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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 흔연히 웃고 낙락하니라.
조회수 | 3,204
작성일 | 07.09.22
지금 시복시성 운동이 추진되고 있는 '하느님의 종' 124위 순교자의 출신 지역을 보면 충청도 출신이 51명으로 가장 많다. 우리 대전교구가 초기 천주교 신앙의 요람이었다는 것과 이곳이 순교자의 피가 배인 거룩한 땅임을 보여주는 것이다.

"무엇이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갈라놓을 수 있겠습니까? 환난입니까? 역경입니까?...(로마 8,35)"

순교자들이 피로써 전해준 신앙이 얼마나 값지고 귀한 것인지를 되새기는 날이다. 우리들 안에는 그토록 구원을 갈망하고 하느님을 사랑했던, 그 사랑 때문에 어떤 박해도 죽음도 이겨냈던 순교자들의 피가 흐르고 있다.

순교자들은 어떤 상황이나 처지에서도 하느님을 삶의 1순위로 고백한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재산, 명예, 신분이나 사랑하는 부모, 배우자, 자식까지 하느님보다 첫자리에 놓지 않았다. 후손인 우리는 너무도 쉽게 1순위를 다른 것에 내어준다. 자녀들에게도 공부, 시험, 입신출세에 관계된 것이면, 주일미사, 신앙생활까지 너무도 쉽게 1순위를 내어주는 부모들을 보면 안타깝다.

대축일을 앞두고 [기해일기]라는 기해박해 때의 순교자들에 관한 기록을 읽었다. 자주 눈에 띄는 구절이 '안색이 여상하다', '혼연히 낙락하다'라는 구절이다.

'여상(如常)하다'는 것은 평상시와 똑같다는 뜻이고, '낙락(樂樂)하다'는 것은 즐거워하고 즐거워한다는 뜻이다.

오늘 기리는 정하상 성인도 법정에서의 모진 고문 속에서도 '안색이 여상했다'고 한다. 그리고 "45세 때 형장으로 나갈 때는 수레 위에서 혼연히 웃고 낙락하니라"고 했다. 함께 순교한 조신철 가를로 성인에 대해서는 "형장으로 나갈 때에 안색이 화평하고 기운이 여상하여 낙락히 기도문을 외우며, 칼을 받을 때에 혼연히 웃더라"고 기록하고 있다.

누가 인생의 가장 중요한 마지막 순간에 환하게 웃으며 죽을 수 있는가? 여러분은 그런 얼굴로 죽을 수 있겠는가?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를 분명히 아는 자만이 웃으며 죽는 것이다. 육신의 목숨보다 더 가치있고 소중한 삶을 살아서 이미 맛보고 누린 이들만이 웃으며 죽는 것이다. "순교자들이여! 하느님을 늘 삶의 1순위로 두고 사셨던 그 믿음을 본받도록 저희를 위하여 빌어주소서! 신앙을 통해 지상에서 이미 천국을 맛보며 사셨던 그 기쁨을 저희도 지니고 살게 하소서!"

이상 대전교구 이대근 신부님의 글이었습니다.

성 김대건 안드레아와 성 정하상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들이여, 저희를 위하여 빌어주소서. 아멘.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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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교구 방윤석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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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카 9,23-26

오늘 복음은 주님께서 선포하시는 수난과 죽음과 부활에 대한 예고입니다. 예수님의 제안은 매일 십자가를 받아들여서 지는 것입니다.

골고타 십자가에서의 영감인 매일 지는 십자가는 심한 박해를 피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스스로 유지하는 모든 형태의 자유로움에로 다가서는 것입니다. 주님은 또한 자기 목숨을 구하려는 자는 잃는 것이라는 위험을 말씀하십니다(24절).

다른 두 가지 위험은 주님을 따르는 진실성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두 가지 위험은 세상의 부요함을 얻는 것이며(25절),

사람의 아들을 증거하는데 있어서의 부끄러움입니다(26절).

루가는 공동체를 말하는데 있어서 다음을 기억합니다. 공동체는 참 부활의 공동체이어야 합니다. 그 부활이 모든 가치의 우선적이며 삶의 건강한 조건이 갖춘 기초에 서 있습니다. 왜냐하면 삶과 자유를 향한 여정을 포기하는 것은 그 발걸음을 죽음과 실패에 양도하기 위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김대건 성인과 정하상 성인과 함께 동료 순교자들은 자신의 목숨을 예수님을 따르기 위해 내 놓았습니다.

오늘날 자기를 버리는 것은 무슨 의미인가요?

자신을 비하하고 내팽개친다는 것이 아니라 내 욕심을 버리고 매일 제 십자가, 즉 자기 역할, 부모, 교사, 직장인, 자녀…로서 성실히 살아가는 것입니다. 자기 십자가를 혹시 이웃이나 예수님께 넘기지는 않나요?

나의 뜻, 생각만 생각하고 주님이나 형제 자매의 뜻을 무시하지는 않나요? "나를 따르려는 사람은 누구든지 자기를 버리고 매일 제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한다"(9,23).

곽승룡 신부
  | 09.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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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워야 채워지는 삶

세상 사람들은 높은 것, 많은 것, 큰 것을 지향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높은 자리를 차지하고 많은 재산을 모으고 큰 평수의 집에서 살기를 원합니다. 이러한 조건을 갖춘 사람을 보면 성공했다고 말합니다. 그러한 현실 속에서 우리는 어김없이 순교자 대축일을 맞이했습니다.

우리가 기리는 순교자들 역시 세상 사람들이 추구하는 것처럼 더 큰 것, 많은 것, 높은 것을 원했습니다. 하지만 그 대상이 달랐습니다.

먼저 순교자들은 세상의 것과 하느님 나라의 것을 비교했습니다. 세상 것이 아무리 크고, 많고, 높다 해도 하느님 나라만큼 크고, 하느님의 은총만큼 많고, 하늘나라만큼 높은 것이 없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또한 그분들은 얻는 방법을 알고 있었습니다. 높은 것을 얻기 위해선 철저하게 낮아져야 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예수께서 최고로 낮아지신 것처럼 낮아지지 않고서는 높이 올라갈 수 없음을 알았습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신‘높아지려는 사람은 낮아지고 낮아지려는 사람은 높아질 것’이란 뜻을 알았던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채우고 또 채워도 차지 않는 욕망 속에 사로잡혀 살고 있을 때 이분들은 자신을 비우며 나누는 삶을 살았습니다. 자기의 모든 것을 다 비워야 만이 그 안에 가득 채울 수 있음을 알고 있었습니다. 크고 좋은 것보다는 보잘 것 없는 것에 감사하고 만족할 수 있었습니다. 주님께서 주신 은총의 선물에 감사했습니다.

그 결과 이 분들은 천상의 높은 자리를 차지하는 영광을 누리게 됐습니다. 이 세상보다 훨씬 더 넓은 세상에서 살게 됐습니다. 이 세상 전부보다 훨씬 많은 천상의 선물을 가지게 됐습니다. 즉, 하늘나라를 선물로 주셨고 세상 사람들에게 칭송받게 해주셨습니다. 이러한 것들은 세상 사람들처럼 무조건 경쟁해서 얻어내는 것이 아닙니다. 자신을 비우고 하느님만을 생각하며 살아갈 때 거저 주시는 선물인 것입니다.

오늘 순교자 대축일을 지내면서 우리의 삶을 반성해보고 하느님께 모든 것을 맡겨드리는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노력합시다. 천상에 계신 순교자들께 나약한 나 자신과 우리 모두를 위해 당신들을 닮은 굳은 믿음, 항구한 믿음을 가질 수 있도록 전구해주시기를 청하며 기도합시다.

김선태 야고보 신부
  | 09.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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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합리한 삶이 가장 합리적인 삶이다.

아버지 : 죽어야 살 수 있단다! 네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오렴.
아 들 : 글쎄요... 근데... 너무 불합리하잖아요...
아버지 : 진짜 네 속 마음이 무엇인지 알고 싶구나!
아 들 : 사실... 십자가도, 죽는 것도 싫어요. 그냥 십자가 없이 살 수는 없을까요?

신앙생활에는 불합리한 일들이 참 많은 것 같다. 1945년 사제로 서품되지만 이듬해 1년여의 사제직을 마치고 순교 당하신 김대건 신부님의 삶도, 그리고 신앙을 증거하기 위해 목숨을 내어놓으셔야만 했던 순교자들의 삶도 너무나 불합리해 보인다. 그런데 하느님께서는 또다시 우리에게 불합리한 삶을요구하신다. 그냥 합리적으로 신앙생활을 할 수는 없는 걸까? 십자가 없이 기쁘기만한 신앙생활을 할 수는 없는 걸까? 아니 어쩌면 우리는 이미 십자가 없는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지난 8월 방한하신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 시복미사를 집전하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신 바 있다. “우리는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방식으로, 우리의 신앙을 양보해 타협하고, 복음의 근원적 요구를 희석시키며, 시대정신에 순응하라는 요구를 받게 됩니다.”이 말씀처럼 우리는 여러 가지 방식으로 신앙을 양보하고 타협하며 살아가고 있는것은 아닐까?

우리의 구세주이신 예수님을 보라! 3년이라는 짧은 공생활 끝에 십자가의 죽음으로 삶을 끝맺으신다. 너무나 불합리해 보인다. 그러나 그 불합리함의 끝은 부활이었다. 그 불합리함을 받아들이기 위한 예수님의 노력을 바라보자. “아버지, 이 잔을 저에게서 거두어 주십시오. 그러나 제 뜻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게 하십시오.”(루카 22,42) 피땀 흘린 예수님의 기도, 예수님의 고뇌! 우리는 십자가 앞에서 얼마나 고뇌하고 있는가? 세속에 양보하고 타협하지 않기 위해 얼마나 피땀 흘리며 기도하고 있는가? 얼마나 저항하고 있는가?

예수님도, 김대건 신부님도, 수많은 순교자들도 그 불합리함에도 불구하고 고뇌 끝에 당신 목숨을 내어놓았다. 그렇다면 나는 지금 내 목숨을 무엇에 내어 주고 있는가? 돈 따위에? 물질 따위에? 부디 귀하디 귀한 진주를 돼지에게 던져 주는 일이 없기를...적어도 날 위해 당신 목숨을 바치신 예수님 정도는 되어야, 당신 목숨보다 나를 더소중하게 여겨 주시는 예수님 정도는 되어야 내 목숨을 바칠 가치가 있지 않겠는가? 이것이 불합리한 일인가?

<대전교구 김택민 마태오 신부>
  | 09.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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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와 성 정하상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들 대축일은 기해박해, 병오박해 때 순교한 79위와 병인박해 때 순교한 24위를 1984년에 요한 바오로 2세 교황님에 의해 시성된 103위 순교자들을 기리는 대축일이다. “순교자의 피는 그리스도인들의 씨앗”(호교론 50,13) 이라는 유명한 말을 남긴 교부 떼르뚤리아누스의 말처럼, 우리 한국천주교회는 그야말로 순교자들의 피 위에서 핀 찬란한 꽃이다.

순교자들에 대한 강론을 준비하면서 식상하게 그 분들의 삶과 순교 여정을 나열하지 말자는 생각을 늘 한다. 왜냐하면 그분들의 고결한 삶과 죽음을 마 치 무슨 약력을 소개하듯 하는 것이 너무 죄송스러운 마음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국은 그분들의 순교 행적을 나열할 수밖에 없었다. 아무리 애를 써도 그 이상을 말할 수가 없었다. 묵상 하면 할수록 순교란 그 자체로 놀라운 신비라는 생각이 들었고, 그 신비를 나의 이성으로는 도무지 이 해할 수가 없었다.

어떻게 하면 그처럼 큰 사랑으로 그리스도를 대할 수 있는지... 어떻게 하면 그리스도를 위하여 온갖 고초를 다 겪으며 피 흘려 흔연히 순교할 수 있는 지... 어떻게 하면 그리스도를 위하여 모든 것을 내려놓을 수 있었는지... 어떤 일을 해도, 어떤 생각을 해도, 늘 나 자신을 떠날 수 없는 옹졸한 나에게는... 늘 예수님이 중심이 되어야 하는 순교의 깊이는 도 무지 헤아릴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순교자들도 우리와 다르지 않은 사람이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무엇이 이분들을 이토록 그리스도께 대한 강렬한 사랑으로 이끌 수 있었을까? 같은 순교의 길을 걸으신 바오로 사도의 말씀에 그 답이 있지 않을까? “나는 확신합니다. 죽음도, 삶도, 천사도, 권세도, 현재의 것도, 미래의 것 도, 권능도, 저 높은 곳도, 저 깊은 곳도, 그 밖의 어떠한 피조물도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님에게서 드러나 하느님의 사랑에서 우리를 떼어놓을 수 없습니다.”(로마 8,38-39) 맞다. 그리스도께 대한 확신이다. 하느님 나라에 대한 확신이다. 그저 막연한 믿음이 아니라 확고하고 강력한 확신이다. 그럴 수만 있다면 순교는 신비가 아니라 삶이고 희망이다. 그러한 확신으로 순교자들이 증거한 믿음을 이제 우리가 증거 할 차례다.

▮ 대전교구 곽명호 루카 신부 : 2016년 9월 18일
  | 09.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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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 거처에 머무는 사람

하루 일정을 마무리하고 사제관이라는 이름이 새겨져 있는 거처로 돌아옵니다. 사제관문을 열다가 잠시 멈칫하는 저를 바라봅니다. 제 이름이 새겨져 있지 않은 명패, 그리고 잊고 있었던 사실을 다시 기억합니다. “아! 나는 잠시 이곳을 거쳐가는 객(客)이지!”

성(姓)이 ‘사’, 이름(名)이 ‘제관’인 집. 그럼에도 감사를 드리는 것은 하루의 피곤함을 풀어낼 수 있는 공간이 있다는 것이고, 그 공간을 원하는 때에 그리고 내키는 대로 사용할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기억합니다. 집이 아닌 거처입니다. 잠시 머무는 공간일 뿐입니다. 잠시 머무는 공간 안에서 거처를 정하는 사람은 언제든 거처를 떠날 준비를 할 수밖에 없습니다. 나의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나의 것은 없습니다.오늘을 살기위해서 최선을 다하지만 그것은 그저 최선을 다하는 것일 뿐, 나의 것이 될 수 없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그래서거처에 도착하면서, 동시에 떠날 수 있도록 준비를 합니다. 불안정의 상태 속에서 만들어야 하는 안정감은 언제나 도전으로 다가오는 숙제입니다. 저는 ‘버티기’를 통해서 숙제를 해결하려고 노력합니다.

살다 보면 정이 듭니다. 허공에 복음을 선포하지 않습니다. 언제나 관계 안에서 복음을 전합니다. 관계 안에서 산다는 것의 전제는 사람 사이의 맺고 풂이 있다는 것입니다. 맺음의 기쁨과 환희, 그리고 풂 속에서 아픔과 상처를 경험합니다. 집이 없다는 것은 떠나야 하는 운명을 잉태한 상태를 의미하기에, 언제나 풂을 준비하고 살아야 합니다. 일정한 경계선을 설정하고 살아야 하는 나그네, 파견된 자의 삶의 상태입니다.

하느님 나라는 제자들의 신앙고백 위에서 드러납니다. 그리고 그 제자들은 스승 예수의 고난을 본받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요즘 혼란스럽습니다. 내가 무엇을 고백하고 있는가? 내가 고백하는 것이 신앙일까? 대형화와 대형화를 달성하기 위한 효율성의 유혹과 손잡고 싶어 하는 나는 .... 정상일까? 효율성의 유혹과 손잡고 얻은 결과로 얻고 싶은 것은 무엇인지? 분명한 것은 지금 여기에서의 나그네의 삶과는 어울리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떠남이 아닌 매임의 상태에 빠질 수밖에 없습니다.

한국 순교 성인들께 큰절을 드리며 복음을 듣습니다. 그리고 침묵 속에서 말씀을 반추합니다.“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날마다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루카 9,23)

▥ 대전교구 임상교 대건 안드레아 신부 - 2017년 9월 17일
  | 09.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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