광이 네 위에 떠올랐다. 자 보라, 어둠이 땅을 덮고, 암흑이 겨레들을 덮으리라. 그러나 네 위에는 주님께서 떠 오르시고, 그분의 영광이 네 위에 나타나리라.“

이사야를 통한 주님의 말씀이 암흑의 동토(凍土)에 살고 있는 우리를 고무하고 격려하며, 우리의 내면을 환히 밝혀줍니다. 바로 동방박사들처럼 눈이 열릴 때 계시되는 주님의 영광이요 주님의 별, 이정표임을 깨닫습니다. 그 많은 사람들 중 그 멀리 떨어져 있던, 진리를 찾는 열망에 깨어 눈이 열렸던 동방의 현자들에게만 계시된 영광의 별, 주님의 별이었음을 주목해야 합니다. 바오로의 고백처럼 계시를 통해 신비를 깨달아 안 이방의 동방박사들입니다. 지척에 있었지만 영적으로 잠들어 있던 그 박학의 종교인들, 신학자들 아무도 발견치 못한 주님의 별, 삶의 이정표였습니다.

셋째로 도반들입니다. 혼자가 아닌 셋의 도반들이 함께 했기에 성공적인 순례여정이었음을 깨닫습니다. 진리의 도반, 사랑의 도반입니다. 혼자라면 십중팔구 도중 하차 했을 것입니다. 주님의 별, 진리의 별, 희망의 별, 삶의 이정표 따라 마침내 목적지에 도달한 동방박사들의 최종 봉헌 모습이 참 아름답고 감동적입니다.

'그들은 그 집에 들어가 어머니 마리아와 함께 있는 아기를 보고 땅에 엎드려 경배하였다. 또 보물 상자를 열고 아기에게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예물로 드렸다."

탄생한 아기 예수님과 구도자 동방박사들간의 아름답고 감격적인 만남입니다. 주님께 자신을 봉헌하는 것보다 더 큰 기쁨은 없습니다. 우리 역시 동방박사들과 함께 믿음과 희망, 사랑의 세 보물 모두를 주님께 봉헌하며 이 거룩한 주님 공현 대축일 미사시간에 참여하고 있습니다.

진정 최고의 도반은 육안으로 보이지 않지만 영안으로 볼 수 있는 주님이십니다. 마지막 복음 말씀이 이를 입증합니다.
'그들은 꿈에 헤로데에게 돌아가지 말라는 지시를 받고, 다른 길로 자기 고장에 돌아갔다.'(마태2,12).

동방박사들의 성공적 순례 여정을 가능케 했던 수훈 갑의 최고의 도반은 바로 주님이심을 깨닫습니다. 주님보다 더 가깝고 더 좋은 도반은 세상에 없습니다. 늘 우리와 함께 계신 주님은 동방박사들과 함께 하셨고, 또 제 산티야고 순례는 물론 지금 뉴튼수도원의 내적 순례여정에도 함께 하고 계십니다.

주님을 찾는 순례여정에 항구할 때 내 삶 역시 '맛있고 향기로운 관상적 삶'에 '살아있는 성경'이 됩니다. 매일의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내 고유의 아름다운 '삶의 성경'을 쓰도록 도와주십니다. 아멘.

▥ 분도회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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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언할 수 없는 은혜로운 대 사건 앞에
그저 감사와 찬미의 기도만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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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라엘 백성들 사이에서는 간절하고도 오랜 기다림 하나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언젠가 하느님께서 직접 자신들 눈앞에 나타나실 것이라는 기다림이었습니다.

그간 약소 민족으로 어쩔수 없이 겪어야만 했던 그 숱한 수모들, 외침, 학살, 파괴, 유배, 등등...하느님께서 나타나시면, 이 끝도 없는 고통과 시련에서 해방시켜, 대자유와 구원을 선물로 주실 것이라는 희망과 함께.

어린 시절, 우리 역시 그런 때가 있었습니다. 부모님이 멀리 외출하셨을 때, 형들이나 누나들로부터 괜한 구박을 받거나 시달림을 당했을 때, 마음 속에는 오직 한 가지 간절한 바람밖에 없었습니다.

제발 빨리 아빠 엄마가 돌아오셨으면. 그래서 내 이 억울한 사연을 들으시고, 형과 누나들을 혼내주셨으면...

그런데 정작 자신들의 눈앞에 모습을 드러내신 하느님의 모습은 너무나 초라해서 실망스러웠습니다. 그간 겪어왔던 약소국의 서러움과 슬픔을 순식간에 바꿔놓을 위풍당당, 휘황찬란한 모습을 기대했었는데, 그런 기대는 순식간에 물거품으로 변하고 말았습니다.

이 땅에 내려오신 하느님께서는 가장 가난한 장소에서, 가장 힘없고 나약한, 갓난 아기의 모습으로 등장하신 것입니다.

지난겨울, 갓 태어난 강아지들을 유심히 지켜본 적이 있습니다. 어미 개의 극진한 보살핌과 헌신 없이는, 단 하루도 생명을 유지할 수 없을 정도로 연약한 존재였습니다. 눈도 제대로 뜨지 못했습니다. 따뜻한 엄마 품이 아니라면 몇 시간 지나지 않아 동사(凍死)할 것 같았습니다. 그저 할 줄 아는 것이라는 것은 끊임없이 낑낑대는 것, 어미 젖을 겨우 찾는 것 정도였습니다.

인간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갓태어난 아기들 보십시오. 스스로 할 줄 아는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그저 젖 달라고 우는 것, 젖 먹고 나면 자는 것, 기저귀 갈아달라고 우는 것 밖에 할 줄 모릅니다. 고개조차 스스로 가눌 줄 모릅니다. 자신의 힘으로 돌아 누울 수도 없습니다. 철저하게도 엄마에게 의존적입니다.

하느님께서 그토록 작고 나약한 모습, 수동적이고 의존적인 모습, 천진난만한 아기의 모습으로 이 세상에 오신 이 놀라운 성탄의 신비를, 다시 한 번 깊이 묵상하는 주님 공현 대축일입니다.

성탄, 공현, 육화강생 사건은 하느님께서 우리 인간에게 보내시는 아주 강렬한 메시지를 하나 품고 있습니다.

우리도 이웃 앞에 미소한 자가 되라는 외침입니다. 가난한 이웃들을 힘과 권력으로 내리 누르지 말라는 메시지입니다. 동료들 위로 올라서지 말고 내려서서 섬기라는 당부입니다. 교만을 버리고 겸손의 옷을 입으라는 무언의 강력한 메시지입니다. 결국 하느님께서 인간이 되어 오신 이유는 우리 인간을 위한 따뜻한 위로와 동행입니다. 인간 세상으로 내려오신 하느님의 의도에 대해서 묵상해봅니다.

아기 예수님 탄생의 배경에는 우리 인간을 당신 나라로 데려가기 위한 하느님의 계획이 있습니다. 아기 예수님 탄생은 나약한 인성에 당신의 완전한 신성을 부여하기 위해서입니다. 부족한 인간성에 무한한 하느님성을 투여하기 위해서입니다.

아기 예수님의 탄생 이유는 너무나 명확합니다. 먼지나 티끌처럼 비참한 인간 존재의 품위를 들어 높이기 위해서 아기 예수님께서 탄생하셨습니다. 보잘 것 없는 우리 인간에게 참된 가치를 부여하기 위해하느님께서 인간의 모습을 취하신 것입니다. 결국 무(無)인 존재를 하느님화하기 위해서, 인간에게 영원한 생명을 선물로 주시기 위해서 하느님이 인간이 되신 것입니다.

형언할 수 없는 은혜로운 대사건, 우리 인간을 향한 하느님의 자비와 사랑이 철철 흘러넘치는 성탄의 신비 앞에 당연히 우리 인간 측의 응답이 있어야만 합니다. 가장 좋은 응답은 감사와 찬미의 기도가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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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승국 스테파노신부, 살레시오회 : 2019년 1월 6일
  | 0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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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미 성탄! 오늘은 “제2의 성탄절”이라고도 불리는 “주님의 공현 대축일” 입니다. 왜냐하면, 그동안 목동들에게만 알려져 있고 감추어져 있었던 메시아의 탄생이 비로소 오늘 동방박사들을 통해 전 이스라엘뿐만 아니라, 이방인들에게도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이를 오늘 <제2독서>에서 사도 바오로는 이렇게 말합니다.

“그 신비가 과거의 모든 세대에서는 사람들에게 알려지지 않았지만, 지금은 ~계시되었습니다.”(에페 2,5)
그래서 동방교회에서는 오늘을 “거룩한 빛의 축제일”이라고 부릅니다.오늘 <제1독서>에서 이사야 예언자는 말합니다.“그때 이것을 보는 너는 기쁜 빛으로 가득하고,너의 마음은 두근거리며, 벅차오르리라”(이사 60,5)

그러니 오늘 이 거룩한 빛의 신비를 본 우리는 기쁜 빛으로 가득하고, 마음이 두근거리며 가슴이 벅차오를 것입니다. 여러분은 지금, 자신이 기쁜 빛으로 가득한지요? 마음이 두근거리고 벅차오르는지요?

오늘 우리는, 바로 이 벅찬 기쁨을 찾아, 동방박사와 함께 임을 찾아나서는 ‘길’을 떠나고자 합니다. ‘길’은 성경의 핵심단어이기도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 자신을 “길”이라고 말씀하셨고(요한 14,6), 프란치스코 교종은 친구인 한 랍비와의 대화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사람이 하느님을 인격적으로 체험할 때, 그는 길을 떠나야 합니다.사람은 걸어가면서, 앞으로 나아가면서, 하느님을 찾으면서,그리고 하느님께서 자기를 찾아 나서도록 허락하면서, 하느님을 만나는 법입니다.”

오늘 <복음>에는 두 부류의 사람들이 등장합니다. 한 부류는 길을 떠난 이들이요, 또 한 부류는 길을 떠나지 않는 이들입니다. 길을 떠난 이들은 빛을 따라나선 동방박사들과 예루살렘으로 길을 떠나온 마리아와 요셉이 있고, 멀리 하늘에서 길을 떠나온 아기 예수님이 있습니다. 한편 길을 떠나지 않은 이들에는 왕궁에 머물러 있는 이들과 수석 사제들과 율법학자들입니다.

우리는 이 둘 중, 어떤 부류의 사람인가요?
빛과 진리를 찾아 길을 떠나 여행하는 사람일인가요?
아니면, 자신의 안전과 편리에 머물러 안주하고 있는 사람인가요?

또한 오늘 <복음>에는 두 명의 왕이 있습니다. 한 왕은 황포를 걸치고 화려한 왕궁에 사는 지상의 예루살렘을 통치하는 헤로데 왕이요, 또 한 왕은 포대기로 둘러싸여 무력하게 누추한 마구간에 누워있는 새 이스라엘의 왕이신 아기 예수님입니다.

우리는 어떤 왕을 만나려고 길을 떠나 여행을 하고 있나요?
지상이 화려한 왕인가요? 아니면 가난하고 힘없는 아기 예수 왕인가요?

오늘 <복음>에는 세 번의 ‘길 떠남’이 있습니다. <첫 번째>는 자기의 터전에서 예루살렘으로의 길 떠남이요, <두 번째>는 헤로데 왕궁에서 마구간으로의 길 떠남이요, <세 번째>는 마구간에서 본래의 자리로 돌아오는 길 떠남입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먼저 빛이 비추고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먼저 별이 나타나 우리를 비추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아무나 그 별을 보는 것은 아닙니다. 그 빛을 받아들이려는 마음이 열려있는 자라야 그 별을 바라보고, 그 별을 바라보는 자만이 그 별이 자신을 끌어당기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렇지만, 아무나 길을 떠나는 것은 아닙니다. 그분을 애타게 갈망하고 고대하는 자만이, “그분의 별”(마태 2,2)을 따라 그분을 만나 경배하러 길을 떠납니다.

사실, 우리는 그렇게 길을 떠나온 사람들입니다. 우리도 먼저 우리를 비추고 계시는 그분을 향한 갈망과 목마름으로 길을 떠나온 사람들입니다. <첫 번째> 길을 떠나온 사람들입니다. 이 <첫 번째> 길 떠남을 위해 우리는 온갖 편리와 안주를 포기해야 했고, 위험과 위기의 십자가도 져야 했습니다. 이 길을 오면서 때로는 사막처럼 무미건조하고 쓸쓸할 때도 있었고, 빛을 놓치고 어둠에 쌓여 길을 분별하지 못할 때도 있었고, 길을 포기하고 싶을 때도 반항할 때도 있었습니다. 그래서 더러는 좌절하기도 하고 방황하기도 했고, 그분이 계실만한 화려한 하려한 왕궁을 찾아 기웃거리기도 했습니다. 마치 동방박사들이 예루살렘 왕궁을 기웃거렸듯이 말입니다.

그러나 동방박사들처럼, 별의 안내를 받아서 이스라엘까지는 왔지만, 메시아를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메시아를 찾아 만나는 데에는 “꼭 필요한 한 가지”(루가 10,41)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바로 “참된 빛이신 말씀”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메시아가 태어날 곳이 어디인지”(마태 2,3)를 이미 “말씀” 속에 계시해 주셨습니다. 예언자 미카를 통하여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 에프라타의 베들레헴아, 너는 유다 부족들 가운데에서 보잘것없지만 나를 위하여 이스라엘을 다스릴 이가 너에게서 나오리라.”(미카 5,1)

그리하여, 동방박사들이 “말씀”을 따라서 또 다시 <두 번째> 길을 떠났듯이, 우리도 말씀을 따라 길을 떠나와 여행 중입니다. 잠시 착각하고 머문 나의 허황한 자기를 떠나 ‘작은 고을 베들레헴을 향하는 길’입니다. 이제 오로지 “참 빛이신 말씀”의 비추임을 따라 걷습니다. 그러나 “그 빛”을 바라보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그 빛”이 비추는 곳을 따라 걷습니다. “말씀의 빛” 이 비추는 낮은 곳, 누추한 마구간에서 “말씀이신 아기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이제 우리는 자신을 낮은 곳, 마구간에 자신을 내려놓고 무릎은 꿇고 땅에 엎드려야 할 때입니다. 낮게 엎드린 우리를 참된 빛이 비출 것입니다. 우리 안에 참 빛이 들고, 우리 안에 말씀이신 아기 예수님이 탄생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경배 드리는 일은 우리 자신을 땅에 내려놓는 일인가 봅니다. 구유라는 밥통에 자신을 밥으로 내어놓는 일인가 봅니다. 우리가 낮아져야만, 우리 자신이 온전히 예물이 될 수 있는가 봅니다.

이제, 우리는 마침내 <세 번째> 길을 떠납니다. 본래의 자리로 돌아가는 길입니다. 이제 우리는 우리 안에 탄생한 빛이신 말씀이신 아기 예수님을 품고 새로운 길을 떠나야 할 일입니다. 그렇습니다. 이 <세 번째> 길을 떠남이 바로 오늘 주님의 공현이 우리에게 이끄는 길입니다.

이제는 빛이 되어 걸어야 할 일입니다. 그러니, 더 이상은 헤맬 필요가 없습니다. 더 이상은 자신을 채우기 위해 온갖 화려함으로 꾸미고 있는 왕궁을 향해 가지 말아야 할 입니다. 이제는 자신을 몰아내고, 찬란히 빛나는 예수님을 밝힐 일입니다. 그리스도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그리스도의 마음으로 세상을 맞이해야 할 일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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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주 올리베따노 이영근 신부 : 2019년 1월 6일
  | 01.06
466 18%
찬미 성탄!
오늘은 “제2의 성탄절”이라고도 불리는 “주님의 공현 대축일” 입니다. 왜냐하면, 그동안 목동들에게만 알려져 있고 감추어져 있었던 메시아의 탄생이 비로소 오늘 동방박사들을 통해 전 이스라엘뿐만 아니라, 이방인들에게도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이를 오늘 <제2독서>에서 사도 바오로는 이렇게 말합니다.

“그 신비가 과거의 모든 세대에서는 사람들에게 알려지지 않았지만, 지금은 ~계시되었습니다.”(에페 2,5)

오늘 <말씀전례>의 주제는 ‘왕’입니다.
오늘 <복음>의 ‘빛’은 바로 이 ‘왕’을 비춥니다. 여기에서 의미하는 ‘왕’은 ‘하느님이 기름 부으신 자’를 말합니다. 고대의 이스라엘에서 ‘왕들’과 ‘제사장’들은 맡은 일을 위하여 기름부음을 받았고, ‘기름부음 받은 자’라는 뜻을 나타내는 단어 마쉬아흐(mashiach)에서 메시아(messia), 그리스도(christos)라는 단어가 나왔습니다.

<성경>에는
오실 ‘왕’에 대한 암시가 미리 주어졌습니다. 하느님의 약속을 나탄이 다윗에게 전하는 장면은 이렇습니다.

“나는 네 아들들 가운데에서 네 뒤를 이을 후손을 일으켜 세우고, 그의 나라를 튼튼하게 하겠다. ~나는 그의 아버지가 되고 그는 나의 아들이 될 것이다. ~내 집안과 내 나라 안에서 그를 영원히 세우리니, 그의 왕좌는 영원히 튼튼하게 될 것이다.”(1역대 17,11-14; 2사무 7,11-16 참조)

이 구절은
‘왕’인 그리스도 오심을 약속하신 모든 메시아 예언의 모태가 되었고, 이러한 미래 구원자에 대한 약속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희망이 되었습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는 그 왕이 오실 때를 묘사해줍니다.

“네 위에는 주님께서 떠오르시고 그분의 영광이 네 위에 나타나리라. 민족들이 너의 빛을 향하여, 임금들이 떠오르는 너의 광명을 향하여 오리라. ~들은 모두 스바에서 오면서 금과 유향을 가져와 주님께서 찬미 받으실 일들을 알리리라.”(이사 60,2-6)

<이사야서>의 이 말씀은 오늘 <복음>을 비춰줍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에는 두 명의 ‘왕’이 등장합니다. 한 ‘왕’은 황포를 걸치고 화려한 왕궁에 사는 지상의 예루살렘을 통치하는 헤로데 왕이요, 또 한 ‘왕’은 포대기로 둘러싸여 무력하게 누추한 마구간에 누워있는 새 이스라엘의 왕이신 아기 예수님입니다.

그런데 하느님의 기름부음을 받은 메시아인 ‘왕’은 어떤 ‘왕’일까요?

이를 오늘 <화답송>인 <시편> 72편에서는 이렇게 노래합니다.

“그가 당신의 백성을 정의로, 당신의 가련한 이들을 공정으로 통치하게 하소서. ~그가 백성 가운데 가련한 이들의 권리를 보살피고 불쌍한 이들에게 도움을 베풀며 폭행하는 자를 쳐부수게 하소서. ~적들은 그 앞에 엎드리고 그의 원수들은 먼지를 핥게 하소서. ~그는 약한 이와 불쌍한 이에게 동정을 베풀고 불쌍한 이들의 목숨을 살려 줍니다.”

진정, 그들이 기다리는 ‘왕’이 이러한 ‘왕’일진데,
헤로데 왕으로서는 참으로 난감하고 두려운 일이었던 것입니다. 사실, 우리가 알고 있는 <신약성경>에 나오는 ‘복음’(기쁜 소식, euanggelion)이란 의미도 왕과 지배자들과 관련된 용어입니다. 곧 ‘새 왕이 책봉되었고, 새 왕국이 집권했다.’는 선포를 뜻합니다. 그러니 제국의 지배권자들에게는 끔찍한 소식이었고, 식민지 백성들에게는 환호와 감격의 기쁜소식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니 헤로데 왕이 동방박사의 말을 듣고 기겁을 한 것입니다.

그러나 엄밀히 말하면,
헤로데 왕이나 이스라엘 백성들이나 다 같이 메시아인 ‘왕’에 대해 오해하고 있기는 마찬가지였습니다. 왜냐하면, 메시아의 왕국은 이미 이 세상에 왔지만, 이 세상에 속하지 않는 나라였기 때문입니다. 빌라도가 예수님께 “당신이 유다인들의 임금이오?”(요한 18,33) 라고 물었을 때, 예수님께서는 대답하십니다.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하지 않는다. 내 나라가 이 세상에 속한다면, 내 신하들이 싸워 내가 유대인들에게 넘어가지 않게 하였을 것이다.”(요한 18,36)

그렇다면 다윗을 계승한 메시아인 왕은 어떤 왕인가?
사실, 유대인들은 왕에 대한 메시아 관과 동시에, 제사장 메시아 관도 가지고 있었습니다. 곧 레위 지파에서 나오는 제사장 메시아와 다윗 지파에서 나오는 왕 메시아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사실은 당시 상황을 잘 알려주는 [사해문서]에서도 드러나고 있습니다, 사실, 제사장 메시아에 대한 증거는 ‘왕’ 메시아보다 훨씬 더 거슬러 올라갑니다. <시편>에서는 말합니다.

“너는 멜키체덱과 같이 영원한 사제다.”(시 110,4)

이는 다윗가문의 왕이 멜키세덱(창세 14장)의 계열을 따라
영원한 제사장이 될 것이라는 맹세입니다. 사실, 다윗은 오직 제사장들만 할 수 있는 제물을 드렸고(1사무 24,25) 제사장 역할을 했으며, 그의 아들들도 제사장들이었습니다(2사무 8,18). 그러니 메시아의 원형인 다윗은 ‘왕’임과 동시에 ‘제사장’이었던 것입니다.

실제로 예수님께서는
고난을 당하시고 죽으심으로 제사장으로서 우리의 죄를 대속하셨습니다. 이를 이사야 예언자는 ‘주님의 종의 노래’(53, 4-12)에서 미리 알려주었습니다. <히브리서>에서는 대제사장으로서의 예수님을 이렇게 말해줍니다.

“우리에게는 하늘 위로 올라가신 위대한 대사제가 계십니다. 하느님의 아들 예수님이십니다. ~모든 면에서 우리와 똑같이 유혹을 받으신, 그러나 죄는 짓지 않으신 대사제가 계십니다.”(히브 4,14-15)

그러니 오늘 우리에게 오신 왕이신 아기 예수님은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십니다. 아멘.

-오늘 말씀에서 샘 솟은 기도 -

“그분의 별”(마태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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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
당신은 먼저 저를 찾아와 비추셨습니다.
제 마음에 열망을 불러일으키셨습니다. 사랑을 심으셨습니다.
그 사랑 안에 살게 하소서. 그 사랑으로 살게 하소서.
빛이 되어 당신 사랑을 드러내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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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주 올리베따노 이영근 신부
2021년 1월 3일
  | 01.03
466 18%
우리는 동방에서 그분의 별을 보고
그분께 경배하러 왔습니다.(마태오 복음 2장 2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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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라는 기쁨을 사람이 되어오신 하느님께서 먼저 드러내신다.

하느님은 누구신가?
사람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하느님의 놀라운 자기 개방성인 평화와 기쁨의 계시이다. 하느님께서 하늘을 떠나 우리들 곁으로 오셨다. 동방박사들도 길을 떠났기에 하느님의 성탄을 만날 수 있었다.

공현은 떠남이다.
집착에서 탐욕에서 떠나는 것이다. 공현은 만나기 위한 떠남이다. 공현은 함께하시는 하느님 그 사랑의 축제이다. 그 축제에서 하느님의 가난함을 만난다. 작은 아기로 오신 하느님께서 우리 모두를 껴안으신다.

널리 드러내는 공현은
하느님의 살아계신 말씀의 빛이다. 사랑할수록 빛나는 하느님의 성탄이다. 우리 모두를 구원하시는 하느님의 구원을 본 것이다. 구원의 여정은 가난한 아기의 여정으로 시작되었음을 믿는다. 자아를 벗어나는 것이 공현의 본질이며 구원의 실재임을 알려주신다. 모든 삶을 우리들에게 거시는 하느님의 봉헌이 사랑의 공현(公顯)이다.

하느님은 누구이신가?
하느님은 봉헌이시다.
봉헌이 선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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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
2021년 1월 3일
  | 0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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